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의 문화를 외부인들에게 소개하시는 기회를 가지신다는 어느 여성분(시인)께서 A4 한 장 분량으로 간추린 글을 보내주시면서 감수를 요청하셨습니다. 제가 읽은 후 외람되게 그 분을 글을 나름대로 가감하고 재정리하여 본 것입니다. 참고로만 하시도록 말씀드렸으며, 따라서 이 글의 원문은 본래 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익산의 어제와 오늘
익산의 역사를 간략하게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기원전 194년 고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은 중국에서 온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살게 되는데 바로 익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을 전후하여 한반도 남방의 진국(辰國)에는 삼한이 형성되고 이곳 익산은 마한의 후기에 한때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으나 4세기에는 남쪽으로 영토를 확대하던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점령당하고 이후 백제에 속하게 됩니다.
백제 말기인 7세기에 이곳 금마에 살던 백제 왕족 서동이 무왕이 되어 그의 정치적 중심지로 익산을 경영하여 왕궁을 건설하고 미륵사를 창건하며 천도를 꿈꾸게 됩니다. 백제 멸망 후에는 10여 년간 고구려 부흥운동의 지도자인 안승의 보덕국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부여, 공주, 경주와 더불어 우리 익산을 천년고도의 도시라 합니다. 천년고도라 함은 왕궁, 왕릉, 왕궁관련사찰, 산성 등 네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바로 우리 익산은 그 네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춘 천년고도임에 틀림이 없다 하겠습니다. 2005년 ‘고도 보존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된 후 2009년 익산 역사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면서 우리 익산은 더욱더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익산시는 조선시대에는 크게 다섯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금마중심의 익산군, 여산부, 함열현, 용안현, 그리고 전주의 속현으로 구 이리시지역인 옥야현입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모두 하나로 통합되어 익산군이 되었으나 1947년에 도시로 성장한 이리부(1949년 이리시로 개칭)가 익산군에서 분리 되었다가 48년만인 1995년에 도,농 통합으로 다시 하나로 합쳐서 새로운 익산시로 출발하게 됩니다.
익산은 예부터 교육의 도시요, 호남선뿐만 아니라 전라선, 장항선, 그리고 KTX까지 철도교통의 요충지입니다. 그리고 백제 금속공예의 찬란한 문화의 전통을 이어 받아 국내 유일의 보석 박물관이 있는 보석의 도시이기도합니다. 우리나라 신흥종교를 대표하는 원불교의 산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원불교 총부가 있고, 초기 교회양식을 엿볼 수 있는 ‘ㄱ’자형 두동교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대의 사찰이었던 미륵사지와 최대의 탑인 미륵사탑이 있고, 나바위 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국내에 첫발을 디딘 것을 기념해 건립된 목조건축양식의 유명한 성당입니다.
역사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 찬란한 문화를 재창조하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어가는 생동하는 익산은 실로 아름다운 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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