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러시아사

청담(靑潭) 2015. 9. 22. 09:09

 

 

이야기 러시아사

                                 지은이 김유경

                                                   펴낸 곳 민음

 

들어가며

러시아사를 별도로 읽은 적이 없다. 러시아는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이며 근대에 유럽에 뒤쳐진 나라였지만 20세기 들어 소비에트 연방으로 한때는 미국과 함께 전 세계를 양분하여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이며, 오늘날에도 세계 250여 국가 중 가장 큰 나라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10대강국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우리나라에게는 가장 중요한 인접강국이다. 모처럼 러시아사를 읽고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1.러시아의 기원

러시아의 뿌리로서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민족은 슬라브족이며, 그중에서도 동슬라브인이 러시아 역사의 주인공이다. 7세기부터 북쪽으로 이동하여 드네프르강, 돈강, 볼프강 연안에 그중 일부는 흑해 연안에서 돈강에 이르는 러시아 남부평야에 정착하여 척박한 조건에서도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는 본격적인 정착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사실상 러시아 국가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한 사람들은 북방 이민족인 노르만족(루스인)이다. 그들은 슬라브족의 터전을 자주 침략해 무역을 담당하고 막강한 무력으로 슬라브인들을 지배했다. 9세기 슬라브족들 내부에 분란이 발생했다. 이러한 분란이 자주 일어나자 슬라브인들 스스로 루스인들에게 통치자가 되어 질서를 바로잡아달라고 부탁을 하게 된다. 이에 노브고로드 최초의 우두머리가 된 전설적인 인물인 루릭이 862년 러시아의 국가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일부는 올레그의 지휘아래 키에프에 정착하였다.

 

 

2.키예프 시대

●통일국가 키예프 공국(880 - 12세기 중반)의 탄생

키예프 대공국 또는 키예프 루스는 880년경부터 12세기 중반까지 현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중심으로 존재한 고대 국가로 동슬라브족들이 구성원들의 주를 이루었다. 우크라이나의 시초이기도 하다. 창시자는 바랑기아인 출신 노브고로드의 올레그 공(公)으로 드니프르 강 유역을 정복하여 루스의 수도를 노브고로드에서 새 정복지의 키예프로 옮겼다.

러시아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통일국가 키예프를 탄생시킨 올레그는 자신을 대공이라 칭하고 교통의 요충지이며 정치적 비중이 높은 키예프(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도)를 막강하게 키워 최대제국인 비잔티움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블라디미르 1세 때(998)에 동방 정교회가 국교로 되었고 그의 아들인 야로슬라프 1세(재위 1019년∼1054년)까지 최전성기였다. 키예프 루스는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고 흑해 유목민의 침입을 받아 쇠퇴하고,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재위 1113년∼1125년)가 중흥시켰음에도 불구하고 13세기 중엽에 몽골에게 정복을 당해 멸망당해 버리고 말았다.

 

●노브고로드 공국(1136 - 1478)

일멘호에 있던 상업도시 노브고로드(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 아래에 odnlcl한 벨리키노브고로드)를 수도로 한 중세 러시아의 귀족공화국. 페이푸스호에서 우랄에 이르는 북부 러시아 전역을 지배하며, 모스크바 대공국과 패권을 다투었다. 노브고로드공인 알렉산드르넵스키가 1240년과 1242년에 스웨덴과 독일의 침략을 저지하면서 국력을 키웠다. 베체라고 하는 귀족과 대상인의 합의제가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공과 관리를 임명하고 재판권도 가졌으므로 노브고로드봉건공화제, 노브고로드후국(侯國)이라고도 한다. 통상의 적지로, 오리엔트 ·콘스탄티노플· 한자동맹의 여러 도시 등과 교역하였다. 1478년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한 모스크바대공국의 이반 3세에 의하여 합병되었다.

 

●타타르의 세력 확장 킵차크한국(1243 - 1502)

남러시아에 성립한 몽골 왕조. 금장한국(金帳汗國, Golden Horde)이라고도 한다. 유럽의 중세에 몽골은 타타르라 칭한다. 칭기즈칸의 장자 주치는 이르티시강 이서의 스텝을 영지로 받았으나 주치의 사후 그의 차남 바투는 몽골 서정군의 총수가 되어 러시아 및 동유럽 각지를 석권함과 동시에 남러시아를 확실히 장악하여 킵차크한국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신도 사라이가 이룩된 볼가강의 하류지방은 유라시아의 스텝을 경유하는 실크로드와 북방으로부터의 모피로가 교차되는 요충을 점하여 오랫동안 투르크계 하자르족이 활약하는 무대가 되어 있었다. 이 칸국은 원조(元朝, 1271~1368)가 멸망한 후에도 100여 년간 존속하다가 1480년에 모스크바 대공(大公) 이반 3세(Ivan III, 재위 1462~1505)에 의해 멸망했다.

 

 

●러시아의 부활 모스크바 대공국(13세기 - 1584)

원래는 키예프 루스의 일부였던 작은 공국이었다. 모스크바는 오늘날 러시아의 수도이다. 13세기에 성립되었으며, 14세기 후반부터 성장하여, 15세기 초반부터 영토 확장을 시작하였다. 14∼15세기 러시아 여러 나라를 통일하여 러시아제국(帝國)의 기초를 이룬 중앙집권적 봉건국가. 처음에는 류리크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3세기 북동 러시아의 유력한 정치 단위체로 성장하여, 14세기 전반부터 영토확장을 시작하였다.

1328년 이반 1세는 블라디미르 대공이 되어, 대군주로 섬긴 타타르 칸에게 바치는 러시아인들의 공물을 걷을 수 있는 지위를 얻어, 경제적 ·정치적 위치를 굳혔다. 아들 세묜 고르디는 ‘전체 루시(Rus’:러시아의 고대 명칭)’의 대공이 되었고, 1380년 드미트리돈스코이는 쿨리코보전투에서 킵차크한국을 격파하여 몽골· 타타르 지배에서 벗어났다.

 

 

●강한 러시아를 꿈꾸며

이반 3세(재위 1462-1505)는 노브고로트를 병합(1478)하고, 타타르에 대한 조공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며 1480년에는 킵차크한국은 멸망시켰다. 그는 240여년에 걸친 타타르의 지배를 종식시킨 장본인이 외었다. 스스로를 차르라 칭하며 그리스의 왕녀와 결혼하여 비잔틴 제왕의 후계자로 자처하였다. 이반 4세(재위 1533-1584)는 군주의 절대권을 강화하여 차리즘을 성립시켰다.

 

 

●혼란의 시대(1584 - 1613)

이반 4세가 죽은 후 모스크바 대공국은 정치적 혼란기에 빠진다. ...최고통치자가 제거되고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린 러시아를 외부세력들이 지켜만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1610년 여름 폴란드가 잠시의 지체도 없이 모스크바를 공격해 왔다. 러시아의 귀족들은 모스크바 성문을 열어 제치고 폴란드군을 환영하였다. 폴란드군은 당당하게 어와 모스크바를 차지하였다. ...국민군에 의해 비로소 모스크바가 해방되고 새로운 통치자를 뽑기 위하여 국민회의를 소집했다. 1613년 귀족과 농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모였고, 여기서 러시아 역사의 한 장을 여는 16살 소년인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르로 선출했다.

 

 

 

3. 로마노프 시대

●로마노프 왕조(1613-1917)

로마노프는 그 기초가 다져지기도 전에 스텐카라친을 비롯한 농민 반란(1667)과 분리파의 출현으로 인한 종교혼란 등 시련을 겪게 된다.

 

 

●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의 치적

하지만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에 이르러 러시아는 큰 전환기를 맞이한다. 1697년에는 사절단과 함께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지를 순회하면서, 조선술, 포술을 배우는 한편, 각국의 풍속, 제도를 연구하고 귀국한 뒤 귀족에게 서유럽 식의 풍속 관습을 강요하였으며, 율리우스력을 채용하는 등 적극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1700년 발트 해 진출을 기도하여 북방 전쟁을 벌였고, 1703년 네바강 입구를 획득한 후 이곳에 러시아의 새 수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표트르 자신의 이름을 따서 새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라고 명명했다. 1711년 투르크와의 싸움에 패하였다. 그러나 1721년 뉘스타트 조약에서 발트 해 연안을 획득하여 숙원을 풀었다. 1722, 1723년 페르시아에 원정하여 카스피 해 서안을 병합하였다. 이러한 전쟁은 농민에게 군사, 운수 등 계속적으로 무거운 부담을 지워 초기에는 농민의 반란을 야기하였으므로 그는 내외의 곤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강력한 행정 조직의 확립을 목표로 절대주의 국가를 확립하였으며, 교육 문화에도 힘을 기울여 러시아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 러시아 제2의 도시다. 제정(帝政) 러시아 때는 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1914년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개칭되었다가,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라 불렀다. 그 후 1980년대의 개방화가 진전되면서 1991년 옛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았으며, 페테르부르크로 약칭하기도 한다. 네바강(江) 하구의 101개의 섬과 함께 강 양안(兩岸)에 계획적으로 건설되었다. 말라야(小)네바강·볼샤야(大)네바강을 비롯한 수십 개의 분류에 놓인 500여 개의 다리로 연결된 정연한 거리는 ‘북방의 수도(水都)’로 불려왔다. 북위 60°의 고위도 지역이면서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보여, 남쪽의 모스크바보다 기온이 높다.

 

 

●급변하는 러시아 왕조

예카테리나 대제(1729-1795)는 독일의 작은 공가(公家)에서 태어났다. 1745년, 후에 제위에 오른 표트르 3세에게 출가한 뒤 남편의 평판이 나빠지자, 1762년 즉위한 지 얼마 안 되는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대제(大帝)라 불렀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하여 볼테르 등과도 문학으로 교유하였고, 학예와 교육에 큰 관심을 쏟았다. 특히, 1767년에 소집한 사회 각층의 대표로 이루어진 법전(法典)편찬위원회에 새로운 정치원리를 해설하는 유명한 훈시를 함으로써 계몽군주로서의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그 법전의 편찬은 성과를 얻지 못하였고, 1773년에 일어난 푸가초프의 반란 이후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1775년의 지방행정 개혁, 1785년의 귀족 특권 인가장 등으로 법치주의의 원칙을 도입함과 동시에 귀족들과의 협력체제도 강화하였다. 만년(晩年) 특히 프랑스혁명 발발 뒤에는 반동화하여 자유사상을 탄압하기도 하였다. 외정(外政)면에서는 두 차례의 투르크와의 전쟁(러시아-투르크 전쟁)과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 등으로 러시아의 영토를 남쪽과 서쪽으로 크게 확대하였다. 아들 파페르와 불화가 심한 반면, 손자 알렉산드르를 편애하여 자유주의 교육을 시켰으며, 음탕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보냈다. 가까운 여러 총신에게 국유지와 농민을 덧붙여 하사함으로써 농노제(農奴制)를 확장하였다.

 

 

●알렉산더 1세(재위 1801-1825)의 치적

알렉산더 1세(재위 1801 ~ 1825)는 러시아 제국의 10번째 황제이다. 어렸을 때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사랑 속에서 스위스인(人) 아르프에게 자유주의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다. 할머니의 모순된 궁정생활과 할머니와 아버지의 불화 및 극단적인 나폴레옹 숭배자인 아버지의 변덕스러운 전제정치의 환경 속에서 자라 “선의(善意)이면서 시기심 많고, 결단성이 없으나 빈틈이 없다”는 평의 모순된 성격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성격은 신하의 쿠데타를 스스로 묵인하여 아버지를 암살하게 하였고, “독재자이면서 자코뱅, 속인이면서 신비가(神秘家)”라고 불린 내외정책의 끊임없는 동요와 모순의 한 원인을 만들기도 하였다.

즉위하자 우선 아버지의 총신(寵臣)을 물리치고 악법을 폐지하여 대학의 신설과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도입, 성제(省制)의 실시를 중심으로 한 행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서 M.M.스페란스키에게 입헌적인 개혁안을 만들게 하였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농노해방에도 관심을 보여 뒤에 독일계(系) 지주가 지배한 발트 3현(縣)에 실시하였으나, 일반적으로는 귀족의 자발적인 농노해방의 길을 여는 데 그쳤다. 외교에 있어서는 처음에 영국 ·프랑스와의 평화유지에 힘썼고, 이어 제3 · 4차의 대(對)프랑스대동맹에 가담하여 아우스터리츠(체코의 슬라브코프)와 프리들란트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패하였다. 1807년에 틸지트(소베츠크)에서 화약을 맺었으나, 대륙봉쇄의 실행 등으로 이해가 대립되었기 때문에 1812년에 나폴레옹 군대의 원정을 받게 되었다.

그 뒤 나폴레옹의 뜻을 좇아 파리에 입성하였고, 빈회의와 신성동맹(神聖同盟)의 결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빈회의가 창설한 폴란드왕국의 국왕이 되었고, 1809년에는 스웨덴에서 탈환한 핀란드대공(大公)을 겸하여 두 나라에 헌법을 인정하였으며, 그 밖에 남쪽의 그루지야 ·베사라비아 ·아제르바이잔을 병합하였다. 불안정한 성격을 지닌 그는 전쟁 중에 경건주의적 신비주의(敬虔主義的神秘主義)에 사로잡혔고, 이것이 전후(戰後)에 내정 면에도 영향을 끼쳐 언론단속의 강화와 문교정책의 반동화를 초래하였다. 특히, 전쟁에 따른 재정궁핍의 대책으로 실시된 둔전병(屯田兵)제도가 국민의 원한의 표적이 되었다. 아들이 없어 동생(뒷날의 니콜라이 l세)에게 황제 계승권도 밝히지 못한 채, 여행지에서 갑자기 죽었다. 그 때문에 황제계승권을 둘러싼 혼란을 틈타 농노제 폐지를 외치는 청년장교 데카브리스트가 난(1825)을 일으켰다.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의 치적

니콜라이 1세(1825-1855)는 맏형 알렉산드르 1세의 사후, 다음 형 콘스탄틴이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여 즉위했는데, 즉위일에 데카브리스트(Dekabrist ; 12월 당원의 뜻) 난이 발생(1825. 12. 14)하여 이에 대하여 잔혹하게 진압했다. 혁명 운동에 대하여는 뛰어난 헌병적 수완을 보이고, 러시아 및 폴란드의 대중 운동의 탄압을 지휘했다. 유럽의 헌병으로서 유럽의 혁명 운동의 진압에 협력하고, 특히 헝가리의 반란 진정을 위해 러시아군을 파견했다(1849). 동방에 대하여는 터키에 간섭하여 러시아의 지배권을 확립하려 하고, 터키 침략에 대하여 터키를 돕는 영국ㆍ프랑스와 충돌, 드디어 크림 전쟁에 돌입하였다(1853). 대내적으로 화폐 제도의 개혁ㆍ철도의 건설ㆍ기술 학교의 개설ㆍ자본주의의 발달에 관심을 보였는데, 본질적으로는 농노제의 옹호자로서 그쳤다. 그 시대인의 증언에 의하면 황제는 크림 전쟁의 실패로 음독(飮毒), 사망했다고 한다.

 

 

●알렉산더 2세(재위 1855-1881)와 러시아

알렉산더 2세(1855-1881)는 니콜라이 1세의 맏아들이다. 크림 전쟁에서 크게 패하자 러시아를 근대화 시켜야겠다고 느끼고, 1861년 농민 노예 해방령을 공포하였다. 그 밖에도 지방 자치제와 재판 제도의 개혁 등 진보적 정책을 보였으나, 1863~64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폴란드 반란이 일어나자 노골적인 반동 정치를 시작하였다. 이어 터키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농민의 부담이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혁명적인 지식인들이 <인민의 운동>을 일으켰는데 그들이 던진 폭탄에 맞아 암살되었다.

 

 

●알렉산더 3세(재위 1881-1894)

알렉산더 2세(1881-1894)는 알렉산드르 2세의 둘째아들이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개혁정책을 계승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이미 황태자 시절부터 반동세력에 가담하여 자유주의 세력에 대항했으며 아버지의 죽음은 그의 태도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유대인을 압박하고 강력한 경찰 정치를 하였다. 밖으로는 평화 불간섭주의 정치를 썼지만 범슬라브주의를 채택, 중앙 아시아ㆍ근동에 진출을 기도하여 영국과 대립, 곡물 관세 문제로 독일과 분쟁이 일어나 그로 인하여 비스마르크와 사이가 나빠, 1890년에 불로 동맹(佛露同盟)을 체결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

1905년 1월 22일, 페테르스부르크의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그날 아침 굶주림에 지친 노동자들이 조용히 길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신앙심이 깊은 노동자들로서, 여느 때라면 교회에 갈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그들은 차르에게 급료를 올려달라고 청원할 생각으로 눈길을 걸어 궁전을 향해가고 있었다. 청원서를 가지고 행진하는 대열은 점점 불어나 급기야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이 행렬 앞에는 성상과 황제의 초상이 게양되어 있었다. 그들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찬송가를 부르며, 혹독한 추위 속을 행진하였다. 그 행렬 선두에는 가폰 신부가 있었다.

가폰이 페테르스부르크에 공장 노동자 클럽을 만든 것은 1903년 봄이었다. 클럽은 활기를 띠어 1904년 가을에는 회원수가 9천 명에 이르렀다. 모임의 내용은 서로 친교를 하거나 명사의 강연을 듣는 것이 주요 행사였고, 정치적인 대화를 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브치로프의 공장에서 노동자 3명이 부당 해고를 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가폰 신부 아래 노동자가 결집하게 되었고, 이들이 차르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들고 행진하게 된 것이다. 이 파업은 이미 1주일 전에 발생하여 계속되다가 이날 22일에는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쓰게 된 것이다.

청원서 행렬은 오후 2시, 광장에 집결하였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여, 인민을 쏘지 말아라'고 하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막아선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하였다. 뒤이어 대포도 여러 발 발사되었다.

이 일제 사격으로 1천 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눈 위에 쓰러졌다. 이 행렬에 대해 이번에는 황제의 기병대가 돌진하여 칼을 휘둘렀다. 이리하여 '거룩한 주일'은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의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모스크바 · 사라토프 · 바르샤바 등지에서 노동자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

지금까지 신을 받들듯이 섬겨온 차르의 명령에 의해서 수많은 동료들이 살상된 사실을 알게 되자 러시아 민중 속에 신앙과 같이 뿌리 깊던 차르 숭배는 일시에 무너지고 사람들은 차르에 대해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당시 일본과 전쟁 중이던 러시아 정부로서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은 셈이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

제정 러시아 최후의 황제인 니콜라이 2세는 그의 나이 26세 때 즉위하게 된다. 그는 수줍고 사색적인 젊은이였으며 그의 재위기간은 한마디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정치적으로 무능한 니콜라이 2세(재위 : 1894~1917)는 러시아 최후의 황제이며 알렉산드르 3세의 맏아들이다. 1881년 황태자가 되고, 1890~91년 극동에 여행, 일본에 들렀을 때, 소위 오쓰 사건으로 쓰다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1891). 즉위(1894) 후 독일ㆍ프랑스와 함께 일본에 대한 3국 간섭(1895)에 성공하고, 다시 동청철도 시설권의 획득(1896), 랴오둥 반도 조차(1898) 등으로 극동 진출을 꾀했다. 그 동안 국내에서는 외국 자본에 의한 중공업이 발전되었으나 농촌의 상태는 개선되지 않고, 노동자 농민의 혁명 운동은 점점 커졌다. 헤이그의 만국 평화 회의를 제창, 개최했으나(1899) 극동에서는 의화단 사건(1900) 후, 만주 점령의 계속으로 일본의 대륙 정책과 대립, 러일 전쟁(1904~05)을 했으나 패배하였다. 1905년의 혁명(피의 일요일)과 패전에 임하여 물리쳤던 비테를 다시 기용하여 국회 개설을 약속함으로써(1905) 겨우 혁명을 억제하고, 드디어는 스톨리핀 시대를 만들었다. 외교상으로는 핀란드의 비외르쾨에서 빌헬름 3세와 회견, 대영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1905), 비테 등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영로 협상(1907)의 성립에 의해 독일 포위의 체제에 참가했다. 제1차 대전시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파면 후 자신이 총 사령관으로서 전선의 대본영에 있었으나 전황의 불리ㆍ식량의 결핍에 의한 민중의 불만 및 라스푸틴에 의해 조종되는 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대 독일 강화 파의 암약 등으로 주전파인 자본가의 신뢰도 잃고, 2월 혁명에 의해 퇴위(1917), 10월 혁명(1917) 후, 소련 정부에 체포되어 가족과 함께 에카테린부르크에서 총살되었다.

 

 

 

4. 격변의 혁명기

●소비에트와 혁명

1905년 10월 14일은 러시아 역사에 새 장을 여는 날이었다. 500명에 1명 단위로 뽑힌 40명가량의 노동자 대표와 혁명주의자가 공업학교에 모여 최초의 소비에트를 결성하였다. 소비에트의 의장은 당시 25세의 트로츠키였으며 도시 곳곳에는 소비에트가 생기게 되었다.

※트로츠키(1879-1940): 학생 시절에는 나로드니키에 참가하였으나, 후에 마르크스주의로 경도되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제2차 대회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했을 때는 후자에 속하였다. 1905년 제1차 혁명 당시에는 레닌의 혁명 방침, 즉 노동자 계급의 지도에 의한 노농동맹에 입각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전화라는 방침에 대립하여 '영구혁명론'을 주장, 1912년에는 8월 블록을 조직하여 볼셰비키에 대항하였다.

1917년의 10월 혁명 직전에 볼셰비키에 가입. 일국(一國)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혁명의 성공 후에 외무 인민위원으로서 독일과의 강화에 반대하여 소비에트 정권의 위기를 가져왔다. 그 후에도 끊임없이 '세계혁명론'을 주장하며 스탈린과 대립하였다.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 즉 러시아만 가지고도 세계혁명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고 트로츠키는 러시아는 후진국이기에 소비에트 독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유럽의 혁명을 지원하여 세계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 그후 1927년당으로부터 제명되었다. 1927년에 국외로 추방되어, 국외에서 제4인터내셔널을 결성하여 반소ㆍ반혁명 음모 활동을 하다가 1940년에 멕시코에서 암살되었다.

 

●혁명가 레닌

레닌(1870-1924)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Vladimir Ilich Ulyanov)이며, 심비르스크 출신이다. 공식명인 니콜라이 레닌은 1902년경부터 사용한 필명이다. 1917년 러시아 11월 혁명(볼셰비키혁명, 구력 10월)의 중심인물로서 독일파 마르크스주의자 K.카우츠키의 사회민주주의에 대립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후진국 러시아에 적용함으로써 러시아파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론가이자 사상가이다.

1870년 볼가 강변의 심비르스크에서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7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계획에 참여했던 맏형 알렉산드르가 처형당하자 혁명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다. 1887년 카잔대학에 입학했으나 학생운동으로 퇴학당하자, 플레하노프가 1870년대에 러시아에서 도입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혁명운동에 투신하여 체포와 유형의 세월을 거친 뒤 1900년 국외로 망명, 1903년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2차 대회에서 당원 자격문제로 마르토프와 맞서 직업혁명가주의를 관철시킴으로써 볼셰비키(다수파)가 되었다.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 직후 일단 귀국하였으나, 1907년 다시 망명하여 주로 스위스에 머물면서 연구와 저술에 종사하다가, 1917년 3월 혁명(구력 2월) 직후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封印列車)로 귀국하였다. 같은 해 11월 7일 무장봉기로 과도정부(過渡政府)를 전복하고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혁명정권을 수립한 다음, 러시아의 공산정권을 지키기 위하여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인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을 결성하였다. 1922년 뇌일혈 발작으로 와병, 마지막 1년은 실어증(失語症)까지 겹쳐 병상에서 지내다가, 1924년 사망하였다.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은 배고픔과 질병에 지쳐있는 러시아를 먼저 함락한 후 프랑스와 영국을 다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밀고 밀리는 장기전 속에서 경제는 혼란에 빠져들었고 철도는 연료부족으로 수송량을 감당하지 못했다. 또 농촌에서는 남자들을 절반 이상 잃어버렸기 때문에 농작물을 수확하지 못했다. ...경제가 극에 달하자 국민들 사이에서는 차르정부에 대해 원방이 커졌고, 전쟁 초기에 일어났던 애국심은 혁명운동으로 변해갔다.

 

 

●2월 혁명과 임시정부의 수립

전선에서 연전연패한 러시아는 1915년에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루마니아의 국경에 이르는 서부 지역을 잃었다. ...1917년 새해를 맞이하였으나 러시아의 국내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을 거점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당 볼세비키 페트로그라드 지하위원회는 노동자들의 시위를 조직하려 하였다. 그러나 시민들이 그들의 지도를 기다릴 것도 없이 시위는 자연스럽게 발생하며 전국으로 퍼졌다. ..이때 두마의 뛰어난 웅변가로 소문난 케렌스키가 나타났다.

※케렌스키(1881-1970) : 심비르스크 출생으로 19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어 정치범으로 고발당한 혁명가들을 변호하는 정치재판을 맡아 명성을 얻었다. 1912년 제4대 의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근로당 당수로서 사회혁명당 온건좌파에 속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국토방위를 주장, 러시아의 참전을 지지하였다. 1917년 2월혁명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 · 병사대표 소비에트 부의장이 되어 당시 대중운동의 지도권을 놓고 국회의장 로장코와 쟁탈전을 벌였다.

임시정부에 처음에는 법무장관으로 들어갔고, 이어 육군장관 겸 해군장관, 7월혁명 후 총리 겸 러시아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내정에서는 온건정책을, 외교에서는 연합국과 협조, 전쟁 수행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결국 L.G.코르닐로프 반란을 유발시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10월혁명 때 여자로 변장하여 가까스로 탈출, 전선의 카자흐부대를 이끌고 수도 탈환을 꾀하였으나 실패하고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1940년 이후 만년에는 미국에 있으면서 《회상록》을 집필하였다.

 

 

●1917년 10월 혁명

차르에 의한 전제정권이 붕괴되면서 1917년 4월에는 러시아의 망명가들이 귀국하기 시작했다. 플레하노프, 레닌, 체르노프 등 굵직굵직한 혁명가들이 모두 이 달에 국내로 들어왔다. ...7월은 혁명가들이 다시 위기에 처한 시기였다. 케렌스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새 내각을 구성하고 자신이 수상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페트로그라드 콜로프체프 장군에게 레닌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이기에 처한 레닌은 다행히 그를 지지하는 군대의 지원을 받아 지하로 잠적하였다.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케렌스키는 스스로가 역사적 요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을 위한 싸움만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날아들었던 호기조차 잡지 못하고 실패로 마감하였다. ...8월 31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개최되었을 때 볼셰비키는 279대 115로 다수를 획득하였다. 츠케이드제 의장을 비롯한 멘셰비키파의 간부가퇴장하고 케렌스키에 의해 체포되었던 트로츠키가 볼세비키를 대표하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취임하였다. ...케렌스키는 풀려나자마자 케렌스키의 의도와는 달리 레닌을 대신하여 볼셰비키를 이끌었다. 드디어 레닌과 트로츠키가 손을 잡은 것이다. 9월 5일에는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도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였다. ...10월 10일 레닌은 당 중앙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변장하고 핀란드에서 귀국하였다. ...10월 26일 임시정부는 항복하였고 대부분의 각료는 체포되었다. ...10월 혁명은 레닌과 그의 주변의 소수가 주도했다. 즉, 정권장악을 주저하던 다른 당파들과는 달리 권력에 대한 집요한 야심과 조직력을 갖춘 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볼셰비키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러시아 내전(1917-1922) : 10월혁명 직후 러시아에서 일어난 전쟁. 적군(赤軍)은 러시아 국내외 반볼셰비키 군대의 공세로부터 갓 출범한 소비에트정부를 수호했다. 러시아의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조약 서명은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사이에 분열을 일으켰고, 양가의 연계는 무너져버렸다. 그 후 몇 개월 동안 러시아의 양대 반레닌주의 세력은 눈에 띠게 가까워졌는데 그 하나는 헌법제정회의 해산을 계기로 레닌에게 등을 돌린 비볼셰비키 좌파 세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쿠반 초원의 의용군을 주축으로 한 우익 백군 세력이었다.

백군(白軍)은 1917년 겨울 모진 고난을 겪고 난 뒤 1918년 4월 안톤데니킨 장군의 지휘를 받게 된 군대로 비록 수는 적었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19년 초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백군을 지원한 반면 영국과 미국정부는 보다 신중한 태도를 취하여 양대 진영의 화해를 획책했다. 그러나 연합국의 군사 개입은 규모에 있어 대단히 소극적인 것이었고 모두 합쳐 약 20만 정도의 병력이 투입되었을 뿐이었다. 공산당 · 백군 · 민족주의자들간의 혼란스러운 전투에 당황한 우크라이나의 프랑스군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1919년 3월과 4월 중에 잇달아 철수했다.

유일하게 진정한 위협이 되었던 간섭 세력은 극동 지역에 체계적으로 주둔해 있던 일본군뿐이었다. 내전으로부터 위풍당당하게 부상한 정치 체제의 명칭은 '러시아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었지만 소비에트의 역할은 실질적으로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권력은 공산당에 귀속되었으며 공산당원들이 인민위원 소비에트의 모든 관직, 그리고 그보다 하위인 정부 기구의 모든 요직을 차지했다. 당 자체는 중앙위원회의 통제를 받았으며, 중앙위원회를 지배한 인물은 레닌이었다.

레닌은 육군 인민 위원으로서 적군의 최고 통수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군수품 보급과 인력 동원에도 책임이 있었다. 1919년경에는 적군이 백군 반대파 보다 훨씬 우세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것은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군의 기지가 변경에 흩어져 상호 연락이 어려웠던 반면 줄곧 유러시아의 심장부를 장악했던 적군은 작전 계획과 병력 이동에 있어 보다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세칭 '러시아 적위군(赤衛軍)과 백군(白軍)의 충돌 사건'이라고도 한다.

 

 

●스탈린의 성장

스탈린(1879-1953)은 조지아(그루지야)의 고리(Gori)에서 구두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일찍이 비밀결사 ‘메사메 다시(Mesame Dazi)’에 가담하여 티플리스의 그리스도 정교회신학교에서 추방당하고, 1901년 직업적 혁명가가 되어 캅카스에서 지하활동을 하였다. 이후 10년간에 체포 7회, 유형 6회, 도망 5회의 고초를 겪었다.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라는 논문으로 인정을 받아 1912년 당중앙위원이 되었고, 《러시아 뷰로》의 책임자로서 처음으로 스탈린(강철의 사나이)이란 필명을 사용하였다. 1913년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어, 1917년 그곳에서 3월혁명(구력 2월)을 맞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다. 4월 레닌이 망명에서 귀환하자 그의 ‘4월 테제’를 재빨리 지지하였고, 신정권의 민족인민위원이 되어 제(諸)민족 공화국의 공수동맹(攻守同盟)인 ‘소련방’의 결성에 진력하였다.

1919∼1922년 국가통제위원, 이어서 초대 당 서기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면서 반세기 동안 독재적으로 전(全) 소련을 통치하였다. 레닌은 유서에서 그의 재능을 평가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성격적 결함(난폭 ·불관용)도 지적하여 당 서기장직에서 경질할 것을 시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체카(VCHK:비밀경찰)와 당기구를 통하여 1만 5000명 이상의 자기 부하를 전국에 배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1924년 제13차 당대회 때 유임을 인정받았다.

이 사이 1936년 이른바 ‘스탈린헌법’이 제정되었다. 스탈린헌법은 소련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를 법적으로 확인한 것이었으나, 이 무렵 국제적 파시즘의 대두로 ‘대소전쟁(對蘇戰爭)’의 위기에 직면하자, 3차에 걸친 대숙청을 감행하여 잇따른 ‘반혁명재판’(1936∼1938)에서 G.E.지노비예프 등 반대파 뿐 아니라 충실한 당원·군인·관료와 무고한 많은 민중이 처형·투옥·제명되었다.

1939년 제18차 당대회에서 그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문제를 제기하여 소위 ‘일국(一國)사회주의론’을 전개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전야의 긴박한 국제정세하에서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어 파시즘의 총구를 일시 서유럽 쪽으로 돌려놓았다. 1941년 V.M.몰로토프 대신에 인민위원회 의장(수상)을 겸하여 비로소 정치정면에 나섰는데, 그로부터 l개월 후에 독일의 기습을 받아 독· 소전쟁(1941∼1945)에 돌입하였다.

그는 국방회의 의장, 적군(赤軍) 최고사령관이 되어 개전 초에는 패배하였으나 급속히 국내의 임전체제를 갖추고, 주코프 등 소장 장군들을 이끌고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모스크바 전선에서 우세한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반격의 시간을 마련하였다. 또 테헤란·얄타·포츠담 등의 거두회담에 참석, 연합국(미국· 영국)과의 공동전선을 굳혀, 독일을 굴복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45년에 대원수가 되어 그 명성은 레닌을 능가하였고 동구(東歐)제국에 대해 헤게모니를 잡고 미국과 대항함으로써 냉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반대자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였다. 1953년 측근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가 죽은 뒤, 1956년 제20차 당대회에서 N.S.흐루쇼프의 ‘스탈린비판’은 복잡한 반응을 일으켜 ‘중 · 소논쟁’ ‘헝가리사건’ 등을 유발하였고,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심각한 혼란 속에 몰아넣었다. 특히 1991년의 소련정변 이후 스탈린에 대한 인민들의 평가는 종전의 신(神)적 숭배에서 독재자로 격하되었다.

 

 

5.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

●스탈린 시대(1924-1953)의 개막

1924년 레닌 사후 사람들은 트로츠키가 레닌의 뒤를 이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스탈린 일파는 어느 새 지노비에프를 지도자로 카메네프,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트로이카 체제를 갖췄다. 그들에게 트로츠키는 위협적이고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또 트로츠키가 주장하는 영구혁명론은 그들의 안락한 생활을 위협하는 이론으로 보았다. ...1925년 12월에 열린 제 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지노비에프가 정면충돌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이 공식 채택되었다. ...1926년 10월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는 정치국에서 추방되었고 카메네프는 후보위원으로 내려앉았다. ...12월에 열린 제15차 당대회에서 막강해진 힘을 휘둘러 좌파그룹의 해산과 이론의 철회를 요구하며 트로츠키파의 지도그룹 75명을 당에서 제명하였다.

 

 

●흐루시쵸프 시대(1953-1964)

스탈린이 죽자 후계자 문제가 대두되었다. 물망에 오른 인물은 스탈린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신망을 구축한 말렌코프와 비밀경찰로 경찰기구에서 힘을 다진 베리아, 그리고 당 기구에 확실한 지지기반을 가진 흐루시쵸프였다. 흐루시쵸프(1894-1971)는 러시아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 겸 공산당 서기장을, 1958년부터는 소련 총리와 겸 소련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낸 정치인이다. 그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와 공존을 모색하였다. 그의 탈스탈린화 정책과 반스탈린주의 정책은 공산주의 국가들에 폭넓은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집단지도 체제를 무시한 정책 결정, 농업 정책 실패,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에 대한 양보 등은 많은 반대파를 만들어내었고, 1964년 10월 13일 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실각되었다.

 

 

●브레즈네프 시대(1966-1982)

1964년 10월 흐루시쵸프는 흑해 연안의 소치 휴양소에서 느긋하게 유가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어떠한 방법도 찾지 못한 채 졸지에 실각하고 말았다. ...1966년 3월 제23차 당 대회 때 브레즈네프를 중심으로 하는 트로이카체제가 형성되었다. 당 제1서기에 브레즈네프, 수상에 코시킨, 최고회이간부회의장에 포드고리니가 임명되어 집단지도체제 형성되었다.

브레즈네프(1906-1982)는 스탈린 이후 최장기인 18년 동안 소련을 통치하였다. 금속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나 1931년 공산당에 입당한 후, 1935년에 도네프로젠스키 야금대학을 나왔고 제2차 세계대전에는 정치장교로서 참전하였다. 1946∼1947년에 자포노레주(州)당 제1서기가 된 이후, 여러 당직을 거쳐 1956∼1960년에 당중앙위원회 서기(書記), 1960년 최고회의간부회 의장을 맡았다. 1964년 10월 14일 흐루쇼프가 그의 내정(內政), 특히 농업정책의 실패로 당중앙위원회에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당 제1서기직에 올랐다. 그의 시대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1965∼1970년의 제1단계는 브레즈네프(당 제1서기), 코시긴(수상) 및 포드고르니(최고회의간부회 의장)의 집단지도체제였으나, 1970년 이후 제2단계에서는 점차 실질적인 1인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안정된 권력을 구사하였다. 그는 통치기간 동안 극적인 정책변화를 피하며 지도적 당간부의 지위안정화를 도모하여 당내의 갈등을 최소한으로 줄였으나, 그 결과 그의 집권 말기에는 정치국 정위원 평균연령이 70세에 이르렀다. 1977년 6월 포드고르니의 후임으로 국가원수직인 소련최고회의간부회 의장직도 맡아, ‘도전받지 않는 지도자’로서 권력지위를 굳혔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브레즈네프 헌법’이라 불리는 새 헌법을 발효하여 브레즈네프 체제를 완전히 굳혔다. 브레즈네프도 그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외교정책의 기본적인 목표를 혁명기지로서의 소련의 국익(國益) 보호와 확대에 두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데탕트 설계의 주역으로서 동서 긴장완화에 미친 그의 공로는 적지 않았다.

 

 

●고르바초프 시대(1985-1991)

브레즈네프 후임으로 KGB의장을 지낸 안드로포프가 당서기장이 되었으나 15개월만에 사망했다. 그 뒤를 체르넨코가 이었지만 13개월만에 사망한다. 1985년 3월 53세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새로운 당서기장으로 선출되면서 소련은 커다란 변혁의 시대를 맞이한다.

고르바초프(1931 - 현재)는 캅카스산맥 북쪽의 스타브로폴 지방 프리블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콤바인을 운전하며 5년간 농장일을 하다가 19세 때인 1950년 모스크바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 2학년 때인 1952년 공산당에 입당하여 교내의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 조직원으로 활약하였다. 5년간의 대학과정을 마치고 1955년 고향 스타브로폴로 돌아와 콤소몰 서기로 일하다가, 1968년 지구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78년 농업담당 당서기로 취임한 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농업투자정책을 수행하였다.

1980년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권력의 핵심권에 접근, 유리 안드로포프가 집권하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고, 콘스탄틴 체르넨코의 집권기간 중에도 제2인자의 위치를 굳혔다. 1985년 3월 체르넨코가 사망하자 당서기장에 선출된 뒤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여 소련 국내에서의 개혁과 개방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등 세계질서에도 큰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1988년 연방최고회의 간부회의장을 겸하고, 1990년 3월 소련 최초의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91년 7월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계급투쟁 포기의 소련공산당 새 강령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의지는 1991년 8월 보수강경파에 의한 쿠데타를 유발시켜 한때 실각하였다가 쿠데타의 실패로 3일만에 복권하고, 공산당을 해체, 소련의 70년 공산 통치사에 종막을 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보리스 옐친 등의 주도로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연합이 탄생하자 1991년 12월 25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사임 후 1992년에 국제 환경보호 운동과 전쟁난민 아동구호 사업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고르바초프재단을 설립하였으며, 1993년 4월에 설립된 국제환경비정부기구 그린크로스인터내셔널의 초대 총장을 맡았다. 이후 환경운동에 앞장서 2007년에는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선정한 '45인의 환경 영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며, 2008년에는 2011년의 러시아 총선을 목표로 정계 복귀를 선언하기도 하였다.

'독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사  (0) 2015.10.10
중국사 100대사건  (0) 2015.09.24
서욱 북촌에서  (0) 2015.09.06
아시아 베스트 170  (0) 2015.08.26
부의 미래  (0) 2015.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