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문화원에서 발행한 익산향토지 제1권(2005)중 필자가 조사하여 정리한 부분입니다
Ⅵ. 평화동(平和洞)
1. 평화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행정동으로서의 평화동은 익산시내의 최 서남부에 위치한다. 원래의 평화동은 평화동 시장과 이리상고 그리고 터미널 부근일대의 작은 지역이었으나 1998년에 목천동이 편입됨으로써 당당히 큰 마을이 되었다. 평화동은 익산역의 아랫녁 끝에 붙어있는 변두리였지만 구시장이 가깝고 공용버스정류장 및 고속버스 정류장이 있는 관계로 옛날부터 시내의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곳이다.
평화동은 모현동과 함께 호남선 철로를 끼고 그 좌우에 마을이 위치하며 북으로는 군산선 철로를 경계로 송학동과 접한다. 호남선 이동에서는 북으로는 창인동 및 중앙동에 접하고 동으로는 인화동과 접한다. 서로는 오산면의 평야에 연결되고 남으로는 목천동을 포함하고 있어 만경강을 끼고 비옥한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목천들이 있다.
2. 평화동의 연혁
일직이 1906년에 옛 옥야현으로 조선시대 내내 전주부에 속했다가 익산군으로 편입된 지역은 남일면(중앙동, 인화동 등 시내 중심부와 목천동), 남이면(오산면 남부지역), 동일면(대장촌 일대), 서일면(오산면 북부지역), 북일면(남중동, 신동, 모현동, 영등동 일대)등 5개면인데 1914년에 남일면과 동일면이 합하여 익산면이 되고, 남이면과 서일면이 합하여 오산면이 되며, 북일면은 그대로 북일면이 되었다.
목천동 지역은 본디 전주부에 속한 남일면에 속하였다가 1899년에 익산군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익산면이 탄생할 때 남일면의 회룡, 회복, 신복, 하신, 신룡, 신평, 목천, 동자, 목상, 수월 및 서일면(西一面)의 송만 각 일부를 병합하여 그 중심 마을의 이름을 따서 목천리(木川里)라 하고 익산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17년에 익산면이 지정면이 되면서 오산면(五山面)에 편입되었다가 1947년에는 그 일부가 다시 이리시로 편입되어 목천동(木川洞)이 되었다.
그 뒤 1961년 중앙동, 남중동, 송학동, 모현동, 동산동, 인화동, 갈산동, 주현동, 창인동, 마동, 목천동, 평화동 등으로 다시 개편할 때 당당히 12개동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1973년 3월 김제군 백구면 삼정리 중에서 만경강 이북을 이리에 편입시킬 때에 고잔과 조문의 두 마을을 목천동에 편입시켰다. 목천리 중 일부 즉 회복리(回福里), 신교리(新橋里)는 오산면 목천리로 남았다.
수리시설(水利施設)이 안되었을 때는 별로 쓸모없는 벌판으로 목천동 목상리, 신룡리 이외의 마을은 별 볼일 없다가 수리시설완비 후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들어서고 그 소작인들을 위해 개척촌(開拓村)을 만들어 일동척, 삼동척, 사동척, 육동척이라 부르다가 1973년 5월에야 일제강점기 치욕의 명칭인 동척명칭을 현재의 명칭으로 바꾸게 되니 일동척은 신광리(新光里), 삼동척은 부농리(富農里), 사동척은 화정리(花亭里), 육동척은 유신리(維新里)라 고쳐 불렀다. 1998년에는 행정 운영동 평화동으로 통합되어 법정동 명으로만 남아 있다. 이에 따라 동사무소는 폐쇄되고 목천삼거리에 목천치안센타만 남게 되었다.
평화동 지역은 북쪽으로는 송학동과, 서쪽으로는 오산면과, 동쪽으로는 인화동과 인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목천동과 접하고 있는 동이다. 동의 유래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디 조선왕조시대에는 전주부의 남일면에 속하였다가 1899년에 익산군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에 익산면이 되고 1931년부터는 익산읍에 속하여 일제시대에는 대정정(大正町)이라 했고 해방 후 평화동(平和洞)으로 개칭하였다.
3. 평화동의 현황과 모습
행정동으로서의 평화동은 평화동 외에 법정동인 목천동이 포함되어 있다. 현재 평화동의 행정구역은 18통 75반으로 구성되어 있고, 면적은 6.85㎢로써 1,745가구에 5,573명이 살고 있다. 총 2,627가구에 농가가 240가구, 비농가가 2,387가구가 살고 있으며 총인구는 6,972명이다. 관공서로는 평화동 사무소와 경찰관서로 평화지구대가 있는데 이름과는 달리 인화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목천동 삼거리가 교통의 요지이기에 구목천동 파출소자리에 치안센타는 그대로 남겨둔 상태이고 구 평화동 파출소자리는 평화지구대 자율방법대가 설치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남초등학교, 이리중학교, 전북제일고등학교 등 3개교가 있다. 기타 농수산물도매시장과 농업기반공사전북지부가 있다. 그리고 버스터미널이 여전히 평화동에 있어 이리시외버스공용터미널과 금호고속버스터미널이 시민들 장거리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1)목천동 지역
조문마을과 한스 빌 아파트
전주와 김제방면에서 만경교를 건너면 전북사람이라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목천포가 나타난다. 이곳은 23번 국도와 26번 국도가 만나는 육상교통의 요지로 일찍부터 검문소가 있었고 전주와 이리와 군산을 있는 국도의 가장 한 가운데 위치하여 전라북도의 평야부에 사는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쳐보지 않은 사람이 없으리라. 언제부터인가 고속도로가 생기고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되면서는 익산의 관문도 이곳 목천포에서 인터체인지가 있는 금마로 옮겨가고 말았으니 세월은 참 많은 것들을 변하게도 한다. 이제는 역사유적이 되어버린 구 만경교 옆에 1990년에 완공된 552m의 새로운 4차선의 만경교가 위용을 자랑하며 버티고 있다. 이곳 목천포는 한때는 장어요리로 유명하였지만 어디 이제 풍천장어가 나올 리 없으니 그 유명세는 끝이 났으나 아직도 장어요리집은 서너집이 남아있어 옛 명성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듯하지만 그 영화는 찾을 길 없다. 도로는 크게 확장되었으나 행정동이 아니기에 동사무소도 없어지고 평화동에 속하게 되었으며 1951년에 송학초등학교 목천분교로 시작한 남초등학교와 목천치안센터(구 목천파출소)만 남아 옛 목천동의 소재지임을 보여주고 있을 뿐 검문하는 경찰도 없이 늘 한가롭다.
구 만경교로 향하면 목천갑문이 나온다. 목천수문이라고도 하는데 원래의 이름은 「목천포 수문」이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수문을 통해 목천천 물이 넘나들었으나 이제는 목천천이 조문마을 오른쪽의 하천만 이용됨에 따라 그 역할이 중단되고 그저 하수구물이나 빠져 나가는 신세가 된 모습으로 남아있다.
조문마을을 지나게 되면 구 만경교가 간간이 난간이 부서진 채로 차량운행이 통제된 채 마을사람들이 마치 운동장처럼 이용하는 곳으로 변하여 있다. 우리가 어린시절 이 다리를 지날 때면 어쩌면 저리도 길며 웅장하였것만 오늘의 모습을 바라보니 그 몰골이 처연하기 그지없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100여m 지점에 1987년도에 완공된 목천 배수문과 목천 배수펌프장이 있다. 이 배수문이 완공되고 목천천을 정비함에 따라 조문마을 왼쪽의 목천천은 그저 구강의 모습으로만 남고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목천포수문은 그 역할을 중단하게 된 것이다.
목천삼거리에서 군산방면으로 2km를 가면 새로운 4차선의 23번 국도의 목천육교와 만난다. 이도로는 김제시의 공덕면에서 새로 건설된 1,140m의 목천대교를 넘어와 이미 건설되었던 산업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여 원광대학을 거쳐 논산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 교차점에 농업기반공사 전북지부가 있다. 1941년에 이 지역 4개의 수리조합을 통합하여 탄생된 과거의 전북농조의 영화를 뒤로하고 모든 농조가 농업기반공사로 통함됨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1996년에 지어진 건물이며 대아리 저수지와 경천저수지 이하 완주일부 및 익산지역의 수리를 담당하는 과거의 전북농조는 그 규모가 김제의 동진농조 다음인 전국 제2의 대농조의 위세를 지녔건만 이젠 모든 농조가 통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농업국의 모습은 간데없고 세계 11위의 상공업 중심의 선진국이 되었으니 건물은 대단하나 그 영화는 언제 다시 찾아올 수 있으리오? 세월의 무정함을 알겠다.
이제는 26번 국도와 새로운 23번 국도가 만나는 교통요지가 된 이곳 농업기반공사 전북지부 길 건너 마을의 이름은 부농이다. 부농은 1973년까지는 삼동척이라 불렸던 마을이다. 부농마을의 앞쪽엔 익산 농수산물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익산시가 관장하는 이 도매시장은 농산물 유통구조개선, 공정한 거래질서 확립, 신선한 농산물 공급, 신속한 유통정보의 전파 등을 통하여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익을 도모할 목적으로 1998년에 개장되었으며 11만㎡의부지에 연건평 2만㎡의 대규모 도매시장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도매시장을 지나 남쪽으로 달리면 회복리가 나오며 회복리 앞은 만경강 둑이다. 이곳에서 오산천이 시작되고 있다. 오산천이 시작되는 바로 곁에 만경강에서는 전체 15개의 다리중 제일 길다는 길이 1,140m의 목천대교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2002년 김제시 공덕면에서 원광대 앞 사거리로 이어지는 새로운 23번 국도가 완성됨에 따라 생겨난 새로운 다리이다. 회복리와 목천동 소재지 사이에는 목천마을과 제방 아래 신교마을이 있다.
목천 소재지에서 목천대로를 따라 시내로 조금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옛 60년대에 운영되던 전자고등기술학교의 건물이 보기에도 흉한 모습으로 아직 남아 있으며 오른쪽으로 한스빌 아파트와 원주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건으로 모현 주공아파트가 지어진 이래 우리 익산시도 역사의 흐름대로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파트생활을 하게 되었거니와 목천소재 농촌 단위 마을의 가구 수가 20~30호에 그저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나, 아파트란게 웬만하면 300호요 대규모는 1,000여 호가 넘으니 마을로 치면 보통 큰 마을이 아닌 것이요, 옛날로 치면 작은 아파트라도 일개 리의 인구요, 큰 아파트는 면 하나의 규모이니 불과 30여년 만에 우리의 삶의 모습은 이리도 크게 변하였다. 이 마을에는 보현사가 있다 예전에는 썩 잘 지은 절의 모습이 아름다웠는데 이젠 도로가의 건물에 가려 일부러 찾아도 잘 보이질 않는다. 원주아파트를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돌면 고잔마을로 들어선다. 이 마을의 이름이 생긴 여유가 된 고잔교는 1994년에 2차선 75m의 말끔한 다리로 변하여 있다. 호남선 철도아래를 통하여 마을로 들어선다. 앞고잔과 뒷고잔으로 나누어진 이 마을은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면 다들 알겠지만 버스만 이용하는 사람들은 잘 알기가 쉽지 않다. 지금도 목천천을 건너는 철교에서 시작하는 구강이 타원형으로 남아있는 옛 모습이 정겹다. 만경강 제방공사가 있기 전부터 원래 김제군 백구면 삼정리에 속하였던 이곳이 만경강을 기준으로 한 김제군과의 행정지역의 분할에 따라 조문마을과 함께 1973년에 익산시에 편입되어 익산땅이 되었다.
고잔 마을 뒤편에 남아있는 구강의 모습
고잔 마을을 나와 목천대로를 건너면 목상리이다. 이곳 목상리 옆을 지나는 수로가 바로 그 유명한 대용수간선이다.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이 인공하천은 대아리 저수지에서 나오는 물이 고산 어우리보에서 우회전하여 출발하여 삼례 취입보를 지나 동산동 구 농촌진흥원을 돌아 이곳 목상리를 거쳐 오산면 남부와 옥구에까지 관개하고 있는 실로 역사가 오랜 것이니 우리가 어린시절 여름이 되기도 전부터 목욕하러가자며 떼 지어 몰려가 수영하던 곳이 바로 이 인공하천이 아니었던가?
온 마을이 나무숲으로 덮이다시피 한 목상리를 지나 신광안 2길을 달리면 평화동 제일아파트와 연결되는 시원하게 뚫린 무네미 2길이 나온다. 목상리와 신룡리를 제외하고 1920년대 이후 개척된 이 지역의 마을들은 모두 저 일제의 한국침략과 경제수탈에 앞장선 유명한 동양척식회사에서 만경강 제방사업과 수로사업을 이루면서 만든 마을이니 옛 이름으로 말하여 1동척이 신광마을이요, 3동척은 부농이요, 4동척이 화정마을이고 6동척은 유신마을이다. 이곳이 바로 일명 목천들이다. 이 목천들과 오산평야를 가로지르며 23번 국도는 마치 만리장성마냥 드높이 엄청난 흙을 쌓아 만들어 졌는데 김제에서 익산시내를 거치치 않고 논산으로 빠르게 빠지는 고속도로형 국도여서 익산의 교통에도 큰 도움을 주고는 있으나 익산시내에서 오산면의 시야가 완전히 가로막혀 답답한 정도가 너무 크다 하겠다.
목상리에서 목천대로를 따라 시내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으로 우석장례식장과 노인병원이 있다. 장례식장 문화가 우리 익산에 처음 도입된 곳으로 기억되며 장차 곧 노령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우리나라는 요즈음 노인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노인전문병원의 확대가 요구되는 시기에 놓여있으므로 우석노인병원의 설립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다.
(2)평화동 지역
목천들에서 바라본 평화동
우석장례식장을 지나면 주유소들이 늘어서있고 일찍이 이 도로가 4차선이 되면서 만들어진 평화육교를 지나 우회전하여 돌면 공용 버스터미널이다. 고속버스 터미널이 함께 있어 1970년대 이후 우리 익산의 버스교통의 메카였으나 90년대 이후 자가용시대가 되면서 그 영광도 스러져 갔다. 웬만한 중류층이면 출퇴근도 자가용이요, 서울출장도 자가용이나 KTX를 이용하니 이제 버스는 학생들과 노약자들 그리고 농민들이나 이용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터미널에 사람들은 한산한데 손님을 기다리는 영업용택시들은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오늘날 택시기사님들의 어려운 형편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터미널을 지나면 일명 평화삼거리이다. 실제로는 육거리나 다름없는 사통팔달 교통요지인 이곳은 2004년도에 정말 크게 확장되어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역전방향으로는 철공·기계 공구 수리업종이 집중되어 있고, 오산방면으로 향하는 오산로가 탁 트여 4차선이 됨에 따라 서쪽 방향의 무네미 마을의 모습은 실로 상전벽해가 되었다. 무네미 마을은 우선 뒤로 하고 동익산역 방향인 평동로로 들어서면 오른쪽 마을이 바로 기와골이다. 기와를 굽는 마을이던 이곳은 오늘날 익산시의 향락가이다. 우선 터미널 뒤편으로 비록 54객실의 작은 규모이지만 익산 유일의 1등급호텔인 익산그랜드관광호텔이 있고 목천대로와 평동로 안에는 인화동의 옛 우시장 지역과 함께 익산 최대의 유흥가로 1980년대 말에 개발되었다. 따라서 이젠 옛 기와골의 모습이 전혀 아닌 것이며 휘황찬란한 불빛아래 한집건너 보통사람들은 들어가기 힘든 가요주점이요, 보통사람들은 출입하기엔 조금 낯부끄러운 모텔, 일명 러브호텔지역이다. 90년대에 한때에는 호황을 누리며 익산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단단히 하였으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이젠 익산의 중심축이 영등동으로 옮겨가고 경제가 어려움에 따라 인적이 드물며 쇠락해가는 모습이 완연하다. 이곳에 평화동 사무소가 있다. 예전에는 오랫동안 평화시장 부근에 있다가 잠간 옮기기도 하였으나 이젠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기와골의 절반은 평화동에 속하지만 나머지는 인화동 소속이며 유흥가의 대부분은 인화동에 속해 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구 이리시 최대의 번화가인 영정통거리(현 중앙로)로 들어간다. 평화동보다 더 번화하여 양장점과 양복점과 금은방이 즐비하던 중앙동의 상가들이 텅 빈 모습임에 비해 그래도 평화동쪽의 옛 영정통은 나은 편인가 보다. 아무래도 살고 있는 주민들이 다소 있어서인지 문을 닫은 가게가 아주 많지는 않으니 말이다.
이곳 평화동 유일의 큰 기관이었던 옛 전북농조가 1996년에 이사가 버리고 그 건물은 텅 빈 채로 잡풀은 우거지고 유리창은 깨어진 채로 방치되고 있는 풍경은 처참하여 이 마을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그 뒤편에 있었다는 일제강점기의 익산군청은 거의 흔적이 없다시피 하며 이웃해 있던 한전지부 건물도 이제는 애림직업전문학교로 간판을 바뀌어 달았다. 이일여중고에서 중평길 사이는 아직도 공터인데 한때는 값나가는 땅이었던 적도 있었을까? 이젠 꼭 버림받은 땅처럼 어떤 임자도 나설 것 같지 않은 몰골로 남아있다. 우체국길을 따라 이일여고 정문을 지나 다다르는 곳이 유명한 오고파 다방 사거리이다.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평화동을 안고 도는 것이 된다.
중앙로를 거꾸로 내려오면 그 유명한 이리극장자리가 나온다. 우리 고장에 TV가 들어오기 전인 60년대까지만 하여도 삼남극장, 시공관과 함께 이리시민과 익산군민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가장 즐겨 찾던 바로 그 극장이다. TV방송이 개통된 이후 극장은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았고 20여년에 걸쳐 무랑루즈라는 극장식 나이트로 운영되었으나 최근에는 이 지역의 쇠락과 운명을 같이하며 문을 닫고는 오피스 텔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글쎄 작은 오피스 텔이나마 분양될 정도라도 이곳의 동력이 남아있기나 하는 것일까?
부근에는 퇴폐업소들이 자리 잡아 청소년금지구역으로 정해진 곳도 보인다. 이곳은 필자가 중학교 1학년 시절 친척집에서 살던 곳인데 그 번성하던 이 지역이 이젠 저렇게 까지 쇠락하였나 하는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1970년대까지 익산시의 가장 큰 대로였던(버스터미널과 역전을 잇는 중심도로)남북로를 건너면 철도 관사촌이다. 창인동과 어울려 이루어진 마을인데 2005년 지금 들어가 보아도 영낙 없는 1960대 풍경이다. 아 이곳은 세월이 다녀가지 않았구나. 길도 그대로이며 집도 그대로이다. 아니 집은 더 초라해진 모습으로 맞아준다. 역 간부들이 살았을 것 같은 두어 채 남은 일본식 집도 안쓰럽기 그지없다. 대부분이 민간에게 불하되어버렸으나 아직까지도 이곳에 마치 오래된 시골 초등학교 건물 같은 모습의 승무원 숙소가 있는 것은 뜻밖이었다.
평화동 시장에서 남북로를 지나 송학동 방향으로 들어서면 호남선과 전라선 철로가 머리위로 지나가고 전북제일고ㆍ이리중학교가 나온다. 정문을 지나면 군산선 철로가 다시 머리 위를 지나는데 호남선이나 전라선은 사람들이 다니기가 어려웠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걸어 다니던 시절에는 오산방면으로는 군산선 철로를 따라 참 많이들 걸어 다녔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필자도 30년이 넘은 그 어느 시절에 친구집을 찾아 이 철로를 걷다가 하마터면 생과 사를 맞바꿀 뻔 했던 무서운 추억이 있다.
무네미 마을로 들어선다.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거니와 이 마을은 오산로가 4차선으로 뚫림에 따라 전혀 다른 산뜻한 모습으로 바뀌어버렸으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기분이 여간 흐뭇한 것이 아니다. 이 거리에 천도교 이리교구와 원광 탁주공사 같은 조금은 알아둘만한 곳들이 있고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평화정미소가 깔끔하게 파란색을 칠하고 단장하였는데 과연 이곳이 저 무네미앞 넒은 뜰을 안은 마을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해주었다. 무네미 마을에 들어선 상당한 규모의 아파트가 평화제일아파트이다. 그 앞에는 한전 지부가 있고 시원하게 뻗은 무네미 2길을 따라가면 옛 미나리 생산지의 명성를 간직하려 함인지 역사를 보여주려 함인지 모르겠으나 아직도 한 필지는 됨직한 미나리강이 있는데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하얀 백로가 날고 있어 한층 운치를 더해 준다. 어린시절 미나리철이 되면 그저 하루세끼 밥상엔 항상 미나리가 무침이 올라오고 그래도 어린나이엔 김치보다는 미나리 무침이 훨씬 맛이 더 있었던지 살짝 잘 익은 미나리 무침에 밥을 넣어 비빈 맛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지금은 일년에 그저 몇 번 미나리 무침을 먹는 듯하고 비벼보기도 하나 가난한 그 시절의 맛은 이미 아니다. 그 맛있던 라면이 이미 나의 입맛에는 전혀 아닌 만큼은 아니지만은…
4. 관공서 및 교육기관
□평화동 사무소
평화동 사무소 전경
□목천 치안센터 : 평화지구대 소속이다.
□전북제일고 : 이리학원이 운영하는 이리중학교에서 1952년 이리상업고등학교로 개교하였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졸업생의 90%이상이 대학에 진학하고 고졸취업이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으므로 2002년 전북제일고등학교로 개명하고 2005년 일반계고등학교로 전환하여 상업고등학교로의 40년 역사를 뒤로하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였다.
□이리중학교 : 1946년에 이리중학원이 설립되고 1947년에는 동문중학원이 설립되었는데 1948년에 두 학원이 합병되어 이듬해 개교하였다. 1949년에 재단법인 이리학원을 인가받고 이리중학교가 인가되었다.
□남초등학교
1951년 송학초등학교 목천분교로 개설되었다.
5. 종교기관
□불교 : 보현사
□기독교 : 목천교회, 평화교회, 신흥교회, 한살림교회 등.
□천도교 : 익산교구
□대순진리회 : 익산지부
□일관도 : 국제도덕협회익산지부, 대한도덕회익산지부
6. 기타 공공기관
□공용버스터미널
1960년대 중반부터 이곳 평화동에 위치한 시외버스터미널은 1970년부터는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함께 하게 되었으며 전북의 인구가 250만이 넘고 자가용이 없던 시절 익산은 전주와 군산을 잇는 중간지점으로 정말 많은 시외직행버스를 이용하여 대학생들이 통학하고 또 그 많은 시민들이 발이 되었다. 이제 직행버스는 그 이용도는 현저히 낮아지고 그저 전주, 군산, 김제 부안방면으로 이용되는 정도이다. 고속버스는 서울로만 운행되고 있으며 이용률은 아직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농업기반공사 전북지부
1941년에 이 지역 4개의 수리조합을 통합하여 탄생된 전북농조가 농업기반공사로 통합됨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1996년에 지어진 건물이며 대아리 저수지와 경천저수지 이하 완주일부 및 익산지역의 수리를 담당하는 과거의 전북농조는 그 규모가 김제의 동진농조 다음인 전국 제2의 대농조의 위세를 지녔건만 이젠 옛 영화를 뒤로하고 새 출발하게 되었다.
□평화시장
구 평화동 사무소가 있던 사거리에 형성된 작은 시장을 부르는 이름이다. 공식적인 시장이라고 할만한 점포도 상인도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이 지역 사람들의 생활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며 여러 생필품 가게들이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겠다.
□농수산물 도매시장
익산시가 관장하는 이 도매시장은 농산물 유통구조개선, 공정한 거래질서 확립, 신선한 농산물 공급, 신속한 유통정보의 전파 등을 통하여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익을 도모할 목적으로 1998년에 개장되었으며 11만㎡의부지에 연건평 2만㎡의 대규모 도매시장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7. 평화동 마을의 형성과 유래
□기와골(지아골, 개와골)
무네미의 동쪽에 있다. 기와를 굽고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서로 모여 사는 마을을 지칭하여 붙여지는 지명은 여럿이 있다. 예로 들면 그릇을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점촌(店村)이라 한다.
□무네미(무넘이 水越里)
평화동의 서쪽 끝에 있다. 과거에는 만경강이 오늘날과 같이 제방이 형성되지 않고 있어서 만조 시에는 바닷물이 밀려들어 왔다. 즉 구강 물 너머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넘나든다 해서 한자표기로 수월리(水越里)라 했다. 전에는 이리 팔경중의 하나라 하여 수월낙안(水越落雁)이라하여 이리 팔경(八景)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의 간척사업이 이루어진 뒤에 농경지를 바탕으로 부락이 형성되었고 현재는 변방 주거지로 발전하였다. 도시 서민층의 주거지 및 합동터미널이 인접하고 있어 운수업 관계사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해방을 전후해서 이곳 무네미 미나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하였고 재배면적도 단지화되어 많은 양이 서울지역으로 반출되기도 했었다.
□이리역 관사촌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목조일식 건축으로 창인동과 평화동에 걸쳐 있다. 관사촌에는 역장 관사, 보선소장 관사 등 대형관사에서부터 하급직원의 8등관사 까지 존재하고 있다. 이곳에는 관사 및 공동목욕탕, 하급직원들의 공동 기숙사 등 많은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관사촌은 익산역에 인접하여 있으며 현재의 익산역 관사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인근 지역의 작은 역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이곳에 살면서 출퇴근 하였다. 현재 여러 동이 남아있으나 대부분 민간에게 불하되어 내부와 외부가 많이 변형되었다. 평화동에 있던 보선소장의 관사는 당시의 관사중에서 가장 잘 지어진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목천포(木川浦)
목천포는 구 이리시의 관문이다. 김제로 이어지는 23번 국도와 전주와 이리를 잇는 26번 국도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하여 마을은 비록 작았지만 우리 전라북도의 평야부 사람들은 목천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김제에서도 전주에서도 군산에서도 이리에 오기위해 직행버스를 타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목천포 다리는 우리에게 크나큰 추억을 지금도 주고 있다. 비록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다리이지만 500m에 달하는 큰 다리는 나의 어린 눈엔 대단한 모습으로 비추여졌던 것이다.
목천은 그 이름으로 보아 남쪽의 내(川) 즉 “남의 내”가 음변(音變)으로 →나무내로 발음되면서 한자화(漢字化)하여 목천(木川)으로 정착되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원래 목천포(木川浦)를 남개라고 했는데 뜻은 남쪽에 있는 浦口(개)란 말이다.
□고잔(古棧)
본래 백구면 삼정리에 속해있던 마을인데 1973년 목천동에 편입되었다. 사방으로 강이 둘러 있어서 잔교(양안에 걸쳐놓은 구름다리)를 놓고 건너 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말도 있으나 고잔이란 말은 ?고지안?의 준말이고 ?고지안?은 그 지형이 곶(串), 즉 언덕이나 등성이가 물이나 들 사이로 쭉 빠져 들어간 곳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도 본다. 예전에는 갈대가 무성하던 곳으로 고잔노화(古棧蘆花)라 하여 이리 팔경중의 하나였다. 앞고잔과 뒷고잔이 있으며 보현사와 고잔교를 넘어 호남선 철도의 지하도를 지나면 고잔마을이 있다. 아직도 구강의 모습과 갈대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옛 모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조문(潮門)
고잔의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강이 갈라지는 곳에 조수가 드나드는 문이 설치되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문은 만경강에 바닷물의 조수(潮水)가 밀려와 경작하는 수로에까지 밀려들어오는 것을 막고 또는 경작수로(耕作水路)의 물을 빼기 위한 수문장치(水門裝置)를 일본식 이름으로 조문이라 했다. 1931년에 목천포수문이 완성되어 생겨난 이름이며 1987년에 그 동쪽 200m지점에 목천 배수문이 새로 설치됨에 따라 목천천을 직선화함으로서 조문마을 뒤를 돌아 흐르던 천은 하수구로 쓰이며 완전히 구강모습이 되었고 부근은 마을 공원으로 단장되어 있다.
□목상리(木上里)
목천포의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전에 마을에서 위하던 큰 당산나무가 있던 윗쪽이므로 목상이라 했다 한다. 지금은 신광안길이 무왕2로까지 포장되어 뻗어있으며 화정길은 오산로까지 포장되어 말끔하게 단장되어있다.
□신광리(新光里)
갈대밭이었던 이 지역을 일본인들이 간척사업을 통하여 농지를 개간하고 소작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이 소작인들이 모여 살았던 이 마을을 일동척이라 하였다. 왜색명칭인 일동척을 1973년에 개칭하였는데 개간하여 새로 생긴 마을로서 번성하였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부농리(富農里)
신광리처럼 갈대밭이었던 이 지역을 일본인들이 간척사업을 통하여 농지를 개간하고 소작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일동척과 구분하여 삼동척이라 하였다. 왜색명칭인 삼동척을 1973년에 개칭하였는데 개간하여 새로 생긴 마을로서 번성하여 농사를 많이 지어 이제는 마을이 잘살고 있다는 의미에서 부농이라 붙였다.
□화정리(花亭里)
신광리, 부농리와 같이 갈대밭이었던 이 지역을 일본인들이 간척사업을 통하여 농지를 개간하고 소작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이 마을은 일동척, 삼동척과 구분하여 사동척이라 하였다. 왜색명칭인 사동척을 1973년에 개칭하였는데 모정인 정자가 위치하고 있어서 화정리라 하였다.
□유신리(維新里)
앞에 설명한 신광리, 부농리, 화정리와 같이 갈대밭이었던 이 지역을 일본인들이 간척사업을 통하여 농지를 개간하고 소작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이 마을은 일동척, 삼동척, 사동척과 구분하여 육동척이라 하였다. 왜색명칭인 육동척을 1973년에 개칭하였는데 개간하여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로 유신리(維新里)라 하였다. 메이지 유신이나 10월 유신과는 일맥상통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겠다.
□신룡리(新龍里)
부농의 서북쪽에 있는 개척이전부터 있던 마을이다. 이제는 23번 장성같은 국도에 묻혀 오산평야의 시야는 막혀버린 모습으로 답답하게 놓여있다.
8. 문화유적과 유물
(1)익산군청 터
1909년 말 호남선을 부설하기 위한 측량이 시작되자 익산의 명칭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1911년에는 철도공사가 착수되고 이에 따라 익산군청, 우편소, 익산 헌병 분대, 익산 변전소등이 금마에서 옛 옥야현 지역의 남일면으로 옮겨오자 이주자가 불어나고 대교농장 대표인 지길원신(枝吉元信)등 34인의 일인들은 익산번영조합을 조직하여 시가지의 계획, 도로의 개착, 교육ㆍ 경비기관 등의 시설 및 기타 관공서의 이전 등에 공헌하였다.
구 익산군청 터 정문자리
구 익산 군청은 평화동 65번지에 있었다. 지금의 평화교회 사거리 자리이다. 지금은 건물은 전혀 찾을 길이 없으나 아직도 담장의 기초와 정문중의 좌측기둥 하나가 남아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이영래씨(61세)에 따르면 1972년 이곳에 이사 올 때 등기부 등본에 군청자리로 기재되어 있었고 전 면적은 약 800평쯤 되는데 민간에게 불하되어 여러 사람에게 분할등기 되었다고 한다. 이씨의 집 담자락에 당시 군청의 정문 기둥이 하나 남아 있으며 군청 담자락의 기초가 아직도 길옆에 남아있다. 건물모양은 일본식 건물이었다고 들었으며 1980년대에 새 도로가 나기 전에는 군청 터를 지나는 길을 《군청길》이라 하였다하며 여러 집이 들어섰으나 그 길의 흔적은 일부 남아 있고 이 길을 통하여 구 한전으로 나갈 수 있었으며 옛 전북농조가 바로 이웃하고 있다. 군청건물이 없어진 뒤부터 1962년경까지 이곳은 탁아소집으로 불렸다 한다. 따라서 1911년 이후 이 지역이 익산군의 행정중심부였음을 짐작하여 볼 수 있다.
(2)전북농조 구터
소중한 건물이 볼썽사나워지고 있다
1920년에 임익수리조합과 임익남부수리조합이 합방되어 익옥수리조합이 설립되었다. 산미증식계획과 함께 익옥수리조합은 완주군 고산면에 대아댐 건설을 착수하였으며 1923년 6월에 준공하였다 대아리 저수지의 물은 대간선 수로를 따라 지금의 군산 비행장근처까지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농민들에게 수세를 징수하였다. 익옥수리조합의 청사로 1930년에 평화동 54-56번지에 준공된 청사는 지상 2층의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서양식(르네상스의 팔라죠 양식)으로 건축된 이 건물은 약 80여 평인데 약 1,500여 평의 대지에 부속창고 및 관사와 함께 지어졌다. 현재 1971년에 지어진 우측의 신청사와 함께 방치되다시피 하는 상태로 남아있다. 1941년에는 4개의 수리조합이 통합되어 전북수리조합이 탄생되어 청사로 이용되다가 전북농지개량조합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6년 전북농조가 신 청사를 건축하여 이전한 뒤 방치되고 있다. 우리 익산에서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오래된 서양식건축물로써 오래 보존할 가치가 있는 건물인데 유리창이 다 깨어진 상태로 잡풀이 우거진 모습으로 함부로 방치되어 있는 모습은 보기가 민망하고 서글프다.
(3)이리역 관사촌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일본식 가옥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목조일식 건축으로 창인동과 평화동에 걸쳐 있다. 관사촌에는 역장 관사, 보선소장 관사 등 대형관사에서부터 하급직원의 8등관사 까지 존재하고 있다. 이곳에는 관사 및 공동목욕탕, 하급직원들의 공동 기숙사 등 많은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관사촌은 익산역에 인접하여 있으며 현재의 익산역 관사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인근 지역의 작은 역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이곳에 살면서 출퇴근 하였다. 현재 여러 동이 남아있으나 대부분 민간에게 불하되어 내부와 외부가 많이 변형되었다. 평화동에 있던 보선소장의 관사는 당시의 관사 중에서 가장 잘 지어진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이리역 승무원 숙소만이 이리역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줄 뿐이며 하루빨리 개발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철도병원(복강의원)이 1920년대부터 이곳에 있었다고 증언하는 노인들이 있었는데 그 위치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한다.
(4)구 만경교
8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다리
500m의 이 다리는 교명석에 단기 4261년 2월에 준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서기로는 1928년이다. 새로 설치된 새 만경교에 그 역할을 넘긴 해가 1990년이니 무려 62년간이나 전주와 익산과 군산을 연결하는 호남평야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많은 농산물과 사람들을 건네었다.
당시 이 교량의 준공식에는 전북지사와 이 부근의 여러 군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렀는데 근교의 사람들이 많이 나와 호남의 자랑거리인 500m의 새로운 대 교량에는 완전히 사람으로 진을 쳤다고 한다.
전주와 군산을 잇는 이 26번 국도가 전국 최초의 포장도로였다니 어쩌면 큰 명예를 지닌 것도 같지만 일제에 의해 1920년부터 시작된 산미증식계획에 의해 무자비하게 군산항으로 농민들로부터 수탈한 쌀을 실어 나르던 비운의 다리이라고도 하겠다. 오늘날 이 곳 저 곳의 난간이 허물어져 보기에 흉하며 조문마을사람들이 농작물을 널어 말리거나 낚시질을 하는 곳으로 이용되는 정도이다.
(5)목천포 수문
목천들과 함께 숨쉬어온 역사의 흔적
현재는 목천 갑문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익옥수리조합의 대아리 저수지 축조와 간선수로 공사 및 만경강 수로공사와 함께 준공되었다. 현재 수문 상부 난간 기둥에 준공연도가 기록되어 있는데 연호 명칭이 훼손되어 있으나 《昭和》두 자로 보이며 6년이라 하였으니 준공연대는 1931년으로 보인다. 만경강에 바닷물의 조수(潮水)가 밀려와 경작하는 수로에까지 밀려들어오는 것을 막고 또는 경작수로(耕作水路)의 물을 빼기 위한 수문장치(水門裝置)를 일본식 이름으로 조문이라 했다. 이 갑문은 만경강의 하천(목천천)을 통해 조수가 밀려와 고잔마을 일대를 침투하는 것을 막고 만경강으로 목천천의 물을 빼는 등의 수위조절을 위해 만들어진 수문이다. 그러나 1987년에 그 동쪽 200m지점에 목천 배수문이 새로 설치됨에 따라 목천천을 직선화하여 목천천이 말끔히 단장됨으로써 이 수문은 완전히 그 기능을 상실하고 목천동 가촌의 하수구 역할을 하는 초라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6)만경강 제2철교
우리 익산은 철도교통의 중심지이다. 호남선의 중심역으로서 군산선과 전라선이 분기된다. 호남선은 길이 261.7 km로 대전에서 출발하여 쌀을 비롯한 각종 농산물이 풍부한 논산·호남·나주평야를 연결하여 목포항에 이르는 간선철도로서 농산물의 수송 및 연변 일대의 개발을 목적으로 부설한 것이며 1911년 10월 착공하여 1914년 1월 11일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호남선 철도가 착공하던 1911년에 익산군청이 금마에서 남일면으로 옮아오고, 준공되던 1914년에는 남일면과 동일면이 합해져 익산면이 되며, 용안군, 여산군, 함열군이 합하여 오늘날의 익산군의 모습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과거 이리시의 인구가 겨우 6만여 명 일 때에?밤에는 6만, 낮에는 10만?이라 했던 말은 익산이 그만큼 교통의 큰 중심지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편 만경강이 오늘의 모습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후의 일이다. 1920년부터 산미증산의 삽을 떠 16년간 진행된 수리사업을 통해 만경강은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 시기 증산계획을 시행하여 쌀 수탈을 위해 대대적인 쌀 증산활동을 벌였고, 그 일환으로 만경강에 대한 대규모 수리사업을 벌였다. 이 시기인 1927년부터 착공하여 1929년에 만경강 제2철교가 준공되게 된다. 전장 555m인 이 철교는 당시 준공될 때만 해도 한강이남에서는 1900년에 준공된 한강철교에 버금가는 조선에서는 두 번 째가는 긴 다리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안하여 서대전∼익산 간의 길이 88.6 km 구간은 1978년 3월 30일 복선 공사가 준공되었고, 익산∼정읍 간의 길이 43.4 km 구간을 1985년에 준공하였다. 이때 또 하나의 철교가 놓여 철교는 2개가 되었으며 건국 이래 최대의 국책사업이라 불리는 호남선 고속철도가 1999년부터 추진되어 2004년 4월 개통됨에 따라 우리나라는 프랑스, 일본, 독일, 스페인 등과 함께 시속 300km의 초고속철도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고 우리 익산시는 전북의 중심역으로 부상함에 따라 다시금 철도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그러나 전주와 군산 시민들이 손쉽게 KTX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김제의 부용역을 환승역으로 확대한다는 보도도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익산시민들은 다소 불편함이 생긴다 하겠으나 나의 작은 희생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준다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용기도 필요하다.
(7) 만경강(萬頃江)
■만경강의 명칭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봐도 만경강이란 명칭은 찾을 수 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주부편을 보면 ‘옥야 6면은 남쪽으로 사수(泗水)와 연하고, 서쪽으로는 김제와 접한다’고 하였고, 임피현 편을 보면 ‘신창진은 사수의 하류이며 김제 만경과 통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서 만경강은 예로부터 泗水로 불리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청천강의 옛 이름이 살수(薩水)요, 대동강의 옛 이름은 고조선 때 열수(列水)였고 그 이후엔 패수(浿水)로 불리었음을 보면 이해가 될 수 있겠다. 또한 한강은 한수(漢水)라 함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전북의 평야를 흐르고 있는 세 강 중 동진강은 동국여지승람에 그 이름이 보이며 금강도 19세기 지도에서 엿 볼 수 있다. 그러나 만경강은 1929년에 발간된 조선환여승람에서 겨우 그 명칭을 찾을 수 있는 데서 만경강은 내내 사수(泗水)로 불리다가 1920년대 일제에 의한 개발이 시작되면서 만경강(萬頃江)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만경강 유역의 행정구역의 변천
만경강 유역의 행정구역은 오늘날에는 전주시, 완주군, 익산시, 김제시. 군산시로 되어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내내 만경강 주변지역은 全州府에 속해 있었음을 확실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1895년 갑오개혁시 새로운 행정제도의 개편으로 23부 331군으로 정비된 후 1899년 전주부에 속해 있던 옥야현 지역(沃野縣 地域)과 옛 우주현 지역(紆州縣 地域)의 우북면이 익산군에 편입되고 1914년에는 익산군, 여산군, 용안군, 함열군이 통합되어 익산군이 되었던 것이다.
원래 고려시대 초기(高麗時代 初期)만 하여도 만경강 주변에는 4개의 현이 존재하였으니 다음과 같다.
○우주현(紆州縣 : 봉동읍, 왕궁면 일대)
○이성현(伊城縣 : 현 이서면 일대)
○옥야현(沃野縣 : 구 이리시, 오산면, 대장촌 일대)
○이성현(利城縣 : 공덕면 일대)
위의 네 개 현은 고려 초에 전주목에 속한 뒤 조선 태종 9년(1409)에는 옥야만 유일한 속현으로 남고 나머지는 폐현이 되어 조선시대 내내 전주부에 속하였으니 당시의 전주부의 규모가 대단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만경강의 하류인 옥구군, 임피현. 만경현을 제외한 만경강 주변의 모든 지역이 전주부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전주부 판도는 다음과 같다. 구이면, 상관면, 소양면, 이서면, 조촌면, 봉동읍, 삼례읍, 백구면, 공덕면, 구 이리시, 춘포면 일부, 오산면 지역 등이다.
■익산시민과 만경강
우리 인간은 구석기시대 이래 강과는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으며 강에 의지하며 살아왔다. 특히 신석기인들은 해안이나 강가에서 주거하면서 고기를 잡고 나아가 농경을 시작하였다. 대저 세계 4대 문명은 모두 큰 강 유역에서 이루어졌으니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과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강·갠지스강 유역의 인도문명, 황하강 유역의 중국문명 등이 그것이다.
만경강은 가장 전북적인 강이다. 전북에서 시작되어 전북에서 끝이 나는 강이란 뜻이다. 우리 조상들은 만경강이 범람하여 만들어 놓은 자연제방에 집을 짓고 배후습지에 논을 만들어 오랜 역사동안 농사를 짓고 살아왔다. 만경강 물은 중심축인 완주-전주-익산-김제-군산을 휘돌아 서해바다에 몸을 푼다. 오늘날 전북인구의 약 절반이 이 강에 기대어 살고 있으니 이 만경강이야말로 전북의 젖줄이요 자양분이었던 것이다. 우리 익산지역의 북반부인 용안·함열·웅포·용동·성당·망성·낭산·여산면은 우리 익산의 또 하나의 젖줄인 금강유역에 속하지만 익산시민의 90%가까이는 오늘날 만경강 유역에 살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만경강은 각종 오물이며 공장이나 축산폐수 등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하더니 한때는 새만금 사업의 계속여부에 대한 분쟁문제로 말미암아 전국에서 가장 부끄러운 강으로 각인 되어 버리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정부는 2001년 5월 새만금 사업의 순차적 개발안을 발표하였는데 제2의 시화호 사태를 막기 위해 만경강 수역은 만경강의 수질개선이 이루어질 때까지 노력한 뒤 개발에 착수하는 조건으로 새만금 사업을 계속한다고 발표하였다. 바로 만경강의 수질오염은 우리 익산의 축산 폐수가 주범이니 우리 역사상 최대의 간척사업의 중요한 걸림돌의 하나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2000년대를 맞아 만경강의 미래는 새롭게 변모될 전망이다. 익산천 환경정화사업과 만경강에 대한 자연생태공원사업의 진행으로 이제는 맑은 만경강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한결 즐겁게 만들어가고 있다.
■만경강의 역사
만경강은 일반적인 우리나라 강의 변천사를 따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국내 다른 강의 개발 역사와는 또 다른 개발사를 갖고 있는 것이 만경강이다. 주변 광활한 평야를 거느려온 만경강은 일찍부터 그 중요성이 인정돼 위정자마다 선진 수리 사업의 ‘시험’ 대상으로 삼았다.
벼와 보리를 경작하는 이모작이 조선시대 도입되면서 이앙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더욱 많은 저수지와 보가 만경강 유역에 만들어졌다. 계속된 수리 사업으로 조선 후기 호남평야 주변 저수지와 보가 수 백 개에 이르렀다 한다. 수리사업의 특성상 많은 비용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던 만큼 강 개발은 당시에도 관 주도로 이루어졌다. 영·정조 당시 중앙 조정에서 ‘천방수리방법’ ‘제언사목’ 등 공사 기술과 시방서를 출간해 지방 수령들에게 기술적·재정적 문제를 조언하기도 했다. 만경강의 삼례천 제방은 이를 토대로 조선 중기 이후 축조됐다. 삼례천방을 축조하면서 내측 토지가 개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까지 만경강에 대한 종합적인 개발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공사 기술과 재정이 뒷받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만경강 유역 또한 천수답과 마찬가지로 홍수와 가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기록으로 전하는 수해만도 막대하다. 1589년 한 해에만 3만여 가옥이 침수돼 2백여 명이 사망했고, 1854년에는 9백 여 명이 홍수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근래 가장 큰 피해는 1925년 때 홍수로, 2백 51호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6명이 익사했다.
만경강이 오늘의 모습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 일제가 쌀 수탈을 위해 대대적인 쌀 증산활동을 벌였고, 그 일환으로 만경강에 대한 대규모 수리사업을 벌였다. 1924년 첫 삽을 떠 16년간 진행된 수리사업을 통해 만경강은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만경강의 수리사업은 인공제방 축조와 곡류가 심한 부분을 직선으로 바꾸는 직강공사, 댐 건설 등으로 진행됐다. 자연 그대로의 강은 물 흐름의 특성상 곡류천을 이루게 마련이고, 만경강 역시 심한 곡류천이었다. 여기에 제방도 튼튼하지 못해 매년 여름이면 홍수 피해를 겪었다. 직강공사와 인공제방의 축조로 만경강 유로는 크게 변했고, 당시 쌓았던 제방이 대부분 오늘날까지 그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 인공제방의 축조로 마을이 없어지거나 생활권의 변화 등의 만경강 유역 일대에 변화가 나타났다. 강 내측에 있던 행사리·사천리·신천리·유천리·신월리·강리·내포리 등의 마을이 없어졌다. 인공제방으로 익산군 오산면 목천리의 구만창·동자포와 춘포면 석탄리 일부 지역이 강 남쪽으로 들어가게 됐고, 김제군 백구면 삼정리 등은 북쪽으로 가게 돼 행정구역상 많은 불편을 겪다 지난 7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북 땅은 익산시에, 강 남쪽은 김제군에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는 만경강 제방축조와 함께 댐 건설과 관개수로 개설 등의 사업도 병행했다. 그물망으로 되어있던 상류 하도를 관개수로로 개발하고, 유로를 정비했다. 만경강 수리사업의 또 다른 역사(役事)가 대아댐 건설 사업이었다. 유량이 적은 만경강 물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1923년 전북농조 주도로 대아댐이 건설됐다. 당시 댐 건설에 전국 각지의 인력이 동원됐고, 차량이 없어 탄광용 수레에다 모래와 시멘트 등을 운반해 건설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아댐(구댐)은 누수 등으로 붕괴 위험이 있어 67년 한 차례 보수공사를 거친 뒤 규모를 늘려 지난 87년 새 댐으로 만들어졌다. 만경강의 또 다른 주요 수원인 경천댐은 대아댐 보다 12년 늦은 1935년 축조됐다.
만경강은 농업용수와 생활용수 공급 역할 외에도 교통이 발달하기 전에는 수로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이야 토사가 쌓이고 수심이 얕지만 한 때는 강 상류까지 배가 통할 만큼 물이 깊었다. ‘전주시사’에 따르면 고려 멸망 직후 고려의 신하였던 최양이 전주시 대승동(완주군 소양면)에 은거하면서 뜻 맞는 친구들과 봉동읍 구만리 앞강에서 뱃놀이를 했다 하며, 영조 때 전라도 관찰사였던 홍낙인도 전주의 승경(勝景)을 ‘문루에서 바라보니 배와 수레가 함께 닿는구나’ 라고 읊었다 한다.
대동여지도에 나타나 있는 대규모 포구나 나루터만도 고사포·동자포·회포·목천포·춘포·사천진 등 12개나 있어 만경강 수로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의 세금으로 미곡의 운송로였을 뿐 아니라 소금·해물·잡화 등이 이곳을 통해 드나들었다. 이같이 중요한 수로로서의 생명을 다한 것이 만경대교의 개통과도 무관치 않을 것 같다. 옥구군 대야면과 김제군 청하면을 잇는 만경대교가 1933년 완공되면서 부안·김제와 군산을 오가는 주요 통로가 됐다. 만경대교는 6.25 전쟁때 폭격을 받아 한 때 통행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54년 복구됐고, 87년 4차선 포장도로로 거듭 태어났다.
새만금 간척사업과 함께 만경강의 수질오염 문제가 대두되기도 하였지만 반세기 전 만 해도 남의 일이었다. 일제의 치수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에 익산의 구릉지에서 만경강까지, 그리고 만경대교 부근 탑천 일대 거의 전부가 갈대밭으로 ‘노전백리’(蘆田百里)를 이루었고, 곳곳 배후 습지에 개연꽃이 만발해 ‘옥야홍련’(沃野紅連)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장관을 연출했다 한다. 오늘날 오산면 일대와 목천동 일대 그리고 인화동과 동산동의 논 지역 및 대장촌 일대는 배후습지지역으로서 만경강 자연제방의 경사가 끝나는 부분부터 시작되는 지형인데 지하수면이 높고, 홍수 때에 침수의 피해가 크며 배수가 잘 안되어서 농경에 부적당하고 사람이 안주하기에 아주 불리하였다. 따라서 늦은 가을이나 이른 봄에 보를 막아 그 물로 농사를 지었으나 한발과 수해로 3년에 1회 정도나 추수가 가능했다고 한다. 오늘날 대 호남평야가 시작되는 넓디 넓은 오산들녘과 춘포들녘을 바라보면 상상하기가 어렵다. 또한 여름이면 봉동 마그네 다리를 비롯, 만경강 유역 곳곳에서 물놀이를 즐겼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오늘날 온갖 생활·산업 오명을 안게 된 만경강은 전혀 다른 강으로 와 닿을 것 같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만경강은 고우나 미우나 우리의 강이다. 오염된 물을 만든 것이 이기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인간에 의해서였지 강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일 뿐이다. 새만금 간척사업은 만경강을 새롭게 태어나게 할 수 있는 기회다. 2천년 이상 우리와 애환을 함께 해온 만경강이 이제 새만금 간척사업의 성공적인 마무리와 세계적인 생태공원 조성의 또 다른 희망이 우리 익산시민에게 다가오고 있다.
■만경강의 자태
만경강은 고산면 대아저수지 댐에서 진봉면 하구까지 유로연장 98.50km 유역면적1601,700km²이다. 만경강의 특징은 감조(感潮)하천 구간이 길며 전형적인 자유곡류하천이라는 점이다. 감조하천은 말 그대로 바닷물을 느끼는 하천으로 밀물 때면 하구에서 상류쪽으로 바닷물이 거슬러 올라온다. 만경강 하구에서 삼례교까지와 그 사이의 지류 주변의 낮은 곳은 제수문(制水門)을 설치하지 않는 한 바닷물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만경강의 본류인 백구정과 탑천, 부용천에 제수문을 설치하기 전에는 하구에서 약 48㎞ 거리에 있는 삼례부근의 대천리(한내)까지 대조(大潮)시에 강수위가 주기적으로 상승했으며 춘포면 인수리 앞 봉개 아래까지 만조의 영향으로 상선이 와서 정박하였다. 부용천은 와룡리까지 바닷물이 드나 들었다. 탑천에서도 요교(腰橋) 아래까지 영향이 미쳤으며 오산천을 통하여 익산의 배산(盃山)뒤 다가포까지 젓거리 배들이 내왕하였다. 대동여지도에는 고사포, 동자포, 동지산포구, 회포, 목천포, 춘포, 율포, 양정포, 신창진, 사천진, 황천진, 부석산진 등 12개의 대규모 포구나 나루터가 나타나 있다. 이들 뱃길은 오래 전부터 쌀과 소금, 해물, 잡화 등을 수송하는데 이용되었으나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그 구실을 끝내야 했다. 강 양쪽으로 둑이 쌓아지는 바람에 갈대밭 1백리 길로, 장관을 이뤘던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게(蟹)가 지천으로 널려있어 오히려 게의 피해를 염려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만경강(萬頃江)의 ‘경(頃)’자는 그 훈(訓·한자의 뜻)이‘백이랑’이다. 따라서 강의 이름을 풀어보면 백 이랑이 만개이니 ‘백만이랑’이라는 계산이 나오는데 이는 곧 이랑이 엄청나게 많은 넓은 들을 의미한다. 또 사람들은 이 평야를 ‘징게 맹경 외야미들’이라고 불러왔다. 이를 표준어로 나타내면‘김제 만경 외배미들’이다. 외배미들은 층계 많은 산골 논과는 달리 논배미가 높고 낮은 데가 없이 마치 한 논배미와 같이 보인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로 호남평야의 노른자위인 금만평야를 이른다.
이 강은 노령산맥의 서사면(西斜面)에서 발원한 여러 지류를 모아 상류에 4개의 거대한 저수지를 조성한 후 전북 평야지대의 중앙부를 서서히 서류(西流), 넓은 나팔모양의 하구를 만들고 하천으로서의 역할을 마치고 있다.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지지자료’에는 ‘만경강은 완주군에서 발원, 전주·익산·김제·옥구 등지를 지나 김제 진봉면에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 길이는 98.5㎞다’라고 기록돼 있으며 그 이후 발간된 많은 서적들이 이 자료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1938년에 만경강 하류지역의 구불구불한 곡강(曲江)을 바르게 펴는 직강(直江)공사를 준공, 길이 76㎞에 이르는 제방을 축조하여 강의 실제길이를 줄여 놓았다.
전라북도의 지형은 노령산맥을 경계로 서해안에서 노령산맥의 산록(山麓) 말단부까지의 서부평야지대와 그 동쪽의 산악지대로 크게 구분된다. 서부평야지대는 동진강 이북의 침식야산과 충적평야지대로 그 중심은 만경강수계를 젖줄로 하는 호남평야다.
충적평야(沖積平野)는 하천이 운반한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퇴적평야의 한종류인데 지표면은 평탄하고 산기슭의 곡구(谷口)에서 하구에 이르기까지 선상지와 자연제방·삼각주 등이 전개된다. 전북지역의 생활과 영농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만경강수계는 고산천과 소양천, 전주천, 삼천, 익산천, 탑천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집수지역은 동으로는 노령산맥, 서북쪽은 함라산(咸羅山)이고 남쪽으로는 김제지역 해발고도 50m이하의 야산지대다. 만경강 유역은 해발고도 30m이하의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고 평야지대를 제외한 지형은 구릉성 산지다. 이 강의 하구연안에는 하천을 통해 바다로 운반됐던 물질이 조수와 연안류에 의해서 해안으로 재 운반, 퇴적되어 넓은 간석지(干潟地)가 조성돼 있다.
만경강의 특징은 감조(感潮)하천 구간이 길고 자유곡류하천이라는 점이다. 감조하천(Tidal River)이란 하류부에서 밀물과 썰물 등 조수현상의 영향을 받아 수위와 유속이 변동하는 범위를 가진 하천으로 밀물 때에는 하구에서 상류쪽으로 조수가 거슬러 올라오게 된다. 만경강의 경우에는 현재 삼례교 주변의 하상표고가 4m여서 그 이하지역은 감조하천 구간에 해당된다.
예전에는 배로 하구에서 익산시 춘포면 대장촌(大場村)까지 들어갔으며 그사이에 신환포(新煥浦·김제)와 목천포(木川浦·익산)등의 선착장이 있어 출곡기(出穀期) 농산물 운송에 많이 이용되어 왔다. 이에 따라 만경강 하구에 있는 만경대교에서 삼례교간 25㎞와 그 사이에 있는 지류연안의 저지대는 인공제방이나 방조(防潮)수문을 설치하지 않는 한 만조시에 바닷물이 침수해 들어오게 된다. 이 때문에 자연상태에서는 이 하천수를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 없었고 집중호우가 겹치면 하류부에서의 유량이 불안정, 침수기간이 길어지면서 홍수피해가 극심했다. 유황이 불안정한 또 하나의 원인은 하천의 유역면적이 좁다는데 있다. 세계적인 대 하천들이 집중호우에도 유황이 안정적인 것은 유역면적이 넓기 때문이다. 또 만경강은 동진강과 함께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자유곡류하천(Free meander)이다. 이는 완경사의 충적지를 흘러가는 하천이 침식곡을 만들지 않고 자유사행(自由蛇行)을 거듭, 하도(河道)의 좌우이동이 심한 하천을 말한다. 옛 지형도에서 보면 이 강의 하역은 대부분 곡류대에 속해있고 구하도의 흔적인 하적호(河跡湖·곡류하던 강의 일부가 본디의 물줄기에서 떨어져 생긴 호수)가 갖가지 모양으로 평야지대에 수없이 산재해 있다. 호안공사와 경지정리 후에도 이러한 구하도의 존재는 인간생활에 큰 영향을 끼쳐 춘포면 일대 등 익산 남부지역 대부분의 취락은 곡류부의 자연제방위에 위치해 있다. 이처럼 만경강은 완경사의 충적지이기 때문에 비옥한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감조구간이 길어 농업용수가 부족하고 홍수의 피해가 큰 하천이었다. 즉 이 강의 본류인 삼례 하류부는 비옥한 충적평야임에도 불구, 저온지(低溫地)가 넓고 하천수에 염분이 함유돼 농업용수로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으며 홍수피해도 거듭돼 왔다. 따라서 제방축조·방조수문 설치 등 대규모 치수사업이 시작되기 전인 1920년대까지는 삼례지역 상류인 고산천과 소양천·전주천·삼천주변의 평야지대가 논농사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같은 이유로 이 하천 유역에서는 벼농사 실시 이후 치수와 수리사업이 계속돼 왔다. 만경강에 대한 주요 치수사업은 하구 간척사업과 동상저수지·대아저수지 축조, 제방공사 및 간선수로 개설, 직강공사, 제수문(制水門)설치 등으로 1920년대 이후 본격화됐다. 특히 1930년대에는 하안에 인공제방을 쌓고 곡류가 심한 부분에 직강공사를 하여 곡류하천의 하도가 직선상 하도로 변했다. 만경강유역은 70여년에 걸친 하천개수와 개발로 황량한 갈대밭에서 옥토로 변화, 호남평야의 젖줄로서 이 지역의 생활과 문화·경제활동 및 농경 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산천
전국 8대 오지로 불리던 동상면과 화산면 일대의 계곡물이 모여 이루는 천이다. 한 갈래는 동상면 사봉리에서 출발한 사봉천과 위봉폭포에서 북상한 물줄기, 운장산 깊은 골짜기를 굽이쳐 내려온 맑은 물이 동상저수지와 대아저수지에 유입되어 흐른다. 또 한 갈래는 화산면을 가로지르는 화평천(花坪川)이 경천저수지로 들어간 후 남진하여 대아리 저수지를 지나온 물과 만나 고산천을 이룬다. 이 천은 봉동읍 근처에서 마그네천으로 불리며 조선 초기 때 까지만 해도 돛단배들이 들어와 동포(東浦)라는 지명과 함께 전주부성의 백마강으로 불렸다. 이제 대아리를 지나 동상면과 화심으로 이어지는 순환도로의 포장으로 전주와 익산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었거니와 필자는 대아리 일대를 전북 최고의 산하라고 자신 있게 말하곤 한다.
◇소양천
소양면 원등산과 모래재 곰티재등에서 발원하여 용진면을 거쳐 회포대교 부근에서 고산천과 만나 만경강을 이룬다. 만경강 지천중 가장 하폭이 넓고 경사도 급하다. 193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 정비가 이루어졌다 한다. 소양면의 발전으로 급속히 오염되었으나 요즘 아주 맑아져 새우까지 살고 있다고 한다.
◇전주천
관촌과 상관면의 경계인 슬치에서 발원하여 전주시내를 관통한다. 한벽당을 지나 전주 시가지를 지나면서 다가산 아래서는 서천이란 이름을 얻고 고속 터미널 부근에서 건산천(모래내)와 합류하고 팔복동 추천대에서 삼천천과 모아진 후 추천(楸川-가리내)이라 불리며 삼례교 부근에서 만경강과 만난다. 반석천, 남고천, 건산천 등의 지류가 있다.
◇삼천
구이면의 모악산 부근의 물이 1962년에 만든 구이 저수지에 모여 흐르는 천이다. 이 물길은 효자동과 대한방직 앞을 지나 추천대에서 전주천과 만난다.
◇익산천
완주군 산간 청정지역에서 발원한 만경강이 소양천·전주천과 합류, 강의 면모를 갖추고 평야지대로 흘러나와 곡류하는 지점에 익산천(益山川)이 유입된다. 익산시 왕궁(王宮)면의 왕궁·용화저수지와 금마(金馬)면 금마저수지 등에서 시작된 물길이 합쳐진 익산천은 춘포(春浦)면 용연(龍淵)리에서 만경강으로 흘러드는 길이 약 10㎞의 작은 하천이다. 금마 저수지에서 시작되는 옥룡천이 용화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길과 만난 뒤 왕궁 저수지에서 흘러 내려온 옥궁천과 만나 이루어지는 이 하천은 마한·백제의 문화가 숨쉬고 있는 유서 깊은 역사의 땅 고도(古都)익산의 동부지역을 휘감아 돌며 남하(南下)하고 있다. 하천 주변인 왕궁·금마면 일대에는 왕궁리 5층석탑(국보 289호)을 비롯, 고도리 석불입상(보물 46호), 모질메산성(지방기념물 1호), 익산쌍릉(사적 87호)등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선조들의 숨결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익산천의 첫 물길이 시작되는 왕궁면 동용(東龍)리의 왕궁저수지는 호남고속도로 익산IC 인근에서 여산면으로 향하는 799번 지방도 바로 옆에 위치하며 면적 49.9㏊, 수심 7m로 익산지역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일제시대에 준공된 이 저수지의 제방 옆에는 1920년 제방이 완성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함벽정(涵碧亭·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유서 깊은 땅을 흘러나오는 익산천은 우리나라 하천중에서도 그 오염도가 가장 심한 곳의 하나로 꼽히는 불명예를 안고 있었으나 익산천의 수질개선을 위한 노력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탑천
익산에서 군산으로 향하는 26번 국도를 달려 대야(大野)면에 들어서면 탑교(塔橋)를 지나게 되는데 이 교량의 명칭은 바로 하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탑천(塔川)은 금마면 미륵산과 함라면, 삼기면 주변의 구릉에서 발원하여 팔봉·삼성동·황등면과 군산시 서수·임피면을 거쳐 대야면 광교리에서 만경강 하류로 유입되는 전형적인 평야부 하천이다.
길이 15㎞, 유역면적 1만7천8백68㏊로 그 폭은 30∼90m에 이르며 유역의 범람원은 지형학상 배후습지에 해당된다. 그리 규모가 큰 하천은 아니지만 하류지역 지명(大野)에서도 알 수 있듯 드넓은 평야지대의 젖줄 역할을 톡톡히 해 내왔다. 이 하천의 유역은 대부분 경작지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지정리 및 배수개선 사업으로 유역상황이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다. 특히 탑천은 만경강 유입지점에서 자연제방의 발달로 지면의 해발고도가 5m내외이지만 상류로 올라감에 따라 4m정도로 낮아지고 개수공사 이전의 옛 물길도 나타난다.
익산과 군산지역의 평야부를 굽이치고 있는 탑천의 물길은 두 갈래의 큰 줄기에서 비롯된다. 백제문화의 숨결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는 미륵사지 석탑(미륵산) 인근의 작은 물줄기가 모여 익산시 팔봉동 북부에서 기양천(箕陽川)이란 이름으로 서진(西進)하다가 삼기면 일대에서부터 남하(南下)한 물길과 만나 하천의 본류를 형성한다. 이 두 물길이 합류하는 곳은 익산시 신용동과 황등면의 경계선인 요교(腰橋)부근 일명 허리다리 부근으로 익산시 통합이전 익산군과 이리시의 경계지점이기도 했다.
이곳은 또 벽골제와 함께 우리나라 농경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황등제(黃登堤)’의 자취가 남아있는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기름진 평야지대를 흠뻑 적시며 하천의 폭을 넓혀가던 탑천이 만경강을 향해 속도를 더해가는 곳인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에 탑동마을이 있다. 시원하게 뚫린 전군(全群)도로 인근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고려 때 건립된 3층석탑이 있어서 예로부터 탑골로 불리웠으며 하천이름도 이 석탑과 연관된 것이라 한다. 탑천 주변의 취락은 탑교를 기점으로 상류와 하류지역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주로 익산지역에 속해있는 상류와 중류주변은 드넓은 경작지로 마을이 멀리 떨어져 있는 반면 군산시 대야면 관내인 하류에는 하천을 끼고 작은 마을이 연이어 형성돼 있다. 이곳 주민들은 제방도로를 이용하여 인근 익산과 군산 등으로 생활권을 넓히고 있지만 교통에는 불편한 점이 아직 많다.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는 강 하류에 유입되는 지류에서 만조(滿潮)때 바닷물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방조수문(防潮水門) 설치가 필수적이다. 이 같은 이유로 탑천은 일제때인 1935년에 준공된 입석(立石)배수문을 통해 그리 길지 않은 여정을 마치고 만경강으로 흘러든다.
◇부용천
김제시 와룡역 뒤편 용지면 구릉지대에서 발원하여 부용역과 공덕면 황산사이의 백구평야를 거슬러 공덕면 농장촌 부근에서 만경강으로 유입되는 아주 작은 하천이다.
■만경강과 문화
◇호남평야의 젖줄
우리 전북에는 4개의 큰 강이 있으니 금강, 섬진강, 만경강, 동진강이 그것이다. 그 중 섬진강은 호남평야와 직접관련이 없으며 금강의 영향력도 미미하다. 동진강은 정읍 김제 부안의 호남평야의 남부지역의 젖줄이나 유로의 길이나 유역인구(27만 4천명)에 있어 만경강의 절반수준이니 명실 공히 호남평야를 이룬 근간은 만경강이요, 전주시민과 익산 시민이 마시고 버리는 모든 물들이 만경강과 함께 한다.
◇조운과 포구
지금의 만경강은 수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러나 예전에는 상류까지 배가 드나들었던 기록들이 많다. 고려의 신하였던 최양은 전주 대승동(소양면)에 은거하면서 친구들과 구만리(봉동)에서 뱃놀이를 했다 한다. 영조때 관찰사 홍낙인은 패서문(전주 서문)누기에서 「문루에서 바라보니 산은 높고 물은 깊다.---배와 수레가 함께 닿는구나」라고 하여 추천에 배가 닿았음을 알려준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의 전라도조에도 「전주 서쪽 사탄(조촌면)에는 소금을 실은 배가 통한다.---전주부는 인구가 조밀하고 물자가 쌓여 서울과 다름없는 큰 도회이다」라 하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만경강 일대에 10여개의 포구와 나루터가 나타난다. 고사포, 동자포, 신창진, 회포, 춘포, 율포, 사천진, 양정포 등이 그것이며, 창(倉) 으로는 신창, 이성창, 옥야창, 우주창, 양창(고산), 동지창(이서)등이 있다.
17세기에 제작된 여지도서에는 만경강에 삼례천방이 축조된 모습을 볼수 있어 그 이전에는 뱃길이 더 위까지 닿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제가 1925년부터 1940년까지 삼례이하 하류에 인공제방을 축조하는 직강공사를 하고 백구정과 탑천 부용천에 제수문을 설차하기 전만 해도 바닷물이 삼례부근가지 밀고 들어왔다(해전리ㆍ어전리). 춘포면 까지도 만조의 영향으로 상선이 와서 정박했으며(춘포 삼포) 부용천은 와룡리까지 바닷물이 왕래하였다. 탑천에서도 요교아래까지 바닷물의 영향이 미쳤고(도선) 배산 뒤 다가포까지지 소형어선들이 다녔고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경지정리가 이루어지기전까지는 오산천을 거슬러서 원오산까지 젖거리 배가 드나들었다. 당시 목천동과 탑천 일대는 전부가 갈대밭으로 노전백리(蘆田百里)의 황야였으며 배후습지에는 개연꽃이 만발해 옥야홍련(沃野紅蓮)의 장관을 이루었던 것이다.
◇교통
현재 만경강 본류를 가로 지르는 교량은 모두 12개이다. 그중 2개의 철교와 용도가 폐기된 인도교 2개를 제외하면 11개의 다리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 호남고속도로인 만경강교와 목천포의 만경교, 삼례교가 교통에 큰 비중을 차지하며 특이한 다리는 우리 익산과 백구면을 잇는 만경강 제수문교와 대장 잠수교이다.
최근에 완성된 다리는 모두 3개로서 23번 4차선 국도를 잇는 목천대교가 2002년 완공되었는데 길이가 1,140m로 목천포 만경교의 두 배이며 만경강의 다리중 가장 길다. 또 하나는 제2의 전군도로를 잇는 공덕대교인데 길이는 800m이며 2002년에 완공되었다. 서해안고속도로 만경강교는 880m로 역시 2002년에 완공되었다.
고산천에서부터 목천포까지의 제방은 대부분 포장이 되어있고 유강리에서 청하까지는 2차선 포장이 아주 잘된 반면에 목천에서 대야방면 제방은 아직 비포장이며 차량통행도 거의 없다. 익산의 남부지역의 대부분의 마을들은 구하도 양안의 자연제방위에 위치하며 춘포면 신복마을이 전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문화재와 관광
지금까지의 만경강 일대의 고고학적 자료는 공덕면, 백구면, 송천동을 중심으로한 구릉지역에 청동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비교적 많이 분포된 것으로 보고 되었다. 그런데 2000년 봄 국토연구원 조사팀이 강 유역 매장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토기와 기와, 화살촉, 옹기, 석기류 등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의 흔적들을 거의 전 지역에서 발견하였다. 특히 송천동 와룡리의 전주천변에서 후기 구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몸돌과 돌날이 발견되어 전북지역 최초의 구석기 세대의 유물을 확인하는 성과가 있었다. 만경강 유역에서는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으로는 삼례교 일대와 청하면 만경대교 일대로 청동기 유물, 척산토성, 고분, 창고터, 나루터등이 분포되어 보존가치가 높다.
사찰로는 망해사의 경치가 으뜸이요, 심포항의 횟집이 유명하고 강 하류의 망둥어잡이가 그만이다. 정자로는 전주시 팔복동의 추천대(楸川臺)와 삼례의 비비정(飛飛亭) 공덕의 영사정(永思亭)이 있다. 추천대는 삼천과 전주천이 만나는 지점에 조그맣고 아담한 모습으로 서있고 전주 8경의 하나인 비비정은 1998년 복원되어 만경강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꾸며주고 있다. 공덕면 당제산의 영사정은 작년에 완공되었다. 서원으로는 삼례의 호산서원(湖山書院)과 공덕의 저산서원(楮山書院)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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