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悟李根濬先生著
一梧未定文藁
아주 어린 시절(오륙세) 설날이면 가장 먼저 세배를 드리러 가는 분은 일명《서당할아버지》였다. 당시 마을에서 가장 나이드신 큰 어른이시기도 하지만, 학문을 하신 분이라서 존경의 대상이셨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우리는 《서당할아버지》께 세배를 드린 다음부터 온 동네 어른들을 모두 찾아 다니며 세배를 했었다. 그 《서당할아버지》가 바로 일오 이근준 선생(1874~1958)이시다.
친 손자 되시는 공사출신 이기택 예비역 장군(1946~ )이 당신 할아버지의 遺稿를 책으로 펴내기 위해 예편 후, 방통대학 국문과와 중앙대 예술대학원을 다니시며 공부한 다음, 한국한시협회 부회장인 신근식 선생의 번역을 빌어 지난 달(2019년 4월 19일)에 이 책을 발행하였다. 대종중 및 사종중에서 각 20권을 구입하여 내게도 한권이 배정되었으므로 읽어 보았다. 260수의 한시와 30편의 글이 있는데 그 중 시 두 수와 글 두 편만 소개한다.
주1. 일오 이근준(1874~1958) 약력
1874 전북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돌제 출생
1881 사종형 백파 이근문에게서 소학을 배움
1884 석정 이정직 문하에서 사서삼경 사사
1888 간재 전우 문하에서 경사 시문 사사
1910 긍구당에서 후학 양성
1919 무성서원에서 유림강장 역임
1926 긍구당에서 훈장 역임
1958 향년 85세로 별세
▣一悟未定詩稿(일오미정시고)
■沃溝先祖墓閣吟(옥구 선조 묘각을 읊음)
玉山(옥산)一片(일편)是(시)佳(가)城(성) : 곤륜 옥산 한 조각이 아름다운 성을 이루었으니
瞻(첨)掃(소)年(년)年(년)感(감)我(아)情(정) : 해마다 첨소 봉영에 감개의 정이 있네.
世(세)事(사)滄(창)桑(상)何(하)足(족)問(문) : 변화 많은 세상사를 어찌 족히 물으리
家(가)聲(성)綿(면)瓞(질)更(갱)堪(감)成(성) : 자손 면면한 가성이 다시 이루어지도다.
石池(석지)細雨(세우)看(간)眠(면)鷺(로) : 석지못 가랑비에 조는 백로를 보고
翰(한)洞(동)春風(춘풍)廳(청)囀(전)鶯(앵) : 한동 봄바람에 꾀꼬리 소리를 듣는다.
顧(고)此(차)孱(잔)孫(손)何(하)所(소)願(원) : 이곳을 돌아봄에 잔손에게 무슨 소원이 있으리
千秋(천추)斯(사)室(실)式(식)齊(제)明(명) : 천추토록 이 재실에 의식이 가지런하고 밝기를.
주1. 玉山(옥산) : 신평이씨 13세 형수, 14세 의복, 15세 춘성공의 묘가 군산시 옥산면한림동에 있다.
주2. 石池(석지) : 마을 옆에 있는 백석제를 말한다. 현재는 습지로 남아있다.
주3. 翰(한)洞(동) : 묘소가 있는 한림동 마을을 말한다. 이곳에 염의서원이 있다.
■肯(긍)構(구)堂(당)原(원)韻(운)(긍구당 원운으로 시를 짓다)
肯(긍)斯(사)結構(결구)肯(긍)斯(사)堂(당) : 부조의(조상들이) 이룩한 사업을 (이 집에서) 이어가니
洞(동)豁(활)軒(헌)窓(창)正(정)向(향)陽(양) : 너른 공간 건물창이 정히 양지쪽을 향하였네.
藏(장)壁(벽)書(서)香(향)成(성)蠹(두)古(고) : 벽속에 든 책 향기에 좀 쓸은 지 오래인데
遶(요)阡(천)松(송)翠(취)拂(불)雲(운)長(장):길가의(무덤길 두른) 푸른 솔은 구름걸치어 높이서있네.
勉(면)將(장)先業(선업)傳來(전래)裔(예) : 힘써 세운 선업을 후손이 전수하니
願(원)使(사)家聲(가성)聞(문)此(차)鄕(향) : 가성(가문의 명성)이 이 고장에 들리기를 원하네.
種(종)得(득)庭園(정원)花(화)百(백)本(본) : 정원에 꽃나무 백 그루를 심어 얻으니
參(참)差(차)不絶(부절)四時(사시)芳(방) : 들쭉날쭉 사시절 꽃(꽃향기)이 끊어지지 않더라.
주1 肯(긍)構(구)堂(당) : 내 고향인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돌제부락에 있는 《신평이씨 문정공파 김제계 대종중 재실》이다.
주2 遶(요)阡(천) : ?무덤길 두른?의 뜻이다.
주3 家聲(가성) : ?가문에 대한 명성?을 뜻하는 듯하다.
▣一梧未定文藁(일오미정문고)
■裕齋號(호)序(서)(유재 호 서문)
書(서)曰(왈)好(호)問(문)卽(즉)裕(유) ....이하 생략
서전에 이르기를, 묻기를 좋아한 즉 넉넉해지고 묻기를 좋아하면 곧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손꼽은 군내에서 함께 노니는 사우 중에 송우가 있다. 군은 호학하는 선비라 해도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묘령의 젊어서부터 석정 이 선생에게서 수업하니 글을 읽고 짓고 하였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여 잠시도 쉬지 않았다. 의심나고 어려운 곳을 만나면 반드시 사우들에게 물어서 분명하기가 구름을 헤치고 달을 본 듯한 연후에 선생님께 가니 매양 칭찬하실 뿐 아니라 그 호를 유재라 지어주셨다. 대개 호문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자고로 성현들께서도 역시 모두 호문하심으로써 성취하셨다.
하물며 성현들의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는 당연히 그 노력을 백배는 해야 마땅하다 할 것이다. 내 친구의 호문함이란 예를 갖추고 백산 전 선생 문하에 들어가서 관유한 교훈을 받고 골간을 절차하고 이미 옥을 탁마한 후 그 문채와 그 조예를 더 구했으니 어떠했겠는가. 몸가짐을 검약히 하고 남을 대함에 주밀하고 자상했으며 처사와 접물에 옳은가를 생각했다.
이로부터 시문서화에 이르기까지 그 법을 이루었으니 이는 모두 두 선생에게서 받아서 수고를 극진히 한 까닭이다. 어찌 넉넉하다 아니하랴. 이것이 반드시 남에게도 미쳤으니 사방으로부터 배우러 오는 자들을 또한 모두 정성껏 개발하여 주었으니 내가 이르기를 유재는 비단 자기만이 호문한 것이 아니라 남이 호문하는 것도 좋아했다고 말하겠다.
주1 송우 : 裕齋 宋(송)基(기)冕(면) 선생(1882~1956)이다. 본관은 여산이다. 저자인 이근준 선생보다 8세 연하인데도 친구로 표현하고 있다. 유재의 아들은 대서예가인 강암 송성용 선생(1913-1999)이며 넷째아들이 현 전북지사인 송하진 지사로 나와는 초중학교 동기이다.
큰아들이 송하철(전 전북부지사), 둘째 아들이 송하경(전 성대교수), 셋째아들이 송하춘(전 고대교수)이며 둘째 따님은 이당 송현숙 선생으로 서예가로 활동중인데 나의 안사람인 가원 양순옥은 현재 이당의 문하생이다. 가까운 친인척으로 송하선(전 우석대 교수․시인), 고 송하영(서예가), 송택주(전 이리기독교 방송국장), 김병기(현 전북대 교수․서예가)를 찾아볼 수 있으며 자타가 인정하는 현 전북 최고의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주2 석정 이선생 : 石(석)亭(정) 李(이)定(정)稷(직)(1841-1910)선생을 말한다. 본관은 신평이다. 유재와 석정 두 사람은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 거주하고 있었다. 석정은 우리 신평이씨로 고손자가 나의 초등학교 동기인 이경석(창석)이다.
주3 백산 전 선생 : 艮(간)齋 田(전) 愚(우)(1841-1922)선생을 말한다.
■讀(독)谷(곡) 肯(긍)構(구)堂(당)記(기)(독곡 긍구당에 관한 기록)
돌제 동편 두어무 쯤에 독곡동이 있으니 우리 오세조 시독공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좌우로 산등성이 성처럼 환포하고 양쪽 계곡물이 교합해 흘러서 금대를 이루었다. 그 앞으로 공간이 넓어 백리 들판을 이루는 밖으로 여러 봉우리들이 구름가에 나열되어 있으니 마치 손자 아이들이 할아버지에 공손히 절하는 것 같다. 남쪽으로는 황산이 책상이 되어 가로놓여 있으니 집안에서 선인독서형의 형국으로 이름하였다.
예로부터 두어 칸 묘막이 있어서 매시 절 묘사를 지내고 치재하였던 나머지 문중의 자질들이 모여서 이곳에서 독서하였다. 옛적 문을 숭상하던 때에는 지역의 선비들이 많이 와서 수업하였다. 때때로 발군의 해석하는 베옷입은 이가 있었다.
이로써 세상 사람들이 이 씨의 재실이 고장사람들의 거소로 알게 되었고 부러운 칭송을 들었다. 불행히 지난 병인년 봄 화재가 나서 제기며 서책 그 밖에 집물들이 모두 타서 재가 되었다. 후손된 자 모두 창황하고 떨리는 마음을 품었다. 창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중 중건의 의론이 일어나서 여러 입이 한 곳으로 모아지고 이론이 없었다. 대저 전곡을 주선하거나 제도를 계획하는 것은 우리 아버님이 하셨고 택일하고 글을 지어 명명함을 사종 형 백파공께서 하셨다. 크고 작은 일을 잘 처리하고 각별히 감독하여 소홀함이 없게 하는 데는 사종형 근만과 사종질 림환이었다.
목석과 토와를 공급할 때에 역사에 응하여 번거로워 하는 얼굴색이 없었으니 이것은 여러 자손들 낙으로써 협력한 것이다. 불과 몇 달이 못 되어 공사의 마침을 고하니 건물이 장대 미려하고 배치가 굉대하였다. 옛 건물을 볼때 이보다 더 빛이 났으랴. 선조의 덕을 칭송하면서 높이 우러러 본다. 이에 상서를 인용하니 안회께서 말씀하시기를 긍구당이라는 말은 대개 조술을 이어간다는 뜻이다. 후손된 자 또한 능히 선조님들의 뜻을 계승하고 선조님들 자취를 돌아보아 그림으로 꾸미듯 덧보태야 할 것이다. 그런즉 그것이 긍구 긍당하는 길인 것이다. 가히 써 유감이 없이 당 역시 장차 백세가 되도록 멀리까지 바뀜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나와 제족이 함께 힘써야 할 바이다. 오호라 지금가지 중건된 지 이십여 성상이 되니 선고와 두 분의 공께서 모두 돌아가신 지 오래니 우러러보고 굽어봄에 눈물이 나올 뿐이다. 그 사실들이 오래되어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위와 같이 그 전말을 약술하여 써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고한다.
주1 돌제 : 내가 태어난 마을이며 신평이씨 동족부락이다. 당시에는 마을사람의 90%가 신평이씨였고 기타도 외척이 대부분이었다.
주2 병인년 : 화재가 난 날은 1926년 3월 12일이다. 세 달에 걸친 공사끝에 6월 8일 완성되었다.
주3 아버님은 이귀연공(1855~1939)이다. 나의 고조인 옥연공(1858-1930)의 둘째 형이다. 따라서 저자인 이근준 공은 나의 증조인 근욱공과 사촌지간이 된다.
주4 10촌형인 白(백)坡(파) 李(이)根(근)汶(문)(1846~1931)으로 두 권의 문집이 있는데 아직 한글로 된 번역본은 나오지 않았다.
주5 긍구당 : 현재까지 남아있는 신평이씨 김제계 대종중 재실이다. 현판은 석정 이정직이 썼고 주련은 일오 이근준이 짓고 유재 송기면이 썼다. 일오와 유재는 석정을 스승으로 동문수학했다.
주6 祖(조)述(술) : 선인의 설을 근본으로 하여 그 뜻을 펴 서술함을 말한다.
주7 肯(긍)構(구)肯(긍)堂(당) : ‘아버지가 업을 시작하고 자식이 이것을 잇는다’는 뜻이다. 긍구당이라는 당호는 이로부터 명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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