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연구

여산 함열 용안 읍지

청담(靑潭) 2020. 12. 16. 22:35

礪山․咸悅․龍安 邑誌

이의강 외 역

해제 : 조선시대 익산시 지역 군현 읍지 체제와 내용

전 익산고등학교 교장 임홍락

 

...지리지는 세종 때부터 편찬이 이루어져 독자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세종 14년(1432)에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다. 이 지리지에는 호구, 전결, 군정 등 경제, 군사, 행정적 측면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후 성종 대에 이르러 《팔도지리지》가 완성되고 여기에 서거정들이 편찬한 《동문선》의 시문을 합하여 4년 후인 성종 12년(1481)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다. 이 지리지는 인물, 예속, 시문 등에 치중한 문화적 성격이 강하여 《세종실록지리지》아는 구분이 된다. 《동국여지승람》은 성종과 연산군 때 2차례 개정되었고, 3차 수정을 거쳐 중종 25년(1530)에 전 55권으로 ?신증?두 자를 삽입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간행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 후기의 수많은 읍지와 지리지 체제의 모형으로 인정받고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크게 진행되고 있던 상황에서 당시의 실상을 반영하고 경제 , 군사, 항복을 반영한 전국적인 지리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숙종 때부터 진행되어 영조36년(1760)에 이르러 조선후기의 실상을 반영하고 지도까지 첨부한 《여지도서》가 편찬되었다. 《여지도서》에는 각 고을에서 편찬한 읍지들을 감여에서 수집해서 올린 것을 홍문관에서 성택하였다. 하지만 활자나 목판으로 간행되지 못한 필사본으로 각 도에서 올라온 자료를 그대로 책으로 묶었기에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달리 빠진 고을이 많으며, 도별 혹은 고을별로 내용에서 차이가 있고, 중앙정부 차원에서 수정․보완․정본화하여 공식적인 간행으로 이어지지 못한 미완의 전국지리지이다. 그러나 여지도와 지리서의 결합이라는 의미로 서명이 부여된 《여지도서》는 양란 이후 조선후기, 특히 18세기 중엽 지방사회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자료이다.

정조는 자신의 의도하에 정국을 이끌 수 있는 통치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지리서로 《여지도서》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 내용이 충실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이에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해동여지통재》편찬을 시도하였다. 이 지리지 또한 사회경제 및 문화적인 변동에 따른 새로운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정보를 국가 차원에서 확보할 필요성에 의해서 추진되었지만 완결을 보지 못학 미완성으로 그치고 만다. 하지만 이 《해동여지통재》의 편찬은 지역사회의 변동에 따른 국가의 대응이라는 18세기 전국 지리지 편찬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현재의 익산시 지역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여산, 익산, 함열, 용안 지역의 지리지나 읍지는 어떤 것들이 전하고 있을까? 세종 때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나,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는 전국 각 군현의 정보들이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익산시 지역의 네 고을에 대한 정보도 이들 지리지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16세기 후반 이후, 전국의 각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지역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읍지들을 편찬하기 시작하는데, 익산시 지역에서 가장 먼저 편찬된 읍지는 영조 32년(1756)에 당시 익산 군수였던 남태보가 편찬한 《금마지》였다. 이《금마지》는 상하 2권으로 편재되어 상권에는 지역을 71항목으로 나누어 기재하였으며, 하권은 6항목으로 고을과 관련된 각종 시뿐 아니라 저자 암태보가 직접 수집한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영조 연간에 편찬된 여산과 함열, 용안 지역의 읍지들은 현재까지 발견도지 않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금마지》편찬이후 (4년 만에) 관찬지리지로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익산시 지역의 네 고을 중 함열현과 용안현의 정보만 실려 있고, 여산부와 익산군의 정보들은 누락되어 있다. 반면, 정조에 의해 추진된 《해동여지통재》에는 앞의 네 지역의 읍지가 모두 수록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추정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들 읍지들은 현재 규장각에 필사본 별책으로 남아 있는데, 그 읍지들의 체제와 내용이 《해동여지통재》의 특징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 특징들은 첫째, 《여지도서》와 다르게 통치와 관련된 항복을 새롭게 설정하고 있으며, 더 자세한 내용을 싣고 있다. 둘째, 새로 추가된 항목들은 정조가 의도했던 새로운 변화를 담고 있다. 셋째, 장시, 상납, 요역, 선생안 등의 항목은 《여지도서》에는 실리지 않은 새로 추가된 항목으로 이 지리지의 시대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것 등이다.

앞의 익산시 지역 네 읍지들로 추정되는 읍지들의 편찬시기를 읍자에 실려 있는 선생안 자료들을 통해 살펴보면, 《익산군 읍지》는 정조 13년(1789), 《용안현 읍지》는 정조 14년(1790), 《여산부 읍지》는 정조 15년(1791),《함열현 읍지》는 그 이듬해인 정조 16년(1792)무렵에 편찬된 것으로 파악된다.

 

 

여산부 읍지

○건치연혁 : 본래는 백제 지량초현이다. 신라때 여량으로고쳐 덕은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1018) 전주에 소속시켰고, 공양왕 3년(1391)에 감무를 두어 낭산을 겸임하게 하였으며, 또 공촌피제 권농사를 겸하게 하였다.

...조선 공정대왕 2년(1400)에 여량과 낭산 두 고을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礪山縣이라고 하였다. 세종 18년(1436)에 원경왕후(태종의 비이자 세종의 모)의 외갓집 고향이라는 이유로 郡으로 승격시켜 충청도에 소속시켰다가 세종 26년(1444)에 다시 전라도에 소속시키고 군수를 두었다. 숙종 25년 기묘년(1699) 봄에 정순왕후(단종의 비)의 본관이라는 이유로 府로 승격시키고 도호부사를 두었다.

○방리 : (11개면) 천동면 천서면 서이면 서삼면 서사면 북일면 북삼면 피제면 공촌면 합선면 부내면

○산천 : 천호산, 독자천

○서원 : 죽림서원

관아 북쪽 35리에 있다.(현 강경읍 황산리 101번지)정암 조광조를 주벽으로 모셔 제사하고 퇴계 이황, 육곡 이이,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을 양쪽에 모셔 제사한다. 을사년(1665년 현종 6)에 사액을 받았다. 장의 1인, 유사 2인, 원생은 30여인이다.

○역원 :양재역

삼례 소속이다. 관아 북쪽 7리에 있다. 역리 1명, 약졸 10명, 삼등마 10필이다.

○누정 : 황화정은 현 연무읍에 있었고, 팔괘정은 강경읍 황산리에 있다.

황화정 : 관아 북쪽 10리에 있다.

팔괘정 : 관아 북쪽 30리에 있다.

※臨履亭 : 1972년 지도에는 임리정이 팔괘정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임리정은 1626년 김장생이 세운 강학소이다.

-강경포구는 조선시대 은진군에 속했다. 강경산 아래에 있는 바닷가 나루터였다.

-강경시장은 병촌리 월포리 일대에서 열렸다.

-1912년 은진군 김포면이 되었는데, 누정이 있는 일대는 여산군 북일면 일부, 즉 황산리를 편입함. 1914년 채운면 성서리를 합하여 논산군 강경면이 되었고 1915년에는 익산군 망성면 작촌리 일부를 병합하였다.

-1872년 지도에는 여산부 황산리인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논산군 강경면에 편입된 것임.

○물산 :비석, 게

○호구 : 원호는 4,078호이다. 인구는 남녀를 합하여 1만 9,038명이다. 그 가운데 남자는 7,699명, 여자는 1만 1,339명이다.

○전총 : 원장에 기재되어 있는 면적은 4,437결 76부 9속이고 밭은 1,722결 13부이다.

○창름

읍창 : 관아 남쪽에 있다.

나암창 : 관아의 북쪽 35리에 있다.

○노비

호조소속 : 사내종 6명, 계집종 1명이다.

관아소속 : 사내종 20명, 계집종 9명이다.

향교소속 : 사내종 10명, 계집종 4명이다.

서원소속 : 사내종 16명, 계집종 4명이다.

 

 

함열현 읍지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감물아현이다. 통일신라 때 함열로 고쳐 임피군의 영현이 되게 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전주에 소속시켰고 명종 6년(1176)에 현무를 두었다. 조선 태종 9년(1409)에 용안과 합하여 안열현이라 불렀고, 태종 16년(1416)에 각각 옛 이름을 회복하여 관원으로 현감을 두었다.

○관직 : 현감 1인, 좌수 1인, 별감 1인이다.

○방리 : 12개면(동일면 동이며 동삼면 동사면 서일면 서이면 남일면 남이면 북일면 북이면 북삼면 현내면)

○산천 : 함라산 황등산 웅포강

○봉수 : 소방산 봉수

관아 서쪽 3리에 있다. 서쪽으로 임피현 불지산 봉수에 응하고, 동쪽으로 용안현 광두원 봉수에 응한다.

○장시 : 읍장시 황등장시 웅포장시

○역원 : 才谷驛 - 관아 남쪽 2리에 있다.

○호구

임자 식년(1792, 정조16)의 원호는 4,182호이다. 인구는 1만 6,251명이다. 그 가운데 남자는 7,960명, 여자는 8,291명이다. 승려 가구는 3호이고 승려 수는 5명이다.

○전총(田總) : 원장에 기재되어 있는 면적은 4,470결 69부 7속이다. 그 가운데 논은 2,440결 6부 4속이고, 밭은 2,030결 63부 3속이다.

○전세(田稅)

세미 : 525석이다.

삼수량미 : 183석 9두 7승이다.

세태 : 116석 7두 승 4홉이다. ※조세로 받던 콩

위태 : 55석 11두 5승 ※ 전세 대신 선혜청에 바치던 콩

◯대동

대동미 : 1,040석 13두 3승이다.

위태 : 55속 11두 5승이다.

저치미 : 1,442석 1두 8승 3홉이다. ※비축미

◯균세

선박세 : 77냥이다.

선무군관세 : 152냥이다.

결전 : 1,171냥 8전 7푼이다.

◯봉름 : 관리들의 봉급

관수미 : 289석 ※수령에게 지급

사객지공미 : 10석 ※사신접대용

유청지지가미 : 20석 ※꿀과 종이값의 쌀

아록미 : 15석 ※아전의 녹봉

공수위미 : 10석 ※관아의 접대나 역의 경비

◯요역

전결에서 거두어들이는 시초는 결마다 땔나무 1동 8속과 볏집 2속씩 거두어들이고, 1년동안 숯․꿩․닭 준비에 필요한 비용을 전결에서 마련하는 것으로 쌀 30석을 거두어들이고, 1년 동안 빙정(얼음관리 일꾼)에게 들어가는 비용으로 관수미 2석을 백성들에게 내주어 얼음을 떠서 보관하게 한다.

○창고

司倉 : 관아 남쪽 1리에 있다.

大同庫 : 관아 동쪽 1리에 있다.

조창 성당창 : 관아 북쪽 20리에 있다. 남원, 진산, 운봉, 익산, 금산, 용담, 고산, 함열 8개 고을의 전삼세(전세, 대동미, 삼수미)를 받아들여 바치는데 3월 15일에 포장해서 배에 싣는다. 임자년(1792) 봄부터 시작하여 지방관이 감독하여 상납하고 절목을 작성한다.

 

 

용안현 읍지

○건치연혁

본래 고려 함열현의 도내산은소이다. 한편으로는 창산소라고도 한다. 충숙왕 8년(1321)에 지역 사람 백안부개가 원나라에 있을 때 고려를 위해 공을 세우자 승격시켜 용안현으로 삼았다. 공양왕 3년(1391)에 전주의 속현이었던 풍제를 이곳에 편입시켰다. 조선태종 9년(1409)에 함열현에 합병하여 안열 감무를 두었으며, 동왕 13년(1413)에 혐감으로 고쳤고 역시 동왕 16년(1416)에 다시 분리하여 두 縣으로 만들고 현감과 훈도를 두었다. 각기 1인이다.

○관직 :현감 1원, 좌수 1인, 별감 1인이다.

○방리 : 4개현- 현내면, 동면, 남면, 북면

○산천 : 무학산 칠성산 용두산 은입산 광두산

창산포 : 관아 동쪽 7리에 있다. 물이 여산 미륵산에서 흘러와 곧장 북쪽으로 흘러 금강으로 들어간다.

금두포 : 관아 북쪽 5리에 있다. 옛날에는 득성창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덕성창이라고 부른다. 권근의 기록이 있다. 지금은 함열의 성당창으로 옮겼다.

○풍속 : 순박하고 착실하며 순수하고 아껴서 일절 분수 밖에서 도모하여 구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향음주례가 있었다.

○봉수 : 광두원 봉수 - 관아 동쪽 10리에 있다. 서족으로 함열현 소방산 봉수에 응하고북쪽으로는 충청도 은진현 강경산 봉수에 응한다.

○장시

완포시장 : 관아 서족 5리에 있다.

검망시장 : 관아 남쪽 8리에 있다.

○누정

태허정 : 읍성안 연지 가운데 있다. 태사 주지번이 편액을 썼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

※태허정은 《금마지》에 의하면 익산의?고을 관아 서쪽 2리 산기슭에 있었고, 양곡 소세양이 창건하였는데 조망이 뛰어났다고 하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편액은 주지번이 뒤에 쓴 것인데 소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익산소재기록이 좀 더 구체적인 것으로 보아 어쩌면 용안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군자정 : 현감 정중조가 창건했는데 지금은 향청으로 옮겼다.

○물산 : 웅어(요즈음 ?우어?라고 부르는 고기인 듯하다.) 게, 반하(약초)

○호구 : 원호는 1,681호이다. 이구는 남녀 5,612명이다. 남자는 2,686명, 여자는 2,926명이다.

○田總 : 원장에 기재되어 있는 면적은 1,853결 62부 8속이다. 그 가운데 밭은 561결 74부이고, 논은 1,291결 88부 8속이다.

○전세

세미 : 336석 4두 2승 2작이다.

삼수량미 : 97석 9승 5홉 2작 8리이다.

세태 : 50석 13두 2승 8홉 3작이다.

○대동 : 대동미 560석이다. 위태 20석 3두이다. 저치미 452석 14두 2홉 6작이다.

○균(역)세

해세전 : 2냥으로 봄과 가을로 나누어 납부한다.

선무포 : 35필이다.

결작 : 592냥 2전 8푼이다.

○요역 : 65석을 전결에서 거두어들인다. 그 가운데 35석을 꿩과 닭 준비비용으로 내려주고, 30석을 숯 준비 비용으로 내려준다.

○충신 : 오응정 오욱 오직 오방언 등

○고적

풍제현 : 관아 동쪽 5리에 있다. 고려때 속현이었는데 지금의 당후리이다.

'향토사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익산의 역사(행정구역의 변천을 중심으로)  (0) 2022.02.16
익산향토사 몇 자료 정리  (0) 2020.12.29
금마지(金馬志)  (0) 2020.12.14
익산의 조창  (0) 2020.01.16
익산의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 요약  (0) 2020.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