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 1 일 발행 고등학교 국사 수정 ㆍ 보완 제안 사항 추가본
(12번 호락논쟁 문장오류 추가)
전주제일고등학교 교사 이 석 한
장 편사기획실장님 안녕하신지요? 올바른 한국사 편찬을 위해 작업에 매진하시는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금번에 교감 승진에 따라 일선 중 ․ 고교에서 30여 년 간 맡아온 한국사 교수를 금년 1학기를 끝으로 중단하게 되어 작년도부터 느껴 기록해온 수정 보완 및 개선을 요하는 부문을 다시 정리하여 보내드리오니 참고하여 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8년 8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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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수록 내용 |
수정 내지 보완 사항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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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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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구석기 시대의 유적지 지도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 지도 ■청동기 시대 유적지 지도
■신석기 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길림(길림성), 러시아의 아무르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 된다. |
※선사시대 우리민족의 활동무대를 한반도로 한정시켜 한반도 중심의 역사로 축소시켜 지도를 그리고 있고 또 내용을 기재하고 있다. 중국이 고대 우리민족의 활동지역인 요령성 및 길림성 지역이 현재 중국의 영토임을 내세워 동북공정을 통해 중국의 역사로 포함시키는 기도를 우리 스스로 인정하는 한반도 중심의 역사서술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중국의 요하문명론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시급하며 우리민족이 동방문화권의 주인이므로 주체적 서술이 되어야 한다. ▶신석기 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 이전에 우리민족의 활동무대인 랴오닝성과 지린성지역에서는 덧띠새김무늬 토기문화가 발달하였으며 점차 한반도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앞선 빗살무늬 토기와 약 500년 간 공존하다가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 된다. |
수정 및 보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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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수록 내용 |
수정 내지 보완 사항 내용 |
비고 |
2 |
38-39 |
사진 |
■동예의 철자형 집터사진이 두개나 수록되어 있음 |
※p 38의 사진은 불필요하므로 원래대로 삭제 |
삭제 |
3 |
53 |
1 |
■백제의 좌평은 국정을 총괄하는 관직이었다. |
※백제는 6좌평제를 두어 좌평이 6명인데 6명의 좌평이 모두 국정을 총괄한다고 서술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그 중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내신좌평이 상좌평으로서 국정을 총괄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408년(전지왕 4)에 여신(餘信)을 상좌평에 임명한 것이 처음이었다. 여신이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좌평으로 이루어진 최고 귀족회의의 의장과 같은 위치에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주로 백제의 왕족· 왕비족· 대성8족(大姓八族) 중 유력한 가문 출신이 임명되었다. 상좌평은 명칭으로 보아 좌평의 직무가 분화되는 과정에서 생겨났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그 성격은 신라의 상대등(上大等)과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좌평 중 내신좌평은 상좌평으로서 국정을 총괄하였다. |
수정 및 보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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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수록 내용 |
수정 내지 보완 사항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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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60 |
8-9 |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태봉으로 바꾸고, |
※국호를 마진으로 바꾼 것은 904년이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긴 것은 905년 7월이다.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었다가 다시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고, |
수정 보완 |
5 |
83 |
읽기자료 |
■대간, 간관 ■대간은 마땅히 위엄과 명망이 우선되어야 하고 탄핵은 뒤에 해야 한다. |
※이 읽기 자료는 삼봉집 제10권 경제문감 하편에서 대관조와 간관조에서 발췌한 것이다. 사헌부의 대사헌 이하 지평까지를 대관이라하고, 사간원의 대사간이하의 관원을 간관이라 하며 양자를 합하여 대간이라 부르는데 교과서는 원 자료를 잘못 옮겼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 대관은 마땅히 위망을 먼저하고, 탄핵을 그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위망이 있는 자는 비록 종일토록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두려워 복종할 것이요....... .......천하의 득실(得失)과 생민(生民)의 이해(利害), 사직(社稷)에 관련된 대계(大計)와 같이, 오로지 그 듣고 보는바 직사(職司)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홀로 재상만이 행할 수 있을 뿐이요, 간관만이 말할 수 있을 뿐이어서, 간관의 직위가 비록 낮다고는 하지만 재상과 동등하다.) ▶대관, 간관 ▶대관은 마땅히 위엄과 명망이 우선되어야 하고 탄핵은 뒤에 해야 한다. |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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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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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수록 내용 |
수정 내지 보완 사항 내용 |
비고 |
6 |
103 104 |
29 1 |
■곧 이어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동래부의 부산포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1609). |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1603년에 절영도에 임시왜관을 설치하였다가 1607년에 두모포 왜관이 설치된다. 두모포 왜관은 외교교섭이 논의되던 때인 1607년에 설립되었으므로 문장을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ꡐ두모포ꡑ는 ꡐ부산포ꡑ와는 위치와 명칭이 다르므로 정확하게 두모포로 명칭을 바꾸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한편 동래부의 두모포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고,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1609). |
수정 및 보완 |
7 |
104 |
그림 |
■통신사의 행로 |
※교토의 위치가 잘못 되어 있다. 교토는 비와호의 남단에 위치하는데 그림에는 비와호의 북단에 그려져 있어 실제로는 오사카와 교토가 아주 가깝고 교토와 나고야는 상당히 먼 거리인데도, 그림에는 교토와 나고야가 아주 가깝게 그려져 있고 교토와 오사카는 멀리 떨어져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전시실에 걸린 그림에서도 확인되었다. ▶교정된 그림 |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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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수록 내용 |
수정 내지 보완 사항 내용 |
비고 |
8 |
28
255 |
4- 10
3 |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5세기경부터 철기시대로 접어들었다. ..............한편, 철기와 함께 출토되는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음을 보여 준다. 또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나온 붓은 당시에 이미 한자를 쓰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우리나라는 철기 시대부터 한자를 도입하여 사용해 왔지만, 이두나 향찰을 만들어 한문의 토착화를 위한 독자적 노력도 기울였다. |
※중국에서 기원전 17세기 은나라시대부터 한자가 사용되기 시작하고 춘추시대에 공자(B.C 551-B.C479)가 나타나며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맹자(B.C372-B.C289)가 활동하는 시기이다. ※우리가 아무리 기자동래설(B.C1122년 은, 주 교체기에 현인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을 건국하고 팔조법금을 가르쳤으며 주 무왕에 의해 조선왕에 봉해졌다는 중국 기록)이나 고조선의 가림토 문자를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비로소 기원전 5세기인 철기시대부터야 겨우 문자를 사용한 것처럼 기술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내용이다. 2007년도 교과서부터는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확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므로, 그렇다면 무려 1800년간이나 글자도 없고 따라서 문자를 사용하지도 못하는 미개민족이 나라를 건국하여 다스렸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중국의 춘추시대에 우리는 글자도 사용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등이 철기와 함께 출토된다고 하여 한자사용의 상한선을 철기시대로 잡으며 창원 다호리 유적(B.C2세기경)에서 붓이 나왔기 때문에 이를 한자를 쓰고 있었던 증거로 삼는 것은 지나친 실증주의에 입각한 증거주의에 함몰된 단편적 사고에서 기인하는 오류라고 본다. 우리 역사를 대단히 위축시키고 얕잡아 보는 반도적 사관에서 기인하는 심각한 오류이다. ※ 공자(孔子)가 구이(九夷) 지방에 살려고 하자, 혹자가 말하기를, “누추해서 어떻게 살겠는가?”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살고 있는데 어찌 누추한 것이 있겠는가.” 하였으며《논어》 ꡒ동이에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군자가 누구인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ꡐ동이란 주나라 조선(朝鮮) 땅이다.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져서는 도를 미루어서 풍속을 교화시켰으며, 백성들에게 예의(禮義)와 농사짓는 법과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 이에 지금까지도 그 백성들이 먹고 마심에 변두(籩豆)를 귀중하게 여기고, 의관(衣冠)과 예악(禮樂)이 중국과 같다. 이는 기자가 교화를 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ꡑ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공자가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이와 같이 산업과 예악이 중국과 같다고 하였는데 고조선 건국이후 우리가 글자도 없고 사용하지도 못하는 미개국으로 1800여년 이상 유지되었다고 교과서에 기록하는 것은 교과서에서 당시의 고조선의 세력범위를 대릉하 유역까지 잡고(교과서 33쪽 그림 참조)있음과 기원전 3세기에 중국식 관직을 두고 연나라와 대립할 만큼 강성하기까지 중국과의 교류가 대단히 활발하였음을 전면 부정하는 기술이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른 유물을 통한 편협한 해석과 반도적 사고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당시의 상황을 거시적으로 이해하고 이미 고조선의 건국사실을 기정사실화시켰음에 유의하여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가 대략 B.C3500년 전부터이고 철기시대가 B.C 2500년 전부터이니 증거는 비록 없다 하더라도 그 당시의 중국(주나라와 춘추시대)과의 문화교류나 문화 발전상태로 보아서 마땅히 청동기시대에 한자를 사용한 것으로 서술하여야 한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의 유물에서 붓이 나오지 않기에 어려움이 있다면 마땅히 고조선으로 바꾸어 기술해야 한다. 한자의 보급과 교육에 대하여 기술하는 내용에 당시의 국가인 ꡐ고조선ꡑ을 명기하지 않고 선사시대의 시대구분인 ꡐ철기시대ꡑ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표현이다. ꡐ철기시대ꡑ를 ꡐ고조선ꡑ으로 바꾸게 되면 고조선이라는 나라의 철기시대 이전의 어느 때부터인가 한자를 사용한 것으로 이해되는 기술이 된다. ■우리나라는 고조선 시대부터 한자를 도입하여 사용해 왔지만, 이두나 향찰을 만들어 한문의 토착화를 위한 독자적 노력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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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
순 |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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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수록 내용 |
수정 내지 보완 사항 내용 |
비고 | ||
9 |
315 |
2 |
■17, 18세기 조선과 중국의 공통적 문화 특징 ①향단이는 미음상 이고 등롱 들고, 어사또는 뒤를 따라 옥문간 당도하니, 인적이 고요하고 사정이도 간 곳 없네. 이 때 춘향이는 비몽사몽간에 ........소리가 크게 나면 사또 염문할 것이니 잠깐 지체하옵소서.ꡓ<춘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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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글소설 춘향가의 일부분이다. 원래 2005년도 판까지는 하단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서민문화에 수록되었던 이다. 그런데 갑자기 2006년도 판부터 ■17, 18세기 조선과 중국의 공통적 문화 특징으로 붙여 수록되었으니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편집이다. 춘향전의 내용이 실려 있는 이 글은 우리의 조선후기의 서민문화에 해당하지만 조선과 중국의 공통적 문화특징을 설명하는 글은 절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못된 편집오류를 그대로 둘 수 없으며 반드시 시정을 요구합니다. ▶이 글은 다시 하단에 있는 조선후기의 서민 문화에 수록하여야 합니다. |
오류 수정 | ||
10 |
352 |
1-18 |
■한국의 세계유산 .................................................우리나라는 ꡐ경주 역사 문화 유적 지구ꡑ를 포함하여 일곱 가지의 세계 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
※2007년 6월 뉴질랜드 크아이스트처치에서 열린 제 31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ꡐ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ꡑ이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으므로 한국의 세계유산은 여덟 가지가 되었다. 한편 2004년 7월에는 제2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북한과 중국의 ꡐ고구려 유적ꡑ이 나란히 개별적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므로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ꡐ경주 역사 문화 유적 지구ꡑ를 포함한 일곱 가지의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인 ꡐ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ꡑ등 여덟 가지의 세계 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밖에 북한과 중국의 ꡐ고구려 유적ꡑ이 개별적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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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358 |
그림 |
■현도산성의 명칭 |
▶환도산성으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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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12 |
301 |
14 |
■ 이어, 18세기 이이 학파를 계승한 노론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호락논쟁을 벌였다. |
※밑줄 친 문장이 문법에 맞지 않다. 마치 노론이 18세기에 존재했던 이이학파를 계승한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이학파를 계승한 노론이 18세기에 호락논쟁을 벌였다는 것이므로 다음과 같이 문장을 고쳐야 한다. 1.▶이어, 18세기에는 이이 학파를 계승한 노론들 사이에서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호락논쟁이 벌어졌다. 2.▶이어, 18세기에는 이이 학파를 계승한 노론들끼리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호락논쟁을 벌였다. |
문장 오류 수정 |
2008. 3. 1 일 발행 고등학교 국사 기타 제안 사항
순 |
쪽 |
줄 |
현 수록 내용 |
수정 내지 보완 사항 내용 |
비고 |
1 |
19 |
그림 |
■주먹찌르개 그림 |
※ 주먹찌르개 사진을 주먹도끼로 환원하면 좋겠습니다. 사진의 주먹찌르개의 그림은 주먹찌르개의 특징이 잘 나타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먹도끼와의 구분도 불분명합니다. 따라서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도구가 주먹도끼이므로 주먹도끼 사진을 다시 게재하는 것이 바람지하다고 봅니다. ▶주먹도끼 사진 게재 요망 |
사진 교체 |
2 |
47 |
25 |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정치체제를 정비하였다. |
※고구려의 소수림왕과 신라의 법흥왕에 대한 기술에는 율령반포가 들어 있으나 백제의 고이왕에 대한 기술에서는 빠져 있어서 학생들이 공부하는데 애로가 되므로 삽입하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삼국사기 고이왕 29년 봄 정월, ꡐ관리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한 자는 그 세 배를 배상하며, 종신 금고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ꡑ는 내용을 통해 교육부 간 교사용지도서에도 관료체계를 위한 법령공포가 있었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국사교과서 및 많은 참고서적에서도 고이왕으로 기술하여 배우고 있다. ▶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율령을 반포하고 정치체제를 정비하였다. |
삽입 |
순 |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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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수록 내용 |
수정 내지 보완 사항 내용 |
비고 |
3 |
67 |
9 |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관청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회의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곳이다. |
※ 도평의사사는 조선시대의 비변사와 함께 고려시대에 국정을 다루는 최고회의기구임에도 교과서에 전혀 기록되지 않고 있다. 05 년도 판에 수록된 내용을 보조설명으로 수록하도록 요망함. ▶보조설명 : 도명마사는 국방문제를 담당하는 임시기구였으나, 고려 후기에 도평의사사(도당)로 개편되면서 구성원이 확대되고,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사항을 담당하는 최고 정무기구로 발전하였다. |
추가 기재 |
순 |
쪽 |
줄 |
현 수록 내용 |
수정 내지 보완 사항 내용 |
비고 |
5 |
258 |
그림 |
■9산 선문 지도 |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는 교종이 발달하여 5교가 성립하였으며, 신라말기에는 선종불교가 널리 확산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유명한 사찰들인 분황사, 통도사, 부석사, 금산사 등은 5교 종파의 본산들이다. 따라서 지도의 제목을 ꡐ교종 5교와 선종 9산ꡑ으로 하여 교종의 5종파와 본산을 표기하여 주시기를 요망함.
|
내용 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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