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프랑스사

청담(靑潭) 2015. 10. 16. 01:36

 

 

프랑스사

맥세계편찬위원회 지음

느낌이 있는 책 출판

제1장 고대부터 중세까지

1. 선사시대

●알타미라 동굴벽화

길이 270 m, 산탄데르 서쪽 30 km 지점에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동굴벽화는 프랑스의 라스코동굴벽화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벽화는 1879년 우연히 8세의 소녀에 의하여 발견되었는데, 당시에는 그 진위를 놓고 학회나 언론에서 떠들썩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북에스파냐나 남프랑스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동굴에서도 똑같은 벽화나 부조 등이 발견됨으로써 인류 최고의 경탄할 만한 미술이라는 것이 실증되었다. 오늘날에는 구석기시대 후기의 마들렌기(약 1만∼2만 년 이전)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벽화의 대부분은 천장에 그려져 있다. 매머드· 토나카이· 들소· 사슴 등이 흑· 적· 갈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 생생한 묘사, 아름다운 색채와 입체감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이 벽화를 통하여 당시의 예술활동 뿐 만 아니라 수렵의 방법이나 무기 ·신앙 등을 알 수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라스코동굴벽화

프랑스 도르도뉴 데파르트망의 몽티냐크 마을에 있다. 1940년 이 마을의 소년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이 방면의 최고 권위자인 H.브뢰유가 정밀조사를 하였다. 동굴의 벽면에 그려진 채화와 각화는 800점 이상이나 되며, 들소· 야생마· 사슴· 염소 등이 주로 그려져 있고, 고양이나 주술사와 같은 인물이 그려져 있다. 이 동굴에 그려진 동굴벽화는 알타미라동굴의 벽화와 함께 프랑코 칸타브리아 미술의 가장 유명한 구석기시대 회화로 여겨지고 있다. 동물화는 대개 크게 표현되었으며, 주 동굴에 있는 검은 소 등은 가로가 5m 이상이나 된다. 동물상은 어느 것이나 약동적이며 생기에 넘치고, 기법도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구석기인들은 동굴의 벽에 사냥의 대상이 되는 동물을 그리고 사냥의식을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벽화는 기원전 3만 5000년에서 기원전 1만 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반인에게 공개하다가 벽화가 훼손되자 1963년에 폐쇄하고 200m 떨어진 곳에 인공동굴인 라스코II를 조성하여 공개하고 있다.

 

2. 전쟁을 좋아한 갈리아인

●갈리아 지방

북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일대, 즉 라인· 알프스· 피레네 및 대서양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말하는데, 포강 유역의 북이탈리아도 이에 포함된다. 북이탈리아는 BC 3세기 말 로마의 속주 갈리아 키살피나(알프스산맥 이남의 갈리아라는 뜻)가 되었으며, 남프랑스는 BC 118년 속주 갈리아 트란살피나(알프스산맥 너머 갈리아)가 되었다. 갈리아 전역을 평정하여 로마 영토로 만든 사람은 BC 58~BC 51년 갈리아 전쟁을 수행한 카이사르였다. 그 후 로마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AD 21년 이후로는 갈리아인의 저항이 완전히 없어졌다.

●갈리아인

갈리아인은 켈트족의 한 부류다. 기원전 1500년 전후 한 부류가 프랑스에 들어와 정착했다. 후에 이들은 점차 센강 유역과 북방으로 확장하여 원시 갈리아인을 형성했다. 이들은 한때 강성한 로마제국과 맞먹을 정도로 큰 세력을 형성했다.

 

3. 갈리아 전쟁

●갈리아인은 수백 년 동안 힘든 과정 끝에 마침내 갈리아에 안정적으로 정착했으나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비록 켈트어를 쓰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방언을 쓰고 체질적인 특성도 달랐다. 그들 부족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동맹을 맺기도 했다. ...갈리아는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했다. 

 

4. 로마화 된 갈리아

●로마화 시대는 기원전 51년 로마가 갈리아에 속주를 세우면서부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2세기 후반부터 로마제국은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260년 갈리아 장군 포스투무스는 스스로 왕이 되어 독립된 갈리아제국을 세웠다.

 

5. 프랑크왕국(481-843)을 세운 클로비스

●갈리아에 대한 로마제국의 통치가 약화될 무렵, 북방 야만족이 끊임없이 공격해왔다. 게르만족은 원래 북유럽에 살고 있었는데 후에 점차 로마의 통치구역으로 이동했다. 프랑크는 이 게르만족 중의 한 부족이었다. 프랑크의 젊고 건장한 수장이었던 클로비스(재위 481-510)는 각지에서 전쟁을 벌였고 갈리아에 위대한 프랑크 왕국(481-843)을 세운다. ...496년 클로비스는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프랑크 왕국사

1. 메로빙거 왕조(481∼751)

왕조명은 프랑크족의 일파인 살리족의 부족장 메로비스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 dynasty)는 메로빙 왕조(Merovings)라고도 하며, 시캉브르(Sicambres)라는 곳에 살았던 골족과 고대 그리스 아르카디아 지역 출신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5세기에서 8세기까지 프랑스와 벨기에의 대부분 지역과 독일, 스위스의 일부 지역을 통치한 프랑크족을 다스렸다.

메로빙거 왕조를 창시한 클로비스(Clovis, 재위 481~511)는 프랑크 부족을 병합하고 갈리아 지방을 통합하는 등의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메로빙거 왕조는 클로비스가 사망한 후 내부권력 다툼이 자주 발생하고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면서 왕권이 유명무실해졌다. 이에 따라 정치의 실권은 귀족의 대표인 궁재(Mojor Domus, 宮宰)의 수중에 들어갔다. 대표적인 궁재였던 카롤루스 마르텔(Karolus Martell)은 732년에 벌어진 투르푸아티에 전투(Battle of Tours-Poitier)에서 이슬람군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751년,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인 피핀이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힐데리히(Childeric) 3세를 폐위하고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메로빙거 왕조는 종말을 고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2. 카롤링거 왕조(751~843)

메로빙거 왕조 말기에 프랑크 왕국의 권력은 궁재에게 집중되었는데, 688년에 피핀(Pepin) 2세가 프랑크 왕국 전체의 궁재(Mojor Domus, 宮宰)가 되었고, 그의 아들 카롤루스 마르텔(Karolus Martell)는 732년에 투르푸아티에 전투(Battle of Tours-Poitier)에서 이슬람 교도의 침입을 격퇴하고 프랑크 왕국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다. 이어서 마르텔의 아들 피핀(Pepin)이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힐데리히(Childeric) 3세를 폐위시키고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 즉위하면서(재위 751~768) 카롤링거(Carolinger) 왕조가 성립되었다.

이후 피핀의 손자인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재위 768~814)가 서로마 황제로 등극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남부의 롬바르디아족을 정벌하고 동으로는 바이에른, 작센족을 토벌하는 한편, 에스파냐를 원정하여 사라센을 토벌하는 등의 업적을 달성하면서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교황 레오 3세는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800년에 카롤루스 대제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하였다.

3. 프랑크 왕국의 분열

프랑크(Frank) 왕국은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 대에 이르러 영토 상속을 둘러싼 분쟁을 겪으면서 지방 제후들이 실권을 장악하는 등 왕권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런 상속 분쟁이 거듭되면서 루드비히(Ludwig) 1세의 세 아들이 843년에 베르덩(Verdun) 조약을 맺음으로써 프랑크 왕국은 3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때 장남인 로타르(Lothar)는 황제 칭호를 얻고 이탈리아 및 지금의 네덜란드, 라인란트 등을 포괄하는 중부 프랑크를 차지하였다. 차남인 카롤루스(Karolus) 2세는 서부 프랑크를, 삼남인 루드비히(Ludwig) 2세는 동부 프랑크를 각각 차지하였다.

그러나 로타르가 죽은 뒤 870년에 두 아들은 메르센(Meerssen) 조약을 맺고 로타르의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이 조약에 따라 로트링겐 지역은 동서로 분할되어 각각 동 프랑크와 서 프랑크에 편입되었다. 이 조약을 시발점으로 오늘날의 독일(동 프랑크), 프랑스(서 프랑크), 이탈리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6. 단신왕 피핀, 왕이 되다

●687년 수년간의 권력쟁탈전 끝에 카롤링거가의 피핀 2세가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궁재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그의 서자 카알 마르텔(680-741)이 궁재의 자리를 이어 받았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 불리지는 못했다. 그 임무는 단신왕으로 불렸던 그의 아들 피핀 3세(714-768)에게로 넘어왔다.

...교황의 지지에 대한 보담으로 754년과 756년 두 차례 이탈리아로 출병하여 롬바르드족을 물리쳤고, 그들이 점거하고 있던 영토를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것을 <피핀의 기증>이라한다.

 

7. 샤를대제(샤를마뉴, 카를대제)

●샤를(742-814)은 피핀의 큰 아들이다. 샤를마뉴(Charlemagne)는 프랑스어로 ‘샤를 대제’를 뜻하는 이 이름은 독일에서는 ‘카를 대제(Karl Magnus)’로 불리고, 그의 생전에는 라틴어로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로 표기되었다. ..그는 정복전쟁을 벌여 광대한 영토를 확장했다. ..그리고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열었다. 800년 성 베드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였다. 그가 기도할 때 교황 레오 3세가 금관을 꺼내 샤를의 머리에 씌워주고 큰소리로 말했다.

?하느님이 그대에게 대관을 내립니다. 로마인의 황제여!?

...814년에 47년간 통치하던 샤를이 72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8. 베르됭 조약(843)으로 삼등분된 제국

●813년 샤를 대제는 친히 루이에게 대관식을 열어 주었다 이로써 루이는 아버지와 함께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가 되었다. ...843년 루이의 세 아들(큰 아들 로타르, 셋째 독일왕 루이, 이복형제 대머리왕 샤를)이 조약을 체결하고 나라를 삼등분하였다.

독일왕 루이는 라인강 동쪽을 차지했으며, 이를 동프랑크라고 한다. 대머리왕 샤를은 론강과 손강, 뫼즈강 서쪽의 땅을 차지하고 서프랑크라고 불렀다. 로타르가 얻은 땅은 이탈리아 북부와 동서프랑크 왕국 사이의 땅이었다. 그는 도한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동프랑크에 대한 통치권은 없었다.

동프랑크 왕국은 후에 독일로 발전하고 로타르 영지 남부는 이탈리아가 되었다. 그리고 서프랑크 왕국은 얼마 후 프랑스 왕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점차 프랑스의 모습을 갖춰갔다. 이로써 진정한 의미의 프랑스 역사가 시작되었다.

 

9. 카페(987-1328) 왕조, 영광의 시작

●카롤링거왕조의 루이 5세가 왕이 되었을 때에는 카페 가문의 위그 카페가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이 시기 카페 가문은 줄곧 왕실과 권력 투쟁을 벌였고, 항상 왕실보다우위에 있었다. 루이 5세는 이런 상황에 실망한 나머지 전혀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무위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987년 무위왕이 죽자, 그의 어머니가 독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그는 후사가 없었다. 위그 카페(재위 987-996)가 왕이 될 시기가 된 것이다. 그는 즉시 귀족들을 이용하여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게 했다.

●7대 필리프 2세(재위 1180-1224)의 명성이 높은 것은 그가 영국을 무찌른 것 외에도 파리라는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도시를 수도로 결정한 일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그 이전 카페 왕조는 수도를 파리와 오를레앙을 번갈아 가면서 정했다. 필리프 2세가 즉위한 후 수도를 파리로 정하고 도로와 성벽을 수리하며 파리의 모습을 새롭게 정비했다.

 

10. 완벽한 괴물 생 루이

루이 9세(재위 1226-1270)는 별칭 성왕(聖王)이다. 정의에 입각한 평화, 덕과 정치의 일치를 추구한 왕이다. 카페가 역대의 왕이 확대한 왕령(王領)을 계승하였고, 봉건제후 영내에 국왕직속의 관료를 두어 국가적 기관을 정비하여 중세 프랑스의 집권적 왕정을 완성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영국과의 싸움을 종결시켰고, 여러 국왕과 제후 사이의 평화수립에 노력하였다. 왕은 십자군 원정 도중에 사망했으나, 이 시기에 프랑스는 서유럽의 중심이 되었다. 외교에 있어 적에게 냉혹했던 그의 모습 때문에 <완벽한 괴물>이라는 별명도 있다.

 

11. 십자군 원정(1096-1270)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이다. ...때마침 셀주크투르크족이 1071년 비잔틴 제국이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했다. 비잔틴 제국의 국토는 거의 이교도의 손에 들어갔고 국운이 완전히 기울었다. 비잔틴 제국은 하는 수없이 로마 교황과 서유럽 국가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행한 원정에 참여한 군사를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당시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자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십자군의 태동이 종교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고 또한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배타적 싸움이라는 점에서도 종교전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성격 지을 수는 없는 복합적인 이해가 요구된다. 봉건영주와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

 

※프랑스의 왕정 역사

카페 왕조(987년~1328년): 위그 카페부터 샤를 4세까지

발루와 왕조(1328년~1589년): 필립 6세부터 앙리 3세까지

부르봉 왕조(1589년~1792년): 앙리 4세부터 루이 16세까지

보나파르트 왕조(1804년~1814년): 나폴레옹 1세

부르봉 왕조(1814년~1830년): 루이 18세부터 샤를 10세까지

오를레앙 왕조(1830년~1848년): 루이 필립

보나파르트 왕조(1852년~1870년): 나폴레옹 3세

 

12.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 전쟁(1337-1453)

●1314년 필리프 4세(1285-1314)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카페 왕조가 막을 내리고 국왕자리가 잠시 공석이 되었다. 당시 왕위 쟁탈자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미남자 필리프 4세의 사촌 필리프 드 발루아였고, 다른 한 명은 필리프 4세의 외조카 영국왕 에드워드 3세였다. ...프랑스 귀족들은 영국왕이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여 필리프 드 발루아(필리프 6세 : 재위 1328-1350)가 추대되었고 이때부터 발루아 왕조(1328-1589)가 시작된다.

●왕위쟁탈전은 전쟁의 도화선에 불과했고 영토분쟁이 주된 원인이었다. 영국의 노르만 왕조(1066-1154)플랜태저넷(1154-1399) 왕조는 모두 프랑스 귀족이 세운 것이라서 프랑스 내에 많은 영지가 있었다. 필리프 2세부터 프랑스 왕들은 지속적으로 프랑스 내에 있는 영국영지를 회수했다. ...또 다른 원인은 플랑드르 문제였다. 플랑드르는 양모업이 상당히 발달한 곳으로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그런데 양모업의 원려ㅛ인 양모가 대부분 영국에서 수입되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영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1328년 필리프 6세가 플랑드르를 직접 통치하기로 했다. 그러자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양모수출을 금지했다. 플랑드르는 원료 공급을 받기 위해 영국왕을 플랑드르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했다. 필리프 6세는 크게 분노했다.

●1348년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었다. 1348년부터 1352년까지 흑사병의 출현으로 적어도 3분의 1의 유럽인이 생명을 잃었다. ...국왕인 필리프 6세도 흑사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13. 성녀 잔 다르크(1412-1431)

●잔 다르크는 13살 때부터 계속해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를 이끌어 영국을 물리치며 왕세자 샤를을 왕으로 만드는 것이 그녀의 사명이라고 했다. ...1429년 4월, 잔 다르크는 샤를이 뽑은 수천 명의 프랑스 군인들을 이끌고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기위해 나섰다. ...그녀는 귀족들의 질투를 사게 되고 부르고뉴 공작은 큰 돈을 받고 그녀를 영국에 팔았다. 영국의 종교재판은 잔 다르크를 이단이며 마녀로 판정했다. 그녀는 루앙의 광장에서 화형 당했고 유골은 센강에 뿌려졌다. 안타까운 일은 그녀가 감옥에 갇혀있던 1년 동안 샤를 7세(재위 1422-1461)는 구원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14. 기사국왕 프랑수아 1세(재위 1515-1547)

●프랑수아 1세는 낭만적이고 모험을 좋아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기사국왕>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에 대한 전쟁을 일으켜 밀라노를 차지한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도전하였으나 에스파냐왕인 카를로스 5세(재위 1516-1556)에게 패한다. ..밀라노 정복 후 밀라노의 예술에 감탄한 그는 다빈치, 로소, 티치아노, 라파엘의 명화를 사들였으며 미켈란젤로의 조각도 운반해 왔다. 심지어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를 프랑스로 초청했다. 다빈치는 프랑스에서 죽었다.

 

 

 

 

제2장 절대왕정의 탄생

1. 혹독했던 36년의 내전

위그노전쟁(1562-1598) : 프랑수아 1세 때부터 시작된 프랑스 가톨릭의 위그노 탄압은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62년 가톨릭을 신봉하던 기즈 공작이 예배를 올리던 위그노들을 기습공격하고, 이를 계기로 위그노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3차 위그노 전쟁이 끝나고, 일시적인 휴전상태에 들어갔으나, 여전히 가톨릭 세력은 위그노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급기야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 축일의 대학살이 일어나 많은 위그노 지도자들과 위그노들이 사망하고, 신교와 구교 간의 격렬한 싸움이 재개되었다.

앙리 3세의 즉위 이후에 조금씩 변화하던 상황은 나바라 왕으로 위그노의 지도자 격이었던 앙리 4세(재위 1589-1610)가 즉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1593년 앙리 4세는 스스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신교와 구교를 화해시키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이윽고 1598년에 낭트칙령(The Edict of Nantes)을 발표, 36년간 지속되었던 위그노전쟁은 종결된다.

 

2. 추기경 리슐리외

●앙리 4세가 암살당한 루이 13세(재위 1610-1644)가 왕위를 이어 받았다. ...1614년 왕족과 귀족들은 삼부회개최를 요구하고는 이를 이용해 왕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바로 이 회의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리슐리외(1585-1642)이다. ...1624년 리슐리외는 권력의 중심 추밀원으로 진출했고 라이벌을 제거하면서 다음 해 재상이 되었다. ...재상이 된 뒤 재정개혁을 시행하고 중앙집권제를 추진했다. ...그는 대외정책에서 국가이익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민생 안정은 돌보지 않았다.

 

3. 태양왕의 위대한 업적

루이 14세(1638-1715, 재위 1643-1715)는 다섯 살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힘든 유랑생활을 겪어야 했던 왕은 그때의 경험을 잊지 않았고 그 경험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국왕다운 국왕이었으며 단점과 장점을 남김없이 보여 준 사람이었다. 재위 70여 년 동안 프랑스에 더 없는 영광을 안겨 주었고 국왕으로서 최후의 에너지까지 소모했다. 그가 세상을 뜨자 왕조는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1661년 마자랭이 죽은 뒤 왕은 직접 정무를 처리했다. ...왕은 재상제를 폐지하고 본인이 직접 정무를 맡았다. 그에게 있어 군주만이 결정권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군주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임무에 충실한 것이었다. 루이 14세 시기는 절대왕정의 전성기였다. ...1673년 그는 프랑스의 모든 주교는 국왕이 임명한다고 선포했다.

●1700년 에스파냐 국왕 샤를이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자 에스파냐 왕위는 프랑스 왕위와 겸임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공이 에스파냐 왕위를 계승했다.

 

4. 루이 14세의 로맨스

●젊은 시절 루이 14세는 마자랭의 질녀 마리 드 만치니를 열렬히 사랑했다. ...1660년 에스파냐 공주 마리 테레즈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첫 번째 정부로 1661년 공인된 루이즈 드 발리에르를 만났다. ...1667년 몽테스팡 부인이 새로운 정부가 되었고 상심한 발리에르는 수녀원으로 들어가서 평생을 조용하게 보냈다. 이후 몽스테팡 부인은 17년 동안 자신의 자리를 탄탄히 지켰고 6명의 자녀를 낳았다. ...맹트농 부인은 몽스테팡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였는데 유순하면서도 예의와 규범을 잘 아는 여인이었다. 1678년 그이 새로운 정부가 되기를 원했으나 부인은 거절했고 1681년, 모든 스캔들을 접고 왕후의 곁으로 돌아갔다. 2년 후 왕후가 죽자 1686년 평민출신인 맹트농 부인과 작은 교회에서 비빌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왕은 48살, 부인은 52살 이었다. ...파리가 싫어져 궁전을 베르사유로 옮겼다(1682).

 

5. 위대한 희극작가 몰리에르(1622-1673)

●프랑스 고전 희극의 거장. 라신의 비극이 귀족 문화의 표현이라 한다면 몰리에르의 희극은 상승하고 있는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본명은 장 밥티스트 포클랑(Jean-Baptiste Poquelin). 그의 외할아버지는 연극 애호가로 어린 그를 이끌고 극장에 출입했다. 중세 전래의 소극(파르스), 이탈리아 희극(코메디아 델라르테)과 에피쿠로스풍의 사상에 접촉하고 여기에 신흥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그의 희극이 탄생한다.

그는 '명성 극단'을 조직하여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했다. 애인 마들렌 등과 함께 고생했으나 아마추어 극단의 슬픔 속에 이내 곧 파산하고 그는 빚 때문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여배우 뒤 파르크의 참가와 왕제(王弟) 오를레앙 공(公) 필리프의 보호 등으로 차츰 순풍을 탄 그는 1658년, 드디어 대망의 파리로 돌아왔다. 그해 루이 14세 앞에서 〈사랑에 빠진 의사〉를 상연하고, 이후 정기적으로 프티 부르봉(Petit Bourbon) 극장에 출연하는 허가를 얻었다. 1659년 〈재치를 뽐내는 여인들〉을 상연해 크게 성공했으나, 여기에는 이전의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희극적 요소는 적고 그 독특한 성격 희극의 탄생이 보인다.

륄리와 협력한 신화극 〈프시케〉(1671)의 실패를 제쳐놓으면 이후의 작품은 성공의 연속으로 주요 작품을 연대순으로 들면 〈남편 학교〉(1661), 〈아내들의 학교〉(1662), 〈동 쥐앙〉(1665), 〈인간 혐오자〉(1666), 〈앙피트리옹〉(1668), 〈조르주 당댕〉(1668), 〈수전노〉(1671), 〈타르튀프〉(1664, 결정판 1669), 〈스카팽의 간계〉(1671), 〈유식한 여자들〉(1672) 그리고 이듬해인 1673년 〈기분으로 앓는 사람〉 상연 중 무대에서 쓰러져 생애를 마쳤다.

 

 

 

제3장 계몽운동과 프랑스혁명

1. 루이 15세(1710-1774 재위 1715-1774)와 풍파두르 부인

●1756년부터 1763년까지 이어진 7년전쟁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동맹과 영국, 프로이센 동맹이 식민지 쟁탈과 유럽 패권을 둘러싸고 벌였던 지루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연이어 패배했고 엄청난 손실을 입었으며 대량의 식민지를 잃었다. 파리조약의 체결로 인도와 캐나다, 미시시피 서쪽을 잃었다. 한편으로는 로렌지방을 얻고 코르시카를 헐값에 사들이기도 했다.

●1745년 24살의 퐁파두르 부인은 남편과 이혼하고 왕궁으로 들어갔다. 20여 년 간 루이 15세의 정부로서 궁의 실질적인 여주인이 되었다. ..그녀가 주최하던 살롱은 당시 가장 유력한 인물들이 모이는 장소로,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자주 참석하여 퐁파두르 부인을 둘러싸고 시상과 문학을 논하고 철학 문제를 논쟁했다.

 

2. 열쇠장이 국왕과 적자 왕후

루이 16세(재위 1774-1793)은 루이 15세의 손자였다. ...그가 조부와 다른 점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이 유일한 취미라고는 각양각색의 열쇠를 만지는 것이었다. ...루이 16세는 중농학파의 경제학자 튀르고를 재정총감으로 임명했다. 대단한 각오로 경제개혁을 추진한 튀르고는 농민의 요역을 없애고 국경의 요새를 철거하며 무역관세를 없애고 공업을 부흥시키는 등의 조치를 추진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귀족과 종교인들도 제 3신분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내도록 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개혁은 특권계층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은행가 네케르의 개혁도 특권계층의 압력에 부딪혔고 얼마 뒤 그 역시 물러났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755년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이며 어머니는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였다. ...아름답고 귀엽고 선량했지만 천성이 순진하고 남의 말에 잘 휩쓸렸다.

 

3. 프랑스 계몽운동

●18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계몽운동이 전 유럽을 석권했다. 계몽이라는 말은 광명과 지혜라는 뜻이다. ...핵심사상은 <이성 지상>이다. 이성을 제장하고 사람들에게 교회 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등이 당시의 대표적인 계몽 사상가들이다.

 

4. 혁명 전야, 삼부회 소집

●1789년 5월 5일, 175년 동안 열리지 않던 삼부회가 베르사유궁전에서 열리면서 전제왕권이 거의 붕괴했다. 성직자 대표가 291명, 귀족 대표가 270명, 제 3신분 대표가 578명이었다.

 

5. 바스티유 습격

●1789년 6월 17일, 제 3신분은 국민회의를 성립하고 자체적으로 세수 권한을 비준했다. 국왕과 귀족들은 몹시 당황했다.6월 20일, 국왕은 제3신분의 회의실을 폐쇄했다. 회의실로 향하던 제3신분의 대표들은 문이 닫힌 것을 알고 분노했다. 이들은 의장 장 바이를 중심으로 테니스코트에 모여 회의를 열고 프랑스 성문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절대 흩어지지 않을 것임을 서약햇다. 이 사건을 테니스코트의 서약이라 한다.

..의회의 승리로 굴욕감을 느낀 국왕은 왕후와 귀족들의 선동에 군대를 대거 이동시켜 파리를 포위하고 제3신분을 체포할 준비를 했다.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무너뜨리자?라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물결이 바스티유로 향했다. ...당황한 국왕은 장 바이를 파리시장으로 인정하고 귀족 라파예트를 국민자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혁명을 상징하는 남색, 백색, 홍색의 삼색기를 채택했다. ..얼마 뒤 의회는 인권선언을 통과시켰다.

 

6. 단두대로 사라진 국왕

●국내의 혁명분위기로 국왕은 불안해졌다. 1791년 6월 20일, 가족과 함께 궁을 탈출하여 국외로 도망치려 했다. 왕실 일행은 국경근처에서 신붕이 탄로되어 파리로 회송되었다. ...9월 20일 선거로 탄생한 국민공회가 열렸고 회의에서 왕정을 폐지하는 결의가 통과되었다. 9월 22일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프랑스 제1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793년1월 18일 국민공회는 루이 16세에게 사형을 판결했다.3일후 국왕은 단두대로 보내졌다.

 

7. 롤랑 부인의 죽음

●롤랑 부인은 지롱드파의 지도자 롤랑의 부인이었다. ...대혁명으로 롤랑 부인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던 열정이 분출되었다. 그녀의 격려로 롤랑은 파리로 가서 지롱드파에 가입하고 내무부장을 맡게 되었다. ...이 시기 국민공회의 수많은 결의가 모두그녀의 살롱에서 나온 것이며 롤랑의 이음으로 발표된 각종 법령은 거의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시기에 그녀는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 뷔조를 만나게 되었다. ...부부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생겼다. 이 때 지롱드파 역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이주도하는 급진 자코뱅파가 지롱드파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자코벵파는 파리에서 미친 듯이 지롱드 구성원들을 수색했다.

...1793년 11월, 롤랑부인에게 사형이 내려졌고 즉시 집행되었다. ...단두대 앞에서 그녀는 유명한 유언을 남긴다.

?오, 자유여, 너의 이름아래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저질러졌는가??

...그녀가 죽은 지 4일 후 롤랑은 멀리 파리의 한 숲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반년 후 보르도 숲속에서 뷔조의 시체도 발견되었으며 사인은 자살이었다.

 

8. 테르미도르 반동

●지롱드파를 축출한 뒤 정권을 장악한 자코뱅파는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속에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공포정치는 계속되었고 로베스피에르의 잔혹한 숙청에 모두 전율했다. 이에 결국 반동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을 단두대로 보낸 로베스피에르 자신이 차례가 된 것이다.

●1794년 3월, 좌파인 에베르가 반란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과감하게 그를 체포하고 사형에 처했다. 얼마 뒤 당통 역시 공화국을 뒤엎을 음모를 꾸몄다는 죄명으로 감옥에 갇혔다. ...1793년 7월에 지롱드파가 축출되었다는 소식에 폭정을 중단시키기 위해 샤를로트 코르테라는 여성에 의해 마라는 암살당했다. ...자신이 숙청될까 두려웠던 의원들은 즉시 반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에게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그를 체포했다. ...7월 28일 그는 동료들과 함께 단두대로 보내졌다. 7월은 공화력으로 熱月(테르미도르)에 발생했다하여 테르미도르반동이라 한다.

 

9. 브뤼메르 쿠데타

●테르미도르당은 반동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결국 다시 쿠데타로 물러났다. 그들이 집권하던 5년 동안 프랑스 정국은 혼란했고 불안과 공포로 가득했으며 반복되는 권력투쟁으로 혁명의 열정이 많이 약화되었다.

●1799년 정국이 환란에 빠지자 총재정부의 일원이었던 시에에스는 반동을 일으켜 다시 강력한 정부를 세우려 했다. 그는 이집트에서 급하게 돌아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과 의기투합했다. ...세심한 계획이 마련 된 후, 1799년 11월 9일 나폴레옹은 자코뱅파의 과격주의가 공화국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행동을 개시했고 군대를 파견해 의회를 포위했다. 이 날이 프랑스 공화력으로 안개달, 즉 브뤼메르 18일이었다....다음 날 나폴레옹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통령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프랑스혁명 전개과정

삼부회 → 국민의회 → 입법의회 → 국민공회 → 총재정부 → 통령정부

 

 

제4장 나폴레옹 제정과 공화정

1. 나폴레옹 제1제정의 영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는 코르시카 섬의 몰락 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1795년 10월, 왕당파가 파리에서 방데미에르 쿠데타를 일으켰고 파리는 혼란에 빠졌다. 총재정부 관리인 바라스는 정국을 통제하지 못해 조급해했다. 그는 나폴레옹을 떠 올렸고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급히 나폴레옹을 기용했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성공적으로 왕당파의 쿠데타를 진압했다. 총재정부는 그를 크게 칭찬했고 그를 육군 중장 겸 파리수비사령관으로 발탁했다. 그의 나이 27살이었다. ...이듬 해 그는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798년 4월 이집트군 사령관이 되어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1799년 브뤼메르 쿠데타타를 성공시키고 제1통령이 되었다. 그의 나이 31살 때였다. ...1800년 5월,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폭설이 몰아치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갔다. 그는 오스트리아군의 후방을 습격해 대파했다. ...1802년 8월, 국민투표로 종신통령이 된다. 1804년 12월, 나폴레옹은 파리 노트르담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나폴레옹 1세라고 칭했다. ...초청되어 온 교황 피우스 1세가 왕관을 들어 그의 머리에 씌워주려고 했을 때 그는 갑자기 교황의 손에서 왕관을 뺐더니 스스로 왕관을 썼다.

●1807년 조세핀과 이혼했다.1810년 나폴레옹은 왕후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인 오스트리아공주와 결혼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황제이자 이탈리아의 국왕, 라인 연방의 보호자, 스위스 연방의 중재자 자리를 겸했다. 그의 세 형제 조제프, 루이, 제롬은 각각 나폴리, 네덜란드, 베스트팔렌의 국왕이 되었다.

 

2. 워털루 전투

●1414년 3월, 제6차 대프랑스 동맹군은 프랑스국경으로 진출하고 러시아황제와 프로이센 왕이 파리에 들어왔다.4월 3일 원로원과 입법원은 연합성명을 내고 나폴레옹을 폐위했다. 4월 6일 나폴레옹은 퇴위조서에 서명했고,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다. 그는 엘바섬으로 유배당했다. ..그는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에 입성하고 루이 18세는 국외로 도망쳤다.

1815년 6월 18일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는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 군대와 교전을 벌였다. ...프랑스군은 전멸하고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당하고 그의 부활은 백일천하로 끝났다. ...그는 대서양에 있는 작은 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당하고 사람을 보내 감시했다.

 

3. 부르봉 왕조의 복귀

●1814년 4월 6일, 나폴레옹이 퇴위조서에 서명한 날, 원로원은 새 헌법을 통과시켰다. 동시에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를 왕으로 등극시킨다고 발표 했다.5월 3일, 루이 18세가 귀국하여 즉위하면서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다.

 

4. 영광의 3일

●루이 18세의 뒤를 이은 샤를 10세는 반동정치에 대항하여 1830년에 7월 혁명이 일어났다. 27일부터 29일까지를 영광의 3일이라 부른다. ...샤를 10세는 베르사유 궁으로 도망갔다. ...의원들은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1773-1850)를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동의했다. ...7월 왕정이 세워졌다.

 

5. 공상적 사회주의

●왕국이든 공화국이든 억압과 착취는 언제나 존재했다. 항상 소수가 고위층에서 군림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층에서 고통 받았다.누가 소수의 고위층에게 동포를 억압할 권리를 주었는가? 불평등한 상태는 어떻게 해야 바꿀 수 있을까? 사상가들은 급하게 그 해답을 찾았고 그렇게 공상적 사회주의가 탄생한다. 생시몽, 푸리에를 선두로 블랑, 푸르동, 바뵈브, 블랑키 등 많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했다.

 

6. 7월 왕조의 부활

루이 필립은 부르봉 왕조의 방계자손이다. ...1830년 8월 14일 삼권분립의 원칙을 담은 7월 왕정의 헌장이 반포되었다.

1848년 2월 22일, 사람들은 비가 오는 가운데서도 시위를 벌이며 자유를 파괴한 정부에 항의했다. ...충돌은 점차 격화되었고 결국 2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임시정부는 프랑스 제2공화국 성립을 선포하고 7월 왕정의 종말을 고했다.

 

7. 문학의 거장 발자크

●프랑스문학 역사상 수많은 인물이 있었지만 발자크(1799-1850)만큼 사회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한 작가도 없을 것이다. 그는 격정적인 혁명시대의 전환점이자 과거 귀족의 영광은 사라지고 미래의 영광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시대를 살았다. 이런 혼란기에 그는 글로써 현실의 가장 깊은 곳을 파고들었으며 신랄하고 무정하게 시대의 외침과 인생의 고통을 모조리 꺼내 놓았다. ...발자크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프랑스 사회의 백과사전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인간희극>은 19세기상반기 프랑스 사회생활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보여 주었다.

 

8. 나폴레옹 제2제정

●1848년 11월, 제헌의회는 제2공화국 헌법을 통과시켰다. ...12월 총통선거에서 자신만만했던 카베냐크가 떨어지면서 당선자인 루이 나폴레옹만 좋은 일 시킨 꼴이 되었다. ...루이 나폴레옹(1808-1873)은 1852년 공화 8년 헌법을 기초로 수정한 새로운 헌법을 발표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3세가 되었다....12월 2일 제2제정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9.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은 피할 수가 없었으며 양측 다 전쟁을 원하고 있었다. ...에스파냐 왕위계승문제가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870년 7월 19일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다. ...1870년 9월 1일 나폴레옹 3세는 스당에서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황제와 프랑스 군 10만 명이 전부 포로가 되었다. ...제2제정이 붕괴되었다.

 

10. 파리 코뮌(1871)

●제2제정이 무너지자 임시정부가 나폴레옹 3세의 퇴출을 선포하고 프랑스 제3공화국을 설립했다. ...1871년 1월 18일, 파리를 점령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독일제국을 성립했다. ...3월 28일 각 지역에서 선거로 선출된 대표들이 모여 파리 코뮌 설립을 정식 선포했다. ...코뮌 전사들은 결국 묘지 동남부의 벽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72일간의 파리코뮌도 실패로 끝내게 되었다. 파리를 점령한 후에도 티에르 정부는 파리시민에 대한 피의 대 살육을 진행했다. 약 3만 명이 살해당하고 6만 여명이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당했다.

 

11. 공화정 성립

●1875년 1월 30일, 공화정을 정식 정치체제로 수립하기 위한 헌법 수정안이 의회에서 1표 차이로 통과되었다.

 

12. 모네의 빛과 그림자의 세계

●그림은 모네(1840-1926)에게 인생의 전부였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모네는 화폭에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면서 만들어 내는 매력적인 세계를 담아냈다. 1867년 그의 모델이며 애인이었던 카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가 그의 첫 아들 장(Jean)을 낳았다. 화필로 풍경의 인상을 잡아낸 이 포수는 세계인들에게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떠났다.

 

 

제5장 프랑스를 빛낸 사람들

1. 대문호 빅톨 위고(1802-1885)

●프랑스의 낭만파 시인, 소설가 겸 극작가. 낭만주의자들이 ‘세나클(클럽)’을 이루었다. 소설에는 불후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는 《노트르담 드 파리 :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레미제라블》이 있다. 그가 죽자 국민적인 대시인으로 추앙되어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판테온에 묻혔다.

 

2. 자신의 길을 걸어간 조르주 상드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는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폴란드 왕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귀족 출신이고, 어머니는 파리 센 강변의 새 장수 딸로 가난한 서민 출신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상드는 프랑스 중부의 시골 마을 노앙에 있는 할머니의 정원에서 루소를 좋아하는 고독한 소녀 시절을 보냈다. 18세 때 뒤드방 남작과 결혼했으나 순탄치 못한 생활 속에 이혼하고, 두 아이와 함께 파리에서 문필 생활을 시작한 후 <피가로>지에 짧은 글들을 기고하며 남장 여인으로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이때 여러 문인, 예술가들과 친교를 맺었는데, 특히 6살 연하인 시인 뮈세, 음악가 쇼팽과의 모성애적인 연애 사건은 당시 상당한 스캔들을 일으켰다. 또한 화가 들라크루아, 소설가 플로베르와의 우정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상드는 이처럼 72년의 생애 동안 우정과 사랑을 나눈 사람들이 2000명이 넘는 신비와 전설의 여인이었으며 ‘정열의 화신’이었고,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사랑의 여신’이었다.

 

3. 문단의 전설이 된 아버지와 아들

●대 듀마 알렉상드르 듀마(대 듀마 : 1802-1870)는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짧은 기간에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희곡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큰 돈을 벌어준 것은 소설이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삼총사> <여왕 마고>등이 있다.

●소 듀마는 알렉산드르 듀마 피스(1824∼1895)라 불려지며, "삼총사", "몬테 크리스트" 등의 장편소설로 유명한 대 듀마의 아들로서, 부친과 대조적으로 단편소설가로 유명하였는데, 1848년에 쓴 소설 "춘희"를 희곡으로 개작하여, 베르디가 파리 체류시에 상연하였다.

베르디는 대본의 작성을 "리골레토"의 대본을 쓴 피아베에 의뢰하였고, 피아베는 이것을 다음 해 1월에 완성하였다. 베르디는 곧 작곡에 착수하여 약 4주간 동안에 전곡을 완성하였다.

듀마의 작품의 원제는 소위 "춘희"라고 불리어지는 것이지만, 대본의 원제인 "라 트라비아타"는 이탈리아어로 "방황하는 여인"이라는 의미가 있다.

 

4. 드레퓌스 사건(1894-1906)

●1894년 10월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포병대위 A.드레퓌스(1859-1935)가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회의에 의해 종신유형의 판결을 받았다.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정보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으나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 혐의를 짙게 하였던 것이다.

그 후 군부에서는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확증을 얻었는데도 군 수뇌부는 진상 발표를 거부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어 재심(再審)을 요구해 오던 가족도 진상을 탐지하고, 1897년 11월 진범인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했지만, 군부는 형식적인 심문과 재판을 거쳐 그를 무죄 석방하였다.

그러나 재판결과가 발표된 직후 소설가인 E.졸라가 공개한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의 논설로 사건은 재연되었다. 졸라는 드레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군부의 의혹을 신랄하게 공박하는 논설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으로 1898년 1월 13일자 《오롤》지에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사회여론이 비등하여 프랑스 전체가 ‘정의·진실·인권옹호’를 부르짖는 드레퓌스파 또는 재심파(再審派)와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를 내세우는 반(反)드레퓌스파 또는 반재심파로 분열되었다.

1898년 여름 군부는 어떤 새로운 증거서류에 의거하여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언하였으나, 그것이 날조로 판명되고, 체포된 증거서류 제출자는 자살함으로써 반(反)드레퓌스파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정부도 재심을 결정했으며, 또 이때 반드레퓌스파에 대항하면서 공화정 옹호를 내세운 발데크 루소내각이 성립되어, 사태는 재심파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1899년 9월에 열린 재심 군법회의는 드레퓌스에게 재차 유죄를 선고하였으나, 대통령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무죄 확인을 위한 법정 투쟁을 계속한 끝에 그는 1906년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판결을 받고 복직 후 승진도 하였다. 자유주의적 재심파의 승리로 끝난 이 사건은 프랑스 공화정의 기반을 다지고, 좌파 세력의 결속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5. 독일에 대한 복수

●프로이센과의 전쟁 패배와 곧이어 체결된 굴욕적인 조약은 프랑스사람들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와 같았다.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 움직임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최고조에 달해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의 일부 국가들과 지역까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거나 보호국이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프랑스는 방대한 식민지를 건설하여 여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식민제국이 되었다.

●식민지를 확장하는 동시에 독일에 대한 복수역시 프랑스 외교정책의 핵심이었다. ..1873년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3제동맹을 맺었다. ..1882년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가 3국동맹을 맺었다. ...1894년에 프랑스는 러시아와 러-프동맹을 맺는다. 1904년에 영-프 화친조약이 맺어진다. 1907년에 영국-러시아가 협정을 맺어 3국협정 체제가 형성된다.

●1905년 제1차 모로코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의 반대로 프랑스가 물러섰다. 1911년 제2차 모로코 사건이 발발하자 영국이 프랑스 편을 들어 프랑스가 모로코를 보호국으로 하고 프랑스는 독일에게 콩고 일부를 할양했다.

 

6. 고갱, 너는 누구인가?

고갱(1848-1903)은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명문가 출신이고 아버지는 정치부 기자였다. ...1888년 고흐(1853-1890)의 초대를 받고 고갱은 아를로 향했다. 그런데 강한 성격을 가진 두 대가는 마치 한 우리 속의 두 마리 맹호 같았다. 한 곳에 같이 있으면 반드시 어느 한 쪽이 다치게 되어 있었다. 함께 지낸지 3개월도 안되어 고흐는 정신이 혼란한 상태에서 귀를 잘랐고 고갱은 그곳을 떠났다. ...1891년 그는 작품을 판돈으로 여비를 마련해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로 갔다. ...1893년 고갱은 자신의 작품을 안고 자신만만하게 파리로 돌아왔고 이번에는 분명히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리라고 확신했다. ...크게 실망한 고갱은 다시 타히티로 갔다.

 

7. 현대 조각 예술의 아버지 로댕

로댕(1840-1917)은 파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1863년에 로댕은 수도원에 들어갔다. ...에마르 신부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신부의 조각상을 조각했다. 1864년 로댕의 <코가 망가진 사나이>가 살롱에서 입선하지 못했다. ...이 시기 인생의 동반자 로즈 뵈레를 알게 되었다. 이 아름다운 소녀는 mr에게 무한한 영감과 기쁨을 주었다. 로즈는 그와 50년을 함께했지만 줄곧 소리 없이 옆에서 같이 지내기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야 로댕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1874년 <청동시대>가 비로소 살롱에서 입선했다. ...<지옥의 문>은 로댕이 이탈리아의 유명 시인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편>을 근거로 조각한 문 장식으로 총 186개의 이미지가 조각되어 있다. 그중 널리 알려진 명작으로는 <생각하는 사람> <입맞춤>등이 있다.

 

 

 

 

제6장 위기와 불안의 시대

1. 전쟁의 불꽃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 준비를 이미 마친 상태였다. ...1914년 7월 28일, 독일의 지원을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했다. ...8월 1일, 프랑스오 kehr일은 거의 동시에 동원령을 내렸다. ..양쪽으로 갈린 연합국은 서로 우ㅠ너한 관계이거나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한쪽은 프랑스, 러시아, 영국이 주척이 된 협상국이었고, 다른 한쪽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를 구성원으로 하는 동맹국이었다.

 

2. 마른의 기적

●9월 5일, 조르프가 지휘하던 프랑스군과 몰트케가 이끄는 제1군대가 만났다. ...9월 6일, 조르프가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에게 전면 반격을 명령하면서 마른 전투가 시작되었다. 파리와 베르됭 사이의 평원에서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독일군과 격전을 벌였다. 양측은 모두 200여만 병력에 6,600개의대포를 전투에 투입시켰다. ...9월 10일부터 독일군은 전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마른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군이 거둔 첫 번째 승리였다.

 

3. 서부 전선의 대치

●마른 전투 후 프랑스 군과 독일군은 장기적인 시소게임에 들어가면서 삽으로 참호를 파는 일이 양측 병사들의 임무가 되어 버렸다. 1915년 전쟁의 중심이 서부에서 동부로 넘어갔다. 1915년 1년 동안 서부전선은 평화가 유지되었다. 1915년 초, 프랑스와 독일은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다. 그 중심은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전식으로 동맹국을 탈퇴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선전포고 했다. ...승리의 저울은 점차 협상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4. 베르됭 전투

●1916년 초부터 전쟁의 중심은 다시 서부 전선으로 옮겨왔다. ...1916년 2월 21일, 독일군은 1,000여 대의 대포를 베르됭 요새를 향해 집결시키고는 공격을 시작했다. ...2월 25일, 혈전이 지나고 독일군은 군사 요충지 두오몽 요새를 점령했다. 2월 26일 베르됭 사령관 페탱(1856-1951)은 두오몽 수복명령을 내렸다. ...3월부터 6월까지 양측은 격렬한 쟁탈전을 벌였고 그 전투에서 독일군은 처음으로 독가스를 사용해 프랑스에 큰 타격을 주었다. ...10월 프랑스군은 대규모 반격을 개시해 두오몽을 수복했다. ...10개월간 계속된 베르됭 전투로 양측에서 약 100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1917년 4월, 승리에만 목을 맨 니벨은 전면 공격을 명령했지만 하는 전투마다 실패했다. 십수 일의 공격으로 프랑스군 20만 명이 사망하자 사람들은 이 전투를 <니벨의 살육장>이라고 비꼬았다.

 

5. 실패한 파리평화회의

●1917년 미국이 참전했고 러시아에는 혁명이 발생했다. 다음 해 러시아는 전쟁에서 빠졌다. ...클레망소는 의회의 압력에 맞서 파리와 함께 살고 함께 죽겠다고 선언했다. ..9월 16일 프랑스, 영국, 미국 연합군이 총공격을 퍼 부었다. 9월 19일, 불가리아가 항복하고, 10월 30일 터키가 항복하고, 11월 3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항복했다. 11월 초에는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 빌헬름 2세가 물러나고 사회민주당이 임시 정부를 구성하고 공화국 성립을 선포했다.

●1919년 1월 19일, 파리강화회의가 프랑스 외무부에서 열렸다.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 영국수상 조지,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최했다....6월 28일 베르사유 궁 거울의 방에서 독일대표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수복했다. 자르 지역은 국제연맹에서 15년간 관할하고 그 후에는 어디로 귀속될 지 국민투표로 정하기로 했다.

 

6. 전후의 프랑스, 위기와 불안이 싹트다

●프랑스는 전승국이었음에도 전쟁의 대가는 참혹했다. 서부전선에서 일어난 전투 대부분이 프랑스 영토에서 벌어졌고 정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전쟁의 상처만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폐허가 되었다.

1921년 4월 런던 회의에서 협상국은 최종적으로 독일의 배상금을 1,320억 마르크로 확정했다. 그런데 이후 독일은 여러 가지 핑계로 지불을 계속 연기했다. ...1923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푸앵카레(1860-1934) 는 독일의 루르를 점령했다. ..전후 몇 년 동안 프랑스의 정치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총리가 수시로 바뀌면서 내각도 오래가지 못했다. ...1926년 경제위기 속에서 프앵카레는 일련의 조치를 마련했다. ...성공적으로 프랑스 재정을 구해 낸 푸앵카레는 <프랑스의 구원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1929년 10월 29일, 뉴욕 월가의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경제 공황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이 시기 번영의 절정이었지만 곧 대공황의 폭풍에 휩쓸렸다.

 

7. 어리석은 타협정책

●1936년 독일군은 공공연하게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라인란트에 진주했다. ...1937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당시 프랑스는 불간섭 정책으로 돌아섰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불간섭을 선언해 놓고도 실제로는 스페인 반군에 무기를 제공해 결국 스페인에 친독일 프랑코 정권을 세웠다. ...1937년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삼국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8. 나약한 마지노선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향해 전격전을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서부전선 이상 없다> 상태를 유지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이런 맹목적인 낙관론이 프랑스를 지배하게 된 것은 마지노선의 존재 때문이었다. 1929년 육군장관으로 마지노가 부임했다. 그는 정식으로 동부 국경지대에 체계적인 방어시설을 제안했다. 이 방어시설의 이름은 마지노선이 되었다. 마지노선은 1929년부터 구축되기 시작했는데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중지되었다. 마지노선은 전체길이 70km에 보호지대와 주요 방어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1940년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

●1940년 6월 10일, 프랑스 정부는 서둘러 파리를 떠나 투르와 보르도로 옮겨 갔다. 같은 날, 이탈리아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6월 16일 전쟁을 주장한 폴 레이노드 총리가 물러나고 페탱이 등장했다. ...6월 22일, 양측은 정전협정에 서명했고 프랑스는 모든 협상조항에서 양보했다. 정전협정에 따라 프랑스는 점령지역과 자유지역으로 양분되었다. 점령지역은 독일이 직접 점령하면서 고액의 점령 비용은 프랑스가 내야 했다. 영토의 2/5밖에 되니 않는 자유지역은 페탱 정부가 통치했다.

●6월 29일 보르도가 독일군 점령지역이 되었기 때문에 페탱정부는 클레몽페랑으로 옮겼다가 7월 1일 다시 온천 휴양지인 비시로 갔다. 그래서 페탱이통치한 시기의 프랑스를 비시 프랑스라 한다. ...1942년 11월, 미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했고 독일은 즉시출병하여 프랑스 남부 지역을 점령했다.이후 페탱은 완전히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제7장 진보하는 프랑스

1. 프랑스 자유의 전사 드골

드골(1890-1970)은 한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2년 군사학교를 졸업한 드골은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대전이 끝난 후에는 페0탱쪽에서 일하며 전략과 군사이론 연구에 매진했다. 오랫동안 페탱과 친밀한 관계를 쌓았다. 1940년 6월 17일 페탱이 정정 방송을 하던 날 드골은 담담하게 프랑스를 떠나 영국 런던으로 갔다. 인지도가 낮았던 드골이지만 6월 18일, BBC방송을 통해 대 독일 항전문, 바로 6.18 호소문을 발표한다. 6월 22일 <프랑스 임시 민족위원회>를 설립했다. 7월에는 7,000여명의 한 부대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령 아프리카 식민지를 성공적으로 얻어낸다. 1942년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싸우는 프랑스>는 모든 교전국의 인정을 받았다.

●페탱정부가 투항한 후 프랑스 국민은 평화가온 것에 잠깐 환호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들은 원래 자신들이 갈구하던 평화가 순전히 허구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투쟁하기 시작했다. 독일 전 지역에 항독지하조직인 레지스탕스가 구성되었다. 1943년 6월, 드골은 지로드 장군과 함께 알제에서 프랑스민족 해방위원회를 설립했고 이는 실제로 프랑스임시정부가 되었다.

●1944년 6월 6일,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7월 14일, 파리시민은 독일군의 총구에도 아랑곳없이 국경 시위를 거행했다. 8월 25일, 파리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이 항복했다. 이어서 파리로 돌아온 드골은 프랑스 사람들은 열렬하게 환영했고 그를 프랑스를 해방시킨 영웅으로 대접했다. 1945년 독일이 항복했다.

 

2. 제4공화국의 탄생

●임시정부는 각 당파 인사를 흡수했다. 공산당은 두 명의 장관직을 받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임시정부는 비시정부에 대한 대규모 청산과 처벌 작업을 단행하여 수많은 매국노를 체포하여 죗값을 치르도록 했다. 1945년 10월, 제헌의회선거와 국민투표가 있었다. 의회선거에서 공산당은 159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되었다. 관례에 따라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이 만들어졌지만 국민공화당과 사회당의 반대로 어절 수없이 드골이 총리가 되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1946년 1월, 정치에 한계를 느끼고 실망한 드골은 사퇴하고 퇴각한다. 12월에 가서야 제4공화국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3. 패션의 여신 샤넬

샤넬(1883-1971)은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마저 실종되자 고아원에 보내졌다. 고아원에서 재봉을 배웠다. 고아원을 나와 양복점에서 재단사로 일했다. 1910년 젊고 잘생긴 영국실업가 보이 카펠을 만났다. 그의 자금지원으로 샤넬은 파리에 여성 모자점을 열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1913년 파리의 해변도시 도빌에서 첫 부티끄를 열고 여성복 패션을 디자인했다. 여성들은 입기 간편하고 활동이 편한 그녀의 옷을 선호했다. 마침내 여성들은 옷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샤넬은 여성의류뿐 만 아니라 기타여성제품, 즉 장식품, 화장품, 보석, 피혁제품까지 취급했다. 특히 향수에 관심이 많았다. 2차 대전 중 독일 군인과 애매모호한 관계를 유지한 탓에 전쟁이 끝난 후 비난을 피하기 위해 몇 년간 은거하다가 50년대 이후 미국으로 넘어갔다.

 

4. 인도차이나 전쟁의 구렁텅이

●프랑스는 세계적으로 많은 식민지를 가진 나라였다. 제2차세계대전중 식민지 사병들은 프랑스 해방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식민지 민족의식이 전에 없이 높아지면서 속속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 3개국으로 구성된 인도차이나는 프랑스 연맹에 합병된 국가였다.1945년 호치민(1890-1969)의 지도아래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설립되었다. 1946년 3월, 프랑스와 베트남 양국은 임시협정을 체결하여 베트남을 자유국가로 인정했다. 1947년 가을, 프랑스군은 베트남 서붑부를 침공했지만 베트남군에 의해 격퇴 당했다. 1953년 11월, 프랑스ㅜ군대는 18개월 내에 베트남 주력군을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베트남 서북부의 디엔비엔푸를 침공했다. 1954년 3월, 유명한 디엔비엔푸 전투가 시작 되었다. 55일간의 전투로 베트남군은 디엔비엔푸를 해방시켰으며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1954년 5월 드디어 인도차이나 평화문제에 대한 제네바 회의가 개최되었다. 마침내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5. 재기에 성공한 영웅

●드골은 1947년 프랑스국민연합(RPF)을 조직, 1951년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으나, 1953년 RPF를 해체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1958년 알제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제4공화정이 붕괴될 위기에 몰리자 다시 정계에 복귀할 뜻을 밝혔다. 그 해 6월 총리가 되었고, 9월 28일 헌법개정 국민투표에 의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의회의 권한을 약화시킨 제5공화정을 발족시켰고, 10월 그를 지지하는 신공화국연합(UNR)을 결성, 11월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되고, 5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1년 1월 알제리 민족자결정책, 1962년 4월 알제리의 독립을 국민투표로 가결하여 7년이 넘는 알제리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프랑스 경제의 가장 큰 장애를 제거하였다. 이로써 132년간의 프랑스 식민통치가 끝나고 알제리 문제도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1962년 10월 대통령 직선을 국민투표에 붙여 승리를 거두어 드골체제를 일단 완성시켰다. 그 후 1963년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가맹에 거부권을 발동하였고, 독자적인 핵무장, 미국 지휘 하에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의 탈퇴 등 ‘위대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민족주의를 부흥하기 위하여 주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고, 1965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러나 1968년 ‘5월 위기’로 10년에 걸친 드골체제의 기반이 흔들려 6월 총선거에서는 드골파가 승리하였으나, 1969년 4월 지방제도와 상원의 개혁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6.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

●프랑스와 독일은 오랜 숙적이었다. 대대로 이어온 원한 관계와 풀기 어려운 복수심이 얽히면서 수차례 전쟁이 일어났다. ...독일의 침략으로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은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원했고 드골은 이런 정책의 단호한 집행자였다. ...미국과 영국의 압력으로 프랑스의 대독정책은 점차 약화되었다. 게다가 연방독일의 총리가 된 아데나워(1876-1967)는 프랑스와의 화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58년 드골이 재기했다. 강경파였던 드골도 독일에 대한 원한을 내려놓았다. 1958년 9월 14일 드골과 아데나워 두 사람이 처음으로 회담한 날 이후 1963년 아데나워가 물러날 때까지 15차례의 만남에 100여 시간의 회담, 40여 차례의 서신교환을 통해 화해에 큰 공헌을 했다. 1963년 1월 22일 양국은 파리에서 <프랑스-독일 화해협력 조약>에 서명했다.

 

7. 5월 위기

●1966년 프랑스는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탈퇴하면서 미국에 프랑스 주둔군을 철수시키기를 요구했다.1960년에는 원자탄을 성공적으로 개발하여 강대국의 핵 독점을 무너뜨림으로써 국제사회에서 프랑스의 명성과 지위를 크게 높였다. ...1962년 헌법 수정안에 따라 다음 대통령은 보통선거로 선출하게 되었다. 12월 5일 1차 선거에서 드골(1890-1970)은 프랑스 본토에서 43.71%의 득표율을 보였고 미테랑(1916-1996)은 32.2%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서 드골이 55.1%로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1968년 파리의 일부대학생들이 교육체제의 구시대적인 행태에 불만을 나타내며 수업거부운동을 벌였다. 5월 10일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졌고 13일에는 파리노동자들이 전국적인 총파업을 선언하면서 학생들이시위를 지원했다. ...드골은 5월 위기를 겪었어도 6월의 의회선거에서 승리했다. 드골은 사회 개혁을 통해 지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상원개혁을 시행하기로 했다. 1969년 4월 27일 그는 앞에서 제시된 문제에 대해 국민투표를 했고 다수의 반대에 부딪힐 경우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투표결과 반대표가 53.2%에 달했다. 다음 날 그는 물러났다.

 

8. 자유로운 연인들 샤르트르와 보부아르

잘 폴 샤르트르(1905-1980)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는 소울메이트이자 평생의 반려자였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또한 각자 독립적인 자유를 누린 연인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평생 계약 연애를 하면서 달콤한 시간도, 힘든 시간도 함께 보내면서 끝까지 자신들의 계약을 지켜 나갔다. 세속인들의 눈으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를 맺었던 두 사람은 사상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놀라운 업적을 이룩했다. 사르트르는 1964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지만 수상을 거부했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을 남겼는데 이 대작은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여성들의 <성경>으로 추앙받았다.

 

9. 임기 중 사망한 퐁피두

●퐁피두(1911-1974)는 1944년에 드골 임시 정부에 참여, 1946년에 실업계에 투신하여 은행 총지배인을 역임하였다. 그 후, 1958~59년에 드골 내각 관방 장관을 역임하고, 실업계에 돌아갔다가 1962년에 수상에 취임했으며, 1965년 드골 대통령 사망 후 대통령 당선되어 취임했다. 외교면에서는 드골의 자주 노선을 계승하였으며 내정에서도 경제 성장률을 연 6% 이상 높이는 등 치적을 쌓았다. 퐁피두는 부지런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질병으로 1974년 임기중에 사망했다. 대통령선거에서 데스탱이 승리했다.

지스카르 데스탱(1926-현재)은 명문가에서 자라 파리의 이공과대학과 국립행정학원을 졸업한 후 재무성에서 근무하였다. 1956년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유엔총회에 프랑스대표로 참석, 1962년 36세의 젊은 나이로 대통령 드골에 의하여 재무장관으로 발탁되었으나 1966년 사임, 드골파와 결별하였다. 그 후 1969년 대통령 퐁피두 밑에서 다시 재무장관에 취임하여 프랑화의 절하를 단행하였다. 1974년 대통령 퐁피두의 사망으로 대통령선거에 ‘점진적 개혁’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하여 좌익연합의 F.미테랑에게 승리하였다. 1981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미테랑에게 패배하였다. 1988년 프랑스민주연합(UDF)의 의장이 되었다.

 

10. 미테랑, 실패자는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다

프랑수아 미테랑(1916-1996)은 1981년에 대통령이 된다. 사회주의자가 최초로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테랑의 정치 경력은 거의 반세기에 이른다. 그는 14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함으로써, 나폴레옹 3세 이후로 역사상 가장 오래 집권했던 프랑스 지도자로 남게 되었다. 1916년에 시골 철도 역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쉬롱트(Chironte) 마을의 작은 학교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어려서부터 리더가 아니면 어느 그룹에도 결코 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은 젊은 청년의 야망을 가차 없이 무너뜨렸고, 그는 보병에 입대했다. 그는 전쟁 포로가 되었고 3차례나 탈출을 시도한 끝에 드디어 성공했다.

프랑스에 돌아온 그는 초기에 페탱 원수의 친 나치 정권을 위해 일하였다. 그러나 후일 미테랑은 비시 정권과의 유대를 강력히 부인하였고, 오직 레지스탕스 운동만을 강조하였다.

미테랑은 자신의 출세와 경력을 위해 극우파에서 극좌파로 전향하는 등 매우 이중적인 정치 생활을 하였다. 해방 이후 미테랑은 가장 젊은 장관으로 새 정권에 참여했다. 그러나 1958년에 드골이 다시 정권에 복귀하자 그는 정부에서 멀어졌다. 이 정치적인 방랑 시절에 보수주의자였던 그는 사회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미테랑의 정치 노선의 180도 전환에 대해 그의 생각이 시대를 앞서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드골은 항상 그의 개종을 비웃었다. 결국,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미테랑은 당시에 결코 드골의 우두머리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야당을 택했고 거기서 좌파를 만났다.

그 후, 20년간 그의 정치 생활은 좌절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1968년 5월 학생 운동 당시에 미테랑은 지나치게 과잉 반응을 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은 미테랑은 드골의 대통령직에 위협을 가하면서 스스로 대통령이나 수상이 되기를 자처했으나, 그 어느 자리도 얻지 못했다.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점점 인기와 신망을 잃게 되자, 그는 드디어 드골 이래 장기 집권했던 우파를 누르고 대통령 도전 세 번째(1965, 74, 81) 만인 1981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시라크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자크 시라크(1932-현재)는 1932년 11월 29일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했다. 1954년 파리국립정치학교 졸업 후 알제리 주둔군에서 복무한 뒤, 1959년 국립행정학교를 졸업하였다. 1962∼1965년 G.퐁피두의 개인비서실장, 1967년 하원의원에 당선, 파리 시장을 지냈다. 1972∼1974년 농업장관 및 내무장관을 거쳐 1974년 후견인이던 대통령 퐁피두의 사망 후, V.지스카르 데스탱의 대통령 당선에 큰 공헌을 하고, 새 정부의 총리가 되어 1976년까지 역임하였다.

1976년 RPR(공화국연합당)이 창설되자 총재에 취임하였는데, 1977년 다시 파리 시장으로 있다가 같은 해에 상원 외교위원장이 되었다. 1981년 5월 대통령선거에서 낙선되었으나, 1986년 총선에서는 RPR이 보수 제1당이 되어, 파리 시장 재임 중 미테랑 정부의 총리에 취임하였다. 1988년 5월 대통령선거에서 미테랑에게 패배, 총리에서 물러났으나, 1995년 5월 L.조스팽과 E.발라뒤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르펜을 누르고 당선되어 프랑수아 미테랑에 이어 두 번째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2003년 3월에는 식민통치 후 40년 만에 프랑스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알제리를 공식 방문하였다. 2007년 5월에 대통령직에서 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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