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들리는가? 저 두승산 아래 배들녘의 피어린 함성이 (수필)

청담(靑潭) 2009. 9. 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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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는가? 저 두승산 아래 배들녘의 피어린 함성이


교사 이 석 한

                                

 

  우리학교에서 주산을 거쳐 줄포로 차를 타고 달리자면, 좌측으로 모양새만 조금씩 달라질 뿐 미동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저 조금은 장엄한 산. 땀 흘려 일하시는 엄마의 등에 업혀서부터 보아왔고, 가끔씩 혼자서 집을 지키며 아득히 멀리 아름다운 꿈의 나래를 펴본 경험이 있을 법 직도 한 저산이 바로 두승산(豆升山)이다.

  해가 변산반도를 넘어가며 서편 하늘을 붉게 물들여 가는 시각에 나는 이평(梨坪)들에 차를 멈추고, 단숨에 뛰어가 손으로 잡을 듯이 눈앞에 서있는 작은 산 - 백산(白山)을 바라다보고 서있다. 저 아득히 보이는 익산의 미륵산보다도 더 먼 금강으로부터 시작된 한반도 최대의 호남평야.

  왼 쪽으로는 서해안의 낮은 구릉과 변산반도가, 동쪽으로는 노령산맥이 감싸고 있는 그림 같은 저 모습이 어쩌면 저리도 한눈에 잡힐 수가 있단 말이냐?

  두승산에서 서쪽과 북쪽으로 부채를 펼친 모양의 이곳 넓은 들녘은 대 호남평야의 사실상의 끝이다. 이곳이 우리 역사상 최대의 농민투쟁인 동학 농민 전쟁이 시작된 바로 그 곳이려니와, 나는 정읍사람들이 동학농민전쟁을 정읍의 전유물로 삼는 데에 감히 도전한다.

  이곳은 투쟁당시 고부군( 古阜郡 )이었고, 지금은 고부면이 되어 정읍시에 속해 있기에, 옛 고부가 모두 정읍 땅이 된 것으로 여기기 쉬우나, 기실 그렇지 않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고부군에 속해있던 백산면이 모두 부안군이 되었으며, 고부군 덕림면의 10여개 마을이 덕림리가 되어 주산면에 편입되고, 고부군 거마면의 일부와 덕림면 일부가 부안읍에 병합되었기 때문이다.

 

 

  1894년 1월 10일 이른 새볔, 말목장터(현 이평면 소재지)에 수백 명의 고부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군수 조병갑은 동진강에 만석보를 쌓고, 약속을 어기고 물세를 걷는가 하면, 농민들에게 온갖 죄를 뒤집어 씌워 재산을 빼앗았다. 이곳 고부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정읍보다 세력이 크고 인근 쌀의 집산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써 부근에서 가장 번성한 고을이다. 줄포, 동진 같은 나루를

통해 어선과 상선의 왕래가 활발하여 당시 지방 관리들의 학정과 탐학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이곳은 중앙관리들이 뇌물과 권세를 이용하여 서로 부임하려고 노리던 소위 "물좋은" 고장이었다.

  당촌마을(현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의 서당 훈장이자, 동학의 접주인 전봉준의 지도아래 고부관아는 점령되고 조병갑은 도망쳤다. 농민들은 줄달음쳐 만석보를 무너뜨려 버렸다. 가슴이 후련하였다.

  3월 25일 47M의 낮은 산, 백산면 용계리에 있는 白山에 진을 치니 농민군이 8천이나 되었다. 이 곳에서 부대를 조직하여 전봉준을 총 대장으로 삼고, 황토현(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진격하여 관군을 대파하니, 비로소 19세기 들어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에 이어, 관리들의 끝없는 착취와 부정으로 견디다 못한 백성들의 분노는 이곳 에서 폭발하여 역사를 뒤 흔들고야 말았다. 농민군은 정읍, 흥덕, 고창, 무장,영광, 함평을 돌아 장성, 정읍을 거쳐 4월 27일에는 전주를 점령하였다. 청.일군이 밀려오자, 정부와 타협하고 우리역사상 최초의 민간 행정기구인 집강소를 전라도 53개 군에 설치하여 탐관오리를 벌하며, 노비문서를 없애고, 토지는 고루 나누는 등의 폐정개혁을 실천하여 나갔다.

 

  5월 이후 청일전쟁의 전세와 중앙 정국의 동태를 주시하던 농민군 지도부는 9월초, 반침략 항일투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집강소를 통해 10만군을 모집하고, 북접과 합쳐 20만의 대군으로 10월 말부터 20여일에 걸쳐 공주 우금치 등에서 일본군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으나 끝내 패하고,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되었다. 이로써 일년여에 걸친 농민전쟁은 엄청난 희생 속에 좌절되어

막을 내리고 일본의 침략은 더욱 거침없이 노골화되는 아픈 역사는 숨 가쁘게 전개되었다. 죽음에 이르러 혁명가는 이런 시를 남겼다.

 

 

 

때가 이르러서는 천지가 모두 힘써주었으나,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더 이상 대책이 없도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로운 마음에 잘못은 없으나,

나라를 사랑한 붉은 마음 누가 알아 주리오?

 

 

 

  들불처럼 아니 활화산처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고자, 고통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보고자, 저 고부 땅 배들에서 우렁찬 함성과 절규로 부르짖으며 일어섰던 저 농민들의 한 어린 몸짓은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으로 다가오는가?

  16세기 초 독일의 종교 개혁시, 목사로써 지상의 천국 건설을 주장하며 모든 것을 다 차지하고 있는 교회와 제후의 봉건제도를 타도하기 위해 일어섰던 뮌쩌와 독일농민들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처럼, 19세기 중엽 남녀 구별 없고 빈부의 차가 없는 지상의 천국을 이루려 했던 홍쉬취안의 태평천국처럼 그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와 착취와 탐학에 빠져있는 탐관오리들과, 일본의 침략

에 목숨을 던져 맞섰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스러져 갔다.

  100년이 지난 오늘의 모습은 어떠한가? 문민정부라는 허울 좋은 이름아래 정경유착 더욱 판을 치고, 정치인 공무원 공기업 모두 극도로 부패하고, 국민 소득 겨우 일만 달러에 선진국이 다 된 양 으스대며 달러 빛 얻어다 외국 나가 마구 써대다가 요 모양 요 꼴 I.M.F가 오지 않았는가? 국민소득은 5천 달러로 곤두박질치며, 중소기업은 문을 닫고, 회사원은 낚시터로 산으로 헤메이고, 대학생은 취직자리 없어 시집이나 가고 군대나 간다는데, 저 여의도 300선량 매월 2천 만원씩 국고 축내며 봄부터 이때까지 싸워대는 꼴이란 눈뜨고 볼 수 없다. 슬프도다. 여야 할 것 없이 나라망친책임은 저희들 모두인데 서로 나는 아니고 너의 책임이라 하며, 유치한 권력 싸움하는 꼴이 영락없이 당파싸움이다,    내 잘못은 없고 다 너 때문이라며 비방 성명전에 날이 새는 저들을 우리 국민들은 혐오대상 제 1호, 퇴출 대상 제 1호로 선정했는데도 물러나는 선량은 없고 이리 저리 이사 다니는 모습에 기가 막힐 뿐이다. 네 잘못 내 잘못 따질 때가 따로 있지 나라가 망해가고 국민이 희망을 잃고 앞이 안보여 깜깜한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자들일랑은 눈여겨보았다가 표로써 응징하자.

  내일 배들녘에서 지난 수재로 땅에 쓰러져 버린 벼를 일으켜 세우는 전교 봉사 활동이 있다. 땅에 엎드려 넘어진 벼를 세우며 가만히 귀 기울여 보리라. 백년 전,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이곳을 노도와 같이 달려 나가며 부르짖던 거친 함성이 들려오는지!

1998.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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