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가족
아파트 키드의 가족이야기
박재현․김영재 엮음 출판 마티
프롤로그 : 나의 주거사
1981년에 결혼하고 근무지인 고창의 무장면소재지에 방 두 개짜리 슬레이트 시골집을 사글세(연 25만원)로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요즈음과는 전혀 달리 당시의 초임교사들의 가정은 대부분 어려웠기 때문에 일체 부모의 도움 없이 다들 그렇게 시작했다. 1984년부터 2년간은 고창읍내 구식 양옥집의 큰 방 하나를 얻어 아이들과 할머니까지 함께 살았다. 1986년에 비로소 1년간 연립에서 살았는데 새로 지은 20평형을 전세로 얻었고 아파트와 다름 없어 편리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다음해인 1987년에 익산의 신동아파트로 이사했는데 1982년에 주공에서 지은 16평형 국민주택이었다. 600만 원으로 구입한 방이 두 개인 작은 아파트지만 난생 처음으로 값비싼 응접세트를 들여놓고 마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듯한 행복감에 도취되었다.
내가 자란 시골집은 초가였지만(1970년대 새마을 운동 때 기와집으로 변신) 규모가 커서 내가 느끼기에도 마치 부잣집 같았으나 나는 그 불편한 한옥 구조가 그렇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1977년 이리역폭발사건으로 말미암아 다음 해인 1978년에 피해자들을 위한 모현아파트가 들어섰고 이듬 해 어느 날 나는 친구를 따라 우연히 13평짜리 모현아파트를 방문하게 된다. 비록 손바닥만 한 현관에 작은 싱크대가 있는 주방, 특히 처음 사용해 보는 신기한 좌변기가 있는 화장실에 매료된 나는 당장부터 아파트를 동경하게 되고 말았다.
실로 우리세대의 가정경제는 오로지 철저하게 미래를 위한 저축과 자식 교육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다. 1991년에는 새로 지은 삼성아파트 32평 맨션으로 진출했다. 비로소 신분이 상승된 느낌, 서민을 벗어나 마치 중산층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었다. 사실 32평 맨션에 자가용차를 굴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2006년에는 리모델링을 하여 더 만족스런 집을 만들어 살았다.
퇴직을 앞두고 2014년 작년 가을 지금 살고 있는 모현동 오투그란데 34평(확장형)으로 이사했다. 삼성아파트는 23년이나 된 낡은 아파트라서 겨우 구입가격의 두 배 조금 넘는 가격에 매도했는데, 서울에서는 15평짜리 반지하 전세금도 안되는 가격임에도 다주택자라하여 양도소득세만 크게 물었다. 40평형도 고려했으나 과감히 무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지금 살면서 34평에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이다. 둘이 살기에 딱이다. 오랫동안 아파트 평수로 신분을 가늠하기도 하더니만 요즈음 대형평수는 천덕꾸러기 신세다. 그 대신 34형과 40평의 가격차인 5천만이 채 안 되는 돈으로 시골 고향집에 소형 조립식 전원주택을 지었다. 내가 생각해도 엄청 합리적이고 현명한 선택! 오전은 고향집 전원주택에서 보내는 노후를 꿈꾸어 왔었고, 그것은 합리적 사고와 현명한 선택을 통해 쉽게 실현되었다. 이처럼 사는 집에 대한 걱정을 크게 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파트 가격이 서울에 비해 현저히 저렴(마포 아현지구 대비 30%)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사는 신축아파트에는 신혼부부가 많이 입주했고 유치원과 초등학생이 많은 것이 크게 눈에 띌 정도이다.
우리 부부가 베이비 붐 세대와 다름없고, 우리 자식들은 에코세대이기에 우리 가족은 이 책에 글을 쓴 주인공 그리고 그 가족들과 같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삶의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책에서 15명의 젊은이들이 부모님들과 자신들의 주거사까지 허심탄회하게, 그리고 자세하게도 잘 그리고 있다. 실감이 나는 이야기들이면서 기억해 둘만한 내용도 많았다. 중요한 내용만 뽑아 적어본다.
기획의 글
●흥미로운 것은 입주 이후였다. 그들 상당수는<근로소득자>로서의 정체성을 청산하고 아파트 시세 상승이 가져다 준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중산층 소비자>의 일상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시기의 아파트는 중산층 위주로 물질적 부를 분배하는 사회적 시스템이나 다름없었다.
●베이비 붐 세대(1955년생~1963년생)는 부모 공양과 자녀교육에 상당한 비용을 지출한 터라 제대로 된 노후생활을 준비하지 못했다. 게다가 가계 부채마저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돌이켜보면 이 세대의 당사자들에게는 자신의 운명이 기구하게 느껴질 법도 했다. 그들은 10% 초반대의 대학 졸업자들을 배출하면서 정부의 산업화정책이 추동한 <이촌향도>의 흐름을 양적으로 주도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오일쇼크라는 경제위기와 유신정권의 긴급조치라는 정치적 압력 속에서 고개를 숙인 채 20대의 청춘을 소진할 수밖에 없었고, 87민주화 항쟁과 그에 뒤이은 노동자대투쟁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제 목소리를 드높일 수 있었다. 특히나 <머릿수만 많은 낀 세대>의 운명은 90년대 후반 이후 악화일로였다. 1997년이 되어 IMF 외환위기에는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2008년 미국 금융위기에는 은퇴를 코앞에 둔 하우스 푸어로, 두 차례의 경제위기에서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에코 세대(1979년생~1992년생)는 베이비 붐 세대의 자녀세대라는 의미를 명시적으로 드러내면서 비관적인 미래 전망의 대명사(반항 세대)로 급부상했다. 사실 이 이름으로 호명된 상당수는 생애주기에 따라 이해찬 세대, 트라우마 세대, 88만원 세대 등 각기 다른 명칭으로 불렸다. 그리고 1990년대 초중반 이후 산업화된 사교육 시스템을 경유해 70~80%대의 높은 진학률로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기업화되기 시작한 대학교육제도 안에서 별다른 자율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교육소비자로 처신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취업의 비좁은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자기계발과 스펙경쟁에 몰두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들의 청춘은 적자생존의 현실원리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했다. ...1·2인 가구의 증가, 삼포세대(연애포기 결혼포기 출산포기)라는 별칭의 등장, 저출산 기조의 지속 등은 이제 30대에 접어들기 시작한 이 세대의 구성원들이 저성장, 고령화 시대의 문턱을 어떻게 넘어서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일 것이다.
...이 책은 에코세대의 개인들이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공간을 마련해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기획되었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2012년 11월부터 2014년 7월까지 한겨레신문이 발행하는 교양월간지<나-들>에 ?아파트키드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것이다.
본문중에서
●21쪽
어머니는 우리는 큰돈을 벌 운명이 아니라면서 스스로 입장을 정리 하였다. 가난이 무서워 가난의 반대편으로 열심히 달렸으나 그리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가난에 붙들리지도 않았다. 검소하게 살고 꾸준히 저축하여 이루어 낸 삶에 빚의 그림자는 없었다. 여전히 나의 부모님에게는 아파트 한 채가 온전히 남아 있고 저축도 있다. 큰 수익을 거둘 수 있었던 기회를 여러 차례 놓치고 나자 그 동안 날린 기회가 앗아간 돈이 얼마인지 세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오지 않을 불행을 미리 걱정하는 것이 부질없듯이 놓쳐 버린 행운을 손해로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다 생각한다.
●1차 가족계획 : 베이비 붐 세대(61세~53세)
○베이비 붐 세대(Baby Boomer)는 1955년에서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인구집단을 가리킨다. 베이비 붐 세대는 자연출산율에 가까운 합계출산율 6.0명을 기록하던 1960년을 전후한 기간에 걸쳐, 그리고 가족계획, 달리 말하면 산아제한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한 1964년을 맞기 전에 태어났다. 베이비 붐 세대는 국가가 본격적으로 경제 개발과 출산에 개입하기 전에 태어난 셈이다. 초기의 경제개발계획이 시행되던 시기에 유년시절을 보낸 베이비 붐 세대는 자연스럽게 본격적인 산업화와 도시화를 이끈 세대가 되었다. 베이비 붐 세대는 농촌을 벗어나 도시로, 특히 서울과 수도권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산업에 종사하고 도시에서 가정을 꾸렸으며 산아제한정책을 완성하여 4인가구를 만들었다.
○1960년 한국의 도시지역 인구비율은 27.71%였는데 ...1971년에 이르면 42.17%가 된다. 1977년에는 51.51% ...
○합계출산율은 1960년에 자연출산율 수준인 6.0명에서 1966년 5.4명으로 줄더니 1970년에는 4.71명, 1983년에는 2.06명이 되어 인구 대체수준까지 떨어졌다. ...1990년이 되자 1.6명으로 떨어졌다. 인구 억제 정책은 1996년에 폐지되었다. ...가족계획사업의 목표였던 도시의 4인 핵가족이 정착한 시기는 도시로 이주한 베이비 붐 세대의 결혼 및 출산시기와 정확히 겹쳐진다. ...베이비 붐 세대의 세대는 자녀 두 명을 가진 비율이 63.9%이고 한 명이 15.5%, 세 명은 15.2%이다. (80%가 두 자녀 이하이다)
○요컨대 베이비 붐 세대의 교육받은 장남이란 농업을 주업으로 삼는 가계의 자산인 농지 등에서 전환된 인적 자본으로 정의할 수 있다. 2010년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베이비 붐 세대는 현재 약 659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4.5%를 차지한다. 현재 베이비 붐 세대의 학력은 고졸이 311만 명(44.7%)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중졸은 17.3%, 대졸은 15.8%이다.
○대졸 베이비 붐 세대는 비교적 좋은 기업에 어려움 없이 취직할 수 있었던 반면, 그들을 뒷바라지 했던 배우지 못한 형제들은 소규모 공장에 취직하거나 낮은 임금을 꾸준히 모아 자영업에 투신했다. 외환위기 이후 기존 중산층의 운명이 엇갈리면서 계층이 분화되기 시작할 즈음 터져 나온 사회양극화문제는 이미 베이비 붐 세대가 사회에 진출할 당시부터 엄연한 현실로 존재했다.
○내 자녀의 미래는 내가 얼마나 자녀 교육에 투자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가족계획은 도시 가계의 재생산 전략에 부합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베이비 붐 세대의 4인 가족은 이렇게 탄생했다.
○경제성장과 함께 중산층의 삶의 형태가 새로운 표준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가족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구체적인 가족의 미래는 저축을 통해 표현될 수 있었다. 자녀교육 그리고 자녀의 독립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이어질 가족의 생애 주기에 대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목돈이었기 때문이다. ...1976년 3월, 재형저축이 첫 선을 보였다.
○가계순저축률은 1975년부터 1980년대까지 추세적으로 상승했고 1990년대 내내 20% 이상을 기록했다. 1988년에는 최고점인 24,7%를 기록했다.
○저축과 주택문제 사이에 전세가 있었다. 당장 집을 살 수 없는 입장에서 전세는 중요한 교두보였다. 시골에서 상경하고 가정을 꾸리는 베이비 붐 세대는 대개 사글세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그 이후에 약간의 보증금을 모아 월세방을 구했다. 그리고 전세를 얻어 매달 월세로 지출하는 비용을 절약한 다음에야 다시 저축에 매진할 수 있었다. 전세를 얻는 과정도 저축, 전세에서 내 집 마련으로 가는 과정 역시 저축에 달려 있었다. 전세는 살림의 커다란 분기점이었다. 전세를 얻은 후에는 가계도 안정을 찾고 자녀의 교육과 내 집 마련을 위한 저축계획을 세울 여력을 얻었다.
○2014년 통계로 베이비 붐 세대로서 자산 5분위에 속하면서 소득 5분위에 속하는 사람은 평균적으로 경상소득 1억 3,093만원, 총자산 12억 3345만원(순자산 10억 661만원 + 부채 2억 2684만원)이다.
●2차 가족계획 : 에코 세대(37세~24세)
○에코 세대(Echo Boomer)는 베이비 붐 세대의 자녀들이다. 베이비 붐 세대 여성을 모친으로 가진 비율이 가장 높은 연령대인 1979년부터 1992년 사이에 태어난 인구 집단이다.
○1997년 12월 3일 터진 외환위기는 베이비 붐 세대 가계의 미래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사건이 되었다. 부채 위기로 인해 주택가격이 폭락했으며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베이비 붐 세대 가장들이 회사에서 잘려 나갔다. ...외환위기 직후 21.6%에 달하던 가계저축률은 이후 급락하여 2010년 2.6%에 이르렀다. 같은 기간 예금 수신금리는 13.30%에서 3.19%로 떨어졌다. (2015년 가계저축률은 4.5%, 예금 수신금리는 1.7%이다.)
○1998년 서울의 전세가격은 22.6% 하락했다. 같은 해 주택가격이 13.2% 하락한 것에 비하면 그 폭이 더욱 컸다.
○정부는 1999년 전면적 분양가 자율화를 시행했다.
○토지공개념 3법 중 택지소유상한제도는 1998년 9월 폐지되었다. ...청약재당첨 금지가 폐지되었다.
○1999년부터 반등하기 시작한 주택가격은 2001~2002년에 폭등했다. ...가격상승은 재건축 아파트가 주도했다. ...2008년 (미국의)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이후 주택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2000년에 2억 원 초반을 호가하던 강남 은마아파트 30평형대의 가격은 2007년 정점에서 10억 원을 넘었고 2010년에는 9억 원 근처에서 가격이 형성되었다.
○베이비 붐 세대가 자녀를 중산층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곧 바로 중산층에 진입할 수 있을 만큼의 자산을 물려주거나 장래에 중산층에 진입할 수 있을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4년제 대학정원은 1980년 40여만 명, 1990년 104만 명, 1998년에 147만 명, 2011년에는 206만 명이며, 2년제까지 합하면 284만 명이다.
○사교육 시장의 성장을 주도한 것이 베이비 붐 세대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1979년생부터 1992년생의 학창시절은 사교육 시장의 성장기와 겹친다. 베이비 붐 세대가 에코 세대의 미래를 위해 준비한 것이 교육이라는 점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에코 세대 990만 명중 220만 명만이 월 소득 200만 원 이상을 번다.
○대부분의 베이비 붐 세대는 자녀에게 물려줄 재산을 헤아리기는커녕 자신의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에코세대의 미래 예상
결혼과 함께 독립을 한다고 가정하면 다음과 같은 일을 예상할 수 있다. 먼저 자녀를 낳아 가족의 규모가 늘어나면서 주택을 구입하거나 더 넓은 집을 전세 등으로 임차하면서 주택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부족한 자금을 대출로 충당하면서 소득의 일정부분을 대출 상환에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자녀교육이 시작된다.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교육을 배제하고 자녀의 교육계획을 세우기 어렵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게다가 부모인 베이비 붐 세대의 소득이 크게 줄거나 사라지면서 에코 세대가 노후의 일정 부분을 책임질 시기가 돌아온다. 이 부담의 정도를 가늠하기 위해서 자신과 배우자의 현재 부모가 가진 재산과 소득의 지속 가능성, 그리고 자신과 배우자의 소득수준과 직장의 전망을 기준으로 삼게 된다.
●257쪽
안정적 직장을 가진 부모가 사회에 나서는 자식들에게 전세 등을 통하여 일정 부분의 부를 양도하고, 자식은 양도받은 부를 이용하여 조금 빨리 자산을 축적하고 집을 마련하는 방식, 이 모델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 같다. 부동산이 현재의 모습과 같이 유지된다면 내가 자식들에게 집을 구해줄 방법이 없을 것이고 부동산 시장이 변화한다면 부모의 도움 없이도 내 자식들이 스스로 집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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