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허균 기행문 3편

청담(靑潭) 2012. 7. 31. 23:37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허균(許筠, 1569~1618)의 저서. 성소(惺所)는 허균의 호(號)이며 부부고(覆瓿藁)는 허균(許筠)의 문집명으로 시(詩)ㆍ부(賦)ㆍ문(文)ㆍ설(說)의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부부는 장독 뚜껑을 덮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저서를 겸손하게 일컫는 말이다. 이 책에는 허균의 생각을 담고 있는 여러 편의 글이 있다. 학문의 목적과 진위를 논한 학론(學論)을 비롯해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나라의 방비를 강화해야 함을 논한 병론(兵論)이 있으며, 허균의 입장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하는 ‘유재론(遺才論’과 ‘호민론(豪民論)’도 포함되어 있다.

 

※서문중에서

난우(蘭嵎) 주 태사(朱太史 : 주지번을 말함)가 《부부고(覆瓿藁)》라는 4부(部)로 된 책 1질을 가지고 와서 나와 다음과 같은 말들이 오갔었다.

“내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조선에 가서 그 나라의 많은 관신사(冠紳士)들과 추종했습니다. 그 중에서 허씨(許氏) 집안이 그 장점을 독차지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 계장원(季壯元)의 문집입니다. 그의 문(文)은 우여 완량(紆餘婉亮)하여 감주(弇州)의 만년의 작품과 같고, 그의 시는 창달 섬려(鬯達贍麗)하여 화천(華泉)의 청치(淸致)가 있으므로, 나는 그윽이 기뻐하여 그 전집(全集)을 구했던바, 금년에 비로소 1질을 서울에서 보내와 저리(邸吏)가 전달한 것입니다.

이와 함께 매우 진지한 편지를 보내왔는데 내용은 ‘해내(海內) 대방가(大方家)의 한마디 말을 빌려 책머리를 빛나게 해달라.’는 청이었습니다.?-중략-

만력(萬曆) 계축년(1613, 광해군5) 계춘(季春) 하사일(下巳日)에 진강(晉江) 이정기 이장보(李廷機爾張父 이장은 자)는 쓴다.

이정기는 명나라 사람으로 주지번의 부탁으로 이 책의 서문을 쓴 사람이다.

 

 

 

1. 조관기행(漕官紀行) : 1601년

 

신축년(1601,선조34) 6월 가부(駕部 사복시(司僕寺)) 낭관(郞官)으로 있던 나는 전운 판관(轉運判官)에 제수되어 삼창(三倉)에 가서 조운(漕運)을 감독하게 되었다.

7월 10일(기해) 각 읍의 강리(綱吏)를 모아 세과(稅課)를 검사하였다.

배가 모두 모이지 않아 백호(百戶) 세 사람에게 40대씩 곤장을 쳤다. 정오에 원(員) 유형 선원(柳兄善元)과 창(倉)을 감독하기 위해 파견된 신창(新昌)의 원 정사억(鄭思億)이 와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처(妻)의 사촌(四寸) 동생 용궁(龍宮) 김지회(金之誨)와 육촌(六寸) 이성형(異姓兄) 윤지복(尹之復)이 함께 왔다가 어두워서야 헤어졌다.

●조선중기인데도 백호(百戶)라는 호칭을 가진 해안 진의 관리들이 존재하고 있다.

11일(경자) 배가 비로소 모두 모이니, 재운세미(再運稅米 두 번째 운반하는 세미) 4천 2백 석을 내어 배 12척에 나누어 실었다. 저녁에 당진(唐津) 원 윤성지(尹誠之)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 1척에 평균 세미 3백 5십여 석을 싣고 있다.

14일(계묘) 온양(溫陽)에 가서 방백(方伯) 이공 용순(李公用淳)을 만나 조졸(漕卒 조운선의 수부)을 수군으로 배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논하였다. 공은 해변 16군(郡)의 세미(稅米)를 경창(京倉)에 바로 납입하면 일이 매우 편하다고 하였다. 나는 그의 말에 따라 곧 예전대로 직납(直納)케 하고 파발을 보내어 모이게 하였다.

16일(을사) 아산(牙山)을 떠나 정오에 신창(新昌)에서 쉬고 예산(禮山)에서 묵었다. 동헌 뒤에 석가정(夕佳亭)이 있는데 대나무가 푸르러 유연(悠然)한 맑은 운치가 있었다. 그 속을 산보하니 원 이지화(李志和)가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하였으나 술을 잘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허균은 여러 기록에서 본인이 술을 잘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20일(기유) 비를 맞으며 서천(舒川)으로 갔다. 진흙탕이 미끄럽고 옷에 튀어 종들은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원망이 대단하였다. 오정 때쯤 군(郡)에 이르니 태수(太守) 김희태(金希泰)는 연회장을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마치 대국의 제후를 섬기듯이 하였다. 대낮부터 밤새도록 묵은 회포를 풀고서야 파하였다. 밀물이 바로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허균은 많은 기록에서 고을 원을 태수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때의 지방관직명이며 고려시대 이후에는 없다. 양반들끼리는 존칭으로 사용한 둣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판검사나 군수시장들을 <영감>이라 불렀다. 

23일(임자) 부안(扶安)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 옥여는 이귀(李貴)의 자)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매창에 대한 중요한 허균의 기록이다. 이 기록을 알게 되어 매우 기쁘다.

24일(계축) 비 때문에 떠날 수가 없었다. 오정 때쯤 비가 개자 고부(古阜)에 도착하여 이장(李丈 이씨 어른)과 만났다. 어른의 이름은 우(瑀)이며 율곡(栗谷) 선생의 아우이시다. 내게는 고향의 어른이 되는데 시와 그림과 글씨를 모두 잘하여 존경하는 분이다. 민인길 숙정(閔仁佶叔正)이 죄가 있어 부안에서 파직되어 군(郡)에 잡혀 있었으므로 불러 함께 묵었다.

27일(병진) 좌랑(佐郞) 강항(姜沆)이 인사를 왔다. 부체찰사(副體察使) 한준겸(韓浚謙)과 방백(方伯) 이홍로(李弘老)가 광주(光州)에서 호군(犒軍 군사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하고 있고 태사(太史) 소광진(蘇光震)이 왕명을 받들고 와 있어 모두 서면으로 안부를 물었다. 한준겸은 조졸(漕卒)을 선격(船格 사공의 일을 돕는 사람)으로 배치하는 데는 만나서 의논해야 한다고 나에게 만나자고 하였다.

●강항은 1597년 정유재란때 가족과 함께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거류하다 1600년에 귀국하였고 간양록(看羊錄)을 남겼다.

28일(정사) 지름길을 잡아 사기원(四岐院)에서 점심을 먹었다. 친척인 정성일(鄭成一)과 그의 아들 경득(慶得)ㆍ희득(喜得)이 찾아왔다. 해질 무렵에야 광주에 도착하니 광주에서는 마침 사신(使臣)을 대접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연회에 참석하라고 여러 번 요청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광주에는 젊은 날 서울에서 정을 준 기녀 광산월(光山月)이 있었는데 그를 보내어 굳이 독촉하니 할 수 없이 참석하였다. 이웃 고을의 소리하는 이는 모두 모아 놓았는데, 술은 동이에 넘치고 고기는 산과 같이 많아 품위가 없었다. 저녁에 한공과 함께 묵었었다. 광산월이 와서 위로하였는데, 평생의 즐거움을 나누며 밤을 새웠다.

●허균은 평소 기생들과의 교분이 많았던듯하고 출장중에도 기생들을 많이 접하며 광산월과는 수개월간을 함께 한다.

8월 7일(병인) 초운수미(初運收米 처음으로 운송하는 세미) 3천 70석과 세로 받은 콩 1천 석을 배 13척에 포장하여 실었다. 익산(益山) 태수 정언충(鄭彦忠)이 석란창(石欄倉)의 쌀을 운반해 오지 않았으므로 함께 보고하고 영암(靈巖)의 아전 30명을 신문하였는데, 해량(海粮 해운하는 곡식)을 훔친 혐의다.

●익산에서 법성포까지 세미를 운반한다는 것이 의문인데 임란직후 아직 조운제도가 미처 정비가 되지 않아서인가?

13일(임신) 진남헌(鎭南軒)에 나가 방백과 함께 장간(長竿 장대놀이)ㆍ주승(走繩 줄타기)ㆍ도상(跳床 높이뛰기) 등 여러 가지 재주 놀음을 모두 보여주었다. 저녁 무렵에 대부인(大夫人)이 설익은 감을 먹은 것이 체하여 부축하고 들어가더니 초저녁에 병이 매우 위태로워졌다. 나는 부사(副使) 채형(蔡衡), 중군(中軍) 이홍사(李弘嗣), 판관(判官) 신지제(申之悌)와 밤새도록 동헌에 앉아 결과를 기다렸다.

15일(갑술) 우도(右道 전라북도)의 재차(災差) 강형 홍립(姜兄弘立)이 도착하였다. 강형은 어릴 적 친구이자 동년(同年)이라 정이 매우 두터웠는데, 서로 만나게 되어 기뻤다. 그의 숙소에 함께 묵었다.

●강홍립 : 1560(명종 15)~ 1627(인조 5)

1618년(광해군 11)에 명은 후금이 변경에 침입하는 등 세력을 크게 확장하자, 조선에 원병을 청해왔다. 광해군은 명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강홍립을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으나 후금과의 관계를 의식하여 전세를 보아 행동하라는 지시를 함께 내렸다. 이에 부원수인 김경서(金景瑞)와 더불어 1만 3,000여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다. 1619년 명 제독(提督) 유정(劉綎)의 군과 합류했으나 부차(富車)에서 크게 패하자, 광해군의 비밀지시에 따라 남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군에 투항했다. 이듬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어 돌아왔으나, 그는 김경서와 함께 계속 억류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도(先導)로서 입국하여 화의(和議)를 주선했다. 그 뒤 국내에 머물게 되었으나,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했다가 죽은 뒤에 복관되었다. 허균의 나이가 이때 33세이고 강홍립의 나이는 42세인데 동년배 친구라 하니 어쩌면 同名異人인지도 모를 일이다.

17일(병자) 성복(成服 상제들이 상복을 입음)하였다. 나는 김정목과 강홍립 등 두 행대(行臺 종사관의 별칭)와 이별하고 저물녘에 익산에 도착하였다.

20일(기묘) 군의 무거(武擧 무과에 합격한 사람) 소문진(蘇文震)의 첩과 그의 집에서 같이 일하는 계집아이가 일에 매우 익숙하였다. 그들이 주안상을 차려가지고 와서 위문하니 광산월도 함께 돌보았다. 종일토록 피리 불고 노래하여 즐거웠으며, 이유위는 일어나 춤을 추기도 하였다.

21일(경진) 소랑(蘇娘)의 집을 방문하였다. 술상은 매우 푸짐하였다. 동리 사람들이 구경하려고 꽉차게 모여들었다. 저녁에 임피(臨陂)에 도착하니 이곳의 원 김료(金璙)가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23일(임오) 광산월과 작별하고 이유위와 함께 나시포(羅時浦)를 건너 한산(韓山)에 도착하여 태수 한회(韓懷)와 만났다. 저녁에 임천(林川)에서 묵었는데, 저보(邸報)를 보니 나의 큰형이 전라도(全羅道)의 방백(方伯)으로 임명되었다.

●큰형인 허성(許筬)을 말한다.

28일(정해) 거두어들인 쌀 2천 3백 석을 배 6척에 싣고 보고서를 올렸다.

●배 1척에 거의 400석을 실었다.

9월 1일(기축) 변산(邊山)에서 조선(漕船) 6척을 제조하여 보고서를 올렸다. 남쪽으로 돌아가 형수님을 기다렸다.

7일(을미) 삼례(參禮)에서 점심을 먹고 전주로 들어가는데 판관이 기악(妓樂)과 잡희(雜戲)로 반마장이나 나와 맞이했다. 북소리 피리소리로 천지가 시끄럽고, 천오(天吳 바다 귀신춤)ㆍ상학(翔鶴 학춤)과 쌍간희환(雙竿戲丸)과 대면귀검(大面鬼臉 탈춤) 등 온갖 춤으로 길을 메우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성곽에 넘쳤다. 나는 큰조카에게, “이 길이 네가 과거에 합격해서 돌아오는 길이 아닌 것이 한스럽다.”고 농담을 하니 그도 배를 잡고 웃었다. 마침내 동헌에서 형님을 뵈었다. 중동헌(中東軒)을 비워 나의 숙소로 하였다.

●신임 전라관찰사를 맞이하는 행사장면이다.감사를 맞이하는 행사가 오늘날 지역 축제와 같다.

19일(정미) 맏형님이 순시차 도착하니 목사가 큰 잔치를 마련하여 대접하였다.

●관찰사 부임 10일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나주까지 순시하고 있다.

20일(무신) 우수사(右水使) 유형(柳珩)이 찾아와 인사하였다. 저녁에 노인(魯認)과 함께 묵었다. 노인은 나주 사람이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왜적(倭賊)에게 붙잡혀 서해도(西海道)에 이르렀을 때 몰래 중국배에 타고 복주(福州 중국 복건성의 지명)에 도착하여 무원(撫院) 김학증(金學曾)에게 호소하니 학증은 돈을 후하게 주어 무이서원(武夷書院)에 있게 하였다. 서원의 여러 학생들도 모두 그를 잘 돌보아 주었다. 안학사자(按學使者) 서즉등(徐卽登)은 인에게 동국(東國)에서 가장 숭상하는 학문이 무엇인지 자세히 서면으로 대답하게 하였는데, 노인은 고정(考亭 주자를 가리킴)을 가장 숭상한다고 하였다. 서즉등은 육왕학(陸王學)을 공격하는 사람이라 매우 기뻐하여 자기의 책을 모두 주고 빈객(賓客)처럼 극진히 대접하였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차관(差官 파견하는 관리)으로 본국에 돌아가게 해 달라고 무원(撫院)의 김학증에게 청하니 학증이 허락하고 사여림(史汝霖)을 딸려 만세덕(萬世德)에게 공문서를 보냈다. 마침내 태주(台州)를 거쳐 천태산(天台山)ㆍ안탕(雁宕)ㆍ진망(秦望)의 훌륭한 경치를 보고 소흥(紹興)에 이르러 섬계(剡溪)ㆍ운문(雲門)ㆍ약야(若耶)ㆍ난정(蘭亭)의 유적지를 보고 여항(餘抗)에 10일간 머무르며 서호(西湖)와 서산(西山)의 경치를 샅샅이 찾아보고 가흥(嘉興)ㆍ호주(湖州)ㆍ소주(蘇州)를 거쳐 오월(吳越)의 산천을 두루 돌아보고 남경(南京)에 들어가 육조(六朝)의 유적을 찾아보고 진회(秦淮)를 지나 양주(楊州) 24교(橋)에 노니니 육가(六街)의 번화함은 당(唐) 나라의 전성시대와 같은 듯하였다. 서주(徐州)를 지나 산동(山東)에 이르러서는 곡부(曲阜)에 가서 부자묘(夫子廟)에 절하고 대종(岱宗 태산(泰山))을 바라보고 돌아와 제도(帝都)에서 본국(本國)으로 돌아왔다. 그 먼 곳에 노닐고 경치 좋은 곳을 돌아다닌 이야기를 하는데 마치 눈에 보는 듯하여 들을 만하였는데, 쓸데없이 매달려 항아리 속에 갇힌 듯한 나의 신세가 한스러워, 노생(魯生 노인(魯認)을 말함)에게 부끄러운 점이 많았다.

●노인을 통하여 중국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고 작은 나라에서 급급하여 살아가는 자신을 탓하는 것을 통해 허균의 그릇이 큼을 이해하게 된다.

16일(갑술) 12읍의 삼수병(三手兵)이 교장(敎場 연병장)에 모여 전체 사열을 하는데, 나는 형님을 모시고 참관하였다. 군사들은 모두 주먹이 날래고 용감하였다. 좌우군(左右軍)을 펴서 어려진(魚麗陣)과 아관진(鵝觀陣)을 만들었는데 병기는 예리하고 깃발은 선명하고 북과 피리의 군호 소리는 우렁찼다. 나아가고, 물러서고, 앉고, 서는 동작이 모두 절도에 맞으니 이(군대)것으로 충분히 적을 물리칠 수 있을 터인데 벌벌 떨며 남쪽을 돌아보고 걱정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저녁에야 파하고 여러 가지 놀이를 벌여 잔치하여 군사를 먹였다. 밤이 되니 불을 밝힌 성 안은 대낮같이 밝았다.

●전주병영 군사들의 당당한 사열장면을 보며 기록한 것이다.

12월 2일(무오) 내집 종이 서울에서 와서 한림시강(翰林侍講) 고천준(顧天峻)과 행인(行人) 최정건(崔廷健)이 나온다고 하며 나는 원접사(遠接使) 이정귀(李廷龜)의 건의로 교체되고 사직(司直) 권운경(權雲卿)이 나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형님과 헤어진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한데 모여 여러 조카들이 모두 곁에 있어 몇 달 동안 즐거움을 같이해도 흡족하지 않을 터인데, 갑자기 멀리 떨어져야 할 일이 생겼으니 매우 섭섭하다.

●허균의 뛰어난 문장이나 시, 학문등에서 재능이 출중하므로 중국사신 접반사의 종사관으로 추천되고 있으며 집안이 벌열이어서인지 아니면 왕명으로 파견된 조운 감독관이어서인지 허균보다 품계가 높은 각 고을의 수령들(현령, 군수, 목사 등)이 모두들 허균을 숙소로 찾아와 인사를 드리고 있다.

 

 

 

 

 

2. 서행기(西行紀) : 1602년

 

  이 해(1602, 선조35) 2월 6일 원접사(遠接使) 이정귀(李廷龜)는 종사관(從事官) 박동열(朴東說)이 병 때문에 뒤처져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나를 대신 그의 종사관으로 삼아 보내 주기를 재촉하는 급한 보고서를 올렸다.

初)가 와서 돌보고 있었으므로 그와 함께 지난 일을 이야기했다.

8일 고진강(古津江)에 이르니 월사가 배에 타고 양만세(楊萬世)가 따르고 있어 머물면서 조용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소곶(所串)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의주에 도착하여 오봉을 뵈었다. 동료 이자민(李子敏), 홍휘세(洪輝世)와 권여장(權汝章) 등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목사 최공 염(催公濂)과 반자(半刺 군(郡)의 보좌관) 홍형 유의(洪兄有義)가 찾아왔다. 홍은 나와 같은 해 사마과(司馬科)에 급제한 사람이다. 통역관 표헌(表憲)ㆍ박인검(朴仁儉)ㆍ박인상(朴仁祥)ㆍ정득(鄭得)ㆍ임준(林埈)ㆍ박대근(朴大根)과 이문학관(吏文學官) 박희현(朴希賢), 사자관(寫字官) 이해룡(李海龍), 괴원 서원(槐院書員) 이자관(李自寬) 등이 함께 와서 인사하였다. 제술관(製述官) 김남창(金南窓)ㆍ차오산(車五山 오산은 차천로(車天輅)의 호)ㆍ한석봉(韓石奉 석봉은 한호(韓濩)의 호 : 1543(중종 38)~ 1605(선조 38))이 함께 와서 문안하였다.

21일 두 사신이 강을 건넜다. 일행(원접사 일행)과 방백(方伯) 이하는 성문 밖에 나가 마중하고 관에 들어가서 환영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상사(上使)는 연폐(宴幣 연회할 때 보내는 선물)가 없다고 연회를 받지 않아 간신히 청해서 잔치를 벌였다.

22일 소관에서 점심을 먹고 양책에서 묵었다. 쉬고 잠잔 곳마다 비용을 지불하였다.

●중국사신이 예의를 다하며 사신단이 절도 있는 행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3월 10일 새벽에 서울 서쪽 교외에 이르렀다. 상(上)이 황제의 조서를 맞아 태평관(太平館)에 들어갔다. 조서를 선포하는 일을 마치고 양사는 남별궁(南別宮)에 자리 잡았다.

21일 양사가 돌아가게 되었다. 홍휘세(洪輝世)는 탄핵을 받고 김남창(金南窓)은 병들어 모두 따르지 못하였고 박희현(朴希賢)도 사양하고 가지 않았으므로 사(使 원접사)는 송효남(宋孝男)을 추가해 인솔하고 벽제에서 묵었다.

●우리나라 사신은 중국에서 1달 이상 묵지만 중국 사신은 10일이면 돌아간다.

4월 1일 비를 무릅쓰고 강을 건너 일행은 중강(中江)에서 작별하고 돌아왔다.

19일 사은사(謝恩使) 정사호(鄭賜湖)ㆍ조정지(趙廷芝)와 서장관 윤안국(尹安國)이 부(府 평양)에 들어와 함께 낮부터 밤까지 뱃놀이를 하였다. 이정(李楨)이 정공(鄭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게 되어 서로 만나 매우 즐거웠다.

●중국에서 온 사신이 떠난지 채 한달이 안되어 우리나라에서는 벌써 사은사(謝恩使)가 출발하고 있다. 사신을 맞이하고 접반하는 일과 몇 달간의 사신단을 중국에 파견하는 일은 인적으로는 너무 번거롭고 물적으로는 너무나 비용이 컸다.

 

 

 

 

 

  3. 병오기행(丙午紀行) : 1606년

 

  을사년(1605, 선조38) 겨울 명(明) 나라 황제의 장손이 탄생하였다. 황제는 한림수찬(翰林修撰) 주지번(朱之蕃)과 형과도급사(刑科都給事) 양유년(梁有年)을 파견하여 조서를 받들고 오게 하였다. 나는 그때 요산(遼山)의 직을 그만두고 서울집에 있었는데 원접사 유공 근(柳公根)이 상께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다.

●그 유명한 주지번(朱之蕃)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오고 이에 대한 기록을 종사관이었던 허균이 남긴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다행한 일이 되었고 큰 의의가 있다.

1월 25일 안성에서 점심을 먹었다. 수안 군수(遂安郡守) 이경천(李慶千)이 찾아와 인사하였다. 용천에서 묵었다. 재령 군수(載寧郡守) 유희발(柳希發)과 소강 첨사(所江僉使) 민인길(閔仁佶), 강령 현감(康翎縣監) 조호룡(曺浩龍) 등이 만호(萬戶) 심눌(沈訥)의 소개로 함께 와서 인사하였다.

●백호(百戶)에 이어 만호(萬戶)도 여전히 지방 수군지휘관 관직으로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2월 5일 동지사(冬至使)가 이상신(李尙信)ㆍ정협(鄭協)과 서장관(書狀官) 유시행(柳時行)이 평양부에 당도하였다. 저녁에 양오(養吾 이지완(李志完)의 자)가 성천에서 왔다.

●허균일행이 중국사신 주지번을 맞이하러 평양에 나가 있는 상황에 이미 중국에서는 전년 겨울에 파견했던 동지사(冬至使)일행이 먼저 평양에 도착하고 있다. 지나치다. 진실로 양국의 지나친 사신의 파견과 왕래와 접반은 가난한 우리나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16일 사(使 유근(柳根))는 매일 일과로 시를 짓게 할 것을 약속하였다. 나는 비로소 한유(韓愈)ㆍ왕유(王維)ㆍ이백(李白)의 시집을 읽었다.

●접반사 유근이나 허균이나 모두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주지번을 맞이하는 적격자로 선발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3월 18일 표헌과 이해룡이 돌아와,

“양사는 매우 관후하게 대해 주었고 관속도 고천준(顧天俊)과 최정건(崔廷健) 때(선조 36년(1603)에 온 명나라의 사신)보다 적어 따라 오는 요동 사람들이 모두 노하고 욕하며 쥐어박으려 하더라.”

고 하였다.

●이해가 잘 안 되는 내용인데 아마 사신단 규모가 작으므로 따라오는 요동사람들이 남기는 이윤이 적을 것을 우려하여 화가 난 듯하다.

23일 소관에서 점심을 먹고 양책에서 묵었다. 상사(上使)는 강상(江上)에서부터 이곳에 오기까지 시를 아홉 수나 지었고, 부사가 지은 시도 그의 절반이나 되어 화답하기 매우 군색하여 사(使)와 나, 그리고 여인은 당황하여 겨를이 없었다.

24일 차연에서 점심을 먹고 임반에서 묵었다. 이날 지은 시도 5~6편이고 부사도 의례 그 반을 짓는 것이 매우 상례가 되었다.

25일 운흥에서 점심을 먹고 정주에서 묵었다. 상사는 사에게 《천고최성(千古最盛)》이란 책자를 내놓고 발문(跋文)을 짓게 하였다.

●위 기록을 통하여 이번 상사 주지번과 부사 양유년 모두 글을 좋아하고 시를 짓기 좋아하는 학자(學者)형 사신임을 짐작케 한다.

27일 상사는 먼저 공강정(控江亭)에 이르고 나는 뒤따라 갔더니 상사는 나를 불러들여 내 누님의 시에 대해 물었으므로 누님의 시집을 드렸더니, 상사는 이를 읽으며 칭찬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당신의 시는 출판되지 않았는가?”하고 물어, 나는 감히 출판하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이어서 우리나라 산천 지리(山川地理)를 매우 자세하게 물어 모두 글로 써서 대답하였더니, 장선(掌扇 의장(儀仗)에 쓰는 자루가 긴 부채)을 꺼내어 자기가 지은 제산정시(齊山亭詩)를 적어 주고 화답하라고 하였다. 나는 즉석에서 구두로 지어 화답하였더니 상사는 감탄하고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저물녘에 안주(安州)에 도착하여 녹주(綠珠) 집에 묵었다. 연주(延州)의 옛 정인(情人)이 찾아와 인사하고 창아(昌娥)와 교섭하여 자신을 대신하였다.

28일 숙녕(肅寧)에 당도하였다. 상사는 나를 불러들여,

“귀국에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가(詩歌) 중에 가장 좋은 것을 낱낱이 써서 가지고 오십시오.”

한 다음 나의 과거 시험 성적을 물었다. 중시(重試)에서 일등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이것은 당송(唐宋) 때의 과거보는 식이다.”

하고는, 이어,

“무슨 관직에 있는가요?”

하고 물었다. 나는,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이니 바로 중국의 광록 소경(光祿少卿)입니다. 직책이 공궤(供饋)를 관장하기 때문에 국왕께서 저를 파견하여 음식과 여관을 마련하게 한 것입니다.”

하니, 그는 또 내 경력을 물었다.

“처음 사관(史官)에 제수되고 직방(職方 병조를 말함)의 주객이원외(主客二員外)에 승진되었으며, 급사중(給事中 예조)으로 옮겨 무선랑중(武選郞中)으로 승진하여, 해운판관(海運判官)이 되었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승진하였으며, 서군(西郡 수안(守安)을 기리킴)의 수령으로 나갔고, 그 다음으로 현재의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사는,

“아니, 이 사람이 중국에 태어났다면 당연히 승명지려(承明之廬 승정원(承政院)을 말함)나 금마지문(金馬之門 홍문관을 말함)에 오래 있을 것인데 죄를 짓지 않고서야 어째서 낭서(郞署)나 외군(外郡) 사이에서 오가겠는가?”

하고는, 《세설산보(世說刪補)》ㆍ《시준(詩雋)》 및 《고척독(古尺牘)》 등 책을 꺼내주었다.

또한 양오(養吾 이지완(李志完)의 자)와 이숙(怡叔 조희일(趙希逸)의 자)을 불러 위로하고 그들의 과거급제와 이력에 대해 물었다. 부사도 또한 이들을 불러 수고함을 위로하고 형산석각첩(衡山石刻帖)을 주었다.

●주지번은 이미 허난설헌에 대해 알고 있으며 허균의 재능을 극찬하고 있다.

30일 그대로 머물렀다. 이사(二使)와 뱃놀이를 하였다. 목은 이색의

종일토록 읊조려도 짓지 못했네 / 終日吟咀不能作

라는 시를 보고는 사가 웃으면서 나에게,

“매일 이와 같은 유의 시를 찾아 올리면 우리들의 마음이 한결 편할 것이다.”

하였다. 부벽루(浮碧樓)에 이르자 양사는 나를 불러,

“연주하는 음악이 중국의 음악과 아주 비슷한데, 가사(歌詞)가 있는가?”

고 물었다. 나는 즉석에서 보당(步唐)과 자야심사(子夜深詞)를 적어 주었더니 양사는 그 가사가 《화간집(花間集)》의 것보다 못하지 않다고 칭찬하였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그림과 글씨로 이름이 높았던 명나라의 주지번(朱之蕃)이 어느 해 조선에 사신으로 오는 길에 평양을 지나면서 연광정에 올랐는데, 그 풍광에 놀라 무릎을 치며 ‘천하제일강산’ 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는 제 손으로 현판을 써서 걸어놓았다. 그 뒤 병자호란 때 조선에 쳐들어와 인조(仁祖)에게 항복을 받고 돌아가던 청태종(靑太宗)이 여기에 들렀다가 중국에도 명승이 많은데 어찌 여기가 천하제일일 수 있느냐고 그 현판을 부숴버리게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풍광도 아름답거니와 글씨 또한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지라 청태종은 ‘천하’ 두 글자만 톱질해 없애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 '제일강산‘이라고 붙어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누가 다시 ’천하‘ 두 글자를 새겨 넣어 지금은 이렇게 ’천하제일강산‘ 이 걸려 있다.

4월 1일 “북경(北京)에서 《황화집(皇華集)》 구본을 보았는데, 이행(李荇)ㆍ정사룡(鄭士龍)ㆍ이이(李珥)와 같은 이들이 모두 문집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왜란으로 판본(板本)이 모두 불타버렸다고 하니, 상사가 탄식하고 아까워하며,

“최근에 유로(柳老 유영경(柳永慶)을 가리킴)의 작품을 보니 원전(圓轉) 완량(婉亮)한 것이 예전 사람들보다 훌륭했습니다. 귀국 사람들의 시를 빨리 베껴 보여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노상이라 바쁘고 서수(書手 글씨 쓰는 사람)도 없으니 며칠만 기다리면 모두 베껴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상사가,

“길가의 관역(館驛 역사(驛舍)) 벽판(壁板)에 왜 귀국 사람의 시문이 없습니까?”

하기에, 나는,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오는 사신이 지나는 곳에 변변치 않은 시를 보이게 할 수 없어 선례가 붙이지 않습니다.”

하니, 상사가 웃으며,

“나라로 보면 화이(華夷 중국과 주변국)의 구별이 있다고는 하지만, 시에 어떻게 내외(內外 내륙과 외지(外地))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은 천하 모든 나라가 한집안 같고 사방이 모두 형제가 되어 나와 당신이 모두 천자의 백성으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중국에서 태어났다고 뽐낼 수 있겠습니까. 요즘 귀국 사대부를 보면 예절이 한아(閑雅)하고 문장이 빼어나니 이들을 중국에 가서 벼슬하게 한다면 어떻게 우리들보다 못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황화집(皇華集)이란 우리나라에 온 중국 사신과 이를 접대하던 관리 사이에 오간 한시를 엮어서 모은 책이다.

5일 회란석(回瀾石) 위에서 잠깐 쉬고 금교(金郊)에서 점심을 먹고 송경(松京)에 들어갔다. 저녁에 우리나라 사람의 시를 최고운(崔孤雲) 이하 1백 24명의 시 8백 30편을 써서 4권으로 만들고 노란 표지로 꾸며 두 본을 만들어 양사에게 올렸다. 상사는 녹화단(綠花緞 꽃무늬가 놓인 푸른 비단) 한 필과 안식향(安息香) 1천 매를 주고 부사는 남화사(藍花紗) 한 끝과 《태평광기(太平廣記)》 한 부를 줬다.

●놀랍다! 그 짧은 기간에 830편의 시를 베껴 중국 사신들의 요청에 응하는 접대능력이 대단하지 않은가?

6일 개성에 머물렀다. 잔치가 파한 후 상사는 나를 불러 우리나라 사람의 시를 평하기를,

최고운의 시는 거칠고 힘이 약한 것 같고 이인로(李仁老)와 홍간(洪侃)이 매우 좋습니다. 이숭인(李崇仁)의 오호도(嗚呼島), 김종직(金宗直)의 금강일출(金剛日出), 어무적(魚無迹)의 유민탄(流民歎)이 아주 좋고, 이달(李達)의 시의 여러 형태는 대복(大復 명(明) 나라 하경명(何景明)의 호)과 아주 비슷하나 가수(家數)가 크지 않습니다. 노수신(盧守愼)은 힘차고 깊어 감주(弇州 명 나라 왕세정(王世貞)의 호)에 비해 조금 고집스러우나 오율(五律 오언 율시)은 두법(杜法 두보의 시법)을 깊이 터득하고 있습니다. 이색(李穡)의 시들은 모두 부벽루에서 지은 것만 못합니다. 나는 밤새 불을 켜놓고 보았는데 귀국의 시는 대체로 음향이 밝아 매우 좋습니다.”

하고는 이달의 만랑가(漫浪歌)를 소리 높여 읊조리면서 무릎을 치며 칭찬하였다.

10일 먼저 서울에 와서 복명하였다. 주상께서 교외까지 나와 일행을 마중하였다. 이사(二使)는 서울에 10일 간 머물렀다.

●선조가 궁궐을 나와 교외에서 사신을 정중하게 맞이하고 있다.

20일 돌아갔다.

●역시 중국사신은 10일이면 돌아간다. 그 짧은 10일 동안에 우리나라 조정과의 업무도 엄청 바빴을 터인데 익산지방에서 발간되는 각종 향토문헌에는 그가 왕궁면 장암리에 살고 있던 표옹 송영구를 찾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기록이다. 기록의 내용은 대개 이렇다.

1597년경 송영구는 성절사(聖節使) 홍이상(洪履祥)의 종사관으로 중국에 가게 된다. 북경에 도착한 사신 일행은 숙소인 영빈관에 여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때 조선 사신들이 머물던 숙소의 부엌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청년이 하나 있었다. 청년은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중얼 거리고 있었다. 표옹이 가만히 들어보니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이었다. 표옹은 숙소의 심부름꾼이 남화경을 외우는 것이 하도 신통해서 청년을 불러 물어보았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천한 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경을 모두 암송할 수 있느냐?”

“저는 남월(南越)지방 출신입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몇 년 전에 북경에 올라왔는데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가져온 노잣돈이 다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과거시험 답안지를 어떻게 작성했었는지 종이에 써 보아라.”

표옹은 청년이 문장에 대한 이치는 깨쳤으나 전체적인 격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 작성요령을 알려줬다. 또한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여러 권을 필사해주고 상당한 액수의 돈을 청년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후 청년은 과거에 합격하였다. 청년의 이름은 주지번(朱之蕃)이었다.

북경에서 처음 만난 지 10여년 만이었다. 주지번은 여러 가지 희귀한 선물들을 가지고 왔다. 그중에는 현재 규장각에 보관 중인 80여권의 책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표옹이 돌아가신 선친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에 망모당(望慕堂)이라는 글씨를 써주었다. 장암마을에는 표옹이 짓고 주지번이 현판을 쓴 망모당이 세월을 견디면서 아직도 남아있다.

24일 옥류천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벌였는데 분위기가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저물녁에 어두워서야 용천에 도착하여 인초(軔初)와 함께 묵는데 못생긴 계집종을 잠자리에 들여보내려 하니 우스운 일이다.

●허균은 시공을 초월하지 못했다. 현재 한국의 모델들은 얼굴이 예쁜 것이 절대 아니고 미국의 유명 영화감독인 우디 알렌의 부인인 순이는 절대 예쁜 여자가 아니다.

29일 가산(嘉山)을 지나 정주(定州)에 당도하였다. 저녁에 양사가 한석봉(韓石峯) : 1543(중종 38)~ 1605(선조 38)의 글씨를 구했다. 나에게 마침 옥루문(玉樓文) 두 벌이 있어 나누어 주었다. 상사는,

“해법(楷法 해서를 쓰는 법)이 아주 묘하다. 안진경(顔眞卿)의 위이며, 자경(子敬 진(晉) 왕헌지(王獻之)의 자)의 아래요, 송설(松雪 원(元) 조맹부(趙孟頫)의 호)과 형산(衡山 명(明) 문징명(文徵明)의 호)은 여기에 미치지 못할 것 같다.”

하였다. 또 진본(眞本)을 얻고자 하여 어쩔 수 없이 장문부(長門賦)를 주었다.

●주지번은 전년에 타계한 한석봉의 해서를 극찬하고 있다. 주지번이 한 말로부터 한석봉의 해서가 동방 제일이라 칭송받게 된 것은 아닌가?

5월 12일 영(令)과 이숙이 먼저 떠났다. 부윤이 남산(南山)에서 전별연을 베풀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영은 내가 돌아본 일이 있는 창기(娼妓)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끌어내어 앉히니 30여 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는 진짜가 아닌 사람이 여섯 명이 끼어 있으니 더욱 우스웠다. 이숙의 연아(蓮娥)는 이별이 서러워 흐느끼며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나는,

“내 정인은 이렇게 많아도 슬퍼 우는 사람이 없는데 이숙은 단 하나이면서 이렇게 연연하니 이야말로 많아봤자 소용없다는 거지 뭔가.”

하니, 모두 크게 웃었다. 저녁에 양책에서 묵었다. 연아가 나의 봉량(鳳娘)을 끼고서 이숙을 뒤따라 왔다. 나는,

“30명 중 너 만 왜 왔는가. 그대로 남아 있다가 용리(龍吏)를 이별하는 게 더 나을걸.”

하였더니, 이숙은,

“형은 어찌 그리 박정한 말을 하시오.”

하였다.

13일 아침에 연아는 이숙을 붙들고 슬피 울며 데굴데굴 굴렀다. 봉랑도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울음을 참았다가 용리를 이별할 때에는 울어라.”

하였다. 이는 옥당(玉堂)의 관리 용우린(龍友鱗)과 좋아하였으나 나 때문에 마음대로 하지 못해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출장을 다니는 중앙관리들과 지방 관청에 속한 기생들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15일 점심 때 곽산(郭山)에서 쉬며 성절사(聖節使) 이각(李覺), 서장관 유경종(柳慶宗)과 만났다. 저녁에 정주에 당도하였다.

●접반사 일행은 사신을 보내고 돌아오는데 중국으로 가는지 오는지 모르나 성절사(聖節使)일행을 만나고 있다. 아! 가난한 조선의 지나친 외교사절 파견 행차와 중국사진 접대로 국고는 탕진되고 관리들은 힘들며 백성들은 허망하지 않았겠는가?

19일 순안을 지나 평양에 도착하였다. 사은사 한술(韓述)ㆍ황정철(黃廷喆)과 서장관 송인급(宋仁及)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이아에서 묵었다. 서장관이 방기 옥일(玉一)을 빼앗아 가버렸다.

●4일 전에 성절사 일행을 만났더니 오늘은 또 중국으로 가는 사은사 일행이다. 중구에서 온 사신이 가고 있는 중에 성절사 일행이 돌아오고 있고 벌써 사은사 일행이 출발하고 있다.

23일 나는 먼저 중화(中和)를 돌아가고 우리 세 사람은 숙야와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송인수(宋仁叟 송영구(宋英耈)의 자)와 함께 뱃놀이를 매우 즐겁게 하였다.

●필자는 이 기록을 통하여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익산지방의 향토사에는 주지번이 부친을 여의고 익산에 은거해 있던 송영구를 찾아와서 망모당(望慕堂) 현판을 써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전연 사실이 아닌 것이 판명된 것이다. 이 글에서 보면 주지번은 4월 20일 서울을 떠나 5월 2일에 압록강을 건넌다. 또한 이 글은 표옹 송영구가 이때(1606년 5월 23일) 대동도찰방으로 근무하고 있음을 확인하여주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분명 송영구가 사행중인 주지번을 만나 망모당(望慕堂) 현판을 받았을 것이며 전주 객사의 풍패지관(豊沛之館)도 누군가가 주지번에게 청하여 서울에서 받은 글씨임이 틀림없다. 한편 만일 주지번이 송영구를 그리도 끔찍하게 사모하고 있었다면 왜 주지번과 송영구에 관한 얘기가 허균의 기록에서 빠졌다는 것인가? 익산지방의 향토사에 기록된 내용의 오류(誤謬)와 과장(誇張)됨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독서를 통해 얻은 큰 수확이다.

'독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르몽드 세계사 1  (0) 2012.09.16
르몽드 세계사 2  (0) 2012.08.08
핀란드 교육  (0) 2012.05.16
교장연수록  (0) 2012.04.19
을해조행록  (0) 2012.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