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문화원에서 발행한 익산향토지 제3권(2007)중 필자가 조사하여 정리한 부분입니다.
제3편 영등1동
제1장 영등1동의 연혁과 현황
제1절 영등1동의 연혁
□남일면(중앙동, 창인동, 갈산동, 주현동, 인화동, 평화동, 마동, 동산동, 목천동 등 구이리시 [1928년 북일면 현황도]
중심부 지역)
□남이면(오산면 남부지역으로 남전리, 신지리 일대)
□동일면(신흥동, 금강동, 석탄동, 춘포리 일대)
□서일면(오산면 북부지역으로 오산리, 송학리, 장신리, 영만리 일대)
□북일면(구 이리시 북부지역으로 남중동, 모현동, 신동, 영등동 일대)
1914년에 부 ․ 군 ․ 현의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2월에 남일면과 동일면이 합하여 익산면이 되고, 남이면과 서일면이 합하여 오산면이 되었으나, 북일면은 그대로 북일면이 되었다. 그리고 3월에는 용안군, 함열군, 여산군이 익산군으로 통합되게 된다. 1917년에 간행된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 新舊對照 朝鮮全圖府郡面里洞名稱一覽》을 보면 당시의 북일면은 모두 9개리로 이루어졌는데 그 지역은 다음과 같다.
1. 어양리 : 양지리, 어곶리, 궁동, 신양리, 용비리, 송정리 각 일부
2. 영등리 : 동영등리, 서영등리, 신성리, 약촌, 청복리, 궁동, 송내동 각 일부
3. 남중리 : 송내동, 장교동, 남중리, 후신리 각 일부
4. 신 리 : 소영등리, 송내동, 신리, 모인리 각 일부
5. 현영리 : 서두리, 동산리, 현영리, 내장리, 상시리, 만석리 각 일부
6. 만석리 : 만석리, 하시리, 상시리 각 일부
7. 모인리 : 도교리, 외장리, 수곡리, 모인리, 신리 각 일부
8. 고현리 : 항가리, 묵동, 요동, 고현리, 동문리, 옥호리, 매교리, 수곡리, 남중리, 남당리, 학곤리 각 일부
9. 신룡리 : 신곶리, 내곶리, 계룡리, 오룡리, 석상리, 석하리, 현영리, 신리, 모인리 각 일부
그러나 익산군의 군청 소재지인 익산면은 이미 1916년 3월에 북일면으로부터 남중리와 고현리를 편입시키고 1917년에는 지정면(중심면)이 되면서 9월에는 거리가 먼 석탄리와 대장촌리는 분리하여 춘포면에, 신흥리와 금강리는 북일면에, 목천리는 오산면에 각각 편입시켰다. 따라서 남중리와 고현리는 일찍이 90여년 전에 이미 익산면에 속하게 되어 1931년에 익산면이 이리읍이 되면서 1933년 12월 1일 정제(町制)시행으로 남중정과 고현정이 되고, 1947년 이리부로 승격함에 따라 남중동과 고현동이 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북일면은 어양리, 영등리, 신리, 현영리, 만석리, 모인리, 신룡리, 금강리, 신흥리로 유지되다가 1947년 11월에는 모인리가 고현동에 합병되었다. 그러다가 원광대학교가 소재하여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 북일면 전 지역이 대통령령 제 7161호(1974년. 5. 25일 공포)에 의해 1974년 7월 1일에 이리시에 편입됨에 따라 북일면은 시지역이 되고 북일동이 되었다. 이때 각 리의 명칭이 법정동이 되고 금강동과 신흥동은 행정동 신흥동이 되고, 신동, 영등동, 어양동의 3개 법정동을 행정동으로는 북일동이라 하고 만석동, 현영동, 신용동 등의 3개동을 합하여 행정동으로는 계문동이라 하였다가 그 후 이리시 조례 1238호(1989.12.22공포)에 의해 1990년 1월 1일 북일동이 영등동과 어양동만 북일동으로 하고 신동은 독립하여 분동되었다.
1996년 7월 10일에는 익산시 조례 제204호(1996년.6.29일 공포)에 의해 급격히 인구가 늘어난 북일동을 영등동과 어양동으로 분동하였다. 1998년 2월 2일에는 익산시 조례 251호(1997. 10. 20공포)로 영등동, 어양동을 관할구역 조정으로 산업도로 북쪽을 어양동, 남쪽을 영등동으로 행정운영동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9일에는 구조조정에 따른 통폐합이 이루어져 영등동과 어양동을 통합하여 행정동 명을 영등동으로 하고 계문동과 신동을 통합하여 행정동 명을 신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2003년 3월 1일에는 익산시 조례 662호(2003. 2. 4공포)로 영등동을 관할구역 조정으로 산업도로 남쪽일원을 영등1동, 산업도로 북쪽 일원을 영등2동, 어양동 일원을 어양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등1동 지역은 1914년경에는 북일면의 영등리로서 동쪽으로는 동영등리, 서쪽으로는 서영등리와 송내동, 남쪽으로는 약촌과 청복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제2절 영등1동의 자연환경
익산은 전라북도의 북서부에 위치하며 동부는 완주군과, 남부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시와, 서부는 군산시와, 북부는 금강을 경계로 하여 충남의 부여군 및 논산시과 접하고 있다. 지세는 동부지역은 험준한 천호산이 가로막고 있으며 서부는 금강이 흐르고, 남부는 용화산과 미륵산에서 그 지류가 발원하고 있는 만경강상류의 준평원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지질구조를 보면 동부산간지대는 선캄브리아기의 화강암질 편마암이나 편마암으로 구성된 변성복합체, 화산암류 등의 풍화에 강한 암석들이 분포하는데 반하여 산간의 분지와 서부평야지대 등의 기반암은 대부분 풍화되기 쉬운 중생대 쥬라기의 화강암 화강암류로 이루어져 있다.
익산의 동쪽인 여산과 금마일원은 노령산맥의 줄기가 뻗어 있어 비교적 산지로 구성되어 있지만 서쪽은 용안에서 성당면, 함라면, 서수면을 지나 임피면, 개정면, 옥산면으로 이어지는 함라산(241m)줄기와 몇 개의 대표적인 구릉지를 제외하면 해발 30m이하의 낮은 구릉과 비옥한 평야가 펼쳐지고 있는 곳이다.
익산시 중심부의 전체적인 지형으로는 미륵산에서 남서부로 내린 지맥이 만경강 본류와 탑천 유역, 그리고 송학동 및 오산리와 영만리의 해발 10 ~ 30m 구릉지를 제외한 지역이 충적토로 형성된 저지대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구릉지로는 배산(98m), 장자산(45.8m), 수도산(40m), 고봉산(45m), 팔봉산(68m), 지네산(67.8m)등을 제외하면 대체로 해발 30m이하로서 풍화층이 두텁고 토양은 적색을 띤다.
영등동 일대의 지형을 보면 동으로는 노령산맥의 줄기가 흘러 여산면, 왕궁면, 낭산면, 금마면을 스쳐 지나고 있으며 북으로는 금강이 서쪽을 끼고 돌며 비옥하고 평탄한 해발 30m 이하의 평야지역을 이루고 있다. 북쪽의 모습을 보면 임상동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을 흐르는 사수(만경강)의 탑천이 허리다리(요교)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기양천이 삼기면의 기산리까지 뻗어나가고 남으로는 팔봉천(망동천)이 금마면의 미륵초등학교 앞까지 뻗어나가 있는데 임상동과는 팔봉천을 경계로 한다. 이곳 평야는 충적평야인데 동부산간지대의 풍하산물이 만경강에 의하여 운반되어 쌓
인 제4기의 충적층으로 되어 있다.
이곳 평야는 충적평야인데 동부산간지대의 풍화산물이 만경강에 의하여 운반되어 쌓인 제4기의 충적층으로 되어 있다.
[1985년경의 삼성 ․ 영등 ․ 어양동 일대]
현재의 영등2동 일대는 북동쪽의 미륵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의 줄기를 따라 낮은 구릉이 형성되어 있고 구릉의 하단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는 저습지가 펼쳐져 있다.이런 지형조건으로 구릉부에는 소규모의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은 밭으로 개간되어 경작물이 재배되고 있어 경작지 조성을 위하여 상당량의 절토작업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영등2동의 남쪽으로 구 이리시와 연결되어 있는 영등1동지역은 1970년대의 야산개발사업으로 거의 대부분 밭으로 개간이 이루어졌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먼저 영등1동 지역이 도시화되어 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서고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가 시작되면서 영등2동마저 급속히 개발되어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영등1동은 소라공원으로부터 시작되는 구릉지대가 남쪽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소라공원은 남중동과 이분되어 있다. 영등로 오른편은 논과 밭이 있고 저수지가 있어 지대가 낮으나 소라단의 남성고길에서 계속 이어지는 구릉의 등성이는 복받음길을 따라 전북기계공고 오른편을 거쳐 익산대학으로 이어지고 익산대학 뒷길과 멀리는 동성길을 따라 남부시장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등성이를 경계로 영등1동과 남중동, 마동과 남중동이 구분되고 주현동과 갈산동이 구분된다.
한편 동부시장 사거리 부근은 상당히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하는데 이곳에서 외환은행 사거리까지 이르는 지대는 해발 40m에 이른다. 영등1동과 마동과 신흥동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고봉산이 해발 45m이기 때문이다.
영등동은 20세기 이후 역사적으로 익산군 북일면 소속이었던 시골지역이었다가 1974년 이리시에 편입되어 비로소 시 지역이 된 곳이다. 따라서 그 범위가 비교적 넓은데다가 1980년대 이후 영등동 개발 아래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하여 2003년에는 산업도로를 기준으로 1동과 2동으로 분동되었다. 영등(永登)이라는 말은 한자의 새김과 음을 따가지고 지은 이름으로서 〈길다란 구릉으로 이루어진 나지막한 잿마을〉이라는 뜻이다. 영(永)은 ?길다?라는 뜻이고 등(登)의 원 뜻은 오른다는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음을 취하여 ?등허리?를 뜻하는 말이니 ?길다란 등성이?라는 뜻으로 시의 변두리인 영등리의 지형이 낮은 구릉이 길게 뻗어있는 곳에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뜻으로 생겨난 명칭으로 보인다.
영등1동의 위치를 살펴보면 북으로는 무왕1로를 중심으로 영등2동과 분동되었고
남으로는 신흥동 및 마동이 있다. 동으로는 어양동이, 서로는 남중동과 신동이 있다. 영등1동의 모양은 영등동을 인위적으로 분동하였으므로 거의 남북으로 직사각형 모양이 되었다. 영등1동은 면적은 비록 좁은 편이나 가장 크게 개발된 지역이기에 인구는 29개 읍 ․ 면 ․ 동지역 중 삼성동 다음으로 많다.
제3절 영등1동의 현황과 모습
1. 행정구역 및 인구
행정구역 |
가구수 |
인구수 | |||||
법정동 |
통 |
반 |
아파트 |
계 |
남 |
여 | |
1 |
42 |
185 |
19 |
9,280 |
31,226 |
15,514 |
15,712 |
2. 면적 및 토지이용 현황
㎢
계 |
밭 |
논 |
임야 |
대지 |
기타 |
1.62 |
0.03 |
0.02 |
0.041 |
0.699 |
0.48 |
3. 주요 기관 및 시설
공공기관 |
금융기관 |
학교 |
병ㆍ의원 |
종교기관 |
경노당 |
복지시설 |
9 |
8 |
5 |
27 |
42 |
16 |
0 |
4. 자연마을별 인구현황
마 을 명 |
세 대 수 |
상 주 인 구 |
비 고 |
송 내 |
206 |
463 |
|
청 복 |
151 |
363 |
|
약 촌 |
206 |
423 |
|
계 |
563 |
1,249 |
|
5. 영등1동 지역의 모습
1974년 7월 1일에 북일면이 이리시에 편입됨에 따라 북일면은 시지역이 되고 북일동이 되었다. 이때 각 리의 명칭이 법정동이 되고 신동, 영등동, 어양동의 3개 법정동을 행정동으로는 북일동이라 하여 비로소 영등동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인구의 집중으로 2003년 3월1일 관할구역 조정이 이루어지고 영등동이 분할되어 영등1동이 태어났다. 이제 원래는 영등동이었던 지역이 두 개의 동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무왕1로 남쪽은 1동이 되고 늦게 개발한 북쪽은 2동이 되었다.
영등은 서영등이나 곡영등, 동영등 등의 마을 뒤 구릉이 모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긴 등성이라는 뜻의 긴등을 영등으로 표기한 것이니 지금도 자연마을로 남아있는 동영과 곡영 그리고 신성마을을 지나서 남성중고와 소라단을 연결하면 긴 등성이가 되며 이는 전북기계공고 오른편의 복받음길을 따라 이어지고 익산대학 외편의 구슬목고개길을 지나 중앙로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영등동의 발전은 제1산업단지의 조성에서 비롯되었다. 1974년에 조성된 제1산업단지는 대부분 신흥동에 속하지만 어양동에도 여러 공장이 입주하게 되고 이때 이리에서 버스를 타고 금마로 나가는 길에 선화로가 개통되면서 영등1동과 어양동이 개발되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때 4차선의 금마로 나가는 주도로인 선화로가 단장되었고 외환은행 사거리에는 현재 익산세관과 익산공단우체국, 익산이동출입국관리소가 들어있는 건물이 수출자유지역의 본부가 되었으며 영등1동에는 2만여 평의 귀금속 단지가 조성되었다. 1976년부터 업체들이 입주하여 가동되면서 자연마을이었던 청복마을은 귀금속단지 업체의 근로자들이 몰려들어 인구가 급증하고 1988년 전성시대에는 무려 3500여명의 종업원이 근무하여 이 일대가 직원들을 위한 아파트가 들어서고 크게 융성하였으나 지금은 800여명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귀금속보석판매센터도 지금까지 개발이 안 되고 있는 이 마을이나 좁은 보석1로에 있기 보다는 하루빨리 2002년에 개장한 왕궁면 동룡리의 보석 테마 관광지에 귀금속보석판매센터를 신축 이전하고 장차 귀금속 가공업체까지 이전시켜 보석 집적화 단지를 조성하는 계획이 실현되어야 한다.
이제 청복마을은 삼성아파트, 청아아파트, 수정아파트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나 귀금속단지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직도 청복마을은 옛 모습을 상당히 유지하고 있어 도심속에서 시골마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사람들은 개발을 원하고 있을 터이나 공단 옆인데다가 새롭게 발전하는 지역이 아니라서 아파트를 건설해도 인기가 없을 것이기에 이 지역의 개발은 그리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1980년대 말에는 배산로 이북은 오직 성모병원과 동양제과공장건물만이 눈에 들어올 뿐 현재의 영등로 길을 따라 끝없이 넓은 논이 펼쳐지고 제과공장 북으로는 그저 밭과 과수원과 야산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동부시장건물은 지난 91년 대형화재 발생 이후 안전진단 결과 시장건물이 철거되고 재건축이 부실해지면서 현재는 빈터로 남아 있는 형편이지만 이미 90년대 말에 동부상설시장을 지어 운영되고 [동부시장 오거리] 있고 경제발전에 따른 국민소득의 증가로 인하여 소비가 증가되었기 때문인지 동부시장 5거리에서 성모병원까지의 영동로 상가가 상당히 번창하고 있다. 익산시에서는 가장 유명한 해장국집인 《별미집》같은 식당은 이 동네의 큰 자랑이다. 더구나 이제 대형마트들이 3개나 등장하여 젊은 세대들이 재래시장을 멀리하는 정서인데다 롯데마트나 홈 플러스가 가까워서 설령 동부시장이 다시 건립된다 해도 기대에 미치기는 힘이 들 것으로 예측된다.
배산로 이북의 개발은 90년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전에는 이미 1980년에 김제로 이전한 옛 전라북도종축장 자리에 남성학원이 들어섰고 80년에 준공된 성모병원과 83년에 준공되어 가동하기 시작한 동양제과 제3공장만이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80대 말부터 이곳 배산로 이북의 영등동 일대가 서서히 개발이 시작되었다. 익산시의 쓰레기를 해결하기 위해 70년대 말부터 매립했던 약촌방죽 자리에 거대한 두 아파트가 개발된다. 방죽자리 부근이 먼저 택지가 조성되어 88년과 89년에 개인주택들이 들어서더니 1992년에는 신일아파트와 동신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영등동의 아파트 건설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전에는 소위 맨션이라고 불리는 32평 이상의 아파트로는 80년대 초에 입주한 전원맨션에 이어 남성맨션, 동북맨션, 모현현대, 영등현대, 동산우성아파트 정도였으나 이제 90년대 들어 이곳 영등동에 건설된 신일과 동신아파트를 시작으로 영등동과 어양동에는 끝없이 맨션아파트들이 건설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마 이때부터 서민들의 꿈은 32평 맨션에 입주하는 것이 되었는데 요즈음은 더 넓고 더 품격이 있는 고급자재로 지어진 40평대 이상 50평, 60평대 아파트로 옮기는 것이 서민들의 이상이요 꿈이 된 듯 너도나도 이사하려 애를 쓰는 것을 보노라면 말로는 ?경제가 안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들을 하지만 그렇게 경제가 안 좋은 것만은 아닌 듯 하다.
소라단 기슭에 있는 마을인 송내마을은 많이 변하고 있으나 아직도 논과 밭이 남아있어 자연마을은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마을 뒤편으로는 여러 교회와 식당들이 들어서면서 크게 변하고 있다.
신일아파트와 동신아파트의 입주에 이어 다시 한번 영등동을 발전시킨 계기가 된 사건은 영등제일아파트의 건설이다. 1995년에 입주한 영등 제일아파트 앞을 지나는 희망로는 번화가가 되고 일대는 많은 식당과 술집들이 들어서면서 크게 활기를 띠게 되고 동산동의 고봉로 지역
을 능가하는 익산 최고의 식당가가 된 것이다. [약촌 오거리]
논이었던 곳에 비사벌아파트가 들어서고 옛 군부대자리에는 한라아파트가 들어서는
이렇게 개발된 영등1동은 90년대 말까지 익산시 최고의 신개발지역으로 각광을 받고 선망의 지역이 되었다. 인구가 3만 명이 넘어 법정동 하나인 단일동으로는 부송동과 함께 가장 인구가 많은 [영등제일 1차 앞 번화가] 동이 되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무왕로 이북지역이 개발되고 택지가 분양되면서 새로운 21세기에는 그 영화를 영등2동으로 넘겨주게 되었다.
제4절 영등1동의 주요기관
1. 행정기관
(1)영등1동 사무소
1996년 7월 10일에는 익산시 조례 제204호(1996.6.29 공포)에 의해 급격히 인구가 늘어난 북일동을 영등동과 어양동으로 분동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행정동 영등동이 탄생하여 동사무소를 두게 되었다. 1998년 2월 2일에는 익산시 조례 251호(1997.10.20 공포)로 영등동, 어양동을 관할구역 조정으로 산업도로 북쪽을 어양동, 남쪽을 영등동으로 행정운영동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9일에는 구조조정에 따른 통폐합이 이루어져 영등동과 어양동을 통합하여 행정동 명을 영등동으로 함에 따라 행정동 어양동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2003년 3월 1일에는 폭발적인 인구증가에 따라 익산시 조례 662호(2003. 2. 4공포)로 영등동을 관할구역 조정으로 산업도로 남쪽일원을 영등1동, 산업도로 북쪽 일원을 영등2동, 어양동 일원을 어양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고 행정동 영등1동이 탄생하게 되었다.
영등동이 분동되었음에도 영등1동은 현재 9280세대에 총인구가 31,226명(남자15,514명, 여자 15,712)으로 익산시 29개 읍ㆍ면ㆍ동 중 인구가 두 번째인 큰 동이다. 영등1동은 이리역 폭발사고 후 80년대 초부터 신동, 무왕로 남쪽의 어양동과 함께 가장 먼저 발달한 지역이며 이후 2000년대 들어서야 부송동과 영등2동 지역이 발전하게 된다. 영등1동은 남북으로는 영등로, 동서로는 배산로가 간선도로이며 성모병원사거리가 그 중심지이다. 42개통 185반으로 조직되어 있고 자연마을은 송내, 청복, 약촌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 모습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다. 2003년 3월 1일 영등동이 분동된 후 동사무소는 약촌 오거리에 있던 사무소(현 익산시 자원봉사종합센터)에서 그해 12월 영등초등학교 앞 영등동 303-35번지에 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고 현재 14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구 영등동 청사] [신 영등1동 청사]
(2)익산세관
관세청 소속의 익산세관은 2006년 1월 2일에 설치되었으며 현재 외환은행 사거리에 익산공단우체국, 익산이동출입국관리소와 함께 같은 건물에 들어있다. 공업단지에 있는 회사들의 통관을 지원(수입통관, 수출통관, 보세구역관리, 보세화물관리)하고 납세심사(납세자 신고, 관세환급, 관세징수, 밀수단속)등을 담당한다.
(3)익산공단우체국과 영등동 우체국
우체국은 우편ㆍ체신 업무 등을 맡아보는 정부기관인 정보통신부 산하 우정사업본부 밑에 8개의 체신청에 속해 있다. 전북체신청 소속으로 익산시에는 익산우체국이 중앙동에 있으며 그 산하에는 15개 읍ㆍ면에 각각 1개씩의 우체국이 있고, 시내권에도 모두 15개의 우체국이 있다. 익산공단우체국은 영등동 191-3번지에 익산세관 및 익산이동출입국관리소와 한 건물에 들어있으며 영등동우체국은 영등동 691-5번지 동신아파트 정문부근에 있다.
우체국의 효시는 1884년(고종 21)우정총국(郵政總局)과 인천분국의 설치이며, 1895년 농상공부의 통신국 밑에 24개의 우체사가 있었고, 1900년 한성우체사(漢城郵遞司)를 총사로 승격시켜 전국의 우체사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1949년 <정부조직법>이 제정된 뒤 <지방체신관서설치법>의 공포에 따라 우체국으로 개칭되었다.
1968년 우편물 매일배달제가 실시되고, 1970년 우편번호제 실시, 1973년 서울~부산간 철도우편물 전용차 운행 개시, 1979년 일본·홍콩과 국제특급우편업무 개시, 1981년 국내특급우편제도 실시, 1983년 체신예금· 체신보험, 국세· 지방세 등 각종 공과금 수납기능 등이 추가되었다. 또한 1986년 우체국을 통해 특산물을 직접 구입할 수 있는 우편주문판매제가 실시되었고, 서신이나 도면 등을 팩시밀리를 이용, 원형 그대로 신속하게 전달하는 전자우편제도를 1984년부터 실시하였다. 우편물 송달체제의 개혁을 위해 1990년 컴퓨터화 된 기계장치에 의해 우편물을 자동 처리해 나가는 서울우편집중국이 개국되었다. 2000년에는 정보통신부 안에 우정사업본부가 신설되어 체신청을 아래에 두게 되었다. 2001년부터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한 인터넷 우체국과 인터넷 쇼핑몰 운영을 시작하였다. 2007년 현재 우체국을 관할하는 체신청은 전국에 8개소(서울, 부산, 충청, 전북, 전남, 경북, 강원, 제주)가 있으며, 우체국 총수는 4,000개소에 달한다.
우편물의 접수ㆍ구분ㆍ발송ㆍ수집ㆍ운송ㆍ배달, 우표·수입인지의 판매, 우편환·우편대체 및 제연금의 현금수불, 우편사서함의 사용승인ㆍ변경ㆍ관리ㆍ교부 등의 우편ㆍ체신 업무를 주 임무로 하고 있으며, 이 외에 금융사업도 실시한다. 예금ㆍ적금ㆍ대출ㆍ신용카드ㆍ보험 등의 금융상품 이외에 공과금 수납도 취급하고 있다. 전화ㆍ팩시밀리·컴퓨터 등의 첨단통신시설이 대중화되고 일상생활이 바빠지면서 편지이용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우체국 고유의 우편업무보다는 전국 분포망을 이용한 금융업무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 거의 전국의 모든 읍ㆍ면ㆍ동에 개설된 4,000점포를 통해 손쉽게 공과금을 납부하고 예금 및 대출이 가능하며 특히 우체국 쇼핑과 우체국 택배는 우리 생활에 아주 편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우체국 택배는 가정이나 회사에 직접 우체국 담당자가 방문하여 가져가고 배달하여주는 아주 편리한 서비스 기능으로 자리 잡았다.
(4)익산이동출입국관리소
법무부 전주출입국관리사무소 소속으로 1978년 4월 27일에 대통령령 제 8983호에 의하여 이리출입국관리사무소로 신설되고 그 후 1995년 7월 8일 익산출입국관리사무소가 되었다가 현재는 익산이동출입국관리사무소가 되었다. 주 업무는 사증(VISA) 발급, 출입국심사, 외국인의 체류허가, 국적취득 업무, 재외동포 방문취업, 난민인정 업무, 출입국사범 처리, 제 증명 발급사무 등이다.
[세관 ․ 우체국 ․ 이동출입국관리소] [치안센터 ․ 안전센터]
(5)신흥치안센터
옛 신흥파출소이다. 2003년 8월에 경찰조직의 전면적인 개편이 있게 되어 익산시 전체에 시내권을 중심으로 6개의 지구대와 시내에서 먼 농촌지역에는 경찰서 직속의 5개의 파출소를 두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흥파출소는 부송지구대소속의 치안센터가 되어 낮에는 민원담당관이 상근하나 밤에는 근무자가 없는 빈 사무실이 되고 말았다.
(6)익산소방서 공단 119 안전센터
전라북도 익산시 영등동 220번지에 있다, 본래 공단 소방파출소였으나 2006년 8월부터 전라북도행정기구설치조례 시행규칙 제2684호에 따라 공단 119안전센터가 되었다. 담당구역 은 익산시 영등동, 신흥동 일대이며 펌프차 2대와 구급차 1대를 보유하고 있다. 방재활동( 화재, 구조, 구급출동)과 화재예방활동(소방안전점검 및 안전 교육)등을 담당한다.
(7)상하수도사업단
상하수도사업단장 아래 관리직 인원은 총 52명으로 상수도 관리팀에서는 신흥, 금강정수장 및 금마 배수지를 관할하며 하수도 관리팀은 익산하수처리장과 함열하수처리장을 관할한다.
■상수도관리팀 업무
업무분야 |
업무내용 |
상수행정 |
상수도 종합계획수립, 예산편성및결산,입찰및계약,공유재산관리, 급수사용료조정, 수입 예산정리 및 정산, 계량기교체 |
급수시설 |
상수도정비기본계획수립, 급수배수공사 설계 및 감독, 공동주택 저수조청소, 간이상수도 및 소규모급수시설관리, 개인급수공사, 누수방지 및 누수탐사기획, 노후관 개량공사 및 감독, 누수탐사, 누수처 보수, 상수도 관망도 정리, 변류 수리 및 교체 |
정수생산 |
정수생산기획조정, 정수장시설물관리, 읍면배수지관리, 시설물유지 수도수질실험기획, 상수원수질검사, 지하수수질검사, 정수약품구입관리, 상수원보호구역관리, 수도꼭지수질검사 |
■하수도관리팀 업무
업무분야 |
업무내용 |
하수행정 |
하수행정종합계획수립조정, 하수도특별회계 현금출납 및 금고감독, 하수도사용료부과징수, 원인자부담금 부과징수, 공기업평가및결산, 하수도공사 계약 및 관급자재 조달 업무 |
하수관리 |
하수도시설계획수립 및 하수도공사(처리구역내), 하수관거정비 및 유지관리, 하수도기계준설, 생활민원처리, 배수설비설치신고처리, 하수 및 분뇨처리 계획수립 및 조정, 민간위탁사업 계획승인 및 운영, 하수ㆍ분뇨펌프장 운영관리, 방류수 실험분석 및 수질분석 하수관거정비. 하수처리시설중장기계획수립, 새만금환경기초시설민자유치투자사업, 하수종말처리장시설 및 중장기계획, 차집관거분류식하수도시설공사 |
하수시설 |
도시설계획 수립 및 공사(처리구역외), 마을하수처리장 설치공사, 공공하수도허가, 온천지구 지정 및 관리, 지하수관리 하수 및 분뇨처리계획 수립 및 조정, 민간위탁사업 계획승인 및 운영, 하수ㆍ분뇨펌프장 운영관리, 방류수 실험분석및 수질분석 |
2. 교육기관
(1)이리동초등학교
이리동초등학교는 21세기를 주도할 자랑스런 한국인 육성을 위해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자 《 智(지:능력인). 德(덕:민주인). 體(체:정서인). 技(기:자아인) 》의 목표로 『조화된 인간육성』을 교육 지표로 삼아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삼위일체가 되어 《꿈ㆍ사랑ㆍ슬기를 키우는 즐거운 학교》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다.
교목은 느티나무, 교화는 장미, 교조는 비둘기이며 추구하는 교육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교육목표 1 |
창의력과 자기주도적인 학습능력인 |
교육목표 2 |
더불어 살아가고 책임 있게 사는 민주인 |
교육목표 3 |
건강한 심신과 아름다운 정서인 |
교육목표 4 |
개성을 키워가는 긍정적 자아인 |
(2)이리동북초등학교
지금은 영등동, 어양동, 부송동 신흥개발지구의 가장 첫머리에 위치하고 있어 마치 오래전부터 시가지에 있었던 학교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현재 총 30학급으로 973명(남학생 514명, 여학생 458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고 모두 41명의 교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 바르게, 슬기롭게, 씩씩하게 』라는 교훈아래 ‘참ㆍ새로움ㆍ멋’을 길러 삶의 질을 높이는 교육, 즉 전인교육을 목표로 노력하고 있으며 교목은 오엽송, 교화는 영산홍, 교조는 까치이며 추구하는 교육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도덕인 |
바른 예절생활을 알고 실천하는 어린이를 육성한다. |
창조인 |
학습방법을 알고 탐구하는 어린이를 육성한다. |
자주인 |
소질을 계발하여 세계에 앞서가는 어린이를 육성한다. |
건강인 |
몸이 튼튼하고 아름다운 정서를 지닌 어린이를 육성한다. |
(3)이리영등초등학교
영등동 개발이 크게 이어지면서 영등동에서는 가장 먼저 지어진 어양현대아파트와 1992년에 준공된 신일, 동신아파트에 이어 1995년에 영등동제일아파트가 건설되었다. 뒤이어 제일2차와 3차아파트가 들어서고 인구가 증가하게 되자 762번지에 1997년 3월에 이리동초등학교에서 분리하여 24학급으로 개교하였다. 제일아파트가 들어서고 이리영등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이곳이 새로운 영등동의 중심지가 되고 일대에는 유흥업소가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영등동 762번지에 있는 이리 영등초등학교는 현재 총 40학급으로 1390명(남학생 769명, 여학생 621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고 모두 57명의 교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교훈은 『나를 알고 미래의 꿈를 키우자』이며 교목은 느티나무, 교화는 도라지꽃, 교조는 비둘기이다. 추구하는 교육의 방향은 《지 ․ 덕 ․ 체가 조화된 인간육성》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한 교육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능력인 |
창의적인 사고와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의 소유교육(지) |
민주인 |
민주적 생활방식을 체득하고 자기를 책임지는 교육(덕) |
정서인 |
아름다운 정서와 건강한 심신수련의 생활습관교육(체) |
자아인 |
자아개념이 형성되고 자기개성을 발굴하는 교육(기) |
(4)이리남성여자중학교
영등동, 남중동, 신동의 경계선 지역인 소라단에는 남성학원의 남ㆍ녀 중ㆍ고 4개의 학교가 늠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중 여자중학교와 여자고등학교는 영등동 337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리남성여자중학교는 1956년 2월에 남성중학교 여자반 2개 반으로 시작되었고 , 1958년 2월 설립인가를 받아 개교하게 되었다. 1980년에는 소라단으로 먼저 이주한 남성중 ․ 고자리로 이전하였다가 1885년 지금의 소라단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건학이념은『남성학원은, 교육보국의 이념으로 고결한 인격을 갖춘 유능한 민주시민을 육성함으로써 국가와 사회 발전에 이바지 한다』이며 교화는 라일락으로 정하였다.
학교의 경영관은 다음과 같다.
부 문 |
목 표 |
학교상 |
편안한 교실, 꿈을 소중히 키우는 즐거움이 가득한 학교 |
학생상 |
멋과 실력을 갖춘, 바른 인성을 갖춘 건강한 학생 |
교사상 |
긍지있는 전문성, 학생을 사랑하며 열정을 지닌 신뢰받는 교사 |
학부모상 |
학교의 동반자, 사랑과 화목, 도덕심을 키우는 가정 |
지역사회상 |
공동체로서 유대와 협력, 학교를 함께 가꾸어 가는 지역사회 |
영등동, 남중동, 신동의 경계선 지역인 소라산에는 남성학원의 남ㆍ녀 중ㆍ고 4개의 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데 남성고등학교와 남성중학교는 신동에 속하지만 남성여자중학교와 남성여자고등학교는 영등동 337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리남성여자고등학교는 1956년 2월에 남성중학교 여자반 2개 반으로 시작되었고 1958년 2월 설립인가를 받아 6학급으로 개교하게 되었다. 1980년 2월에는 먼저 소라단으로 이주한 남성고등학교 자리로 이전하였다가 1885년 4월에 지금의 소라단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건학이념은『고결한 인격을 갖춘 유능한 민주시민 육성』이며, 교훈은 『아름답고 성실하고 새로워지자』이고 교화는 라일락으로 정하였다.
학교의 경영방향과 경영목표는 다음과 같다.
경영방향 |
희망과 성취, 긍지와 보람이 넘치는 학습공동체 | |
경영목표 |
학 생 |
존경으로 학습하는 성원인 |
교직원 |
사랑으로 교육하는 교직원 | |
학부모 |
기쁨으로 협동하는 학부모 | |
동창회 |
거름으로 봉사하는 동창회 |
(6)대영직업전문학교
교육이념은 『선 인간 후 기능』으로 인성교육을 중시하고 있으며 훈련목표로는 1. 인성함양 정예기능인 양성 2. 가치 있는 정예기능인 양성 3. 전문적인 지식인 양성에 두고 있다.
입학과정은 1. 정부위탁 훈련과정 2. 전직실업자 훈련과정 3. 신규 실업자 훈련과정 4. IT 훈련과정 5. 재직자 훈련과정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2007학년도 훈련과정은 다음과 같다.
2007학년도 훈련과정
훈련과정별 |
훈련분야 |
훈련기간 |
비고 |
실업자 훈련과정 |
웹디자인 및 서버구축과정 |
6개월 |
○수당지급 ○교재비, 실습비 전 액 국비 |
전산세무관리 및 전문가과정 | |||
한국조리과정 | |||
자동차정비 및 차체수리과정 | |||
정부위탁 훈련과정 |
자동차 차체수리과정 |
6개월 | |
정보통신설비 과정 |
1년 | ||
네트워크 운영관리 과정 | |||
내장형 하드웨어 과정 | |||
재직자 및 일반인과정 |
컴퓨터 기초반 |
4주 |
○본인부담 없음 |
컴퓨터 엑셀반 | |||
자동차 정비반 |
○본인부담 20% ○재직자는 수료후 환급 | ||
포토샵반 | |||
전산회계반 |
2개월 | ||
Auto - CAD반 |
3. 공공기관 및 기업체 기타
(1)국민건강보험공단
1963년 12월 16일 의료보험법이 제정되었고, 1977년 7월 1일부터 500인 이상의 사업자를 대상으로 의료보험법을 적용하였다. 1979년 1월부터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 1988년 1월부터 농어촌 지역 주민, 1989년 7월부터 도시 지역 주민으로 각각 의료보험을 확대 적용하였다. 1989년에는 약국의료보험을 실시하였다. 1998년 10월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 의료보험관리공단과 227개 지역조합을 통합한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이 출범하였고, 2000년 7월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과 139개 직장조합을 통합해 지금의 명칭으로 바꾸고, 2003년 7월 보험재정을 통합하였다.
주요 업무는 가입자 및 피부양자의 자격 관리, 보험료 및 기타 국민건강보험법에 의한 징수금의 부과· 징수, 보험급여의 관리, 가입자 및 피부양자의 건강 유지·증진을 위해 필요한 예방 사업, 보험급여비용의 지급, 자산의 관리· 운영 및 증식사업, 의료시설의 운영, 건강보험에 관한 교육 훈련 및 홍보, 건강보험에 관한 조사·연구 및 국제협력, 국민건강보험법 또는 다른 법령에 의하여 위탁받은 업무, 기타 건강보험과 관련해 보건복지부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업무 등이다.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과 직장조합이 통합되면서 익산지사는 현재의 건물을 지어 입주하였다.
(2)농협 영등동 지점 및 익산시청 영등출장소
1961년 8월 법률 제670조로 공포된 농업협동조합법에 의거 구 농협과 농업은행이 통합된 새 농협협동조합이 발족되었다. 농협은 그동안 엄청난 발전을 거듭해 와서 지금은 국내 최대의 지점망을 가진 규모로 성장하였다.
농협은 신지식 농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교육지원사업, 시장 지향적 산지유통을 위한 경제사업, 금융을 통한 신용사업을 그 주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00년 7월 1일에는 축산, 인삼협동조합까지 통합하였고 전국의 16개 지역본부 밑에 시 ․ 군마다 지부가 그 아래 지점 및 지소, 출장소가 있다. 우리 익산시만 하여도 39개의 지부, 지점, 지소 및 출장소가 있어 서민들의 공과금 납부 및 예금 및 적금, 대출 등 금융서비스를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역할을 충분히 해 주고 있다. 농협에서 운영하는 하나로마트를 포함하여 전라북도 내에만 총 643개의 점포가 있으니 그 규모는 실로 방대하다고 할 것이다.
일명 중앙농협이라고 하는 농협은 익산중앙지점(중앙동소재)과 이곳 영등동 지점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영등동지점은 영등동 206번지에 있다. 두 지점 외에도 중앙회소속의 농협은 함열지점과 익산시청 출장소, 영등동 상하수도 사업소 내에 설치된 영등동 출장소가 있다. 나머지는 모두 단위농협인 익산농협소속의 지점들이다. 농협영등동 지점은 원래 약촌 오거리 코너에 자리하고 있다가 2006년에 20여m 북쪽방향으로 조금 자리를 옮겼다.
(3)전북은행
1969년 12월에 창립하였다. 1993년에 전주시 금암동에 신축한 건물로 본점을 이전하였고 2000년에 인터넷 금융 서비스를 시작하였으며 2001년에 사이버점포를 개설하였다. 2003년 사업부제 중심으로 직제를 개편하고 전략사업본부를 신설하였다.
지역 자금의 집대성을 통한 지역 경제의 활성화를 설립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도민 1인 1주 갖기 운동을 통해 설립된 전북 유일의 지방은행이다. 전국에 64개 지점과 소형영업점 6개소 등 총 70개의 점포망을 갖추고 있다. 본점은 전주시 덕진구 금암동에 있으며 우리 익산에는 총 10개의 지점이 개설되어 있는데 영등제일1차 아파트 정문 앞에 있던 영등동 지점이 영등2동 동사무소부근으로 이전하고 구 점포는 영등제일영업점이 되었다.
(4)우리은행 영등동 지점
한빛은행이 평화은행을 분할 합병하여 2002년 5월 발족한 시중은행이다. 1998년 7월 한국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금융구조조정의 일환으로 합병을 결의, 1999년 1월 한빛은행으로 출범하였다. 한빛은행은 2001년 12월 평화은행을 분할합병, 이듬해 5월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2001년 11월 말 현재 총자산은 평화은행 우량자산 인수분을 포함하여 약 82조 원, 총수신은 62.3조 원, 총여신 51.1조 원에 1만 5백여 명의 직원과 국내 685개· 국외 12개 모두 697개의 점포망을 갖추게 되었다. 또 우리은행은 광주은행·경남은행· 우리종금· 우리신용카드· 우리증권들과 함께 우리금융지주㈜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은행은 전북에 10개의 지점을 두고 있으며 익산에는 2개의 지점이 있다. 영등동 지점은 무왕1로의 교보증권 앞 영등동 770-1번지에 있다.
(5)IBK기업은행 익산지점
중소기업인의 경제활동을 원활히 하고 그 경제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된 금융기관이다. 1961년 8월 <중소기업은행법>에 따라 설립되었다.
주요업무는
① 중소기업자에 대한 자금 대출과 어음 할인
② 예금 ․ 적금 업무
③ 중소기업자의 주식 응모· 인수 및 사채의 응모· 인수· 보증
④ 내외국환업무· 보호예수(保護預受)
⑤ 지급 승낙
⑥ 국고대리 업무
⑦ 정부·은행으로부터 자금 차입
⑧ 정부·공공단체의 위탁 업무
⑨ 중소기업에 대한 외국자본 차입
⑩ 중소기업에 대한 조사연구와 기업지도 등이다.
재원조달은 자본금· 예수금· 차관자금· 차용금· 금융채권발행 등에 의존한다. 곧 정책금융기관· 개발금융기관의 성격과 함께 일반 은행의 성격도 가진다.
2003년 총자산 71조 5843억 원, 자본금은 3조 4519억 원, 당기순이익은 2239억 원이다. 본점은 서울 중구 을지로 2가에 있다. 기업은행은 전라북도에 10개의 지점이 있고 익산에는 2개의 지점이 설치되어 있다. 기업은행 익산지점은 무왕1로의 교보증권 앞 영등동 770-9번지에 있다.
(6)신한은행 익산지점
한국에서 금융사상 처음으로 재일교포가 주축이 된 순수 민간자본에 의하여 설립된 시중은행으로 정식명칭은 주식회사신한은행이다.
설립취지는 재일동포와 본국과의 관계 강화와 본국에 대한 투자의욕 고취 및 선진금융기법의 도입에 의한 국내금융산업의 발전과 한일경제협력증진에의 기여 등이다. 일반 은행업무 이외에 증권업무· 신탁업무도 하고 있다.
1981년 4월 은행 민영화와 자율화 촉진지침이 발표된 뒤 그해 9월 신한금융주식회사를 세우고 이를 기반으로 은행 설립을 추진하여 10월에 인가를 얻고, 1982년 7월 신한은행으로 정식 발족하였다.
1987년 5월에 신한종합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989년 기업공개와 더불어 1991년에 신한리스를 설립하였다. 1998년 6월에 동화은행 인수, 1999년 7월에 인터넷뱅킹을 실시하였다. 2001년 9월 신한금융지주회사 계열사 중 하나로 출범했다.
2003년 현재 국내에 74개 지점을 두고 있으며, 해외에 영국의 런던, 미국의 뉴욕 지점, 중국의 천진· 상하이 지점, 홍콩 현지법인, 베트남 호치민 지점, 일본의 도쿄·오사카·후쿠오카 지점 등이 있다.
신한은행은 전라북도에 10개의 지점이 있고 익산에는 3개의 지점이 설치되어 있다. 신한은행 익산지점은 영등동 149-1번지 홈 플러스 앞에 있다.
(7)KB국민은행 영등동 지점
한국주택은행㈜과 통합하여 새로 출범한 한국 최대의 은행이다. 1962년 서민경제의 발전과 향상을 위해 설립된 은행으로, 국민은행법 제정에 따라 1963년에 발족했고, 정부가 자본금의 1/2 이상을 출자했다. 1970년에는 학교은행, 1975년에는 봉급생활자 신용대출제도와 학자금제도, 1976년에는 재형저축제도를 실시하여 가계저축 증대에 전환을 가져왔다. 1980년에는 금융기관 중 최초로 신용카드 업무를 실시하였다. 1994년 기업공개 및 공모증자에 이어 국민은행법이 폐지되고, 1995년 완전 민영화되었다. 1998년 소비자금융에 강점을 가진 국민은행은 기업국제금융에 노하우가 많은 장기신용은행과 합병하여 거대 은행이 되었다. 2001년 한국주택은행㈜과 합병하여 한국 최대의 거대은행이 되었으며 2003년에 국민카드를 합병하였다.
점포 수 1338개, 고객 수 2410만 명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영업규모와 금융권 최고 규모를 자랑한다. 2003년 총자산 184조 525억 원, 자본금 1조 6818억 원, 당기순손실이 7533억 원이다. 본점은 서울 중구 남대문로 2가에 있다. KB국민은행은 전라북도에 17개의 지점을 설치하고 있으며 익산에는 중앙동과 영등동 그리고 부송동에 국민은행 지점이 있다. 영등동 지점은 무왕1로의 영등동 149-1번지 CGV건물 1층에 들어 있다.
(8)귀금속단지 및 익산귀금속보석가공업협동조합
귀금속 1단지와 귀금속 2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현재 총 입주업체는 89개 업체이며 87개 업체가 가동 중이다. 현 고용인원 총 769명 중 남자 554명, 여자 215명이다. 익산 귀금속단지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1975. 08. 29 제7차 수출진흥 확대회의에서 수출특화 산업으로 집단 육성방안 확정
1975. 11. 14 이리귀금속보석 제 1공단 조성 대지 10,300평, 건평 7,434평
1976. 06. 30 입주가동
1979. 10. 04 제 2공단 활성화 대지 9,708평, 건평 6,396평
1981. 03. 01 한국관광공사 김포면세점 입점
1981. 05. 01 귀금속보석 판매장 개장
1988. 12. 22 이리 귀금속 판매 센터 기공 대지 : 4335평, 건평 770평
1989. 12. 27 이리 귀금속 보석 판매센터 개관
1993. 10. 29 잠실 중소기업제품 상설 전시 판매장 입점
1996. 08. 16 여의도 중소기업제품 상설 전시 판매장 입점
1999. 10. 21 전자상거래 쇼핑몰(www.kj.co.kr)운영 시작
2000. 08 여의도 중소기업제품 상설전시판매장
2001. 02 이리 귀금속 보석수출공단 상품카달로그 제작 (37개사 참여)
2001. 03. 29 인천국제공항 개항(롯데면세점, 한국관광공사 면세점 입점)
2001. 05. 26 인천국제공항 지하 한국 풍물시장 입점
2002. 05. 22 익산보석박물관 판매코너 입점
1988년 전성시대에는 무려 3500여명의 종업원이 근무하여 이 일대가 직원들을 위한 아파트가 들어서고 크게 융성하였으나 지금은 800여명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귀금속단지내 가공업체들의 조직인 익산귀금속보석가공업협동조합에서는 다음과 같은 홍보활동을 위한 행사를 시행하고 있다
■벚꽃맞이 대축제
익산 귀금속공단의 다양한 디자인, 만족스러운 가격, 유통구조 개선을 위해 설립된 귀금속 판매센터에 각종 수출제품과 신제품을 다양하게 준비, 우리 고장의 자랑인 벚꽃행사와 연계 개최함으로써 익산 귀금속보석 판매센터의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판매촉진과 이미지 홍보를 위해 실시하고 있다.
○후원 : 전라북도, 익산시
○기간 : 매년 4월말 ~ 약 12일간
○행사내용
- 할인 판매 실시 : 20%
- 사은품증정
- 디자인 공모전 입상작품 전시
- 결혼예물 특별 상담
- 보석 무료 세척 서비스
- 보석 리셋팅
■보석문화 대축제
문화관광부 축제로 지정된 "익산 보석 문화 축제" 는 명실상부한 세계 속의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보석 관련 다양한 문화행사와 아울러 이리 귀금속공단의 새로운 디자인과 기술력을 마음껏 자랑하는 본 축제는, 매년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바이어와 소비자들에게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장이 되고 있다
○후원 :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전라북도, 익산시
○기간 : 매년 10월중, 12일간
○행사내용
- 할인 판매 실시 : 20%
- 사은품증정
- 디자인 공모전 입상작품 전시
- 결혼예물 특별 상담
- 보석 무료 세척 서비스
- 보석 리셋팅
- 경품행사(마티즈 1명 외 60명)
- 전자 상거래 시연회
■전국 귀금속 보석 디자인 공모전 실시
익산의 보석 도시화, 익산 귀금속보석 공단 활성화, 참신한 디자이너 발굴, 업계의 창작의욕 고취 및 신제품 개발 촉진
○출품작 접수 : 매년 4월 중순
○전시 : 매년 4월 중순 벚꽃맞이 보석대축제 행사기간 중
○시상 : 산업자원부장관, 전라북도지사, 익산시장 등 14명
(9)익산귀금속보석판매센터
1975년에 정부가 익산보석수출단지를 조성하기로 확정하여 76년 6월부터 귀금속단지 입주가 시작되어 단지가 가동되었다. 1987년부터는 100% 수출만 해오던 방식을 지향하여 내수판매를 목적으로 보석판매장을 개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북도의 건의로 정부지원을 받아 1989년 12월에 현재의 국내 유일의 익산귀금속 보석판매장이 개장을 보게 된 것이다. 대지 1만 4000㎡ 지하 1층 지상 2층 연건평 2599㎡ 규모다. 현재 29개 업체가 입주해 연간 97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20여년의 역사를 가진 귀금속보석판매센터는 이젠 익산시의 모습이 크게 변하고 시외지역인 왕궁리 동룡리에 보석박물관이 생기면서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2002년 5월 왕궁면 동룡리 575번지에 개장한 보석 테마 관광지는 면적이 14만 3천여㎡(43,000여 평)로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보석박물관과 지하 1층, 지상 1층의 화석박물관 및 체험장, 조형물 그리고 공연장, 공원시설, 주차장 등 각종 시설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시당국에서는 왕궁면 동룡리의 보석 테마 관광지에 귀금속보석판매센터를 신축 이전하고 장차 귀금속 가공업체를 이전시켜 보석 집적화 단지를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익산시는 귀금속판매센터를 신축해 영등동의 현 판매센터 입주 업주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임대해줄 방침이며, 장기적으로 인근에 1만 6천여㎡의 귀금속가공단지를 조성해 시내에 있는 80여개 가공업체를 이주시킬 계획이다. 특히 관광객들이 직접 보석을 디자인하고 만들어 볼 수 있는 공방과 체험학습실 등을 만드는 한편 국제보석박람회 개최도 검토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이 조속히 실현되어 익산의 보석산업의 중흥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한편 익산귀금속보석판매센타는 큰 수난을 겪기도 했다. 지난 2005년 5월 11일 저녁, 영화속에서나 볼 수 있는 피해액이 67억원으로 추정되는 희대의 귀금속 절도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절도범들은 건물 뒤편 화장실 쇠창살과 창문을 뜯고 들어와 매장으로 통하는 나무합판 출입문 밑 부분을 톱으로 잘라내고 침입했다. 절도범들은 앞서 경비업체 직원을 가장, 판매센터에 들어와 천장에 있는 15개 열감지 센서의 뚜껑을 열고 화장지를 붙여 비상벨이 작동하지 않도록 했으며 매장 내 유리 진열장을 뜯고 귀금속을 쓸어 담다가 열 감지센서 중 하나에 붙인 화장지가 떨어져 비상벨이 울리는 바람에 도주했다.
판매센터에 입주해있는 29개 업체 77개 진열장 가운데 80%에 이르는 25개 업체 61개 진열장이 털렸다.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자수정을 비롯한 각종 보석과 금붙이 등 5만 여점에 이르며, 대부분 50만원 대 이하이나 100만원 이상의 고가품도 다수 포함돼 있다.
수십억 원 대의 귀금속과 보석을 판매하는 대형 매장치고 경비가 너무 허술하였던 것이 지적되었는데 경찰이 여러 차례 폐쇄회로 카메라 설치를 권유했지만 고객들의 사생활 침해를 이유로 거부했었다고 한다. 다행이 곧 범인들이 잡혀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2007년부터 익산시의 4대 축제가 함께 열리게 됨에 따라 10월 18일부터 28일까지 11일간 보석대축제는 이곳 익산귀금속보석판매센터에서 열렸다. 올 보석대축제는 기존의 단순했던 프로그램을 지양하고, 축제 참관자들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이라는 목표아래 행사기간 중 다이아몬드, 순금을 제외한 귀금속을 20% 할인 판매하였다.
첫날 개막식에서는 익산보석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개막식과 비전 선포식이 있었고 일정에 따라 비 보이 페스티벌, 보석을 주제로 한 주얼리 트렌드 쇼, 락(Rock) 페스티벌, 밸리 댄스 공연, 매직 일루션 공연과 주민자치센터의 공연이 펼쳐졌다.
프로그램과 체험행사로는 보석가공시연과 체험코너, 보석 네일아트 체험, 아이들 세상, 보석벽화 그리기가 있으며, 전시행사로는 원광보건대 쥬얼리디자인과의 졸업작품전과 월별 탄생석(石)전시 등이 준비됐다.
특히 이번 축제는 상설, 전시, 체험의 3박자를 고루 갖춘 새로운 축제로 거듭나기 위해 관람객 중 420명을 추첨해 ‘익산보석쌀’을 제공하고, 휴식공간으로 보석카페를 조성하는 등 여유롭게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외에도 영등1동에 속하는 제1산업단지에는 (주)세진산업, (주)오리엔트21, (주)이리모방, (주)삼우테크, (주)미첼, (주)율촌, (주)선진상사 등의 회사가 있다.
(10)우리신협 본점 ․ 한국고덴시 신협 본점 ․ 이리주현신협 영등지소
신용협동조합은 주거지역단체 ․ 직장 ․ 종교 등의 유대관계를 근거로 조직된 신용협동기구의 하나이다.
현재 한국의 신용협동기구는 추진주체에 따라
①한국신용협동조합연합회 산하의 <신용협동조합>
②마을금고연합회 산하의 <마을금고>
③농업협동조합과 수산업협동조합의 계통조직인 <단위조합>과 어업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상호금융>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들은 구성원에게 경제적인 여· 수신을 행하여 조합원 상호간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비영리적 신용협동조직이다. 한국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은 1960년 5월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28명으로 조직된 성가신용협동조합(聖家信用協同組合)이다.
6.25전쟁 직후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궁핍해 미국의 구호물자에 의존하는 사회적 혼란기였다. 따라서 저축을 하거나 누구에게 돈을 빌려주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환경을 극복하고자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1960년 5월 1일, 부산에서 메리놀 병원 직원과 천주교 교우 27명을 조합원으로 성가신협을 설립했다. 우리나라 신협의 시초이다. 장대익 신부는 같은 해 6월, 서울에서 가톨릭 교인을 대상으로 중앙신협을 설립해 한국 신협의 확산에 불을 당겼다.
그 뒤 1964년 4월 55개의 신용협동조합이 한국신용협동조합연합회를 창설하였고, 이 연합회는 그 해 5월 국제신용협동조합연합회에 정식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1989년 신용협동조합중앙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1972년 8월<신용협동조합법>이 제정됨에 따라 한국의 신용협동조합은 설립· 출자· 대출한도, 이자율, 예탁금 등 여러 사항에 대하여 규제를 받게 되었다. 1960년 당시 총자산 규모가 8만 7000원에서 1990년 3조 5976억 원으로, 2003년에는 19조 1900억 원으로 늘어났다. 조합수는 1960년 3개에서 1990년에 1315개였고 2007년 현재는 1015개 이다.
익산시에는 신용협동조합 중앙회 산하에 20개의 신용협동조합이 있으며 우리신협 본점은 영등2동의 동부시장내 547-55-1번지에 있고 한국고덴시 본점은 영등1동 220-1번지 한국고덴시 사내에 있다. 이리주현신협은 본점은 동산동에 있으며 영등지소는 구 영등동사무소 건물(현 익산시 자원봉사종합센터)바로 우측 건물이다.
(11)익산원예농협 영등제일지점
영등동 773-1번지에 있다. 익산원예농업협동조합은 이미 1964년 농협중앙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농협과 축협처럼 통합된 것은 아니지만 크게는 농협중앙회의 관리하에 있으며 모든 금융업무는 단위농협과 같고 그 연혁은 다음과 같다.
1957. 12. 09 창립총회 개최
1958. 11. 14 익산군원예협동조합으로 설립
1961. 07. 14 인화동에 농산물공판장 개설(480평)
1964. 12. 31 농협중앙회 회원으로 가입
1967. 01. 30 이익지구원예협동조합으로 명칭변경
1978. 10. 05 창인동 공판장 이리역 폭발사고 후 건물보수 및 신축공사 완공
1981. 09. 09 영등동공판장 개설(440평)
1989. 04. 18 이익원예농업협동조합으로 명칭변경
1989. 11. 01 인화동에 신용사업 개점(60평)
1991. 12. 18 덕기동에 농산물 저온저장고 신축(100평)
1995. 05. 10 행정구역 통합으로 익산원예농업협동조합으로 명칭 변경
1997. 12. 02 어양동에 영등지소 개점(30평)
1998. 01. 05 각공판장 패쇄 후 목천동에 익산시 농수산물 도매시장으로 입주
1999. 09. 30 낭산면에 공정육묘장 신축(1,522평)
2002. 09. 09 영등동으로 영등지소 이전 및 영등제일지점(107평)으로 명칭변경
2003. 07. 01 부송동에 부송제일지소 개점(95평)
익산원예농협영등제일지점은 앞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2002년 7월에 영등지소가 영등제일지점이 되었으며 만도기계사원아파트 부근 해동사우나 앞에 위치해 있다.
(12)우리투자증권
2005년 4월 1일 우리금융그룹이 LG투자증권(주)을 인수하여 우리증권(주)과 합병하여 신설된 증권사이다. 1969년 1월 한보증권(주)로 시작되어 대보증권(주), 럭키증권(주), LG증권(주) 등의 상호를 거치다가 1999년에는 LG종합금융을 흡수 ․ 합병하여 LG투자증권(주)으로 상호가 변경되었다.
위탁중개, 자산관리, 기업금융, 종합금융 등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런던, 뉴욕, 홍콩에 각각 현지법인을 두고 있으며 상해에는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전라북도에는 2개의 영업점이 있는데 하나는 전주영업점이며 익산영업점은 무왕1로 영등동770-1번지 용선빌딩에 있다.
(13)동부상설시장
(14)오리온 제3공장
오리온제과는 1956년 동양제과공업(주)으로 창립하여 껌 제조시설을 도입한 데 이어 1957년 캔디 제조시설, 1958년 비스킷 제조시설을 도입, 설치하고 1962년 상호를 오리온제과공업(주)으로 변경하였다가, 1964년 다시 동양제과공업(주)으로 변경하였다. 1975년 주식을 상장하였다.
1977년 웨하스 제조시설 도입에 이어 캐러멜· 초코파이· 캔디바 등의 제조시설을 도입· 증설하고, 익산· 대구 등지에 공장을 건설하는 등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1984년 동양종합상사(주)를 합병하고, 1986년 현재의 이름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오리온초코파이를 비롯한 파이류와 초콜릿, 비스킷, 껌, 캔디류 등 주요 제품을 익산, 청주 공장과 중국 현지법인에서 연간 4,000억 원 규모로 생산하고 있다. 1997년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랑방경제기술개발구에 연산 2,000만 달러 규모의 초코파이 공장을 건설한 데 이어 1998년에는 상하이[上海]에도 생산공장을 건설하는 등 해외현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러시아· 중국· 중동· 동남아시아, 유럽과 미주지역 등 세계 60여 국가에 각종 과자를 수출하고 있다.
동양종합상사는 제과를 중심으로 1990년대 초반부터 유통· 방송· 외식· 스포츠사업 등에 진출해 왔으며, 최근에는 CATV와 영화사업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다. 1999년에는 미국의 미디어그룹 타임워너의 자회사인 TBS와 네덜란드 투자회사인 모리타 인베스트먼트 인터내셔널로부터 대규모 외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1994년부터 케이블TV 사업에 진출하여 OCN(영화), 투니버스(만화), 바둑TV, 온게임넷(게임), MTV(음악) 등 9개의 채널을 보유하고 있으며, 1995년부터 시작한 외식사업(패밀리레스토랑 베니건스)은 2003년 현재 전국에 18개의 매장을 오픈하였고, 1999년 6월에는 영화 및 인터넷, 음악 등의 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미디어플렉스를 설립하였다. 한편 2001년 9월 1일부터 동양제과(주)를 비롯한 식품 및 미디어부문 16개사를 동양그룹에서 분리하여 오리온그룹으로 독립하였다. 2002년 1월 건강생활사업부를 신설하여 기능성식품을 출시하고 있으며, 9월 외식사업부문을 분할, 라이즈온(주)을 설립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 모스크바와 상하이에 공장을 짓고 베트남 종합과자공장과 중국스낵공장을 착공하였다. 오리온은 중국, 러시아, 베트남 등지에 5개의 현지법인과 10개의 해외사무소를 설립하여 세계시장의 현지화작업이 한창이다. 2005년에는 해외시장 진출이래 처음으로 매출액 1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또한 미국 펩시코사 지분을 인수하고 새 출발을 한 OSI도 포커칩, 스윙칩 등 두 감자칩은 스낵시장 매출1위로 등극시키며 주력 스낵브랜드의 해외공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우리 익산시에는 1980년에 건설된 비스켓 전문의 제2공장이 신흥동의 (주)쌍방울옆에 있고, 제3공장은 영등1동이 아직 배산로 이남 지역만 개발이 되었을 뿐 이북지역은 전혀 개발이 되지 않았던 83년에 건설되었는데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소라단 곁에는 성모병원과 오리온 공장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15)성모병원
성모병원은 익산시 영등동 268-9번지 일명 성모병원사거리에 있다. 1972년 6월에 창인동 성당내의 구 사제관에서 성모의원이 처음 개설되었고, 1980년에는 지금의
최근 고령화 사회가 도래되면서 지역사회 복지에 관심이 더욱 고조되고 참여정부에 들어 사회연대적 책임의식이 확산되어가면서 종교계도 참여 복지구현에 대한 여러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익산성모병원은 30여 년 간의 성모의원 운영을 모태로 소외된 계층과 더불어 사는 사회와,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복지사회를 이루고자 병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진료과목은 내과, 신경외과, 재활의학과이며 요양 및 보호서비스는 다음과 같다.
재활서비스(물리치료, 작업치료), 치료보호서비스(욕창서비스, 목욕서비스, 간호 및 간병서비스), 사회봉사연간프로그램, 자원봉사프로그램, 원목프로그램 등이 있다.
(16)미즈베베 병원
원래는 산부인과로 출발하였으나 현재는 같은 건물에 미즈베베 소아과 병원이 입주하여 분리 운영되고 있다. 산부인과에는 이희섭 원장을 비롯한 4명의 의사가 근무하며 소아과는 오만택 원장을 비롯한 4분의 의사가 근무하고 있다.
(17)실로암 사랑요양병원
실로암 사랑요양병원은 노인전문 진료 ․ 치료 ․ 요양병원이다. 노인에 대한 진료와 치료, 요양 간병까지 원스톱시스템으로 관리한다. 진료과목은 내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재활의학과이며 전문간호인력(호스피스 전문 간호인력과 교육수료 간병인)이 24시간 간호한다. 신경 및 정형외과 전문의를 통한 실로암 사랑요양병원의 특화치료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중풍 신경재활 프로그램
○치매 인지재활 프로그램
○교통사고 재활증진 프로그램
○척추 관절 치료 프로그램
○호스피스 프로그램
제1병동은 일반병동으로 일반외래진료, 교통사고환자를 위한 병동이다. 제2병동은 요양병동으로 노인성질환 진료 및 요양을 위한 병동이다. 신재생 에너지를 이용한 중앙공급식 냉난방과 바닥온돌 시공으로 온화한 실내 환경을 조성하였고, 병동별 층별 충분한 휴식공간이 마련되었으며 샤워실과 공동목욕탕이 설치되고 100평에 달하는 황토벽과 첨단장비를 이용한 운동휴식공간겸용 재활물리치료실을 운영하고 있다. 이미 2000년에 65세 이상의 노인인구가 7%를 넘는 고령화시대를 맞이하였고 2018년에는 14%를 넘는 고령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2026년에는 20%를 넘는 초고령시대가 이루어진다. 이런 고령화추세에 발맞추어 우리 익산시에 노인들을 위한 전문병원인 실로암 사랑요양병원이 개원된 것은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18)알리앙스
1960년대 초 만 하여도 시골에서 행하여지던 전통혼례는 근대문화의 발전과 도시화로 인하여 60년대 중반이후에는 완전히 사라지고 전문예식장이 생겨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서양의 선진국에서는 대부분 교회나 마을 공회당을 이용하고 동남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은 신랑신부집이나 식당 같은데서 보통 하루 종일에서부터 길게는 일주일 동안 성대하고 진지하게 이루어지는데 반하여, 우리나라와 일본정도만이 예식장을 이용한 결혼식이 주류라고 한다. 아름다운 식장에서 많은 하객을 초청하여 결혼식이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하객들 모두가 진심으로 신랑신부를 축하하는 모습인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진지하고 엄숙한 자리인 것인지 반성하면서 새로운 결혼문화의 패턴이 자리잡아주기를 기대해 본다. 너무나 실용적 측면만 강조되는 나머지 그저 형식적이고 빨리, 그리고 너무 가볍게 결혼식을 치르고 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고착된 우리의 결혼문화는 그래도 예식이 끝난후 신랑신부가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고 예식장에 마련된 폐백실에서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는 절차를 지키는 것으로 전통의 맥을 조금이나마 이어가고 있음에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1960년대는 영화의 전성시대였다. 한국에서 최초로 영화가 상영된 것은 1903년 6월 23일 미국인 헨리 콜브란(Henry Collbran)과 H.R 보스트위크(H.R Bostwick)가 발전소겸 전 차창고로 사용하고 있던 한성전기회사(현재 서울의 동대문 부근) 마당에서 입장료를 받고 일반인들에게 영화를 보여준 것이라고 한다. 이후 1923년에 《서선시네마》라는 회사가《국경》이라는 작품을 제작한 것이 최초의 영화제작이었다.
우리 익산에서 TV가 안방극장을 대신하기 시작한 1980년 이전에는 영화는 우리 삶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문화였다. 영화는 클래식 음악이나 미술이나 연극과 달리 도시사람이건 시골사람이건 배운 사람이건 못 배운 사람이건 누구나 좋아하였고 영화를 통하여 문화를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인생을 배웠다. 그리고 영화를 통하여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해방이후 읍내에까지도 극장이 생겨 누구라도 가까이 영화를 보러 다니기 시작한 이래 60년대까지만 해도 당시 이리에는 4개의 극장이 있었다. 기억속에 너무도 생생한 이리극장, 삼남극장, 시공관, 동성극장들이 그것이다. 이중 동성극장은 TV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도 전에 문을 닫았지만 다른 극장들도 80년대가 시작되면서 TV에 밀려 모두 사라지고 중앙동의 코리아극장이나 창인동의 제일극장 등의 중형급 극장과 많은 소극장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이젠 소극장 시대도 끝나고 전국적인 체인망을 갖춘 대형 종합 극장시대가 막을 열었다.
CJ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프리머스시네마 등 국내 4개 복합상영관(멀티플렉스)이 바로 그것이며 인터넷을 통한 예매와 체인점망을 구축하고 다양한 영화를 방영하는 초현대식 운영방식과 초대형 규모의 호화로운 극장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한국영화의 중흥과 함께 영화관을 찾는 관객의 수도 급증하여 2006년도에 극장을 찾은 관객은 무려 1억 660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국내 영화 상영시장에서 4대 복합 상영관의 스크린 수는 무려 54.7퍼센트(2006년 기준)에 달하며 관객 점유율은 70.1퍼센트 수준으로 매우 높은 시장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태인데 4대 복합 상영관중에서도 CJ CGV의 규모가 가장 크며 전국에 56개의 영화관과 무려 449개의 스크린을 운영하고 있다.
영등동 149-1번지의 아오아 건물 4층-6층에 있는 익산 CGV는 좌석수가 839석으로 2004년 6월 4일에 오픈하였다. 5개의 스크린을 운영중이며 하루에 7-8개의 영화를 상영하므로 언제나 원하는 영화를 선택하여 관람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호화로운 시실에서 편안한 감상을 하게 되었으므로 소극장시대는 자연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리극장과 삼남극장, 시공관 중심의 전통적인 극장이 융성하던 1970년대까지가 1기, 소극장으로 운영되던 1980년대-90년대가 2기라고 한다면 이제 2000년대는 제3기 초대형 복합상영관의 시대가 막을 연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2장 영동1동의 전통마을
1980년경에는 20여 호의 작은 마을이었다고 하는데 논이 많았고 집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사벌 아파트, 동초등학교, 부영아파트지역으로 그 흔적은 전혀 없게 되었다.
[혜교마을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군] 송내(松內)는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솔밭안(소라단)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1980년경에는 20~30여 호의 작은 마을이었으나 오늘날은 206호가 이 마을에 살고 있다하니 이제 자연마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큰 마을이며 도로나 주택들도 도시화되었으나, 그래도 영등1동에서는 아직도 마을에 논과 밭이 많이 있고 소라산이 있어 가장 자연마을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청복(淸福)은 일찍부터 이루어진 한자명이라 하는데 아마도 비탈면에 언제나 푸
[청복마을] [송내마을]
르른 채소와 곡식들이 가꾸어지기 때문에 풍성하여 복을 받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쓰여 지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약촌(藥村)은 이 지역에서 약수가
나왔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 하는데 오늘날은 완전히 시가지로 변하여 지금은 어떤 곳에 그 샘물이 있었던지는 이젠 잘 알 수 가 없다.
1980년경에는 20여 호의 작은 마을이었다고 하는데 오늘은 206호가 사는 큰 마을이 되어버렸다. 약촌은 현재의 약촌오거리에서 영등초등학교사이에 있는 마을인데 이젠 자연마을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1919년에 발간된 지도를 보면 약촌 부근을 영등리로 표시하고 있다. [약촌로]
이외에 잿배기가 있었는데 이는 재(언덕)를 넘어가는 길가에 이루어진 마을에 흔히 붙여지는 이름인데 그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제3장 영등1동의 문화유적과 유물
제4장 명승지
제5장 민속과 전통
'향토사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주의 역사와 문화 (0) | 2010.08.30 |
---|---|
영등2동(익산향토지 제 3권) (0) | 2009.10.11 |
어양동(익산향토지 제 3권) (0) | 2009.10.11 |
삼성동(익산향토지 제 3권) (0) | 2009.10.11 |
중앙동(익산 향토지 제 2권) (0) | 2009.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