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타이완 여행 3박 4일(2011)

청담(靑潭) 2011. 1. 18. 00:50

 

 

중화민국(자유중국·타이완·대만)

3박 4일

 

여행을 떠나면서

  금년은 서기 2011년 신묘년이다. 토끼해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지 벌써 17일이 되었으나 새해 소망을 어디에도 아직 담지 못했다. 새해 첫날 서울에서 승수, 승원이와 함께 지내며 건강하고 보람찬 한 해를 만들어 가자고 굳게 약속하다.   

  작년은 교직에 첫 발을 내디딘지 30주년이 되는 해였다면 금년은 결혼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우리 친구들이 예순 살이 되는 해이다. 한 살 더 먹은 친구들은 환갑이다. 이제 집나이로 60대가 되는 것이다. 더욱 지혜있고 더욱 진중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

  학교에서 3일부터 12일까지 근무하고 13일 하루는 임용고시 3차시험 심사에 참여하니 일단 근무가 끝나다. Taiwan은(한문으로는 대만)은 동남아 여행을 가면서 비행기에서 여러번 내려다 보았다. 공식 국호는 중화민국이며 우리는 어릴때부터 자유중국이라고 불렀다. 현재의 중국인 중공(중화인민공화국)과 구별하여 부르던 이름이며 남북이 대결하고 있던 우리 대한민국과는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우리가 국교를 수립하기 전까지 미국과 함께 최고의 혈맹으로 맺어진 우방국이었다. 국제기구에 참가할 때의 공식명칭은 중화타이베이(Chinese Taipei)이다. 중국이 등소평에 의해 개혁 개방하고 소련이 붕괴되면서 2차대전 이후의 양극체제가 사실상 무너지니 이제 이념이 아닌 경제와 실리를 추구하는 시대가 되어 우리와 자유중국간 국교가 단절되어 현재까지도 우호관계가 소원한 상태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유중국이 중국과의 대립속에서도 활발한 경제및 문화교류와 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젠 우리가 자유중국에 지고 있는 큰 짐을 덜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아무튼 일본의 침략시기에 장제스의 국민당정부의 도움을 받아가며 우리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끈질긴 대일투쟁을 지속할 수 있었기에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중국에 대한 고마움과 뜨거운 우정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애정어린 대한민국이 중공과 국교를 맺으며 저희네와는 국교를 단절하였고, 수 년 전부터는 개인별 국민소득마저 저들을 앞질러 (현재 자유중국은 1만 7천, 우리는 2만 1천달러) 타이완 사람들의 자격지심, 질투심, 소외감 같은 감정들이 크다고 한다. 또 지난 12월의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발생한 태권도 심판판정문제(전혀 오해에서 비롯된)로 우리나라에 대한 감정이 아직까지도 매우 좋지 않다고 한다. 대만인들 사이에서는 대한민국의 한류(연속극)을 보지 말자는 캠페인도 벌어지며 반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니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며 하루빨리 오해를 풀고 친선관계를 잘 유지하도록  민간단체차원에서의 적절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자유중국은 3.6만㎢의 작은 나라라서 비행기로 지나가면서 여러차례 거의 전 국토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1885년 청 지배하에서 독립된 성이 되었고,  1895년 청일전쟁후 라오뚱 반도와 함께 일본에 할양되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중국이 되찾았으나 1949년 국공내전에서 장졔스의 국민당정부가 패함으로서 이곳으로 이전해와 자유중국이 되었고 인구는 2400만 정도이다.

  우리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아의 선진국으로 일본-홍콩-싱가포르-자유중국을 손꼽았으나 이제 우리 대한민국이 GNP(국민총생산)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되고 NNP(개인별 국민소득)마저 타이완을 앞지르고 PPP지수(구매력소득지수)는 머지않아(2018) 일본과 같게 된다. 어찌 대외관계가 변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부러움과 질투를 받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나 자만하지 말고 더 겸손하며 더 노력하고 더 발전하여 저 웅비하는 중국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나라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첫째 날(2010. 01. 19 수요일)

  

  어제 서울에 차를 가지고 왔다. 23일에 경주삼촌의 큰 딸인 소영이의 결혼식이 부천 역곡역 아이웨딩에서 있어 내가 결혼식에 참석하기위해서도 차가 필요하지만 부모님들께서 올라오시므로 이왕 오신 김에 마포집으로 모시고자 함이다. 하루를 주무시게 될 터이므로 24일에 내려가게 되는 스케줄을 짰다.

  아침 8시 15분에 아현동주민센타앞에서 공항버스를 타다. 15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지금까지는 해외에 나갈 때면 으레 익산 인터체인지 공항버스 주차장에 차를 놓고 다녔다. 마포집을 되찾으니 한결 인천공항 가는 일이 수월하고 편하다. 타이완에 대해 사전에 조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역사

  3세기 중엽 중국의 기록문헌 臨海水土志)에 따르면 한족이 타이완 섬을 최초로 발견하였다고 전한다. 7세기 초 隋나라 때부터 한족이 타이완 정찰정략을 시도하였으며, 元은 1360년 펑후 섬에 처음으로 순검사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였다. 명대에 이르자 한족의 도래가 증가하고 동시에 서구의 열강도 타이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590년 포르투갈인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포모사(Fomosa)라고 명명하였다. 네덜란드는 타이완 남부의 한족을 누르고, 일찍이 1624년 안핑[安平:臺南市]에 제란디아성을 구축하였다. 에스파냐도 1626년 지룽[基隆]지방의 서랴오섬[社寮島]에 산살바도르성을, 다시 3년 후에는 단수이항[淡水港]에 산토 도밍고 성을 각각 축조하고 타이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1642년에 에스파냐를 구축하고 그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661년 明의 유신 정성공이 부하를 이끌고 타이난[臺南]에 상륙하여 제란디아 성을 점령해서 네덜란드인을 항복시키고 이곳을 抗淸復明의 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1683년 6월 중국의 통일을 완성한 淸은 타이완에 진격하여 鄭軍을 무조건 항복시켰으므로 鄭의 타이완 지배는 불과 3대, 23년으로 끝났다. 다음해인 1684년 청은 타이완을 푸젠성에 예속시키고 타이난에 타이완부(府)를 설치하였다.

  그 후 대륙으로부터 이민이 격증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신천지를 개척하고 1885년 타이완은 하나의 성으로 독립하였다.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조약(1895)에 의하여 213년간 계속되었던 청나라의 통치를 벗어나 타이완은 일본의 최초 해외 식민지가 되었다. 그 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에 복귀할 때까지 타이완은 51년 간 일본 치하에 놓여 있었으며, 1949년에는 중국공산당의 내전에 패배한 國民黨의 장제스[蔣介石]정권이 타이완으로 이전하여 그 지배체제가 유지되어 왔다.

  국민당 1당 지배정치를 펴온 타이완 정부는 1949년 이래 계속 실시된 계엄령을 1987년 7월 해제하였으며, 1988년 1월 13일 총통 장징궈[蔣經國]가 사망한 후 부총통 리덩후이[李登輝]가 총통으로 취임하였다. 1989년 1월에는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의 입법원 선거에서 야당세력이 예상외의 의석수를 차지함으로써 집권 국민당에 타격을 주었다.

  1991년에는 타이완 수비사령부를 해체하고 진먼섬 계엄을 종식하였으며, 1992년에는 사상경찰제 및 타이완 경비사령부를 폐지하였다. 1993년 11월 최초의 지방선거를 실시, 1994년 7월 국민대회에서 선출되던 총통직선제 개헌안 승인을 거쳐, 1996년 3월 총통 리덩후이가 최초의 직선총통이자 제9대 총통으로 선출되었다. 2000년 3월 야당인 민진당(民進黨)의 후보 천수이볜[陳水扁]이 롄잔을 꺾고 총통으로 선출되어 50년 이상 계속되어온 국민당 체제가 중단되었다. 2001년 12월 1일 제5기 입법위원 선거 결과 민진당이 제1당으로 도약하였으며 그후 2004년 3월 20일 총통선거에서 천수이볜 총통이 50.12%의 지지를 얻어 연임에 성공하였다. 이때 야당은 3월 19일의 천수이볜 총통 피격 사건으로 국가안전체제가 발동되어 군인과 경찰의 투표권이 박탈당했다는 것을 이유로 당선 및 선거무효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최고법원에서 모두 기각 패소하였다.

  2004년 12월 11일 실시된 제6대 입법위원 선거에서 야당(국민당, 신민당, 신당)이 입법원내 과반수(113석) 이상을 확보함으로써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民進黨 89석, 國民黨 79석, 親民黨 34석, 台聯 12석, 新黨 1석, 기타 10석)되고 2008년 3월 마잉주[馬英九]가 제12대 총통에 당선되었다.

 

◎사회․자연환경

1. 면적 : 3만 6천㎢

2. 인구 : 2400만명

3. 통화 : 신 타이완 달러(실제로는 圓이라고 부른다)

4. 출산율 : 1.12

5. 1인당 GNP : 1만 7천달러

6. 행정구역 : 수도및 2개 직할시, 22개 현

7. 현재 기온 : 섭씨 10도-20도 정도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하나투어 직원을 만나 출국수속을 밟다. 일행은 모두 22명이다. 정확히 12시에 아시아나 OZ 711기가 이륙하였고 미리 창가 좌석(J)을 요청하여 앞쪽 창가에 않아 목포까지 우리 서해안과 산하를 감상하다. 큰 비행기다. 12시 50분에 타오위엔 국제공항에 도착한다. 예전에는 장제스공항이었는데 정권이 바뀌자 집권당인 민진당이 지역명칭으로 바꾸어 버렸다니 자유중국 건국자요 25년을 통치한 장제스의 명예가 무색하고 세월의 무심함을 말해주는 듯하다. 가이드는 50대 버스기사 타입의 세련되지 않는 위가창씨인데 우리말이 아주 유창하다. 우리나라에서 겨우 2달 살아봤다는데 어쩌면 저렇게 남의 나라 말을 완벽하게 구사하나? 부럽다. 시차는 1시간이어서 다시 12시가 되어 버렸다.

  우리 일행은 크게 세 팀으로 나누어 행동하게 되었다. 첫째는 강릉에서 온 4형제 부부이다. 둘째는 50대 중반정도의 여성 선후배들 팀이다. 세번째는 혼성팀인데 목포에서온 50대 중반의 부부, 우리 부부, 제천에서 오신 60대 초반의 부부와 시집간 딸과 그 아들로 이름이 우서이다. 우서는 4일간 우리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

  타이완의 경제수준은 우리와 근사하다. 최근 원화절상으로 인해 우리의 NNP가 2만 1천달러가 되었으나 재작년만 해도 1만 7천 달러 였고 당시 타이완은 1만 6천 달러였으니 말이다. 거리의 모습이나 사람들의 모습이나 자가용의 행렬이나 우리와 대동소이한데 가이드 설명으로는 타이완 사람들의 직장 월급이 적어 부유하게 살지는 못한다는데 가옥구조는 마치 일본과 같아서 아파트는 적고 단독주택들은 2층으로 된 큰 규모의 주택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우리 시골의 일(―)자형 집들이 생각나고 하루빨리 제2의 새마을 환경운동을 시작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퇴직하면 꼭 환경새마을 운동에 참여하여 무너진 농촌, 모두들 떠나버린 농촌의 빈집들을 지자체에서 정리하고 마을길은 도시처럼 직선도로를 내는 제2의 농촌새마을 환경운동에 앞장서 보고자 한다.

  세계 4대 박물관이라는데 외양이 평이하게 보이는 것은 상대적으로 우리 국립박물관이나 독립박물관의 위용이 너무 대단해서이다. 국민당이 쫒겨 올 때 모두 가지고 온 중국 최고의 역사유물과 보물들인데 모두 75만점이다. 이미 베이징 박물관에서 중국의 많은 보물들을 보았지만 이곳 유물들이 더 진귀하고 수준 있는 보물들이거니 하는 생각으로 관람하다. 하지만 가이드는 청대 장식품으로 비취로 된 배추잎과 귀뚜라미, 삼겹살 조각품등 흥미거리에만 시간을 할애하기에 나는 따라가면서 설명은 듣지 않고 많은 유물들을 두루 두루 살피었다. 주어진 시간이 100분인데 30분은 자유관람시간을 주기에 양드리와 함께 부지런히 서화전시관 몇 방을 급히 둘러 보았다. 너무 짧은 시간이어서 아쉬움이 크지만 할 수 없는 일이고 은(상)말 주초시기의 거대하고도 정교한 문양을 자랑하는 청동제품에 다시 한번 찬탄을 금할 수가 없다.

  특히 그 당시의 청동제품에 백제금동대향로와 영락없이 똑같은 유물을 발견한 것은 나 스스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결코 백제봉래산대향로가 우리의 창조적인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허탈하고 왠지 속은 듯하고 부끄러움을 감출수가 없다. 반드시 부여 박물관의 학예관을 통하여 확인을 요하는 중요한 사항이다. 내 눈에 비친 기원전 11세기경의 청동향로와 백제대향로의 디자인및 작품구조는 거의 일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타이베이시

  타이완 섬의 가장 북단부 분지에 위치한 타이베이시는 자유중국의 수도이다. 인구는 270만명으로 타이베이현에 둘러싸여 있다. 인구는 대구시 정도인데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거의 없어서인지 대단히 큰 도시로 여겨질 정도로 시가지가 넓다. 지진의 위험에 대비하여 대형아파트는 짓지 않고 대부분 소규모 아파트가 많이 보이고 건물은 지진에 견디도록 튼튼하게 짓는 것이 일본과 같다. 서울주변에 위성도시가 20여개가 넘어 서울과의 경계가 불분명한 것처럼 타이베이도 주변 외곽 위성도시까지 시가지로 연결되어 있고 고속도로를 통해 주변도시로 이동하는 데 지대가 높은 고속도로상에서 타이베이시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어 인구에 비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용산사

  타이베이시의 가장 북쪽 교외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을 나와 시내 서부를 흐르는 담수하의 바로 오른편에 위치한 용산사를 찾는다. 이미 저녁때가 되어 용산사의 화려함이 불빛에 비쳐 더욱 화려하게 눈에 들어온다. 국민의 93%가 불교와 도교와 유교가 혼합된 종교를 믿는다는데 이 용산사도 겉으로는 황금색의 화려한 불교사원이나, 도교와 혼합된 형태의 사원으로 시민들이 향을 피우며 갖가지 제물을 바치면서 자신의 소원을 빌고 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마당에 서서 자유스럽게 기도하는 모습에서 대중과 가까운 불교, 기복신앙의 모습, 생활종교의 모습을 크게 느끼게 한다. 기독교도는 4.5%라니 일본과 대동소이하고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절에 안내한다고 화를 내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무식한 개신교 여행객도 있었다고 가이드가 소개한다.

 

 

■야시장

  용산사 옆에 야시장이 있다.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밤에까지 열어주는 시장으로 크지는 않으나 자유중국의 풍물을 장 파악할 수 있게 갖가지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다. 발맛사지업소에는 가격이 붙어 있는데 40분에 300원이다. 우리 돈 1만 3천원이니 매우 싸다. 그런데 모레 하기로 예정된 선택 관광 발맛사지는 30달러라니 우리 돈 3만 6천원이라 너무 비싸다. 가이드 수입 메워주는 선택관광 이라지만 별로 시원치도 못한 발 맛사지에 3만 6천원은 지나치다.

  저녁은 몽골리안 바베큐인데 한국인이 운영하는듯하고 쇠고기, 돼지고기, 오리고기, 닭고기, 양고기를 마음대로 골라 담아 소스를 부어 요리사들에게 건네면 세 명의 요리사들이 익숙하게 재빠르고 멋진 솜씨로 대형불판을 돌려가면서 구워낸다. 그 맛이 너무 좋았으나 내가 워낙 식탐이 있어 지나치게 양이 많아 다른 음식은 먹지 못하다. 바비큐가 싫으면 일반 뷔페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조치되어 있는 점이 아주 훌륭하다.

 

■101타워 전망대   

  타이베이시의 동남부에 있는 세계 제 2위의 고층빌딩으로 높이가 508m이다. 89층에 전망대가 있어 일본에서 제작한 초고속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데 걸린 시간이 10여초나 되었을까? 아무튼 눈 깜짝할 사이에 올라가니 아파트 4-5층 오르는 시간과 같다. 평소에는 91층 옥상까지 걸어 올라가기도  한다는데 이날 비가 와서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 6.3빌딩보다는 더  디자인이 예쁘고 타이베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타이베이의 상징적 건물이다.

  복용대반점( Fullon Hotel)호텔은 시중심부에서 무려 40분이나 고속도로를 통해 가야하는 삼협시에 소재하고 별은 5개이나 시내에 소재하는 호텔의 분점이다. 시설이나 식사는 괜찮다. 비데가 없는 것이 큰 흠이다.

  저녁에 TV를 켜고 채널을 돌려보니 과연 듣던대로 우리나라 연속극이 너댓개의 방송국에서 쉬임없이 방영되고 있다. 내가 보도 듣도 못한 연속극들이 더빙과 자막처리까지 되어 누구나 어려움없이 시청할 수 있도록 조치가 될 만큼 우리 연속극이 인기라는데 그 인기 이유가 우리연속극이 재미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우리 배우들이 잘생긴 것도 큰 이유가 아닐까하는 우습지만 약간 자만스럽기도 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둘째날 1월 20일(목요일)

 

■태로각 협곡

  아침 6시에 일어나 식사하고 7시30분에 출발한다. 아침식사는 간단하고도 가볍게 빵 세 개와 우유로 때운다. 원래 아침식사는 가볍게 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퇴직 후에도 계속 아침식사는 빵 세 조각과 계란 후라이 한 개와 우유 한 잔으로 하고 싶다. 점심은 주로 외식(백반이나  우동․짜장)으로 하고 저녁만 양드리가 만든 찌개로 먹는 패턴을 정하면 간편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오히려 이익이 아닐까? 두 사람이 아침식사 5천원, 점심식사 1만원 저녁식사 5천원이면 해결될 듯 하니 두 사람의 한 달 음식물비로  60만원이 소요되고 300만원의 생활비라면 엥겔게수는 0.2다. 조금 사치스러운 생각인가?

  호텔에서 조금 가까운 송산역에서 자강호 열차를 탄다. 우리의 새마을 열차라고 할 수 있는 기차인데 의자간격이 넓어 아주 편안하다. 동북부를 돌아 해안을 타고 거의 3시간을 달려 화련시 못 미쳐 신성역에서 내려 버스로 태로각으로 이동한다. 가는 도중 해안의 절경이 볼만 하고 오직 섬이라고는 하나밖에 발견할 수가 없었는데 지도를 보니 이름이 귀산도이다. 거북이 모양이다. 도착시간이 12시가 되어버려서 역전 앞 식당에서 8가지 반찬의 중국식 정식으로 점심을 먹는데 우리나라 고급 중국식당 정식보다 훨훨 낫다. 최고의 맛이다.

  무려 18km에 이르는 대리석 협곡의 위용은 대단하다. 깊고 좁은 협곡으로 아름답고 맑은 물이 흐른다. 원래 석회암 지대이며 석회암 동굴들이 이젠 변형되어 결정질의 대리석이 되고 대리석동굴이 된 것이다. 원주민들이 다니던 길이 남아있으며 식민지로 지배하던 일본인들이 신작로를 냈다. 여기에 1950년대에 정부가 군사도로를 내며 확장하여 오늘날 저 처럼 험준한 협곡을 버스가 다니고 있다. 내 눈에 이젠 관광도로로 더 아름답고 견고하게 만들어진 듯 보인다. 이곳의 험준한 한 지역의 명칭이 연자구인데 대리석의 작은 동굴에 사는 제비를 한 마리 볼 수 있었다. 저 강남 제비들이 봄이면 우리나라에 와서 살다가 가을이면 돌아갔건만 이제 오지 않는다. 정말 작년에는 제비를 구경한 기억조차 없다. 우리나라는 이제 산업화와 농약으로 제비들이 올 곳이 못 된다. 제주도에서는 아직도 많이 볼 수 있으나 우리 한반도 남녘땅엔 제비가 없다. 흥부놀부전의 <제비와 박씨이야기>는 이야기로만 남고 조영남의 <제비>는 노래로만 남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무서운 변화의 모습이다.

 

 

■아미족 마을

  인구가 40만쯤 되는 아미족이 과거부터 이곳 협곡에 살았다. 이제 대부분 대도시로 떠났지만 그래도 상당수가 남아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마을들을 이루고 있고 민속음악과 춤과 놀이를 볼 수 있는 공연도 하고 있다. 베이징이나 계림의 소수민족 공연에 비해 공연장 시설이나 20여명의 남녀 젊은이들의 복장이 약간 허술하고 음악도 생음악이 아니어서 약간 실망스럽다. 그러나 정성을 다해 공연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아틀랜타 올림픽 개막식에서 들은 바 있는 생소하지 않은 음악이 있어 이상타했더니 미국에서 아미족의 음악을 편곡하고 도용한 것으로 저작권 문제제기의 소지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미국에서 만든 음악으로 각인되어서인지 음악을 들으면서 자꾸만 미국 인디언 생각만 났고 양드리도 아미족 음악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녁식사는 화련시 변방의 시골스런 식당에서 먹는다. 주인은 중국인인데도 7가지 반찬은 한식류다. 돼지고기복음이 맛있고 목포에서 오신 분이 건네는 소주를 두 잔이나 들이켰다. 화련시역에서 자강호를 타고 밤 기차는 열심히 달리지만 갈 때와는 달리 어두운 해안은 볼게 없는 고로 실컷 자다. 밤 10시 30분에야 호텔에 들었다.

 

 

 



세째날 1월 21일(금요일)

 

■만리 온천

  오늘은 느즈막이 9시에 출발한다. 과거부터 타이베이의 출구항인 기륭시로 가는데 정작 목적지는 기륭시 못 미쳐 좌편방향으로 꺾어져서 만리시로 간다. 이곳에 온천지대가 있어 작은 온천으로 들어간다. 매주 익산온천에서 목욕하며 사는지라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하여 처음에는 꺽정스럽더니 정작 들어가니 썩 괜찮다. 남녀가 수영복을 입고 함께하는데 양드리도 흔쾌히 입장한다. 물도 부드럽고 수온이 40도쯤 되어서 한시간 반을 물속에 있다 나오니 몸이 한결 가뿐하다.  


■아류해양국립공원

  온천에서 되돌아 나오다 아류에서 점심을 먹는다. 중국정식인데 깍두기가 맛있다. 식사후 터미널 곁에 있는 해양공원으로 나간다. 바닷물의 침식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기암들이 다채롭다. 특히 여왕바위라고 불리는 바위는 클레오파트라 흉상이라고 명칭을 바꾸는 게 옳을 듯하다. 기실은 클레오파트라보다 훨씬 날씬하고 목이 긴 예쁜 여성상이다. 바다의 침식해안에 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이고 모두들 좋아한다.

 

 

 

 

■충렬사

  내전과 항일운동시 전사한 군인과 열사들의 영령을 모신 곳으로 우리나라로 말하면 현충원이다.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본토의 관광객들이 뒤섞여 참배에는 관심이 없고 위병 교대식에만 온 눈들이 쏠려 있다. 매우 흥미롭게 거행되는 멋있는 교대식이어서 재미도 꽤나 있다. 여자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들 같은 군인들의 교대식이 안쓰럽다고 하는데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이다. 군대 중에 가장 최고인 의장대에서 근무하면서 충렬사에서 멋진 교대식을 연출하는 저 청년들은 모든 청소년들의 우상이건만 뜨거운 모성애는 저 아름다운 모습을 남자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보는 것이지. 인생은 내 주관과 내 멋대로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면 되는 것을 어찌하여 우리는 자꾸만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비하하며 슬퍼하고 불행을 스스로 만들어가며 만족하지 못하는 것인가? 방법은 간단하다. 의식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의식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뇨? 물질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진정으로 의식 있는 사람이니라. 부자와 정치인과 사업가들과 사이비 종교인들은 결코 누릴 수 없는, 참된 인격의 소유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런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서문정 거리

   타이베이 최고의 번화가이다. 우리로 말하면 명동이나 신촌이나 홍대앞이 되겠다. 꼭 우리 대학로마냥 고교생들과 대학생들이 가득차고 활기가 넘친다. 원대앞 대학로에 가보면 정말 잘생긴 선남선녀들이 많은데 이곳 수도인 타이베이 젊은이들은 키도 작고 그리 예쁘지들 않다. 이리저리 거닐다가 잔돈이 남은 게 몇 푼 있어서 수퍼에 들어가 캔맥주 600CC 하나 샀더니 우리 돈으로 천 오백원 정도이다.

  잡화점 쇼핑등이 여러차례 있었지만 전혀 관심없다. 가지고 싶은 것도 없을뿐 만 아니라 원래 여행이 목적이요 상품구매는 목적과 관련없다. 내 소신이 지나친 듯하지만 실제 생각이 그러하므로 가이드 체면을 생각하여 그냥 구경만 할 뿐이다. 공항 면세점은 아예 들어가지 않고 양드리가 구경하는 동안 나는 운동한다. 출국시 양드리가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피부 알레르기로 고생하는 우리 숭어가 요청한 간단한 화장품 몇 가지를 구입하고, 십 몇년 전 어느 마트에서 서비스로 준 여행가방이 그동안 닳고 닳아 여러차례 기워가며 사용하여왔으나 오늘 큰 맘먹고 가방을 샀다고 좋아한다. 잘했다고 칭찬하고 내가 헌가방을 용감하게 쓰레기통에 버리니 양드리는 못내 아쉬워한다. 뭐 가보로라도 날길라꼬?

 

 

 

 

네째날 1월 22일(토요일)

 

◎중정기념관

  오늘은 귀국하는 날이고 스케줄이 여유가 있으므로 9시에 출발하여 먼저 장제스 기념관에 도착한다. 중국 현대사의 영웅이자 자유중국 건국의 아버지인 장제스(1887-1975)도 이제 정권이 바뀌어 타이완 본토세력인 민진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에 대한 신격화를 무너뜨리려하나 아직도 국민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은 별 변화가 없다고 한다.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하였고 1918년 쑨원의 휘하에 들어가 주로 군사면에서 활약하여 1924년에 황푸군관학교 교장, 1925년 쑨원 사후에는 난징정부의 실질적인 1인자가 되고 1926년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취임하여 북벌을 개시하였다. 1927년 상하이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하였으며 이 해 12월에 쑨원의 처제인 송미령과 결혼한다. 1928년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드디어 1914년 위안스카이 사후 군벌의 시대가 되어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뚱 공산정권과의 통일전쟁, 시안사건(1936), 항일전을 펼치기 위한 제2차 국공합작(1937-38)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국권은 회복되었으나 1946년에 다시 공산당 토벌에 나서고 이의 실패로 1949년에 타이완으로 쫓겨난다.

  국부인 쑨원 기념관 탐방이 스케줄에 없어 찾지 못함은 아쉬운 점이며 이 장제스기념관은 국민들의 성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우리 박정희기념관은 국가 보조와 국민성금으로 추진되어 김대중 대통령께서 흔쾌히 보조금을 책정하시고 후원하셨으나 노무현 시대에 노빠들의 반대로 무산된 상태로 지지부진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유신독재에 갖은 고초를 당하셨음에도 개인감정을 뛰어넘어 역사를 바로보시는 김대중 대통령의 열린 큰 마음에서 역시 한국현대사에 박정희와 비견되는 큰 인물임을 나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시실에 정말 많은 역사적 사진들과 장제스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송미령이 쑨원의 뒤를 이어갈 장제스와 정략적 결혼을 하게된 의도나 장제스가 송미령의 소원대로 두 부인을 간계로 쫒아내고 결혼식을 올린 뒤 혼인신고를 해버렸다는 비화에서는 그에 대한 존경심이 싹 가신다.

  장제스와 송미령이 결혼할 때 입은 예복이 8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변색되지 않은 채로 잘 남아 있어 부럽다. 내 결혼예복은 올해 30년이 되었는데 잘 있나? 양복과 시계와 넥타이는 잘 보관하고 있으나 누가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인가? 과거에는 전제군주들뿐만 아니라 귀족 관료들의 유품도 후손들이 가보로 잘 보존하여 왔으나 오늘날에는 오직 대통령들만이 기념관을 짓고 유물들을 전시하는 특권을 부여받을 뿐, 다른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이고자 하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사림관저

  원래 스케줄은 오후 2시 30분 발 비행기 출국이었다가 스케줄 변경으로 4시 50분이 되었으므로 장제스 사림관저를 가게 되다. 장제스가 1949년부터 1975년에 죽을 때까지 살던 사저이다. 자유중국이 총통제임에도 총통부와 관저가 달라서 총통도 출퇴근 한다는 데서 장제스의 민주성을 시사 받는다. 우리는 일본 총독이 살던 총독관저를 경무대(지금 청와대)로 만들어 일본총독이 하던 방식대로 청와대 안에서 살면서 근무한다. 이는 미국의 백악관과 같다. 내각책임제를 하는 나라들의 총리들은 모두 관저에 살면서 집무는 관청으로 출근하여 본다. 대통령이 결코 군주가 아니고 국민이 뽑은 대표라는 것을 상징하는 뜻에서도 우리 대통령도 대통령부청사를 짓고 청와대에서 출근하면 바람직하다.

  7만평이나 되는 넓은 터에 아담하게 지어진 관저, 그러나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 이젠 시민공원으로 개방되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특히 외국인들도 많이 방문하는 곳이 되었다.

 

 

 

 

 

여행을 마치면서

 

  타이완에 갈 때보다 오는 비행시간은 엄청 단축되어 비행시간이 2시간으로 준다. 8시에 공항을 빠져 나오며 일행들과 간단히 인사하다. 한 시간이 못되어 마포집에 도착하다. 어린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자유중국에 가서 작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그들의 안정된 삶의 모습을 살펴보고 더운 친근감을 느낀다. 자유중국이 하루빨리 다시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고 중국과의 평화로운 외교관계도 잘 지속되면서 언젠가는 다시 통일이 되는 그 날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