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문화원에서 발행한 익산향토지 제1권(2005)중 필자가 조사하여 정리한 부분입니다.
Ⅳ. 송학동(松鶴洞)
1. 송학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송학동은 익산시내의 최서부에 위치하며 위로는 모현동이 있고 동쪽으로는 익산역과 중앙동이 있다. 남쪽으로는 만경강까지 탁 트인 목천들과 평화동이요, 서쪽으로는 오산평야가 펼쳐지고 있으나 국도 23번에 꽉 막힌 형세이다. 마을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송학로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송학동과 모현동 양방향으로 모두 경사를 이룬다. 솜리의 변방에 위치한 관계로 발전이 늦었고 아직도 한국전력 익산전력소를 둘러싼 형태로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그 앞은 논농사를 짓고 있다. 학동과 학곤리로 이어지는 구릉지대에 약간의 야산이 버려진 듯 남아있다.
2. 송학동의 연혁
송학동 지역은 본래 조선왕조시대에는 전주부에 속한 서일면의 마을이었다가 1906년에는 익산군 서일면이 되었다. 이 지역은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학동(鶴洞)과 송만리(松萬里), 학곤리(鶴崑里) 망기리(望旗里) 점촌, 새터, 역굴재, 교촌 등을 싸잡아 일컫는 마을로 송만과 학동의 이름을 따서 송학리(松鶴里)라 하였는데 서일면이 남이면과 합하여 오산면이 됨에 따라 오산면에 속하게 되었다가 1947년에 이리시로 편입되고, 송학리가 1949년에는 송학동으로 되었다. 옛 송학리 마을 학동과 광양부락은 아직도 오산면에 속해 있다.
송학동의 배산로 사거리 부근
3. 송학동의 현황과 모습
익산시의 서부지역에 위치한 송학동은 과거에는 역전의 굴다리 너머 가난한 마을의 상징적 이미지를 가졌으나 이제는 익산 도심지를 중심으로 1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잇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도·농이 조화를 이루어가며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지역이 되었다. 송학동의 행정구역은 13통 65반으로 구성되어 있고 면적은 1,465㎢로 2,523세대에 7296명의 주민이 있으며 117농가에 호당 경지면적은 1.5ha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도시중심에서는 굴다리를 통해야만 갈 수 있는 오지 아닌 오지였기 때문에 학교라고는 송학초등학교가 고작이어서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아직도 전 송학동이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과 재정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송학동으로 통하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예전에 역전에서 통하는 길은 굴다리였으나 지금은 중앙교차로로 변하였으며 평화동에서 통하는 길은 길만 크게 확장되었을 뿐 여전히 그 옛 길이다. 남북로에서 전북제일고로 들어서는 길이 학곤로이다. 장차 학곤리까지 이어지게 되어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나 이화아파트에서 길이 막힌다. 하지만 2002년 들어 이 4차선이 완공되면서부터 송학동의 남쪽도 비로소 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학곤로 남쪽으로 대형 보석화이트 사우나와 새누리 교회 그리고 골프연습장이 들어섰고 송학동의 북쪽은 1987년에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칩칩한 굴다리대신 시원한 중앙교차로가 완공되고 4차선의 송학로가 확장되었으며 송학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송학동의 모습이 새로워지더니 이제 동서로 학곤로와 남북으로 고현로와 배산로가 펑펑 뚫려 송학동 동부지역의 외양은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송학초등학교 앞 교촌마을은 아직도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이다. 다만 길 건너 앞에 대규모의 송학천주교회가 들어서면서 마을의 외관이 훤하게 되었다. 송학동의 유일한 학교인 송학초등학교는 본래 학곤리에 있었다. 1962년에 이리상고를 잠시 빌려 수업하다 그 해 말에 정식으로 지금의 송학동 교사로 입주하였다.
송학천주교회 바로 뒷마을이 역골이다. 작년까지만 하여도 철로변에 다닥다닥 붙여서 지어진 보기 안쓰럽던 집들이 지금 막 헐리고 밀어서 길이 나고 포장을 하면서 몰라보게 변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지어진 동영아파트와 거북빌라가 있으나 20여 년 동안 변할 줄을 모르더니 이제야 변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 지역 주민인 양일영씨(55세)의 증언에 의하면 60년대까지만 하여도 역골 아랫쪽에는 역 안쪽에 열차에서 때고 난 석탄찌꺼기를 버리는 일명《가래밭탕》이 있어 송학동과 평화동 사람들이 이를 주어다가 연탄을 다시 찍거나 흙을 섞어 주먹탄을 만들어 땠다하니 그게 겨우 40여 년 전의 일인데 오늘날 우리가 이런 가난의 아픔의 역사를 벌써 모두들 너무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소비가 미덕인 시대라 하나 또다시 경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으나 그들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모두 모두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송학동 하면 그 옛날 굴다리가 생각난다. 이리역 광장의 남쪽을 지나 시작되는 굴다리는 원래 일제시대에 시내의 하수구로 건축되었으나 복개를 하여 인도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일제시대부터 1987까지 송학동 사람들이 날이면 날마다 시내로 통하던 그 굴다리는 추억도 많다. 시내 쪽 굴다리 입구에는 술을 파는 포장마차들과 오징어다리며 떡이며 붕어빵을 파는 좌판을 놓은 아주머니들이 열을 지어 앉아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초여름 초저녁 어둠이 시작될 즈음 붕어빵을 사서 봉투에 들고 굴다리에 들어서서 송학동까지 간 다음 다시 돌아오던 기억이 난다. 퀴퀴한 냄새와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 술에 취한 아저씨와 어둠속에서 가까워지는 여러 사람들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면서 그리고 떨어지는 물을 요리조리 용케도 피하면서 산책하던 그 어린말의 기억이 새롭다.
오늘날의 중앙교차로는 이제 그 퀴퀴한 굴다리가 아니다. 1987년에 새로 태어나 송학동 주민들에게 크나큰 즐거움을 선사한 중앙교차로는 길이가 450m에 2차선 7.4m의 차도와 차도 양쪽의 상단에 각각 2.5m의 인도가 있는 당시로는 국제수준의 최신공법인 파이프루프(piperoof)공법으로 건설되어 지상의 철도교통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움도 겸비한 자랑할 만한 지하도인 것이다.
중앙교차로의 야경
역전쪽에서 송학동으로 나가 입구를 나오면 시원한 송학로가 나타나고 좌우 도로변은 마치 번화가처럼 활기를 띤다. 이곳 송학 사거리는 북으로 송학동보다 먼저 개발된 모현동으로 향하며 다음의 큰 사거리로 등장한 송학현대 4거리는 북으로 배산으로 뚫려 이제 송학동이 결코 익산의 오지가 아님을 실감케 하고 있다.
송학동의 가장 오랜 대로인 평송길과 고현로 사이는 이제 골목길들이 모두 방죽목길로 이름 붙여져 마치 옛날부터 모두 방죽목으로 부르는 동네인양 되어버렸는데 이는 2004년에 이루어진 새주소 부여사업의 과정에서 찾기 쉽게 편의적으로 모든 골목길에 명명을 하게 된 데서 연유한 것으로 이처럼 마을이름이 인위적으로 붙여지거나 바꾸어지게 된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리라 여겨진다. 그 안에 오랫동안 송학동 사무소가 위치해 있고, 이제는 고현로와 배산로 사이가 눈에 띄게 변하고 있다. 이곳은 오른쪽이 송만마을이요, 왼편은 새터와 마루재로 나뉘는데 새터와 마루재사이에 1990년대 초에 송학현대아파트가 들어서고 마루재 아래에 이화아파트, 훼미리아파트가 지어졌으며 현재는 송만리의 안동네라 불리던 송만부락 앞에 예다음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어 발전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안동네에 가보면 옛 모습 그대로다. 다르다. 비록 길들은 뚫렸으나 지대가 높은 바우고개 부근과 송학사거리길 부근의 언덕배기에 놓인 대부분의 가옥들은 70년대 새마을사업당시의 모습으로 초라하다. 아직도 가난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도시서민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여 마음이 그리 좋지 않다.
방죽목 1길은 서수 가는 옛 길이다. 이곳에는 철도 넘어 유일한 모텔단지가 있어 우리를 조금 의아하게 여기게 하는데, 이젠 이곳도 경제가 어려워진 탓인지 사양길이라 한다. 이 길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송학동과 모현동으로 가르고 있다.
배산로 사거리의 리젠시빌 아파트 뒤편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건축자재백화점이 있어 오히려 이채롭다. 이곳이 바로 옛 국제전광사 자리라한다. 「전광사」라 하면 40대이상이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으리라 여겨지는 익산을 대표하던 기업으로 시계를 만들던 회사이다. 원래 60년대까지는 익산대 옆의 마동공원 부근에 있다가 70년대에 이 곳으로 이주하여 운영되다가 시계산업이 무너지면서 80년대에 없어진 기업이니 세월이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송학로를 따라 걷노라니 아무리 경제가 침체상태이며 이곳 송학동이 시민들에게 인기가 없는 곳이라 해도 그 모습이 처연하기까지 하다. 4차선의 대도로 변에 언덕배기 토담집하며 십년이 넘도록 방치되고 있는 공장건물이며 부지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놓여있다. 영등동과 부송동이 번쩍이는 신시가지를 조성하며 활기를 띠는 것과는 어쩌면 저리도 비교가 된단 말인가? 이웃 모현동에 예정된 대규모 임대아파트단지가 완성되면 이런 모습이 바뀔까? 이 도로의 끝은 23번 국도와 만나는 송학교차로이다. 23번국도가 마치 만리장성처럼 오산면과 경계를 지어주며 원광대 방향으로 장엄하게 늘어섰는데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곳은 익산시의 또 하나의 관문이 되고 있다.
점촌마을은 옛날부터 이 마을에서 질그릇을 굽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평화동에 기와골이 있었고 이곳은 질그릇을 굽는 가마들이 있고 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던 것이다. 6ㆍ25동란이후 이곳에는 피난민들이 많이 들어와 살아서 피난민촌이라고도 불리었는데 70년대까지만 해도 질그릇을 구웠다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 마을에 저 유명한 한국전력 익산전력소가 있다. 그 옛날에 일명 「변전소」라 불리던 곳으로 구 이리시에 변변한 공장하나 기관하나 없던 시절에 이곳 변전소는 우리 눈에 는 정말 대단한 곳으로 비치곤 했다. 그 변전소가 아직도 변함이 없는 채 잠자고 있는 이곳 송학동 시골마을에 소리 없이 숨죽이며 자리하고 있다.
점촌을 지나 내려가 보면 망기부락이 나온다. 과거부터 송학동 사무소길을 따라 학곤리를 가자면 만나는 마을이며 꽤나 큰 마을이다. 이 마을 앞에는 광대한 자리를 차지하며 우리 익산이 자랑으로 여기던 옛 「호남 작물시험장」이 이제는「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 호남농업연구소」로 간판을 바꿔달았으나 아직도 그 위용을 잃지 않고 있다. 이곳은 일제시대 일본의 경제수탈인 쌀 증산계획이 한창이던 1930년에 문을 연 이래 1965년 이후에는 농촌진흥원 호남작물시험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2004년에 지금의 생소한 이름으로 바뀌어졌다.
과거 이리시민들은 자방차치가 시행되기 전까지는 ?작물시험장장이 국토관리청장과 함께 시장보다도 직급이 더 높다더라?하는 말을 하곤 했는데 확인해보지는 못한 말이며 혹은 맞는 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당시에 우리 서민들이 공무원들을 얼마나 높은 사람으로 우러러 보았길래 일반 시민들이나 대학생들까지도 그런 얘기들을 상식으로 주고받으며 상당한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나하는 생각이 미치는데,
?그럼, 지금은 어떤데? 대학을 나와 9급 공무원 하나 되려면 170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하는 시대인데 그럼 이사관이 높은 지위가 아니란 말인가??
하고 자문해 보니 이 물음에 반박할 자신이 없다.
망기부락 뒤쪽에는 20여 년 전에 새로운 마을이 하나 들어섰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가 나고 모현주공 아파트를 지어 재해민들이 입주하기도 하였지만 일부사람들은 이곳에 마을이 만들어져 입주하였다고 마을 골목길에서 채소를 다듬던 6,70대 할머니들이 증언하여 주신다. 이 마을이 바로 신영마을이다. 어둡고 지친 삶을 살던 사람들이 폭발사고를 당하여 이곳으로 이주함에 있어 이제 새로운 발전을 기원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학동마을이 그 옆에 있다. 무왕로 안쪽이어서 마땅히 시내일 것 같은 마을이지만 아직도 오산면에 속해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그저 학동1길과 학동 2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주하고 난 집터엔 무너진 집을 치우지 못한 채 방치도어 있어 보기에 흉하기 그지없으니 언제나 시 당국에서는 이런 폐가들을 말끔히 치워주는 제2의 새마을 사업을 벌이게 될까? 장차 10년만 지나면 시골에는 그나마 마을을 지키시던 노인들마저 세상을 떠나시게 되고 마을은 텅텅 비게 될 텐데 과연 미리미리 자치단체가 챙겨서 도시로 가버린 이주자들이 떠나고 내버리거나, 십수 년씩 방치한 흉가들을 치우고 말끔히 남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아름다운 환경을 제공해주는 대민 서비스를 하게 되는 것일까? 이 마을에 아직도 공동묘지의 흔적이 있어 음습하나 소나무 숲이 간간이 남아있어 아름다웠던 옛 경치를 말해주는 듯도 하다.
학동길 따라 가면 학곤리로 내려갈 수 있다. 50년대까지만 하여도 송학초등학교가 있고 100여 호가 넘던 큰 마을이며 농업이 산업의 중심일 때 저 앞의 넓디넓은 목천들과 오산평야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을 때와는 달리 시골 산촌마을 모습으로 남아있으며, 동네 입구에 임대아파트를 지으려다 지하만 파다말고 사업이 중단되어 깊은 방죽이 되어 위험하게 방치되고 있는 모습은 바로 이 마을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익산시내에서 상대적으로 낙후된 서부권 택지개발사업이 2005년 11월에 결정되었다. 송학지구 국민임대주택단지 조성사업이 금년 안에 곧바로 시작되면 3만 2,340㎡가 개발되어 700가구의 임대주택을 짓게 된다. 송학동은 모현동의 개발계획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낡은 주택이 밀집해 낙후됐던 모현동, 송학동과 오산면 일대 등 서부권이 개발되면 익산시의 균형발전에도 큰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주요 관공서와 가볼만한 곳은 다음과 같다.
4. 관공서 및 교육기관
□송학동 사무소
송학동 사무소 부근 모습
□송학동 우체국
□송학초등학교
1949년 현재의 학곤리 김춘수씨 소유농장이 창고를 개조하여 개교하였다. 1962년에는 잠시 이리상고건물을 이용하여 운영되다가 그 해 말에 현재의 교사가 완공되어 입주하였으며 오산초등학교와 고현초등학교 다니던 학생들이 일부 흡수되었다. 학곤리 교사터는 일부는 민가가 들어서고 일부는 창고로 이용되고 있다.
□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 호남농업연구소
일제하인 1930년 농사시험장 남선지장으로 설치되었으며, 1945년 중앙농업기술원 이리육종지원, 1957년엔 농사원 농사시험장 이리지장, 1963년에는 농촌진흥청 수도육종연구소, 1965년엔 우리의 귀에 익숙한 농촌진흥청 호남작물시험장이 되었으며, 1997년에는 농촌진흥청 호남농업시험장이 되었고, 2004년에 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 호남농업연구소가 되어서 아직은 생소한 이름이 되었다. 75년의 역사를 가진 호남농업연구소는 한국이 농업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니 쌀, 쌀보리 등을 중심으로 10개 작물에 117개 품종을 개발하였다. 특히 호남평야이 중심인 익산에서 개발된 벼 품종들은 그동안 우리나라 식량의 자급달성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으나 이제 WTO시대를 맞이하여 쌀의 완전 개방이 임박하였고 식생활의 변화로 쌀의 소비량이 급감함에 따라 금년가을에 쌀 한가마니가 시장에서 13만원에 거래되어 농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쌀 시장 전면 개방을 10년간 미루는 대신 의무 수입량을 늘려나간다는 쌀 협상 결과에 대한 국회 비준안 동의가 국회에서 통과가 될 우려가 커서 농민들이 투쟁하고는 있으나 과연 세계화의 추세를 언제까지나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한국전력 익산 전력소
예전엔 그저 변전소라고 불리던 곳이다
5. 종교기관
□천주교 : 송학동성당
□기독교 : 선민교회, 은성교회, 영광교회, 주님의 교회, 익산한사랑교회, 새누 리교회, 서문교회, 송덕교회, 영복교회, 참빛교회, 익산중앙교회 등.
□원불교 : 서이리교당
6. 송학동 마을의 형성과 유래
□송만리(松萬里)
송학동의 오랜 중심마을이다. 옛날 인가가 별로 없을 때 소나무가 많아서, 또는 용마(龍馬)가 나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하지만 개발되기 전인 1910년대만 해도 아주 한산한 속마을 이었다. 잡초와 나무들로 둘러싸인 “속마을”이 자음 접변하여 <속마을→송말>이 되고 거기에 리(里)가 붙어 송말리가 되었다가 한자음 표기로 바꾸면서 송만리(松萬里)라 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현재 송학초등학교 뒷마을이다. 이 마을은 세분하여 안동네, 마루재, 새터로 나누어 졌다.
□학곤리(鶴崑里)
200여 년 전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산 속에 집을 짓고 살았던 외딴집이었다고 할 정도로 한가롭고 구석진 곳이었다. 야산이었기 때문에 소나무가 많아서 학(鶴)이며 꿩등 야생조류가 서식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우거진 소나무숲에 깃드는 길조는 학이라 새의 대표로 꼽는 학(鶴)자를 따고, 마을 이름은 흔히 두자로 되기에 우리에게 친숙한 꿩을 따서 “학꿩리”라 했지만 어감이 좋지 않아 발음하기 쉬운 소리로 변하여 학곤리(鶴崑里)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풍수설에는 학의 형국이라 한다. 일제 강점기에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949년에 이 마을 입구에 송학초등학교가 개교하였으며 1962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사한 이후 지금은 학교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이 민가가 들어서 있다. 100호가 넘던 이 마을은 동아시, 서아시, 남아시, 북아시로 나뉘는데 예를 들면 ?동아시?란 말은 전라도 지방에서 흔히 쓰는 말로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망기리(望旗里)
오산들판에 낮은 섬 모양으로 낮으막하게 솟아 나온 지형으로 이웃 학곤리에서 옮겨와 마을을 이루었다. 망기란 지명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지만 개화기 이후에 전국적으로 세부 토지측량 때 다른 곳보다 좀 높기에 여기다 측량기준이 되는 푯대를 세우고 여기를 기준 삼아 측량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생각된다. 망기때라고도 부른다. 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 호남농업연구소가 이마을에 있다.
□점촌(店村)
옛날부터 이 마을에서 질그릇을 굽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점촌이라는 지명은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지명이다. 변전소가 있는 마을이다.
□새터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으로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이다. 흔히 새로 생긴 마을은 신기촌, 신흥리, 새말, 신촌 등으로 불리웠다. 현재 송학현대아파트 위쪽마을이다.
□마루재
새터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낮은 구릉지대에 형성된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송학현대아파트 아래쪽마을이다.
□역굴재(역골)
이리역이 들어서고 호남선과 전라선 군산선 철로 밑에 지하도(地下道)를 내서 자동차며 사람들의 통행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지하도 서쪽방면에 형성된 마을을 역굴재라 하였다. 역촌재라고도 부른다.
□교촌(校村)
송학초등학교가 있는 마을이다. 해방 후인 1949년 이 지역에 갑자기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서 학곤리에 있던 송학초등학교를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학교가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교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래 군현의 소재지에 향교가 있는 마을을 보통 교동이라 하였다. 즉 향교가 있는 마을에 붙여지는 지명인데 이곳은 초등학교가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니 재미있는 일이며 양반들이 모여 사는 곳인 향교마을을 교동이라 부르는 것을 감히(?) 따르지 못하고 그저 교촌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방죽목
과거에는 농사를 짓기 위하여 작은 규모의 수리시설로 논 가장자리에 웅덩이를 팠다. 가장 작은 규모를 둠벙이라 하고 조금 큰 규모를 방죽이라 하였다. 동네 앞 논에 방죽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송학동 중앙교차로 입구 부근 위에 익산차량사무소가 있는데 그 뒤편에 있던 방죽이며 그래서 중앙교차로 앞동네를 방죽목이라 하였다.
□학동(鶴洞)
학동은 지형이 학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숲이 많았기에 학이 많이 날아와 붙여진 이름으로 볼 수도 있다. 무왕로 동쪽에 있어 송학동에 연결되어 있으나 행정구역은 아직도 오산면에 속한다.
7. 문화유적과 유물
□송학동 굴다리
지금은 막힌 옛 굴다리 입구
지금이야 서울 뿐 아니라 우리 익산에도 고가철교며 고가다리 그리고 고가건널목 등이 수없이 많지만은, 20여 년 전 만하여도 우리 이리시에는 오직 유일한 시멘트 지하도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송학동 굴다리이다. 이리역광장의 남쪽을 지나 시작되는 굴다리는 원래 일제시대에 시내의 하수구로 건축되었으나 복개를 하여 인도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일제시대부터 1987까지 송학동 사람들이 날이면 날마다 시내로 통하던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중진국으로 지나 이제 막 가난을 벗어나던 때인 구 굴다리의 북쪽으로 1987년에 건설된 중앙교차로는 길이가 450m에 2차선 7.4m의 차도와 차도 양쪽의 상단에 각각 2.5m의 인도가 있는 당시로는 국제수준의 최신공법인 파이프루프(piperoof)공법으로 건설되어 지상의 철도교통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도 자동차가 왕래하게 되어 송학동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다. 또한 아름다움도 겸비한 자랑할 만한 지하도이다. 새로운 중앙교차로의 벽에는 머릿돌이 새겨져 있고 이런 글이 씌어져 있다.
-일제가 이리역 동부 영정통을 중심으로 신시가지를 조성할 때 이리시의 발상지인 속리(모현동)와 격리시킨 셈이지만 이 지역의 주민들은 송학동 굴다리의 악취를 견디면서도 하루 수 만 명이 통행하였고 끝내 두더지처럼 지하도를 뚫어내어 시민의 기상과 맥이 통하게 되었다- 지하도의 역사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주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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