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연구

서동요와 익산쌍릉

청담(靑潭) 2009. 9. 1. 19:45

 

薯童謠와 益山 雙陵(서동요와 익산 쌍릉)




교사 이 석 한


프롤로그


  수 년전에 어느 신문사에서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남녀간의 사랑이야기 중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

 

지를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발표하였던 일이 있다. 〈춘향전〉이 1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서동과 선화공주〉는 놀랍게도 겨우 8위에 올라 있었다. 우리 전북지방에 남아있는 유일한 왕릉의 주인

 

공인들이자 우리 지방의 대표적인 애정 설화인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는 우리의 생각보다는 그리 널리 알

 

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글은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정리한 것이다.




Ⅰ.서동요(薯童謠)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해 두고


맛둥방(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서동요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1)




  무왕(옛 책에는 무강왕(武康王)이라 하였으나 틀린 것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백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어머니가 남편을 여의고 백제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과 결혼하여 장을 낳고, 아명(兒名)을 서동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으나, 어려서는 마(薯)를 캐어 팔아서 생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맛둥(薯童)이라 불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와


서 중의 행색을 했다. 마를 가져와 서울(경주) 근방의 동네 아이들에게 주자 여러 아이들이


가까이 따랐다. 이내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부르게 하였다. 동요가 장안에


퍼져 궁중까지 알려지니 신하들이 공주의 잘못을 규탄하기에 이르렀고, 왕은 공주를 먼 곳


에 귀양보내기에 이르렀다. 공주가 떠나려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서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 하였더니, 공주는 그가 어


디에서 온 사람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공연히 미덥고 즐거웠다. 그래서 따라가다가 상통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는다 하여 함께 백제로 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이것으로 생활을 영위하자 하였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공주는 "황금인데 백 년 동안 부자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서동은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려서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이 진흙처럼 쌓였었다."하였다. 공주가 듣고 깜짝


놀라 "이것은 천하의 보배인데 당신이 금이 있는 곳을 알았으니 이 보배를 우리 부모의 궁


전으로 보내는 것이 어떠합니까?"하였다. 서동이 "좋다." 하고 금을 모았는데 그것이 구릉


처럼 쌓였다. 용화산 사자사 지명법사가 머무는 곳에 가서 금을 보낼 계책을 물으니 "금만


가져오라"고 하여 공주는 편지를 쓰고 금을 법사에게 가져다 주었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에 신라 궁중으로 실어다 놓았다. 진평왕이 그 신통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


하고 항상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고, 서동은 이로 인해서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


다. 하루는 무왕이 부인과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소원


입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지명법사에게 나아가 못을 메울 일을 묻자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산을 무너뜨려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법상 3개와 회


전, 탑,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간판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 했다)라 하였는


데, 진평왕은 많은 공인들을 보내어 도왔다. 지금도 그 절이 있다. (삼국사에는 법왕의 아


들이라 하고 여서는 과부의 아들이라 하니 알 수가 없다.)






Ⅱ. 무왕과 선화공주


 

1. 무왕(재위600-641)


  무왕이 과부의 아들로 태어나고 익산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왕이 된 것으로 보아 그가 몰


락한 왕족임에 틀림없다. 무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단서는 성왕(523-554)에서부터 찾


을 수 있다. 왕권강화와 백제 중흥을 위해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538)한 성왕은 당시의 지배


세력을 재편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한다. 부여로 옮긴 후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고 딸을 신라에 시집보내는 등 동맹체


제를 강화하려하지만 바로 진흥왕의 배반으로 신라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그는 귀족들


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정벌에 나섰다가 관산성(옥천)에서 전사하고 만다.


  왕의 죽음으로 왕권은 급속히 약화되고 귀족들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잡는다. 그리고


「관산성 전투를 주도했던 성왕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 귀족들에게 심하게 추궁을 받


았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 있다.2) 이 아들이 바로 위덕왕(재위 554-598)으로 재위


기간 내내 귀족들의 기세에 눌리다가 죽은 후 혜왕(재위 598-599) 법왕(재위599-600)이 그


뒤를 잇지만 둘 다 2년만에 단명했고 왕권은 더욱 약해졌다. 법왕이 죽은 후 실권귀족들에


의해 무왕은 추대된다. 귀족들의 권력유지와 국정운영을 위해 추대된 이가 바로 익산에 살


던 몰락왕족 서동이었던 것이다. 관산성 전투이후 신라가 삼국의 주도권을 쥐었고 나제동맹


은 와해되었으며 두나라는 내내 적대관계였다. 그런 외교상황속에서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


혼은 과연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러나 적대국 왕실간의 결혼은 전쟁중에도 있었다. 삼


국사기에는 즉 관산성 전투가 있기 전해인 553년 7월, 신라가 동북변경을 빼앗고 신주를 설


치하였는데도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다」는 기록이 있다.3) 무왕이 신


라의 왕실과 혼인을 추진했던 것은 안으로는 귀족세력을 누르고, 밖으로는 일시적으로나마


신라와의 대립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을 노래하는 서동요는 탄생한 것이며, 서동요속


에는 당시 백제와 신라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늦추려는 정략적인 화해가 담겨 있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비단 서동요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전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거창 월


성계곡에는 백제왕자 서동이 신라의 선화공주를 꾀어서 백제의 도읍 부여로 돌아가던 길에


쉬어 갔다는 전설이 있고, 함양군 안의면의 원학동 계곡에도 서동이 선화공주를 데리고 지


나갔다는 갈기숲의 전설이 남아 있다.


  그런데 무왕은 풍채가 영특하고 체격이 컸으며, 기개가 호방하고 기상이 걸출하였다 한다.


그래서 그의 시호도 무(武)로 하였다. 그의 아들로 왕위를 이은 사람이 바로 의자왕


(641-660)으로 아비의 뒤를 이어 신라를 무섭게 공격하였으나 외교적 실패로 나라는 멸망하


였다.(660)




2. 선화공주


  신라의 진평왕(579-632)은 세 딸을 두었다. 첫째가 선덕여왕(632-647)이 된 덕만공주이고


둘째는 진평왕의 사촌인 용춘에게 시집가서 태종 무열왕(654-661)이 된 김춘추를 낳은 천명


공주요, 셋째딸이 바로 선화공주로서 백제의 무왕과 결혼한 것이다. 실제로 589년부터 601


년(무왕2년)까지 양국간에는 한번의 교전도 없고, 삼국유사나 동국여지승람4)에 의하면


「미륵사 창건시 진평왕은 많은 기술자를 보내 사찰건축을 돕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리하여 백제 신라간에 혼인을 통한 제3차 동맹이 맺어진 것이다.




Ⅲ. 무왕과 익산 쌍릉


1. 무왕의 익산경영과 천도계획


  평화롭던 양국관계는 무왕 초기부터 긴장관계로 바뀐다. 여


기에는 진평왕의 둘째공주 천명의 남편인 김용춘의 계략이 있


었다. 김용춘은 진평왕이 아들이 없기 때문에 진평왕 사후 왕


위계승권을 놓고 무왕과 자신이 다툼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무왕의 왕위계승권을 차단하기 위해 이미 불문에 입문하여 승


려가 된 덕만공주를 환속시켜 왕태녀로 삼게 하고, 신라역사상


처음으로 여왕으로 삼을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그리고 김용


춘 자신은 진평왕의 신임을 독차지하여 국정을 총괄하였다. 호


방한 무왕은 김용춘의 계략을 알아차리고 602년(무왕 3년)8월


김용춘을 죽이려 병력을 동원하여 아막산성(지금의 운봉)을 공


격하였다. 신라는 지금의 덕유산에 4개의 성을 쌓고 방어하니 치열한 전투 끝에 백제가 패


퇴하게 된다. 이른바 동서(同壻)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이후 백제와 신라는 그 관계가 급


속히 악화되고 , 이전의 동맹관계를 끝내 회복하지 못한다. 두나라간의 싸움은 무왕이 죽기


전까지 무려 12차례나 된다. 혼인동맹으로 맺어진 무왕과 선화공주의 인연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적대관계로 바뀌었으나, 양국간의 이런 전쟁관계로의 반전에도 불구하고 부부의 금


실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무왕은 왕권강화의 차원에서 수(581-618) 및 당(618-907)나라와의 외교를 통하여 고


구려를 견제하며 신라를 압박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바로 익산경영이다. 무왕


이 익산을 경영하게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5)


  첫째, 익산은 무왕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이다. 왕족이었으나, 몰락왕족이었기


때문에 익산에서 마를 캐며 사는 생활이었다. 마룡지는 바로 그가 익산에서 생활하던 곳이


라 할 수 있다.6) 이처럼 익산의 금마지역은 그가 왕이 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둘째, 익산지역이 가지는 경제적 측면이다. 앞의 삼국유사에서 보이듯 황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동이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마를 캐던


땅에서 갑자기 오금을 얻었다. 뒤에 그는 임금이 되어 그 땅에 절을 짓고 오금사라 하였


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익산지역이 금이든, 쌀이든 풍부한 경제력을 가진곳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지리적 잇점이다. 익산은 대부분이 구릉과 충적층으로 이루어진 평야지대이다. 북서


쪽으로 금강을 경계로 부여와 곧 닿아있고 동북은 논산으로 연접하며 동쪽으로는 미륵산,


천호산등의 산지로 막혀 있어 평야와 산지가 잘 어울리는 지형으로 교통상으로나 방어상으


로 아주 유리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익산경영을 통해 왕권의 지지기반을 확대한 무왕은 드디어 익산으로의


천도를 추진하게 되고, 왕궁리에 새로이 왕궁을 조영하고 백제의 최대사찰인 미륵사가 창건


되었다. 그러나 구 귀족들의 반대로 천도는 단행되지 못하고 마는데 이것이 무왕의 정치적


한계성이라 하겠다.




2. 익산 쌍릉


A. 백제의 왕릉


  백제는 고대왕국이었고 따라서 왕릉의 조영은 필연적이다. 고구려는 환인과 퉁코우, 그리고


평양에 왕릉이 산재해있고, 신라는 경주에 집중되어 있다. 백제시대는 한성(지금의 서울), 웅


진(지금의 공주), 사비(지금의 부여)에 분산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의 왕릉으로는 서


울에는 석촌동 고분이, 공주에는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이, 그리고 부여에는 능산리 고분


이 있다.


  한성시기(B·C18-A·D475)의 석촌동 고분군은 적석총으로 알려져 있는데, 적석총 중 일부


가 왕의 무덤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러나 적석총의 존속시기와 초기백제의 오랜 왕계를 고


려하면 적석총만으로는 설명이 어렵다. 오히려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한다.7) 석촌동 토광묘


나 가락동의 토광묘, 옹관묘 등 다른 형태의 묘제를 고려하면 적석총 이외의 묘제를 사용하


였을 가능성도 있다.


  웅진도읍시기(475-538)에 조성된 왕릉으로 확인된 유적은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이다. 여기


에는 백제가 웅진도읍시기에 유행한 횡혈식 석실분들만 있으며, 남천 후 중국 남조와의 교


류의 산물인 전축분이 제25대 무령왕의 능으로 조성되어 유적자체가 왕릉의 면모를 완벽하


게 갖추고 있다. 그러나 무령왕릉 이외에는 피장자의 성격을 알 수 없다.


사비 도읍시기(538-660)의 왕릉은 능산리 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은 발굴 결과 사비도읍시


기의 유일한 왕릉군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 능산리 고분군내의 고분들은 이 시기에 유행한


횡혈식 석실분이다.


  결국 백제의 왕릉은 백제 묘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중앙묘제의 범주에서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도읍지에 따라 각각 왕릉이 남아있어 이동에 따라 별개의 능역을 마련


하였음도 확인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익산 쌍릉은 기록에 의해 분명히 왕릉으로 전하지만


도읍지가 아닌 곳에 위치한다는 큰 특징이 있다. 그러나 묘제는 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


덤) 구조로서 사비도읍기의 묘제와 상통하고 있다. 횡혈식 석실분은 석재로 매장부를 조성


하고 반드시 입구를 설치하는 방식이다.




B. 익산의 쌍릉


  우리 전북에는 무릇 왕릉이라 할만한 큰 묘는 1899년에 조성된 전주이씨 시조묘인 조경단


을 제외하고는 오직 이 쌍릉밖에 없다. 전남 나주에는 30여기의 반남고분군이 있는데 이는


백제의 왕릉과는 별개의 강력한 지방세력집단의 무덤군으로 추정되고 있다.8) 기타 익산 부


근의 왕릉으로는 충남 연무읍의 견훤왕의 묘를 볼 수 있을 뿐이다.




1) 기록을 통해 본 쌍릉


  익산 쌍릉이 왕릉이란 기록은 이미 고려사에 나타나 있다.9) 고려사 지리편 금마군조에는


「후조선의 무강왕과 왕비의 능이 있는데 속칭 말통대왕릉이라 하며 말통은 어릴 때 서


동이라 부르던 무왕을 일컫는다」라고 전하고 있어 이미 고려시대부터 아니면 조선초기에


이미 이 무덤은 왕릉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


다 구체적으로 전한다. 「쌍릉은 오금사 봉우리의 서쪽 수백보에 있는데 고려사에 이르


기를 후조선 무강왕 및 비의 능이라 하였다. 일설에 백제 무왕의 이름이 서동인데 말통


은 서동이 변한 것이다」라고 하여 이 쌍릉이 무왕과 왕비의 능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


사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후조선이라는 국명과 무강왕의 왕명이다. 고


려사나, 동국여지승람이나 모두 삼국유사에서 인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삼국유사에는


분명히 「옛 책에는 무강왕(武康王)이라 하였으나 틀린 것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


다」고 하였다. 즉, 그 옛 책의 저자가 무왕에 대한 기록을 하면서 백제의 국명을 후조선이


라 오기(誤記) 하고 무왕을 무강왕이라 기록한 것이 틀림없다.10) 문제는 후조선이라는 국


명이다. 대처 고조선은 원래는 조선인데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


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 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그렇게 보면 후조선


이란 위만조선임이 분명한데 위만조선에도 무강왕은 없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


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또 기자조선이라는 명칭이 있는데 이는 중국 은나


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전하는 나라이다.11)


  이러한 익산 쌍릉에 대한 기록은 백제왕릉 기록으로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이외의 백제


왕릉에 대한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 동쪽 오리에 옛 능터가 있는데 백제왕릉


이라 말로 전한다」는 공주지역의 왕릉소재에 대한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나 고


구려의 경우 사망과 더불어 그의 장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한성


시기의 왕릉이나 공주시기의 무령왕릉, 사비시기의 능산리 고분군의 존재는 고고학적 성과


인 것이다. 따라서 비록 전언에 기초한 후대의 기록이지만 쌍릉을 무왕릉으로 전하는 기록


은 충분히 인정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고고학적 혹은 지리적 측면에서의 쌍릉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쌍릉은 묘제적으로 백제 후기에 유행한 횡혈식 석실분(굴식 돌


방무덤)으로 고임식에 속하는 것이기에 백제의 것임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서울인 부여


에 있는 능산리 고분과는 구조면에서 다같이 최고수준의 고분 조영술이 반영된 것들이다.


형식면에서 고임식이고, 재료로 화강석을 판석으로 정제하여 사용한 것들은 능산리 고분의


보편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쌍릉은 규모면에서 오히려 초대형에 속한다. 일찍이 1917년 일본인 야쓰이(谷正濟


一)에 의해 처음 내부가 조사되었다.12) 당시 대왕묘는 봉토의 지름이 30m, 높이가 5m이며,


소왕묘는 지름24m, 높이가 3.5m의 규모였고, 그 내부는 대왕묘는 길이 3.8m에 너비1.78m이


고 높이는 2.27m이다. 그리고 소왕묘는 길이3.2m, 너비1.3m, 높이1.7의 크기이다. 이러한 규


모는 능산리 고분들보다도 훨씬 더 크므로 규모면에서는 왕릉이라는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


다.


  지리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 왕릉은 사비시대에 축조된 것이 틀림없기에 사비도읍기의 왕의


무덤이어야 한다.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까지의 혈연관계나 묘지의 위치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겠으나, 법왕과 무왕과의 관계는 석연치 않고, 더욱이 무왕과 익산과의 인연은 앞에


서 살펴본 바이다. 따라서 쌍릉은 익산에서 태어나서 미륵사를 짓고, 왕궁평성을 조영하는


등 익산을 천도 예정지 내지는 별도로서 경영하다가 묻힌 무왕과 그 비의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3) 명칭 문제


  우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부터 기록된 쌍릉이라는 명칭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백제


의 많은 왕릉가운데서도 피장자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공주의 무령왕릉뿐이며 기


타 어느 고분에서도 그 피장자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쌍릉은 무왕의 탄생과


성장설화, 미륵사 창건, 오금사, 마룡지, 왕궁평성 조영 등을 통하여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


많은 기록들이 있다. 나아가 7세기대의 많은 문화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관


세음응험기의 기록을 통하여 천도설도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배경을 통해서


쌍릉은 이제 그 주인공에 맞게 무왕릉과 무왕비릉으로 호칭되어야 할 것이다.13)




4) 출토 유물


  무왕릉에서는 목관, 도제완, 옥제 장신구, 치아 3점이, 왕비릉에서는 도금관식금교구편, 관


정, 금동투조금구 등이 나왔다. 이중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목관을 들 수 있는데


목재는 능산리에서 출토된 목관과 같은 것으로, 왕의 관을 제작하는데는 일본에서 가져온


목재를 사용하였다. 무령왕릉의 목관도 역시 일본의 남부지방에서만 분포하는 금송을 사용


하였는데 일본에서만 산출되는 수종으로 물에 강하고 부식이 잘 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왕들의 목관의 목재가 일본에서 왔다는 데서도 당시의 백제와 일본과의 밀접한 관계


를 엿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주에서 약간 언급하고자 한다.14) 이러한 유물들은 능산


리 고분 출토유물들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으로 보아서도 왕릉임은 자명하다 하겠다.




Ⅳ. 마치는 말



  이상으로 삼국유사의 서동설화를 통하여 서동은 익산에서 출생하여 왕이 된 백제의 무왕이


며,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결혼하여 정치적 안정과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으나


오히려 신라와 적대관계가 이루어지고 출생지인 익산을 중시하여 미륵사를 창건하고 왕궁평


성을 조영하였음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고려사 및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하여 쌍릉은 무왕과 그 비의 무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는 서동설화를 통해 해석해 볼 때 선화공주임을 거의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현재 동서화합의 차

 

원에서 1999년부터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사랑을 주제로 한 축제가 경주와 익산에서 열리


고 있다. 익산 쌍릉이 백제의 왕릉이요, 무왕의 무덤이라는 데에 대한 이견은 없다. 그간의


연구성과에 의해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인정된 만큼 익산문화권의 개발이 알차게 이


루어져 익산만이 아닌 우리 전북의 역사적 문화명소가 되어 경주의 천마총처럼, 공주의 무


령왕릉처럼, 부여의 능산리처럼 널리 알려지고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모습을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왕과 왕비릉에서 오금산성 그리고 서동의 출생지인 연동마을의 마룡지


와 용샘까지 승용차를 이용하여 쉽게 찾을 수 있어야 하며, 아름다운 풍경의 조성 등 여러


볼만한 꺼리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註:보충설명




주1 삼국유사 권2 무왕조.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


(一然:1206 ∼1289)이 신라·고구려 ·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이


다.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름은 역시 장(璋)이라 하였다.


주2 일본서기(일본 나라[奈良]시대 720년에 관찬(官撰)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역사서)에 기록


되어 있다.


주3 삼국사기 권 제26 백제 본기 제4 성왕 조.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인종때(1145)에 김부식


(金富軾) 등이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이다.


주4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조선 성종 12년(1481)에 만든 우리 나라의 인문 지리책.


1481년(성종 12년)에 왕명으로 노사신, 양성지 등이 명나라의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여


만든 책이다. 우리 나라 각 도의 연혁, 풍속, 무덤 및 사당, 관청, 토산품, 학교, 성곽, 산


천 등과 역대의 이름난 사람들의 기문(記文), 단군 신화 등이 실려 있다.


주5 노중국, 계명대, 2000, 백제사상의 익산지역, <익산 쌍릉과 백제고분의 제 문제>


주6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익산군 산천조. 이행(李荇)·윤은보(尹殷輔) 등이 중종의 명


에 따라 1530년(중종 25)에 〈동국여지승람〉을 새로 증보하여 만든 조선 전기의 전국


지리지. 「마룡지는 오금사 남쪽 백여보 되는 자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


의 어머니가 축실하였던 곳이다’라고 한다」이러한 내용은 금마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서동과 그 어머니가 살았다는 오금산 아래 연동마을 앞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이를 마


룡지라 기록하고 있다. 이 마룡지의 북쪽 50M 지점에 서동의 집터에 있던 우물인 용샘


(龍泉)이 있었는데 원래 가공석으로 井字형으로 축조된 우물이었으나, 새마을 사업으로


원형을 잃고, 10여년 전에는 논 임자가 아주 메워버렸으나, 현재 시멘트로 샘 모양을 해


놓고 있어 그 위치만큼은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용샘 부근은 항상 물이 솟는 수렁논


인것으로 보아 대단한 시암이었을 성 싶다. 4차선 도로변에 있는 蓮방죽(蓮池)을 마룡지


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마룡지의 일부가 논으로 메꾸어 졌다고 가정하면, 오늘의 연지


를 마룡지로 보는 견해가 전혀 타당성이 없는 주장은 아닌 듯 싶다.


주7 이남석, 공주대, 2000, 백제고분과 익산쌍릉, <익산 쌍릉과 백제고분의 제 문제>


주8 나주 반남고분군이 중요하게 평가받는 이유는 독무덤을 쓰면서 왕릉처럼 거대한 봉


분을 쓴 것은 이곳 영산강 유역의 고분들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백제의 돌방무덤과


차별되는 무덤양식으로 이 지역에 백제와 다른 강력한 정치력을 가진 독자세력이 있었


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무덤양식 중 일부는 일본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 것으로


고대 한일 관계를 밝히는 자료가 될 수도 있다.


주9 고려사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1390-1453) ·정인지(鄭麟趾:1396-1478)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만든 고려시대의 역사책이다.


주10 이와 같은 기록은 이후의 지리서인 與地圖書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시호


를 武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원래는 武康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에 관


해서는 10세기에 중국에서 편찬된 관세음 응험기에 百濟武廣王遷都...라하여 무광왕이


라한 것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주11 기자조선 중국 은나라 말기 (B·C 1100년경)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전하는 나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


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


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후한 왕부(王符)의 《잠부


론(潛夫論)》에 “주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衛滿)에게 망하여(B·C194) 뱃길로 남하하


여 한지(韓地)에 와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여기서 바다로 간 자는 바로 준


왕(準王)이므로 그의 성은 기씨가 아니라 한씨이며, 중국인이 아니라 한인(韓人)인 것이


라고 주장한 한씨조선설이 있다. 이 준왕이 익산에 자리잡았다 하여 쌍릉을 준왕묘로


보고 기자를 시조로 하는 청주한씨들은 쌍릉에 제사를 지내왔다.


주12 조선고적연구회 소화12년도 조선고적조사보고 야쓰이는 석실의 구조상으로 부여 능


산리 왕릉과 비교할 수 있는 왕족의 능묘라고 단정적으로 추정하였다.


주13 최완규, 원광대, 2000, <익산 쌍릉과 백제고분의 제 문제>


주14 일본서기를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수 있다(최 진-다시 쓰는 한일 고대사)


무왕에게는 태자인 의자와 교기왕자, 경왕자, 보황녀등 여러 공주가 있었다. 일찍이 맏이


인 보황녀는 선화공주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공주로 정치적 고려에 의해 629년 일본의 서


명천황에게 시집가게 된다. 이 보황녀(이영희 교수는 조선일보에 연재한 <노래하는 역사


>에서 그녀를 경왕녀라 하고 일본에 망명하였다고 보고 있다)는 서명천황이 죽자 황위에


올라 황극천황이 된다.


백제에서는 641년 무왕이 죽고 의자가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신라에서는 진덕여왕이 죽


고 천명공주의 아들인 김춘추가 654년 무열왕으로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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