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고대 오리엔트 지역 유적답사기(2010)

청담(靑潭) 2010. 3. 28. 21:54

고대 오리엔트지역 유적답사기

(이집트-그리스-터키등 지중해 지역)

♧들어가는 말

성우회는 전주교대 남성동문 모임이다. 현재 본래의 회원은 8명이나, 언젠가부터 부부동반모임이 되었으므로 모두 16명이 되었다. 적금을 부어 5년 전에 필리핀에 부부동반 여행을 다녀온 뒤 다시 적금을 붓기 시작하고 아무도 아직 다녀오지 않은 곳을 찾아보니 지중해 지역이어서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적금을 4년간 모았으나, 작년에 제2차 경제위기로 국민정서상 분위기가 여의치 않아 모두들 해외여행을 자제하는 분위기여서 우리도 포기하고 적금을 계속하니 각 가정마다 900여만 원의 자금이 모아져 드디어 이번에 출발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전주교대에서 동문중심으로 결성된 써클《성화》에서 만났다. 나의 사랑하는 양드리님은 남성여고 출신으로 성화 후배이며 우리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 모임은 내게는 사실 가장 소중한 모임이라고 할 것이다. 고등학교는 지역의 명문이었으나 다들 가난하여 4년제 대학을 가기 어려워 교대에서 만났고 2년을 함께 밤이나 낮이나 붙어살다시피 했다. 당시에는 교육대학생인 것이 상당히 부끄러워 남들에게는 자기소개도 꺼리며 우리끼리 폐쇄된 대학생활을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여 교직은 부모들이나 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이 되고 종철이와 동규를 제외하고는 모두 부부교사이며, 모두들 오랜 세월을 노력한 끝에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고, 나 자신 부자야 될 수 없겠지만 남들이 인정하거나 말거나 마음으로는 대한민국 10% 삶이라고 자부하고 살고 있다. 동규네는 딸이 카이스트 박사이고 사위가 의사이며 아들은 의학전문대학원생이고, 종철이도 큰딸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KT에 입사하였고 본인이 젊은 시절부터 취미로 시작한 난 수집 취미가 발전하여 부인의 성공적인 화원경영으로 부자(?)가 되어 6천만 원짜리 제네시스를 탄다. 이만하면 다들 성공하지 않았나? 열흘을 함께 동고동락하게 된 우리 식구들은 다음과 같다.

 

♣이석한(남성고 21회) 양순옥 부부

♣이종철(남성고 21회) 최현임 부부

♣송명용(남성고 21회) 문혜성 부부

♣김용성(남성고 22회) 정정임 부부

♣이상범(남성고 22회) 김애순 부부

♣심재호(남성고 24회) 오정숙 부부

 

 10월 모임에서 두 가정이 여행을 반대하고 강조석 선생네와 김동규 선생네가 사정상 포기함에 따라 자동적으로 여행계획을 전면취소하고 적금은 배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김용성 선생, 이종철 선생, 심재호 교감은 함께 가기를 원하므로 내가 다시 추진하여 이상범 교장네와 송명용선생네까지 동의를 받아 결국은『한교투어』를 통하여 여섯 가정 12명의 부부가 모두 함께 가기로 결정 하였다. 여행기간은 10박 11일(이집트 3일-그리스 1일-터키 5일)로 일급호텔형이며 러시아 항공을 이용하여 모스크바를 경유하고, 단체이기에 1인당 10만원씩을 할인하여 289만원에 결정되었고 팁 값까지 포함되며 일체의 옵션이 없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갈 수 있는 조건이었다.

나로서는 11번째 해외여행이며 유럽은 처음으로 가게 된다. 지역이 고대 오리엔트 문명지인 이집트 터키 및 고대 그리스문명지역의 핵심인 아테네의 유적을 탐방하게 되는 것이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며 가슴 설레는 여행이다. 더욱이 어쩌면 평생에 한 번도 가 볼 수 없을 지도 모르는 모스크바를 경유하니 러시아에 발을 디디어보고 러시아의 산하를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엄청난 덤이기에 정말 최선의 선택이라고 스스로 기뻐하였다.

단체이지만 여행사교섭은 각 가정이 따로 하고 공동자금 266만은 김용성 총무가 집행하기로 결정하다. 드디어 1월 17일 새벽 6시 인천공항 리무진을 타면서 시작되었다.

방학 중이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답사공부준비를 마냥 미루다가 겨우 일주일전에야 고대오리엔트 지역의 세계사를 다시 정리하고 인터넷을 통하여 자료를 추출하여 두 권의 책을 만들었다. 지도를 프린트하여 답사지역과 도시에 표시하여 공간적으로 파악하고 문화내용은 열심히 읽고 붉은 볼펜으로 밑줄을 쳐가며 공부하다. 일정과 답사지역을 공부하면서 이번 여행에서 아쉬운 점 몇 가지가 있다. 이집트에서는 애스완 댐을 찾지 못하는 것이 하나요, 그리스에서는 크레타섬과 크놋소스,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스파르타와 미케네를 가보지 못하는 것이 또 하나요, 터키에서는 트로이를 가지 못하는 것이 또 하나이다.

20여 년 전부터 해외에 나가기 시작하였음에도 아직까지 처음 장만한 낡은 여행가방을 사용하였는데 이번에 큰맘 먹고 전주 롯데백화점에서 샘소나이트 가방을 장만하다. 대형과 소형 두개를 샀는데 대형이 너무 커서 고민하였으나 시간관계상 교환이 불가능하므로 지나친 고민 안하고 그냥 사용하기로 결정해버렸다. 날씨는 이집트는 5월의 봄, 그리스는 11월의 늦가을, 터키는 2월의 겨울로 생각하고 복장도 잘 준비하다보니 옷 짐이 꽤나 많아졌다. 원래 우리 둘이는 어느 나라 음식도 잘 먹기에 준비 없이 출발하려는데 양드리 친구인 남성여고 김재선 선생의 ‘터키음식 못 먹는다’는 눈물어린 충고에 귀 기울여 컵라면 10개와 인스턴트 고추장 3개, 김 10개를 준비하였다.

물건 사는 일이나 선물은 아예 관심이 없고 옵션이 거의 없는데다, 총무가 움직이는 250여 만 원을 믿고 유로화와 달러는 70여만 원만 준비하였다. 호텔 팁, 그리고 세 나라 모두 물은 사먹어야 한다기에 물 값 등으로 사용할 돈만 준비한 것이다.

 

♣제 1일(1월 17일 일요일)

김용성 선생네는 정아가 태워다 준다기에 우리는 라세티를 타고 가서 익산 인터체인지부근에 있는 리무진 정류장에 마련된 무료주차장에 놓고 떠나기로 하였다. 다른 네 집은 전주에서 6시에 출발하고 익산정류장에서는 6시 25분에 도착하여 30분에 출발한다. 어릴 때 보았던 정아는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으나 이젠 훨씬 더 예쁜 의사가 되었다. 전북대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인턴이며, 함께 나온 신랑감은 서울에서 의대를 나온 의사이다.

비행기 출발은 12시 40분인데 10시에 공항에 도착하였으므로 시간여유가 많아 핸드폰 로밍신청도 하면서 기다리다 가이드 박종란씨를 만났다. 40세 정도의 똑똑한 가이드로 보았는데 대화중에 마치 50대인 듯 세대의식이 잘 통하여 나중에 알고 보니 47세의 노처녀님이라 한다. 우리 여행단 인원은 여행객이 29명이며 가이드까지 30명이 되었다.

일행은 다음과 같다.

●우리 가족 12명

●부산에서 온 초등 여교사 2명

●개인 3명-회사 은퇴한 60대 후반의 서울 분, 전북 군산의 모 중학교 교장, 서울에 사는 외대 사학과 출신의 40대 여행을 즐기는 여성분

●교육계 은퇴자인 70대 초반의 다정한 부부 2명

●40대 초반의 가장 젊은 영계들이나 실은 아들이 중3이라는 회사원 부부 2명

●50대의 초등여교사와 서강대 법학과 3학년인 딸 2명

●카메라를 잘 다루는 남자와 30대로 착각되는 썬 그라스 멋쟁이 아내인 40중반의 부부

●중등여교사 부부

●60대 초반의 무슨 단체 이사님이라는 부부이다.

비행기는 20분 연착하여 오후 1시에 출발한다. 모스크바항공 SU600기이다. 이번 여행에서 좌석이 창가로 배정되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웬 행운인지 처음부터 우리부부에게 창가자리가 주어진다. 이번에 우리나라에도 기상대가 생긴 이래 최대의 눈이 내렸고 아직도 서울은 온통 눈으로 덮여있다. 날씨가 흐려서 이륙한 뒤 육지가 잘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가 2시에 식사가 나와 먹은 뒤부터는 눈 덮인 산과 마을들이 보인다. 분명한 것은 이곳이 만주지역 일 텐데 어디쯤인지 자료가 없어 알 수가 없다. 다른 비행기들과 달리 진행항로와 고도 및 속도 상황을 알리는 대형모니터화면을 작동시키지 않으니 매우 안타깝다. 4-5시간을 날았어도 온통 거대한 눈이불로 덮여 있는 고원지대와 산악지대를 지나고 있다. 아! 혹시 이곳이 몽고 근처의 사막지대는 아닐까? 아니면 텐산산맥인가? 나는 잠시 산악인들이 히말라야 높은 산들을 정복하면서, 또는 등산 좋아하는 사람들이 높은 산 정상에 올라 ?온 세상이 내 눈에 잡히고, 자연과 사람까지도 모두가 내 발아래 존재하는 듯한 정복감을 느낀다?라는 말을 하는데, ?지금 내가 수 천 미터 아닌 2만 미터 높이의 하늘에서 바라보는 저 눈 덮인 지구의 장엄함을 바라보는 감동과 비교나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잠시 잠겨 보았다. 비행항로를 미리 잘 파악해 놓지 못한 죄로 이런저런 짐작만하면서 드디어 5시간이 지나니 사람 사는 세상이 보인다. 오후 8시 30분에 검은 운해 위로 해가 지는 아름다운 모습이 보이는듯하였으나 9시 45분에는 해가 다시 뜨는 것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우리가 서쪽을 향하여 계속 날아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꼬박 10시간 걸려 모스크바에 도착하다. 모스크바 부근에 작은 호수가 아주 많고 호수 부근에 마을들이 아주 잘 정돈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옛 공산주의 시절에 형성된 소포즈나 콜호즈일텐데 의외로 주택들이 잘 지어진 듯 보이고 질서정연하다. 온통 눈으로 덮여 있어 확실치는 않으나 마을 광장도 조성되어 있는듯한데 내왕하는 자동차도 없이 쥐 죽은 듯 눈 속에 파묻혀 온 마을사람들이 활동을 중단하고 잠을 자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6시간의 시차가 있으므로 11시를 5시로 바꾸다.

모스크바 공항은 매우작고 출구나 통로도 비좁아 불편하다. 대기실도 작고 면세 상가물건들도 한산하다. 5년째 세계최고의 공항으로 선정된 인천국제공항에 비교할 수는 없다 해도 대러시아의 모스크바공항으로는 분명 손색이 있다.

7시에 모스크바항공 SU341기로 바꾸어 타고 카이로를 향하다. 역시 창가좌석인데 깜깜한 밤인데다 모스크바의 교외지역이어서인지 전력사정으로 모스크바가 어두운 것인지 어디가 어딘지 짐작이 잘 가지 않는다. 모스크바 지역을 벗어나서는 작은 마을들만 보이고 큰 도시는 아예 보이지 않아 잠을 청하였다. 4시간 30분 날아서 카이로에 도착하니 모스크바보다는 훨씬 밝고 큰 대도시 모습의 카이로가 나타난다. 11시 반에 도착하다.

예상 밖으로 최고급 버스로 30여분 이동하여 12시가 넘어서 파라다이스 뷰 호텔에 투숙하다. 그러나 모스크바와 시차가 1시간이므로 11시 조금 넘은 시각이 되었다. 피라미드가 있는 구 카이로 지역에 있는 낡고 작은 호텔이다. 호텔입구가 포장도 돼있지 않아 이해하기 곤란하였지만 정원은 그런대로 꾸며져 있다. 아버지와 승원이는 통화가 되지 않았으나 승수와는 통화하여 무사한 도착을 알렸다.

 

♣제 2일(1월 18일 월요일)

▣이집트의 역사

1. 이집트 왕국(B·C3200~B·C526)

○고왕국(제3왕조~제10왕조 : B·C2780~B·C2180) 수도 멤피스

○중왕국(제11왕조~제17왕조 : B·C2100~B·C1788) 수도 멤피스

○신왕국(제18왕조~제26왕조) : B·C1580~B·C1090) 수도 주로 룩소르

2. 아시리아의 지배(B·C 8세기~B·C7세기)

3. 페르시아의 지배(B·C526~B·C330)

4. 알렉산더의 지배 (B·C330~B·C323)

5.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304~B·C30) 그리스인의 왕조

6. 로마지배 시대(B·C30~A·D395)

7. 동로마 지배시대(A·D395~A·D7세기)

8. 이슬람 시대(8세기초부터 옴미아드조-파티마조(909~1171)-마물르크조(1171~1517))

9. 오스만 투르크 지배(1517~1922)

10. 1922년 왕국으로 독립

11. 공화국 선포(1953 나세르)

 

▣이집트의 상황

○언어 : 아랍어

○대통령 : 무바라크

○면적 : 100만 ㎢

○인구 : 8천만 명

○국민소득 : 약 5천 불

 

어제 밤 호텔 로비에서 모임을 갖고 약간의 술을 했는데 양드리님은 보드카와 맥주를 몇 잔하더니 과음했는가 보다. 가이드는 에즈 딘이라는 나이가 45세 정도의 키가 187㎝에 아주 잘생기고 똑똑하신 분이다. 외모가 마치 귀족적인 대학교수 타입이며 박식하고 한국어에 상당히 능통하며 설명은 대학강의식으로 능수능란하되 품위가 있다. 카이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이 어렵자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연세대 한국어 학당에서 2년간 공부하고 가이드가 되었고 지금은 성공한 가이드라고 하며 수입면에서 대학교수보다 훨씬 좋아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중국어교수이며 누이동생은 일어과 교수라고 한다. 카이로 대학 재학생이 수 만 명이나 되며 한국보다도 훨씬 더 취업이 어려워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한없이 믿어주시는 아버지가 계셨지만, 오늘이 있기까지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과정을 겪었다는 지난 20년 삶의 여정을 말해준다. ?나도 저 가이드 아버지만큼이나 언제나 우리 승원이 승수를 믿고 기다려 주는 아빠가 되어야지? 하는 마음 다짐을 한다. 9시에 버스는 기자지구에 있는 그 유명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찾아간다.

기자(Giza)는 카이로 서쪽 10㎞지점에 있으며 큰 피라미드는 4왕조 마지막 왕인 쿠푸왕이 축조한 세계최대의 피리미드이다. 부근에 카프라왕과 멘쿠레왕의 피라미드가 있어 3기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미 익히 잘 알고 있어서인지 경이로움이 앞서기 보다는 장수왕의 무덤과 자꾸 비교가 되는 것은 직업의식의 발로인가? 작지만 아름답고 장엄한 장수왕의 무덤이 결코 부족함이 없음을 느낀다.

피라미드는 장제용 건축물이다. 고왕국 창건 때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까지 2700년 동안 지어졌다. 그러나 피라미드 건축의 전성시대는 제3왕조부터 제6왕조까지(B·C2686~B·C2345) 이다. 이집트에서는 약 80기의 왕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으나 많은 피라미드들이 깎아내려지고 폐허로 변했으며 보물들은 약탈당했다. 이곳에 와보니 카이로의 서쪽은 사막지대이며 피라미드는 카이로시와 사막의 접경지에 자리하고 있다. 카이로시가 아름답지 못한 것은 사막의 먼지 때문에 도저히 깨끗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도 큰 이유가 되리라고 여겨진다. 낙타꾼들이 수없이 많이 대기하고 있어 관광객들을 태우는데 겨우 100여 미터 갔다 오는데 1불씩이다. 사진 찍어준 수고비까지 2달러를 주었는데 이들이 다들 카이로 부자라 한다. 낙타기사로 돈을 벌어 부자가 되면 대학교수 사위는 가난하다고 무시한다고 하니 이집트의 가난함과 후진성이 이해된다. 카이로는 상상속의 국제도시, 아름다운 여행의 도시, 멋있고 환상적인 쾌락의 도시가 아니라 흙먼지에 비포장에 60년대식 마을 수퍼에 저급한 상품들이 진열된 후진국가 모습 그대로이다. 적어도 GNP 5천 달러 정도의 중진농업국이라고 생각한 이집트에 대한 지식은 물거품이 되었다.

카프라왕의 피라미드 앞에 있는 伴人半獸의 스핑크스는 규모는 상상보다 작은데 카프라왕(B·C2575~B·C2465)시기에 하나의 돌로 조각한 것이다. 臥像인 스핑크스는 왕의 초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의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왕의 초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미이라를 만든 신전은 스핑크스 앞에 있다.

시내로 들어가서 유태교회와 곱티교회(그리스 정교 일파)및 이슬람 사원을 보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을 찾았다. 정원에 수 천 년 전의 대리석 인물상과 석조물이 진열되어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는데 정작 내부로 들어가니 경이로움이 아니라 경악 그 자체다. 수 천 년 전의 온갖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상상을 초월한다. 왕관들(王冠과 왕의 미라를 넣는 石棺)의 금은 세공기술, 돌과 나무에 새긴 조각기술, 눈부신 황금상과 관에 새긴 아름다운 보석장식등이 실로 눈부시다. 그림에 나타나는 인물들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너무나 뛰어나다.

저녁에는 카이로시내를 흐르는 나일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뷔페식 식사를 하다. 2시간 정도 식사를 하면서 공연을 관람하고 카이로의 야경도 구경하다. 10시 30분에 호텔로 돌아왔다. 새벽 2시 기상이다. 룩소르로 가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야 한다.

 

 

 

 

♣제 3일(1월 19일 화요일)

2시에 모닝콜이다. 바삐 서두르고 나와 3시에 호텔을 출발한다. 호텔에서 빵, 햄버거 등으로 박스에 넣은 3류 도시락을 준비해 주었는데 가는 도중에 적당히 먹었다(여성 몇 분은 배탈이 났다). 5시에 비행기가 이륙하여 1시간 만에 룩소르에 도착하였다. 카이로시 인구가 700만 명인데 비해 룩소르는 50만 명이 사는 도시인데 아주 깨끗하고 수목도 녹색 빛이 아름다우며 예쁜 꽃들도 피어 있으니 카이로에 비할 바 아니게 사람이 살만한 관광도시다. 가이드 설명으로는 관광수입이 많아서 이집트 어느 도시보다 살기 좋은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고대 도시인 테베유적지의 남쪽에 형성된 도시에 붙여진 이름이다. 버스로 이동하여 점심이 예약된 식당에서 간단한 휴식을 취한 뒤 왕가의 계곡으로 출발한다.

나일강 서쪽에 있는 왕가의 계곡에 가는 길에 멤논석상을 보았다. 제 18왕조 말기 아멘호테프 3세(재위 B·C1390~B·C1353)때 새긴 거대한 두개의 석상이다. 높이가 20M이며 무게는 90t 이라고 한다. 나일강을 보호하기 위해 다리를 설치하지 않는 관계로 먼 길을 돌아 왕가의 계곡에 다다른다. 왕가의 계곡은 나무하나 없는 삭막한 돌과 모래로 이루어진 사암으로 이루어진 황야의 계곡에 신왕국 시대의제 18왕조에서 제 20왕조까지의 왕들의 묘지로 조성된 파라오들의 묘지구역이다.

제일먼저 아멘호테프 3세의 아버지묘를 찾았다. 최정상 부근에 있으며 투트메스 4세이다. 투탕카멘의 묘는 원래 미완성이었다고 한다. 람세스 6세의 묘를 파면서 나온 흙을 쌓아놓은 자리여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때문에 도굴을 면하여서 오늘날에는 가장 최고로 유명한 무덤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람세스 3세의 무덤이다. 신왕국 마지막 왕으로 무덤 속 길이는 140m인데 크게 그린 벽화가 많다. 석관은 루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김용성 선생은 루불박물관에서 본 기억이 있다고 자랑이다.

다음은 람세스 9세의 무덤이다. 이때부터 불안한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버스로 이동하여 합세슈트 여왕이 건축한 유일한 신전으로 여왕의 시아버지 루트머스 1세의 부활과 그녀 자신의 부활을 기리며 건립된 것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대한 제전의 하나인 합세슈트 장제전에 가다. 합세슈트(하칩스)는 신왕국시대 유일한 여왕인데 소말리아와 무역을 시작하고 문화를 전파한 업적도 남긴 여왕이다. 루트머스 2세와 결혼하였는데 왕과 다른 여자 사이에 낳은 루트머스 3세가 아직 어린 시절에 20여 년 간 집권하였다. 루트머스 3세는 이집트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17번의 전쟁을 일으킨 정복자라고 한다. 장제전 건물도 뒷산을 배경으로 잘 배치되었지만 거대한 기둥과 석상 그리고 벽화는 매우 아름답고 예술적이다.

점심을 먹고 아몬대신전으로 유명한 카르낙신전으로 간다. 아멘호테프 3세는 나일강 가까이 있는 이곳에 강둑을 따라 아름다운 신전을 지어 이집트의 주신인 아몬과 여신 무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콘스에게 바쳤다고 한다. 카르낙 신전은 이집트 최대의 신전이며 룩소르 관광의 하일라이트이다. 위대한 이집트의 거대한 석조물들이 나를 압도한다. 이집트 문화의 위대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위압감을 느끼며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왕들마다 다투어 만든 25개의 작은 신전들의 집합체이다. 먼저 람세스 3세의 신전을 보았다. 람세스 2세 때 만든 신전은 그림과 채색이 아름다운 104개의 대형기둥이 있고 기둥 위는 파피루스 꽃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많은 신전에 그려진 섬세하고 치밀한 벽화를 통하여 이집트 농경문화 및 신앙까지 모든 문화를 파악하기가 가능하다. 거대한 오벨리스크 2개는 모두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무게는 300톤이라 한다. 이 거대한 오벨리스크 하나는 동로마시대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고 하니 대단한 일이다. 카르낙 신전은 수 천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나일강의 범람으로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다.

룩소르시내를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보이는 룩소신전은 카르낙 부속신전인데 시간이 부족하여 직접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옆에 있는 길을 두어 차례 버스로 오가면서 많은 건물들이 무너져 내린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관광객들이 관람하는 모습도 보였다. 배를 타고 나일강을 유람한 뒤 점심 먹은 식당부근에서 내려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한식으로 저녁을 잘 먹다. 밤 11시 10분 비행기로 다시 카이로에 돌아오는 강행군으로 하루여행을 마쳤는데 이런 힘든 여행을 양드리님은 잘도 견딘다. ‘해외여행이라면 아플 줄도 모른다’는 내 농담에 ‘맞아!’라며 맞장구를 쳐 준다.

 

 

 

 

♣제 4일(1월 20일 수요일)

오늘은 이집트여행 3일째로 멤피스로 간다. 멤피스는 카이로남쪽 25km지점에 위치하는 고왕국과 중왕국의 수도이다. 아침식사는 빵과 우유로 간단히 먹었다. 어제는 너무 힘든 여행이었으므로 여유 있게 9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멤피스의 부근의 사막지대에 사카라로 가다. 사막언덕에 오르면서 보이는 올리브 과수원이 아름답다. 먼저 귀족들의 무덤 하나에 들어갔다. B·C 2400경의 귀족들의 무덤이 10여개 있는데 그중 공개되는 하나의 무덤이다. 벽화가 선명하며 잘 그려져 있어 그 당시의 생업과 사후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매우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활모습이 묘사되고 있는데, 주로 농업과 어업 그리고 제사와 관련된 벽화들이다.

다음으로 최초의 피라미드 양식인 계단식 피라미에 다다른다. 4600년 전에 만들어진 최초의 피라미드인 것이다. 입구에는 신전이 있는데 목조형 석조기둥은 미륵사지 석탑(목조탑 양식의 석탑)을 생각하게 하고 계단식 피라미드는 위례성의 계단식 돌무덤을 연상하게 하였다.

멤피스 박물관에서 최초의 스핑크스라는 람세스 2세의 거상과 정원에 있는 예술적인 석상들을 감상하고 기념사진을 즐겁게 찍었다. 곳곳에 쓰레기가 방치되고 길은 비포장이다.

카이로에 돌아와 공항과 가까운 곳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시내를 흐르는 나일강 농수로의 더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죽은 가축들이 수로에 방치되어있는 모습은 불결을 넘어 흉악스럽다. 그러나 식당은 대형이며 식사도 굳 나이스다. 공항으로 이동하여 올림픽 항공으로 4시 25분에 아테네로 출발하다. 창가에 자리를 잡게 되었으므로 나일강을 따라 지중해로 들어서면서 알렉산드리아시를 볼 수는 없을까 기대했으나 구름이 잔뜩 끼었고, 겨우 나일강 주변의 삼각주에 펼쳐진 풍요로운 농장들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2시간을 날아 아테네에 도착하니 선진국이라서 아름답고 깨끗한 시내로 들어서면서 국회의사당을 먼저 구경하다. 국회의사당에서 근위대 행진을 구경하는데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발견된 것은 중앙에 게양된 태극기! 모두들 감격해하는데 오늘 요인 한분이 이 나라 국회를 방문한 것으로 추측만 할뿐 자세한 내용은 알아내지 못하다.

 

 

 

 

♣제 5일(1월 21일 목요일)

▣그리스의 역사

○크레타 문명(미노스문명) : B·C2700 ∼B·C1450-크레타섬

○미케네문명 : B·C1600 ∼B·C1100

○고대 그리스 : B·C750 ∼B·C323-식민도시 건설

○헬레니즘 시대 : B·C3230 ∼B·C146

○로마 지배 시대 : B·C146 ∼A·D395

○동로마 제국 : A·D395∼A·D1453

○오스만 투르크 지배 : A·D1453∼A·D1821

○그리스 독립(1821)

 

▣그리스의 상황

○언어 : 그리스어

○대통령 : 파풀리아스(좌파정권)

○면적 : 13만 ㎢

○인구 : 1100만명

○국민소득 : 3만 달러

○OECD가입국이며 유럽연합 가입국

 

폴리스 그랜드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이른 새벽에 애기나섬으로 출발한다. 아테네의 항구인 피레네항에서 관광국인 그리스의 아테네다운 아름다운 크루즈 유람선을 타고 가는데 배는 새벽바다를 가르며 애기나 섬으로 향한다. 가는 좌우편에도 여러 큰 섬이 있으나 이 섬의 경치가 좋고 볼거리가 있어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들리는 정해진 코스라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가는 도중에 해가 떠오르고 한 시간 남짓 만에 드디어 항구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50대 중반의 가이드님이 갑자기 버스투어를 제안하는데 1인당 무려 6만원이라 한다. 버스투어를 하지 않을 분은 항구에서 놀고 있으라는 놀라운 협박(?)에 1인당 6만원짜리 고가 버스투어를 하게 된다. 인터넷에서 이미 버스투어에서 보는 어느 성당인가에 대한 사진도 본 듯하여 우리 팀 12명이 합동으로 신청하니 놀랍게도 대부분이 너도나도 참가하여 25명이 버스투어를 하게 되었다.

애기나섬은 인구가 1만 2천명이며 밀물과 썰물이 없고 무려 125개의 성당이 있는 것이 특색이라고 한다. 정말 수많은 성당이 흰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다. 또 돈 많은 아테네사람들의 별장이 많은 섬이다. 과수원이 많아 물어보니 일직이 피스타치오로 성공한 섬이라는 설명이다. 우리가 20여 년 전 부터 먹기 시작한 피스타치오가 가장 많이 생산되고 수출하는 생산지라고 한다. 이곳을 대표하는 나무는 소나무와 올리브나무와 피스타치오나무로 보인다. 백사장이 있는 지중해 해안에서 잠시 쉬다가 작은 산의 정상에 있는 아페아 신전 에 도착했다. 아아! 작지만 그리고 많이 부서졌으나 그리스신전 모습 그대로다. B·C490년에 세워진 아티나여신을 섬긴 신전으로 산의 정상에 위치한 탓인지 규모에 비해 웅장한 모습으로 보이는데 도리아식 건축이라는 설명이다.

조금 이동하니 인터넷에서 본 넥타레스 성당이다. 1920년에 서거한 성 넥타레스 성인을 기리는 성당이며 聖水가 있어 나누어 주기도 한다. 신자가 아니라도 남을 위해 헌신한 성자를 모신 성당이니만큼 경건한 분위기에서 정말 맑은 마음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아테네로 돌아와서 그리스에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한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스에 거주하는 우리 한국인이 겨우 1백 여 명 정도라니 상상 밖인데, 그만큼 그리스인들이 배타적인 듯하며 가이드님은 미국에서 만난 그리스인과 결혼하게 되어 왔으며 남편은 가방 제조업자라고 한다.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아크로폴리스 언덕파르테논 신전에 가다. 파르테논 신전에 빨리 오르고 싶은 마음에 흥분되며 가슴이 설렌다.

“내가 과연 지금 그 유명한, 상상 속에 머물러 있던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 가기 위해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오르고 있는 것인가?”

맞다! 양드리님과 손을 잡고 우리가 지금 파르테논 신전에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에 오르니 웅장한 신전과 하얀 색으로 색칠한 아름다운 아테네시가 이 신전을 둘러싸고 있다. 정말 아름다운 도시이며 장엄한 신전이로구나! 폐허가 된 신전의 보수작업이 한창이라서 더 유심히 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저 거대한 파르테논 신전도 보수작업으로 건물을 다시 완성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미륵사탑 복원은 너무 어려워 할 필요가 없고 충분히 복원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생긴다.

 

다음은 신전에서 내려와 부근에 있는 바위언덕에 올라갔는데 가이드가 아고라라고 설명하여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하며 의문을 표시하였으나 가이드가 잘 몰라서 그러는지 ?아고라가 맞다?는 대답만 한다. 이 글을 쓰면서 자세히 찾아보니 이 바위언덕 아래에 보이는 넓은 평지가 바로 아고라이며 성당과 수도원 건물 같은 것들이 여러 채 눈에 뜨인다. 가이드가 학식이 조금 약하여 실수하는 것이지만 잘해보려는 노력은 많이 하고 있어 용서는 된다. 내려오는 길에 아크로폴리스 언덕 바로 아래 대형 원형극장이 웅장하게 놓여있고 저 멀리 시내쪽으로 제우스 신전이 보인다. 주로 대형 기둥들만 남아 있는 모습이다.

버스로 잠깐 이동하니 암벽동굴이 나오는데 이곳이 소크라테스가 갇혔던 감옥이라고 하니 우리가 마치 2500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듯한 착각을 아니 할 수 없다. 바로 엊그제 그 냥반이 저곳에 갇혀 있다가 처형당한 듯한 착각 말이다. 동굴 앞에서는 고등학생들이 교사의 지도로 연극 연습을 하고 있어 한참을 구경하였다. 4시가 되어 1896년에 개최된 근대 올림픽 경기장을 구경한다.

최초의 근대 올림픽 경기장은 대단히 규모가 크고 아직도 완벽하게 남아있어 현재에도 운동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잘 관리되고 있다.

오후5시 아테네를 출발하다. 배에서 하룻밤을 지내므로 아테네에서 술을 미리 사두었다고 한다. 히오스항까지 9시간 거리다. 말하자면 에게해를 가로지르는 것이며 산뚱반도에서 우리 인천항에 오는 것이나 진배없다.

새벽 2시40분에 도착하였는데 내리는 비가 보통이 아니다. 우산을 받지만 해결이 잘 안되는데 그래도 모두들 가방을 힘차게 밀며 차에 오른다. 히오스는 인구 5만 명의 섬인데 그리스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바로 옆이 터키이다. 비행장까지 있으며 만일 내일 터키 체스메항으로 배가 뜨지 못하면 다시 아테네로 돌아가 아예 비행기로 콘스탄티노플로 날아가며 일정이 변경 될 수도 있다고 한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이 이곳에 있다. 50대 초반의 한국인 부부인데 이 섬에 사는 유일한 한국인이요, 호텔이름은 〈골든 오딧세이〉이다. 겨우 3시간도 못자고 6시 기상이다. 바삐 서둘러 7시에 아침을 먹고 터키의 체스메항으로 떠나는 8시40분발 배를 타다.

 

 

 

 

 

♣제 6일(1월 22일 금요일)

▣터키의 역사

○히타이트 (B․C 2000~B․C 1193)

○리디아 (B․C 7세기~B․C 545)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조 B․C 559~B․C 330)

○알렉산더제국의 지배 (B․C 330~B․C 323)

○시리아 (B․C 323~B․C 63) ※페르가몬이 독립( ~B․C 133)

○로마의 지배 (B․C 133) →동로마 제국(A․D395~1453)

○오스만 투르크 (A․D1299~1923) →터어키 공화국(A․D1923 ~ )

 

 

▣터키의 상황

○언어 : 터키어

○대통령 : 압둘라 궐

○면적 : 783만 ㎢

○인구 : 7100만명

○국민소득 : 1만 3천달러

○OECD가입국

 

히오스항을 빠져나간 배는 터키의 체스메항 까지는 금방이다. 지리적으로 히오스섬은 터키 땅이어야 할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앙숙인 두 나라의 협정에 의해 그리스 영토로 남아있는 상태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도 처음 안 것인데 히오스섬은 그리스의 섬 중 5번째로 큰 섬이니 터키로선 안타까운 일일 듯하다. 거리가 불과 7㎞라더니 과연 몇 십 분 만에 터키 땅이다. 터키는 소아시아라고 불리는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한 나라이며 정말 큰 나라이니 이동하는 시간이 길어 우리 양드리님에겐 가장 걱정되는 일이다.

가이드는 김부현이라는 30대 초반의 청년이다. 서울에서 모 공대를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다가 사건이 생겨 사표를 쓰고 어찌어찌하다가 이곳 가이드가 되었다는데, 머리가 상당히 좋은 사람이며 정말 터키를 비롯한 오리엔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공부를 엄청 많이 하였고 설명을 체계적으로 아주 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체스메항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하여 11시에 에페소(에페스)에 도착한다. 에페소는 약 3,0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고대도시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약 2000여 년 전 로마시대에 세워진 로마양식으로 A․D 500여 년 경 말라리아로 인해 폐허가 되어 버려진 채로 방치되던 것을 A․D 1800여 년 경부터 발굴을 시작하여 현재는 3분의1 가량이 끝난 상태라고 한다.

에페소 고대 로마 도시에 비가 내리며 영상기온이기는 하지만 은근히 춥기까지 하다. 입구에서 50유로를 주고 재빨리 우비를 샀다. 우산보다 편하기도 하지만 우비를 입으면 따뜻하기 때문이다. 에페소는 고대 로마시대에 소아시아에 있던 도시로 지금은 폐허상태이나 부지런히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곳이다. B․C 620년경 이곳에 세워진 아르테미스신전(神殿)은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에 이르는 지역에서 많은 순례자를 끌어 모았다. 이곳은 B․C 7세기∼B․C 6세기가 최전성기였으나 B․C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 원정 뒤 헬레니즘시대에 이르러 경이롭게 부흥하였다. 1세기 성 바울로는 이곳에 그리스도교를 전하였으며, 또한 로마에서 이 지방 신자에게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사도바울이 돌팔매질을 당했다고 한다. 이 도시의 폐허에서는 수많은 유적이 발굴된다. 헬레니즘시대에 건축된 2만 4천명을 수용한다는 대극장, 서기 114년에 건축한 아름답고 웅장한 셀수스 도서관, 시리아풍으로 조각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신전, 트라야누스 황제의 분수대, 스콜라스티카 목욕탕, 창녀촌의 흔적, 길 양편의 수많은 상가들, 많은 황제의 기념비와 황제상등 규모가 웅장하고 최고의 예술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엄청난 유적과 유물들이 즐비하다. 경악 그 자체이며 고대 로마의 도시 속에 우리가 그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구경 온 착각에 빠져 버린다. 놀랍다. 경이롭다. 2천 여 년 전의 고대 유적이 땅속에 묻혀 있다가 이렇게 다시 나타서 당시의 도시 모습과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하여 주다니…

 

에페소가 터키여행의 진수다. 한때 세계사를 가르쳤고 사회선생이기에 소아시아의 역사와 터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터키에 이러한 고대 로마의 최대 역사유적이 있을 줄은 정말 상상하지 못했다. 이 에페소 답사를 통하여 로마를 모두 알아버린 느낌이다. 로마의 웅장함, 화려함, 경제적 번영이 그대로 드러나는 에페소 모습이다. 이 에페소는 에게해에 인접하여 고대에는 배가 닿았기에 인구가 20만 명이나 되는 대도시로 번영하였으나 지금은 바다가 멀어진 상태라고 한다.

지금부터 불과 40여 년 전인 1967년 여름에 내가 아버지께서 근무하시는 후포초등학교를 찾아갈 때, 부안의 줄포항에 고깃배들이 정박한 모습을 보았더니만 지금은 배 흔적조차 찾을 길 없고 바다는 보이지 않으니 천년세월도 더 지난 이곳 에페소야 말해 무엇 하리?

에페소에서 빠묵깔레까지는 고속도로임에도 3시간 30분이 걸린다. 가는 길에 양고기로 점심을 먹고 히에라폴리스 유적과 온천으로 유명한 작은 산속마을 빠묵깔레에 6시에 도착하여 상당한 규모의 호텔에 들었는데 눈이 오고 추워서 온천에 가지 않고 그냥 자기로 했다. 섭씨 35°C도 안된다는데 매주 한 두 번씩 물 좋은 익산온천에 다니는 내가 온천이라 하여 꼭 가야할 필요는 없고 연일 강행군이었는데 오늘은 9시에 잠을 자게 되니 실컷 자기로 했다.

 

 

 

 

 

♣제 7일(1월 23일 토요일)

5시에 모닝콜이고 6시에 식사다. 터키 음식은 내겐 큰 문제다. 어제 낮에 상당히 고급스럽고 큰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처음으로 먹는 터키음식이 영 짜기만 하고 맛이 없어 혼이 났더니만 오늘 아침 식사도 대동소이한 것 같아 적당히 빵과 계란으로 때우고 말았다. 다행이 터키에 대비하여 가져온 컵라면이 있어 아침에만은 따뜻한 물이 제공되므로 개운하게 먹었다.

7시에 출발하여 10분 만에 석회봉 주차장에 도착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는 석회봉 가는 초입부터 유적들이 늘어서 있어 깜짝 놀랐다. 히에라폴리스는 다시 이동하여 보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대한 성벽과 여러 건물들이 석호봉 가는 길 옆에 계속되는데 가이드의 목적지는 아마도 석회봉인지 히에라폴리스에 대한 각별한 설명 없이 일정이 바쁘다며 걸음을 재촉한다. 우리 양드리와 나는 새하얀 눈 덮인 석회봉에 도착하여 잠시 신발을 벗고 노천온천에 5분정도 들어갔다 나와 즉시 히에라 폴리스 유적이 산재한 곳으로 찾아갔다. 가이드는 박물관이 있으나 돈을 내야하며, 아직 시간이 일러 입장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만 해준다. 실제로 아직 8시도 되지 않아 입장은 되지 않았지만 담을 따라 돌아보니 광장 안에는 넓은 유적지에서 모아놓은 온갖 수많은 유물들이 보이고 잘 보존된 건물들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폴리스 전 지역을 보건대 폐허가 아주 심하여 전쟁으로 폭격당한 뒤의 도시 모습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인구 10만 정도의 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이 온천지대라는 자연조건이 좋아 생긴 도시로 보고 있다고 한다. 양드리와 함께 부지런히 걸어 유적지를 더 돌아보았는데 도시를 흐르는 상수도 시설이 잘 남아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른 아침인데도 많은 여행단이 몰려드는데 우리의 여행방향과는 반대로 이스탄불에서 오는 여행단이 이곳에서 조우하는 것이라 한다. 이 곳 터키 여행단 중에는 기독교 성지 순례단이 상당히 많다고 하여, 의아해서 알아보니 우리가 지나온 이즈미르(에페소 도착하기전의 큰 도시)에는 기독교 박해를 피해 성모마리아와 성 요한이 에페소에 왔고 부근 이즈미르 셀쥬크라는 곳에서 이들이 여생을 보내고 승천한 집이 있어 지금은 교회가 되어 있다고 하며 1967년 교황 요한 바울6세가 방문한 이후 순례지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 여행팀과는 달리 폴리스 유적지부터 돌아서 석회봉에 오는 팀들이 보인다. 짧은 50분 동안 모두들 석회봉과 노천온천에서 노는 시간에 우리가 폴리스유적 모두는 아니라도 전체를 조망하고 오니 참 다행으로 여겨진다. 버스로 잠간 이동하여 옷가게에 들렸는데 비버리 입은 양드리가 너무 멋있어 무조건 사도록 명령(?)하다. 비록 수 년전에가 만들어진 오래된 영국산 버버리라지만 값도 싸면서(22만원이던가?) 멋이 있고 딱 양드리에게 어울리니 무슨 이유를 따질 손가?

9시30분부터는 가파도키아 까지 8시간 강행군이다. 터키는 호수의 나라라는데 가는 길에 소다호수와 타클리 호수 등을 구경하였다. 파묵깔레 옆에 있는 대도시인 데니즐리를 지나 아피욘과 콘야를 지나 드디어 6시에 가파도키아에 도착하였다. 이동시간이 너무 길어 힘이 들기도 하고 시간이 아깝지만 그게 바로 터키 여행의 특징이라 한다. 워낙 큰 나라인데도 유명한 관광지는 찾아보려는 여행심리 때문에 이런 강행군이 있게 된다는 설명이다.

GOMEDA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 후 동굴무도장을 찾았다. 가는 도중에 많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으나 버스는 출발하였고, 무도장은 산속에 있는데 상당히 이색적인 모습의 무도장이다. 악기연주와 남녀 전통 무용이 계속되는데 술은 무료로 계속 지급되는 것도 이채롭고 무희들의 지정에 따라 나도, 양드리도 무대에 나가 춤을 추는 등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제 8일(1월 24일 일요일)

카파도키아는 큰 나라인 터키의 내륙 중앙에 위치한다. 오늘은 여유가 좀 있는지 7시 기상이다. 9시에 출발하여 부근의 자연관광에 나선다. 낙타바위가 있는 하멜계곡을 거쳐 버섯모양의 바위산이 가득한 파샤바 계곡에서 눈을 맞고 눈길을 걸으며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들을 실컷 보냈다. 괴뢰메 골짜기에서는 우리나라 이동식이나 부페식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먹다. 동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동굴의 규모나 실내 건축이 매우 아름답고 공연도 하고 있어 꽤나 흥겨운 식사시간이 되었다.

4C에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살았다는 계곡도시인 데린구유 동굴을 찾았다. 베트남에서 베트콩들이 만들어 투쟁하던 동굴과 흡사한데 그 규모나 과학적 설계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다시 긴 이동이다. 목적지는 수도 앙카라이다. 버스는 다시 가파도키아에서 악사라이로 되돌아 나온다. 악사라이에서 우회전하여 앙카라로 향해 북으로 달려가고 있다. 크고 넓은 나라이며 끝없는 평원인데 산들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도대체 나무가 없고, 설령 부분 부분 나무들이 있다 해도 숲이 아니며 겨울이어서인지 전혀 아름답지도 않다.

엄청난 규모의 소금호수가 나온다. 잠시 버스를 멈춰 호수가로 나가 호수물을 떠서 맛을 보았는데 짜기가 영락없이 바닷물인데 너무 추워서 다들 구경하기 바쁘게 차에 오른다.

앙카라로 가는 길에 렘네 지역에서는 A․D280년경에 산타클로스가 태어난 곳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고, 7시에는 어두움을 가르며 앙카라 교외에 위치한 올림픽 파크호텔에 도착하였다. 지도상으로는 대단한 거리인 듯한데 약 5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식사 후 김용성 선생방에서 향후 경비사용에 대한 회의를 하다.

 

 

 

♣제 9일(1월 25일 월요일)

오늘은 너무나 길고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새벽 4시에 기상이다. 6시 정각에 출발한다. 어제 일찍 도착하면 들리게 되어있던 한국공원을 먼저 찾았다. 한국공원에 가는 길에 앙카라 도심에 마치 우리의 남산 같은 산이 있고 그 산 정상에 아타투르크 공원이 있는데 당시 케말 파샤 대통령궁을 공원으로 만들었고 큰 대통령궁 건물은 어두운 새벽이라서 인지 네온불빛이 비추이면서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함께 보여준다.

가이드로부터 터키공화국 창건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파샤에 대한 많은 설명이 있었다. 케말파샤는 오스만투르크의 장군이었는데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붕괴하자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만의 독립을 성취하고자 노력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에 존재하는 민족적·종교적 다양성을 모두 아우르는 국가로 독립하기 위해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를 그들만의 공통유산에 기초한 국민국가로 단결시키는 방향으로 독립절차를 개시했다.

1919년 8월 술탄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세브르조약을 강요당하자 민족독립전쟁을 일으켰으며, 1921년 8∼9월에는 앙카라를 향해 진격하는 그리스군을 사카리아 강변에서 격퇴하였다. 무스타파 케말은 1920년 마침내 앙카라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2년간 군사작전을 진두지휘하여 그리스 점령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본격적인 정치개혁에 나서 1922년 11월에 술탄제도를 폐지하고, 이듬해 7월 연합국과의 사이에 새로 로잔조약을 체결하였다. 10월 앙카라를 수도로 정한 공화제를 선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인민공화당을 창설하여 정당정치를 확립하였다.

그는 재임기간동안 개혁과 개방에 몰두했으며, 이슬람의 영향력을 축소하고자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1925년에는 이슬람 전통 복장이 폐지되었으며, 남녀의 합동 교육이 실시되었다. 1926년에는 새로운 민법이 제정되어 일부일처제를 비롯한 남녀평등권이 도입되었다. 1928년에는 아랍 문자의 사용이 폐지되고 로마자로 터키어를 표기하는 방법이 고안되었으며, 1930년에는 여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그는 신생 터키 공화국을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대명제 아래 서구식 법치와 민주적 정치제도로 현대화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터키 국회는 1934년 무스타파 케말에게 조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투르크’ 경칭을 수여했다. 그는 평생 조국독립과 현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재임 중이던 1938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진정한 터키의 위대한 지도자로 무너진 터키를 독립시키고 구제도의 터키를 근대화하여 오늘날 이슬람세계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서구화된 터키문화를 형성한 인물이기에 나는 일찍부터 이 분을 존경하였다. 오늘 터키의 앙카라에서 그 분이 사시던 대통령궁을 지나면서 새삼 존경심이 다시 일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공로자인 이승만대통령과 자유대한민국을 탄생시켜준 미국을 통일의 반대자로 내몰고 증오의 대상으로 몰아 부친 좌파들의 음흉한 속셈과 허울을 아직도 인식하지 못한 채 70년대식 좌편향 이념교육에서 탈피하지 못한 일부 40대들과 30대 후반의 세대들, 그리고 포퓰리즘에 의해 잘못된 교육에 여전히 빠져드는 젊은이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역사는 크고 넓고 무한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짧고 작고 좁은 시공간적 사고에 사로잡혀 자신의 역사적 가치관은 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통일이념에 사로잡힌 일부 좌파들의 포퓰리즘적 선동적 구호에 빠져들어 우물안 개구리식 철학을 지상 명제로 떠받드는 젊은이들이 너무나 안타깝기 그지없다. 모두가 용기있게 나서야 한다. 2007년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촛불집회 때 나 혼자 용감하게 우리 학생들에게 진실과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 사고에 대해 설명하고 포퓰리즘에 몰입되지 않도록 지도한 결과 전라도 한 복판인 전주임에도 불구하고 과반수 이상의 학생들이 합리적 판단을 해준 사실이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우리는 진실해야 한다. 합리적이어야 한다. 과학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용감해야 한다. 낡은 이념과 비현실적 통일지상주의와 정치적 포퓰리즘과 허무맹랑한 미신을 물리치는 용기와 확신을 가져야 한다. 아이들에게 용감하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철학적 신념을 확고히 해야만 한다.

당시에 우리 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미국 쇠고기 광우병 미신속에서 헤매였지만 오늘날 그 미신은 새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세력들이 비과학적 비합리적 맹신을 만들어 MBC PD들과 함께 온 국민을 광우병 파동에 휩쓸리게 하여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가져 오게 했던 것은 만천하에 그 잘못됨이 법적으로 과학적으로 드러났으니 인간의 마음이란 저리도 허약한 것인가?

나쁜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은 저러한 인간의 헛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마음대로 국민과 신도들을 그릇되게 만들고 이용하는 것이니 그래서  사람은 반드시 『공부해야만 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는 철칙이다. 그래야 우리 보통사람들이 소위 잘난 사람들에 의해 농락당하지 않고 그들의 정신적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공원은 우리나라에서 양국의 우의를 다지기위해 조성한 공원으로 6.25 전쟁시 우리나라에서 산화한 터키 장병들의 이름을 새기며 명복을 비는 탑도 세워져 있다.

6․25전쟁이 발발한지 60년이다. 터키군 같은 자유우방의 참전과 지원과 큰 희생으로 우리 대한민국은 여기까지 왔다. 2002년 서울 월드컵에서 터키와 우리는 준결승에서 만나 우리는 터키와 우리 팀을 함께 응원하였고, 이때 터키국민들은 우리의 터키에 대한 애정을 가진 국민정서에 감동하여 한국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어두운 새벽에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한국공원 방문을 마치기 무섭게 베르세데츠 벤츠 버스는 이스탄불을 향한다. 고속도로를 달려 나가는데 북쪽으로 올라 갈수록 추워지며 눈이 무섭게 내리기 시작한다.

가이드로부터 터키계인 돌궐과 위그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계속된다. 7-8세기 북부아시아 전역에 걸쳐 흥하던 돌궐이 망하고 카스피해에서 만주까지 위그르족이 744년에 대제국을 건설한다. 위그르는 840년에 다른 터키계에게 망하게 되는데 지금은 700여 만 명이 신장성자치구에 살고 있으며 티베트 민족에 이어 작년에도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어 중국에서 정치문제가 되고 있는 민족이다. 이 위그르족이 바로 회회민족(回回民族)인데 가이드는 놀랍게도 영화배우 장동건이 회회족 출신인 덕수장씨라고 한다. 대체 ?장동건이 피부도 곱고 잘 생긴 것은 순전히 핏줄탓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그럴싸한 해석이라 나 혼자 생각한다.

고려가요에 충렬왕 때에 지어진 《쌍화점》이 있고 이 노래에 회회아비가 나오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쌍화점에 쌍화(雙花) 사라 가고신, 회회(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미 이 점(店) 밧긔 나명 들명, 다로러 거디러 죠고맛간 삿기 광대네 마리라 호리라….” ※쌍화=만두

조선 성종 때는 이 노래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또는 음사(淫辭)라 하여 배척을 받았고 2008년에는 거의 에로물이라 할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 쌍화점에 나오는 회회아비란 서역인인데 이 서역인이라는 것은 바로 위그르족이요, 덕수장씨도 이렇게 탄생한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일직이 역사를 가르치면서도 서역인은 원나라의 제2계급이요, 중앙아시아에 살던 민족이라고 설명하면서 동서문화의 교류가 활발하던 원 시기에 우리나라에 장사하기 위해 왔던 서역의 장사꾼으로까지만 생각하고 설명하는데 그쳤다.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원제국시기에 서역인은 위그르인이요 이들이 우리나라 세자들이 원의 대도에 들어가서 결혼하고 돌아올 때 원공주의 수행원이 되어 상당수가 들어 왔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서 ?이때 들어온 수행원들 중 고려에 정착하는 서역인들이 많이 생겨났겠고 그들이 원과의 교류가 활발한 틈을 이용하여 국제 무역과 중국물건을 파는 장사도 많이 이루어 졌겠다?라는 생각이 미치자 스스로 마음속에 부끄러움을 감출수가 없다. 일직이 80년대 초에 대학원에 다니면서 졸업논문으로《고려만호부에 대한 고찰》을 쓰고, 이때 지금 돈으로 수 백만원을 들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구입하여 거의 독파하면서도 단지 쌍화점의 회회아비는 단순히 「장사하기 위해 고려에 온 서역인」으로밖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아! 처처에 교사가 있고 배울 곳이 많다. 여행을 통하여 보고 들으며 정말 많은 공부를 하는 것이니 여행은 참으로 즐겁고 유익하다.

이스탄불이 가까워지면서 산의 숲들이 제법 아름다운데 온통 눈으로 덮인다. 눈은 엄청 계속내리고 있어 저으기 교통사고도 걱정이 되기도 한다. 볼루 부근의 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휴식하고 드디어 이스탄불인데 눈이 내리고 길은 눈으로 덮여 있어 괜히 기분이 들뜨면서 콘스탄티노플에 온 내가 꿈이 아닌가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톱 카프궁전으로 향한다.

이스탄불은 도시가 형성된 기원전 660년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렀으며 서기330년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라고 불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제국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의 남쪽 입구에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다. 1923년까지 1,600년 동안 수도였던 이스탄불에는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오스만 제국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유적들이 분포해 있는 것이다.

톱 카프 궁전은 오스만 투르크시대의 궁전이기에 건물이 화려하고 보석관에 전시된 엄청난 보석들과 박물관 여러 전시실에는 왕국에서 사용하던 수많은 진기한 유물들이 많고 이러한 유물들에 새겨진 금을 비롯한 각종 보석세공 기술은 참으로 화려하고 뛰어나다. 누군가 내게?신라와 백제의 금관을 이 유물들과 비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말았다.

부근에 있는 공원에 늠름하게 서 있는 오벨리스크를 가까이 가 보았다. 이것이야말로 동로마제국이 이집트를 지배할 시기에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다음은 블루모스크 사원이다. 유명한 성소피아사원 부근에 있으며 내부는 모자이크 장식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저녁을 먹고 가까이에 있는 외국인 관광객 상대의 대형 시장인 그랜드 바자르를 찾았다. 무려 4,400여개의 상점들이 있는 엄청난 규모의 깨끗한 시장이요 물건이 화려하고 물량이 엄청난데 한국인들과 일본인들 그리고 서양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 부지런히 오간다. 우리 일행도 이리저리 골목을 찾아 구경하였으나 별로 물건은 구입하지 않았다. 파노라마 호텔에서 잠을 청하다.

 

 

 

♣제 10일(1월 26일 월요일)

아침 5시에 가상이며 7시에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출발이다. 어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들어오면서 해협을 건넜고 보스포러스 브릿지를 보았으나 눈이 많이 내려 아름다움 모습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더욱이 지금까지 TV화면으로 보았던 해협의 아름다움과 다리의 아름다움 그리고 다리를 두 대륙을 넘나드는 감격과 감동적인 다리로 상상하였다가 어제의 건넘에서의 느낌은 너무나 황당한 생각조차 들 정도였다.

내가 세계지리를 공부하여 지리적 공간의 시야를 세계로 확대하게 된 중학교시절부터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인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보스 포러스 해협과 그 다리는 언젠가 한번은 가보리라는 동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오늘 드디어 해협을 배를 타고 유람하면서 도시의 풍경을 구경하게 됨은 정말 내 인생에 오래토록 기억될 대사건이 아니겠는가? 부푼 기대를 안고 배를 타니 말마라 해협에 위치한 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하여 제1 브리지를 향해 바다를 가른다. 제1 브리지는 1973년 독일에 의해 건립되고 제2 브리지는 흑해 쪽으로 더 나가면 있는데 1988년 일본에 의해 놓여 졌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하나 더 놓아주면 어떨까? 아니나 다를까 한승수 국무총리까지 방문하여 해저터널 공사를 수주해서 공사 준비 중이라고 하니 기대가 크다.

말마라해는 에게해와 흑해의 중간지점에 있는 바다이다. 눈 덮인 아름다운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해협을 유람선이 흑해를 향하여 달려간다. 갈 때는 유럽 지역 쪽을 타고 제1브리지를 넘어간다. 많은 공공건물들과 고급 주택들이 즐비하다. 제1브리지를 지나면서 모두들 환호하면서 흥분하다.(물론 내가 가장 흥분한 것 같다) 배위에는 눈이 수북하고 상당히 춥지만 불평 없이 오르락 내르락 하며 사진을 찍으며 모두들 즐겁다. 제1브리지를 지나자 제2브리지까지 가지 못하고 아쉬움 속에 바로 되돌아 이제는 아시아지역 쪽으로 내려온다. 유럽쪽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내가 만일 이스탄불에 별장을 하나 사둔다면 이곳이 오히려 좋겠다. 산이 있고 나무들이 많아 경치가 훨씬 낫다.

유명한 성 소피아사원이다. 어제 바로 옆을 지나면서 이미 모습은 구경하였으나 오늘은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관람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비잔틴양식의 대표적 성당인 유명한 성 소피아성당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시대에 건축된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오스만 터키가 지배하던 시대에는 이슬람의 모스크였으나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옛 성당(325년) 대신에 비잔틴 제국의 전성시대인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당시 6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재건한다. 설계자는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와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라고 하는데, 황홀한 내부와 장대한 외관에 헌당식에 참석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솔로몬이여! 그대에게 내가 이겼노라!”고 외쳤다고 한다. 헌당 당시의 6세기의 모자이크는 8∼9세기의 성상 파괴운동 때 없어지고 그 후에 제작된 모자이크도 15세기 이후 이슬람교 투르크의 점거 하에 거의 없어졌으나 최근 조사에 의하면 전실과 2층 복도의 벽면에서 9∼13세기의 모자이크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표현이 주목을 받았다.

동로마제국 멸망 후 투르크에 의해 모스크로 사용되었기에 옛 성당의 자취가 보이지 않았으나 최근의 조사에 의해 모스크 양식의 벽면 안쪽에는 고스란히 성당의 벽화 등이 남아있어 잘 보존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아예 옛 성당의 내부모습을 되찾아 놓자는 주장이 받아 들여져 결정적이라고 한다. 향토문화를 관광지화한다거나 역사유적을 복원한다는 명분으로 이미 절터와 탑하나 당간지주만 남아있는 미륵사를 다시 재건하는 것은 큰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인가? 이미 500여년을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되고 그 내부도 이슬람식 양식으로 처리되어 아름다움을 아직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500년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하여 구태여 현재의 아름다운 이슬람식 내부 벽면 양식을 뜯어야할 필요성을 주장하는것은 정당한 것인가? 아무튼 내부는 작업하는 팀들이 많고 여러 설비들이 장치되어 있어 어수선하기 그지없으나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최근에 드러난 성당의 성모마리아상이 장중하게 높은 2층 벽면에 있는데 촬영이 금지 되었는데도 아무도 제재하지 않아 다들 찍고 있어 나도 재빨리 찍어 두었다.

성 소피아성당을 나와 11시에 가죽옷 가게에 들렀는데 나는 원래 가죽옷에 전혀 관심이 없어 쇼만 즐겁게 보았다. 공항으로 이동하여 면세점에서 화장품을 사고 드디어 오후 2시 40분에 최신형 보잉 에어버스는 이스탄불을 이륙한다. 보잉 767 에어버스는 개인용 TV모니터가 있고 음악감상과 영화를 볼 수 있으며 대형 비행안내 화면이 있고 비상시에는 6군데로 보트가 내려진다고 한다. 행여 흑해를 내내 볼 수는 없을까하고 크게 기대를 하였지만 구름 속에서 흑해가 잠시 보이는 듯 했으나 이내 다시 구름 속에 가려지기에 포기하고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니 눈 덮인 육지다. 눈 덮인 농장지대가 아름답게 펼쳐지는데 지도가 없어 곰곰이 머릿속으로 유럽지도를 그려보니 틀림없이 우크라이나로 생각되어지면서 감명 깊게 보았던 소피아 로렌 주연의 영화 《해바라기》가 생각났다.

♣2차 세계대전 시기, 나폴리 시골에 살던 지오바나(소피아 로렌)는 밀라노에서 온 안토니오(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안토니오와 지오바나는 결혼식을 올리지만 남편 안토니오는 곧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남편을 기다리던 지오바나가 받은 것은 한 장의 전사 통지서이다. 남편이 살아있다고 확신하는 지오바나는 그를 찾아 소련의 구석구석을 헤맨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남편을 찾아내지만 그는 부대에서 낙오되어 헤매다가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는 소련 여인 마샤를 만나 두 딸을 둔 아버지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소피아 로렌의 안타까운 모습과 전쟁에서 당한 부상으로 낙오되는 안토니오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아련히 떠올랐다. 아!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잔잔히 잘 그려낸 감동적인 영화였다. 옆에 잠들어있는 우리 양드리도 소피아 로렌처럼 나를 찾아 저 우크라이나를 헤매 인다?

5시 40분에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2시간 남짓 머무르게 되었지만 이미 갈 때 들러서 내부를 잘 알고 또 면세점에서 살만한 것도 없으므로 그럭저럭 시간을 보낸다. 오후 8시 15분에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어두운 밤이어서 밖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잠을 자면서 쉬기로 하였다. 이번 여행에서 비행기를 모두 7번 탔는데 모두 창가에 앉을 수있는 행운이 주어져서 너무나 그 행운에 감사한다. 해외여행에서 공짜로 주어진 정말 엄청난 큰 덤이다. 만일 가운데 좌석이었다면 어찌 우크라이나를 볼 수 있었으랴?

어두운 밤이어서 잠이 들었다가 12시 넘어 잠이 깨었더니만 밖이 훤하게 보인다. 시계는 1시가 가까워지지만 시차를 따져보니 새벽녘인 줄 알겠다. 갑자기 큰 도시가 나타난다. 이 깜깜한 밤에 지도도 없으니 도대체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대단한 호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하! 바이칼 호구나! 이제 궁금증이 풀렸다. 나중에 집에 와서 찾아보니 이르쿠츠크다. 이제 잠이 완전히 깨었기 때문에 창밖으로 지구여행이다. 틀림없이 울란바토르인 듯한 대도시다. 어둠속에 보이는 도시 모습이 거의 다 가로등 불빛으로 들어나고 있다 상당히 아름다운 도시로 보인다. 아니 비이칼호와 울란바토르를 보는 행운이 주어지다니...

이제 날이 동이 트고 날이 밝아지면서 비행기는 몽고를 지나 중국으로 들어선다. 온 세상이 눈밖에 없다. 금년겨울에는 유난히 지구북반구가 겨울 내내 눈으로 덮인 이상 기후라는데 그 원인이 지구온난화라니 대단히 아이러니컬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지구의 온난화로 인한 대기의 열기가 지구 북반부로 이동하여 눈이 되어 내린다는 것이다. 아무튼 시베리아에서 내몽고를 거쳐 중국의 하북성까지 도시고 시골이고 할 것 없이 눈에 파묻혀 있는데 자동차도 안 보이고 시골의 농촌은 겨우 큰 국도로 길만 나 있는 형국이니 아주 고립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모니터에 보이는 항로가 베이징 근처를 지나 발해만과 산둥반도를 지나며 드디어 인천공항이 가까워진다.

열흘간의 지중해 여행이 끝나가는 시간이다.  

    

  

 

 

♣제 11일(1월 27일 화요일)

11시에 김포공항에 도착한다. 가방을 찾느라 분주하다보니 일행들과는 제대로 인사조차하지 못하고 12시가 넘어서야 전주행 공항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시작은 어려웠지만 대단히 유익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우리 회원들도 서로 불편했던 분위기를 일소하는 계기가 되어 매우 다행이다.

금년 여름을 어쩌면 넘기고 내년 겨울방학에 해우회 해외여행이 계획되어 있는데 여행지는 일본으로 잡혔다. 그리고 내년 여름에는 내내 미루어 온 서유럽여행을 반드시 실천해야만 할 처지에 놓였다. 자! 또 열심히 살고 열심히 저축하고 미루지 말고 또 열심히 여행 하자꾸나! 양드리와의 결혼 30주년 서부유럽 여행약속도 실천에 옮기자꾸나!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