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연구

성곽(城郭)과 봉수(烽燧)

청담(靑潭) 2009. 9. 1. 19:55

 

성곽(城郭)과 봉수(烽燧)

 

 

(익산 지역을 중심으로)

이 석 한

Ⅰ. 들어가는 말

Ⅱ. 성곽

  1. 성곽의 기원

  2.. 성곽의 발달

  3. 성곽의 종류

   1) 도성

   2) 산성

   3) 읍성

   4) 장성

Ⅲ. 봉수

  1. 봉수의 기원

  2. 봉수의 종류

  3. 봉수시설과 봉수군

  4. 봉수 방법

  5. 봉수 노선

  6. 전북지방의 봉수로

   1) 연변 봉수로

   2) 내지 봉수로




Ⅰ. 들어가는 말


   지난 6월 15일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한반도 분단 55년만에 화해무드가 조성되고 ‘이제 한

반도에는 전쟁은 없다’라고 대통령이 서슴없이 말했다는데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

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은 강력한 기대의 표현일 뿐 그 후 대통령은 누차 튼튼한

국토방위 속에서만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역사는 끊임없는 전쟁을 통하여 때로는 통합되고 때로는 분열하며 발전하여 왔다.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수많은 외적의 침략과 내란의 갈등 속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20C들어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탱크와 전투기를 이용하게 되었고 20C말에

이르러서는 레이더와 경보기 및 인공첩보위성을 통하여 광대한 지역을 관찰하고 걸프전에

서 보았듯이 수 천 킬로를 공격하는 대륙간 미사일로 순식간에 승패가 결정지어지는 국경

도 없는 전쟁이 바로 오늘날의 현대전이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이후 인류가 국가를 조직한 이래 19까지는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나 전

쟁에 대비하여 성을 쌓아 적을 막으며 적의 침입 시에는 긴급히 말을 달리거나 연기나 횃불

로 긴급히 연락하는 비상 신호를 준비하는 문화적 보편성을 찾을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많은 성( 城 )을 쌓았고 비상시의 재빠른 통신

수단으로 봉수제도( 烽燧制度 )를 마련하여 외적의 침입에 항시 대비하였다. 우리 익산지방

에도 여러 성곽의 유적들이 남아있고 봉수대의 흔적이 있어 이에 대해 간단히 알고자 한다.

익산지방의 관방 유적은 숫 적 한계가 있는 데다 그 고고학적 조사내용을 알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우리 나라의 성곽 및 봉수제도의 전반에 대한 이해를 주로 하면서 우리 고

장의 관방유적을 조금 상세히 조사정리 하였다.


 

Ⅱ. 성곽


1. 성곽의 기원

 

  城이란 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흙이나 돌로 구축한 방어시설을 말한다. 전자가 토성이요, 후

자가 석성이다. 극히 원시적인 방어시설이 설치된 것은 이미 수 만년전 구석기 시대부터 인

간이 주거하는 동굴이나 움집 등의 주거에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적과 야수를 방어하였으

리라고 보여진다. 현재 고고학적 발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되는 성곽도시는 이스라

엘의 예리코라 하는데 B·C 8천년 이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어 메소포타미아 및 이집

트 중국 인도등 고대 문명지역에서는 모두 성곽도시가 출현하였다. 이후 성곽도시나 성새

(城塞=城砦)는 계속 전승되어 근세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조선 세종 때 양성지는 ‘우리 나라는 성곽의 나라’라 했다 하며 일찍이 중국에서도 ‘고

구려 사람들은 성을 잘 쌓고 방어를 잘 하므로 함부로 쳐들어 갈 수 없다’라고 했을 정도

로 많은 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성곽의 기원에 대하여는 분명하지는 않으

나 사기 및 한서 조선전에 평양성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데 B·C 2세기쯤이다. "한이 위

만을 침공했을 때 왕검에 이르니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조선 말기

에는 성곽이 있었음이 분명하고 그 강력한 한무제의 군사들이 수개월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는 기록에서 성곽의 발달과 성곽전의 전개, 성곽의 중요성을 시

사하는 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 삼한 및 삼국의 발전과 더불어 많은 성

곽과 같은 방어시설들이 생겨났으리라고 보여진다.


 

2. 성곽의 발달

 

   성은 원시인들이 적이나 야수를 막는 원시적 방어물에서 시작되었으나 그후 농경 목축등

경제생활을 하면서 정착생활을 하게 되자, 주거를 지키는 주거 방어의 형태를 낳아 취락방

위로 발달하였다. 이것은 점차 성곽도시로 발전하여 갔다. 또한 권력자의 사적 주거방비가

거성, 왕궁의 형태로 발달하였다.

   한편 순전히 전투상에 필요한 방어물이 구축되니, 처음에는 木柵이나 녹채(鹿寨가시 울타

리)같은 간단한 것에서 만리장성과 같은 대규모 성곽으로 발전하였다. 유럽에서는 게르만의

이동 이후부터 중세를 거쳐 근세에 이르렀다.

 

◎미륵산성(미륵산성 지방기념물 제 12호)


   호남평야를 내려다 보는 430m의 익산의 명산 미륵산의 뒷자락에 자리한 미륵산성은 고조


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하하여 쌓았다고 하여 기준성 이라고도 부르니 가


히 역사가 오랜 성이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산 정상의 동쪽에서


부터 말발굽 모양의 성벽이 산중턱까지 걸쳐있다. 백제 때 미륵사를 세울 무렵 축조되고 그


후 여러 차례 개축되고 조선시대까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레는 2km정도이며 현재


300여m가 남아 있는데 높이 2-3m, 폭이 5-6m이다. 1990년과 92년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바 있으며 옹성과 동문지가 확인 되었다. 현재 일부 복원을 위한 성벽 석축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낭산산성(郎山山城 지방기념물 제 13호)


  미륵산에서 북쪽으로 약 4km 정도 거리에 있는 상랑부락 뒷산에 자리하고 있는 낭산의 정


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낭산의 높이는 162m이며 이 산성은 다른 이름으로 구성(舊城) 북성


(北城) 마한성(馬韓城)이라 불린다. 이 성안에서는 백제시대 이래의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


다. 삼국사기 진지왕 3년(578)년조에 "신라가 알야산성(閼也山城)을 쳤다"는 기록이 보이는


데 바로 이 낭산산성을 칭하는 것이다. 백제시대의 알야산현은 신라 경덕왕때 야산현(也山


縣)이라 부르다가 낭산현(郎山縣)이라고 부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곽은 깬돌로 쌓은 부분


과 토축으로 구성한 산성으로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있다. 둘레는 약


1059m이다. 현재 남쪽편에 남아 있는 석축의 높이는 역 2.8m이며 서쪽과 남쪽, 북쪽에 문지


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의 북쪽은 거의 정상부에 성벽이 위치하고 남쪽은 일부 골짜기를


감싸는 테뫼식이며 남쪽이외는 토축으로 판단되고 있다.


 

◎금마 도토성(金馬 都土城 지방기념물 제 70호)


  이 성은 금마 소재지에서 미륵사지 쪽으로 공수여단 바로 못미쳐 오른쪽에 있는 약 80m정


도의 굿대숲 위에 있는 토성으로 일명 굿대숲토성이라 한다. 북면은 산맥과 연결되어 있어


다른면들은 평지에 임하고 있어 중복을 테머리식으로 토루와 토단을 설치하였다. 토성의


주위는 약 330m로서 원형에 가까운 평면인데 남쪽 성벽 중앙부는 돌출되어 있어 우루(隅


樓)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이곳에 묘를 서서 원형을 찾을 수 없다. 동쪽 성벽


은 산허리의 경사면을 파서 외루(外壘)를 쌓아 올리고 내부에도 토루를 쌓은 흔적이 있다.


익산지에는 저토성(猪土城)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옛 금마저(金馬渚)의 渚를 猪로 잘못 기


록하지 않았나 한다. 현재는 금마가 옛 고도였다는 데서 都土城이라 부르며 마을사람들은


"말다지기"라고 부른다.


 

◎천호산성(天壺山城 지방기념물 제 99호)


  우리 익산의 가장 큰산인 500m의 중봉을 둘러있는 주위가 약 4km에 이르는 큰 산성이다.


속칭 태성(台城) 또는 농성(農城)이라 부른다. 이곳은 후백제와 고려군의 격전장이라 전해


온다. 성곽은 폭이 약 4.4m로 비교적 넓게 자리를 잡은 석성인데 지금은 모두 붕괴된 상태


이다. 북벽은 치석한 석재를 서서 정교하게 쌓은 것을 볼 수 있고 봉수시설로 추정되는 흔


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이성에 관하여 동국여지승람이나 호남읍지에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이전에 폐한 것으로 보인다. 왕건의 고려군이 후백제 정벌 때 주둔했던 문드뢰뫼


재가 이 천호산에 이어져 있고 탄현과 황산벌도 이산에 연결되어 있음을 볼 때 전략상 중요


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으로 보인다.




3) 읍성

 


  읍성은 지방행정관서가 있는 고을에 축성되며 성안에 관아와 민가를 함께 수용한다. 우리나


리의 촌읍은 대개 배후에 주산을 두고 그 기슭에 형성되어 있으므로 성곽도 자연적으로 읍


의 주위를 두른 다음 그끝이 산으로 이어지는 평산성(平山城)형식이 발달하였다. 순수한 평


성 읍성으로는 낙안읍성, 해미읍성 등이 있다. 대개 고려말에 등장하여 조선초기에 많이 쌓


았는데 동국여지승람에는 전국에 읍성이 179개나 나타나고 있어 전 군현의 반수가 넘게 읍


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해미읍성(海美邑城 사적 제 116호)


  서산군 해미읍에 있으며 우리나라 읍성 가운데 가장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곳은 서해안의 요지


로 충청도의 병영이 있던 곳이다. 성종 22년(1491)에


이루어졌으며 원형으로 된 1높이 5m 길이 1800m의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약 5만평의 성안에는 원


래의 건물들은 모두 없어지고 초등학교 및 민가가


들어있던 것을 1973년부터 복원사업을 벌여 정비하였다.


 

◎진주성(晉州城 사적 제 118호)


  진주시에 있는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가 벌어진 곳이며, 다음해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하여 최후를 마친 곳이다. 이때 우리고장 장수출신의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


한 촉석루가 있다. 내성의 둘레는 약 600m, 외성의 둘레는 약 4km이다.


 

◎낙안읍성(樂安邑城 사적 제202호)


  승주군 낙안면에 있는 이성은 민속보존마을로 지정되어 최근 유명해진 곳이다. 조선초기에


축조되고 인조때(1626)임경업 장군이 석성으로 개축했다 하는데 둘레가 1384m 높이가2m가


량의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읍성 입구에는 임경업 장군의 선정비 비각이 있다.1984년부


터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벌여 성벽 및 3개의 문루를 복원하고 관아건물도 세워 관광지로 각


광을 받고 있다.


 

◎고창읍성(高敞邑城=牟陽城 사적 제 145호)


  해미읍성과 함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성곽으로 조선


단종 1년(1453)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4-5m


이고 둘레는 1680m에 이른다. 석재는 거의 자연석이다.


반등산을 둘러싸고 동,서,북의 세 문과 여섯군데의 雉,


두군데의 水口門, 甕城등을 갖추고 있다. 이 성은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호남내륙을 지키기


위한 것이어서 읍을 둘러싸지 않고 산성처럼 되어 있으며 성밖에는 해자를 팠다. 1976부터


복원되기 시작하여 그 안에 있던 고창여고가 이전하고 건물들을 복원하고 있다.



◎무장읍성(茂長邑城사적 제 346호)


  조선 태종 17년(1417)에 병마사 김저래가 주변 백성 및 승려 2만여명을 동원하여 쌓은 이성


은 현재 그 안에 무장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으며 동헌과 객사가 남아있다. 현재 읍성을 복원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4)장성(長城=行城)

 


  국경의 변방에 외적을 막기 위하여 쌓은 말 그대로 긴 성이다. 길이가 수십km에 달하므로


산과 산을 연결하여 축조된다.


 

◎천리장성(고구려)


  고구려 때 당의 침략을 막기 위해 영류왕 2년(642) 요동에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부여성(농


안)에서 요하를 따라 비사성까지 1천여리에 뻗쳤다. 이 성을 쌓는데 16년이나 걸렸으며 연


개소문이 직접 감독한 대 역사였다 이성은 천 여리를 모두 성벽으로 연결한 것은 아니고 군


사적 방어에 필요한 요충지에만 성벽을 쌓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다.


 

◎천리장성 (고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으로 12년이나 걸려 정종 10년(1044)에 완성을 보았다 .고려


가 3차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후에 개경에 도성을 축조하고 나서 쌓은 성이다. 서쪽


으로는 압록강 입구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정평)에 이르는 이 장성은 압록강과 청천강의


분수령을 이용하였는데 상류지역에서는 평지를 횡단하였다. 이성은 산령을 통과하는 부분


은 토축으로 평지는 석축으로 하였으며 대체로 초기에 축성된 여러 성들을 연결시킨 것이


다.





Ⅲ. 봉수(烽燧)



1. 봉수의 기원

 

 


  봉수란 높은 산정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써 변경의 정세를 중앙


에 급히 전달하는 군사 통신 조직이다. 봉화의 최초 기원은 기원전 3 백년 경 알렉산더 시


대에 널리 사용되었다 하며, 중국에서는 서기 1세기 후한 광무제때 정비된 수(燧)제도가 있


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봉수관련 기록이 보이고, 15세기 조선


세종때에 크게 정비되고 1895년 5월 9일 봉수대의 봉수군이 폐지될 때까지 그 역할을 다하


였다.

 


2. 봉수의 종류


A. 직선봉수와 간선봉수


◎직선봉수:기점이 해안이나 국경인 경우 위급한 상황으로 중앙에 직선으로 연결되는 기간


선로상의 봉수


◎간선봉수:직봉의 보조선이며 본봉사이의 중간지역을 연결하는 장거리의 것과 본진과 본


읍에 보고하는 단거리의 것이 있다.


 

B. 경봉수·연변봉수·내지봉수


◎경봉수: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인 서울 목멱산(木覓山:南山)의 봉수


◎연변봉수:해륙과 변경의 제 1선에 위치한 봉수


◎내지봉수: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봉수로서 내륙지방에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중


앙으로 신속히 전달.


 

3. 봉수시설과 봉수군


1) 봉수시설


  연변봉수에는 거화시설인 연대(높이 9M,둘레 21M, 폭 9M)와 연조(네모 또는 원형의 아궁


이. 높이 3M) 연통을 설치하고, 연대 박에는 끝이 뾰족한 말뚝을 박은 일종의 목책으로 적


군과 맹수의 습격을 예방하였다.


 

2)봉수군


  봉수는 중앙의 경우 병조의 무비사(武備司)가, 지방의 경우는 수령등의 군사 책임자가 관장


하였다. 수령은 오장(伍長)과 봉수군의 근무의 성실여부를 감독하고 연대책임을 졌으며 그들


의 차출과 출근, 봉수대의 이상유무를 살폈다. . 오장과 봉수군은 봉수대에서 함께 기거하면


서 임무를 수행하는데 봉수군은 주야로 후망( 望) 하는 고역을 담당하고 오장은 봉수군을


통솔하고 봉수대의 이상유무를 수령에게 보고하였다. 봉수군은 출퇴번의 편의를 위하여 반


드시 부근의 주민을 중심으로 차출하였다. 그 신분은 초기에는 봉화간(烽火干)이라하여 신량


역천(身良役賤)에 속하였으나 봉수의 역이 갈수록 고달프고 신분이 낮아져 칠반천역(七般賤


役)의 하나로 되었다. 봉수군의 수는 경봉수가 정원 20명에 5개소의 봉수마다 각 4 명씩 배


치하여 2교대하고, 연변봉수는 정원 50명에 10일 교대, 내지봉수는 정원 30명에 10일 교대였


다.


 

4. 봉수방법


  봉(烽)이란 밤에 오리는 烽火를 말하며 홰(炬)에 불을 켜서 알리는 것으로 싸리나무에 관솔

 

을 넣어 만들었다.


  수(燧)란 낮에는 나무에 불을 피워 그 연기를 서로 바라보게 하는 방법인데, 섭나무를 태워


그 위에 이리똥이나 말똥을 태웠다.


봉수대에서는 炬의 수를 달리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봉수는 하루 한번씩 정해진 시간에 거화


○어느 봉수대에서든 서울까지 12시간 이내에 도달


○평상시 목멱산에 초저녁 무렵에 도달




5. 봉수노선


  전국의 주요 간선로를 5로로 나누고 이 기간 선로를 直烽, 직봉사이의 중간 지역을 연결하


는 보조선을 間烽이라 하며 30리마다 설치하여 전국 369개소의 직봉과 254개소의 간봉등 총


623개소가 있었으며, 제주에는 별도의 25개소의 직봉과 38개소의 간봉을 설치 운영하였다.


◎전국의 직봉로선




6.전북지방의 봉수로


 

◎연변봉수로(해안선 14개소)


▶ 전남영광→고창상하(고리포)→고창 소응포→부안격포(월고리)→부안변산(봉수대산) →


부안(계화산)→김제심포(길곶산)→군산어은(사자암산)→군산선연(화산)→군산성메→군산월명


공원(점방산) →--서천 운은산→비인 칠지산


→--군산성산(오성산)→군산성산(불지산)→익산함라(소방산)→익산용안(광두산)


→충남 강경( 강경산)→논산 황화산→논산 노성산→공주 월성산


 

◎ 내지봉수로(내륙 12개소)


▶ 경남함양 → 남원아영(봉화산) →-- 임실(두치)


→-- 장수(사두봉)→ 장수(비봉산)→ 진안(성치)→ 진안(태


평) →완주 죽림→--완주 인봉


→--완주 선인→완주 화암→완주 옥배→완주신복 → 충청남도 진산 천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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