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를 움직인 100대사건
홍문숙․홍정숙 엮음
펴낸 곳 청아출판사
들어가며
중국사는 자주 접하지만 그래도 흔히 놓치지 쉬운 사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 책은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게 재미있게 엮어졌지만, 중국사에서 기억해둘만한 100대 사건을 잘 정리하였다. 흥미롭게 읽고 정리한다.
주나라에서 진나라까지 고대 중국의 나라들
●주나라 서주시대(BC 1046∼BC 770)의 수도는 호경(서안, 시안)이며, 낙양(뤄양)으로 옮겨 동주시대(BC 770∼BC 221)를 맞이한다. 동주시대는 춘추시대(BC 770∼BC 403)와 전국시대(BC 4036∼BC 221로 나뉜다.
1. 삼감의 난(BC 1041)-제후의 반란과 봉건제도의 탄생
주 무왕이 BC 1046년에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웠으나 1043년에 병사한다. 열세 살의 어린 성왕이 즉위하여 무왕의 동생인 주공(주공 단)이 섭정을 하자 무왕의 다른 동생들인 관숙, 채숙, 곽숙이 주공의 왕위찬탈을 의심하여 난을 일으킨다. 주공은 정벌을 단행하여 BC 1038년에 상나라 유민들을 다스리던 무경과 관숙을 죽이고 채숙과 곽숙을 형벌하여 반란을 잠재웠다.
2. 제자백가 출현(BC 770)-중국 전통을 확립하다
제자백가의 제자와 백가는 수많은 학자와 학파를 의미하지만, 기록에는 14개 정도가 남아있다.
유가, 묵가, 병가, 법가, 도가, 음양가, 종횡가, 잡가, 농가, 소설가, 병서가, 수술가, 방기가. 병가, 의가 등이 기록에 전한다.
3. 규구의 회맹(BC 651)-강한 제후국들의 시대
제환공은 제후국들에게 제나라가 패자라는 사실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이에 환공은 규구에 제후국들을 모아 회맹을 하고 춘추시대의 첫 패자가 되었다. 會盟이란 제후 사이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문제를 회의에 올려 결론을 낸 후, 그 결론에 따라 실행하는 것이다.
4. 도덕경의 탄생(BC 560-530년경)-노자가 창시하고 장자가 발전시킨 은둔의 철학
《도덕경》은 노자의 사상이 담긴 저술로, 도를 중심으로 만물의 기원, 도덕, 정치, 철학 등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다. 노자는 道를 만물의 기원으로 지칭했다.
5. 유가학파 창시(BC 520 또는 497)-중국 전통문화의 집대성
유가사상은 공자에게서 시작되었다. 공자는 서주시대의 질서회복을 목표로 正名을 내세웠고, 이를 위해서는 인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6. 오월의 싸움(BC 496) -춘추시대 마지막 패권싸움
패자가 된 오왕 합려는 오나라의 동쪽에서 점점 강국으로 성장하던 월나라 공격을 감행한다. ...월나라 왕권교체기를 이용하여 공격했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부상을 입은 채 귀국하였고,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아들 부차에게 자신을 죽인 것은 월나라 왕임을 잊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오왕 부차는 복수를 결심하고 행여 잊을까 두려워 섶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이것이 臥薪이다.
BC 494년 드디어 오왕 부차는 월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다. 월왕 구천은 5천여 명의 군사와 함께 회계로 물러났지만 오나라 군대에게 포위되어 목숨이 위태로워져서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청한다. 즉 자신은 오왕의 신하가 되고 자신의 부인은 오왕의 첩으로 바치겠다는 것이었다.
강화체결 후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의 말을 끌어주는 등 3년 동안 오왕 부차의 종처럼 살았다. 3년 후 월나라로 돌아온 월왕 구천은 복수를 위한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 오왕 부차에게 받은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쓸개를 매달아 식사 전에 먼저 쓸개의 맛을 보았다. 이것이 嘗膽이다.
7. 상앙의 변법(BC 359)-강력한 변법으로 중앙집권과 법치주의의 기초를 닦다
전국칠웅은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상호 경쟁과 대립을 거듭했다. 부국강병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각국은 군주 중심의 지배체제를 정비했는데, 이를 위해 대두된 것이 변법이었다. 그중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 낸 나라는 상앙이 주도한 진나라였다. 상앙은 두 차례(기원전 359, 기원전 350)에 걸쳐 변법을 실시했으나 권력기반이 와해도면서 모반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다. 하지만 그가 이룩한 개혁은 약소국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 바탕이 된다.
8. 합종연횡(BC 333)-권모술수와 책략이 난무하던 시대
전국칠웅은 전쟁과 군사력으로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에 처하자 권모술수와 책략을 총해 승리를 거두고자 하였다. 이에 소진은 진나라에 대항해 여섯 나라가 연합하는 합종설을 주장했으며, 장의는 여섯 나라가 진나라와 각각 연맹을 체결하는 연횡책을 주장했다. 전국칠웅은 처음에는 소진의 의견에 따라 합종을 완성했으나, 수세에 몰린 진나라가 장의를 등요하면서 6국은 합종을 깨고 연황을 확립했다.
9. 진시황의 대륙통일(BC 221)-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탄생
기원전 246년 13세의 나이로 왕에 오른 영정은 기원전 230년부터 통일의 대업을 시작한다.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영정은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강력한 통치를 위해 중앙집권제를 확립한다.
10. 만리장성 축조(BC 214)-중국 역사와 함께한 인류 최대의 건축물
만리장성은 진나라가 춘추전국시대의 장성들을 연결하면서 축조된다. 애초에는 북방 이민족(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나 여러 왕조를 거듭하면 개․보수되면서 중원과 외부, 농경세계와 유목세계의 경계를 짓는 역할을 했다. 만리장성은 5천 킬로에 해당하는 것을 10년 만에 쌓은 것으로 당시 백성의 고생이 극심하였다.
한나라 역시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장성을 개축했다. 이때 서쪽으로는 둔황의 옥문관까지, 동쪽으로는 고조선에 이르기까지 총 1만 킬로가 넘는 길이였다. ...당, 오대십국시대, 북송시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나라가 장성을 쌓았다. 명나라 때 약 200년 동안 20여 차례의 대규모 공사를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건축되었다.
11. 분서갱유(BC 213)-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사상, 문화 통제정책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의 다양한 사상을 약화시키고 법가사상아래 전제주의적 통일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진시황의 신제도를 비판하며 신하와 학자들이 목소리를 내자 재상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나라 사서를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태우는 焚書사건을 일으켰다. 坑儒사건은 불로장생에 현혹된 신시황이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방사들과 유학자들을 산채로 묻은 사건이다.
12. 진승의 난(BC 209)-진나라 멸망의 불씨를 당기다
농민출신 진승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구호로 농민을 설득하여 수십만의 봉기군을 모아 진나라에 반기를 든다. 진승을 죽이고 그의 반란군을 흡수한 항량이 반진 세력의 수장으로 나선다. 항량은 범증의 건의에 따라 초회왕의 손자인 양치기 웅심을 그의 조부의 이름으로 옹립한다. 항량 사후 그를 이은 항우와 강소현에서 봉기한 유방은 함양을 함락하기 위해 경쟁한다.
한나라에서 수나라까지
13. 홍문의 연(BC 206)-천하를 앞에 둔 항우의 결정적인 실수
항량이 정도에서 장한에게 패해 전사한 후 반란군의 중심에 항우와 유방이 등장했다. 당시 초나라는 진나라 수도인 함양의 공략을 준비하던 때로 초회왕은 제후와 장수들에게 먼저 함곡관을 돌파하여 관중을 평정하는 사람을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는 약속을 한다. 항우에게는 장한의 군대에 포위된 조나라를 구원할 것을, 유방에게는 함양의 관문인 함곡관을 공략할 것을 명한다. 진의 3세 황제 자영이 유방에게 항복하여 유방은 바로 서진하여 함양에 입성했다. 유방이 함양에 입성한 지 1개월이 지난 후 항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신풍의 홍문에 진을 쳤다. 유방을 세의 불리함을 파악하고 100기만을 이끌고 홍문으로 향함으로서 회합이 이루어졌다. 항우는 유방이 臣이라 자칭하며 조아리자 그를 죽이고자 했던 마음을 접고 연회를 열었다. ...함양에 들어간 항우는 항복한 진왕 및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고 아방궁을 비롯한 함양의 궁전을 불태웠다. 초회왕을 의제로 봉한 뒤 스스로 서초패왕이 되어 팽성을 새 도읍지로 삼았다. 이때 유방은 파촉의 제후로 봉해졌다. ...항우와 유방은 광무에서 다시 대치했다. 기원전 202년 항우는 해하에서 한신의 군대와 대치한다. 항우는 대패하고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항우는 홍문의 회합에서 유방을 죽이지 못한 결정적 실수를 범하여 초한전쟁이 일어나고 유방은 기원전 202년 한나라의 황제로 즉위한다.
14. 여후의 섭정(BC 195)-중국 황실을 피로 물들인 악녀
한고조 유방의 황후 여후는 아들 혜제가 즉위하자 자신과 혜제를 불안하게 하는 척부인과 유여의에게 보복했다. 잔인하고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위협요소를 제거해 나가자 충격을 받은 혜제가 죽고, 여후는 8년간 정권을 장악하며 여씨 일족을 모아 한나라를 통치한다. 여후가 죽고 불과 2개월 만에 여씨 일족은 몰살되었다.
15. 오초칠국의 난(BC 154)-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체제 형성
한 고조 유방은 성씨가 다른 공신 일곱 명을 왕으로 봉하고 독립된 통치권을 위임하여 제후국으로 다스렸다. 경제가 제후국이 영지를 삭감하는 정책을 펴자 오왕 유비는 나머지 6국의 왕과 연합하여 난을 일으켰으나 본인은 살해되고 다른 왕들은 모두 자살한다. 이 난은 3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16. 비단길 개척(BC 139)-동서 간의 경제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다
한 무제가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 대월지와 동맹하고자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한다. 그러나 장건은 월지아의 동맹에 실패하고 귀국하던 중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가 귀국했다. 그 후 기원전 119년 오손과 동맹하기 위해 다시 파견된 장건은 오손의 사절 수십 명과 말을 데리고 귀국했으며 그의 부하들 또한 서역의 사절과 함께 귀국했다. 두 차례 서역 원정에서 흉노 제압에는 실패했지만 한나라는 서역 여러 나라와 교류할 수 있는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했다.
※대월지 : 중국 전국시대에서 한나라 때까지 중앙아시아 아무다르야강 유역에서 활약한 이란계 또는 투르크계의 민족으로 전국시대 말기에는 서몽골로부터 간쑤 서부, 황허강 상류, 동투르키스탄, 중가리아, 서투르키스탄의 일부에까지 미치는 대 세력이었다.
※오한 : 투르크계 민족으로 톈산산맥의 북쪽 기슭을 거점으로 활약한 유목민으로서, BC 177년경에 흉노에게 압박되어 동부 톈산에서 서부 톈산으로 이동하고 산간부의 시르 다리야강의 상류 하곡을 거점으로 하여 활약하였다. 그 왕이 도읍한 곳은 적곡성이었다고 한다.
17. 유가 국교화(BC 136)-중국 유교문화의 토대를 세우다
한 무제는 유가사상이 자신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부합된다고 여겼다. 특히 그는 동중서의 춘추공양학을 중심으로 하는유가 사상에 주목하여 오직 유가만을 국교로 인정했다.
18. 마읍 전투(BC 133)-흉노와 한나라의 전쟁
한 무제는 흉노와의 화친정책을 놓고 군신들의 의견이 엇갈리자, 강경파 왕희의 계책에 따라 흉노의 군신선우가 마읍 땅을 노리고 있음을 이용하여 끌어들인 뒤 미리 한의 군사들을 매복시켰다가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마읍 전투는 허무하게 끝났지만 한 무제가 흉노정벌의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기원전 119년에 곽거병과 위청이 공동으로 출병하여 흉노를 바이칼 호까지 쫒아내고 흉노는 남부 근거지를 완전히 상실했다.
19. 사기의 완성(BC 91)-중국 3천년 역사를 집대성하다
사마천이 기원전 99년 이릉사건에 휘말려 억울하게 궁형을 받아 환관이 되는 수모를 견디며 목숨을 부지한 것은 오로지 부친 사마담의 유언을 받들어 기원전 103년부터 시작된 사서완성에 대한 강한 의지 때문이었다. 사기는 25사로 이루어진 중국 정사의 효시로 형식면에서 기전체라는 창조족인 형식을 만들어냈다.
20. 왕망의 신나라 개창(8)-신나라를 세운 왕망의 급진적인 개혁
왕망은 원제의 황후 왕씨의 조카다. 원제 사망 후 황후가 태후가 되자 왕씨는 조정의 중요한 직책을 차지한다. 그는 38세에 대사마에 오른다. 그는 자신의 딸을 평제와 결혼시켜 국장이 되었다. 평제가 14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자 겨우2살인 유영을 황제에 앉히고 자신은 가황제, 섭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선양의 형식으로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한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신이라는 새 왕조를 열었다. 그의 개혁정치는 실패로 돌아가고 백성봉기와 호족의 반란으로 15년 만에 망하고 만다.
21. 녹림․적미의 난(17)-왕망의 개혁이 실패한 결과
전한 사회의 제도적 폐해와 모순을 해결하고자 왕망은 신왕조를 열었고, 여러 개혁정책들을 실시했다. 왕전제, 노비매매금지, 화폐 개혁, 육관정책 등은 각지의 호족들을 규제하고 호족과 대상인들에게 착취당하던 농민들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책들은 호족의 이익과 상반되고 현실성 부재와 급진적인 성격 때문에 모조리 실패한다. 왕망에게 불만을 가진 세력들 중 녹림군은 유연과 유수와 연합해 일족인 경시제를 추대한다. 적미군은 백성의 호응을 얻어 대군으로 성장한다. 그들은 왕망을 죽이기에 이른다. 하지만 투쟁의 결실은 호족세력인 유수의 차지가 되었다.
22. 백마사 건립(68)-중국에서 불교가 공인되다
명제가 불교를 신봉하여 만든 중국 최초의 사찰이다. 이는 불교전래가 공인되었음을 뜻하는데 이는 불교가 전해지기 시작한 전한 말엽이 유학의 전성기였기 때문이다.
23. 서역으로 파견된 반초(73)-중국과 서역간에 경제와 문화교류를 촉진시키다
흉노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던 후한은 서역제국과 우호관계를 맺어 흉노를 제압하여 했다. 이에 반초가 서역 국가들을 설득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된다. 반초는 선선, 우전, 소륵, 구자, 사차, 고묵, 언기 등 서역 50여 개국을 후한의 조공국으로 복속시켰다. 이로써 후한은 서역과 정치, 경제, 문화 교류를 안정적으로 전개하며 반초가 귀국하는 102년까지 북흉노에게서 서역에 대한 패권을 지켜 냈다.
24. 채후지 제작(105)-인류의 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다
오늘날 다양하게 이용하는 종이는 후한의 채륜이 발명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기원전 40년대에 제조된 종이가 중국 신안, 서안에서 발굴되면서 채륜이 종이의 발명자는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채륜이 개량한 제지술에 의해종이 품질이 크게 향상되면서 사람들의 생활환경과 기록문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다.
25. 당고의 화(166)-외척과 환관의 전횡
후한 말 외척과 환관의 세력다툼으로 조정이 혼란해지자 진번과 이웅은 환관 정치를 반대하는 모임을 결성해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대노한 환제가 당인들에게 종신금고형을 내렸으니 이를 제1차 당고의 화라고 한다. 환제가 죽은 후 외척 두무가 영제를 옹립하여 세력을 잡고, 진번과 함께 환관을 척결한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환관 세력은 진번을 살해하고, 사인 새학살을 시작해 169년에 제2차 당고의 화가 일어났다.
26. 황건적의 난(184)-후한 타도를 외치며 일어난 농민 대반란
환관과 외척의 권력 다툼으로 후한의 혼란이 극에 달하자 태평도 교주 장각은 소규모 농민 반란을 조직화해 황건의 난을 일으킨다. 장각은 장보, 장량과 모의한 뒤 태평도 36방을 일제히 봉기시켰다. 다급해진 후한 조정은 황보숭과 관군을 내세워 진압에 나선다. 장각의 갑작스런 병사로 상황이 어려워진 황건 봉기군은 황보숭의 야간 공격을 막지 못하고 광종에서 패하고 말았다. 비록 황건적의 난은 후한 왕조를 전복시키지는 못했지만, 지배체제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하였다.
27. 관도대전(200)-조조와 원소 두 영웅의 전투
원소는 사촌동생 원술과 2천여 명의 환관을 주살한다. 동탁은 헌제(재위 189-220)를 옹립한 뒤 전권을 휘두른다. 원소를 맹주로 한 반 동탁군이 결성되자 동탁은 낙양을 버리고 장안으로 천도했다. 192년 동탁이 부하인 여포에게 주살 당한다. 헌제가 장안을 떠나 낙양에 돌아왔지만 낙양역시 폐허가 되었다. 196년에 조조가 황제를 허성(현 하남성 허창)으로 옮겼다. 조조는 헌제의 후견인을 자칭해 자신의 세력을 굳건히 만든 후 백마에서 원소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에 원소가 조조군을 다시 공격하자 당시 가장 강한 군벌세력인 원소와 조조가 충돌하는 관도대전이 일어났다. 조조는 2만의 군사로 10만의 원소군을 격파하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28. 적벽대전(208)-삼국시대 개막의 신호탄
북방을 평정한 조조는 천하통일 대업을 이룩하고자 형주와 강동으로 진격한다. 조조가 형주에 도착했을 때 형주의 유종은 조조 대군에게 겁을 먹고 투항했다. 이에 다급해진 유비는 남쪽으로 도망쳐 손권과 연합한다. 조조의 선발군과 손권-유비의 연합군은 적벽(현 후베이성 가어현)부근에서 각각 진을 친다. 연합군의 황개는 조조군의 함선이 하나로 묶여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조조에게 거짓 투항한 뒤 조조의 함대에 불을 붙였다. 이로써 조조군의 함대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연합군에 대패했다.
29. 제갈량의 북벌(228)-천하통일 대업을 꿈꾸다
제갈량은 촉한 건국 때부터 오나라와 협력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기본정책으로 삼았다. 그는 유비 사후 오나라와 수교를 맺고 천하를 통일하고자 북벌을 결심했다. 네 차례의 북벌에 실패한 제갈량은 그동안 문제가 된 군량 보급 문제를 보완하고 드디어 5차 북벌을 시작한다. 그러나 오장원에 진을 치고 위나라와 대치하던 중 제갈량이 갑작스레 병사하자, 촉한은 더 이상 북벌을 시도하지 못한 채 위나라에 멸망당했다.
30. 고평릉 정변(249)-사마씨 세력이 위나라 정권을 장악하다
239년 위나라 명제가 조상과 사마의에게 당시 8살인 황태자 조방의 보좌를 부탁하며 죽다. 유언대로 사마의와 조상은 조방을 보좌했다. 조상은 사마의를 우대하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그의 군사 지휘권을 빼앗았고, 이에 사마의는 병을 핑계 삼아 조상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후 정권 찬탈을 준비한다. 마침내 사마의는 조상이 소제를 보좌해 고평릉에 제사를 지내러 간 틈을 타 조상과 그 일파를 모두 주살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이 고평릉 정변으로 사마의는 승상이 되어 위나라 정권을 찬탈하였다.
31. 팔왕의 난(291)-사마씨 일족의 골육상잔
사마염은 황족 종친을 우대할 목적으로 전국 각지를 사마씨 일족에게 분봉했으나 분권화를 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마염 사후 사마충이 재위를 잇자 정치는 외척 양씨 일족의 차지가 되고, 가황후가 사마위와 협력해 양씨를 처단하고 사마량에게 정권을 맡긴다. 하지만 정권이 마음대로 운영되지 않자 가황후는 사마량과 사마위를 죽인 뒤 정권을 독차지한다. 가황후가 사마휼을 폐위시키고 독살하는 전횡을 일삼자 사마륜과 사마경은 가황후를 척결한다. 이후 16년 간 골육상잔의 비극이 계속되었다. 여덟 명의 제후왕들은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며, 팔왕의 난으로 희생된 제후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32. 영가의 난(311)-서진의 몰락
흉노, 선비, 저, 갈, 강족 등 북방 민족을 5호라고 부른다. 당시 화북지역에는 이민족들의 이주가 상당히 이루어진 상태였다. 이들 화북 이민족 대부분은 지방 호족들에 의지한 채 행상, 전객, 노예 등으로 비참하게 생활했다. 304년 팔왕의 난과 대기근을 겪으며 유민으로 전락한 농님들의 반란이 한창이던 시기, 산서지역의 흉노족 유연이 대선우를 자칭하며 漢을 세운다. 유연은 흉노의 재기를 꾀하며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공격했으나 실패한 뒤 병사했고, 아들 유총이 311년 낙양을 공략한다. 낙양성 함락에 송공한 유요와 석륵 등이 왕공과 백과, 백성 3만여 명을 죽이고 회제를 생포하여 평양(현 산서성 소재로 가이펑 북쪽)으로압송해 살해하자 이는 서진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영가의 난이다. 한왕 유충은 이민족 최초로 중원을 차지한 패자가 되었으며 오호십육국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이민족들은 실제로는 18개국을 건설하였지만 최홍의 저작인 《십육국춘추》에서 이름을 빌렸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사마씨의 서진이 남하하여 강남호족들의 지지를 얻어 사마예가 건업(현 난징)에서 동진을 건국했다. 이로써 당시 오호십육국의 북조와 동진의 남조가 대치한다.
33. 비수대전(383)-천하통일을 위한 부견의 동진 정벌
전진은 351년 저족 출신의 부씨가 수립한 정권으로 부건이 장안을 수도로 정하고 국호를 진이라 칭함으로서 건국되었다. 370년에는 전연, 376년에는 전량을 멸망시키고 탁발족을 굴복시킴으로서 북방을 통일했다. 부견은 천하통일을 이루고자 동진 정벌을 결심했다. 그는 90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을 출발했고 동진은 8만군으로 비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동진의 사현은 계책을 부려 부견의 후퇴를 유도한 뒤 맹공격을 퍼부어 전진의 대군을 물리쳤다. 이 비수대전은 중국 역사상 관도대전, 적벽대전과 함께 소수의 군대로 다수의 군대를 물리친 3대 대전으로 유명하다.
34. 유유의 송나라 건국(420)-남조시대를 열다
399년 절강성 일대에서 오두미교를 신봉하는 손은이 난을 일으켰다. 이를 평정한 환현이 초를 세우자 한족인 유유는 환현을 죽이고는 낙양과 장안을 탈환하고 418년 건강(건업 : 현 난징)으로 돌아와 420년 송나라를 세운다. 이리하여 104년 동진이 막을 내리고 제, 양, 진이 뒤를 잇는다.
35. 북위의 낙양천도(493)-다민족 국가로 거듭나기 위한 효문제의 한화정책
선비족이 세운 북위의 효문제는 통치체제를 확고히 하고 국가 재정을 건실하게 하려면 한족의 선진문화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여겼다. 문무대간들의 반대 속에 평성(현 허베이성 소재)에서 낙양(현 뤄양)으로 천도한다. 천도 후 한화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한족 복장 착용, 한어의 공식어 지정, 선비의 복성을 한족의 성으로 바꿀 것을 명한다. 이로써 북위는 정치,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민족 간의 갈등과 계급 모순을 해결하여 다민족 통일국가로 거듭났다.
36. 육진의 난(523)-북위의 분열
499년 효문제가 병사하자 낙양 천도 후 훈공에 따라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특혜가 없어진 군진들은 봉기를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한다. 이에 북위 조정은 포로를 강제 이주시키는 등 반란군 진압에 나섰으며, 기주에서 또 다시 반한이 있었으나 계호족 추장 이주영이 진압함으로써 육진의 난은 평정되었다. 그 후 군권을 쥔 이주영 일족이 전횡을 일삼자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여 532년 두 명의 황제가 생겼으며 마침내 동위와 서위로 갈라졌다가 동위는 북제가 되고 서위는 북주가 되었다.
37. 과거제 시행(587)-혁신적인 인재 선발제의 실시
581년에 수나라를 개국한 문제가 조정정치를 혁신하기 위하여 펼친 대표적인 정책이 과거제이다. 급제자들은 입신양명은 물론, 세금과 부역을 면제받았다. 또한 능력이 검증된 사람들이 관직에 진출하면서 원활한 국정운영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귀족들에게 독점되던 관료사회가 무너지고 황제 중심의 중앙 집권제가 강화되었다. 당과 송을 거치며 흥성한 과거제는 1,300년을 존속하며 중국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38. 대운하 건설(605)-수 양제가 일으킨 대규모 토목공사
춘추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운하는 수문제때 120킬로의 광통거를 건설했다. 수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해하, 황허, 회수, 양쯔, 전당강등 중국 5대 하천을 연결하여 2,500km의 대운하를 개통한다. 그러나 대운하는 수양제의 개인 유람시설로 전락했고, 300년이 지난 후 송나라 때 이르러서야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39. 고구려 원정(612)-수나라 멸망의 길
589년 수문제가 고구려 원정을 시도했으나 무위에 그친다. 수양제는 612에 2차 원정을, 613년에 3차 원정을, 614년에 4차 원정을 시도했지만 고구려가 귀순한 병부시랑 곡사정을 되돌려 보내고 조공을 약속하며 화친을 요구하자 받아들였다. 그러나 수양제의 무리한 고구려 정벌은 곧 수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당나라에서 송나라까지
40. 이연의 거병(617)
이연은 수양제와 이종사촌지간이다. 613년 고구려로 투항한 병부시랑 곡사정의 친척인 황화군 유수가 파면되고 이연이 유수로 임명된다. 616년에는 태원유수가 되었으나 돌궐토벌에 실패하자 소환 당한다. 아들 이세민의 의견을 따른 이연은 반란을 일으키고 장안을 정복하여 드디어 당을 건국한다. 이때 군웅 토벌에 있어 눈부신 활약을 보인 것은 이세민이다. 그는 후일 당태종이 된다.
41. 현무문의 변(626)-정관의 치세
당고조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할 때 가장 공이 큰 사람은 둘째아들인 이세민이다. 그러나 첫째인 이건성이 태자로 책봉되면서 형제 사이에 권력에 대한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에 이세민(599-649)은 현무문에서 이건성을 죽이는 변을 일으켜 형제를 살해함으로써 위협을 제거한다. 며칠 후 이세민은 태자가 되었고 고조 이연의 뒤를 이어 약 두 달 후 태종황제로 등극한다. 이연은 태상황제가 되는데 이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의 모습에서 다시 볼 수 있다.
42. 무주혁명(690)-중국 최초의 여황제 탄생하다
당은 건국한지 100년도 안되어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여황제인 측천무후(624-705)에 의해 역사가 중단된다. 무후는 637년 당 태종(재위 626∼649)의 후궁으로 입궁하였으며, 4품 재인으로서 태종에게 ‘미(媚)’라는 이름을 받아 ‘무미랑(武媚娘)’이라고 불렸다. 649년에 태종이 죽자 무후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감업사로 출가하였다. 그러다 651년 고종(재위 649~683)의 후궁으로 다시 입궁하였고, 이듬해에 2품 소의가 되었다. 무후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낳았으며, 655년 왕황후와 소숙비 등을 내쫓고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무후는 고종을 대신해서 정무를 맡아보며 태종 때부터 봉직해온 장손무기(?~659), 저수량(596~658), 우지녕 등의 대신들을 몰아내고 신진 세력을 등용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656년 황태자였던 이충(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인 이홍(652~675)을 황태자로 앉혔고, 664년부터는 수렴청정을 통해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치하였다. 675년 고종의 병세가 악화하자 무후는 섭정이 되어 전권을 행사했으며, 그 해 이홍이 죽자 둘째 아들인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 그러다 680년에는 이현(李賢)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이현(李顯, 656~710)을 황태자로 세웠다. 683년 고종이 죽자 이현(李顯)이 황제가 되었는데, 당의 4대 황제인 중종(中宗, 재위 683~684, 705~710)이다. 하지만 중종의 황후인 위후가 아버지 위현정과 함께 정권을 장악하려 하자 684년 중종을 폐위시키고 넷째 아들인 이단(662~716)을 황제로 세웠다. 그가 당의 5대 황제인 예종(재위 684~690, 710~712)이다. 그 해 서경업, 서경유 형제가 일부 황족들과 연합하여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무후는 40일 만에 이를 진압하였다. 688년에도 태종의 아들인 월왕 이정이 아들인 이충과 함께 박주(博州, 지금의 山東省 濟寧)와 예주(豫州, 지금의 河南省 汝南)에서 무후에 반대해 군사를 일으켰지만 곧바로 진압되었다. 무후는 내준신, 색원례, 주흥 등을 등용해 반대파에 대한 밀고와 감시에 기초한 공포정치를 펼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처럼 황실 안팎의 반대파를 제거한 무후는 690년 예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라 하고 수도를 장안에서 신도(神都)라 이름을 바꾼 뤄양으로 옮겼다. 역사가들은 이를 고대의 주(周, BC 1046∼BC 771)와 구분하여 ‘무주(武周)’라고 부른다. 무후는 과거제도를 정비해 적인걸, 요숭, 송경 등의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행정 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무후는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했지만,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 그녀의 통치기는 태종이 통치하던 ‘정관의 치’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아 ‘무주의 치'라고 불리며, 이후 당의 전성기인 현종(재위 712∼756) 때의 ‘개원의 치’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699년 이후에는 장역지, 장창종 형제와 환관 설회의 등의 총신들이 횡포를 부리는 등의 폐단이 발생했다. 결국 705년 무후가 병을 앓아눕자 재상인 장간지(625~706) 등이 그녀에게 양위를 압박하였고, 무후는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고 698년에 다시 황태자가 되었던 중종이 복위되어 당 왕조가 부활하였다.
측천무후는 28년을 당 왕조의 황후로, 7년을 당 왕조의 황태후로, 15년을 무주의 황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무후는 황제가 아니라 황후로서 장례를 치르고,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등의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43. 현종의 양옥환 귀비 책봉(745)-여인의 치마폭에 빛바랜 개원의 치
당나라의 태평성세를 이룬 현종(685-762 재위 712-756)은 무혜비가 세상을 떠나자 실의의 세월을 보내던 중 아들 이모의 비인 양옥환에게 반해 그녀를 귀비로 책봉했다. 이가 양귀비(719-756)다. 현종은 정치에 관심을 멀리하여 양귀비의 친인척들을 개거 등용하여 말할 수 없이 부패하고 쇠퇴하자 755년 절도사 안록산이 난을 일으켰다. 결국 현종은 촉 땅으로 몽진하고, 군사들이 반란하여 양국충을 제거하고 양귀비를 죽이게 했다. 몽진 중에 아들에게 양위하고 안록산의 난이 평정된 뒤 장안으로 돌아온 현종은 개원의 성세를 이룩한 황제가 무색하게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44. 안사의 난(755)-당나라 체제를 붕괴시킨 반란
페르시아와 돌궐의 혼혈인 절도사 안록산은 양귀비의 사촌오빠인 양국충과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나자 그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15만 대군을 이끌고 낙양을 함락했다. 낙양을 점령한 안록산(703?-757)은 756년 大燕을 건립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연호를 건무로 정했다. 양귀비가 죽은 후10여일 후 안록산은 장안을 점령했다. 757년 그는 황제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진 태자인 안경서에 의해 잠자던 중 살해당했다. 장안을 다시 회복할 때 안경서의 부장 사사명이 항복했으나 이를 거짓으로 받아들이자 758년 사사명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대연황제에 올랐다. 당나라는 안경서를 살해했으나 761년에는 사사명이 자신의 아들인 사조의에게 살해된다. 763년 사조의가 자살하면서 9년의 난이 종지부를 찍었다. 전란으로 인구는 890만 호에서 290만 호로 급감하였다.
45. 우이당쟁(823)-40년간 지속된 관료집단의 권력 투쟁
우이당쟁은 우승유와 이종민의 우당, 이덕유의 이당 사이에 벌어진 정치 투쟁으로 무려 4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우당과 이당은 파면과 불임용을 거듭하고 극심하게 대립하며 권력을 주고받았다. 우당은 목종 때 권력을 잡은 이래 경종, 문종 때까지 실권을 잡았고, 무종이 즉위하면서 이당의 반격이 이루어졌다가 다시 선종 때 우당이 권력을 차지하였다. 선종 즉위 후 이덕유가 죽으면서 야당이 와해되자 우이당쟁의 최종승자는 우당에게 돌아갔다.
우이당쟁은 정치와 사회 발전을 위한 논쟁이 배제된, 단순히 권력 쟁취를 위한 관료집단의 다툼이었기 때문에 당쟁의 피해는 오롯이 백성의 몫이었다.
46. 감로의 변(835)-당 왕조를 휘두른 환관들의 전횡
환관은 당 초기에는 정치에 간여할 수 없었으나, 측천무후 시대에 권력을 잡기 시작해 대종 시대에 권세가 막강해졌다. 대종 사후 환관은 군사권마저 장악하고 모든 행정권을 차지했으며, 황위를 좌지우지 했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문종을 도와 환관들을 척결하려는 신하 중 이훈이 정주를 시기하여 835년에 일으키는데, 甘露(단 이슬)를 핑계로 환관들을 한 자리에 모아 주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오히려 600여명의 관리들이 환관들에 의해 살해되는 감로의 변이 일어났다. 이후 환관들의 전횡은 극에 달하여 당 왕조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47. 황소의 난(875)-당나라 멸망을 이끈 대규모 농민반란
안사의 난으로 번진이 당 왕조의 통제에서 벗어나자 당 왕조는 중앙 정부군을 증강하는데 많은 돈이 필요했다. 가혹한 세금 징수(특히 소금세)를 단행하여 민생이 파탄 나자 전국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이어졌다. 그중 소금 밀매업자인 왕선지와 황소는 농민들을 모아 당 왕조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반란을 일으킨다. 880년 황소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낙양을 점령한 뒤 하동관을 공격하고 장안에 입성하여 희종을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大齊라 하고 연호를 금통 이라했다. 그러나 883년 황제군에게 패하여 장안을 내준 뒤 다음 해에 자결하였다. 황소의 난은 10여 년 간 계속되어 당 왕조를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시켰다. 이때 당의 관리였던 최치원(857-?)이 토벌군 도통사 고변의 종사관으로 토황소격문을 쓴다.
♣토황소격문 내용
廣明二年七月八日 諸道都統檢校太尉某 告黃巢 夫守正修常曰道 臨危制變曰權
광명 2년7월 8일에 저도도총검교태위 황소에게 고한다. 무릇 올바름을 지키고, 떳떳함을 닦는 것을 도라하고, 위태로움에 임해서 임기응변을 만드는 것을 권이라 한다.
智者成之於順時 愚者敗之於逆理 然則雖百年繫命 生死難期 而萬事主心 是非可辨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종하는데서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에 거슬러서 패하게 된다. 그러나 비록 백 년 동안 목숨을 매달릴지라도, 생사는 기약하기 어렵고, 만사는 마음에 달렸으니 옳고 그름은 가히 분별할 수 있다.
今我以王師則有征無戰 軍政則先惠後誅 將期剋復上京 固且敷陳大信 敬承嘉諭 用奸謀
지금 내가 왕의 군사로써 정벌은 있으나, 전쟁은 없게 하니, 군정은 곧 은혜를 앞세우고 주살은 뒤로하니, 장차 이겨 상경을 회복하고, 진실로 또한 큰 믿음을 펼친 것이니, 공경스럽게 아름다운 말씀을 받들어서 간사한 꾀를 거두어 들이거라.
且汝素是遐氓 驟爲勍敵 偶因乘勢 輒敢亂常 遂乃包藏禍心 竊弄神器 侵凌城闕 穢宮
또한 너는 평소 한맹으로써 갑자기 사나운 도적이 되어서 우연히 세력을 탐으로 인해서, 더럽게 감히 떳떳한 도를 어지럽혔다. 드디어 재앙의 마음을 감추고 사사롭게 신기를 훔치고 희롱하고 있다. 대궐을 침입하여 능멸했으며 대궐의 문을 훔치고 더럽혔으니...
48. 후량 건국(907)-오대십국의 탄생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데 가장 공이 큰 주전충(852-912 재위 907-912)이 당을 멸망시키고 후량을 세운다. 그는 안후이성 출생으로‘황소의 난’에 참가하여 그 부장이 되었으나, 882년 형세의 불리함을 간파하고 관군에 항복하여 당의 희종으로부터 전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 뒤 황소의 잔당과 그 밖의 군웅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양왕에 봉해지고 각지의 절도사를 겸하는 등 화북 제일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 후 당의 소종을 살해한 뒤 애제를 세우고, 다시 907년에 애제로부터 제위를 양수받아 양나라를 세우고 카이펑(개봉)을 수도로 정함으로써 당 왕조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그의 세력범위는 화북 일부에 한정되었고, 이후 50년에 걸친 오대십국(五代十國)의 분쟁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도 즉위 후 6년 만에 그의 아들 주우규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중원지역은 송이 건국되는 960년까지 후당, 후진, 후한, 후주 등이 명멸을 거듭하는 5대와 같은 시기에 남방에 건립된 오, 남당, 전촉, 후촉, 오월, 민, 초, 형남, 남한, 그리고 화북 끄트머리에 건립된 북한을 말한다.
※자식이 아비를, 지어미가 지아비나 자식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예
정치 혼란의 시기에 벌어지는 권력쟁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심지어 아들이 아비를 살해하는 존속살인이 빈번하다. 오래전부터 이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려 했으나 미루어왔는데 이를 조사하여 기록한다.
●수양제는 왕자시절 600년 권신 양소와 결탁해 형 양용을 모함해서 태자의 자리를 빼앗았다. 604년에는 아버지 수문제의 병이 중해지자 살해하고 제위에 올랐다
●912년 후량의 창건자인 주전충이 아들 주우규에게 살해당한다. 주우규는 동생 주우정에게 죽임을 당한다.
49. 진교병변(960)-조광윤의 송나라 건국
후주 세종의 뒤를 이른 것은 일곱 살의 공제였다. 황태후는 960년 금군 사령관 조광윤에게 요나라의 공격을 방어할 것을 명했고, 이를 위해 수도개봉에서 불과 40리 떨어진 진교역에 진을 치고 있던 조광윤은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다. 개봉으로 돌아온 조광윤은 공제에게 황제를 선양받고 송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진교병변이다. 무혈혁명으로 송나라가 건국되고 이로써 혼란의 오대십국시대가 가고 통일왕조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송나라 역사는 이후 319년간 지속되었다.
50. 전연의 맹약(1004)-송과 요가 맺은 평화조약
송(960건국 979통일)이 요(916 건국)를 몰아내고 936년에 후진이 거란에게 넘긴 화북지역의 연운16주를 수복하려고 하자 양국사이에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양국이 전주에서 대치하던 중 전세가 송에 유리해지자 위협을 느낀 요는 송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안했다. 이로써 양국은 화의 회담을 통해 전연에서 평화조약을 맺으니 이것이 전연의 맹약이다. 이 조약으로 송과 요사이에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평화가 유지되었으며, 두 나라는 현실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추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