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박정희 比較 小論
■시작하는 말
오늘은 2010년 11월 11일이다. 이 글을 쓴지 일년이 다 되었다. 오늘 G20정상회의가 개최된다. 세계를 이끌어가는 강대국들의 회의인데 우리가 주최하고 의장국이며 전 세계의 이목이 우리나라에 쏠려 있고 지구상의 중요 의제들을 다룸에 있어 우리나라의 역할을 주시하고 있다.
아아! 유엔에 우리나라 반기문총장이 취임하여 전 세계 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이제 지구상의 200개 나라중 강대국 20국의 모임이 우리나라에서 열리고 우리가 주도하는 역사를 이루어낸 이 시간이 참으로 감격스럽다. 이러한 나라를 만든 주춧돌을 단단하게 놓은 박정희란 인간을 다시 생각한다. 박정희라면 이를 갈고 박근혜라면 실컷 조소하면서도 온 백성을 굶겨 죽게 하고 수 만명이 자기나라를 탈출하여 중국과 우리 대한민국과 여타 동남아 지역을 떠돌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삼세대 대를 잇는 지도자 김정일과 그 일파들은 의도적으로 전혀 비난하지 않는 정신병 환자무리(아니라면 지독한 출세주의자이거나 소인배이거나 하겠지요)들도 곰곰히 생각해본다.
자랑스럽다. 대한민국! 이런 역사를 창조하여 온 박정희대통령과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같은 위대한 정치 지도자들, 이병철, 정주영같은 위대한 경영인들, 힘든 산업현장에서 피땀흘린 모든 위대한 산업전사들, 그리고 남덕우 신현확같은 위대한 경제 관료들, 해외로 동분서주하며 발품으로 우리 상품을 팔아댄 위대한 수출역군들 모두 모두 정말 고맙다. 저런 위대한 사람들 덕택에 오늘의 내가 너무나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니 우리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항상 긍정적 사고(비판적 사고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는 건 아시지요? 오로지 부정적이고 비판적 사고로만 일관하면서 마치 자기들만이 우리 역사를 지켜나가는 대단한 지성인듯 우쭐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사회에 너무 많아 사회갈등이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인지 오늘 신문을 보니 지식층의 30%가 다른나라에 가서 살고 싶어 한다는 군요)를 강조하지요. 결국 모든 생명은 편안하고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인데 긍정적 마음가짐이 행복을 주기 때문이지요. 학교장이하 온 교직원이 한마음으로 애써서 준비하여 어제 학교평가를 잘 마쳤다. 행복하다. 학생들이 즐거운 학교, 교직원들 모두 즐거운 학교가 되어야 한다. 학교장과 내가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 전 무주고인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해야 한다. 나도 행복하고 모두가 행복하기 위함이다. 요즈음 주위사람들이 아들 딸 잘 키워 시집 장가 보내는 것이 행복하다. 1월에는 양드리와 대만 국립박물관을 찾으려는 계획에 행복하다. 또 2월에는 기린회 선배들과 일본여행을 가게될것 같아 행복하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니 너무 너무 행복하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만 하고 절대로 미워하지 않으리라. 이제 금방 황봉식 교감 전화를 받았다. 두루 두루 사랑하며 살자. 이찬규 교장도 함께 만나 쐬주 한잔하자고 했다. 김성진 교수에게도 지난 추석때 마음아프게 했는데 형인 내가 전화로 위로해야 겠다. 우리 선희도 더 이해하고 동서 형님도 자주 만나 뵈어야 한다. 오늘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이 나이에 내가 무척 성숙해지나 보다. 모든 생명체들 언제나 안녕!
오늘은 또 빼빼로 데이란다. 억지로 선생님들에게 세개나 받아서 먹어 본다. 우리 가족에게 메시지로나마 사랑하는 만큼 빼빼로 한아름씩 보냈다.
카를 마르크스가 노동자 농민이 주인이 되는 공산주의라는 인간평등의 세상을 꿈꾸며 20C에 이르러 마치 쓰나미 같은 인류역사의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한 19C의 위대한 사상가라면, 박정희는 태어난 20C 세기에 후진국이던 조국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든 우리역사의 대 전환을 가져오게 한 위대한 정치가이다. 박정희는 마르크스 보다 거의 1백년 뒤에 태어나 1백년 뒤에 죽었으니 두 사람은 1백년 차이로 한사람은 19세기에 살았고 한사람은 20세기에 살다 모두 저 세상으로 갔으나 그들이 역사에 남긴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마침 중앙일보(2009. 11.24일자)에 마르크스의 사생활에 대한 언급이 있어 이를 읽으면서 퍼뜩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본 것이며 제목은 위와 같이 잡았다.
■카를 마르크스 (1818-1883)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로 20세기 지구의 역사를 뒤흔들게 한 카를 마르크스 (1818-1883)는 변호사인 아버지와 네덜란드 귀족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836년 베를린 대학에 입학하여 역사와 법률, 철학을 공부하고 헤겔학파 좌파의 일원이 되고 무신론적 급진주의자가 된다. 이때는 7월 혁명(1830)과 2월 혁명(1848)이 일어난 시기로 바야흐로 프랑스 혁명이 계속되면서 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이 일던 시기였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공부한 상류 부르주아지임에도 자유주의 혁명을 통한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을 갈구한 그의 철학은 역시 부유한 가정출신으로 변호사였던 레닌(1870-1924)에 의한 러시아에서의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함으로서 인류는 물질적으로까지 평등한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공산주의 혁명은 귀족이 모든 것을 다 가지는 계급사회를 노동자들이 폭력혁명을 통하여 타파하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완성하려는 것이었으며, 이 혁명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다. 소비에트 연방(1922)이 결성되면서 이후 우크라이나 카자흐 등 14개의 독립국이 소비에트 연방에 흡수된다. 동유럽은 소련에 의해 독일 폴란드 헝가리 등 10여개 국가가 공산화되고 아시아에서도 마오 쩌둥에 의해 중국이 공산화(1949)되고 호치민에 의해 월맹이 공산화(1945)되며 아메리카에서는 카스트로에 의해 쿠바가 공산화(1959)되어 모두 30여개 국가 이상이 공산주의를 택하여 인류의 이상인 평등사회를 꿈꾸며 공산화 되었다.
우리나라도 해방이후에 소련에 의해 김일성을 내세운 공산정권(1949)이 세워지면서 동족상잔의 뼈아픈 전쟁을 치렀다. 마치 20세기는 모든 인류가 평등한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서 사회주의는 곧 정의이자 진보로 인식되고 세계는 공산주의 이념을 실천하려는 좌파라고 불리는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자들로 인해 지구촌 곳곳에서 인류는 끊임없는 투쟁과 전쟁의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소련에 볼셰비키 정권(1917)이 세워진지 70여 년 만에 이미 공산주의는 물질적 인류평등의 제도적 실현의 불가능성과 그 발전의 한계에 부딪히고 동유럽에 민주혁명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공산주의를 버리기 시작하고 소련에서마저도 페레스트로이카(개혁운동)가 일어나고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1992)되면서 공산주의 이념에 의해 결성된 소비에트연방에 속해 있던 14개의 나라들이 모두 독립을 선언하였고 공산주의 이념은 그 권위를 상실당하고 이념보다는 민족이 우선임을 일깨워 주었다.
현재까지 전통적 공산주의 체제를 고집하며 공산당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나라로는 쿠바와 북한밖에 남지 않은 것을 볼 때 그 이상만큼은 훌륭하고 억압받던 대다수 인류에게 환영받았으나 구체적 실천면에서는 실패한 사상이며 제도임이 확연히 증명되었다.
마르크스는 귀족과 자본가들에 의한 신분과 물질의 억압으로부터 인류의 해방을 실현하고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세상을 꿈꾸면서 과학적 공산주의이론을 탄생시켰으나 그 자신은 전혀 자유주의도, 평등주의도 실천하지 못했다. 그의 집에는 그가 성인이 된 후 죽을 때까지 요리와 생활비관리까지 온갖 가정 일을 맡아 한 헬렌 데무스라는 하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놀랍게도 전혀 보수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노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신분적 억압과 노동 착취를 당했으며 마르크스가 수시로 성적 노리개로 삼아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으나 그는 자신의 아들임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으며 혁명지도자로서의 명성을 잃을까봐 동지인 엥겔스가 한 짓이라고 거짓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반 평등주의자이다. 그는 노동 착취자이다. 그는 반 페미니스트다. 그는 비실천주의자이다. 그는 비 양심주의자이다. 아니 거짓말로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자 친구의 명예를 더럽힌 사기꾼이다.
그러나 그는 인류의 대다수가 신분 권력과 자본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모두가 평등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해야 함을 인류에게 일깨워준 영원하고도 위대한 사상가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인류가 20세기의 공산주의 실험에 실패하였다하여 그의 사상 자체를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넌 센스이다.
■박정희 (1917-1979)
박정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에 놓인 나라 잃은 조선의 시골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말미암아 사범학교에 진학하여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이때가 1937년으로 일제가 만주사변(1931)을 일으켜 만주국을 건국(1932)하고 중일전쟁(1937)을 일으켜 남북 10개성과 상하이 난징 등 주요 도시를 점령하여 마치 중국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였던 시기이다.
비록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군을 피해 충칭까지 밀려 났으나 만주에서는 동북항일연군(1936)이 유격활동(1937년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 등)을 펼치고 조선의용대(1937)와 한국광복군(1940)이 창설되어 조국광복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으나 국내에서는 일본이 패배하여 독립을 이룬다는 희망은 엄두도 못 내던 암울한 시대였다.
21세의 박정희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자원입학하고 이어 뛰어난 성적으로 일본 육사에 진학한다. 말하자면 당시로는 뛰어난 수재로 대 일본 제국을 위해 멸사봉공하는 충성심을 보여 성공하려는 부류로서 당시 고시합격으로 고등사무관이 되었던 신현확 전 총리나 진의종 전 총리 그리고 만주국 관리였던 최규하 전 대통령이나 다름없는 그저 출세가도를 달리는 수재이상의 인물은 아니었다. 이 때까지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옹호하거나 숨기려는 발상은 가당치 않다.
그는 독립투사는 못되었으나 독립 후 우리 육사에 입학하여 다른 일본 육사출신인 이응준, 김석원, 장도영, 유재흥이나, 같은 만주국 장교출신인 백선엽등과 함께 대한민국의 국군을 조직하고 김일성이 일으킨 동족상잔의 6․25침략전쟁을 막아낸다. 한때 유행처럼 번지던 공산주의 사상을 가져 군복을 벗는 고난을 겪지만 그것은 시대의 아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역사가 주는 전염병일 뿐이었다.
강직하고 정의로우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인간형으로 당시의 장군으로는 보기 드문 존재였던 그가 5․16 군사혁명을 일으켜 이후 18년 동안 이루어낸 업적은 구차하게 나열할 필요가 없다. 수 천 년 간 이 나라 백성들은 가난과 질병과 신분차별과 권력 앞에서 목숨만 부지하며 살아온 슬픈 존재들이다. 비단 우리의 역사만이 그런 것은 아니하였다고는 하나 일본의 지배하에서 불평등을 참아가며 신음하였고 동족전쟁을 겪고 난 1961년 당시 국민소득은 80달러로 아시아에서도 후진국에 속하여 대다수 국민들이 세끼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어린 아이가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비록 바람직하게 탄생한 정권은 아니었으나 이후 그의 위대한 능력과 민족중흥의 꿈과 노력은 대한민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선진국이 되게 하였다. (그의 경제발전에 대한 업적은 모든 국민들과 전 세계가 모두 인정하는 것이므로 단정적으로 말하였음을 밝힌다.)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경제성장은 이루어 질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좌파들의 주장은 2002 월드컵에서 히딩크가 아니었어도 우리는 4강에 들 수 있었다고 우겨대는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히딩크가 없으니 4강은커녕 16강에도 들지 못하고 있으나 4강에 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축구수준은 매우 높아지고 자부심은 대단히 커졌음을 우리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은 1996년에 OECD(경제협력기구 : 30개국)에 가입하고 국민총생산 8820억 달러로 세계 13위의 경제력과 수출국이 되었고 국민소득은 2만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이미 경제면에서나 금융면에서 선진국대우를 받고 있으며 내년부터는 개발도상국의 위치를 청산하고 개발도상국을 원조하는 나라로 변신하여 오늘(11월 25일) 파리에서 개최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 특별회의에 공식 가입한다고 한다. 원조받던 나라에서 당당하게 원조하는 나라로 변신하는 첫 케이스라고 한다.
한 인간을 특정시기만 보고 그 일생을 재단하거나 하나의 사건만으로 그 인간의 전체를 진단하여서는 안 된다. 비록 그가 유신체제를 만들어 독재 체제로 장기집권 하다가 민중의 저항에 부딪히고 한계상황에서 결국 자중지란으로 부하의 총탄을 맞고 죽는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갔으나 결코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을 폄하하여서는 안 된다.
20대의 젊은 시절의 짧은 삶만으로 그를 평가하여서는 안 되며 그러한 시도를 하는 일부 사람들은 매우 잘못된 의도를 가지고 있거나 졸렬한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나는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시절 비록 패기와 출세의 욕망으로 일제의 조국지배와 대륙침략에 앞장서는 역사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하여 그가 민족애와 나라사랑이 부족한 인물이라고 폄하하여 단정한다면 나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나 자신도 항상 부끄럽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지난날을 생각하면 스스로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는 시절이나 사건들이 수없이 많다. 그렇다고 하여 나 스스로 남들보다 부끄러운 사람이라거나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지난 시절의 부끄러운 모습 하나로 자신을 재단한다면 당당하게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찾을 수 있으랴?
그는 친일주의자이다. 그는 독재자이다. 그는 유신체제를 만들어 장기집권 하였으며 민주화를 외치는 인사들과 학생들을 탄압하고 감옥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와 권력을 탐하여 군사혁명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강직하고 정의롭고 청렴하였으며 호의호식하거나 부티 나게 폼 잡고 살아보지 않았다. 부정축재하지 않았다. 오직 가난한 조국을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 가난한 국민들을 잘살게 하려는 대 야망을 실천하고 싶어 하였다.
그가 비록 나라 없는 젊은 시절에 출세를 위하여 일제의 장교가 되었다고 하여 그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업적을 일부러 폄하하려하는 의도적 작업은 누구라도 자행하여서는 안 된다. 역사는 그를 비참한 죽음으로 내몰았고 민주화는 이미 달성되어가고 있으며 우리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어 국민들은 당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한 시기에 친일행위를 하였다하여 그의 삶 자체를 친일파로 몰아가거나 위대한 역사적 업적을 부정하려 한다면 역시 큰 넌 센스인 것이다.
2009년 11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