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연구

인화동(익산향토지 제 2권)

청담(靑潭) 2009. 10. 11. 22:28

익산문화원에서 발행한 익산향토지 제2권(2006)중 필자가 조사하여 정리한 부분입니다.

 

제3편 인화동

 

제1장 인화동의 연혁과 현황

 

제1절 인화동의 연혁

 

익산시의 남부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인화동은 법정동인 인화동과 주현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쪽으로 동산동, 서쪽으로 평화동과 목천동, 북쪽으로는 갈산동과 남중동과 마동이 있으며 남쪽으로 김제시 및 만경강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인화동에서 북쪽 방향으로 주현동으로 넘어가면서 야트막한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갈산동으로 차츰 오르막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 전주부의 속현이었던 옛 옥야현 지역이 익산군에 편입된 것은 1906년의 일이었다. 이때 편입된 옥야현 지역은 5개면(남일면, 동일면, 남이면, 서일면, 북일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인화동 지역은 남일면의 이리에 속하였다. 1911년에 익산군청이 금마에서 남일면으로 옮겨오면서 남일면은 익산의 중심이 되었고 1912년에는 호남선이 개통되며 1914년에는 남일면(이리, 마동리, 동산리, 목천리)이 동일면(신흥리, 금강리, 대장촌리, 석탄리)과 합쳐져서 익산면이 되고 남이면과 서일면이 합하여 오산면이 되며 북일면은 그대로 북일면이 되었다. 1911년 당시 이리의 인구는 3,776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익산면은 8개의 리(里)가 있었는데 중심부인 이리(오늘날의 인화동, 주현동, 갈산동, 중앙동, 창인동, 평화동 지역)를 비롯하여 마동리, 동산리, 석탄리, 대장촌리, 신흥리, 금강리, 목천리가 있었다.

1917년에는 익산면이 지정면(중심면)이 되면서 익산시의 모체가 되었다. 이때 거리가 먼 석탄리와 대장촌리는 춘포면에 주고 신흥리와 금강리는 북일면에 목천리는 오산면에 넘겨주게 된다.

1931년 4월 1일 익산면은 익산읍으로 승격하고 그해 11월 1일 이리읍으로 개칭되었다. 1947년에는 이리부가 되어 익산군과 분리되었고 1949년에 이리시로 개칭하였다. 1995년 5월 10일 도농 복합도시 형태로 익산군과 통합하여 익산시가 되었다.

남일면의 솝리는 구 이리시의 근원이 되는 곳으로 속마을, 즉 속리라 하였는데 우리말로는 솝마을이라 하였다. 솝리는 예전엔 갈대만이 무성한 습지로 풍수가들이 말하는《十里蘆花不見沼》라 하여 드넓은 갈대만이 무성한 곳이었다. 구한말까지만 하여도 지금의 구시장 부근에서 주현동 쪽으로 올라가는 언덕바지에 10여가호의 동네가 있었는데 이 동네를 솝리라 하였다 한다. 옛날에 만경강가에 갈대 우거진 속에 멀리 보이는 것이 이 마을이었기에 속마을이라는 뜻으로 솝리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 후 솝리는 한자지명으로 이리(裡里)가 되었다. 이곳은 구이리(舊裡里)라고도 불리었고, 남부시장은 아직도 모두들 구시장이라 부르고 있다. 그 뒤에 주현동 즉, 구슬재 부근에 인가가 들어섰기에 후리라고 불렀고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이곳에 본정(本町)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46년 12월 1일에는 본정 일정목(一町目)을 화선동(和善洞), 본정 이정목(二町目)을 동인동(東仁洞)이라 개칭 했다가 1961년 7월 1일 화선동과 동인동을 합하여 인화동(仁和洞)이라 하였다. 1998년 2월 2일 주현동과 인화동을 통합하여 행정운영동 인화동으로 개칭하였다. 1994년 12월 1일 동산동의 나룻가와 신천을 흡수하였다.

한편 법정동인 주현동은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서정(曙町)이라 하였는데 1946년 일본식 동명변경에 의하여 주현동으로 고쳤다가 1998년 2월 2일 인화동과 통합되었으며 이제는 법정동 이름으로만 남아있게 되었다.

 

제2절 인화동의 현황과 모습

인화동은 현재 2.226㎢의 좁은 면적에 3,453세대 9,065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행정구역은 26통 117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20여 년 전인 1985년의 통계를 보면 주현동과 합하여 3,732세대에 16,307명이 살고 있었으니 세대수는 거의 변함이 없으나 인구는 38% 가량이나 크게 줄어든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하여도 과거 이리시의 핵심지역중의 하나로 인구의 밀집지역이요, 구시장이 있는 상업의 발달지역이었고 1977년의 이리역 폭발사건 이후 고봉로 일대와 남부지역이 개발되어 한참동안이나마 번성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90년대 부터는 이리시가 주로 북부와 동부로 영역을 확대하며 영등동지역이 크게 발달하여감에 따라 이곳은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쇠퇴하여 남부시장은 폐쇄되기 일보 직전에 놓여 있으며 유흥지역으로 개발된 남부지역의 모텔가는 이미 썰렁한 모습이 완연하다.

1. 인화동 지역

 

법정동 인화동은 그래도 1.88㎢로 제법 큰 마을이다. 1,596가구에 3985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원래 인화동은 1995년 5월 1일 도농통합도시 익산시가 생겨나기 전 도시지역인 이리시의 모체가 되었던 마을이다. 이리는 원래 속리에서 한자어로 바뀐 이름이며 그 속마을은 오늘날 구시장에서 주현동으로 넘어가는 언덕바지에 있던 10여 호의 작은 마을에서 생겨난 이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인화동, 주현동, 갈산동, 중앙동, 창인동, 평화동 지역이 바로 이리(裡里)인데 이리는 조선시대 전주부에 속한 속현인 옥야현의 중심면인 남일면에 속해 있었고 1911년 익산군청이 금마에서 남일면으로 옮겨오게 된다. 1914년에는 동일면과 합쳐서 익산면이 되며 1931년에는 익산면이 익산읍이 되고 그해 11월 이리읍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도시로 성장하여 왔다. 그 중 인화동지역은 1911년에 익산군청이 옮겨오면서 생겨난 이리에서 가장 큰 상설시장인 구시장(남부시장)이 생기고 호남선에 이어 전주까지 전라선의 철도가 개통되면서 1914년 11월에 동이리역이 생기게되고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한다.

오늘날 동익산역은 고봉로의 남쪽 끝에 우뚝 자리하고 있다. 주현로 끝에 있던 동이리역이 1987년에 전라선이 물러나면서 동이리역도 동남방향으로 물러나 지금자리로 옮기고 남부가 개발되었다. 인화동, 동산동, 주현동이 역세권이나 무궁화호는 하루에 상ㆍ하행 각 1회만 정차하며 상ㆍ하행 각 5회의 전주 군산간 통학열차 승객위주의 여객취급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과거에는 화물 영업개시 당시 비료, 양곡, 무연탄 수송 중심으로 영업이 이루어 졌으나 운송환경 변화에 따라 현재는 컨테이너 수송을 주 업무로 하고 있다. 운동장과 최근에 설치된 체육시설은 인화동과 동산동의 주민들이 아침저녁으로 운동하는 소중 [동익산역 앞 전경]

한 곳이 되었다. 새벽 6시면 상쾌한 음악에 맞추어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려는 주민들의 에어로빅이 한 시간이나 이어지고 오후가 되면 벌써 저녁어둠이 깔리기도 전에 운동장을 돌기 위해 주민들 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동익산역 앞에 1995년 10월에 준공된 동이리 웨딩타운이 익산의 가장 큰 예식장으로 각광을 받았으나 그 명성은 수년이 채 가지 못하고 이제 초호화 대형예식장들에게 영예를 넘기고 말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옛 명성을 유지하던 인화동 구시장의 상권은 이제 그 위력이 완전히 소진하였다. 중앙동과 인화동 지역이 가지고 있던 익산시의 상권의 중심은 90년대 이후 영등동과 어양동으로의 상권이양이 시작되고 2000년대 들어 완전히 자리 잡힌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구시장이 [주단혼수길]

있는 인화동이 모습이 이젠 가난과 미개발의 상징이다시피 하던 이웃 동산동에게 마저 그 명성을 넘겨주게 되고 말았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홈에버 등의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마트들은 이제 전국의 상권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있다. 지역 시민단체들의 강력한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2001년 8월에 롯데마트가 영등동에 개장한 이래 전국의 지점 중 가장 실적이 우수한다는 소문이 돌더니만 이제 2006년 10월에는 롯데마트 앞에 또 하나의 공룡시장인 대형마트 홈플러스가 그리고 동산동의 구 원광중고자리에 이마트가 들어서면서 익산상업의 역사인 구시장은 완전히 초토화된 모습으로 그 목숨이 끊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초원의 병든 사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어쩌면 구시장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기력마저 모두 쇠진한 것이나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그래도 주단혼수길은 명맥이나마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하지만 중앙동과의 갈림길인 오고파길과 평화동으로 이어진 농방길의 모습은 어쩌면 참담하다. 이미 80년대부터 메이커 고급가구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한 농가구업은 최근 들어서는 아파트에 붙박이장이 제공되면서 완전히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라 한다. 국가적 정책으로 내건 재래시장 활성화가 이루어져 다 죽어가는 남부시장의 모습부터 산뜻하게 바꾸어 대형마트에서 취급하지 않거나 또는 취급하지 못하는 품목으로 다시 시작하여 시민들의 사랑을 받을 날이 과연 올 수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영영 재래시장은 우리의 추억속으로 사라져 가는 운명인 것일까?

인화동에 소재한 유일한 학교가 이일여중ㆍ고이다. 1964년 삼남여중ㆍ고로 시작한 이 학교는 1968년에는 성신여중고로 교명을 변경한 바 있고 1976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여 우리 익산의 유명한 사립 여성교육기관으로 성장하여 인재양성에 크게 공헌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스포츠 육성종목으로 긴 세월동안 탁구를 살려 양영 [이일여중ㆍ고 전경]

자와 홍순화, 박해정 등 국가대표를 배출하여 탁구명문으로도 이름이 높다.

인화동에는 이일여중ㆍ고 뒤에 있는 크지 않은 청원아파트이외에는 작은 연립주택들만 있는 모습이었는데 옛 동일섬유자리에 2006년 인화제일아파트가 준공되어 입주하였다. 이마트의 바로 앞에 위치하여 마주보는 곳이기에 인화동 발전에 큰 지렛대 역할을 하였다 할 것이다. 금년에 이마트와 인화제일아파트가 들어선 사거리는 이전에도 동산동 농협과 농협대형마트가 들어 있는 대단히 큰 사거리였는데 이제 장차 영등동의 전자랜드 사거리만큼이나 번창하는 이마트 사거리가 되기를 주민들은 갈망하고 있다.

최근 들어 주현로가 상당히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원래는 마동사무소에서 동이리역으로 통하는 큰길이었으나 관공서로 유일하게 등기소와 쌍방울 아파트만 댕그라니 놓여있고 그간 소외되어 낙후한 모습으로 초췌하였더니만 주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인화동 지역에는 2003년에 익산시 최대의 찜질방인 《스파리스》가 문을 연 이후로 옛 동이리역 앞인 등기소 사거리 부근이 차츰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그 위의 주현동에 소재한 등기소 주변에는 상당수의 변호사 및 법무사 사무실이 개업하게 되면서 식당들이 생겨나며 생기를 띠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부근에 국민연금 익산지사가 자리하면서 발전이 더욱 기대되고 있다.

1972년에 4차선으로 평동로가 뚫리면서 인화동은 자못 눈부신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1987년에는 동이리역이 현재의 역사로 이전하였으며 평동로 주변에는 은행과 농협이 들어서고 평동로 남쪽에는 익산의 모든 모텔과 [등기소 사거리와 스파리스]

값비싼 주점들이 모인 소위 《남부지역》이 개발된 것이다. 이 지역은 예부터 소전이 있던 곳이며 나룻가로 가는 길 (현 소전길)좌우에 건설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장미길에 있던 철길이 제거되고 남쪽으로 옮겨가게 된다. 따라서 동이리역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번창하던 남부는 이젠 아주 조용한 거리가 되었다. 찬란한 네온싸인 불빛도, 술에 취한 젊은이들의 웃음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최신식으로 개업하는 대형 음식점들이 그리고 세련된 술집들이 모두 모두 영등동 쪽에 지어지며 번창하고 사람들은 남부를 외면해 버린 것이다. 아직도 수십 개의 모텔들이 영업을 계속하고 있지만 경기가 예전만 어림없다는 소문이며 부동산 가격의 하락도 커서 모두들 관심 밖의 지역이 되었으니 이곳에서 터를 잡은 사람들에겐 10년 [평동선 기념비]

세월이 주는 아픔 이 너무도 크다. 평화동 방면의 기와골에는 수많은 모텔과 가요주점들이 많고, 다들 살아남기 위해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주민들의 땀 흘리는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관공서로는 현재 인화동 사무소는 이곳 남부의 옛 소전자리 뒤편에 있으며 목천대로에는 인화동 소방파출소가 있고, 평동로 건너편 기와골에는 익산경찰서 평화지구대가 있어 평화, 동산, 마동, 목천 등 4개의 파출소를 관할하며 평화동, 인화동, 동산동, 마동, 주현동, 목천동 등이 관할구역이다.

2000년 이후로 다행히도 평동로와 이리역 폭발사고 후 확장되고 명명(1979)된 인북로가 만나는 인화 사거리 부근에 건물들이 들어서서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되고 있다. 전북은행 건너에 백암빌딩이 있고 하이마트가 아직도 성업중이며 평동로 건너편에는 2004년 4월에 익산 장애인종합복지관이 개관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작은 오피스텔도 들어섰다. 그리고 인화사거리에서 삼성아파트 사거리까지는 6차선의 대로가 되었다.

80년대에 뚫린 익산의 관문인 6차선의 목천대로 아래로는 자동차 및 전기 등과 관련한 수많은 공업사들이 있는 곳이다. 전라선과 대용수선을 넘는 나룻교를 지나면 나룻가와 신천 마을이 나온다. 동산동의 옛뚜기 마을처럼 우리 익산시의 남부 논 가운데 있는 이런 마을들은 시내의 젊은이들이나 어린이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마을 [신천마을 전경]

들이다. 나룻가길이 2차선 아스팔트로 말끔히 단장한 뒤로는 이젠 나룻가와 신천은 구석지고 볼품없는 마을이 아니다. 아주 산뜻한 모습으로 마을이 변하고 있으며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는 마을이 되었다. 나룻가는 97가구에 262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신천마을은 61가구에 17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신천마을에서 만경강 제방을 만나게 된다.

 

2. 주현동 지역

 

법정동 주현동은 0.34㎢의 아주 작은 마을이다. 31개 법정동 가운데 갈산동과 중앙동 다음으로 작은, 그저 작은 시골마을 면적밖에 되지 않으나 인구는 1,857가구에 5,080명으로 인화동보다 더 많다. 주현동은 인화동과 함께 이리시의 모체가 되었던 마을이다. 이리는 원래 속리에서 한자어로 바뀐 이름이며 그 속마을은 오늘날 구시장에서 주현동으로 넘어가는 언덕바지에 있던 10여 호의 작은 마을에서 생겨난 이름이기 때문이다.

「탁류」의 저자인 임피 출신의 소설가 채만식(1902-1950)도 해방 이듬해인 1949년에 잠시 살았었다는 주현동에는 옛부터 큰길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주현로이다. 2003년에 4차선으로 확장되어 이제는 작은 도로가 아니지만 예전의 주현로는 분명 2차선 도로이었음에도 우리의 [등기소 앞길]

기억에는 시내의 가장 큰 길 중의 하나였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인구 10여 만 명의 손바닥만한 이리시는 남북으로는 평화동에서 역전까지의 4차선의 남북로와 우체국에서 시공관을 거쳐 이리공고로 가는 2차선길이 가장 큰 길이요, 동서로는 2차선의 역앞길과 평동로가 큰길이었으며 마동사무소에서 등기소를 거쳐 동이리역으로 가는 주현로도 역시 대단히 큰 길이었던 것이다.

주현동의 터줏대감은 등기소이다. 오죽하면 주현로를 예전에는 등기소길이라 하면 시내에서 모두들 통하였을까? 주현동을 변화시킨 가장 큰 주역은 등기소앞에 지어진 쌍방울 한양아파트가 아니었을까? 아직까지도 주택지구인 주현동의 거의 유일한 고층아파트로 홀로 서 있는 아파트이다. 2003년에 주현로 끝에 대형 찜질방인《스파리스》가 들어서더니 이후로 차츰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익산법원이 개설되고 등기소 주변에 변호사 및 법무사 사무실이 여럿이 개업하게 되면서 이를 겨냥한 식당들이 생겨나며 생기를 띠고 있다. 최근에 국민연금 익산지사가 자리하면서 발전이 더욱 기대되고 있다.

1980년대 들어 6차선의 고봉로가 뚫리고 일명 마동지구가 개발되어 쌍방울 아파트 앞쪽이 상가지역이 되면서 주현동의 면모가 일신하게 된다. 주현로의 좌편으로 넓게는 남부시장의 일원인 주현동 천주교회와 화교소학교부근은 이미 상업지역으로서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고 북으로 중앙로까지 아주 적막한 주택가이다. 주현로의 오른편은 수많은 계획된 직선도로가 고봉로를 향하여 나있다. 90년대 한 시절 [번화가인 고봉로]

번성하던 이지역의 영화도 이젠 영등동의 번창으로 크게 한풀 꺾인 모습이나 그래도 아직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음인지 연말이면 가로수에 금색불빛을 장식하여 화려한 모습을 보이는등 그런대로 유지되는 모양이 보인다. 고봉로에는 주현동 유일의 관공서인 주현우체국이 있다.

 

제2장 인화동의 전통마을

 

제1절 인화동

 

□구시장

이 시장은 일본인들이 들어와 번성하였던 시장이다. 이리가 1912년부터 철도교통의 중심이 되자 급속히 발달한 시장이다. 뒤에 중앙시장이 들어서서 역전이 있는 지역으로 상권이 옮겨가면서 주도권을 상실하기 시작하였으나 그래도 1980년대까지는 그럭저럭 북적대는 시장모습을 유지하였지만 1990년대부터 아파트 단지가 모현동과 영등동 일대에 들어서고 그 쪽으로 인구가 대거 이동하면서부터는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2006년 10월에 E-마트가 구 원광고등학교자리에 들어서면서 구시장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구시장 건물은 남아 있으며 극히 일부상인들만이 외롭게 옛 영화를 그리워하며 쓸쓸히 상가를 지켜가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장날이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3.1운동 때는 이곳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그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 휘호의 순국열사기념비(殉國烈士紀念碑)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나룻가

전에는 만경강과 연결되어 이곳에까지 배가 드나들어 각지의 산물과 물품뿐만 아니라 사람들까지 실어 날랐던 나루터가 있었기에 붙어진 이름이다. 1994년 12월1일 동산동에서 인화동으로 넘어갔다.

□신천(新川) : 새터, 신촌(新村)

신촌은 만경강 구강 뚝방에 새로이 형성된 마을이라는 의미로 붙어진 이름이다. 나룻가와 함께 1994년 12월1일 동산동에서 인화동으로 넘어왔다. 예전에는 신촌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신천이라 부른다. 신천이란 사행천인 만경강을 바로 잡으면서 새로운 천이 만들어진 곳에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창고동네

주현로의 입구 오른편에 있는 작은 마을 이름이다. 현재는 금년에 입주한 인화제일아파트(구 동일섬유)뒷편에 있는데 과거 일제때부터 있었던 동양직물과 동일유업 등의 창고를 개조하여 살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렀다고 한다. 아직도 양화길이라 불리는 골목길을 사이로 하여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기와골

기와골(지아골, 개와골)은 평화동 무네미의 동쪽에 있다. 오늘날 이 지역은 평화동에 일부가 속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인화동에 속하고 있다. 기와를 굽고 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특정한 수공업에 종사하면서 서로 모여 사는 마을을 지칭하여 고려시대부터 마을이름 뒤에 < 소 >자를 붙였다. 고려 무인정권시대인 1176년에 공주에서 일어난〈명학소의 난〉에서 보이는 명학소라는 마을명칭에서 엿볼 수 있으며 또 다른 비슷한 경우의 예로는 그릇을 만드는 마을은 점촌이라 부르기도 한 것을 들 수 있다.

 

제2절 주현동

 

□후리(뒷실마을)

처음에는 속리 뒤에 생겨난 마을이라는 의미로 후리(後里)라 하여 뒷실마을로 불리었다. 뒷실마을, 즉 후곡리가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동안 뒷실이 뒤실이 되고 듀실로 잘못 발음되면서 주실이 되었다. 주에 알맞은 한자로 구슬 주(珠)자가 적격이었을 것이다. 낮은 지형과 고개를 가진 마을이라 구슬고개라는 뜻으로 주현(珠峴)으로 고치니 이는 유사음에 따른 자의평명화(字意平明化) 현상이라 한다. 이는 원래 뜻하고는 전혀 다른, 그러나 이해하기 쉽고 분명한 뜻을 가진 말이다. 즉, 뒷실고개라는 말보다는 구슬고개는 어감도 좋고 누구나 이해되는 말이 된 것이다.

 

제3장 인화동의 문화유적과 유물

 

제1절 대교(오하시)농장터

 

주현동 105번지는 일본인 부호인 대교여시(大橋與市)의 농장이 있었던 곳으로 대교농장의 사무실과 쌀 창고가 있었으며 지금도 사무실과 부속건물 및 서쪽의 석축담이 그대로 남아있다. 대교여시는 일본인으로 1907년 9월에 맨 먼저 이리에 농장을 세운 사람이다.

1912년 토지조사령이 내려지고 일인들은 국가소유의 농지나 미개간지를 강제로 불하받는 방법으로 농지를 점유하였다. 이들은 호남평야의 농지매입에 열을 올렸는데 1908년에 이미 옥구의 웅본농장(熊本, 1903)을 비롯하여 세천농장(細川, 1904)과 대교농장(大喬, 1907) 등이 1,000정보 이상을 소유한 거대지주가 되어 있었다.

20세기 초 이리의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일본인들인데 국권을 약탈한 다음해인 1911년에는 대교농장의 대표인 지길원신(枝吉元信)등이 주동이 되어 이리에 거주하는 일본인 34인의 찬성을 얻어 조직한 이리번영조합이 그 모체가 되었다고 한다. 이 조합은 15개조의 규약을 만들고 지길원신이 조합장이 되어 매월 조합비를 거두고 시가지의 계획, 도로의 개설, 교육위생, 경비기관 등의 시설, 관공서의 이전운동 등에 공헌한 바 가 많았다고 한다.

한일합방 이후에 일본인의 토지침탈은 더욱 확대되어 1926년에는 1,000정보 이상을 소유한 일본인 대농장이 9개로 늘어났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국책농장으로 전국적으로 분포하여 대농장을 이루었으며, 교본(하시모토)농장은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의 개간지를 중심으로 농장을 이루었고, 웅본농장은 김제시 죽산면 연포리, 부량면 옥정리, 정읍군 신태인읍 화호리 등지에 농지를 확보했다. 아부농장은 김제시 광활면 일대를, 다목농장은 학부대신 이완용이 소유했던 김제시 진봉면 일대의 토지를 사들여 농장을 이루었다. 우근농장은 도내에 산재된 농장을 경영했으며, 승부농장은 김제시 청하면 일대의 농지를 차지했다. 정목농장은 정읍군 신태인읍 일대의 토지를 소유했다.

당시 일본 본토에서도 1,000정보 이상 소유한 지주는 북해도에 13명, 일본본토에 9명에 불과하였음을 볼 때 논농사지역인 우리 전북지역의 토지수탈이 얼마나 심하였는지 알 수 있다.

참고로 1936년경 전라북도 내에는 10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일인 농장들이 모두 29곳이었는데 익산지방에는 모두 9곳이 있었으며 익산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대농장을 경영했던 일본인들의 대규모 농장들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익산지역 100정보 이상 일인 농장 현황(1936)

단위 : 정보

농장명

사무소

소재지

토지

소재지

소유경지

소작인수

관리인원

직원

사음

동 척 익 산 지 점

이 리 읍

각 군에 산재

6,798

597

7,395

10,671

28

136

다 목 농 장

익산 함열

김제 진봉

익산,정읍,김제,옥구

2,289

71

2,360

3,055

16

69

우 근 상 사

남선 출장소

이 리 읍

김제,부안,익산,정읍,완주

2,020

76

2.096

3,924

12

23

불 이 흥 업

전 북 농 장

익산 오산

옥구 옥구

익산,옥구,김제,완주,정읍,부안,고창

1,367

169

1,536

4,719

27

16

세 천 농 장

익산 춘포

익산,완주,김제

1,146

112

1,258

2,132

5

10

대 교 농 장

이 리 읍

익산, 김제

916

119

1,035

1,800

8

15

삼 중 농 장

이 리 읍

익산,부안,김제,완주,옥구

606

154

760

1,441

3

5

진 전 농 장

익산 오산

익산,옥구

558

96

654

1,150

4

10

금 촌 농 장

익산 춘포

익산,완주,김제

286

108

394

597

3

6

사음 : 지주를 대리하여 토지를 관리하는 사람. 마름이라고도 함.


 

위의 표를 통하여 대교농장은 익산지방에서는 6번째로 규모가 큰 일인 농장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전북에서는 12번째의 규모였다.

한편 일본인들에 의해 대규모 농장이 조성된 곳은 한국의 전통적인 마을구조도 바꿔 놓았다. 농장 시설을 중심으로 가까운 곳에는 일본인들이 일식주택을 짓고 살고 이들 주변에는 농장의 한국인 하급직원들이 거주하였다. 농장과 관련된 소작인들은 마을의 변두리에 모여 살거나 소작지와 가까운 곳으로 이

 

 

 

 

 

 

 

[살림집으로 쓰이는 창고] [남아있는 대교농장 돌담]

 

동하였다.

일제는 전북지역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전주-군산간 도로를 건설하니 과거 전주가도를 기본으로 1907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공사 책임자는 히다고였다. 도로 길이 총 46.7㎞였으며 1년 6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1912년에는 호남선 철도를 부설하고, 이듬 해 군산선이 개통되었다. 군산항은 부산 다음 가는 쌀 수출항으로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쌀의 양은 전국 쌀 수출량의 25%에 달했다. 그리하여 군산항의 쌀 수출량은 군산항 수출 총액의 70~80%를 차지하였다.

군산항을 통해 수송되던 쌀은 부피를 줄이기 위해 익산· 김제· 정읍· 전주·삼례등지에 모아두었다가 도정공장을 거쳐 군산항으로 옮겨졌다. 일제시기에 지어진 많은 도정공장은 해방이후 정부양곡을 도정함에 따라 번창하다가 지금은 도정업을 거의 폐하였다. 그러나 신태인도정공장(정읍), 대장도정공장(익산), 월봉도정공장(김제)등의 대규모 도정공장들이 아직까지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현존하고 있다.

 

 

 

 

 

 

 

 

[화교소학교가 된 대교농장터] [1914년에 세워진 사무실 건물]

3.1운동 당시 이곳 대교농장에는 곡식창고가 있었는데 구시장에서 만세운동

이 일어나자 일경은 시위군중이 곡식창고를 습격하는 것으로 오인하여 창고의 담위에서 무차별 발포하였다고 한다. 1928년 당시 1,300정보의 논을 소유하여 농사를 경영하였다. 이리시 택지의 대부분이 대교농장의 소유였다고 한다.

이 대교농장의 남아있는 터는 해방이후 이리화교협회에서 인수하였다. 대문에는 《익산화교소학》이라는 간판과 《익산화교협회 및 경로회》라는 간판이 두개 걸려 있으며 새로 지은 사무실 안에는 화교협회사무실과 소학교교실이 여러 개 있다. 현재 40여명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는 익산에 하나있는 중국인들의 유일한 초등학교이다. 한편 유일하게 남아있는 대교농장 사무실 건물은 1914년에 건립되었으며 2005년에 리모델링하여 사무실과 붙여서 사용하고 있는데 원형은 완전히 상실 당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2층 건물로서 일식주택의 형태이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일식기와를 올렸는데 망와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 건물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가 최근에 익산화교협회에서 개조하여 창고로 사용하게 됨에 따라 겉모습이 많이 바뀌어 일본집의 형태가 사라졌다.

이곳이 전북지역 농업수탈의 현장이라는 점과 일제하의 농장사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현존 건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생활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로, “대교(大橋)”라는 문양이 새겨진 망와가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사무실 건물은 2005년 11월 11일자로 등록문화재 209호로 문화재청에 등록되었다.

서쪽의 2층 규모의 긴 목조건물은 본래 창고로 쓰이던 건물인데 현재는 여러 칸으로 나누어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일식 시멘트 기와를 올렸다.

 

제2절 화성농장(華星農場)터

 

화성농장을 세운 사람은 백인기(1882-1942)선생이다. 그는 구한말 종2품 가선대부 혜민원 참서관의 관직에 있었다. 혜민원이란 고려시대에는 혜민국, 조선시대에는 혜민서라 불리던 기관으로 서민의 질병치료를 위하여 설치한 의료기관이다. 대한제국시대에는 혜민원이라 하여 1901년(광무 5)에 설치되었고 흉년에는 기근자를 돕고, 평상시에는 고아· 홀아비· 과부· 무의탁 노인을 구호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관직에 있으면서도 항상 생존시에 자신의 말년을 이야기할 때면 고향에 돌아가서 육영사업을 할 것임을 여러 차례 내비치었다고 한다. 그는 호남에서 제일가는 지주이었기에 대농장을 경영하게 된다.

화성농장은 1911년에 설립되었으며 백씨집안의 농장으로 전북 굴지의 한국인 소유의 대농장이었다. 화성농장은 전라북도내 100정보 이상을 소유한 한국인 농장 9곳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으며 식산은행 관리하에 있었다고 한다. 소유주는 백인기이며 주사무소는 이리읍에 두고 각군에 산재한 논이 1,483정보요, 밭이 2,203정보로서 모두 3,686정보나 되었다. 이는 일본인 개인농장 최대규모인 웅본농장(옥구대야, 정읍 신태인)의 3,148정보보다도 큰 것이었으니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없다.

 

화성농장의 규모현황(1936)

단위 : 정보

농장명

사무소

소재지

토지

소재지

소유경지

소작인수

관리인원

직원

사음

화 성 농 장

이 리 읍

각 군에 산재

1,483

2,203

3,686

4,685

7

56


 

그러나 그는 1942년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민족의 해방과 함께 중대한 과업은, 오직 민족교육을 일으켜야 한다는 교육보국의 일념으로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농장 소유자인 백인기씨가 죽자 명륜동에 살던 이윤성(李潤成, 1884∼1956)여사는 화성농장 소재지인 주현동(당시는 이리읍 서정)으로 옮겨오게 온다. 이때에 당시 화성농장 지배인이자 여사의 조카사위가 되는 이춘기씨가 화성농장의 주인이 된 이윤성 여사에게 민족 발전의 백년대계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소유한 토지를 육영사업에 사용할 것을 진언하였다. 이에 이윤성 여사는 흔연히 찬동하고 자신과 아들의 소유 토지 110여만 평을 교육 사업에 희사할 것을 약속했다. 이렇게 하여 화성학원(華星學院)의 창업이 이루어지고 남성중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다. 오늘날 남성고등학교를 비롯한 4개의 학교를 지닌 익산의 대표적 사학재단인 남성학원의 전신이 바로 화성학원이다

학교 설립의 책임을 맡은 이춘기씨는 불철주야 동분서주하면서 온갖 심혈을 기울여 마침내 1945년 11월, 4년제 남성중학교 신입생을 선발하였는데 10대 1 이라는 치열한 경쟁을 가져왔다. 원칙적으로 학교 설립 인가가 있은 다음 학생 모집을 해야 되는데 먼저 학생 모집을 한 것은, 당시 유억겸 문교부장관의 후원과 양해를 얻어 선 모집 후인가를 하게 된 것이다. 선발된 정예 129명의 신입생이 1945년 12월 25일 화성농장 광장에서 지방 유지와 학부모들이 다수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개교식 및 입학식을 가졌다.

이춘기씨는 입학식 축사에서 ?배움에 굶주렸던 우리가 조국광복과 더불어 배움의 전당을 마련하고 이같이 영재를 맞아 입학식을 거행하게 된 것은 대단히 뜻 깊은 일?이라고 말하고 ?여러분은 남성 1회 졸업생이 될 것이므로 남성의 훌륭한 전통을 세우도록 학구 연마에 전심전력할 것은 물론이고 국가 발전에 초석이 되어줄 것?을 당부했다.

이 화성농장을 관리하며 화성학원을 일구어 낸 인물은 바로 이춘기이다. 이춘기(李春基,1905∼1989)는 함흥출신으로 1924년 함흥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조선식산은행에서 근무하다 1941년 조선공영 상무이사로 있었으며 1944년부터 1950년까지 이리화성농장 지배인으로 근무하였다. 1945년 화성학원 재단법인이 구성되자 이사직에 취임했고 이듬해 남성중고등학교가 정식으로 인가되어 개교했다. 후일 1950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0년 민주당 소속 5대 민의원에 당되었다. 1960년 국정교과서주식회사 사장, 1963년 사학재단연합회 이사, 1965년 국정교과서주식회사 상무이사, 1969년 남성수예공업사 사장, 1969년 전북은행 고문, 1970∼1984년 사학재단연합회 전북지회장, 1972년 1대, 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및 운영위원, 1976년 총력안보 전라북도협의회 의장, 1978년 주식회사 쌍방울 고문, 1978년 대한노인회 전북지회장, 1979년 대한노인회 부회장을 맡았다.

1980년 화원교통 사장, 1979년 전북투자금융 이사장, 1980년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회 위원장, 1980∼1985년 국정자문위원, 1980년 화원교통회장, 1981년 민주정의당 총재고문, 1984∼1988년 사학재단연합회장, 1987년 전라북도 애향운동본부 총재 및 전북발전협의회 의장을 역임하며, 정치· 경제· 문화·교육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당시의 화성농장 모습] [문틈으로 본 화성농장 터]

 

현재 사는 사람 없이 빈집으로 남아 잡초만 무성한 주현동의 고 이춘기 선생이 살던 일본식 집이 바로 화성농장사무소 자리라고 하는데 한 시절 익산의 최고 명사의 집으로 화려한 모습을 자랑하던 화성농장터는 한 시절의 영화가 얼마나 무상한가를 쓸쓸히 보여주고 있다. 대문의 왼쪽에는〈화성학원〉, 오른쪽에는〈이춘기〉라고 본인의 손으로 직접 쓴 듯한 나무판 문패가 주인도 없는 빈집에 나란히 걸려 있다. 이춘기씨 집 앞쪽으로는 60년대까지 동성극장이 있었는데 이 역시 화성농장 터이었고 현재는 가정집들이 들어서 있다.

 

제3절 공화제재소 자리

 

인화동 2가 28번지 구시장 안길의 시장 입구에 있던 이리목재소는 일제시대 공화제재소 자리이다. 불과 2년 전인 2004년까지도 이리목재사라는 상호로 오래된 옛 건물에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시에서 매입하여 건물을 헐고 무료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2004년에 전라북도청에서 발간한《근대문화유산 목록화 및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건물은 경제적이고 기능을 위주로 한 시설물로서 길을 사이에 두고 2층 사무실과 제재소가 위치하고 있다. 사무실은 포치 상부 박공부에《공화제재소》라고 쓴 간판을 걸었다. 구조는 목조이며 벽체는 골함석을 붙였다. 지붕구조는 목조 트러스이며 그 위에 시멘트 기와를 올렸다.

제재소 내부에는 일제시대에 사용하던 여러 가지 장비들이 아직 남아 있으며 2년 전 까지만 해도 제재를 하고 있었다. 벽체상부와 박공면에는 열개창을 두었다. 구조는 목조이며 벽체는 골함석과 비늘벽으로 처리하였다. 지붕구조는 목조 트러스를 사용하였는데 2개의 박공지붕과 반박공지붕이 연결되도록 구성하였으며 지붕상부에는 골슬레이트를 올렸다. 구조재로 사용되는 목재는 치목하지 않고 껍질만 벗겨 자연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연결부의 재료로는 꺾

 

 

 

 

 

 

 

 

[공화목재소 자리] [방치된 삼화목재소 건물]

 

쇠와 굵은 철사를 이용하였다.

적어도 60여년이 넘는 세월을 구시장 입구에서 살아온 공화제재소 건물도 무상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건물이 헐리고 이리목재소는 주현로의 호남목재소 한 쪽을 빌려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옛 공화제재소 옆 만세운동

길 좌우에는 이 못지 않게 역사가 깊은 삼화목재 건물이 남아 있으나 역시 무심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십 수 년 전부터 영업을 중단하고 문이 잠겨있다. 역시《삼화목재》라는 간판만이 쓸쓸하게 만세운동길을 사이에 두고 두 채의 건물에 퇴색된 채 붙어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구시장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어른들과 지나가는 행인들마저 세월의 무상함과 시대의 거대한 변화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제4절 남부시장(구시장)

 

구 이리시의 형성과정에서 최대의 변혁을 가져온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호남선 철도의 부설이었다. 대한제국시기인 1907년에 군산과 전주를 잇는 폭 7m, 길이 46.7m의 전군가도가 개통되어 전주와 이리 및 군산이 연결되더니 1910년 무렵에는 호남선과 군산선 철도부설을 위한 측량사업이 시작되면서 장차 이리가 철도교통과 도로 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이 지방의 중심도시가 될 것을 예측한 일본인들이 눈독을 들이고 광대한 농토를 빼앗다시피 매수하여 대 농장들을 만들어 나간 데서 출발한다.

1911년에 익산군청이 금마에서 남일면으로 옮겨오면서 남일면은 익산의 중심이 되었고 1912년에는 호남선이 개통되며 이어서 그해 10월 15일에는 군산선이 개통되었고 1914년 1월 11일에는 목포까지, 그해 11월 17일에는 전주까지 철도가 개통되어 익산은 이 지역 교통의 그야말로 최고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인근의 익산지역, 김제군, 옥구군 일부의 주민들이 모여 각종 일상생필품을 거래하고 농사에 필요한 농구를 사갈 수 있는 정기시장이 5일 간격으로 지금의 구시장 부근에서 음력 4일과 9일에 정기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호남선 열차가 개통되고 전주까지 철도가 개통되는 1910년대 초반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927년경에는 평소 장날이면 1천 여명, 대목장날이면 1만 여 인근주민들이 몰려 물건을 팔고 사는 야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특히 농한기 솜리 우시장은 이 고장의 이름 있는 시장이었다. 또한 당시 익산군 오산면 목천리이던 목천동에도 음력 1일과 6일에 조그마한 수산시장이 열리고 있었는데 거래상품은 많지 않았으나 잡어와 소금, 그리고 농산물, 직물 기타 일용잡품이었다. 목천포에 만경강을 통해 배가 닿기 때문이지만 역시 익산면(1931년 이후 이리읍)의 상업중심은 구시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익산군에는 이리시장(구시장)이외에도 목천시장, 황등시장, 함열시장, 금마시장, 여산시장, 웅포시장 등이 있었는데 이리시장이 규모면에서 익산군의 가장 중심적인 시장구실을 하였다.

해방이후 창인동에 중앙시장이 들어서서 역전이 있는 지역으로 상권이 옮겨가면서 쇠락하기 시작하였으나 1974년 4월 1일 시청에 의해 전라북도에서는 8번째로 일반상설시장으로 발전하였다.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발간한 《전국도소매업체총람》에 따르면 1992년 당시 점포수 221개, 종업원수 143명으로 전북도내 24개 일반시장 중 8번째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갈수록 세가 약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1980년대까지는 그럭저럭 제법 시장 모습을 유지하더니만 1990년대부터 아파트 단지가 모현동과 영등동 일대에 들어서고 그 쪽으로 인구가 대거 이동하면서부터는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남부시장을 중심으로 주단 60여년 역사와 40여개 익산 유일의 주단상가가 형성되어 번성하였지만 요즈음은 결혼할 때 한 벌씩 해 입는 혼례복 이외에는 일상적으로 한복을 입는 사람들을 찾을 수 없는 시대인지라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2006년 10월에 시장에서 지척거리인 구 원광고등학교자리에 대형마트인 E-

마트가 들어서면서 구시장은 완전히 초토화되는 모습으로 무너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구시장 건물은 텅 빈모습으로 남아있으며 외곽의 일부상인들만이 외롭게 옛 영화를 그리워하며 쓸쓸히 상가를 지켜가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장날이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한적한 구시장의 중심가 모습]

모이는 곳이기에 3.1운동 때는 이곳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그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 휘호의 순국열사기념비(殉國烈士紀念碑)가 세워져 있다.

 

제5절 이리영문교회 터(현 구세군 이리교회)

 

등기소 위 오른쪽 안심1길을 들어서면 큰 교회인 온누리 교회가 나오기 전의 좌편에는 그리 눈에 잘 띠지 않는 구세군 교회가 있다. 이 구세군 교회를 옛날에는 영국에서 들어온 교회라 하여 영문교회라 하였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오래된 구 건물을 헐고 그 옆에 다시 지은 것으로 1997년 9월 18일에 완공되었다. 현재 이 교회의 정식명칭은 구세군 이리교회이다.

구세군은 1865년 7월 2일 런던에서 당시 감리교(監理敎) 목사이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와 그의 부인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가 창시하였다. 구세군은 '그리스도교 전도회(Christian Mission)'라는 명칭으로 서민층을 상대로 동부지역 빈민가 등을 찾아가 노방(路蒡)전도를 한 데서 시작하였다.

그리스도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교리를 가지고 선도와 교육, 가난구제, 기타 자선 및 사회사업을 통해 전인적 구원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1878년 구세군으로 개칭하였다. 조직은 군대식 제도를 모방하고 교회를 국제적인 단일조직으로 하여 부스가 초대 대장이 되었다.

각 군국(軍國)에는 사령관이 있고 지역사령부에는 지역사령관이 있다. 또한 군국마다 각 지방을 관장하는 지방장관이 있으며, 각 지방에는 소속된 영(營)이 있어 담당 사관이 복음선교와 예배, 지역사회 봉사사업을 지도한다. 영문(營門)에는 병사가 있는데, 이들은 구세군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의 죄악과 싸울 것을 다짐하고 병사로서 동참하고 있다.

한국에도 1908년 영국에서 파견된 로버트 호가트(Robert Hoggard) 정령(正領)이 이끄는 10여 명의 사관이 선교사업을 시작한 이래, 그 교세를 확장하는 한편, 의료선교 및 고아원· 양로원· 육아원 등을 경영하며, 그밖에도 교육기관을 통해 포교에 힘쓰고 있다. 본부는 영국 런던에 있다.

익산에 구세군 영문교회가 들어선 것은 1936년이다. 당시에는 이곳은 한적한 곳이었는데 당시에 천주교회가 있던 곳을 구세군에서 인수하여 교회를 지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부교님께서 증언하여 주었다.

현재 우리 익산에는 이리영문교회 외에도 문화촌의 배산구세군교회와 월성동의 구세군교회가 있으며 평소에는 우리의 눈에 잘 띄지 않으나 지금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제일은행 4거리에서는 어김없이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리영문(구세군)교회]

현재 담당사관은 정만용 참령이다.

 

제6절 순국열사비

 

주현동 105-19번지에 있는 순국열사비는 1919년에 이곳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비석이다. 이 만세운동을 주도한 남전교회는 오산면 남전리에 소재한 교회로 1897년 10월에 세워진, 익산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남전교회는 서울 탑골공원의 3· 1운동이 일어난 뒤 치밀하게 만세운동을 준비하여 4월 4일 솜리 장날을 택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익산 4· 4만세운동은 현 익산 구시장 대교농장 앞에서 당시 남전교회 성도였던 문용기 장로, 박영문 장경춘 서정만 박도현 등 성도들과 교회에서 운영하던 도남학교 학생 등 200여명이 함께 시작했으며 장날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합류,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익산 지역은 김제평야와 함께 일제의 식량수탈의 거점지여서 일경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거사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지 않고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당시 구시장 대교농장에는 곡식창고가 있었다.장날인 4월 4일 정오에 미리부터 비밀리에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대한독립만세〉라고 빨갛게 적힌 커다란 깃발을 장대에 매단 시위대는 장터 네거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익산지방의 만세시위를 막기 위해 2개 중대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시위가 진행되자 일본군은 창고의 담 위에서 시위 군중에게 무차별 발포 했다.심지어 곤봉과 갈고리로 무장한 수백 명의 소방대원과 농장원들까지도 시위 군중들에게 닥치는 대로 폭행을 가하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문용기 장로 등 6인이 일군경에게 항거하다 그들의 칼에 쓰러졌고 수십 여 명이 부상당하였으며 39명이 검거되었다.

익산 4· 4만세운동은 단일교회에서 주도한 시위로서는 대규모 시위였으며 도남학교의 어린학생부터 교회의 나이든 성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흰 광목옷을 입고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일경과 대치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1919년 전주지역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던 부위렴 선교사는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보고서에서 남전교회의 독립운동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남전교회의 독립만세운동은 많은 민중들의 참여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수원제암리, 매봉교회 등의 만세운동에 묻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 남전교회 교인들의 4·4만세운동은 1949년 당시 이리시민 일동 명의로 건립하여 지금까지 보존하여 오고 있으며 이승만 대통령(1875-1965)이 높이 평가하여 직접 친필로 순국선열비문을 써서 하사하였고 기념비는 현재 익산 구시장에 세워져 있다. 전후면의 [순국열사비]

아래쪽과 후면의 많은 글자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데 1960년 4ㆍ19혁명으로 자유당의 몰락시에 생긴 일이라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쓴 비문이기에 수난을 당 한 것인데 순국선열을 기념하는 비문을 훼손하는 것은 무지한 이들의 소행이라 할 수 밖에 없으며 최근에도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쓴 현판이 걸린 기념물들이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역사인식에 대한 무지함과 과격함에 놀랄 뿐이다. 이 비석 외에 오산면 사무소 안에도 순국열사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의 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구시장 안쪽에 덩그러니 서있던 순국열사비는 익산시에서 2002년에 작은 공원으로 조성하여 단장하였다.

최근에도 일부 뜻있는 인사들과 시민단체에 의해 문용기 목사 등 익산지역 독립운동가들의 기념사업 및 성역화사업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보도가 있어 자못 기대가 크다.

순국열사비 후면의 문장은 12줄 300여자로 되어 있는데 글자 훼손이 심하여 제대로 옮기지 못한다.

 

전 면 : 殉國烈士碑 雩南 李承晩 書

측좌면 : 裡里府民一同 立

측우면 : 檀紀 四二八二年 四月 二十 九日

후 면 : 인류평등의 대의를 위한 전 민족적 항쟁의 (생략) 지축을 흔들며 태 극기의 (생략) 장경춘, 박도현, 서정만 제 의사께서 이에 호응하여 폭악한 왜적총검에 무찔리어 이 땅을 떠나셨으나 저들이 품으신 이 뜻 3천만 민족(생략)우리 겨레의 이 위대한 선열들의 (생략)자유와 독립을 (생략)

 

제7절 옛 동성극장 자리

 

1960년대는 영화의 전성시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03년 6월 23일 미국인 헨리 콜브란(Henry Collbran)과 H.R 보스트위크(H.R Bostwick)가 발전소겸 전 차창고로 사용하고 있던 한성전기회사(현재 서울의 동대문 부근) 마당에서 입장료를 받고 일반인들에게 영화를 보여준 것이 최초라고 한다. 이후 1923년에는 《서선시네마》라는 회사가《국경》이라는 작품을 제작한 것이 최초의 영화제작이었다.

우리 익산에서 TV가 안방극장을 대신하기 시작한 1980년 이전에는 영화는 우리 삶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문화였다. 영화는 클래식 음악이나 미술이나 연극과 달리 도시사람이건 시골사람이건 배운 사람이건 못 배운 사람이건 누구나 좋아하였고 영화를 통하여 문화를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인생을 배웠다. 그리고 영화를 통하여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해방이후 읍내에까지도 극장이 생겨 누구라도 가까이 영화를 보러 다니기 시작한 이래 60년대 당시 이리에는 4개의 극장이 있었다. 이리극장, 삼남극장, 시공관, 동성극장이다. 이중 동성극장은 오늘날 구경찰서 사거리와 마동사무소 중간에서 남쪽으로 나 있는 동성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갈산2길을 만나는 지점부근에 있었다. 화성농장 자리에 창고를 개조하여 세워진 동성극장은 4개의 극장 중 가장 규모가 작고 시내에서 거리가 멀어서인지 입장료도 가장 쌌으며 그러기 때문에 우리 학생들은 싼 맛에(?) 종종 동성극장을 찾았다. 아마도 80년대의 소극장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60년대 중반에 다른 극장이 한편에 10원 일 때 동성극장은 5원에 두 편을 볼 수도 있었다. 동성극장은 TV시대가 전개되기도 전에 문을 닫았지만 다른 극장들도 80년대가 시작되면서 모두 사라지고 코리아극장이나 창인동의 제일극장등의 중형급 극장과 수많은 소극장 시대가 열렸다. 이젠 소극장 시대도 끝나고 2000년대에는 CGV, 메가박스, 롯데 시네마 등 전국적인 체인망을 갖춘 [화성농장터에 있던 동성극장 자리]

호화로운 초대형 극장시대가 막을 올렸다.

 

제8절 옛 기독교방송국 자리

 

1954년 12월 15일 최초의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국이 서울에 개국하였다. 이어서 1959년 3월 26일에 대구기독교방송이 개국하고, 같은 해 12월 23일에는 부산기독교방송이 개국하고, 이어 1961년 8월 1일에는 광주기독교방송이 개국하였다. 그리고 1961년 11월 1일에는 인화동 1가 2번지에 이리기독교방송(HLCM)이 개국되었다. 1938년에 이리에 개국되어 2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이리방송국(JBFK)이 1959년에 도청소재지인 전주로 이전함에 따라 방송국이 없어진 이리에 또 다시 방송국이 생겼다는 사실은 우리 이리시민들에게는 대단히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기독교 관련방송만이 아니라 이리를 비롯한 전북지방에 관한 뉴스가 제공되기 때문이요, 기독교방송국이 우리 이리에 주는 문화적 영향력은 매우 컷기 때문이다. 1967년에는 기독교이리방송국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0년이 지난 1971년 5월부터는 창인동 1가 54번지인 현재의 동서병원자리에 잠시 이주하였다가 1959년에 전주로 이전해버린 옛 이리방송국자리인 남중동 1가 128번지 현 시청 옆으로 이전하여 남중동 시대를 시작하였다. 1985년에는 지상3층 지하1층의 아담한 사옥을 지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구축하더니 1992년에 전주에 스튜디오를 설치하고 1995년 2월에 기독교 전북방송으로 명칭을 변경하고는 2002년 이후에 완전히 전주로 이전하였다. 아직 남중동에 빈 건물만 쓸쓸히 남아있어 옛 기독교방송국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인화동에 있던 기독교방송국은 네모진 성냥갑 모양으로 슬라브 건물로 지어진 아주 작은 방송국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60년대 중반 중학생 시절에 현장체험학습으로 방송국을 견학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그 자리에 상당히 고급스런 2층 양옥 2채가 지어져 있고 그중 한 채는 이일여중ㆍ고 운동선수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에 근무하던 송택주, 이지연 아나운서의 이름이 기억에 남아 있다. 송택주 아나운서는 이리기독교방송국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이지연 아나운서는 1983년에 KBS에서 주최한 남북이산가족찾기 운동의 사회를 맡아 온 국민의 눈물을 자아낸 유명한 아나운서로 유철종 아나운서와 함께 단숨에 인기스타가 되었고 지금도 원로 방송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 옛 이리 기독교방송국 자리]

 

제9절 옛 대화공립보통학교 자리

 

동산초등학교는 일제하인 1941년 4월에 대화공립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다. 당시의 이리읍에는 1913년에 개교한 이리일출공립국민학교(현재의 이리초등학교)밖에 없었는데 인화동과 동산동일대의 어린 학생들을 위하여 분교하여 2학급 80명으로 개교하였다. 당시의 교사는 현재의 구시장에 있는 삼화목재소 옆에 있는 안전섬유자리이다. 구시장에서 오래 사신 70대 어른들이 위치를 확인하여 주셨으며 실제로 이 학교를 1945년에 1학년으로 입학하였다가 해방이 되어 현재의 동산국민학교가 지금의 위치에 개교되자 그리로 가셨다는 금강동의 망산에 사시는 70살 되신 어른도 만난일이 있다.

개교당시에는 현재의 동산동 일대는 물론 금강동에서도 잿백이길을 통하여 이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1945년 9월에 조금 가까이 동산초등학교가 설립되었지만, 1946년 11월 북일국민학교 동부분교가 설립(1957년 신흥초등학교)되어서야 금강동 신흥동 일대의 어린 학생들은 장거리 도보통학의 어려움을 덜게 된다.

이 학교는 이리지방의 부호로 익산과 김제에 166정보의 토지를 가지고 200여 소작인을 거느렸던 김화 [대화공립보통학교 자리]

형농장주의 아들 김기곤이 토지 7만 5천평을 팔아 기증한 자금으로 교실 5칸,숙직실, 변소, 현관 등을 신축하였다고 하며 해방이 되자 현재의 동산초등학교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제10절 동익산역과 옛 동이리역 자리

 

1912년 3월 6일에 이리와 강경간의 호남선과 군산선이 개통됨에 따라 이리역, 이리보안구, 이리기관구가 개설되고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이리에서 김제까지, 1914년 1월 11일에는 목포까지, 그해 11월 17일에는 전주까지 철도가 개통되어 동이리역이 문을 열게 되었다.

1914년 11월 12일에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으며 처음에는 역의 이름을 구이리역이라 하였으며 1972 년 4월 대전철도국소 [옛 동이리 역사 자리]

속에서 순천철도국으로 이전 되었다.

동이리역은 익산역 기점 1.9㎞ 떨어진 동남방향인 인화동 2가 59번지에 위치한 전라선 하행열차의 첫 번째 역이었는데 1987년에 익산역에서 동익산역간 전라선 복선공사로 인하여 1987년 10월 30일 전라선을 남쪽으로 후퇴시키면서 인화동 2가 255번지 현재의 역사로 신축이전하게 되었다.

이는 전라선이 개통된 이후 익산역에서 동익산역까지의 선로가 시 중심지역 을 통과하고 있어 그간의 지역개발과 시내교통에 지장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함과 동시에 철도노선의 곡선을 직선으로 이설시킴으로서 통행의 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는 효과를 얻기 위해서 전라선 복선공사를 시행하였던 것이며 공사는 1986년부터 시작하여 1989년에야 준공되었다. 그리고 1995년 9월 1일에 익산시가 발족함에 따라 동익산역으로 역명을 변경하였다.

동익산역은 익산지방에서 전라선 승객과 화물의 운송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서 역무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현재 인화동, 동산동, 주현동이 역세권이나 무궁화호는 상ㆍ하행 각 1회만 정차하며 하루 상ㆍ하행 각 5회의 전주 군산간 통학열차 승객위주의 여객취급이 이루어지고 있고 과거에 화물 영업개시 당시 비료, 양곡, 무연탄 수송 중심으로 영업이 이루어졌으나 운송환경 변화에 따라 현재는 컨테이너 수송을 주 업무로 하고 있다. 운동장과 최근에 설치된 체육시설은 인화동과 동산동의 주민들이 아침저녁으로 운동하는 소중한 곳이 되었다. 새벽 6시면 상쾌한 음악에 맞추어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려는 주민들의 에어로빅이 한 시간이나 이어지고 저녁 어둠이 깔리기도 전에 운동장을 돌기 시작하는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동익산역은 이제 시민들의 휴식처요 시민공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역에서 운동과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을 위해 저녁이면 밝은 불을 제공하고 운동장을 고르게 해주는 등 세심한 배려를 은근히 바라고 싶다.

한편 73년간 동이리역이었던 자리는 현재 동산동 [동익산역 전경]

농협우측에 있는 제10호 미관광장이 되었다. 역이 있던 자리의 오른편에는 우시장이 있었는데 바로 지금의 삼화연립자리이다. 그 후 우시장은 현재의 소전길 부근으로 이주하였다. 그 옛날 비포장도로인 평동로를 따라 걷노라면 동이리역 못 미쳐서 우시장이 펼쳐져 있었고 인가는 없이 벌판이었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동익산역이 1987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고 그 자리는 남부 번화가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 새로 난 길이 장미7길이며 좌우에는 수많은 모텔과 주점과 음식점들이 즐비하나 경기침체와 영등동으로의 인구이동 및 번영으로 말미암아 남부는 매우 어려운 형편에 놓여지게 되었다.

 

제11절 익산등기소

 

예전에 시내에서 경찰서를 지나 동산동 방면으로 가는 길에는 거의 유일하게 서있던 나름대로 유명한 관공서가 바로 등기소이다. 1918년 7월 1일에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원 이리출장소로 출발한 이리등기소는 1922년 7월 2일에 전주지방법원 이리출장소로 개칭하였고 1947년 1월 1일에는 전주지방법원 이리등기소로 개칭되었다. 등기소의 처음 위치는 현재의 구시장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해방 이후에는 오랬동안 현재 갈산동 62번지에 지금도 남아 있는 옛 익산금융조합건물을 이용하여 사무를 보다가 1970년 4월에 공터로 있던 현재의 자리에 청사를 지어 이사하여 왔음은 알 수 있지만 1918년 처음 개원한 이후부터 해방이후 익산금융조합건물에서 업무를 보기까지의 등기소 위치는 정확히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익산군과 이리시가 통합됨에 따라 1995년 6월 12일에 전주지방법원 익산등기소로 이름을 바꾸었고 2000년 2월 7일에 전주지방법원 북익산등기소와 통합되었다. 이 건물에는 1층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익산등기소]

에서는 등기소가 사무를 보고 있으며 2층에는 1995년 9월 1일에 개설된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익산시법원이 들어서게 됨에 따라 등기소 주변에는 수많은 법무사 및 변호사사무실이 들어서게 되었고 이에 따라 주변의 상업발달이 크게 영향을 받아 주변 상권이 눈에 띄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