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인도 네팔 12일간의 여정

청담(靑潭) 2025. 11. 18. 01:11

인도 네팔 12일간의 여정

 

프롤로그

중장기 해외여행 계획 중에 인도와 네팔여행은 힘들다하여 가장 뒤로 미루어 놓았었습니다. 이제 우리 두 사람이 모두 70대가 되었으니 힘들다는 인도 네팔여행을 다녀오려고 지난 6월에 일찍 예약했는데 요즈음 환율상승으로 추가비용이 발생합니다. 다 트럼프 때문입니다. 이번 여행에 중고교 친구인 이○○교장과 이교장 후배인 김○○교육장이 전혀 사전에 약속한 바도 없는데 함께 하게 되니 무척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군산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맺은 인연도 있습니다. 이번 여행 중에 너무 많은 곳들을 찾았으므로 기록은 찾은 순서대로 되도록 간단히 하기로 합니다.

 

1일차 2025112()

미팅이 9시이므로 430분 발 버스를 탑니다. 인도항공 312편은 1205분에 정시 출발하여 오후 4시에 델리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시차는 3시간 30분입니다. 이런 시차는 기억에 없습니다. 비행 중에 행로를 탐색합니다. 중국 상하이, 우한, 쿤밍을 지나 방글라데시의 다카를 나르며 왔습니다.

인도와 네팔은 비자를 현장에서 발급하므로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데 다행이도 우리는 1시간 30분 만에 발급받고 시외지역의 호텔에 짐을 풀었습니다. 공항근무자들의 나태한 근무자세가 말이 아닙니다. 날씨는 1528도여서 초여름 같이 아주 좋은데도, 사원에 들어가야 하므로 반바지가 허용되지 않는데다 이곳 사람들은 낮에 상당히 더워도 반바지를 입지 않고 가을 옷들을 입고 있어 우리가 입을 상황도 아닙니다. 반바지와 짧은 T셔츠를 여러 개씩 준비했으나 반바지는 아예 입지 못했습니다.

일행은 16명으로 남녀 각 8명입니다. 부부가 4, 부자지간 두 분, 군산 친구들 두 분, 중랑구에서 오신 네 분의 여성입니다. 나중에 말씀들을 나누어보니 전라북도 분들이 무려 10명이나 됩니다. 이런 저런 인연들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모두 반갑게 만나 즐거운 여행을 시작합니다. 가이드는 고럽(42)인데 네루대학 출신으로 서울대학에서 한 달 연수를 한 후 한국인 가이드로 출발했으나 코로나 기간 동안 큰 어려움을 겪었답니다. 아직도 한국인들이 인도를 많이 찾지 않아 매우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으나 희망을 잃지 않는 마음가짐과 안내와 보살핌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오히려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그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2일차 2025113() 델리

쿠툽탑 : 1193년 이슬람교 술탄 꾸뜨브 웃딘이 힌두 왕국을 패배시킨 후 건설했다. 인도에서 가장 크고 높은 미나르(Minar)는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모스크의 부속건물로 예배시간을 알리는 탑이다. 지금까지 델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12세기 유적으로 델리뿐 아니라 인도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랜드마크로 꼽는 곳이다. 이 거대한 탑을 세운 사람은 델리 최초의 무슬림 군주인 꾸뜹 웃딘으로 추정되나, 사실 그의 통치 기간에는 1층만 완성되었을 뿐이고 그의 후계자인 일투미쉬, 그 뒤를 이은 피로즈 샤 투글라크가 그 위로 층을 계속 올리도록 했고, 그 결과 72.5m라는 놀랄 만한 높이의 세계 최고 벽돌 탑이 탄생한 것이다. 웅장하고도 아름답다. 마치 이집트나 로마의 폐허 유적처럼 거대하고 위엄 있는 건축술에 놀랄 뿐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방글라사힙 : 나눔을 실천하는 종교 시크교사원이다. 연중무휴 24시간 개방하고 빈자들에게 무료로 식사와 진료를 제공한다. 식판에 담아 주는데 음식을 마련하는 주방에도 들어가 보았다.

인디아 게이트 :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탑이며 인도문이라고도 한다. 프랑스 파리에 개선문이 있다면, 델리에는 인디아 게이트가 있다. 둘 다 도시를 상징하는 거대한 아치형 게이트지만 파리의 그것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라면, 델리의 게이트는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상징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 사망한 인도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거대한 위령탑으로 42m에 달하는 탑 전체에 약 85,000명 전사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버스로 지나가면서 여러 번 보이는데 대단한 위용이다.

후마윤의 무덤 : 초기 무굴왕국의 묘역이다. 1565년 지어진 무굴제국의 2대 황제 후마윤의 무덤이다. 이보다 더 큰 왕묘가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규모가 크다.

3일차 2025114() 자이푸르

암베르 성 : 높은 산과 마오다 호수, 무굴양식의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의 성이다. 암베르는 인도 라자스탄 주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로, 라자스탄 주의 주도인 자이푸르에서 약 1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암베르 성은 바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험준한 산악지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형을 활용한 방어적 목적이 강한 성이다. 대단한 요새이다. 저 멀리 건너 편 산에 다른 성도 보인다.

잘 메헬 : 암베르 성에 가는 도중에 있는 인공호수안의 궁전이다.

잔타르만타르 (천문대) : 마법의 장치라는 뜻을 지닌 건축물로 천문학 기술을 볼 수 있다. 18세기 초 당시의 전제군주로서는 보기 드물게도 건축, 천문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자이싱 2세가 건설한 천문대이다. 자이푸르 외에도 델리, 웃자인, 바라나시, 마투라에도 건설했는데 자이푸르의 잔타르만타르는 인도 내에 있는 중세식 천문대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20세기 초까지 실제 관측을 했을 정도로 높은 정확도를 자랑한다. 20여개로 구성된 주요 관측기구가 땅에 고정되어 있으며, 인도역사에 길이 남을 천문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다. 해시계는 너무도 정확하고 실제로 가이드와 실험해 보았다.

하와마할 : 여왕과 왕실의 부인들이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던 바람의 궁전. 1799년에 건축된 바람의 궁전 하와마할은 핑크 시티 자이푸르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하와마할의 높이는 15M에 이르는 파사드에 950개가 넘는 창문이 있다. 보수적인 봉건시절,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없었던 왕가의 여인들이 밖으로 나갈 수 없어 하와마할의 문틈을 이용해 세상을 구경했다고 한다. 하와마할의 창문은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게 특별히 설계되었다. 바람의 궁전의 이름은 밖에서 부는 바람이 건물 전체를 시원하게 만드는 특별한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알버트 박물관 : 자이푸르 랜드 마크. 원래 영국 왕 알버트 공작을 기리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1887년에 개관했다.

사랑의 궁전 : 암베르 서에서 저 멀리 보이는 다른 산에 있는 성이다. 가까운 곳에 까페가 있어 석양을 보며 맥주 한 잔씩을 마셨다.

빌라 만디르 : 힌두교 사원으로 드라비다, 라자스타니, 우트칼라 건축물의 혼합을 보여 준다. 그것은 2000톤의 순백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벤카테스와라 경의 화강암 우상은 높이가 약 3.4m이고, 꼭대기에는 조각된 연꽃이 우산을 이루고 있다. 절 구내에 42피트(13m) 높이의 놋쇠 깃대가 있다.

4일차 2025115() 아그라

찬드 바오리 : 시칸드라 지역의 아바네리에 위치한 대형 우물이다. 인도에서 가장 큰 계단식 우물 중 하나로 그 중 가장 크다. 엄청난 기하학 기술로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며 상층부에는 목욕실들이 있다. 아무 든 거 없이도 오르내리기에 무서운 좁고 경사가 가파른 계단들이 가득 설치되어 있다. 저 처럼 위험한 계단을 통해 물을 길어 가도록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의문이 들지만 아무튼 놀라운 건축술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시칸드라성 : 악바르 대제 무덤이다. 타지마할에서 10KM거리에 있는 시칸드라 성 내에는 악바르 대제(무굴 제국 제3대 황제)의 묘가 있으며, 이는 인도 무굴 건축의 대표적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정식명칭은 악바르 마우솔레움이다.

아그라성 : 무굴 제국의 권력을 상징하는 샤 자한이 유폐되었던 성이다. 1565년 무굴제국의 제3대 황제 악바르 대제에 의해 건설된 아그라 성은 무굴제국의 권력을 상징하는 곳으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아마르싱문을 통해 궁전 내부에 입장하면 사암으로 만들어진 궁전이 있고 정원수와 초록잔디가 인상적이다. 특히 디완이카스는 귀빈 접견실로 아그라를 흐르는 야무나 강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여 매우 인상적이다. 아그라성에서 보이는 타지마할은 마치 강의 수면위로 떠있는 듯하다. 건축광인 샤자한은 델리에 붉은 성(1648)과 타지마할(1653)을 지었으나 지나친 건축공사로 인하여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658년 샤자한이 병에 걸리자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는 샤자한을 아그라 성에 죽을 때까지 감금했다. 아그라 성에서 저 멀리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그가 8년간 유폐되어 살던 방을 찾으니 덧없는 인생의 한 모습이 그려진다. 아무튼 그는 인류 최고의 걸작을 이루어냈다. 아그라성은 198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타지마할 : 무굴 제국의 샤 자한 왕이 사랑하는 왕비를 위하여 세운 건축물이다. 타지마할은 인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적지 중 하나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이다. 무굴 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Shah Jahan)'이 자신의 아이를 낳다가 죽은 아내 뭄타즈 마할에 대한 변치 않는 마음을 간직하고자 만든 역사상 유례없는 화려한 무덤이다. 황제는 아내의 넋을 달래기 위해 22년간의 시간을 들여 타지마할을 짓게 하였다. 엄청난 예산과 20만 명의 공사 연인원 그리고 1,000여 마리의 코끼리를 동원하여 1653년에 완성한 이 기념비적 예술품은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5일차 2025116() 델리

약사르담 사원 : 19952005년에 지어진 사원이다. 엄청난 규모로 드넓은 대지에 지어진 세계에서 가장 큰 힌두사원이라는데 주차장에서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한 바퀴 돌아보는데도 힘들다. 일체 사진을 찍을 수 없게 하며 찍은 사진이 없다. 주차장에서 나오면서 멀리서나마 찍으려다 실패했다. 도대체 오늘날 인도의 대다수 국민들은 어렵게 살아가는데 종교는 과연 저런 어마어마한 사원을 지어야만 하는 건가? 살아서는 고생이고 그저 죽어 천국에만 가면 된다는 건가? 건축비용은 어디에서 나오고 영화는 누가 누리는가? 주지스님이 3대째라는데 주지가 아니라 아예 제왕이다.

바하이사원 : 연꽃사원이라고 하면 연합사원으로도 불린다. 1986년 건립했다. 사원 건물형태가 연꽃 형상으로, 일명 연꽃(Lotus)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숫자 9를 신성시하는 종교적 특성에 맞춰 9면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27개의 연꽃잎을 형상화하였다. 바하이 신앙은 하나의 독립된 세계종교이며, 그 기원에 있어 신성하고 전위가 포괄적이며, 그 시야가 광대하며, 방법이 과학적이고 가르침이 인본주의이며,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 미치는 영향력이 강력하다. 바하이 신앙은 하느님의 유일성을 지지하며 그분의 예언자들의 일체성을 인정하며 전 인류는 하나이고 전체라는 원칙을 가르치고 있다.

6일차 2025117() 카트만두

델리 06:55 AI213(국제선 탑승) 09:05 카트만두 도착. 시차 15

보다나트 사원 : 네팔 최대의 불탑인 보다나트 사원은 라마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그 곳 주변에 정착해서 사는 티베트 사람들이 많은 관계로 이 주변 일대는 티베트와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다.

스와얌부니트 사원 :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원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이 사원은 정확한 근거는 없으나 지금부터 2천 여 년 전에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불교 사원으로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다. 이 사원으로 오르는 길은 300개가 넘는 가파른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고 기념품, 골동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외국인에게는 '원숭이사원' 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할 정도로 야생 원숭이가 많이 살고 있다. 정상에 오르면 커다란 스투파를 볼수 있다. 불교인들은 스투파를 한 바퀴 돌면 불경을 1천 번 읽는 것만큼의 공덕을 쌓는 일이라 믿고 있어 스투파 주변은 참배객들로 항상 북적거린다. 스투파 옆에는 기도용 휠 마니차가 놓여 있어서 순례 온 불교인이나 티벳인들이 이를 돌리는 모습도 볼 수 있으며 카트만두 시내의 전경도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쿠마리사원 : 더르바르 광장에서 남쪽 끝에 있는 목조 사원이다. 목조 조각으로 이루어진 창틀의 기술이 매우 뛰어나며, 힌두교의 처녀신 쿠마리의 화신인 라즈 쿠마리(Raj Kumari)가 살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고대부터 라즈 쿠마리는 명문가의 어린 소녀 중에서 신비한 선택과정을 거쳐 선정하게 되는데, 학벌이나 외모보다는 특히 신성함을 중시하며 일단 선출이 되면 모든 이의 숭배를 받는다. 평소에는 외부 출입을 할 수 없지만 1년에 7번 있는 종교의식 때에는 사원 밖으로 나가서 살게 되며, 특히 매년 9월의 인드라 축제 때는 국왕도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소녀의 가족에게 돈을 지불하면 라즈 쿠마리가 2층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어 보인다. 그러나 라즈 쿠마리가 첫 생리를 하면 저주를 받은 것으로 보고 다음 라즈 쿠마리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되는데, 이후에는 대개 불행한 운명의 길을 걷는 경우가 많다.

7일차 2025118() 포카라

티벳시장 : 티벳인들로 이루어진 카페트 시장이며 주변엔 관광상품 가게들이 많다.

굽테스와라 동굴과 데이비스 폭포 : 작은 사원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면 강물로 인해 침식된 동굴이 있고 우렁찬 소리의 폭포가 보인다. 페와호에서 흘러나온 물이 만들어낸 폭포이다. 파탈레 창고(Patale Chhango)라고 불리는 이 폭포는 일설에 의하면 영국사람(David)이 그 아래로 떨어진 후 사라져 버린 데서 이렇게 불리어졌다고 한다. 페와호수에서 흘러나온 물이 이곳에서 폭포를 만들며 떨어지므로 수량이 많을 때는 멋진 광경을 볼 수 있다.

페와호'에서 보팅 : 포카라 외곽지역에 아름다운 페와호수가 있다. 호수가 상당히 크기도 하지만 자연경관이 그만이다. 빙하가 녹아내린 호수이며 네팔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로 포카라의 아름다움을 배가시켜주는 가장 큰 규모의 매력적인 장소이다. 이 호수에서 수영을 하거나, 잔잔히 흐르는 수면 위를 보트를 타고 가로지르며 여유로움을 느껴볼 수 있다. 외국인들뿐 만 아니라 네팔인들도 관광을 와서 보트를 즐기고 있다.

 

8일차 2025119() 포카라 - 룸비니

사랑코트 전망대와 히말라야 : 히말라야 일출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포카라시 동쪽에 위치한 전망대이다. 포카라 페와 호수 북쪽에 위치한 가장 유명한 히말라야 전망대이다. 안나푸르나 3봉과 마차푸차레 등 히말라야의 만년설봉들이 훨씬 뚜렷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고산지대의 특성상 이른 아침나절에만 청명하며 일출에 붉게 빛나는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 등 설봉들의 아름다움에 황홀한 정도이다. 어떤 이들은 이곳에 와서 날씨가 맞지 않아 저 장관을 보지 못하고 같다고 하니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마야 사당과 아쇼카 석주, 구룡못 : 석가모니 탄생지에 건립한 사당과 석가모니 어머니 마야데비가 목욕한 장소인 구룡못이 있다. 그리고 기원전 3C에 아쇼카 대왕이 건립한 석주가 있다. 마야데비 사원은 11세기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데비 부인을 기념하는 사당이다. 석가모니가 탄생한 곳인 룸비니 동산에 푸스카니 연못과 함께 위치하고 있으며, 사원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 장면이 부조로 묘사되어 있다.

9일차 20251110() 바라나시로 이동

국경이동으로 하루 소비. 국경이동시 혼잡하며 무질서한 모습이나 그래도 예상보다는 빨리 비자를 발급받고 인도로 넘어옴.

심플 요가체험 : 피곤함 풀어주는 요가이다. 아주 간단한 동작들만 가르쳐 주는데 두 다리를 45도 각도로 올리고 동시에 두 팔을 뻗어 45도 각도로 올리고 지속하는 자세를 하다 아랫배가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 듯싶으니 나만이 가진 신체적 특성임을 잘 알고 앞으로 크게 주의해야 할 사항이다.

 

10일차 20251111() 바라나시

꽃등디아 체험 : 소원을 이뤄주는 꽃등 띄우기이다. 배를 타고 나가 하나씩 띄우며 소원을 빌어본다. 새벽기도 하는 모습과 화장하는 모습을 관람하다.

사르나트, 사르나트 박물관 : 4대 불적의 한 곳인 부처의 초전법륜의 땅과 박물관이 있다. 사르나트는 석가모니가 부다가야의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이곳으로 와서 같이 수행했던 5명의 형제들과 처음으로 불법을 이야기했던 땅으로 불탑과 큰 수도원의 흔적, 고고학 박물관 등이 같이 있다. 룸비니, 부다가야, 구시나가라와 함께 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이다. 사르나트 고고학박물관은 석가모니의 초기 불상과 귀중한 아쇼카 석주, 마우리아, 쿠샨 및 굽타시대의 그림과 조각이 소장되어 있다. 일직이 8C초에 혜초스님(704-787)이 이곳 바라나시에 왔었고 사르나트에도 다녀간 기록이 왕오천축국전에 남아있다. 723년 혜초스님은 흑산도를 거쳐 중국에 왔고 광저우에서 출발하여 말레이반도와 자바섬 사잇길을 거쳐 인도에 도착했다. 동천국지역인 이곳을 경유하여 인도의 서쪽지역인 중천축을 거쳐 서천축국인 파키스탄 지역과 북천축국인 카슈미르지방을 지난다. 이어 중앙아시아지역을 돌아보고 텐산북로를 거쳐 툰황에 왕오천축국전을 남기고 733년 장안에 돌아와 50여년을 살다가 입적했다.

릭샤타기, 아르띠뿌자, 갠지스강 티타임 : 힌두교 전통의식인 아르띠뿌자를 관람하고 갠지스강 뷰를 바라보며 커피 타임을 가진다. 뿌자 의식은 힌두교인들이 신에게 올리는 종교 의식이자 제례이다. ‘기도하다라는 뜻으로 아침저녁으로 아르티뿌자 예배의식이 거행되고 있으며, 갠지스를 바라보며 향과 불을 피우고 힌두교 경전인 베다를 외우며 꽃과 불을 바친다. 행사가 화려하기도하고 인파가 엄청난데 멀리서 오는 순례자들과 시민들이라고 한다.

11일차 20251112() 바라나시

갠지스강 일출 보팅과 새벽기도 모습 참관 : 성스러운 갠지스강에서 일출을 기다린다. 힌두교 성지순례자들의 모습, 화장터를 볼 수 있다. 순례자들이 목욕을 하는 모습도 본다.갠지스강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인도인들에게 가장 큰 축복이자 바램이다. 갠지스강은 약 100여개의 가트가 있으며, 이른 아침이면 가트에서 목욕하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그리고 전날 저녁부터 시신을 태웠던 화장터 사람까지, 인도의 진짜 모습을 이른 아침 일출과 함께 느껴 볼 수 있다.

바라나시 12:35 AI405 델리 14:20 델리 공항 도착

싸켓 백화점 : 상류층들의 인도 인기 쇼핑몰이라고한다. 화려한 대리석 건물과 내부의 벽이나 복도까지 온통 대리석이다. 더운 놀라운 건 화려한 황제 화장실이다. 베르사이유궁보다 더화려한 화장실인데 안내인이 미소로 깍듯이 안내한다. ! 인도에서도 돈만 있으면 황제처럼 살 수 있구나. 릿샤를 끄는 사람들의 남루하고 빈약한 모습, 길거리 상인들의 초라한 모습들이 떠오른다.

12일차 20251113() 귀국

델리 00:05 AI312인천 10:40 도착

인천공항 11:50 익산 3시 도착

 

에필로그

인도는 실로 어마어마한 대국으로 면적은 세계 7위이고 인구는 세계 1위인 나라이다. 국가 경제력은 세계 5위이다. 첨단 IT경쟁력은 최고수준이며 관련 박사급 인재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그런데 수도인 델리는 지저분하고 도로정비도 되어 있지 않고 깨끗한 데를 찾아보기 힘들다. 빈부의 격차가 극심한 나라라서 그렇겠지만 부자들은 보이지 않고(백화점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가난에 찌들어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들만 보인다. 차라리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은 네팔의 카트만두의 거리는 깨끗하고 시민들의 모습도 훨씬 안정되어 보인다. 포카라로 이동하는 지역에는 시골임에도 깔끔한 3,4층 집들이 아름다운 색채로 지어지고 있다. 인도도 가이드 고럽의 소원대로 모디 총리의 대 개혁정책이 성공하여 거리도 깨끗하고 대다수 시민들도 안정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지만, 저처럼 힌두교의 계율이 엄하고 종교에 순응하는 국민들의 의식의 변화를 과연 쉽게 가져올 수 있을지 의문시 된다.

인도의 광대함과 문화의 찬란함을 보았다. 델리의 꾸툽탑과 폐허가 된 이슬람 사원, 자이푸르의 암베르성, 아그라의 아그라성과 타지마할, 카트만두의 쿠마리 사원, 포카라의 폐와 호수와 사랑코트 전망대에서 바라본 일출에 붉게 물든 안나 푸르나와 마차푸차레의 장관, 룸비니의 석가모지 탄생지, 바라나시의 항구의 전경, 사르나트 유적지등은 영원히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곳이었다. 일행들과 어울려 서로 배려하면서 정말 꿈같이 즐거운 여행이었고 나로서는 반드시 다녀와야 할 여행이었다. 다음 여행 계획은 실크로드이다.

 

 

 

□참고자료

인도

면적 329(7) 인구 13.5억명(1), GDP(6), 1인당 소득 2,930달러, 힌두교 80.5%, 이슬람교 13.4% 루피

1. 인더스 문명(B.C. 3000~2000)

2. 아리안 문화(B.C. 2000~1000)

3. 도시국가의 형성

4. 마우리아 제국(B.C. 321~185)

5. 쿠샨왕조(78~226)

6. 굽타왕조(320~606)

7. 군소왕국 및 이슬람세력의 진출(델리 술탄왕국) : 11세기~16세기

8. 무굴제국(1526-1858)

인도 공화국(印度共和國, 영어: Republic of India) 인구는 2023년 이래로 세계에서 가장 많으며 국토 면적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다. 서쪽으로는 파키스탄, 동쪽으로는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남동쪽에는 벵골만, 남서쪽으로는 아라비아해, 남쪽으로는 인도양과 맞닿아 그 주변으로 스리랑카, 몰디브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네팔, 부탄, 중국과도 맞닿아 있다.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의 해상 경계는 태국, 인도네시아와 접해 있다. 수도는 뉴델리이다. 주요 도시로는 뭄바이, 첸나이, 벵갈루루, 하이데라바드, 콜카타 등이 있다.

고대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이자 역사적인 무역로였으며 거대한 제국이 있었던 인도 아대륙은 오랫동안 그 지정학적 지위와 경제·문화적 가치를 인정 받아왔다. 인도는 4개의 종교(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의 발상지이며, 또한 기원 후 천 년 동안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이 인도에 영향을 미쳐 현재의 인도의 다양한 종교 문화를 만들었다. 18세기 초부터 서서히 영국 동인도 회사의 관리 아래에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19세기 중반 영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간디가 주도한 비폭력주의 독립 운동으로 1947년에 독립을 하게 된다.

인도는 GDP 규모로는 세계에서 5번째로 높다. 핵 보유국이자 지역 강국인 인도는 세계에서 상비군이 3번째로 많은 국가이며, 군비지출은 세계에서 10번째로 높다. 인도는 연방제 공화국이며, 28개의 주와 8개의 연방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는 WTO, SAARC, 브릭스, G-20, 영국 연방 등의 회원국이며,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사는 다문화 사회로, 종교 사상과 인도 영화, 인도 요리 등의 문화가 발전해 있다. 상위 1%40%의 부를 차지하는 빈부격차국이다.

역사

전근대

인도의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생한 인더스 문명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기원전 1500~1200년경 인도아리아인들이 이란 고원을 넘어 인도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베다 문명을 건설하였다. 이 시기 아리아인들의 베다 신앙에서 브라만교가 탄생했고, 산스크리트어가 발전해 이후 2,000여 년 동안 인도의 공용어로 사용했다. 인도의 문명은 4대 문명 중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가 가진 충적토는 농업에 큰 도움을 제공하여 국가가 아닌 지역으로 계산하면 인도는 문명이 등장한 이후 언제나 가장 인구가 많았다. 인도에선 카스트로 불리는 신분제(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불가촉천민)가 발달하여 인도 귀족들의 지배를 받지 않은 인도인이나 내부의 천민 집단 혹은 외국인을 불가촉천민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이보다 늦은 기원전 6세기에 등장했다. 십육대국이 들어선 북인도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기원전 321년경 ~ 기원전 185)의 통치 아래 마우리아 제국으로 통합되었고 그 손자인 아소카 대제의 시대에는 인도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한 대제국으로 확장되었으며, 남인도의 타밀라캄 지역에는 촐라, 판디아, 체라 등의 왕국들이 난립하였다. 인도는 마우리아 제국의 붕괴 이후 수많은 소왕국이 난립하였으며 굽타 제국(320~ 550) 시대에 브라만교가 힌두교로 발전하였다. 이슬람 교도들의 침입은 1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14세기 초, 모하마드 이븐 투글루크가 델리 술탄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고 무슬림 왕국들을 세워 통치하였다. 남인도에서도 역시 이슬람계 바만 왕조가 성립(1347)되어 1527년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며 이와 함께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1336년에서 1556년에 걸쳐 인도의 남부 지방을 양분하며 통치했다. 한편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여행(1498)을 기점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상륙하여 인도와 유럽 사이의 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피부가 하얀 백인 침략자들은 인도사에 있어서 대체로 지배층이었으나 인도 귀족들에 의해 학살을 당하거나 수드라 이하의 신분이 될 수도 있었다. 마누법전 등에 의하면 인도 천민들의 생활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탐구된다. 인도의 귀족들은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귀족제로 지배하기 위해 카스트를 발전시켰으며 특히 차별을 심하게 받는 수드라 이하의 천민들은 불만이 대단했으나 인도 귀족들의 현실적이고 비정한 지배 시스템에 의해 저항할 힘을 가질 수 없었고 귀족들을 향한 반란도 항상 비참한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근대

16세기 초, 한때 델리 술탄국(1206-1526)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던 인도 북부 지역은 우월한 기동성과 화력을 기반으로 한 중앙아시아의 전사들에게 점령당했다. 그러나 인도 귀족들은 국가나 민족이 망해도 개인적으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 전부를 제압하는 일이 전근대 수준으론 언제나 거의 불가능했다. 인도의 귀족들은 외부 정복자들에 의해 공적인 신분이나 지위를 잃기도 했으나 그들이 가진 힘을 바탕으로 다시 귀족 신분을 얻었다. 신화적인 역사가 많은 인도와 달리 현실적이고 냉혹한 지배자들도 인도에선 자주 출현했으며 인도 귀족들은 현실적인 방법들을 딱히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외부의 정복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긴 사람들이 있으며 인도의 귀족들은 최후까지 영토의 40%와 인구의 23%를 지배하였다. 무굴 제국(1526-1857)은 명군 악바르 대제의 재위기에 이슬람교를 전국에 퍼뜨리고 부족간의 갈등을 완화하였으며, 황제를 신성화시키고 페르시아의 풍요로운 문화와 인도의 고유 문화를 결합하여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웠다. 무굴 제국은 주로 모든 세입을 농업에서 걷었으며, 안정적인 경제 구조를 운용하여 은으로 세금을 걷는 등 선진적인 경제를 이룩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시장 자체의 규모가 커졌으며, 농부들과 예술가들이 대거 발흥하여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하였다. 17세기에는 무굴 제국의 통치 하에 인도는 안정기를 되찾았으며,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하였다. 귀족들은 회화, 문학, 직물, 건축들을 후원하였으며, 무굴 제국의 통치하에 마라타인, 라지푸트인들, 시크인들과 같은 새로운 민족 공동체들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무굴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 지역에서 군사적, 경제적인 특권을 누렸으며, 점차 고유적인 정체성을 형성해나갔다. 상업의 팽창은 인도 남부와 동부 지역에서 새로운 상인 엘리트층들의 형성을 유도하였다. 다만 점차 18세기 들어 제국이 쇠퇴기에 들어가자, 이 엘리트층들은 스스로 생존을 위하여 독립적인 세력들을 만들어 자치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1526년 바부르가 세운 이 제국은 악바르와 아우랑제브 치세 동안 세력을 확장하고 최고의 번영을 누렸으나 이후 마하라슈트라를 중심으로 형성된 힌두 왕국인 마라타 제국이 17세기말 세력을 뻗치면서 위협받기 시작했다.

18세기 초에는 인도의 경제와 정치가 점차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하였고, 영국 동인도회사와 같은 유럽의 무역 회사들이 해안가로 진출하여 인도의 경제를 차츰차츰 잠식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막강한 해군력, 해외 식민지들에서의 자원, 발달된 무기술 등으로 인하여 점차 인도 엘리트층의 관심과 후원을 받기 시작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처음에는 이 엘리트층들의 지지를 받아 1765년에 벵갈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하였으며, 다른 유럽 열강들의 인도 진출을 막아 독점적인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과 동인도 회사는 부유한 벵골 지역을 이용하여 점차 힘을 키워나갔고, 무력으로 1820년대에는 인도 대부분의 지역들을 거의 다 통치하게 되었다. 인도는 더 이상 특산품들을 해외로 수출하지도 못했고, 그 대신 대영 제국에게 원자재들을 공급하는 광산 수준으로 전락하였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때부터를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기로 본다. 이쯤 되는 시기에 영국 동인도 회사는 영국 의회의 지원, 그리고 군대의 지원을 받아 교육, 사회, 문화와 같은 비경제적인 분야에까지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현대

사학자들은 현대 인도가 1848년과 1885년 사이 쯤에 시작하였다고 구분한다. 1848년에 달후지경이 동인도회사의 사장으로 부임하여 현대 국가로서의 변환을 주도하였다. 이는 주권 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잡을 수 있게 하였고, 이후 인도의 독립의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영국은 자치권, 인구 조사, 공공 교육 등을 실시하였으며, 운하, 철도, 전보선 등을 깔아 기술의 현대화도 촉진하였다. 이는 유럽에도 이 같은 신문물들이 깔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깔린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 착취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고, 1857년에는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혹독한 지세, 사회적인 차별, 사회적인 개혁 조치 등에 반발하여 여러 지역에서 동시적, 산발적인 반란들이 일어난 것이다. 반란은 주로 인도 중부와 북부 지역에 집중되어 일어났고, 동인도회사의 지배 자체를 뒤흔들었다. 1858년 즈음이 되자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이 반란으로 인하여 동인도회사의 직접 지배는 해산되었고 영국 정부가 직접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시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제한적이나마 영국적인 의회 제도를 도입하였고, 경호원들을 동원하여 봉건 지주들과 귀족들을 보호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공 사회의 질은 인도 전역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결국 1885년에는 인도 독립의 초석을 놓은 인도 국민회의가 창설되었다.

기술의 발전, 농업의 상업화가 19세기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고, 경제적인 발전이 진행됐으며 많은 소규모 자영농들이 해외 시장에 의존적으로 변모하였다. 다만 막대한 양의 곡물들이 해외로 방출되며 대규모 기근들이 횡행하였다. 인도의 인프라는 영국 본토에 비하여 훨씬 열악한 상태였고, 인도인들은 실업 상태에 놓여있었다. 다만 장점들도 몇몇 있었는데, 특히 수로가 깔린 펀자브 지방은 인도 국내의 소비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막대한 양의 곡물들을 새로이 생산하였다. 또한 철도 네트워크가 효과적인 식량 수송을 도와 기근 지역에 구호물을 실어 날랐고, 상품들의 이동을 쉽게 하였으며 인도인 소유의 산업을 크게 키운 것이다.

1차 세계대전에 대략 1백만 명의 인도인들이 영국 편에 참전을 하였다. 이후 영국은 인도에 여러 개혁 조치들을 개시하였으나, 억압적인 정책들도 피기 시작하였으며 점점 많은 인도인들이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때 간디가 이끄는 비폭력 운동,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비협력 운동이 전역적으로 퍼져나갔으며, 협력과 평화의 상징으로 떠올라 인도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1930년대 동안 영국은 점진적인 입법 개혁을 진행하였고, 간디가 이끄는 인도 국민회의가 여러 차례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다만 이후 10여년 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며 독립 요구는 일단 일단락되었다. 인도는 2차 세계대전에도 영국의 편으로 참전하였다. 전후 인도 국민회의는 끊임없이 독립을 요구하였고, 북부 지방에서는 무슬림들이 들고 일어나 영국의 지배를 거부하였다. 결국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켰으나, 이 과정에서 힌두교도 중심의 인도 지방과 이슬람교 중심의 파키스탄 지방간에 불화가 일어나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 2개의 국가로 나뉘어 독립(1947)하게 되었다. 펀자브와 벵골은 주민들의 종교성향에 따라 각각 2개로 분리되어 양국에 포함되었으며 카슈미르는 아직까지도 분쟁이 계속되는 상태에 있다.

인도에서는 자와할랄 네루를 총리로 한 국회가 1952년 선거를 통해 구성됐다. 확정되지 않은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196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1965년에는 파키스탄과 잠시 국경 분쟁을 겪는다. 1967년에는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1984 암살)가 의회의 지지 받아 총리로 취임하였고 인디라 간디가 암살된 이듬해 아들 라지브 간디(1991년 암살)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1971년 파키스탄과 국경 2곳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시크교도들이 펀자브 지방의 독립을 요구하는 등 인종과 종교로 인한 갈등이 잔존해 있다. 인도는 새 독립 국가로 출범하였고, 1950년에 드디어 헌법을 완성하여 반포하였다. 이 헌법은 인도를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공화국으로 규정하였다. 인도는 그 거대한 인구와 영토의 난점에도 불구하고 시민권을 유지한 민주 공화국으로 남았으며, 대법원 사법권이 존중되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언론을 보유하며 완전한 민주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1990년대부터는 경제적 자유화도 진행되었고, 대규모의 중산층들을 만들고 인도를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국들 중 하나로 만들었고 지정학적인 중요성도 크게 뛰어올랐다. 인도의 영화, 음악, 사상들은 세계적으로도 크나큰 문화를 끼치고 있다. 하지만 인도는 아직까지도 도심과 농촌간의 심각한 빈부격차, 엄청난 빈민들의 수, 카스트 제도의 폐해, 잠무와 카슈미르 지방의 분리주의 운동 등에 신음하고 있고, 중화인민공화국과 파키스탄과도 여전히 국경 갈등을 겪고 있다. 인도는 제3세계 국가들 가운데에서도 독보적일 정도로 완전한 민주주의 체제 유지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로 불린다. 2019년 경제 규모는 세계 5위까지 이르게 됐다.

 

네팔

면적 14.7, 인구 3.000만 명, 1인당 소득 1,400달러, 종교 힌두교 87%, 불교 8%, 이슬람교 4%, 통화 루피

역사

17681221일에 왕조가 세워졌고, 1814년 영국 육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영토를 상당수 잃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 상태로 놓이지는 않았다. 1990년에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변경되고 1994년 총선에서 네팔 통일 사회주의당이 정권을 잡았다. 1996년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이론을 따르는 마오이스트(Maoist)들이 네팔 인구의 37.8%를 차지하는 네팔 원주민(자나자티스)을 인적자원으로 한 무장투쟁을 시작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당시 무장 투쟁 지도자는 프라찬다 현 네팔 공산당 당수이다.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던 비렌드라 전 국왕은 2001년 네팔 왕실 대학살 사건으로 사망하였다. 같은 해에 즉위한 마지막 왕 갸넨드라 시대에는 총리가 없었다. 그리고 전제 정치와 다름없는 행각으로 국민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 때문에 내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결국, 20071223일 네팔은 국민 투표에 따라 군주제 폐지를 결정했다. 2008528일에 네팔 제헌의회가 첫 회의를 열고 압도적인 찬성 속에 왕정 폐지와 공화정 도입을 골자로 한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239년 동안 이어졌던 왕정체제가 끝나고 공화제로 변경되었다. 궁을 비우라는 의회의 통첩을 받은 네팔의 왕과 왕비는 2008611일 군과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카트만두의 궁전을 떠났으며 일부 왕의 지지자들이 앞길을 막는 시도도 있었다. 왕이 거주하던 궁은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네팔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될 갸넨드라는 국민들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밝히며 네팔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84월 제헌의회 총선에서는 마오쩌둥주의 계열의 네팔 공산당이 전체 의석의 1/3 이상을 차지하며 제1당으로 올랐으나, 20087월에 열린 선거에서 제헌의회는 국민회의당의 람 바란 야다브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2008815, 제헌의회 투표에서는 네팔 공산당의 프라찬다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네팔은 239년 동안 지속된 왕정2008년에 폐지하고 연방공화국이 됐다. 하지만 이번 시위 전까지 13차례나 총리가 바뀔 만큼 정치적 혼란이 이어져 왔다.

네팔 Z세대 시위

2025년 네팔 Z세대 시위는 20259월 네팔 전역에서 일어난 주로 Z세대 학생과 젊은 시민들이 조직한 대규모 시위이다. Z세대 시위라고도 불리는 네팔 시위는 수많은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대한 전국적인 금지 조치 이후 시작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부패와 정부 관료와 그 가족의 부의 과시, 공금 오용 의혹에 대한 대중의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이 운동은 거버넌스, 투명성, 정치적 책임에 대한 더 넓은 문제로 확대되었다. 시위는 공무원에 대한 폭력과 정부 및 정치 건물에 대한 반달리즘(훼손행위)이 전국적으로 발생하면서 격화되었다.

202594, 네팔 정부는 정보통신기술부의 새로운 규정에 등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페이스북, X, 유튜브, 링크드인, 레딧, 시그널, 스냅챗을 포함한 26개 소셜 미디어 플랫폼의 폐쇄를 명령했다. 등록 요건은 수입 증대를 위한 노력으로 외국 전자 서비스 제공업체에 대한 새로운 디지털 서비스세 및 엄격한 부가가치세 규칙 시행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비평가는 이 SNS 폐쇄가 소셜 미디어 트렌드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 지도자의 자녀와 친척이 누리는 부당한 특권에 초점을 맞춘 족벌주의를 부각시켰기 때문에 촉발되었다고 주장했다.

미디어 플랫폼 금지의 중요성은 네팔의 정치경제학과 관련이 있었다. 네팔 GDP33%는 송금에서 나오며, 수십만 건의 출국 허가가 발급되고 청년 실업률이 20%에 달한다는 것은 이러한 송금이 가계를 유지하고 수입 대금을 지불하지만, 국내 경제가 고용 우선 모델로 구조적 변화를 겪지 못하여 청년이 온라인 공간에서 일하게 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 금지는 청년의 생계를 위협했다.

시위 이전에 네팔인의 연평균 소득은 1,400달러였지만, 집권 엘리트의 가족은 소셜 미디어에서 자신의 부를 과시했다. 이러한 "금수저" 트렌드는 특히 Z세대 사용자로부터 상당한 대중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네팔 인구의 평균 연령은 25세로, 인구의 상당 부분이 소셜 미디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Z세대이다. 여기에 국가의 대부분이 농촌 지역이고 험준한 지형과 상당한 해외 이주로 인해 네팔은 남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소셜 미디어 사용률을 자랑하며, 인구 2명당 거의 1개의 계정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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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 내 특히 마이티가르 만달라와 뉴바네스와르의 연방 의회 건물 주변에서 수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202599, 카드가 프라사드 샤르마 올리 총리는 몇몇 정부 장관과 함께 사임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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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는 시위대 21, 수감자 9, 경찰관 3, 기타 18명을 포함하여 총 51명에 달했으며, 전국적으로 1,3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전 대법원장 수실라 카르키가 네팔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로 임시 총리에 취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우델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고 202635일을 다음 선거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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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 지역에 통행금지령이 해제되었다. 카르키 총리는 병원에 있는 부상당한 시위대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국내 평화가 회복되었다고 전해졌다.

사망자는 72명에 달했고 2,1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수실라 카르키의 임시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시위에서 가족을 잃은 가족은 100만 네팔 루피(20259월 기준 약 7,000달러에 해당)의 금전적 보상을 받을 것이다. 시위 중 부상당한 사람들도 돌봄을 받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같은 회의에서 수실라는 국가 재건을 위해 단합을 촉구했다.

지리

네팔은 길이 650 km, 너비는 200 km 정도의 직사각형 형태이며, 전체 면적은 147,181 km2로 세계적으로는 94번째로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자치구, 서쪽으로는 인도의 우타라칸드 주, 남쪽으로는 우타르프라데시 주와 비하르 주, 동쪽으로는 시킴 주와 웨스트벵골 주에 접하는 내륙국이다. 길이는 총 2926 km, 그중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은 1236 km, 인도와의 국경 1690km에 달한다.

네팔은 비교적 작은 국가이나 인도와의 국경지대에 펼쳐져 있는 습지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경계에 있는 히말라야 등 고산지대에는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곳이 많다. 네팔은 자연, 지리학적으로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산악 지대, 언덕지대, 그리고 습지대로 나뉘는데, 이러한 구분은 정부의 지역 개발 계획에서도 그대로 사용된다.

북쪽의 중화인민공화국 국경 지대에는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8000m급의 높은 봉우리를 포함한 히말라야가 존재한다. 따라서 고산 기후를 가지고 있다. 한편, 인도와의 국경 지역은 "타라이" "떠라이" 또는 "마데스"라고 하는 고온다습한 평원 지대가 있고, 비옥한 땅이다. 그중간에는 언덕이 펼쳐진다. 가장높은 곳은 에베레스트로 해발 8850m. 가장 낮은곳은해발 70m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에 접하는 네팔 북부는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8000m급의 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고산 지대이며, 많은 등산객을 매료시키고 있다. 고산의 산간에는 빙하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고산의 눈이 녹아, 빙하 호수의 종괴가 문제가 되고 있다. 빙하 호수가 무너지면서 대량의 토사에 의한 토석류가 발생하여 큰 피해가 발생한다. 특히 에베레스트 기슭에 있는 임쟈호수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팔의 주요 봉들은 다음과 같다.

에베레스트 8,848m 칸첸중가 8,586m 로체 8,516m 마칼루 8,462m 초오유 8,201m

다울라기리 8,167m 마나슬루 8,163m 안나푸르나 8,091m

정치

정치는 민주공화정이며 대통령은 람 찬드라 파우델이다. 네팔의 대통령직은 명목상의 직책이며, 실질적인 정부 수반은 총리이다. 의회는 상, 하원 양원제로 알려져 있다. 네팔의 주요 정당은 네팔 의회당, 네팔 공산당이 있다.

본래 네팔은 군주국이었으나 2006년 민주화 운동(록탄트라 앤도란)의 결과, 기존의 사실상 절대군주국에서 잠정적으로 입헌군주제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당시 여당인 네팔의회당과 다른 여러 당에서 제안되었던 왕제 폐지에 찬성하는 것을 표명했다. 또한 임시 헌법에 네팔에서 가장 큰 정치 세력이던 네팔 공산당 (마오쩌둥주의)가 임시 정부 복귀 조건으로 했던 "왕정 폐지""연방 민주공화제"가 포함되는 것이 정해져, 네팔의 국가 형태 이 왕정에서 공화정로 전환하는 것이 사실상 굳어졌다.

2008410일 치러진 제헌 의회 선거(지역구 240, 비례 대표 335, 의회 임명 26)에서 프라찬다 의장이 이끄는 네팔 공산당가 229(지역구 120, 비례 대표 100, 의회 임명 9)을 획득하여 제1당이 되어, 네팔의회당이 115(지역구 37, 비례 대표 73, 의회 임명 5), 통일공산당이 108(지역구 33, 비례 대표 70, 의회 지명 5)을 차지하여 왕정 폐지파의 정당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왕정지지파 정당은 유일한 국가 민주당 네팔이 4석에 머물렀다. 같은 해 528일 소집된 제헌 의회 첫 회의에서 찬성 560, 반대 4표로 정식으로 왕정을 폐지하고 연방 민주공화정으로 전환을 선언했다.

 

 

1. 델리 : 28-13

델리, 또는 공식 명칭 델리 국가수도직할구(영어: National Capital Territory of Delhi)는 인도의 수도권이며, 인도의 상업·공업·정치 중심지의 하나이다. 그곳에는 올드델리와 뉴델리라는 구/신시가지로 나눌 수 있다. 옛날에 올드 델리는 소도시였는데, 영국 식민지 시대 때 수도의 개발로 인해 뉴델리가 건설되었다. 영국의 설계와 건설에 의한 신도시 부분을 뉴델리라고 부르고, 예부터 있는 도시를 올드 델리라고 부르고 있다. 2001년 인도 인구 조사 결과 델리의 인구는 13,782,976이고, 2010년 현재 델리를 중심으로 한 광역 도시권(수도권)에만 약 157,000,000명이 살고 있다.

2. 자이푸르 : 30-15

자이푸르는 인도 라자스탄 주의 주도로서 도로와 철도 등 교통망이 정비된 상공업 중심지이다. 18세기에 건설된 사각형의 계획도시로 거리 전체가 분홍색이라분홍 도시로도 알려져 있는 곳이다. 1728년에 암베르의 통치자인 자이 싱 2세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2003년 현재 인구는 약 270만 명 정도이다. 북서쪽에 유령도시인 반가라가 있다.

3. 아그라 : 29-13

아그라는 인도 야무나 강변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있다. 1526년부터 1658년까지 무굴 제국의 수도로 발달했는데, 당시 건설된 타지마할, 아그라 성 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인구는 1,585,704, 도시권 인구는 1,760,285명이다.

4. 바라나시 : 30-15

바라나시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에 위치한 도시로 옛날 카시 왕국의 수도이자 동시에 힌두교의 최대 성지이다. 바라나시를 흐르는 갠지스강은 힌두교도에게 성스러운 젖줄로, 가트에는 강에 몸을 담그고 그 물을 마시기 위해 모여든 신도들로 북적거린다. 강가에서 화장을 하는 모습은 바라나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인구는 약 116만 명(2004)이다. 불교의 성지 사르나트가 인근에 있다.

바라나시에서 개발된 인도 고전음악의 버나러스 가라나와 수많은 유명한 인도 철학자, 시인, 작가, 음악가가 바라나시에 거주하였거나 거주하고 있다. 툴시다스가 그의 라마차리타마나스를 그곳에서 썼다. 아유르베다가 바라나시에 근원을 지닌다고 언급되며 고타마 붓다가 그의 첫 강론을 카시 근처의 사르나트에서 하였다. 고타마 붓다(기원전 567~ ) 시절에 바라나시는 카시의 수도였다. 중국의 순례자 수안장은 도시가 종교, 교육, 예술 활동의 중심이라고 증명하였다. 그곳은 갠지스강의 서쪽 제방을 따라 5km가량 뻗어있었다.

바라나시는 버나러스 힌두대학의 고향이며 거주자들은 주로 카시카 보즈푸리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그것은 힌두어에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사람들은 자주 바라나시를 사원의 도시, 인도의 종교 및 문화의 수도로 언급한다.

5. 카트만두 : 24-8

카트만두는 네팔의 수도로 네팔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네팔 중앙의 카트만두 계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는 약 320만 명이다.

카트만두 시내의 더르바르 광장, 스와얌부나트 사원, 부다나트 사원, 파슈파티나트 사원 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6. 룸비니 : 24도-10도

룸비니는 뒤에 석가모니가 된 샤카 왕자인 싯다르타 고타마가 태어난 신성한 곳으로 네팔 룸비니주에 있다. 불교 8대 성지 중 한곳이다.

이 탄생지는 1896년에 2,200년 전 인도 아소카 황제의 기념 기둥을 발견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불교유적지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현재 국제적인 후원 아래 룸비니 개발 계획으로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룸비니 주요 매력은 8km에 펼쳐져 있으면서 역사지의 보물을 모두 소유한 신성한 정원이다. 현재 개축중에 있는 마야데비 사원은 성지순례자와 고고학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요 방문지다. 붓다 어머니인 마야데비의 얕은 양각을 발견할 수 있는 이곳은 브라마와 인드라의 힌두신으로써 그를 낳고, 연꽃잎과 성수로 목욕시켰던 곳이다. 마야데비사원 서쪽으로 네팔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기념물인 아소카 석주가 서 있다. 이 기둥은 기원전 249년 아소카 황제가 이 성지를 순례한 기념으로 세웠다. 브라미어로 새긴 기둥조각이 기원전 623년에 태어난 붓다의 출생지가 바로 이 룸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7.포카라 : 24-12

포카라는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서쪽으로 약 200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로 약 19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어 네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꼽힌다.

30km 이내에 다울라기리, 안나푸르나, 마나슬루 등 8,000 m가 넘는 고봉이 위치하고 있다. 페와 호수 등 포카라 인근 어디에서도 고봉들을 조망할 수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는데, 특히 인근에 있는 사랑곳은 고봉을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꼽히고 있다.

그 밖에도 물이 깊은 구멍으로 떨어지면서 사라져버리는 다비스 폭포도 유명한데 그 이름은 다비 또는 데이비드란 사람이 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려고 구멍 안을 들여보다가 떨어진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8. 힌두교

힌두교(Hinduism, 또는 사나타나 다르마는 인도 신화 및 브라만교를 기반으로 형성된 인도 계통 다신교로,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에서 널리 믿는 종교이자 인도의 민족종교 및 최대종교이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ū)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은 넓은 강을 의미하는 신두(Sindhu)’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인도와 같은 어원이기 때문이다. 힌두교라고 할 때 민간 힌두교 전통과 베다 힌두교 전통에서 비슈누파와 같은 박티 전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복잡한 전통 전체를 뜻한다. 또한 요가 전통과 카르마 개념에 기초한 매일의 도덕적 삶과 힌두 결혼 풍습과 같은 사회적 일반 규범도 포함한다.

힌두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다음 가는 세계에서 3번째로 신도 수가 많은 종교다. 그 수는 2005년 기준으로 94,000만명에 달한다. 힌두교의 발생은 고대 인도의 종교 사상인 베다와 인도 신화에서 비롯하며, 베다 사상은 기원전 15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다는 초기 힌두교 종교이며, 그 경전은 현존하는 문학 문헌 중 가장 오래 되었다고 여긴다. 힌두교 신자는 출신 지역이나 가문과 연계한 신 하나를 섬기지만, 여러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다신교적 일신교(택일신교 또는 일신숭배). 다양한 지역적 신들이 하나의 종교사상으로 연합한 형태의 종교이므로 교주(敎主) 즉 특정한 종교적 창시자가 없는 특징이 있다.

힌두교로 번역되는 영어 힌두이즘(Hinduism)이라는 명칭은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인도의 종교에 자의적으로 붙인 이름이다. 원래 힌두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힌두교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며, 영원한 다르마(법칙)라는 의미의 '사나타나 다르마(산스크리트어: Sanātana Dharma)'고 불렀다. 산스크리트어 사나타나 다르마는 힌두교의 기본 교의를 지칭하는 말이다. 사나타나(Sanātana)는 영원하다는 뜻이며 다르마(Dharma)는 법() 또는 법칙으로 번역된다.

힌두이즘이란 말은 서양에서 종교를 포함한 인도의 문화의 특질을 총칭한 표현이다. 따라서 가장 넓은 의미에서 힌두교란 모든 인도 종교를 포함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힌두교란 외래 종교인 이슬람교 · 조로아스터교(특히, 파시교) · 기독교를 제외하며, 인도 고유 종교 가운데서도 불교 · 자이나교를 제외한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 힌두교란 불교와 자이나교 진출로 한때 후퇴하였던 베다 힌두교 전통, 브라만교가 8세기경에 새로운 종교적 형태로 대두한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힌두교라고 할 때는, 민간 힌두교 전통과 베다 힌두교 전통으로부터 비슈누파와 같은 박티 전통에 이르기까지, 위의 타 종교들을 제외한 여러 다양하고 복잡한 전통들 전체를 뜻한다. 이 일반적인 의미의 힌두교에는 또한 요가 전통이 포함되며, 카르마 개념에 기초한 매일의 도덕적 삶과 힌두 결혼 풍습과 같은 사회적 일반 규범도 포함된다.

힌두교는 고대 인도에서 발생하였다. 힌두교의 경전인 베다는 기원전 1500년경에 성립되어 베다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었다.

근대 이전에 인도 부근의 네팔, 인도네시아 지역에 전파되었으며 근대에 이르러 인도인들의 이주에 따라 세계 각지로 전파되었다. 힌두교의 많은 신들과 주요 사상은 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불교의 전파와 함께 힌두교의 신화와 전설이 전파되었다.

네팔은 2008년 힌두교를 국교로 지정했었지만 2015년부터 민주화로 인해 국교가 아니게 되었다. 인도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나 많은 사람들이 힌두교를 믿는다. 또한 힌두교는 굽타왕조의 지원 아래 확산되었다.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는 마다가스카르 동쪽의 모리셔스가 힌두교가 종교 중 최다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힌두교의 정전은 베다 · 우파니샤드이며 그 외에도 브라마나 · 수트라 등의 문헌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인도의 종교적 · 사회적 이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또한 경전에 준하는 것으로 마하바라타라마야나(라마의 기행)2대 서사시가 유명한데, 특히 전자의 일부인 바가바드 기타는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이 외에 푸라나 · 탄트라 · 아가마 · 상히타 등이 힌두교 각 파에서 존중되고 있다.

조금 부유한 북쪽지방과 브라만 계급과 크샤트리아 계급중에서는 비슈누파가 많고 남쪽의 가난한 지방과 수드라 계급과 불가촉천민인 찬달라에게는 시바파가 많다.

힌두교의 기본 교의는 우주의 법칙과 인간의 윤회를 근간으로 한다. 힌두교의 교의를 이루는 기본 개념들은 대부분 이후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 등 인도에서 발원한 다른 종교에 도입되었다.

힌두교에 따르면 우주는 생성, 발전, 소멸을 반복한다. 브라흐마신이 우주를 생성하고 비슈누신이 우주를 유지, 발전시키며 시바신이 우주를 소멸시킨다. 마치 계절이 바뀌듯 우주의 시간도 바뀌어 결국에는 낡은 우주가 소멸되고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진다.

윤회는 돌아간다는 뜻이다. 흔히 수레바퀴로 상징된다. 수레바퀴가 한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가듯 인간 역시 이 번 생애에서 다음 생애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힌두교의 교의에 의하면 인간 역시 우주 안에서 끊임없이 낳고 죽기를 반복하며 윤회한다. 인간이라 하더라도 다음 생애에는 짐승으로 태어나기도 하며 천신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수없이 많은 윤회의 과정에서 사람은 한 인생을 살면서 쌓은 업(Karma)에 의해 다음 생애가 결정된다. 다르마에 따른 삶을 살다 죽으면 다음 생애에는 보다 고귀한 존재로 태어난다. 다르마에 어긋나는 삶을 살면 고귀한 존재라 할지라도 다음 생애에는 비천한 존재로 태어난다.

브라흐만(산스크리트어: Brahman)은 우주의 진리 또는 우주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힌두교의 최상위 목표는 '참된 나'인 아트만이 '우주의 진리'인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카스트 제도의 가장 상위계층을 브라만이라고 칭한 것은 이들이 스스로 브라흐만을 구하는 것이 자신들의 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힌두교의 신은 브라흐마(Brahma), 비슈누(Vishnu), 시바(Shiva)의 삼주신(Trimurti,三主神)과 여러 남신, 여신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트만은 힌두교에서 생명은 숨과 같은 의미로 쓰였으며 아트만의 원래 뜻은 숨 쉰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생명을 목숨으로 표현하는 것과 유사하다. 숨 쉬는 생명 아트만은 ''를 말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윤회하는 삶에서 지금의 나는 '참된 나'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윤회를 거치는 동안 내가 쌓은 업(산스크리트어: Karma, )에 의한 것이다. '참된 나'는 윤회의 과정에서 계속하여 존재하여 없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나라는 생명의 본질'을 뜻한다.

카르마는 업()으로 한역(漢譯)된다.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업에는 다르마(: 산스크리트어: Dharma)에 마땅한 업과 다르마를 거스르는 업이 있다. 선업(善業)으로 한역(漢譯)되는 '선한' 카르마는 다르마에 마땅한 업을 쌓는 것을 의미하며 선업을 쌓으면 다음 윤회에 보다 존귀한 존재가 된다. 다르마를 거스르는 악업(惡業)을 쌓으면 다음 윤회에 보다 미천한 존재가 된다.

다르마는 법()으로 번역된다. 이때 ''이 의미하는 바는 우주에 존재하는 영원한 법칙이기도 하며 모든 생명이 마땅히 따라야할 본질을 말하기도 한다. 고대 인도에서 유래한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에 의한 각 신분의 다르마는 브라만의 지혜, 크샤트리아의 용맹, 바이샤의 근면이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시한 삼계급설과 유사하다.

모크샤는 브라만과 합일되는 것 또는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말한다.

힌두교의 교의에 의해 힌두교도들은 현세의 부귀를 전생에 의한 보상으로 생각하며 현세의 고난을 내세의 보상을 받기 위한 기회로 여기게 된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힌두교는 현세적이며 세속적인 성격이 강한 기복 신앙의 성격과 명상 요가 고행과 같은 신비주의적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힌두교인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절대인격신 바가반 크리슈나는 소를 돌보는 목동이었고 소를 아주 사랑했기 때문이다. 크리슈나는 유제품을 사랑했으며 "나에게 꽃과 잎 한 송이 물 혹은 우유를 바치면 난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라고 바가바드 기타 928절에서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베다에 따르면, 선한 생을 산 사람은 다음 생에 보다 윗 단계의 존재로 태어나고, 악한 생을 산 사람들은 다음 생에 그보다 아랫단계의 존재로 떨어지는데, 가장 낮은 단계의 생물은 악마와 같은 사악한 일을 하는 존재이며 가장 높은 단계의 생물은 인간이다. 악마에서 인간이 되기까지는 86번의 환생을 거쳐야만 하며, 이 과정에서 인간의 바로 전 단계의 생물을 소로 보고 있다. 거기에 한 마리의 소안에 3억 명 이상의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데, 소를 죽이거나 먹은 사람은 신성모독 취급을 받아 다음 생에 무조건 벌을 받게 된다.

그러니 소는 신성한 가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아힘사 즉 비폭력은 사나타나 다르마의 기본 윤리이기에 절대 동물을 살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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