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서욱 북촌에서

청담(靑潭) 2015. 9. 6. 23:23

 

 

서울 북촌에서

                                                       지은이 김유경

                                                                     펴낸 곳 민음

 

들어가며

 

작년에 서촌에 대한 글을 읽고 ?한나절 쯤 한가로운 시간을 내어 돌아다녀 보리라?던 스스로와의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하던 차에 이번엔 북촌에 대한 책을 보게 되었다. 북촌은 종로구 재동 · 가회동 · 삼청동 등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이곳이 청계천과 종각의 북쪽에 있는 동네인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예로부터 조선시대 왕족이나 고위관직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매천야록≫ 권1 상에 의하면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서 살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북촌이 권세 있는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데 비해,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한 남촌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양반들과 하급관리 · 상인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후에 일제강점기에는 남촌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어, 조선인 중심의 거주지역으로서의 북촌과 일본인 중심의 거주지역으로서의 남촌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오늘 날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사이, 즉 사간동, 송현동, 원서동, 재동, 계동, 가회동, 안국동, 인사동 등을 말하며 행정동으로는 삼청동과 가회동이다. 넓게는 창경궁 오른편의 성북동, 혜화동, 이화동까지 포함하여 찾아보면 좋을 듯싶다. 이화동엔 대학로와 낙산공원과 이화장이 있고, 성북동엔 성균관과 간송미술관이 있고, 혜화동엔 혜화문이 있다.

 

 

제1장 한옥 동네의 삶

 

1. 북촌의 가게들

●안국동 네거리에서 북쪽으로 나 있는 여러 골목 중 아무데로나 내키는 길을 택해 슬슬 걸으면 앉을 만한 곳이 나오고 걸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2. 한옥에 살다

●가회동과 삼청동으로 통칭되는 종로구일대 한옥은 북촌 풍경의 백미이다.

●북촌일대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안옥 저택을 지금까지 지니고 있는 대표적 서울 사람이 윤보선 전 대통령 집안이다.

3. 피마자 정원을 가꾸며 시를 읊다.

4. 서울 음식의 매혹

5. 복촌 정원 구경

 

 

제2장 삼청동과 성북동

 

1. 나란한 산책길, 삼청동 길과 맹현

●경복궁 건춘문 담을 따라가다 두 갈래 난 길의 오른쪽, 활처럼 휘어진 도로가 그 오른쪽에 높이 솟은 맹현의 언덕과 높낮이를 이루며 삼청 터널까지 1.5km가량 이어진다. 복개된 물길 위, 도심 한 복판에서 바로 북악산으로 스며드는 삼청동길이다.

※2012년 1월, 독립문역에서 출발하여 인왕산 아랫길을 지나 창의문을 거쳐 북악 팔각정까지 걸었다. 팔각정에서 아래로 내려와 삼청각을 지나니 숙정문이 있었고, 총리공관 뒤편 삼청동 주민센터 부근에서 택시를 타고 마포집에 돌아왔었다. 그 날의 여행목적은 완전히 달성하였지만, 택시를 탄 부근에 북촌 한옥마을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사실 수년 전에 우리 아이들과 한옥마을을 가볍게 구경하고 총리공관 앞에서 택시를 타고 온 적이 있었는데 서로 연결 지어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왜나고요? 여전히 촌놈(?)이니까요.

2. 삼청동의 예술과 사람들

3. 삼청각 건축 이야기

●1972년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난 이후 남북한 대표들의 첫 서울회담에 맞춰 군사정권의 힘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1970년대 최고급 요정으로 사업가, 정치인, 관료, 전문직등 실력자들이 많이 드나들고 과거 박대통령도 찾아와 놀던 곳이라는 비사로 널리 알려졌다. ...2001년 대보수를 거쳐 민간 운영체제로 전환되었다. ...가볍게 들리기에는 비용이 고가인데 한옥 한 채를 다 차지하고 벌이는 모임, 가족이 나 회사 기념일, 동창회, 생일 등에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4. 성북동 세 집

●한용운의 삼우장, 이태준의 수련산방, 이종상․이재준의 별장 일관정

5. 성북동에서 조선을 만나다

●성북동 언덕 깊숙이 <꿩의 바다> 동네에는 조선 선조 이래의 병장터 성락원이 있다. 이곳을 처음 보았을 때 4,358평 정원에 흐르는 시냇물과 연못, 돌기둥을 받친 웅장한 누각, 나무숲, 그리고 이런 것들이 지형을 따라 높낮이를 이루며 가려지고 펼쳐지는 경관이 별천지 같았다. ...외교 무대에서 한국적 정원의 아름다움을 과시할 민간의 의전장소로 서울에 여기만 한 곳이 없어 역할이 컸다. ...1953년 사업가 심상준이 이 집을 사들여 여덟 개의 돌기둥으로 받친 누각 송석정을 지었다. ...서울 시내에서 큰 규모의 한국식 전통 정원을 유지하는 곳은 송석정 정도다.

 

 

제3장 부드러운 삶의 휴식이여

 

1. 세검정을 지나다. 옛사람의 풍류를 찾아서

●서울 북서쪽의 세검정 일대는 삼각산과 인왕산. 북악의 산세가 겹칠 듯 맞대고 있는 곳이다. 6차선 도로가 나있는 도심이지만 삼면을 둘러싼 산자락이 수려하게 들어온다. ...큰 비가 올 때는 흘러 내려가는 빗물의 기세가 쏜살같다. ...부근에 창의문, 홍지문, 탕춘대성 등의 군사시설과 세검정, 안평대군과 이항복의 별장, 흥선대원군의 석파정 등이 있다.

※정약용 선생이 젊은 시절 비오는 날 세검정 급류를 구경하려고 친구들과 함께 말을 타고 와서 술을 마시며 즐겼다는 세검정 정자에서 막걸리 한잔 마셔보고 싶다. 북악산 정상에서 보이는 평창동을 둘러싸고 있는 북한산 고봉들이 그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어 내가 언제나 저 산의 봉우리들을 모두 올라가 볼까나 하는 생각을 하였는데 글쎄.... 나이 더 먹기 전에 꼭 올라보고 싶다.

2. 성필관네 공연 날 저녁

●효자동 북쪽에서 부암동 주민센터에 이르는 길 한쪽은 산의 나무를 야생 그대로 보며 지나는 시내버스 길이다.(이곳은 북촌이 아니라 서촌이라고 해야 한다) 봄이면 개나리가 눈부시고 청와대 옆 칠궁 가까이에는 이팝나무가햐얗게 피고 큰 나무가 있어 구중심처 같은 고즈넉함이 서려 있다. 출근시간대면 자동차가 꼬리를 물지만 걷는 사람은 없다. 학교가 끝난 시간에 학생들이 왁자지껄하게 버스를 타고 떠나면 곧바로 적막한 산길이 된다.

※경복궁역에서 경복궁을 따라 영추문을 지나 무궁화동산을 거쳐 주한교황청대사관을 지나며 창의문까지 2.5km이며 도보로 넉넉잡아 40분이다. 창의문에서 세검정까지 1.5km에 20분 거리다. 왕복 2시간이면 아주 행복한 도보여행이 될 듯하다.

3. 원서동 언더그라운드

●원서동은 창덕궁 바로 왼편에 있는 작은 동네다. 원서동 언덕 박바지 창덕궁 후원(비원)담 밖 흔히 <장희빈 집터>라고 부르는 곳, 상궁이던 여성이 대궐에서 나와 살던 야무진 한옥 백홍범의 집은 서울시문화재다. 동네 아래쪽에는 오래돼 퇴락한 집들이 많지만, 툇마루에 놓인 달리아 화분 같은 어여쁜 장면이 빼꼼 열린 문틈으로 보인다. 화가 고희동의 옛 집은 귀신이 나올 것 같은 폐가가 되어 가림막이 둘러쳐 있다.

4. 살림과 예술이 하나다, 홍정실의 공간

●한국 골동품의 본산은 강북 인사동이다. 최근에는 인사동의 오랜 가게들이 많이 사라졌다. 인사동 개발과 맞물려 큰 길은 골동품들이 진열장에서 방긋 웃는 듯한 아기자기한 맛을 잃었다.

5. 빌모트가 설계한 평창동 관경재

●삼각산 보현봉 아래 평창동에는 미술관이 여러 개 있다....1979년경 여기 산동네에 주택단지가 처음 마련되었다. 처음에는 집들이 드문드문 했다. ...언덕 높이 위치한 집에서는 보현봉의 웅장한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고 거친 바위와 흙이 집 마당에 들어와 있다. 남쪽으로는 북악 스카이웨이의 긴 가로등 빛이 가득 들어오는 도시적인 야경이 있다.

※평창동은 종로구지만 서촌도 아니고 북촌도 아닌 큰 마을이다. 세검정이 있는 마을이며 보현봉을 비롯한 북한산의 고산준령들이 감싸고 있는 서울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는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다.

6. 청진동 열차집 풍경

●청진동은 세종로 오른편, 종로구청 앞의 작은 마을이다. ...청진동 일대 해장국, 빈대떡, 음식점, 번역, 호적정리 가계들은 6.25이후 형성된 서울의 재개발 대상 상업지구이다. ...수십 년 전 학생시절 찾았던 낙지집, 선술집 같은 업소는 여러 군데 있다. 그런 가게들이 오밀조밀 모여 50여년을 지나는 동안 어떤 곳은 청진동 명소가 되었다.

7. 광화문에서 만난 야나기의 조선 미술품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는 이십대 나이에 조선 미술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 1915년 이래 십 수 차례 조선을 다녀간 그의 주변에는 함께 조선 미술에 빠져들고 조선인이 다 되어 살았던 아사카와 노리다카, 아사카 다쿠미 형제가 있어 그 영향이 컸다. 그는 서울과 도쿄에서 전시회를 열고 1924년 경복궁에 조선민족 미술관을 만들었다. 도쿄에 일본 민예관을 설립해 일본, 한국, 유럽의 민예품 2만 점을 소장하고 저술과 강의를 하였다. 그가 말했다.

?어째서 조선의 것은 아름다운가??

?조형의 세계에서 이정도의 것을 영속적으로 지니고 있는 나라는 별로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제4장 서울의 상징

1. 보신각종을 지키는 사람들

●조선시대 종각에서 새벽 4시 파루를 쳐 성문을 열면 기다리던 사람들과 우마차들이 일제히 팔대문 성 밖으로 나갔다가 밤 10시 인정을 쳐서 문 닫기 전에 돌아왔다.

...옛 보신각종은 세조14년인 1468년 김덕생이 감독하고 정길산, 김몽총 등 20-30여 명이 참여해 높이 3.18m, 지름 2,28m에 쌍두 용뉴 고리가 달린 무게 19.6톤으로 주조됐다. 500년이 훌쩍 지나면서는 수명을 다해 박물관으로 가고 1984년 8월 15일 새 종으로 대치됐다. 국민의 성금으로 만든 새 종에는 비천의 꽃 줄과 태극이 조각됐다. 강찬균의 조각, 전 서울공대 교수 염영하와 이장무가감독하고 성종사에서 주조했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는 아침과 점심에 서른세 번, 저녁에 스물여덟 번씩 하루 세 차례 백번쯤을 치는 기간이 있었다. ...2006년 11월 21일부터 매일 오전 정오에 수문장 교대식과 함께 서른세 번 종치는 일이 살아났다.

2. 광화문의 밤

●광화문에서는 눈을 감고 있어도 사방 얼마만큼의 지도가 환히 떠오른다. 지나는 길 바람소리까지도 느껴진다. 넓은 차로와 사방으로 난 길 북쪽으로는 북악산과 경복궁, 광화문이 한 시대를 전한다. 관청이 있던 육조거리는 현대사에 접어든 정부 청사, 세종문화회관, KT, 교보 같은 건물이 나란하다.

※광화문 앞에 서면 기분이 상쾌하고 대한민국 국민임이 자랑스러워진다. 넓디넓은 세종로를 바라보면 막힌 가슴이 확 트이는 듯 후련하다. 광장에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있어 마음 든든하다. 10월의 마지막 밤에 우리 초등학교 동기들의 모임을 예정하고 있다. 올해 예순 여섯에서 예순 셋까지의 우리 친구들이 오후 3시에 경복궁 앞에서 만나 함께 궁궐을 거닐고, 청계천에서 노닐다 저녁을 먹고, 노래방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한잔씩 하고는 10시에 헤어질 생각이다.

광화문은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이 궁제에 따라 '오문(午門)'으로 부르다가, 태조 3년(1395) 정도전에 의해 '정문(正門)'으로 이름을 바꾸지만, 세종 8년(1426)에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집현전에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지어 올리면서 지금의 광화문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원래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궁성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부서지고 석축은 탄흔 투성이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광화문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은 1968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다. 파괴된 문루를 다시 짓고 광화문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 재건한 광화문은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으며, 재건 당시 광화문의 축을 경복궁의 중심축에 맞춘 것이 아니라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청사의 축에 맞추어, 그 결과 3.5도 가량 본래의 축과 어긋나게 틀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원래의 광화문 자리에서도 14.5미터 가량 뒤로 물러나 지금의 자리에 서있게 되었다. 이렇게 원형을 잃어버린 광화문을 복원하고자 2006년부터 광화문 철거작업을 시작해 3년 8개월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2010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화강암으로 육중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이층의 문루를 얹어 멀리 조망하기 좋을 뿐 아니라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기단에 있는 3개의 아치형 출입문은 경복궁이 조선의 정궁이라는 위엄을 과시한다. 돌로 만든 기단 위에는 흙을 구워 벽돌처럼 만든 '전돌'로 나지막한 담을 둘렀는데, 여기를 장식한 팔괘문양은 조선조 궁궐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광화문 완공 기념식이 열리던 날 기념공연에 참석하여 태극기를 흔들던 때가 벌써 5년 전? 아아! 세월이 무섭다. 오년 후면 70이 눈앞에?

3. 세종문화회관과 건축가 엄덕문

●세종문화회관은 주변의 높은 빌딩 사이에서도 늠름히 버티고 앉아 있다. 고래등 같은 한옥 혹은 관복을 차려입고 앉은 사람의 위엄 같다. ..건축가 엄덕문이 설계, 5년의 공사 끝에 1978년 완공된 세종뭉화회관은 한국적 스타일을 성공적으로 제시한 근대 건축의 대표적으로 꼽힌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치르는 행사에 가본 일도, 공연을 관람한 일은 없는데 우리 초등학교 친구인 송하진 지사와 송국진 교장(두 사람이 한 마을 출신)의 아들들 결혼식이 이곳 별관에서 열려서 참석한 바 있다. 이상한 인연이네? 두 사람이 사는 곳이 다르고 평소 자주 연락이 되는 것도 아닌데?

4. 성돌이, 굽이굽이 이야기가 흐른다

●한국은 성(城)의 나라라고도 한다. 국내에만 1,500여개의 산성이 있고 고대 일본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성을 쌓은 것도 한국인들이었다. ..서울 성곽은 서울도심을 둘러싸고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휘도는 성곽 18.2km를 말한다. ...평지엔 자취도 없어지고 산을 타고 있는 높은 곳에만 문루가 새로 건축되고 낙산성 구간을 비롯해 여기저기서 조금씩 복원됐다.

...혜화문에서 성북동까지는 성 안팎으로 나무가 많은 고풍스러운 산책길이다. ...와룡공원에서 이어지는 군부대 뒤 성벽은 인가가 없는 산속 그대로여서 옛 서울의 흙을 보는 듯 했다. ...성벽은 계속해서 북문인 숙정문과 창의문으로 이어지는데 군 경비구역이라 성북동 약수터까지 밖에 지나지 못하다가 성곽이 개방된 2007년에나 숙정문에 가 보았다. 숙정문에서는 창의문으로 쉬이 갈 수 있다. 낙산에 가보야야겠다. 이화장도 가보고 싶고(일전에 이화장을 가려고 전화를 했더니, 전화를 받는 여직원은 ?지금 공사중이라서 와봐야 볼 것이 없다?엄청 거만한 목소리로 퉁명스레 답했다.)간송미술관도 가보아야 하고 성균관에도 들러보고 싶다. 물론 혜화문에서 숙정문까지 성곽을 따라 답사도 하고 싶다.

 

제5장 젊은 그들

1. 재동 백송과 젊은 그들

●재동 헌법재판소 구내에는 600년도 더된 거대한 백송이 있다. 고종 때 이곳은 개화파의 산실 박규수의 집이었다. ...박규수는 청나라를 통한 실학 문물 도입을 외친 박지원의 손자다. 할아버지의 사상을 계승한 그의 집 사랑에는 오경석, 유대치, 동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교, 박영효 등이 모였고 이들은 조선 말 개혁세력의 주체가 되었다.

2. 우정총국, 홍영식의 얼굴이 보인다

●종로구 견지동에 회화나무 고목 한 그루와 한옥 한 채로 남은 우정총국 건물이 있다. ...1884년 근대화된 우편제도를 실시할 때 사용했던 우정국 건물 중 남은 단 한 채로, 헐리기 직전 한 체신부 관리의 노력으로 보전되어 1972년에 체신 기념관이 되었다.

3. 정동 산책, 돌담길에 새겨진 근대의 기억

●덕수궁 옆 정동은 조선말의 정치사적 긴장과 숨 가쁜 근대화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1884년 이래 여러 나라와 수교를 맺으면서 덕수궁 주변에 각국 공사관이 들어서고 석조전, 중명전 같은 양식 건축이 시작됐다. 선교사들이 앞장서 들어온 정동 일대에 신식학교, 예배당, 집과 클럽, 상사등이 생기고 여기서 발원된 역사는 20세기 문턱을 넘으며 근대사를 이뤘다.

...정동이란 이름은 태조의 비 신덕 왕후 강씨의 무덤 정릉에서 나왔다. 1396년 강왕후가 죽자 태조는 규범을 넘어서까지 성안인 이곳에 장사를 지내고 흥천사라는 170칸 규모의 큰 절도 세웠다. 왕권 계승을 두고 강씨 소생의 방석을 죽이며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9년 태조가 죽자마자 정릉을 파괴하고 성 밖 지금의 정릉동으로 이장했다. 이대 정릉에 장식됐던 돌조각은 청계천 다리 석재가 되고 하수도속에 파묻혔다가 2004년 청계천 복원 때 발굴되었다.

※태조 방원의 성격상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를 제치고, 그것도 일등공신이자 아주 똑똑한 방원을 무시하고 계비인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이를 후계자를 삼은 것은 낮잠자던 소도 들으면 웃을 일이다. 견훤도 같은 어리석음을 범했다. 지난 달 8월에는 롯데 경영권 분규가 발생했다. 롯데그룹 창시자 신격호씨는 현재 94세인데 아직도 권력을 놓지 못하고 그룹을 운영하다가 큰아들 신동주와 작은 아들 신동빈 사이에 권력쟁탈전이 벌어지고, 큰아들을 지원하는 창시자인 신격호의 명령이 전혀 먹혀들지 않고 그룹 임원들이 모두 작은 아들을 지지하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과도한 권력집착증이 만들어낸 대재벌의 대망신이다. 老醜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 해도 나이가 80이 되면(과거에는 70세가 되면 고위관료도 致仕라 해서 자진하여 물러났다.) 정치계에 기웃거리지도 말아야하고, 회사도 자식에게, 아니면 사회에 넘겨야 한다. 나는 왕도 아니고 재벌도 아니라서 권력도 돈도 가진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나이 80이 되면 자신의 모든 것을 현명하게 잘 정리하여야만 한다.

4. 북촌의 대궐 여성들

●경복궁 동쪽 사간동과 송현동에는 궁 규모의 한옥이 많았다. 지금 법련사와 그 옆 법륜사 자리는 고종의 후궁 광화당 이씨와 또 다른 후궁 삼축당 김씨가 왕실에서 지어준 집을 나란히 해서 자매처럼 살던 곳이다.

...안동 별궁 옆 1만여 평 규모의 송현동에 순종의 비 순정효 황후 윤씨(1894-1966)의 친정집이 있었다. ...대궐 여성들로 명성황후 민씨(1851-1895), 귀비 엄씨(1854-1911), 의왕비 김숙여사《현존하는 고종의 직계 후손은 둘째아들인 귀인 장씨 소생의 의친왕 이강(1877-1955)의 후손들뿐인데 의친왕은 정부인인 덕인당 김씨 등 10여명의 부인을 뒀고 이들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12남 9녀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일본으로 끌려가 대마도주의 아들과 정략결혼한 후 정신병자가 된 덕혜옹주(1912-1989), 순헌황귀비 엄씨 소생인 영친왕 이은(1897-1970)의 부인인 일본여성 영친왕비 방자여사(1901-1989) 등이다.

 

 

 

제6장 서울의 祭와 齋

1. 성균관, 켜켜이 내려앉은 학문의 자취

●성균관은 관광객에게 개방된 장소는 아니다. 성균관 대학의 구내이긴 해도 캠퍼스의 시끌벅적함이 미치지 않아 물과 기름처럼 동떨어져 보인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공자의 뜻을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다고 생각하는가??라고 했던 윤휴를 두고 <사문난적>이라고 몰아붙여 가는 집단의 광적 분위기는 근래에도 기득권을 두고 죽기 살기로 대립하는 파벌들 모습에서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특정한 이념과 주의에 빠져 전혀 다른 생각과 사상을 이단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배타주의는 조선 성리학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이었고 우리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은 악질적 집단사고였다.

자신들이 믿는 종교만이 진실한 종교요, 자신들만이 오직 저 세상에 갈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외치는 저들의 정신은 온전한 것인가?

상당수의 정치인들이 수천내지 수억대의 부정한 정치자금을 받아 법원의 판결이 나서 실형을 선고 받았는데도 끝가지 잡아떼며 ?진실은 끝내 승리하리라…?며 망발들을 일삼는다. 정말 온전한 정신일까?

대선 때 전혀 사실이 아닌 유언비어를 터트려 고발당하고 거짓임이 밝혀져 형을 선고 받고도 대선승리의 주역이 되어 기고만장하며 이후로도 국회의원 뱃지를 달고 의기양양하는 미친 개 같은 정치인도 있다. 온전한 정신인가?

정부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반대해서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이슈를 만들어 내고 지역사람들을 충동질하여 해를 두고 허위사실들을 생산해가며 끝없이 집단 광기를 부리는 일부 사회단체들의 투쟁을 보면 참 별나게 생산적인 일은 전혀 안하면서 잘 살아가는 광인들이 매우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이들을 찾아다니면서 호시탐탐 정치적 재기를 노리는 어떤 못난 정치인까지도 있다. 그들 모두 온전한 정신인가?

특정 종교와 이념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특정신앙이나 이념적 교조주의를 맹신하게 되었으면서도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단호히 거부하며 오직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만이 아주 당연히 옳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없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다.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한 이해와 존중과 배려가 없이, 합리와 창의적 사고를 배제하며 오직 독선에 빠진 그들은 정말 무섭다.

2. 5월의 宗廟大祭

●종묘의 건축물들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와 제사를 지낼 때에 춤과 함께 연주되는 음악인 종묘제례악(중요 무형문화재 제1호, 세종대왕 작곡)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록되었다.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에 어가행렬과 함께 전주 이씨 종친에 의한 제사로 거행된다.

3. 잊을 수없는 아름다움, 봉원사 靈山齋

●영산재는 해마다 단오날 즈음 태고종 사찰 신촌 봉원사에서 열린다. ...영산재는 봉원사 전체를 극장삼아 춤과 노래, 수행이 어울린 일종의 장려한 가극이다. ...1973년 11월 5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9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49재 가운데 하나로 사람이 죽은 지 49일 만에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이다. 이 의식에는 상주권공재·시왕각배재·영산재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영산재는 가장 규모가 큰 의례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영산재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던 영산회상을 상징화한 의식절차이다. 영산회상을 열어 영혼을 발심시키고, 그에 귀의하게 함으로써 극락왕생하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영산재는 국가의 안녕과 군인들의 무운장구, 큰 조직체를 위해서도 행한다.

4. 국사당의 하루

●무속, 불교, 유교는 한국문화의 근간을 이룬 세 축이다. 국가적 이념, 민속, 예술, 한국인이 있는 곳 어디에나 무속은 존재한다. ...오늘날의 무속은 제천같은 국가적 이념과는 거리가 멀고 개인차원에서 신 내림을 받은 무속인들이 주도하는 굿이 대표적이다. ...국사당은 조선 초부터 남산에 있다가 일본 신사에 쫓겨나 1925년 지금 인왕산 자리로 옮겼다. ...1년 내내 재수굿, 내림굿, 진오귀굿 등이 벌어지는 굿의 전당이라 할 만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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