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서(金仲舒) 15세기
조선 세조 때의 문신으로 고려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의 7세손이다. 오수찰방(獒樹察訪)을 지냈다. 호는 척약재(惕若齋)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구용(九龍)의 손자이다. 익산군에 거주하였으며 진사(進士)에 올랐다가 음사(蔭仕)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이르렀다. 말년에 익산에서 살다가 89세에 죽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3년(1467) 11월 8일
<한계미· 배맹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한계미(韓繼美)에게 오위 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겸(兼)하게 하고, 배맹달(裵孟達)을 곤산군(昆山君)으로, 정종(鄭種)을 동평군(東平君)으로, 송문림(宋文琳)을 행 사간원 대사간(行司諫院大司諫)으로,김기(金琦)· 강흡(姜洽)· 이수생(李壽生)· 정육손(鄭六孫)· 유효진(柳孝眞)· 유말손(柳末孫)· 박신함(朴信諴)· 이소생(李紹生)· 김중서(金仲舒)· 김흥(金興)· 박윤(朴倫)을 보두 겸 사헌부 집의(兼司憲府執義)로, 신자형(申自衡)· 채치인(蔡治仁)을 모두 겸 사헌부 장령(兼司憲府掌令)으로, 김지경(金之慶)을 수 충청도 관찰사(守忠淸道觀察使)로, 이형손(李亨孫)을 겸 전주 부윤(兼全州府尹)으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973년 12월 31일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활자본(필사본 일부 포함)으로 2,077책이다. 1413년(태종 13)에 《태조실록》이 처음 편찬되고, 25대 《철종실록》은 1865년(고종 2)에 완성되었다. 《실록》의 편찬은 대개 전왕이 죽은 후 다음 왕의 즉위 초기에 이루어지는데, 춘추관 내에 임시로 설치된 실록청(또는 撰修廳·일기청)에서 담당하였다.
실록청의 총재관(摠裁官)은 재상이 맡았으며, 대제학 등 문필이 뛰어난 인물이 도청(都廳) 및 각방 당상(各房堂上)으로 임명되었다. 시정기(時政記)와 사관(史官)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사초(史草), 각사 등록(謄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실록편찬의 기본자료였고, 문집·일기·야사류 등도 이용되었으며, 후기에는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과 《일성록》도 사용되었다.
■음사(蔭仕)
음서(蔭敍) 또는 음서제(蔭敍制)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중신 및 양반의 신분을 우대하여 친족 및 처족을 과거와 같은 선발 기준이 아닌 출신을 고려하여 관리로 사용하는 제도이다. 음보(蔭補), 문음(門蔭), 음사(蔭仕), 음직(蔭職)이라고도 표기하며, 음덕(蔭德)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음서로 선발된 관료들은 음관(蔭官)으로 불렀는데 규정에는 음서제로 관직에 오른 자는 당상관 이상의 직책과 청요직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문벌의 영향력에 따라 간혹 청요직과 3정승, 2찬성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 생원시나 진사시에는 합격했으나 대과에 응시할 역량이 되지 않는 고관대작의 자제들이 음서제도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과거 급제자 출신에 비해 음서 출신을 낮추었다고 하지만 후기에는 과거보다는 음서로 출사하기를 선호하게 되어 부정비리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김자완(金自琓) 1425(세종 7)∼1457(세조 3)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자완(自琬)으로도 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익산군 출신이다. 고려추충정난정원공신삼중대광첨의중찬세자사상락군개국공충렬공(高麗推忠靖難定遠功臣三重大匡僉議中贊世子師上洛君開國公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8세손으로. 호조참의 김중서(金仲舒)의 아들이다. 성천부사(成川府使) 명리(明理)의 손자,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구용(九容)의 증손, 삼중대광평 장사상락군(三重大匡平章事上洛君) 앙(昻)의 현손, 호조참의(戶曹參議) 김초(金礎)의 외손, 좌의정 서원부원군 양절공(左議政 西原府院君 襄節公) 한확(韓確)의 사위, 윤강(允崗)․윤정(允精)․윤경(允勍)의 아버지, 소혜왕후(昭惠王后; 德宗妃)의 형부요 성종대왕(成宗大王)의 이모부다. 음직(蔭職)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공조(工曹)․형조좌랑(刑曹佐郞),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역임하였다. 33세로 작고하자 나라에서는 전라감영(全羅監營)을 통해 다수의 장례부의(葬禮賻儀)를 내렸다. 묘는 완주군 고산면 서봉리(完州郡 高山面 西峰里) 소농골에 있으며 비문은 통정대부비서원승원임규장각직각(通政大夫秘書院丞院任奎章閣直閣) 송규헌(宋奎憲)이 짓고, 글씨는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이우면(李愚冕)이 썼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년(1455) 12월 27일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공신에 녹훈하다>
…현감(縣監) 김자완(金自垸)......등은 3등에 녹(錄)한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5년(1484) 12월 21일
<익산인 김자완의 처가 죽어서 호조로 하여금 쌀·콩 등의 물품을 보내주게 하다>
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기를,“전라도(全羅道) 익산(益山)에 사는 김자완(金自琓)의 처 한씨(韓氏)가 죽었다고 하니, 부조로 쌀·콩 아울러 40석, 관곽(棺槨)과 초둔(草芚) 10번(番), 송지(松脂) 3두(斗), 종이 1백 권, 석회(石灰) 40석, 정포(正布) 20필, 공석(空碩) 60번, 연육폭 유둔(連六幅油芚) 3장, 청밀(淸蜜) 10두, 진말(眞末) 3석, 기름 20두를 그 도(道)에서 보내어 주게 하라.” 하였다.
황거중(黃居中, 시호는 문숙) 14세기-15세기
생졸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우주(紆州). 자는 경덕(敬德), 호는 사가(四佳). 우주황씨(紆州黃氏)의 시조는 고려시대 중윤공(中尹公)으로 추봉되었던 황민보(黃旻甫)이다. 거중의 부친은 고려의 문하평리를 지낸 황문용(黃文用)이며, 모친은 덕수장씨(德水長氏)로 현령 장핵(張翮)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글 짓는 데 능하고, 경서를 해석함에 남달리 뛰어났다고 한다. 이성계(李成桂)의 황산전투(荒山戰鬪)에 종사관으로 참여하였으며,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어 전당문학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 자리에 있으면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부양하는 것을 제일 우선적인 것으로 삼아 주‧군에 교수‧훈도를 둘 것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뒤에 공조전서에 임명되었다가 곧 호조판서에 올랐고, 이듬해에 향리에 돌아갔다. 조선 초기의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일으킨 공이 크다. 후에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우주(紆州)를 본관으로 정한 것은 황거중이 우주에 낙향, 그곳에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우주로 하였다. 황거중의 아들 황기(黃圻)가 호조 참판을 지냈으며, 절충장군으로 상호군을 역임한 황윤성은 통정대부를 지낸 황린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황형은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했고, 황희는 승사랑에 올랐으며, 황호는 공조 좌랑을 지내 우주황씨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395년(태조 4) 원종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사가유교》가 있으며, 죽은지 400여년 뒤인 1842년(헌종 8)에 김제시 용지면에 있는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우주황씨(紆州黃氏)
우주황씨는 창원황씨, 장수황씨 등과 같은 뿌리다. 우주황씨는 고려 초 중윤(中尹)을 지낸 황민보(黃旻甫)가 시조다. 그리고 10세손 황거중이 중시조이다. 황거중은 고려 말 이성계가 남원 운봉에서 왜구를 칠 때 종사관으로 참전, 많은 공을 세운다.
훗날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그를 정당문학에 임명했다. 황거중은 관직을 떠난 후 고향 우주로 낙향한다. 우주는 전주 북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통일신라 경덕왕이 우주로 개칭하여 익산군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 전주에 속했다.
우주는 지금의 전북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장구리, 둔산리, 용암리, 구미리 일대와 삼례읍 후정리, 해전리, 어전리 및 익산시 왕궁면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황거중은 이곳에서 후학 지도에만 전념했다. 그 뒤 후손들이 우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황거중의 아들 황기는 호조참판을 지냈고, 황윤성은 절충장군으로 상호군을 역임했다. 황헌은 이조정랑으로 진위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간신 김안로를 탄핵하여 사사시켰다. 후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황형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황호는 공조좌랑을 지냈다
황귀존(黃貴存) 15세기
▣조선왕조실록 문종 즉위년(1450) 7월 5일
<사헌부에서 임금에게 정치의 도를 상서하고, 장령 하위지가 안숭선의 국문을 청하였으나 불허하다>
장령(掌令) 하위지(河緯地)가 인하여 아뢰기를,“안숭선(安崇善)은 일찍이 중한 죄에 좌죄(坐罪)되었는데, 갑자기 고신(告身)을 돌려주는 것은 부당하니, 청컨대 도로 거두소서. 사알(司謁) 황귀존(黃貴存)은 지난 번에 안장(鞍粧)이 규제를 넘었으므로 본부에서 탄핵하였는데, 국문하지 말라고 명령하시었으니, 간사한 소인의 무리를 법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뒤에 징계할 방법이 없습니다. 청컨대 국문하소서.”
▣조선왕조실록 단종 1년 (1453) 10월 10일
<세조가 이용과 결탁하여 반역하고자 했던 김종서·황보인·이양·조극관 등을 효수하다>
또 아뢰어 용(瑢)의 당(黨)인 환관 한숭(韓崧)·사알(司謁) 황귀존(黃貴存)을 궐내에서 잡아 의금부(義禁府)에 넘기었다.
▣조선왕조실록 단종 1년 (1453) 10월 11일
<지정·정분·조수량 등 이용의 당을 처벌하다>
황귀존(黃貴存)을 강계(江界)에 압송(押送)하여 종으로 만들었으니, 모두 이용(李瑢)의 당(黨)이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단종 1), 즉 계유년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정분(鄭苯) 등 3재상을 비롯한 정부의 핵심인물을 죽이고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로 축출·사사(賜死)한 뒤 정권을 잡은 사건.
황장손(黃長孫) 1421(세종 3) ∼1454(단종 2)
조선초기의 충신으로 문숙공(門肅公) 거중(居中)의 손자이며, 부사직(副司直) 황귀존의 아들이다. 본관은 우주(紆州)이며 함열출신이다. 별좌(別座)로 단종(端宗)이 영월(寧越)로 유배갈 때 호종(扈從)하고 단종이 죽은 뒤 영월에서 순절하였다. 장릉 배식단에 제향되었다. 형인 황경손도 당시 죽음을 당하였다. 이때 연좌되어 죽은 사람은 1백 90인이었다.
▣조선왕조실록 단종 2년(1454) 8월 15일
<임금이 친히 건원릉과 현릉에 추석제를 행하다>
환궁하다가 중량포(中良浦)의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니,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과 좌승지 박원형(朴元亨)·우승지 권자신(權自愼)·우부승지(右副承旨) 구치관(具致寬) 등이 함께 의논하고 아뢰기를,“간당(姦黨)을 베어 없애소서.”하므로, 즉시 하교(下敎)하기를,
…황귀존(黃貴存)의 아들 황경손(黃敬孫)·황장손(黃長孫)… 등을 법에 의하여 처치하라.
▣조선왕조실록 정조 15년(1791) 2월 21일
<장릉 배식단에 배향할 사람의 명단>
…황경손(黃敬孫)·황장손(黃長孫)…
■우주현(紆州縣)
전라북도 전주시(全州市) 북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우소저현(于召渚縣)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이 우주(紆州: 汚州)로 개칭하여 금마군(金馬郡: 益山) 속현이 되었다. 고려 때에는 전주에 속하였다가 폐현되었다. 오늘날 삼례·봉동·왕궁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
배식단에 오른 인물은 총 268명이다. 정단(正壇)에 배식된 사람이 32명, 별단(別壇)에 배식된 사람이 236명이다. 이중 정단에 배향된 32인의 인물은 성격별로 육종영(六宗英), 오의척(五懿戚), 삼상신(三相臣), 삼중신(三重臣), 양운검(兩雲劒), 사육신(死六臣) 그리고 나머지 인물들로 나뉜다.
송질(宋軼) 1454(단종2)∼1520(중종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가중(可仲). 도정(都正) 송공손(宋恭孫)의 아들이다. 1477년(성종 8)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 같은 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482년에는 진현시(進賢試)에 발탁, 홍문관정자를 거쳐 1485년 지평에 올랐다.
이때에 나라에서는 재정의 긴축을 강화하여 관찰사‧수령으로 하여금 사저곡(私儲穀)과 제사사(諸寺社)의 장리곡(長利穀)을 철저히 조사하여 본주인의 용도를 제하고 그 밖의 것은 감봉(監封)하게 하였는데, 그는 이 일의 추진을 주관하였다.
그 일례로 충청도 진천 지방의 재상 신균(辛均)과 상장군 오유종(吳有終)은 모두 사저곡이 수 만석에 이르나 관청의 감봉은 100석에 불과함을 밝히고 진천고을의 관리를 징계조치하였다.
아울러 각 지방에 농장을 가지고 있는 재상들로 하여금 스스로 납속(納粟)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하여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어 병조정랑에 임명되고, 다시 승정원의 동부승지‧부승지를 거쳐, 1496년(연산군 2) 우승지가 되었다.
이때 그는 왜인들이 불법적인 약재무역을 횡행하자 이의 단속을 주청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이어서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때마침 그 지방에서 유행하던 역질(疫疾)의 치유에 힘써 지방민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오랫동안 북방의 국방을 다스렸다.
1501년에는 도민 임지성(林之盛)의 변란을 사전에 파악, 진압하였으며, 그 공로로 형조참판에 승진되었다. 같은 해에 천추사(千秋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어서 공조‧호조‧이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특히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임하며, 경재소(京在所)의 당상관별감을 토성조관(土姓朝官)으로 임명시켜 풍속을 바르게 하고, 왕자‧제군(諸君)이 이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50세 때에 정헌대부(正憲大夫)‧예조판서가 되고, 이어 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를 지낸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때에는 예조판서로서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여원군(礪原君)에 봉군되었다. 1509년 함경도체찰사가 되어 동북 육진지방의 사민입거책(徙民入居策)을 제시하였고, 북도 일원을 순찰한 뒤 무산‧풍산 지방의 이배도(移排圖)를 제작하여 진상하기도 하였다. 1512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이듬해에는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간들로부터 탐오(貪汚)하다는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시호는 숙정(肅靖)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8년 (1477) 8월 3일
<성균관에 나가 석전을 행하고 명륜당에서 유생을 시험하도록 명하다>
해사(該司)에 명하여 방방(放榜)과 유가(遊街) 등의 제사(諸事)를 갖추게 하고, 신시(申時)에 윤자운(尹子雲) 등이 4인을 뽑아 아뢰니, 임금이 진사(進士) 권건(權建)을 제1등으로 삼고, 송질(宋軼)과 민사건(閔師騫)·송윤종(宋胤宗)을 차등으로 삼았다. 임금이 단상(壇上)에 나아가서 방방(放榜)하니, 백관(百官)이 진하(陳賀)하기를 의식과 같이 하고, 권건 등이 나가자, 임금이 4관(四館)에 명하여 신래(新來)를 불러서 희학(戲謔)을 하게 하였다. 또 명하여 내구마(內廐馬)를 타게 하였는데, 유가(遊街) 때에는 다리[橋]와 문(門)을 에워싸고 구경하는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2년 (1481) 4월 26일
<육조 당상 등에게 상평창 설치의 편부를 의논하게 하다>
이맹현(李孟賢)·이우보(李祐甫)·권건(權健)·이명숭(李命崇)·정성근(鄭誠謹)·이창신(李昌臣)·민사건(閔師鶱)·이균(李均)·김응기(金應箕)·안윤손(安潤孫)·송질(宋軼)·성희증(成希曾)은 의논하기를,
“나라에 창름(倉廩)·부고(府庫)가 있는 것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므로, 풍년에는 곡식을 거두어 들이고, 흉년에는 곡식을 나누어 주어서 그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나라에서 서울과 외방(外方)에다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고 곡식이 귀해지면 값을 더하여 포목과 바꾸고, 곡식이 천(賤)해지면 값을 줄여서 포목과 바꾸니 진실로 좋은 법입니다.
▣국조보감 제18권 중종 8년(1513)
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사간 신상(申鏛)이 나아와 아뢰기를,
“사치를 금지시키려면 대신부터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데, 지금 제도를 어겨가며 집을 짓기도 하니, 매우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송질(宋軼)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신의 집이 폐조 때 헐렸었는데, 반정 후에 다시 지으면서 제도를 넘도록 칸수를 잡고 또 단청을 하였습니다. 몸소 금령을 범하였으니 죄를 내려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집이 제도를 어겼으면 고치면 된다. 어찌 이 일 때문에 재상을 바꾸겠는가.”
하였다.
▣송질(宋軼)신도비
維正德十五年歲在庚辰正月乙未礪原府院君宋公卒 上震悼輟朝三日官肖喪葬 贈諡肅靖以三月乙卯于楊州治北蘇羅山後戌坐辰向之原至嘉靖二十三年甲辰公嗣通禮院司禮之翰携家乘請銘于世昌 嗚呼公之知擧獲門下生其掌銓衡登黃閣再辱爲郞僚平生所景仰而欽慕之者無如公則其鐫公幽道不可以不文辭 公諱□字可仲□□□□□祖諱淑文仕高麗官至政堂文學諱松禮佐元宗爲一代宗臣諡貞烈自是累世以功名顯有諱辰生仕國朝爲內資少尹贈吏曹判書是公曾祖 少尹生諱萬達慶源府使贈議政府左贊成生諱恭孫折衝將軍訓練都正贈純忠補祚功臣議政府領議政礪良府院君寔娶司直朴謙亨之女高麗進賢館大提學諱大陽之曾孫景泰甲戌生公於司直府君密陽之第府君嘗抱登樓偶失手□墜上樓下蒼皇視之則己匍匐就行無所傷及知讀書業日進有遠大志贊成公奇之曰此兒將大吾門 成化丁酉□進士是年秋上幸學試諸生公中乙科 命借內馬卽臨軒放榜初授成均學諭 戊戌丁外憂服爲承文院正字選補弘文館著作陞博士中進賢試超授副修撰知製敎 甲辰陞校理轉司憲府持平 御書公及金應箕等五人名下政曹各加級曰□人雖衆非濫丙午拜兵曺正郞歷司膽宗簿二寺僉正轉司憲府掌令陞軍資監副正辛亥拜世子侍講院輔德壬子陞弘文館直提學藝文館應敎甲寅陞副提學□入政院爲同副承旨轉至左承旨丁巳賜金帶拜黃海道觀察使秋□□同知中樞府事□□平安道觀察使以親老辭不許辛酉拜刑曺參判以賀千秋赴□□□□京轉戶吏曺參判癸亥特陞資憲拜刑曺判書推明斷獄無滯囚甲子監 昭惠王后山陵事進階正憲旋陞崇政 乙丑爲京畿道觀察使丙寅拜禮曹判書兼同知成均館事九月 聖上反正朝廷議文一切責就公應之無滯錄勳 賜秉忠舊義靖國功臣號進階崇祿丁卯拜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戊辰帝遣太監李珍等來公接伴于境土冬進階輔國崇祿封礪原府院君兼領 經筵事己巳以體察使往咸鏡道審定堡鎭多革宿弊至今民有賴焉八月丁內憂哀毁守禮時議美之辛未服復勳封壬申拜吏曺判書銓選無私人稱洽然 上親批公名特拜爲右相癸酉陞領議政公常懷盛滿甲戌遇有人言辭之甚懇上不得已從之封府院君乙亥正月承 召詣 闕得疾還 上遣御醫治療□□偏國有大事 遣近臣諮問恩禮彌重臨□不病晨起悠然而逝公天資忠懿識量宏胸次豁達長不踰中人而望之如山岳之重其平居談論雜以諧謔和氣融然及當大事色莊氣肅確然不動爲文辭操筆便就涉獵書史旁通韜略世之論將者以公爲首屢掌試圍得人尤盛事親色養雖至貴重定省不怠恩撫宗族義敎子弟性又不喜紛華自奉甚簡自釋褐遇知 成廟嘗曰得人安得如宋某上嘗閱公弘文館月課之作曰此是宋某忠誠所發 命置高茅公尨眉高準狀最微餐 上嘗因進見目送之曰宋某有何不快乃爾盖重公而之也晩年卜於城東樂其泉石之趣陶然若不與世故相涉而至其愛君憂國之念老而不衰公配南原梁氏宗親府典籤諱瑗之女南原君諱誠之之孫性端淑閒靜溫惠慈詳生未嘗有驕惰之容年十七歸于公終始敬順無有違克享福祿宗黨咸尊仰焉敎男女皆有禮則事都正公幾四十年克盡誠孝得己歡心公嘗語諸子曰爾母賢吾敬如良友公卒後十五年甲午十二月乙未終享年七十四葬于公同塋異室 公有三男三女男長之翰府使次之幹定略將軍次之禎司甕院參奉女長適德山監李亨幹次適內資寺正愼居易次卽今議政府左議政洪彦弼夫人 夫人生一男一女男曰今爲京畿觀察使女適敦寧都正尹珍 之翰先娶領議政南袞之女生一男曰寅 方數歲公嘗撫之曰骨法類我善養之旣長尙貞順翁主封礪城尉後娶刑曹正郞金顯祖女之幹娶安東權允溫女之禎娶翊贊尹穎女生三男曰宇曰賓璿源殿奉曰寧德山生一男一女男曰崑讀 世子翊衛司侍直女適幼學柳□□生一女適□□□士虞內外曾孫又若干人銘曰有州曰維礪良偉人代作邦國之祥公應休期早擅詞場翊我 聖明大運再昌手執銓衡身登廟廊掃除町畦坦露心腸掌甘調鼎盤錯剖亨嘉會際陶鑄虞唐銘鍾勳勒誓河秘藏配美貞烈休有耿光蘇羅後麓有封若堂永鐫貞珉嗚呼不忘
□□二十四年九月 日立
정덕(正德) 15년(1520, 중종 15) 경진 정월 을미에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 송공(宋公)이 세상을 떠나자 임금께서 매우 슬퍼하시고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장례를 도와주게 하였으며 ‘숙정(肅靖)’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셨다. 3월 을묘에 양주 고을 북쪽 소라산(蘇羅山) 뒤 동남향의 언덕에 묘소를 정하고 가정(嘉靖) 23년(1544, 중종 39)에 공의 후사인 통례원 사예(通禮院司禮) 지한(之翰)이 가승(家乘)1)을 가지고 와서 세창(世昌)에게 명문(銘文)을 청하였다. 오호라! 공이 과거시험관이었을 때에는 문하생으로서 욕되게 하였고, 전형(銓衡)을 잡고 재상의 지위에 오르실 때에는 외람되게 두 번이나 낭료(郞僚)가 되었다. 내 평생에 공경하고 사모하는 이가 공과 같은 분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공의 묘도(墓道)를 새기는데 굳이 사양하지 못하였다.
공의 이름은 질이며 자는 가중(可仲)이다. (…결락…) 숙문(淑文)은 고려 때에 벼슬하여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송례(松禮)는 원종(元宗)을 도와 일대의 종신(宗臣)이 되었으며 시호는 정렬공(貞烈公)이다. 이로부터 여러 대에 걸쳐 공명을 드날렸고, 진생(辰生)은 국조(國朝 : 조선)에 벼슬하여 내자 소윤(內資少尹)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으니 이 분이 공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소윤(少尹)이 만달(萬達)을 낳았는데, 만달은 경원 부사(慶源府使)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이 분이 공손(恭孫)을 낳았다. 공손은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훈련 도정(訓練都正)을 지냈으며, 순충 보조공신 의정부 영의정을 증직받고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다. 사직(司直)인 박겸형(朴謙亨)의 딸을 배필로 맞아들였는데, 고려의 진현관(進賢館) 대제학인 대양(大陽)의 증손이다. 경태(景泰) 갑술년(1454, 단종 2)에 공을 사직부군(司直府君)의 밀양에 있는 집에서 낳았다. 일찍이 부군이 공을 안고 누각에 올라가다가 실수하여 누각 아래로 공을 떨어뜨렸다. 누각 위에 올라 황급히 살펴보니 공이 기어 나오는데 다행히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 글을 읽을 줄 알기 시작하면서 학업이 날마다 정진되고 원대한 뜻이 있었으므로 찬성공(贊成公)이 기특히 여기며 “이 아이는 장차 우리 가문을 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성화(成化) 정유년(1477, 성종 8)에 진사가 되었다. 그 해 가을에 임금께서 학궁(學宮 : 성균관)에 납시어 모든 학생들에게 시험을 보게 하였다. 공은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는데 내구(內)의 말2)을 빌려 타고 오라는 임금의 명이 있어 곧 서둘러서 대궐에 당도했다. 살펴보니 방이 붙어 있었고 처음으로 성균관 학유(學諭)에 제수되었다. 무술년(1478, 성종 9)에 외가 쪽의 상(喪)을 당하여서 복(服)을 마치고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가 홍문관 저작(著作)으로 뽑혔으며 박사에 올랐다. 진현시(進賢試)에 합격한 뒤 관품을 뛰어넘어 부수찬 지제교에 제수되었으며, 갑진년(1484, 성종 15)에는 교리로 승급되고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다. 어서(御書)에 공과 김응기(金應箕) 등 5명의 이름을 쓰시고 정조(政曹)에 명을 내리시어 각각 자급을 올리라고 하시며 “비록 사람 수가 많으나 넘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병오년(1486, 성종 17)에 병조 정랑에 제수되고 사섬시(司贍寺)와 종부시(宗簿寺)의 첨정을 거쳐 사헌부 장령으로 전임되었는데 다시 군자감 부정으로 진급되었다. 신해년(1491, 성종 22)에 세자시강원 보덕에 제수되고 임자년(1492, 성종 23)에 홍문관 응교에 올랐다. 갑인년(1494, 성종 25)에 부제학에 오르고 승정원으로 들어가서 부승지가 되었고 다시 옮겨 좌승지가 되었다. 정사년(1497, 연산군 3)에 금대(金帶)를 하사받았으며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동지중추부사 (…결락…) 평안도 관찰사 (…결락…) 그러나 어버이의 연로함을 이유로 사양하니 임금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신유년(1501, 연산군 7)에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천추사(千秋使)로 연경(燕京 : 북경)에 다녀왔으며, 그 후에 호조와 이조의 참판으로 전임되었다. 계해년(1503, 연산군 9)에 특명으로 자헌대부로 진급되고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성의를 다하여 송사를 밝게 판결하므로 옥에는 죄수가 없었다. 갑자년(1504, 연산군 10)에 소혜왕후(昭惠王后)의 산릉(山陵) 일을 감독하여 정헌대부로 관계(官階)가 올랐고 의정부로 승진되었다.
을축년(1505, 연산군 11)에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고 병인년(1506, 연산군 12)에 예조 판서 겸 동지성균관사에 제수되었다. 9월에 임금께서 반정(反正 : 중종반정)을 하시고 조정에서 논의되는 일체의 문서에 대하여 힐책하셨는데, 공이 응하여 막히는 것이 없었다. 이에 공훈을 기록하여 병충 분의 정국공신의 호를 주시고 숭록대부로 관계를 올려주셨다. 정묘년(1507, 중종 2)에 의정부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고, 무진년(1508, 중종 3)에 중국에서 태감(太監) 이진(李珍) 등을 보내어 오니 공이 국경에서 접대하였다. 그 해 겨울에 보국 숭록으로 관계가 오르고 여원부원군 겸 영경연사에 봉해졌다. 기사년(1509, 중종 4)에 체찰사(體察使)로 함경도에 가서 보진(堡鎭)을 살펴 묵은 폐단을 많이 고쳤으므로 지금까지 그 지방의 백성들이 힘을 입고 있다. 8월에 부모상을 당하여 몹시 슬퍼하며 예를 다하였으므로 그 당시 여론이 그를 아름답게 여겼다. 신미년(1511, 중종 6)에 복을 마치고 다시 훈봉(勳封)을 받았으며, 임신년(1512, 중종 7)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어 관리를 공정히 선발하니 사람들이 아주 흡족해하며 칭송하였다. 임금께서 친히 공의 이름을 비준하여 특명으로 우의정에 제수하고 계유년(1513, 중종 8)에 영의정으로 승진시켰다. 공은 항상 성만(盛滿 : 부귀·권세 등이 극성함)을 경계했는데, 갑술년(1514, 중종 9)에 사람들의 언쟁이 심하자 간곡히 사임하기를 청하였다. 임금께서 마지못하여 허락하시고 부원군에 봉하셨다.
을해년(1515, 중종 10) 정월에 부르심을 받들어 입궐하였다가 병을 얻어 가마에 실려 돌아왔다. 임금께서는 어의를 보내어 병을 치료케 하였으나 위중해졌다. 그러나 나라에 대사(大事)가 있으면 근신(近臣)을 보내어 자문하셨고 은총을 두텁게 내리셨다. 병이 심해지자 새벽에 일어나 서둘지 않고 침착히 서거하였다.
공은 천성이 충성스럽고 식견과 도량이 넓고 커서 가슴 속이 막히지 않고 트여 있었다.신장은 보통사람을 넘지 않으나 바라보면 마치 산악(山岳)같이 중후하였으며, 평소에 해학을 섞어서 말씀하시니 화목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큰일을 당하면 낯빛이 씩씩하고 의기가 엄숙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문사(文辭)를 지을 때는 붓을 잡고 즉시 쓰며, 서사(書史)에 빠짐없이 능통하고 육도삼략(六韜三略)3)의 병서까지 모두 통하였기에, 세상에서 장수의 재질을 논할 적이면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여러 번 시관(試官)을 맡아 인재를 많이 얻었다. 어버이를 섬길 때는 안색을 살펴 봉양을 잘하였으며 귀하고 중한 위치에 이르렀어도 아침 저녁으로 부모의 안부 묻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은혜로써 친척을 위로하며 의리로써 자제를 가르치고 또 성격이 화려함을 즐기지 않아 벼슬에 있을 때는 심히 간결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하는 것에서부터 성종(成宗)의 지우(知遇)4)를 받았는데, 임금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사람을 얻음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송모(宋某)와 같은 사람을 얻을 것인가”라고 하셨다. 임금께서 일찍이 공이 월과(月課)로 지은 글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는 곧 송모의 충성심에서 나타난 것이다”라 하시고, 큰 집을 마련해 주도록 명하셨다. 공은 풍성한 눈썹과 높은 콧마루로 인해 조금 찌푸리는 듯한 인상이었는데, 임금께서 일찍이 보시고 눈짓을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송모는 무슨 불쾌한 일이 있어서 그렇게 콧대를 찌푸리는가”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공을 중하게 여기시어 농담을 하신 것이다. 만년에 집을 도성 동쪽에 짓고 수석(水石)의 취미를 즐기며 활기차게 생활하였다. 세상일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은 늙도록 변하지 않았다.
부인은 남원 양씨(南原梁氏)인데 종친부 전첨(典籤)인 원(瑗)의 딸이고 남원군(南原君) 성지(誠之)의 손녀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정숙하며 따스하고 자상하여 평생에 한 번도 교만하거나 게으른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나이 17세에 공에게 시집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공경하여 순종하고 말을 어기거나 거스린 적이 없었다. 복록(福祿)을 누리니 종족들이 모두 우러러 보았다. 자녀를 가르치는 데에는 예와 법도를 다하였으며 도정공(都正公)을 섬긴 지 거의 40년이 되어도 성실과 효성을 다하여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공이 일찍이 모든 아들들에게 “너의 어머니는 어진 사람이다. 내가 어진 벗과 같이 공경하였다”라고 말하였다. 공께서 돌아가신 뒤 15년이 되는 갑오년(1534, 중종 29) 12월 을미일에 세상을 뜨니 향년 74세였다. 공의 묘소에 합장을 하였는데 묘봉(墓封)은 같으나 묘실(墓室)은 다르다.
공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지한(之翰)은 부사요, 차남 지간(之幹)은 정략장군(定略將軍)이며, 3남 지정(之禎)은 사옹원 참봉이다. 장녀는 덕산 현감(德山縣監)인 이형간(李亨幹)에게, 차녀는 내자시 정(內資寺正)인 신거이(愼居易)에게 시집갔다. 3녀는 지금 의정부 좌의정인 홍언필(洪彦弼)의 부인이다. 부인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섬(暹)으로 지금 경기도 관찰사이며, 딸은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인 윤진(尹珍)에게 시집갔다. 지한은 먼저 영의정 남곤(南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인(寅)이라고 하였다. 두어 살이 되었을 때에 공이 어루만지며 말씀하시기를 “골격이 나와 같으니 잘 기르라”고 하였다. 자라서 정순옹주(貞順翁主)를 배필로 삼았고 여성위(礪城尉)에 봉해졌다. (지한은) 뒤에 형조 정랑인 김현조(金顯祖)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지간은 안동 권씨인 권윤온(權允溫)의 딸에게 장가들고, 지정은 익찬(翊贊) 윤영(尹穎)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다. 우(宇)와 선원 참봉(璿源參奉) 빈(賓), 녕(寧)이다. 덕산 현감 이형간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곤독(崑讀)은 세자익위사 시직이고, 딸은 유학 유(柳) (…결락…) 에게 시집갔다. (…결락…) 1녀를 낳았는데 (…결락…) 에게 시집갔다. 내외 증손은 약간 명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남쪽에 고을이 있는데 여량(礪良)이라고 했다.
위인이 대대로 나니 나라의 상서로운 일이다.
공이 좋은 시대에 부름을 받아 일찍이 사장(詞場)에서 이름을 떨쳤고,
우리 임금이 도와 큰 운(運)이 두 번이나 번성하였다.
손으로 전형(銓衡)을 잡고 몸은 조정에 올라
경계를 쓸고 닦아 넓게 포부를 들어냈으며,
시고 단 것을 솥에서 조절하고 혼잡한 것은 칼날로 잘 요리하였도다.
순임금과 우임금 같이 좋은 만남이었으니,
종정(鐘鼎)5)에 공훈을 새기고 산하(山河)에 맹세한 것을 은밀히 간직하였다.
부인은 아름답고 굳은 절개가 있었으며,
검소한 가운데 어진 덕이 있으셨다.
소라(蘇羅)의 뒤 언덕에 무덤이 있어 당(堂)과 같으며 묘석에 사적(事蹟)을 새기니,
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 24년 9월 일에 세우다.
박형(朴珩) 15세기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정숙공(貞肅公) 안신(安臣)의 후손으로 참판(參判) 이창(李昌)의 아들이고 기수(期壽)의 아버지이다. 생원이 되고 문과에 급제한 후 저작랑(著作郞)이 되었다. 단종복위사건에 성삼문의 동생인 성삼빙(成三聘)과 연루되어 고양(高揚)에 축출되었다가 후에 함열현 두동(현재 성당면 두동)으로 낙향하여 살았다.
박희성(朴喜成) 15세기
조선초기의 공신으로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익산군 출신으로 판서 대흥(대흥)의 아들이다. 세조 1년(1455)에 행 사정(行司正)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으며 순창군수를 지냈는데 후에 이조판서가 증직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년 (1455) 12월 27일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
행 사정(行司正) 박희성(朴喜成)…등은 3등에 녹(錄)한다.
윤말손(尹末孫) 15세기
본관은 함안이다. 여산면 출신이고 무과에 급제 하였으며 세조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이 커서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함안군에 봉해졌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3년(1467) 9월 20일
<도총사 이준 등이 개선하여 복명하니 공신호와 전토 노비를 내리다.>
윤말손(尹末孫)·김면(金沔)·맹석흠(孟碩欽)을 이등 공신(二等功臣)으로 삼고,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율원 부윤(栗元副尹) 이종(李徖)·한계미(韓繼美)·선형(宣炯)·민발(閔發)·오자경(吳子慶)·최유림(崔有臨)·우공(禹貢)·정종(鄭種)·정준(鄭俊)·이양생(李陽生)을 삼등 공신(三等功臣)으로 삼고, 호(號)를 적개공신(敵愾功臣)이라고 내려 주고......
■적개공신(敵愾功臣)
조선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 45명을 3등급으로 나누어 포상하였다.
1등은 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으로 구성군 준(龜城君浚)·조석문(曺錫文)·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박중선(朴仲善)·허종(許琮)·윤필상(尹弼商)·김교(金嶠)·남이(南怡)·이숙기(李叔琦) 등 10명이 이에 속하였다.
2등은 정충포의적개공신(精忠布義敵愾功臣)으로 김국광(金國光)·허유례(許惟禮)·이운로(李雲露)·이덕량(李德良)·배맹달(裵孟達)·이형손(李亨孫)·이종로(李從魯)·이서장(李恕長)·김순명(金順命)·김관(金瓘)·구겸(具謙)·박식(朴植)·김백겸(金伯謙)·어세공(魚世恭)·오유치(吳有治)·정숭로(鄭崇魯)·장말손(張末孫)·손소(孫昭)·오순손(吳順孫)·심응(沈膺)·윤말손(尹末孫)·김면(金沔)·맹석흠(孟碩欽) 등 23명이 이에 속하였다.
3등은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으로 영순군 보(永順君溥)·율원부윤 종(栗元副尹徖)·한계미(韓繼美)·선형(宣炯)·민발(閔發)·오자경(吳子慶)·최유림(崔有臨)·우공(禹貢)·정종(鄭種)·정준(鄭俊)·이양생(李陽生)·차운혁(車云革) 등 12명이 책록되었다.
황석(黃晳) 15세기
조선 초기에 절신(節臣)으로 호는 두촌(杜村)이며 본관이 우주(紆州)이다. 문숙공(文肅公) 거중(居中)의 증손이며 한림(翰林) 맹수(孟秀)의 아들이다. 세조때 성균관 생원으로 사육신의 난을 겪은 뒤 성당면 두동에 은거하였다.
권추(權錘) 15세기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며 권근의 후손으로 종(鍾)의 아버지이다. 익산군 팔봉면출신이다. 세조 때 등과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고 황해감사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년 (1455) 12월 27일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공신에 녹훈하다>
사용(司勇) 권추(權錘)…등은 3등에 녹(錄)한다.
송문림(宋文琳) 1409(태종 9)∼1476(성종 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부친은 송인산(宋仁山)이다. 음직으로 경덕궁직(敬德宮直)에 보임되었으며, 1451년(문종 1) 경상도행대감찰을 거쳐 벼슬이 누천되어 호조좌랑에 올랐다. 1457년(세조 3)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간원지사간‧집의를 거쳐, 지병조사‧병조참의가 되었다.
1463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어 민정을 순찰하였고, 이듬해 병조참판‧예조참판을 지냈다. 다시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467년 대사간이 되었다. 이어 대사헌을 역임하면서 국가의 기강확립에 힘썼고, 예종이 사망하자 청시사(請諡使)로 명나라에 내왕하며 외교활동을 하여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1470년(성종 1) 호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성종의 즉위에 공로가 있어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봉되고 여산군(礪山君)에 봉하여졌다. 1472년 이조참판에 올랐으며 작위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직무에 충실하였고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무예에 밝았다. 시호는 공무(恭武)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7년(1476) 9월 6일
<여성군 송문림의 졸기>
여성군(礪城君) 송문림(宋文琳)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전례와 같이 하였다. 송문림은 여산인(礪山人)으로, 처음에는 가문의 음덕(蔭德)으로 경덕궁(敬德宮) 궁지기[宮直]에 보직(補職)되었는데, 여러 번 옮겨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이르렀었다. 경태(景泰) 정축년에 문과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지사간(知司諫)·사헌집의(司憲執義)를 역임하고, 천순(天順) 신사년에 병조 지사(兵曹知事)에 제수되었다가 참의(參議)로 승직(陞職)되었다. 계미년(1463)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전라감사(全羅監司)로 승직되었고, 갑신년(1464)에는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옮겼다가 병술년에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외직으로 나아가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되었다. 그리고 정해년에는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되었다가 기축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옮겼다. 예종(睿宗)이 승하(昇遐)하자 시호를 청하는 일로 중국에 갔다가 주문(奏聞)을 청허(聽許)받고 돌아와서 논밭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경인년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제수되었고, 신묘년에는 순성 명량 경제 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여성군(礪城君)에 봉해졌으며,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계(陞階)되었다. 임진년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계되고, 봉군(封君)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66세였다. 시호(諡號)를 공무(恭武)라 하였는데, 일을 집행함에 견고(堅固)한 것을 ‘공(恭)’이라 하고, 굳고 세차고 사리에 곧은 것을 ‘무(武)’라고 한다. 사람됨이 강개(慷慨)하여 이르는 데마다 명성(名聲)과 공적(功績)이 있었다.
■좌리공신(佐理功臣)
조선시대 왕을 잘 보필하여 정치를 잘하였다는 공으로 내린 훈명(勳名). 1471년(성종 2) 성종은 1등에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등 9명, 2등에 월산대군(月山大君) ·정인지(鄭麟趾) 등 11명, 3등에 성봉조(成奉祖) 등 18명, 4등에 김수온(金守溫) 등 35명에게 좌리공신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좌리공신의 아버지에게도 추증(追贈)하여 순충보조(純忠補祚)라 칭하게 하였다.
최경지(崔敬止) ? ∼ 1479(성종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화보(和甫). 필선을 지낸 최유종(崔有悰)의 아들이다. 익산 황등면 용산리(黃登面 龍山里) 즉, 당시 함열현(咸悅縣) 용산 성내(龍山城內) 출신이다.
1460년(세조 6)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고, 1462년 경연에서의 뛰어난 강서(講書)로 가자(加資)되었다. 1464년 시(詩)‧문(文)‧사(史)에 능한 문신을 뽑을 때 시학문에 소속되고, 그해 병조좌랑 재직 중 사헌부로부터 “비목(批目)을 서리에게 위임시켜 무단히 출거(出去)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1466년(세조12)지평으로 복직하고, 그 해 실시한 발영시(拔英試)에서 2등으로 합격하였다. 1469년(예종 1) 예문관전한에 승진되고, 곧 부응교 겸 경연시강관에 개수(改授)되면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예종실록》 편수에 참여하였다. 1475년(성종 6) 봉상시 부정(奉常寺副正), 이듬해 문과중시에서 2등으로 급제하였고, 1477년《율려신서(律呂新書)》를 학습할 문신으로 선임되었다.
1479년 홍문관직제학으로서 연산군의 생모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폐위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곧 부제학으로 승진하였다가 주병(酒病)으로 죽었다. 그는 성품이 정직하고 기개가 높아 권간(權奸)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시를 잘하였다. 세조말∼성종초에 걸쳐 문한직(文翰職)에 있으면서 문운 융성에 공헌한 바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6년(1460) 9월 13일(병술)
<문과 최경지·무거 문맹손 등에게 급제를 내려 주다>
문과(文科)의 최경지(崔敬止) 등 20인과 무거(武擧)의 문맹손(文孟孫) 등 1천 8백 13인에게 급제(及第)를 내려 주었다. 그때 무거(武擧)에 시험을 치른 자가 많아서 3천여 인에 이르니, 명하여 8곳에 나누어서 시험 보게 하였는데 투화(投化)한 야인들도 시험 치르기를 청하니, 또한 이를 허락하였었다.
■발영시(拔英試)
1466년(세조 12) 현직 중신과 문무관료를 대상으로 실시했던 임시 과거. 1466년 5월 10일 단오절을 맞아 서현정(序賢亭)에 행차한 세조가 2품 이상의 종재(宗宰)와 부장(部將) 등을 불러 주연을 베풀고, 왕 스스로 ‘치세지능신 난세지간웅(治世之能臣亂世之奸雄)’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운(短韻) 9장(九章)을 지었다.
이어서 재추(宰樞) 11인, 3품 이하 유신(儒臣) 100인, 선전관(宣傳官) 등에게 종이와 붓을 주고, 그 내용에 알맞은 시· 부· 송(頌)· 책(策)을 지어 바치게 하여 합격자를 중시(重試)와 같이 대우할 것을 하명했다. 3일 후,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등에게 지어 올린 글을 고열(考閱)하게 하여 34인을 선발하였다.
이에 장원으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김수온(金守溫)이 뽑혀 예빈시(禮賓寺)로부터 쌀 20섬을 지급받았다. 나머지 합격자들도 과거급제자처럼 방(榜)을 내걸고 유가(遊街)하게 하였다. 이 때 강희맹(姜希孟)이 상중(喪中)이므로 발영시에 참가하지 못했음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이에 세조는 14일 다시 문신 100여인을 사정전(思政殿)에 불러 글을 짓게 하고, 정인지(鄭麟趾)· 정창손(鄭昌孫) 등을 독권관(讀卷官)으로 하여 강희맹 등 6인을 다시 뽑았다. 그리고 13일에는 뽑은 김수온 등 34인과 합해 40인을 최종합격자로 하였다.
그 내용은 1등 김수온·노사신(盧思愼)·강희맹 등 3인, 2등 성임(成任) 등 13인, 3등 이경동(李瓊仝) 등 24인이었다. 한편 16일에는 또 서현정에 나가 무신들을 친시(親試)했는데 응시자는 830인이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각각 사후이시(射後二矢)·기사오시(騎射五矢)로 시험을 보았다.
다음날 세자(世子)에게 계속 시험하게 하여 권지훈련참군(權知訓鍊參軍) 금휘(琴徽) 등 43인을 선발하였다. 19일에는 문방(文榜)에서 장원을 한 김수온을 일품(一品) 승진시키고, 나머지 합격자도 자품(資品)을 올려주었다
김쉬(金淬) 1463(세조 9) ~ 1535(중종 30)
조선초기의 충신. 자는 경숙(慶淑), 본관은 강릉(江陵), 익산 출신. 호는 신암(愼菴), 시호는 충순(忠順), 시조는 명주군왕(溟洲郡王) 주원(周元)의 22세손이다. 현조는 평장사(平章事) 인존(仁存)의 12세손, 부는 예조판서(禮曹判書) 득지(得智), 혁혁한 집안에서 태어나 대사성(大司成) 송정(松亭) 김양(金洋)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성종 때에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어 후릉참봉(厚陵參奉)과 종묘령(宗廟令)에 제수되었다. 1485년(성종 16)에 문과에 합격하고 대교(待敎)를 역임, 해평현감(海平縣監)을 지냈다.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이 야인(野人)을 토벌할 때 임금께 아뢰어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청도군수(淸道郡守)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상장(喪葬)의 예를 지극히 하였고 그 후로는 벼슬에서 물러나 산수를 즐기다가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 충순(忠順)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는데, 기(記)는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묘지(墓誌)는 손(孫)인 봉사(奉事) 충민(忠敏)이, 묘갈(墓碣)은 흠재(欽齋) 최병심(崔秉心)이 지었다. 많은 직계 후손들이 익산에 살고 있다.
오응정(吳應鼎) 1548(명종 3) ~ 1597(선조 30)
조선중기의 무신, 충신. 자는 문중(文仲), 호는 완월당(翫月堂), 본관은 해주, 무안현감 하몽(下蒙)의 제5자로 익산군 용안면(龍安面)출신이다. 부인은 전주이씨 참봉 이계수(李桂遂)의 딸이다. 1574년(선조 7) 별시무과에 급제한 후 비변랑(備邊郞),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형조정랑(刑曹 正郞)을 거쳐 1579년(선조 12년)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에 승진하였다. 1583년(선조 16년) 이이(李珥)가 탄핵을 당하자 반대상소를 올려 동인(東人)들의 미움을 사 흥덕현감(興德縣監)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임지(任地)에 나가지 않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8년 후 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로 다시 관계(官界)에 나가 1589년(선조 22년)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가 되고, 같은 해에 체찰사종사관(體察使從事官), 다시 해남현감(海南縣監), 벽단첨사(碧團僉使)를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양 대동강의 수탄장(守灘將)이 되어 왜적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때 선조께서 평양 파천(播遷)에서 의주(義州)로 옮기게 되자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호가(扈駕)했다. 일본과 강화가 성립된 후 강화부사(江華府使)로 부임했고 다시 북변(北邊)의 만포첨사(滿浦僉使)로 국경 수비를 맡았다. 1596년(선조29년) 경기방어사 겸 수원부사(京畿防禦使 兼 水原府使)로 있던 중 소인(小人)의 모함에 의하여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서울로 달려가 참전해서 바로 훈련중군(訓練中軍)이 되었고, 이어 순천부사 겸 총병부 문안사(順天府使 兼 總兵府問安使) 전라도 우방어사(全羅道右防禦使)에 임명되니 순천으로 내려가 전라병사(全羅兵使) 이복남과 함께 남원성에 들어갔다. 그때 왜적은 5만 6천명의 병력으로 남원성을 맹공격하여 왔으므로 4천의 우리 병력으로는 당해낼 수 없어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큰아들인 어모장군(禦侮將軍) 욱과 셋째아들 동량과 함께 3부자가 화약에 불을 질러 같이 폭사(暴死)하였다.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嘉善大夫 漢城府 左尹)에 증직되고 1759년(영조 35)에는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에 가자(加資)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또한 욱은 호조좌랑에 동량은 선무원종공신(宣務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각각 남원충렬사(南原忠烈祠)와 금산충렬사(錦山忠烈祠), 용안충렬사(龍安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응정과 그 장자 욱(稶), 차자 직(稷), 3자 동량(東亮), 직의 장남인 방언(邦彦)을 일반이 삼세 오충(三世五忠)이라 일컫는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18일
<순검사 한응인이 평양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순검사(巡檢使) 한응인(韓應寅)이 치계하였다.
“14일 신시(申時)에 왜적이 왕성탄(王城灘)· 능라도(綾羅島)로부터 건너오자 장수와 병졸들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왕성탄 조방장(助防將) 박석명(朴錫命), 수탄장(守灘將) 오응정(吳應鼎) 등이 패전하여 돌아오는데 마탄(馬灘)의 수탄장(守灘將) 김응서(金應瑞)가 퇴각하여 도망하자 박석명 등도 자산(慈山)으로 달아났습니다. 평양이 이미 포위당하였으니 앉아서 강 여울을 지키는 것은 다시 소용이 없습니다. 흩어진 장수들을 소집하기 위하여 직로(直路)로 출발하고자 합니다.”
■삼세오충렬사(三世五忠烈祠) 전라북도 기념물 제61호
삼세오충열사는 전북 익산시 용안면 중신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2년 8월 30일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삼세오충열사는 3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순절한 해주오씨(海州吳氏) 오충신(五忠臣)의 유적이 모여 있는 곳이다. 원래는 오응정(吳應鼎)과 그의 아들 욱(稶)과 직(稷), 그리고 직의 아들 방언(邦彦)을 배향하여 사충사(四忠祠)라 하였으나 근년에 오응정의 아들 동량(東亮)을 추향하여 오충열사(五忠烈祠)라 부르고 있다.
오응정의 차남 오직(1574∼1619)은 광해군 때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康弘立) 막하의 우영천총(右營千摠)으로 요동심하 전투에 출전하였으나 강홍립이 후금군에 항복하자 격분하여 부차(富車)에서 적과 싸우다 온 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 방언(1588∼1637)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적과 싸우다 인조대에 삼전도 굴욕을 당하자 남한강에 투신자살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조선 숙종 7년(1681)에 충열사를 세웠다.
관리 사무소를 지나면 광장입구에는 정문인 충신문이 있다. 충신문을 지나 올림픽기념 숲을 걷다보면 외삼문인 복절문에 이르고 복절문 좌측에는 기념관인 영국관이 있다. 내삼문인 장의문을 지나면 본사우인 삼세오충열사에 이른다. 여기에는 중앙에 오응정, 좌측에 동량과 욱, 우측에 직과 방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삼세오충열사의 현판은 여산 권갑석 선생이 쓰셨다.
삼세오충열사를 나와 우측으로 가면 신도비와 오응정의 묘가 있고 정려각이 있다. 최근에는 모충제를 건립하였다. 충신문의 우측으로 가면 오충신의 묘와 오응운, 오응태, 오하몽, 오석근, 오식 등 직계선조의 묘가 있고 오영우, 오사고, 오희, 오사만, 오영수 등을 모신 삼신단이 있다.
권덕요(權德饒) 1548(명종 3) ~ ?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요부(饒夫), 본관은 안동(安東), 익산 출신. 세경(世經)의 아들, 임(木任)의 손자. 1583(선조 16)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정자(正字)로 지냈다.
남궁활(南宮活) 선조 ~ 광해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이길, 본관은 함열(咸悅), 익산군 출신. 관찰사와 부제학을 지낸 찬(璨)의 증손. 1561(명종 16년) 소과(小科)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역임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5년(1572) 12월 4일
<파루 때에 각 과의 급제자를 뽑다>
파루(罷漏)에 전(殿)에 나아가 2백 50수의 글을 상고하여 채점을 끝내고 이중(二中)이 1인, 이하(二下)가 1인, 삼상(三上)이 2인, 삼중(三中)이 1인, 삼하(三下)가 8인, 점삼하(點三下)가 7인 등 도합 20인의 입등 단자(入等單子)를 써서 입계(入啓)하니, 상이 이 수대로 급제시키도록 명하였다. 사평(司評) 임영로(任榮老)가 장원(壯元)이고, 그 다음으로는 을과(乙科)가 4인으로, 김영남(金穎男)· 홍세영(洪世英)· 윤엄(尹儼)· 홍종록(洪宗綠)이고, 병과(丙科)가 15인으로 조원(趙瑗)· 윤안성(尹安性)· 윤민선(尹敏善)· 심희수(沈喜壽)· 박염(朴廉)· 이일원(李一元)· 홍적(洪迪)· 민여경(閔汝慶)· 정숙남(鄭叔男)· 이순인(李純仁)· 김서생(金瑞生)· 김수(金脩)· 남궁활(南宮活)· 박천거(朴天擧)· 이입(李砬)이다. 이번 20인은 모두가 서울의 화족(華族)이고 개성부와 호서(湖西)에서 각각 한 명씩이었다.
소영복(蘇永福) 1555(명종 10) ~ 1615(광해 7)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중수(重綏), 호는 사은(四隱). 익산 출신. 대사간 소세량(蘇世良)의 증손이며, 부제학(副提學) 봉(逢)의 손자이고 현감 소민선(蘇敏善)의 아들인데, 서윤(庶尹) 소응선(蘇膺善)에게 입양되었다. 김은휘(金殷輝)의 문인이다. 금마면 도천(道川)출신으로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된 뒤 성균관에 들어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혼(成渾)으로부터 출사할 것을 여러 차례 권유받았으나 스스로 학문이 미진함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 금마(金馬)의 도천(道川)에 서당을 세우고 일평생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의 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용화산(龍華山)에 설책(設栅), 향토방위에 참여한 일이 있었으며, 난후 국정 전반에 관한 시무책(時務策)을 조정에 올려 가납(嘉納)되기도 하였다. 김부휘(金敷輝)의 문하에서 사사(師事)하였고 학행이 높고 깨끗하여 경세재(經世才)가 있으므로 1601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수천 권의 서책 속에 묻혀 후진교육에 진력하였으니 장일(葬日)에 모인 옛 친구와 문생이 7백여 인이었다.
1605년 김장생(金長生)이 익산군수로 있을 때 매번 그의 방문을 받아 군정자문(郡政諮問)에 응하였으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경전(經典) ‧ 사서(史書) 등 귀중한 전적들을 나라에 기증하여 궁중의 비서각(祕書閣)에 비치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 무렵 향리 일대가 한해로 인하여 매년 흉년을 겪게 되자 40여리에 달하는 수로건설을 건의, 그것이 이루어짐에 따라 주위의 농민생활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 중봉(重峯) 조헌(趙憲) 등 당대의 석학(碩學)들과 도(道)와 의(義)로써 사귀었고 제공(諸公)이 선생을 깊이 외경하였다. 경학(經學) 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약, 경사, 병법 등에 정통하였고 예학(禮學)에도 밝았다. 문집으로 사은집(四隱集) 2책이 전하며 익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광해군 때 조카 소명국(蘇鳴國)이 대북‧소북간의 당쟁에 관여하여 결국 몰락하기에 이르자, 이에 연좌되어 대명(待命) 중에 질병을 얻어 죽었다.
▣고대일록 제3권 1598년(선조 31) 4월 8일
군내(郡內)로 들어갔다. 진사(進士) 소영복(蘇永復)을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부(志夫) 역시 군(郡) 안으로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왜적의 소식이 놀랍고 다급했기 때문이다.
■고대일록(孤臺日錄)
조선 중기의 학자· 의병장인 정경운(鄭慶雲:1556~?)이 쓴 일기체로 쓰여진 책. 필사본. 4권 4책.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 4월 23일~1609년(광해군 10)까지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정경운이 쓴 원본을 토대로 후손 정동규(鄭東圭)가 필사하였다.
이 책에는 이순신(李舜臣)· 김덕령(金德齡) 등의 활약상과 명(明)나라 군대의 횡포상황, 전란에 의해 피폐된 서울의 모습, 의병장과 승병의 활동 등 임진왜란과 관계된 다양한 기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는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으로, 김면(金沔)· 조종도(趙宗道) 등 경상우도 의병장들의 활동을 자세하게 기록했으며,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의병장들에 대한 기록도 정리해 놓았다. 특히 저자인 정경운은 정유재란을 피해 가족과 함께 1598년 4월에 익산에 와서 10월까지 거주하였으므로 이 책은 익산지역과 인사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이 책에는 선조대 후반에서 광해군대 초반까지의 정치상황과 사회제도에 관한 기록들이 있어 임진왜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책은 최근까지 그 내용이 학계에 소개되지 않다가, 1992년 남명학연구소(南溟學硏究所)에서 자료를 영인하고 해제를 붙여 소개하였다.
한백겸(韓百謙) 1552(명종 7) ~ 1615(광해 7)
조선중기의 문관, 자는 명길(明吉), 호는 구암(久庵), 본관은 청주(淸州), 익산군 금마면 신룡리(金馬面 新龍里)출신. 한성부판관(京城府判官) 효윤(孝胤)의 아들, 모친은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5년 교정청(校正廳)이 신설되자 정구(鄭逑) 등과 함께 교정낭청에 임명되어《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을 보았다. 1586년 천거로 중부참봉(中部參奉)이 되었으며, 이어 경기전 참봉 ‧ 선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재직 중 병으로 사퇴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 모반에 실패하여 자살한 정여립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스레 염(殮)한 사실이 뒤에 발각되고, 또한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귀양 갔다가 임진왜란 때 대 사면령으로 석방되었다.
석방될 때 적소에서 적군에게 아부하여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로로 관직에 재임용,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기용되었고, 1595년 호조좌랑, 1601년 형조좌랑 ‧ 청주목사, 1607년 판결사 ‧ 호조참의에 서용되었다.
이듬해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당상(殯殿都監堂上)이 되어 상례(喪禮)를 주관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강원도안무사(江原道安撫使), 1611년 파주목사에 기용되었다가 사임하고 양주의 물이촌(勿移村)에 퇴거하여 있다가 역학(易學)에 해박하다 하여 선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였던《주역전의(周易傳義)》의 교정을 보았다.
실학의 선구자로서 실증적이며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역사‧지리를 연구하고, 종래 역사가들의 학설을 비판, 수정하여 이 방면에 새로운 관심을 고양하였으며, 그 결과로 《동국지리지》의 저술과《기전고(箕田考)》가운데 실려 있는〈기자도(箕子圖)〉‧〈기전설(箕田說)〉 등의 저술을 남겼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원주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었다. 그는 소자파(蘇自坡; 소세량, 소세걸, 소세공, 소세양, 소세득의 아버지)의 외증손 사위였다. 저서『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는 중국의 사서(史書)들로부터 우리나라 지리(地理)에 관한 사항을 뽑고 필자의 사견(私見)을 붙인 역사지리서(歷史地理書)다. 그의 문집으로 『구암집(久庵集)』인쇄본 2권 1책이 있는 바 내용은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 심의설(深衣說),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동사찬요 후발(東史簒要 後跋), 조석변(潮汐辨), 접목설(接木說), 물이촌(勿移村), 구암기(久庵記), 제(題), 서(序), 기(記), 소(疏), 행장(行狀) 등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1595년 6월 11일)
<사간원이 관리 임용이 공정해야 함을 아뢰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재능이 수령이 될 만한 자를 천거하여 국가가 파격적으로 등용하는 것은 적임자를 선발하고자 해서입니다. 지난번에 비변사가 천거한 바는 혼잡스런 폐단이 없지 않아 물정이 매우 온당치 않게 여기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헤아려서 가려 뽑게 하여 미진한 뜻이 없게 하소서.【당시 재주가 수령이 될 만하다고 하여 선발된 자는 한백겸(韓百謙)· 윤영현(尹英賢)· 나덕준(羅德峻)· 오장(吳長)· 이개립(李介立)· 권반(權昐)· 이칭(李偁)· 장현광(張顯光)· 서사원(徐思遠)· 강복성(康復誠)· 금응훈(琴應壎)· 이집(李㙫)· 최운우(崔雲遇)· 이홍우(李弘宇)· 송양(宋亮)· 방처인(方處仁)· 노사회(盧士誨)· 채애선(蔡愛先)· 이대수(李大遂)· 김응성(金應聖)· 이질수(李質粹)· 권득중(權得中)· 오윤겸(吳允謙)· 이진(李軫)· 이보(李輔)· 윤진(尹瑱)· 정입(鄭立)· 김두남(金斗南)· 정숙하(鄭淑夏)· 심주(沈澍) 등 30인인데 남방 사람이 대부분이고, 간혹 학생으로 발탁된 자도 있었다. 모두 유성룡이 전적으로 추천한 것인데 혼잡스럽다는 비평이 있어 물의가 비등하였다.】”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
1615년(광해군 7) 한백겸(韓百謙)이 편찬한 역사지리서이다. 1책. 목판본. 1640년 경상감영에서 간인되었다. 내용은 중국사서의 열전에 나오는 우리나라 부족국가에 대한 기록을 인용한 부분과 삼국 및 고려의 3부분으로 나누어 우리나라의 역대 강역을 서술하였다. 부족국가에 대한 기록은 주로 중국의 사서들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단군조선에 대한 서술이 없으며, 위치· 강역· 종족· 역사 등을 다루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서술된 삼국 및 고려에 대하여는 수도·영토·형세·관방 등을 기록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영토를 연계시켜 연구한 최초의 역사지리서로서 조선의 문화와 국토에 대한 관심이 대두함을 반영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실학적 지리학의 하나의 맥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홍명계(洪命啓) 1555(명종 10) ~ 1626(인조 26)
조선후기의 무신. 자는 경숙(敬淑), 본관은 남양(南陽). 익산군 왕궁면(王宮面) 출신. 석벽(石壁) 춘경(春卿)의 후손, 어모장군(禦侮將軍) 응해(應海)의 아버지. 선조 대에 무과에 등과하여 관직이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묘소가 왕궁면 궁평(宮坪)에 있다.
송영구(宋英耈)1556(명종 11) ~ 1620(광해 12)
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인수(仁搜), 호는 표옹(瓢翁) 또는 일호(一瓢), 백련거사(白蓮居士), 본관은 진천(鎭川). 익산군 왕궁면 광암리 장암(王宮面 光岩里 長岩, 당시 전주부全州府 우북면紆北面) 출신. 증좌승지(贈左承旨) 억수(億壽)의 손자.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영(翎)의 아들, 성혼(成渾)의 문인. 1584년(선조 17) 29세로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병과(丙科) 1위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승정원 주서(承政院 注書)에 임명되었다. 무반의 계통인 사과(司果)의 직을 받고, 연이어 부친, 모친, 조모의 상을 치르는 5년 동안은 관직을 떠나 있었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발탁되었고, 이어서 1593년(선조26) 예조좌랑이 되어 군사 1,000여명을 모집하여 임금이 피하여 있던 행재소로 향하던 도중 시강원 사서(侍講院 司書)의 벼슬을 받았다. 또한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충청도 순찰사(忠淸道巡察使) 김신원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후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어 서장관(書壯官)이 되어 북경에 다녀온 후 고향에 돌아와 살았다.
1599년(선조 32)에 충청도사(忠淸都事)로 임명되어 피폐한 도정(道政)을 바로 잡았고 지평이 되고 문학을 겸하였으며, 이조정랑 ‧ 사인 ‧ 사간을 지내고 청풍군수 ‧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을 역임하였다. 1607년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곧 권신 정인홍(鄭仁弘)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사간(司諫)에 등용되었고, 필선(弼善)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냈으며, 1613년(광해 5)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이 일본과 수호한 사실이 없음을 밝힌 공으로 지중추부사가 되고, 1616년(광해 8) 병조참판이 되었으나 1618년(광해 10) 폐모론에 반대하며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고 또 낙서 등으로 비방한 것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절대로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차례 파직, 좌천, 휴직되었으나 그것이 관직자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풍채가 단아하고 언행이 바르며 성격이 강직하였으나 남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해주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가 성절사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을 때 등과(登科)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던 주지번(朱之蕃)을 알게 되었는데, 송영구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은 주씨(朱氏)는 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주지번은 1606년(선조39) 사신으로서 조선에 왔었다. 그는 송영구를 늘 스승으로 섬기고 잊지 못하여 조선 내왕 사신을 자원했다고 한다. 그가 송영구에게 망모당액자(望慕堂額字)를 써 주고 갔는데 지금도 그 액자가 남아 있다. 문집으로 『표옹유고(瓢翁遺稿)』인쇄본 3권 1책이 있다. 시(詩)․잡저(雜著)․부록(附錄) 등이 실려 있다. 인조반정 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전주 서산사(西山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1593년 3월 8일)
<이곽· 길회· 송영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곽(李)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길회(吉誨)를 헌납으로, 송영구(宋英耉)를 정언으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1601년 6월 11일)
<비망기로 송영구가 임금 앞에서 대신을 칭찬한 일에 대해 질책하여 전교하다>
비망기로 정원에 전교하였다.
“《대명률(大明律)》에 대신(大臣)을 칭예(稱譽)하는 자는 간신이라 하여 중률(重律)에 처하였으니 고황제(高皇帝)의 법이 지극히 엄하였다. 이제 송영구(宋英耉)란 자가 감히 임금 앞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대신을 칭찬하는가 하면 임금을 지휘하여 전권(專權)을 맡기고자 많은 말을 하였다. 내가 비록 못났으나 어찌 송영구의 지시를 받겠는가. 그의 심술을 헤아리기 어렵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18권 병오기행(丙午紀行)
■1606년 4월 10일
먼저 서울에 와서 복명하였다. 주상께서 교외까지 나와 일행을 마중하였다. 이사(二使)는
서울에 10일 간 머물렀다.
■ 1606년 5월 23일
나는 먼저 중화(中和)를 돌아가고 우리 세 사람은 숙야와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송인수(宋仁叟 송영구(宋英耈)의 자)와 함께 뱃놀이를 매우 즐겁게 하였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허균의 시문집이며 이 책에 실려 있는 병오기행(丙午紀行)의 이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익산의 향토사에 관련한 각종문헌에는 주지번이 익산의 송영구집에 찾아와 직접 망모당 편액글씨를 써주고 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과 성소부부고 등의 기록을 통하여 그것은 사실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기록을 보면 주지번이 사신으로 와서 4월 10일에 서울에 도착하고 20일에 서울을 떠나가니 불과 서울에 10일간 머무르고 돌아가는데 5월 2일에는 압록강을 건넌다. 그 후인 5월 23일에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耈)는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근무하면서 접반사 종사관인 허균과 만나 뱃놀이를 즐겼다는 내용이다. 당시 주지번이 부친을 여의고 익산에 은거해 있던 송영구를 찾아와서 망모당(望慕堂) 현판을 써 주었다고 하는 기록은 사실이 아닌 것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표옹 송영구는 이 때(1606년 5월) 익산의 왕궁에 거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대동도찰방으로 근무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흠의 상촌집을 통하여 조사된 바로는 1604년경, 송인수는 청풍 군수(淸風郡守)로 있다가 해직되어 돌아온 뒤에 이때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판서인 윤국형이 기록한 갑진만록(甲辰漫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을사년(1605, 선조 38) 겨울에 황제의 원손(元孫)이 탄생하자 천하에 널리 알렸다. 주지번(朱之蕃)이 정사(正使)가 되고, 양유년(梁有年)이 부사(副使)가 되어 병오년 4월에 비로소 우리나라에 이르렀다. 주지번은 술을 좋아하고 시를 즐겼으며, 또 현판 글씨도 잘 썼는데, 우리 나라의 재상들과 연회할 적에 친구처럼 지내고, 심지어는 붙잡고 장난까지 하였다. 현판 글씨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막론하고 곧장 붓을 휘둘러 써주니, 그의 필적이 거의 중외 인가의 창이나 벽에 퍼지게 되었고, 비갈(碑碣)을 청하는 사람이 있어도 응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하여 분명 송영구가 사행중인 주지번을 만나 망모당(望慕堂) 현판을 받았을 것이며 전주 객사의 풍패지관(豊沛之館)의 글씨도 서울에서 받은 글씨임이 틀림없다. 만일 주지번이 송영구를 그리도 끔찍하게 사모하고 있었다면 조선왕조실록이나 허균의 기록에 왜 주지번과 송영구의 인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인가? 익산지방의 각종 향토사에 기록된 내용의 오류(誤謬)와 과장(誇張)을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다.
■주지번(朱之蕃)
송영구는 1593년 5월 성절사((聖節使;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파견된 사신) 홍이상(1549~1615)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의 서울인 북경에 갔었다. 북경에 도착한 사신 일행은 숙소인 영빈관에 여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때 조선 사신들이 머물던 숙소의 부엌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청년이 하나 있었다. 청년은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중얼 거리고 있었다. 표옹이 가만히 들어보니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이었다. 표옹은 숙소의 심부름꾼이 남화경을 외우는 것이 하도 신통해서 청년을 불러 물어보았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천한 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경을 모두 암송할 수 있느냐?”
“저는 남월(南越)지방 출신입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몇 년 전에 북경에 올라왔는데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가져온 노잣돈이 다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과거시험 답안지를 어떻게 작성했었는지 종이에 써 보아라.”
표옹은 청년이 문장에 대한 이치는 깨쳤으나 전체적인 격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 작성요령을 알려줬다. 또한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여러 권을 필사해주고 상당한 액수의 돈을 청년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후 청년은 과거에 합격하였다. 청년의 이름은 주지번(朱之蕃)이었다.
이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606년, 명나라는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주지번을 정사로 사신을 조선에 파견했다.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전주객사의 웅장한 현판 풍패지관(豊沛之館)은 주지번이 쓴 것이다.‘풍패’는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이 태어난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전주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써 준 것이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그림과 글씨로 이름이 높았던 명나라의 주지번(朱之蕃)이 어느 해 조선에 사신으로 오는 길에 평양을 지나면서 연광정에 올랐는데, 그 풍광에 놀라 무릎을 치며 ‘천하제일강산’ 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는 제 손으로 현판을 써서 걸어놓았다. 그 뒤 병자호란 때 조선에 쳐들어와 인조(仁祖)에게 항복을 받고 돌아가던 청태종(靑太宗)이 여기에 들렀다가 중국에도 명승이 많은데 어찌 여기가 천하제일일 수 있느냐고 그 현판을 부숴버리게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풍광도 아름답거니와 글씨 또한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지라 청태종은 ‘천하’ 두 글자만 톱질해 없애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 '제일강산‘이라고 붙어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누가 다시 ’천하‘ 두 글자를 새겨 넣어 지금은 이렇게 ’천하제일강산‘ 이 걸려 있다.
중국 사신으로서 시(使行詩· 사행시)를 가장 많이 쓴 사람은 주지번(朱之蕃)이다. 그는 표옹이 돌아가신 선친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에 걸 망모당(望慕堂)이라는 글씨를 써주었다. 장암마을에는 표옹이 짓고 주지번이 현판을 쓴 망모당이 세월을 견디면서 아직도 남아있다.
주지번은 1606년(조선 선조 39년) 조선에 와서 방문 중 모두 259수의 시를 남겼다. 명 사신이 시를 지으면 조선의 접반사도 시를 지어야 했다. 우리 측의 원접사인 의정부 좌찬성 유근은 300수 가까운 창화시를 이때 지었다. 명의 사신 주지번은 유근의 종사관(從士官)이던 허균에게 조선에서 간행된 옛 시 책(古詩本· 고시본)을 구해달라고 해 받기도 했다. 주지번은 액자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붓을 휘둘렀다. 성균관 내 명륜당의 편액도 그의 글씨다. 조선이 임란 뒤 타버린 명륜당을 새로 지은 뒤에 편액을 쓸 사람을 찾다가 때마침 찾아온 명의 사신에게 글씨를 부탁했다. 그는 신라 이래 지금까지 한국의 시가(詩歌) 중에서 좋은 것으로 책을 한 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사행기록인 '봉사조선고(奉使朝鮮稿)'를 남겼다.
■망모당(望慕堂)
망모당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건물로 1979년 12월 27일에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었다. 망모당은 조선 선조 때 학자 송영구(宋英耉)의 집인 ‘은거당’뒤뜰에 있던 별장이다. 선조 38년(1605년)에 송영구가 아버지 상을 당한 뒤, 동쪽 멀리 우산에 있는 조상의 무덤을 바라보며 부친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망모당’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인근에 연못이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하얀 연꽃인 백련을 처음 들여온 송영구가 고향 마을에 연못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주변의 풍치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이 집 부근에는 백여 명이 앉아서 놀 수 있는 넓은 바위가 있는데 장암이라고 부른다. 바위 밑으로 맑고 깨끗한 왕궁천이 흘러, 요즘도 주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당은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의 문인(文人)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 선생이 선조 38년(1605년) 선친을 여의고 선조40년(1607년)에 지은 것으로, 이곳에서 우산(山)에 있는 선영(先瑩)을 망모(望慕)하였다고 한다. 망모당(望慕堂)이란 편액(扁額)은 중국사신 주지번(朱之蕃)의 친필을 현각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전면의 주초는 주형초석(柱形礎石)으로 누집 형식을 이루고 있다. 정방형의 건물로, 전면의 4개의 주초석은 높이가 1m 정도이고 후면 주초는 얕게 지반을 계단식으로 다져서 건물을 세웠다. 기둥 위에 첨차를 놓아 굴도리 밑의 장혀를 받친 것이나, 난간두겹대의 받침기둥을 계자각 비슷하게 다듬은 것 등은 특색 있는 점이라 하겠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허균(許筠, 1569~1618)의 저서. 허균의 생각을 담고 있는 여러 편의 글이 있다. 학문의 목적과 진위를 논한 학론(學論)을 비롯해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나라의 방비를 강화해야 함을 논한 병론(兵論)이 있으며, 허균의 입장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하는 ‘유재론(遺才論’과 ‘호민론(豪民論)’도 포함되어 있다.
이보(李寶) ? ~ 1592(선조 25)
조선전기의 의병장. 자는 백거(伯居), 호는 묵재(黙齋), 본관은 연안. 영의정 정화(廷華)의 아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귀(貴)의 형. 익산군 팔봉면 은기리(八峰面 隱基里)출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행진과 같이 향리에서 의병 4백여 명을 모집하고 가산을 기울여 군량과 병기를 마련하여 왜적이 주둔하고 있는 고경명 부대가 있는 금산(錦山)으로 달려가 적과 싸우고 진산 이현(珍山梨峴)에서 적을 만나 교전하다가 세진(勢盡)하여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큰 아들 계(繼)가 발상(發喪) 3일후에 진산(珍山)으로 달려가 전사하니, 둘째 아들인 동(同)이 형의 전사소식을 듣고 적진으로 달려가 또 전사하여 3부자가 모두 순국하였다. 이때 둘째 동(同)의 부인인 민(閔)씨도 강화의 친가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절사(節死)하였다. 이처럼 온 가족이 절사함에 따라 자손이 끊어져 그 공적이 잊혀져 오다가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증직되고, 1754년(영조 30)에는 정려(旌閭)가 내렸다. 익산시 팔봉면 은기리 은천(隱泉)마을에 있는 은천사(隱泉祠)에 제향되었다.
탁율(卓율)? ~ 1598(선조 31)
조선중기의 의병. 본관은 광산(光山), 익산군 북일면(北一面) 출신, 증호조좌랑(贈戶曹佐郞) 상(祥)의 아들, 정유재란에 의병으로 활약하던 아버지가 전사하자 아버지의 시체를 거둔 뒤 다시 출전하여 싸우다가 전사했다.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내렸다.
황박(黃璞) ? ~ 1592(선조 25)
조선중기의 무신. 본관은 우주(紆州). 익산군 출신. 비변랑(備邊郞) 섭(燮)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를 지내고 여묘(廬墓) 중 임진왜란을 당하자 의병 200여명을 모집하여 진안(鎭安) 웅치(熊峙)에 나아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복남(李福南), 김제군수 정담(鄭湛)과 합세하여 싸웠고, 이현(梨峴)에 나아가 싸우다가 포위되어 전사했다. 병마절도사에 증직되고 정려(旌閭)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6월 1일)
<왜적이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현을 침범하다>
왜적이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현(郡縣)을 침범하였다. 처음에 호남의 군사가 패하여 본도로 돌아오니 여러 고을의 인심이 흉흉하여 보전할 수 없었는데, 오직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만이 고을의 군사를 단속하고 이웃 고을에 격문을 전하여 수어(守禦)할 계획을 하였으므로, 이광(李洸)이 즉시 첩보하여 권율을 도절제사로 삼아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 나아가 수비하게 하였다. 이에 방어사 곽영(郭嶸),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전주(全州) 의병장 황박(黃璞),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을 웅현(熊峴)과 이현(梨峴) 등 요해처에 나누어 배치하여 적의 침입을 방비하게 하였다. 이 때 왜병이 성주(星州) 무계현(茂溪縣)으로부터 금산(金山)·지례(知禮) 지경을 경유하여 무주(茂州) 용담현(龍潭縣)으로 들어와 금산(錦山)에 진을 치고 있다가 충청도 옥천(沃川)·영동(永同)의 여러 고을로 들어가 청주(淸州)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사방으로 나가 방화하며 노략하였다. 그러나 충청 감사 윤국형(尹國馨)과 병사 이옥(李沃)이 금강(錦江)에 군사를 모아 방위만 하면서 감히 진격하지 못하자 조헌(趙憲)이 국형에게 편지를 보내어 머뭇거리면서 적을 치지 않는 것을 책망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7월 1일)
<전라 절제사 권율이 왜적을 웅치에서 물리치다>
전라 절제사 권율(權慄)이 군사를 보내어 왜적을 웅치(熊峙)에서 물리쳤는데 김제 군수 정담(鄭湛)이 전사하였다. 왜병이 또 이치(梨峙)를 침범하니 동복 현감 황진(黃進)이 패배시켰다.
이때 적이 금산(錦山)에서 웅치를 넘어 전주(全州) 지경으로 침입하려고 했는데,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이 황박(黃璞)·정담 등과 요해지에 웅거하여 적을 맞아 공격하였으므로 감사 이광(李洸)이 군사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왜적의 선봉(先鋒) 수천 명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돌진해 왔는데, 복남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활로 쏘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적이 패하여 물러갔다.
이귀(李貴) 1557(명종 12) ~ 1633(인조 11)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黙齋), 본관은 연안(延安). 세조조의 문신 이석형(李石亨)의 5대손으로 영의정 정화의 아들, 이보의 아우이며 모친은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그 선대와 그 형 이보가 익산군 팔봉면 은기리 은천(八峰面 隱基里 隱泉)에 살아 이귀도 일시 익산에 머물렀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이이 ․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1582년(선조 15) 생원이 되고, 이듬해 일부 문신들이 이이와 성혼을 공박, 모함하여 두 유현(儒賢)의 처지가 위태롭게 되자 여러 선비들과 함께 글을 올려 논변하여 스승을 구원하였다.
1592년에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가(御駕)가 서행(西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하고 물러나와 의병을 모집하여 황정욱(黃廷彧)의 진중으로 갔다가 다시 어가가 주재하는 평양으로 가서 청죄(請罪)하고 방어대책을 아뢰었다.
이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 이천으로 가서 세자를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이듬해에는 숙천행재소로 가서 왕에게 회복대책을 진언하자, 왕이 후하게 상사(賞賜)하고 다시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명나라 군중에 군량을 수송하게 하였다.
그는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각 읍으로 순회하며 군졸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해서 서울 수복전을 크게 도왔다.
이듬해 장성현감 ․ 군기시 판관(軍器寺 判官) ․ 김제군수를 역임하고, 1603년 (선조 36)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형조 좌랑(刑曹佐郞) ․ 안산군수 ․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 ․ 백천군수 등을 역임했다. 1609년(광해군 1) 함흥판관을 거쳐 1616년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있을 때 무고를 입고 수감된 해주목사(海州牧使) 최기를 만나본 죄로 이천(伊川)에 귀양갔다. 1619년에 풀려나와 1622년에 평산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및 두 아들 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 등과 함께 반정의거를 준비하였다.
이듬해 3월에 광해군을 폐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을 왕으로 추대,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김류 ‧ 이서(李曙) ‧ 심기원(沈器遠) ‧ 김자점 ‧ 신경진 ‧ 최명길 ‧ 이흥립(李興立) ‧ 심명세(沈命世) ‧ 구굉(具宏) 등과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그 뒤 호위대장(扈衛大將) ․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 우참찬(右參贊) ․ 대사헌(大司憲) ․ 좌찬성(左贊成)이 되었으며,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지고, 공서(功西)의 영수가 되었다. 그동안 남한산성의 수축, 호패법의 실시, 무사의 양성, 국방을 충실히 할 것 등을 건의하여 국력강화에 힘썼다. 1626년(인조 4) 병조판서 ․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 해 김장생과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 : 元宗妃)의 상(喪)을 만 2년으로 주장했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했다. 이듬해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도에 호종하여 최명길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다가 다시 탄핵을 받았다. 당쟁이 치열하고 명‧청 관계의 외교가 복잡한 시기에 일신의 안위를 잊고 나라를 위하여 공헌한 바가 컸다. 허균이 조관기행(漕官紀行)에 기록하기를 이귀가 부안명기 매창(1573~1610)의 정인(情人)이라고 하였다. 저서로는 《묵재일기》 3권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고대일록 제3권 1601년(선조 34) 10월 17일
선생께 사람을 보내어서 이귀(李貴)에게 욕을 본 것을 위로하였다. 이귀는 곧 이이(李珥)의 조카이자 성혼(成渾)의 제자이다. 이 때문에 득의양양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5년 (1623년 3월 13일)
<경운궁에 나아가 대왕대비께 문안드리고 어보를 올리다 >
상이 경운궁에 나아가 대왕대비께 문안드리고 어보를 올렸다.【이귀 등이 경운궁에 처음 갔을 때 대비는 무슨 사단인지 알지 못하고 왕이 병사를 보내어 변란을 일으키는 것인가 의심하여 문을 잠그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이귀 등이 군사로 하여금 담장을 넘어 문을 열게 하고 들어가서 바깥뜰에서 울었는데, 대비가 내시를 시켜 묻게 하자, 이귀 등이 반정을 일으킨 사유를 모두 아뢰었다. 그리고 대비에게 창덕궁으로 행차하기를 청했는데 대비가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장사들을 거느리고 경운궁으로 갈 때 도성 백성들이 양쪽 길가에서 환호하며 이마에 손을 얹고서 축수하였고 서로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장사들을 위로하였다. 상이 경운궁에 도착하여 백관·제장들과 함께 합문(閤門) 밖에서 절하며 울고 이어 어보를 올렸다. 상이 심기원·김자점 등으로 하여금 왕을 받들어 작은 가마에 태우고 뒤를 따르게 하였는데, 도성의 남녀들이 왕이 가는 것을 보고 모두 담장과 지붕에 올라가 바라보았고, 어떤 사람은 욕하기를 “돈 애비야, 돈 애비야, 거두어들인 금은(金銀)은 어느 곳에 두고 이 길을 가는가.” 하니 왕이 머리를 숙이고 눈물만 흘렸다. 궁에 이르러 내약방에 머물게 하였다. 군인이 이질이 숨어 있는 곳을 또 아뢰자, 장수를 보내어 데려오게 하였고, 왕비·세자빈 및 여러 궁인들을 모두 병조에 집합시키고 군사들이 주위에서 지키게 하였다.】
김정익(金廷益 1561(명종 16) ~ ?
조선중기 사관(仕官). 자는 사겸(士謙), 본관은 경주(慶州), 익산군 금마면(金馬面) 출신. 김세량(金世良)의 손자, 김득지(金得地)의 아들, 소세양(蘇世良)의 조카인 소적(蘇適)의 외손. 1590년 생원시에 합격한 후 1613년(광해군 5)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갑과 3위로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다.
▣응천일록 1(凝川日錄一) 1615년(광해군 7) 8월 15일
간밤에, 소명국(蘇鳴國)이 밀고한 신경희(申景禧)ㆍ김이강(金以綱)ㆍ소문진(蘇文振)ㆍ김정익(金廷益)ㆍ양시우(楊時遇)를 잡아 가두었음을 아뢰었다. 가도사 3명이 전교를 듣고 나갔다.
승정원의 아룀에 전교하기를,
“대간은 빨리 처치하게 하고, 양사의 장관은 명초(命招)하여 국문에 참여케 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장령 윤길을 체차하라.”
하였는데, 대개 들리기에는, 명국이 경희의 역적 모의를 고하되, 정원군(定遠君)의 셋째 아들에게 뜻을 두고 윤길에게 그 운명을 점치게 하였다고 한다.
정승 기자헌(奇自獻)이 아뢴 것은 대개, ‘명국은 곧 신을 비방하여 동요하는 자이니, 명국의 상소에 회계할 때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더니, 비답하기를,
“역적을 토죄하는 대의는 지극히 엄한 것이니, 경은 안심하여 사양하지 말고 빨리 회계에 함께 참여하도록 하오.”
하였다.
▣고대일록 제3권 1598년(선조 31) 6월 13일
양식이 떨어져 군내(郡內)로 갔다. 주부(主簿) 소윤원(蘇潤源)과 진사(進士) 김정익(金廷益)을 찾아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보리를 얻어 왔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2년 (1599년 7월 23일)
<과거 시험에서의 실수로 장령 강연이 파직을 청하나, 윤허하지 않다 >
장령 강연(姜綖)이 아뢰기를,
“일소(一所)의 거자인 생원(生員) 김정익(金廷益)은 논(論)의 삼하(三下)로 입격하고, 유학(幼學) 김정익(金廷益)은 책(策)의 차하(次下)로 입격하였는데, 2일 동안의 시권을 조사하여 출방(出榜)할 때 유학 김정익의 책 차하를 생원 김정익의 이름 밑에 아울러 잘못 기록함으로써 유학 김정익이 참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감시관이 되어 제대로 자세히 살피지 못함으로써 이와 같은 실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혼매하여 불찰한 죄가 크니, 신의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연려실기술 제21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신경희(申景禧)의 옥사와 능창군(綾昌君) 을묘년(1615)
○ 익산(益山)의 진사 소명국이 문자를 조금 알고 음흉하기가 비할 데가 없었다. 시속의 무리와 은밀히 결탁하여 그들의 좋아하고 미워함에 따라서 소를 올려 그 위세를 북돋우니 사람들이 그를 귀신이나 물여우처럼 두려워하였다. 이때 이첨이 허균ㆍ신경희와 함께 일을 하였는데, 겉으로는 합치하는 듯하고 속으로는 꺼려서 경희를 먼저 제거하려는 뜻이 있었다. 명국이 이것을 알고 소를 올리기를, “전 부사 신경희가 말하기를, ‘새문동(塞門洞) 궁에 왕기가 있는데 신성부인(信城夫人) 신립(申砬)의 딸임.《사옹만록(思翁謾錄)》에는‘부인은 바로 경희(景禧)의 사촌 누이이다.’ 하였다. 은 남자와 같은 기상이 있는 여자이며, 능창군은 배우지 않고도 글을 잘하고 또 그 친족에는 무술에 익숙한 이름난 무인 2, 3명이 있다. ……’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새문동 궁은 바로 원종(元宗 인조의 아버지)의 잠저(潛邸)이며, 경희는 바로 원종의 왕비 구(具)씨 외사촌인 까닭이었다. 능창군은 원종의 셋째 아들이니, 역적의 모략은 다만 경희 한 사람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원종의 한 집안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능창군과 경희가 옥에 갇히고 진술이 정경세(鄭經世)ㆍ이명(李溟)과 경희의 무리인 장령 윤길ㆍ정언 양시진(楊時晉)에게도 관련되어 모두 잡혔으나 마침내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하담록》ㆍ《사옹만록》
○ 8월 14일에 소명국이 신경희ㆍ김이강(金以剛)ㆍ소문진(蘇文振)ㆍ김정익(金廷益)ㆍ양시우(楊時遇) 등을 은밀히 고발하며 말하기를, “경희가 반역을 도모한 것은 그 뜻이 능창군을 추대하는 데에 있으므로 윤길을 시켜 그 운명을 점쳐 보았습니다.” 하였다.
○ 의성군(義城君) 적(樀) 경흥ㆍ윤공 통천(通川)ㆍ윤숙 영흥(永興)ㆍ김립신(金立信) 중화ㆍ정홍의(鄭弘義)ㆍ김우립(金右立) 삼수ㆍ김정익(金廷益) 평창(平昌)ㆍ소문진(蘇文振) 풍천(豐川)ㆍ양시우(楊時遇) 삼수ㆍ오충갑(吳忠甲) 위원(渭原)ㆍ변충원(卞忠元) 영광ㆍ최광돈(崔光潡) 해남ㆍ문이훈(文二訓) 갑산ㆍ이극해(李克楷) 희천(熙川)ㆍ김이강(金以剛) 벽동(碧潼) 을 귀양보냈다.
▣승정원일기 인조 5년 (1627년 12월 6일)
< 정사가 있었다 >
장령에 김남중(金南重)을,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김상(金尙)을, 이천 부사(伊川府使)에 변충범(邊忠範)을, 강진 현감(康津縣監)에 윤계(尹棨)를, 마전 군수(麻田郡守)에 김정익(金廷益)을,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김확(金矱)을, 형조 정랑에 홍호(洪鎬)를, 형조 좌랑에 윤복원(尹復元)을,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윤민일(尹民逸)을 차하하였다. 구성 부사(龜城府使) 정봉수(鄭鳳壽)와 개천 군수(价川郡守) 정지한(鄭之罕)을 서로 바꾸었다.
■응천일록 1(凝川日錄一)
≪대동야승 大東野乘≫권 44에서 권 50까지에 수록된 7책본의 작자 미상의 책. 권 50에는 <광해초상록 光海初喪錄>이 부기되어 있다.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에는 ≪응천일기≫로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1609년(광해군1) 11월 28일에서부터 1635년(인조13) 8월 13일까지 약 27년간에 걸친 역사적 사건과 비화를 기록한 것인데 군데군데 누락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친 여러 사건들을 매우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고 또한 당시의 상소문 등이 상당수 기재되어 있어 누락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료적 가치는 높은 편이다. 특히 인목대비의 서궁유폐(西宮幽閉),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사사(賜死) 등 광해군의 폭정과 인조 연간의 당쟁을 이해하는데 참고되는 부분이 많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조선시대 야사총서(野史叢書). 필사본. 59권 42책. 저자가 부친의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42세 때부터 저술하기 시작하여 타계(他界)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에 걸쳐 완성하였다. 400여 가지에 달하는 야사에서 자료를 수집 ·분류하고 원문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원집(原集) 33권, 속집(續集) 7권, 별집(別集) 19권 등 3편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원집에 태조 이래 현종까지의 283년간(1392∼1674) 각 왕대의 주요한 사건을 사의(私意)를 가하지 않고, 인용한 책 이름을 밝혀서 적어 나갔고, 각 왕대의 기사 끝에는 그 왕대의 상신(相臣) ·문신(文臣) ·명신(名臣)의 전기(傳記)를 덧붙였다. 속집은 숙종조(肅宗朝) 47년간(1674∼1720)의 일들을 원집의 형식대로 적었다. 별집은 조선시대의 역대관직(歷代官職)을 비롯하여 각종 전례(典禮) ·문예(文藝) ·천문 ·지리 ·변위(邊圍) ·역대 고전 등 항목별로 그 연혁을 수록하고 역시 인용한 책 이름을 부기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조선시대에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文書)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 1999년 4월 9일 국보 303호로 지정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승정원에서 편찬한 일기로 필사본이며, 3,243책이다. 이 일기의 작성은 승정원의 주서(注書)와 가주서(假注書)의 소임으로, 한 달에 한 권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사건이 많을 경우에는 2권 이상으로도 작성하였으며, 반드시 그 다음달 안으로 완성하여 보존하였다.
원래 조선 개국 초부터 일기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어 1623년(인조 1)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270여 년간의 일기만이 현존한다. 또, 1744년(영조 20)의 승정원 화재로 인하여 《승정원일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746년(영조 22)에 일기청(日記廳)을 설치하고 홍계희(洪啓禧)·임정(任珽)·이철보(李喆輔) 등 45명에게 개수(改修)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선조와 광해군 시대의 사료(史料)는 거의 소실되었으므로, 1623년부터 1721년(경종 1)까지의 일기만 개수하기로 결정하여 1747년(영조 23)에 548책의 개수를 완료하였다. 이 책의 개수시에는 기사마다 그 출처를 명시하고, 책 끝에 서역낭청(書役郞廳)과 교정낭청(校正郞廳)의 성명을 기입하여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한 것이 하나의 특색이 되었다.
소사원(蘇泗源) 1563(명종 18년) ~ ?
조선전기의 사관(仕官). 자는 도윤(道潤), 본관은 진주(晉州), 익산 출신.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세온(世溫)의 증손. 익선(益善)의 아들. 1590년(선조 23) 생원이 되고, 1605년에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다.
▣고대일록 제3권 1598년 5월 16일
진사(進士) 소사원(蘇泗源)은 자(字)가 도연(道淵)이다. 정자에 왔기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대일록 제3권 1605년 3월 28일
익산(益山)의 소사원(蘇泗源)이 등제(登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4년 (1612년 4월 29일)
<사간원이 포도 가대장 안위·강진 현감 소사원 등의 파직을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포도 가대장(捕盜假大將) 안위(安衛)는 성품이 본디 패려궂은 데다 음란 방종한 짓까지 멋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일찍이 전라 병사로 있을 적에 도내에 새로 부임하는 수령 가운데 아름다운 첩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많은 군관을 보내어 중로(中路)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가로채서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남편이 분노한 끝에 죽고 말았습니다. 강간(强奸)한 자는 교형(絞刑)에 처한다는 율이 본래 있으니 안위가 목숨을 보전하고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직껏 재신의 반열에 끼어 있으면서 의관을 더럽히고 있으므로 인심이 오래될수록 더욱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를 사판에서 삭제시키소서.
〈 강진 현감(康津縣監) 소사원(蘇泗源)은 위인이 어리석고 용렬하여 정사를 하리에게 맡기고 있기 때문에 온 경내에 원망하는 소리가 마치 물에 빠지고 불속에 들어 있는 것 같으니,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그의 대임(代任)은 명망이 있는 문관으로 각별히 가려서 차임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안위는 파직시키고 〈 다른 일은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양시우(楊時遇), 1563(명종 18) ~ 1638(인조 16)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형언(亨彦)이고, 호는 성천(聖泉)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 금마면(金馬面) 황복동(黃福洞: 옛 황복골) 출신이다. 시조는 고려시대에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를 역임한 양경문(楊敬文)이다. 양사헌(楊士獻)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유후(柳厚)의 딸과 혼인하였다.
1601년(선조 3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3년(광해 6) 문과 별시방(文科別試榜)에 급제하였다. 1614년(광해군 6) 갑인(甲寅)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15년 익산에 소명국이란 불륜의 사람이 있어 그를 처벌하여 달라는 글을 올려서 소명국을 사헌부에서 잡아다가 죄수로 다스렸는데 소명국이 옥중에서 그의 종제 양시진과 그와 신경희(申景禧) ‧ 김정익(金廷益) ‧ 소문진(蘇文震)등이 능창군(綾昌君)을 세우려는 역모를 하였다고 고변을 하여 여기에 연루되어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그의 무고함이 밝혀져서 풀려나왔다. 그로부터 관계에 나아가서 병조정랑, 예안현감 등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노령이었기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용화산(龍華山)아래에 강사를 짓고 후진을 기르는 것이 자기의 책임이라 믿고 많은 인재를 길렀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7년 (1615년 8월 5일)
<사헌부의 청에 따라 소명국을 엄히 국문하게 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이달 4일에 익산(益山) 사람 전적(典籍) 양시우(楊時遇)와 유학(幼學) 김이강(金以剛) 등이 본부에 정장(呈狀)하였는데, 대개 소명국(蘇鳴國)의 죄악을 나열한 것으로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말하기를 ‘어미상에 거상하면서 아비와 서로 싸워 오동나무 몽둥이로 집기둥을 쳐서 가운데가 부러지게까지 하였으며, 그의 아비가 그 몽둥이를 빼앗아 내던지면서 「네가 나를 이렇게 대하면서 어찌 감히 어미상에 상복을 입느냐.」 하고 이어 여러 친척들에게 떠들어대었다.’고 하였으며, 또 ‘아비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서로 만나보기를 원하였으나 소명국은 서울에 있으면서 내려오려 하지 않고 단지 명정(銘旌)만 사 보냈으며, 죽은 뒤에도 오래도록 분상(奔喪)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또 ‘삼촌 숙부의 첩 한복(漢福)을 울타리를 뚫고 들어가 겁탈하다가 그의 상전인 이인수(李仁壽)의 처에게 들켰다.’고 하였으며, 또 ‘아비가 살았을 때 점찍어 둔 처녀를 아비가 죽은 뒤에 첩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삼촌 숙부가 저지시키면서 「너의 아비가 살았을 때 혼인을 하기로 의논한 사람인 줄을 너는 모르느냐?」 하자, 도리어 숙부를 원수로 여기고 끝내는 첩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며, 또 ‘김영일(金榮一)의 여종 환춘(環春)을 그의 아비와 더불어 번갈아가며 간통하다가 유생 남탁(南倬)에게 들켰다.’고 하였습니다.
불효(不孝)와 음증(淫蒸)은 천하에 극악한 것이고 인륜의 큰 변고인 것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캐물어 율에 의거하여 처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엄하게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왕이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7년 (1615년 8월 6일)
<소명국의 죄목대로 논죄하기를 청한 양시우 등의 상소문>
전적 양시우(楊時遇) 등이 상소하기를,
“소명국은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한 짓을 하여 행동이 금수와 같으므로 지난해 2월에 온 고을의 공론으로 인하여 삭출(削黜)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금되어서 신들을 향하여 원망스런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신들이 지난번에 당초의 삭출하게 된 죄목(罪目)을 가지고 헌부에 정장(呈狀)하였는데, 지금 헌부가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올린 계사를 보니 원장(元狀)의 문자들을 생략해 버려 그 어세가 마치 신들이 지금 비로소 논의를 발하여 정장한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금부로 하여금 원장을 상세히 살펴서 시행하라고 명하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이 상소를 금부에 내리라.”
하였다.
유숙(柳潚)1564(명종 19) ~ 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연숙(淵叔) 호는 취흘(醉吃)이며 몽표(夢彪)의 아들로 본관은 고흥(高興)이고 여산면 출신이다.
1588년(선조21)에 식년시 생원과에 합격, 159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홍문관 교리를 거쳐 경기도암행어사를 지냈다. 검열을 거쳐 1608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후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했다. 1616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시묘(侍墓)를 마치자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또 삼년 시묘(侍墓)를 살았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광해군 때 역신(逆臣)의 심복이었다는 죄로 청하(淸河)에 위리 안치되었다. 뒤에 숙부 유몽인(柳夢寅)의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다시 위리 안치되었다. 1635년 인조의 특명으로 적소에서 돌아와 1636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제수(除授) 되었는데 불행히도 그 해 병사(病死)하여 자손들이 춘성군 남면 가정리(春城郡 南面 柯亨里)에 안장(安葬)하고 영모재(永慕齋)를 건립, 향사(享祀)하니 후손들이 이주하여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승정원일기 인조 1년 계해(1623년 8월 10일)
의금부가 유숙 등의 배소를 청주 등으로 정하였다는 계사를 올렸다.
소광진(蘇光震)1566(명종 21) ~ 1611(광해 3)
자는 자실(子實), 호는 후천(后泉)이며, 대제학 세양(世讓)의 증손이다. 1589년(선조 22) 진사, 1597년(선조 30) 문과에 급제하여 1599년(선조 32) 승정원가주서가 되었다. 1601년(선조 34) 설서(說書), 예문관 검열, 봉교를 차례로 역임하고, 이듬해 형조좌랑을 거쳐 1603년(선조 36) 정언, 사서에 이어 병조정랑이 되어 지제교, 춘추관기주관을 겸했다. 이듬해 평안도 도사, 성균관 전적을 거쳐 황해도 도사가 되었으며, 1607년(선조 40) 예조정랑이 되었다. 1609년(광해 1)에는 시강원 문학이 되고, 이듬해 장령, 필선을 거쳐 1611년(광해 3)에 홍문관 교리, 헌납을 역임하였다.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익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18권 조관기행(漕官紀行) 선조 34년(1601년 7월 27일)
좌랑(佐郞) 강항(姜沆)이 인사를 왔다. 부체찰사(副體察使) 한준겸(韓浚謙)과 방백(方伯) 이홍로(李弘老)가 광주(光州)에서 호군(犒軍 군사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하고 있고 태사(太史) 소광진(蘇光震)이 왕명을 받들고 와 있어 모두 서면으로 안부를 물었다. 한준겸은 조졸(漕卒)을 선격(船格 사공의 일을 돕는 사람)으로 배치하는 데는 만나서 의논해야 한다고 나에게 만나자고 하였다.
남의(南倚) 명종~선조
조선중기의 한학자. 호는 매곡(梅谷), 본관은 의령(宜寧), 익산군 출신. 강무공(剛武公) 은(誾)의 후손. 명종 때 증광진사시(增廣進士試)에 급제하여 헌릉참봉(獻陵參奉)이 되었다. 김장생(金長生)의 학문을 이어받았고 송시열(宋時烈)과 교유하였다.
김득룡(金得龍) 1555(명종 10)~1598(선조 31)
조선중기 무관․공신. 자는 성서(聖瑞), 본관은 진주(晉州), 익산군 함열(益山郡 咸悅) 출신. 부원군(府院君) 무침(茂琛)의 후손. 힘이 남달리 세고 용감하였다. 1584년(선조 17)무과(武科)에 별시 병과(別試 丙科)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수전(水戰)에 참가하여 적선을 쳐부수고 왜적을 격살하였다. 항상 이순신 장군을 따라 전투에 참전하였다. 노량(露梁)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순국하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적을 수십 명 참살하며 용전분투(勇戰奮鬪)하다가 날아오는 적탄에 맞아 역시 전사했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녹하였다.
전응협(全應協) ?∼1597(선조 30)
조선전기의 무신, 본관은 천안(天安). 익산군 용안면 출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訓練院 奉事) 되었다. 오응정(吳應鼎)의 막하(幕下)에 들어 1597년 남원성(南原城) 함락 때 오응정과 함께 화약에 불을 질러 폭사하였다. 영조 때 정려(旌閭)가 내렸다.
허균(許筠)1569년(선조 2)∼1618년(광해군 10)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학산(鶴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후취인 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許筬)이 이복형이며, 허봉과 허난설헌(蘭雪軒)이 동복형제이다.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때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 아버지를 잃고 더욱 시공부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웠으며,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서 시의 묘체를 깨닫게 되었으며,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선조 22년(1589)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4년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 ·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는데 선조 40년(1607)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매월 세번씩 무려 27번이나 문신월과(文臣月課)에 장원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 뒤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고, 1597년에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 달 만에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형조정랑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으며, 이해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왔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누님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여기서도 석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 공주목사로 다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또다시 파직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매창(梅窓)을 만났고 천민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두터이 하였다.
1609년(광해군 1)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 전시(殿試)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그 뒤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하였는데,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부탁하여 대북(大北)에 참여하였다.
1614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 [태평광기 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1617년 좌참찬이 되었으며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지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1618년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났으며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당시의 허균에 대한 평가는 총명하고 영발(英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볼 때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견해는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허균은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편협한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관과 학문관을 피력해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한때 그가 지었다는 것에 대하여 이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보다 18년 아래인 이식(李植)이 지은 [택당집 澤堂集]의 기록을 뒤엎을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그를 [홍길동전]의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그의 생애와 그의 논설 [호민론 豪民論](백성을 무서워 해야 한다는 論)에 나타난 이상적인 혁명가상을 연결시켜볼 때 그 구체적인 형상화가 홍길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문집에 실린 [관론 官論]· [정론 政論]· [병론 兵論]· [유재론 遺才論] 등에서 그는 민본사상과 국방정책,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으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 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으며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다는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특히 중형의 친구인 사명대사와는 절친한 사이로 불교에 대하여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 閑情錄]이 있어 그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는 자신이 편찬하여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하였다고 하며, 그 부록에 [한정록]이 있다. 그가 스물다섯 살 때 쓴 시평론집 [학산초담 鶴山樵談]이 [성소부부고] 가운데 실려 있는 [성수시화 惺叟詩話]와 함께 그의 시비평 안목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그의 시에 대한 감식안은 시선집 [국조시산 國朝詩刪]을 통하여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국조시산]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허문세고 許門世稿]가 전한다. 이밖에 [고시선 古詩選]· [당시선 唐詩選]· [송오가시초 宋五家詩抄]· [명사가시선 明四家詩選]· [사체성당 四體盛唐] 등의 시선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또, 임진왜란의 모든 사실을 적은 [동정록 東征錄]은 [선조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는데 역시 전하지 않는다. 전하지 않는 저작으로 [계축남유초 癸丑南遊草]· [을병조천록 乙丙朝天錄]· [서변비로고 西邊備虜考]· [한년참기 旱年讖記] 등이 있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리 능골에 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2년(1610) 12월 29일
<허균을 함열현으로 귀양보내다 >
죄인 허균을 함열현(咸悅縣)으로 귀양보냈다. 허균은〈 총민함과〉문장의 화려함이〈 근래에〉짝할 사람이 없지만, 망령되고 경박하며 또 행실을 단속하지 못하였다. 얼마 전 과장(科場)에서 부정을 행하였다가 잡혀 들어가 신문을 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서야 허균이 죄를 자백하니, 법률에 따라 단죄하여 전라도 함열 땅에 정배하였다. 당시에 사정을 써서 자제를 합격시킨 부형이 허보(許寶)의 아저씨만이 아니었고, 부형을 인하여 과거에 합격한 자제가 허균의 생질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허균이 당시에 명망을 얻지 못하고 세상에 중시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허보만 과방에서 삭제되고 허균만 처벌을 받았으니, 사람들이 승복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도문대작(屠門大嚼) 서문(序文)
‘푸줏간 앞에서 입을 크게 벌여 입맛을 다진다’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책은 허균이 귀양지인 함열에서 1611년 4월에 쓴, 음식에 대한 저작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식품사(食品史)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문헌이라고 한다. 이 책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내가 죄를 지어 바닷가로 거처를 옮기고부터는, 쌀겨나 싸라기조차 제대로 댈 형편이 못 되었다. 밥상에 올라오는 것이라곤 썩은 뱀장어와 비린내 풍기는 물고기, 쇠비름과 미나리에 불과하였다. 그 조차도 하루에 두 끼밖에 먹지 못하여 밤새 뱃속이 비어 있었다. 산해진미를 입에 물리도록 먹어서, 물리치고 손도 대지 않던 옛날의 먹거리를 떠올리고 언제나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곤 하였다. 이제는 아무리 다시 먹고 싶어도, 하늘에 사는 서왕모(西王母)의 천도복숭아인양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내가 동방삭(東方朔)이 아니고 보니 무슨 수로 그 복숭아를 몰래 따겠는가?)
당시의 함열현 소재지는 오늘날 함라면이므로 웅포와 성당포가 바로 이웃이고, 강경포는 대단한 물산의 집산지였으므로 금강은 바다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함라를 바닷가로 표현한 것이다.
■매창(梅窓)(1573 선조 6 ~ 1610 광해군 2)
조선 중기의 시인. 본명은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 호는 매창(梅窓).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고 하였다.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났으며, 부안(扶安)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매창의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며, 시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데서 그의 우수한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 작품으로는 《추사(秋思)》 《춘원(春怨)》 《견회(遣懷)》 《증취객(贈醉客)》 《부안회고(扶安懷古)》 《자한(自恨)》 등이 유명하다. 부안의 묘에 비석이 전하며, 1974년 부안 서림공원에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정제관(鄭濟寬) 1775(영조 51)~1806(순조 6)
조선후기의 한학자. 자는 율재(慄哉), 본관은 연일(延日), 익산군 북일면(北一面)출신, 상룡(祥龍)의 5세손, 태영(太榮)의 아버지,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의 문인,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모르는 것이 없어 누구든지 물으면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진동육(陳東陸) 18세기 ~ 19세기
호는 유재(柳齋)이며, 개국원종공신 충귀(忠貴)의 후손으로 본관은 삼척(三陟)이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 ~ 1807)의 문인으로 유고(遺稿)가 있다고 한다.
송기준(宋基儁) 19세기 ~ 20세기
근대의 한학자. 호는 현곡(玄谷), 본관은 여산(礪山), 익산군 출신. 송례(松禮)의 후손. 좌승지(左承旨) 성일(成一)의 7세손이다. 많은 서적을 섭렵(涉獵)했고, 천문(天文)에도 통했다. 간재 전우(田愚)와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오랜 친구다.
정면행(鄭勉行) 18세기 ∼ 19세기
호는 일감제(一鑑齊). 백봉(柏峰) 상룡(祥龍)의 현손으로 부(父)는 택규(宅揆)이다. 본관은 연일(延日)로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와 깊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고 한다.
소환술(蘇喚述) 1778(정조 2) ∼ 1842(헌종 8)
조선후기의 한학자. 호는 환성재(喚惺齋), 본관은 진주(晉州),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金馬面 東古都里) 출신. 저서『환성재유고(喚惺齋遺稿)』필사본 1책이 전한다.
정석행(鄭碩行) 1789(정조 13) ~ 1835(헌종 1)
조선후기의 한학자, 자는 사관(士寬), 호는 북촌(北村), 본관은 연일(延日), 익산군 출신. 의주(依周)의 5세손, 제철(濟哲)의 아버지. 일지기 학업에 힘썼으며 도량이 컸다. 향약회(鄕約會)를 만들어 주관했다.
이종림(李鍾林) 1797(정조 11) ~ 1865(고종 2)
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성률(聖律), 호는 저전(樗田), 본관은 전의(全義), 석하(奭夏)의 아들. 익산군 금마면 서고도리(金馬面 西古都里) 출신. 음사(蔭仕)로 가선대부 시종원 부경(嘉善大夫 侍從院副卿)을 지냈다. 문집『저전유고(樗田遺稿)』 인쇄본 8권 4책이 전한다. 내용은 시(詩)․소(疏)․서(書)․서(序)․기(記)․명(銘)․송(頌)․논(論)․잡저(雜著)․유람록(遊覽錄) 등이다.
서홍순(徐弘淳) 1798(정조 22) ~ 1876(고종 13)
조선후기의 한학자, 서예가. 자는 경삼(敬三), 호는 호산(湖山) 또는 진사(晋史), 본관은 대구(大邱), 익산군 웅포면 입암리(熊浦面 笠岩里) 출신.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연루되어 죽은 서종하(徐宗廈)의 5대이고, 서충보(徐忠輔)의 5남 가운데 1남으로 태어났으며, 동생은 서대순(徐大淳) ‧ 서두순(徐斗淳) ‧ 서경순(徐景淳) ‧ 서영순(徐英淳) 등이 있다.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의 수제자. 25세 때인 1822(순조 22)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글씨 공부에 전력하여 망가진 몽당붓이 큰 독으로 가득 찼다고 하며 고행인 함라산 문필봉에서 ?흐르는 물이 마르느냐 내 붓이 마르느냐?의 기개로 끈질기게 서도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사마시 합격이후에도 서도(書道)에 정진하였으며 만년에 청의 서예계를 살피고 자신의 솜씨를 알리기 위하여 중국에 가는 사신 일행을 따라 가다가 불행이도 의주(義州)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서홍순(徐弘淳)의 아들의 호는 호운(湖雲)인데, 역시 글씨를 잘 썼으며, 서홍순의 손자는 호가 우운(又雲)인데 난(蘭)을 잘 쳤다.
조선후기의 전북지방 서예가 중 전주(全州)의 이삼만(李三晩), 익산(益山)의 서호산(徐湖山), 남원(南原)의 강남호(姜南湖)를 3대 명필(三大名筆)로 꼽는다. 세자(細字)에 능하고 초서(草書)를 잘 썼다. 전주 풍남문(豐南門)의 편액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 그의 글씨이다. 그의 글씨를 소장한 사람이 지금도 많다.
소휘명(蘇輝明) 1806(순조 6) ~ 1869(고종 6)
조선후기의 한학자. 호는 죽계(竹溪), 본관은 진주(晉州),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金馬面 東古都里) 출신. 문집『죽계고(竹溪稿)』필사본 4책은 시(詩)와 산문(散文)의 여러 양식이 망라되어 있다.
강휘언(姜彙彦) 순조 ~ 고종
호는 죽강(竹岡)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과 교유하였다.고종때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하였다.
소휘면(蘇輝冕) 1814(순조 13) ~ 1889(고종 26)
조선후기의 한학자. 자는 순여(純如), 호는 인산(仁山), 본관은 진주(晉州),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金馬面 東古都里) 출신. 부친은 소형술(蘇亨述)이며 모친은 광산김씨(光山金氏)로 김재준(金在俊)의 딸이다. 긍술(兢述)의 아버지이다. 나이 9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엄한 훈육과 할아버지인 소수구(蘇洙榘)에게 학업을 닦았으며, 20세 이전에 문명을 떨쳤다. 뒤에 홍직필(洪直弼)을 사사하였다.
학문은 4서6경(四書六經)을 근거로 정주(程朱)의 설을 절충하여 전현(前賢)이 미처 발견치 못한 것을 찾고, 의리(義理)를 분석하는데는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일도양단(一刀兩斷)하여 추상(秋霜)과 같았다고 한다.
1858년(철종 9) 도백(道伯)이 그의 학행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1876년(고종13) 식년 진사시(式年 進士試)에 합격한 후, 도학과 문장을 수렴하여 이름이 높았다. 1881년(고종 18) 선공감 가감역을 제수받았으며 곧 전설시별제(典設寺別提)에 제수되었다.
그 뒤 전라도사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1882년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아니하고 오직 후배들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익산군 금마(金馬) 화산서원(華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그의 문집은 『인산집(仁山集)』인쇄본 17권 8책이 전한다. 여기에는 시(詩) ․ 잡저(雜著) ․ 서(序) ․ 기(記) ․ 제(題) ․ 설(說) ․ 명(銘) ․ 묘갈(墓碣) ․ 묘표(墓表) ․ 행장(行狀) ․ 행록(行錄) ․ 전(傳) ․ 기(記) ․ 부록(附錄)이 실려 있다.
유영규(柳榮奎) 순조 ~ 고종
호는 회석(晦石)이며 고흥백(高興伯) 준(濬)의 후손이며 대명처사(大明處士) 시화(時華 : 사계 김장생의 문인) 의 7세손이다.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김중암(金重菴), 송녹봉(宋鹿峰)에게 사사(師事)하고 소휘면, 유성재(柳省齋)와 교유하였다.
송재화(宋在和) 1819(순조 19) ~ 1885(고종 22)
조선후기의 관인. 자는 수중(秀中), 호는 성하(醒荷). 본관은 진천(鎭川). 익산군 왕궁면 도순리 출신. 우(愚)의 15세손. 아버지는 문섭(文燮). 천성이 영민하고 지기(志氣) 또한 굳건하였으며 효우(孝友)에 힘쓰면서 학문에 공을 쌓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충북 음성군 맹동면 두성리(忠北 陰城郡 孟洞面 斗城里)에 장지가 있다.
서병우(徐丙于) 순조 ~ 고종
호는 호운(湖雲)이며 웅포면 입암리 출신으로 서예가로 유명한 호산(湖山) 서홍순(徐弘淳)의 아들이다. 본관은 달성(達成)으로 서예에 능하고 묵화(墨畵)를 잘 그렸다.
정제철(鄭濟哲) 1819(순조 19) ~ 1893(고종 30)
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희순(希舜), 호는 남고(南皐), 본관은 연일(延日), 익산군 북일면(北一面)출신으로 정난공신(靖亂功臣)이며 참판(參判)인 정덕성(鄭德成)의 후손으로 석행(碩行)의 아들이며 만포(晩圃) 정제호(鄭濟鎬)의 형이다. 석봉(石峰) 송산장(宋山丈)의 문인이다. 관찰사가 세 번 조정에 천거하되 처음에는?연원(淵源)이 있는 집안으로 독실하고 진지하다.?는 명목이었고, 두 번째는?명가(名家) 자손으로 박학하고 아조(雅操)하다.?는 명목이었고, 세 번째는?경서를 궁구하고 벌써 배워 세상의 사표가 된다.?는 명목이었다. 마침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
정제호(鄭濟鎬) 1821(순조 21) ~ 1897(고종 34)
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시순(時舜), 호는 만포(晩圃), 본관은 연일(延日), 익산군 북일면(北一面)출신, 상룡(祥龍)의 5세손, 교관(敎官) 석행(碩行)의 아들로 남고(南皐) 정제철(鄭濟哲)의 아우이다. 고종(高宗) 26년(1889)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전적(典籍),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을 역임했다. 1893년(고종 30) 당시 정치의 득실(得失)을 상소하여 권세가의 미움을 받아 승진하지 못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 공주(公州) 차령(車嶺)에서 낙마(落馬)하여 집에 돌아와 곧 죽었다. 1904년(광무 8) 충효겸전(忠孝兼全)이라 하여 정려(旌閭)했다. 북일면 모인리(北一面 慕仁里)에 정문(旌門)이 있다. 익산 백산서원(柏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문집 만포유고(晩圃遺稿)가 있다.
■만포유고(晩圃遺稿)
정제호(鄭濟鎬)의 시문집으로 1책이며 목활자본이다. 1898년에 아들 동식(東植)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송병준(宋炳俊)의 서문과 권말에 동식의 발문이 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앞에 「만포재기(晩圃齋記)」 2편과 「만포재서(晩圃齋序)」 1편이 있고, 시 7수, 부(賦) 1편, 소(疏) 1편, 통문(通文) 1편, 가훈(家訓) 19조, 동방록(同榜錄) 1편, 부록으로 만사 34수, 제문 2편, 상언(上言)ㆍ장례원입안(掌禮院立案)ㆍ화상찬(畫像贊)ㆍ행장ㆍ묘갈명ㆍ찬(贊)ㆍ흥학계서(興學稧序)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소(疏)에서는 당시의 시폐(時弊)를 지적하고 장학(奬學)ㆍ절용(節用)ㆍ숭검(崇儉)ㆍ척사(斥邪)의 4개 조목으로 그 시정 방법을 제시하였다.
통문(通文)은 전주(全州)의 호산(湖山)에 있는 비비정(飛飛亭)은 송시열(宋時烈)이 노닐던 곳으로 1828년 이 자리에 정몽주(鄭夢周)ㆍ송시열ㆍ김수항(金壽恒)의 영당(影堂)과 정각(亭閣)을 세웠는데, 영당이 철폐되고 뒤에 왜인 삼례찰방(參禮察訪)이 정각마저 철거한 일에 대해 성토하는 내용이다.
송상현(宋商鉉) 1824(순조 24) ~ 1875(고종 12)
조선후기의 유학자, 자는 국노(國老), 호는 오하(梧下) 또는 직량재(直養齋). 본관은 진천(鎭川)이다, 익산 출신으로 효우심이 두터웠으며 문장과 학행이 탁월한 거유(巨儒)로서 당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고 유고로 『오하잡언(梧下雜言)』 5권을 남겼다. 묘는 익산군 왕궁면 동룡리 녹동(王宮面 東龍里 鹿洞)에 있다.
송순택(宋淳澤) 1827(순조 27) ~ ?
조선후기의 한학자. 자는 원후(元厚), 본관은 진천(鎭川), 여산현(礪山縣) 출신. 조봉대부 전행정릉직장(朝奉大夫 前行靖陵直長) 태진(泰鎭)의 아들이다. 1859년(철종 10)에 진사(進士)에 오르고, 1882년(고종 19)에 증광 문과(增廣文科)에서 을과(乙科)에 급제했다.
최치의(崔致義) 18세기 ~ 19세기
호는 묵암(墨菴)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순조 때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를 지냈다. 효우와 학행을 겸비했다고 한다.
소성홍(蘇聖鴻) 1828(순조 28) ~ 1862(철종 13)
조선후기의 익산민란 주동자인 의사(義士). 관명은 점규(漸圭). 본관은 진주(晉州), 익산군 왕궁면 용화리(王宮面 龍華里) 출신. 마량진수군첨절제사(馬梁鎭水軍僉節制使) 세공(世恭)의 12대손. 휘선(輝先)의 아들. 진상(鎭常)의 아버지. 익산에서는 철종 13년 3월 27일 소성홍, 임치수 등이 주동이 되어 군민 수 천명이 봉기하여 군아(軍衙)에 뛰어 들어가 인신(印信)과 병부(兵符)를 뺏고 군수 박희순(朴希淳)을 끌어내려 욕(辱)을 보이고 경외로 축출하였다. 이 사건을 들은 전라감사 김시연(金始淵)은 사실을 조정에 장계(狀啓)하였다. 조정에서는 안핵사(安劾使) 이정현(李正鉉)으로 하여금 진상을 조사하여 환곡(換穀) 작전(作鐫) 도결(賭結)의 폐단이 컸고 작전이 3배나 부과된 사실을 알고 조정에 보고하여 전라감사와 익산군수를 파직하고 소성홍(蘇聖鴻) 등 10여 명을 전라감영으로 끌어다 많은 군중 앞에서 교수형(絞首刑)에 처하고 소덕규(蘇德奎) 등 수 십 명을 각 지방으로 귀향 보냈다.
▣조선왕조실록 철종 13년 임술(1862) 5월 5일
<익산에서 난을 일으킨 임치수·이의식 등을 부대시로 효수하게 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익산 안핵사의 사계(査啓)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임치수(林致洙)·이의식(李義植)·소성홍(蘇聖鴻) 이 세 사람은 난민들의 거괴(巨魁)이고, 천영기(千永基)·문희백(文希白)·장순복(張順福)·오덕순(吳德順) 이 네 사람은 난민의 동악(同惡)입니다. 임종호(林宗鎬)·임덕호(林德鎬)는 한 사람은 이방(吏房)이고 한 사람은 호장(戶長)인데, 은밀히 서로 표리(表裏)의 관계를 맺고 앉아서 그 성패(成敗)를 살폈으며, 최학초(崔學抄)는 좌수(座首)로서 그 기미를 알고서는 기일에 앞서 집으로 돌아갔다가 변란의 소식을 듣고서는 밤을 틈타 고을로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전에 없던 변란을 당하여 화응(和應)한 여부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원통하더라도 사형에 해당되고 죄를 졌어도 사형에 해당이 되는 것이니, 이상의 10인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민인(民人)들을 영하(營下)에 대대적으로 모아 모두 부대시(不待時)로 효수(梟首)하는 형벌을 시행하게 하소서. 전 군수(郡守) 박희순(朴希淳)은 도결(都結)이 이미 법 밖에 관계되는 것인데도 그런 정사를 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많이 받아서 이민(吏民)이 함께 거사하도록 만들었으며, 드디어 위협받아 쫓겨나는 패욕(悖辱)을 당하였으니, 우선 먼저 찬배(竄配)시키소서. 그리고 받아들인 결잉전(結剩錢)은 일일이 환급(還給)하게 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임치수(林致洙) ? ~ 1862(철종 13)
조선후기의 익산민란 주동자인 의사(義士). 본관 평택, 용안 현감 정진(貞鎭)의 아들. 익산군 출신. 조선 말기에 정치가 문란하고 매관매직과 아전과 수령의 민간착취가 심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였다. 그때 익산군수 박희순(朴希淳)도 탐학과 착취가 심했으므로, 1862년 3월 27일에 임치수․소성홍 등이 주동이 되어 군민 수 천명이 궐기하여 군수의 불법적인 도결(都結)을 규탄하고, 군 청사에 들어가 인신(印信)을 빼앗고, 군수를 끌어내어 군 경계 밖으로 쫓아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그 후 여러 고을에서도 농민의 봉기가 있었다. 소성홍등과 함께 전라감영에서 처형되었다.
이봉규(李鳳奎) 1829(순조 29) ~ 1888(고종 25)
조선후기의 문신. 호는 국포(菊圃), 익산군 왕궁면(王宮面)출신. 1874년(고종 1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병조참의(兵曹參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문집『국포유고(菊圃遺稿)』2책이 전하는 바 내용은 주로 시(詩)와 부(賦)다.
▣승정원일기 고종 1년(1864) 6월 7일
<6차 정사에서 이재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6차 정사를 하였다. 이재원을 도총부 도사로, 이봉규(李鳳奎)를 훈련원 주부로 삼았다.
김봉식(金鳳植) 1820(순조 20) ~ ?
조선후기 한학자. 자는 의백(儀伯), 호는 백초(白樵), 본관은 김해(金海), 제택(濟宅)의 아들. 익산 출신. 1850년(철종 1)에 생원시에 급제했다. 일찍이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성리학에 전념하였을 뿐 출세에 뜻을 두지 않았다.
소휘만(蘇輝晩) 1831(순조 31) ~ 1883(고종 20)
조선후기의 유학자. 자는 송여(松汝), 호는 취간(翠澗), 본관은 진주(晉州), 익산군 왕궁면 용화리(王宮面 龍華里) 출신. 마량진첨사(馬梁鎭僉使) 세공(世恭)의 11대손. 긍술(兢述)의 아들. 홍규(弘奎)의 아버지. 문량공(文良公) 소휘면(蘇輝冕)의 문인. 문장과 학식이 저세(著世)하여 1876년(고종 1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874년 유생을 대표하여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사당 화양서원(華陽書院)의 복원을 상소하였으며 저서는 『취간유고(翠澗遺稿)』 5권과 주역의 위삼백을 도해(圖解)한 『해기삼백도』가 있다.
이봉구(李鳳求) 1834(순조 34) ~ 1917
근대의 문신. 호는 석초(石樵), 본관은 전주, 병조참판(兵曹參判) 종혁의 아들, 용양위 부사용(龍陽衛 副司勇) 희선의 아버지. 익산군 금마면 산북리(金馬面 山北里) 출신. 선략장군 충무위 부사용(宣略將軍 忠武衛 副司勇)을 지냈다. 문집『석초집(石樵集)』인쇄본 1책이 전한다. 문집 서(序)는 전 예조판서 김종한과 가선대부(嘉善大夫) 전 강원도 관찰사 권익상과 가선대부 윤영구와 통훈대부(通訓大夫) 남경희가 썼다.
양석중(楊錫中) 1834(헌종 2) ~ 1901(고종 38)
자는 경화(敬和), 호는 춘당(春塘)으로 송은(松隱) 재우(在佑)의 아들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으로 본래 남원군 대강면 평촌리에서 태어났으나 자라서는 익산군 왕궁면으로 이거하였다.
학문이 깊고 넓어 향리에서 추앙을 받았으며, 영희전 참봉(永禧殿 參奉)에 제수되었다가 1901(고종 38)에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에 올랐다.
특히, 갑오년(1894)의 동학운동 때는 승지 이건영(李健泳)과 함께 운동을 진압할 계책을 의논하다가 일본군의 개입이 있자, 이건영과 의견이 맞지 않아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집으로 『춘당집(春塘集)』6권 4책이 전한다.
전세규(田世圭) 19세기 후반 ~ 20세기 전반
호는 겸재(謙齋)로 경은(耕隱) 조생(祖生)의 후손이며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오하(梧下) 송상현(宋商鉉)의 문인으로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 후 비분강개하여 자결한 모은(慕隱) 정동식(鄭東植)과 뜻을 같이 하였다가 모은(慕隱) 자결 후 겸재는 산에 들어가 초근묵피로 연명하다가 월랑(越浪 ; 현재의 진안)의 백운산방(白雲山房)에서 생을 마쳤다. 문집으로 『겸재유고(謙齋遺稿)』2권이 있다.
정상진(鄭象鎭) 1850(철종 1) ~ 1928
호는 몽율(夢栗)로 삼기면 출신이다. 문집으로 『몽율집(夢栗集)』6권 6집이 전한다. 주로 시(詩)와 만사(輓詞)가 실려 있다.
송순보(宋淳輔) 1853(철종 4) ~ 1906(고종 43)
조선후기의 한학자. 호는 평재(平齋), 익산군 왕궁면 동룡리 학현(王宮面 東龍里 鶴峴) 출신. 문집『평재유고(平齋遺稿)』필사본 1책이 전한다. 그 내용은 시(詩)․부(賦)․서(書)․서(序)․기(記)․제문(祭文)․묘갈(墓碣)․행장(行狀) 등이다.
권시용(權時庸) 철종 ~ 고종
조선후기의 서예가․한학자. 자는 치중(致中), 호는 서계(西溪), 본관은 안동(安東), 익산군 팔봉면 (益山郡 八峰面) 출신. 추(錘)의 후손. 글씨를 잘 쓰되 특히 초서(草書)에 능하였다. 그의 초서첩(草書帖)인『서계초결(西溪草訣)』이 전한다. 고종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김석종(金錫宗) 19세기 ~ 20세기
조선후기의 한학자. 자는 자서(滋瑞), 호는 열재(悅齋), 본관은 김해(金海), 익산군 함열(益山郡 咸悅), 당시의 함열현(咸悅縣) 출신. 기형(箕亨)의 아들. 1873년(고종 10) 식년 사마시(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박상규(박상규) 19세기 ~ 20세기
호는 농력(儂歷)이며 정숙공 안신(安臣)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성태(成泰)이다. 본관은 상주(尙州)로 학원과 태극교(太極敎)를 경영하였다. 고종 때 관직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송기서(宋基曙) 19세기 ~ 20세기
근대의 한학자, 호는 현묵(玄黙), 본관은 여산(礪山), 익산군 출신. 정열공(貞烈公) 송례(松禮)의 후손. 승지(承旨) 성일(成一)의 7세손. 송병선(宋秉璿)․전우(田愚 ; 1842-1922)와 사귀며 학문을 넓혔고, 검소하고 효우가 돈독하여 후학들의 모범이 되었다.
권종(權鍾) 고종대 이후
조선후기의 한학자. 호는 운강(雲岡), 본관은 안동(安東), 익산군 팔봉면(益山郡 八峰面) 출신. 동몽교관(童蒙敎官) 시용(時庸)의 아들. 감찰(監察)에 증직되었으며, 박학다식하여 당시 많은 문하생이 몰려들었다.
서기홍(徐基鴻) 1853(철종 4) ~ 1916
조선 후기의 한학자. 효자. 자는 성겸(聖謙), 호는 송암(松菴), 본관은 부여(扶餘), 서익(徐益)의 후손, 상선(尙善)의 아버지. 소휘면(蘇輝冕)의 문인. 익산군 왕궁면 발산리(王宮面 鉢山里) 출신. 간재 전우(田愚)와 교우가 깊은 학자로서 경학(經學)에 밝고 연의(演義)에 정통했다. 많은 후학을 길렀다. 효자로도 유명하다.
송기인(宋基仁) 고종대
근대의 한학자. 호는 농은(農隱), 본관은 여산(礪山), 익산군 출신. 송례(松禮)의 후손. 좌승지(左承旨) 성일(成一)의 7세손. 고종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후 관찰사(觀察使) 이용직(李容稙)이 포상을 상신하여 좌장례(左掌禮)에 증직되었다. 효우가 돈독하며 청렴결백하고 근검하여 향리(鄕里)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전우(田愚)가 그의 묘갈(墓碣)을 짓고 최익현(崔益鉉)이 묘지(墓誌)를 썼다.
서정민(徐廷珉) 고종대
호는 우운(又雲)으로, 서예가로 유명한 호산(湖山) 홍순(弘淳)의 손자이며 호운(湖雲) 병우(丙于)의 아들이다. 본관은 달성(達成)으로 불운한 일평생을 붓 한 자루에 의지하여 살았다.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는데, 글씨는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에 능했으며 그림은 묵란(墨蘭)과 노안(蘆雁 ; 갈대가 무성한 곳에 내려앉은 기러기)이 특히 뛰어났다.
정남식(鄭南植) 1854(철종 5) ~ 1926
근대의 한학자. 자는 학수(學洙). 호는 계은(桂隱). 본관은 연일. 익산군 북일면 백산(현재의 익산시 배산) 출신. 판서 덕성(德成)의 후손, 제철(濟哲)의 아들.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특히 예문(禮文)에 정통했다. 처라(處士)라 세칭(世稱)되었다
양홍순(楊弘淳) 1855(철종 6) ~ 1915
조선후기의 한학자, 자는 성구(聖九), 호는 옥호(玉壺), 본관은 남원,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礪山面 源水里) 출신. 문집『옥호문집(玉壺文集)』3권 1책이 있다. 내용은 시(詩)․기(記)․서(序)․표(表) 등이다.
차광현(車光炫) 1858(철종 9) ~ ?
근대의 한학자. 본관은 연안(延安). 함열현(咸悅縣)출신. 남진(南震)의 아들. 1891년(고종 28) 증광 문과(增廣 文科)에 급제하였다.
정석규(鄭錫圭) 1859(철종 10) ~ 1906(고종 43)
조선후기의 한학자. 자는 종숙(鍾淑), 호는 백곡(柏谷), 본관은 연일. 익산군 북일면 출신. 찬구(燦九)의 아들, 소휘면(蘇輝冕)의 문인, 일찍 학문을 성취했으나 영달(榮達)을 구하지 않고 백곡(柏谷)에 은거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소학규(蘇學奎) 1859(철종 10) ~ 1948
근대의 한학자. 자는 정습(正習), 호는 열재(悅齋), 본관은 진주(晉州), 출생지는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完州郡 龍津面 上雲里)이나 주거지는 익산군 북일면(北一面 현 익산시)이었다. 성술(星述)의 손자. 휘식(輝植)의 아들. 세량(世良)의 13대손.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1891년(고종 28)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학자 집안 출신으로 간재(艮齋) 문하생 가운데도 중견인물이다. 문집『열재집(悅齋集)』인쇄본 11권 5책이 전한다. 그것은 사(辭)․시(詩)․묘갈(墓碣)․묘지(墓誌)․행장(行狀)․행록(行錄)․제문(祭文)․서(序)․기(記)․발(跋)․제(題)․잡저(雜著)․논(論)․설(說)․잠(箴)․명(銘)․찬(贊)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운곡가장(雲谷家藏)』은 할아버지 성술(星述)과 본인이 여러 사람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그 후손이 모은 것인데 그 중에는 우의정 정범조(鄭範朝)의 서신 4매를 비롯하여 학부대신(學部大臣) 이도재(李道宰)의 서신 및 관찰사(觀察使)․교리(敎理)․군수(郡守)․현감(縣監) 등이 보낸 편지가 다수 들어있다. 책명(冊名)을 『운곡가장(雲谷家藏)』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수신자들이 상운리 운곡(上雲里 雲谷)에 살고 있었던 까닭에서였다.
오덕근(吳德根) 1861(철종 12) ~ 1950
현대의 기독교인, 본관은 해주, 익산군 북일면 신리(北一面 新里)출신. 동반(東班) 제5품 관직인 통덕랑(通德郞) 오길영의 장남으로 오덕순의 오빠이며 장로 김성환의 아버지이고, 장로 김찬규의 할아버지이다. 매부 김자윤의 전도로 교회에 출석하고 1918년에 고현교회(古縣敎會) 장로에 피임되었다. 천성이 강직하여 적에 대해 용맹스럽고 십자가 정신으로 신도와 동포를 사랑하였으며,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헌병대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사립백동학교(私立栢東學校)를 설립하였고, 김한규와 함께 계문(啓門)학교를 세웠으며, 사립 경신(敬信)학교도 세워 영재양육과 복음교육에 열을 쏟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폐교 당했다. 전체 신도를 진실 되게 사랑하고, 언행에 어긋남이 없어 교세를 번창하게 하였다. 고현교회내에는 충헌비(忠獻碑)가 있다. 종교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열과 성을 다해 만인의 숭배를 받았다.
정창업(丁昌業) 1847(헌종 13) ~ 1919
판소리 명창. 후기 8명창 가운데 한 사람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전라남도 함평 출생이나 익산군 망성면 내촌리에서 살았다. 명창 정학진(丁學珍)은 아들이고,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인 정광수(丁珖秀)는 손자이다.
천부적으로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음악적 재능이 있어 어려서부터 소리를 잘하였다. 박유전(朴裕全)에게 5년간 배웠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젊어서 전주대사습놀이에 참가하여 실수로 낙방한 뒤 열심히 독공(獨工)하고, 신재효(申在孝)밑에서 2년간 지도를 받고 다시 대사습놀이에 출연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다. 고매하기는 박만순(朴萬順)에 비견할 수 없고, 웅휘(雄揮)하기는 이날치에 미치지 못했으나 스스로 만든 특색으로 일세를 풍미한 대가였다.
그는 흥보가(興甫歌)에 특기가 있었고,〈심청가〉의 한 대목을 너무 슬프게 불러서 좌중이 눈물을 손으로 닦아 비석에 뿌렸더니 물이 흘렀다고 한다. 그래서 후세에 “정창업의 소리에는 비석도 운다.”는 말이 나왔다. 더늠(판소리에서 명창들이 사설과 음악을 독특하게 새로 짜서 자신의 장기로 부르는 대목)으로 전하는 것은 심청가중 몽운사(夢雲寺)의 화주승이 권선시주 얻을 양으로 산에서 내려오는 대목이다.
그는 서편제(西便制)로 소리하였고, 계면조(界面調)를 주로 하여 소리하되 상하성(上下聲)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희로애락의 감정을 잘 표현하였다.
고종으로부터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계를 제수 받았다. 제자로는 원각사(圓覺社)시절에 활약한 김창환(金昌煥)과 그 뒤의 정정렬(丁貞烈)‧김정길(金正吉) 등이 있다.
지태순(池泰淳) 1902 ~1979
호는 익성(益城)으로 금마면 동고도리 출신이며 창석(昌錫)의 장자이다.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금마면 출신이다. 구한말 한학을 수학하다가 익산보통학교를 나왔다. 1945년 조국 광복이후 지방교육의 창달을 위해 1951년에 재단법인‘익성학원’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여 익산중학교, 익산종합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서울에 ‘한성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사장으로 활약하였고 이어 ‘한국벼짚펄프주식회사’를 만들어 역시 사장으로 경제활동을 했다. 한편 1960년에는 익산고적보존회 고문으로 문화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전북은행’ 창립 당시에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남달리 근검절약을 모토로 하여 거대한 재력을 키운 데 대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전라북도에서 ?공로상?표장을 받았고, 전북교육감으로부터 ?전북의 별?특별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한국사학재단연합회장으로부터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하였고 국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였다.
현재 그가 세운 익산중학교는 200여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고, 익산고등학교는 500여 학생들이 재학하는 전국단위로 학생들을 모집하는 자율형 사립고로서 대규모 기숙사를 운영하고 오래 전부터 우수한 인재를 배출함으로서 지역 명문고로서의 명성을 확실히 다지고 있다.
1990년 설립자의 숭고한 건학이념(建學理念)과 창학정신(創學精神)을 영원히 기리고자 동문들과 지역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교내에 있는 익성기념관 앞에 고 익성 지태순 이사장 동상을 건립하여 해마다 추모행사를 갖고 있다.
소완규(蘇完奎) 1902 ~ ?
현대의 법률가․공무원. 호는 유당(悠堂), 본관은 진주(晉州), 익산군 팔봉면 용제리(八峰面 龍堤里;현 익산시 팔봉동) 출신이다. 의학박사 소진탁(蘇鎭琸)의 아버지이며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이미 8세 때 7대조 할아버지의 비문을 썼다고 한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4세때 동생인 선규(宣奎)와 같이 부안군 계화도에 있는 간재 전우에게서 3~4년 동안 한학을 깊이 배웠다. 서울 중동중학 속성과를 수료하고, 중국 뻬이징대학에서 수학하였으나 학업보다는 독립운동에 더 힘을 쏟아 3년 만에 왜경에게 쫓겨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로 피신하였다. 이곳에서는 독일계 대학의 의과대학에 적을 두고 조선인 청년회일을 책임지면서 독립결사조직에 전념하였다. 이후 25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을 하며 1930년에 니혼 대학 법률과를, 1932년에는 메이지 대학 연구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전북도청에서 1년간 근무하다가 32세에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오랫동안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약하였다. 1933년 변호사 개업이후 해방직전까지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는 중앙일보 이사와 보성학원 이사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조선일보 법률고문을 지냈으며 경성부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34년 나혜석이 최린을 상대로 정조유린 위자료청구소송을 내어 화제가 되었을 때 이 소송의 담당 변호사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행적이 있다.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과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지냈으며, 임전대책협의회에서 채권가두유격대를 조직했을 때 참여하여 경성부 거리에 나가 행인을 상대로 채권을 판매했다.
8․15해방직후 서울시동연합회회장, 연합군 환송회 부회장, 과도정부(過渡政府) 사법부 차장을 지냈고, 경성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또 농본사(農本社) 사장으로 일하며 『우리 민족의 살 길』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6․25 때 납북되었다.
소선규(蘇宣奎) 1903 ~ 1968
현대의 정치가. 국회의원. 호는 계산(桂山), 본관은 진주(晉州), 익산군 팔봉면 용제리(八峰面 龍堤里) 출신.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 형은 변호사 소완규이고 차남은 정치학 박사이며 외교관인 소진철이다. 대한민국 건국초기 익산이 배출한 대표적인 거물급 정치인이다.
일본 후꾸시마(福島) 고등상업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45년 8․15해방 이후 동대문구청장을 거쳐 서울시부시장을 역임하고, 한민당(韓民黨)과 민주당(民主黨)의 창당발기인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서 익산 갑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고 1950년 5월 30일 제 2대 국회의원 선거에 지역구 익산 갑구에서 민국당(民國黨)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이후 2․3․5․6대에 걸쳐 4선의원이 되었다, 2․3대에는 국회 상공분과위원장을 역임하였다. 5대 때 참의원의원(參議院議員)으로 초대 부의장을 맡았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비준 때는 야당 의원으로서 찬성 발언을 했다.
박영문(朴泳文) 1903 ~ 1919
본관은 함양(咸陽)으로 응춘(應春)의 아들이다. 1919년 4월 4일 이리시장에서 만세시위운동을 하다가 17세의 어린 나이에 왜적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다.
송원규(宋元圭) 1905 ~ 1982)
현대의 한학자. 자는 중덕(重德), 호는 춘강(春岡)이다. 본관은 진천(鎭川)으로 익산군 왕궁면 용화리(王宮面 龍華里)에서 병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어 학문이 뛰어났다. 홍순태(洪淳太), 송영식(宋瓔植), 소찬영(蘇贊永)등과 교유하며 많은 시작을 남겼다.
문집으로『춘강유고(春岡遺稿)』1책이 전한다.
이문원(李文源) 1906 ~ ?
호는 경재(敬齋)이며 본관은 합천이다. 익산군 팔봉면 덕기리(八峰面 德基里)출신으로 전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에 있었다. 1948년 5월 10일에 행한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에 익산군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입후보자 4명을 물리치고 당선하였다. 그 후 사회민주당 집행위원, 한독당(韓國獨立黨) 중앙위원을 지내고,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조직부장으로 있을 때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12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 6․25전쟁때 출옥하여 월북했다.
■국회 프락치사건(1949)
1949년 제헌국회 내의 일부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을 주장하다 정부에 의해 남조선노동당의 국회내 프락치 역할 혐의로 국회의원들이 대거 구속되었던 사건.
당시 수사당국이 밝힌 내용을 보면 김약수(金若水)․노일환(盧鎰煥)․이문원(李文源) 등 국회 내 소장파 의원들이 이삼혁(李三赫)․이재남(李載南) 등 남조선노동당 특수공작원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제헌국회 내에서 외국군 철퇴와 국가보안법 반대, 남북통일협상촉구 등 남조선노동당의 노선을 실행하기 위해 공작했다고 되어 있다. 수사당국이 밝힌 증거는 38선을 넘으려다 붙잡힌 정재한(鄭載漢)이라는 여인이 가지고 있던 박헌영(朴憲永)에게 보내는 암호문서였다. 이 사건은 헌병대와 검찰·경찰이 합동으로 수사했으며, 관련의원들의 검거는 1949년 4월말부터 8월 중순까지 3차에 걸쳐 실시되었고, 총 13명의 의원들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1심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은 후 이에 불복 항고, 2심에 계류중 6·25전쟁으로 서울이 북한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자 서용길 의원만 제외하고 모두 월북했다. 이들은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협의회 간부를 역임하다가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에 대한 시각은 당시의 수사 내용처럼 공산당의 지령을 받은 소장파 의원들이 이른바 민족자결을 내세워 외국군대 철수요구 및 기타 공산당의 입장을 대변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김원룡(金元龍) 1909 ~ 1950
현대의 교육가. 본관은 김해(金海), 익산군 여산면 여산리(礪山面 礪山里) 출신으로 유헌(悠軒) 김종원(金鐘遠)의 아들이고, 여산초등학교의 전신인 호산학교(壺山學校)를 설립하고 여산과 금마(金馬)사이의 도로변에 나무를 심어 우리나라 가로수의 효시를 이루었으며, 바둑에 뛰어나 국기(國碁)로 손꼽히던 성재(誠齋) 김영진(金英振)의 장손이기도 하다.
1916년 여산공립보통학교 입학하여 졸업하고, 1922년 전주공립농업학교를 중퇴하였다. 1923년전주도립사범학교 입학하여 졸업 후 1926년 김제군 월촌공립보통학교 훈도를 시작으로, 1930년 순창공립보통학교에서 근무하였다. 1933년 사상문제로 피검되어 2년간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고, 출옥 후 전북일보 순창지국장(淳昌支局長)을 역임하였다.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순창군 위원장으로 일시 정계에 투신하였다가 곧 교육계에 복귀 순창농림고등학교 교사, 1947년 이리공업고등학교, 1948년 군산중학교에서 봉직하였으며, 1948년 동명중학과 이리중학교를 합병한 재단법인 이리학원의 초대 이사장으로, 교육과 육영사업에 헌신하였다. 인품이 호방하고, 성격이 강직하며, 불의와 타협치 않는데다가 지기가 뛰어나 일화가 많다.
양완섭(楊完燮) 1910 ~ 1964
자는 마산(馬山), 호는 우청(又靑)으로 춘포면 문덕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왕궁면 도순리에 이거하여 살았다. 본관은 남원(南原)으로 시문(詩文)과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었다.
일본강점기에 왕궁면 도순리에 김만기(金滿基)가 개설한 시대야학에서 인근의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불우한 청소년을 모아 학문과 한글을 약 8년간 가르쳐 민족의식을 깨우쳐 주었다. 송영식(宋瓔植), 소찬영(蘇贊永), 홍순태(洪淳太)등과 교유하면서 많은 시작(詩作)을 남겼으며 6.25전쟁 중에는 북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문집으로『우청유고(又靑遺稿)』가 전하며 13살부터 시작하여 타계(他界)한 1964년까지 쓴 수 십 권의 일기가 전하고 있다.
신쾌동(申快童) 1910 ~ 1977
본명은 복동(卜童)이며 호는 금헌(琴軒)이다. 익산군 삼기면(三箕面) 출생으로 선조(先造)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율(律)을 좋아하여 9세 때 박생순에게 양금(洋琴)을 배웠고, 박학순에게 가야금정악과 산조를, 13세 때 정일동에게 거문고풍류를, 16세 때 거문고산조의 창시자인 백낙준에게 거문고산조를 배웠다. 백낙준이 짠 진양· 중모리· 자진모리에 중중모리· 엇모리를 창작하여 신쾌동류 거문고산조를 만들었다. 당시 활동하던 판소리 명창들과 전국을 돌며 연주활동을 했고, 1933년 5월 10일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하여 기악부에서 당시 산조의 대가들인 박상근·강태홍·김종기·한주환 등과 활동을 하면서 후진양성과 창극운동에 앞장섰다. 1958년 대한국악원 이사, 전주 국악원장을 지냈다. 국악예술학교에서 후배양성에 힘썼고,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77년에 녹음한 〈현금곡전집 玄琴曲全集〉이 있다. 신쾌동류 거문고산조는 진양조 27장단, 중모리 76장단, 중중모리 42장단, 엇모리 48장단, 자진모리 255장단으로 이루어졌다.
소병돈(蘇秉敦) 1911 ~ 1977
현대의 교육자. 자는 경일(卿一)이며 호는 매하(梅下)이다. 본관은 진주(晉州)로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金馬面 東古都里)출신이다. 평안병사(平安兵使) 두산(斗山)의 11대손이며 상영(祥永)의 아들이다. 전주북중과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육계에 투신하여 일선교사로 재직하고 익산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익산교육위원회 부위원장, 사립중고등학교 중앙 대의원으로 활동하고, 문화재 연구와 보존에도 관심이 많아서, 익산고적보존회(益山古蹟保存會) 회장(會長)을 역임하여 이 분야에 이바지한 바 크다. 40여 년간 후진양성에 헌신하였으며 증조(曾祖)가 건립한 몽죽당서재(夢竹堂書齋)를 중수한 바 있고, 고서(古書)들 곧 족보(族譜), 선대선현(先代先賢)의 문집(文集), 시서(詩書), 경전(經傳) 등 수천 권의 책들을 소장․보존하였다. 묘는 금마면 동고도리 금마산 서록(金馬山 西麓)에 있는 자택 뒤에 있다.
윤택중(尹宅重) 1913 ~ 2002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자 교육자, 공무원이었다. 1936년 보성전문학교를 마치고 1943년 일본 주오대학(中大)법학부를 졸업하였다.
해방이후 전라북도 교육청 학무국장과 전주명륜대 학장을 역임하고 2대 국회위원선거에서 익산군을에서 당선되어 국회문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이어 1954년 단국대학교 학장을 역임하였다.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역시 익산군을에서 당선하고 제5대 역시 익산군을에서 당선하여 1960년 문교부 정무차관에 이어 1961년 5월 3일에 장면 내각에 의해 발탁되어 문교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지만, 1961년 5·16 군사 정변 직후 개각으로 단 17일 만에 물러났다.
1971년 신민당 지도위원회 부의장, 민족통일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1993년부터 2002년까지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제4대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백형남(白亨南) 1915 ~ 1950
현대의 정치인이다. 익산군 황등면 황등리(黃登面 黃登里) 출신으로 일본대학(日本大學) 문과 3년 때 중퇴하였다.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익산군 단장으로 있으면서 1948년 5월 10일에 실시한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선거(制憲國會議員)에 34세로 익산군 갑구에서 출마하여 입후보자 네 사람 중에서 당선되었다. 1950년 6․25전쟁 중 고향에서 북한 공산군에게 피살당했다.
소병욱(蘇秉郁) 1915 ~ 1962
현대의 사회사업가. 자는 동암(東岩), 호는 아석(啞石), 익산군 왕궁면 동촌리(王宮面 東村里)출신이다. 어모장군임치진첨절제사(禦侮將軍臨淄鎭僉節制使) 세온(世溫)의 15대손이며 연안(延安) 이관(李寬)의 외손이고 화영(華永)의 아들이다. 모암(慕菴) 소진우(蘇鎭佑)의 문인이다. 한문수학 15년 후 공주영명실수학교(公州永明實修學校)를 졸업하고 향리(鄕里)에서 후진교육을 위하여 농업기술학교를 설립, 운영하면서 빈한(貧寒)하여 진학하지 못하는 농촌아동들에게 중학과정의 교육을 하였으며 『도의교본(道義敎本)』과 『삼명교본(三明敎本)』을 저술하여 예의와 사회도덕에 공헌하였고 민선면장으로 당선되여 4년의 임기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다.
강수원(姜壽遠) 1920 ~ 1979
현대의 생물학자. 호는 노호(鷺湖)이며 본관은 진주(晉州)로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益山郡 金馬面 東古都里) 출신이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어류․육수학(陸水學)을 전공하였다. 서울대학교 농생물학과 교수(1954~1979년)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서울대학교 농대학장(1963년)과 한국육수학회 회장(1972년)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한국어류생태학(韓國魚類生態學)』 현대활자본 1책과 『한국육수학(韓國陸水學)』현대 활자본 1책외 10권, 주요논문으로는「미네소타 주립 양어장 치어 생산고 요인에 대하여」외 15권이 있다.
홍건표(洪建杓) 1923 ~ 1975
현대의 독립운동가. 자는 경중(敬中), 호는 호산(壺山)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익산 금마면 도천(金馬面 道川) 출신이다. 경복중학(景福中學)을 다닐 때, 장의찬(張宜燦)․이현상(李賢相)․성익환(成益煥)․최호(崔昊)․주낙원(朱樂元)․명의택(明義宅)등과 조국 광복에 헌신할 것을 약속하였고, 1941년 보성전문대학교 재학 중 위 동지들과 이른바 흑백당(黑白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하던 중, 동지 한사람이 체포되어 1944년 대전 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에 해방되어 출옥하였다.
조국광복 후 교육계에 투신하여 전북대학교 강사를 역임하고, 이후 전주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 과로로 순직하여 교장으로 승진 추서되고, 1984년에는 국가보훈처에서 금마면 신용리 용화산 아래 「애국지사비」를 건립하여 그 공적을 기렸다. 1990년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이집길(李集吉) 1923 ~ ?
함라면 함열리 출신으로 일본에서 음대를 마치고 8․15 해방과 더불어 고국에 돌아와 영화배우로 활약했다. 영화배우 김진규, 도금봉 등이 그의 문하생이며 출연작품으로는《끊어진 항로》,《성벽을 뚫고》,《애정산맥》,《열애》등이 있다.
송형규(송형규) 1924 ~ 1950
호는 문평(文平), 본관은 진천(鎭川)으로 판서 우곡(藕谷)공 창(昌)의 후손이다. 왕궁면 용화리 화곡에서 출생했으며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문필(文筆)을 일찍 성취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하며 전주 북중학교 재직시절에 한국작가협회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이정호(李正浩) 1927 ~ 1991
자는 명우, 호는 두촌(豆村)으로 춘포면 천서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옥녀(玉女)의 장남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춘포공립보통학교를 마친 후 선린상업학교와 전주농림학교를 거쳐 전북대학교 및 서울신문학원을 졸업하고 자유신문, 연합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하다가 1960년 4․19혁명직후 전북수리조합 최연소평의원으로 피선되어 농촌개혁운동에 전념하던 중 5․16군사 구테타로 뜻이 좌절되자 다시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17년간 기자로 활동하였다.
1964년 진통주사제에 마약을 넣어 제조한 제약회사를 잠입취재한 후 매수, 회유,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언론인의 투철한 사명감으로 《메사돈 사건》을 특종 보도하여 의학계는 물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제1회 전북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동아일보 신입기자교 육시에는 바람직한 기자상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유신치하말기에 동아일보사를 떠나 <한국역사문제연구소>, <민요연구회>, <민학회>, <땅이름학회>, <이수학회>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전국 곳곳의 산과 들을 밟으며 우리 민족문화와 역사연구에 심취하였다.
시집으로 『사과와 돼지와 농부』,『지구멀미』,『수렵시대』등 10여권의 동인지가 있고, 역서(譯書)로 『관동군』을 펴내는등 작가로서도 활약하였다. 또 사라져가는 농촌공동체 문화보존을 위해 무형문화재《호남우도굿》연구와 이리농학전수관 건립에도 노력하였다.
김현기(金顯基) 1924 ~ 1978
현대의 정치인. 익산군 팔봉면 월성리(八峰面 月星里) 출신으로 1947년 서울대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이리농림학교(裡里農林學校)에서 교사로 근무하였고 월간지『인물계』를 창간하기도 하였다. 1952년 민주당 창당 발기인이 되면서부터 정치가의 길을 걸었다.
1967년 6월 8일 제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新民黨) 전국구(全國區) 19위로 추천을 받아 처음에는 당선권에서 벗어났으나 앞 순위인 김도연(金度演)후보의 돌연한 사망으로 인해 원내에 진출하게 된 이후 뛰어난 정치역량을 보이며 1971년 5월 1일에 실시한 제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1972년 국회를 해산하고 유신헌법에 따라 1973년 2월 27일에 실시된 제 4공화국 제 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1978년 12월 12일에 실시한 제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4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6년 신민당 감찰위원 및 중앙상임위원, 1973년 정무위원, 1976년 중앙당기위원장 등을 거치면서 제1야당인 신민당의 중진급 인사로서 당 운영을 주도하였다. 또한, 재정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국회의 재무위원회나 본회의에서 경제 전반에 걸쳐 정부의 경제정책을 신랄하게 추궁하면서 서민대중의 권익을 위한 대안을 시의적절하게 제시하였다.
이리· 군산· 옥구· 익산이 지역구인 그는 탄탄한 지역구 기반을 가져 원만한 의정활동이 기약되었으나,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깝게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김용문(金容文) 1929 ~ 1987
호는 동석(童石)으로 당시 익산군 팔봉면 덕기리 출신이다. 경희대학교를 중퇴하고 서울에서 살다가 타계하였는데 늘 고향에서 살기를 원했다고 한다.
시집으로『고금마』가 있으며 유고시(遺稿詩)가 다수 전한다. 불경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산과 수석을 좋아하였다.
소기섭(蘇起燮) 1930 ~ 1988
현대의 시인. 호는 남초(南初)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익산군 왕궁면 왕궁리(王宮面 王宮里)출신으로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향리로 돌아와 신파극, 동서회 등 문학에 몰두하였으며 이상농촌(理想農村)을 꿈꾸기도 하였다. 『전북문학(全北文學)』동인으로 활약하였으며 시집으로 『여가의 습작』이 있고 유고시집으로 『내 마음 강물처럼』이 출간되었다.
김용세(김용세) ? ~ 1947
용안면 칠목리 출신으로 본관은 금녕(金寧)이다. 용안찰방으로 향민에게 덕을 베플고, 모범부락 건설에 공이 컸기에 현민들이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소병호(蘇秉鎬) 1931 ~ 1986
왕궁면 발산리에서 교육열이 남달리 강한 편모슬하에서 자라 전주 상생초등학교, 전주남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중학교때 일본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돌아와 동학미술학원을 운영하던 박병수에게 김영창과 함께 사사받았다.
서울미대에 진학한 뒤로는 박득순 화백에게서 사사를 받았으며 후에 전주에 내려와 전북 최초의 현대식 아뜨리에를 열어 작품제작 및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국전 22회 때는 인물화로, 25회 때는 풍경으로 입선하였다. 이리(2회)와 전주(2회), 정읍(2회)에서 개인전을 열어 지방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전주여중, 남성고등학교, 동신여고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였고, 전북대학교 강사를 역임하였으며 전북도전 초대작가와 미협 이리지부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오직 예술의 순수성을 고수하며 그림 속에서 살다간 호기 있고 개성이 강한 예술인이었다.
강병식(康秉植) 1953 ~ 1988
오산면 신지리 출신으로 본관은 신천(信川)이다. 오산국민학교와 이리동중학교, 이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1975년 31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된 후 소대장, 중대장을 거쳐 최전방 승리부대에 근무했다.
1988년 적의 초소에서 1.2km 떨어진 철책선 보강작업중 갑자기 강풍이 불어와 조경보 보조물 빈병이 지뢰위로 넘어지자 당시 대대장이던 그는 ?엎드렷!?소리를 크게 치고 지뢰위로 몸을 덮쳐 부하 14명을 구했으나 뒤따르던 이동진 중위와 함께 그는 산화하고 말았다.
이리고등학교 동창회에서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위훈을 기리어 모교 서편에 동상(銅像)을 건립하였다. 승리부대에서도 1989년에 각계의 성금으로 높이 4.5m의 시멘트 탑에 화강암을 붙여 고인들의 생전모습을 재현하였고, 후면에는 부하사랑의 비문을 새겨 추모비를 세웠다. 국군묘지에 안장되고 대령으로 추서되었으며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다.
소행진(蘇行震) ? ~ 1592(선조 25)
조선중기의 순국열사.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익산군 금마면 용순리(金馬面 龍脣里) 출신으로 소세득(蘇世得)의 증손(曾孫)이며, 소세양(蘇世讓)의 종증손(從曾孫)이다. 부친은 소종선(蘇宗善)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같은 고향 출신인 이보(李寶)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선무랑에 재직 중이던 그는 아버지의 상(喪)이 끝나지 않아 검은 상복[黑縗]을 입고 출전하였는데, 금산 왜진(倭陣)으로 나아가다가 진산 배재(梨峴 또는 梨花峴)로 진군하여 전투를 벌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많은 적병을 죽였으나, 곧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자 이보와 함께 부둥켜안고 순절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큰아들 소계(蘇繼)가 발상 3일 후에 진산으로 달려가 또한 전사하였고, 둘째 아들 소동(蘇同)이 형의 전사 소식을 듣고 적진에 달려가 또한 전사함으로서 3부자가 모두 순국하였다.
당시 둘째 아들의 부인 민씨는 강화의 친가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절사(節死)하였는데, 온 가족이 절사하여 자손이 끊어진 까닭에 공적이 잊혀졌다. 1780년(정조 4) 군내 유림이 글을 지어 호소하여, 1783년(정조 7)에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증직되고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1843년(헌종 9) 익산군 팔봉면 은기리 은천사(隱泉祠)에 이보와 함께 배향되었다.
▣일성록 정조 7년 1월 23일
또 익산(益山)의 충신 소행진(蘇行震)의 일을 읽어 아뢰었다. 내가 이르기를,
“그의 충렬이 이실(李實)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혼자만 표창하는 은전이 없었으니 참으로 딱하고 애처롭다. 이실의 예대로 증직하고 정려하라.”
하였다.
탁상(卓祥) ? ~ 1597(선조 30)
조선중기의 의병. 자는 지서(之瑞), 본관은 광산(光山), 익산군 북일면(北一面) 출신으로 율의 아버지이다.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싸우고 정유재란 때 또 출전하여 전사하였다. 조봉대부 호조좌랑(朝奉大夫 戶曹佐郞)에 증직되고 정려(旌閭)가 내렸다. 익산시 북일에 그의 정문(旌門)이 있었다.
황포(黃褒) ? ~ 선조
조선중기의 의병․열사로 자는 곤부(袞夫)이며 호는 성남처사(城南處士)하였다. 본관은 우주(紆州)이며 익산군 출신으로 문숙공(文肅公) 거중(居中)의 6세손이며 진사 응침(應琛)의 아들이고 우(祐)와 형제간이다. 소모사(召募使) 이정만(李廷鸞)의 사돈으로, 거상(居喪)중에 임진왜란을 당했는데 사돈 소모관 이정란이 그 아들 도길(道吉 : 포(褒)의 사위)를 보내어 계책을 물으니, 이에 대해 포(褒)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써주었다.
「風塵萬馬洞 虛實有誰知」만마가 풍진을 이는 가운데, 허와 실을 누구 있어 알겠는가?
정만(廷鸞)이 이것을 보고 상중이라도 복직하여 출전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거상 중 궐기할 수가 없어 종제(從弟) 참봉 상길(裳吉)로 하여금 창의(倡義)토록 하였던 바 의병(義兵) 수 백 명이 모여들었으므로 포(褒)가 그들을 이끌고 고산(高山)에 나아가 적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김봉(金鳳) ? ~ 1597(선조 30)
조선중기 무신. 호는 학은(學隱)이며, 본관은 김해(金海: 金寧)이다. 익산군 출신으로 금녕군(金寧君) 시흥(時興)의 후손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경력(經歷)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한 뒤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병으로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7년(1604) 6월 25일
<대대적으로 공신을 봉하니 명칭은 호성 공신, 선무 공신, 청난 공신이다.>
공신(功臣)들의 명칭을 정하여 대대적으로 봉(封)했는데,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始終) 거가(車駕)를 따른 사람들을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奏請)한 사신(使臣)들은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람은 청난 공신(淸難功臣)으로 하고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있게 명칭을 내렸다.
남준(南俊) ? ~ 1593(선조 26)
조선중기의 한학자․무인. 호는 매계(梅溪)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익산군 출신으로 부정(副正) 덕룡(德龍)의 아들이며 간(侃)의 형이다. 장예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를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조헌(趙憲)과 함께 군병을 거느리고 군량(軍糧)을 날랐으며 금산(錦山)에서 왜적과 교전하다가 조헌과 같이 전사했다. 후에 갈산원(葛山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남간(南侃) ? ~ 1597(선조 30)
조선중기 무신.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익산군 출신으로 부정(副正) 덕룡(德龍)의 아들이고 준(俊)의 동생이며, 재영(再榮)의 아버지이다. 선조 때 운봉현감(雲峰縣監)으로 재직 중 임진왜란을 맞게 되자 힘을 다하여 성(城)을 지켰다. 그 때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호남과 영남 지방을 왕래하며,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과 더불어 분전(奮戰)하다가 남원 전투에서 전사했다.
▣고대일록 제 2권 1596년 7월 2일
중국 사신의 군마(軍馬)가 순창(淳昌)으로 향하였다. 오후에 칙서(勅書)를 가지고 온 중국 장수와 접반관(接伴官) 및 운봉 현감(雲峯縣監) 남간(南侃)이 군(郡)에 이르렀는데, 하리배(下吏輩)가 모두 숨고 달아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중국 사람과 통사(通事) 및 운봉(雲峯) 사람 등이 여염집을 수색함이 꿩이나 토끼를 사냥하듯 하여, 만나기만 하면 결박을 지어 형장(刑杖)을 자행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놀라고 겁내어 남녀를 불문하고 미친 듯 달아나, 있는 힘을 다해 산골짜기로 숨어들어 가 노숙을 하며 돌아오지 않았다. 이 무슨 세상의 변고인가. 향소(鄕所)의 공형(公兄)은 죄를 받음이 마땅하다. 무고(無辜)한 이 백성이 무엇을 좇아 살란 말인가. 남간(南侃)의 인물됨은 가증스럽고 가증스럽다.
▣고대일록 제 2권 1597년 4월 5일
참판(參判)이 창고를 점검해 보니, 관(官)에서 저장하고 있는 물건들이 모두 장부에 올라 있어 한 섬도 빠진 것이 없었다. 성주(城主)가 몸가짐을 청렴히 하여 사사로이 한 말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마치 어린아이의 밥도 덜어 내는 듯이 하여 제공하지만 물고기나 술 등의 물건은 마련할 길이 없으니, 가련하기 짝이 없다. 합천(陜川)ㆍ거창(居昌) 같은 곳은 많이 감춰 두었다가 사사로이 쓰는 것이 예사이고, 운봉(雲峰)의 수령 남간(南侃) 같은 이는 더욱 심하다.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8월 전라도 남원성에서 있었던 일본군과의 싸움. 1597년 7월말 우키다[宇喜多秀家]와 고니시[小西行長] 등이 이끄는 일본군 5만 6,000여 명이 북상하고 있었다. 조선과 명(明)의 연합군 4,000여 명은 남원에 병력을 집결시켜 이에 대응하고자 했다. 양원(楊元)의 명군 3,000명과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임현(任鉉) 등은 남원으로 가서 성을 지키고, 유격장(遊擊將) 진우충(陳愚衷)은 전주를 지키면서 남원성전투를 도왔다.
8월 6일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이 남원성에 들어오고 이어서 문안사(問安使) 오응정(吳應井),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등이 남원성에 들어왔다. 13일에 일본군이 남원성에 도착하자 이날 밤부터 전투가 벌어졌다. 4일간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나 이복남· 이신방을 비롯한 장수들이 전사하고, 명나라 장수 양원만이 살아서 탈출한 채 성은 함락되었다. 남원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진우충이 그대로 도망가 버림으로써 전주성은 싸움 없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남경룡(南景龍) ? ~ 선조
조선중기 무신. 본관은 의령(宜寧), 익산군 출신으로 부위(副尉) 응곤(應坤)의 아들이다. 선조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주부(主簿)가 되어 훈련원(訓練院)을 지키다가 임진왜란에 출전하여 적병 10 여인을 죽였으나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어 힘겨운 싸움을 치르며 힘이 다하자 자살하였다.
노응탁(盧應晫) ? ~ 1592(선조 26)
선조․광해군대의 의사(義士). 자는 계회(季晦), 호는 국재(菊齋), 본관은 만경(萬頃), 익산군 출신. 고려조 이부시랑(吏部侍郞) 극청(克淸)의 후손. 임진왜란에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접전하다가 금산(錦山)싸움에서 그의 큰형과 함께 같은 날에 전사했다.
▣난중잡록 2(亂中雜錄 二) 선조 25년(1592년) 8월 27일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과 중[僧] 의장(義將) 영규(靈圭) 등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치다가 패하여 죽다. 그 뒤 만력 23년 을미년(1595, 선조 28)에 전지(戰地)에 비를 세우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아! 여기는 증 참판(贈參判) 조공(趙公)이 순절한 땅으로서 부하와 함께 죽은 병사들이 매장된 곳이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 25)에 왜란이 갑자기 일어나니, 우리 땅을 범하였다. 우리 군사가 닿는 곳마다 번번이 붕괴되어 감히 그 칼날을 막는 자가 없었다. 왜적이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고 마구 몰아서 바로 한강을 건너오니 삼경(三京 한양(漢陽)ㆍ개성(開城)ㆍ평양(平壤))이 모두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나 근왕(勤王)하는 자가 전혀 없었다. 이때에 공이 옥천(沃川)의 시골집에 있다가 홀로 분연히 일어나서 피를 뿜으며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순찰사와 수령들이 모두 방해하였다. 공이 잉에 동지와 문생인 전승업(全承業)ㆍ김절(金節) 등과 더불어 충청 우도로 달려갔더니 전 참봉 이광륜(李光輪)과 선비 신난수(申蘭壽)ㆍ장덕개(張德盖)ㆍ고경우(高擎宇)ㆍ노응탁(盧應晫) 등이 공의 의기를 사모하여 앞 다투어 와서 모였다. 드디어 군사와 군량을 모집하고 혹은 기계를 주조하여 7월 4일에 공주(公州)에서 기(旗)를 세우니 군사가 1천 7백이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년 (1609) 3월 23일
<충청도 유생 노응탁이 상소하여 조헌의 사우에 사액하기를 청하다>
충청도 유생 노응탁(盧應晫)이 상소하여 조헌(趙憲)의 사우(祠宇)에도 고경명(高敬命)의 포충사(褒忠祠), 김천일(金千鎰)의 정열사(旌烈祠)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소를 살펴 보니 충신을 드러내려는 다사(多士)들의 정성이 가상하다. 마땅히 의논해 처리하겠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해조에 내려 회계하게 하라.”
하였다.
주)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동명인인 노응탁(盧應晫)이 조헌과 관련한 상소를 하고 있다. 노응탁이 익산출신이 확실한지, 금산전투에서 죽은 것이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다.
■난중잡록(亂中雜錄)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쓴 일기 형식의 기록이다. 산서야사(山西野史)라고도 한다. 그가 13세 때인 선조(宣祖) 15년(1582)부터 인조(仁祖) 16년(1638)까지 57년간의 국내 정세를 기록한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대목은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다루어진 자료가 많다. 그것은 난중일기가 이순신 직속부대의 실제 전황을 기록한 것인 데 반해, 난중잡록은 당시 임진·정유 양란의 전반적인 상황과 국내외 정세를 사실 그대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는 난중일기보다 훨씬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정승서(鄭承緖) 선조 ~ 광해군
선조․광해군대의 무신으로 자는 경회(景恢)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익산군 출신으로 참판 기(基)의 아들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병사(兵使)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에 조중봉(趙重峰)과 같이 나가 금산(錦山)싸우다가 한쪽 눈을 상하였다. 선조의 의주 파천에 호종(扈從)하였기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을 받아 서북면 병마사, 중추부사(中樞府使)가 되었다. 광해군의 폐모(廢母) 때는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과 뜻을 같이하여 반대하고 벼슬을 버리고 은산 대암(恩山 大岩)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종신불서류(終身不敍類)〉
행 호군 정승서(鄭承緖) : 전지(傳旨)하였다.
“지나간 무신년 임해군의 옥사를 만들 때에 그때 수문장으로 있으면서 짚으로 만든 자리에 병기를 싸서 두었다는 말을 김위(金渭)에게 하였고, 그래서 고변하였다. 임해군의 역적 옥사를 만든 것은 실로 이 두 사람에서 연유된 것이다. 김위는 다행히 죽었으나, 정승서는 아직도 당상관의 직명을 가지고 있으니, 잡아서 국문하라.”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조선 중기의 인조반정(仁祖反正)과 이괄(李适:1587~1624)의 난을 일기체로 엮은 책. 필사본으로 지은이는 알 수 없다. 1권 1책.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 서인(西人) 김류(金瑬) · 이귀(李貴) · 김자점(金自點) · 심기원(沈器遠) · 최명길(崔鳴吉) · 신경진(申景稹) · 심명세(沈命世) · 이서(李曙) · 이괄(李适) · 이중로(李重老) · 장유(張維) 등이 반정(反正)을 모의하고 궐기하여 광해군을 폐출(廢黜)하고, 능양군(綾陽君:인조)을 옹립한 사건의 경위를 적었다. 서인이 집권하게 됨으로써 요직(要職)에 대한 포열(布列), 공신(功臣)의 책봉(冊封), 북인(北人)들의 숙청 등을 단행한 일련의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또, 인조반정 때 북병사(北兵使)로 임명을 받고 임지로 가기 전에 반정모의를 알고 이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이괄이 그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1624년(인조 2)에 반란을 일으킨 ‘이괄의 난’에 대하여도 간략하게 적어 놓았다.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수록되어 있다.
손승제(孫承悌) ? ~ 선조
임진란의 순국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익산군 출신. 예문관 부제학(藝文館 副提學)을 지낸 비장(比長)의 현손. 대교(待敎) 홍적(弘籍)의 아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 중 경기도 양성(陽城;안성군安城郡에 병합됨)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송건(宋建)? ~ 1592(선조 25)
조선중기의 무신. 자는 사립(士立)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충강공(忠剛公) 간(侃)의 5세손으로 익산군 출신이다. 1588년(선조 2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북변(北邊)의 군영에 보직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방장(助防將) 양사준(梁士俊)의 선봉으로 활약했다. 그 공으로 성주판관(星州判官)이 되었다. 그 뒤 함창(咸昌; 상주尙州)싸움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흥양(興陽)의 세충사(世忠祠)에 배향되었다.
송대창(宋大昌) ? ~ 1593(선조 26)
조선중기의 무신. 자는 덕형(德亨)으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익산군(당시의 여산현(礪山縣) 소속) 출신으로 군수 기의 현손이며, 관직이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에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의 막하에 들어가 진주(晉州)싸움에서 많은 적을 죽이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모두 같이 전사했다. 선무원종훈(宣武院從勳)을 받았다.
오세우(吳世佑) 선조
조선중기의 무관, 본관은 동복(同福), 언일의 아버지. 익산군 출신. 선조때 무과에 급제하여 개운포 만호(開運浦 萬戶),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 정략장군(定略將軍)에 이르렀으나 임진왜란 중 진주에서 전사하였다.
오응현(吳應賢) ? ~ 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공신으로, 자는 방좌(邦佐)이고, 호는 추강(秋江)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출신지는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팔봉면(八峰面)이다.
부친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오인(吳麟)이고, 동생으로 오응필(吳應弼)과 오응철(吳應哲)이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들과 함께 의병 대장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금산(錦山) 전투에 참여하였다. 왜적 수십 명을 죽였으나 몰려드는 적을 당해 내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그 공을 기리어 조정에서는 그를 주부(主簿)로 추증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으로 녹훈(錄勳)하였으며, 덕천사(德川祠)에 배향하였다.
오응필(吳應弼) ? ~ 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공신으로, 자는 방축(邦軸)이고, 호는 백천(栢川)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출신지는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팔봉면(八峰面)이다. 부친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오인(吳麟)이며, 형으로 오응현(吳應賢)이 있다. 1582년(선조 15) 무과에 합격하여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를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오응현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의병을 거느리고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금산(錦山)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때 수십 명의 왜병을 벤 공으로 수문장(守門將)이 되었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전사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고 덕천사(德川祠)에 배향되었다.
이서원(李瑞遠) 선조
조선중기의 무인. 자는 선영(善英), 본관은 전주, 첨지중추(僉知中樞) 사진의 아들. 여산현(礪山縣) 출신. 임진왜란에 순찰사(巡察使) 이광근(李洸勤)을 좇아 용인(龍仁)에 가서 백광언(白光彦)과 더불어 출전했는데 백광언이 전사하자 이서원이 말을 달려 적진에 들어가 적 두 사람을 사살하고 백광언의 시체를 수습하려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적을 꾸짖으며 힘대로 싸웠으나 미치지 못하고 죽었다.
최빈(崔賓) ? ~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공신. 호는 화암(花岩). 본관은 해주(海州), 익산군 출신, 병조참판 치운(致雲)의 아들, 임진왜란에 왕을 호종할 때 왕의 수레를 끌던 말이 갑자기 쓰러져 죽자 최빈이 왕을 업고 가던 중병으로 죽었다.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해릉군(海陵君)으로 봉했다. 정려(旌閭)가 내렸다.
최호(崔虎) 명종~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문백(文伯). 호는 석봉(石峰), 본관은 탐진(耽津), 익산군 출신, 병조판서 징(澄)의 후손, 선무랑(宣武郞) 맹손(孟遜)의 아들, 대붕(大鵬)의 할아버지, 근력이 절륜하여 6백근 무게의 무쇠를 들어올릴 정도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황박(黃璞)과 함께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을 따라 진산(珍山) 배치(이현 梨峴) 전투에 나가 창을 들고 싸워 위세를 떨쳤으나 전사하였다. 후에 조정에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반윤형(潘尹衡)1665(현종 6) ~ ?
조선후기의 한학자. 본관은 광주(光州), 익산군 함열(咸悅) 출신. 진수(進洙)의 아들. 1690년(숙종 16)에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찰방(察訪)을 지냈다.
김수견(金守堅)광해군 ~ 숙종
조선후기 한학자. 호는 서계(西溪), 본관은 함창(咸昌), 익산 출신. 감찰(監察) 익진(翊震)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현종 때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월주집(月洲集)
송시열의 문인인 소두산(蘇斗山:1627(인조5) ~ 1693(숙종19))의 문집이다. 저자는 송시열(宋時烈)의 제자로서 철저하게 노론(老論)을 따르다가 금고(禁錮)중에 죽었는데 자손도 가세를 떨치지 못하고 문인(門人)마저 없어 유고(遺稿)를 수습할 형편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나마 유고를 보존하고 저자의 유사(遺事)를 소략하게나마 정리한 이는 묘지명(墓誌銘)을 쓴 저자의 사위 權忭이었다.
본집은 5권 3책으로 권두에 趙斗淳이 1866년에 쓴 서문이 있고 總目錄이 실려 있다.
권1은 詩로 약 180題의 시가 실려 있다. 전체적으로는 詩體에 관계없이 編年順으로 구성된 듯 한데 편차의 기준이 뚜렷하지 않다. 앞부분의 〈次李白紫極宮感秋〉 이하 10題는 모두 月課詩이고, 〈金交河翊震挽〉 이하 17제는 모두 挽詩이다. 그 뒤로는 대략 저작 연도순이고 권말에는 또 20제 가량 挽詩가 몰려 있다. 시의 본문에는 인물이나 지명 등에 대한 간단한 註가 달려 있는데 본집이 후대에 편차된 것을 고려해 볼 때 대부분 編者가 작성한 주로 보인다. 시를 수창한 대상은 僧侶 一愚, 李雲林, 黃翼漢, 金守堅, 李敏敍, 崔栴, 생질인 趙泰徵, 金洧 등인데, 東萊 府使로 있던 1683년을 전후한 시기와 義州 府尹으로 재직하던 시기의 작품이 많다.
송수량(宋秀良) 1666(현종 7) ~ 1737(영조 13)
자는 수부(秀夫)이며, 우곡(藕谷) 창(창)의 아들이다. 벼슬은 삭령군수(朔寧郡守)를 지냈으며, 양주군 배양동 천수리 선영묘소 앞에 숙소를 신축하였다. 1728년(영조 40)에 참분무훈(參奮武勳)을 훈(勳)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경종 3년(1723) 4월 1일
<아산 현감 송수량·금천 군수 이중국을 나문하여 정죄하게 하다>
간원(諫院)【정언(正言) 유시모(柳時模)이다.】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아산 현감(牙山縣監) 송수량(宋秀良)은 조미(糶米)를 갑절로 거두어 들이고 재결(災結)을 사사로이 이용했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금천 군수(金川郡守) 이중국(李重國)은 춘분(春分) 뒤에 그 처(妻)를 데리고 가면서 첩(妾)의 행차라고 속였고, 뇌물을 받고 짐짓 살옥(殺獄)을 풀어주었으며, 군정(軍丁)을 찾아내어 아전과 이익을 나누었으니, 청컨대 또한 나문하여 정죄하소서.”
하니, 임금이 다만 송수량과 이중국의 일만 따랐다.
정국빈(鄭國賓) 1677(숙종 3) ~ 1727(영조 23)
조선후기의 유학자. 자는 여용(汝用). 호는 곤유(壼臾) 또는 서와(書窩)이다. 본관은 영일 (迎日)이며 익산군 북일면 출신이다. 통훈대부 숙주(叔周)의 손자이며 부친은 정상린(鄭祥麟)이다. 1717년(숙종 43) 식년 사마시(式年 司馬試)에 진사가 되었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경전(經傳)연구에만 전심했다. 우암(尤菴) 송시열과 동춘(同春) 송준길의 문묘배향을 요청하는 소(疏)를 올리기도 했다. 후에 통덕랑(通德郞)에 증직되었다.
▣송자대전 부록 제12권
5도(道) 유생이 계속 상서하여 선생의 배향을 청하였다. 영남(嶺南) 유생 성덕징(成德徵) 등이 상서하여 선생의 문묘 배향을 다시 청하였고, 호남 유생 정국빈(鄭國賓) 등이 상서하여 최창대(崔昌大)가 선생을 무함한 것을 변론하고 이어 선생의 배향을 청하였고, 경기(京畿)ㆍ충청(忠淸) 유생 윤수준(尹壽俊) 등도 상서하여 배향을 청하면서 박현석(朴玄石)까지 배향하기를 거론하였다. 정언(正言) 정택하(鄭宅河)가 박공까지 거론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니, 세자는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써 대답하였다.
■송자대전(宋子大全)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송시열(宋時烈)의 문집. 1717(숙종 43)년에 간행된 구본과 1847(헌종 13)년에 간행된 신본이 있다. 총 215권 102책이다.
송사윤(宋思胤) 1667(현종 9) ~ 1742(영조 18)
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석여(錫汝), 호는 시은(市隱), 본관은 진천(鎭川), 생원(生員) 화(華)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한 사익(思翊)의 형. 익산군 왕궁면 장암(王宮面 場岩) 출신. 1684년(숙종 10)에 생원 및 진사시에 아울러 합격하고, 1699년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지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1년 (1725) 7월 8일
<대제의 축문을 잘못 읽은 대축 송사윤(宋思胤)을 추고할 것을 청하는 김취로의 계>
경소전에 친림하여 지낸 제사가 끝난 뒤에 김취로가 구전으로 아뢰기를,
“제향을 올리는 일은 체모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데, 대축(大祝)인 승문원 판교 송사윤(宋思胤)은 축문을 읽을 때 띄엄띄엄 끊어 읽기도 하고 잘못 읽기도 하였으니, 일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눈이 어두워 그런 것이니, 추고하지 말라.”
하였다.
송사익(宋思翊) 1672(현종 13) ~ 1709(숙종 35)
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운거(雲擧), 본관은 진천(鎭川), 익산군 왕궁면 장암(王宮面 場岩) 출신. 생원 화(華)의 아들. 문과에 급제한 사윤(思胤)의 아우. 1699년(숙종 25) 생원 및 진사시에 아울러 합격하고 1702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소대려(蘇大呂) 1678(숙종 4) ~ 1714(숙종 40)
조선후기의 사관(仕官). 호는 제음(濟陰), 본관은 진주(晉州),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金馬面 東古都里) 출신. 벼슬이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으나 37세에 요절하였다. 문집『제음유고(濟陰遺稿)』필사본 1책이 전한다. 부인(夫人) 함평 이씨(咸平李氏, 1679~1743)가 국문 자필로 쓴 『내훈(內訓)』도 별책으로 전한다.
박성원(朴聖元) 1688(숙종 14년 ~ ?)
조선후기의 무신. 자는 시중(時仲), 본관은 충주(忠州), 문웅(文雄)의 손자. 익산군 용안면 난포리(龍安面 蘭浦里, 당시의 용안현 은입산리 龍安縣 銀入山里)출신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 부호군(龍襄衛 副護軍)․만호(萬戶)․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했다.
소해(蘇邂) 1691(숙종 17) ~ 1740(영조 17)
자는 백우(佰遇)이며 금마면 서고도리 출신으로 흥양현감(興養縣監) 세득(世得)의 아들이다. 음사(蔭仕)로 군수에 올라 화순(和順), 곡성(谷城), 능성(陵城)군수를 역임하였고,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에 올랐다.
김석산(金碩山) 숙종 ~ 영조
조선후기 공신. 호는 잠헌(箴軒), 본관은 김녕(金寧), 익산 출신. 동지중추(同知中樞) 명환(命還)의 아들. 1728년(영조 4)에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켜 전주(全州)가 함락되자, 큰 아들 명한(明漢)과 장사(壯士) 10여 명과 함께 전주에 나아가 스스로 선봉을 자원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조정에서는 공훈을 내리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하였다.
조태선(趙泰善) 숙종 ~ 영조
조선후기의 공신. 본관은 풍양(豊穰). 익산군 출신. 용양위 대호군(龍陽衛 大護軍)으로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이 되어 급복전(給復田 : 면세 토지)이 480결(結)이었고, 녹권(錄券)을 받았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5년(1729) 4월 6일
<대신과 비당을 인견하고 《서정록》을 올리라고 명하다. 이태좌가 군공의 별단을 올리다>
춘당대(春塘臺)의 시재(試才)에서 4푼(分)을 받은 사람도 궐원에 따라 수용(收用)했는데, 더구나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공을 세운 사람이겠는가? 양전으로 하여금 상당한 관직에 우선 조용하게 하라. 변장에 제수하라고 승전을 받은 사람은 관무재(觀武才)의 예(例)에 의거하여 과(窠)를 만들어 부직(付職)시키라. 그리고 김주천(金柱天)은 은(銀)을 상가(賞加)하였고 이미 첨사(僉使)에 제수되었으니, 지금은 일후(日後)에 조용(調用)할 것을 논할 것이 없다. 조태선(趙泰先)은 탈상(脫喪)한 뒤에 이미 동지(同知)를 제수하게 했으니, 지금은 논하지 말라.
노금석(盧今石) 영조대
조선후기의 공신. 호는 운암(雲岩). 본관은 교하(交河), 익산군 출신. 병부상서(兵部尙書) 전(琠)의 후손, 자헌대부(資憲大夫) 천주(天柱)의 아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에 공이 커서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 등이 되었다.
소응천(蘇凝天) 1704(숙종 30) ~ 1760(영조 36)
조선후기의 문장가. 호는 춘암(春庵), 본관은 진주(晉州), 익산군 금마면 동고도리(金馬面 東古都里) 출신이다. 문명(文名)이 높고 서예에도 능했다. 성격이 호탕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국내 명승지를 주유하며 음풍영월(吟風咏月)로 일생을 마쳤으며 생전에 많은 일화를 남겼다. 양친을 여의고 처음에는 산음(山陰)의 자연(紫煙)에서 살다가 두류산(頭流山) 화개동(花開洞)에 들어가 은거했는데 명성이 일세에 자자하였다. 조신(朝臣)들이 여러 번 추천하여 출사(出仕)시키려 하였으나 사절하였다. 이후에 덕유산지역에서 살다가 30여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일생을 마쳤다.
문집『춘암유고(春庵遺稿)』필사본 7권6책의 내용은 시(詩)․부(賦)․서(書)․서(序)․기(記)․제문(祭文)․묘지(墓誌)․행장(行狀)․잡저(雜著)․논(論)․설(說)․상량문(上梁文)․잠(箴)․명(銘)․송(頌)․책(策) 등이다. 그의 유고집 가운데 시(詩)작품들은 주로 전국의 명승고적을 유람하고 그 고적에 대한 감회를 읊은 것이 많다.
▣석북집(石北集) : 신광수(申光洙;1712 ~ 1775)의 문집
1731(영조 7) 이 무렵 호남에서 노닐며 吳達運, 李彥根, 蘇凝天과 수창(首唱), 강마(講磨)하다.
'향토사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익산인물지 2 초고 (0) | 2014.04.15 |
---|---|
동학농민운동 교재 (0) | 2014.03.13 |
익산의 어제와 오늘 (0) | 2012.03.18 |
익산의 역사 (최종 수정본) (0) | 2012.02.13 |
무주의 역사와 문화 (0) | 2010.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