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무주의 역사
무주의 역사와 문화
1. 서언
무주에 온지 2년이 지났다. 그 동안 무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나 무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조사를 미처 하지 못했다. 향토문화에 그래도 관심을 많이 가져온 역사교사로서 근무지인 이곳 무주의 역사문화에 대한 관심을 아직까지 발현하지 못한 것은 분명코 직무유기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무주에 대한 역사와 문화재를 소개하고 향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고취시키는 작업을 여태까지 하지 못한 것이다. 군청이나 문화원에 의지하기 이전에 나 스스로 근무지인 무주에 대한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학습자료를 제작하여 특별프로그램으로 강의할 필요성을 이제야 느끼게 된것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 우선 무주군청 홈페이지를 활용하여 역사와 문화재를 정리하고 아직 답사하지 못한 문화재를 하나하나 직접 답사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주의 향토 문화 교육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무주는 아름답다. 가까운 영동과 함께 청정지역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금강상류가 마치 능사가 기어가는듯 굽이 굽이 휘돌아 흐르고 아름다운 산들이 강과 함께 어우러진다. 김제 평야지대에서 태어나 평생을 김제와 익산과 부안과 전주와 군산을 오가며 살아온 내게 아름다운 무주에서의 근무는 나를 유혹할 만 했다.
읍내를 동서로 남대천이 가로지 르고 ,앞뒤 좌우로 산들이 둘러 있는 무주읍은 해발 200m의 전형적인 산골읍이다. 학교 뒷산이 향로봉(440m)이며 읍내의 주산이다. 내가 살고 있는 관사가 해발 220m이니 영락없이 향로봉의 절반 높이요, 따라서 향로봉은 기껏해야 200여 미터이니 하시라도 오르는 산이다.
내도리 안쪽에서 얕은 재를 잠간 넘으면 다다르는 아직도 금산군 부리면에 속하는 강변마을 농원부락과, 무주읍에 속하는 신댐이골의 역시 강변마을인 원방우리가 있어 요즈음 관심이 많다. 무주읍에서 채 십리밖에 안되는데도 두 마을은 모두 강으로 막혀 밖으로는 무주읍으로만 통하는 조선시대에나 있을 법한 마을이라서 관심이 생긴 것이다. 짧은 2년 동안 이곳에 근무하는 다른 누구못지 않게 많이 돌아 다니기는 했지만 무주를 알려면 아직도 멀었다. 이유야 간단하다. 토요일이면 즉각 무주를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무주를 더 좀 알자고 근무중에 마음대로 나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무주읍 주변만이 아니라 적상이나 부남 안성도 더 많이 알기 위해 드라이브를 좀 더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이번 토요일은 즐거운 노령산맥 상부지역을 헤집고 다녀볼까 하여 혼자서도 결코 외롭지 않은 드라이브를 계획한다.
부남면 부당초 - 부남면 소재지 - (지방도 635)금산군 남일면 - (국도 13)용담면소재지 - (지방도 795)용담댐 - 정천면 소재지 - (지방도 725)주천면 소재지 - (지방도 55)운일암 반일암 - (지방도 732)대아댐 - 고산 - 봉동 - 삼례 -익산
향로봉에서 본 무주읍 전경-가장 왼편으로 적상산의 남동발전소 관망대가 보인다.
오른쪽으로 여러개의 산봉우리가 보이는데 이름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향로봉에서 보이는 내도리 모습이다. 등성이 왼편으로
원방우리 마을이있고 등성이를 넘어가면 오른편으로 농원마을이 나온다.
2. 무주의 자연과 인구
서쪽으로 진안군·장수군, 북쪽으로 충청남도 금산군·충청북도 영동군, 동쪽으로 경상북도 김천시와 경상남도 거창군에 접한다. 1읍 5면으로 이루어져있다.
소백산맥의 서쪽 사면, 금강의 최상류에 위치하여 군 전체가 산악지대에 속하며, 산지 사이에 계곡이 발달하였고 그 주변에 고원 형태의 분지와 평야가 있다. 설천면(雪川面)과 충청북도 영동군과의 경계에 민주지산(1,242m), 무풍면(茂豊面)과 경상북도 김천시와의 경계에 대덕산(1,290m), 안성면(安城面)과 설천면 및 경상남도 거창군과의 경계에 두문산(1,051m)·덕유산(1,614m) 등이 있고, 군의 중앙인 적상면(赤裳面)에 적상산(1,034m)이 있다.
우리학교가 읍내 시가지보다 20여m나 높으므로 1층인 교무실에서 바라보아도 무주읍 앞에 놓인 산들이 모두 보인다. 학교는 남남서방향인데 저 왼편 거의 남쪽 방향으로 적상산(1,034m)이 보이고 바로 왼편에 적상산 관망대가 보이며 오른쪽 남서 방향으로는 마향산(730m)과 조항산(선경공원묘원 799m)이 보인다.
금강지류 하천은 남대천·구량천 등이 있는데, 남대천은 설천면의 무주구천동에서 발원하며, 구량천은 안성면에서 발원하여 금강의 발원지라고 하는 장수에서 시작하는 장수천과 진안 상전면 천반산에서 만나 용담저수지로 흘러든다. 진안 용담댐에서 충청도 지역으로 흘려 보내는 물이 부남소재지를 지나 무주읍 대차리 앞에서 설천에서 흘러 내려온 남대천과 만나고 내도리를 돌아 금산군의 부리면의 적벽강을 지난다. 영동을 지나서 대청댐으로 들어가 결국에는 부여를 지나 군산 앞바다로 흘러간다.
내도리는 거의 완벽한 섬모양이다. 안동의 하회마을과 거의 흡사한 내도리는 향로봉에 올라 바라보면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다. 금강이 휘돌아 겨우 몇 발치만 산등성이로 남겨 놓았다. 이 산등성이 고개를 잠간 넘으면 농원마을이며 행정구역은 금산군 부리면인데 부리면으로 통하는 다리도 없고 배도 없어 별수 없이 무주로 다시 나와야 하며 학생들도 모두 무주읍으로 다닌다. 우리학교 바이애슬론 선수인 미래도 이 마을에 산다.
지금은 내도리에 다리가 놓여 무주읍에 속하지만 1914년까지는 내도리 앞섬과 원방우리는 금산군 부동면이었다. 하긴 1980년대에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중고생들은 비가 오면 배를 타고 건너야만 무주에 소재한 학교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안성면과 설천면 심곡리(深谷里)에서는 화강암질 편마암이 심층풍화되어 고원 형태의 분지가 발달하였는데, 심곡리는 해발고도 800~1,000m에, 안성면 장기리(場基里)는 해발고도 400~550m에 나타난다. 특히 안성면의 경우에는 심층풍화된 상부에 적황색토가 덮여 있고 여기에 구리향천이 개석(開析)한 후, 현재 하천 주변에 충적단구가 있어 3단의 단구상(段丘狀) 지형이 발달하여 한국 내륙분지의 형성과정을 모식적(模式的)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후는 연평균기온 12℃, 연평균강수량 1,300mm로 남내륙형 기후구에 속하나, 지대가 높아서 고랭지 기후지역이 많다. 군을 상징하는 꽃은 철쭉(진달래), 나무는 주목, 새는 원앙이다.
면적/가구/인구(2009.12)
구분
무주군
무주읍
무풍면
설천면
적상면
안성면
부남면
면적
631.90㎢
79.41㎢
91.22㎢
158.23㎢
135.82㎢
97.26㎢
69.96㎢
세대
11,262
3,922
1,117
1,958
1,285
2,210
770
인구
25,979명
9,643명
2,406명
4,549명
2,834명
4,980명
1,567명
무주군은 남북으로 뻗은 소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삼한시대때 동편은 변진(변한과 진한), 서편은 마한에 속해 있었고, 삼국시대에는 변진의 무풍땅은 신라에 속하여 무산현이라 했으며, 마한의 주계땅은 백제에 속하여 적천현이라 했던 것을 통일 신라 이후에는 종전의 무산을 무풍현으로, 적천을 단천현으로 개칭했던 것인데 고려 건국과 함께 무풍현의 지명은 그대로 두고 단천현을 주계현로 바꾸어 사용해 왔다.
그 후 조선 태종 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옛 신라땅의 무풍과 백제땅 주계를 합병,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편제하면서 두 고을 이름의 첫자를 따 무주라는 새로운 지명을 붙여 사용하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자료1 1872년 무주부지도 해설
무주부는 지금의 전북 무주군 중에서 부남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무주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무주는 조선 태종 14년(1414)에 茂豊縣과 朱溪縣을 합하여 만든 고을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에 위치해 있다. 동쪽으로 백두대간과 연해 있어서 고을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에는 이러한 고을의 특성이 잘 부각되어 있다. 특히 준험한 적상산성의 모습이 입체감 있게 확대 묘사되었다. 금강 상류인 남대천이 고을을 가로질러 흐르는데 이 하천을 중심으로 시점이 반대로 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작은 지역을 표현하는 회화식 지도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것이다. 읍치에는 각종의 관청 건물이 그려져 있고 寒風樓, ?翠樓 등의 누각도 보인다. 읍치의 전면 하천 변에는 범람을 방지하기 위해 쌓았던 제방도 그려져 있다. 읍치 남쪽의 적상산성은 사방이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산성으로서는 천혜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려 1374년(공민왕 23)에 최영의 건의에 따라 산성이 만들어졌고, 1639년(인조 17) 巡檢使 朴潢의 건의에 따라 다시 쌓았다. 1614년(광해군 6)에 史閣을 창건하여 1618년에 실록을 봉안하였고, 璿源閣은 1641년(인조 19)에 세워진 것이다. 別將을 두어 守城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곳도 다른 산성과 유사하게 사찰의 僧軍을 산성 방어에 활용하였는데 護國寺가 이를 담당하던 사찰이었다.
참고자료2 대동여지도속의 무주
참고자료3 오늘의 무주지도(daum 지도활용)
참고자료4 무주읍 역사
무주읍은 마한에 속했는데 나중에 백제의 적천현(赤川縣)으로 되었다가,통일신라 경덕왕 때 단천(丹川)으로 이름을 바꾸고 종전에 이성현(伊城縣)으로 불렸던 진례현(進禮縣)에 예속되었다.
고려 때에는 주계현(朱溪縣)으로 개명(改名)되었는데, 현의 중심지였다. 조선 태종 14년(1414) 무풍현과 통합되어 무주현(茂朱縣)이 되었으며 치소(治所)가 주계성에 설치되어 무주현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당시 무주현의 행정구역은 부내면ㆍ북면ㆍ서면ㆍ신풍면ㆍ풍서면ㆍ풍남면ㆍ풍동면ㆍ상곡면ㆍ유가면 등 9개 면이었다. 그 중 무주읍에 해당하는 지역은 부내면(현재의 읍내리 오산리 대차리의 다산), 북면(앞섬을 제외한 내도리 일대), 서면 (다산을 제외한 대차리 용포리 가옥리), 신풍면(장백리) 등이었다.
현종 15년(1674) 적상산성 사고(史庫)와 관련하여 무주현이 무주도호부(茂朱都護府)로 승격된 후에도, 현재의 무주읍은 본군의 전역을 관할하는 관아(官衙)가 설치된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1914년 지방제도 개편이 단행되었다. 이 때 종전의 부내면(府內面) 전역을 비롯하여 서면(西面)과 북면(北面)의 전역, 신풍면(新豊面)의 상장(上長)과 하장(下長)이 통폐합되었다. 여기에 금산군의 부동면에 속하던 전도리(前島里. 앞섬)와 금산군 부리면의 요대마을을 편입시키면서 무주군의 소재지이자 중심지가 되어 무주면(茂朱面)으로 이름하였다. 그 후 1979년 5월 전국의 군청소재지가 있는 면(面)이 읍(邑)으로 승격되면서 무주읍(茂朱邑)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1년 현재, 무주읍의 행정구역은 8개 법정리(法定里), 행정상 30개 리, 152개 반(班), 34개 자연마을로 구획되어 있다.
참고자료5 무풍면 역사
면의 중심인 현내리(縣內里) 부근은 화강암이 침식풍화된 해발고도 400~900m의 분지이고, 그 주위는 해발고도 700~1,000m의 산지이다. 주곡 농업 외에 고랭지채소 엽연초 등이 생산된다. 현내리에서 무주 김천거창 방면으로 통하는 도로가 분기된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에 속했었고 현재도 경상도와 인접하여 언어풍속이 영남권에 가깝다.
삼한시대에는 변진의 감문국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으로 치소(治所)였다. 신라의 변방(邊防)이던 무산은 백제의 적천현과 국경을 이루었으며, 신라 경덕왕 때 무풍(茂豊)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성종 때에는 신라권역의 영남권에서 백제권역인 호남권으로 편제되어 강남도 남원부 진례현의 속현(屬縣)이 되었으며, 명종 때 실시된 감무제(監務制)에 따라 무풍현의 감무가 주계현의 행정까지 관할하였고 한 때는 병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태종 14년, 전국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풍과 주계가 통폐합되어 무주(茂朱)라는 새로운 지명이 생기면서 치소가 주계로 옮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무풍은 무주현에 딸린 면(面)단위의 행정구역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무풍의 행정구역은 풍동면(豊東面. 현재의 현내리, 지성리, 금평리)과 풍남면(豊南面. 현재의 철목리, 증산리, 은산리)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별다른 변화가 없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옛 이름을 되찾게 된다. 즉 무주군이 6개 면으로 나뉘게 되는데, 무풍은 풍동과 풍남을 통폐합하고 종전의 횡천면(橫川面, 지금의 구천동 덕지리 지역)에 속해 있던 덕동과 오정동을 편입시키면서 옛 명칭을 다시 살려 무풍면이 된 것이다. 1414년 무풍현이 폐지된 후, 500년 만에 옛 지명을 되찾은 것이다.
조선 후기 참위설(讖緯說)과 풍수지리설을 신봉하던 술가(術家)들의 말에 의하면, 무풍은 십승지지(十勝之地)14)의 하나이다.
특히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에 나온 것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풍으로 찾아와 난리를 피하고 정착하기도 하였다. 즉 무풍은 술가들이 복지(卜地)로 선망(羨望)하던 곳이다. 한편 현내리에는 명례궁(明禮宮)이 있었다.
2001년 현재, 무풍면의 행정구역은 8개 법정리(法定里), 행정상 17개 리, 55반(班), 43개 자연마을로 구획되어 있다.
참고자료6 설천면 역사
삼한시대에는 백제의 적천현과 신라의 무산현에 속하여 무주구천동 제33경중 제1관문인 <라제통문>의 명칭이 삼국시대부터 유래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단천현과 주계현으로 개칭된 후 조선전기에는 무풍현과 주계현을 통합하여 무주현이 되자 풍서면으로 불리우다가 중기에는 현대 안성면과 횡천면과 신풍면(현재 : 두길, 심곡, 삼공)의 일부를 흡수하였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도 행정구역 개편당시 풍서면과 횡천면 그리고 신풍면 3개면을 통합하여 <설천면>으로 개칭된 후 10개 법정리 25개 행정리로 편제되어 있다.
참고자료7 적상면 역사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으며, 백제의 적천현, 통일신라의 단천현, 고려의 주계현에 속하였고, 조선 태종 이후에는 주계현이 무주현으로 개칭됨에 따라 무주현에 속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유가면[柳加面, 현재의 사천리와 사산리(마산 제외), 삼유리와 방이리, 그리고 안성면 진도리]과 상곡면(裳谷面, 현재의 북창리 괴목리, 사산리의 마산 마을과 안성면의 사전리)으로 나뉘었었다. 한편 적상면의 관할지는 현재의 무주읍과 동일한 과정을 거치면서 변경되어 왔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유가면과 상곡면이 통폐합되어 적상면이라는 이름을 새로 갖게 되었으며 용담거리(龍潭街)에 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이 때 유가면에 딸렸던 진도리와 상곡면에 속했던 사전리는 안성면으로 편입되었다.
적상면의 지명은 관내에 있는 적상산(赤裳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즉 여인의 붉은 치마와 같은 형태를 갖고 있는 적상산의 이름을 그대로 면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적상산에는 산성이 있을 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지와 수호사찰 등 이 있다.
그 후 별다른 변화가 없었는데, 1963년 면출장소설치조례(面出張所設置條例)가 공포되어 포내리(浦內里)에 적상출장소가 설치되어 종전의 상곡면 지역을 관할하다가 1998년 11월 6일 폐지되었다. 2001년 현재, 적상면의 행정구역은 8개 법정리, 행정상 25개 리, 75반, 54개 자연마을로 구획되어 있다.
참고자료8 안성면 역사
안성면은 본래 대곡소(大谷所)·횡천소(橫川所)와 함께 부리현(富利縣)에 속했던 안성소(安城所)였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백제 때에는 진내군(進乃郡), 통일신라 때는 진례군(進禮郡), 고려 때는 금주군(錦州郡) 또는 부리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금산군(錦山郡)에 속하였으며, 현종 15년(1674) 적상산사고와 관련하여 무주현이 무주도호부로 승격하면서 횡천면과 함께 무주도호부에 소속되었고, 일안면(一安面)과 이안면(二安面) 그리고 횡천면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행정개편 시 일안면과 이안면 전역을 중심으로 유가면의 오동·진원·물리·도치 등 4개 리와 적상면의 사교(斜郊)·사전(斜田)·구교(鳩郊) 등 3개 리를 편입하여 8개리로 개편하고, 옛 안성소의 이름에 따라 안성면이라 하였다. 2001년 현재, 안성면의 행정구역은 8개 법정리, 행정상 36개 리, 115반, 61개 자연마을로 구획되어 있다.
참고자료9 부남면 역사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백제 때에는 진내군(進乃郡), 통일신라 때는 진례군(進禮郡), 고려 때는 금주군(錦州郡) 또는 부리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금산군(錦山郡)에 속하였으며, 조선시대(태종 14년,1414년) 에 금산군 부리현이 부동면, 부서면, 부남면, 북부면으로 나뉘어진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때 금산군에서 무주군으로 편입되었다.
4. 무주의 문화재
1. 보물
보물 제 1267호 안국사영산회괘불탱화 - 적상면 괴목리
영산회괘불탱은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불공을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가리킨다.
이 괘불은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로 길이 10.75m, 폭 7.01m나 되는 대형불화이며 재질은 마본(麻本)이다.
2. 사적
사적 제 146호 적상산성 - 적상면 북창리
적상산성은 적상면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창리·포내리·괴목리·사천리 등 4개 리에 걸쳐있는 적상산 위의 분지를 에워싸고 있는 절벽을 이용해서 석성을 쌓은 대표적인 산성이다.
3. 천연기념물
1. 천연기념물 제 249호 무주구상화강편마암처럼 - 무주읍 오산리
구상구조를 가진 암석은 세계적으로 희귀할 뿐 아니라 학술적으로 매우중요한데,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구상암석은 상주운평리구상화강암(천연기념물 제69호)과 부산전포동구상반려암(천연기념물 제267호) 등 3곳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2. 천연기념물 제 291호 무주 설천면 삼공리 반송
반송의 높이는 17m이고, 가슴둘레 5.3m, 수관의 너비는 동서 14,3m, 남북으로 16,4m인데, 수령은 약 2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땅위 50㎝ 부근에서 5개의 큰 가지가 분지(分枝)되었고, 지상 2m 높이에서는 가지가 여러 개로 갈라져 고르게 뻗고 자라서 부채꼴의 우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3. 천연기념물 제 322호 반딧불과 그 먹이(다슬기)서식지 - 설천면 장덕리
본래 ‘무주 일원의 반딧불이와 그 먹이 서식지’는 충북 영동군과 전북 무주군을 가르며 흐르는 설천면청량리원청량 앞 남대천 신계를 기점으로 소천리 평지마을에서 동북쪽으로 꼬부라진 대불천(大佛川) 중간지점인 나림마을 앞 개울까지였고, 명칭도 ‘무주 설천면 일원의 반딧불과 그 먹이(다슬기) 서식지’였다. 현재 이 지역은 반딧불이 자연학교가 자리하고 있으며, 자연생태 체험장으로 활용하기위해 ‘반딧불이 생태공원’을 조성 중에 있고, 생태공원 내에는 곤충박물관이 건립되었다.
4.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1. 등록문화재 제 262호 지전마을 담장 - 설천면 갈산리
담장형태는 토담길이 약 700m의 돌담으로 토석담 (전형적인 돌담과 토석담)이라한다. 전체의 80%가 돌담으로 되어 있어 산골 마을의 전형적인 담장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담장은 본래 기능인 주택의 경계역할을 하는 담장과 외벽의 기능을 하는 담장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마을의 대부분의 담장은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5. 도지정 -유형문화재
1. 매월당 부도(유형문화재 제43호-설천면 백련사)
구천동에 소재한 백련사 일주문 옆 부도군(浮屠群)에 있는 매월당(梅月堂) 설흔법사(雪欣法師)의 승탑(僧塔)이다. 정조 8년(1784)에 세운 석종형탑으로 대석의 높이가 0.3m, 둘레 3.9m의 원형으로 상두면(上頭面)에 복연(伏蓮)을 둘러 연화대좌로 조형했고, 그 위의 탑신은 전형적인 종형으로 높이 1.6m, 둘레 2.8m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도에 각자된 간지는 보지 못하고, 매월당이라는 탑명만을 보고 생육신(生六臣) 중의 하나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으로 오인(誤認)하기도 하였다. 이는 김시습의 법명 설잠(雪岑)과 설흔의 혼동이 가중되어 더욱 그런 오해를 낳았던 것이다.
백련사 경내 천왕문 아래 있으며, 청허하(淸虛下) 정관문파(靜觀門派)의 종조(宗祖)이며 서산대사의 제자인 정관당(靜觀堂) 곽일선선사(一禪禪師. 1533∼1608)의 승탑이다.
탑의 대석은 높이 0.3m, 둘레 3.8m크기의 원형(圓形)으로 상두면(上頭面)에 복연(伏蓮)을 두른 연화대좌(蓮華臺座)로 조형했으며, 그 위의 탑신은 높이 1.8m, 둘레 2.3m 규모의 석종형이다. 그러나 다른 부도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양식과는 달리 상륜부(相輪部) 위에 보륜(寶輪)과 보주(寶珠)를 생략하고, 최상단 끝 부분을 마치 팽이처럼 뾰족하게 돌출시켜 놓았다. 원형기단에 종 모양의 탑신을 갖춘 전형적인 조선시대 승탑이다.
3. 안국사 (적상면 괴목리)
본래 적상산분지에 위치했던 이 사찰은 고려 충렬왕 3년(1277), 월인화상이 창건한 것이라고도 하고, 조선 초 무학대사가 국가의 앞날을 위해 성을 쌓고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광해 5년(1613) 사찰을 중수하고 그 다음 해에 창건된 적상산 사고를 지키기 위한 승병들의 숙소로 사용해 왔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보경사 또는 상원사 등으로 부르던 것을 영조 47년(1771)법당을 중창하고 안국사라 했다.
더러는 산성 안에 있는 절이라 하여 산성사라고도 불렸으며 부처님 1천불을 모신 천불전과 보물 제 1267호인 안국사 괘불이 있으며 현재의 안국사는 본래의 위치가 양수발전소 상부댐(적상호)에 잠기게 되어 1992년에 옮겨 세운 것이다.
4. 안국사 극락전(유형문화재 제42호 - 적상면 괴목리)
안국사는 본래 보경사(寶境寺) 또는 산성사(山城寺) 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무주양수발전소 상부댐 건설공사로 인해 수몰됨에 따라 1992년 8월, 건물을 해체하고 현재의 위치인 옛 호국사지(護國寺址)로 옮겨 복원되었다.
본전인 극락전을 중심으로 한 안국사는 고려 충열왕 3년(1277) 월인화상(月印和尙)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한편으론 조선초기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왕명을 받아 세웠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둘 다 사적(史的)인 근거는 없다. 다만 고종 2년(1865) 사찰을 중수하고 남긴 안국사중수기(安國寺重修記)에 따르면, “옛날 풍수지리학자의 건의에 따라 산성을 쌓고 승병을 모아 지키게 했는데, 안국사는 곧 승병이 거처할 영사(營舍)로 지은 사찰”이라고 한다.
6. 도지정 -기념물
1. 구천동 주목군총(기념물 제 2호-설천면 삼공리)
덕유산 정상 향적봉 부근에 군총을 이루고 있으며, 주목과(朱木科)에 딸린 상록침엽교목(常綠針葉喬木)으로 학명은 Taxus cuspidata Sied Zuce이다. 주목, 적백송(赤柏松), 수송(水松) 등으로 불리는 우리나라 자생수목이다.
덕유산의 주목은 해발 1,200m 이상 8부 능선에 약 1천주가 밀집되어 있고, 수령은 약 300∼500년생으로 추산되고 있다. 고산식물이면서 음수(陰樹)인 주목은 원추형의 수형을 이루고, 조밀하게 달린 짙푸른 녹색잎과 가을이면 붉게 매달린 열매가 매력적이어서 관상수로 인기가 높다. 또한 목재는 색깔과 결이 고와 고급 가구재나 조각재로 많이 쓰이며, 옛날에는 마패(馬牌)를 만드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잎은 마취(麻醉), 통경(痛經), 이뇨제(利尿劑) 등 약용으로 쓰인다.
2. 구천동 항일 격전지(설천면 삼공리 덕유)
구한말 구국 항쟁으로 혁혁한 공적을 남긴 의병 대장 문태서(文泰瑞)장군이 1908년 2월 일본군 헌병대와 격전을 벌여 대승을 거둔 항일 격전지이다. 옛 격전장이던 구천동 인월암 부근에 문태서 순국비가 있다.
3. 마산동굴(기념물 제 41호 - 적상면 사산리)
마산동굴은 적상면 사산리 마산마을 남쪽, 속칭 놋쇠솥계곡에 자리한 석회동굴로 전라북도에서는 익산시 천호석회동굴 다음으로 발견되었다. 동굴의 입구가 좁아 허리를 굽혀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고, 내부는 40°쯤 되는 경사와 낮은 천정으로 보행이 자유롭지 못한데, 16m쯤 내려가면 천정이 6m쯤 높아지고 너비도 2∼3m쯤 되는 곳에 이른다.
4. 백련사 금강계단(기념물 제 42호 - 설천면 삼공리)
금강계단은 사찰에서 금강보계(金剛寶戒)로 일컫는 불사리(佛舍利)를 설해 놓고 수계의식(授戒儀式)을 행하는 곳으로 백련사 금강계단은 대웅전에서 덕유산 정상으로 오르는 뒷산에 위치한다. 길이 17m 폭 5m 넓이의 바닥에 자연석을 깔아 단(壇)을 설치하고, 단의 중앙지점에 높이 2.1m 둘레 4m의 우람한 석종형탑 1기를 세워놓고 그 전면에 직경 1m 높이 0.3m 크기의 원반형 좌대 1기가 안치되어 있다.
5. 백련사지( 기념물 제 62호 - 설천면 삼공리)
1960년대 초반 이후 복원되거나 신축되어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인 백련사가 자리하고 있는 백련사지는 덕유산 구천동 계곡 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백련사(암)에 대한 창건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고증자료가 없기 때문에, 언제부터 사찰이 존재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구전(口傳)을 통해 통일신라 때 창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신라 신문왕 때(681∼692) 하얀 연꽃이 솟아 나온 곳에 백련선사(白蓮禪師)가 절을 짓고 백련암(白蓮菴)이라 했다는 설과 흥덕왕5년(830) 무량국사(無梁國師)가 창건했다는 설이다.
6. 서벽정(기념물 제80호 - 설천면 두길리)
서벽정은 조선말기 대사헌의 벼슬에 올랐던 연재 송병선이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고 은둔생활을 하던 중 이 고장을 찾아왔다가 구천동의 아름다움에 반해 이곳에다 집을 짓고 머물면서 영.호남의 선비들과 시국을 논하며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다. 연제 송병선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비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로서 충절을 지킨 충신이다.
7. 원통사지(기념물 제67호 - 안성면 죽천리)
원통사지는 덕유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터이다. 원통사중창비문(圓通寺重創碑文)에 따르면, 신라 때 창건된 고찰(古刹)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창건 시기와 당시의 규모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숙종 때 탄언(坦彦)·도영(道英)·혜옥(惠玉)·일학(一學) 등이 법당과 종각을 중창하고 불상을 중수 했으며 동종을 주조하는 등 대불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보다 앞선 시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원통사(元通寺·圓通寺)가 덕유산에 있다’고 하여, 중종 25년(1530) 이전에 존재했던 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다.
8. 적상산 사고지(기념물 제88호 - 적상면 북창리)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조의 족보인 선원록을 보존하기 위해 설치된 적상산 사고지 유구이다. 우리나라의 사고(史庫)는 고려 말기 이후 역대왕조의 실록을 보관하던 곳으로 선원전(璿源殿)과 실록전(實錄殿)을 두었다.
고려는 초기부터 사관을 두고 국사편찬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전란으로 대부분 없어졌고, 조선 초기 ≪고려사≫ 편찬 후에는 종적조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조선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까지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외사고인 충주·성주·전주 사고의 4곳을 두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불에 타버렸다. 그 후 실록을 다시 편찬하였는데, 인쇄된 실록은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정본 3부와 교정본 1부 등 모두 5부로 만들었으며, 전화(戰禍)를 피할 수 있도록 깊은 산중이나 섬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였다.
원본인 전주사고본은 강화의 마니산에 두었다가 정족산사고로 옮겨졌으며, 새로 인쇄한 정본 가운데 1본은 예전처럼 서울의 춘추관에 두고 나머지는 태백산사고와 묘향산사고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교정본은 오대산사고에 보관하였다.
그 시기 묘향산사고가 있는 북방에서는 후금(後金)의 세력이 확장되고 있었다. 이에 대비하여 묘향산사고의 실록을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1610년(광해군 2) 조정에서는 사관(史官)을 보내 적상산의 지형을 살피게 하고 산성을 수축하였다.
그 뒤 1614년(광해군 6) 천혜의 요새로 이름난 적상산에 실록전을 창건하고, 1618년(광해 10) ≪선조실록≫을 봉안하였으며, 1634년(인조 12)에는 묘향산에 보관하던 실록을 적상산사고로 이안하였다. 또한 1641년(인조 19)에는 선원전을 세우고 동년 11월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을 봉안함으로써 적상산사고는 완전한 사고가 되었다. 적상산 사고의 설치는 무주현이 무주도호부로 승격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적상산사고에 비장되어 있던 실록을 왕실 규장각으로 옮겨감으로써 사고는 폐지되었으며, 건물은 안국사의 불구(佛具)를 옮겨와 법당으로 사용되었다. 후에 선원전 건물은 안국사 경내로 옮겨져 천불전(千佛寶殿)으로 사용되었으며, 실록전과 그 밖의 부속 건물은 모두 훼철되고 주초석만 남게 되었다.
방치되다시피 흩어졌던 유구는 1980년대 후반 한국전력공사에서 시행한 양수발전소 건설에 따른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으나 댐 건설에 따라 수몰되었고, 본래 있던 유구의 위치보다 위쪽에 선사양각이 복원되었다.
9. 칠연의총( 기념물 제 27호 - 안성면 공정리)
칠연의총은 안성면 공정리 통안마을의 속칭 송정골에 위치한 구한말 의병들의 무덤이다. 이 곳에 묻힌 의병들의 수는 정확하지 않지만 150여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의병장은 신명선(申明善. 또는 明先)이다.
신명선 부대는 1907년 겨울, 김동신 의병대, 이석용 의병대와 연합하여 진안과 임실·순창 등지에서 격전을 치루었고, 1908년에는 무주 적상면 배골 접전 모퉁이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퇴한데 이어 정월 대보름에는 문태서의 호남의병대와 합세하여 부남면 고창곡 옥녀봉 골짜기에서 일본군 수비대 43명을 사살하고 총기 50자루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진안·거창·함양 등지에서 격전을 치르면서 장수를 거쳐 칠연계곡으로 진군하다가 통안리 함지 방앗간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1908년 4월 10일에는 문태서 부대와 함께 장수를 습격하였고, 동월 13일에는 안성에서 진안수비대와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토벌대의 추격을 받아 무주의 칠연계곡에서 유진(留陣)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의병 150여명이 모두 이곳에서 옥쇄(玉碎)하였는데,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하였다. 신명선의 이 때 나이는 30세 전후였으며, 연설에 능하고 체구는 거구였다고 한다.
7. 비지정 문화재
1. 무주향교
조선 건국 이후 국가에서 유교를 권장하기 위해 각 고을 마다 향교를 설치하여 공자를 제사하고 선비를 양성토록 했다.
무주향교는 본래 본군의 관아 북쪽에 있었는데 숙종 18년 (1692) 호랑이의 피해가 많아 향로산 서쪽으로 옮겼는데 그 터가 너무나 습하여 순조 34년에 (1834)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기게 되었다. 현재의 무주 향교는 춘, 추로 공자에게 제사를 올리는 석전대제의 행사를 거행한다.
2. 덕치서원(설천면 소천리)
덕천서원은 본래 1919년 설천면 두길리 구산마을 앞 산위에다 유천사라는 현판을 걸고 건립했던 것인데 1982년 그 후손들에 의해 설천면 소천리 이남마을로 옮겼다가 1993년 11월 현 위치로 옮겨 덕천서원이라 했다.
이 서원에는 연산군때 무오사화로 희생당한 탁영 김일손을 주벽으로 하고 그의 후손인 김치삼, 김형을 배향(配享)하고 있다.
김일손은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의 사초를 썼다. 연산군때 사초가 원인이 되어 화를 당한 인물로 스승인 김종직, 점필재를 닮아 재능과 부패와 불의를 규탄했던 인물로 중종반정 이후 도승지에 추층(追贈)되면서 문민(文愍)의 시호를 받았다.
3. 도산서원(안성면 사천리)
도산서원은 안성면 사전리 사교마을 뒤 오도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순조 13년에 건립한 것인데 고종5년 훼철되었다가 후에 다시 세웠다.
이 서원은 건물중 도산재는 본래 덕유산에 있었던 백운암 건물이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 하는데 조선 말기의 순종 2년 1908년 도산여학당이라는 사립학교를 세우고 1942년 안성공립학교가 개설될 때 까지 그 전신으로써 소임을 다해 왔다.
서원의 도산사에는 충목공 김여석과 임회당 박희권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충목공 김여석은 세종~성종 사이의 인물로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벼슬길에 올라 도승지를 거쳐 충청, 경상, 강원 관찰사를 역임하고 대사헌, 호.병.예조 등 삼조참판을 두루 거친 후에는 형조판서를 지낸 분이다. 국가에서 광산부원군에 봉하고 충목의 시호를 내렸다.
8. 전통민속놀이
1. 안성 낙화놀이
2. 무풍 기절놀이
3. 부남방앗거리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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