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이병기 생가 (지방 기념물 제 6호)
여산면 원수리 전시동에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가 있다. 선생의 생가를 알리는 팻말을 보고 마을길로 접어들어 10여 채의 민가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단정한 초가가 나선다. 가람은 1891년 변호사 이채의 큰아들로 이집에서 태어나 1968년 77세를 일기로 역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채, 사랑채, 고방채, 억새로 지붕을 이은 소박한 정자 등이 남아 있으며 정자 앞에는 자그마한 연못도 파여 있다. '조선말기 선비집안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라는 안내팻말의 문구가 아니더라도, 크지는 않으나 옹색하지도 않은 집채, 여름철이면 몇그루의 파초가 늘어서는 동구, 정자앞의 연못을 둘러싼 묵은 산수유와 배롱나무, 조붓한 마당 한편에 놓은 맷돌과 일반, 안채 옆의 가지런한 장대, 집뒤의 대밭에 이르기까지 선비집의 은근하고 담백한 생활의 멋을 느끼게 한다.
스스로 술복, 제자복, 화초복의 세복을 가진 사람이라 자처했던 가람의 집답게, 넓지 않은 집안임에도 사철 돌아가며 꽃과 잎을 볼수 있는 나무들이 잘 자리잡고 있다. 허세나 야단스러움이 없는 적적한 갖춤때문인지, 국가나 지방 기념물로 지정된 집들에서 흔히 느껴지는 썰렁한 분위기가 아니라 그 좁다란 무루에 걸터앉아 햇볕이라도 쬐고 싶은 친밀감을 주는 집으로, 우리 말과 글을 가다듬는 데 일생을 바친 선생의 체취를 느끼게 한다.
익산 쌍릉 (사적 제87호)
백제 무왕(30대)과 그의 아내 선화공주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백제 말기(7세기)의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다. 사적 제87호로 지정되어 있고 행정구역으로는 익산시 석왕동에 속한다. 두 개의 봉분이 있어 쌍릉이라 불리 며 좀더 큰 것을 대왕묘, 작은 것을 소왕묘라 한다. 772번 지방도를 타고 익산시내를 향해 가다가 익산시 금마면과 익산시내를 지나면 곧 오른쪽에 '쌍릉'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고, 그 옆 비포장길로 800m쯤 들어가면 왼쪽에 대왕묘가 있다. 글내에 새롭게 단장된 듯 말끔하고 약간 어색해 보이는 석수, 장명등, 문무신석이 놓여 있다.
소왕묘는 대왕묘 옆으로 뚫린 솔밭 사이 오솔길로 100m쯤 간 곳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능에 대해 "오금사 봉우리 서쪽 수백 보되는곳 에 있다. 『고려사』에는 후조선 무강왕 및 비의 능이라 하였다. 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인데,
말통은 즉 서동이 변한 것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왕묘는 지름이 30m, 높이 5m정도, 소왕묘는 지름 24m, 높이 3.5m 정도의 원형분으로,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부여 능산리 고분 돌방과 같은 형식의 판석제 굴식 돌방이다. 널방(현실)은 장방형이며 화강암 판석을 다듬어 벽을 세웠다. 널방 중에는 관대가 있었고 그 위에 둥근 뚜껑을 덮은 목관이 놓여 있었다
고 한다. 두 곳 모두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도굴되었으나 토기와 나무널등이 수습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수습 유물과 널방의 규모 및 형식으로 보아 백제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부근의 미륵사가 백제 무왕 때 창건된 것과 관련하여 무왕과 왕비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가까이 에 마룡지, 오금산성, 그리고 좀 떨어진 곳에 미륵사터가 있는 등 부근에 무왕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
왕궁리5층석탑 (국보 289호)
소재 : 왕궁면 왕궁리
이 탑은 백제의 궁궐터로 전하는 왕궁 평성안에 우뚝 서 있는 높이 8.5m의 백제계 석탑이다. 탑의 구조는 미륵사지 석탑의 양식을 많이 모방하여 단층 기단과 얇고 넓은 옥개석 그리고 3단의 옥개받침 등이 나타난다.
1965년 탑의 해체 복원시 일층 개석과 기단부에서 19매의 금제 금강경판과 금제 사리함, 사리병 등의 사리 장엄구가 수습되어져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어 현재 전주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76년 이 탑 주변 발굴 조사에서 「관궁사」명의 기와가 출토 되어 사찰 이름이 밝혀졌다.
유래 : 석탑의 정확한 유래는 전하지 않지만 탑 주변에서 왕궁사, 대궁등의 명문 기와가 수습되어 궁성과 관련된 사찰이 건립되는 과정에서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1965년 탑의 해체 복원시 제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부에서 금제 금판경과 사리함, 청동불상등이 수습되어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는데 이들 유물이 관세음 응험기에 나오는 제석사지 칠층 목탑내의 유물과 같은 종류여서 제석사지 목탑과 관련되 r>어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도리석불입상 (보물 46호)
소재 : 금마면 동고도리
높이 4.2m로 200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는 2구의 석조 입상은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을 나타내고 있는 속칭 '인석'이라고 불린다. 고려시대에는 신체의 표현이 지극히 절제화된 석상이 많이 조각 되었는데 이 석불입상은 이러한 계통의 작품이다.
유래 : 1858년 (철종9년) 이고을에 부임한 군수 황종석이 넘어져 있던 석불을 세우고 건립한 석불중건기에 의하면 금마는 동서북의 3면이 모두 산으로 막혀있는데, 만쪽만 터져 있어서 마을의 수호를 위하여 이곳에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이불상은 민속적인 감각이 가미된 특이한 것으로서 금마의 수호신과 같은 느낌을 주고있다.
미륵사지석탑 (국보 11호)
소재 :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백제 무왕대(600∼641)에 건립된 한국 최초의 석탑으로서, 목탑에서 석탑 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석탑이다. 이 탑은 미륵사지 서원에 위치한 석탑 으로 본래는 9층이었으나 현재는 6층만 남아있다. 탑의 뒷부분은 1915년 일본인들에 의해서 시멘트로 보수되었다.
유래 : 삼국유사 무왕조에 기록된 미륵사의 창건 연기 설화에 의하면 백제 30대 무왕이 왕비인 선화 공주와 함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에 불공 드리러 가는길에 연못가에서 미륵 삼존이 출현하여 선화 공주가 무왕 에게 청하여 사자사 주지인 지명 법사의 신통력으로 하루밤 사이에 연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창건 하였다고 한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제236호)
2기의 당간지주
미륵사지 남쪽에 2기의 당간지주가 88.3m의 거리를 두고 서 있다. 당간지주란 전에서 불문을 나타내는 문표, 그리고 불교 종풍을 드러내는 종파의 기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당을 걸었던 깃대의 지주를 말한다. 미륵사지에서는 당간지주가 다른 가람에서와는 달리 서탑과 동탑에서 남쪽으로 약 64m를 두고 각각 하나씩 두기를 조영하였다. 이 동.서 당간지주가 위치한 지점은 동.서탑이 위치한 것보다는 절터의 중심 쪽으로 가깝게 자리하고 있어 하나의 가람배치 계획속에서 조영된 것으로 보여 지고 있다. 구조는 4매의 길게 다듬어 만든 돌로 지복석을 놓고 그 위에 기단을 마련하였는데, 기단은 두 개의 장대석을 가공하여 조합하였다. 그리고 두 지주 사이에는 간대받침을 별개의 돌로 만들어 끼웠는데 간대받침은 상단과 하단에 반원형의 장식을 베푼 것으로 중앙에는 간대의 고정을 위한 구멍이 있다. 향지주의 내면에는 간대를 세웠을 때 고정시키기 위한 간공을 2개처에 설치하였으며, 간구를 두었다. 이 당간지주는 조형미가 아름다우며 김제 금산사의 당간지주와 비슷한 형태를 지니며, 통일신라대에 조성되었다.
미륵사지(사적 제150호)
미륵사 가람 모형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하는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30대 무왕(600년∼641년)에 의해 창건되었고, 17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지가 발굴되기 이전에는 백제 창건당시에 세워진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 1기, 그리고 석탑의 북쪽과 동북쪽 건물들의 주춧돌과 통일신라시대에 사찰의 정면 양쪽에 세워진 당간지주 1쌍(보물 236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미륵사지에 대한 조사연구는 일본인들이 1910년 고적조사를 개시로 남아있는 석탑과 관련, 부분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品' 자형 가람배치를 갖는 것으로 주장되기도 하였다. 그 후 1974년과 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는 동쪽에 남아잇는 탑자리가 목조탑인지 석조탑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동탑지부근을 발굴조사하여 서탑과 같은 규모의 석탑지임을 확인하였다.
1980년에 들어서 문화재 연구소에서는 백제 문화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당시 최대규모의 사찰인 미륵사지를 정비하고 보호하여 이를 사회교육도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종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종합적인 발굴조사의 결과 일본인들이 주장한 '品'자형의 가람배치는 맞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확인된 가람배치에 의하면 동탑과 서탑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각 탑의 북편에 금당(법당)의 성격을 지닌 건물이 하나씩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이 있어 동쪽은 동원), 서쪽은 서원, 중앙은 중원이라는 개념의 삼원 병립식가람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중원의 북측에 거대한 강당 하나만을 두고 공동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가람'이란 승가라마의 준말로 범어의 Sangh rama에서 유래 된 것으로 여러 승려들이 한군데 모여 살면서 불도를 닦는 것을 뜻하였으나, 후세에 와서는 절에 속한 집을 말하는 것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아무튼 이러한 가람배치는 동양 가람배치연구에서는 밝혀진 바가 없는 전혀 새로운 형식의 특수한 형태이다.
미륵사지의 발굴은 1980년에서부터 1995년까지 15년간 실시되어 20,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막새기와류와 기와의 등에 문자를 새긴 명문와, 토기류 그리고 자기류가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건물의 서가래 끝에 붙이는 녹유 연꽃무늬서까래 기와는 백제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수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이밖에 그 수는 많지않지만 금속제품, 묵제품, 벽화편, 토제품, 유리 및 옥제품, 석제품 등도수습되어 종류면에서 비교적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기 위한 호국사찰로서 성격을 띄고 세워졌던 것으로 여겨지고 잇다. 따라서 미륵사는 백제가 망할 때까지 왕실 사찰로 혹은 호국사찰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찰이다.
미륵사지는 연못을 매운 절이라고 삼국유사에 나타나있다. 실제로 조사결과 연못이었다는 증거를 나타낼 수 있는 여러 생물흔적이 나왔다. 물 배수를 위해 아래와 같이 배수로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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