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 백산면의 역사인물
1. 안위(安衛 : 1563-1644)
조선 후기 김제시 백산면 학당리 출신의 무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대훈(大勳). 아버지는 안경신(安敬信)이다. 안위(安衛)는 지금의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에서 태어났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무고되어 용천에 유배되었는데(5촌 조카), 임진왜란으로 도성이 함락되자 배소를 이탈한 뒤 평양에 도착해 어느 병사의 막하에 배속되었다. 1592년 영유무과(永柔武科)에 급제하여 군인으로 발탁되었다. 이항복의 특천으로 대동찰방겸조방장(大同察訪兼助防將)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에는 거제현령에 제수되었으며, 당항포 해전에서 적의 중선 한 척을 불태우는 전공을 세웠다.
안위는 이순신(李舜臣)이 삼도수군통제사로 12척의 빈약한 전함을 이끌고 1597(선조 30) 9월 16일 명량대첩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침시키고 대승을 거둘 때 선봉장에 나서 큰 공을 세웠다. 이어서 노량해전에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러한 전공이 이순신의 장계에 의하여 널리 알려져 1598년(선조 31) 전라우수사에 제수되었다. 1599년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1600년에는 전라병사에 제수되었다.
1602년(선조 35) 전라수사에 임명되었고, 1605년에는 충청병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06년 경상수사가 되었다가, 1608년에는 전라수사로서 수군을 통제하였다. 1619년에는 평안방어사로 임명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다시 대장으로 임용하려 하였으나 반대파의 시론에 부딪혀 향리로 돌아와 조용히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74세의 고령으로 왕의 수레를 모시고 따라가기 위해 올라가던 중 은진(恩津)에 머물고 있었으나 길이 막힌 상황이어서 남한산성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마침내 강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 조용히 보내다가 1644년(인조 22)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598년 통정대부(通政大夫), 1599년 가선대부(嘉善大夫), 1604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선조가 친필과 함께 『무경칠서(武經七書)』, 공신록(功臣錄), 방어사27부교지(防禦使二七符敎旨)를 하사하였으나 병부(兵符)의 유서(諭書)만이 오늘날 전할 따름이다.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학당서원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묘소는 김제시 백산면 조종리 대산 마을에 있는데, 1999년 11월 19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02호로 지정되었다.
2. 이정직(李定稷) : 1841-1910
조선 말기~근대기에 활동한 학자이자 서화가이다. 자는 형오(馨五), 호는 석정(石亭) · 석정산인(石亭山人) · 연석(燕石),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이조판서를 지낸 이상원(李上垣)의 후손으로 이정직의 집안은 경기도 김포에서 대대로 거주했으나, 선략장군사과(宣略將軍司果)를 지낸 부친 이계환(李啓煥)이 시국의 참상을 보고 김제(金堤)로 이거하였다. 1841년 음력 6월 3일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서 3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학문을 즐겨 강회민(姜會民) · 안정봉(安廷鳳)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사서오경(四書五經) 등의 정통학문 이외에도 음양(陰陽) · 복서(卜筮) · 성력(星曆) · 율려(律呂) · 산학(算學) · 명물(名物) · 기계(機械) · 도화(圖畵)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 심취한 실학자였다.
더구나 서양철학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칸트[Kant]와 베이컨[Bacon]의 철학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한 근대적 철학자이기도 하다. 칸트 철학을 주자학과 비교분석한 『칸트철학연구평론』이라는 저작을 남겼다. 이정직은 거의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는데, 1869년 28세 때에 연경사(燕京使)인 어영대장 이봉구의 수행원으로 북경에서 1년간 체류하고 돌아온 후 사상적 기반과 학문, 예술은 더욱 풍부해졌다.
이정직의 서예는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에 미불(米芾)과 동기창(董其昌)의 행서를, 때로는 안진경(顔眞卿)의 해서와 행서를 접목시켜 또 다른 행초의 세계를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즉 왕희지를 근본으로 하는 미불과 동기창 중심의 전통적인 첩학파(帖學派) 계열의 해서나 행서계통의 서체나 서풍을 견지함으로써,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전통 유학자이면서 신문물의 흡수에도 열을 올린 신지식인으로서 지적 호기심이 지대한 인물이었던 이정직이 당시 전예(篆隸)나 육조해(六朝楷) 계통의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서풍을 수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외이다.
이정직의 회화는 숙련된 서예의 필치와 학문의 심오함을 통해 이루어진 문인화였다. 실천적 학문과 다방면에 걸친 관심이 보여주듯 그는 회화에서도 사군자와 괴석 뿐 아니라 기명절지(器皿折枝) 등 문인화의 다양한 소재를 두루 다루었다. 이정직의 서화는 당대 뿐 아니라 이후 전북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예술적 영향은 기법이나 구도의 특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화정신을 일깨워준 데에 있었으며, 특히 전북 화단에 문인화의 흐름을 형성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정직의 문하에서 서예활동을 한 문인들이 대단히 많았는데, 대표적인 서화가로는 조주승(趙周昇) · 박규환(朴奎煥) · 유영완(柳永完) · 송기면(宋基冕) 등을 들 수 있다. 문집으로 『석정이정직유고(石亭李定稷遺藁)』가 있다.
3. 송기면(宋基冕) : 1882-1956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유학자. 송기면(宋基冕)의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군장(君章), 호는 유재(裕齋)이다. 1882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서 아버지 송응섭(宋應燮)과 어머니 전주최씨 사이에서 5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절의와 순국의 의리를 강조한 교육자이자 만인에게 사표(師表)가 되는 호남의 거유(巨儒)로서 숭앙받았다.
송기면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으며,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효행으로 널리 알려졌다. 13세 되던 해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강사(講舍)를 마련하고 실학자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을 첫 번째 스승으로 맞이하였다. 이정직은 식견이 넓고 시문과 시화 및 의학, 역학 등에 밝았다. 이후 송기면은 간재(艮齋) 전우(田遇)의 문하로 들어가 심성이기(心性理氣)와 본말존비(本末尊卑) 문제에 관하여 잠심(潛心)하였고, 고향인 요교마을에 강사를 마련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도의(道義)를 바로잡는 데 힘을 다하였다.
송기면은 근세 유학을 공부하는 일부 학자들이 심(心)을 성(性)으로 보고 기(氣)를 이(理)로 보아 심을 지존처럼 여기는 데서 세도인심에 화가 발생한다는 논설은 그릇된 견해라고 통박하기도 했다. 그가 추구하는 학문적 방법은 시(詩)·서(書)·예(禮)·악(樂)의 정론을 추구하고, 욕심을 버리고 법도를 준수하며, 언행일치(言行一致)를 행함에 있었다.
경제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고, 문학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는데, 특히 당(唐)의 두보(杜甫)와 송(宋)의 구양수(歐陽修) 및 소동파(蘇東坡)를 좋아했다. 또한 서예에서도 대가(大家)의 경지에 이르렀다. 학문과 예술에 뛰어났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충성심이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행해진 성씨 개명에 응하지 않았으며, 선성(先聖)과 선왕(先王)을 수호하는 선비로서의 순도(殉道)와 신하의 순국(殉國)하는 의리를 강조하였다. 195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유재집(裕齋集)』 4책과 부록 1책이 있다. 정경(政經)에 관한 포부를 담은 「망언(忘言)」 2편을 발표하였는데, 「망언」1에서는 지도자와 민중에 관한 문제, 의리와 의욕, 불변하는 법칙과 응변하는 도리의 문제, 강자와 약자의 문제, 문과 무의 문제, 빈곤과 부유의 문제, 생과 사의 문제, 시와 비의 문제, 용맹과 비겁, 성공과 패배, 번영과 쇠멸, 전문 직업에 대한 면려, 인내력과 의지, 지혜의 개발 등 사회과학에 깊은 관심을 내보였다. 「망언」2에서는 중국 청나라 말의 학자 양계초(梁啓超)의 정치사상을 받아들이는 한편, 독특한 견해로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서예가 강암 송성용의 부친이자 현 송하진 전북지사의 조부이다.
4. 윤제술 (尹濟述) : 1904-1986
전라북도 김제시 출신의 교육자이자 정치가. 윤제술(尹濟述)의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운재(芸齋)이다. 1904년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석교리 앙청에서 태어났다. ‘일이관지(一以貫之)’와 ‘유성(惟誠)’ 등 자신이 좋아하는 글귀처럼 6선의 오랜 의정활동에서도 문교위원으로만 일관했고, 철저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몰두해 온 지조로 일생을 바쳤다.
윤제술은 7세 무렵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는데, 신동이라 할 정도로 똑똑하였다. 글뿐만이 아니라 글씨도 잘 써서 신필이라고 소문이 났다. 9세 때 전주로 나가 심농(心農) 조기석(趙沂錫)에게서 2년 동안 서예를 사사 받았으며, 이때 성가(成家)하여 훗날 멀리 대만과 일본 등지에서까지 이름을 날렸다. 14세 때인 1918년 결혼하였는데, 전라북도 지방이 낳은 서예의 대가 강암(剛庵) 송성용(宋成鏞)이 4촌 처남이 된다. 이후 윤제술은 처숙인 송기면(宋基冕)이 문필가로 이름난 큰 선비였기에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게 되었다. 이때 운재라는 호를 받았다.
1919년 당시 계화도에 칩거하고 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다가 3·1운동을 겪으면서 개화의 물결을 접하게 되었다. 1925년 서울로 올라가 중동학교에 입학하여 1년 만에 수료하고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들어갔다.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아카다현의 중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근무하다 귀국하여 모교인 중동학교에서 10년간 영어선생으로 재직하였다.
1939년 윤제술은 중동학교에서 보성학교로 옮긴 뒤 3년여 동안 근무하다가 1942년 성남학교로 옮겼는데, 일제가 영어 과목 폐지를 종용하자 강력히 항의하다 1944년에 사표를 내게 된다. 1946년 당시 화성학원 이사장직을 맡고 있던 이춘기가 전라북도 익산시 신동에 남성고등학교를 세우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8년 동안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남성고등학교를 호남의 명문 고등학교 반열에 올려놓았다.
1954년 남성고등학교 교장직을 퇴임하고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김제 을구에서 당선되었다. 때마침 광활면의 방조제가 터지자, 농림분과를 택하여 방조제 공사를 위한 예산을 따내는 등 방조제 문제를 해결한 뒤 문교분과로 옮겼다. 1956년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하였다.
1960년 7월 29일 개정 헌법에 따라 민의원 선거가 치러지자 민주당 공천을 받아 김제 을구에서 세 번째로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제의 갑구와 을구가 합쳐지자 서울 서대문구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되었다. 이어서 제7대와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었다. 제7대 때에는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73년에 선출된 통일당 최고위원직을 마지막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여 지난날 교편생활에서 익혀온 서예 수도로 만년을 보내면서도 그때그때 한국 민주정치 발전에 긴요한 원로의 발언을 거듭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운재선집(芸齋選集)』이 있다.
5. 송성용 : 1913-1999
전라북도 김제(金堤) 출생. 호는 강암(剛菴).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의 아들이다. 일찍이 한학(漢學)에 입문하여 문리(文理)를 터득하였으며, 서법(書法)과 그림에 취미를 가져 일가를 이루었다.
학문과 범절을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보발(保髮)을 고집하고 양복(洋服)을 입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일제강점기 때에는 창씨개명과 신학문을 반대하는 생활로 일관하였다.
서법에 있어서 그는 다양한 서체를 구사하였으며, 그림은 문인화를 주로 그렸다. 그의 문하에 유능한 제자들이 많았는데, 주로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강암일대전(剛菴一代展)을 개최하여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오늘 날 그의 가문은 전북 최고의 가문을 형성하였는데 송하철(전 전북부지사), 송하경(전 성대교수), 송하춘(전 고대교수) 송현숙(서예가), 송하진(현 전북지사)등 다섯 자녀가 있고, 고 송하영(서예가)은 조카이다.
6. 송하영 : 1927-1992
서예가. 한의원 운영. 유재의 장손으로 한학과 서예, 문장에 능하며 초대 김제미술협회 회장을 지냈다.
■현대의 인물
※2017.3.7일자 전북일보 <우리고을 인물열전>참조
●박승(1936- ) : 중앙대 명예교수와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건설부장관, 한국경제학회 회장, 한국은행 총재, 금융통화위원회 의장 등을 지냈다.
●송하철(1937- ) : 익산시장과 전 전북행정부지사를 지냈다.
●송하경(1942- ) : 강암의 둘째 아들로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와 대학원장, 박물관장,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1~3회 조직위원장, 그리고 예총회장을 지냈다.
●송하춘(1944- ) : 전 고려대국문과 교수. 7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로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와 문과대학장을 지냈다.
●송현숙(1948- ) : 서예가. 이당서실(익산)및 이당미술관(군산)을 운영하고 있다.
●송하진(1952- ) : 전주시장을 연임하였고 현 전북지사(재선)이다.
●강완구(1945- ) : 전주지방법원장과 광주지방법원장, 대구고법원장, 서울고등법원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등을 거쳐 현재 법무법인 로고스 상임고문변호사를 맡고 있다.
●강철기(1951- ) : 전주시 완산·덕진 구청장과 복지환경국장, 전북도 대외협력과장, 김제시 부시장 등을 지냈다.
●안자옥(1956- ) : 전 재경부 생활안전과장, 전 한국증권금융부사장
●안성국 : 전 문체부 감사실장
●정인영 : 전 익산소방서장
●강원구 : 현 보건복지부 사회보장위원회 사무국장
●유대희(1955- ) : 변호사. 5대 도의원을 지냈으며, 현재는 전주시 통합체육회 부회장과 대한적십자사 전북지사 상임위원 등을 맡고 있다.
●고영준(1941- ) : 변호사, 제일종합법무법인 대표변호사
●강신섭(1957- ) : 변호사. 중앙행정심판위원과 대법원 재판연구관, 전주지방법원 형사 1·2부 등을 지냈으며 현재 법무법인 세종의 대표변호사이다.
●이종석 : 우리나라 최초의 난(蘭) 박사로 ‘실용 한국의 蘭’을 펴내기도 했으며, 제주대학교를 거쳐 현재는 서울여대 원예생명조경학과 명예교수이다.
●이복렬(1943- ) : 호원대 식품환경화공학부 교수와 공과대학장 등을 지내고, 현재 호원대 명예교수.
●박공우(1948- ) : 전 김제 교육장
●유지득(1955- ) : 전 익산 교육장
●문홍근(1954- ) : 전 전북교육청 장학관, 김제중앙초등학교 교장
●임국선(1955- ) : 원광대 학군단 출신으로 육군 제7기동군단 군단장과 육군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 육군본부 정책관 등을 지낸 뒤 중장으로 예편하고 현재는 원광대학교 군사학과 석좌교수로 있다.
●안장근(1957- ) : 전 법무부 감찰관, 전 금융감독원 감사
●조연식 : 육군본부 인사처장과 28사단장을 거쳐 소장으로 예편.
●이기택(1946- ) : 공군 준장으로 예편.
●라화종(1951- ) : 전 장수경찰서장
●채규남 : 시조명창. 86년 전주대사습놀이 시조부에서 대상을 받고 98년에 전북도 지방문화재 14호로 됐으며, 이후 2007년에 대한민국 인간문화재로 지정받았다.
●강남호(1960- ) : 원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정대섭 : 전북일보 전략기획국장(이사)
●홍동기 익산신문 편집국장
●강찬구 : 전북포스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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