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잊혀진 도시
<이리의 형성과 발전과정>
《익산학연구총서》 익산근대문화연구소장 신귀백 지음
1. 裡里의 탄생과 발전
○익산과 결합된 이리는 원래 다름 행정구역이었다. 솜리의 한자식 표기인 이리의 주요공간은 전주부 남일면이었다.
○오늘의 익산시는 전통적 농촌 공간에 100여년 전 일제 강점기에 탄생한 이리라는 신흥도시가 결합된 도농복합도시이다.
○일제가 이리지역에 진출하면서 정찰한 기록속의 이리는 1906년 이전 전주군 남일면에 속해 있던 <솜리>라는 인구 700여명의 꽤 활발한 마을이었다. 이후 1914년 4월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익산군 남일면과 동일면을 합하여 이리를 익산군 익산면에 편입하였다.
2. 타자의 시선으로 본 이리
○1910년대에는 이리만이 아니라 강경, 조치원, 김천, 대전 등 일본인이 진입한 신흥타운에서는 일본인의 조선이주 안내서와 견문기 간행이 붐을 이루었다.
○야마시타 에이지에 의해 1915년과 1927년 두 번에 걸쳐 발행된 『이리안내』는 일본인이 처음으로 이리에 진출한 이후 일본인의 연혁 및 사회, 경제, 정치를 넘어 유지와 네트워크 그리고 소소한 생활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관해 상세하게 서술한 식민도시 이리의 도시형성사 및 조선거주 일본인사회 연구를 위한 1차적인 참고자료이다.
○1899년 군산의 개항과 더불어 1900년 8월 일본 본토와의 직교역이 가능한 오사카-군산 직항로가 개설된다. 1908년 목천포를 지나는 전주-군산간 전군도로가 완성되고 1910년 10월부터 대전에서 목포를 잇는 호남선 261km의 철도가 1914년 1월에 완성되었다. ...1912년 3월에는 이리에서 군산으로 이어지는 24.8km의 철로까지 완공하였으니 이리는 동서의 도로와 남북의 철길을 갖춘 교통의 요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이리는 익산군이 아닌 전주군 남일면에 속했다. 그러나 1906년 익산군에 편입된 이리지역은 일찍부터 지리적 측면에서 주목받는 땅이었다.
○1915년 당시 이리지역의 일본인은 2,035명, 한국인 1,367명, 외국인 40명으로 기록하여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많았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15년 당시 이리에는 기차역은 있지만, 은행도 없고 수도시설도 없었다. 전주, 군산, 김제에는 도서관이 있으나 이리는 도서관이나 중학교 그리고 공원도 없는 도시에 여관과 술집이 즐비하고 오락시설이 먼저 들어선 도시인데도 홍보의 뻔뻔함을 보여주는 태도는 지적받은 만 하다.
○1927년 조선의 45개 도시 중 제1위는 경성(306,303명), 2위 평양(109,285명), 3위 부산(106,323명), 4위 대구(77,263명), 5위 인천(53,741명), 10위 목포(27,521명), 12위(23,041명), 15위 전주(21,851명), 22위 대전(15,904명), 26위 이리(14,735명)순이다.
○이리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이리에서 발행된 두 권의 『이리안내』와 『익산군사정』 그리고 회고록 『조선삼십육년』이다. 이와 관련된 조선인들이 간행한 보조저작물로써 『전라북도요람』(1913), 『전라북도안내』(1914) 『전라북도발전사』(1928)등이 있다. 기타 1932년 익산군청에서 한문으로만 인쇄된 판형으로 『익산군지』를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전주군에 속해있던 옛 옥야현 지역이 1899년에 익산군에 이속되었다고 잘못 기록함으로써 90여 년 간 익산 군지 및 이리시사에서 오류를 답습하여 왔다. 실제로는 1906년임을 2021년에 필자가 확인하였고 이후 각종 향토사에서 바르게 기록하고 있다.
○1905년에 보고된 『군산이사청 관내상황』은 일본 목포 영사관 군산분관이 작성하여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것이다. 일제가 군산지역을 수탈하기 위하여 군산 개항이후 경제상황을 상세히 파악한 자료로 군사의 지세와 의식주...특별히 군산과 이웃한 이리에 대해 민가의 호수가 100호에 700여명이 사는 촌민이 부유한 마을로 표현하고 있다.
○전라북도 요람(1927)에는 ...1927년 이리지역 인구로 일본인 936호에 4,004명, 조선인 1,128호에 5,371명 총인구는 9,5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후기 정조 때인 1789년 발행된 『호구총수』에는 이리가 지명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남일면 이리(남일면 裏里)로 나타난다. 1872년 전주부 지방지도에서도 남일면에 이리가 표기되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1897년 간행된『구한말한반도지형도』에 이리(裡里)가 지명으로 표기된다. 만경강 주위 속마을 내지는 안 마을을 나타내는 솜리의 다른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리는 1895년 전주군 남일면에 속했으나 1906년 익산군으로 귀속되었다.
○일본인 농장 : 1904년 송학리에 사나다(眞田진전)농장, 오산리에는 후지모토(虅本등본)농장, 대장촌에는 다사카(田坂전판)농장, 이마무라(今村금촌)농장, 호소카와(細田세전)농장, 이리 한 가운데는 미에(三重삼중)농장이 자리 잡았다.
오하시(大橋대교)농장은 ...일본식 성채였다. 황등에는 가타기리(片桐편동)농장, 함열에는 오키(多本다본)농장이 있다.
○1928년에 건설된 목천포와 김제를 잇는 만경교는 폭 6m, 길이 550mf ㅗ현존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시멘트 콘크리트 다리로 전주와 군산을 잇는 중요한 다리였다.
3. 제1기, 일본인 이민의 진입과 도시형성(1904-1914)
○1947년 통계로 전북인구는 125만 명, 익산군은 13만 3천명, 이리읍은 1만 4천 700명이다.
○1900년 일본 외무성의 지시에 따라 외무관료와 소속 관헌이 직접 답사하여 작성한 『전라북도 북부상황』보고서에는 이리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이리(裏里)는 전주부내의 한 촌락으로 다소 번영한 곳인데 이곳에 정기시장이 선다. 즉, 4일과 9일에 장이 선다. 이 마을의 호수는 100호이며 인구는 700여 명이다. 이곳은 군산항과 전주부의 중간종도에 위치하며 토지가 비옥하고 지세가 평탄하다. 이에 따라 모든 촌민이 부유하다. 이곳의 주된 산물로는 米穀이 많이 난다고 한다.》
4. 제2기, 유지정치와 사회상(1915-1927)
○1917년 지정면이 되고 1922년에는 익옥수리조합에서 만든 대간선수로가 개통되고 이리농림학교가 설립된다. ...1924년에는 일본인 여학생들이 다니는 이리공립고등여학교가 개교하는데 수업연한은 4년이었다. 이후 1940년에 이리공립공업고등학교가 개교한다.
○1917년 익산면은 영등포, 대전 등과 함께 철도요충지로 지정면이 된다.
※지정면은 면단위행정구역가운데 도시 경제적 조건(인구규모, 철도접근성, 일본인 거주비율, 상업기능 등)을 갖춘 곳을 보통면, 리 일부를 묶어 지정면으로 개편하였다. 전라북도에서는 전주면, 익산면, 김제면, 정읍면, 남원면, 군산면 등이며 전국에 약 23개면이 지정면이 되었다.
5. 제3기, 균열과 침체(1928-1945)
○개항장 군산은 거류민단이 주체가 되어 1913년 상수도건설공사가 시작되어 1915년 준공되었지만, 이리는 취수한 물을 사용자에게까지 공급하는 시스템 문제를 오래토록 해결하지 못했다.
○이리의 부호 오하시 요이치가 1929년에 사망한다. 부친 이름을 계승한 아들 요이치가 농장주가 되면서 경영방침을 종전과 달리하고 이리의 토지 43만 6천평에 대하여 대대적인 매각을 단행한다.
<경성일보>
이리의 대지주 오하시농장은 이리시내의 택지 전부를 개방하여 희망자에게 이를 분양한다고 발표하였다. ...익산면 총 지번수 3,655필, 213만 평 가운데 오하시 농장이 소유한 지번수로서 그 9분의 1, 즉 432필, 며적으로 43만 6천 여평이다. 익산면의 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오하시 농장의 토지개방은...
6. 타자의 시선이 담지 못한 이리
○만경강 호안공사 : 1925년에 시작해 1938년까지 만경강 하류지역의 구불구불한 곡강을 바르게 펴는 직강공사를 준공한다. 98km의 사행하천에 길이 76km에 이르는 제방을 축조하여 강의 실제 길이를 줄여 놓았다. ...오산면에 속해있던 신지리와 남전리의 일부가 김제 공덕면에 들어갔고, 목천리의 일부가 김제 백구면에 편입되었다.
○1899년 군산의 개항부터 1912년 호남선 이리역 개통까지는 정착을 위한 탐색의 시기였다. 호남선 철도의부설과 이리역의 신설은 새로운 도시의 탄생을 가져오는데 그 이전 1911년에는 철도공사가 착수되고 이에 따라 익산군청, 우편소, 헌병분대, 변전소등이 금마에서 옛 옥야현 지역의 남일면으로 옮겨오자 이주자가 불어났다. 일본인들은 번영조합과 학교조합을 조직하여 시가지 계획, 도로 개착, 교육 및 경비기관 등 도시 기반시설을 구축해 나가는데 이것이 유지정치의 시작이었다.
7. 교육도시 이리의 까마귀떼
○1907년 3월 1일 사립 호성학교(여산초등학교)가 설립되고 1908년 9월에 사립 창명학교가 개교한다. 바로 함라초등학교의 전신이다. 10월에는 익산군 사립 기영학교가 설립되고 이어서 익산군 사립 익창학교를 세운다. 두 학교는 병합되어 1011년 9월 익산공립보통학교(금마초등학교의 전신)의 개교로 이어진다. 황등계동학교 역시 민족의식을 수립하기 위해 만들어 진 학교이고 이리계문초등학교는 1921년 사립계문보통학교로 개교한다.
○문성당에서 새 책을 사지 못한 학생들은 이리여고 곁 대본소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공부만 했겠는가? 이리극장과 삼남극장이 있었다.( 그리고 동성극장과 시공관이 있었다.) ...DJ가 있는 뮤직박스가 있던 고려당과 황금당 그리고 지구음악실도 있었다. 영스타 롤러스케이트장과 팝송을 담은 해적판 LP와 가요테이프를 사던 서울악기점은 학생들의 성소였다....역 앞에는 통학생들의 자율학습을 위한 적십자회관이라는 도서관이 있었고 무덕관, 창무관 등 태권도장도 있었다. (시공관 가는 길에는 2층에 기독교회관이 있어 공부도 하고 독서 발표회도 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중앙대학교는 1951년 10월에 이리분교를 설치하는데 해방후 <귀속농지 관리국>창고건물을 임시교사로 사용했다. 쉬게 말해 동양척식회사 이리지점 자리였다. 당시 이리분교에는 중앙대생 말고도 피난중인 서울대, 연세대 학생들도 강의를 듣는 등 수강생이 656명에 달했다. 당시 학교장이던 임영신 여사가 전북출신인 것과 중앙시장에 자리한 호남의원 원장 윤부병 박사의 공이 커서 약학대학이 유치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리분교는 문교당국의 존속허가를 받고 신축교사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1960년 중앙대는 결국 서울로 올라가고 그 빈 공간을 원광여자중학교와 원광여자상업고등학교가 사용하게 된다.
○1948년 4월 정부는 이리농립학교를 이리농과대학으로 개편했다. 이때 도립 이리농과대학은 전북대학교 농과대학으로 개편되었고, 농학과, 임학과, 수의축산학과 3개과로 운영되었다. ...1963년 이리농과대학을 전북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이전했는데 당시 이리시민들은 전주이전을 결사반대하였다. 1951년 전북대학교 공과대학 설립추진위원회가 발족하고 1952년 4월 농과대학자리에 기계, 전기, 제지, 채광야금 4개학과가 문을 열고 640명이 입학하면서 전북대 공대는 설립되었다.
8. 문학작품 속에 표현된 현대 이리
○이리역은 한국 현대소설의 주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박재호가 유성으로 가는 길에 잠시 머무는 공간, 또 채만식의 유작 『소년은 자란다』에서는 1945년 해방이후 유입된 전재민이 유입되는 공간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또한 윤흥길의 『소라단 가는 길』에서는 1950년 이리역 오폭사건을 시작으로 1977년 발생한 이리역 화약폭발사고에 얽힌 이야기가 등장한다. 기차역 주위의 시공간적 배경이 등장하는 주요 텍스트로는 박범신의 『더러운 책상』, 김남중의 『기찻길 옆 동네』등이 있다.
○이리역은 역사와 기억의 장소다. 대중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의 상징인 신익희가 1956년 5월 5일 죽음에 이르러 내렸던 공간이고 이리역 북쪽 모현동 주민 철길은 한국전쟁 후 이데올로기를 가르는 공간이었다. 전쟁 기간에는 미군 B-29기가 수원역 인줄 알고 폭격했던 <이리역 오폭사건>의 현장이며 전쟁후에는 각종 걸구대회(궐기대회)가 열리던 장소이고 1977년에는 화약열차 폭발사고가 일어났던 기억의 현장이다.
○전주에 콩나물과 비빔밥의 문화가 있다면 익산에는 역 앞을 중심으로 <회관문화>가 있었다. 실비회관, 등대회관, 영빈회관 등 그리운 이름들이다. 익산역을 중심으로 호남평야의 농산물과 서해가 가까운 군산 쪽 수산물들이 결합된 양식과 일식이 함께한 모던한 식탁은 푸짐하면서도 깔끔했다. 삼촌과 형님들은 맥주와 청주를 타서 마셨다. <역전할머니맥주>가 살아난 것처럼 회관문화가 다시 살아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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