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을해조행록

청담(靑潭) 2012. 2. 1. 00:27

 

 

 

을해조행록(乙亥漕行錄)

 

 

서언

  익산문화원에서 『을해조행록』 《익산문화총서 28》을 발간하였다. 『을해조행록』은 1875년(고종 12년) 3월 23일 함열현감 겸 성당창 조세영운관인 조희백(趙熙百)이 호남지역 8개 읍의 세곡 1만 6천여 석을 조운선에 싣고 웅포를 출발하여 4월 19일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운반과정을 기록한 아주 귀중한 항해일지다. 이 책을 발간한 익산문화원과 번역을 해주신 고교은사 향토사학자 조재섭 선생님, 편찬을 맡은 후배 채수환 교수에게 감사드린다.

  조운제도는 전국 각 지방에서 거둔 세곡을 내륙의 수로와 바다의 해로를 이용하여 서울로 운반하는 제도이다. 육운은 도로망이 잘 되어 있지 않은데다가 운송 수단의 제약 등으로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일찍부터 해상 교통에 크게 의존하여 왔다. 중앙 집권적인 왕조 지배 체제 밑에서 지방 물자의 중앙 조달이 불가피하였기 때문에 조운의 비중은 그 만큼 컸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지방의 세곡을 수송하기 위해 강변에 수운창, 해변에는 해운창을 설치하여 세곡을 모으고, 선박을 항상 준비시켜 두어 매년 일정 기간을 정하여 중앙의 경창에 수송하였다. 또 조운에는 출발 지점, 기항, 도착 지점이 각각 있어 이 세 지점을 연결하는 선이 조운 항로이며, 출발지와 도착지에 있는 창고가 조창이다. 조창의 기능은 수집, 보관뿐 만 아니라 운송도 담당하였다. 전국의 각 조창에서 조운하여 온 세곡은 경창에 수납, 보관하였다가 각기 용도에 따라 이용하였다

  조선초 전라도에는 세 개의 조창이 있었다. 덕성창(전북 익산시 용안면)과 법성포창(전남 영광군 법성포읍)과 영산창(전남 나주시)이다. 그 변천은 다음과 같다.

 

▣덕성창(용안현 금두포, 현 익산시 용안면 용두리)

▶1428년(세종) 함열현 피포(현 익산시 웅포면 고창리)로 옮김

▶1482년(성종)다시 용안현 금두포로 옮기고 득성창이라 부름

▶1512년(중종) 군산창을 설치하고 이관함.

▣법성창 : 현 전남 영광군 법성포읍

▣영산창 : 현 전남 나주시. 1512년(중종)에 혁파하고 법성포창으로 이관

▣군산창 : 현 군산시 경암동에 1512년(중종)때 설치하고 운영

▣나암창 : 인조(17세기 초)때 여산군(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나암)에 설치.

▶군산창과 함께 잠시 운영되다가 1662년(현종)에 함열현 진포에 성당창을 설치하고 이관

▣성당창 : 함열현 성포, 현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에 1662년(현종)에 새로 설치함.

 

 

 

  앞의 변천사를 통해서 덕성창과 영산창은 없어지고 나암창은 잠시 운영되다가 폐쇄되고 조선 후기에는 내내 법성창과 군산창, 성당창이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라도는 3월 15일에 발선하여 4월10일까지 납부하였다.

  성당창은 남원, 운봉, 진산, 금산, 용담, 고산, 익산, 함열등 8개읍의 전세와 대동미를 관장하여 서울까지 조운하였다. 함열현감이 계량을 감독하고 수납하고 조운까지 맡았으며 이 기록을 통하여 세곡의 수납과 조운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조행일록 서

●무릇 여덟 고을에 대한 세금인 곡물은 대개 같아서 각기 여러 궁(宮)에 바치는 일을 비롯하여 군량미며 잡비와 아울러 합하여 1만 6천여석이 되었다. 포장하여 배에다 싣는 기한은 석 달 보름사이에 해야 했다.

●배는 12척 중 못쓰게 된 것이 5척이고 1척은 고쳐야 한다. 3월 15일에 나누어 싣고 23일에는 출항하는 의식을 행하다.

●12척의 배는 모두 갖추어 손질하여 웅포에 옮겨서 머물도록 하면서 짐을 싣게 하였다.

 

3월 23일

●배의 노를 젖는 사공이 180명으로 12척의 배의 사공으로 나누어 거느리게 하다. 총 인원은 240명 정도이고 점호를 살펴서 배의 선실에 유숙한다.

필자 주 : 배 1척당 사공은 15명이고 실은 곡식은 1500석이다. 대개 1천석이 적당하다고 하니 지나치게 많이 실은 것이다.

 

24일

●아침부터 해가 지는 저녁까지 바람을 동반하고 비가 와서 떠나지 못하다.

 

25일

●아침을 먹고 배가 출발하다. 한 시간 가량 가서 장암진 앞에서 닻을 내려 놓다. 앞에는 바다와 같아 경솔하게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공자선이 모래를 오르다가 이수철이 발을 잘못 디뎌서 물에 빠져 죽었다 한다. 듣기에 몹시 놀랍고 슬픈 일이다. 배가 있는 곳에서 용당제를 지내다.

 

26일

●날씨가 맑고 온화하여 조수를 기다려서 배가 가기에 마땅하였다.

●점점이 있는 섬들은 망월도연도이다. 우측에 서천의 마지막 경계가 조도이다. 오식도가도의 좌측이 옥구의 경계이다. 그 옆에 있는 가라도항명도는 바다의 가운데에 있어 바위의 모서리와 모래 바탕에 극히 암초가 위험하여 배가 지나가는데 심히 어려움이 많으므로 이곳을 지날 때마다 세심하게 주의하여 삼가야 한다고 한다. 바람이 지극히 순하여 조수가 순식간에 오식도 앞까지 밀어 닥쳤다. 파도가 몹시 심하여 배가 정박할 수 없는 상태라 배 멀미가 심하게 일어나다. 밤이지만 차라리 배를 떠나게 하고 바다의 한가운데 쯤 가서 배 위에서 제사음식을 차려서 제사를 지냈다.

 

28일

●넓고 넓은 바다여! 크고 큰 바다여!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서북간의 아득하고 망망하게 드넓은 곳에서 검은 점의 작은 섬이 있는데 연도라 하고 그 동쪽에 또 하나의 섬이 있어 푸른 솔과 풀로 덮여 있는데 개화도(개야소도)라 한다. 개화도에는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큰 도시를 이룬다고 한다.

  노 젓는 뱃사공들을 단속해서 온 힘을 다하여 노를 젓게 하였으나 큰 배의 도움을 받았어도 한 20리쯤도 이르지 못하다. 오후에 연도에 도착하여 닻을 내리고 숙소에 머무르다.

 

29일

●한 밤중 2경 무렵부터 배가 나는데 남풍이 불어서 노를 젓는데 기운을 보태다. 대호송관인 마량첨사가 와서 뵙다. 서천 호송사도 찾아오다. 배 위에 붙잡아서 묶어 놓고 곤봉으로 7번 엉덩이를 치라는 분부를 내리다. 망월도 첫 경계부터 연도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주의 호송리가 와서 뵈었는데 비인보령리는 경계를 넘어서 오지 않았다. 분하고 통탄한 것은 이곳은 밤에는 배가 가지 못하고 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뱃속에서 사흘 밤이나 지냈다. 배 뒤쪽에서 일하는 사공들을 불러 위로의 상금 두 냥을 주다. 두 번에 걸쳐 일곱 냥을 주니 감격의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30일

●사시에 배가 뜨려 할 때에 이곳이 곧 고대도(안면도 남쪽 3km 지점에 있다.) 오른쪽에는 도토마리 섬이 있고 왼쪽에는 뾰족한 봉우리를 가진 명덕도라 한다. 섬 앞에 어전(漁箭 고기 잡는 화살)이 십 여리나 펼쳐져 있다. 고대도의 마을모양이 즐비하게 잘 정돈된 아름다운 바닷속의 대도시와 같다. 남녀(藍輿)를 타고 마을 객사에 내려서 예감고(관리들이 머물려 쉬는 곳)에서 한 낮을 쉬다. 술과 안주를 내놓았다. 오적어회인데 색깔이 깨끗하고 희며 그 맛이 평소에 달게 먹는 생복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

 

4월 초 2일

●귀와 눈이 갑자기 섬광과 같은 황홀함에 돌아보니 왼쪽 편에 여러 섬들이 있다. 다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들이다. 오른쪽에 솔밭은 안면도이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이곳에서 배가 만들어진다.

●앞에는 경도(鏡島)가 있는데 사는 사람은 근 백호 정도라고 한다. 조그만 암자가 그 속에 있다 하는데 큰 바다의 외딴 섬에 불가의 절이 있어 불교의 진리를 설교하는 불당이 있다는 것은 또한 교묘하다. 대 호송관인 마량첨사가 잠시 나타났다가 다시 모습이 없어졌다. 연일 바다를 건너고 위험한 관문을 지났다. 12척의 배 가운데 오직 3척만 뒤를 따르고 나머지 8척은 좇아 따라오지 못한다. 경계하고 삼가면서 소근진 앞 바다에서 열지어 닻을 내리고 머물러 숙소에서 묵었다.

 

초 3일

●배가 민어리(民魚里)를 거쳐 갔다.서남풍이 연거푸 불어서 배는 날아가는 것 같이 빨리 갔다. 겨우 태안지경을 떠났는데 갑자기 짙은 안개가 하늘을 덮어 바로 가까운 거리도 앞뒤의 배도 분간 못하게 되었다. 물 깊이가 두 길이 넘는 때문에 뱃속에 있는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기에 얕은 곳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하였지만 할 수없이 동아줄을 연이어 일곱 길이나 되게 이어서 깊은 물에 닻을 내리었다.

●어제 밤에 길을 잃었을 때 어떤 사람은 수원의 경계에 들어갔다고 하고, 혹 어떤 사람은 남양의 경계를 넘었다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오나라와 초나라의 중국경계라고도 말하였다.

 

초 4일

●여기가 바로 영흥도 뒤의 바다이다. 땅은 곧 남양부이고 화량진이다. 남양 호송장교가 와서 뵈었다. 말린 조갯살 몇 되를 가지고와 저녁거리 반찬에 보탬을 주었다. 배 사공들이 섬으로 들어가 물을 길어 오는 길이 늦어졋다. 내일 배가 떠난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매우 신속하다고 말하나 날짜를 계산해 보니 10일이나 지났다. 형제도를 지나 팔산도가 있고 그 팔산도 왼쪽과 오른쪽 얕은 곳에 몇 년 전에 서양의 배들이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일직이 들은 바로는 서양의 배들은 물이 얕으면 가지 못한다고 한다.

●앞에는 대궐도부평 평지가 있고 그 앞 왼쪽에는 송도가 있는데 영종진의 소속이다. 노 젓는 사공들이 몸을 던져 죽음으로서 노를 젓는다. 특별히 3냥의 돈은 상으로 사공의 머리에 걸어 주었다. 그런즉 함차고 기쁨에 넘친 감격의 소리가 노래가 되고 웃음꽃이 피었다.

 

초 5일

●날이 훤하게 새어서 팔산도의 중간쯤 되는 바다에서 출발하다. 북쪽의 하늘 끝에 있는 많은 산들이 첩첩이 쌓인 박에 3개의 봉우리가 특별히 솟아있고 천만 개나 되는 푸르름에 짙은 봉우리들이 쌓여있는 곳을 초공에게 물으니 바로 삼각산이라 한다. 10여일을 들락거려 수도 서울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다. 잠시 영종에 이르러 먼저 배 7척이 닻을 내리니 큰 바다는 다 지났다. 장강(한강)으로 직접 통하는 곳이 영종진이라 한다. 본래 의무적으로 응당 여러 배들과 같이 머물러야하나 습증으로 몸이 상해서 잠시 마을 사랑채의 따뜻한 곳에 머물면서 치유하였다. 앞으로 5리쯤 나아가서 세어리에 닻을 내렸다. 동쪽에는 중산이 있는데 이곳이 곧 이다. 서쪽에는 마니산정족산성이 있으니 이곳이 곧 강화부이다. 서북간 10리쯤 되는 곳에 층층이 높이 솟은 산봉우리가 유난히 뛰어나고 암석이 뾰족 뾰족 솟아 있는데 그곳이 손돌이다.

 

●위에는 너 댓개의 움막이 있으나 병든 환자들의 움막으로 민가의 집을 피하였음에 틀림없다. 다시 살펴보니 그 아래 남자와 여자 30여명이 있는데 등이 굽은 곱사등이와 난장이들로 돌을 깨고 있다. 몹시도 불우한 생애를 이와 같이 누가 만들었는가? 불쌍한 삶의 존재들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돌을 채집하여 소금을 가라앉히는 채염(採鹽)을 하는 것이다. 맨발로 돌아다니다가 열 발가락이 돌 모서리에 찧어 피가 나서 물속의 기생충이 몸 한가운데 기생한다. 병든 몸으로 하루 종일 일한 품삯이 겨우 굴 한 되인데 많은 소금일을 하고도 소금 값은 2전이 안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백성을 쓰는 업무의 상태가 고르지 못함이 이와 같다.

초 6일

●세어리에 머물면서온 종일 문서작성에 매달리다. 초지첨사가 대호송관으로 찾아와 알현하다.

 

초 7일

●해가 뜰 때에 배는 황산을 지나며 닻을 잠시 내려 머물다. 손돌목은 평소부터 험하거니와 막힌 곳으로 소문나서 십분 삼가고 경계해야 한다. 앞이 갑자기 사나운 급류가 되어서 물살이 돌에 부딪히는 힘찬 상태는 사납고 빨라 기운찬 말이 마치 하늘을 날아 작게 보이는 것 같다. 계곡의 흐름이 12척의 배가 바늘구멍으로 숨어 차례로 지나는 듯하였다.

연미정 아래에 다달아서 12척의 배가 나란히 닻을 내리게 하였다. 부평호교가 찾아와 알현하다. 연미정은 명승지로 유명한 곳이다. 비록 사치스럽고 아름답지는 않지만 집 꾸밈새며 창틀이 아주 견고하고 넓고 넉넉하여 풍채가 당당하다.

●나는 무엇 하는 벼슬아치인가? 자고로 층층의 바다를 건너기가 힘들다. 만리나 되는 먼 곳에서 나라의 세곡을 운반하여 지금 여기에 이르렀다. 여기 올 때까지 마음은 한시도 편안하지 않았다.

 

초 8일

●천자선과 공자선이 사고로 늦은 걸음으로 가는 바람에 낭패의 걱정이 뒤따름이라 생각되다. 해는 지고 있다. 아직도 20리 정도밖에 나가지 못하였는데 수로가 비좁아서 아무리 조심해서 나가도 불과 얼마를 가지 못한다. 그래서 배를 머물게 하여 배위에서 숙소를 삼았다. 모든 사람의 바램은 모두가 단잠을 자고 편안한 것을 원한다. 일어나 보니 빗소리는 그치지 않고 쏟아지고 있다.

 

초 9일

●이 날은 배가 떠나서는 안 되는 날이다. 그러므로 배를 머물게 하고 기 길고 긴 여름날 무료하고 심심함을 푸는 방법이 없다. 장암으로부터 출발하여 13일이 지나서 처음으로 어버이의 기체가 편안하고 아무 일 없다하니 마음이 놓이다. 안흥, 원산, 영종의 삼사가 어찌 오지 않는가 물었다.

 

초 10일

●점심때 오시에 출발하다. 간간이 수많은 얕은 바다와 빠른 여울을 만나 건너가기가 힘들어 조심조심 나아가 천천히 갔다. 겨우 10여리가 되는 고양 현암리에 이르러 닻을 내렸다.

 

11일

●동풍이 연달아 불어서 우기를 몰아내고 오늘 배가 가야 한다.

 

12일

●여기서 출발하여 10리쯤 가면 석동목이 있는데 물길이 얕아 길이 험해서 오늘 배가 떠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한다. 작은 배로 포구를 지나 배를 따라오게 하여 강기슭에 매어두고 보니 여기가 현암이다. 집들이 아주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가꾸어서 청결하다. 돗자리 위에 앉아서 조금 쉬다. 앞에는 수 십 척의 낚시 배가 있다. 이 모두가 도롱이와 삿갓을 쓴 물고기 낚시를 즐기는 낚시꾼 할아버지들이다. 노를 젓는 것을 왼손으로 하고 오른손으로 낚싯대를 들어 고기를 낚는데 잠시 사이에도 은빛 비늘이 번쩍이는 월척이 넘는 것들이다. 혹은 2-3마리, 조금 큰 것은 한 마리에 7전을 값으로 쳐서 주고 사가지고 와서 썰어서 회를 만들어 술안주로 삼으니 어디 가서 술을 구할 것인가 고민이다. 과연 부엌의 한 구석에 술이 가득한 술동이가 있었다. 그런데 틉틉한 탁주만 있다. 소주를 저어서 소탁주를 만들어 물고기 회와 함께 나누어 마시다. 소주 한 병을 또 사오다,

 

13일

●가는 비가 오는데도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배가 출발하다. 동풍이 연이어 불어서 돛폭을 달지 못하고 노를 저으며 가다. 간신히 밀고 버티면서 행주까지 가서 닻을 내리다.

 

14일

●오후에 서풍이 갑자기 일어나 조수는 미치지 않았다. 비록 염창목에 갔으나 쉽게 넘지 못할 줄을 알았다. 그러나 물속에서 잠시라도 머무르는 것이 걱정이 되다. 드디어 돛폭을 올리고 앞으로 나아가다. 겨우 염창목 앞 수 십 보에서 서풍이 드디어 멈추다. 염창목은 건널 수 없어서 닻을 내리다.

 

15일

●아침은 흐리고 남풍이 크게 불어 배가 가지 못하다. 점심때 조수가 물러가 빠진 후에 강물이 흘러 크게 차기를 앉아서 기다리다가 저녁조수와 아울러 서풍을 기다림이 쉽게도 빨리 오다. 시 한수를 짓다.

 

철따라 부는 바람 계절풍에 배를 띄우니 나의 벼슬은 무엇인가?

옛 부터 층층이 다른 바다의 수리 건너기가 어려워라.

만 리나 먼 거리 뱃길 조운사업 지금 여기 도착했네.

여기는 마음이 한 때도 편안히는 못 있는 곳이라네.

 

16일

●날이 밝아 일어나 보니 과연 강물은 불어서 수위가 높다. 12척 모든 배가 아울러 머물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다.

 

17일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 뱃속에서 바라는 것은 안개가 벗어나서 맑아지는 것이며 곧 서풍인데 바람 한 점 불지 않으니 걱정이다. 바로 가까운 지척에 비를 몰고 왔다. 물의 깊이를 재보니 겨우 한척이 갈 만한 뱃길이라 3척의 배가 서로 부딪히기 때문에 온전하고 안전하게 갈 이치가 아니다. 요행이 3척이 안전함을 얻어 앞으로 100보를 나아갔을 때 바람이 그치다. 할 수없이 닻을 내리고 아침을 기다리는 불안과 번민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북쪽 가장자리의 모래와 자갈밭 위에 한 척의 조그마한 배가 뒤 집혀져 걸려 있다. 근심과 걱정으로 밤을 새우다.

 

18일

●해가 뜨면서 하늘은 맑고 청명하여 졌다. 조수도 점점 불어나 생겨나고 또 동풍이 배가 있는 곳, 즉 염창목사적을 겨우 반 지났음을 알았다. 동쪽이 변하여 서쪽 미풍의 조력으로 거기다 다시 조졸들의 힘을 다하는 노 젓는 수고로 모래자갈의 톱을 이미 벗어나 양화도에 수 십일을 통해 이르렀다. 안진양을 넘어 조졸들이 나란히 도착하다. 솟아오르는 기쁨과 반가움으로 관에 소속된 신분 낮은 신분 사람들이 대포를 쏘고 나팔을 불어 대어서 마치 전공을 축하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또한 구경거리였다. 그러나 양화진 산수의 아름다움도 서울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이 아니라는 것이 한이다.

●고을을 떠나서 25일, 대저 서울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순탄하게 또한 빠르게 도착하였다 한다. 바다를 타고 조운선을 거느리기가 누구나 어려운 일이다. 12척의 여러 배가 가지런히 서강에서 머물러 자고 오후에 서울에 들렀다. 곧 지방의 정보를 관아에 보고하고 보고가 도착함에 그 상태를 순경(巡警)과 각 사령에게 알려서 지휘를 받아 잘 처리하다. 임금님께 숙배차 궁궐에 들어가서 배례하였다. 장안과 시골의 식솔들 모두 다 편안하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다.

 

19일

●아침이 밝았다. 대궐을 향하여 나아가서 궁궐에 엄숙하게 절하고 식사 후에 서강에 나아가다. 그리고는 호조판서가 나오기를 기다리다. 모든 절차의 점검을 신고하고 후에 각기 서울 장안과 시골의 집으로 돌아갔다.   끝

 

 

조선왕조실록 관련자료

1873년 9월 13일

●전라감사 이호준의 장계에

<도내의 대동세를 직접 상납하는 각 읍들이 근래 경강의 배가 부족하기 때문에 대부분 운반이 늦어져 변질되는 폐단이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부안 격포진에 조창을 설치하여 부근의 직접 상납하는 고을들인 부안, 고부, 김제, 만경, 정읍, 흥덕, 무장 등 일곱 고을의 대동세를 조운하도록 ....배 제작에 쓸 재목은 본도와 안면도에서 절반씩 가져다 쓰고 뒷날 고쳐 만들 때에는 단지 본도에서만 가져다 쓰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1874년 4월 5일

●이유원이 아뢰기를

<경상감사 유치선이 보고한 바를 보니 후조창의 조운선이 경강에 정박한 뒤에 계미(稧米)라는 명목으로 언제나 상납하기 전에 먼저 빼앗아가기 때문에 원래의 납부량이 줄어들어 결국 선주에게 억울하게 추징하게 되니 엄금하게 해주소서. 몇 십 년 전에 뱃사람의 누적된 빚을 계미라는 명목으로 천만부당하게 시공과 곁꾼(격군)에게서 멋대로 빼앗았습니다. 이 때문에 정공의 양이 줄어들어 그것을 채울 때에는 필경 뱃군들에게 배분한 뒤에야 해결이 되니 조운법을 생각할 때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1877년 5월 26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 본도 세 조창이 중 성당창 세선이 방금 곡식을 싣고 떠났습니다. 군산창, 법성창에서 이미 받았던 곡식은 잡비까지 아울러 2만여 석인데 오랫동안 쌓아둔 것과 아직 미납된 것을 같이 지체시키면 폐단이 생길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세곡의 상납을 지연시킨 전주, 옥구, 영광, 고창 네 읍의 수령을 우선 파출하고....지금 진휼정사가 겨우 끝나고 조운선으로 걷어 들이는 것을 아직 마감하지 못한 이러한 시기에 많은 수령들이 교체되는 것은 백성과 고을에 폐단을 다할 우려가 있으니 위에서 말한 네 고을의 수령을 파면시켜 잡아오는 것은 특별히 그만두고 모두 죄를 진 채로 일을 보게 하며 다시는 감히 조금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엄하게 신칙하여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1880년 10월 5일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 전라감사 심이택의 장계를 보니...근년에 지체된 것은 역시 배의 척수가 많지 않은 탓입니다. 현재 있는 조선과 약간의 임선(賃船)이 그간에 이미 싣고 떠났는데 그 밖의 곡물은 이 배들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려 밤을 새워 실어 보내겠습니다.

옥구지방의 오식도는 호남과 호서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바로 본도 수참의 마지막 지경이어서 영남과 호남의 세선은 이곳을 경유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최근 그 섬의 수참이 막혀서 매번 군산, 고군산 앞바다로부터 호서로 바로 향합니다....삼창의 배의 부족 액수가 원래 많습니다....허류조 가운데 사공들의 묵은 빚을 쌀로 보상한 것이 그 수가 5,6000여석이나 됩니다.>

 

 

1881년 3월 23일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지금 이에서는 신뢰가 없고 아래에서는 법을 지키지 않아서 백성들의 마음이 흩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대체로 백성들의 정상은 언제나 다스리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는데 팔도의 감사로부터 360개 고을의 수령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어질고 착한 정사는 모르고 오직 백성들에게서 빼앗으려고만 하니,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조리 물과 불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곤궁해도 호소할 데 없는 그들의 심정은 차마 말로 표현 할 수 없습니다.

몇 해 전부터 화적떼가 일어나 산골짜기에 모여들고 해적들은 무리지어 무기를 싣고서 대낮에 큰 길에서 길가는 사람을 막고서 돈을 빼앗는데 심지어는 세전과 군목까지도 왕왕 탈취 당하게 되었습니다. 도적의 수가 혹은 수백 명 혹은 700, 800명에 이르며 그 밖에 시정과 여항에서 출몰하는 잔당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식량을 저축하는 방도는 우리나라는 삼남에서 배로 운반하는 것에 불과한데 근래 배가 파손되어 잃은 것이 해마다 30,40척 이상이며 총계가 5,6만석이나 되니 백성들에게 독촉해서 징수한다 하더라도 끝내 흐지부지하게 소비하고 맙니다.

대체로 경강의 선주와 조창의 뱃사공들이 그 선가를 탐하여 많은 이익을 남겨 먹기 위하여 배를 굉장히 크게 만들어서 짐을 싣되 적어도 2,000여 석 이상입니다. 또 혹시 더 실을 쌀이 있으면 일은 적고 값은 곱절로 받는 이익을 탐내어 험한 바닷길을 가면서 요행수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뜸 짐을 더 실으니 그 중량은 태산처럼 무겁게 됩니다. 바람을 받은 돛배가 수십 일 물길을 가는 과정에 사나운 파도와 광풍을 만나기라도 하면 바다의 파도 속에 들어가 버리는 것이니. 이는 비단 귀중한 물건을 버리게 될 뿐 만 아니라 나라의 생계와 군량에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각도에 엄중하게 공문을 띄워 세곡을 운반하는 배에 짐을 싣는 양을 대략 1,000석을 넘지 않도록 한다면 침몰하는 일이 반드시 줄어들 것입니다.>

 

 

1883년 2월 7일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조세 운반선이 와서 닿으면 많은 침해를 당하는 것이 벌써 고질적인 폐해로 되고 있습니다. 호남에 있는 세 조창의 조운이 올라올 때, 알만한 높은 관리들 집에서 『분세』라고 하면서 매번 뱃전에 달려들어 제멋대로 빼앗는 바람에 정식 공납이 줄어들고 있지만 배꾼들이 무슨 수로 막아 내겠습니까?>

 

 

1883년 9월 23일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방금 전라도 암행어사 박영교의 별단을 보니’

<세 군데 조창의 조세를 되질하는 곡(斛)은 원래 규정이 있으나 오랜 세월 사용하다 보니 널판이 온통 손상되어 혹 암암리에 농간을 부려 네 모퉁이를 움직이면 턱없이 들어가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파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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