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구비설화3
함라면(함라산 호랑이와 삼부자 이야기)
김복현(전 익산문화원장 73세)
문 : 먼저 함라산에 대한 전설이 있으면 말씀 좀 해주시지요.
답 : 옛적에 우리 함라를 위시해서 소장이 유명했던 데가 황등소장 여산소장 웅포소장이 유명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소가 요새 같으면 큰 돈 덩어리지요. 우리 수동마을의 농부가 오랫동안 먹였던 소를 팔러 우리 함라산의 곰개재를 넘어갑니다. 웅포장으로 갑니다. 곧 소가 팔릴 것 같기도 하고 안 팔릴 것 같기도 했는데 못 팔았습니다. 이제 소를 다시 끌고 와야 할 것 아니요. 막걸리를 먹고 좀 취해서 해가 져서 곰개재를 넘어오는데 불덩어리 같은 것이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아! 이것은 호랑이구나 하고 줄행랑을 쳤다는 것입니다. 그 호랑이가 암소와 부딪쳤는데 암소를 어떻게 하려다 못했는데 그 소가 암소였습니다. 만약 황소였으면 죽었지요. 호랑이는 소를 만나면 급소를 물어버립니다. 그런데 암소였기에 죽이지 못한 거지요. 화가 난 암소는 집으로 돌아와 화가 나니까 자기가 살던 집을 뿔로 받아버렸어요. 소를 잡아매고는 그 동네 한 분이 ?이 소를 팔지 말고 죽을 때까지 키워라.?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그 옛날에 이 함라산에는 호랑이가 살았다는 최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둘째는 함라산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하게 꽉 찼습니다. 함라산 계곡 속은 일 년 내내 시냇물이 흘렀습니다. 고창마을의 어느 농부가 하루는 함라산을 지나가는데 숲속에 웬 띠를 두른 짐승이 있어 저게 뭘까 하고 보니까 호랑이 새끼다 이거야 이 호랑이 새끼를 데려와서 돼지막에 넣었어요. 그런데 저녁에 난리가 났어요. 온 동네 개들이 모두 나와 짖고 난리가 난 거예요. 호랑이가 나타난 거예요. 노인들이 가보니까 왜 너희 집에 난리가 난 거냐하고 들어가 보니까 호랑이 새끼가 있는 거여요. 그래서 풀어주니까 어미가 기분 좋게 데리고 가는 모습, 이것이 두 번째 함라산에 호랑이가 살았다는 두 번째 증겁니다.
세 번째는 웅포와 함라의 경계에 숭림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어느 조그마한 암자의 바닥에 자국이 있어요. 그때 당시에 짐승, 즉 호랑이가 애기를 물어다 먹어버려서 남은 자국이라는데 지금은 리모델링을 하면서 그 자국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옛날 옛적에는 우리 함라산에 호랑이가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문 : 그러면 호랑이가 어디서 왔다는 것인가요?
답 : 강을 건너 충청도에서 왔다는 것이지요. 강을 건너온 겁니다. 사람도 호랑이도 먹을 것이 있어야 사는데 강을 건너 와보니까 이곳에 먹을 것이 많았다는 것이고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함라산에 함부로 드나들지 않았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요새는 민둥산이 되어서 별것이 없지요.
문 : 함라의 먹거리는 무엇이 있나요?
답 : 함라는 자연조건이 좋아 곡물이나 곡식이 많았고요. 함라산에는 잔다구, 도라지 등이 많았고 나무열매도 캐먹었답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만 먹는 게 아니고 짐승들도 같이 먹었겠지요. 웅포에서 항이 생기면서 곰개를 넘어 생선종류들도 들어오게 되는 것은 한 참 후지요. 그때에도 소금이 일등이고 황새기 장사가 제일 많았던 곳이 웅포입니다. 거기서 곰개재를 넘어서 함라, 여산까지 팔러 갔답니다. 숭림사길은 옛날에는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곰개재 이외에는 길이 없었고 후에 숭림사길과 칠목재길이 생겼습니다. 두 길은 일본인들이 만들었다고 보여 집니다. 그 때는 이고 지고 다녔답니다.
그래서 교통이 좋지 않으니까 강경 용안 웅포 사람들이 뱃길을 이용했기 때문에 뱃길 통학로가 생겨서 군산으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이리(솜리)로는 안다녔어요, 재를 넘어 다녀야 하니까요.
문 : 함라는 3부자 집이 유명한데요. 조부자, 김부자, 이부자 들이 부자가 된데 대한 이야기들이 있는가요?
답 : 그 부자들의 할아버지들은 근면 검소하고 노력을 많이 했대요.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그래요. 글을 알아야 된다고 해서 아들과 딸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 아이들이 견문을 넓혀 가지고 참봉도 되고 일본도 다니면서 무엇보다도 먹을 것을 생산해야 되고 그럴려면 농토를 가져야 한다면서 농장을 경영합니다. 세 부자가 모두 그랬습니다.
그 분들이 외지에서 온 분들인데 약간의 돈을 가지고 와서 여기에서부터 부를... 조부자는 임천에서 왔다고 하고 김안균씨 집안은 김해김씨지요. 이곳에 김해김씨가 많이 살았고요. 이씨도 외부에서 들어 왔다고 하고요. 문제는 돈 버는 것을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눈 이예요. 일본을 드나들면서 돈벌이를 찾아낸 것이고 일본은 당시에는 쌀이 최고 아니에요? 그래서 일본 놈 농장에 버금가는 농장을 경영한 것이 부자가 되는 첩경이었던 것이지요.
문 : 3부자들이 지금은 집만 남아있는 것인가요? 농토는 없어졌나요?
답 : 농토가 없어진 배경은 이렇습니다. 조부자 집의 후손들을 보면 그분들이 작은 부인을 많이 얻었어요. 아들딸들이 많았지요. 아들딸들이 그 재산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팔아먹기 시작합니다. 다 팔아먹어요. 그 집에 열두 대문이 있었고 그 열두 대문 안에는 모두 곡간이 있었는데 그 곡간 채를 다 팔아먹습니다. 나 아는 분도 한 채를 사다가 지었어요. 그렇게 해서 우리 전라도에는 함라의 삼부자 집을 사다가 지은 것이 많습니다. 지금도 저 재목을 다룬 것을 보면 보통사람들이 다룬 것이 아닌데 하고 보면 삼부자 집을 가져다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요. 삼부자 집을 지은 당시 상황을 보면 조선이 망하면서 왕궁을 지을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왕궁을 지을 때 일하던 대목장들을 데려다가 삼부자들이 집을 짓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같은 재목을 썼어도 기둥이나 서까래나 다르다는 겁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삼부자 집을 판다하면 그것을 살려고 서로 경쟁을 했답니다.
문 : 제일 먼저 지은 집은 어느 집인가요?
답 : 이배원 가옥(1917)이고 다음은 조해영 가옥(1918) 그 다음이 김안균 가옥(1922) 입니다. 거의 같이 지었어요. 삼부자집이 거의 같은 시기에 지었어요. 너도 지으니까 나도 지은 거지요. 세 부자가 서로 선의의 경쟁을 심하게 했는데 백리 밖을 나갈 때는 니 땅을 밟고 가라. 우리 땅을 밟고 가지 마라. 오솔길이라도 내 땅을 밟고 가려고 땅을 서로 차지하려는 경쟁을 했다는 겁니다. 그 땅을 후손들이 다 팔아먹었어요. 저들은 구한말부터 부자가 되기 시작했어요. 현재는 김안균씨 집만 본채 사랑채를 보존하고 이배원씨 집은 팔아먹었고 보수하고요. 김안균씨 집도 안채는 없어졌다고 봐야 돼요. 집터가 제일 넓었지요.
요새 날 삼부자의 흔적을 볼려면... 예나 지금이나 우물이 좋으면 번성하고 우물이 없으면 망하는 동네요. 우물 하나에 50리 밖에서도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어다 먹기도 했어요. 우물을 아무나 못 파요.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우물을 이용해서 먹고 살았어요. 근데 산골짜기인 이 마을에 우물이 많게는 5개, 적게는 3개의 우물이 있습니다. 왜 우물이 많으냐? 주인이 먹는 우물, 하인들이 먹는 우물, 과객들이 먹는 우물 등 그렇게 성격이 다릅니다. 함열리 우물은 짠 물이 나옵니다. 그래서 많이 팠다는 설도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 물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우물이 많았다는 겁니다. 삼부자가 있어서 기거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기거하는 사람들도 일도 좀 하면서 잠도 자고 기거했지 그냥 얻어먹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서로 상부상조했기 때문에 삼부자집이 지속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문 : 1920년대라면 지금의 함열읍 방면이 이미 모두 넓은 들이었으니 삼부자들이 그곳에 농토를 가진 것이겠지요?
답 : 조부자는 이곳 함라에 농장이 있었지만, 이부자와 김부자는 지금의 함열 읍에 농장이 있었지요. 함열 가는 길에 간다리 근처의 그 큰 농토가 다 그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었지요. 삼부자들은 만석꾼이었어요. 살기는 이곳에 살았지만 농토들은 지금의 함열쪽에 있었던 것이지요.
문 : 지금 같았으면 그들이 집을 함열에 지었을 테지만 당시만 해도 이곳 함라가 지역의 중심이다 보니 사는 집은 함라에 지은 것이겠지요?
답 : 그렇다고 봐야지요.
문 : 일제 때 함라에는 일본인들이 얼마나 살았을까요?
답 : 일본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살게 되어서 이곳 사람들이 그렇게 크게 손해를 본 것은 없다고 들었어요. 지주들은 친일 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고요. 한국동란 때도 삼부자들은 인민군에게도 협조를 했답니다. 먹을 것을 대주고 하니까 좋아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불을 안 질렀지요. 그래 여기는 손해를 안 입었어요. 삼부자들에게 대항하던 사람들이 인민군 앞잡이들이 되어서 양민들을 학살하는 일이 더러 동네마다 있었어요.
문 : 김부자 집 후손들 중에 이북으로 간 사람이 있다면서요?
답 : 그 이북으로 간 사람이 김안균씨의 형인 김해균(1910~?)씨지요. 김해균씨는 동경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영어와 경제학에 능통했기 때문에 박헌영이를 따라서 북으로 갑니다. 박헌영이의 오른팔입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김일성이와 박헌영이가 대립을 했지요 우리나라에서 김구와 이승만처럼요. 김일성이가 정권을 잡으면서 박헌영파를 다 죽였어요. 그런데 김해균씨는 죽이지 않았어요. 김해균씨는 김일성대학 교수가 되었다가 십 몇 년 전에 죽었어요. 그래서 김안균씨 집이 저렇게 잘 보존된 이유도 당시 간첩사건이 생기면 접선할까 봐서 우리 익산경찰서나 도경, 심지어는 치안본부에서도 직접 사람이 나와서 지킵니다. 그래서 김안균 씨는 집 문을 쳐 닫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락날락 할까봐서요. 그 습관이 들어서 지금까지도 문을 닫아 놓아버립니다. 그런 요인도 있어요. 그래서 부장판사가 된 김안규씨 아들은 그 엄마가 같이 죽자고도 했어요. 아들은 이 좋은 세상에 왜 죽느냐고 내가 살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고 그래요. 김안균씨는 술을 좋아했어요. 속이 상하니까요. 그 사람은 술병으로 죽고 그 안사람은 안산에서 살고 있고 그 아들은 부장판사가 되었어요. 지금도 끄떡없지요. 그 이후에 내가 김안균씨 안식구를 만나 물어보니까, ?사모님 만나 왜 문을 열어놓지 않느냐??고 물어보니까 ?문을 열어 놓으면요. 저 주춧돌은 안 빼가지만 돌팍까지 싹 가져져요.?하는 거예요. 문화재라고 생각하고 다 가져간다 이거야. 그래서 문을 잠궈 놓는 습관이 있고 지금도 잘 잠그는데 들어가서 상세히 살펴보면 좋은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뭐네 뭐네 해도 당시 우리 전라도에서 잘사는 사람들의 집 재목은 백두산 소나무를 썼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집이 견고하게 잘 지어졌어요.
문 : 당시 삼부자 집들을 지을 때 왕가에서 쓰는 대목장들을 불러서 지었다고 들었는데요? 그렇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대목장들을 불러서 지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집들에 비해서 월등히 잘 지어진 것이지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못 구멍하나 없이 나무못으로 박아서 잘 했는데 틀림없어요. 저 집들은 그래도 잘 보존되어 왔는데 지금 우리가 저 집들을 어떻게 할거냐 하는 문제에요. 최근에 함라에 많은 돈을 들여 한옥마을을 지었는데 그것보다는 삼부자 집을 보수하고 보완을 해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를 하고, 들어가 보게도 하고, 잠도 자고 가게 하는 개혁 개방화를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지요.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 집에 깃들었던 얘기, 옛 날에 어느 기생이 이 집에 와서 머물렀던 얘기라든가 그런 얘기들을 늘어놓으면 얼마나 스토리가 많아요? 얼마든지 발표할 게 있거든요. 그런 생각들은 왜 안하는지 몰라요.
문 : 옛날에 함라 사람들은 군산으로 많이 다녔나요 아니면 익산으로 많이 다녔어요?
답 : 함라에서 군산으로 다니게 되는 것은 금강 뱃길 때문인데 그 뱃길이 끊어지면서 도로가 뚫리지요. 행정구역상 이리와 가깝기도 하고 교통이 좋아지니까 빠른 시간 내에 이리로 다니게 되어서 이곳 사람들은 비교적 군산으로 학교를 다니지 않았어요. 더구나 이리로는 철도가 놓여있으니까 함열로 가서 이리로 다닌 거지요.
문 : 1960년대만 해도 웅포항에는 배가 많이 드나들었다는데요? 무슨 배가 많이 드나들었는가요?
답 : 황새기배, 소금배가 엄청 드나들었어요. 황새기와 소금이 모든 먹거리를 제공하는데 제일이지요.
문 : 제가 알기로는 웅포에 버스가 들어간 것은 1973년으로 아는데요.
답 : 그래요. 늦게 들어갔어요. 마이크로버스가 들어갔어요. 길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웅포 사람들은 군산으로 학교를 많이 다녔지요. 칠목재가 오늘날 보면 별거 아니지만 엄청 많이 깎아 내렸어요. 거기서 브레이크가 안 듣는 자전거를 타고가고 가다가는 죽습니다.
어찌됐든 1910년 무렵에 일본놈들이 철길을 함라쪽으로 해서 이리로 가는 철도길을 기안을 했는데 이유는 간단해요. 산 밑에 견고한 땅에다가 철길을 놓아야 만이 철로가 견고하니까요. 이 소리를 듣고 함라쪽의 선비와 삼부자집 후손들이 기차가 다니며는 새까만 먼지가 나고 조상의 묘가 울리고 후손이 잘못되고 동네가 망해버린다, 배려버린다고 했어요. 그 후손들은 일본에 다녀봐서 잘 아니까. 그래서 떼를 쓰러 서울로 갔어요. 조정관이 따악 앉았다가 보따리 세 개를 보더니 ?이게 뭡니까?? 하니 ?돈입니다.? 해서 고쳤어요. 고쳐서 십리 밖으로 몰아내자 해서 몰아낸 곳이 지금의 와리입니다. 그럼 이름은 어떻게 할 거냐 했는데 이름은 천황 싸인까지 받아야하니 그것까지는 못한다 해서 함열이라는 이름까지 주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함열이 탄생한 겁니다.
문 : 근대화시기에 처음에는 개항장이 발전했다가, 기차가 생기면서 역이 된 곳은 정거장이 되고, 그곳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 되었습니다. 신태인, 이리, 동대구랄지가 그런 곳이지요.
답 : 그래서 우리 함라가 철길 바람에 낙후된 촌락으로 전락되고 함열은 한때 군청소재지까지 되어서 좋았는데 이제는 그것도 없어져 버리고 허덕거리는 상황이지요.
문 : 만약 함라에 철길이 놓였더라면, 원래 일본사람들이 철도를 계획했을 때 연산 논산 강경 여산 금마 삼례 전주로 가게 되어있었지요. 거기서 태인으로 나가는 것이 호남선의 계획이었어요. 그게 호남선이에요. 그때 전주사람들이 반대했고 그래서 군산사람들이 부자가 많이 되었잖아요? 그 때 제안한 곳이 어디냐 하면 연산 논산 강경 함라 대야 김제 태인이었어요. 이 안이 실현되었더라면 오늘날 대야가 엄청 커졌을 거에요. 거기서 호남선과 전라선이 갈라졌을 테니까요. 그런데 함라사람들이 반대를 하고 그러다 보니 솜리로 철도가 나게 되고 솜리가 커지게 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면 이 함라에서 삼부자 외에 농토를 가진 소농이랄지 하는 사람들은 어땠나요?
답 : 삼부자외 천석꾼들도 몇 있었어요. 그러나 삼부자들에게 눌려서 감히 행세를 못했지요. 일제 때 일본지주들은 별로 없었어요. 와리 뜰도 조씨나 연안이씨 땅들이 많았어요. 그리고 소낙비가 많이 내리면은 함라는 물이 쪽쪽 빠지는데 황등 일부나 이리는 물이 하애요. 함라산에 올라가보면 하앴습니다. 물이 잘 안 빠지니까요. 만경강이 밀물 때 홍수가 지면 물이 안 나갈거 아니에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이곳의 자연조건이 그만큼 좋았다고 보지요. 그런 것들도 삼부자가 이곳에 안착하는데 기여를 했다고 봐요.
문 : 얼핏 들으니 전 국회의원 고 김현기씨가 함라초등학교를 다녔다는데 왜 함라초등학교를 다녔나요? 그 분 고향은 어디인데요?
답 : 태어나기는 오산인가 황등인가로 알고 있는데 인근 함라초등학교가 웅포초, 용안초, 용동초등학교들보다는 가장 전통 있고 튼튼한 학교였기 때문이지요. 당시에는 국민학교가 면소재지에 하나씩 있던 시대인데 김현기씨는 황등 쪽 사람(팔봉면 임상리로 황등에 가까운 지역임)이지만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함라초등학교로 유학을 온것이라고 보여져요. 무려 110여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이거든요.
문 : 함라산에 얽힌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탄광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답 : 믿거나 말거나 하는 얘기지만요. 일본 사람들이 함라에 옵니다. 함라산에 올라가서 소재지를 바라보며 ?왜 저기가 노랗냐?? 하고 물으니 행동마을에 있는 은행나무 암컷과 수컷이 있어 한쪽이 노랬답니다. 그래서 대답하는 말이 ?함라산에서 금빛을 받아서 노랗습니다.?고 하니 일본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어디서 그런 소리 말라며 일본에 돌아가서 지질학자를 데려와서 살펴보니 금맥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금을 파다가 장항제련소에 제련해서 다 일본으로 가져갔어요. 그래서 한때 함라의 금광이 꽤 유명했어요. 나도 초등학교 삼사학년 때(1950년대 초) 그 금광에 들어가 본 일이 있는데 이후에 금이 나오지 않으니까 폐쇄했지요. 일본 사람들이 떠난 뒤인데 그 때 왜 들어갔느냐면 김택수라는 친구의 아버지가 그 탄광 관리를 했어요. 그런데 친구가 후라시(손전등)를 들고 나는 촛불 들고 우리 친구들끼리 따라 들어오라는 거에요. 들어가 보면 금색 나는 줄기가 있는데 그것을 떼 내는 거에요. 나중에 수지타산이 안 맞으니까 폐쇄되었어요. 금광을 운영하려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고 물을 펌프로 퍼 올리고 해야 되지요. 오랫동안 사용을 안 하니까 물이 곽 차버렸어요. 그 앞쪽에 있던 무연탄광도 유명했어요. 그 무연탄도 매장량이 많아서 운영했는데 그것도 실패했어요. 사업이 망했어요. 크게는 돈을 못 벌었어요. 무연탄광은 30-40년 전까지 운영했어요. 지금도 함라산에 오르다보면 길에 무연탄이 섞인 돌들이 많이 보이지요. 무연탄광이나 금광에서 나오는 물들이 다 소나무밭에서 들어간 물들이고 이것들이 엄청나게 함라천으로 흘렀어요. 웅포쪽에 있는 묵정은 들어가 보면 물이 시커먼데 우리는 길어다 먹기도 했어요.
샘이라는 것이 자꾸 쓰고 자꾸 물을 퍼 먹어야 유지 되는데 그러지 못하니 마르게 되고 없어져버렸지. 함라산에는 그런 저런 많은 이야기들이 얽혀져 있어요.
문 : 함라산 밑에 정자가 있었다는데요.
답 : 그곳에 있던 연못이 용무정(용샘)이지요. 그 용무정이 옛날 관아의 후원역할을 한 곳이지요. 용무정을 팠어요. 한여름에 장정 다섯 명 정도가 들어가 목욕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남자들이 지키면서 여자들도 목욕할 수 있도록 했어요. 그 용무정가에는 아름드리 벚나무 참나무가 좌악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없어졌지만요, 그래서 누구나 함부로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나무들 덕분에 함라천에 물이 많았던 것이지요. 그 근처에 관아터가 있었지요. 진즉 관아는 없어지고 내가 어렸을 때도 관아터만 남아 있었어요. 일제 때 관아는 일부러 없앴어요. 말살정책으로 없애버렸어요. 그때는 재목이 별로 없으니까 누가 집을 판다고 하면 서로 뜯어가려고 정신이 없었어요.
문 : 지금 현청터는 여산에는 조금 남아 있는데 함라는 어떻습니까?
답 : 함라는 옛날에는 좋은 밭이었는데 지금은 어린이집이 되어 있어 흔적이 없어져버렸지요. 어린이집을 지을 때 거기서 기왓장이라든지 주춧돌 같은 것이 나와서 그 부근에 굴러 다녔었어요. 위치가 참 좋은 곳이지요. 지금도 거기 어린이집이 함라를 내려다보는 형국으로 참 좋지요.
문 : 용안의 향교는 잘 보존 관리 되고 있는데 함열 향교는 어떤가요?
답 : 함열향교는 잘 되고 있어요. 교동마을에 있어요.
문 : 함라의 인구가 많을 때는 얼마나 되었나요?
답 : 지금은 적은데 먹거리가 많아야 사람이 많이 사는 건데, 예전보다는 아주 많이 줄었지요. 10여 년 전만 해도 3천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더 줄어서 2,500명 정도 됩니다. 함열리라는 데가 7개 부락입니다. 7개 부락이 부락축구대회를 열 정도로 예전에는 사람이 많았지요.
문 : 함라노소는 언제부터 설립되었나요?
답 : 함라노소는 300여년(1687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곳으로 이곳은 경로당 개념이 아니에요. 돈 있는 사람들이 돈을 내서 노인들이 와서 밥도 먹고 즐기고 하는 곳인데 노소의 요원이 될려면 노소에 돈을 내야 돼요. 그 돈으로 논밭을 사서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행사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 날이면 유지들을 초청해서 밥도 먹여주고 봉투도 내놓고 가지요. 나쁜 짓 하는 사람들은 혼내기도 하고 어른들이 노는 곳이었어요. 옛날에는 양반들,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이 입회하여 모이는 곳이였어요. 상민들이 가입하여 들어가는 곳이 아니었지요. 요즈음 익산군에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노소이고 그만큼 전통 있는 고을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노소에 가입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함라사람들 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황등사람, 성당사람들도 있어요. 당시에는 모두 함열현 관내이기도 했지만 여기서 이사를 가도 그 후손들은 대를 이어 노소에 가입하였다고 보여져요. 그래서 한때는 익산군수가 부임하면 순위를 다투어 함라에 인사를 왔어요.
문 : 다른 지역에 비해 함라노소가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 : 노소답, 즉 재산이 있었잖어요? 재산이 있으니까 계속 잘 유지될 수 있었지요. 누가 노소재산 훔치고 형무소 갈려 하겠어요? 우리 개인이 노소답을 짓고 세를 내고 그 세를 받아 운영하지요. 함라에는 양로당과 노소가 있는데 성격이 전혀 다르지요. 양로당은 아무라도가는 곳이지만 노소는 가입된 분들만 드나드는 곳이지요. 우리 아버지도 회원이어서 나도 자격이 있었지만 나는 그곳에 가고 있지는 않고 있어요. 노소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노인들 기구이지요. 오래된 동네이기 때문에 이런 노소 같은 기구가 남아 있지요. 그런데 아쉬움이 있다면 함라 삼부자집들이 있을 당시에 그 사람들이 선행을 베프니까 공적비를 세워준다든지 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함라 비석거리에 주욱 서 있었는데 새마을 사업한다면서 경운기에 실어다가 저 구렁텅이에 버렸어요. 찾아보려니까 찾기가 힘들어요. 그런 것들이 함라에 많았어요. 김육불망비가 있는 곳(조해영 가옥 초입)이 비석거리였어요. 김육 불망비는 용안 향교에도 하나 있지요. 공납제도를 개혁하는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에 대한 선정비가 유독 이곳에 세워져 있는 것은 이 지역이 그만큼 농토경영을 잘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어요.
문 : 요즈음 함라의 자랑으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답 : 요즈음 내세울게 뭐가 있나요? 함라 전통한옥마을을 지어놓았는데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고, 익산에서 가장 오래된 함라초등학교가 있다는 것이 가장 자랑스러워요. 비록 현재 학생수는 적지마는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라서 자랑스럽지요.
문 : 원장님 함라에 대해 장시간 말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답 :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향토사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제시 이성현 지역(공덕면과 청하면)에 대한 소정리 (0) | 2018.09.02 |
---|---|
익산 대물림맛집 13 (0) | 2018.08.21 |
웅포면(곰개나루 이야기) (0) | 2018.06.03 |
성당면(성포농악 이야기) (0) | 2018.06.03 |
익산시 영역 변천사 개요 (0) | 2018.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