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성우회 필리핀 여행
♧들어가는 말
‘星友會’는 전주교육대학 남성동문 써클인 ‘星火’에서 나온 모임이름이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모였다. 내가 1973 학년도에 전주교육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친구인 장관익과 이종철이랑 입학하였더니만 가서보니 동기에 송명용이가 있고 22회에 이상범 김용성 김동규 이종원 23회에 강조석 김형곤이 있어 남학생 180명중에 남성출신이 10명이나 되었다. 1년 뒤에 24회 심재호와 배병주가 들어왔고 여학생으로는 양순옥이와 김영란이가 들어왔다. 그리하여 1973년도와 1974학년도의 전주교대의 학교생활은 순전히 성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런 인연으로 양순옥이와 나는 하나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다.
1975년도 가을 성화 야유회에 일행들이 이미 떠난 뒤에 터미널에 늦게 도착한 우리 둘은 그냥 대둔산으로 뒤 따라 갔으나 일행을 만나지 못함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며 나는 그녀에게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인연이 깊어졌기에 그 날을 참으로 소중한 만남으로 여기고 있다. 성화와 대둔산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1976년에 이 모임을 만들게 되었는데 애초부터 서울에 발령 받은 이종원이 빠졌고, 장관익이가 별세하였으며 이런 저런 이유로 김형곤이와 배병주가 나오지 않게 되어 현재 회원은 8명이다. 3년 전에 내가 강력히 주장하여 부부 동반 해외여행을 계획하게 되고 월 10만원씩 적금을 부어 250만원씩을 모았으나 전원 참가가 너무 힘들어 1년을 미룬 뒤, 아무도 가보지 않은 장소인 필리핀으로 의견을 모아 드디어 떠나게 된 것이다. 송명용이 내외는 아이들이 뉴질랜드에 어학연수중인데 그곳에 한 달간 가게 되어 부득이 참가치 못하였다. 참가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이종철 - 최현임
□이석한 - 양순옥
□이상범 - 김애순
□김용성 - 정정님
□김동규 - 원방연
□강조석 - 전한희
□심재호 - 오정숙, 그리고 우리의 마스코트 심영근까지 15명이다.
여행은 서울에 있는 대형 여행사에 신청하면 값싸게 다녀올 수 있지만 이왕이면 우리끼리만 한 팀이 되고자 전주에 있는 “여행 스케치”에 맡겼다. 원래 사장이 가게 되어 있었으나 여성인 오은하 부장을 보내어 한결 부드럽기는 하였으나 무려 타 여행사보다 1인당 15만원 이상 비싼 여행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일반 여행사는 85만, 이번 계약은 115만원이다)
■필리핀에 관한 몇 가지 안내
필리핀은 면적이 약 30만 KM꒜, 인구는 약 8천 만명, 사용언어는 타갈로그어와 영어가 공용어이다. 통화는 페소(1달러는 54페소이며 1페소는 한화 약 19원이다. 한화가 강세여서 오늘 1달러 당 1030원 이하로 환율이 떨어졌으며 우리 국민소득도 1만 4천 달러가 넘게 되었다) 일찍이 마젤란의 세계일주이후 에스파니아에 의하여 경영되어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는 부족사회의 모습에 머물렀다 하며 통일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한다. 1898년에 아기발도에 의하여 독립이 선언되었으나 미-스페인전에서 승리를 거둔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나 1907이후 자치권을 부여받았고 1943년 일본의 침략을 받아 점령당했다가 1945년 탈환되어 필리핀 공화국이 되었으며 26년 동안 마르코스-이멜다의 독재에 신음하다가 민주화운동으로 몰아낸 뒤 아키노 대통령 등을 거쳐 지금은 아로요 대통령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다.
7천 여 개 의 섬이 있으나 사람이 사는 섬은 880개 정도라 한다,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하여 화산과 지진이 많으나 지난해 12월 26일의 역사적 대 지진인 ‘쓰나미’의 피해는 자바섬과 말레이 반도가 막아 필리핀은 전혀 피해가 없었고 따라서 우리의 여행도 가능한 일이었다. 북위 4-12도의 열대권이며 지역, 시기에 따른 기온 차가 적고, 연평균 기온이 27도라는데 지금은 겨울임에도 우리가 있는 동안 밤낮으로 내내 27도를 유지하여 낮에는 비교적 선선하고 밤에는 더운 편이었다. 30여 년 전 만 하여도 우리와 경제력이 비슷하였으나 지금은 국민소득 1천 달러로 우리의 10분의1이 되지 못하는 경제 후진국인데 이 모든 이유가 마르코스 같은 나쁜 지도자를 만난 때문이 아니었나 여겨지며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적 존재가치와 그 위대성에 더욱 존경심이 일어남을 억제할 수 없다. 종교는 83%가 로마 카톨릭으로 카톨릭이 바로 국교이다, 우리 나라에도 많은 근로자들이 들어와 있으며 최근 농촌총각에게 시집온 필리핀 여성들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장수군에도 100여명 이상의 여성이 시집와 살고 있다는 TV보도를 본 바 있다.
■제 1일(2005년 1월 21일)
아침에 할머니를 김제에 모셔다 드렸다. 어머니께서 여수의 애양원 병원에서 무릎 관절의 연골 수술을 받으시고 계신 중에 여행을 떠나게 됨은 죄스러우나 이미 이 여행 일정이 확정되어 있음을 아시고 병원일자를 잡으신 고로 부모님들이 이해하시고 취해진 일이다. 16일에 부모님과 함께 내려가서 17일에 수술을 보고 올라와 할머니를 3일간 모시다가 여행관계로 다시 김제에 모신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오시는 21일까지 3일간은 선희네가 보살피기로 하였다.
애초에 돈이 너무 지나치게 많이 들었기에 일체의 쇼핑은 하지 않기로 하여 돈은 260달러만 준비하였다, 그러나 수영복과 신발 등의 준비로 20여 만원은 따로 지출하였다. 오후 1시 45분에 전주팀을 싣고 우리 아파트 앞에 버스가 왔다. 이처럼 익산에서 편안한 출발하기는 처음인데 돈이 좋기는 좋다. 즐거운 마음으로 인천 국제공항으로 향하다.
Philippine Airline 항공기는 오후 8시 20분에 마닐라 센티니얼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4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내 자리가 운이 따라주어 창가이기에 가는 중에 타이완을 모두 구경하고(어두운 데도 전 나라가 모두 보였다) 타이완을 지나서는 암흑세계가 되었기에 잠을 청하다. 1시간의 시차가 있으므로 12시 40분이 11시 40분으로 바뀌었고 센츄리 파크 호텔에 여장을 풀고 첫날이므로 모두 편안히 잠을 자기로 하였다. 현지 가이드는 35세의 잘생기고 똑똑한 김병훈 씨이며, 도우미로 협조하며 사진을 찍어 판매하는 현지인이 한 명 더 있어 일행은 모두 18명이 되었다. 5층은 20년은 된 듯한 카페트가 엉망인 형편없는 수준의 호텔이었다, 칫솔도 치약도 주지 않고 냉장고도 텅빈 모습인데 한국인 보통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생긴 행태가 아닌 듯 싶다.
■제 2일(2005년 1월 22일)
아침 6시에 일찍 일어나 뷔페 식사를 하는데 왜이리 먹을 것이 없는고? 내가 워낙 잘 먹는 식성이라 먹는 것만큼은 어느 나라라도 자신이 있다고 평소에 큰소리 쳤건만 여기는 아닌 듯 싶다. 고기는 짜고 밥은 맛이 없고 하여 과일과 음료수와 커피로 대충 먹었다.
10시발 보라카이로 가는 South East Aisa 경비행기를 탔다. 우리 일행 18명만 타는 소형 비행기라서 재미가 그만이나 저으기 무서운 생각도 들다. 1시간이 소요되어 까띠클란 공항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보라카이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섬인데 이곳에서 눈앞에 보이는 보라카이 해수욕장까지 배로 건너게 된다. 철저하게 관광객을 맞는 준비가 잘 되어 있어 많은 젊은이들이 여행객들을 승객 운반용 오토바이로 이동시키고, 또는 짐을 메어 배에 나르는 등의 서비스를 하고 있으며 배에 오를 때는 바다에 빠져 몇 미터씩은 직접 걷도록 하였는데 이는 돈이 없어 시설을 못 한다기 보다는 재미가 있는 여행을 위함도 될 것이요, 바로 세계적 휴양지인 보라카이 해변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에서임이 느껴졌다.
보라카이에서 가장 고급 리조트인 듯한 파라다이스 가든에 여장을 풀다. 너무나 아름다은 리조트라서 황홀하다. 남국의 아름다움을 최고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정원이 자연미의 극치이다. 한인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는 자유시간으로 아름다운 보라카이 해변을 거닐며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보라카이는 원래의 해변을 잘 보존하고 상가의 길이가 무려 십리에 달하는데 일체의 인위적 시설을 거부하고 자연 그대로의 길을 만들어 자연스러움이 그만이며 이런 조치들이 보라카이의 아름다움을 잘 보존시키는 힘인 듯 싶다. 전날 보라카이에 큰 불이 난 보도를 마닐라에서 TV에서 보았는데 이날 놀랍게도 아로요 대통령이 이곳까지 방문하는 모습을 보았다, 주민을 제외한 관광객들은 내국인들과 한국인들과 서양인들이 비슷한 듯 싶었다. 중국인들로 상당히 눈에 띠었다. 대통령내방도 관광의 중요성에 비추어 보면 그리 놀라운 일만은 아니다.
저녁에는 현지식을 맛있는 식사를 하고 10시에는 가든 에서 우리가 준비해간 양주와 라면으로 파티를 열었다.
■제 3일(2005년 1월 23일)
오늘은 호핑투어를 하는 날이다. 아침식사는 뷔페식인데 마닐라에서보다는 훨씬 나았다. 먹을 만하여 기분 좋은 식사를 하다. 원래 계약된 호핑투어는 돈 안드는 재미없는 것들이기에 가이드는 다이빙을 권했다. 양순옥이 강력히 원하기도 하지만 이때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싶어 모두 10명이 참가하게 되었다, 30분간의 바닷속 여행은 참으로 경이롭고 환상적인 체험이다. 바닷속 물고기들과 함께 노는 짧은 즐거운 시간은 짧았으나 좋은 경험이다. 계약된 호핑 투어는 웃기는 장난같은 낚시질과 바닷속을 구경하는 시시한 것들이요, 바나나 보트는 겨우 5분 정도였으나 스릴은 있었다.
이날 점심은 풍성한 과일과 대형 가제와 대형 꽃게와 대형 새우와 맛있는 돼지구이여서 정말 최고의 점심이었다. 오후3시 이후에는 자유시간으로 낮잠과 사진촬영과 해변 산책으로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한국식당에서 먹었다.
■제 4일(2005년 1월 24일)
보라카이에 오던 방식대로 되돌아간다. 9시 반에 마닐라에 도착하다. 오늘은 기대를 가진 팍상한 폭포에 가는 날이다. 버스로 출발하여 3시간만에 팍상한에 도착하였다. 고속도로휴게소에서 상품들을 보니 거의 외제인데 물건값이 만만치 않다. 일제 과자 하나에 700원인데(우리나라에서 1천원짜리 과자이다) 이처럼 비싸면 필리핀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사먹을 수가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우리가 들린 상점은 결코 필리핀 서민들이 마음껏 이용하는 곳이 아니요, 외국관광객들이나 상류층들이 이용하는 곳임을 알겠다.
팍상한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통나무 카누를 타고 폭포로 향한다. 손님 두 명이 한 배에 타면 두 현지인 들이 노를 젓기도 하고 또는 밀기도 하며, 또는 들어올리기도 하며 나아가는데 그 기술이 신기에 가깝다. 약 50분 걸려 폭포에 도착하며, 내려오는 데에도 40여분이나 걸렸다. 대부분 절반이상이 한국인이며 서양인과 내국인들이 반쯤 되는 듯 싶은데 아마도 값이 비싸기에 내국인들이 오지 못하는 듯 싶다.
가이드는 저녁에는 맛사지를 권유하였으나 우리 부부이외에는 원하는 사람이 없어 모두들 호텔 앞의 백화점에 가기로 하였다. 백화점 물건은 거의 모두 외제수입품인데 가격이 우리 나라 백화점의 절반이하여서 너무나 놀랍기도 하고 싼 가격에 흠뻑 빠져 자꾸 사고 싶었으나 아직까지도 이곳은 페소만 받고 있어 약 5만 원어치의 물건을 샀다. 우리 사랑하는 승원이에게 줄 아주 예쁜 브레지어와 팬티(한국에서 8만원자리 -2만 8천원에 구입) 내 지갑(우리 나라에서 약 5만원짜리를 1만 8천원에 구입), 빗 등을 구입하였다. 이 백화점에서 보고 느낀 점과 가아드의 말을 종합하여 판단하면 이곳은 서민들이 결코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며 우리 나라보다는 관세가 없어 확실히 물건값이 싼 것이었다. 예를 들면 지갑은 우리보다 40%의 가격으로 구입할 수 는 있으나 이곳 서민들은 월급이 15만원이므로 1만 8천원짜리 고급지갑을 구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5천원짜리 가죽지갑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며 그들은 그것들을 구입할 것이다. 아무튼 쇼핑은 나의 기분을 아주 즐겁게 하였다.
■제 5일(2005년 1월 25일)
필리핀에 왔으니 마닐라에 있는 국립 박물관과 민속 박물관 또는 민속공연, 그리고 재래시장 등에 가보고 싶으나 가이드 밥벌이를 망칠 수도 없고 하니 일정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쇼핑센타 세 곳을 거치면서 제일먼저 필리핀의 독립영웅 호세 리잘이 처형된 리잘 공원을 지나치며 구경하다. 그리고 산티아고 요새를 찾았는데 오직 역사적 장소는 우리가 찾은 것은 이곳 밖에 없다. 이곳은 필리핀을 지배하던 스페인 사람들이 만든 요새인데 면적이 엄청나고(수만평) 성벽의 견고함과 웅장함이 대단하였다. 필리핀에서 온갖 착취를 다하며 대단한 에스파니아 지배자들은 이곳 요새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던 것이리라.
12시에 공항에 도착하여 2시 30분 비행기를 기다리나 연착으로 인하여 출발이 40분이나 늦어 3시 10분에야 출발하였다. 하늘에서 보이는 마닐라의 매연은 가히 절망적이다. 도시의 하늘이 온통 시커멓다. 시내에서 사람들이 거의 코를 막으며 다니는 모습이었지만 상공에서 보이는 마닐라의 하늘은 연통속이다. 갈 때와는 달리 3시간 30분만에 도착하여 7시 40분에 인천에 내리게 되었다. 비행기도 자동차 마냥 속도를 내면 빨리 가는 줄을 이제야 알았다. 우리 아파트에 도착하니 하루가 지난 26일 0시 10분이다.
♣후기
이번 여행은 말 그대로 여행이다. 답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배운 것이 전혀 없이 놀다만 온 건 아니다. 필리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고 많은 공부가 되었다. 특히 필리핀 같은 경제가 어려운 나라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여야 한다는 값진 교훈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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