호남보고 이리안내《湖南寶庫 裡里案內》
일명 익산발전사 : 문화도시 익산
저자 : 야마시타 에이지(山下英爾) 양은용 역주
□이리(裡里)
1995년에 이리시와 익산군의 도농통합으로 현 익산시가 된다. 구 이리시 지역은 조선시대에 본디 전주부에 속한 옥야현지역(조선 태종때 전주부의 속현이 되었다가 이후 폐현됨))인데 1906년에 대한제국 칙령 제 49호로 飛入地(越境地)인 옥야현을 익산군에 이곳시킨다. 이로써 옥야지역의 남일면, 남이면, 동일면, 서일면, 북일면이 익산군이 되었다. 이리는 남일면에 속한 만경강변의 작은 마을로 속리라 부르던 것이 한자로 이리로 표기하게 되었다. 1909년 말 호남선을 부설하기 위한 측량이 시작되었고 1911년에는 철도공사가 착수되고 익산군청이 이곳 남일면으로 옮겨왔다. 1912년에는 호남선이 개통되었고 이리역이 생겼다. 南一面의 裡里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1914년에 지방행정구역의 통폐합이 이루어져 2월에 남일면과 동일면을 합하여 익산면이 되었고, 4월에는 용안군 여산군 함열군이 익산군으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익산의 중심지인 익산면으로의 집중력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1917년에는 지정면으로 승격하였으며, 1925년부터 1938년까지 만경강 직강공사가 진행되며 이리에는 많은 노동자가 유입되었다. 마침내 익산면은 1931년에 익산읍이 되었다가 곧 이리읍으로 개칭하였다. 1947년에는 이리부가 되었고 익산군과 분리 되었다. 1949년에는 이리부가 이리시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5년까지 현 익산시 지역은 이리시와 익산군으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통합된 것이다.
■저자인 야마시타 에이지씨는 일제 강점기에 이리에서 거주한 일본인이며 1915년과 1927년 두 차례 걸쳐 이 책을 발간했다. 그는 당시 익산군청의 촉탁직 공무원으로 익산과 이리에 대한 ᅟᅵᆨ록을 담당했다고 한다. 일제는 이리를 산업도시가 아닌 농업을 중심으로 한 교통과 물류의중심지로 설계했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이리와 익산의 근대화와 도시형성, 그리고 도시발전을 기록한 귀중한 책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본인의 시각에서 일본과 일본인들을 위해 쓴 책임을 주지해야 한다.
■저자의 서언
이 책을 간행하는 주된 이유는 호남의 보고로서 최고 요충지인 우리 이리 및 근접지인 황등, 대장촌, 오산리, 목천포, 함열 등을 널리 사회에 소개하고 이리의 유망함을 알리기 위함이다.
제1장 총설
○이리는 지리적 위치는 물론이거니와 지방관청 및 병영 등의 건설지로서도, 더 나아가 농상 공업지로서도 실로 최고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 호남지역을 정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역이 바로 이리이다.
○1925년 말 익산면의 인구는 한국인 9,263명, 일본인 3,947명, 기타 139명으로 총 13,349명이다.
제2장 관공서와 단체
○1925년 익산군 호수는 26,138호이고 인구는 133,638명이다. 우편국 7개소, 중학교 2개교, 보통학교 11개교, 소학교 6개교, 금융조합 5개, 마곡검사소 4개소, 소방조 8조, 은행회사 11개, 공장 14개, 미곡 생산고 2,333,596석, 기타 잡곡 79,341석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은 1,323호 5,972명에 달하고 그들의 소유 경작지는 10,162정보이다. 전체 사유경작지는 279,042정보이다.
제3장 교육 ※익산면
1. 이리공립농림학교
이리 오하시 농장의 기부금 35,000엔을 마중물로 이리시민 및 전라북도 내의 대지주, 은행, 회사 등의 기부금 146,000엔을 모아 학교 대지의 매수 및 교사를 건설했다. 이후 총독부 관립 농림학교로서 1922년에 개교했다. 수업연한 5년, 기숙사를 보요하고 있다.
2. 이리공립고등여학교
이리학교조합이 학교의경영에 참여한다. 1924년에 개교했다.
3. 이리공립소학교
1912년 3월 민가에 교사를 마련하여 개교했다.1926년 현재 학생은 남자 261명, 여자 241명이다.
4. 이리공립보통학교
1913년 인가를 거쳐사립보통학교로 일련종 이리포교소의 경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26년 교원은 13명, 학생은 남자 609명, 여자 157명이다.
5. 사립광희여학교
여수교 남장로파 교회가 경영하는 보통학교 수준의 학교이다. 1920년 4월 개교했다. 교사는 3명, 학생은 70명이다. 신도들의 기부로 운영된다.
6. 사립이리유치원
1922년 12월 개원했다. 원아는 60명이다. ㅇ지들의 기부로 운영된다.
제4장 위생기관
이리철도병원 카이세에(回生)의원 코가(高賀)의원 천성당(天誠堂)의원 삼산(三山)의원
나카무라(中村)의원 단노(檀野)안과분원 타케이치(武市)치과의원 후지이(蘇井)치과의원
산파5개소 목욕장4개소 이발업13개소
제5장 사사(寺社) 및 교회 ※이리는 곧 익산면을 의미한다.
이리신사(1913) 혼간지파대성사(1917) 진언종진관사(1916) 남장로파교회(1920)
이즈모타이사쿄(1925) 오타니파동본원사(1912) 니치렌종영국사(1912) 일본기독교회(1919)
텐리교교회(1915) 콘쿄교(1926)
제6장 교통운수 및 통신
1. 이리를 기점으로 주요한 도로는 시의남쪽 30여 정의 목천리를 거쳐 전북평야를 가로질러 동쪽은 전주까지 7리로, 서쪽은 군산까지 8리로 이어져 있는 1등도로가 위치한다.
3등도로는 서족 오산면으로 1리의 길이, 동족으로는 2리 끝 대장촌에 닿아있다.
이밖에 각등외도로는 서족 임피까지 총 3리의 길이, 남쪽 김제까지 4리, 북쪽으로는 전북에서 큰 시장에 속하는 황등까지 2리, 동북쪽의 금마면까지 3리를 연결하고 있다.
2. 호남철도
실제 운수의 상황은 전국가운데 3위 이하로 떨어지는 일이 없으며...1914년 승차인원 74,772명, 하차인원 79,850명이었던 것이 1925년 통계에 의하면 승차인원 270,192명, 하차인원 299,960명으로 증가했다.
3. 호남철도
전북철도는 도청소재지인 전주를 호남선으로 연결한다. 산업개발에 도움을 주기 위해 민가자본가ᅟᅦᆼ 의해 부설되었다. 1914년 11월 개통되어 이리를 기점으로 대장-삼례-동산-덕진을 거쳐 전주에 도착한다.
4. 만경강 수운
강물의 유속이 매우 느려 만조 시기를 이용하여 하구로부터 약 10리의 사이는 배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후 교통기관이 완성된 지금도 연안의 미곡은 이 하천을 이용해 군산으로 반출할 수 있다.
5. 자동차 및 기타
이리-전주간은 교통이 빈번하다. 양 지역을 운행하는 정기 운행차량은 편도 1엔 20센으로 이용이 가능하다. 운행시간의 경우 전북철도를 이용하면 약 1시간 30분이지만, 정기운행차량의 경우 1시간이면 전주에 도착할 수 있어 매우 편리하다. 이리에는 자동차 1대, 인력거 21대, 자전거는 513대, 우마차는 38대, 화물차는 132대가 있다.
제7장 농업
○조선은 일본에 비해 인구가 적지만 기름진 땅은 많다. 地價 또한 저렴하므로 새롭게 농업을 경영하려는 사람은 매우 유리하다. ...일본에서 농업경영에 뜻을 품고 새롭게 건너온 사람이 제1착으로 족족을 찍는 곳이 바로 호남지방이다. 이리는 그 기름진 땅의 중앙에 있어 매우 비옥하고 수리사업의 완성 덕분에 旱害와 水害를 피할 뿐 아니라 철도의 개통으로 교통 운반이 매우 편리하다.
○일본의 토지가격은 절정에 달하여 더 이상 오름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조선의 토지는 이제 막 싹을 틔웠을 뿐 가격은 더욱 오르고 있어 일본의 토지 매매가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 자본가는 이에 크게 발분하여 우리 호남지방의 토지에 투자해야 할 것이다.
○농업경영가
오하시농장(이리) 동척지점(이리) 쿠보타농장(이리) 화성농장(이리) 오기 요네츠(이리) 내외토지주식회사(이리) 오하시 오토마츠(이리) 박기순(이리) 후작 호소카와농장(대장촌) 타사카농장(대정촌) 시나다농장(송학리) 서상농장(함열) 함화농장(함열) 모리타니농장(신기리)주식회사 밍 농장(이리) 우곤상사회사 출장소(이리) 이타이 신죠(이리) 나가타농장(이리) 키타가와 쇼마(이리) 사사키농원(이리) 쿠니카농원(이리) 김화형(이리) 이마무라농장(대장촌) 후지 전북농장(오산) 카타키라농장(황등) 오키농장(함열) 삼성농장(함열) 조준식농장(함열) 마키농장(신기리)
제8장 水利
○익옥수리조합은 임익남부수리조합과 임옥수리조합을 병합한 뒤 천수답 비간지 간석지 등 2,600정보를 구역내에 편입하여 조직하였다. 1920년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사무소를 이리에 열고, 동년 7월 기공한 뒤 1923년 6월에 준공했다.
※만경강 직강공사 : 전북도에서는 삼례 비비정에서 군산 회현면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만경강을 직강으로 바꾸는 호안공사를 계획하여 총복부에 제출하였다. 당초 6년 계획이었으나 총독부에서 사업의중대성에 따라 공사기간을 12년으로 변경하였다. 1925년에 시작하여 1938년에 공사를 마쳤다. 호남선과 전라선 철도공사와 만경강호안공사로 인해 이리는 노동자들이 집결하는 도시가 되었다.
제9장 상업
○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수천명의 사람들이 방문하고 추석과 설날 전에는 1만여 명 이상이 방문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제13장 신문 및 잡지
현재 이리에는 아직 신문 잡지류가 하나도 발간되지 않고 있다. 유통되는 신문은 다음과 같다.
군산일보 전북일보 경상일보 조선신문 호남일보 부산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오사카아사히신문
오사카마이니치신문
제14장 여관 요리점 및 음식점
○우리 이리는 비록 창시이래 15년의 새발전지이지만 여관 요리점 및 음식점의 설비가 완전하고 대우 조리 등 또한 경쟁적으로 성의를 다하고 있다. 또한 폭리를 탐하는 일이 없으며 아름다운 여성이 많은 것이 이리의 자랑이다.
제15장 명승 및 고적
1. 배산 : 정상에 오르면 요교제가 한 눈에 들어오며 전북 대평야 또한 눈에 겹쳐온다.
2. 이리신사 : 1913년 건립
3. 기준성지 : 기씨 41대손 기준왕이 난을 피하여 이곳에 들어와 성을 쌓았다고 알려져 있다.
4. 미륵탑 : 5층탑이다.
5. 보덕성지 : 사람들은 토성이라 한다.
6. 상릉 : 무강왕 및 왕비의 능이라 전한다. 말통대왕능이라고도 부른다.
7. 석불 : 신라시대 석불이다.
8. 사자암
9. 월담 : 사계절 낚싯대를 드리운 낚시꾼들이 가득하다. 특히 달 밝은 밤이 절경으로 낚시꾼 혹은 달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
10.시녀제 : 가을 낚싯대를 맨 어객들이 많다.
11.고현저수지 : 옥야현청소재지이자 옛 유적이다.
12.야생송 : 금마 일부의 소나무는 다른 잡초들처럼 한차례 벌채해도 다시 새싹을 틔운다.
13.삼도율 : 팔봉산의 밤나무는 매년 세 번의 꽃이 피고 결실하여 실로 사람들이 진귀하게 여긴다.
14. 부석 : 금마면 서북쪽 1리 정도에 있다.
제16장 이리의 장래에 대한 소견
1. 이리의 발전책으로 각 농장주를 이 땅에 거주시키고 싶다.
○대지주 농장주가 거의 하나같이 본인은 일본에 거주하고 농장의 임무는 관리자를 두어 일임하고 있다.
2. 이리 장래의 발전을 도모하려면 크게 거주자의 일치협력을 요한다.
○농림학교에 대해서 말하면 이 학교는 처음에 서울에 개설하기 위해 내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리시민이 일치협력하여 여론을 일으키는 등 선도자가 되어 인화의 힘으로 여러 차례 변경된 것이다.
3. 일본인은 반도에 은거해야
○우리 가운데 패기있고 자신있고 야심을 가진 청년은 남태평양과 남미로 가서 분투하여 창업을 통해 제2, 제3의 일본제국을 건설하라. 우리 일본 민족의 영원한 땅을 쌓아 국가의 천년을 계획하고 도모하라. 반면 물러서서 은거하고자 하는 자는 이 반도에 오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20년 전의 조선과 현재를 비교하면 문화 교육 통신 교통 산업 富의 차이가 격세지감이다. 조선은 실로 눈부신 정도의 급속한 발전을 이뤘다. ...조선인의 작은 흙집의 생활상태는 마치 원시인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지금은 이르는 곳에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기차와 자동차 등 교통편이 발전하여 지금은 반도 이르는 곳, 각지에서 같은 가격으로 구할 수 있는 상황이다. ...원시시대에서 잠자던 상태가 일변했다. 이렇듯 지금의 조선은 일반 문명국으로서의 체면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대구나 이리가 지금은 일본의 여느 도시가 부러워할 정도로 당당한 시가를 형성하고 있다. ...불과 20여 년 간의 진보로 이룬 결과이므로 실로 경탄하게 한다.
○하물며 지리적 이점과 天時를 얻어 빠르게 진전하여 그치지 않는 우리들은 세인의 상상 이상으로 이리는 장래 발전할 것이다. 장래 대이리의 실현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즉 이리 시내는 세계에서 제일 빠르게 발전을 이룰 것이다.
○로스엔젤스나 이리는 대소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해변에 가까운 옥토의 중심지이고 건강한 땅이며 교통의 요로에 해당한다. 이처럼 두 도시 모두 대도시의 요소는 모두 갖추고 있다.
○20년 후의 조선! 그리고 20년 후의 이리를 상상해 보라. ...이 난관을 돌파하고 검은 구름을 깨끗하게 일소하고 천지자연의 은혜에 싸인 대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자각이 필요하다. ...장래 대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자질에 대해 시민들에게 각성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4. 이리관
처음은 고작 10여 호의 부락이었는데 호남선 개통 덕분에 세상에 알려진 것도 십수 년에 불과하다. 오늘날 이리를 도시라고는 하지만, 큰 도시에 비해 아직도 미비하여 비교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이 완벽하기 위해서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므로 이리시민의 관점에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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