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연구

중앙동(익산 향토지 제 2권)

청담(靑潭) 2009. 10. 11. 22:32

※익산문화원에서 발행한 익산향토지 제2권(2006)중 필자가 조사하여 정리한 부분입니다.

 

제2편 중앙동

 

제1장 중앙동의 연혁과 현황

 

제1절 중앙동의 연혁

 

행정동 중앙동은 3개의 법정동 (창인동, 중앙동, 갈산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으로는 송학동과 모현동이 접하고 있고, 북으로는 남중동이 있다. 동으로는 마동이 있고 남으로는 평화동과 인화동이 있다.

과거 오랫동안 독립된 행정동이었던 3개동이 외곽지역의 개발로 인구가 이동하여 인구공동화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이제는 하나의 행정동으로 묶이는 비운을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전주부의 속현이었던 옛 옥야현 지역이 익산군에 편입된 것은 1906년의 일이었다. 이때 편입된 옥야현 지역은 5개면(남일면, 동일면, 남이면, 서일면, 북일면) 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중앙동지역은 남일면의 이리에 속하였다. 1911년에 익산군청이 금마에서 남일면으로 옮겨오면서 남일면은 익산의 중심이 되었고 1912년에는 호남선이 개통되며 1914년에는 남일면(이리, 마동리, 동산리, 목천리)이 동일면(신흥리, 금강리, 대장촌리, 석탄리)과 합쳐져서 익산면이 되고 남이면과 서일면이 합하여 오산면이 되며 북일면은 그대로 북일면이 되었다. 1911년 당시 이리의 인구는 3,776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익산면은 8개의 리(里)가 있었는데 중심부인 이리(오늘날의 인화동, 주현동, 갈산동, 중앙동, 창인동, 평화동 지역)를 비롯하여 마동리, 동산리, 석탄리, 대장촌리, 신흥리, 금강리, 목천리가 있었다.

1917년에는 익산면이 지정면(중심면)이 되면서 익산시의 모체가 되었다. 이때 거리가 먼 석탄리와 대장촌리는 춘포면에 주고 신흥리와 금강리는 북일면에, 목천리는 오산면에 넘겨주게 된다.

1931년 4월 1일 익산면이 익산읍으로 승격하고 그해 11월 1일 이리읍으로 개칭되었다. 1947년에는 이리부가 되어 익산군과 분리되었고 1949년에 이리시로 개칭하였다. 1995년 5월 10일 도농 복합도시 형태로 익산군과 통합하여 익산시가 되었다. 행정운영동 중앙동의 변천사는 다음과 같다.

○1933년 12월 1일 이리읍 일출정, 굉정, 영정일· 이정목, 경정, 욱정으로 명명되었다.

○1946년 12월 1일 동제도 시행에 따라 북창동, 철인동, 호남동, 신흥동 갈 산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57년 9월 14일 다시 북창동을 창인동 1가로, 철인동을 창인동 2가로 개 칭하였다.

○1961년 7월 1일 호남동을 중앙동 1가로, 신흥동을 중앙동 2가로, 상신동 (上新洞)을 중앙동 3가로 개칭하였다.

○1998년 2월 2일 창인동, 중앙동, 갈산동의 행정업무를 중앙동에서 총괄하 게 되고, 동사무소를 중앙동에서 창인동 1가 221-1로 옮겼다.

 

1. 중앙동(中央洞)

 

이리의 중심가로 중앙에 위치했다 하여 지어 붙인 동명이다. 이리역이 들어선 뒤 1933년 정제(町制)실시에 따라 이리읍(裡里邑)을 나누어 일부를 영정(榮町) 일정목(一町目), 영정(榮町) 이정목(二町目), 경정(京町)이라 했던 것을 해방이후 호남동(湖南洞), 신흥동(新興洞), 상신동(上新洞)으로 개칭했다가 1957년 9월 4일 행정구역 재조정에 의하여 중앙동 1가와 2가, 3가로 되었다가 1974년 7월 4일 중앙동이 되었다. 1998년 2월 2일 창인동과 갈산동을 합쳐 행정 운영동 중앙동이 되었다. 일제시대에 이곳을 영정(榮町)이라고 한 것은 가장 번화가이기에 붙인 이름이며 익산면 때의 익산면사무소도 이곳에 있었다.

역앞길 남쪽에 위치하여 익산의 일백년 역사에 가장 번화가였던 중앙로(일명 영정통)가 있는 곳이나 1990년대부터 영등동지역이 개발되면서 그 명예를 영등동에 넘겨주고 말았다.

 

2 창인동(昌仁洞)

 

1933년 12월 1일 일본인들이 정제(町制)를 실시함에 따라 이리읍을 나눌 때 이지역의 동반부 일부를 일출정(日出町)이라 하였고 서반부는 삼선(三線)의 열차가 닿는 이리역을 끼고 있어 기차소리가 요란하다하여 굉정(轟町)이라 하였다. 1946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일출정은 북창동으로 하고 굉정은 철인동으로 하였다. 철인동은 철도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1957년 9월 14일 행정구역 조정에 의하여 북창동과 철인동을 합하여 창인동 1가, 창인동 2가로 하였다가 1974년 7월 1일 행정구역 재조정에 의하여 창인동이 되었다. 창인동이란 이름은 북창동과 철인동에서 한자씩 취한 것이다. 철인동 일부는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때 크게 파괴되어 그 후 재건되었다. 1998년 2월 2일 창인동은 중앙동, 갈산동과 함께 통합되어 행정 운영동 중앙동으로 개칭되어 법정동으로만 남아있게 되었다. 창인동 2가는 남북로 좌편으로 거의가 익산역이며 창인동 1가는 역앞길 북쪽으로 중앙시장을 끼고 있는 익산의 핵심 번화가 지역이다.

 

3. 갈산동(葛山洞)

 

갈산동 지역은 철도부설과 1912년 호남선 개통이전에는 황량한 야산으로 칡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1911년 익산군청이 남일면으로 옮겨온 후에 일본인들의 주거지로 되어서 지금도 일본식 건물이 여러채가 남아있다. 1914년 익산군의 남일면과 동일면을 합해서 익산면이라 하고, 익산면 8개리 중의 하나인 이리(裡里)에는 14개 마을이 있었는데 갈산리는 그 중의 하나였다. 1933년에 욱정(旭町)이라 했다가 1945년 해방 후 갈산동이 되었다. 1998년 2월 2일 중앙동, 창인동과 함께 통합되어 행정운영동 중앙동으로 개칭되어 법정동으로만 남게 되었다.

역앞길 아래쪽으로 인북로 좌우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법정동인 중앙동과 접하며 오른쪽은 동성길을 두고 법정동인 주현동과 접하고 있다.

 

제2절 중앙동의 현황과 모습

 

행정동 중앙동의 행정구역은 20개통 83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고 면적은 0.88㎢ 로서 2006년 10월 현재 총 가구수 2,446가구에 총 6,583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그중 법정동 중앙동과 창인동은 익산역의 소재로 인하여 교통의 중심지이며 익산의 일백년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익산상업의 중심지로서 중앙시장 등 상가가 밀집되어 있으나 현재는 몹시 쇠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서쪽으로는 송학동과 모현동이 접하고 있고, 북으로는 남중동이 있다. 동으로는 마동이 있고 남으로는 평화동과 인화동이 있다. 총 2,446가구 중 농가가 199가구이고 총인구는 14개 행정동 중 가장 적다.

현 중앙동 신권식 동장님은 주민들의 요망사항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주셨다. 첫째, 역세권 개발 및 원 도심 활성화. 둘째, 철도관사 지역 및 창인아파트 재개발. 셋째, 재래시장 환경개선 및 시설의 현대화. 넷째, 구 경찰서 부지의 재개발. 다섯째, 도심지내 공영주차장 확보 등이다. 하루빨리 주민들의 소망이 이루어져 다시 중앙동이 활기를 찾아 왕년의 번영하던 모습을 되찾기를 기대한다. 한편 인근지역인 모현동, 송학동, 평화동 지역이 재개발되어 더 많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이미 확정된 KTX 익산역 역사가 건립되어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고 있어 주민들은 상권이 다시 되살아나기만을 크게 고대하고 있다.

 

1. 중앙동

 

법정동 중앙동에는 현재 총 737가구에 1,59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중앙동이 한창 번창하던 20여 년 전인 1985년의 통계를 보면 총 972가구에 4,364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으니 20년만에 삼분의 일로 인구가 확 줄어 버린 것이다.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로 그 도시의 가장 중심지역에 중앙동이라는 명칭이 붙여져 있다. 그러나 산업 [익산역 앞의 중앙로 전경]

화가 이루어지면서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고 시 외곽지역에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아파트가 들어서고 인구와 상권이 중심지에서 개발지역으로 이전함에 따라 중앙동은 상업이 쇠퇴하고 인구공동화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우리 익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신동과 모현동과 영등동이 개발되면서 인구가 빠져나가고 익산의 가장 번화가요 상업의 중심지이던 창인동과 중앙동은 이제 그 위상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창인동과 중앙동이 갈리는 역앞길은 1977년 익산역 열차폭발사건이 터지기 전만 하여도 익산의 최고 번화가요 그야말로 중심중의 중심도로였다. 호남선과 전라선과 군산선이 갈라지는 철도의 중심인 이리역은 전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큰 역이었고 이른 아침부터 이리역을 빠져나오는 통학생들의 물결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루 내내 이리역은 사람들로 북적였으니 1960년대 초에 ?낮에는 10만, 밤에는 6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리역 앞에는 버스정류장이 있었기에 실로 하루 수 만 명의 인파가 기차나 버스를 이용하여 이리로 들어오고 모두들 이리역 앞을 지나 시내로 나아갔던 것이다.

기껏해야 현재의 행정동으로는 중앙동과 인화동, 송학동, 모현동, 동산동, 마동, 남중동, 평화동이 전부였던 익산시민들은 자나 깨나 익산역에서 당시의 시공관에 이르는 역앞길을 벗어나진 못하였다. 그저 ?시내에 나갔다 온다?는 말은 이심전심으로 바로 이곳에 다녀온다는 말로 이해되었다. 중앙동에는 역앞길에는 유명한 길손다방, 시민사장, 문성당, 황금당을 위시하여 수많은 서점과 옷가게들이 모두 모여 있어 그곳이 바로 시내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역앞길에는 지금까지도 시민사장이 가업을 이어가고 있어 지날때마다 왠지 흐뭇한 기분이 들게 해 준다.

역앞길 보다 더 유명한 [정겨운 옛 상가] 또 하나의 길이 바로 영정통이다. 일제 때부터 번영 로이기에 붙여진 영정통은 일반적으로 평화동에 있던 이리극장에서부터 제일은행까지를 말하였다. 해방이 될 때까지도 역앞길의 북쪽으로는 민가가 있었을 뿐 상가는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였었다고 한다. 영정통은 나사점(양복지 판매점)과 양복점과 양장점, 구두점과 시계점이 즐비하였으니 익산시에서 가장 화려한 거리요, 이리극장과 삼남극장이 있어 하루 종일 인파가 북적인 거리였다. 실로 해방이후 통학생들과 시내 중심권에 사는 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이리극장과 삼남극장과 시공관을 이어주는 제일은행 사거리를 중심으로 살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여성의류가 먼저 기성복으로 바뀌고 1980년대에는 남성복도 기성복으로 의생활이 바뀌게 됨에 따라 거리의 모습도 크게 바뀌게 된 것이며 70년대 초반부터 텔레비전이 보급되어 영화관도 자연적으로 쇠퇴하게 되어 대중문화의 산실인 세 극장도 문을 닫고 말게 되었다.

이외에도 70년대 익산에서 가장 큰 여관이던 영풍여관과 가장 현대식 백화점이었던 이도백화점은 지금은 건물은 그대로이나 이름도 명성도 사라지고 없다. 80년대에 명성을 날리던 하노바 호텔과 코리아 극장도 명성을 잃었다. 이제 그 화려한 영화는 어디로 가고 역앞길과 역사가 옮겨지면서 새로 뚫린 4차선 중앙로의 좌우 상가를 제외하고는 영정통과 일명 텍사스거리의 수많은 음식점과 술집들은 대부분들이 문을 닫았고 인적 드문 한적한 마을이 되고 말았다. 지금 한번 찾아가 보노라면 빈 가게가 많고 공터가 눈에 띄는 등 텍사스거리의 쇠락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이 부동산 거래도 잘 이루어지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한다. 다행히 역앞길과 열차폭발사건 이후 새로 난 중앙로에는 아직도 제일은행, 중소기업은행, 전북은행, 우리은행, 국민은행, 신한은행이 있고 우체국길에는 농협익산지점과 거의 유일한 관공서로 우체국이 건재하고 있어 아직도 중앙동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2. 창인동

 

법정동 창인동에는 현재 1,083가구에 2,49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창인동이 한창 번창하던 20여 년 전인 1985년의 통계를 보면 1,792가구에 7,505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으니 인구가 삼분의 일로 크게 줄어 버린 것이다. 창인동에는 익산역이 있다. 1977년의 열차폭발사건이 있기 전에는 [옛 번화가인 역앞길] 익산역은 실로 익산최고의 중심지였다. 거대한 이리역 앞에는 마이크로버스와 시내버스 그리고 시외버스가 모이는 버스터미널이 있어 기차와 버스를 통해 시내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수 천 명의 교복을 입은 남녀 중ㆍ고등학생들이 아침저녁으로 쉬임없이 역 앞을 오갔다.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경에 일어난 이리역 폭발사건은 익산시를 일거에 변모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준 대사건이었다. 민수용 화약을 싣고 광주로 가기 위해 하행선에 대기중이던 대전기관차사무소 소속 제1052 화물열차에 실린 다이너마이트 등 폭약 24.810t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때의 폭발로 깊이 15m 폭 40m의 큰 구멍이 생겼으며 이리시의 상당지역이 폐허로 변했다. 당시 피해규모는 사망 59명, 중상 185명, 경상 1,158명, 이재민 9,973명(1,982세대)에 피해액 61억원이었다.

사건의 원인은 화약수송원이 소주를 마신 후 열차 내에 촛불을 켜놓고 잠들었다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 포장 상자에 옮겨 붙어 발생했다. 그러나 한국화약과 철도청의 허술한 수송 과정과 호송 방법에도 문제가 있었다. 즉 한국화약이 총포화약류단속법과 이에 따른 시행령 등의 규정을 무시한 채 다이너마이트 등 폭약과 뇌관 36상자를 실었고, 위험물 취급 무자격자를 동승하는 과오를 범했다. 철도청은 화약류는 되도록 도착정거장까지 직통하는 열차에 의해 운송되어야 한다는 철도운송규정을 무시하고 화학열차를 역 구내에 22시간 이상 방치했고, 위험표지판의 부착이나 비상소화전 등의 방화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익산은 이를 계기로 역 주변의 판잣집 등 무질서하게 형성됐던 시가지를 정비하고 도로망도 격자형 체계로 크게 바뀌었다. 이 사고는 익산의 도시 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도시 발전에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대규모의 아름다운 역사와 광장을 갖추었던 익산역은 규모와는 달리 그동안 상당히 소외되었다. 한국경제의 눈부신 성장으로 80년대 이후 고속도로가 여기저기 건설되고 90년대부터는 너도나도 자가용을 가지게 되면서 철도는 철저히 외면당하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지난 2004년 4월에 개통된 KTX는 교통과 물류 중심도시인 익산에 지역경제 활성화와 관광사업에 있어서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 [역앞 중앙로 모습]

켰다. 시속 300km인 KTX의 개통으로 서울과 익산의 운행시간이 1시간 50분대로 줄어들어 반나절 생활권을 실행하게 됐으며 KTX의 개통으로 시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했다. 익산시와 인근 지역민들이 KTX를 애용함으로써 다시금 익산역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전주지역 인사들에 의해 강력한 KTX환승역사 이전건설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2006년 10월에 익산에 그대로 두 고 건설하기로 일단락되었다.

장차 익산역이 환승역으로서의 경제적 효과, 역세권 개발을 통한 도시 발전은 물론 시간 단축에 따른 기업 환경 개선 그리고 관광 여건 개선에 따른 관광객의 증가와 시민들의 편리한 수도권 진입 등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전국 최고의 기업하기 좋은 도시, 문화관광의 도시로 발돋움함으로써 새로운 익산발전의 도화선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밤에까지도 북적거리던 이리역 광장은 사건들도 많았던지 역파는 항상 바쁘고 또 그래서 유명한 파출소였다. 이제 역전파출소는 없어졌으나 건물은 아직도 초라하게 남아있어 그 옛날을 생각나게 한다.(그러나 이 역전파출소 건물도 2006년 12월에 철거되었다.)

배차장에는 전주군산간 직행버스 아닌 일반 시외버스가 주차하는 곳으로 버스통학생들이 법석대던 곳이었고 그 앞에는 포장마차형 주점들이 늘어서 있었으나 60년대 중반에 평화동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배차장파라는 주먹패들도 있었다.

창인동에는 철인동이라는 성매매업소집단구역이 있어 이리의 부끄러움의 대명사였다. 이리역에는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서성거렸고 청소년들까지도 강한 호기심으로 관심을 두었다. 폭발사건 후 철인동이 철폐되어 모두들 환영하더니만 오늘날 음성적인 성매매가 더욱 기승을 부려도 모두가 부끄러움을 별로 느끼지 않는 오히려 더 부끄러운 세태가 되고 말았다. 2004년 9월부터 성매매금지법이 발효되어 사라지는 듯하던 대형유리창안의 성매매 여성들과 업소들이 주변의 도시에서는 다시 살아나서 성매매 여성들이 유리창 안 붉은 등불아래서 마치 성의 노예처럼 성의 노리개가 되어 반라의 모습으로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우리 익산에는 그런 모습들이 보이지 않아 천만 다행이다. 뿐 만 아니라 노래방 문화도 타 도시처럼 그렇게 천박스럽지 않은 점에서도 우리 익산시민들의 도덕적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아 흐뭇하기 짝이 없다.

해방이후 중앙시장은 기존의 구시장과 함께 익산의 가장 대표적인 시장으로 성장하였으나 1975년에 북부시장이 개설되어 번창하고 90년대 이후에는 인구가 영등동 지역으로 이동함에 따라 급격한 쇠락을 보이더니 2000년대 이후 웬만한 중산층과 젊은층은 대형마트를 찾을 뿐 철저히 재래시장을 외면함에 따라 이제 설자리를 잃고 말 지경에 이르렀다. 경제발전과 사람들의 의식주생활수준의 변화가 너무도 커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재래시장 활성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마 구호에 그치고 말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중앙시장 1층은 시장을 유지하기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보이지만 2층은 사람들의 왕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90년대에는 옛 삼남극장자리에 백화점이 들어섰다가 문을 닫고, 옛 군청자리인 영빈관예식장 앞에 송원백화점이 들어서서 최근까지 안간힘을 쓰면서 운영되더니 다시금 문을 닫았다. 1979년에 익산군 청사가 함열로 옮긴 후 옛 청사를 리모델링하여 번창하던 영빈관 예식장도 문을 닫고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옛 시공관 자리에는 우리은행이 자리 잡았고 옛 시청 자리에는 1980년대에 보배빌딩이 지어져서 익산의 가장 유명한 건물로 등장하였는데 이제는 SK건물이 되어 삼성증권이 입주해있고 그 옆에는 알리안츠생명 건물이 있다.

창인동 2가는 바로 익산역이다. 익산역 광장의 북쪽으로는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었는데 열차폭발사건이 있은 뒤 3-4층 건물들이 들어서서 큰 상가가 형성되어 번성하였으나 지금은 예전만 못한 모습이다. 역 광장의 남쪽으로는 최근 KTX운행으로 익산역이 활성화되면서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활기가 생기고 있다. 그리고 역광장의 오른편으로는 철도 관사촌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관사촌은 창인동에서 평화동에 걸쳐 있고 거의 대부분이 창인동에 속하나 이미 평화동에서 소개한 바 있다. 현재에는 대부분이 민간에게 불하되었으나 아직도 승무원 숙소만이 남아 운영되고 있다. 주민들이 아직도 오래된 일본식 목조건물을 개조하여 살거나 고치지도 못하고 그냥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하루빨리 재개발되어 말끔한 마을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주민들의 간절한 소망이 있다.

 

3. 갈산동

 

법정동 갈산동에는 현재 626가구에 1,49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갈산동이 한창 번창하던 20여 년 전인 1985년의 통계를 보면 896세대에 3,865명이 살고 있었으니 인구가 당시의 거의 삼분의 일 수준이다. 익산시 31개 법정동중 가장 면적이 좁은 동이다. 그저 4차선 인북로가 뚫리기 전에는 제대로 된 큰 길 하나 없던 마을로 일제시대 초기 이래로 일인들의 주택가로 발전하였다 하며 오늘날까지도 인북로 동편은 주현동과 함께 주택가로 남아있다.

1930년 당시 익산군의 중심부인 익산면의 이리에는 일본인이 893세대에 남자가 1,627명, 여자 1,652명으로 총 3,279명이나 되었는데 조선인이 6,166명이었으므로 전체인구의 35%가 일본인이었던 것이며 갈산동에 얼마나 많은 일본인들이 살았는지 쉽게 [중앙사거리 모습]

짐작이 갈수 있는 일이다. 이는 당시의 서울이나 개항장이었던 도시들보다도 일본인의 인구비율이 더 높은 수치이다.

갈산동의 중심은 말할 것도 없이 구경찰서 사거리 즉 중앙사거리이다. 오늘날 경찰서가 2003년 2월에 모현동으로 큰 청사를 지어 옮기고 나서 알아주는 이 없는 사거리가 되어버렸지만 80년대와 90년대까지는 익산의 중심지로서의 큰 위상을 가졌던 곳이다. 익산을 오가는 차량들이면 거의 한번쯤은 지나치는 교통의 요지였던 것이다. 시내의 한 복판에 위치했던 경찰서는 이제 중앙지구대가 되어 중앙, 모현, 남중, 오산 등 4개의 파출소를 관할하며 관할구역은 중앙동, 남중동, 모현동, 송학동, 오산면지역이다.

갈산동에는 역사 오랜 중앙초등학교와 관음사가 있다. 그리고 구 경찰서 맞은편으로 원불교이리교당과 전일상호저축은행이 있다.

중앙초등학교 아래에서 [중앙초등학교의 모습]

옛 오고파 다방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과거부터 가구점들이 들어서 번성하였으나 이제는 쇠락을 면치 못하고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모습이다.

중앙초등학교는 1945년 광복이후 그해 10월 이리국민학교에서 분리하여 개교한 이래 1949년에는 이리중앙국민학교로 개칭하였고 말 그대로 한 시절 이리국민학교와 함께 익산의 중심지에 위치한 가장 대표적인 학교였으나 이제는 한 학년에 3개반이 겨우 구성되는 낙후되고 인구가 적은 중앙동에 소재한 변두리 학교마냥 되고 말았다. 그러나 금년 2월에 61회 졸업생까지 총 2만 7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제2장 중앙동의 전통마을

 

제1절 중앙동

 

□호남동(湖南洞)

익산역에서 앞쪽에 있던 마을로 지금 익산역 광장앞의 중심지를 말한다. 호남선 철길을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후일 중앙동 1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신흥동(新興洞)

호남동 남쪽의 마을로 도시가 형성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흥리라 하였다. 현재 구삼광교회와 제일건설 빌딩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말한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지명 등을 보면 신흥리, 신기촌, 신촌, 신성리, 새터, 새말, 등이 있다. 후일 명칭이 중앙동 2가로 변경되었다.

□상신동(上新洞)

현재 중앙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이 곳 역시 도시가 형성되면서 새로이 생긴 동네를 말한다. 신흥리의 위쪽에 형성된 마을이기 때문에 이와 구분하기 위하여 상신동이라 했다. 후일 중앙동 3가로 개칭되었다.

□원정(元町)

일제시대에 텍사스 거리 중심지인 고란다방에서 직행하여 역전의 정류소로 뚫린 골목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농협1길을 말한다.

□말광정(末廣町)

일제시대에 김외과 병원에서 서쪽 편 영정통으로 가는 길을 말광정이라 하였다. 지금의 농협2길을 말한다.

□수정(壽町)

일제시대에 중앙국민학교에서 이리극장 쪽으로 가는 골목을 부른 이름이다. 지금의 우체국1길을 말한다.

□유정(柳町)

지금은 동서관통로(중앙로)가 된 이전의 골목길을 부른 이름이다.

 

제2절 창인동

 

□곡마당

익산역 북쪽에 있었던 마을로 익산역 폭발사고 이전까지만 하여도 빈민들의 판잣집 여인숙이 많았고 풍기도 문란했었다. 구릉을 따라서 형성된 마을로서 마치 활과 같이 구부러진 모습의 지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여진다. 마당은 넓은 터를 의미하기 때문에 구릉으로 형성된 넓은 터에 형성된 마을이다. 활 궁(弓)마당이 나중에 곡마당으로 변하였다.

□시장통

중앙시장 주변에 있는 마을이다.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됨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자연히 시장통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에는 상가만이 번성하고 있고 사람들은 신흥 아파트 단지로 모두 이사하여 생활하고 있어서 밤에 거주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

□신한장(新韓莊)

일제시대 때 현재의 중소기업은행 자리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 이리지점 직원들의 사택이 들어서면서 형성된 마을로 해방 후에는 신한공사(新韓公司) 직원들의 사택이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라북도 농업사정》에 있는 1936년도 〈전라북도 지주일람〉에 의하면 도내 100정보 이상을 소유한 일인농장 29개 중 이리읍에 사무소를 둔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에서 소유한 농장은 전라북도 각 군에 걸쳐 있었으며 밭이 6,798정보이며 밭이 597정보로서 총 7,395정보나 되었다. 소작인의 수가 10,671명이요, 직원이 l28명에 사음의 수가 무려 136명이나 되는 전라북도 내 최대의 지주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은 중소기업은행 자리에 있었으며 6ㆍ25사변 당시에는 중앙대학교 이리분교이기도하였다. 신한장은 현재 이리침례교회 뒤편에 있는 집들이다. 인북선(仁北線)이 개통되면서 대부분의 집들이 철거되었는데 해방 후 한때는 이 집들이 이리에서 가장 좋은 집에 속하였다. 침례교회로 사용된 터에 있던 집들이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의 사무실이었다고도 한다. 현재의 중앙동 사무소 뒤편을 말한다. 지금도 일본식 집이 여러

채 남아 있어 일제당시 가장 부유한 일인들의 마을임을 엿보이게 한다.

 

 

 

 

 

 

 

 

 

[남아 있는 일본식 가옥들]

 

□철인동(鐵仁洞)

익산역 북쪽 철도부지에 있었던 마을이다. 철인동이란 이름에서 철(鐵)자는 익산역의 철도부지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시대에는 기차의 시끄러운 소음이 심하다 하여 굉정(轟町)이라고 불렀다. 굉(轟)은 차(車) 모이는 소리 굉, 우르릉 굉 등 시끄럽다는 뜻인데 역에 기차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니까 마을 이름을 굉정이라 하였다. 철인동은 창인동 2가로 명칭이 바뀌었다.

□관사촌(官舍村)

1912년 3월 6일에 이리역이 영업을 개시하게 되어 창인동과 평화동에 걸쳐 관사촌이 형성되었는데 현재 대부분 창인동에 속한다. 관사촌에는 역장관사, 보선소장 관사 등 대형관사에서부터 하급직원의 8등 관사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관사 및 공동목욕탕, 하급직원들의 공동기숙사 등 많은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초창기에는 인근의 작은 역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이곳에 살면서 출퇴근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이리철도병원이 있었다는 어른들의 증언을 들었으나 위치는 확인하지 못한다. 복강(福岡)의원으로 불렸던 이리 최초의 병원인 철도병원은 1920년대 당시 2명의 의사와 3명의 간호원이 근무하였고 8개의 병실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많은 일본식 집들이 남아있으나 대부분 민간에게 불하되었고 그동안 집 관리들이 잘 되지 못하여서인지 외형이 낡고 누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에도 승무원 숙소만큼은 남아있다. 현재의 관사촌내 길은 매우 협소하게 보이는데 당시에는 비교적 큰 도로로 형성한 것이라고 한다. 필자도 1960년대 중반 이리역과 철도가 작은 이리에서는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던 시절에 이곳 친척의 관사에서 1년간 학교에 다닌 일이 있거니와 목욕탕에 다니거나 송학동 굴다리를 드나들던 아련한 추억들을 가지고 있다. 하루빨리 관사촌이 재개발되어 주민들이 깨끗한 거리와 아늑한 집에서 살게 되기를 기대하며 익산역 부근이 산뜻한 모습으로 바뀐 모습을 보고 싶

다.

 

[일제시대 철도병원의 모습] [철도관사촌의 중앙길 모습]

 

제3절 갈산동

 

□갈산리(葛山里)

갈산은 칡넝쿨이 우거진 산을 일컫는다. 20세기 초 만경강 일대의 치수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리의 구릉지에서부터 만경강까지 갈대밭이었다 하여 노전백리(蘆田百里)의 황야였으며 구강을 비롯한 배후습지는 개연꽃이 만발할 때 옥야홍련(沃野紅蓮)이라고 불렀다 한다. 한자로 갈(葛)은 모두 칡을 지칭하는 글자이니 갈대가 우거진 만경강(泗水)주변의 구릉지대에 칡넝쿨이 우거진 산이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1912년 호남선 개통이전에는 실제로 갈산동 지역은 황량한 야산으로 칡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갈후리(葛後里)

주현동 지역을 속리의 뒤에 있다하여 후리라고 한 것을 보아 칡넝쿨 우거진 갈산리 뒤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갈후리라고 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제3장 중앙동의 문화유적과 유물

 

제1절 익산역

 

국철이 1911년 3월에 착공하여 1912년 3월 6일에 이리와 강경간의 호남선과 군산선이 개통됨에 따라 이리역 이리보안구 이리기관구가 개설되고 같은 해 2년 10월 1일에는 이리에서 김제까지, 1914년 1월 11일에는 목포까지, 그리고 전라선은 사철인 전북철도주식회사가 공사를 맡아 1914년 5월에 착공하여 그해 11월 17일에는 전주까지 철도가 개통되어 익산역이 문을 열게 되었다.

호남선 철도는 1894년 프랑스의 휘브릴 회사에서 우리나라 정부에 철도의 부설권 허가를 요구한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를 가진 나라들과 앞을 다투어 철도부설권 쟁탈전을 벌였으며 이에 대하여 우리정부가 1898년 6월 농상공부의 제의로 의정부회의에서 본 철도의 관설안을 결의하여 고종황제의 재가를 받아 이를 주한외국공사들에게 통보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이후 일본은 통감부가 우리정부를 크게 괴롭혔으며 주권을 빼앗은 직후부터 공사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군산선은 호남선 철도의 부설공사 당시 군산지역 공사라는 이름으로 함께 계획되어 호남선 철도와 함께 착공되었다. 대전에서 목포까지의 호남선 철도공사와 함께 시작된 이 군산선 철도는 익산정차장을 분기점으로 하여 군산항에 이르는 철길을 개막하는 것인데 이때 군산지방의 일본인 거류민단이 주동이 되어 소위 호남선철도기성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철도부설추진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그들은 철도공사에 필요한 각종 중량급 자재를 운송 보급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지적하여 군산항을 통한 해운과 단거리 수송의 이점을 주장하면서 군산지선철도공사를 선행시키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군산선 철도공사는 자재운송수단의 일환으로 호남선 철도의 본공사에 선행하여 군산만까지 철도입선을 부설토록 하였다. 이 철도는 1911년 6월에 착공하여 1912년 3월 6일에 개통하였으니 호남선 주요구간인 익산에서 강경까지의 철도개통일과 같은 날이었다.

전라선은 1913년 1월 전북철도주식회사가 부설면허를 받아 1914년 2월에 회사를 설립한 후 본사를 전주에 두고 5월에 착공하여 10월에 준공하고 11월 12일에 이르러 협궤철도의 부설을 완료하고 17일부터 여객운송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익산역은 1912년 3월 6일 이리역(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여 호남선과 전라선 그리고 군산선이 갈리는 철도교통의 요지인 이리시의 관문이었다. 익산역은 서울에서부터 247.2㎞, 목포기점 171.8㎞, 여수기점 198.3㎞의 기점인 익산시 창인동 2가 1번지상에 위치하고 호남철도의 요충인 분계역이며 전라도의 교통관문이다.

1977년 11월 11일의 화약열차 폭발사건으로 구역사는 부서지고 남쪽으로 80m 지점에 새로운 역사가 78년 11월 10일 준공되었다.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경에 일어난 이리역 폭발사건은 익산시를 일거에 변모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준 대사건이었다. 민수용 화약을 싣고 광주로 가기 위해 하행선에 대기중이던 대전기관차사무소 소속 제1052화물열차에 실린 다이너마이트 등 폭약 24.810t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 때 폭발로 깊이 15m 폭 40m의 큰 구멍이 생겼으며 이리시 상당지역이 폐허로 변했다. 당시 피해규모는 사망 59명, 중상 185명, 경상 1,158명, 이재민 6,326명(1,365세대)에 피해액 61억원이었다.

사건의 원인은 화약수송원이 소주를 마신 후 열차 내에 촛불을 켜놓고 잠들었다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 포장 상자에 옮겨 붙어 발생했다. 그러나 한국화약과 철도청의 허술한 수송 과정과 호송 방법에도 문제가 있었다. 즉 한국화약이 총포화약류단속법과 이에 따른 시행령 등의 규정을 무시한 채 다이너마이트 등 폭약과 뇌관 36상자를 실었고, 위험물 취급 무자격자를 동승하는 과오를 범했다. 철도청은 화약류는 되도록 도착정거장까지 직통하는 열차에 의해 운송되어야 한다는 철도운송규정을 무시하고 화학열차를 역 구내에 22시간 이상 방치했고, 위험표지판의 부착이나 비상소화전 등의 방화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고 보도되었다.

피해보상은 인명피해 293명의 유족 및 중상자에게 2억 9천 3백만 원의 피해보상금이 지급되었고 장기구호를 받던 이재민들에게는 모현동 아파트 26개동이 완공됨으로써 이듬해인 1978년 9월 8일 입주하였으며 나머지 세대들은 송학동 신영마을 등의 자활촌을 마련하여 입주하게 되었다.

전라선, 군산선, 호남선 철도 주변 일대의 공업단지에서 생산되는 공산품의 수송수요의 급증과 영산강 유역의 물동량을 감당하기 위하여 계획된 호남선 철도의 복선화작업은 1차적으로 대전과 익산간을 우선 개통시킬 목적으로 1968년에 1월에 착공하여 1978년 1월 10일애 개통되었다.

2000년 1월 1일부터는 익산지역 관리역으로 직제가 변경되어 전라북도내 총 31개 역에 대한 철도운영과 그 부대사업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고 있으며 2004년 4월 현 역사의 증, 개축과 꿈의 고속열차 KTX개통으로 고객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제 호남, 전라, 군산선을 분기하는 철도교통의 요충지 일 뿐만 아니라, 전라남북도의 교통관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일일 평균 만여 명의 고객이 철도교통을 이용하는 호남 제일의 역이다. 옛부터 이리시는 철도교통의 요지로 낮과 밤의 인구가 크게 달랐기에 ?낮에는 10만, 밤에는 6만?이라는 말이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고속버스가 운행되기 이전에는 실로 이리역은 이리시의 가장 중심이었던 것이니 이리에서 타지방으로 가는 사람도 이리역을 거치고 다른 지방에서 이리시로 들어오는 사람도 반드시 이리역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리시로 학교를 다니는 그 수많은 학생들은 학교에 갈라치면 하루에 반드시 두 번씩 이리역을 드나들었다.

 

[구 이리역의 모습] [신 익산역의 모습]

 

1970년부터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고속버스에 승객을 빼앗긴데다가 1990년대

부터는 자가용시대가 전개됨에 따라 영영 철도여행은 쇠퇴하는 줄로만 여겼더니만 이제 꿈의 고속열차 KTX개통으로 이리역이 증축되고 승객이 늘어나면서 이리역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역 앞 상가들의 상업활동도 크게 고무되고 있는 모습이다.

현재 KTX고속열차는 하루 상 하행 각 18회씩 모두 36회 정차하고 있으며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각 1회식 증차하여 운행하고 있다.

 

제2절 익산 우체국

 

1884년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식 우편사무를 보기위해 11월 18일에 우정총국을 설치하였으나 그해 12월 4일에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우정국사건으로 총판 홍영식은 살해되고 우정총국은 정치적 보복으로 폐쇄당하고 말았다.

그 후 정부는 1895년 친러로 기우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이후 일제가 추진한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우체사를 세우기로 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누고 전라도는 전주부, 남원부, 나주부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 23부에 우체사를 설치하기로 책정되었다. 그리하여 1986년 2월에 전주우체사가 설치되었다.

이어서 군산에도 옥구소속으로 임시 우체소가, 그리고 금마에는 전주우체사소속의 익산임시우체소가 설치되었다. 이것이 이 지방에 있었던 최초의 근대식 체신기관이었던 것이다. 우리정부의 개화사업으로 설치되고 운영되던 이 통신기관들은 그 후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1905년의 한일통신협정으로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이 지방의 함열, 용안, 익산 등 세 곳의 임시 우체소는 같은 운명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 후 일제의 식민지가 된 1911년 7월 1일 금마에 익산우편소가 세워졌고 일제치하에서 초기의 우편과 전신 등 통신업무를 취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익산우편소가 오늘의 익산우체국의 전신이 되었다.

현재 중앙동 3가 125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익산우체국은 1923년 건립하여 사용해 오던 청사건물이 낚아 이를 철거하고 그 자리의 대지 927평에 연건평613.3평의 현대식 2층 청사를 1979년 12월 31일에 준공하였다.

예전 건물은 붉은 벽돌로 쌓은 서양식 아담한 공관건물이었는데 역사와 함께 사라지고 현대식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제 붉은 벽돌의 아담한 서양식 건물이 사용되고 있는 공관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관장하는 주요업무는 우편, 전신, 전화, 우편환대체, 우편저금, 간이생명보

 

[구 우체국 건물 모습] [지금의 익산우체국]

험 등을 취급하였으며 1923년부터 1972년까지는 익산시내 일원만을 관장하다가 1972년부터는 익산군 지역까지도 관할구역으로 하여 왔으나 전신, 전화업무가 급증하자 1975년에는 전신전화국이 신설되어 동업무를 분리하여 전화국으로 이관하였다. 현재에는 주로 우편서비스(우편)와 금융서비스(예금, 보험, 경조금배달, 공과금 납부), 우체국 택배, 우체국 장터운영 등의 다양한 대민서비스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제3절 익산국악원

 

일제시대에는 우리의 전통음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국악을 관장하는 주체조차 없었기에 익산의 국악활동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해방이 되자 서울에서는 국립국악원이 생겼는데 이리에서도 1954년 초에 뒤늦게나마 평소에 국악에 관심이 많고 조예가 깊었던 강전상 선생이 주도하여 소산영, 김형규외 15명의 동지로부터 찬조금을 모아 당시의 기금 17만환으로 중앙동에 기와집 3칸을 사들여 국악원을 창립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야말로 익산의 국악활동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신기원이었다.

이듬해인 1955년 3월 10일에 정식으로 《이리국악원》이 발족되었으며 초대원장으로 김원중 선생이 추대되었고 부원장에는 강전상, 총무에는 나창순 선생이 취임하여 국창 김연수가 참석한 가운데 현판식이 있었다.

이후 원생이 늘어나면서 건물이 비좁게 되자 1975년에 다시 기금을 모아 갈산동 46번지의 맹아학교 건물을 사들여 국악원을 확장 운영하게 되었다. 이후 국악원은 명실공히 익산 국악발전의 산실로써 커다란 업적을 쌓게 되었다. 이후 많은 국악인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 오정숙 명창을 첫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

오정숙(1935-)선생은 본디 진주 출생으로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분이다. 오정숙은 어려서 어른들에게 판소리 기초를 배웠다. 선고께서는 오삼룡이라는 분이었는데 전주태생으로 명창이었다. 14세 때부터 17,8세까지 익산 국악단 단원으로 수행하였는데 이 단체에는 박옥진, 박복아, 조양금(박병기 부인)등이 활동하였다고 한다. 21세 때부터는 창극활동을 그만두고 판소리학습과 공연에 주력 하였고 23세 때에 상경하여 김소희에게 심청가 범피증류를 배웠다. 24세 때부터는 은거하고 있다가 1962년에 김연수선생 전수생이 되었고 그때부터 김연수선생에게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를 공부하였다.

오정숙은 1972년부터 1976년까지 매년 판소리 한마당씩 완창발표회를 가졌는데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 순이었다. 1977년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여 지금까지 창극활동을 하고 있으며 1982년에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 예능 보유자 후보로 인정되었고 전주대사습 1회 장원, 남도 판소리 명창부 1회 장원을 하였다.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이면서 그동안 활동하던 국립창극단 지도교수 및 서울대, 이화여대, 중앙대, 한양대 등 모든 학교의 출강을 중단하고 향리인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315번지에 스승인 동초 김연수 선생님의 아호를 따서 동초각을 지어 후진을 양성하고 있으며 사단법인 동초제 판소리 보존회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 동초제 판소리의 전국민 보급과 보존 육성에 노력하고 있다.

이리국악원은 1972년 6월 1일 《한국국악협회 이리지부》로 정식 인준됨에 따라 《예총이리지부》산하의 하나로 정식 발족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악협회지부로 개편함과 함께 국악원의 운영주체를 단일화하여 국악원장도 국악협회 지부장이 겸임하게 되었다. 동시에 모든 국악원 행사도 국악협회 이름으로 치르게 되었으니 예총지부가 연례적으로 다양한 예술행사를 가지게 됨으로써 종전보다는 국악협회가 더욱 활기 있게 진행되었다. 수많은 국창들의 공연과 예술행사공연을 가져왔으며 수많은 무료공연 활동을 하였다. 2001년부터는 익산국악원과 교육청의 공동주최로 근대 5명창 중의 한 분으로 꼽히는 국창 정정렬 추모 전국판소리경연대회를 개최하여 오고 있다.

국창 정정렬(1876-1938)선생은 익산 망성면 내촌리 출신의 명창이다. 2005년 01월의 문화인물로 지정된 정정렬선생은 판소리 명창 정정렬(丁貞烈)은 19세기 말 〈조선적〉인 판소리 시대가 서서히 끝나갈 무렵에 태어나 오랜 수련을 통해 〈일류 명창〉, 〈국창(國唱)〉의 칭호를 받았고, 훗날 평자들에게 〈근세(近世) 오명창(五名唱)〉의 하나로 꼽히는 등 최고의 명창이자 소리꾼이었다.

정정렬은 소리명창이 되는데 제일 중요한 요인인 〈소리목〉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나 그 약점을 독특한 음악 해석으로 극복하여 명창이 되었다. 판소리에서는 고음부의 음역이 좋지 않아 자유로운 소리 표현이 잘 안되고, 소리가 심하게 거친 목을 〈떡목〉이라고 하는데 소리꾼으로 대성하기에는 아주 치명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악조건을 오랜 공력으로 다듬어 내면 거칠면서도 힘이 있고, 소리의 극적인 면을 살려낼 수 있는데,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실제로 확인시켜준 대표적인 명창이 곧 정정렬이다.

정정렬은 일곱 살 무렵에 소리에 입문하여 수업을 시작하였는데,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도 입산수도(入山修道)하는 방식의 독공(篤工)을 할 만큼 무던한 노력을 기울였다. 독공은 대개 100일, 200일 단위의 기간 동안 잠자고 먹는 시간을 제외한 일과를 모두 소리 연마에 쏟는 불가의 '용맹정진(勇猛精進)' 같은 공부방법이다. 대부분 성공한 명창들은 이러한 독공을 통해 소리 실력을 쌓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정정렬이 공부 열심히 하는 명창으로 평가되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약점을 오로지 연습으로 극복한 대표적 사례임을 잘 말해준다.

한편, 정정렬은 공력을 기울인 성음뿐만 아니라 판소리의 해석을 완전히 새롭게 하여 〈신식 판소리〉를 부른 명창으로도 높이 평가된다. 정정렬은 목이 좋지 않아 〈성음〉으로 소리의 미학을 만족스럽게 표출하지 못하는 것을 다양한 음악의 변용으로 풀어낸 명창으로도 유명하다. 판소리는 성음과 장단, 다양한 조의 변화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면서 사설의 극적 구성을 다이나믹하게 표현하는 음악인데, 정정렬은 성음에서 부족한 부분을 장단과 조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보충하려고 하였다.

정정렬은 판소리 사설을 노래하면서 장단을 정격대로 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본래의 장단 보다 길게 늘이거나, 또는 앞당겨 붙이는 등 〈엇붙이는 방법〉을 구사함으로써 음악적 재미를 극대화하였다. 그의 변화무쌍한 소리 장단 구사는 웬만한 고수들이 소리를 맞추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그의 이러한 시도는 이후 판소리와 기타 민속음악 및 춤의 리듬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또 청중들은 소리꾼과 고수가 절묘하게 맞춰나가는 조화로움을 만끽할 수 있어 더욱 정정렬제 소리를 즐기게 되었다. 정정렬은 또 판소리의 장단의 부침새를 변화무쌍하고 정교하게 구성하는 동시에 조(調)와 음질(音質)을 변화시키는데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 발성을 할 때도 밋밋하고 평평하게 하기보다는 극적 표현을 살려 흔들어 낸다거나, 밝고 씩씩한 표현보다는 애조 띤 계면조 표현을 확대시켰다. 그 결과 정정렬의 판소리는 화려하고 정교하며 세련된 표현이 넘치는 독특한 세계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동시대 명창들은 〈신식 판소리〉라고 평하였다.

여러가지 판소리 중에서 정정렬은 특히 <춘향가>의 판을 아주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판소리 명창과 애호가들 사이에서 ?정정렬 나고 《춘향가》 다시 났다?라는 말과도 통할 만큼 그의 춘향가는 남달랐으니 그야말로 〈창의적인 소리세계를 이룩한 명창〉으로 기억될 만하다. 정정렬은 《춘향가》를 새롭게 짜면서 소리뿐만 아니라 극적 구성과 사설의 표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예를 들면 춘향과 이도령이 먼저 춘향모의 허락을 받은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첫날밤을 지낸 후에야 춘향모에게 사실을 알린다든지, 사랑의 표현들이 매우 직접적으로 묘사된다든지, 이별 대목에서도 오리정에서 작별하는 장면을 더 넣어 슬픈 소리를 길게 부르도록 한 것이다. 정정렬이 짠 《춘향가》의 전편 구성을 보면 그가 소리꾼으로써 문학적 소양도 매우 잘 갖추고 있다는 평에 공감하게 된다. 특히 춘향이 멀리 떠나는 이도령을 바라보면서 ?우두커니 바라볼 때 가는 대로 적게 뵌다. 달만큼 보이다가 별만큼 보이다가 나비만큼 불티만큼, 막상 고개 넘어가니 아주 깜박 그림자도 못 보겠구나? 라고 한 대목은 이별가의 명대목으로 꼽힌다.

정정렬은 1930년대에 방송과 공연활동, 음반 취입으로 가장 유명한 스타 명창이 되었다. 50대가 넘어 뒤늦게 서울의 중앙 무대로 진출해 작고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정정렬은 후배 판소리 명창들과 청중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김여란, 박녹주, 김소희 등, 당대 최고의 여류명창들과 박동진, 김연수 등의 남자명창들이 줄지어 그의 문하에 들었으며,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가장 제자가 많은 스승이었다. 그리고 판소리 명창으로서는 JODK 방송에 가장 많이 출연하였고, 빅타와 폴리돌 등의 음반회사의 초청으로 음반사에 길이 남을 대규모 전집 음반을 녹음하는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정렬은 소리를 창극 식으로 구성하여 녹음하는 방식을 생각하여 《춘향전》,《심청전》, 《화용도》 등의 전집을 냈는데, 그가 소리를 창극 식으로 부르고, 기악 반주를 붙여 녹음한 기획은 여러모로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

정정렬은 1936년 무렵 창극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1902년 원각사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창극은 비록 무대에서 연극식으로 소리하는 공연으로 자리를 잡아갔지만,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소리의 배역을 나눠 부르는 식의 〈분창(分唱)〉 형식의 공연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하나의 줄거리가 있는 창극을 여러 날에 걸쳐 연속해서 공연하는 식의 〈연쇄(連鎖) 창극〉 도 시도되었는데, 처음에는 청중들의 흥미를 끌었으나 점차 관심이 저조해지고 말았다. 바로 이 무렵 정정렬은 창극의 연출을 맡아 창극의 소리와 대사는 전통성을 살려 품위와 격조를 더하고, 극적으로는 하루 공연에서 기승전결의 구조가 완결되도록 구성하며, 소리꾼들이 직접 연기를 하면서 소리를 불러 소리와 극이 겉돌지 않고 조화롭게 표현한 신 형식의 창극을 선보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공연장인 동양극장에는 연일 관람객이 넘쳤고, 《춘향전》이 큰 성공을 거두자, 그 여세를 몰아 《흥보가》 등의 후속프로그램을 속속 발표함으로써 1936년은 그야말로 창극사에 신기원을 마련하였다. 그가 시도한 창극은 오늘날까지 창극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정정렬의 이러한 노력에 주목한 판소리 학자 중에는 그를 ?현대 창극의 아버지?라는 말로 그의 공로를 평가하기도 하였다.

익산국악협회와 익산국악원은 익산이 낳은 국창 정정렬선생의 문화인물 지정을 기념하고 그 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2005년 [골목길의 초라한 익산국악원]

9월 솜리 문화회관안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예향인 전라도 익산의 국악원의 건물이 지나칠 때마다 잠깐 기웃거려 보노라면 너무도 외진 곳에 협소하게 자리하고 있어 원생들을 지도하는 국악 연수기관으로나 익산시의 국악행정의 사무실로는 누추하기 짝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가 없다.

 

제4절 옛 익산금융조합 건물

 

갈산동 62번지에 있는 이리금융조합의 건물은 2층의 관공서형 건물로 잘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다. 현재에는 갈산동에 속하며 인화동과 경계인 효열비길에 있는 협립양산건물 안쪽에 있다.

1977년에 철근콘크리트 2층 및 단층으로 5칸의 상가가 지어져서 정면을 가리고 있으며 현재는 이지역의 상업이 쇠퇴하여 대부분의 상가가 문을 닫은 상

태로 전락하여 버렸지만 일제시대에는 번화가로 익산금융조합이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집주인이 이곳에 살고 있지 않아 바깥 건물 내부에 있는 옛 금융조합 부속건물을 들어가 직접 볼 수는 없으나 지붕만은 약간 보이고 있다.

《익산군세 일반》이라는 일본인이 발간한 책에 1928년 3월의 익산 금융조합의 예금고와 대출고가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건물은 적어도 1928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해방 후에는 등기소, 전북은행 예금취급소 등으로 사용되었고 그후 개인소유가 되어 1977년에 도로쪽으로 상가를 지은 이후로는

 

[익산금융조합 건물] [상가로 막혀 있는 모습]

 

창고로 쓰이고 있다.

참고로 금융조합은 1907년부터 1956년까지 존립하였던 신용금융기관이다.

주로 농민과 지방 중소상공업자 등 서민층이 대상자였다. 일제시대에 익산금융조합 외에 이리금융조합이 있었는데 이리 금융조합은 현재의 중앙농협자리에 있었다.

 

제5절 옛 익산면ㆍ이리읍사무소 건물

 

조선시대에 전주부의 속현이었던 옛 옥야현 지역이 익산군에 편입된 것은 1899년의 일이었다. 이때 편입된 옥야현 지역은 5개면(남일면, 동일면, 남이면, 서일면, 북일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중앙동지역은 남일면의 이리에 속하였다. 1911년에 익산군청이 금마에서 남일면으로 옮겨오면서 남일면은 익산의 중심이 되었고 1912년에는 호남선이 개통되며 1914년에는 남일면(이리, 마동리, 동산리, 목천리)이 동일면(신흥리, 금강리, 대장촌리, 석탄리)과 합쳐져서 익산면이 된다.

당시 익산면은 8개의 리(里)가 있었는데 중심부인 이리(오늘날의 인화동, 주현동, 갈산동, 중앙동, 창인동, 평화동 지역)를 비롯하여 마동리, 동산리, 석탄리, 대장촌리, 신흥리, 금강리, 목천리가 있었다.

1917년에는 익산면이 지정면(중심면)이 되면서 익산시의 모체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거리가 먼 석탄리와 대장촌리는 춘포면에 주고 신흥리와 금강리는 북일면에, 목천리는 오산면에 넘겨주게 된다.

익산면사무소는 우체국 뒤에 있었다. 당시 익산면사무소의 사진은 1989년에 간행된 《이리시사》에 남아 있다. 익산군 18개면 중 군청소재지이면서 지정면이었던 익산면은 드디어 1931년 4월 1일 익산읍으로 승격하고 그해 11월 1일 이리읍으로 개칭되었다. 전주부소속의 속현이었던 옥야현지역의 남일면에 속했던 이리가 이제 당당한 읍의 명칭이 되었고《이리》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면사무소는 이리읍사무소 건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익산면 사무소와 이리읍 사무소는 동일한 위치에 동일한 건물인 것이다. 그 위치는 현재 중앙동 2가 63번지로서 오고파길에 그 건물이 불타버린 처참한 몰골로 남아있으며 사무소 건물은 뒤로 뻗어 있는데 현재는 대화장 여관과 담장으로 구분되고 있으며 당시의 규모는 지금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큰 규모였다고 한다. 인화동에 사시는 오상곤 옹(82세)은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약 2년간 이리읍사무소에 열여섯의 어린나이에 급사로 근무하신 분인데 읍사무소에 대해 자세히 증언하여 주셨다. 현재 오고파길에 나와있는〈그애광고〉간판이 붙어있는 2층 건물은 해방이후 덧붙여 지어진 건물이며 그 자리는 원래는 자동차도 주차할 수 있는 여유공간이었고 안쪽으로 본 사무소 건물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별도로 지어진 권업계 건물이 있었으며 사무소 뒤편으로는 학교조합과 조합장 사택이 있었다고 한다.

중앙동 2가 63번지에 있는 이 건물은 지상 2층의 소규모 건물이어서 인구 3만이 육박하는 이리읍을 관장하는 행정기관(1944년 : 2만 7천명)의 사무소로는 아무래도 비좁았을 것이다. 오상곤 옹이 1942년에 일본에 건너갔다가 1945년 4월에 돌아와 보니 이리읍 사무소는 현재의 보배빌딩자리에 있던 붉은 벽돌로 아름답게 지어진 옛 시청건물로 이주하여 갔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따르면 분명 읍사무소는 1943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사이에 새 건물을 지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추후 더 확실한 증거를 필요로 한다.)

이리읍은 해방후인 1947년에 이리부로 승격하면서 익산군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리고 1949년에는 이리시가 된다. 따라서 자연히 읍사무소는 부사무소를 거쳐 시청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읍사무소 건물은 이후 민간에게 불하되어 민가로 개조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작년(2006년) 4월에 원인모를 화재로 인하여 사무소 건물전체가 전소하고 겨우 기둥만 남은 흉측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기에 딱하기 그지 없다. 온전할때에 시당국에서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문화재로 지정하거나 관리하는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으니 이제 불타버린 지금 애석해한들 소용없는 일이다.

 

[옛 익산면ㆍ이리읍 사무소] [불에 탄 이리읍사무소 모습]

 

현재 건물은 도로가에 있는 2층 건물뿐만 아니라 그 내부까지 모두 불에 탄

흔적이 완연한데 타다남은 일부 기둥만 남고 모두 무너져 내린 모습이어서 차마 들어설 수가 없을 정도이다.

2005년과 2006년에 익산지역에 소재하는 8건의 문화재가 등록문화재로 문화재청에 등록이 되었는데, 무려 30여년 간 익산면과 이리읍의 사무소로 쓰이던 이 건물이 문화재로 등록되지 못하고 불에 타버린채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몹시 착잡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제6절 옛 경찰서 건물

 

 

 

 

 

 

 

 

 

[막혀진 초창기 구 경찰서 정문] [구 경찰서 안쪽 모습]

 

갈산동 1번지에 있던 구 경찰서는 2003년 2월 모현동으로 초현대식 대형 청사를 지어 이사가고 구청사는 중앙지구대가 되었다. 중앙지구대는 4개의 파출소를 관할하며 중앙동, 남중동, 모현동, 송학동, 오산면을 담당한다. 중앙지구대의 건물 뒤편의 안마당으로 들어가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길다란 2층 건물을 볼 수 있다. 바로 1979년 2월에 현재 중앙지구대 건물인 구청사를 지어 사용하기 전의 경찰서 건물이 바로 이 건물이다.

1928년경에 지어진 이 건물은 1979년 2월 이전까지는 경찰서 주 건물이었으니 약 50년 간 익산의 경찰서로 쓰인 건물인 것이다. 정문도 당시 익산에서는 가장 큰 길인 역앞길에 있었는데 1979년에 새 청사를 지은 이후 정문은 대각선 방향으로 바뀌고 옛 정문은 폐쇄되었으며 건물은 교통과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비어 있다. 원래 단층건물이었는데 어느 땐가 2층으로 증축된 것으로 보인다. 붉은 벽돌 조적조 건물이며 거의 사용하지는 않고 있으나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제7절 옛 상업은행 익산지점 자리

 

우리가 흔히 상업은행이라고 불렀던 한국상업은행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1899년 1월 30일 설립된 민족계의 근대적 은행인 천일은행으로 발족하여 1911년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하였고, 1923년 원산상업은행, 1924년 조선실업은행, 1925년 대동은행, 1928년 삼남은행, 1933년 북선(北鮮) 상업은행과 차례로 합병하였으며, 1935년에는 부산상업은행을, 1941년에는 대구상공은행을 매수하고 1950년 한국상업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1956년 주식을 상장하고 1972년 시중은행 중 최초로 민영화하였다.

익산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은행은 조선식산은행(1918.10), 1924년 4월 1일에 삼남은행으로 출발하여 조선상업은행에 합병된 상업은행(1928.6.16), 제일

 

[구 상업은행 건물 모습] [구 상업은행 자리 모습]

 

은행(1944.9), 익산군 농협(1961.8), 국민은행(1962.2), 중소기업은행(1962.10) 등인데 그중 중앙동 2가 일명 텍사스 거리에 위치한 상업은행 익산지점건물은 1920년대에 지어진 건물로 그 역사는 무려 80년이 다 된 기념할만한 것이었으나 이제는 건물은 철거된 상태이지만 아직도 잔해가 치워지지 않은 채로 버려진 상태이다. 상업은행은 1984년 9월 15일에 옛 시공관 자리를 인수하여 이전하면서 빈 건물로 남겨 두었고 1999년 1월 한일은행과 합병하여 한빛은행으로 발족하였다. 2001년 4월 예금보험공사가 설립한 우리금융지주(주)에 편입되어 자회사가 되었으며, 2002년 5월 지주회사와 동일한 지금의 우리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1920년대에 지어져 60여 년 간 상업은행 이리지점으로 영화를 누리다가 오랫동안 비어고 있던 옛 건물은 2003년 12월에 철거되었으나 아직까지도 그 자리는 보기흉한 모습의 빈터로 남아 있다.

 

제8절 옛 삼산의원 건물

 

1932년에 간행한 익산군지에 의하면 당시의 익산군의 의료기관으로 천성당의원, 삼산의원, 복강의원(철도병원), 회생의원, 고가의원, 중촌의원, 여산의원, 익수의원, 무시치과의원, 등정치과의원 등 10개의 병원이 있었다고 한다.

1922년에 익산군 익산면 이리에 김병수(金炳洙 1898-1951)가 개원한 삼산의원은 익산에서 가장 오랜 병원중의 하나였다. 1930년~31년간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당시 익산면 이리에는 8개의 의원이 있었다. 그 중 4개가 일본인이 운영한 의원이며 나머지 4개가 한국인이 운영한 의원이다.

김병수는 김제군 백구면 유강리 출신이나 익산면에 살았다. 군산 영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1년을 앞두고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익산에 전달하고 궐기대회에 선봉이 되어 행진하다가 일경에게 잡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3개월을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1년에 의전을 졸업하고, 군산 야소교병원을 거쳐 다음해인 1922년 익산에 삼산의원을 개원하였으니 삼산(三山)은 그의 호였다. 그는 삼산의원을 통하여 인술을 베풀고 사재를 털어 광희의숙을 설립하여 여성교육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28세에는 익산 제일교회 장로가 되어 유치원을 설치하고 익산 청년회관도 건립하였다. 1945년 수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이리읍이 부로 승격되자 초대부윤이 되었으며 6.25 동란시에는 제5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활약하였다.

중앙동 3가 114-2번지에 있는 옛 삼산의원 건물은 2004년에 전라북도청에서 발간한《근대문화유산 목록화 및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지상 2층의 건물로 르네상스 양식의 팔라죠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세부적인 장식이 매우 섬세하다. 정면은 대칭이며 출입구 상부는 바로크 양식의 곡선을 수용하였다. 건물 중앙에 포치를 돌출시켰으며 좌측의 계단실을 통해 2층으로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2층은 복도형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며 슬레이트로 마감하였다. [옛 삼산의원 건물]

해방되던 해에 화재가 나서 내부가 전소되었다고 하는데 외관에는 이때 수리한 흔적이 남아있다. 이후 삼산의원 건물은 한국무진회사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그 후 국민은행이 건물을 인수하였다. 국민은행이 들어서면서 금고를 증축하였다. 국민은행은 그 후 현재의 신축건물로 이전하였으며 현재는 내부를 개조하여 식당으로 쓰이고 있다.

김병수 선생의 아들인 김신기 박사는 1952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중앙동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삼산의원을 운영하였다. 그는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 손신실과 함께 삼산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전북 익산의 왕궁면에 있는 한센병(나병)을 앓았던 사람들의 자활정착촌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전주 예수병원에서 수련의 과정 중 한센병 환자를 접하게 된 이후로 틈틈이 이곳 왕궁복지원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인연이 있었다. 주민들의 염원대로 1981년 복지원 안에 ‘한일기독의원’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병원에 온 의사들은 열악한 주변환경으로 인해 근무기한 2년을 채 못 채우고 병원을 떠나기 일쑤였다. 결국 1985년에는 의사가 없어 병원문을 내려야 할 단계에 이르렀고, 마을 농장장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김신기 박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안락한 병원장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삼산의원의 문을 닫고는 1986년 3월부터 한일기독병원에서 봉사를 시작한 김신기, 손신실 의사 두 부부는 〈98년 좋은 한국인 대상〉수상자로 선정되어 시민의 모범이 되고 자랑이 되었다.

1922년에 지은 옛 삼산의원 건물은 2005년 6월 18일자로 문화재청 공고 제2005-55호에 의해 전라북도내 다른 19점의 근대문화유산과 함께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참고로 최근에 등록된 익산의 등록문화재는 다음과 같다.

 

문화재 등록 내용(2005-2006년)

종 목 명 칭 등록일 소 재 지 소 유 자
등록문화재
178호
익산 구 이리농림학교 축산과 교사 05.06.18 마동 194-5 국립익산대학교
등록문화재
179호
원불교 익산성지 05.06.18 신용동 344-2 재단법인 원불교
등록문화재
180호
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 05.06.18 중앙동3가14-2 정봉교
등록문화재
181호
익산구 익옥수리조합 사무소 및 창고 05.06.18 평화동
54,56,56-5
농업기반공사
익산지사
등록문화재
209호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 대교농장 사무실 05.11.11 주현동 105-9번지 외 1필지 추본기
등록문화재
210호
익산 춘포역사 05.11.11 춘포면 덕실리 508 한국철도공사
등록문화재
211호
익산 춘포리 구 일본인 세천농장 가옥 05.11.11 춘포면 춘포리 103-3 안삼길
등록문화재
263호
익산 함라마을 옛 담장 06.06.19 함라면 함열리 314 등 박진순 등

 

 

제9절 중앙시장

 

이 시장은 8.15해방 후에 생긴 시장이다. 해방이 될 때까지만 해도 이리읍은 역앞길 남쪽으로 영정통과 텍사스 골목 일대, 우체국 일대와 구시장으로 이어지는 인구 2만 7천여 명 정도의 작은 읍이었기에 역앞길 위쪽으로는 그저 작은 구멍가게들이 생겨나고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시장이 생기기 전에는 이곳은 복숭아 과수원이었고 예전의 원예조합자리는 일제시 판정신장(板井信藏)의 농장자리였다고 한다. 주변은 드문드문 인가가 있던 밭이었는데 해방이후에 인구가 늘어나면서 시장이 생겨났고 처음에는 시에서 관리하다가 일반상인들에게 넘겼다고 한다.

1947년 4월 1일에는 전라북도 내에서 최초로 일반상설시장으로 출발하여 처음에는 시에서 관리하다가 상인들에게 넘겨졌다. 1992년경에는 전라북도의 24개 일반시장 중에서 군산공설시장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시장으로 번영하였다.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발간한 《전국도소매업체총람》에 의하면 1992년 당시 익산시에 소재한 일반시장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익산군 소재 일반 시장 현황(1992)

명칭 개설자 소재지 개설일 점포수 종업원수
중 앙 시 장 (사)중앙시장번영회 이리시 창인동 1가 47.04.01 432 245
황 등 시 장 익산군수 익산군 황등면 황등리 65.03.15 46 63
남 부 시 장 이리시장 이리시 인화동 2가 74.04.01 221 143
북 부 시 장 (주)북부시장 이리시 남중동 1가 75.11.04 100 76
동 부 시 장 (사)동부시장 이리시 영등동 548-1 81.08.31 407 196
신 동 시 장 (주)신동상가 이리시 신동 808-1 86.06.12 75 113
신 중앙시장 (주)신중앙시장 이리시 남중동 1가 86.08.18 42 145

 

 

위의 표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중앙시장은 그 규모가 도내에서 두 번째이며 익산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유지하여 온 익산의 대표적인 시장이다. 그러나 1975년에 북부시장이 개설되고 신동지역이 발달함에 따라 북부시장은 더욱 번 번창하게 되었으나 90년대 이후에는 인구가 영등동 지역으로 대거 이동함에 따라 중앙시장은 급격한 쇠락을 보이더니 2000년대 이후 웬만한 중산층과 젊은층은 대형마트를 찾을 뿐 철저히 재래시장을 외면함에 따라 이제 설자리를 잃고 말 지경에 이르렀다. 경제발전과 사람들의 의식주 생활수준의 변화가 너무도 커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재래시장 활성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마 구호에 그치고 말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중앙시장 1층은 시장을 유지하기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보이지만 2층은 이미 가게도 거의 없어지고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진 모습이다. [중앙시장의 모습]

시장의 주변에서도 90년대에는 옛 삼남극장자리에 백화점이 들어섰다가는 이내 문을 닫고, 옛 군청자리인 영빈관예식장 앞에는

송원백화점이 들어서서 최근까지 살아남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모습이었으나 다시금 문을 닫았다. 시장상인들의 시장을 살리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애절한 호소에도 이제 시대의 변화를 거스르지 못하고 정녕 60년 역사의 중앙시장은 쇠락하고 마는 것인가? 신세대들은 대형마트만을 찾고 있으며 고령사회(Aged Society)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제 재래시장은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제10절 옛 익산군청ㆍ이리시청ㆍ시공관 자리

 

1. 옛 익산군청 자리

 

1911년 익산군청이 남일면으로 옮겨오게 되자 군청은 지금의 평화동 65번지 평화시장 안쪽 평화교회 사거리에 소재하게 되었다. 그 뒤 익산군청은 어느때인가 지금의 우리은행 뒤편의 현재는 빈 건물로 주차장만 활용하고 있는 구 영빈관 예식장 자리로 이전하였다. 인화동에 사시는 오상곤 옹(82세)은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약 2년간 이리읍사무소에 열여섯의 어린나이에 근무하신 분으로 그 분의 증언에 의하면 당신이 읍사무소에 근무할 당시에도 영빈관 예식장자리에 있던 군청사에 심부름을 다녔다고 하므로 적어도 1930년대에★ 평화동청사에서 창인동청사로 이주하여 간 것으로 추측된다. 오상곤 옹도 이미 구청사가 옮겨져 있던 것만 기억할 뿐 옮긴 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시기 때문이다.

창인동 군청은 본 건물과 함께 상당히 여유로운 부지를 가진 청사였으나 지금은 건물앞이 옹색하기 그지 없다. 현재의 영빈관 건물은 1964년 11월에 준공된 건물이며 익산군청이 1979년 함열로 이주하기까지 15년 동안 군청건물이었던 청사는 한때 영빈관예식장으로 번창하였으나 현재에는 도심의 이동으로 쓸쓸하게 빈집 신세가 되었으며 앞마당만 유료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최근에(2024.9) 익산교원향토사연구회에서 발간한 책자를 읽던중에 이와 관련된 사진자료를 보게 되었다. 아래의 첫번째 지도는 1935년에 발간된 [조선도별현세지도]인데 군청이 현 평화동에 소재하고, 두번째 지도는 이리에 살던 일본인 여성인 전촌민자씨가 직접 그린 1945년의 지도로 군청은 창인동 옛 군청자리로 그려져 있다.  이 지도는 해방후 일본에 돌아가기 전에 전촌민자씨가 그린 것으로 책의 본문에는 연대를 1945년으로 적고 있는데 정작 지도 아래에는 1935년으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익산군청이 평화동에서 창인동으로 이전한 시기는 1935년 이후로 추정이 확실하다. 

 

 

2. 옛 이리시청 자리

옛 이리시청은 현재 우리은행의 오른편 보배빌딩과 알리안츠 생명건물이 있는 자리에 있던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중앙동 2가 63번지에 있던 이리읍사무소는 추후 더 확실한 증거를 필요로 하지만 대략 1943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사이에 새 건물을 지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리읍은 해방후인 1947년에 이리부로 승격하면서 익산군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리고 1949년에는 이리시가 된다. 따라서 자연히 읍사무소는 부사무소를 거쳐 시청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말기부터 약 30여년간 이리읍 사무소, 이리부 사무소, 이리시 청사로 쓰이다가 1970년에 남중동에 현재의 청사를 지어 이사하였다. 그 자리에는 보배빌딩이 지어져서 한때 익산시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이 되었으나 주식회사 보배가 1997년에 조선맥주에 넘어가고 보배그룹이 무너졌으며 소주상표도 하이트로 바뀌어 짐으로서 시민의 기억속에서 차츰 지워져 가고 있다. 보배빌딩은 이제는 SK건물이 되어 삼성증권이 입주해있고 그 옆에는 알리안츠생명 건물이 있다.

 

3. 시공관 자리

시공관은 이리극장, 삼남극장과 함께 이리의 영화와 공연문화를 이끌어간 공연장이었으나 1977년의 이리역 폭발사건으로 크게 손상을 입고 난후 텔레비전시대의 물결에 밀려 영화가 사양길에 들어서자 다른 극장들과 함께 문을 닫았다. 이 자리는 상업은행이 인수하여 1984년 9월 15일에 현재의 건물을 완공하였으며 상업은행은 1999년 1월 한일은행과 합병하여 한빛은행으로 발족하였다. 2001년 4월 예금보험공사가 설립한 우리금융지주(주)에 편입되어 자회사가 되었으며, 2002년 5월 지주회사와 동일한 지금의 우리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옛 익산군 청사] [시공관터와 보배빌딩]

 

제11절 이리중앙교회

 

익산시에서 가장 큰 교회로는 신광교회가 손꼽히지마는 시내 한복판에 가장 당당하고 늠름하게 서있는 교회가 바로 중앙동 3가 49번지에 있는 중앙교회이다. 1923년 주현동의 후리교회에서 50여명의 신도가 분교하여 박길부씨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출발하였다. 1933년 3월에는 수정교회라 하여 인화동에 교회를 신축하였으나 곧 중앙교회로 개명하여 교회를 증축하였다.

1944년에는 일제의 강압으로 제일교회와 합병하여 이리교회로 개칭하고 4월 1일부터 중앙교회당에서 회집하여 예배를 드렸고 해방으로 강제 합병되었던 이리교회는 중앙교회와 제일교회로 다시 환원하였다.

1949년 9월 중앙동 3가 49번지 소재 대지를 예배당 신축부지로 이리시장으 로부터 양도받아 건축을 [중앙교회의 모습]

시작하였으나 1950년 6.25사변으로 예배당 건축공사가 중단되고 온 성도들이 분산되었다. 1951년에 현재의 예배당이 완공되었으며 1958년에 중앙동 3가 57번지 소재 대지 209평을 운동장 부지로 매입하였고 1977년 11월 예배당을 연건평 449.33평으로 증축하여 입당함으로써 현재의 웅장한 교회가 되었다.

외관은 전면에는 화강암을, 양 옆면에는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대조적인 입면구성을 보여주며 정면은 비대칭적인 형태로 우측에만 종탑을 두었고 재료는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현재의 담임목사는 조성천 목사이다.

 

제12절 옛 이리(성결)교회

 

미국인 C.E Cowman과 E.A Kilbourne 두 사람이 구령에 불타는 심정으로 《요한 웨슬레》의 성경적 복음신앙을 이어 받아 동양 모든 나라에 '성결의 복음'을 전하려는 사명에서 《동양 선교회》를 조직하고, 1901년에 일본 동경으로 가서 직접 전도하며, 《성서학원》을 세우고, 전도자를 양성하였는데, 이 학원을 졸업한 전도자인 김상준, 정빈 등이 귀국하여 1907년에 당시 경성부 종로

[옛 이리성결교회] 염곡(무교동)에 셋방을 얻고 《동양선교 회 복음 전도관》이란 이름으로 전도한 것이 교단의 기원이다.

1929년 설립된 이리성결교회는 갈산동의 가장 아래쪽 오른편 27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매우 아름다운 모습으로 약간의 증축을 거쳤다고는 하나 아직도 여전히 찬연하게 고색을 띠고 있다. 아쉽게도 2003년 성결교회는 용제동으로 교회를 새로 지어 이사하였고 지금은 성수교회에서 인수하였는데 건물에 붙인 교회명도 간단하게 〈결〉자를 〈수〉자로만 바꾸면 되었기에 인계인수하는 일이 쉬웠다며 장로님께서 인수 사실을 확인하여 주었다.

 

제13절 관음사(觀音寺)

 

관음사는 일본인들이 지은 동본원사(東本願寺)에서 출발하였다고 한다. 동본원사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지은 일본식 불사(日本式 佛寺)로 히가시 혼관지(東本願寺)라 하였다. 일본 나라에 있는 히가시 혼관지(東本願寺)는 진종대곡파(眞宗 大谷派)의 본산으로 정식이름은 진종본묘라 한다. 160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혼간지 세력을 억누르고자 혼간지 11대 문주의 아들인 교노를 시켜서 혼간지로부터 진종대곡파(眞宗 大谷派)를 별도로 만들어 분리시킨 것이 히가시 혼관지(東本願寺)의 기원이라고 한다.

목포의 동본원사 별원은 1898년 4월에 다 허물어진 바라크 빈집에 세웠다고 하는데 부산, 인천 등 전 개항지에 별원이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목포 동본원사의 건물은 목포중앙교회가 사용하고 있는데 절간이 교회가 된 이색적인 약력을 지닌 이 건물은 목포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가는 답사코스라고 한다.

이리 동본원사는 1907년에 창립된 사찰로써 원래 자리는 중앙동(현재의 신사임당 예식장 자리)이었는데 해방 후에 6ㆍ25가 일어나자 피난민의 수용소가 되었고 이후 그 자리에는 제일교회가 들어서게 되자 사찰은 정복전(정분녀:정복연화보살)씨가 인수하여 현재의 갈산동 32번지로 이전하고 1954년에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직속 포교소로 만들었으며 1968년 1월에 박옥남(朴玉南)씨가 인수하여 금산사 재단법인으로 이전등기하고 1973년 5월 29일에 134호로 대한불교 조계종에 속하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일제시에 동본원사와 함께 이리 갈산동에는 현재의 인북로 동편에 서본원사(西本願寺)도 있었다고 한다. 1997년에 완전히 한국식 건축양식으로 고쳤으며 현재 대웅전과 요사채 한 개동이 있다.

그러나 위의 기록과는 달리 창건연대가 1930년대라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전라북도내 주지들의 회합장소로 창립된 절이라는 설도 있으나 그 진위가 분명치 않다. 현 주지인 원성스님은 전라북도내 주지들의 회합장소로 세워진 설은 결코 맞지 않는다고 하시며 전 주지스님이 경내에 세운 연혁비에는 1907년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관음사에서는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 인가 신도전문 교육기관인 이리불교대학을 운영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대한불교학생연합회 익산지부이기도하다. 1991년에 개교한 이리불교 교양대학은 지금까지 2005학년도 수료생인 15기 19명을 포함하여 기초 교리반 482명과 불교학과 381명을 졸업시켰다. 불교대학에서는 부처님의 생애와 사상, 불교교리, 불교사, 불교경전 등 불교전반에 걸쳐 폭 넓은 교육을 하고 있으며 1년 과정으로 운영된다. 이 대학과정을 수료하면 포교사 응시자격이 주어지고 현재까지 포교사 50여명을 배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관음사의 주지인 원성스님이 불교대학의 학장을 겸하고 있으며 전북지역의 사찰 중 정기법회가 이루어지는 곳은 금산사가 전주에서 운영하는 불교회관의 화엄불교대학과 이곳 관음사에서 운영하는 불교대학 두 곳 뿐이다. [관음사]

 

제14절 3ㆍ1운동 기념비

 

익산역 광장의 오른편 대한적십자 건물 앞에는 세 개의 기념비가 서있다. 그 중 한가운데에 서 있는 비석이 1971년 8월 15일에 동아일보사에서 세운 3.1운동 기념비이다. 이 비문의 내용은 이러하다.

 

〔1919년의 3.1만세운동은 한일 합방에 항거하는 통분의 함성이요, 자유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비장한 절규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유지 계승하려는 당당한 주장이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이 한 덩어리로 뭉쳐진 뜨거운 불길의 폭발이었다. 이러한 정당하고 평화적인 궐기에 대하여 일제의 탄압은 어떠하였는가? 잔인하고 악독한 살육과 형벌이었다. [3ㆍ1운동 기념비]

우리 익산에서는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서정만 등 여러 의사가 장터에 모인 수만 명의 군중에 앞장서서 태극기의 물결을 지휘하던 중 무자비한 일제의 탄압 앞에 장렬한 순국의 영령이 되고

말았다. 이 숭고한 3.1정신을 이어 받아 그 거룩한 정신을 길이 전하고자 1971년 8월 15일 익산 3.1운동 기념비 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사가 공동으로 이 기념비를 건립하여 보존하고자 한다.]

 

제15절 미군의 이리역 폭격 희생자 위령비

 

이리역이 미공군기에 의해 무차별 폭격을 당한 것은 1950년 7월 11일 오후 2시 40분경이다. 이날 B-29폭격기는 이리역 상공을 선회했고, 기관사들은 국적을 확인하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잠시 후 비행기에서 시커먼 물체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낙하산이 떨어진다며 신기해하였다. 그러나 그 물체는 낙하산이 아닌 포탄이었으며, 순식간에 이리역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 폭격으로 300여명의 주민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됐다. 7월 15일에도 평화동 변전소(현재 고속터미널 부근)와 철길 주변과 마을은 미공군기의 기관총탄 세례를 받았다. 당시 북한군은 수원 근처에 있었다. 북한군과의 교전은 열흘 후인 7월 20일경 이었다. 이날 이리시내에는 우시장이 열려 김제 황등 전주 군산 등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군 입대를 위해 소집영장을 받고 사람들이 이리역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날 폭격으로 이리역에 근무하는 철도청 직원 54명이 죽음을 당하였다. 지금까지 이 폭격사건은 이리역을 천안역으로 잘 못 알고 저질러진 단순한 미군의 오폭사건으로만 여겨져 왔다.

그러나 피해자 유족회원들은 천안역과 이리역은 200km나 떨어져 있어 납득이 안 간다고 주장하며 당시 상황으로 미군측이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만경강 철로를 폭격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며 오폭이 아닌 고의성이 짙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전에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미군이 만경강을 금강으로 생각하고 천안역을 폭파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는데 당시 천안읍의 남쪽으로 삽교천의 제1지류인 곡교천이 흐르고 있어 이리시의 남부를 흐르는 만경강과 혼동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한국교통동란기>를 비롯해 <한국철도백년사>, <철도 50년사> 등에는 이 사건과 관련해 당시 이리운전사무소 직원만 54명이 희생되었으며, 3백여 민간인이 중경상을 입는 대참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교통동란기>는 철도박물관에 단 한권만 남아 있는 희귀본인데 이 책에는 오폭으로 수많은 희생이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한국철도백년사> 연표에도 오인폭격으로 기록돼 있다.

최근에는 이 폭격은 오폭이 아니라 미군에 의한 고의적인 폭격이라는 주장이 매우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1950년 7월 11일 미군기가 이리역을 폭격하기 몇 시간 전인 새벽에는 금강의 교량을, 오전에는 이리역을 그 다음날인 12일에는 금강철교를 폭파했다고 《철도백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북한군의 빠른 남침을 차단하기 위한 미군기의 의도된 폭격일 가능성을 높게 하는 대목이다. 따라서 미군기의 이리역 폭격은 확인폭격이었다는 점에 비중이 실릴 수밖에 없다.

미국과 한국정부는 유족들의 한 맺힌 진상규명 요구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 및 문제해결을 위한 어떠한 의지도 보이고 있지 않은 상태다. 2000년 10월 28일 [위령비]

에 익산역 광장에 세워진 위령비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유현(幽玄)에 떠도는 세월(歲月)

시인 채규판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

역사는 피울림에 젖고

한에 얼룩진 피바다,

이 유현에 떠는

광장에 섰다.

 

삶으로 앓는가

죽음을 안아 눕는가

결코 씻을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우리는 허망의 세상을

보았노니

무차별 사살의 폭격투하

를 보았노니

천연히 내려꽂은 비극의

광장,

양민의 죽음을 보았노니

누가 이 자리에 서서

그들의 영혼 앞에 서서

경건하게 죽음을 애도할

것인가

 

역사를 되돌릴 수 없듯이

비극의 재연은 다시 연출될 수 없다.

오십 해 긴 세월,

있어서는 아니 될 통한

의 세월인데

여기 유현(幽玄)에 떠는

숨결을 본다.

 

제16절 4.19 학생의거 기념비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자유당의 3ㆍ15부정선거와 독재에 항거하여 일으킨 학생의거는 현재는 4.19혁명으로 불린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그리고 1960년 3월 15일 제 4대 정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반 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그러자 같은 날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당국은 총격과 폭력으로 강제 진압에 나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무고한 학생과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면서 고문을 가했다. 이후 1960년 4월 11일 1차 마산시위에서 실종되었던 남원출신의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참혹한 시체로 발견됨으로써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제 2차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1960년 4월 18 고려대학교의 4천여 학생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중 괴 청년들의 습격을 받아 일부가 피를 흘리며 크게 부상당했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이 다음날인 1960년 4월 19일 총 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하여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탄압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960년 4월 25일 독재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명은 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고 1960년 4월 26일 전날에 이어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의 시위군중은 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하여 이기붕은 가족동반 [4.19 의거 기념비]

자살로 비극적인 최후를 마치고 이승만은 결국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이러한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익산역 광장에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기념비는 4.19혁명이 일어난 해인 1960년 11월 20일 기공하여 1961년에 준공되었는데 원광대 배

형식 교수가 제작하고 글씨는 고재봉씨가 썼다.

 

제17절 제일은행 익산지점

 

중앙동 1가 54번지에 자리 잡은 제일은행은 예로부터 익산역 앞의 가장 번화가인 역앞길 중에서도 영정통과 만나는 사거리에 위치하여 가장 번화한 거리의 한 중심에 늘 있었다. 익산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은행은 조선식산은행(1918.10), 삼남은행(1924.4), 상업은행(1929.12), 조선저축은행(1944.9), 익산군 농협(1961.8), 중소기업은행(1962.10), 국민은행(1963.2) 등인데 제일은행은 상업은행에 이어 익산에서 네 번째로 개설된 은행이었던 것이다.

제일은행은 1929년 7월 조선저축은행으로 창립되어 1950년 5월 한국저축은행으로 행명을 변경하였으며, 1954년 1월 조선식산은행(한국산업은행 전신)을 승계하여 1956년 3월 기업공개를 통해 주식을 상장하고 1958년 12월 현재의 제일은행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1962년 4월 외국환 업무를 개시하였으며, 1981년 2월 제일씨티리스, 1983년 광명투자금융(주) 등을 인수하였다. 1994년 상업증권(주)과 상업상호신용금고(주)를 인수하고, 제일종합금융연구소(주)를 설립하였다. [옛 중심가의 SC제일은행]

1997년 12월 경영개선 명령을 받았으며, 1999년 12월 23일 미국의 투자기관인 뉴브리지캐피탈과 합작계약을 맺었다. 2005년 1월에는 영국계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 3조 4000억원에 매각되었다. 2005년 9월에 SC제일은행으로 행명을 변경하였다.

현재의 제일은행자리는 비록 새로 지은 최신식 건물이나 일제시대부터 조선식산은행 이리지점이 있던 역사가 오랜 자리이다.

 

제18절 중소기업은행

 

창인동 1가 145번지 중앙시장 입구에 오랫동안 버티며 자리잡고 있는 은행이 1962년 11월 26일에 이리지점으로 출발한 중소기업은행이다. 중소기업은행은 중소기업인의 경제활동을 원활히 하고 그 경제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된 금융기관으로 1961년 8월 《중소기업은행법》에 따라 설립되었다.

주요업무는 ①중소기업자에 대한 자금 대출과 어음 할인 ②예금ㆍ적금 업무 ③중소기업자의 주식 응모ㆍ인수 및 사채의 응모ㆍ인수· 보증 ④내외국환업무· 보호예수(保護預受) ⑤지급 승낙 ⑥ 국고대리 업무 ⑦정부·은행으로부터 자금 차입 ⑧정부·공공단체의 위탁 업무 ⑨중소기업에 대한 외국자본 차입 ⑩중소기업에 대한 조사연구와 기업지도 등이다.

재원조달은 자본금· 예수금· 차관자금· 차용금·금융채권발행 등에 의존한다. 곧 정책금융기관·개발금융기관의 성격과 함께 일반 은행의 성격도 가진다. 2003년 총자산 71조 5843억 원, 자본금은 3조 [기업은행 전경]

4519억 원, 당기순이익은 2239억 원이다. 본점은 서울 중구 을지로 2가에 있다.

중소기업은행은 익산에서는 여섯 번째로 설치된 은행인데 현재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원래의 이리지점은 익산지점으로 명칭을 바꾸어 영등동으로 이사하여 가고 현재 들어있는 지점은 익산중앙지점이 되었다.

 

제19절 KB국민은행

 

1963년 2월에 이리지점으로 출발한 국민은행은 익산에서는 일곱 번째로 설치된 은행으로 처음엔 삼산의원건물에 세들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곧 중앙동 3가 7-1번지 현재의 자리에 새 건물을 지어 이사하였다.

1962년 12월 종래의 유사금융기관과 관련 법률을 통폐합하고 영세금융에 관한 정부의 시책에 부응, 서민경제의 발전과 향상을 기하기 위한 주식회사 국민은행의 설립을 위해 국민은행법(법률 1201호)이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1963년 서민금융전담 국책은행으로 새로이 국민은행이 발족되었다.

1994년 기업공개 및 공모증자에 이어 국민은행법이 폐지되고, 1995년 2월 완전민영화되었다. 거래대상기업도 확대되어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까지 여신거래가 가능해졌다. 1998년 6월에 퇴출된 대동은행(주)을 인수하였으며, 2000년 9월에는 총수신 70조 원을 돌파하였다. 한편, 은행권구조조정 으로 2000년 12월 한국주택은행(주)과 합병에 대한 양해각서 (MOU)를 체결하였고, 2001년 4월 합병 본계약을 체결, 통합은행의 상호를 국민은행(주)으로 하여 11월 1일 새롭게 출범하였다. 2003년 5월 신용카드사업 일원화와 경영효율성 극대화를 위해 국민신용카드 (주)와 합병계약을 체결하였다.

현재 KB국민은행 익산지점은 가장 번화한 중앙로에 건물내외를 산뜻하게 리모델링하여 우람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고객들로 항상 붐비고 있다. [중앙로의 KB국민은행]

 

제20절 구 세무서 자리

 

1931년 11월에 익산읍이 이리읍으로 변경된 지 3년 후인 1934년 5월에 당시 모현동에 이리세무소가 설치되었다. 1962년 1월에는 김제세무서를 통합하였으며 65년 7월에는 다시 김제세무서가 부활되었다. 50여 년 간 익산의 세무청사였던 좁은 구 세무서(현재는 창인동)를 떠나 1987년 12월에 현재의 남중동 청사로 이전하였다. 1999년 9월에는 다시 김제세무서를 통합하였다. 현재 구 이리세무서 [구 세무서 자리와 정문]

는 흥국생명이 들어 있으며 정문기둥이 그대로 남아 있고《이리세무서》라는 현판글씨가 아직도 훼손된 채 남아 있어 지나가는 이들로 하여금 옛 시절을 기억나게 한다.

바로 담장 하나 사이로 있던 일제하에서는 토목국이리출장소가 해방이후에는 내부무건설국 이리지방건설국(현 익산지방 국토관리청의 전신)이 되었으며 1945년 12월에 개교한 남성중학교가 교사 신축부지의 정지작업이 미처 이루어지지 않아 2년동안 건설국 건물 일부를 빌려 교실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제21절 적십자 애향관

 

익산역 광장의 가장 오른편에는 예전부터 학생들에게는 널리 잘 알려진 유명한 건물이 있다. 1960년대부터 이곳 이리역을 통하여 학교에 다니는 열차통학생들이 학교에서 나와 역전에서 열차를 기다리면서 공부하던 지금의 도서관역할을 해준 곳이 바로 이 적십자사 건물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전시관 하나 변변하지 못하였기에 이곳 1층에서는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클래식음악감상회가 가끔씩 열리고 연말이면 각 중고등학교 미술부가 연합하여 크리스마스 카드 전시회를 열어 카드를 판매하였는데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크리스마스는 학생들에겐 대단한 날이어서 이곳을 찾으며 마음을 설레곤 하였다. 학생들은 적십자회관이라고 불렀는데 가장 최근에(2006년 12월) 철거한 구 역전파출소와 적십자사 건물 사이에는 적십자애향관건립연혁비가 세워져 있다.비문의 내용을 통하여 그 역사를 모두 알 수 있기에 소개한다. 그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적십자학생회관은 1964년 9월 1일 이리가 교육도시이며 교통의 중심지라 이리시회에서 통학하는 많은 학생들의 여가이용과 청소년들의 선도를 위하여 그 당시 212평 위에 철근 콘크리트조 3층으로 건립되어 학생들의 보금자리로 되었는데 그 때 재원은 대한 적십자사, 전라북도 전북교육위원회, 이리시, 익산군, 김제군의 찬조금과 학생 성금 등으로 설립을 보아 운영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77년 11월 11일 밤 불의의 이리역 대폭발 사고로 순식간에 시가지가 폐허화되어 온

겨레를 경악과 비탄에 잠 [적십자 학생회관] 기게 하였으며 이로 인한 피해는 막대하여 58명의 인명피해와 1343명의 부상자와 6326명의 이재민을 발생케 하였고 또한 46억 여 원의 막대한 재산 손실을 냈던 것이다.

그러나 도민은 물론 온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재해복구에 인내와 근면과 창조적 역량을 총집결한 불굴의 의지로 30년 앞당긴 새 이리시의 건설을 2년여 동안에 보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이 학생회관도 당시 폐허가 된 구 적십자 학생회관을 철거하고 옛터 전면에 연면적 235평의 지하 1층 지상 3층의 철근 콘크리트조 고전식 지붕으로 새로 건립을 보게 되었는데 여기에 소요된 경비는 대통령 각하 하사금과 경향각지의 성금 6천9백만 원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 중앙본부 성금 7천만 원, 재일북해도동포호남회 2백만 원 등 도합 1억 4천1백만 원의 기금으로 이룩된 것이다.

이제 다시 이 적십자 학생회관이 건립됨에 따라 이리역에서 열차시간을 대기하는 학생과 거리에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잠시나마 휴식처를 찾아 대화하고 공부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마련되어 청소년들의 선도에 큰 공효가 있을 것임과 아울러 여기에는 노인들의 안식처와 사회봉사 사업 등 적십자 이념구현을 위한 종합봉사관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니 이 모두가 새 이리 건설에 있어서 또 한 가지 큰 실적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 학생회관 준공을 보게 되어 그 명칭을 적십자 애향관이라 하고 설립된 경위를 간단히 써서 비에 새기고 이 역사적인 사실을 기리 기념코자하는 바이다. ]

서기 1980년 7월 1일

전라북도 도지사 김학중

대한 적십자사 전라북도 지사장 윤부병

이리시 재해대책 본부장, 이리시장 채의석

 

현재 이건물의 주 현판은《익산적십자봉사관》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 안에는 《적십자애향경노회》, 《대한적십자사익산지역협의회》, 《적십자익산평생대학》등이 들어서 있고 지금도 오후에 학교가 끝나면 많은 학생들이 공부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