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문화원에서 발행한 익산향토지 제2권(2006)중 필자가 조사하여 정리한 부분입니다.
제1편 동산동
제1장 동산동의 연혁과 현황
제1절 동산동의 연혁
행정동 동산동은 세 개의 법정동(동산동, 금강동, 석탄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익산시 주요부(도시지역)의 남단에 위치한다. 서쪽으로는 인화동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마동과 팔봉동이 있다. 동쪽으로는 춘포면이 있고 남쪽으로는 만경강 건너 김제시 백구면이 있다. 동산동의 원불교 동산수도원과 단군사당이 있는 환산의 낮은 구릉지와 금강동의 수도산(해발 40m)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평탄부이며 금강동과 석탄동은 전적으로 논농사지역이다.
조선시대에 전주부의 속현이었던 옛 옥야현 지역이 익산군에 편입된 것은 1906년의 일이었다. 이때 편입된 옥야현 지역은 5개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동산동지역은 남일면에 속해 있었고 석탄동과 금강동지역은 동일면에 속하였다. 1911년에 익산군청이 금마에서 남일면으로 옮겨오면서 남일면은 익산의 중심이 되었고 1912년에는 호남선이 개통되며 1914년에는 남일면(이리, 마동리, 동산리, 목천리)이 동일면(신흥리, 금강리, 대장촌리, 석탄리)과 합쳐져서 익산면이 되고 남이면과 서일면이 합하여 오산면이 되며 북일면은 그대로 북일면이 되었다. 1911년 당시 이리의 인구는 3,776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익산면은 8개의 리(里)가 있었는데 중심부인 이리(오늘날의 인화동, 주현동, 갈산동, 중앙동, 창인동, 평화동 지역)를 비롯하여 마동리, 동산리, 석탄리, 대장촌리, 신흥리, 금강리, 목천리가 있었다.
1917년에는 익산면이 지정면(중심면)이 되면서 익산시의 모체가 되었다. 이때 거리가 먼 석탄리와 대장촌리는 춘포면에 주고 신흥리와 금강리는 북일면에, 목천리는 오산면에 넘겨주게 된다.
1931년 4월 1일 익산면은 익산읍으로 승격하고 그해 11월 1일 이리읍으로 개칭되었다. 1947년에는 이리부가 되어 익산군과 분리되었고 1949년에 이리시로 개칭하였다. 1995년 5월 10일 도농 복합도시 형태로 익산군과 통합하여 익산시가 되었다.
동산동의 시작은 1914년 10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남일면의 고잔리, 상류리, 월담리와 신동 각 일부와 동일면의 신성리 일부를 병합하여 동산리라 한데서 출발한다.
그 후 이리읍 동산정이었는데 1949년 8월 15일 동산동으로 개칭했고, 1951년 6월 1일 동산동을 남· 중· 북부로 나누었으나 1957년 9월 14일 다시 통합했다. 1973년 7월 1일 김제군 백구면 삼정리 일부지역이 편입되고, 1983년 2월 15일 익산군 춘포면 석탄리 지역이 편입되었다. 1994년 12월 1일 동산동의 ‘나룻가’와 ‘신천’이 인화동으로 넘어갔다. 1998년 10월 9일에는 신흥동의 법정동이었던 금강동이 동산동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에 당시까지 김제군에 속해있던 만경강 이북에 있는 김제군 백구면 삼정리(조문, 고잔, 신천)를 목천동과 동산동으로 편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만경강 이북인 석탄동 유천마을 구강 좌편에서 중문천에 이르는 농경지 수 만평은 김제시에 속하고 있다. 행정운영동 동산동의 변천사는 다음과 같다.
○1914년 10월 1일 : 익산면 동산리
○1931년 4월 1일 : 익산읍 동산리
○1931년 11월 1일 : 이리읍 동산리→33년 12월 1일 동산정
○1947년 2월 23일 : 이리부 동산동
○1949년 8월 15일 : 이리시 동산동
○1973년 7월 1일 : 김제군 백구면 삼정리 일부(신천) 편입
※신복은 김제군 백구면에서 익산군 춘포면 석탄리로 편입
○1983년 2월 15일 : 익산군 춘포면 석탄리 편입
○1995년 5월 10일 : 이리시와 익산군의 통합으로 익산시 동산동이 됨
○1998년 10월 9일 : 익산시 금강동을 편입하여 석탄동과 함께 3개 법정동 이 됨
○2002년 4월 4일 : 동산동 주민자치센터 개관
제2절 동산동의 현황과 모습
익산시 중심부의 동남단에 위치한 행정동 동산동은 3개의 법정동(동산동, 금강동, 석탄동)으로 구성되어 있어 익산시 전체 31개 법정동 중 3개가 합쳐진 동이다. 동산동의 면적은 12.73㎢(익산시 전체면적의 2.5%)로 14개 행정동 중 3번째로 넓은 동이며 인구는 9,125세대에 26,953명이 거주하고 있어 14개 행정동 중 4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진 전형적인 도농복합형 지역이다. 52개 통 267개 반 1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금강동과 석탄동은 논농사지역인데 그중 석탄동은 31개 법정동중 목천동 다음으로 많은 전답을 가진 동이다.
구 동산동 지역은 오래전부터 저소득층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던 관계로 지금도 발전이 미미한 곳이 잔존하고 있으나 이미 80년대 말에 고봉로 주변은 고층상가가 들어서면서 상업지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최근에는 아파트가 밀집되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 동산동이 시내 중심의 변두리였던 20여 년 전인 1985년의 통계를 보면 2,628세대에 12,704명이 살고 있었는데 현재는 8,229세대에 무려 24,661명의 대단히 많은 인구가 살고 있음을 통해 20여년의 짧은 기간에 세대수는 3배, 인구는 2배로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에도 동산동은 전형적인 도농이 복합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옛부터 옛뚜기 마을은 시설원예단지가 조성되어 토마토, 멜론 및 각종 채소 생산지로 유명하다.
김시영 동장님(55세)의 말씀을 듣자면 아직도 미개발지가 산재하여 있으나 토지의 절대다수가 우량농지 및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철도가 지나고 있어 개발여건이 좋지는 않으나 앞으로 도시의 팽창에 따라 우량농지가 해제되고 전라선 철도 이설화 계획에 따라 철도 이설이 완료되면 도시개발이 우선적으로 추진되어 어느 지역보다도 발전가능성이 매우 큰 지역으로 현재 개발속도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일부지역은 부동산 가격이 계속 상승하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동산동에는 현재 100세대 이상의 아파트단지 20여개가 형성되어 있으며 계속 늘어나고 있어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영등동의 롯데마트에 이어 대형마트로는 두 번째로 2006년 10월 중순, 구 원광중ㆍ고등학교 자리에 E-마트가 개장함에 따라 이곳 동산동은 더욱 활기를 띠는 모습이어서 앞으로 발전이 크게 기대되는 지역이다.
석탄동과 금강동은 동산동에 속해 있어 시내권이기는 하나 여전히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시골이며 12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민들은 삼호아파트 앞의 우량농지를 도시계획지역으로 지정하여 주기를 요망하며 동산동 사무소 부근의 주거 열악 지역을 재개발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고, 전라선 철도를 현재의 위치에서 500m이상 남쪽으로 이설하여 토지이용을 확대하여 주기를 원하고 있다.
□ 동산동에 있는 농촌 자연마을 현황(2006.11.1현재)
마을명 |
세대수 |
상주인구 |
비고 |
작은옛둑 |
148 |
370 |
동산동 |
유 천 |
109 |
300 |
석탄동 |
고 제 |
77 |
195 |
〃 |
신 복 |
74 |
210 |
〃 |
용 강 |
54 |
132 |
〃 |
간 리 |
42 |
106 |
〃 |
양 촌 |
103 |
232 |
금강동 |
망 산 |
116 |
281 |
〃 |
운 용 |
53 |
112 |
〃 |
부 평 |
69 |
192 |
〃 |
강 경 |
44 |
126 |
〃 |
신 성 |
73 |
186 |
〃 |
금 곡 |
82 |
220 |
〃 |
계 |
1,044 |
2,662 |
|
□ 3개 법정동의 가구별 직업분포(2006)
법정동명 |
농업 |
자영업 |
회사원 |
공무원 |
기타 |
동산동 |
145 |
2,821 |
2,558 |
29 |
2,634 |
금강동 |
392 |
34 |
12 |
3 |
99 |
석탄동 |
234 |
25 |
7 |
1 |
89 |
계 |
771 |
2,880 |
2,577 |
33 |
2,822 |
□ 주요 특용작물 현황(2006)
생산품 |
재배면적 |
생산량 |
재배농가 |
비고 |
방울토마토 |
14ha |
700t |
62 |
|
토 마 토 |
16ha |
600t |
62 |
|
메 론 |
12ha |
168t |
62 |
|
계 |
42ha |
1,468t |
62 |
|
1. 동산동 지역
법정동 동산동 지역은 일백여 년 전부터 익산의 중심부인 남일면 소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억속에는 농촌진흥원과 원광중고등학교가 있던 마을이라는 기억과 시내 변방의 가난한 마을이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1980년대를 거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 오늘의 동산동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 있다.
동산동은 금강동이나 석탄동이 농촌지역인 것과는 달리 시내주요부에 속한다. 서쪽으로는 인화동과 주현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마동이 있다. 동쪽으로는 같은 행정동에 속한 금강동과 남쪽으로는 석탄동이 있다.
면적은 2.37㎢이며 그 40%가 논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동산동은 인구 2만 5천명에 육박하는 거대동이다. 31개 법정동중 영등1동과 모현동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마을이며 인구 2만 5천인 장수군 인구와 거의 맞먹는다.
주변이 상가로 개발됨에 따라 동산동은 예전의 변두리가 아닌 시내에 속하는 마을이 되었다.
현재 동산동의 중심부는 동산동 우체국 삼거리이다. 1988년에 건설된 510세대의 동신아파트에 이어 420세대의 15층 우성아파트가 1989년에 들어서게 되어 동산동에도 소위〈맨션〉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는 마동의 전원맨션에 이어 영등현대아파트와 함께 익산에서는 가장 오랜 맨션중의 하나이다. 이 지역에는 동익산로를 좌우로 하여 이후 지어진 삼성, 우남남부, 동산세경 아파트가 있으며 최근 신동아아파트가 건설중에 있어 바야흐로 동산동이 아파트단지화 되어가고 있다.
동산동의 가장 큰 희망은 뭐니 뭐니 해도 동익산 사거리 구 원광중ㆍ고등학교 자리에 E-마트가 개장한 일이다. 2001년 영등동에 롯데 마트가 익산시의 가장 큰 대형마트로 등장한 이래 익산시내 온 중산층의 발길을 붙잡았으나 금년 10월 홈 플러스가 영등동에, E-마트는 이곳 동산동의 구 원광중ㆍ고자리에 거대하게 들어서게 되었다. E-마트의 개장이 동산동 발전의 기폭제가 될 것을 동민들은 바라고 있다.
월담리 북쪽 언덕에 있는 단군사당 동편의 대용수로 건너편에는 동산우남아파트가 자리잡고 있다. 옹벽길을 지나면 옴속골이며 콩나물길을 통해 동산초등학교로 이어졌는데 동산동에서도 가장 음습하고 개발이 되지 않던 이 마을도 금년에는 중장비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이곳 언덕배기 아래 1만 3천평이 [옴속골 재개발 현장]
넘는 옴속골과 잠상리의 오래된 집들을 철거중에 있으며 대한주택공사에서 800호의 아파트를 지어 분양 및 임대를 할 예정이다. 이제 동산동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는 중이다.
잠상리를 지나면 또 하나의 거대한 아파트군을 만난다. 수도산 자락에 자리잡은 동산동 유일의 중학교인 동중학교와 동남초등학교에서 동산초등학교에 이르는 주변에는 삼호, 동산주공, 한성, 비사벌, 세경, 세경고층, 동양화학, 동산제일2차 등 수많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990년 초부터 개발되어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그로 인하여 동남초등학교와 동중학교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80년대 말 개발된 6차선의 고봉로 주변은 삼사층 건물로 꽉 들어차서 이리시의 새로운 번화가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찾던 유흥가로 한때 유명하였으나 이제 인화동의 남부와 함께 그 영화를 뒤로하고 주춤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고봉로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인 동양호텔은 한때 익산 최고의 호텔로 명성을 지녔으니 이젠 옛 명성을 멀리하고 병원으로 변신했다. 1990년대 들어 영등동이 개발되기 시작하고 2000년대에는 영등동과 어양동으로 익산의 상권이 완전히 옮겨간 뒤로는 활기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 전적으로 유흥가인 남부와는 달리 주변에 아파트가 많은 관계로 그런대로 상권이 유지되는 듯하니 천만 다행이거니와 E-마트의 개장으로 향후 새로운 변화를 기대한다.
[월담마을과 환산] [환산에서 바라본 월담마을 전경]
리고 중부길의 집들과 단군사당 1길의 집들이 산뜻한 주택으로, 아니면 아파트로 새롭게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동산동은 이젠 어려운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든지, 발전이 더딘 시내의 변두리라는 오명을 저 멀리 집어던질 수 있으리라.
동산동의 거의 유일한 구릉지대인 월담마을은 동산리의 끝 마을이다. 동산동에서 살아온 추재인 3통 통장님(62세)의 증언에 따르면 환산(環山), 즉 봉술뫼 앞의 큰 마을이 동산리이며 가장 동쪽에 위치하는 월담산(옛 농촌진흥원)아래 마을을 월담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환산은 좌편으로는 원불교 동산수도원이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오른편에는 단군사당이 있는 산으로 동산2호 공원이다. 말이 공원이지 으슥한 골목길이 이리저리 나 있어서 낯모르는 사람은 대낮에도 지나기가 무섭다. 하루빨리 이 지역까지도 밝은 모습으로 단장되어 아름다운 공원으로 탈바꿈되어 산책로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추재인 통장님 말씀에 따르면 해방 후 아주 잠시 미군이 진주하여 이 산에 주둔하였을 때 그 앞에는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들이 기거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9월 8일에는 미군이 상륙하였고 10월에는 이리지역에도 미군이 들어왔는데 처음에는 책임자로 스탄 소령이 왔고, 그 뒤에는 쇼로 대위가 부임하였다고 한다. 1949년 6월에 미군의 철수가 완료되었으니 익산에도 중대병력 정도의 미군이 3년 정도 환산에 주둔하였고 미군을 상대로 하는 상업활동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옛뚜기 마을은 큰 옛뚜기와 작은 옛뚜기로 나뉘는데 작은 옛뚜기는 동산동에 속한다. 구 이리시 지역이 옛 옥야현이기에 이곳에 2005년 3월 옥야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초등학교가 개교하여 이 부근 어린이들의 통학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이 마을을 한껏 폼나게 하고 있다.
인 학교가 생긴 것은 크게 기뻐할 일이다. 1995년 익산군과 통합되기 전의 이리시 지역 거의 전체(팔봉동 제외)와 오산면과 춘포면의 대장촌리를 포함하는 지역이 1899년까지 전주에 속하였다가 익산군에 편입된 옥야현 지역임에도 그런 역사를 기억하게 할 만한 상징이 없어 아쉬웠던 차에 《옥야》라는 명칭을 붙인 옥야초등학교가 탄생되었음을 정말 대단히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2. 석탄동 지역
원래 옥야현 동일면 지역으로 만경강이 돌아서 흐르므로 돌여울 또는 석탄(石灘)이라 하였는데 1899년 익산군에 편입되고 1914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복리 신룡리 간동 일부와 김제군 공동면의 신복리 동반월리 및 목연면 백구리의 각 일부와 남일면 유천리를 병합하여 석탄리라 하여 익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익산면이 지정면이 되면서 거리가 먼 석탄리가 춘포면에 속하게 되었다. 1983년 2월에 이리시에 편입되어 석탄동이 되었고 행정동 동산동에 속하게 되었다.
석탄동은 6.0㎢의 면적으로 31개 법정동중 두 번째로 면적이 넓은 마을이다. 모두 5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농촌지역으로 그 50% 이상이 논이므로 역시 목천동 다음으로 논이 많은 마을이다.
이곳 석탄동지역과 금강동 지역의 대부분은 자연제방위에 형성된 마을들이다. 자연제방이란 하천의 범람시에 하천의 운반물질 중 비교적 입자가 큰 것이 하도의 양안에 퇴적함으로써 발달하는 지형이다. 그리하여 이 지형은 홍수시에 상류지역에서 공급되는 다량의 물질을 통과시키는 하도 양안에 잘 발달하며, 갯골의 역할을 주로하거나 범람원을 배수하는 배후습지의 하도양안에는
잘 발달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만경강의 자연제방은 대부분 삼례의 서쪽에서 나타난다. 일제는 1924년부터 쌀 수탈을 위해 대대적인 쌀 증산운동을 벌인 산미증산계획의 일환으로 만경강에 대한 대규모 수리사업을 벌였고 직강공사는 1924년에 시작하여 16년간 수리사업을 통하여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만경강의 수리사업은 인공제방 축조와 곡류가 심한 부분을 바꾸는 직강공사가 가장 기본적인 사업이다. 만경강은 유로가 불규칙하게 심한 자유곡류천이었다. 여기에 제방도 튼튼하지 못해 여름이면 홍수의 피해가 대단히 컸다. 직강공사와 인공제방의 축조로 만경강 유로는 크게 변했고 당시 쌓았던 제방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 직강공사와 인공제방의 축조로 많은 마을이 없어지거나 생활권의 변화 등 만경강 유역일대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만경강의 유로가 직선상으로 개조되고 제방이 축조되었으므로 그 자연제방은 인공제방 바깥쪽에 남아있는 구하도(구강)을 따라 분포한다. 상류에서부터 강의 북안에는 삼례읍의 해전리, 춘포면의 용연리, 춘포리, 석탄동의 간리, 신복, 용연, 유천, 고제, 동산동의 작은 옛뚜기, 금강동의 금곡, 강경, 인화동의 신천, 나룻가, 목천동의 고잔, 조문, 목상리, 목천포, 남전리, 신지리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하며, 강의 남안에는 전주시 화전동, 신성동, 도덕동, 강흥동, 김제시 백구면의 마산리, 유강리, 동자포, 강좌리 등이 있다. 이들 부락들은 대개 발생연대가 백여 년 전이라고 볼 수 있으며 만경강의 내측에 있던 행사리, 사천리, 신천리, 신월리, 강리, 내포리 등은 없어지게 되었다. 인공제방의 완성으로 익산군 오산면 목천리의 구만창, 동자포와 춘포면 석탄리의 일부지역이 강 남쪽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김제군 백구면 삼정리 등은 북쪽으로 들어가게 되어 행정구역상 많은 불편을 겪다가 197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북의 땅은 이리시에, 강남의 땅은 김제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강의 북쪽임에도 아직도 일부땅이 김제시 소유의 땅으로 남아 있고 남쪽에는 익산시 소유의 땅이 약간 남아 있다. 유역의 범람원은 거의 전부가 논으로 이용되고 있어서 토지 이용의 유형을 통해서 지형을 식별하기는 곤란하지만 익산시 남부의 이곳 석탄동과 인화동 지역의 구강양안의 자연제방에서는 고등채소를 재배하는 밭이 분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만경강 제방 안에서도 현재의 하도 양안에 자연제방이 형성되었고 홍수의 범람을 막기 위하여 자연제방에 소규모의 인공제방이 형성되어 강안의 농경지를 보호하고 있다.
이 마을에 서 사시는 서정년씨(67세)의 증언에 따르면 1980년대에 들어서 [고제 마을의 중문천]
서 중문천을 크게 넓혔는데 이처럼 중문천이 크게 확장되기 전에는 수해가 나면 일주일 내지 10일 정도는 지나야 물이 빠지기 때문에 아주 피해가 크고 살기 힘들었다 하며 그때 일부 작은 하천도 정리되어 없앴다고 한다.
만경강 주변의 취락들이 거의가 지류인 곡류대의 구하도의 자연제방을 따라서 선상분포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하천유역의 마을들은 생활용수를 얻기는 용이하나 홍수시에 침수위험이 아주 컸던 것인데 작은 구강들을 정리하고 큰 지류인 중문천을 크게 확장하여 침수를 면하게 해준 것으로 80대의 마을 어른들은 비만 오면 마을 밖으로 나들이조차 어려울 정도로 물에 잠기던 옛날을 말씀하시며 여름 장마철에 상(喪)을 당하면 시내 쪽으로 상여조차 메고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물에 차고 상여가 건널만한 다리하나 변변한 것이 없어 큰 고생을 하였던 고생담을 말씀하여 주신다.
모두가 아름답게 살릴 수 있는 구강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강의 물이 이젠 주변의 비닐하우스 재배단지에서도 지하수를 이용하므로 크게 이용되지 않고 있다는데 일백년이 다 되어 가는 역사를 가진 이 구강을 살려 생태공원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자연생태학습장이나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띠기에서 이곳 유천마을까지는 시설원예단지로써 이곳에서 생산되는 토마토와 방울토마토 및 멜론은 맛이 좋고 색깔이 좋으며 품질이 우수하여 전국시장에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이곳 비닐하우스는 옛강의 좌편에 있는 투구모양의 땅에 대규모로 설치되어 있다. 이 투구모양의 땅은 아직도 만경강 이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김제시에 속한 땅이다. 반면 만경강 남쪽에는 또한 유일의 익산시에 속한 땅이 남아 있으니 바로 춘포면 소재지에서 만경강 건너 김제시 백구면 마산리와 전주시 덕진구 도덕동 사이에 있는 구담마을이다. 일직이 1973년에 그때까지도 김제군에 속해 있던 만경강 이북에 있는 김제군 삼정리 일부를 목천동과 동산동으로 편입하고 만경강 남쪽에 있던 오산면 목천리 남전리 신지리 일부를 김제군에 편입하였으나 아직까지도 만경강 이북인 동산동 유천마을 구강 서편의 농지는 김제군 소유요, 만경강 남쪽의 백구면 마산리와 전주시 덕진구 강흥동 사이에는 아직도 익산시 춘포면 소유의 구담(九潭)마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사시는 유진태씨(72세)에게서 이 마을에 대해 알아보았다. 현재 이 김제시 소유의 농지에는 5가구가 살고 있다. 비록 땅은 김제시에 소속되어 있으나 행정상의 관리는 유천마을로 인정하여 익산시 동산동에서 관리하고 있다. 길을 내는 일이나 농사자금대출, 각종 세금까지도 익산시에 납부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땅은 김제시이나 사람은 익산시민〉인 셈이다.
[유천ㆍ고제의 구강] [신복ㆍ용강의 구강]
하우스재배에도 지하수를 이용하므로 활용가치가 없다 하는데 여전히 만경강
물을 받아 중문천의 지하를 지나 목천포천으로 물을 보내고 있다. 언젠가 익산시의 경제적 힘이 미쳐 이곳을 생태공원화하여 역사문화유산도 살리고 자연학습과 시민공원으로 활용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유천마을에서 만경강 제방을 타고 춘포면 소재지로 향하면 신복과 용강이 나온다. 신복과 용강마을은 너무나 아름다운 반달모양의 구강을 사이에 두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만경강 제방이 완성된 이후 남아있는 구강중에서도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구강이다. 폭은 대략 30m 내지 70m에 이르며 길이는 1㎞에 가까운 아주 큰 규모이다. 마을사람들이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관리를 잘하는 모양이어서 예전보다 훨씬 깨끗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불어난 연잎이 너울거리고 있어 날로 더 아름다워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용강 신복을 지나 춘포면으로 향하면 석탄동의 마지막 마을인 간리가 있다. 간리는 자그마한 마을인데 만경강이 대부분 양 제방 안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모습인데 반하여 이 부근에서는 마을 바로 옆에 까지 다가와 있어 만경강 줄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치가 있다.
3. 금강동 지역
1914년에는 익산면 금강리였으나 1917년 익산면이 지정면이 되면서 거리가 먼 지역이라 하여 금강리가 북일면에 속하게 되었다. 1974년 7월 1일에 북일면 전역이 이리시에 편입되어 금강동이 되었으나 행정동 신흥동에 속하였다가 1998년 10월에 금강동은 동산동에 편입되고 신흥동은 팔봉동에 편입되었다.
금강동은 4.3㎢의 면적으로 모두 7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농촌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엿볼 수 있는 마을이다. 면적의 60%가 논인 논농사지역이다.
동산교에서 부평마을에 이르는 도로변에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서 어엿한 현대판 가촌(街村)이 형성되고 있다. 왼편으로는 왕지평야가 시작되는 곳이며 건물들이 거의 없으나 오른편은 동산교를 [발전하는 부평마을] 지나면서부터 부평에 이르기까지 주유소, 식당들이 들어서고 있고 부평마을의 금강교차로는 서쪽으로는 동산동 방면, 북으로는 공단방면, 동으로는 삼례방면으로 가는 3개의 4차선 도로와 구도로인 옛 춘포로가 교차하는 곳으로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거니와 춘포로를 따라가면 역시 도로 양변에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거대한 익산농협 미곡종합처리장을 비롯하여 수많은 작은 공장과 가든들이 있고 어린이집도 보인다. 이곳에 소재한 마을이 부평인데 옛날에는 이 근방 일대는 지대가 낮아 홍수가 나면 침수가 잘 되는 곳이기에 뜬 들이라는 뜻으로 부평(浮平)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 금강동의 신성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지형에 입지한 마을이
지만 부평과 금곡마을은 석탄동의 일곱 마을과 함께 임수촌은 맞지만 배산촌이 아닌 순수한 평야촌이다. 만경강 직강공사이전에는 물이 차는 배후습지 아닌 구강을 따라 형성된 자연제방위에 형성된 마을인 것이다. 그저 망망대해 같은 논밖에 없는 평야지대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평마을은 이제는 망망대해에 떠있는 외로운 부평초 같은 마을이 아니라 아주 활기찬 모습으로 눈에 띠게 [금곡마을 전경]
변신하는 마을이 되었다.
이제 이곳을 지나는 국도 27번이던 삼례길은 예전길이 아니다. 예전의 길은 아직도 대장촌을 지나면서 삼례로 이어져 있어 시내버스와 다른 차들도 간간이 다니고 있지만 2001년에 개통된 새로운 27번 국도는 고속국도와 진배없는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이다.
시내에서 평동로를 따라가다가 부평마을입구에서 우측으로 들어서서 전라선 철도를 넘어 5백여 미터를 가면 금곡이 있다. 멀리 양쪽으로 동산동과 부평마을이 보이는 시골마을이다. 초등학교학생들이 동산초등학교까지 다니고 있어 매우 먼 거리이지만 대부분 차편으로 통학하고 있다.
[강경마을과 중문천] [토다리의 금강교]
에서 도망친 작부인 백화 세 사람이 근대화에 떠밀려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을 유랑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이다. 강경과 삼포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이곳이 배가 드나들던 포구임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지금의 중문천을 타고 배가 드나들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강경마을의 하천은 역시 규모가 커서 하천 양제방의 폭이 족히 사오십 미터나 되니 강안에 갈대도 많고 마을 어귀에는 큰 수양버들이 자라 가로수를 이루고 있다. 사실 대장촌을 지나면 금마에서 발원하는 만경강 지류의 하나인 익산천이 나오는데 익산천보다 현재에는 강경을 지나는 중문천이 더 강다운 모습을 띠고 있다.
중문천은 어쩌면 만경강 제방과 대용수간선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익산천과 이어지는 또 하나의 만경강 지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평소에는 대용수간선처럼 물이 흐르지 않지만 비가 많이 온 날이면 이 하천에는 물이 그득하여 제법 장관을 이룬다.
10여년 전 만 하여도 도시의 가장 변두리 낙후마을이라서 전혀 누가 감히 살러올 것 같지 않던 이 신성마을이 교통 좋고 경치 좋은 살만한 마을이 되었으니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정말 틀린 말이 아니다. 이젠 어느 곳이고 큰 길이 나고 포장만 되면 일년이면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해버리고 마는 세상이 되었다
하나 1로는 큰 길이다. 4차선으로 27번 국도가 공단 방향으로 갈라지며 나있는 간선도로이다. 동천로로 갈라지는 삼거리 못 미쳐 익산시 하수종말처리장과 그 뒤에는 환경시설관리공사 익산사업소가 있다.
익산시 하수종말처리장이 지역주민들의 휴식공간 및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익산시는 작년(2005년)부터 익산 하수종말처리장 부지 내에 각종 수목과 함께 편익 시설을 조성,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익산시는 하수종말처리장 내에 영산홍, 자산홍 등 5만여 주의 철쭉꽃을 비롯해 라일락, 왕벚꽃 등을 식재한 상태이다. 또한 테니스장을 비롯해 농구, 배구, 족구, 탁구, 헬스장 등 각종 체육시설을 조성해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이와 함께 대규모 잔디 광장 등을 조성함으로써, 유치원과 초등학생들의 소풍 장소는 물론 환경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혐오시설임에도 시민들이 가까이 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환경을 조성하였으니 대단히 환영할 일이다.
금강동에서 유일한 공공
기관인 신흥초등학교는1946년에 이곳이 북일동에 속하였을 때 북일초등학교 동부분교로 개교하였다가 1957년에 신흥국민학교로 분리하였다. 망산마을에 사시는 김성곤씨(70세)에 의하면 일제말기 1941년에 인화동에 세워진 대화국민 [신흥초등학교 모습]
학교(동산초등학교의 전신)까지 이곳에서도 걸어 다녔다고 하며 해방이 되자 동산초등학교가 세워지고 이곳에도 북일국민학교 동부분교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주민들이 얼마나 반겨했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모든 농촌의 학교들이 그렇듯이 이곳 부근에 418세대의 아파트가 들어선 지금에도 한 학년 한 학급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도시속의 소규모학교이다.
해에 구시장 안길에 있는 대화초등학교에 다녔다고 하신다. 현재 대화초등학교 자리에는 작은 회사가 들어서 있는데 학교와 관련된 아무런 흔적도 없다. 이 대화초등학교는 개교한지 4년 만에 해방을 맞이하여 현재의 동산동으로 이전하여 동산초등학교가 되었다. 이제 잿백이 1길은 사람들이 왕래하지 않는 [양촌 마을] 산길이 되어버렸고 오히려 운룡1길을 따라가면 수도산 정상의 삼거리가 나온다.
망산 너머는 양촌이다. 망산쪽보다는 쌍방울 앞 고봉로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마을이다. 망산이나 운룡과는 달리 양촌은 일직부터 큰 길 옆 마을이라 익히 알고들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딱이나 시민들이 무슨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마을에 들어가 보는 일은 드물었다. 하물며 망산이나 운룡은 말할 것도 없겠다. 우리 구이리시의 동편에 소재한 금강동이 1974년까지 북일면에 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뇌리에 북일면은 원광대학이 있는 신동과 영등동지역이라 깊게 고정관념으로 박혀 있기 때문일 것이리라.
제 2장 동산동의 전통마을
제1절 동산동(銅山洞)
동산이란 명칭은 환산에서 유래한다. 동산동에 자리한 구 농촌진흥원 터의 북쪽에 둘러친 산의 형국이 둥그런 반원(半圓)모양으로 되었다 하여 고리메 즉 환산(環山)이라 하였다. 그런데 고리가 음모음화(陰母音化)하여 구리로 변음하게 되었다. 따라서 뜻도 환산(環山)이 동산(銅山)으로 변하게 되었다.
익산시내에 인접한 산중에서는 배산 다음으로 가장 높은 이 봉우리를 봉술뫼라고도 한다. 환란이 있을 때 이곳에 봉화를 올렸다 하며 선인들은 우리 겨레의 밝은 미래를 예견하였음인지 또 환산(還山)이라 이름하였다고도 한다. 일제는 한반도를 강점하고 조선 팔도에 중요 지맥에 정을 박고 산의 정기를 끊고 이리읍의 봉술뫼에는 저들의 조상신을 기리는 신사(神社)를 짓고 이곳에서 저희 천황을 경배하였다. 일본인들이 측량할 때 깃대를 꽂았다 하여 붙이는 이름인 일명 「기때배기산」이라고도 부르는 환산은 해방이 되고 원불교가 이곳에 고등선원을 짓고 이리시는 이곳에 단군묘(檀君廟)를 지어 민족의 얼을 선양하게 되었다.
환산, 즉 봉술뫼에는 두개의 봉우리가 있다. 단군성묘 천진전이 위치한 봉우리에서는 익산 시가지가 내려다보이지 않는다. 동익산역에서 전주로 가는 철길과 멀리 모악산, 그리고 가까이 대장촌의 들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神社)가 있던 현재의 동산선원이 있는 봉우리에서는 익산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동산리(銅山里)
동산동을 중심부에 있는 산인 환산(還山), 즉 고리메 아래의 가장 오랜 마을을 동산리라 한다. 원래 옥야현 남일면의 동산리 마을이며 오늘날 법정동 동산동 일대를 일컫는 말이라 하겠다.
□잠상리(蠶桑里)
동산리에서 옴속골을 지나 신흥리 쪽으로 가는 중간에 마을이 있다. 이곳에서 뽕나무를 재배하여 누에를 치며 생활을 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월담리(月潭里)
담(潭)은 연못을 말하는 것으로 연못이 있어 달이 비추이는 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오늘날 동산동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월담산(옛 농촌진흥원 자리)아래 마을이니 동산동에 있던 연못을 일명 다래못(달의 못)이라 하였다 하며, 지금도 월담산 아래에는 구강의 형태가 남아 있으니 그 옛날 강물에 비친 달빛이 아름다웠기에 붙여진 이름이리라. 이리 팔경 중에는《月潭玩月》이 있으니 바로 월담산 아래 연못에 비치는 달이 마치 장난하듯 출렁이는 모습을 그린 말이다.
□갓방뜰
갓방뜸을 말하며, 옛날 하대 받던 갓바치들이 모여 살며 갓을 만들어 팔았던 마을이다. 옛날에는 수공업에 종사하면서 모여 살던 마을을 행정구역으로 소(所)라 하였다.
□조상고개(장뜰)
예전 동산동 도살장 쪽에서 부치댕이 쪽으로 넘어가는 곳을 조상(弔喪)고개라 불렀다. 나중에 잠상리(蠶桑里) 고개 너머에 공동묘지가 생기니 우연치 않게 명실상부한 이름이 되고 말았다. 조상고개는 닭뫼(수도산)에서 봉술뫼(환산, 기때배기산)로 연하는 공동묘지 등성이에 있었다. 공동묘지는 닭뫼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현재의 동중학교와 동남초등학교까지 연하였다.
현 비사벌아파트가 있는 곳에 도살장이 있었고 삼호아파트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조상고개라 일컬었다. 조상고개를 넘으면 고라실 논이 나오고 논가를 지나면 신성리 부치댕이가 나온다. 고라실은 봉술뫼와 닭뫼 사이의 골짜기를 일컫는데 지금은 논자리의 흔적도 없고 현재 삼호와 동산주공의 고층아파트가 우뚝 서 있다.
조상고개에는 옛날 가난한 사람들은 묘를 쓸 산이 없기에 죽어서 묻힐 땅이 없을 때 지금의 공동묘지와 같이 누구나 묘를 쓰는 곳으로 많은 무덤들이 있었다. 이것을 도장골이라 불렀는데 장뜰도 그와 같은 지역이다.
□옴속골(안골)
지형적으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곳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산리에서 신흥리쪽으로 가는 길의 왼편 언덕에 깊숙이 들어앉은 마을이었다. 여기에 동산서원이 있다. 동산서원은 이 지역 일대의 아파트 건설로 인하여 2006년 11월에 철거되었다. 안골이라고도 한다.
□콩나물고개
동산초등학교에서 옴속골로 가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이 마을에서 콩나물을 많이 재배하여 시내에 내다 팔았는데 이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기 때문에 고개부근의 마을을 콩나물고개라고 불렀다.
□신사당 말랭이
지금 원불교 동산선원 자리에 일제시대에는 신사가 있었다. 말랭이란 산의 등성이를 이르는 말이다. 신사당 말랭이는 신사가 자리한 산등성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부치댕이(佛堂)
동산동 수도산 남쪽에 있는 작은 산으로 석불이 있는 절터를 말하였다. 그곳에 현재 관음사가 들어서 있으며 일명 미륵댕이(彌勒堂)라고도 한다.
□해방촌(解放村)
동산초등학교 앞의 좌측편 마을을 일컫는다. 해방이후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이루어진 마을이며 일제시대에 영전(永田)농장이 있던 자리이다. 미군이 진주하여 1947년까지 원불교 동산수도원자리에 주둔하게 되자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들도 이곳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단군사당 1길을 따라가면 언덕배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곳까지도 해방촌이었다고 한다.
□교동(校洞)
동산초등학교의 오른편으로 크게 자리 잡은 마을이 교동마을이다. 이곳에는 원래 꽃마을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었는데 해방 뒤에 마을이 커지면서 동산국민학교가 생기자 마을이름이 교동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어느 고을에나 으레《교동》이 있게 마련인데 고을에는 향교가 있고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이라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저 멀리 이리국민학교나 1941년에 생긴 대화공립보통학교밖에 없다가 마을에 학교가 생기게 되니까 마을이름을 교동이라고 붙인 것으로 보인다.
□작은 옛뚜기(이띠기)
만경강에 예전 둑이 있던 곳으로 ‘옛 둑’에 접미사 ‘이’ 가 붙은 이름이다. 즉, 옛 둑마을이란 이름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입에 오르내리면서 보다 쉽고 짧게 불리어져 옛둑이→예뚜기→이뜨기, 이띠기가 되었다. 한자로는 고제(古堤)라고 하는데 작은 이뜨기는 동산동에 속하고 큰 이뜨기는 고제라고 불리며 석탄동에 속한다.
1924년부터 만경강 직선 제방공사가 이루어지면서 구강의 둑 부근에는 마을이 들어서게 되었다. 예전에는 갈대밭이었으나 강 내의 수많은 마을들이 없어지면서 강 밖으로 큰 마을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제2절 석탄동(石灘洞)
석탄동(石灘洞)의 본 이름은 전에는 만경강이 돌아서 흐르는 곳이었기로 ‘돌(廻)’이 ‘돌(石)’이 되어 ‘돌여울→石灘’이 되었다. 즉, 급하게 돌아서 흐르는 여울물을 뜻한다. 1914년 2월 남일면과 동일면이 합하여 익산면이 될 때 석탄리, 구복리의 전역과 신용리, 간동, 남일면의 유천리, 김제군 공동면의 신복리와 동반월리, 김제군 목연면의 백구리 일부를 병합하여 석탄리라 하였다. 익산면에 속하였다가 1917년 춘포면에 편입되고 1983년 1월 10 일 익산군 춘포면 석탄리가 이리시에 편입되면서 법정동 석탄동이 되고 동산동에 속하게 되었다.
□고제(古堤)
전에는 뚝(堤防)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명칭이다. 동산동에 속한 작은 옛뚜기, 즉 이띠기와 같은 어원인데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작은 옛뚜기를 지나 유천리로 가는 중간에 있는 큰 옛뚜기를 말한다. 동산동에 속한 작은 옛뚜기와 구분하여 고제라고 부르고 있다.
□상복쟁이
고제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에는 고제에 속하며 10여 호가 두개의 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천(柳川)
이 마을 앞에는 만경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그 강변에는 버드나무가 많아서 버드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화하여 유천(柳川)이라 하였다. 지금도 폭 50m, 길이가 600m에 달하는 큰 구강이 남아있고 구강의 강변에는 버드나무가 여전하다. 옛부터 해주오씨가 많이 사는 동족마을이었다.
□신복(新福)
1914년 이전에는 김제군에 속했다. 1914년 2월 남일면과 동일면이 합하여 익산면이 될 때 석탄리에 편입되어 익산군에 속하게 되었다. 신복은 새로 막은 보(뚝) 옆이라 해서 새보라 불러 신복(新洑)이 되고 한자가 변하여 신복(新福)이 되었다. 보(洑)의 원음은 복이라 한다.
□용강(龍江)
만경강 제방공사 이전에는 만경강이 마을 앞을 흐르고 있었을 때 이 강에서 용이 오른 곳이라 하여 생긴 명칭이라지만 사실은 강물이 굽어 흘러서 뱀이 지나간 것 같은 사행천을 이루고 있어서 용 모양과 같다고 하여 용강이라 하였다. 지금도 반달모양의 구강이 그대로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마을로 옛 김제군 공동면의 동반월이며 서반월은 지금 김제시 백구면 소재지 마을이다.
□간리(澗里)
용강과 대양(강 내측에 있어 없어진 마을로 추정)이라는 마을과의 사이에 있어서 샛마을이라는 뜻으로 간리(間里)라 했는데 너무도 멋없는 말이라 하여 물과 관계가 있는 시내간(澗)자를 써서 간리(澗里)라 했다고 한다. 또는 만경강가이므로 냇가마을이라 하여 간리(澗里)라고 했다고도 한다. 또는 김제군과 익산군사이에 있어 간리(間里)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용강이나 신복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김제군에 속하였다가 1914년에 석탄리에 편입되어 익산군에 속하게 외었다. 갈리라고도 부른다.
□동반월(半月)
지형이 마치 반달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날 용강이 동반월리에 속하였으며 현재는 이 명칭이 김제시 백구면 반월리에 남아있는데 예전에는 서반월이라 하였다.
□토다리(土橋)
금강동의 부평마을을 지나 대장촌으로 가다보면 금강교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는 이미 옛날부터 토다리가 있었다. 일제시대에 군산 봉동간 27번 신작로를 건설하면서 1932년에 준공한 22m의 다리 이름을 원래 이름인 토다리를 한자로 바꾸어 토교(土橋)라 하였는데 1980년대 초에 노후교량교체공사로 다시 건설하였다. 그런데 1982년에 중문천 확장공사가 이루어지면서 16m를 연장하고는 이름을 금강교라 바꾸고 반대편에 붙어있던 〈토교〉명판은 떼어 버렸다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있다. 이제 바로 그 위에 만리장성처럼 건설된 새 27번 국도가 지난 2000년 12월에 완공되면서 건설된 신 금강교는 길이가 무려 50m이다. 이 금강교 부근의 지하도를 지나 중문천을 따라 올라가면 강경마을이 있다. 지금도 금강교를 토다리라고 부르고 있는데 옛날에는 다리는 돌다리 아니면 토다리(土橋)이기 마련이고 토다리는 작은 하천을 건너는 다리이며 나무로 다리를 제작하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모습이었다. 담양의 소쇄원에 가면 나무로 만든 작지만 비슷한 다리를 볼 수 있는데 생각보다 훨씬 견고함에 놀라게 된다.
그런데 이리시사(1989년 출간)에는 금강교(1933년 준공, 길이 16m)와 토교(1932년 준공, 길이 22m)가 따로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착오인 듯싶고 마을 어른들도 서로 다른 두개의 다리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다행이 1921년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고 계시는 신복리 고성배 할아버지(86세)는 토다리는 우마차가 다닐 정도의 너비로 당시 익산과 대장촌을 연결하는 작은 신작로에 놓인 다리인데 토다리를 허물고 1932년에 새 교량을 설치한 것이라고 증언하여 주셨으며 토다리 자리는 바로 금강교 자리임을 확인하여 주셨고 농촌공사의 이영기 과장님(51)도 금강교 이전의 구다리의 머릿기둥에 《토교》라는 이름으로 다리명이 새겨져 있었음을 확인하여 주었다.
고성배 할아버지와 강경마을 최영오 통장님(64세)의 증언에 의하면 이 토다리에는 원래 너 댓 가호의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며 그 중 두 집은 주막집이었고 정월대보름이면 강경마을에서 이 곳 토다리 마을까지 풍장을 치러 다녔다고 하는데 1990년대까지도 주막집은 없어도 네 집이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주유소와 공장들만 있을 뿐이다. 1982년에 익산군에서 발간한 「미륵산의 정기」에는 토다리를 춘포면의 신평마을과 같은 지역으로 보고 있으며 20년 전까지 흙다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현재 금강교 앞에는 토다리 주유소가 있고 부근에 토다리 산장(음식점)이 있어 많은 이들이 토다리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고 있으나 정작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토다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들 있다. 최근에는 신복과 용강마을의 입구이지만 6년전 까지만 하여도 강경마을사람들도 밖으로 나들이갈라치면 이곳으로 나와서 버스를 탔다. 20여 년 전까지는 비가 오기만 하면 걸어 다니기도 힘들었던 곳으로 현재의 중문천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논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는 시간이 강변마을까지도 무려 20분이 넘게 걸렸다고 마을 어른이 말씀하여 주신다. 요즈음은 그저 사 오 분이면 갈 수 있는 지척거리일 뿐인데도 말이다.
제3절 금강동(金江洞)
1914년 강경리, 금곡리, 운룡리, 신성리, 망산리, 신동의 일부로 한 리(里)가 구성 될 때 금곡리와 강경리에서 한자씩 따서 금강리라 하여 익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에는 북일면에 편입되고 1974년 북일면이 이리시에 편입됨으로써 법정동 이름으로‘금강동’이라 하였다. 1998년 10월 9일에는 행정동
동산동에 편입되었다.
금강리 지역은 만경강 유역의 농경지대로서 대아리와 경천저수지의 몽리구역으로 혜택을 입게 되자 농사를 짓기 위한 새로운 마을들이 조성되었다. 따라서 마을이름도 물과 관계되는 곳이 많다.
□양촌(陽村)
흔히들 잿백이, 세 가호뜸, 네 가호뜸이라 하였다. 농경지 개간에 따라 삶을 찾아 타지에서 이사 와서 형편대로 몇몇 가옥이 들어서자 붙여진 이름이며 세집이 살 때는 세 가호뜸, 한집이 늘어나자 네 가호뜸이라 하였다. 구릉지대에 집이 들어섰기 때문에 잿백이라 하였고 양지바른 곳이었기 때문에 양지뜸이라 부르다가 한자표기로 양촌이라 하였다.
□망산(望山)
수도산 밑의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여러 마을에서 바라다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춘포 들판에 한 과부가 혼자 살았는데 이곳 망산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수도산이 매우 아름다워 마음을 끌었다. 어느 날 풍수 잘 보는 지관을 만나 물으니 지세가 좋다고 칭찬하므로 그 말에 따라 이곳으로 이사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한편 망산이라는 이름은 원래 고리처럼 산새의 지형이 둥글어 어찌 보면 고기잡는 망을 반원형으로 쳐놓은 것 같다 하여 한자로 그물망(網)과 헤쳐놓을 산(橵)자를 따서 망산이라고 지었다 하나 대개의 지명은 순수하고 소박해서 그렇게 어렵게 지었다고 보여지지는 않으며 산이 없는 들녘에 작은 산이나마 가까이 있으니 늘 눈에 익혀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망산이라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운룡(雲龍)
수도산 중턱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어느 도승이 지나면서 산의 형용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세, 즉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국이란 말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지는 말이 있으나 실은 안개 자욱한 가을 아침에 산기슭은 흰 안개에 덮이었는데 뿌연 안개위로 산등성이가 슬쩍슬쩍 보이는 것이 용이 꿈틀거리는 형용 같이 보였기에 지어진 이름이라 여겨진다. 즉, 용이 구름과 함께 즐겁게 논다는 의미의 반룡유운형(盤龍遊雲形)이라는 풍수설에서 기인한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신성(新成)=신기(新基)
수리사업으로 또는 간척지사업으로 새로이 농경지가 개간됨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하여 모여들자 자연히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이렇게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곡
옛날 이 지역이 개간되기 전에는 황무지로 갈대가 무성한 갈밭이었다고 한다. 이 부근이 개간되고 마을 동북쪽의 냇가 뚝에 소를 많이 매었다 하여 소매골이라 하였는데 줄여서 쇠골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을 다시 한자화하여 금곡(金谷)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또는 갈대나 억새같이 억센 풀이 자라는 골이라는 뜻의 새골이 쇠골이 되고 한자로 금곡이란 전연 다른 표기가 이루어지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가능하다.
□부평(富平)
이 근방 일대는 지대가 낮아 큰 물이 나면 침수가 잘 되는 곳이기에 뜬 들이라는 뜻으로 부평(浮平)으로 불리던 것을 음이 같으면서 좋은 뜻을 가진 부평(富平)으로 바꾸어 썼다고 한다. 오늘날은 큰 삼거리가 되었으며 아주 많은 자동차 관련 공장및 여러 중소기업과 가든들이 도로변에 들어서서 외롭게 떠 있는 마을이 아니라 상공업이 발전하는 가촌(街村)이 되어 크게 그 모습이 변하였다.
□강경(江鏡)=갱변
비교적 오래전부터 여기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은 농촌 마을인데 강 줄기가 휘어져 흐르는 지형을 두고 지어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즉 강갱이가 한자화하여 강경으로 되었다. 원래 갱이란 ㄱ자형으로 굽어진 것을 의미하며 곡갱이 갱이 등 굽어 휘어진 것을 일컫는다. 즉 강물이 ㄱ자 모양으로 굽어진 곳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는 뜻으로 붙어진 이름이다 이와 같은 똑 같은 예가 우리 익산의 이웃에 있는 충남의 강경(江景)이다. 금강물이 굽어져서 휘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하여 역시 강갱이가 강경으로 한자화하였다.
□왕지평(王地平)
금강동의 넓은 들을 부르는 말이며 큰 들이란 뜻으로 왕지평야라고 부른다. 서쪽으로는 동산동, 북쪽으로는 신흥동, 동쪽으로는 춘포면이 있고 남쪽으로는 석탄들이 있다.
제3장 동산동의 문화유적과 유물
제1절 동산서원(東山書院)
1. 연혁(沿革)
동산서원은 2006년 11월 현재까지 익산시 동산동 299번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1967년에 세워진 이후 40여 년 동안 옴속골의 콩나물고개 끝자락에 아주 옹색하고 구차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동산서원에는 정면 3칸의 사당이 담장으로 둘러있고 내 3문을 통하여 사랑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으며, 이 내3문에는 무극문(無極門)이라 액판을 써 붙여 놓았다. 그리고 사당 왼쪽(동북쪽)에 삼왕영당(三王影堂)이 정면 3칸의 건물로 세워져 있으며, 사당 바로 앞에 정면 5칸의 강당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 이 강당 오른쪽에는 사당으로 들어가는 외 3문이 세워져 있다.
동산서원을 세우게 된 목적은 본 서원의 창건에 실질적인 일을 담당했던 김형재(金亨在)선생이 현대에 와서 타락해버린 윤리도덕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부패되고 소멸되어 가는 유교의 도덕을 다시 일으켜야 된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능력이 미칠 수 있는 한계에서 자기 조상들의 높은 덕을 널리 밝히고 동시에 유교를 가르치고 또 배울 수 있는 새로운 유교의 수련장을 먼저 세워야 된다는 생각에서 이 동산서원을
그리하여 그의 구상은 가락김씨(駕洛金氏)와 가락허씨(駕洛許氏)들의 찬동을 얻고 이 지방 유림들의 협조에 의해 1967년 3월 실현되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서원들의 규모에 준하여 선현(先賢)들을 모실 수 있는 사묘(祠廟)와 유교를 가르치고 배우는 수련장으로서 강당을 갖추게 되었다. [가락세덕문]
하지만 그의 서원을 세우게 된 목적과는 달리 현재는 이 동산서원이 사묘(祠廟)에 제사만 지내고 있을 뿐 유교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사업을 실현되
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매년 음력 3월 10일과 9월 10일에 전국에 있는 가락 김씨ㆍ허씨들과 지방 유림들이 모여 1년에 두 번 제사만 행하고 있는 형편이다.
내3문 밖에는 동산서원비(東山書院碑)를 비록하여 동산서원중수공적비(東山書院重修功績碑), 김종두위선공적비(金琮斗爲先功績碑), 김성철기공비(金聲喆紀功碑) 등을 세워 놓았다.
사당에는 김수로왕과 신라시대의 사람 김유신(金庾信)을 중심으로 하여 고려시대의 사람 김보(金普), 조선시대의 사람 김극일(金克一)과 허후(許詡)ㆍ김수연(金壽延)ㆍ김일손(金馹孫)ㆍ김대유(金大有)ㆍ김경서(金景瑞)ㆍ김완(金完)ㆍ허목(許穆)ㆍ김홍복(金洪福) 등 12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상왕영당에는 가락국 태조왕(駕洛國 太祖王)과 양왕(讓王)ㆍ흥무왕(興武王)을 모시고 있다. 사당과 영당에 모셔진 사람들은 모두가 가야시대의 김수로왕(金首露王)을 비롯한 그의 후예로서 충효와 도덕에 뛰어나고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옹색하고 구차스럽게 40년을 지탱한 이 서원도 동산동 개발로 최근 철거되었다. 이미 주변의 민가들은 모두 허물어지고 주공아파트 건설이 진행중인데 2006년 11월에 철거를 마쳤으며 비문이나 현판과 위패 등을 보관중인 가락종친회 김재일 총무님의 말씀에 의하면 ?함열읍, 웅포면, 금마면 일대의 적지를 찾는 중이며 곧 복원사업을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곳곳의 서원들이 지키고 보존하는 분들이 차츰 사라짐에 따라 관리가 되지 않아 대부분 쇠락하고 무너지고 없어지는 세상에 역사가 짧은 동산서원은 그나마 지키고 보존하는 종친회가 있어 개발에 밀려 철거는 되었으나 다시금 되살아 난다하니 대단히 기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이전하
는 장소는 경치 좋고 넉넉한 곳에 자리를 잡아서 선현들을 다시 모시고 전통문화를 다시 되살리며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도록 하여 살아 숨쉬는 교육의
장이 되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동산서원 강당문] [무극문 현판]
2.배향인물(配享人物)
1)김수로왕
김수로왕은 삼국시대 이전 가야국(伽倻國)을 세웠다고 한다. 신라 유리왕(琉璃王) 19년(서기 42년)에 가락국의 9간(九干)이 귀지봉(龜旨峰)에 올라가 귀가(龜歌)를 부르니 여섯 개의 알이 든 금합(金盒;금으로 만든 상자)이 붉은 줄에 매달려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것을 아도간(我刀干)의 집에 두었더니 다음날 여섯 개의 알에서 각각 사람이 하나씩 나와 10여일 뒤에 어른이 되어 6가야국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수로(首露)라는 이름은 이 여섯 명의 이름 가운데 앞에서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의 키는 9척(尺)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대가야국의 임금이 되었으며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는 가락 김씨의 시조이다.
김해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銀河寺翠雲樓重修記)에 〈장유화상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비(首露王妃)인 허황옥(許黃玉)의 오라버니이다〉라고 적혀있다.
허황옥은 아유타국(지금의 인도)의 공주로 AD48년에 가락국에 도착하였다고《삼국유사》가 전하고 있다. 허황옥 공주가 가락국 김수로왕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는데, 그때 나이 16세였다.《삼국유사》에 의하면 공주의 일행은 이름이 밝혀진 사람은 신하 신보(申輔)와 그의 모정(慕貞), 또 다른 신하 조광(趙光)과 그의 처 모량(慕良) 뿐이고, 나머지 사람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서 누구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취운당 중수기에는 왕비의 오라버니가 《장유화상》이라고 적혀 있다.
허황옥이 왔다는 아유타국은 어느 곳에 있는 나라였을까? 현재 지구상에 아유타라고 불리는 땅은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인도 갠지즈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Ayodhia)이고, 또 하나는 태국 방콕 근처의 아유티야(Ayuthia) 이다. 그런데 태국의 아유티아는 서기 13세기 때 생겨난 도시이므로 허황옥이 살았던 서기 1세기부터 2세기 사이에는 지구상에 없었던 곳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허황옥의 고향인 아유타는 인도의 아요디아 일 수 밖에 없다.
인도의 아요디아는 서기전 6세기 때 융성했던 도시국가인 코살(Kosala)국의 수도였다. 인도의 전통종교인 힌두교를 부흥시킨 라마왕의 탄생지가 바로 아요디아이기 때문에 더욱 유명한 곳이다. 뿐 만 아니라 아요디아는 불교의 교조인 싯다르타 왕자가 출가(出家)하여 처음 공부를 시작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시내의 사원마다 대문 정면에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마주보는 물고기 두 마리는 김해 수로왕릉(首露王陵) 정문에 그려져 있는 쌍어문(雙魚文)과 똑같은 모양이다.
가락국 최초의 왕이자 아유타국에서 시집온 허황옥 공주를 왕비로 맞이한 김수로왕의 무덤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분명히 가락국의 국장(國章)이자 신앙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림이 허황옥 왕비의 고향인 인도 아요디아 사원마다 그려져 있는 것은 아마도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시집온 인도 공주가 한국 땅에 소개한 신앙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쌍어문은 그래서 인도와 한국을 연결하는 끈이고, 한국에 자리 잡은 인도 신앙의 증거이다. 장유화상이 허황옥 공주의 오라버니라면 아유타국의 왕자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장유화상의 가락국 도착은 인도신앙 내지는 인도종교가 한국에 도착한 중요한 증거가 된다.
쌍어문을 어느 신앙의 상징으로 삼기 시작한 사람들은 지금부터 2,800여 년 전 바빌로니아인들이다. 그들은 물고기가 인간을 보호하는 영특한 존재로 생각하였고, 신전 앞에다 대문을 세울 때 대문 머리에다 쌍어를 그렸다. 그런 생각이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던 유목민족 스키타이인들에게 퍼져 결국은 인도에까지 스며들어 힌두교의 여러 신상(神像)중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신앙은 자연스럽게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 의 동방전파와 함께 북으로는 네팔→티벳트→몽고로 퍼졌고, 동으로는 남중국을 거쳐 양자강을 따라 황해를 건너서 한국 땅에 도착하였다.
따라서 인도출신 허황옥 공주가 한국 땅 가락국에 와서 김수로왕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면서 쌍어 신앙이 한국에 전파되었다. 그 결과 쌍어신앙은 지금까지 한국 땅에 남아있다. 지금도 옛날 가락국(후에 금관가야)의 옛 땅이었던 경상남도에 여러 불교사원에 쌍어문이 남아있다. 김해의 은하사, 계원암, 합천의 영암사에 쌍어문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있고, 새로 창건한 김해의 동림사, 김해 장유종선원에 새로운 쌍어문이 등장하였다.
2)김유신(金庾信)
삼국통일(三國統一)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으로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아버지는 소판(蘇判) ․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역임한 서현(舒玄)이고, 어머니는 숙흘종(肅訖宗:갈문왕 입종의 아들)의 딸 만명(萬明)이다. 본래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2대손으로,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구형왕이라고도 함), 조부는 신주도 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지낸 명장 무력(武力)이었다. 김유신은 신라 진평왕(眞平王) 17년(595)에 태어나, 진평왕(眞平王) 31년(609)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린 낭도(郎徒)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611년과 이듬해 중악(中嶽)과 인박산(咽薄山)에서 삼국통일을 기원(祈願)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國仙)이 되었다.
629년(진평왕 51) 8월 이찬(伊湌) 임영리(任永里) 등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할 때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적군의 역습을 받은 아군의 사기가 떨어져 싸움이 불리해지자 아버지 소판 서현에게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하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옴으로써 승리의 기틀을 잡아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642년(선덕여왕 11)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산) 군주(軍主)가 되었고, 644년 소판 벼슬에 올랐다. 같은 해 9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성을 쳐 이기고 이듬해 1월에 개선하였다.
그런데 왕을 알현하기도 전에 매리포성(買利浦城:居昌)이 백제군의 맹공을 받고 있다는 파발에 곧장 상주(上州:尙州) 장군이 되어 출전, 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647년(眞德女王 1) 1월 여왕을 폐하려고 난을 일으킨 화백회의(귀족회의) 수뇌인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군을 토벌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그 반란의 결과는 그 뒤 신라 정계의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보인다. 반란세력의 우두머리는 당시 귀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 비담(毗曇)이었다. 그들은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명활성(明活城)을 거점으로 월성(月城)의 왕족세력을 공격하였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죽는가 하면, 흉조라고 믿고 있던 유성(流星)의 추락이 월성 쪽에 있어, 왕실 측의 사기는 위축된 반면, 반란군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이때 새로 등극한 진덕여왕과 귀족들을 설득하는 한편, 종교적인 제전과 계략으로 왕실 쪽 군중의 사기를 북돋워 반란군과의 결전에서 승리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된 알천(閼川)도 전통적 신라의 귀족이었다. 반란의 진압에서 전통적인 귀족들의 힘도 컸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야계 출신으로 신라 중앙정부의 운명을 결정함에 큰 구실을 했고, 또 그로 인하여 그의 영향력도 커질 수 있었다.《삼국사기》에는 비담의 반란 후 진덕여왕 대에 세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전투들의 최고지휘관을 김유신이 맡았다.
10월 무산(茂山:무주) 등 3개성을 공격해 온 백제군을 보병 ․ 기병 1만으로써 크게 격파하였다. 이듬해 압량주 군주로서 전날 백제에게 빼앗긴 대량성(大梁城: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어서 악성(嶽城) 등 12개성을 빼앗았으며, 그 공으로 이찬 벼슬로 승진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이 되었다.
649년 8월에는 석토성(石吐城) 등 7개성을 공격해 온 백제의 장군 좌평(佐平) 은상(殷相)을 무찔렀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재상으로 있던 이찬 알천(閼川)과 의논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태종무열왕)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듬해 9월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충북 영동군의 비봉산성)을 공략하였으며, 이때 백제왕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백제를 멸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 1월 상대등에 올랐고, 7월 신라 정예군 5만과 소정방(蘇定方)이 이끈 당나라군 13만이 연합하여 사비성(泗城)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문무왕 1) 7월 나당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인 9월 옹산성(瓮山城:대전시 계족산성)에 있는 백제의 잔적(殘賊)을 토벌하고, 12월 당나라군의 군량미를 실어다 주었으나 당나라군의 철수로 고구려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663년 8월 백제의 부흥군(復興軍)을 두솔성(豆率城:주류성)에서 대파하였고, 665년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봉해졌다.
667년(문무왕 7) 왕을 따라 당나라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11월 환군하였다. 이듬해 9월 나당 연합군으로 평양을 칠 때 연합군 대총관이 되었으나 왕명으로 금성에 남아 국방을 도맡았다.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직위에 오른 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 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그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에 신라군의 총사령관이라 할 대총관(大摠管)이 되었다. 그러나 늙고 쇠약하여 병으로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왕경(王京)에 남아 왕까지 원정을 떠난 신라 국내의 통치를 담당하였다.
문무왕과의 생구관계(甥舅關係) 뿐만 아니라, 고구려 원정군의 수뇌인 김인문(金仁文)과 김흠순도 생질과 아우였던 만큼 그는 국가의 원로로서 고문과 지도적 구실을 하여 신라 진영의 단결과 전략수립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를 평정한 직후에는 다시 한 등급을 높인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 제수되고, 여러 가지 특전을 부여한 포상이 있었다. 그 뒤 자신이 직접 일선에서 정치나 군사적 일을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신라 지배층의 원로로서의 자문역할은 계속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멸망 후 본격화된 당나라와의 투쟁에서도 지도적인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673년(문무왕 1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금산원(金山原:경주시)에 장사지냈고,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고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3)김보(金普)
고려의 문신이며 공민왕의 수종공신(隨從功臣)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호는 죽강(竹岡)이다. 당시의 권신 김용(金鏞) 등과 더불어 권행(權幸)을 다투던 친원파 인물이다.
1351년(공민왕 즉위년) 공민왕이 고려왕으로 지명됨에 따라 왕을 호종하여 입국하였으며 그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고 의성(義城) 덕천창제조(德泉倉提調)를 겸하였다.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따랐던 수종공신들을 녹훈(錄勳)할 때 찬성사(贊成事) 조일신(趙日新) 등과 더불어 일등공신에 오르고 아울러 충근양절광보공신(忠勤亮節匡輔功臣)의 호를 하사 받았으며, 뒤에 금녕부원군(金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354년 찬성사에 임명되어 지밀직사사 전보문(全普門)과 더불어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원나라에 드나들었다. 공민왕의 비호를 받고 김용과 권세를 다투면서 인사행정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였다.
그러던 중 1355년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게 되자 김용은 복직을 봉쇄하기 위하여 거짓 왕명을 꾸며 백관들로 하여금 부모상에 3년간 벼슬을 쉬도록 하는 법을 시행하게 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왕이 3년상을 폐지, 다시 불러들여 첨의평리에 복관하고, 이어 중서문하시랑평장사판밀직(中書門下侍郎平章事判密直)에 제수하였다.
1356년에 반원정치(反元政治)가 결행됨에 따라 부원배(附元輩)의 거두였던 기철(奇轍) 등이 주륙 되면서 함께 체포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가라산(加羅山)으로 유배되었다.
1365년 신돈(辛旽)이 집권하자 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거쳐 좌시중(左侍中)이 되었다. 뒤에 신돈(辛旽)에게 국정을 위임함이 옳지 않다고 누차 왕에게 건의하였고, 신돈(辛旽)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4)김극일(金克一)
김극일(金克一)의 자는 용협(用協)이고 호는 모암(慕庵)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382년 (고려 우왕 8년)에 태어나고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문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등창에 피고름이 괴어 있을 때마다 입으로 빨아 등창을 낫게 하였다. 또 그의 아버지가 이질로 고생할 때 그는 아버지의 대변을 혀로 맛보아 그 증세를 살피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가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때도 부모의 뜻에 거스름이 없었고 항상 부모님의 입맛에 맡게 음식을 마련하여 부모님을 공경하였다고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전후 6년 동안 묘 옆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그의 부모님의 묘 옆에 있을 때에는 그의 효도에 감복하여 호랑이가 항상 그를 호위하여 주었다고 한다.
한편 그에게 서모(庶母)가 계시었는데 그는 그 서모를 모시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아버지가 계실 때 보다 더 극진히 하였다고 하며 재산과 토지를 좋은 것으로 골라 그의 서모가 낳은 이복동생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야은(冶隱) 길재(吉再)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리하여 자신의 선생(吉再)의 뜻을 받들어 벼슬을 멀리하고 시냇물이 흐르는 산골에 머물면서 성현들의 가르침으로 평생 동안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았다.
통덕랑(通德郎)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내고 후에 향리에서 아들 육형제의 교육은 물론 후학들의 계도에 힘써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1456년(세조 2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75세였다. 집의(執義)가 증직되고 생전의 출전지효를 칭송하고 후세의 귀감을 삼고저 향리유림과 제자들이 사시호를 절효(節孝)라 하였고 청도군 이서면 서원동에 있는 자계서원 (紫溪書際)에 봉안하고 향사하였다.
조선 20대왕인 경종(景宗)은 김해김씨를 가리켜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칭하시며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세 현인(賢人)을 가리켜 삼현(三賢)이라 하였다. 한 집안에서 사대간(四代間)에 삼현(三賢)이 났다는 일은 과거나 앞으로(古來)도 드문 일인고로 이로 인하여 삼현파(三賢派)로 정한 것이다.
5)허후(許詡)
허후(許詡)는 조선 세종(世宗) 8년(14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직제학(直提學)의 벼슬에 올랐다. 그 뒤 1436년 중시(重試;조선 4대 세종 때부터 10년에 한번씩 실시된 것으로 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당상관 정3품의 품계로 올려 주었음)에 급제하여 승지(承旨)의 벼슬을 거쳐 1442년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 이어 예조참판(禮曹參判),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1445년 대사헌(大司憲)ㆍ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내고 1448년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1451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다음 해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 세종실록(世宗실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3년 좌찬성이 되어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문종(文宗)의 유언을 받들어 어린 단종(端宗) 임금을 보살폈다.
그 해 수양대군(首陽大君;뒤에 세조가 됨)이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켜 황보인ㆍ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뒤 연회를 베풀게 되었는데 그 연회에 참석한 그는 음식을 먹을 때 고기를 먹지 않자 수양대군으로부터 황보인 등과 같은 사람으로 지목을 받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그 때 그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김종서 등이 무슨 큰 죄가 있어 그와 같이 그들을 죽이었으며 그의 자손까지 죽입니까? 조정의 원로들이 한 날에 다 죽었으니 나의 생명이 붙어 있는 것만도 만족하거늘 차마 이 고기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고 대답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수양대군이 크게 화를 내어 그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평소 그의 재주와 인품을 생각하여 그를 죽이지 않고 거제도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그 뒤 수양대군이 단종(端宗) 임금을 자리에서 내쫓고 자신이 임금이 되었다. 그런데 허후는 거제도로 귀양을 가서도 여러 차례 김종서 등의 무죄를 주장하니 세조 임금이 된 수양대군은 그를 목 졸라 죽이게 명령하였다.
그는 실록청(實錄廳)의 감수관(監修官)을 역임하였으나 세조를 반대하는 사람이라 하여 세종실록 권말부록의 편찬자 이름에서 빼어버렸다. 그가 죽은 뒤 영조(英祖) 때 그의 살아서 행한 행동이 죄가 아니라는 판결을 임금으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영조는 그에게 충간(忠簡)이라는 호를 주었다.
6)김수연(金壽延)
김수연은 호를 용강(龍岡)이라 하였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순하고 효도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가 살았던 마을을 효자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뒤에 그가 칠도병사(七道兵使)를 역임할 때 많은 공적을 세워 임금은 항상 그를 ?사직을 지키는 신하?라 칭찬 하였다고 한다. 그가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 단종(端宗)이 임금의 자리를 수양대군에게 빼앗기고 쫓겨났다는 소리를 듣고 북쪽 단종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하여 네 번 절을 한 뒤 집으로 돌아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 음식을 먹지 않은지 6일 만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 정부에서는 그에게 병조판서(兵曹判書)의 벼슬을 주었다.
7)김일손(金馹孫)
김일손의 자는 계운(季雲)이며 호를 탁영(擢纓)이라 하였다. 그는 세조 10년(1464)에 태어나 연산군 4년(1498)에 죽었다. 그는 김종직(金宗直)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함께 공부한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 등과 매우 친하였다.
1486년(成宗 17년) 8월에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로 장원급제 하였으며 그해 10월에 알성대과(謁聖大科)에 또한 장원급제 하였다.
시관(試官) 이었던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의 추천으로 홍문관(弘文館), 예문관(禮文官) 등의 관직을 거쳐 1488년(成宗 19년) 왕의 특혜로 호당(湖堂)에 들어가 수학하였는데, 호당은 대과에 급제한 젊은 문신 중에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왕의 특명으로 뽑아 학문을 닦고 인격을 도야하여 조정에 기용해서 장차 국사를 맡기기 위한 요원 양성기관으로 조선조 최고의 학당이다.
그 후 이조정랑(吏曹正郎)이 되었으며 1490년(成宗 21년)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다음해 28세 때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니 외교사신으로 두 차례나 다녀왔다. 그 때 명나라 황제가 하사(下賜)한 많은 서예품(書藝品)과 특히 소학집설(小學集說) 등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가져와 보급된 것으로 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한바 있다. 또한 명나라에 머물 때 명나라 명현(名賢)인 정유(程愈), 주전(周銓) 등과 교결 하였으며 후세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같은 분은 선생의 문집서문에 말하기를 문장은 양양대해 같고 중국의 문호(文豪) 한창여(韓昌黎)에 비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약관 20여세 때 이미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있었다.
성종 때 춘추관(春秋館)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도 관찰사 이극돈(李 克墩)의 비행을 사초에 직필하고 그 뒤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고하여 이극돈의 원한을 샀고 실로 권신들의 부정부패를 직필하였다.
그리고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었다. 이극돈은 자기의 비행이 사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고 빼주기를 비밀히 간청하였으나 ?내 목숨이 다해도 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앞서 유자광(柳子光)이 함양(咸陽) 학사루(學士樓)에 놀러가서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걸어 두었는데 그 후 김종직이 함양군수(咸陽郡守)가 되어 이것을 보고 소인배 (小人輩)의 글이라 하여 떼어 불살아 버렸다.
성종(成宗)이 승하하고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여 1498년(燕山君 4년) 성종실록(成宗實錄)이 편찬될 때 훈구파의 이극돈이 사국당상관(史局堂上官)이 되어 사초(史草)를 정리하다 김일손이 쓴 사초 속에 세조의 찬위(築位)를 풍자(諷刺)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자신의 비행은 물론 궁중의 불미스러운 일들을 비롯한 훈구파의 비행들에 대한 기록이 있음을 보았다.
원래 사초는 다른 사람들은 물론 왕도 볼 수 없는 것인데 이극돈이 사원(私怨)을 풀기 위한 것과 훈구파 권신들의 비행이 후세 영원히 남게 되자 이극돈이 같은 훈구파의 유자광 및 당시의 중신들인 윤필상(尹弼商), 노사신(盧思愼), 한치형(韓致馨), 신수근(愼守勤) 등에 공개하여 평소 학문과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왜곡 충동시켜 드디어 1498년(燕山君 4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士禍)인 비참한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이로써 일어났다.
무오사화(戊午史禍 : 사화(士禍)인데 사초(史草)에 의해 비롯되었다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쓴다)에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케 하고 김일손은 향년 35세로 능지처참(陵지處斬)을 당하게 되었다. 김일손이 처형을 당하던 날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지며 폭풍우가 일어나서 나무가 넘어지고 향리인 운계천 물은 3일이나 벌겋게 흘러내려 세인들은 김일손의 충절과 기개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였다 한다.
그 당시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率穆), 허반(許盤) 등 여러 사람들은 처형되었으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박한주(朴漢柱), 이 주(李 冑) 등을 위시하여 많은 사류가 유배되었다. 이를 계기로 새로 등장한 신진사림(新進士林)인 영남학파(嶺南學派)는 집권층인 훈구파에 의해 거세되었다.
김일손은 또한 1494년(成宗 25년)에 단종의 후사(後嗣)와 소능(昭陵:성종 왕후)의 복위 등 전후 3회나 상소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1496년(연산군 2년)에 충청도사(忠淸都事)로 있을 때 왕의 난정과 간신들의 부정부패 등을 간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다. 이와 같이 문장과 충절의 선비이며 정서와 풍류도 즐겼으며 거문고는 신금(神琴)으로 이름이 높았다. 연산군의 등극 때 하야한 후 정여창과 더불어 탐승유람(探勝遊覽)과 악양(岳陽)의 뱃노리 등으로 서정과 낭만을 찾기도 하였다.
1506년(연산군 12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 후 신원(伸寃)되어 복작하고 도승지(都承旨)와 이조판서 (吏曹判書)를 추증 받고 1830년(순조 30년)에 문민(文愍)의 시호를 내렸으며 출생지인 청도 서원동에 자계서원(紫溪書院)의 사액을 내리고 도승지 홍처량(都承旨 洪處亮)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또한 김일손은 목천(木川)의 도통서원(道東書院), 남원(南原)의 사동서원(社洞書院), 함양(咸陽)의 청계서원(淸溪書院)등에서도 봉안하고 있다.
8)김대유(金大有)
김대유는 성종(成宗), 명종(明宗)대의 문신이고 명유(名儒)로 자는 천우(千佑)이고 호는 삼족당(三足堂)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498년(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자 숙부 탁영(濯縱) 김 일손(金馹孫)은 처형되고 김대유는 아버지인 김준손(金駿孫)과 같이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년)에 중종반정으로 은사를 받아 적소에서 풀려 나왔다. 1507년(중종 2년)에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진사(進士)에 올랐으나 고향에 돌아와 은거 중 중종(中宗)이 전국에서 행실이 올바르고 참신한 인재를 구하였는데 향리에서 제일로 밀어서 천거되어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을 지내다가 1519년(중종 14년)에 현량과(賢良科)의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成均館典籍)에 오르고 호조좌랑(戶舊佐郎)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고 이어 정언(正言)이 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칠원현감(漆原縣監)이 되어 석 달 만에 선정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신명(神明)처럼 여기였다 한다.
이 해에 기묘사화(己卵士禍)가 일어나 현량과(賢良科)가 폐지되고 급제한 사람들이 발표를 취소하자 직을 사임하고 청도 운문산 하에 은거하여 유연자적 벗들과 학을 논하고 수렵을 즐겼으나 잡은 것은 모두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다. 1520년(중종 15년)에 벗 소요당(適遙堂) 박하담(朴河淡)과 더불어 사창(社倉)인 동창(東倉)을 창설하여 휼민사업을 이끌었다. 또한 자호를 삼족당(三足堂)이라 하였는데 그 뜻은 계산(溪山)이 족(足)하고 풍월(風月)이 족(足)하며 음아(吟我:시를 소리 높이 읊음)에 족(足)이라 하여 삼족(三足)이라 하였다 한다.
1545년(仁宗 1년) 인종(仁宗)의 유명(遺命)으로 복관된 소식을 듣고 상경 도중에 병이 나서 고향에 뒤돌아 와서 다시 은거하며 박하담(朴河淡)과 같이 객관(客館)을 중창하는 등 고을을 위한 일에 앞장서는 한편 전국의 명유(名儒)들과 교우하며 후학들의 계도에 진력하다 1552년(明宗 7년) 2월에 졸하니 향년 74이었다.
현종조(顯宗朝)에 왕명으로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증직하고 자계서원(紫溪書院)과 선암서원(仙巖書院)에 제향하였다. 저서에는 탁영년보 (濯纓年譜)가 있다.
9)김경서(金景瑞)
김경서는 처음 이름을 응서(應瑞)라 하였고, 자는 성보(聖甫)라 하였다. 명종(明宗) 19년(1564) 관서(關西)의 용강현(龍岡縣)에서 태어나 인조(仁祖) 2년(1624)에 죽었다. 무과에 급제한 뒤 1588년 감찰(監察)이 되었으나 집안이 워낙 가난하고 천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다시 벼슬에 나아가게 되어 평양성을 방위하기 위한 싸움에서 그는 수란장(守란將)이 되어 대동강을 건너는 왜적을 막았다. 이 공으로 평안도 방어사가 되었다. 다음해 7천 7백의 군사를 받아 이여송(李如松)의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고 1594년 경상도 방어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 해 남한일대에 도적 때가 들끓자 도원수(道元帥) 권율장군의 명령을 받아 그는 도적 떼를 소탕하였다. 이 공으로 1595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되었다.
이 때 그는 자기의 군관 이홍발(李弘發)을 뽑아 부산에 있는 왜군초소에 잠입시켜 적의 상황을 정찰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적의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매수하여 왜적들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런데 1597년 도원수 권율장군으로부터 의령(宜寧)의 남산성(南山城)의 수비 명령을 받고 이에 따르지 않았다는 죄로 벼슬이 강등되었다.
1603년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그는 이 때 군사를 학대하는 등 군사들의 훈공을 장부에 기록할 때 많은 부정행위를 한 것이 드러나 벼슬에서 쫒겨 났다. 그러나 1604년 그가 전에 세웠던 공로를 다시 인정받아 포도대장 겸 도정(都正)의 벼슬에 올랐다. 그 뒤 1609년 정주목사(定州牧使)가 되었으며 곧 만포진 첨절제사(滿浦鎭 僉節制使)로 나아갔다. 1614년에는 북로(北路) 방어사가 되었으며 다음 해 길주목사(吉州牧使)를 거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와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가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을 때 건주위(建州衛)의 후금(後金)을 치기 위하여 중국 명나라가 우리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게 되었는데 그는 우리나라 부원수가 되어 원수(元帥) 강홍립과 함께 원병을 이끌고 명나라로 갔다. 이듬 해 명나라 심하(深河) 지방에서 그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부차(富車)에서 패배하였다. 그런데 원수 강홍립이 우리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 군대에 항복하므로 그는 금나라 포로가 되었다. 그는 포로가 되어 있으면서 금나라의 군사기밀을 몰래 기록하여 우리나라로 보내려 하였으나 원수 강홍립이 이를 금나라에 고발하여 그는 거기서 사형에 처해졌다. 그의 고향에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임금은 비각을 세우게 하였으며 뒤에 그에게 우의정의 벼슬을 추서하고 양의(襄毅)라는 호를 주었었다.
10)김완(金完)
김완의 자는 자구(子具)이다. 그는 선조(宣祖) 10년(1577)에 태어나 인조(仁祖) 13년(1635)에 죽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영암(灵巖)에서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용감하기가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없을 정도였으며 활솜씨가 대단하였다고 한다. 그의 이와 같은 재주로 이름이 알려져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李福男) 장군의 부하가 되었으며 여기서 무과시험(武科試驗)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그 뒤 그는 경상도 방어사의 부하로 있다가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을 따라 남원(南原)에 갔었는데 그 때 자기의 아버지를 죄 없이 고발하여 죽게 한 한덕수(韓德脩)가 병력을 점검하고 있으므로 그를 찔러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에 모포만호(毛浦萬戶)와 남원판관(南原判官)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울로 올라가 한덕수를 찾아 그에게 활을 쏘았으나 죽이지를 못하고 체포되어 수년간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1615년 그는 다시 관무재시(觀武才試;임금이 직접 군사의 열병을 끝마친 뒤 당상관으로부터 그 아래의 군관 및 한량들에게 무예의 재능을 시험하는 무과시험의 하나)에 급제하여 고산진첨절제사(高山鎭僉節制使)를 거쳐 창성방어사의 벼슬에 이르렀다. 그 때 마침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 난을 평정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그는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으로 학성군(鶴城君)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그 뒤 훈련원 도정ㆍ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그가 죽은 뒤 임금은 그에게 병조판서의 벼슬을 추서하고 양무(襄武)라는 호를 주었다.
11)김흥복(金興福)
김홍복의 자는 자회(子懷)이며 호를 동원(東園)이라 하였다. 그는 인조(仁祖) 27년(1686)에 태어나 숙종(肅宗) 24년(1698)에 죽었다. 1682년 춘당대문과(春堂臺文科;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창경궁(昌慶宮) 안에 있는 춘당대에서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로 행하던 시험으로 선조 때부터 실시하였다.)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ㆍ예문관(禮文館)의 벼슬에 올랐다.
1686년 봉교(奉敎)가 되어 중시에 병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그는 문장과 예술에 뛰어났다. 1688년 고부사(告訃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갔다 왔다.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예조참의ㆍ여주목사(驪州牧使)ㆍ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항상 그는 국가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으며 옳고 그름을 가릴 때는 엄격하고 올바르게 곧바로 이야기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숙종(肅宗) 임금의 왕비였던 민씨(閔氏)가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자 오두인(吳斗寅) 등과 함께 부당함을 말하다 그들과 함께 벼슬에서 쫓겨났다. 그는 당시의 정계(政界)가 당쟁이 날로 끊이지 않고 계속되자 모든 정치와 벼슬의 꿈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유학을 후진들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12)허목(許穆)
허목은 선조 28년(1595)에 태어나 숙종 8년(1682)에 죽었다. 그의 자는 문부(文父) 또는 화보(和甫)라 하고 호를 미수(眉叟)ㆍ대령노인(臺嶺老人)이라 하였다.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는 그의 나이 50여세가 될 때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중국의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의 사상을 연구하다가 뒤 늦게 유교의 경서(經書)를 연구하게 되어 특히 그의 예학(禮學)은 일가를 이룰 정도로 유명하였다. 1650년 그는 참봉벼슬에 추천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57년 처음으로 지평이 되어 벼슬길에 오르게 되어 다음해 장령(掌令)이 되었다.
1660년 그는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당시 집권층인 서인(西人)의 송시열(宋時烈) 등이 채택한 기년설(朞年說:만 1년 복을 입어야 한다는 설)에 반대하고 3년설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당시 임금 현종이 송시열 등의 기년설을 재확인함으로써 재집권을 노리던 남인(南人)들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남인들이 숙청될 때 그는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쫓겨났다가 2년 뒤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74년 제2차 복상문제로 예송이 일어나자 그는 서인의 대공설(大功說:만 9개월 동안 복을 입어야 한다는 설)에 반대하고 남인이 주장하는 기년설에 찬동하였다. 이에 당시 숙종이 남인들이 주장하는 기년설에 따르게 되자 다시 남인에 의해 집권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대사헌(大司憲)에 특진되고 그 뒤 이조참판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그런데 그 때 장기(포항아래)에 귀양가 있는 송시열에 대한 처벌 문제가 일어나자 그는 영의정 허적(許積)과 의견이 맞서게 되어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남인은 허적을 따르는 송시열의 처벌에 온건론을 펴는 탁남(濯南)과 대립 그는 청남(淸南)의 최고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뒤 1679년 그는 탁남의 우두머리 허적을 탄핵할 것을 주장하다가 벼슬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많은 저술활동과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는 독특한 도해법(圖解法)을 해설한《심학도(心學圖)》와《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寓傳心法圖)》를 지어 후진을 교육하였다.
그는 그의 유교의 성리학의 주요문제인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는 기에서 행하므로 이와 기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글씨에 능하였는데 특히 그의 전서(篆書)는 동방제일인자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그림과 문장에도 대단한 솜씨가 있었다고 한다.
사상적으로 이황(李滉) ․ 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李瀷)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사서(四書)나 주희(朱熹)의 저술보다는 시 ․ 서 ․ 역 ․ 춘추 ․ 예의 오경(五經) 속에 담겨 있는 원시 유학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중국 진한(秦漢) 이전의 문물에 대한 탐구는 문자에도 적용되어 특히 전서(篆書)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다. 그러한 사상은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고 당시의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활로의 개척을 의미하였다. 그의 예설은 정치적으로 왕권강화와 벌열 세력 억제를 통하여 왕조 질서를 확립하고 일반 사대부의 기회 균등을 찾으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서인들이 왕실에 대해서 유교적 예를 보편적으로 적용하여 상대적으로 집권 사대부의 권위를 높이려는 움직임에 대립되었다. 또한 막강한 권위를 지닌 북벌론에 대해서도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허구임을 비판하였다. 한편 당시의 국정에 많은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호포제(戶布制)를 반대하고 중세 신분제의 수호에 나타나듯 보수적인 입장에 선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저서에 편집한 문집《기언(記言)》역사서인 《동사(東史)》를 비롯하여 예서(禮書)인《경례유찬(經禮類纂)》《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정체전중설(正體傳重說)》삼척읍지인《척주지(陟州誌)》 등이 있다.
그가 죽은 뒤 임금으로부터 문정(文正)이라는 호를 받았다. 마전(麻田)에 있는 미강서원(湄江書院)ㆍ나주에 있는 미산서원(眉山書院)ㆍ창원에 있는 회원서원(檜原書院)등에서 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2. 관련유적
1)동산서원비(東山書院碑)
東山書院碑
駕洛紀元一千九百二十 七年戊申三月
後孫金鉦烈謹記 壺山宋成鏞篆
紆州黃祥奎書 本院創建都有司金亨在
2)동산서원중수공적비(東山書院重修功績碑)
東山書院重修功績碑文
무릇 創建이 있으면 반드시 重修가 있어야 한다. 만일 創建만 하고 重修가 따르지 않으면 永久히 保存할 수가 없으므로 創建의 功이나 重修의 功을 다같이 稱美하는 것이 古今의 通例이다. 이제 重修에 대한 功績碑文을 씀에 즈음하여 本院 創建의 由來를 대강 記述하면 設立當時에 巨額을 獻誠한 特誠人은 勿論이요 至於 二三百원이라도 院誌에 상기되어 있다. 이것은 崇祖육종의 精神이 物力의 多少에 있는 것이 아니요 衆心으로 合하는데서 東山書院이 이룩된 것을 明示하여 두는 것이다. 우리나라 書院은 李朝中宗時에 始作되었으니 忠臣烈士儒賢의 偉大한 事蹟에 歷史에 빛나는 名人들을 奉安하고 每年 春秋二回로 羊과 服의 全首牲幣와 遷豆精의 祭物로 官界의 要人과 士林代表가 會同하여 享祀를 올리고 崇慕하는 곳이다. 本院은 古今 書院의 前例에 依하여 盛大히 擧行하였으므로 建物의 施設은 다른 祠宇에 손색이 없을 지라도 儀式節次는 擧道的으로 社會人士들의 稱頌을 받았으나 維持策을 마련하지 못하고 문득 二十餘 星霜을 지났다. 그동안 凡 四棟으로 設立된 蓋瓦가 전부 삼우하고 墻坍이 모두 무너져 가는 현상은 後孫된 道理로써 悚懼함을 禁치 못했다. 이 때 會長을 中心으로 宗親會員들이 奮然蹶起하여 着工한지 凡 六個月만에(自 一九八三年十月二十一日 至八四年四月五日) 重修의 役이 告成하니 本院의 面貌가 煥然 一新하였다.
아 ! 우리는 모두 本院에 奉安한 同祖의 至親이니 원컨대 相互愛敬하고 相互親睦하여 一致團結 할지어다. 繼繼承承한 後昆들은 今日 重修한 功績을 世世로이 이어받으면 本院의 持續이 天地와 같이 永存 하리로다. 重修之錢贊助와 重修之役에 參與한 特誠會員이 거듭 讚美하여 마지 않는 바이다.
光復後四十一年 乙丑 三月 立夏節
創建都有司駕洛 金亨在 지음
陽川 許永哉 씀
重修時獻誠後孫芳名錄
駕洛理益地區宗親會長 金吉善
推進委員長 金鍾佑
3)김종두위선공적비(金琮斗爲先功績碑)
金琮斗爲先功績碑
全國各地에 殿閣과 享祠를 創建하여 忠臣烈士와 儒賢을 奉安하고 永久히 保存하는 것은 우리 民族이 걸어온 오랜 苦難의 歷程속에 民族存亡의 危機에 처하여 果敢하게 國難을 克服한 救國의 英雄을 비롯하여 草野에 묻혀 民族文化의 發展暢達에 빛나는 業績과 피어린 자국을 남긴 聖賢들의 喜悲哀歡의 발자취 속에서 오늘에 사는 겨레의 前程을 비춰줄 督智를 찿을 수 있고 不屈의 意志와 不境 의 氣槪에서 우리는 힘찬 來日의 前進을 鼓舞하는 無言의 叱咤를 듣기 위한 것이리라 따라서 東山書院은 三國과 民族을 統一한 元勳 興武王 諱庾信을 主壁으로 모시고 吾宗의 五忠五賢을 配享하여 忠誠貫日한 先祖의 功績과 崇高한 遺志를 길이 빛내고 祖上을 崇拜하고 宗族을 敬愛하는 精神을 子孫들에게 繼承하려고 薦志宗親과 持誠士林諸賢의 獻誠으로 創建되여 享祀를 모셔오는 바 宗材 마련이 않되어 그 때 마다 都有司와 駕洛會員들의 協贊의 功德으로 補修 維持해 왔다.
本碑의 主人公 金琮斗 宗親은 故鄕을 裡理에 두고 日本國 北海道 札幌市에 居住하는 僑胞로 全州高等學校를 卒業하고 渡日 慶應大學 經濟學部를 修了後 事業을 經營中 敗戰한 日本社會에서 버림받고 彷徨하는 同胞를 保護할 目的으로 創設한 在日建國促進靑年中央總本部執行委員 및 地方本部委員長을 始發로 神奈州縣 韓日親善協會長 大韓民國國會 옵써버(三期八年) 등을 歷任하고 在日大韓體育會中央副會長 在日駕洛宗親會長 在日韓國人商工會常任理事職 등을 맡아 他國에서 惡戰苦鬪하면서도 愛鄕心의 發露로 巨額을 드려 全州動物園에 곰 十五마리를 寄贈하는 등 全北發展에 物心兩面으로 表誠한 功績이 커 一九八四年 全羅北道民의章 愛鄕章을 받은 유지로서 宗事와 爲先事業에 깊은 關心을 가지고 宗親會를 방문 會長으로부터 그동안 書院의 創建 및 管理의 功勞談과 장차 維持管理가 難題라는 說明에 感銘하여 院宇重修와 境內 造景 등에 巨金을 表誠함으로서 裡益地區 宗親등에 崇祖睦宗의 氣風을 振作케 하는 貧者百澄의 힘이 되어 이를 應讚하는 碑를 세워 永久히 記念하고자 하니 始礎一根이 數百萬衼인 宗親들이어 ! 有財者는 財補로 有智者는 智補로 有勞者는 勞補로 하는 精誠으로 爲先事業에 積極 參與하여 本院의 維持發展에 龜鑑이 되어 子孫萬代에 빛을 내기 바라는 바이다.
駕洛紀元一九四四年 乙丑 十月
駕洛裡益地區宗親會 財務 金容周 지음 江岩 尹起連 씀
駕洛裡益地區宗親會長 金吉善 外 會員一同
4)김성철기공비(金聲喆紀功碑)
宗親會長金聲喆議員紀功碑
裡理의 東山書院은 三國을 統一한 千古 聖雄이신 興武王을 主享으로 하고 歷史에 빛나는 金許兩性의 五賢五忠을 東西로 從享한 곳인바 天然形勝으로 山水가 交合하고 竹林이 鬱蒼한 가운데 新建된 院宇의 全貌는 그 規模가 南州 一帶 어느 書院에 遜色이 없다는 것을 不肖가 奉安大祭에 參禮하고 깊이 느낀바 있었다. 此事를 責任한 都有司 金亨在氏에게 그 施設의 顚末을 들으면 裡益地區 宗中은 元來에 一分의 資金이 없는 實情인데 國會議員 金聲喆氏로부터 六拾萬圓의 喜捨金을 基本삼아 爲先大事가 이루어졌으나 그의 經濟的 餘裕가 豊富하지 못함에도 不拘하고 如斯한 특성을 베풀었음에 더욱이 功德을 잊을 수 없는 感銘이 깊으며 또 그는 無言의 實踐者이며 功譽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 爲先 親族의 道理가 거의 땅에 떨어지고 私利好名에 汲汲한 이 때에 金議員은 吾宗의 烽火이며 國家의 棟梁이다. 이 特誠에 感歎한 筆者의 마음 보다 擧族的으로 讚揚하는 意를 代表하여 碑를 세워 그 功蹟을 永遠히 紀念코저 하는 바이오니 數百萬 宗親은 이 本을 받아 相互協力하여 書院의 維持發展에 寄與가 있게 하고 子孫萬代 빛이나게 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大駕洛紀元一千九百二十六年 丁未 九月
全羅北道敎育監 金容煥 撰
紆州 黃祥奎 書
제2절 월담산과 구 농촌진흥원
금은 무서운 곳으로 변한지 오래되었는데도 어이하여 아직까지도 이곳을 새롭게 단장하여 시민들을 맞게 해줄 새로운 임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안타까운 일이다.
유재영 교수가 쓴《이리관내의 지명》에는 월담산은 한때 석재가 채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911년에 대교농장의 대표인 지길원신 등이 조직한 이리번영조합에서 조합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당시의 동산리 월담산을 사들여 석재를 채취하였다고 하므로 원래의 월담산은 지금보다는 높이가 더 높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해오는 이리 팔경 중에는 월담완월(月潭玩月)이 있으니 바로 월담산 아래 연못에 비치는 달이 마치 장난하듯 출렁이는 모습을 그린 말이다. 아주 옛날에는 특히 달밤에 경치가 좋아 낚시질하는 사람들이나 달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던 곳이라 한다. 오랜 세월 이곳에 농촌진흥원이 들어서서 영화를 누렸건만 이제 한때의 영화를 모두 잊고 저 처럼 폐허된 건물과 우거진 잡초만 무성하며 어두운 나무숲에 둘러싸여 사람들이 접근을 꺼리는 무서운 곳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제3절 원불교 동산수도원
원불교를 창립한 교조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은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우주만물과 인간만사에 의문을 품고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산신을 만나려 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도사를 찾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여세가 되면서부터 입정상태에 들어가 있다가 그의 나이 26세 되던 1916년 4월 28일 대각(大覺)을 이루에 된다. 원불교에서는 이 날을 개교(開敎)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소태산은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 슬로건을 내걸고 9인의 제자를 뽑아 교단을 발전시켜 나갔다. 1917년에 저축조합을 만들고, 금주, 금연, 소비절약 공동출역 시미운동 등을 통하여 상당한 기금을 만들었다. 1920년에는 부안군 변산에 들어가 5년동안 교리초안과 사방의 인연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1924년 소태산은 본부를 익산군 북일면으로 옮겨 《불법연구회》라는 간판을 걸고 본격적인 종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모여든 제자들과 함께 낮에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밤에는 종교이념에 바탕하여 도덕과 윤리로서 정신훈련을 시켜나갔다. 그의 이같은 개척정신과 훈련방식은 새 시대의 종교, 새 종교인상, 새 지도자상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 1943년에는 그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원불교의 기본경전인 《불교정전》을 완성하고 6월 1일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소태산의 뒤를 이어 제2대 종법사가 된 정산(1900-1962)은 1945년 해방이 되자 그간 사용해오던 《불법연구회》라는 임시교명을 《원불교》라고 바꾸고 신생조국을 위해 여러 가지 적극작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1946년에는 교육입국을 전제로 유일학림(唯一學林)을 설립하여 인재양성을 시작하였는데 이 교육기관이 오늘의 원광대학을 비롯한 수많은 산하 교육기관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해방이 되어 원불교가 교명을 확정하고 새롭게 발전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원불교 동산수도원이다.
원불교 동산수도원은 익산시 동산동의 환산(環山, 일명 봉술뫼, 기때백이산)에 소재하고 있다.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1924년 북일면에 원불교 총부가 자리를 잡고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나 일제 말까지 이리읍에는 교당이 없었다고 한다. 1939년 봄 이인의화씨가 당시 돈으로 3,000원을 희사하여 주현동(曙町)에 교당을 마련하고 법회를 보다가, 1945년 해방이 되고 이리부 고문인 송혜환 등의 노력으로 중앙동의 일인 사찰 동본원사(현 신사임당 예식장 자리)를 불하받을 작정으로 이리지부 간판까지 걸었으나 당시 이리부윤(시장)이던 김병수(삼산병원장이며 기독교 장로)의 실력 행사로 그 자리에 제일교회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 대신 3,000여 평의 동산동 일제신사를 불하받아 교당을 그곳으로 옮겼다. 그래서 주현동 교당을 매각한 돈으로 법당 개축공사를 마치고 이사하였던바, 그해 10월 미군 주둔으로 인해 또 물러나 신사 근방의 집을 마련하여 법회를 보았다. 그러다가 1949년 6월에 미군이 완전 철수함에 따라 당시 미군정장관 딘 소장의 결재하에 1947년 5월에 이리교당이 서게 되었다. 그 뒤 1949년 8월에는 상주선원(강당)을 설립하고, 동란 발발 후 이듬해 1951년 10월에는 여선방을 설립하였다. 1953년 1대 성업봉찬기념을 기하여 재가출가의 훈련 도량으로 고등선원인 동산선원이 발족되었고, 이곳에서 교단 기관지 《원광》이 발간되기도 하였다. 이리지부는 1961년 갈산동 205번지에 대지 400평을 매입하고 5월 20일 봉불식을 거행하고 동산선원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처럼 살펴본 바와 같이 원불교 동산수도원은 북일면 총부다음으로 본격적으로 이리지부로 탄생한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오늘날 동산정사는 원불교 동산수도원이라고 부른다. 동산동의 중심에 서있는 환산의 대부분을 차지한 수 천 평의 대지에 본관을 비롯한 3동의 수도원 건물과 아름답게 꾸며진 드넓은 정원이 매우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지금까지도 교무나 정녀님들의 수도도량으로 운영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몸이 불편하신 원로신자들이 계시는 곳으로 보인다. 원불교 역사에 소중한 한 페이지를 담당하는 곳이지만 원불교의 눈부신 발전과 확대에 따른 변화로 보여 진다.
정문의 길 건너편에는 밖에서는 신비스럽게 여겨질 정도로 우거진 숲에 둘러싸여 있는 원불교 이리수양원이 있다. 아름답게 우거진 숲속에 2층 양옥으로 지어진 수양원 건물은 관리되지 않는 모습으로 놓여져 있다.
[원불교 동산수도원] [원불교 이리수양원]
제4절 단군성묘
이들 유림들은 46년 1월 15일 중광절(重光節)에 서울로 올라가 독립운동가이자 후일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단군 영정을 모셔왔으며 동년 10월 3일 개천절에 봉성회(奉成會)를 결성하고, 지방 관민 유지 일동의 협력으로 1947년 3월 15일 일제의 신사를 허문자리에 단군성묘 건물을 기공하여 1949년 상량, 1951년 10월 3일에 낙성됨과 동시에 영정을 봉안하였다.
단군은 한민족의 시조(始祖)로 받드는 고조선(古朝鮮)의 첫 임금이다. 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 [천진전] 의 아들로, BㆍC 2333년 아사달(阿斯達: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하였다. 한국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기록으로는 중국의『위서(魏書)』를 인용한『삼국유사(三國遺事)』「기이편(紀異篇)」에 실려 있는 자료가 있을 뿐, 정사(正史)인『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대조를 이룬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 이승휴(李承休)의『제왕운기(帝王韻記)』, 권람(權擥)의『응제시주(應製詩註)』에도『삼국유사』와 비슷한 기술이 보이나, 단군에 관한 문제를 다룰 때에 우선『삼국유사』의 기록을 사료(史料)로서 인용하고, 여기에 더 많은 신빙성을 둔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므로, 아버지가 환웅의 뜻을 헤아려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의 신단수(神壇樹)에 내려와 신시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 ․ 우사(雨師) ․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 ․명(命) ․ 병(病) ․ 형(刑) ․ 선(善) ․ 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렸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 살면서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렀다. 곰과 범은 이것을 먹고, 곰은 3ㆍ7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고 범은 못 참아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어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배게 해달라고 축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하여 혼인하여서 아이를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왕검이 당고(唐高: 중국의 가장 오랜 역사 고전인 상서 첫머리에 올라 있는 제왕) 즉위 50년인 경인(庚寅: 50년은 정사(丁巳)이니 틀린 듯하다)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으며, 이어서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로 옮긴 뒤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하였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주(周)나라 호왕(虎王)이 즉위한 기묘년(己卯年)에 기자(箕子)를 조선의 임금으로 봉한 후 장당경(藏唐京: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이 개국신화는 이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라 많은 해석이 나왔다.
한 예로서 이 신화는 고조선의 한 부족(部族)신화이던 것이, 훗날 고려시대에 대몽항쟁(對蒙抗爭) 등 민족의 단합이 요구되는 시대를 맞아서 민족의 시조로 받들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단군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삼국유사』의 편찬시기가 앞에서 언급한 시대와 거의 같다는 점도 유의할 만하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평양에 사당을 짓고, 단군과 고구려의 동명왕(東明王)을 함께 모시기도 하였다. 한편, 민족의 형성과정과 관련된 단군신화에서 중심이 되는 곰 숭배사상이 한국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등지에 널리 퍼져 있던 고(古)아시아족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조상신이라는 점에서, 단군신화의 시대와 성격을 한국의 신석기시대 주민과 관련시키는 견해도 있다.
물론 이 신화를 청동기시대의 산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지배자의 출현을 빛내는 신화로 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단군신화 시대를 무문토기문화(無文土器文化)와 관련시키면서 환웅족(桓雄族)의 등장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는 견해도 있다. 이와 반대로, 역사과학의 입장에서 신화라는 것은 고대인의 한 관념형태이므로 단군신화를 곧 역사적 사실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속에 담겨 있는 역사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으므로 어떤 맥락으로든 간에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그러나 단군의 신화가 그대로 왕조사(王朝史)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도 무리이다. 아무튼 단군신화는 한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의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적(求心體的) 역할을 해왔다.
익산지역 유림들이 이시영 선생을 만나 민족정기를 되찾기 위한 취지를 설명 드리자 만주에서 고된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고이 간직하고 있던 단군영정을 선뜻 내주셨다고 하며 이 영정은 가로 120㎝, 세로 60㎝ 크기의 채색화인데 191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작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단군 영정은 전면 3칸, 측면 2칸짜리의 천진전(天眞殿)에 봉안돼 있으며 봉성회 원들은 해마다 단군이 이 땅에서 뜻을 펴고 하늘에 오른 음력 3월 15일에 어천대제(御天大祭)를, 양력 10월 3일에는 개천대제(開天大祭)를 지내고 있다.
익산지역 유림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군봉성회(회장 홍석표)는 기관장과 봉성회원 및 시민 300여명이 모여 단군성묘에서 개천대제를 봉행한다.
기록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의 화가 솔거가 꿈에서 본 단군을 그린 것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솔거는 1천여 장을 그렸는데 그 중의 한 장이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봉안돼 있었으나 고려 이후로는 전해 오지 않는다. 후세의 단군 존영은 모두 솔거의 그림을 모방해 다시 그린 것인데 관련 학자들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점 변형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국내에 봉안된 대표적 단군 존영은 서울 홍은동의 단군대종교의 총본사 시정당(施政堂), 우리 익산 단군성묘의 천진전(天眞殿), 서울 사직공원에 현정회가 세운 단군성전 등의 것이 꼽힌다.
최근 중국당국이 우리의 고대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왜곡하려는 동북공정사업에 온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는 시점이기에 어느 때보다도 단군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높은 가운데 단군성묘에서 개천절 행사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천진전 단군영정]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12년에 ?기자와 단군에게 제사드릴 것을 의논하다?라고 하였으며 ?하윤(河崙)이 또한 일찍이 건의하여 조선의 단군(檀君)을 제사하도록 청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세종 7년에는 ?단군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하여 제사하게 하다?라는 기록에서 조선 초부터 우리 민족의 시조로 단군묘를 짓고 제사를 지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종교상의 문제로 인해서인지 마치 단군을 신화적 존재로만 여기면서 국가적 행사로 치르는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1994년 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단군묘가 있었다는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에 대대적인 단군릉 개건사업을 시작하여 마치 중국 시안의 진시황릉처럼 거대한 단군릉(한 변의 길이 50m, 높이 22m)을 축조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과 그 부인의 무덤이라 하여 실존인물임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제5절 관음사(觀音寺)
신성부락 앞을 흐르는 대용수간선을 건너면 자그마한 산이 하나 있어 학산(鶴山)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부치댕이(佛堂)는 수도산 남쪽 신성리의 석불이 있는 절터이다. 일명 미륵댕이(彌勒堂)라고도 하는데 바로 이 곳을 일컬어 부르는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관음사의 두 비석]
이전부터 이곳에는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도 이곳에 남아있는 관음보살불(觀音菩薩佛)과 관찰사윤영신영세불망비(觀察使尹榮信永世不忘碑), 사인박윤길적선비(士人朴潤吉積善碑)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1910년대의 어느 날 화재로 인하여 사찰이 소실되고 관음보살불과 두 비석만이 남게 되자 1914년 초대 익산면장인 이인휘 부자가 이를 점유하였다 한다.
몇 년 뒤쯤 어느 보살에 의하여 초막으로 근근이 맥을 이어오다가 보살모자와 불자들의 합심으로 1933년 10월 21일에 지금의 사찰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보살이 바로 뒤에 완주 봉서사 진월스님에게서 계를 받고 온 손자인 정명규 스님의 할머니인 신씨이다. 부처당이라고 불리던 이곳에 법당을 조성한 것이며 정명규 스님에 의해 대한불교 화엄종에 속하는 절로 명맥을 유지하여 온 것이다.
1994년 10월 신씨의 며느리인 이금순 보살이 학의 입 부분을 출입편의를 위해 훼손하였다가 어려움을 당하던 차에 장남 정명규 내외가 오토바이사고로 입원치료하게 되자 그 충격으로 사망하였다. 이에 정명규의 아들인 정진수는 더 이상 이곳에 눌러 살 수 없다 하여 경기도 하남시로 이주하면서 1995년 지금의 주지 김정수 스님이 인수하여 1998년 건물을 보수하고 주변을 정리하여 태고종 금강관음사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제6절 수도산(水道山) 공원
해발 40m인 수도산은 행정동으로는 동산동과 마동에 걸쳐 있다. 수도산의 정상을 비롯하여 대부분은 법정동으로는 금강동에 속하여 있으며 동산동과 마동에 일부가 걸쳐 있다. 수도산은 예전엔 「운룡산」「통술뫼」「닭뫼」라 불리웠다. 이 산 뒤로 왕지평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산 아래 신성ㆍ운룡ㆍ망산ㆍ 잿백이ㆍ잠상리 등의 부락이 있었으며 이들 부락은 대부분 여전히 자연부락으로 남아있으나 모래뜸 잠상리만은 시내에 포함되어버린 상황이다. 산 앞으로는 시내를 향하는 쪽의 기슭에 화장막이 있었다. 모래뜸 잠상리는 현재 동산동 구역에 속한다.
수도산(水道山)이라는 명칭은 일제가 신흥도시 이리읍에 수도를 대기 위해 대아리 저수지에서 대용수간선을 따라 흘러오는 물을 닭뫼(계산:鷄山) 정상으로 끌어올려 이리읍내에 공급하게 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공동묘지 정상에 물탱크를 만들고 그 아래로 수도관을 묻은 배수로가 생겨났으며 이곳을 가기 위한 새로 생긴 길이 현재 원광대학교 부속 병원 신경정신과 별관으로 올라가는 아스팔트길이 되었다. 원래 가장 큰 길은 이리읍에서 마동을 거쳐 화장막으로 하여 잿배기를 넘어 금강리로 가는 길이었으나 이후로는 새로운 수도산길이 큰길이 되었다. 수도산 정상에는 1980년대에 10여 년 간 이리시 최초의 야외풀장이 있어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경제발전에 따라 91년 남중동에 세워진 올림픽 기념관 안에 실내 풀장이 개관하고 여타의 사설풀장이 생겨나면서 이 풀장은 내내 보기 흉한 몰골로 방치되다가 최근에 가든으로 바뀌어 흉한 모습은 조금 덜하게 되었다.
화장막은 한때 숯불구이 불고기집으로 유명한 《고래등》 뒷길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다. 공동묘지는 화장막 앞과 왼쪽에서부터 원광대 부속병원 별관을 지나 현 동중학교와 동산주공과 동남초등학교까지 펼쳐져 있었다. 이 화장터와 공동묘지는 시유지로서 1974년을 전후하여 이리시에서 택지로 정리되었으며 화장막과 공동묘지는 팔봉으로 옮겨져서 시공원묘지가 되었다.
수도산을 풍수가의 말로는 이곳에 운중반룡(雲中盤龍)이라는 혈(穴)이 있다고 하여 운룡산(雲龍山)이라고도 하며 그 산 남쪽 자락에 불당이 있었기 때문에 당뫼(당산:堂山)이라고도 한다. 또 풍수가들은 당뫼를 닭뫼(계산:鷄山)로 풀이하여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혈(穴)을 설명하기도 한다고 유재영교수의 《이리관내의 지명》에 소개되어 있다. 전해오는 이리 팔경중에는 《鷄山吐月》이 있으니 바로 수도산에서 아름다운 달이 떠오름을 그린 말이다. 수도산 남쪽으로 내려가면 신성마을이며 이곳에 바로 금강정수장이 있다.
[수도산에서 본 동산주공 일대] [수도산에서 본 왕지평야]
제7절 대용수간선과 중문천, 목천포천 및 구강
1. 대용수간선
모진 비바람에도 거의 한 세기를 견디어온 고색이 창연하던 동산동 구 농촌진흥원 앞의 제1수문은 2005년 대용수간선의 흙 제방을 시멘트 공사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새로운 제1수문이 건립되였다. 이제 고색창연하던 수문은 없어졌으나 아직도 춘포면과 금강동, 동산동, 인화동, 목천동, 오산면을 지나며 유유히 흐르는 호남평야 논농사 지역의 젖줄인 대용수간선은 춘하추동 쉬임없이 항상 깨끗한 물이 유유히 흐른다.
2005년 12월 농촌공사 익산지사로 바뀐 옛 전북농조의 전신인 익옥수리조합이 창설되던 무렵인 1920년 이후 약 20년 동안은 한반도에 대규모 토지 개량사업이 수행되던 기간이다. 일제는 특히 1917년에 한국산 쌀 170만석을 포함 650만석을 들여갔고 이듬해인 1918년에는 쌀 280만석을 포함한 950만석을 수탈하여 가는 등 한반도를 그들의 식량기지로 삼아온데다가 1919년 역사상 초유의 대 한발로 인하여 식량이 부족해지자 대대적인 농업개발계획을 세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일제는 본토에서 개간촉진법을 발표하는 등 미곡증산에 전력하는 한편 한국, 대만 등지에서의 토지개랑사업 발전을 자연히 촉진시켰다. 더구나 서북지방 일대의 대 한발로 인하여 토지개랑사업은 한층 박차가 가해졌다. 이에 일제의 쌀증산계획 대상농지로써 전북지방의 드넓은 평야가 제일 손꼽힌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1920년 이후 15년간에 전국적으로 427,500정보의 밭의 개량, 또는 확장을 꾀하는 토지개량사업을 실시하는 동시에 연간 약 900만석을 증산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900만석 가운데 일본에 대한 식량공급량을 460만석 증가함으로써 연간 700만석 이상이 되도록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식량수탈을 위한 시책적 배경과 방침아래 급속히 추진된 것이 1920년 2월 4일에 이루어진 임익남부와 임옥수리조합의 통합을 전제로 한 익옥수리조합의 창설이었다. 당시 일제가 식량증식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아직도 공업용수 공급면에서 초보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던 두 조합을 통합하는 한편 여기에 최대규모의 수원확보를 실시하여 새로운 농경지를 개량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대규모 수원확보는 대아리 저수지를 말하며 이 대아리 저수지가 완성되면 익산, 옥구뿐 만 아니라 옥구 남쪽에까지 수로를 뻗쳐 농업용수를 공급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당시 임옥수리조합은 임익수리조합의 비 관개기간에 여분의 하천수를 끌어다가 수로나 저지대에 저류시킨 뒤 식용수로 충당하여 왔던 만큼 언제나 천수에 의존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아무리 강력한 식량증산계획도 성과를 이루어낼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이 상습적인 한해의 피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으로써 고산천의 상류인 전주군 동상면 대아리에 대규모의 댐을 축조하여 저수지를 만들고 익옥수리조합 지역으로부터 흐르는 탑천의 잉여수를 이용하는 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1920년 산미증산계획과 함께 그 해 2월 익옥수리조합은 완주군 고산면에 대아댐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1922년 12월에 준공하였다. 그러나 그 물을 옥구지방까지 보내려면 중간지점인 삼례를 지나치지 않고는 보낼 수가 없기에 삼례의 취입보 및 대간선을 옥구에까지 확장하게 된 것이다. 대아리댐 건설과 병행하여 고산천의 어우리보를 확장하여 봉동면 구미리의 기존의 배수로를 이용하여 별산천에 넣어 삼례의 신금리에 취입보를 설치하고 삼례읍의 남방을 거쳐 구 비비정 수로에 도달하게 하여 춘포산 부근까지 확장하여 목천포 전군도로에 달하게 하고 지경(대야)을 거쳐 옥구읍을 지나 옥구저수지까지 도달하게 하였다. 어우리보에서 옥구까지 간선의 길이가 장장 18리(종래의 사용리수로는 180리)이기에 《수로 200리》라는 말로 통칭되었다. 삼례까지의 간선은 1922년 4월에 이미 완공되었으며 다음해부터는 대간선을 확장하여 공사가 진행되어『전북농조 80년사』를 참고하여 볼 때 대략 1924년까지는 완성된 것으로 보이며 대간선에 투입된 기술진은 중국의 고력(苦力)회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 대간선은 좌우 흙 제방(土堤)으로 설치되어 누수 및 삼투량으로 인한 물의 손실은 물론 시설이 노후되어 1988년에 어우리보에서 삼례읍 후정리까지 시멘트 블록으로 대체하고 1989년부터 1993년까지는 삼례에서 옥구읍 어은리까지 완성하였다. 이 현대화된 시설은 길이 약 10m 높이 약 1.6m의 높이로 콘크리트로 설치되었으며 최근에는 스테인레스 보호망을 둘러쳐서 사람들이 접근을 방지하여 깨끗한 소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간선의 마지막 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옥구양수장에는 온갖 오물을 제거하는 최신식 제거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다만 아직도 익산시 신흥동의 전북농업기술원부근에서 동산동 우남아파트 부근까지는 아직도 흙제방 상태로 공사가 중단된 상태인데 머지않아 공사가 있게 될 전망이다.
일제의 쌀 수탈을 위한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대아리 댐과 대용수간선은 비록 그들의 경제적 침략수단으로 이루어진 성과이기는 하지만 아
아직도 간간이 당시의 구 [단장한 동산동의 대용수간선]
조물이 현재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는 곳도 있다.
■대용수간선 진행노선
어우리보-고산서초등학교앞-용암교-율소교-은하교-서두교-청왕교-삼례천과 합류-별산교-백두교-하리교-삼례터미널앞-금마교-해전교-후정이교-어전교-화평교-구춘포중앞-광동교-석암교-석암초등학교앞-진흥교-신흥초등학교옆-동남초등학교앞-동산교-구진흥원옆-나룻교-평육교-목상교-목천포-목천교차로-후동교-북참교-사광교-원두교-신동교-군산남고앞-지경교-신기암거교-봉동교-옥산교-제1금당교-상평교-옥구읍-자양중앞-옥구저수지
2. 중문천
중문천이라는 이름은 시민들에게 생소하다. 그러나 고제마을을 흐르는 큰 천을 마을 사람들은 중문천이라고 부른다. 양 제방의 폭이 무려 60여m나 되는 이 큰 하천은 본디 그리 큰 하천은 아니었으나 1980년대 초반에 구강을 메우는 공사를 하면서 크게 확장한 것이라는 마을 어른들의 증언이다.
이 하천의 근원은 석암천과 석삼천으로 보인다. 본디 익산지방을 흐르는 만경강의 대천(大川)으로는 익산천, 목천포천, 오산천, 탑천 등이 있고 중천(中川)으로는 석암천등 수많은 하천들이 있었다.
석암천(石岩川)은 팔봉동과 신동리 부근의 물을 받아 석암초등학교 앞을 지나면서 강폭이 커져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석암동에서 출발하여 흐르는 작은 하천으로 왕지평야를 거치면서 갈라져서 작은 한줄기는 금강동 익산시 위생처리장 옆을 지나면서 처리장 물을 받아 신기교를 지나 고제동편에서 중문천과 만나며 본류는 강경마을 뒤편에서 곧바로 석삼천과 만나게 된다.
석삼천(石三川)은 과거에 천서초등학교 앞에 있던 취본지의 물을 받아 춘포중학교 앞에서 비로소 큰 폭으로 흐르며 삼포 앞을 지나 강경마을 뒤편에서 석암천의 한 줄기와 만난 다음 강경마을을 거치면서 강둑의 폭이 50m가 넘는 큰 강이 되며 금강교를 지나면 중문천 배수문이 설치되어 있고 고제 동편에서 익산시 위생처리장에서 나오는 물과 만나게 되는데 오늘날은 모두 중문천이라 통칭하여 부르고 있다. 이 중문천은 옛뚝교를 지나 유천배수문을 거쳐 만경강으로 합류한다. 석암리 앞에서 시작하여 삼포(三浦)앞을 지나기에 붙인 이름으로 보이지만 마을어른들도 석삼천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는데 이리시사에는《석삼천》이라는 기록이 있어 필자가 추측해본 것이며 정확하지는 않다. 이제 석암천이나 석삼천의 이름은 기록에는 있지만 살아있는 이들에겐 전혀 생소한 명칭이며 현지 어른들도 그저 〈대똘〉이나 〈하천〉이라고만 부를 뿐이다.
마을 어른들의 증언에 따르면 1970년대에는 지금도 아직까지 유천마을에 남아있는 구강과 중문천과 목천포천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사행천들을 모두 메꾸어서 논으로 만들고 중문천을 남긴 것이며 그 후 80년대 중반에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고제, 유천마을 수해문제를 해결하고자 중문천을 확장하는 공사를 하였다고 하는데 비단 중문천 뿐 만 아니라 석암천등을 모두 확장하였다. 지금의 금강교가 1982년에는 처음 건설된 토다리(1932년) 크기(22m)정도의 16m로 다시 건설하였다가 이듬해 40m로 확장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1920년대초까지 평야부에서 심히 곡류하는 전형적인 자유사행천인 만경강의 수리사업이 대아리댐과 대용수간선을 마무리하던 1924년부터 시작되어 인공제방 축조와 곡류가 심한 부분을 직선으로 바꾸는 직강공사가 16년간 이루어졌다. 그러나 직강공사가 이루어진 제방 밖의 구강들은 그대로 남아 큰 비가 오면 홍수가 지고 목천포천을 통하여 만경강으로 물이 빠지는 데에는 무려 열흘씩이나 걸리기 [고제 동쪽의 중문천]
도 하였다. 이제 80년대에 유천마을의 구강을 제외하고는 모두 메우고 유천제수문을 통하여 물이 목천포로 돌지 않고 직접 빠지며, 중문천의 확장으로 홍수가 져도 마을이 물에 잠기기 않을 정도로는 원활하게 배수가 되고 1998년에는 유천배수장이 설치됨에 따라 큰 비가 와서 물이 빠지지 않으면 강력펌프를 이용하여 강제로 만경강으로 내보내기까지 하면서 수해에 대처하는 것을 보면 옛부터 제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 큰 책무가 바로 치산치수(治山治水)이었다는 것이 저절로 실감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 목천포천
구농촌진흥원 뒤 동산철교 아래 구강에서 시작되는 이 천은 고제 서편의 중문천 지하관을 통해 보내지는 유천마을 동편의 구강물을 받으면서 시작되는 또 다른 천과 나룻가 동편에서 만나 대용수간선과 나란히 흐르다가 평화육교 못 미친 지점에서 이일여중ㆍ고쪽에서 흘러 나오는 처리되지 않은 시내 상하수도 물과 합류하여 목천철교를 지나 목천포의 조문마을 오른쪽에서 만경강으로 연결된다. 현재 양 제방의 폭은 대개 30m이다.
목천포천은 만경강에 바닷물의 조수가 밀려와 경작하는 수로에까지 밀려들어오는 것을 막고 경작수로의 물을 빼내기 위한 수문장치를 하였는데 이를 조문(潮門)이라 하여 마을이름이 되었으며 이 수문
장치가 바로 1931년에 설치되어 아직까지 남아있는 목천포수문이다. 이제 사 [남아있는 옛 목천포천의 모습] 행천이던 목천포천은 1987년에 큰 폭으로 직강공사를 끝내고 목천포수문 동쪽 200여m 지점에 목천배수문이 새로 설치됨에 따라 목천포수문은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목천포천은 뒷고잔에 평소에는 물이 없이 말라있는 구강을 남겨두고 위치를 옮겨 조문 오른편으로 흐르고 있으며 목천포수문으로 흐르는 옛 강은 주민들이 버리는 생활하수구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4. 고제와 유천 소재 구강
1924년부터 시작된 만경강의 직강공사로 자유곡류천인 만경강의 제방밖에는 초승달 모양의 호소가 남게 되었다. 이러한 구하도의 호소를 우각호 또는 하적호라고 한다. 만경강 유역의 하적호는 벼농사를 위한 관개용 저수지의 역할을 하였으며 또는 갈대밭으로 옥야홍련의 소택지로 남아 있었으나 그동안의 퇴적작용과 농지정리사업으로 대부분 농경지화 하였지만 현재에도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고제와 유천소재 구강은 직선형이다. 폭 50m, 길이 600여m이며 고제수문에서 시작되는 목천포천과 연결되어 있다. 예부터 만경강에서 물을 공급받아 하우스 채소재배에 이용되어 왔으며 목천포천으로 물을 빼낸다. 요즘에는 지하수물을 이용하여 하우스 재배가 이루어지므로 농업용수로의 활용가치가 거의 소멸되었으므로 공원이 부족한 우리 익산시의 생태공원으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왕에 뚫린 옛뚝길을 제방까지 직선으로 연결하고 구강에는 연꽃을 심고 구강을 도보로 산책할 수 있도록 산책길을 조성한다면 시
그래도 현재 이 구강은 만경강의 물을 받아 중문
[유천 고제의 구강 모습]
천 아래에 묻힌 관을 통하여 목천포천으로 연 결되어 흐르기에 그래도 수질이 썩 괜찮은 편이지만 행정당국과 마을주민들의 환경오염 예방 및 관리가 필요하며 깨끗한 수질관리가 절실히 요구된다.
이러한 구강은 이곳 이외에도 신복과 용강, 목천동 고잔 마을 뒤편, 춘포초등학교 앞, 동산동 월담산 아래 호소, 김제시 백구면 미산리와 춘포면 구담마을 및 전주시 강흥동 신유강 부근에 남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형체만 남아 있을 뿐임에 비하여 이곳의 구강과 신복ㆍ용강의 구강은 물이 항상 가득 차있어 호수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므로 기왕에 도청 차원에서 계획된 만경강 생태공원 사업의 부진으로 시청 차원의 만경강 공원화사업이 시작되었다하니 하루빨리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이곳 유천과 고제마을이 아름다워지고 시민들의 발길이 잦아지게 되기를 바라는바 크다.
5. 신복과 용강 소재 구강
만경강 제방이 완성된 이후 만경강의 남북에 몇 개 남아 있는 구강 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벽한 초승달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신복과 용강마을의 구강이다. 신복과 용강마을은 너무나 아름다운 초승달 모양의 구강을 사이에 두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폭은 대략 30m 내지 70m에 이르며 길이는 1㎞에 가까운 아주 큰 규모이다. 마을사람들이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관리를 잘하는 모양이어서 예전보다 훨씬 깨끗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연잎도 불어나서 더 아름다워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잘 간직하고 있는 구강들을 [아름다움을 더하는 구강의 모습]
아름답게 꾸며 두 마을을 이어주는 아름다운 다리를 만들어 주민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고 학생들의 자연학습공간으로 활용되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관광자원화한다면 충분히 활용이 가능하며 큰 가치가 있다고 보는데 언제가 고제ㆍ유천의 구강 및 신복ㆍ용강의 구강이 모두 아름답게 가꾸어져서 군산의 은파저수지처럼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공원이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현재 초승달 모양의 전형적이 곡류천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이 구강의 안쪽마을이 신복이요, 바깥쪽 마을이 용강인데 지금까지도 두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 하나 없어 제방을 통하여 멀리 돌아서야 내왕이 가능한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제8절 동산초등학교
대화공립국민학교는 이 [동산초등학교 전경]
지방의 부호인 김화형농장(지금의 보화당 약방 뒷집)주인 김화형의 아들 김기곤이 토지 7만 5천평을 팔아 기증한 자금으로 교사를 신축하였다. 해방 후인 1945년 9월 일제 때 영전농장 부근인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동산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가 1996년 동산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
1994년에는 소강당 및 15개 교실을 새로 증개축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학교가 단장되었으며 2006년 2월 졸업한 제60회 졸업생을 포함하여 총 2만 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역사 깊은 학교이다. 한때 익산에서 최고의 학생수를 가진 매머드 학교였으나 2005년 옥야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학생수가 줄었으며 현재는 38학급에 1,230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제9절 만경강 제수문교
만경강 본류에는 1928년에 세워진 구만경교를 위시하여 현재에는 무려 15개의 다리가 있다. 무려 1,140m의 23번 국도를 잇는 목천대교를 비롯하여 제2전군도로를 잇는 공덕대교와 서해안 고속도로를 잇는 만경강교는 모두 800m가 넘는데 모두 2002년에 완공되었다. 그중 유일한 제수문다리가 바로 익산시 동산동과 김제시 백구면을 잇는 만경강 제수문교이다. 1970년 10월에 시작하여 1975년 10월에 완공된 만경강제수문교는 우리 익산쪽에서는 유천마을에서 제방을 건너 내려가 제수문까지 다다를 수 있는 길은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으며 강줄기를 막는 제수문을 걸어서 김제시 방면으로 건너면 제방까지는 연이어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 제수문은 평상시에는 만경강 하류에서 내려오는 물을 막아 농업용수로 활용하며 바닷물의 역류를 막고 홍수가 나면 열어서 수위를 조절한다. 한때는 자동차의 왕래를 허용한 적도 있으나 이제는 사람의 왕래만 허용하고 있다. 제수문교의 길이는 100m가 넘으며 백구면 쪽으로 이어진 인도까지 [백구면 쪽에서 본 만경강 제수문교]
포함하면 200여 미터에 이른다. 이 다리가 만들어지기 전인 1960년대까지는 건너편 백구면 사람들 중에는 백구정에서 나룻배를 타고 동산동으로 건너왔었다. 건너편 백구정에 새로 아주 잘 지어진 백구정 정자 앞 안내판에는 만경강 다리가 생긴 이후로 나룻배가 없어진 듯 기록한 오류를 보았는데 필자는 1960년에 할머니와 함께 나룻배를 타고 백구면 작은 할머니 댁에서 동산동으로 건너온 추억을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다. 한가한 봄날의 일요일 아침에 이 제수문을 건너 김제시 백구면으로 건너가면 만나게 되는 백구정으로 조용한 산책나들이를 가져보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다.
제10절 삼일교회
아직도 종루에 매달려 있으나 울리지는 않는다. 이 교회의 뒤편에는 또 하나의 작은 교회가 있는데 1961년에 세워진 성은교회로 시대는 오래지 않으나 건물은 오래된 모습으로 보이는데 한 마을에 두 교회가 있는 모습으로 우리 지방에서 해방이후로 개신교가 얼마나 널리 전파되어 믿어지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제4장 동산동의 민속과 전통
제1절 전해오는 이야기
1. 관음사(觀音寺) 돌부처
지금의 익산시 금강동 660번지에 관음사(옛 부처당)라는 절이 있는데 그 곳의 법당 중앙에 한 여인이 아기를 업고 있는 듯한 형상의 돌부처(石佛)가 앉아 있다. 이 돌부처에는 옛날부터 다음과 같은 애틋한 사연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멀찍이 서서 집안 동정을 살피고 있던 스님은 그 며느리의 더없이 착한 거동을 보고 매우 감동하였다. 그리하여 가난한 며느리의 어진 마음에 보답하려고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보아하니 매우 박복하게 사시는 모양인데 아주머니의 그 착한 마음씨에 보답하려고 하니 소승을 따라와 주시오."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며느리가 어정쩡한 태도로 물었다.
"아무 말 묻지 말고 잠자코 따라와만 주시오. 그러면 복문(福門)이 열려 잘 살게 될 것입니다." 스님이 대답했다.
며느리는 스님의 무게 있는 대답에 더는 의심할 마음이 없어, 어린 아이를 등에 들쳐 업고 스님의 뒤를 따라 나섰다. 한참 가다가 스님이 이윽고 말했다.
"소승의 뒤를 따라오되 단 꼭 지켜야할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옵니까?" 며느리가 물었다. [관음사 돌부처]
"목적지에 완전히 이를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됩니다. 만약 뒤를 돌아보았다가는 불행하게 됩니다."
며느리는 이에 마음을 단단히 다지고 스님의 뜻을 좇아가리라 하였다. 그들은 이윽고 금강리 앞 관음사 근처에 이르렀다. 이 곳은 당시에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큰 강이었다. 스님은 뒤를 돌아보 않고 씽씽 앞장서 걸어갔다. 그러나 마음씨 고운 그 여인은 행여 빠져 죽지나 않을까 하여 더럭 겁이 났다. 그래 조마조마 애타는 마음으로 강을 건너다가 어느 순간에 그만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결국 그 여인은 스님의 가르침을 어긴 것이다. 이 바람에 그 여인은 갑자기 돌이 되어버렸다. 이 돌은 하나의 부처로서 등에 아이를 업은 부인의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마음씨 착한 여인을 행복하게 보답해 주려고 했던 스님의 뜻이 금기를 어기는 바람에 도리어 돌이 되게 하고 말았다는 애틋한 이야기다.
이는 하나의 불교 연기설화(緣起說話)다. 보시(布施)의 수행을 하면 천계의 사보(査報)를 받는 대신, 인색한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자는 흑업(黑業: 사업(四業)의 하나로 암흑 부정의 고통을 받음)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업을 만나야 마땅할 시어머니 밑에서 선행하는 며느리에게 복업(福業)을 주려고 인도했으나 되돌아보지 말라는 금기(禁忌)를 어겼기 때문에 돌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은 속연(俗緣)을 끊으라는 뜻이 된다.
2. 금도끼와 은도끼
아주 먼 옛 날, 전라도 하고도 솝리의 어느 마을(이리시 동산동 부근)에 아주 근면하고 착한 농부가 하나 살고 있었다. 그는 봄과 여름에는 밭에 나가 농사를 짓고, 가을에나 겨울에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나무를 찍어서 장작을 팔아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넉넉한 생활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 늙은 농부는 아무런 불평 한마디 없었다. 그는 마음이 바르고 착하여서 그냥, 그날 굶지 않고 무사히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하였다. 어느 날 농부는 날마다 하는 대로 이른 아침을 먹고 또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마침 큰 연못가에 이르러 그 늙은 농부가 지게를 받쳐 놓고, 이른 아침의 탁 트이는 산 공기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취한 듯 스르르 눈을 감고 앉아 곰방대로 한대의 담배를 피노라니 새삼 자신의 행복이 절실해졌다. 이윽고 천천히 일어나서 이제 도끼로 나무를 찍기 시작하였다. 그 도끼 소리는 그 무거운 적막 속의 산을 울려 우렁찬 산울림을 일으켰고 삽시간에 늙은 농부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이제 농부의 나이도 나이인지라 숨이 씨근씨근 가빠 오는데, 그래도 뭐라 흥얼거리며 연신 찍어 내는 그 힘에 아름드리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이윽고 쓰러 넘어지곤 하였다. 또 다시 잠깐, 땅 위에 수북이 쌓인 도끼밥을 치어다보며 허리를 펴고 있다가 다시 ?타-악? 손바닥에 침을 뱉어 도끼자루를 잘 잡아들고 다시 다른 나무에 도끼질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번 나무는 이상하게도 어찌 단단한지 도끼가 잘 박히지 않고 튀기기만 하여, 다시 몇 번 있는 힘을 다하여 도끼를 내리쳤다.
아뿔사! 딱 하고 도끼 자루는 부러져 도끼는 연못 가운데로 풍덩 빠져 버리는 게 아닌가? 하도 기가 막히어 늙은 농부는 눈앞이 캄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도끼는 늙은 농부의 하나밖에 없는 큰 밑천이었기 때문이다. 농사짓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고 일 년의 절반은 도끼로 나무를 찍어서 내다 팔아 그것으로 겨우겨우 연명해 오던 터에 그 귀중한 도끼를 연못에 빠뜨렸으니 농부는 장차 살아갈 길이 막연하고 아찔하여서 마침내 연못가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어 버렸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을 때 느닷없이 연못물이 돌이뱅이 치더니, 연못 한복판에 흰 수염을 날리며 한 노인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농부야.”
너무도 놀랍고 또한 당황하여서 농부는 그만 울음을 딱 멈추고 저도 모르게 끓어 엎어졌다.
“네 울음소리가 하도 처량하여서 웬일인가, 말 물어 볼까?”
농부는 떨리는 가슴에 두 손을 모아들고 사실대로 말했다.
“어허, 그것 참 딱하게 되었구나. 그러면 이것을 보아라.”
노인은 어느 사이 도끼 두 자루를 내어 놓는게 아닌가! 하나는 분명 자루가 부러진 낡은 쇠도끼였고 하나는 번쩍번쩍 빛이 나는 금도끼였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네 것이냐?”
농부는 반가움에 얼른 자루가 부러진 낡은 쇠도끼를 가리켰다.
“제 도끼는 바로 그 자루가 부러진 낡은 쇠도끼입니다요.”
“오, 기특한 마음씨로고......”
웃으면서 노인은 쇠도끼를 농부에게 건네주었다. 농부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고마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노인이 사라진 후에, 농부는 새로 자루를 만들어 끼우고 다시 도끼질을 시작하였다. 한 번 찍고 두 번 찍을 때마다 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도끼가 그리 미덥고 소중할 수가 없어서 ‘고맙습니다요, 고맙습니다요.’하며 아까 그 노인에게로 혹은 도끼에게로 연신 그 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나무에 도끼를 내리쳤을 때 ?쩡-?하고 산울림이 일어났다.
그런데 웬 일인가. 일시에 그 나무에서 자르르 하고 돈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농부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것을 손바닥에 펴 보니 틀림없는 금돈이었다.
“얼레- 나무에서 돈이 막 쏟아지네......”
늙은 농부는 기쁨에 넘쳐서 자꾸만 도끼질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무에서는 자르르 자르르 하고 금돈이 쏟아졌다. 그리하여 농부는 장작 대신 돈을 한 바작 잔뜩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 소문은 당장에 마을에서 마을로 퍼졌다. 이웃마을에 사는 한 농부가 늙은 농부를 찾아와서 부자가 된 내력을 물었다. 그런데 그 농부는 욕심이 많고 마음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늙은 농부는 겪은 대로 자세히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이웃마을의 농부는 그 연못가로 가서 도끼질을 하다가 일부러 연못에 도끼를 내던져 빠뜨렸다. 그리고 두 다리를 뻗고 슬프게 울었다. 그러나 어찌 그 눈에 눈물이 고였겠는가? 뽀송뽀송한 두 눈에는 그저 어서 그 노인이 나타나 주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는데 대처나 연못 한 복판이 돌이뱅이 치면서 드디어 노인이 나타나지 않는가! 그리하여 도끼 두 자루를 내어 들며
“어떤 것이 네 것이냐?”
물어 보는 즉시 그는 눈부시게 빛나는 금도끼를 가리켰다. 노인은 묵묵히 금도끼를 농부에게 주었다. 그 농부는 기쁨에 넘쳐서 숲속으로 달려가 가장 큰 나무를 골라 단숨에 내리쳤다. ?쩡-?하고 한 차례 산울림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건 웬일인가. 나무에서는 돈이 자르르 쏟아지지 않고, 크고 작은 뱀들이 득시글 쏟아져서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일제히 그 욕심 많은 농부에게 달려드는게 아닌가! 그리하여 그 욕심 많은 농부는 금도끼도 내던지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가 버렸다.
제2절 생활속의 노래
1. 상여노래(만가)
어노 어나리 넘라 어노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그렇게 쉽게 가렸던가
어노 어노 어나리 넘자 어노
먹든 밥을 개덮어 놓고
어디로나 행하는가
어노 어노 어나리 넘자 어노
고사당을 이별허고서
영결종천 나는 간다
어노 어노 어나리 넘자 어노
익산대는 엇다두고
명전공포가 앞을 섰냐
어노 어노 어나리 넘자 어노
나간다고 설어말고
실하자손 너의들
부디부디 잘살아라
어노 어노 어나리 넘자 어노
인제가시면 언제오실까
오실날이나 일러주시오
어노 어노 어나리 넘자 어노
명년 온때 춘삼월의
잎피고 꽃필적의 오실라는가
어노 어노 어나리 넘자 어노
〈 2001년 익산시사에서 발췌 - 가창자는 동산동 김만동씨 〉
2. 범벅타령
정월에는 만두범벅
이월에는 송편범벅
삼월에는 냉이범벅
사월에는 쑥범벅
오월에는 느티범벅
유월에는 보리범벅
칠월에는 밀범벅
팔월에는 수수범벅
구월에는 호박범벅
시월에는 무시로범벅
십일월에는 팥죽범벅
섯달에는 긴떡범벅
이만하면 열두달
범벅이 만족하구나
〈 2001년 익산시사에서 발췌 - 가창자는 동산동 이순덕씨 〉
3. 환갑노래
공자맹자 내아들
동봉화초는 내며느리
재산유전은 내손자
천하일색은 내아딸
천하의 귀골은 내아사우
만대유지는 내영감
살기싫은 시집살이
그럭저럭 살았더니
오갈자갈이 내재미네
구석구석이 내재미네
얼씨구나 절씨구나
아니놀고 무엇하리
〈 2001년 익산시사에서 발췌 - 가창자는 동산동 이순덕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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