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연구

남중동(익산 향토지 제 1권)

청담(靑潭) 2009. 10. 11. 21:52

익산문화원에서 발행한 익산향토지 제1권(2005)중 필자가 조사하여 정리한 부분입니다.

 

Ⅱ. 남중동(南中洞)


1. 남중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남중동은 익산 시내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70년대에 조성된 신동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마동과 새 중심부로 성장한 영등동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호남선 철도를 넘어 모현동과 마주하고 남쪽으로는 구 이리시의 핵심부인 중앙동과 인접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내 중심지에서 가깝고 구릉지대이었기 때문에 각급학교가 많았으며 2000년 이후 영등동 및 어양동 지역이 개발되어 상권의 중심이 크게 이동하여 가고 있으나 그래도 아직까지는 익산시청과 주요 공공기관이 다수 소재하고 있는 익산시의 중심부이자 익산의 전형적인 주거지역이다. 동서로는 배산로와 동서로가 뚫려있고 남북으로는 남북로와 인북1로가 뻗어있어 교통망이 원활한 곳이다. 남북로와 인북1로 사이는 낮은 구릉지대로서 구 주택지로 단독주택이 대부분인 마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60년대까지만 해도 인북1로 오른쪽은 논과 밭이었으며 익산대에서 전북기계공고를 지나 소라산으로 통하는 복받음길 주변과 바깥은 솔밭이 우거진 한적한 시골이었으나 이제 그 모습은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2. 남중동의 연혁

원래 조선시대 익산군의 10개면은 군내면, 제석면, 율촌면, 지석면, 용제면, 춘포면, 두촌면, 두천면, 구문천면, 미륵면 등 이었다.

여기에 1906년에 옥야현으로 전주에 속했다가 익산군으로 편입된 지역은 남일면(중앙동, 인화동 등 시내 중심부와 목천동), 남이면(오산면 남부), 동일면(대장촌 일대), 서일면(오산면 북부지역), 북일면(남중동, 신동, 모현동, 영등동 일대)등 5개면인데 1914년에 남일면과 동일면이 합하여 익산면이 되고, 남이면과 서일면이 합하여 오산면이 되며, 북일면은 그대로 북일면이 되었다. 따라서 남중동 지역은 본디 전주부에 속한 북일면에 속하였다가 1899년에 익산군에 편입되었는데 1914년 송내동, 장교리의 일부와 남일면의 후신리 일부를 병합하여 남중리라 하여 북일면에 속하였다가 1917년 익산면이 지정면(指定面 : 중심면 )이 되면서 북일면의 남중리는 익산면에 편입된다.

1931년 익산면이 익산읍(이리읍)이 됨에 따라 남중정이 되었으며 1946년 12월 동제 실시에 따라 남중동으로 개칭하였다. 1951년에는 남중동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었으나 1957년 9월 1일에 다시 통합했고, 1970년 7월 1일에 다시 남중동 1가동와 2가동으로 분동했다가 1998년 2월 1일 재차 통합하였다.

남중동은 원래 북일면의 남중리라 하였다. 남중이라는 말도 위치로 보아 북일면의 남북쪽이며 남바위가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으로 보여진다.

 

3. 남중동의 현황과 모습

남중동의 면적은 1.75 ㎢이며 총가구수는 6,206가구, 총인구는 17,735명(남8,965,여 8,770)으로 43개통 165개 반으로 편성되어 있다. 각종 시설로는 공공기관 5개소, 학교 8개소, 은행 5개소, 병의원 26개소, 종교기관은 18개소이다.

1977년에 일어난 이리역 폭발사고는 참으로 익산시의 모습과 생활을 크게 변모시켰다. 1960년대까지는 버스정류장이 이리역 앞에 있었고 교육도시인 이리시로 통학하는 중ㆍ고등학교 학생들은 기차로 또는 버스로 역 앞까지 오게

되면 제각기 자기 학교를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도 남중동에는 현재

정자나무길

 

와 마찬가지로 이리여중과 이리여고, 남성여중과 남성여고, 남성중학교와 남성고, 이리동중과 이리고, 이리공고 등이 있었으므로 중ㆍ고교의 절반이 넘게 소재하고 있었는데 그중 남학생들은 모두 미관상 또 교육상 바람직하지 않은 창인동 골목길을 통과하여 남성여중고 정문 앞을 지나 오늘날 이리여고길이라 불리는 이리여고 서쪽길을 따라 끊임없이 새까만 행렬을 지으며 걸어갔다. 정자나무길을 따라 네 학교 학생들이 각기 자기 학교로 들어가고 나면 마지막으로 공고생들은 아직도 옛 추억이 남아있는 한마음길을 따라 한참을 더 걸어갔던 것인데 도보 시간은 무려 15분내지 20분으로 나어린 중학생들에게는 꽤나 멀고 힘들었던 길이었다.

당시 이리시의 중심부인 남중동이라고 해봐야 가장 큰 길은 역앞길과 지원중길~이리공고길이다. 이제는 익산시내 남중동의 작은 골목길처럼 되어버렸지만 당시에는 시내의 가장 중심이 되는 간선도로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던 길이었다. 시내의 중심은 역전과 시공관이었고 시공관 사거리는 중심지 중의 중심지였다. 지원중길과 이리공고길을 통하여 원대버스가 다녔고 지금은 도덕길과 삼양사 1길 그리고 비석거리로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제 그 옛날 이리시의 중심지였던 남중동에서 행정을 제외하고는 인구와 상권이 영등동으로 모두 옮겨간 모습이며 젊은이들은 모두들 영등동으로 가버린 형상이다.

남중동은 비록 면적은 그리 넓지 않으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면적에 비해 인구도 많고 지역 내에 농지가 거의 없이 마을이 꽉 들어차있다. 남중동의 중심은 인북1로를 기준으로 하여 아무래도 상공회의소 사거리와 북부시장 사거리이다. 그래서 남중동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차례대로 마을을 찾아보기로 한다.

남중동의 시작은 사실상 남중로부터이다. 그러나 남중로 아래에도 신중앙시장의 인북1로 앞과 뒤가 남중동 소속이다. 신중앙시장이란 인북1로가 건설됨에 새로운 제2의 남북로가 되어 발전을 시작함에 따라 조각산을 일부 헐어 그 자리에 세운 상가 건물로 한때는 스탠드바로 유명하였으나 지금은 예식장으로 바뀌어있다. 신중앙시장의 앞쪽은 바울병원이 있으며 신중앙시장 뒤편이 바로 황새골이다.

황새골이라는 마을명칭은 요즈음 도로명을 붙여 주민들이 알게 된 것이요, 예전에는 특별한 마을이름을 붙여 부르지는 않았다. 신중앙 시장의 뒤편으로 가보면 그 옛날 ?조각산?이라는 언덕을 만나게 된다. 6,70년대 학생들 사이에서는 서로 다투게 될 때에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고 선생님들에게 발각될 염려가 없는 이곳 조각산으로 ?한번 뛰러 가자?고 하는 말이 종종 오고 갔는데 바로 그 산이다. 이곳에서 40년을 사셨다는 아주머니는 필자가 어릴 때 들었던 얘기들이 실제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황새골을 돌아보니 생각보다 큰 마을이다. 마치 작은 동 하나는 되엄직하게 마을이 크다. 황새골은 한참동안 시내에서 유명했던 중국음식점인 길명반점부근에 큰 정자나무가 있어 이곳에 황새가 많이 날아와서 붙어진 이름이라고 어느 할아버지께서 새로운 유래를 말씀해 주셨다. 익산대의 서쪽 담을 경계로 하여 마동과 나뉘는데 작년에 익산대의 우중충한 서쪽담장을 헐고 조경을 하여 익산대 뒷길이 환해지고 새로운 공원이 하나 생긴것처럼 시야가 훤하나 마을 안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조각산길에서는 악취가 나고 꼬불꼬불 마을길은 너무도 좁다. 무너지기 직전의 위험한 담장이 쓰러질듯하며 빈집이며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것만 같은 집들이 많다. 시내의 한복판에도 이처럼 어려운 사람들이 어렵게들 살아가고 있음을 보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새삼 아프게 와 닿는다. 번영하는 마을과 이제는 어려운 사람들과 노인들만 남은 마을은 같은 시내 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너무나 다르다. 빨리 후다닥 임대아파트라도 많이 지어대서 이 마을사람들에게도 모두 좋은 생활공간을 마련해 줄 수 있는 뾰족한 묘안은 없을까?

한때는 남파와 더불어 우리의 입에 너무 자주 오르내렸던 마파(마동파출소)사거리는 옛 어두운 때를 벗고 말끔하게 길을 넓히고 새로운 집들이 지어지고해서 언 뜻 보기엔 환해보이지만 이젠 새로운 세대에겐 생소한 곳이 되었고 10여 년 전에는 한때 대형유리창에 홍등을 켜고 손님을 기다리는 부끄러운 술집들이 여러 집 들어서더니만 많은 여성단체와 정부의 노력에 의해 2004년 9월부터 '성매매특별법' 이 시행된 이후 전국의 집창촌의 쇠퇴와 함께 이곳도 완전히 문을 닫고는 빈집으로 방치됨에 따라 아주 음습한 거리가 되고 말았다.

황새골의 서쪽 지역은 우정길을 사이로 하여 좌측은 이리여고가 있고 우측엔 남창초등학교가 있다. 이리여중은 지원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2004년 마동 교육청 뒤에 새 집을 지어 이사가버렸다. 남창초등학교는 구 남성중ㆍ고 앞의 밭이었던 곳에 1963년에 개교한 학교이다.

남중동에서는 유일하게 남북로 서쪽에 있는 마을이 장뜰과 남바위이다. 남북로를 낼 때 이리여고길에서 지대가 낮은 장뜰로 연결하는 지하도를 내주어서 주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장뜰마을에는 옛 남성여중고자리가 지금은 면적은 좁아졌지만 이리서초등학교로 바뀌어 자리하고 있으며 모현사거리를 넘어 가면 남바위인데 이곳이야말로 남중동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마을이다. 철도를 넘어가면 현내가 있으니 어쩌면 현내와 함께 역사를 같이하는 오랜 마을일 듯 싶다. 놀랍게도 이 마을에는 아직도 논 한필지가 있어 농사를 짓고 있는데 마을이 크게 발전하지도 못했기도 하지만 철도 옆이라서 시설녹지와 자연녹지로 묶여 다른 용도로 사용이 불가능하여 지금도 논농사를 짓고 있다는 주민의 설명이다. 마을의 모습은 수십 년 전의 모습을 크게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나 길은 잘도 뚫려있다. 위로는 소나무길에서 정다움길 그리고 정자

모현동으로 넘어가는 제1 육교

 

나무길까지 남북로를 넘어 철도까지 크게 이어져서 이제 남바위도 변신을 가져올 모양이다.

예전에는 철도의 양쪽 주변에 밭이 많았고 나이 드신 어른들이 철도를 무단횡단하다 사고가 빈번하자 1990년대 초에 두 개의 육교를 놓았다. 하나는 정자나무길과 이어진 마을 끝에서 모현동의 명일아파트 2길과 이어주는 육교요, 또 하나는 소나무길과 이어지는 마을 끝의 흰돌교회 앞에 있는 육교인데 모현동의 이화아파트와 명일아파트 사잇길을 이어준다. 필자는 처음 보는 육교이나 잠시 지켜보노라니 생각보다는 학생들이 많이 넘나들고 있는 모습이다.

남바우 마을의 동편은 남중동의 오랜 주택가이다. 걸어 다니자면 꽤나 넓고 넓은 마을인데 지금은 세무서길을 비롯한 수많은 길이 직선으로 뻗어 있어 제법 보기에 좋으나 실상은 큰 변화 없는 오랜 마을일뿐이다. 실로 남중동의 발전은 이곳이 아니라 인북1로를 넘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남성 맨션(구 남성중ㆍ고 자리)과 이리고등학교 곁의 인북1로 너머는 60년대까지는 남북으로 길게 그저 논과 밭이었다. 지금의 시청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논길을 걸어 한참 지나면 전북대학교 공과대학이 있었으며 시내의 중심지인 시공관 옆(현 보배빌딩자리)에 있던 시청이 1970년에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온 이곳은 뒤이어 올림픽 생활관이 건립되면서부터 90년대까지는 한참동안 익산시의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기존에는 전북기계공고 밖에 없던 이곳에는 1970년에 익산시청이 들어선 이후 이리기독교방송국이 인화동에서 옮겨오고 익산시 문화회관과 여성회관에 이어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과 남중교회가 들어섬에 따라 크게 발전하게 된다.

북부시장 사거리는 북부시장의 융성으로 교통이 혼잡한 익산시의 큰 중심지이다. 북부시장이 생기기 전에는 현재의 남파사거리는 벽돌막에 사시는 노인들 말씀에 의하면 윗목거리라 하였다는데 70년 12월 익산시 청사가 남중동으로 이전하여 발전하기 시작하기 이전까지는 이리시의 사실상의 맨 윗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서북으로는 이리공고를 지나 원대로 가는 유일한 2차선 도로가 있었으며 동북으로는 소라단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벽돌막이라 불리는 이리고등학교의 뒷마을은 구릉지에 있는 북쪽 끝의 작은 시골마을로 적벽돌 공장이 있어 부르게 된 이름이다. 오늘날에는 주택가로 북부시장과 가까워서 살기 좋은 지역이 되어 있다.

조선 초기 15세기 말부터 발달한 5일장인 장시는 18세기 중엽에는 전국에 1,000여개소가 개설되었으나 이젠 교통의 발달과 도시화에 따른 상설시장 및 대형마트의 급증으로 급감하고 있으나 우리 익산에는 아직도 황등장, 함열장 여산장, 금마장이 그 명맥을 잇고 있는데 중소도시인 구 이리시내의 북부시장은 원래 상설시장임에도 4일과 9일의 장날이면 많은 상인들이 모여들어 농수산물과 생필품들을 팔고 사면서 큰 성황을 이루는 특이한 시장이다. 이미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재래시장으로 방송에도 소개되어 푸근한 고향의 모습을 널리 알려진 바 있다. 북부시장의 왼편으로는 신일아파트와 원주아파트가 있고 관청으로는 익산세무서와 익산지방 국토관리청이 자리잡고 있다. 그 뒤편으로는 역사 오랜 이리공고가 자리하고 있다.

북부시장 앞쪽엔 남중동 사무소가 있고 1970년에 이리북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같은 해 이주한 시청 뒤편으로 새로운 집들이 들어서고 기계공고 뒤편으로도 몇집 안되던 작은 마을이 인구가 늘면서 차츰 커졌다.

북부시장을 넘어서면 왼편은 문화촌이다. 옛날 꽃밭재라 불리던 곳으로 70년대 가난하던 시절에 반듯한 양옥집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웬만한 서민들은 감히 엄두를 못 내던 마을이었었건만 이젠 젊은이들은 모두들 살기편한 아파트로만 몰려가고 단독주택에는 어른들만 남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구 한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문화촌의 30년 된 양옥집들마저 팔기도 힘이 든다고 하니 정말 세상은 저 짧은 세월동안에 얼마나 많이도 변한 것인가? 우리 시민들이 무심히 신동일 것으로 생각되는 문화촌과 문화촌의 동쪽으로 소라단 마을까지가 남중동이다. 60년대까지 지금의 북부시장 사거리부근엔 그저 초라한 집 몇 채가 있었고 그 작은 마을을 지나 오늘의 남성고길을 따라 소라산을 거치면 큰 종축장이 있었고 그 종축장을 지나 영등리 사람들은 시내에 나들이 하였다. 이제 그 종축장은 남성학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중 남성중학교는 남중동에 속한다. 60년대에 소라단 왼쪽은 일부에 논이 있기도 하였지만 넓디 넓은 공동묘지가 남중동 북부지역과 신동지역에 펼쳐져 있어 ?영등이 고구마?로 불리던 영등리 학생들이 이 곳을 지나 북일초등학교로 통학하였는데 어두워지면 도깨비들이 나타난다 하여 무섭기 그지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53세 이현복 교사의 증언).

70~80년대의 남중동의 영화는 이제 떠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시청도 지은지 35년이 넘어 사무실이나 주차장이 모두 지극히 협소하여 어느 곳이 될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조만간 이전이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나마 남아있는 남중동의 위상은 더 낮아질 것이다. 이미 영등동, 어양동, 부송동으로 주거와 상권이 이동하였으며 그 이동은 계속될 것으로 보여 지고 있으니 말이다. 주요 기관 및 가볼만한 곳은 다음과 같다.

 

4. 관공서 및 교육기관

□익산시청

새 청사를 염원하는 현 청사

 

현재의 창인동 우리은행은 옛 시공관 자리이다. 삼남극장과 이리극장과 함께 시민들의 사랑을 받던 곳으로 시가 운영하던 극장이다. 이 시공관의 오른쪽에는 이리시청이 있었고 뒤편에는 익산군청이 있었으니 가히 60년대까지는 이리시내의 가장 중심지였다 할 수 있겠다. 1970년에 이리시청이 현재의 남중동 자리로 이전해 오고 1979년에는 익산군청이 함열로 이전해 가면서 그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지금은 볼품도 없고 빈약하기 그지없는 이리시청도 지을 당시에는 널찍한 주차장과 현대식 건물로 시민들의 마음을 뿌듯하게 하였지만 이젠 익산군과의 통합으로 30만이 넘는 익산시를 관장하기에는 건물도 너무 협소하고 위치도 걸맞지 않다. 한국식 전통을 살려 지은 저 대단한 전주시청이 매우 부럽던 차에 군산시청마저 경장동 시 외곽지역에 매머드 청사가 우뚝 세워지니 상대적으로 우리 익산시의 청사가 너무 초라하기 그지없다. 진즉부터 삼기면이니 모현동이니 하는 시청사 이전에 대한 말들이 나돌았는데 조만간 그 꿈이 이루어지고 시청사 이전이 익산시의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되었으면 한다.

□익산세무서

1934년 5월에 모현동에 이리세무소가 설치되었다. 62년 2월에는 김제세무서를 통합하여 운영하다가 65년 7월 다시 김제에 이관하였다. 87년 12월에 현 남중동 청사로 이주하였으며 95년 7월, 익산세무서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1999년 9월 다시 김제세무서를 통합하여 김제시까지 관할하게 되었다.

□익산 국토관리청

1949년 이리지방건설국으로 출발해 1962년 건설부 호남국토건설국을 거쳐 1975년 전라북도ㆍ전라남도 지방국토관리청으로 분리되었다가 1981년 이리지방국토관리청으로 통합되었다. 1994년 건설교통부 이리지방국토관리청으로 개편된 뒤 1996년 현재의 익산지방국토관리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국도의 건설과 유지관리, 하천 개수 및 관리, 지역개발사업 시행, 건설공사 품질관리 및 시설물 안전관리를 주요 임무로 하며,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북도 전역을 관할한다.

특히 서해안시대의 산업·무역·관광의 중심권으로 부상하고 있는 지역으로서, 2,790㎞의 관할 국도 가운데 2,744㎞가 포장되었고, 금강·섬진강ㆍ영산강 등 6개 수계 601㎞를 관리한다.

고속도로 3개 노선을 관리하며, 광주-목포, 군산-장항, 광양만권 등 3개 광역권 개발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군산·군장·광주첨단·대불·여천 등 국가산업단지, 광주권·전주권·여수권 등 개발제한구역을 관할한다.

기구에는 관리국(총무과·건설지원과·보상과), 도로시설국(도로계획과·도로공사과), 하천국(하천계획과·하천공사과), 건설관리실이 있으며, 산하에 광주·전주·남원·순천국도유지건설사무소가 있다. 전라북도 익산시 남중동 2가 352번지에 있다.

□전북전신전화건설국 : 1950년에 군산에 있던 전신전화건설국이 옮겨와서 이리전신전화국이라 칭하였다가 1978년에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전북지방 일원의 전신전화건설사업을 관장 수행한다.

□익산 전신 전화국 : 1975년 우체국에서 전신과 전화관계 업무를 분리하여 출범하였으며 익산시 관내의 전신전화에 관한 업무와 유지보수를 관장한다.

□이리공업고등학교 : 1940년 이리공립공업학교로 개교된 5년제 학교로 1946년에는 6년제 이리공립공업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51년에 동중과 분리되어 이리공업고등학교로 개명하였고 전북공대가 개교함으로써 세 학교 모두 한 울안에 공존하다가, 이리동중은 1952년에 현재의 이리고자리로 옮겨가고 이리공고는 1961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였다. 당시의 자리에는 전북공대만 남았다가 1973년에 전주로 이전하고 다음해에 전북기계공고가 설립되었다.

□이리고등학교 : 1951년에 이리공업중학교에서 분리된 이리동중학교가 1952년에 일제시대부터 공설운동장이었던 자리에 옮겨오게 되었고, 1955년에는 이리고등학교가 설립된다. 1990년 이리동중학교가 동산동으로 이주함에 따라 이리고등학교만 남게 되었다.

□이리동중학교 : 1951년 이리공업중학교가 이리공업고등학교와 이리동중으로 분리되었다. 다음해인 1952년에 신축교사(현 이리고 자리)로 이사하였다. 1990년 익산시의 도시확장에 따라 현재의 동산동 교사로 이주하였다.

□전북기계공업고등학교 : 전북공대가 전주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그대가로 설립되었다. 1975년에 개교할 때는 우리나라가 중진공업국이 되기 위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기 시작하였던 때 인만큼 공업고등학교도가 인기가 높은 때였지만 학비가 모두 면제되고 기숙사가 제공되는 이 특별한 국립 기계공고에는 전국에서 상위3%이내의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얼마나 어려운 시절이었으며 얼마나 비약적인 발전을 하던 시대인지 가름 할 수 있게 하는 아련한 기억이다.

□이리여자고등학교 : 1924년 이 지방에 설립된 최초의 여학교로 이리공립고등여학교로 출발하였으며 현 중앙초등학교남쪽에 위치하였으며 일본인만이 입학하는 학교였다. 1930년에 남중동으로 이사하였고 1946년에 이리공립여자중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51년에 학제변경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이리여자중학교 : 1924년 이 지방에 설립된 최초의 여학교로 이리공립고등여학교로 현 중앙초등학교남쪽에 개교하였으며 일본인만이 입학하는 학교였다. 1930년에 남중동으로 이사하였고 1951년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2000년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여 지원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2005년 8월 마동 익산교육청 뒤로 이사하였다.

□이리북초등학교 : 1970년에 북부시장이 설치되고 이지역이 발달함에 따라 개교되었다.

□서초등학교 : 이리역 폭발사고후 모현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주변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남성중ㆍ고자리로 이사한 남성여중ㆍ고 건물을 이용하여 1983년에 개교하였다.

□남창초등학교 : 1963년 개교하였다. 개교 당시 학교 뒷담에서 남성중ㆍ고까지는 밭이었다.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시민들의 문화체육공간으로 등장한 국민생활관

 

제24회 88서울올림픽대회의 성공을 후대에 영원히 전승·기념하고 온 국민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하여 시·도별로 1개소씩 신축하였으며 1991년에 개관하였다.

부대시설로는 체육관, 수영장, 헬스장, 소극장, 유아실, 에어로빅장, 예식장 등이 있으며 별관으로는 1978년에 개관되어 문화예술공연 공간으로 활용된 문화회관이 시청 앞에 있다. 지역사회의 체육활동을 중심으로 문화·예술 등 다목적 복합시설로 활용하여 시민들의 스포츠 생활화와 건전한 여가 선용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익산시 여성회관

1982년에 개관한 이리시 여성회관과 1991년에 개관한 익산군 여성회관이 1995년에 통합되었다. 전북기계공고 앞에 위치하고 있는 여성회관은 취미교양교육, 직업기술교육, 시민전산교육. 직장인 취미 교육 등을 담당하고 있으며 가정도우미 알선도 담당하고 있다.

□기독교이리방송국

1961년에 인화동 1가 2번지에서 개국한 기독교이리방송국은 1971년 5월부터 창인동 현재의 동서병원자리에 잠시 이주하였다가 1973년 옛 이리방송국 자리인 남중동 1가 시청 옆으로 이전하여 남중동 시대를 시작하였다. 1985년 11월에는 3층 지하 1층의 아담한 사옥을 신축하여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구축하였다.

이리방송국은 1938년 10월에 설립되어 주로 경성방송을 중계하였는데 호출부호가 HBFK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이리방송으로 개칭되고 호출부호도 HLKF로 변경되었는데 1959년 도청소재지인 전주로 이전하게 되었고 2년 뒤인 1961년에 기독교이리방송국이 개국되어 방송도시의 위상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이리방송은 1992년 10월에 전주에 스튜디오를 설치하고 1995년 9월 기독교전북방송으로 이름을 변경하더니 2002년 이후 이리청사는 완전히 비우고 전주로 송두리째 이전되고 말았다. 지역 언론기관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하며 지역발전에 이바지하였고 우리 익산시민들의 자부심이었던 기독교 방송국이 이제 또 다시 전라북도의 중심지인 전주로 소리 없이 옮겨가니 이리방송국의 이전(59), 전북농대의 이전(63), 전북공대의 이전(73)에 이어 또 하나의 마음 아픈 일을 맛보게 되었다. 기계시설과 녹음시설 등은 상징적으로 남겨놓아 마치 완전 이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눈가림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경비원만 남아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익산소방서 남중동파출소

□익산보훈지청

□남중동 사무소

북부시장 앞에 위치한 동사무소

 

□남중동 치안센터 : 중앙지구대 소속이다.

 

5. 종교기관

□불교 : 법성사

□기독교 : 남중교회, 신일교회, 화평교회, 동은교회, 이리제일교회, 예일교회, 본향교회, 아름다운교회, 신인교회, 영풍교회, 배산영문교회, 통일교회, 흰돌교회 등

□원불교 : 남중교당, 문화교당

 

6. 기타 공공기관 및 공원

□북부시장

아직도 살아 숨쉬는 전통 5일 장시를 볼 수 있는 재래시장

 

북부시장은 기실은 1975년에 개설된 상설시장이다. 그러나 1910년대부터 4일과 9일에 이곳 솜리에 일명 《솜리장》이 지금의 남부시장부근에서 열리기 시작한 이래 민초들의 삶만큼이나 끈질기게 그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기록애 의하면 1927년에 평소 장날이면 1천여 명이 모이고 대목장에는 1만여 명이 몰리는 큰 장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솜리장이 그처럼 번성한 것은 이 익산이 호남선과 전주-군산 간 철도가 교차함은 물론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4일과 9일에 열리는 장날에는 남중동의 북부시장에 인근 군산지역 상인들은 물론 전남 구례, 곡성과 충남 서천, 서산 등지에서 1천여 명의 상인이 몰려들어 시민들과 함께 어우러진다. 이곳에는 부지 6천6백여㎡에 건평 3천3백여㎡의 상설시장인 북부시장이 있으나 이 5일장이 열릴 때는 그 상설시장보다 5배 크기의 장이 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익산지역에는 아직도 황등, 함열, 여산, 금마에는 장시가 열리고 있으나 웬만한 중소도시만 해도 백화점과 대형마트에 밀려 정기시장이 소멸되고 있음에도 우리 익산의 북부시장에서는 장날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번영하고 있는 특이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소라단 공원

소라단의 체련장과 약수터

 

1970년대까지는 그저 남중동에서 영등이로 통하는 산이었고 전북기계공고 동편에서 영등리 쪽으로 가는 길의 좌우의 마을을 소라단이라 하였다. 이 소라단의 끝에는 도립 종축장이 있던 곳이었으나 종축장은 김제시 백산면으로 이주하고 그 자리에는 남성학원이 들어섰으나 익산시가 확대되면서 이제 산이 귀한 이 일대의 남은 산은 익산시의 중요한 공원이 되어주었다.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아침운동을 하거나 약수를 떠가기 위해 모여들고 있으며 면적은 265,000㎡(약 8천평)으로 영등동과 남중동에 걸쳐 있다. 종축장자리에는 현재 남성학원 산하 4개의 중ㆍ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7. 남중동 마을의 형성과 유래

□남바우(남암)

구이리(舊裡里)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마을이 모현동의 현내(슬내)와 남중동의 남바우다. 돌이 귀한 야지(野地)에 배산에서 뻗어 나온 구릉(丘陵)에 바위가 덧보여진 것과 북일면 남쪽이란 방향 때문에 남바우라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이 마을은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며 고려 때에는 왕씨(王氏)가 살았으나 조선 중엽에 이르러서는 정씨(丁氏)가 들어와 살면서 정씨 일촌이 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는 도시화가 되면서 정씨도 많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많은 타성바지 사람들이 이사 와서 살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뒷산인 배산에 옮겨진 것을 어떤 장수가 밤에 몰래 다시 옮겨 놨다 한다. 그 바위 때문에 남바위가 → 남바우라는 이름으로 변하였다 한다. 한자로는 남암(南巖)이라 쓰기도 한다.

남바우란 납작한(넓적한) 바우를 말하는 것으로 납작한 바우인 납바우가 변하여 남바우로 되었다. 또한 이 마을 뒷산 줄기가 옛날 방한용(防寒用)으로 쓰던 모자의 일종인 남바우와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작은 남바우 : 지금의 구 남파 오거리에서 이리여고방향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갓방뜰

역전 쪽으로 있던 마을이었다. 갓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의미로 갓방 + 뜰(터전)의 합성어이다. 다른 지방에서는 갓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갓방뜸 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곳은 과거 집의 옆 쪽으로 방을 달아내어 세를 놓은 방들이 많았기 때문에 갓방이 많은 곳이라는 뜻에서 갓방뜸(갓방뜰) 이라 했다고도 한다.

□장뜰

이리여고 서편 구릉지의 평탄한 곳을 말한다. 지형이 마치 소 잔등처럼 기다랗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긴(長) 들이라는 뜻의 장들이 비슷한 음인 장뜰로 불리워졌던 것이다. 오늘날 남창초등학교 일대로 보인다.

□황새골

기독교방송국자리 남쪽으로부터 전신전화건설국 쪽으로 난 골짜기를 말한다. 지금은 많은 집들이 들어섰지만 과거에는 골짜기로 항상 물이 고여 있어서 물고기들이 많이 서식하였다. 이렇게 많은 물고기가 있기 때문에 황새들이 언제나 날아와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황새들이 항상 모여들었기 때문에 황새골이라 하였다.

□벽돌막

남중동 파출소 앞에 형성된 주택가를 말한다. 도시가 팽창되기 전에는 이 구릉 지역에 이리시 주변에서는 가장 큰 빨간 벽돌 공장이 있어서 이리시의 건축공사장에 대부분 공급되었다. 이와 같이 벽돌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라단

남성고등학교 주위에 있었던 마을이다. 소라단이라는 말은 솔밭 안이라는 말에서 전음(轉音) 된 것이다. 과거에는 이곳 일대가 무성한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도 나주정씨 선산 부근에는 솔이 무성하여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솔밭 안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솔안→ 솔와단→ 소롸단→ 소라단으로 전음 되었다.

□제주샘(제주천)

지금은 막혔지만 과거 남바우에서 모현동 고현마을 쪽으로 건너가던 철도 건널목 근처에 있었다. 몽고가 고려를 침공하고 나서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목마장을 설치하였다. 그 이후부터 조선시대에도 제주도에서 말을 방목하여 길렀다. 제주도에서 말을 한양으로 진상할 때 말몰이꾼들이 이곳을 통과하게 되었다. 이 때 이 샘물을 말에게 먹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삼중(三重)농장자리 : 지금의 신광교회 자리이다.

□좌좌목(左左木) 농장자리 : 전 기독교방송자리 남쪽 포도원자리로 지금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우무골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어서 다른 지역에 비하여 물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즉 우무처럼 물이 많다고 해서 우무골 이라 하였다. 위치를 자세히 알 수 없다.

□탱자나무거리

옛날에는 울타리를 탱자나무로 많이 하였다. 즉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조성하였던 집들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위치는 자세히 알 수 없다.

 

8. 문화유적과 유물

□남중동 5층석탑

이리여고 교정의 작은 탑

 

현재 이리여자고등학교내에 소재한 탑이다. 원래 학교입구에 있었으나 현재는 교정을 공원화 하면서 교사의 맨 왼쪽 끝에 옮겨져 있다. 제작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옥개석의 선이 무디며 탑신부가 길어 균형미가 떨어지고 정형미도 갖추지 못해 예술적 가치는 부여하기 어려우나 작으면서 아담한 모습의 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