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문화원에서 발행한 익산향토지 제3권(2007)중 필자가 조사하여 정리한 부분입니다.
제1편 삼성동
제1장 삼성동(三星洞)의 연혁과 현황
제1절 삼성동의 연혁
두천 면,지석면, 율촌면, 사제면, 구문천면, 미륵면, 동일면, 서일면, 남일면, 남이면, 북일면, 우북면 등이다. 이중 동일면, 서일면, 남일면, 남이면, 북일면 등 5개면은 1906년에 전주군 소속의 속현이었다가 폐현이 된 옥야현지역이 익산군으로 편입된 곳이며 우북면은 태종 9년(1409)에 폐현된 우주현 소속의 3개면 중의 하나로 전주군 소속이었다가 1906년에 옥야현 지역의 5개면과 함께 익산군으로 편입된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두천면의 덕기리, 석왕리, 팔봉리, 석암리, 용제리, 부송리와 지석면의 은기리, 정족리, 임상리, 월성리를 병합하여 최초로 팔봉면이라는 행정구역이 확정된다. 이에 따라 1917년에 간행된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을 보면 팔봉면에는 앞에서 열거한 10개리가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1914년 이후 이어져온 팔봉면의 행정구역은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 11027호에 의거하여 팔봉면 전 지역이 이리시에 편입되면서 임상리, 월성리, 정족리, 부송리 등 4개리를 각각 법정동으로 하고 통합한 행정동 명을 삼성동이라 하였고 나머지 6개리는 각각 법정동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행정동인 팔봉동이 되었다.
삼성동이라는 동명은 월성동에 삼성초등학교가 있어서 그 이름에서 채택한 것이라 하며 ?삼성?이라는 이름은 그곳이 풍수지리설에서 삼성락지(三星落地)라고 전해온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삼성동은 조선시대 지석면의 임상리, 월성리, 정족리 등 3개리와 두천면의 부송리가 합쳐져 이루어진 동임을 알 수 있다.
부송동은 조선시대에는 원래 익산군 두천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작천리, 망산리, 부평리, 송정리의 전 지역과 팔봉리, 석치리, 궁동, 어곶리의 각 일부지역으로 구성되어 팔봉면에 속하게 되었다. 부송리라는 명칭은 부평과 송정에서 한 자씩 취한 것이다. 1983년 팔봉면 전 지역이 이리시에 편입됨으로써 이리시 법정동인 부송동이 되었다.
정족동은 조선시대에는 원래 익산군 지석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원봉리, 상정리, 하정리, 원봉리, 산정리의 전 지역과 내두리 일부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정족리라는 명칭은 원래 본 이름인 ?솥발이?의 한자 표기인데 그 어원은 지형이 솥의 발같이 3면으로 뻗어 있기에 생긴 명칭이라고 한다. 상정마을의 뒷산을 중심으로 아래로 뻗은 세 골짜기를 솥발과 같이 본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당시 지석면 전 지역은 새로운 팔봉면에 속하게 되었고 1983년 팔봉면 전 지역이 이리시에 편입됨으로서 이리시 법정동인 정족동이 되었다.
임상동은 조선시대에는 원래 익산군 지석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림리, 임내리, 오상리, 몽곶리의 전 지역으로 그 중심인 임내의 ?임?자와 오상의 ?상?자를 한자씩 취하여 임상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당시 지석면 전 지역은 새로운 팔봉면에 속하게 되었고 1983년 팔봉면 전 지역이 이리시에 편입됨으로써 이리시 법정동인 임상동이 되었다.
월성동은 조선시대에는 원래 대부분 익산군 지석면 지역이다. 1914년 진자리, 반월리, 신성리, 율촌면의 내ㆍ외화리의 전 지역과 사제면의 궁교리 일부로 구성되었다. 월성이라는 명칭은 반월의?월?자와 신성의?성?자를 취하여 월성리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당시 지석면 전 지역은 새로운 팔봉면에 속하게 되었고 1983년 팔봉면 전 지역이 이리시에 편입됨으로써 이리시 법정동인 월성동이 되었다.
위와 같이 그 연혁을 살펴보고 나면 영등동 ․ 어양동 ․ 삼성동 지역의 옛 모습이 그려지는데 오늘날 영등동은 전주부(1895년에는 전주군)의 소속인 옛 옥야현 지역의 북일면 소속의 영등리이었다가 1899년 익산군에 편입된 곳이며 1914년 행정개편 이후에도 그대로 북일면으로 남아 있다가 1974년에 이리시에 편입된 곳이다. 그러나 어양동은 원래는 익산군 두천면에 속한 곳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어곶, 양지(팔성), 궁동이 어양리가 되어 북일면에 편입되었던 지역이다. 역시 영등리와 함께 1974년에 이리시에 편입되었다.
부송동지역은 익산군 두천면 지역으로 1914년에 팔봉면이 되었고, 월성동과 정족동 임상동지역은 지석면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팔봉면에 흡수된 곳이다. 따라서 오늘날 익산시에서 가장 신개발지역으로 활기를 띠며 각광을 받고 있는 영등동과 어양동 그리고 부송동이 한데 어울려 대부분의 시민들에게는 동지역의 구분조차 어렵게 되어가고 있으나 기실 1899년 이전까지만 하여도 전주군 소속의 폐현인 옥야현 지역의 북일면(영등리), 익산군의 두천면 지역(어양리, 부송리)과 익산군의 지석면 지역(월성리, 정족리, 임상리)으로 확연하게 행정구역이 구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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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익산시 경계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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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군 경계선 |
[1906년 행정구역 개편 직전의 현 익산시 지역 행정구분도]
제2절 삼성동의 자연환경
익산은 전라북도의 북서부에 위치하며 동부는 완주군, 남부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시, 서부는 군산시, 북부는 금강을 경계로 하여 충남의 부여군 및 논산시와 접하고 있다. 지세는 동부지역은 험준한 천호산이 가로막고 있으며 서부는 금강이 흐르고, 남부는 용화산과 미륵산에서 그 지류가 발원하고 있는 만경강상류의 준평원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지질구조를 보면 동부산간지대는 선캄브리아기의 화강암질 편마암이나 편마암으로 구성된 변성복합체, 화산암류 등의 풍화에 강한 암석들이 분포하는데 반하여 산간의 분지와 서부평야지대 등의 기반암은 대부분 풍화되기 쉬운 중생대 쥬라기의 화강암류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인 여산과 금마일원은 노령산맥의 줄기가 뻗어 있어 비교적 산지로 구성되어 있지만 서쪽은 용안에서 성당면, 함라면, 서수면을 지나 임피면, 개정면, 옥산면으로 이어지는 함라산(241m)줄기와 몇 개의 대표적인 구릉지를 제외하면 그 동부인 이곳은 해발 30m이하의 낮은 구릉과 비옥한 평야가 펼쳐지고 있는 곳이다.
익산시 중심부의 전체적인 지형으로는 미륵산에서 남서부로 내린 지맥이 만경강 본류와 탑천 유역, 그리고 송학동 및 오산리와 영만리의 해발 10 ~ 30m 구릉지를 제외한 지역이 충적토로 형성된 저지대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구릉지로는 배산(98m), 장자산(45.8m), 수도산(40m), 고봉산(45m), 팔봉산(68m), 지네산(67.8m)등을 제외하면 대체로 해발 30m이하로서 풍화층이 두텁고 토양은 적색을 띤다.
삼성동 일대의 지형을 보면 동으로는 노령산맥의 줄기가 흘러 여산면, 왕궁면, 낭산면, 금마면을 스쳐 지나고 있으며 북으로는 금강이 서쪽을 끼고 돌며 비옥하고 평탄한 해발 30m이하의 평야지역을 이루고 있다. 남쪽의 모습을 보면 사수(만경강)의 탑천이 허리다리(요교)에서 갈라져 북으로는 기양천(삼기천)이 삼기면의 기산리까지 뻗어나가고 남으로는 망동천(팔봉천)이 금마면의 미륵초등학교 앞까지 뻗어나가 있는데 부송동을 제외한 임상동, 정족동, 월성동은 바로 이 두 천이 흐르며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이곳 평야는 충적평야인데 동부산간지대의 풍화산물이 만경강에 의하여 운반되어 쌓인 제4기의 충적층으로 되어 있다.
현재 익산시가지의 가장 발전하는 신흥개발지역이 된 부송동의 남부지역은 이미 상업지역으로 수많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으나 부송동의 대부분에 속하는 북부는 부평로를 중심으로 동부지역은 현재에도 원광중고등학교와 팔봉공원으로 이어지는 드넓은 야산이 펼쳐지고 있으며 망산, 송정, 부평 등 자연마을이 유지되고 있으나, 서북부 지역은 오상앞뜰로써 논농사지역이다.
임상동, 정족동, 월성동지역도 14개의 자연마을이 들어선 길게 벋어 있는 구릉지대에는 임야와 밭이 있으나 구릉을 제외하면 논농사를 짓는 끝없는 평야지대이다. 즉, 전통적인 농업위주의 농촌지역과 부송동 중심의 신흥도시개발지역이 병존하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이 지역이 비록 도심에 묻혀버린 부송동의 작천을 제외하고는 17개의 자연부락이 농촌마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익산시의 외곽에 위치한 시골지역이지만 2002년에 부평마을까지 연결되는 6차선의 부평로가 뚫리면서 비약적인 발전이 기대되고 있다.
두천(豆川)은 망동천(望洞川)이라고도 하며 미륵산의 서록에서 발원하여 금마면 용순리와 미륵초등학교 앞을 지나 은기동의 내두앞에서 정족동의 용골방죽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만나 옛날 익산군의 지석면과 두천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오상 앞뜰을 거치면서 북쪽방향으로 틀어져서 몽환 앞의 허리다리에서 삼기면 쪽에서 흘러오는 기양천과 만나 탑천을 이루어 황등면의 연전평(만석들)을 지나 만경강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석면에 속하였던 은기리 앞에서는 두천(豆川)이라고 하였는데 그런 이유에서 강의 아래쪽인 오늘날 팔봉동 일대가 두천면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천은 망동천(望洞川)이라고도 부르는데 은기리에 내두마을이 있고 부송동에 망산이 있어 마을이름과 관련지어 부른 이름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미륵산 상류부터 기양천(삼기천)과 만나는 허리다리까지 전체를 부를 때는 이 지역 사람들은 그냥 팔봉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옛 황등제가 있을 때는 황등제, 즉 요교호로 들어가는 하천이었다. 이 하천유역은 높은 산이 없는 준 평원지대로 하저에는 토탄층이 있어 1980년경에 파내다가 중지한 일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망동천과 기양천이 만나는 곳]
면천(綿川)은 기양천(箕陽川)이라고도 하며 두천과 마찬가지로 미륵산의 서록에서 발원하여 삼기면 간촌리에서 구문천과 장항천과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남하하다가 임상동의 몽환 앞의 허리다리에서 두천과 만나 탑천을 이루고 황등면의 연전평(만석들)을 지나 만경강으로 흘러가고 있으므로 두천과 마찬가지로 옛 황등제가 있을 때는 황등제, 즉 요교호로 들어가는 하천이었다. 뱀내라고도 부른다.
삼성동의 위치를 살펴보면 북으로는 삼기면이 있고, 남으로는 영등2동과 어양동이 있다. 동으로는 팔봉동이, 서로는 황등면, 신룡동과 닿아 있다. 삼성동의 모양은 월성동, 정족동, 임상동이 농촌지역이므로 대단히 넓고 부송동 역시 무왕1로를 중심으로 개발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대부분이 농촌지역이기에 익산시 14개 행정동 중에서는 팔봉동 다음으로 면적이 넓은 동이다.
제3절 삼성동의 현황과 모습
1. 행정구역 및 인구
행정구역 |
세대수 |
인구수 | ||||||
법정동 |
통 |
반 |
자연 마을 |
아파트 |
계 |
남 |
여 | |
4 |
56 |
274 |
17 |
18 |
10,939 |
34,306 |
16,772 |
17,534 |
2. 면적 및 토지이용 현황
계 |
밭 |
논 |
임야 |
대지 |
기타 |
12.8 |
3.8 |
4.6 |
2.0 |
0.9 |
1.5 |
3. 주요 기관 및 시설
공공기관 |
금융기관 |
학교 |
병ㆍ의원 |
종교기관 |
경노당 |
복지시설 |
4 |
3 |
9 |
20 |
36 |
20 |
8 |
4. 법정동별 인구현황
법정동 |
세대수 |
남자 |
여자 |
인구계(%) |
비고 |
부송동 |
10,874 |
16,280 |
17,254 |
33,534 |
|
정족동 |
126 |
150 |
145 |
295 |
|
임상동 |
173 |
237 |
217 |
454 |
|
월성동 |
274 |
359 |
374 |
733 |
|
계 |
11,447 |
17,026 |
17,990 |
35,016 |
|
5. 자연마을별 인구현황
마을명 |
세대수 |
상주인구 |
비고 |
망 산 |
61 |
149 |
부송동(3) |
부 평 |
110 |
249 | |
송 정 |
57 |
143 | |
산 정 |
29 |
75 |
정족동(4) |
상 정 |
52 |
115 | |
하 정 |
16 |
49 | |
원 봉 |
29 |
56 | |
임 내 |
59 |
146 |
임상동(5) |
신 림 |
22 |
71 | |
오 상 |
34 |
91 | |
동 사 |
24 |
59 | |
몽 환 |
34 |
87 | |
신 화 |
25 |
69 |
월성동(5) |
외 화 |
96 |
243 | |
내 화 |
47 |
163 | |
반 월 |
77 |
181 | |
진 자 |
29 |
77 | |
계 |
801 |
2,023 |
(17) |
( )는 자연마을 수
6. 부송동 지역의 모습
삼성동은 익산시의 14개 행정동 중에서는 팔봉동 다음으로 면적이 넓고, 부송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하여 익산시의 29개 읍 ․ 면 ․ 동 중 인구도 가장 많은 동이 되었다. 무려 동인구가 3만 5천명이 넘었으므로 웬만한 작은 시의 규모가 되어가고 있다. 그 중 삼성동의 중심지이자 핵심지역은 바로 부송동이다. 부송동의 인구만 하여도 3만 3천 5백 명이 넘어 31개 법정동 중에서 이미 행정동 2개로 분리된 영등동을 제외하면 가장 많다. 그만큼 부송동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부송동을 제외한 나머지 3개의 법정동은 아직까지도 개발이 되지 않은 순수한 농촌지역이며 따라서 14개의 자연부락이 현존한다. 부송동에는 3개의 자연마을이 남아 있으며 도심이 된 지역에는 최근까지도 작천마을이 아직도 그 옛 모습을 조금은 간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작천마을만 사실상 도시화되었을 뿐 나머지 자연마을들은 아직도 농촌 그 자체로 남아 있는 것이다.
1980년대 들어 영등동과 어양동이 개발되기 시작하더니 90년대에는 부송동까지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이지역의 온 산과 밭 사이로 길이 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학교와 관공서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제 부송동은 동서로는 1987년에 6차선으로 뚫린 무왕1로(당시에는 산업도로)와 남북으로 역시 6차선의 뻗은 부평로를 중심으로 도심이 확대되고 있다. 2007년 금년에도 향토기업 제일건설이 지은 오투그란테(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더욱 활기를 띠는 모습이다. 사실 부송동의 도심지역만 인구가 3만이 넘으니 하나의 큰 읍 정도의 규모가 된다. 1987년에 오늘날 익산 최대의 외곽 간선도로인 산업도로가 뚫려서 자동차들의 왕래는 많았으나 당시에는 2차선만 포장이 된 상태였고 도로주변은 모두가 밭과 야산이었을 뿐 건물이라고는 오직 화물종합터미널뿐이었다. 이제 교통 좋은 부송동에 오페라하우스에 이어 오투그란테가 들어서는 등 중대평형 아파트가 많아지고 넓고 품격 있는 집에 살고자하는 사람들이 선망하는 마을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우리 익산시의 산업단지 개발과 함께 뚫린 선화로를 따라가다가 한국폴리텍대학 뒤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돌면 바로 부송동으로 들어가는 부평로이다. 오른쪽은 죽적골이라는 길 이름이 붙어있는데 개발이전에는 마을은 아니고 산과 밭으로 이루어진 언덕배기 야산지역이었다. 아직도 부송중학교 부근은 개발이 되지 않고 야산과 밭이 많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2006년에 어양동의 LG자이 아파트개발과 함께 뚫린 6차선의 보석2로가 부송2호공원 앞에서 부평로와 만나면서 교통이 한결 편리해졌고 부송동 접근이 용이해졌다. 무왕1로 남쪽의 부평로 좌우편은 완전히 아파트군이다. KT익사지사부터 백제웨딩사거리까지 제법 활기찬 상가가 형성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아직까지도 부송동 도심의 한가운데 옛 작천마을이 옛 모습을 조금은 간직한 채 남아 있다. 백제웨딩타운 앞쪽에 작천마을 옛 마을길과 밭이 남아있고 대여섯 집이 남아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작천마을은 팔성로와 무왕1로 사이에 묻혀서 차로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제 몇 집밖에 남아있지 않은데 아직 개발이 안된 이유는 미개발 면적이 너무 좁아서 마땅한 개발을 찾기가 용이하지 않아서라고 한다.
팔성로를 따라 동아아파트 방향으로 가노라면 좌우로 아파트가 늘어서 있는데 2004년에는 오페라하우스가 입주하고 2005년에는 부송주공(송백마을)이, 2007년에는 송정방죽자리에 오투그란테가 완성되어 입주하게 되면서 1995년에 입주한 우남콤비타운과 1997년도에 입주한 동아아파트와 함께 무왕1로 끝자락 오른편이 갑자기 활기를 띠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선화로에서 부송초등길로 들어서면 부송중학교와 부송초등학교가 나오는데 부송중학교와 오페라하우스부근은 아직도 개발이 안 된 밭들이 많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왕1로의 북부지역은 영등동 ․ 어양동 ․ 부송동지역에서는 가장 최근에 개발된 지역이다. 아직은 동서로 나있는 궁동로까지만 개발된 상태이며 남북으로 뻗은 부평로는 부평마을까지 연결은 시켜 놓았으나 궁동로 이북은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되는 중이다.
이 지역에 일직이 제일먼저 들어선 건물은 뭐니 뭐니 해도 화물종합터미널이다.1989년에 개업한 화물터미널은 1990대 초만 하여도 아직 한적한 시골길가에 이리동초등학교와 함께 두드러지게 눈에 띠는 건물이었다. 아직도 큰 대지를 차지하고 있지만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원래의 제 모습과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관계자의 설명이다.
부송동의 무왕1로에 일직이 건축된 또 하나의 대규모 건물이 영생감리회이다. 1996년에 2,000여 평의 대지에 웅장하게 건립된 영생감리교회는 최근에는 까치샘 아파트 옆에 교육문화회관을 짓고 이 지역 주민들의 사회문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주공아파트 근처에는 전자제품 대형매장인 하이마트 익산점이 있다.
2002년에 개장한 백제웨딩타운은 어쩌면 우리 익산시민들에게 이곳 부송동을 새롭게 인식시키고 부송동 개발을 촉진시킨 대표적인 건물이 아닌가 싶다. 르네상스식 건물로 지어진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백제 웨딩타운은 한결 우리 익산의 문화를 업그레이드시킨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최근에 무왕1로 북쪽의 부평로가 번화가가 되어 있다. 백제웨딩사거리에서 삼성동사무소가 있는 곳까지 많은 식당, 노래방, 맛사지업소, 사우나 등이 들어서고 있는데 바로 이곳이 부송동의 향락지대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백제웨딩 뒤편으로 까치샘(鵲泉의 뜻)아파트와 아담한 부송3호공원이 있어 개발지역으로 삭막해진 이곳에 여유로움을 선사한다.
2003년에 정족동의 산정마을에서 이전해온 삼성동사무소 뒤편으로는 부송주공9단지와 어양중학교, 리젠시빌 아파트가 있고 그 뒤로는 송정부락과 부평마을까지 넓은 논이 펼쳐진다. 부평이나 송정은 2002년도에 6차선의 부평로가 뚫리기 전만 하여도 가까우면서도 쉬게 접근하기 어려운 마을이었다. 왜냐하면 자동차로는 영등동과 어양동쪽에서는 제대로 된 길 하나가 없어 원팔봉을 돌아서야 들어갔기 때문이다. 부평마을을 지나 황팔길로 나가면 망산부락이 나오는데 실제로 마을 앞으로는 망동천이 흐르고 오른편으로는 석왕동의 석치 남쪽에 있는 지네산이 가까이 보이고 마을 앞으로는 익산의 주산인 미륵산이 손에 잡힐 듯이 눈앞에 놓여 있다.
망산마을에서 팔봉동 소재지로 나오게 되면 1994년에 동산동에서 멀리 이곳까지 이전하여 온 사학명문 원광중고등학교가 숲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당시만 해도 시내와 너무 멀리 동떨어져서 학생들과 시민들의 불만을 샀다고 하지만 이제 머지않아 마한로와 서동로가 완성되면 팔봉을 경유하지 않고도 직행하는 날이 오게 되리라고 본다.
7. 월성동 ․ 임상동 ․ 정족동 지역의 모습
신룡동에서 황등으로 나가는 원광대학로를 따라가다가 허리다리(腰橋)에서 들녘너머 동쪽방향으로 바라보면 임상동과 월성동이 보인다. 현재의 4차선 도로 아래 남아있는 허리다리는 원래 북일면의 도치산과 황등산의 남단과를 연결하는 1,300여 미터의 제방을 쌓았던 황등제(요교호)의 유지이다. 문헌비고에는 이 황등제가 길이는 900보(步)이며 둘레가 25리(10㎞)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형원이 저술한 반계수록에는 황등제(요교호)는 김제의 벽골제와 고부의 눌제와 더불어 나라 안의 모든 제언 중에서 가장 큰 것이라 하여 대제(大提)라 하였다고 한다.
이 제방이 제 구실을 하던 때에는 미륵산에서 발원한 수원인 망동천과 기양천(현재의 팔봉천 및 삼기천)을 받아 저 멀리 동편 망산리까지 요교호라고 불린 큰 호수가 있었으며 황등면의 뱃나들이와 팔봉면의 외화마을 간에는 나룻배를 타고 건너 다녔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황등제는 북으로는 삼기면 서두리에서부터 간촌리를 거쳐 월성동의 신화와 외화를 지나 임상동의 몽함과 오상앞까지 이르는 대 호수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명칭은 황등제이지만 황등제는 삼기면과 황등면, 신동과 삼성동, 영등동에 걸쳐 있던 대규모 호수였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중엽에 그려진 김정호의 동여도나 대동여지도에는 분명히 황등제가 동그란 모습으로 간략히 그려져 있는데 1872년에 간행된 지방도에는 아주 넓은 호수로 보이기보다는 사수(만경강)의 조수가 밀려와 마치 해안의 만이 된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전주부에 속하여 있던 옛 우주현지역인 과거의 이리시 일대가 지도에 불분명하게 그려져 정확한 판단은 어려우나 대체적으로 북쪽으로는 삼기면의 간촌리와 서두리에서부터 남으로 임상동의 몽곶과 오상앞을 거쳐 망산부근까지는 물이 차는 것으로 되어 있고(지도에 산 너머 가까이에 현재 용제동 전라북도 농업기술원 앞마을인 조산부락이 보이고 있다) 서쪽으로는 마치 만석동 일대까지 물이 차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어 비록 정확도가 떨어지는 지도이기는 하나 실로 대단한 크기의 저수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72년 지방도(익산군)]
이는 필시 황등제가 제 구실을 못하는 상황일 때면 만경강물의 조수가 밀려와 오산면 일대를 거쳐 기존의 황등호 지역까지 물에 가득 찬 상태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때부터 인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개보수가 안 되고 방치되어 황등호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함에 따라 1909년에는 임익수리조합에서 황등제 복구를 목적으로 제방을 증축하여 1914년에는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1919년에 발간된 조선 5만분의 1지도에는 요교호의 모습이 아주 정확히 그려져 있다. 요교호가 닿은 마을을 들어보면 북으로는 황등면의 율동, 신평, 삼기면의 화초, 원서두, 석라동, 원간촌, 궁교, 각동, 필동까지이며 월성동의 신정, 내화, 신화를 거쳐 남으로는 임상동의 몽환, 오상, 정족동의 신정, 부송동의 망산부락 앞의 평장교 부근, 부평, 송정, 어양동의 어곶, 영등2동의 마한초등학교부근, 동영, 곡영, 신성, 신동의 익산병원 뒤, 원광대병원일부와 오른편, 서영으로 이어지며 마치 리아스식 해안의 모습을 띤 거대한 규모의 저수지였음이 확인된다. 이는 1872년에 간행된 지방도보다 훨씬 정확한 모습이며 실로 일제 강점기에 복구한 요교호의 규모가 대단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근의 마을에는 1930년대까지 저수지를 건너는 배들을 많았다는 여러 이야기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황등제는 일본에 의한 현대적 수리시설의 효시였으나 1922년에 대아리댐이 준공되고 1935년에는 경천저수지가 완공되면서 그 역할을 상실하였다. 1937년에 저수지는 간척되고 제방은 도로로서의 역할만 하게 되었다.
[1919년의 이리지도]
시원하게 뚫린 23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황등리에서 우회전하여 들판과 기양천을 건너는 면치교를 지나면 월성동이다. 하나1로가 나기 전에는 자동차로 월성동에 오기 위해서는 황등을 돌아 이 길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팔봉을 거쳐 들어와야 했는데 이 길 이름이 바로 부르기가 어색한 황팔길이다. 즉 황등과 팔봉을 잇는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라 하겠다. 여전히 이 길은 구불구불한 옛길 그대로인데 그래도 주변은 보다 깨끗해졌고 발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외화부락에는 부락안에 천주교당인 월성공소가 있다. 그리고 공공기관으로 드넓게 자리 잡은 전라북도 농업기술원 종자사업소가 있고 바로 옆에는 축산위생연구소 익산지소가 있다. 그 바로 옆에는 천주교 문정현신부가 운영하는 작은 자매의 집과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던 종축장을 불하받아 운영되고 있는 천주교 소유의 해바라기 농장이 있다. 그리고 이어서는 성 글라라 봉쇄수도원이 있어서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종교기관들이 이어져 있기 때문인지 성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신정을 지나면 반월부락에는 60년 역사의 이곳 유일의 학교인 삼성초등학교를 만난다.
월성 ․ 임상 ․ 정족동 지역은 모두 14개의 자연마을로만 이루어진 아직도 순수한 농촌지역이다. 월성동의 아래에 위치한 임상동은 월성동이 계속되는 야산지대에 펼쳐있는 것과는 달리 몽환, 동사, 오상, 신림부락 등이 앞으로는 익산시가지를 바라보면서 넓은 들을 대하고 있다. 이 네 부락을 연결하는 길이 너무 협소하였으나 최근에 확장하여서 크게 불편함은 없는 듯 하나 시내의 아파트들이 금방 손에 잡힐 듯한 이곳 마을들의 모습은 아직도 역시 궁색한 시골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야산 구릉지대의 끝자락에 있는 마을인 몽환부락은 원래 어양리의 어곶마을이나 오산면의 용곤(龍串)리와 같이 들녘 방향으로 돌출된 지형의 끝에 있었기에 이름 끝에 「곶」자가 붙었는데 사수(만경강)를 통해 조수가 밀려올 때나 요교호의 물이 가득 찰 때면 마치 반도의 말단부처럼 보였기에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임상동의 임내마을을 막 지나면 정족동의 산정마을이다. 이곳이 과거에 2003년까지는 20년 동안 삼성동의 소재지로서 10여 년 전에 이곳을 지나치면서 보이는 모습은 제법 활기있는 동소재지 같더니 2003년에 새롭게 발전하는 부송동으로 동사무소를 이전하고부터는 완전히 쇠락한 모습으로 남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하여도 대 삼성동의 면소재지였던 이 마을은 묘하게도 월성동과 임상동, 정족동이 만나는 지점에 있어 대부분은 산정마을사람이지만 가까이는 임내마을에 속하는 집도 있고 심지어 멀리 떨어진 월성동의 진자에 속하기도 한다는데, 현재 구 동사무소에 설치되어 있는 이동민원실은 월성동에 속한다고 한다. 이 지역이 아직도 시골인 까닭에 대부분 나이 드신 어른들이 많이 살고 계시기 때문에 이전한 동사무소 출입에 아무래도 불편하므로 이동민원실을 두고 두 분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정족동의 중심지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가장 끝자락에 원봉부락이 있다. 바로 길 하나로 이웃에는 금마면의 삼봉부락이 있다. 누구나 이곳을 처음 찾는 사람은 이 마을이 부송동과 같은 행정구역인 삼성동에 속한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오지마을이다. 아직까지도 금마면 갈산리와 용순리 그리고 팔봉동의 은기동이나 부송동의 정족동지역은 포장도로가 제대로 뚫리지 않은 상태여서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대낮에 자가용으로 지나려 해도 무서움이 밀려오는 곳임에도 아직까지도 이곳 주민들은 전혀 도로 개발의 혜택을 누리고 살지를 못하고 있다. 여기저기에 내고 있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대형도로들이 효율성은 차치하고 경기부양책의 일환으로 필요이상으로 논밭을 집어삼키면서 건설되고 있음을 볼 때, 2차선의 포장도로만 내준다면 주민들의 생활에 긴요하게 필요할 뿐만 아니라 비로소 산간오지를 벗어날 수 있음에도 소리없이 그저 참고 살아가는 나이드신 이곳 주민들의 생활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루빨리 도로확장의 혜택이 이곳에도 주어져서 오지이자 음습한 이 지역이 밝고 건강한 지역으로 변모되기를 빌어본다.
제4절 삼성동의 주요기관
1. 행정기관
(1)삼성동 사무소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 11027호에 의거하여 팔봉면 전 지역이 이리시에 편입되면서 임상리, 월성리, 정족리, 부송리 등 4개리를 각각 법정동으로 하고 통합한 행정동명을 삼성동이라 하였고 나머지 6개리는 각각 법정동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행정동인 팔봉동이 되었다. 처음의 동사무소가 있던 소재지는 월성동, 임상동, 정족동이 만나는 정족동의 산내에 있어 마치 면소재지 마냥 상가가 형성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다가 2000년 이후 부송동의 놀라운 발전으로 2003년에 지금의 장소로 동사무소가 이전하게 됨에 따라 기존의 동사무소 소재지는 쇠락하였고 현재 농촌 어른들의 편의를 위해 구 동사무소 건물을 그대로 두고 2명의 직원이 상주하면서 이동민원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삼성동은 4개 법정동, 56개 통, 17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아파트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현재 10,939가구에 34,306명(남16,772, 여17,534)의 인구로 익산시의 14개 행정동 중 가장 면적도 넓고 인구도 많은 동이 되었다.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공공기관 및 금융기관 그리고 학교가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현재 16
[구 동사무소] [현 삼성동 사무소]
(2)전라북도 농업기술원 종자사업소
지금까지 전북원종장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아직까지 안내판도 그대로 세워져 있으나 사실은 조직개편으로 인하여 이름이 바뀌었으며 정식명칭은 전라북도 농업기술원(익산시 신흥동 소재 구 전북농촌진흥원)소속의 종자사업소이다.
1936년 5월에 전라북도 농민훈련소로 창립된 이 연구소는 1967년 12월에 전라북도 농산물 원종장으로 개칭되었고, 1998년 9월 전라북도 농업기술원 원종과가 되었다가 2001년에 전라북도 농업기술원 원종사업소로 바뀌었고, 2007년 8월에 전라북도 농업기술원 종자사업소가 되었다.
이곳 종자사업소에서 하는 구체적인 업무는 다음과 같다.
1.벼 원원종· 원종 생산 및 공급
2.맥류·두류· 고구마 등 주요 밭작물의 원원종· 원종 생산 및 공급
3.주요 농작물 우량품종 증식종 생산 및 공급
4.원누에씨 및 보급누에씨 생산 및 공급
5.누에씨· 뽕나무 품종보존 및 품종개량 시험연구
6.누에씨 및 나방 병독검사
7.주요 농작물 종자·누에씨· 뽕나무 개량에 필요한 사무
8.생산물 관리ㆍ처분 및 세입징수
9.공인ㆍ재산 및 물품관리
(3)전북축산위생연구소 익산지소
1. 일상경비 예산편성 및 집행
2. 직원 복무관리
3. 가축질병의 방역과 검진
4. 병성감정
5. 지방병성 조사 연구
6. 유방염 감염조사
7. 우결핵, 브루셀라 검진 및 예방주사
8. 추백리 확인 검사
9. 착유하는 소 또는 양의 검사
10. 종돈장, 종계장 위생관리
11. 가축혈청검사 및 우간질 구제
12. 축산물 위생검사 및 관리지도
13. 원유 위생실태 조사
14. 돼지 오제스키병 검진
15. 기타 가축 질병의 방역 및 검정에 필요한 사항
가축방역의 중요성에 대한 실례로 2006년 11월 22일 익산시 함열읍에서 발생한 고병원성 구제역 사고는 충청도 등 여러 지역에서도 나타나 국가적 비상상황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한 인적 물적 손실은 물론 축산농가의 아픔이 너무나 큰 사건이었다.
그동안 익산시는 AI 발생 후 2만 5천여 명의 인원을 투입하고 1천 1백여 대의 장비를 지원해 가금류와 전염이 잘되는 감수성 동물 등 76만수(두)를 살처분했다. 또 살처분 보상 등 지원금은 86억 5천 500여 만 원, 3만 8천여 수의 닭 수매에 7억4천 여 만원, 계란 26만 3천개에 대해 657만원의 판매차액을 지원했다. 이외에도 상수도 시설 사업비 94억원을 지원받아 인근 마을에 상수도를 공급했다.
2007년 3월 들어서야 AI 발생농장 등 4개 농장에 대해 3주간 입식시험 후 시험가축 전 수가 AI항체 음성으로 판정됨에 따라 지난 19일 AI를 종결지었다. 이에 발생농장 및 500m 이내 사육농가 등 입식에 대한 제한사항이 3월 19일부터 완전 해제되어 그동안 제한 받아왔던 모든 농가에 대한 입식이 허용되었다.
또한 기온의 상승과 철새의 북상으로 AI 재발생 위험도는 낮아졌지만, 구제역 등 해외 악성질병의 유입 가능성이 있어 3월부터 5월까지를 ‘구제역 특별방역기간’으로 설정해 우제류(발굽이 두개인 동물)에 대한 예찰 및 방역활동을 강화하였다.
익산시에서 발생한 구제역사고로 인하여 시청직원들의 노고와 농민들의 고통이 너무도 컸기에 방역과 검진을 담당하는 축산위생연구소 익산지소와 시청 축산과가 합심하여 지속적인 예찰 방역활동에 힘씀으로써 다시는 농민에게 가슴 아픈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빌어본다.
(4)부송동 우체국
우체국은 우편ㆍ체신 업무 등을 맡아보는 정부기관인 정보통신부 산하 우정사업본부 밑에 8개의 체신청에 속해 있다. 전북체신청 소속으로 익산시에는 익산우체국이 중앙동에 있으며, 그 산하에는 15개 읍ㆍ면에 각각 1개씩의 우체국이 있고, 시내권에도 모두 15개의 우체국이 있다. 부송동우체국은 부송동 1036번지에 있으며 1996년 12월에 설치되었다.
우체국의 효시는 1884년(고종 21)우정총국(郵政總局)과 인천분국의 설치이며, 1895년 농상공부의 통신국 밑에 24개의 우체사가 있었고, 1900년 한성우체사(漢城郵遞司)를 총사로 승격시켜 전국의 우체사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1949년 <정부조직법>이 제정된 뒤 <지방체신관서설치법>의 공포에 따라 우체국으로 개칭되었다.
1968년 우편물 매일배달제가 실시되고, 1970년 우편번호제 실시, 1973년 서울~부산간 철도우편물 전용차 운행 개시, 1979년 일본· 홍콩과 국제특급우편업무 개시, 1981년 국내특급우편제도 실시, 1983년 체신예금, 체신보험, 국세, 지방세 등 각종 공과금 수납기능 등이 추가되었다. 또한 1986년 우체국을 통해 특산물을 직접 구입할 수 있는 우편주문판매제가 실시되었고, 서신이나 도면 등을 팩시밀리를 이용, 원형 그대로 신속하게 전달하는 전자우편제도를 1984년부터 실시하였다. 우편물 송달체제의 개혁을 위해 1990년 컴퓨터화 된 기계장치에 의해 우편물을 자동 처리해 나가는 서울우편집중국이 개국되었다. 2000년에는 정보통신부 안에 우정사업본부가 신설되어 체신청을 아래에 두게 되었다. 2001년부터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한 인터넷 우체국과 인터넷 쇼핑몰 운영을 시작하였다. 2007년 현재 우체국을 관할하는 체신청은 전국에 8개소(서울, 부산, 충청, 전북, 전남, 경북, 강원, 제주)가 있으며, 우체국 총수는 4,000여 개소에 달하는 거대조직이다.
우편물의 접수 ․ 구분 ․ 발송 ․ 수집 ․ 운송 ․ 배달, 우표· 수입인지의 판매, 우편환·우편대체 및 제 연금의 현금수불, 우편사서함의 사용승인 ․ 변경 ․ 관리 ․ 교부 등의 우편 ․ 체신 업무를 주 임무로 하고 있으며, 이 외에 금융사업도 실시한다. 예금ㆍ적금 ․ 대출 ․ 신용카드 ․ 보험 등의 금융상품 이외에 공과금 수납도 취급하고 있다. 전화 ․ 팩시밀리· 컴퓨터 등의 첨단통신시설이 대중화되고 일상생활이 바빠지면서 편지이용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우체국 고유의 우편업무보다는 전국 분포망을 이용한 금융업무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 거의 전국의 모든 읍 ․ 면 ․ 동에 개설된 4,000여 점포를 통해 손쉽게 공과금을 납부하고 예금 및 대출이 가능하며 특히 우체국 쇼핑과 우체국 택배는 우리 생활에 아주 편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우체국 택배는 가정이나 회사에 직접 우체국 담당자가 방문하여 가져가고 배달하여주는 아주 편리한 서비스 기능으로 자리 잡았다.
2. 교육기관
이곳 임상동에는 일제 강점기에는 학교가 없어 8km나 떨어진 팔봉국민학교로 통학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고장의 유지들에 의하여 1944년 창고를 빌려 성인교육을 실시한 바 있고 해방이 되어 분교장을 설치 운영하다가 1947년에 학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임상동 227번지에 위치한 삼성초등학교는 월성동 반월마을에 접해 있는 학교인데 팔봉면 임상리, 월성리, 정족리의 학생들이 다니던 이 지역 유일의 초등학교이다. 1948년 3월에 개교하여 58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니 졸업생이 4,000명이 넘는다. 이제는 젊은이들이 시내로 떠나고 출산아동들의 현격한 감소로 인하여 총 6학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학생수가 60여명에 교직원은 10명에 지나지 않는다.
『큰 꿈을 이루는 즐거운 학교』를 만들기 위해 《꿈! 예의! 호기심이 넘치는 교육!》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고 노력하고 있다. 교목은 소나무, 교화는 개나리, 교조는 비둘기이며 교육중점은 다음과 같다.
순 |
교 육 중 점 |
교육중점1 |
충ㆍ효ㆍ예ㆍ의 덕성도야 |
교육중점2 |
민족전통의 효와 예술사랑 |
교육중점3 |
정보화 능력 배양 |
교육중점4 |
창의력 신장 |
(2)이리부송초등학교
죽적골 부송동 1047번지에 위치한 이리부송초등학교는 부송동이 개발되면서 1994년 3월에 개교하였다. 여러 아파트가 들어서서 인구가 늘어나므로 처음부터 19학급으로 출발하였다. 현재 총 33학급에 1,064명의 학생들(남학생 580, 여학생 484명)이 다니고 있으며 53명의 교직원이 있다.
교훈은 『푸른 꿈을 키워가며 슬기롭게 자라자』이며 교목은 소나무, 교화는 홍도화, 교조는 까치이며 추구하는 교육의 기본방향과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기본방향 |
충ㆍ효ㆍ예의 바탕에 지ㆍ덕ㆍ체를 겸비한 (된 사람)을 기르는 인간교육 |
예절바른 사람 |
친절과 바른 예절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기본이 바로 된 예절바른 어린이를 기른다. |
능력 있는 사람 |
스스로 공부하고 새롭게 생각하며 슬기롭게 행동하는 능력 있는 어린이를 기른다. |
아름다운 사람 |
참된 아름다음을 알고 가꿀 줄 아는 몸과 마음이 아름다운 어린이를 기른다. |
건강한 사람 |
건강한 신체와 강인한 의지를 가진 안목 있고 기백 있는 건강한 어린이를 기른다. |
(3)이리부천초등학교
어양공원 뒤편 부송동 1070번지에 위치한 이리부천초등학교는 이곳에 아파트 단지가 늘어나면서 부송동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자 1997년 3월15일에 개교하였다. 현재 총 38학급으로 1,200여 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고 모두 60명의 교직원이 재직중이다. 부천(富川)이란 명칭은 신흥동에서 터질목을 지나 팔성다리로 이어지는 농수로 하천이 있었기에 부송동 곁을 지나는 하천을 의미하는 이름으로 보인다(부송동 토박이이신 김수영 선생(75세)의 증언) 원래 부송이라는 명칭은 부평(富坪)마을과 송정(松亭)마을에서 한 자씩 취한 것인데 이제 부송동의 부(富)자에 내를 뜻하는 천(川)자를 붙인 것으로 부평마을과는 상당히 먼 거리인 이곳에 부천초등학교에 이어 부천중학교가 개교를 앞두고 있으니 재미있는 일이다.
교훈은 『해와 같이 밝고 꽃처럼 아름답게 슬기를 키우자』로 정하고 교목은 느티나무, 교화는 철쭉, 교조는 까치이며 추구하는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도덕인 |
웃어른을 공경하고 남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 의식을 가진 어린이 |
창조인 |
새롭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실천하는 어린이 |
자주인 |
올바른 판단력과 표현력을 지닌 어린이 |
건강인 |
강건한 신체와 의지력을 지닌 몸과 마음이 튼튼한 어린이 |
(4)익산궁동초등학교
부송동에서도 가장 최근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개발된 곳이 무왕로의 위쪽, 부평로의 오른편 지역이다. 이곳은 익산시의 맨 북서쪽의 가장자리에 자리하여 팔봉공원과 맞닿아서 산과 논이 연결되고 있는데 이곳에 2003년 3월에 14학급으로 개교한 학교가 바로 익산궁동초등학교이다. 현재 총 29학급으로 982명(남학생 491명, 여학생 491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고 모두 50명의 교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교훈은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며, 바르게 자라는 어린이』로 정하고 교목은 소나무, 교화는 철쭉, 교조는 비둘기이며 추구하는 교육의 기본방향과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기본방향 |
새천년을 이끌어갈 신지식인의 육성 |
건강인 |
보건안전에 대한 기초지식과 기술을 익혀 강인한 정신과 건강한 몸을 기른다. |
도덕인 |
민주시민의 예절과 질서를 익혀 착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생활습관을 기른다. |
능력인 |
학습과 일상생활의 기본 능력을 익혀 창의적인 탐구능력을 기른다. |
자주인 |
주인의식과 자립생활을 익혀 자기주도적인 어린이를 기른다. |
심미인 |
아름다움을 느끼고 가꿀 수 있는 정서적 생활을 익혀 취미와 재능을 기른다. |
(5)한벌초등학교
부송동 삼성아파트와 오페라하우스 부근에 아파트 단지가 계속 늘어나면서 2006년 3월에 26학급으로 개교한 학교이다. 부송초등학교가 인근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이 학교가 설립되는데서 이곳 부송등의 눈부신 발전과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 현재 총 33학급으로 1,176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고 모두 47명의 교직원이 재직 중이다.
교목은 느티나무, 교화는 철쭉, 교조는 까치이며 추구하는 교육의 기본방향과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기본방향 |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하는 학교 |
애국ㆍ예절인 |
충ㆍ효ㆍ예를 바탕으로 한 참된 인간을 기른다. |
자율ㆍ학습인 |
교수ㆍ학습 방법의 개선으로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을 기른다. |
탐구ㆍ창조인 |
기초 과학교육의 충실로 탐구 창조인을 기른다. |
행복ㆍ추구인 |
특기ㆍ적성 교육의 활성화로 꿈과 희망을 기른다. |
심체ㆍ건강인 |
체육 교육의 정상화로 심체 건강인을 기른다. |
(6)익산부송중학교
부송동 240-2번지 선화로의 죽적골 입구에 자리 잡은 익산부송중학교는 2006년 3월에 개교하였다. 무왕로 남쪽의 부송동이 폭발적으로 아파트가 건설되고 인구가 늘어났음에도 중학교가 없기에 학생들의 불편을 덜고자 학년 당 12학급의 큰 학교가 개교하게 된 것이다. 1ㆍ2학년을 합하여 총 24학급으로 827명의 학생이 재학중이며 총 48명의 교직원이 재직 중이다. 이 일대의 인구증가로 인한 학생들의 증가로 어양동의 LG자이아파트 앞에 또 하나의 부천중학교를 짓고 있으며 2008학년도에 개교할 예정이다.
교훈은 『자율과 책임, 창의적 사고, 사랑의 실천』으로 정하고 교목은 소나무, 교화는 장미, 교조는 비둘기이며 추구하는 교육의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사랑인 |
국가와 민족, 이웃사랑은 실천하는 부송인을 기른다. |
실력인 |
교수-학습방법을 개선하여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는 부송인을 기른다. |
창조인 |
과학적 사고력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창의적인 부송인을 기른다. |
자주인 |
민주시민정신을 함양하여 바르게 행동하는 부송인을 기른다. |
건강인 |
건전한 심신을 배양하여 정서가 순화된 건강한 부송인을 기른다. |
(7)익산어양중학교
학교명은 어양중학교 이지만 위치는 부송동 672-1번지에 있다. 무왕로 위쪽의 부송동지역이 개발되고 발전함에 따라 2004년 3월 1일 10학급으로 개교하였다. 현재 학년별 각 10학급 총 30학급으로 1,068명(남학생 570명, 여학생 498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며 모두 58명의 교직원이 재직 중이다.
교훈은 『자율 ․ 협동 ․ 창의』로 정하고 교목은 소나무, 교화는 백일홍, 교조는 비둘기이며 추구하는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애국인 |
나라와 이웃을 사랑하고 질서와 규범을 준수하는 민주시민을 육성한다. |
면학인 |
교육과정의 정상적인 운영으로 자주적 학습능력을 향상시킨다. |
실력인 |
미래사회에 요구되는 실력을 향상시키고 창조적 ․ 합리적 사고력을 기른다. |
자율인 |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 민주적 ․ 자율적 생활태도를 기른다. |
(8)원광중학교
팔봉동 소재지에서 황등으로 통하는 황팔길의 부송동 122-5번지 숲속에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는 익산원광중학교는 60여년의 역사를 가진 전통있는 사립중학교이다. 원래 1945년 5월에 유일학림으로 창립되고 1950년 6월에 원광중학교로 개교하였다. 금년까지 56회 졸업에 총 18,834명의 이 지역 인재를 배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신시가지로 발전한 영등동, 어양동, 부송동에 수많은 초 ․ 중학교가 대부분 1990년대 이후에 세워졌으나 원광중학교는 지금도 한적한 시골에 위치하고 있기도 하지만 일직이 동산동에서 1994년에 이전하여 아늑하고 조용한 숲속에 자리 잡았다. 옛 부지는 10년 이상 빈터로 남아 있다가 드디어 2006년에 이-마트가 들어서서 동산동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가 이루어졌다.
현재 학년별 각 9학급이며 총 27학급으로 916명의 남학생들이 다니고 있고 모두 56명의 교직원이 재직 중이다. 원창학원 재단 내에 원광여중이 있으므로 남성중학교와 함께 순수한 남자 중학교로 남아있는 특색이 있다.
학교생활목표는『맑은 마음, 밝은 지혜, 바른 실천』으로 정하고 교목은 소나무, 교화는 철쭉, 교조는 송골매이며 추구하는 교육의 경영목표는 다음과 같다.
경영목표 |
인성교육을 바탕으로 하는 학력신장 |
경영목표1 |
인성교육으로 은혜를 알고 보은하는 인간을 기른다. |
경영목표2 |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으로 민주사회에 필요한 기본능력과 문제해결력을 기른다. |
경영목표3 |
특기적성과 잠재력을 계발하여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을 기른다. |
경영목표3 |
구성원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민주적인 의사결정과 투명한 학교를 만든다 |
(9)원광고등학교
팔봉동 소재지에서 황등으로 통하는 황팔길의 부송동 9-4번지 숲속에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는 익산원광고등학교는 50여년의 역사를 가진 전통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원래 1954년에 설립인가를 받아 개교하였다. 1950년에 개교한 원광중학교와 함께 동산동에서 출발하였으나 일직이 동산동에서 1994년에 이전하여 아늑하고 조용한 숲속에 자리 잡았다. 옛 부지는 10년 이상 빈터로 남아 있다가 드디어 2006년에 이-마트가 들어서서 동산동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가 이루어졌다. 금년까지 51회 졸업에 총 18,343명의 이 지역의 우수한 인재를 배출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학교이다. 남성고등학교와 함께 익산의 대표적 사학으로 알려져 있고 이리고등학교와 함께 세 학교가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익산의 남자 인문계 고등학교를 대표한다.
현재 학년별 각 10학급이며 총 30학급으로 1,002명의 남학생들이 다니고 있고 모두 70명의 교직원이 재직 중이다. 원창학원 재단 내에 원광여자고등학교와 원광예술정보고등학교가 있으나 여자 중ㆍ고 3학교는 모현동에 있으며 원광고등학교는 원광중학교와 예부터 지금까지 캠퍼스를 함께 하고 있다.
교훈은『진실, 용감, 봉사』로 정하고 교육의 경영관과 경영방침은 다음과 같다.
경영관 |
○건전사학을 바탕으로 바른 인성 및 합리적 사고력 신장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 신장 ○학교 구성원간의 상호 신뢰와 화합 |
경영방침1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학교 |
○민주적이며 자율적인 학교 ○활기차고 사제의 정이 넘치는 학교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쾌적한 학교 ○배우고 가르치는 열기가 가득한 학교 |
경영방침2 존경받는 스승상 |
○사랑과 정성을 다하여 가르치는 교사 ○부단히 자기연찬에 힘쓰는 교사 ○자긍심과 보람이 넘치고 솔선수범하는 교사 |
경영방침3 바람직한 학생 |
○스스로 노력하며 진취적인 학생 ○자율과 책임을 다하는 성실한 학생 ○공동체 의식과 바른 가치관을 가진 건강한 학생 |
[원광중 ․ 고등학교)
3. 공공기관 및 기업체 기타
(1)해바라기농장
현재 농장장으로 계시는 김문곤 옹(75세)의 증언에 따르면 바로 전라북도 종축장이 소라단으로 이주할 때 오스트리아의 카톨릭 부인회가 그 땅을 매입하여 농촌청년들의 농업기술향상과 농촌발전을 위하여 전주수녀원에 기증하여 관리하도록 하였다가 지금은 전주교구소속의 농장이 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여러 작물을 재배하였으나 지금은 노동력 부족과 농업현실에 맞추어 185,000㎡(5만 6천여 평)의 농장에 묘목(소나무)을 재배하고 있다. 이 농장의 일부에 문정현 신부가 작은 자매의 집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므로 서로 경계가 없이 같은 울안에 농장과 작은 자매의 집이 있는 셈인데 아직도 농장에는 일본식 관사와 창고 등이 남아 있다.
(2)작은 자매의 집
문정현 신부의 동생은 임수경 방북사건으로 수감됐던 문규현(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공동대표) 신부이며, 여동생 문현옥씨는 경기도 동두천성당의 수녀다. 문정현 신부는 인권옹호와 불평등한 사회의 모순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1974년부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참가해 활동을 시작했으며, 1975년에 인혁당 사건 관련자 사형집행 저지 싸움에서 무릎 부상으로 5급 장애를 입었다.
1976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시절 ?3․1 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되었고, 1979년에는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되었다. 1987년 익산 창인동 성당 주임신부 시절 노동자 투쟁에 헌신, 이후 전북지역에서는 ?노동자의 아버지?로 불리며 1999년까지 노동운동 현장에서 활동했다. 이를 계기로 현재까지 민주노총 전북본부 고문을 맡고 있다.
인권옹호운동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문 신부는 1990년대 들어서는 통일운동과 반미운동, 한미주둔군지위협정(소파) 재개정 투쟁 등을 펼치고 있다. 2003년 현재 '불평등한 SOFA개정 국민행동' 상임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또한 1986년 전북 익산시 월성동에 있는 천주교 전주교구 소유인 해바라기 농장 내에 ?작은 자매의 집?이라는 정신지체아 보호시설을 열어 1994년에는 사회복지법인 허가를 받고 계속하여 시설을 확장하면서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바로 이곳이다. 현재 25세 이하의 장애우 41명(만 18명, 여 23명)이 보살핌을 받고 있으며 모두가 1등급 내지 3등급에 해당하는 장애우 들이다. 겉으로는 장애인을 위하는 사회정서가 무르익은 듯하지만 ?장애인 시설만을 절대 우리 마을에는 들어오지 못한다?는 님비(NIMBY)현상을 자주 겪는 메마른 세상에서 작은 자매의 집의 의미는 크며, 장애우들에게 보다 더 많은 혜택이 주어질 수 있도록 ?작은 자매의 집?의 무궁한 발전을 빌어본다.
(3)성 글라라 봉쇄수도원
성 글라라 봉쇄수도원은 작은 형제회 한국관구소속의 수도원이다. 성 프란치스꼬(1181-1226)는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소도시 아씨시(Assisi)에서 태어났는데 이 수도원은 수도회의 복음적 소망을 강조하고 성인으로 추앙받은 성 프란치스코를 기리는 수도원 조직인 작은 형제회에 소속된 여성들의 수도원으로 대외접촉을 금하는 봉쇄수도원이다.
이러한 글라라가 12살에 성 프란치스코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아 자기도 프란치스코와 같은 삶을 꿈꾸며 자신의 소명을 확신하였다. 18세인 1212년 3월 18일 성지주일에 출가하여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보속의 수도복'으로 착복되고 순명을 서약하였다
42년간의 수도생활 중 27년간 병상에서 보내면서도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신비는 삶 자체로 드러나는 그녀의 기도에 있었다. 글라라에게 있어 기도는 자신의 존재 전부로 하느님을 숭배하고 사랑함이었고, 수도원의 봉쇄는 주님과 단 둘이 누리는 자유의 공간이었으며, 가난은 그리스도를 관상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었다.
글라라 수녀회는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성 교회 안에서 거룩한 복음을 그대로 본받음을 생활양식으로 하고,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기도생활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인 그리스도 신비체의 완성을 위해 봉헌된 관상 수도회이다. 성 글라라 수도원의 세 가지 정신은 첫째, 봉쇄 생활 속의 관상 생활, 둘째, 철저한 가난의 생활, 셋째, 서로 사랑함이다. 이들은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며 교회와 세상을 위하여 보속하며 당시 썩은 교회의 받침돌 역할을 했다.
현재 한국에는 양양, 양평, 익산, 광주, 인천, 제주에 성 글라라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다.
황등에서 팔봉으로 통하는 황팔길의 외화마을과 반월마을 사이에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익산의 성 글라라 봉쇄 수도원은 1981년 8월 15일에 개원하였으며 담장은 그리 높지 않고, 건물 안에 들어가면 봉쇄라는 문이 있으며 그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수녀원장님과도 나무창살을 사이에 두고 말씀을 나눈다고 한다.
격자(格子)성당이란 작은 방이 있어 많아야 30명 정도의 자리가 마련되고 맞은 편에 격자로 가려진 벽을 통해 성당 제대가 옆으로 보인다. 제대의 앞 쪽에 수녀들의 자리가 있고 제대의 왼쪽에 격자로 가려진 일반인이 미사를 보는 격자 성당이 있다. 벽을 격자(판자)로 비스듬히 막아서 수녀들의 자리를 볼 수 없게 되었으나 제대는 볼 수 있어 함께 미사를 참례할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성당이다.
(4)황등천주교회 월성공소(公所)
공소교우들은 공소를 유지하기 위하여 헌금을 내는데 공소전(公所錢)으로 불렸으나 현재는 교무금제도로 대체되었다. 예전에 본당신부의 공소방문은 1년에 두 번 봄· 가을에 있었는데, 신부방문 때 집행되는 성사가 주로 판공성사(判功聖事)이었기 때문에 각각 ‘봄판공’․‘가을판공’이라고 불렀다.
공소소재 마을의 지대별 입지조건을 보면 전체 공소의 48.2%가 산간지대에, 35.5%가 평야지대에 있고, 9.0%가 도서· 임해 지대에, 7.3%가 도시근교에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82.2%가 순 농촌지역, 12.3%가 반 농촌지역으로 나타나 전체의 94.5%가 농촌지역에 위치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공소는 1799년(정조 23) 이전에 설립되었다.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첫 모습은 공소였으며, 한국천주교회 200년의 반 이상이 공소시대였으므로 천주교회의 모태가 바로 공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소 신자수, 공소전례, 공소사목활동, 공소재정 등의 여러 측면에서 볼 때, 현재의 공소는 옛날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전라북도 전주교구산하에는 84개의 성당이 있고 각 성당이 관할하는 공소가 100개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교통이 편리해짐에 따라 대부분의 공소의 신도들은 본 성당으로 예배를 다니게 되었다. 현재 황등성당 산하에는 월성공소, 신등공소, 삼기공소가 있다. 모두들 황등천주교회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설립된 공소들이나 이제는 세월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시골의 인구도 감소하고 경제력도 약해짐에 따라 쇠락한 모습을 감출 수가 없게 되었다. 1960년 4월에 황등천주교당이 문을 열면서 교통이 불편한 이들 세 지역에 공소를 두고 예배를 보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그 이전의 최초의 개소 시기는 잘 알 수가 없다. 월성공소는 푸른 잔디와 고색창연한 공소건물이 꽤나 어울리고 관리도 잘되고 있어 한껏 아늑하고 경건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5)부송교회
1927년에 교회는 세워졌으나 처음에는 기도소로 운영되었다는 안봉섭 목사님의 설명이다. 전도사나 장로님들에 의하여 교회가 운영되다가 1969년에서야 처음으로 송창식 목사님을 모시게 되었고 1985년 3월에 취임한 3대 안봉섭 목사에 의하여 큰 발전을 이루면서 1995년 4월에 지금의 교회건물이 완성되어 어엿한 모습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현재 네 분의 장로가 있고 신도수는 200여명이나 교세는 시골지역이어서 매우 열악한 형편이다. 하지만 2002년에 바로 교회 앞까지 4차선의 부평로가 뚫리면서 시내권에 들어온 모습이어서 부송등의 발전에 따라 교회의 미래도 밝을 듯싶다.
(6)KB국민은행 부송동지점
한국주택은행㈜과 통합하여 새로 출범한 한국 최대의 은행이다. 1962년 서민경제의 발전과 향상을 위해 설립된 은행으로, 국민은행법 제정에 따라 1963년에 발족했고, 정부가 자본금의 1/2 이상을 출자했다. 1970년에는 학교은행, 1975년에는 봉급생활자 신용대출제도와 학자금제도, 1976년에는 재형저축제도를 실시하여 가계저축 증대에 전환을 가져왔다. 1980년에는 금융기관 중 최초로 신용카드 업무를 실시하였다. 1994년 기업공개 및 공모증자에 이어 국민은행법이 폐지되고, 1995년 완전 민영화되었다. 1998년 소비자금융에 강점을 가진 국민은행은 기업국제금융에 노하우가 많은 장기신용은행과 합병하여 거대 은행이 되었다. 2001년 한국주택은행㈜과 합병하여 한국 최대의 거대은행이 되었으며 2003년에 국민카드를 합병하였다.
점포 수 1,338개, 고객 수 2,410만 명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영업규모와 금융권 최고 규모를 자랑한다. 2003년 총자산 184조 525억 원, 자본금 1조 6,818억 원이다. 본점은 서울 중구 남대문로 2가에 있다. 익산에는 중앙동과 영등동 그리고 부송동에 국민은행 지점이 있으며 부송동지점은 1996년 11월에 무왕로 남쪽의 팔성로 사거리에 설치하였다가 2004년 9월에 무왕로 북쪽 부송동 1102-1번지 백제웨딩 오른편의 지엔지 건물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7)익산원예농협 부송제일지점
부송동 1101-1번지에 있다. 익산원예농업협동조합은 이미 1964년 농협중앙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농협과 축협처럼 통합된 것은 아니지만 크게는 농협중앙회의 관리 하에 있으며 모든 금융 업무는 단위농협과 같고 그 연혁은 다음과 같다.
1957. 12. 09 창립총회 개최
1958. 11. 14 익산군원예협동조합으로 설립
1961. 07. 14 인화동에 농산물공판장 개설(480평)
1964. 12. 31 농협중앙회 회원으로 가입
1967. 01. 30 이익지구원예협동조합으로 명칭변경
1978. 10. 05 창인동 공판장 이리역 폭발사고 후 건물보수 및 신축공사 완공
1981. 09. 09 영등동공판장 개설(440평)
1989. 04. 18 이익원예농업협동조합으로 명칭변경
1989. 11. 01 인화동에 신용사업 개점(60평)
1991. 12. 18 덕기동에 농산물 저온저장고 신축(100평)
1995. 05. 10 행정구역 통합으로 익산원예농업협동조합으로 명칭 변경
1997. 12. 02 어양동에 영등지소 개점(30평)
1998. 01. 05 각공판장 패쇄 후 목천동에 익산시 농수산물 도매시장으로 입주
1999. 09. 30 낭산면에 공정육묘장 신축(1,522평)
2002. 09. 09 영등동으로 영등지소 이전 및 영등제일지점(107평)으로 명칭변경
2003. 07. 01 부송동에 부송제일지소 개점(95평)
익산원예농협부송지점은 앞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2003년 7월에 무왕로 백제웨딩사거리 뒤편의 부평로에 개점하였다.
(8)원광중앙신협 부송지점
주거지역ㆍ단체ㆍ직장ㆍ종교 등의 유대관계를 근거로 조직된 신용협동기구의 하나이다. 현재 한국의 신용협동기구는 추진주체에 따라
①한국신용협동조합연합회 산하의 <신용협동조합>
②마을금고연합회 산하의 <마을금고>
③농업협동조합과 수산업협동조합의 계통조직인 <단위조합>
④어업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상호금융>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들은 구성원에게 경제적인 여· 수신을 행하여 조합원 상호간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비영리적 신용협동조직이다. 한국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은 1960년 5월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28명으로 조직된 성가신용협동조합(聖家信用協同組合)이다.
6.25전쟁 직후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궁핍해 미국의 구호물자에 의존하는 사회적 혼란기였다. 따라서 저축을 하거나 누구에게 돈을 빌려주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환경을 극복하고자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1960년 5월 1일, 부산에서 메리놀 병원 직원과 천주교 교우 27명을 조합원으로 성가신협을 설립했다. 우리나라 신협의 시초이다. 장대익 신부는 같은 해 6월, 서울에서 가톨릭 교인을 대상으로 중앙신협을 설립해 한국 신협의 확산에 불을 당겼다.
그 뒤 1964년 4월 55개의 신용협동조합이 한국신용협동조합연합회를 창설하였고, 이 연합회는 그 해 5월 국제신용협동조합연합회에 정식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1989년 신용협동조합중앙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1972년 8월<신용협동조합법>이 제정됨에 따라 한국의 신용협동조합은 설립· 출자· 대출한도· 이자율· 예탁금 등 여러 사항에 대하여 규제를 받게 되었다. 1960년 당시 총자산 규모가 8만 7,000원에서 1990년 3조 5,976억 원으로, 2003년에는 19조 1,900억 원으로 늘어났다. 조합수는 1960년 3개에서 1990년에 1,315개였고 2007년 현재는 1,015개 이다.
익산시에는 신용협동조합 중앙회 산하에 20개의 신용협동조합이 있으며 원광신협 부송지점은 부송동 1037번에 있는데 부송우체국부근에 있다.
(9)이리중앙새마을금고 부송지점
새마을금고는 이웃간에 서로 돕고 사랑하며 협동하는 우리 고유의 자율적 협동조직인 계, 향약, 두레 등 마을생활의 공동체 정신을 계승하고, 협동조합의 원리에 의한 신용 사업, 공제사업 등의 생활금융과 문화복지후생 사업, 지역사회개발사업 등을 통하여 회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나아가 지역공동체의 발전과 국민 경제의 균형발전에 기여하는 금융협동조합이다.
새마을금고의 역사는 향토개발사업의 하나로서 1963년에 경상남도에 설립된 다섯 개의 조합에서부터 시작됐다. 1963년 5월 25일 산청군 생초면 하둔리, 5월 26일 창녕군 성산면 월곡리, 6월 3일 의령군 의령면 정암리, 6월 9일 의령면 외시리, 6월 12일 남해군 남해면 마산리에서 새마을금고의 전신이 탄생된 것이다.
초기의 마을금고 운동은 뚜렷한 이념과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며 명칭도 금고가 아닌 신용조합이었다. 초기 마을금고 설립 주체였던 재건국민운동본부 경상남도지회 요원들이 당시 신용조합의 교육기구였던 협동조합 봉사회의 제3차 신협 지도자 강습회 때 자극을 받고 각자 자기 마을에 돌아가 조합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운동은 급속히 뻗어 나가 1963년 말에 경상남도 지역에서 모두 115개의 조합이 설립되었다. 마을금고는 재건국민운동중앙회가 해체된 1975년 12월까지 가장 주된 사업으로 지도, 육성되었다. 1973년 3월에 새마을금고연합회가 창립되고 1983년 1월에는 새마을금고법 제정(법률 제3622호)되어 시행되었다.
2006년 현재 1,579개의 새마을금고가 조직되어 있으며 회원수는 1,540만 명이 넘고 새마을금고자산은 50조원을 이미 돌파하였다. 창인동에 있는 이리중앙새마을금고의 부송동 지점으로 2005년에 팔성로 사거리에 설치되었다.
(10)(주)KT 익산지사 익산지점
부송동 부평로 왼편에는 KT건물과 하치장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KT(KT Corp.)는 전기통신사업의 효율적 경영을 위해 정보통신부에서 통신부문을 분리하는 공사화 전환 계획에 따라 국민의 편익 증진과 공공복지 향상을 기치로 내걸고 1981년 12월 10일 설립 되었다. 역사가 가장 오래된 전화 ․ 초고속통신망 업체인 이 회사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85 한성전보 총국(화전국)개국
1902 한성(서울)~인천간 전화 개통. 한성~개성간 전화 개통.
1903 개성~평양간 전화 개통
1905 한·일 통신협정 체결, 한국의 통신권을 일본이 장악
1907 경성(서울)~평양간 시외전화 개통
1908 경성우편국, 공전식 교환기(복식) 개통
1911 경성~부산간 전화 개통
1915 전기통신 현업기관인 전신 전화소 창설
1920 평양우편국, 직렬복식 교환기(대형 시외교환기) 설치
1922 철도, 공중전화 취급 개시
1923 경성중앙전화국 설치
1924 경성~펑톈(선양)간 장거리 전화 개통
1933 경성~오사카 간 전화 개통
1934 금강산 무선전화, 공중통화 개시
1935 나진우편국에 최초로 자동전화교환기(SH식) 설치. 경성중앙전화국, 자동전화 교환기(ST식) 설치
1937 경성전화국, 도수요금제 실시
1941 전화 통화도수 및 통화시간 제한
1945 한ㆍ미간 무선전화 개통, 최초로 국제 직통전화 개시
1946 경성ㆍ 대전ㆍ부산ㆍ대구ㆍ광주에 전신전화건설국 설치
1950 서울 국제전신전화국 신설, 부산전화국 신설, 한·일간 무선전화 개통, 서울~ 타이베이 간 무선전화 개통
1955 대구· 대전에 전신전화국 설치
1958 국제전신전화국, 국제전화 DSB방식을 SSB다중방식(ISB)으로 전환, 전국공중 전화 도수제 실시
1959 서울 국제전신전화국, 전화조정장치(VODAS) 설치
1960 이동무선전화업무 취급 개시(최초의 공중차량 무선전화), 표준 교환방식으로 서 EMO교환방식을 도입
1962 가입전화 설비에 특수장치제도(전화기 이동, 발착신 전용, 전화번호 대표취 급등)실시, 국산 전화기 생산 개시, 옥외 무인공중전화 최초로 설치
1965 서울·부산·대구에 DDD 운용 개시
1969 동축케이블 통신방식, 최초로 서울~수원 간 80회선 개통, 한· 미간 위성직통 전화 8회선 구성, 전화기 50만대 돌파 기념행사
1970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개통, 공동전화, 집단전화, 집중전화 설치· 운용 개시
1971 서울~부산 DDD개통, 남북직통전화 개설
1977 시외 자동공중전화 개통
우편업무는 1884년 우정국이 그 효시이지만 전신전화는 1885년에 개국한 한성전보총국화전국이 KT㈜의 출발점이다. 해방이후 1950년에 우편업무와 분리되어 전신전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였지만 체신부 소속으로 우체국에서 그 업무는 함께 담당하다가 1981년 한국전기통신공사로 발족하면서 완전 분리되기 시작하였고 1994년 아시아 최초로 전 세계를 잇는 첨단 인터넷망과 위성통신망을 확보하여 한국을 선진 정보통신 대열에 올려놓았으며, ADSL 서비스 도입, 초고속 국가망 구축 등 인터넷망 구축에 역량을 검증하며 초고속 인터넷 사업자로서 기반을 다졌다. 1997년 정부투자기관 한국통신(Korea Telecom)을 거쳐, 2001년 12월 현재의 KT㈜로 상호를 변경하였고, 2002년에는 정부소유 지분을 처분, 민영화를 이룩했다. 산하에 이동통신 분야를 담당하는 ㈜KTF를 비롯하여 14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무선통신서비스 시장의 확대를 위해 2000년 한솔엠닷컴㈜을 인수한 자회사 ㈜KTF와의 결합을 통해 무선사업 기반을 다지는 등 유ㆍ무선을 망라하는 통신사업자로서의 입지를 구축했다. 초고속 인터넷 시장의 후발 사업자로서 사업 개시 1년 만인 2000년 국내 초고속 인터넷 시장 1위 달성에 이어, 국내 최초로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100만을 돌파했다. 2001년 전화발신번호서비스(CID)를 시작하였으며, 2003년 인터넷 500만 가입자 기록을 돌파하였다. 2006년 12월 총자산 17조 9,623억 원, 매출액 11조 7,721억 원이다. 본사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에 있다.
말하자면 KT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백 여 년 간 체신부산하에서 우체국과 함께 우리에게는 낯익은《전신전화건설국》으로 불리었다. 전신전화건설국은 공사화되어 1981년부터는《통신공사》로 부르게 되고 전화시설 공급에 주력하여 1982년 450만에 불과했던 전화회선을 1993년 2000만 회선으로 확충하면서 정보화를 앞당기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후 초고속 인터넷의 출현과 함께 1997년부터는《한국통신》으로, 2001년부터는《KT》라고 불리는 변신을 거듭해온 민영화된 회사이다. 이 회사와 경쟁하는 회사로 SK텔레콤, LG텔레콤 등이 있으며 전화, 이동통신(핸드폰), 초고속 인터넷 등이 주력업종이다.
KT익산지사(남중동 소재)는 익산지점과 군산지점을 두고 있으며 부송동에 소재한 KT건물은 익산지점 소속으로 부송동, 영등동, 어양동, 신흥동 등 익산의 신도시지역과 공단지역이외에도 금마면, 여산면, 왕궁면, 춘포면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으며
2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11)신익산화물터미널
무왕로와 부평로가 만나는 사거리에 위치한 백제 웨딩홀은 5개의 예식홀을 가진 익산에서는 가장 큰 초대형 예식장으로 무왕로 북부의 부송동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하던 2002년 12월에 개장하였다. 모현동 배산 앞에 있는 갤러리아, 영등1동의 알리앙스와 함께 익산의 예식장을 대표한다. 특히 어양동, 부송동지역의 유일한 대형 예식장으로 1,000석의 연회장과 500대를 수용하는 주차장이 완비되어 있다.
1960년대 초 만 하여도 시골에서 행하여지던 전통혼례는 근대문화의 발전과 도시화로 인하여 60년대 중반이후에는 완전히 사라지고 전문예식장이 생겨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아직도 서양의 선진국에서는 대부분 교회나 마을 공회당을 이용하고 동남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은 신랑신부집이나 식당 같은데서 보통 하루에서부터 길게는 일주일 동안 성대하고 진지하게 이루어지는데 반하여 우리나라와 일본정도만이 예식장을 이용한 결혼식이 주류라고 한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식장에서 많은 하객을 초청하여 결혼식이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하객들 모두가 진심으로 신랑신부를 축하하는 모습인지, 가족 친지들 앞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진지하고 엄숙한 자리가 되고 있는 것인지 우리 모두가 반성하면서 새로운 결혼문화의 패턴이 자리잡아주기를 기대해 본다. 너무나 실용적 측면만 강조되는 나머지 그저 형식적이고 그저 빨리, 그리고 너무 가볍게 결혼식을 치르고 마는 것이 아닌지 성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고착된 우리의 결혼문화는 그래도 예식이 끝난 후에는 신랑신부가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고 예식장에 마련된 폐백실에서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는 절차를 지키는 것으로 전통의 맥을 조금이나마 이어가고 있음에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제2장 삼성동(삼성동)의 전통마을
제1절 부송동(富松洞)
조선시대에는 원래 익산군 두천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작천리, 망산리, 부평리, 송정리의 전 지역과 팔봉리, 석치리, 궁동, 어곶리의 각 일부지역으로 구성되었다. 부송동이라는 명칭은 부평과 송정에서 한 자씩 취한 것이다. 1983년 팔봉면 전 지역이 이리시에 편입됨으로써 이리시 법정동인 부송동이 되었다.
망산(望山)은 ?바라메?라고도 부르는데 원래는 20여 호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으나 1970년대 이후 야산개발로 인가가 부쩍 늘었다. 정족동과 임상동의 여러 마을에서 들 건너로 바라보이는 외딴 마을이므로 ?바라뫼?라는 뜻으로 한자음 표기인
망산이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아니면 미륵산이 손에 잡힐 듯이 눈앞에 놓여 있어 전망이 아주 아름다운데서 나온 이름인지도 모를 일이다. 마을 앞으로는 두천(豆川)이 흐르고 있어 망동천(望洞川)이라고도 부르는데 은기리에 내두마을이 있고 부송동에 망산이 있어 마을이름과 관련지어 부른 이름으로 보인다. 1980년경에 56호가 살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61호가 살고 있다.
[망산마을] [부평마을]
을로 알려져 왔다. 처음에는 홍씨가 들어왔으나 곧 이사하였고, 뒤이어 이씨와 오씨, 그리고 윤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보통 ?부평?이라는 지명은 특정한 부자가 그곳에서 넓은 땅을 집단으로 경작하게 되면 붙여지기도 하는데 이곳 부평마을의 이름도 그러한지는 확실치 않다. 이 마을의 옆 마을인 송정마을과 어양동의 어곶마을은 함께 붙어 이어지는데 이를 싸잡아 ?느릇?이라고 부른다. 이는 이곳의 지형이 낮은 들 쪽으로 늘어진 모양이기에 ?늘곶?이 변하여 ?늘곳?이 되고 이는 다시 ?늘읏?이 되고 또?느릇?이 되었다. 이를 문법적으로 풀이하면 늘곶이 늘옷이 된 것은 ㄱ이 ㄹ받침 아래에서 묵음화, 즉 탈락한 현상이다. 늘옷이 느롯으로
발음되는 것은 연철음화 된 것이고 느롯이 느릇이 된 것은 음모음화현상으로 모두나 쉽고 편하게 소리내기 위함이다. 부평동쪽 골짜기에는 부송제라는 저수지가 있었다고 한다. 1980년경에 무려 83호나 되는 큰 마을 이었다고 하며 그중 파평윤씨
가 17호였다고 한다. 현재는 110호나 되는 엄청난 자연마을이 되었다.
송정(松亭)은 1710년경에 여산부 황화면의 신월리에 사는 한 사람이 들어온 것이 처음으로 이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소나무가 무성하여 마치 정자와 같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송정 남쪽에는 송치제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1980년경에 57호가 살았다고 하는데 현재도 57호가 그대로 살고 있다.
작천(鵲泉)은 1780년경 임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고 뒤이어 김씨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작천은 마을 앞에 까치샘이라는 샘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샘은 공동우물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먹거리들을 다루는지라 늘 많은 까치들이 날아와서 먹이를 찾기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추측된다. 40호가 넘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부송동 도심의 한가운데 옛 작천 마을이 옛 모습을 조금은 간직한 채 조금 남아 있다. 백제웨딩타운 앞쪽에 움푹 들어간 지대에 아주 작게나마 작천마을 옛 마을길과 밭이 남아있고 겨우 대여섯 집이 텃밭을 일구며 그대로 남아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작천마을은 팔성로와 무왕1로 사이에
[송정마을] [작천마을]
묻혀서 길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몇 집이나마 남은 이유는 남은 면적이 너무 좁아서 마땅히 개발이 용이하지 않아서라고 한다. 채소밭만 조금 남았을 뿐이어서 논밭도 제대로 없고 농사에 의지하여 사는 주민들이 아니기에 사실상 작천마을은 이제는 자연마을의 모습을 거의 상실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작천 동쪽에는 작천제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1980년경에 43호가 살았다고 하며 그중 여흥민씨가 11호였다. 현재도 5~6호가 살고 있으나 이제는 자연마을이라고 볼 수도 없거니와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모습도 그리 오래갈듯 싶지 않다. 까치샘이라는 명칭은 백제웨딩 뒤편에 까치샘 아파트가 있어 마을 이름을 앞으로도 전하게 되었다.
제2절 정족동(鼎足洞)
조선시대에는 원래 익산군 지석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원봉리, 상정리, 하정리, 원봉리, 산정리의 전 지역과 내두리 일부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한자이름인 정족은 원래 본 이름인 ?솥발이?의 한자 표기인데 그 어원은 지형이 솥의 발같이 3면으로 뻗어 있기에 생긴 명칭이라고 한다. 정(鼎)은 원래 음식류를 끓이는 용기로 중국의 신석기시대부터 토기형태로 제작되었다. 이후 하(夏)시대부터는 토기대신 청동기로 제작되었는데 이후 오랫동안 사용하였다. 몸체 아래에 삼족(三足)을 붙여 열을 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되기도 한다. 상정마을의 뒷산을 중심으로 아래로 뻗은 세 골짜기를 솥발과 같이 본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1983년 팔봉면 전 지역이 이리시에 편입됨으로써 이리시 법정동인 정족동이 되었다.
[원봉마을] [상정마을]
원봉(元峰)은 옆에 접한 금마면의 삼봉(三峰)과 구분된 명칭으로 ?원 삼봉?이라는 뜻이다. 익산 삼기(三奇)의 하나로 알려진 일년에 세 번 열린다는 밤나무(三栗)는 아직도 이 마을에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한 나무에서 20일 간격으로 세 번 꽃이 피어 제각기 성숙해 간다고 한다. 석왕동의 석치 남쪽에 있는 산인 지네산에서도 삼율이 난다고 하는 것을 보면 꼭 원봉에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원봉의 동쪽에 있던 산을 삿갓재라 하였는데 삿갓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삿갓재 서쪽에 있던 산은 매 받던 곳이라 하여 매봉재라 하였다고 하는데 꿩 사냥과 관련되어 지어진 이름인 듯 하다. 1980년경에 46호가 살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29호가 살고 있다.
상정(上鼎)은 소빠리(鼎足)를 상ㆍ하로 구분하여 구분한 명칭으로 상정과 하정으로 나누어 부르게 되었다. 예전부터 소씨가 살던 마을이라고 한다. 상정은 소빠리의 안쪽을 이룬다하여 안소빠리라고 한다. 1980년경에 41호가 살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52호가 살고 있다.
하정(下鼎)은 상정과 분리하여 부르는 마을로 그 유래는 상정과 같다. 소빠리의 바깥쪽을 이루는 마을이라 하여 밧소빠리라고 한다. 또 원봉과 하정을 합쳐 부르기를 원정(元鼎)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하정 동쪽에 있던 산을 양산재라 하였다. 하정은 작은 마을이었으며 현재에도 16호가 살고 있다.
[하정마을] [산정마을 구 면소재지]
산정(山亭)은 임상리의 임내마을이 크게 번창했을 때에 임내와 산정의 사이 고개 말랑이에 정자를 지었기로 임내에서 부르기를 ?산정너머?라는 뜻으로 부른데서 생긴 명칭이라고 한다. 마을 북편의 팔봉 황등선 도로가 된 구릉지대를 재의 등성이가 진 곳이라 하여 ?잿등?이라 하였다. 1980년경에 32호가 살았다고 하는데 이곳이 과거에 2003년까지는 20년 동안 삼성동의 소재지였으며 10여 년 전에 이곳을 지나치면서 보이는 모습은 제법 면 행정의 중심지 같더니만 2003년에 발전하는 부송동으로 동사무소를 이전하고부터는 완전히 쇠락한 모습으로 남았다. 현재는 29호가 살고 있다.
이밖에도 요골(하정 북쪽에 있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제3절 임상동(林相洞)
조선시대에는 원래 익산군 지석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림리, 임내리, 오상리, 몽곶리의 전 지역으로 그 중심인 임내의 ?임?자와 오상의 ?상?자를 한자씩 취하여 임상리라 하였는데 1983년 팔봉면 전 지역이 이리시에 편입됨으로써 이리시 법정동인 임상동이 되었다.
신림(新林)은 새 임내라는 말로 ?임내?와 구분된 명칭이다. ?아랫말?이라고도 부르는데 임내에서 아랫동리라고 부르기에 보편화되어 부르게 된 명칭이다. 1980년경에 농가만 32호가 살았다고 하는데 그중 안동권씨가 15호였다고 한다. 현재는 22호가 살고 있다.
[신림마을] [임내마을]
임내(林內)는 예전에 숲으로 싸여 있는 마을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숲 안이라는 뜻에서 ㅍ이 탈락하여 ?수안?, 또는 ?솔밭 안?이라는 말이 쉽게 불러
?솔안?이 되고 다시 ㄹ 이 떨어져 나가?소안?이라고도 부르며 아주 오래된 마을이다. 숲 안에 있는 마을이기에 한자음으로 ?임내?가 되었다. 초기에 안동권씨가 들어와 권씨촌이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현재에도 이웃마을인 신림과 월성동의 ?반월?,?진자?등에 많이 살고 있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옛날에는 이 마을이 큰
부촌으로 기와집이 즐비하였으며 황등 방면에서 익산군의 소재지인 금마로 가던 사람들이 금마로 잘못 알고 짐을 풀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온다. 1980년경에 총 40호가 살았다고 하는데 그중 안동권씨가 27호나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59호가 살고 있는 큰 마을이 되었다.
[동사마을] [몽환마을]
몽환(夢串)은 마을지형이 앞 뒤의 들 사이로 길게 빠진 구릉의 서쪽 끝에 위치하였으므로 마치 꿴 꼬치 같다 하여 ?뀜고지?가 변하여 ?꿈고지?가 되고 한자어로?몽곶?(夢串)이 되었는데 이것이?몽곤?으로 변하고 ?곤?을 ?환?으로 읽는 속례에 따라?몽환?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반도처럼 생긴 육지의 말단부에 위치하였다 하여 마을이름에?곶?자가 붙은 것은 어양동의 어곶마을도 있다.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은 단순히 마을이 산등성이의 끝자락에 위치해서만은 아니며 옛날 대규모의 황등제가 있었을 때나 또는 황등제가 제 구실을 못하여 사수(만경강)의 조수가 밀려올 때면 마치 바다의 돌출부 말단에 자리한 마을형국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마을에 양촌대가 있으며 마을의 서쪽 끝에 있는 뜸이며 고려 말의 사대부인 양촌 권근이 귀양 와서 정자를 짓고 지내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이 마을의 동쪽에 있던 산은 오상에서 몽환과 반월로 통하던 고개인데 돌팍재라 하였으며 고인돌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1980년경에 총 40호가 살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34호가 살고 있다.
이밖에 모작바리(동사 서북쪽에 있던 마을)라는 지명도 전해오고 있다.
제4절 월성동(月星洞)
조선시대에는 원래 익산군 지석면 지역이다. 1914년 진자리, 반월리, 신성리, 율촌면의 내ㆍ외화리의 전 지역과 사제면의 궁교리 일부로 구성되었다. 월성이라는 명칭은 반월의?월?자와 신성의?성?자를 취하여 월성리라 하였으며 1983년 팔봉면 전 지역이 이리시에 편입됨으로써 이리시 법정동인 월성동이 되었다.
진자(榛子)는 원이름인 ?개금말?의 한자표기이다. 개금이란 개암의 전북지방 방언이니 개암이란 개암나무의 열매로서 모양은 도토리 비슷하며 껍데기는 노르스름하고 속살은 젖빛이며 맛은 밤 맛과 비슷하나 더 고소하다. 이를 한자로는 진자(榛子)라고 한다. 이 마을에 개암나무가 많았기에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1980년경에 총 40호가 살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24호가 살고 있다.
[진자마을] [반월마을]
반월(半月)은 그 서편 골짜기 이름이 ?쪽다리골?인데 그 ?쪽다리?를 반월(半月)로 표기한 것이다. ?쪽?은 반(半)으로, 다리는 고대에 달(月)을 다리라 하였기에 ?쪽다리?를 ?반월?이라고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쪽다리골?은 쪽
(藍)풀이 무성해서 생긴 명칭이라고도 하고, 또 지형이 반달처럼 생기기도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볼 수 도 있다. 원래 ?다리?는 ?드르→드리→다리?로 변한 것으로 ?들?이란 뜻이다. 만일?쪽 풀이 많은 들?이라는 뜻이 맞는다면 ?다리?를 ?월(月)?로 표기한 것은 제 뜻의 한자로 표기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남야(藍野)라고 쓰는 것보다는 쉽고 이해도 빠르게 반월이라고 쓴 것이라 하겠다.
반월을 ?새터?라 고 부르는 것은 ?새로 생긴 터?라는 뜻에서 부르는 명칭이지만 동네가 새로 생긴 것은 아니며 이미 200여 년 전에도 동리가 있었던 곳이다. ?뒷말?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임상리의 임내마을에서 자기마을의 뒤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부르던 명칭이 보편화한 것이다. 반월리에서 외화로 가는 잿등이에 있는 뜸을 신정(新亭)이라하는데 전에는 ?신성(新成, 新城, 新星)?등 여러 한
자로 쓰였는데 이는 반월리와의 사이에 있는 새(間)의 재라는 뜻에서 ?샛재?라고 하던 것을 ?신성(新城)?으로 썼거나, 새로 이루어진 넓고 평평한 땅이라는 뜻인 벌(벼리)이라 해서 ?신성(新星)?이라고 했을지도 모르는데 ?별(星)?의 옛말이 ?벼리?이기 때문이다. 또 ?신정?은 풍수설에서 말하는?삼성락지(三星落地)?라 한다. 따라서 ?삼성(三星)?이란 명칭이 이루어진 뒤에 근처에 인가가 생김으로서 ?신성(新成) 또는?신성(新星)?이라고 했을 수 도 있다. 그것은 1937년에 황등저수지의 간척으로 내화의 삼성촌(三星村)이 새로 이루어졌을 때에 노인들이 ?삼성촌과 신정 일대를 예로부터 삼성락지라 하였으니 삼성이라고 지으라?고 하여 이루어진 명칭이고, 광복 후 반월리에 세워진 삼성초등학교도 그런 뜻에서 당시 노인들의 의견에 따라 정해진 이름이라고 한다. 1980년경에 총 86호나 되는 큰 마을이었다고 하는데 그중 안동권씨가 23호나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77호가 살고 있다.
내화(內化)는 그 명칭의 유래가 외화와 같다. 곶의 안쪽이 되므로 고지안이어서 고잔이 되었고 또 다시 바깥쪽의 고잔은 밖고잔이 되고 안쪽의 고잔은 안고잔이 된 것이다. 이 때 ?고지안?이 ?곶잔?으로 줄어 한자로 꽃의 옛말 곶과 음이 같아서 한자음 표기로 바꾸어서 내외로 구분하여 부름에 따라 내화(內花)가 되고 내화(內化)로 변하였다. 내화 동남쪽에 있던 산을 매봉산이라 한다. 내화에서 분리된 신화와 내화를 합쳐 내신이라고 부른다. 내신은 1980년경에 총 74호나 되는 큰 마을이었는데 두 마을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내화는 현재 47호가 살고 있다.
[내화마을] [신화마을]
신화(新化)는 요골이라고도 하는데 1937년에 요교호(황등저수지)가 간척됨으로써 생긴 마을로 내화에서 분리되어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 마을을 삼성촌이라고도 부른다. 신화는 현재 25호가 살고 있다.
제3장 삼성동의 문화유적과 유물
제1절 부송동 청동기 시대 집자리 유적
(1)발굴현황
부송동 유적은 1993년 부송동 택지개발과정에서 발굴된 유적이다. 원광대학교 마한ㆍ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하여 발굴되어 모두 3기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는데 기존에 이 지역에서 청동기 유물은 상당수 채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청동기 시대의 집자리가 조사되지 않았던 익산지역에서 처음으로 청동기 시대의 집자리가 발견되고 조사되었다는데 그 의의가 큰 유적이다. 오늘날 부송동의 KT익산지사부근인데 원래 사유지였기에 이후 개발이 이루어져 현재는 흔적조차 없는 곳이 되었다. 당시 유적발굴조사단의 조사원으로 참여했던 이신효 현 왕궁리유적전시관 학예연
구사님을 통하여 부송동 및 영등동 유적지의 위치를 정확하게 확인 할 수 있었다.
(2)관련유구
3기의 집자리는 모두 평면의 형태는 원형이고, 내부 유형으로는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중앙의 구덩이 양쪽에 각각 1개씩의 기둥과 이를 중심으로 방형을 이루도록 4개의 기둥을 배치한 것이고 또 하나는 중앙의 타원형 구덩이 양쪽에 1개씩의 주공만이 배치된 것이다.
(3)출토유물
(4)부송동 유적의 의의
송국리형 집자리 유형인 부송동 집자리 유적은 대략 기원전 1,000 ~ 800년 전인 영등동 집자리 유적의 후기 형태와 같은 계열의 집자리 유적으로 부장유물 역시 영등동과 비슷한 유형인 홍도, 발형토기, 그리고 석검, 석촉, 삼각형 석도, 석착과 함께 곡옥이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영등동 집자리 유적의 후기형태인 부송동 집자리 유적은 전형적인 송국리형 집자리 유적인 점을 고려한다면 영등동보다는 다소 늦은 시기인 기원전 8 ~ 7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강하류의 충적평야에 발달한 농경지를 확보한 익산지역의 청동기시대 주민들의 주거환경은 대부분 해발 10m 내외의 낮은 구릉위에 살면서 농업에 종사하였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주거유적이 익산지역 영등동과 부송동 집자리 유적이며 이외에 인접지역인 전주 여의동, 완주 반교리 집자리 유적 등의 여러 유적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낮은 구릉인 충적평야 평지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는 유적들로서 도작농경의 확산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특히 이곳 부송동 집자리 유적에서 볍씨자국의 토기가 출토되어 이런 유형의 지대는 도작농경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익산지역에 농경이 이루어졌을 만한 고고학적 증거로는 이밖에 농경이나 수확관련 석기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많은 양의 석촉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수렵생활도 함께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보다 앞선 시기의 부근 영등동 집자리 유적에서는 적지 않은 어망추가 출토되고 있어 어로생활도 겸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석재 방추차(가락바퀴)와 토제 방추차가 출토 되고 있어 방직물을 제작하여 의류생활을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제2절 임상동 고인돌 유적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두천면의 덕기리, 석왕리, 팔봉리, 석암리, 용제리, 부송리와 지석면의 은기리, 정족리, 임상리, 월성리를 병합하여 최초로 팔봉면이라는 행정구역이 확정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불과 90여 년 전만 하여도 부송동을 제외한 삼성동 지역은 지석면(支石面)이었으며 그 명칭은 고인돌, 즉 지석묘(支石墓)가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인 것은 쉽게 짐작하여 볼 수 있다.
익산군 지역의 지석묘에 대한 또 다른 기록으로는 고려시대 대문호인 이규보(1168~1241)가 전주사록겸 서기의 직책으로 근무하면서 기록한《남행월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산은 여느 고을과 비해서 더럽지 않았고 고산에서 예양으로 예양에서 낭산으로 갔는데 하룻밤씩 자고 갔다. 다 음날 금마군으로 향하여 갈 때에 소위 [돌팍재 전경] 지석(支石)이라는 것을 보았다. 지석이란 것은 속전하기를 성인이 고인 것이라는데 과연 기적(奇蹟)도 이상한 것이 있다? 아마 이규보는 고인돌을 처음 본 것으로 여겨지는데 낭산에서 금마로 가는 도중에 지석을 보았다고 하므로 그 경로로 보아 결코 임상동의 몽환마을이 아니기에 당시 지석묘는 비단 지금의 임상동의 몽환마을에 한 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낭산이나 삼기지역에도 여러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하여 볼 수 있으며 특히 삼성동지역에 많았으므로 지석면이라는 명칭이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익산의 어느 곳에도 고인돌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나 증거는 없다. 애석한 일이다.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거석문화의 일종이다. 거석문화는 자연석이나 가공한 돌을 사용한 건조물로, 고인돌 외에 선돌(立石), 환상열석(環狀列石:Stone Henge), 돌널무덤(石棺墓), 돌무지무덤(積石墓)등이 있다.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 혹은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로도 부르고,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라 하며, 기타지역에서는 돌멘(Dolmen)이나 거석(巨石)으로 부른다.
한국의 고인돌의 기원으로는 먼저 자생설을 들 수 있다, 이 설은 우리나라에 가장 밀집 분포하고 형식도 다양하며, 주변의 고인돌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는 데서 나온 주장이다. 설령 독자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세계적인 밀집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고 또 오랜 기간 축조되어 어느 지역의 고인돌보다도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고 보는 설이다.
두 번째는 남방 기원설이다. 이는 동남아시아로부터 해로를 통해 도작(稻作)문화와 함께 중국 동부 해안 지방과 한반도에 전파되었다는 설이다. 이설은 우리나라의 평안도, 황해도, 전라도등 서해안을 따라 고인돌이 집중 분포하는데서 나왔으나, 중국 동해안 지역 가운데 고인돌이 분포하는 곳은 절강성뿐이고 그나마 40여기에 지나지 않는데다 형태도 다르기 때문에 주장에 무리가 있다고 보고 있다.
세 번째는 북방기원설이다.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인 고인돌이 북방의 청동기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요녕지방의 돌널무덤(石棺墓)에서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돌방무덤(石室墳)의 뚜껑돌이 1매석으로 대형화되면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 되고, 지하의 무덤방이 지상에 드러나면 북방식 고인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요령지방 주변과 시베리아 등 북방지역과 서유럽 사이에는 고인돌이 분포하지 않는다.
이제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아시아 지역의 중심 분포지가 우리나라이고 형식도, 북쪽에는 북방식이 남쪽에는 남방식이 많으며 돌널무덤과 유사한 개석식 고인돌이 요령성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남북방의 문화를 융합한 독자적인 고인돌 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인돌의 축조 시기는 일반적으로 일본에서는 죠몽(繩文)시대 후기에서 야요이(彌生)시대 중기까지, 서유럽에서는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 초기까지, 동남아시아에서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거석 숭배 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청동기 시대로 알려져 있다.
신석기 시대 축조설은 고인돌이 씨족 공동 무덤의 성격을 띠며 그 주변의 간석기, 빗살무늬토기편이 출토된다는 점에 근거 한다.
청동기 시대 축조설은 중국 요녕 지방의 고인돌 연대에 비기어 기원전 2000년대 말기설과 기원전 1000년대 초,중기설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기원전 8세기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진다. 하한 연대는 BC 3-2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고인돌의 형태로는 먼저 북방식(탁자식)을 들 수 있다. 잘 다듬은 판석 3-4매로 짜맞춘 석실을 지상에 축조하고 그 위에 편평하고 거대한 판석상의 돌을 얹은 것으로 책상을 닮았다 하여 탁자식으로도 부른다. 대형북방식은 요동반도와 한국 대동
강 유역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구릉이나 산중턱에 1기씩만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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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남방식, 오른쪽은 북방식 고인돌]
다음은 남방식(바둑판식ㆍ기반식)이다. 판석을 세우거나 깬 돌을 쌓은 무덤방(묘실)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4-8개의 받침돌을 놓은 뒤 커다란 돌로 덮는 것으로 바둑판 모양이라 하여 기반식으로도 부른다. 덮개돌이 거대하고 괴석상을 한 것은 호남과 영남지방에서만 보이며, 무덤방은 없는 것이 많다.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의 고인돌은 소형의 덮개돌에 받침돌을 괴었다.
다음은 개석식(무지석식)인데 이것은 지하에 만든 무덤방위에 바로 덮개돌을 놓은 형식으로 요동반도, 한반도, 일본 큐슈 지역에 널리 분포한다. 이는 지석이 없는 남방식으로 분류하여 무지석식이라고도 한다.
고인돌의 설치목적에 대해 생각해보면 청동기인들은 영원불변의 자연물, 즉 돌에 대한 숭배나 관심에서 거대한 바위를 이용한 기념물을 축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시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죽은 사람이 다시 활동할 수 없도록 시체를 매장한 뒤 큰 돌로 덮은 것이 아닐까도 여겨진다. 그 위치는 주로 큰 강이나, 하천변의 평지, 구릉 위, 산기슭, 고갯마루 등 사람이 활동하는 주변에 세웠는데 이는 무거운 돌을 얻고, 옮기기 쉽게 하려는 이유에서였다.
고인돌의 부장품에 대해 조사해보면 고인돌의 출토 유물에는 크게 석실 안에 부장했던 의례용 유물과, 석실 주변에서 발견되는 실생활용 유물이 있다. 의례용 유물에는 무기류, 토기류, 장신구류 등이 있으며 무기류가 가장 많아 간돌검과 돌화살촉 등이 있다. 청동기는 비파형동검이나, 청동도끼 등이 있다. 비파형동검은 한반도 남쪽에서도 널리 출토된다. 고인돌에서 출토된 인골을 보면 하나의 무덤방에 한 사람만 묻는 것이 보통이지만, 북방식 고인돌은 무덤방안을 몇 개의 칸막이로 막은 공간에 여러 사람을 묻은 특수한 예도 있다.
고인돌의 축조에 대해 알아보면 고인돌의 제작은 채석 - 운반 - 조립의 단계로 진행된다. 덮개돌은 대개 10t 미만이지만 대형은 20-40t에 이르며 100t이상 되는 초대형 덮개돌도 있다. 덮개돌은 대개 주변산에 있는 바위나 암벽에서 떼어낸 바위를 이용했는데, 덮개돌의 측면에 일정한 구멍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바위틈이나 암석의 결을 이용하여 떼어 낸 것으로 보인다. 이 떼어낸 돌은 축조할 장소로 옮겨지게 되는데 둥근 통나무와 밧줄로 옮겨지게 된다. 즉, 둥근 통나무 여러 개를 엇갈리게 깔고, 덮개돌을 옮겨 놓은 후 끈으로 묶어 끌거나 지렛대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운반해온 덮개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또는 받침돌에 흙을 경사지게 돋은 위로 끌어 올린 후 흙을 제거했다고 추측된다. 대개 30여 톤의 돌을 운반 하는 데는 약 200여 명 이상의 인원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보아 족장의 무덤으로 보거나, 일정한 지역안의 혈연 혹은 지연으로 뭉친 공동체 사회의 공동 무덤으로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 전북지방의 고인돌에 대해 알아본다, 고인돌은 북유럽, 서유럽, 지중해 연안, 인도, 동남아시아, 동북 아시아등 거의 세계 전역에 분포하며 바다에 인접한 곳에 밀집해 있다. 그 중 동북아시아에는 중국의 절강성에 40여기, 요령성에 300여기가 있으며 일본에는 600여기가, 한반도에는 무려 3만 여기가 분포한다. 대동강 유역의 1만 여기와 전라도 지방의 2만 여기가 바로 그것이다. 북방식 지석묘의 대표적인 것으로 강화도 송해면과 하점면 부근리의 고려산 북쪽에 30여기가 있는데 길이 7.1m 폭 5.5m의 대형 고인돌이 있다. 전남에는 영광군 홍농읍 성산리,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등에 고인돌군이 있다. 우리 전북 지방에는 부안 고창일대에 널리 분포하며 거의가 남방식이다.
□부안 구암리 고인돌군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 (귀암부락) 707번지에 있으며 사적 제 103호로 지정되었다(1963년). 모두 13기의 지석묘군으로 그중 가장 큰 것은 길이 6.3m, 폭 4.50m의 구갑형에 두께 0.69m로 남방식 지석묘 중 가장 크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고창 죽림리ㆍ상갑리 고인돌군
고창군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조밀한 고인돌의 분포 지역이다. 그 수는 대개 2천 여기로써 고창읍의 매산리와 죽림리 일대, 아산면 상갑리, 해리면, 무장면, 공음면, 상하면 등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그중 고창읍 도산리 고인돌은 북방식 이어서 특이하며, 아산면 운곡리의 고인돌은 높이 5m, 길이 7m, 폭 5m로 우리나라 최대 크기이다.
죽림리 일대 고인돌군은 고창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9.5Km거리에 위치하며 매산 마을을 기점으로 동서 약 1,764m에 걸쳐 산줄기의 남쪽 기슭을 따라 표고 15m - 50m의 범위내에 군을 이루며 등고선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
이 고인돌군은 1965년 국립 박물관에 의해 3기가 발굴 조사된 이래 1990년 전라북도와 원광대학교의 주관으로 3개월에 걸친 현지 조사에 의해 442기가 조사되었으며 파괴· 매몰된 108기를 합하면 550여기가 확인되었다. 고창의 고인돌은 그 숫자의 방대함 뿐 만 아니라 다양한 형식, 즉 북방식인 탁자식, 여러 매의 벽석이 지상에 노출된 지상 석곽형, 남방식인 바둑판식, 기타 개석식 등 다양한 형식이 분포하고 있으며 무게가 10톤 미만에서부터 300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여 우리나라 고인돌 연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가치는 실로 인류사적 가치를 지닌다. 그리하여 2000년 12월 죽림리 일대의 고인돌군은 화순 고인돌 유적, 강화 고인돌유적과 함께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삼성동 지역인 정족동, 임상동, 월성동은 팔봉동의 은기동과 함께 야트막한 야산지대이면서 미륵산에서 발원하는 하천인 기양천과 망동천이 사수(만경강)을 통해 서해로 흐르는 곳이니 청동기시대에 밭농사뿐 만 아니라 논농사까지도 발달하기에 유리한, 농경에 아주 적합한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그들에 의해 고인돌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을 입증하는 유적이 바로 1993년에 발굴된 부송동 주거지 유적과 1995년에 발굴된 영등동 주거지 유적이다. 고창과 부안에서 찾을 수 있는 고인돌이 익산의 삼성동에 지금까지 잘 보존되었더라면 어쩌면 남방식 고인돌이 최북단에 위치하는 고인돌로써 그 문화재적 가치가 클 뿐 만 아니라 익산의 백제문화권을 더욱 윤택하게 하면서 하나의 큰 관광자원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에 일제강점기까지 남아있던 마지막 한 기(基)마저 주민에 의해 소멸되고 만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다면 우리 익산이 가진 또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클 터이나 이제는 지석면이라는 명칭과 함께 그 실체도 사라져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제3절 양촌대지(陽村臺址)
임상동 몽환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양촌대의 터는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이며 정치가로 이름이 높았던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이 익주에 유배되었을 때 세워진 누각이 있던 자리라고 하나 양촌이 이곳에 머무른 기간이 수개월이 되지 못하므로 유배당시에 지은 것이라기보다는 후일 조선 개국 후 영화를 누린 시기에 옛시절을 생각하여 지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지금은 전혀 흔적이 없고 대지만 남아 있는데 20여 년 전에 이 대지의 부근 대숲에서 청기와 여러 점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아마 양촌대가 상당히 잘 지어진 누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양촌대는 몽환마을의 가장 서쪽 끝의 10여가가 모여 사는 곳으로 마을 뒤편에는 해발 25m 높이의 산이 있고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곳은 600여 년 전에는 이곳에 대규모의 황등호수가 있어(또는 황등제가 제구실을 못하여 사수의 물이 밀려들어 올 때면) 서쪽 호수방향으로 길게 늘어진 몽곶마을 중에서도 끝자락에 위치한 이곳 양촌대는 양촌대의 소나무 숲과 저수지에 비치는 낙조가 어울려 대단히 아름다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양촌 권근은 1352년(공민왕 1년)에 태어나서 1409년(태종 9년)에 죽었다. 본관은 안동이며 초명은 진(晉)으로 자는 가원(可遠)이고, 호는 양촌이다.
양촌은 1368년(공민왕 17년)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 성균관 직강, 예문관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鄭夢周)ㆍ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을 주장하였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ㆍ성균관 대사성ㆍ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1388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1389년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을 때, 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중도에 몰래 뜯어 본 죄로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
그 뒤 영해(寧海)· 흥해(興海) 등을 전전하여 유배되던 중,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그해 2월 계림옥에 갇히었다가 흥해로 귀양가고 4월에는 김해로 옮겨졌으며 5월에 청주옥에 갇혔다가 6월 달에 홍수가 나서 청주옥을 휩쓸자 면방 되었다가 7월에 다시 이곳 익주(益州)에 유배되었으며 11월에 석방되어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이때가 1390년으로 그의 나이 39세 때이며 그는 이 해 7월에 이 곳에 왔고 11월에 귀양이 풀려 돌아갔으니 대략 4-5개월을 이곳에서 머물은 것이며 이때 그의 대표적 저술인 《입학도설》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그런데 양촌이 이곳 몽환마을에서 유배생활을 한 기간은 기껏해야 4-5개월인데 그나마 처음에는 미륵사에 거주하였다는 기록(뒤에 기록한 양촌의 시 ?월야봉사지주사혜주(月夜奉謝知州事惠酒)?참조)이 있으므로 이 짧은 기간에 정자를 짓고 살만한 여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지는 않으므로 아마 귀양살이가 끝난 뒤 그가 귀하게 된 후에 그 시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자를 지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든다. 아마도 처음에는 미륵사에 거주하다가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으로 옮겨 왔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곳으로부터 미륵사까지는 직선으로 시오리 밖에 되지 않는다. 마을 뒤편으로 올라가면 미륵산이 바로 눈앞에 다가오는 곳이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3년(태조 2)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태조의 아버지 환조(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 바쳤는데, 이 글들은 모두 후세사람들로부터 유문(鎪文)·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 뒤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ㆍ중추원사 등을 지
[양촌의 글씨] [권람의 응제시주]
이때 그는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 아니라, 유삼오(劉三吾)ㆍ허관(許觀) 등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명나라 태조의 어제시(御製詩) 3수를 받고, 응제시(應製詩)24편을 지어 중국에 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이때 지은 응제시(應製詩)중에는 고조선의 개국시조인 단군설화가 담겨있어 역사적 자료가 되며 선생의 손자인 권람(權擥)이 주석을 더하여 응제시주(應製詩主)를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고, 정종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私兵制度)의 혁파를 건의, 단행하게 하였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4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을 뽑았고,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 중시(重試)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한편,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하고, 하륜(河崙) 등과 《동국사략》을 편찬하였다.
또한, 유학제조(儒學提調)를 겸임하여 유생교육에 힘쓰고, 권학사목(勸學事目)을 올려 당시의 여러 가지 문교시책을 개정, 보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하여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하였고,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鄭夢住)ㆍ김구용(金九容)ㆍ박상충(朴尙衷)ㆍ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專)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연구에 정진하여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주로 《입학도설 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 五經淺見錄》으로 대표되는 바, 《입학도설》은 뒷날 이황(李滉) 등 여러 학자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오경천견록》 가운데 《예기천견록 禮記淺見錄》은 태종이 관비로 편찬을 도와, 주자(鑄字)로 간행하게 하고 경연(經筵)에서 이를 진강(進講)하게까지 하였다. 이밖에 정도전의 척불문자(斥佛文字)인 《불씨잡변 佛氏雜辨》 등에 주석을 더하기도 하였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 40권을 남겼는데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을 남기었으니 시 980수, 다양한 문장 315편이 있고 《동국사략》은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 역대 왕조의 역사를 기술하고 비평적 견해를 서술한 것이며 《동현사략》은 고려왕조 후기의 명현 24인을 뽑아 사적을 기술한 전기집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선생은 당시 문단의 최고의 위치에 있었으며 나라의 중요한 정치, 외교상 문서가 모두 선생의 손에서 저술될 만큼 대 문장가였다.
선생의 묘소는 선생의 사당과 함께 현재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있다. 고려말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서 고려멸망 직전에 유배를 다니던 중 이곳 익산의 지석면 몽환마을에 잠시 머무른 까닭에 익산과 인연이 맺어진 대 문호 권근의 흔적은 이제 크게 남아있지는 않으나 이곳 양촌대는 그의 삶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게 해 주고 있으며 후일 조선왕조에 등용되어 공신이 되어 큰 업적을 남기고 그의 향촌에 잠들어 있다. 양촌 선생이 익산의 미륵사 및 삼성동 임상리 몽함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남긴 시들을 소개한다.
익주(益州)에 도착하여 청주성의 그 날도 홍수가 져서 은사(恩赦)로 자유의 몸이 되었네. 익주에 온 오늘밤도 뇌우(雷雨)가 심하니 누가 축객(逐客)을 가엾이 여겨 잠 못 이룰가.
到益州 西原當日到漫天 肆眚鴻恩己霈然 此夜益州雷雨急 誰燐逐客獨無眠 ◈청주옥에 갇혀 있다가 홍수로 인하여 석방되고, 익산으로 유배 온 것으로 추측 된다. |
회포(懷抱)를 적어 봄
창밖에 청산 깍은 듯이 솟아 시름 올 때 눈 들면 뚜렷이 달라지네. 가을바람 나날이 옷깃 스치니 높은 봉우리에 올라 서울이나 바라보고 싶구나.
書懷 窓外靑山似削成 愁時擧目轉分明 秋風日日吹巾杖 欲上高岑望玉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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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에 지주사(知州事)가 보내준 술에 사례하며
귀양 와 적막히 절간에 머물다가 어찌하여 이 좋은 밤 술이 생겼나 오히려 풍류있어 자랑할 만 하고 노승의 노래솜씨 놀랍기도 하구나.
月夜奉謝知州事惠酒 謫來廖落寓禪窓 何幸良宵得酒缸 猶有風流堪詑處 老僧能解唱高腔
◈스스로 주(註)를 달아 이르기를 익주에 귀양 와서 미륵사에 머물었으며 늙 은 중이 있어 노래를 잘했다고 한다. 익주지사가 보낸 술에 사례하는 시이 다. |
중추(中秋)
지난 해 추석은 중원(中原)에서 만났더니 올해는 익산으로 귀양와서 만났다. 해해마다 가절(佳節)때면 돌아가는 나그네가 부럽고 술을 드니 시름 띤 얼굴 또 한번 붉어지네.
가을바람 옥로(玉露)로 은하를 씻어내어 달빛은 이 밤사 더욱 밝다는데 애달프다 뜬 구름 해를 가리어 술잔 놓고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구나.
종을 불러 적(笛)을 불리고 노승은 노래하니 건부(蹇父)를 불러다가 비파를 뜯게 하네. 누구라서 양촌의 많은 흥미를 알아줄까 귀양살이 기특한 일 자랑스럽기도 하구나.
中秋 去歲逢秋齊魯東 如今謫在益山中 年年佳節思歸客 得酒愁顔又一紅
秋風玉露洗銀河 月色由來此夜多 惆悵浮雲能幣日 停盃一問欲如何
僮奴吹笛老僧歌 蹇父呼來札琵琶 誰信陽村多興味 謫來奇事亦堪誇
◈중원은 중국의 중심부인 황하의 중류유역을 말하는데 양촌은 전년도인 1389 년에 중국에 사신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건부는 절름발이 촌로를 뜻한 다. 외롭고 쓸쓸한 귀양살이 중에서도 음악을 즐기는 한 가닥 여유 있음을 읊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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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명승지
제5장 민속과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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