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서울은 깊다

청담(靑潭) 2015. 10. 30. 10:01

 

 

서울은 깊다

               지은이 전우용

펴낸 곳 돌베개

 

 

 

들어가며

 

십여 년 전부터 서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졌다. 내 비록 김제 시골에서 태어나 익산과 전주와 군산을 오가며 60여년을 살아온 시골뜨기로서 서울에서 공부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서울에서 경제자립을 이룩한 서울사람으로 사는 복은 가지지 못했지만, 내 아들과 딸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나도 상경하면 잠잘 수 있는 누추한 아파트도 하나 있으니 이제 그만하면 족하지 않은가? 퇴임한 나에게 지나치게 많은 시간의 자유가 주어지다보니 서울의 자연과 역사와 문화를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서 서울을 더 알고 싶고 더 찾아보고 싶어지는 것 같다. 도서관에서 또 서울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줄만한 좋은 책 한권을 빌렸다. 기억하고 싶은 내용만 추려 간단하게 기록하고자 한다. 어제(10월 28일) TV에서 보니 안산이 매우 아름답다. 안산에도 올라가 보고 싶다. 내일 모래(10월 31일)면 초등학교 친구들 47명이 모여 함께 가을의 경복궁과 청계천을 거닐게 된다. 내가 10월의 마지막 밤에 고궁과 청계천에서 만나는 첫 서울모임을 추진한 것이다. 즐거운 모임이 되도록 세심하게 진행하려 한다. 

 

 

1. 신시 神市, 서울

●조선시대에도 ?서울?이라는 말은 한성부나 햔양...등의 말보다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듯하다. 조선 말기 이 땅에 들어온 외국인 선교사들이 우리말을 배우면서 공식 명칭인 한성부대신에 서울을 썼던 것은 그 때문 이었다.

●우리 역사상 공식적인 문건에 서울이 표기되는 것은 『독립신문』이 창간된 1896년 4월부터의 일이었다.

●해방 후에도 한동안 서울의 공식명칭은 여전히 경성부였고 그 행정수반은 경성부윤이었다. 경성부가 서울시로 바뀐 것은 해방 1년째 되는 날인 1946년 8월 15일이었다.

 

2. 유아독존의 수도

●성벽은 성안과 성 밖을 구분 짓는 공간적 경계선이었을 뿐 아니라, 그 안의 사람들과 밖의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해주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계선이기도 했다. ...도시는 농촌을 수탈함으로써만 문명을 생산하고 이를 성벽 안쪽에 집적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이 땅에서는 서울 외에 성장의 증거를 확보한 도시를 찾아볼 수 없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차츰 지방의 도시들도 많이 변화하고 있다. 최근 부산은 문화적으로 급속하게 서울의 종속에서 이탈하여 독립적이고 종합적인 도시 형태를 만들어가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3. 정도전의 서울, 이방원의 서울

●한강은 천혜의 방어선이었고 교통로였다. 새 수도의 촉수이자 빨판으로서 한강만큼 효율적인 것은 없었다. ..정도전이 이겼다. 그가 교조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유교적 합리성이 불교적, 풍수학적 신비주의에 승리했다. 그는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여 새 도시 공간위에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다.

●후원을 제외하고 보면 경복궁에서 궁역과 궐역은 기계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곳곳에서 궁역보다 궐역을 더 많이 배려한 흔적이 보인다.

 

4. 노는 놈, 미친 년

●중세의 서울은 세계 도시가 지닌 보편성에 비추어 본다면 무척 특이한 도시였다. 서울에는 경기장은 물론이요, 작은 극장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신전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서울은 사대부들의 도시가 되었지만 사대부는 들은 자신들이 놀고먹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노는 놈은 중이나 광대뿐이었고 미친년은 무당이나 기생뿐이었다.

 

5. 뒷골목

●한성부의 행정편제는 部-坊-里 였다. 이라는 지명과 라는 행정단위명이 함께 쓰였다. 그런데 다산이 살던 무렵에는 里가 사라져 버렸다. ...방역부과체제인 契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대한제국 때부터 주소지 표현에서 契보다는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인 주거지인 개천 이북 지대는 모두 洞으로 통일되었다.

※지금은 도시는 洞이고 시골은 里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모현동이고 낮에 찾아가는 고향마을은 상정리이다. 그러나 시골의 단위마을이름에 동명칭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 고향의 어느 한 마을 이름은 산치동이고 또 다른 이웃마을 이름은 황경동이고, 대고모 할머니가 사시던 마을은 명마동이었다.

 

6. 똥물, 똥개

●이 시대 오물의 대종은 분뇨와 재, 특히 분뇨였지만 그걸 모두 땅이 흡수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몇 가지 처리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도시 내부에 텃밭을 만들거나 농촌에 수출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물에 흘려버리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성벽 주변에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어 파묻어버리는 것이었다. ...요컨대 분뇨처리를 개천에 일임할 수는 없었다. 다른 보조적인 방법이 동원되어야 했다. 그중 하나는 텃밭이었다. 한양정도직후부터 도성 내에서 농사짓는 일은 금지되었지만 집터 안에 자그마한 텃밭을 가꾸는 일은 용인되었다. ...다른 하나는 가축에게 위임하는 것이었다.

 

 

7. 등 따습고 배부른 삶

●1753년 봄, 영조는 직접 현지조사에 나섰다. 왕은 수표교 어름에 오부방민(서울주민)을 대표할 만한 이들을 불러 모으고 그 자리에서 한 노인에게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느냐고 물었다. ...이후 1756년부터 영조 회심의 사업인 <준천>이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서울 주변의 산에서는 투장, 채석, 벌목이 모두 금지되었다. 서울의 지맥을 보호하고 왕릉 예비지를 확보하며 때로는 왕의 사냥터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서울 사람들에게 땔감은 곧 쌀이었고 옷이었다. 쌀과 옷을 때서 온기를 얻는 것이 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울 사람들에게는 쌀과 땔감이 상호 전환되는 물자였다. 오죽하면 행복한 삶을 표현하는 말이 ?등 따습고 배부른 삶?이 되었겠는가?

 

8. 땅거지

●도성 내 거지에 대한 정부차원의 대책이 처음 마련된 것은 현종대였다. 현종 11년(1670), 왕은 백성들로 하여금 거지 아이들을 거두어 길러 노비로 삼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거지 아이를 데려다 노비로 삼는 일은 전에도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불법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때에 이르러 법적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다.

●영조대의 준천은 거지들에게 큰 선물을 하나 남겼다. 개천 바닥에서 퍼 올린 흙을 오간수문(청계천에 있던 다섯 칸짜리 수문) 양쪽에 쌓아 두었는데 두 개의 산이 되었다. 이 산을 조산, 또는 가산이라 불렀다. 다리 밑을 차지하지 못한 거지들이 이 산에 땅굴을 파고 거처를 마련하였다. 그로써 <땅거지>무리가 생겨났다. ...영조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줄 심산으로 뱀을 잡아 파는 독점권을 주었다. ...땅거지를 땅꾼이라고도 했는데 그 이후로 뱀을 잡는 사람을 땅꾼이라 부르게 되었다.

 

9. 무뢰배

●무뢰배는 글자 그대로 풀면, 기댈 곳, 도는 의지할 사람이 없는 무리가 된다. ...기대어 생활할 근거가 없다는 것은 곧 恒産이 없다는 것이며, 항산이 없는 자가 恒心을 가질 수 없으니 ...조선 초기에 무뢰배로 지칭된 자들은 주로중이나 백정, 도망노비, 산간이나 절간에 숨어든 도둑떼 등이었다. 호패제가 시행된 후에는 여기에 호적에서 누락된 자가 추가되었다.

●오늘날의 조직폭력배들이 형님, 아우라는 호칭을 버리고 새로 사장이니 상무니 하는 호칭을 얻게 된 것처럼 조선 후기의 겸인(종친이나 대관들의 가신, 관리인)배 역시 말 타고 활 쏘는 대신에 치부책을 쓰는데 더 많은 정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10. 촌뜨기

●조선 후기에 들어 시골사람이 서울에 자리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졌고, 서울사람이 아주 낙향하는 일도 드물어졌다. 18세기 이후 서울이 지방으로부터 빨아들이는 재화의 양은 크게 늘어났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인재를 끌어들이는 규모는 축소되었다. ...경화귀족들이 서울로 들어오는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자기들만의 유행을 만듦에 따라 서울과 시골 사이에 시간적 장벽이 쌓여갔다. ...<내기>는 출생지를 뜻하고 <뜨기>는 출신지를 뜻한다. 경향 간에 왕래하면서 정처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 어디서 났는지 어디서 왔는지 추적할 수 없는 자들을 <뜨내기>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영조는 ?雨露는 땅을 가리지 않았는데 인재를 취하는 일에 어찌 경향을 가리는가?라고 꾸짖었고, 정조는 ?급제를 차지하는 자들은 모두 남산과 북악사이에 사는 집안 자제들뿐?인 현실을 통탄했다.

 

 

11. 압구정과 석파정

●조선시대 서울에서 과시와 은폐의 변주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건조물이 바로 누정이다. ...대관들도 강가에 정자를 지었다. 한명회가 압구정을 지었다.

●석파정은 철종 김흥근이 지은 것인데 후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우격다짐으로 빼앗았다. 김흥근이 이 정자를 팔려하지 않자 대원군은 고종을 이 정자로 불러 함께 연회를 즐겼고, 김흥근은 왕이 행차했던 곳을 신하가 쓸수 없다하여 울려 겨자 먹는 격으로 대원군에게 내주었다. ..석파정은 백악 뒤편 도성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다.

 

12. 南酒北餠

●영조 38년(1762년) 9월 17일, 임금이 친히 숭례문에 나아가 남병사 윤구연의 참형을 지켜보았다. 당당한 장수를 참형에까지 이르게 한 것은 ?금주령이 시행되는 중에 술 냄새가 나는 술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죄였다.

●우리나라에 증류주, 즉 소주의 製造法이 전래된 것은 고려 말의 일이었다. 소주를 <아라기> 도는 <아락주>라고도 했는데 이는 아라비아어 <알코올>에서 나온 말이다. 이 제법에 따라 한 되의 제대로 된 소주를 만드는 데에는 대략 같은 분향의 쌀이 소요된다. 여기에 누룩과 물, 시간과 손길이 추가되어야 하니 증류주 한 되의 가치는 쌀 한 되의 가치를 멀리 뛰어넘는다.

●18세기 이후 남주북병이란 말이 유행했다. 남촌(필동, 남산동, 주자동, 묵정동, 저동, 인의동, 회현동 등)사람들은 술 빚어 마시는 걸 즐겼고, 북촌(계동, 재동, 가회동, 안국동, 경운동, 원남동 와룡동 등)사람들은 떡을 잘 만들어 먹었다는 뜻이다.

 

13. 탕평, 땅평

●조선시대 내내 서울 북촌은 전국최고의 주거지였다. 18-19세기 노론 일당 지배체제가 별다른 동요 없이 유지되면서 북촌은 당연히 노론의 집거지가 되었다.

남촌의 진고개 언저리는 양반이되 양반 대접을 받지 못하는 남인과 무반의 주거지가 되었다.

동서 양촌에는 소론과 북인이 다수 모여 살았지만, 다른 당색의 양반관료들도 섞여 살았다.

●개천 변 양안 일대를 중촌이라 했으니 오늘날의 다동, 무교동, 수표동, 관수동, 삼각동, 입정동 등지가 이곳이다. 이 일대에는 역관, 의관, 화원 등 이른바 기술직 중인들이 모여 살았다.

 

14. 어섭쇼

●조선시대에도 나이 70이 넘으면 천민에게도 벼슬을 주었고, 도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궁궐로 불러들여 왕이 직접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런데 18-19세기 어느 시점에도 서울말에서 존비법이 균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시오?와 ?하십시오?의 중간쯤에 자리 잡은 얼버무림형 존대, ?합쇼?가 서울 특유의 방언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른 바 깝쇼체이다. ...택시기사는 ?어섭쇼, 어디로 모실깝쇼?, 음식점 점원은 ?어섭쇼, 뭘 드릴깝쇼?, 남대문 시장 주인은 ?어섭쇼, 골라봅쇼?로 흥정을 걸었다.

 

15. 복수의 하나님

●우리나라의 무덤이 山所가 된 것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의 일이었다. 고구려 사람들과 백제 사람들은 죽은 자의 공간과 산 자의 공간을 후대 사람들과는 달리 보았다. 그들은 죽은 자를 평지에 묻었고, 집은 산위에 지었다. 유목과 수렵을 중시하던 사람들, 잦은 전쟁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이 보는 공간은 그렇게 달랐다. 그러나 광활한 경작지가 중요성을 더 해가면서 마침내 산 자들은 평지로 내려오고 죽은 자를 산속으로 내몰았다.

명동성당이 경복궁을 겨눈 쇠뇌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당시에는 적었고 지금은 더더욱 없다.

 

16. 종로, 전차

●주지하다시피 현재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은 <노인의 공간>이며, 이 두 지점을 잇는 길은 <노인의 거리>가 되어 있다. 노인들이 탑골공원을 거점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 부터였다. ...1960년대까지도 보신각 주위의 <종로 네거리>는 한국은해 앞 광장과 더불어 당당한 양대 도심이었다.

●서울의 한 복판인 종로를 관통하여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이어지는 전차 궤도부설공사는 1898년 10월 17일부터 12월 25일에 결쳐 진행되었다.

 

17. 덕수궁 돌담길

주부들은 서너 평짜리 공간을 꾸미면서도 가구의 배치, 벽지나 커튼의 색깔과 재질, 바닥재의 종류 등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녀는 깔끔하거나 클래식하거나 모던하거나 심플한 분위기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고, 그를 통해 자신의 교양과 품성, 덕목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뿐 아니라 그공간ㅇ 같이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분위기에 맞추라고 요구한다. 아니 그럴 필요조차 없다. ?분위기 하나 제대로 못 맞춘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황도, 새로운 황궁을 구상했다. 경운궁 수리 공사는 독립협회가 대대적인 환궁운동을 벌이기 전인 1896년 7월부터 시작되었다. 이 공사가 반년여 만에 얼추 마무리 되자 고종은 경복궁을 아예 버려두고 이곳으로 이어했다. ...경운궁이 옹색하나마 황궁다운 면모를 갖추자 고종은 연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하는 새 나라를 출범시켰다.

 

18. 팔각정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원과 팔각 사용에 대한 금제도 풀렸다. 원구단(천단, 곧 천자가 하늘과 직접 소통하는 장소)과 황궁우(천신, 지신, 인신인 태조의 신위를 모신 곳)는 대한제국이 천자국임을 상징하는 건조물이었고, 이 두 건물이 들어선 장소는 이 나라에서 가장 존엄하고 신성한 곳이었다. ...나아가 전국 도처에 ?신성한 아우라?가 완전히 소멸된 팔각 정자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제 팔각정들에게서 ?神聖?을 느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19. 시계탑

●2005년 초에 <학교종>을 작사 작곡한 김메리가 100살 넘게 살다가 미국에서 작고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우리나라에 자명종이라는 이름의 기계식 시계가 처음 들어온 것은 1631년의 일이었다.

※우리 집에는 아주 내가 어릴 때부터 안방에 시계가 있었으나, 나내 손목시계를 소유하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아버지가 선물로 중고시계를 사주였는데 예쁘기는 했지만 그리 잘 맞지는 않았다.

●1900년 경 한강에서 인천까지 증기범선이 왕래하였다. 대한제국시기에는 대한협동우선회사 소속선 등 연안해운선뿐 만 아니라 강운과 해운을 겸하는 배들도 정기적으로 운행했다.

●이 땅에 최초로 기계식 시계를 설치한 건조물(시계탑)로 추정되는 것은 1888년 경복궁내에 신축된 관문각 옆의 시계탑이다. ...이윽고 시계는 도시 곳곳이 공공시설이나 벽면이나 별도의 시계탑에 속속 내걸리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최초로 밖에 시계를 걸은 것은 바로 한 달 전의 일이다. 2015년 9월 말에 시골집에 예쁜 빨강색 방수시계를 구입하여 걸어 놓았다. 순전히 집을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20. 제중원

●병을 가리키는 순 우리말로 ??이 있다. ?탈?은 가면을 뜻하기도 한다. 신라 사람들이 만들어 썼다고 하는 처용탈은 역신을 쫒는 구실을 했다. ?탈?이 사고 또는 고장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것으로 보아 ?탈 나는 것?은 본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탈 쓰는 것?은 본래의 모습을 감추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태조 6년(1397)에 설치된 재생원은 처음에는 의학서적 편찬을 맡았으나 태종 5년(1405), 연고 없는 환자를 수용하는 시설로 바뀌었다.

●1885년 2월에 개원한 광혜원은 불과 2주 만에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일반적으로 제중원은 앨런이 고종의 윤허로 설립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게 아니다. 광혜원(제중원)은 앨런의 건의를 받은 고종의 지시에 따라 통리기무아문에서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이다.

 

21. 촬영국

●이 땅과 이 땅위의 사람들 모습을 담은 최초의 사진 기록은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인들이 찍은 것이다. 그 탓에 처음 사진으로 모습을 남긴 한국인은 포로와 시체들이었다.

●1883년 한성순보는 시내에 촬영국이라는 기관이 있다고 보도했는데, 이 이것이 이 땅 최초의 사진관이었다. ...1884년에는 지운영이 일본에서 사진기술을 배워 와서는 고종의 어진을 찍었다. ...1895년, 역시 화가였던 김규진이 일본에서 사진 기술을 배워 와서는 소공동에 천연당사진관을 열었다.

※어느 사이엔지 카메라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결혼한 다음해인 1982년 난생 처음으로 중급인 일제 『야시카』카메라를 샀다. 우리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담았다. 1997년에는 보다 휴대가 간편하면서도 성능이 우수한 삼성자동카메라를 구입하였다. 이 카메라로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많이 찍었다. 2005년경에는 삼성디지털카메라를 구입하였다. 필름이 필요 없고 아주 작아서 해외여행 시 아주 편리한 카메라가 나온 것이다. 2009년에 삼성에서 스마트 폰인 갤럭시를 출시했는데 나는 다음해인 2010년에 구입하였다. 화소가 낮아 카메라 기능이 우수하지 않았지만 해외여행 시 카메라를 별도로 준비할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2014년 말 구입한 최신형 갤럭시 옛지는 카메라보다도 더 성능이 우수하니 카메라는 우리에게서 아예 사라져 버렸다.

 

 

22. 파리국

유리는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생산해 왔다. 신라고분에서도 유리로 만든 구슬은 흔히 출토된다. 조선시대에도 유리 세공을 업으로 하는 장인(匠人)들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경국대전 사전에는 유리장(琉璃匠)에 관한 조항이 없다.

●1880년 다소 느닷없이 김용원(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사진기술을 배운 사람)이 부산에 유리제조소를 설치하기 위해 일본인 기술자를 불러왔다. ...1883년, 파리국(玻璃局)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관서가 통리기무아문 산하에 만들어졌고 방판(幇判)에 박제순이 임명되었다.

 

23. 도깨비 시장, 돗떼기 시장

●도시 한구석에 정연하게 정비된 상업구역을 라하고, 행상이 몰려들어 교역하고 물러가는 곳을 이라 한다. ...오늘날의 도시 재래시장은 시와 장이 결합해 있으나 장보다는 시의 특징이 지배적인 것들이다. ...그래서 이름이 시장이다. ...반면 농촌에서 열리는 정기시는 시장이라는 이름보다는 장시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더 일반적으로 불린다. 5일 간격으로 정기시가 열리는 날을 장날이라 하며 장이 열리는 공간을 장터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내가 어렸을 적 살던 서울 변두리 동네에도 언덕위에 도깨비시장이 있었는데 ...세월이 한참 지나서, 그 시장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도깨비시장이 무허가 시장으로, 단속반이 뜨면 씻을 듯 자취를 감추었다가 단속반이 지나가면 다시 생기는 시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남대문 밖의 칠패와 동대문 안쪽의 이현이 난장판이 된 것은 18세기부터였다. 19세기에는 서소문 밖에도 난장판이 하나 더 생겼다. 이 무렵에는 본래 시전가였던 종루 앞거리에 이현과 칠패를 더하여 도성삼대시라 하였는데 그탓에 18-19세기에 서울에는 세 개의 시장만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시라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소시나 중시가 있고 난 다음에야 대시가 있는 법이나 이들 말고도 분명 여러 시장이 있었을 터이다.

●1987년 1월, 이 나라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이자 중앙시장이 이 자리에서 문을 열었다. 오늘날 서울 재래시장의 원조이자 대표 격인 남대문시장이 출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은 광장시장이라고 알고 있다. ...남대문 시장 상인들조차 거개는 자기들 시장이 가장 역사가 오래된 시장임을 모르고 있다.

선혜청 창내장(남대문 시장)은 소매시장인 동시에 속칭 돗떼기 시장, 즉, 돗자리에 물건을 떼어가는 도매시장이기도 했다. 번잡하고 시끄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곳을 돗떼기 시장 같다고 하는데, 상품이 돗자리채로 팔리다보니 조금이라도 좋은 가격에 빨리 사고팔려는 사람들로 북적대었기에 나온 말이다.

 

24. 물장수

●서울 재 천도를 단행 한 직후 태종은 다섯 집에 한 곳씩 우물을 파도록 했다. 이 지시가 그대로 이행되었다면 서울에는 2,000~3,000개의 우물이 있었을 것이다.

●私家뿐 만 아니라 관청에서도 노비의 기본 임무는 나무하고 물 긷는 일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나 말기 어느 시점에선가 물 길어다 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한 무리의 남자 운반 노동자, 속칭 물장수 또는 水商이 출현했다.

●개항이후 얼마 되지 않아 물장수들로서는 본의 아니게 물통 규격을 통일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개항 직후부터 미국산 석유가 수입되기 시작했는데 ...이 석유 깡통에 최초로 접근한 사람들이 바로 물장수들이었다. 양철 석유통은 그때까지 물장수들이 쓰던 나무통보다 가벼운데다가 물이 새지도 않았으며 수명이 길었고 규격 또한 일정했다.

●세간에 오랫동안 전해온 이야기 중에 북청물장수에 관한 것이 있다. 서울 물장수의 태반이 북청 출신이었고, 그들이 남달리 근면하고 성실해서 대개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인데 어떤 이는 물장수가 처음 출현할 때부터 북청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까지 주장한다.

※20세기 말 우리가 자랄 때 ?서양 사람들은 물을 사먹는다?는 말에 적이 놀랐다. 우리는 마을 우물에서 맛있는 물을 마음껏 퍼 마시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세기가 되면서 선진국이 된 우리도 물을 사먹는다. 수돗물이 깨끗하고 잠간 받아놓으면 맛도 괜찮은데도, 직장에서는 물장수가 배달해주는 물을 정수기에 담아 받아먹거나 아니면 수돗물을 정수기에 연결하여 받아먹는다. 가정에서도 정수기를 이용하거나 수퍼에서 미리 물을 사다 놓고 먹고 있고, 여행시에는 판매용 물을 준비하는 일이 필수가 되었다. 우리 집에서도 오랫동안 정수기를 이용하다가 작년에 이 아파트로 이사해온 이후로는 《삼다수》를 사다 먹는다. 우리 양드리가 가장 맛이 좋다하니 비싸지만 어쩌랴? 나는 삼다수를 미리 미리 사다 놓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삼다수가 떨어질라치면 호통치는 양드리가 꽤나 무섭기 때문이다.

 

25. 복덕방

●福德房이라는 말의 유래는 확실치 않다. 堂祭나 洞祭를 지낸 뒤 망르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던 방을 복덕방이라 했고, ...가옥 매매를 중개하는 업소 명칭을 복덕방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복덕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地福과 隣德을 알선해주는 업소다. 그래서 복덕방 주인은 풍수쟁이를 겸해야 했고, 동네 사정도 꿰뚫어야 했다. ...그러고 보면 복덕방 영감이 갖추어야 했던 자질과 능력은 오늘날의 공인중개사에게 요구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도 총체적이었던 셈이다.

※오늘날 공인중개사라는 직업은 크게 개방되었다. 퇴직자들 뿐 만 아니라 주부들과 젊은이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자격증 시험에 대한 관심이 높다. 자격증이 남발되어 경쟁이 치열하다고도 하고 부동산 경기가 없을 때면 영업이 거의 안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관심도는 높은 것 같다. 나의 외삼촌 중 두 분이나 공인중개업을 하시고, 은행 지점장을 지낸 어느 친구도 서울에서 개업하여 일하고 있다. 작년에는 시청 과장으로 퇴직한 어느 친구도 익산에서 개업하였다. 나는 전혀 관심이 없는 직업이다.

 

 

26. 협률사

●조선 후기 도성 주변에서 행해진 대표적 演戱로 <송파산대놀이>와 <양주 별산대놀이>라는 것이 있다. 이 두 놀이는 조선후기 서울로 들어오는 행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송파장과 다락원장의 치열한 경쟁을 반영한 성이기도한데, 여기서 산대라는 것은 본래 궁궐에 임시로 가설한 무대를 말한다. 대궐마당에 놀이판을 벌이면 내전 깊숙한 곳에 정좌한 왕이나 왕후, 대비같은 높으신 분들은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계단 밑에 시립한 禁軍이나 액례(掖隷) 따위와 같은 높이에서 구경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서울에 상설무대가 있는 건물, 그래서 사람들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가서는 돈을 내고 들어가 벌서듯이 앉아 있어야 하는 극장이 처음 생겨난 것은 1895년경의 일이었다. ...1897년, 일본의 거류지 내 가건물에서 최초의 화롱사진이 상영되기도 했지만, 이 일이 미친 파장은 크지 않았다.

●1902년,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칭경(稱慶) 예식을 치르기 위해 전국 각처의 재주꾼을 끌어 모아 協律社라는 단체를 만들었을 때쯤에는 공연에 대한 수요는 이미 넘쳐나고 있었다. ...1906년 일시 폐쇄되었던 협률사극장은 1908년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했고, 이보다 앞서 1907년에는 협률사에 모여 있던 재인들과 또 다른 재인들이 광무대, 단성사, 연흥사 등을 만들었다.

 

27. 와룡묘

●화폐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초상화가 그려졌거나 彫像이 만들어진 인물은 누구일까? ...아마도16억 인구가 좋아하는 사람, 운장 관우가 아닐까 싶다.

...관우가 죽은 직후 동오의 여러 장수가 잇따라 급사했고 형주 땅에는 물난리가 나고 뒤이어 역질이 창궐했다. 이 모든 것이 관우 귀신의 탓이라고 믿은 형주 사람들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관우숭배의 시작이었다.

●군신 관우가 다시 부활한 것은 명나라 말의 일이었다. 임진왜란이 그 계기였다. ...조선에 출병하는 군사들은 먼저 관우묘에 찾아가서 옛날 관흥을 구했던 것처럼 자신을 적의 총칼로부터 구해달라고 빌었다. ...후금 군사들과 싸울 때도 명나라군사들은 관제묘에 나아가 승전을 기원했다.

군신 관우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 출병한 명나라 군사들의 뒤를 따라서였다. 선조 31년(1598)명의 유격 진인은 자신이 주둔하고 있던 남산 기슭에 관왕묘를 세웠다. 이른바 남관왕묘가 세워진 것이다. 다른 명나라 장수들도 이 역사에 돈을 대었으니 천자의 군대로부터 구원을 받은 조선 왕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선조는 결국 관왕묘에 참배했고 이듬해에는 다시 동대문 밖에 새 관왕묘(동묘)를 하나 더 짓기까지 했다.

●1883년, 서울 북문(혜화문)밖에 느닷없이 관왕묘가 하나 더 생겼다. 이름하여 북묘인데 여기에 들어온 관우 귀신은 군신도 재신도 아닌 만사형통신, 말하자면 잡신이었다.

●1902년에 세워진 숭의문보다 먼저인지 나중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남산 중턱 골짜기 안에 와룡묘라는 작은 사당이 하나 더 만들어졌다.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이 사당은 와룡선생, 즉 제갈량을 주신으로 모신 사당이다.

 

28. 덕수궁 분수대

●1900년 영국인 건축기사 하딩의 설계에 따라 착공되었던 석조전이 완공된 것은 1910년이었다. 공사 중에, 정확하게는 경운궁 화재(1904) 뒤인 1906년에 석조전 앞의 정원이 유럽식 침강원(땅을 파서 만든 정원)으로 조성되었다. 침강원 역시 하딩이 설계했는지는 불분명하나 공사는 일본 건축회사 오쿠라조가 담당했다. 이 침강원 안에 분수대가 설치된 것은 덕수궁이 공원으로 개방된 뒤의 일이었다.

●고종이 죽은 지 14년 뒤인 1933년, 덕수궁은 공원이 되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석조전 옆에 비슷한 건물이 또 하나 들어섰고 1937년에는 침강원 한복판에 분수대가 가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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