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출판 푸른역사
1. 수만 백성 살린 이름 없는 명의들
●內醫院은 임금의 약을 조제하는 기관으로 일반백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典醫監이라하여 대궐 내에 필요한 약재를 공급하거나 약재의 하사를 관장하는 곳이 있었으나 역시 왕실에 속한 의약기관이다.
惠民署는 서민의 질병을 구료하는 기관이요, 活人署는 주로 무의탁 병자를 수용하고 전염병이 돌때 임시로 병막을 지어 환자의 간호를 담당했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이런 기관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는 이런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종기가 나는 경우가 드물고 병 취급도 하지 않지만, 해방 전까지만 해도 종기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큰 병이었다....효종과 정조는 종기로 목숨을 잃었다.
※1977년 6월 경, 나는 토요일부터 고열과 몸살로 화장실에 갈 기운조차 없이 아팠다. 심한 몸살로만 알고 약을 지어다 먹었으나 차도가 없어 토요일과 일요일을 심학 앓다가 월요일에 겨우 겨우 기다시피 하여 정류장까지 걸어서 익산의 강외과에 갔다. 지인이신 원장님이 나를 팬티만 입힌 채 침대에 눕게 한 뒤 이리 저리 살피시더니 내 오른 발 허벅지에서 종기를 찾아내셨다. 약간 붉은 색이 보이는 정도였는데 칼로 자르니 종기가 크게 자리잡고 있었고 고름이 엄청 나왔다. 현대의학이 아니었으면, 강외과 원장님처럼 명의가 아니었으면, 아니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도 못했더라면... 지금은 병으로 치지도 않는 하찮은 종기로도 수많은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의학이 아닌 서양의 현대 의학이 발달하고, 특히 우리나라의 의료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 데다, 세계 최고의 의료보험제도가 정착된 대한민국에서 사는 우리는 정말 행복한 나라 사람들이다. 담박에 2014년 통계로 기대 수명이 82.4세로(남성은 79세로 세계 17위, 여성은 85.5.세로 세계 4위라고 한다.)65세는 마치 노인도 아닌 듯 여겨지고 우리의 기대수명은 백세가 되었다. 엄청난 변화의 시대에 태어나 아직까지 건강을 잘 누리는 나는 대한민국 국민임에 항상 감사하다.
●정조 23년(1799년)에 전염병이 돌았는데 이해 사망자는 모두 12만 8천여 명이었다. ...1821년에서 1822년 사이에 유행했던 콜레라로 인해 평양에서 수 만 명, 서울에서 13만 명이 사망했으며 전국적으로 수십 만 명이 사망했다. 1859년에서 1860년에도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때 사망자는 40만 명이었다.
2. 모이면 도둑이 되고 흩어지면 백성이 된다
●一枝梅는 잡히지 않는다. 완벽하다. 게다가 매화꽃을 남겨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했다니 멋있지 않은가? ...일지매와 같은 유형으로 我來賊이 있다. 내가 왔다 간다는 我來라는 글자를 적어 놓았다고 한다.
3. 투전 노름에 날 새는 줄 몰랐다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지방관들이 도박에 탐닉하는 것을 경계하며 말한다.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것은 바둑, 장기, 쌍륙, 투패(투전), 강패(골패), 척사(윷)이다.
●조선 후기 도박계의 패권을 차지한 것은 투전이다. 조선 후기는 물론 19세기 말 화투가 들어오기 전까지 도박계를 완전히 석권했고 화투가 수입되자 그 놀음방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국가는 오로지 도박을 독점하기 위하여 자신이 허락한 도박 외에는 모두 금지한다. ...고스톱은 금지하지만 복권과 경마는 장려한다. 특히 경마는 레저란 이름으로 권장한다. 복권은 체제에 의해 합법화된 도박의 전형이다. 증권역시 나라에서 권장하는 도박에 다름 아니다. 증권을 일컬어 자본주의의 꽃이라 하지만 그 꽃은 흉측한 데다 악취를 풍긴다.
※최근에 삼성 라이온스 팀의 선수 세 명이 마카오 카지노에 원정도박을 다녀 온 것이 드러나서 모두 코리안 시리즈에 참가하지 못했다. 2003년에 개장된 국내 유일의 공식 카지노인 정선의 강원랜드에는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아주 많다고 한다. 오늘날 하루 입장객이 7,000여명이 넘는다니 마치 다른 나라에서 빚어지는 일 같다. 국가에서 공인하는 도박장이라고는 하지만 놀라운 일이다.
어렸을 적 초등학생과 중학생들 사이에는 쌈치기가 유행했다. 지금은 어느 회사의 부사장 직위에 있는 어느 중학교 동창은 별명이 『쌈치기』가 되어 지금도 놀리는 친구들이 간혹 있다. 본인은 그런 별명으로 불리어지는 것을 아주 크게 싫어하고 있다. 나는 쌈치기에 낀 적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선천적으로 도박성이 거의 없는데, 남성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나 자신 스스로 생각해도 크게 매력이 있는 일은 아니다.
어떤 집에서는 겨울밤이면 가족들이 화투놀이를 즐기기도 하는데 우리 집은 가족들이 화투놀이에 별 관심이 없었다. 가끔 민화투를 치는 정도였다. 나는 겨울밤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민화투나 나이롱 뽕, 육백 또는 버티기를 해서 먹을 것 내기, 극장가기 등 가벼운 내기 등은 자주 했지만 그런 놀음들은 결국 돈을 합해 공동으로 먹을 것을 사다 먹거나 함께 극장에 가기 위한 것이었을 뿐, 돈을 따거나 잃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고향선배들이나 친구들 중에 화투놀음(도박)인 삼빡꾸(도리짓고땡)를 즐겨 하는 사람들이 있어 초상집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노름에 나도 따라가 보기도 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초상집에서 도리짓고땡 도박이 아주 성행했는데 당시에는 이를 경찰도 공공연히 묵인하는 사회풍조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도박은 초상집을 중심을 이루어졌고 초상집 도박은 신고하는 일도 없었고 다들 검사나 경찰도 함께 어울려 하는 것으로 여겼다. 나는 구경은 하되 언감생심 끼어들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던 것은 돈도 없었지만 또 용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친구에게 쓰꾸(한편이 되어 돈 태우기)들어 돈을 따면 두 배로 받는 재미를 본 적은 있었다. 8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화투놀음이 고스톱이다. 처음에는 배워서 해보니 재미도 있었으나 차츰 백 원짜리가 아닌 천 원짜리로 하게 되니 고 스톱은 결국 도박이 되어버려 나는 판에 끼지 않게 되었다. 당시 거의 모든 직장의 남자들은 회식이 끝나면 2차로 여관방을 얻어 고스톱을 치고 심지어는 고스톱을 치기 위해 여관방을 얻어 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친구들의 계모임에서는 저녁식사 후 밤새도록 고스톱을 치는 것이 관례가 되어 버렸지만 나는 돈 따먹고 잃고 하는 일에 별 관심이 없어 그저 곁에서 구경만 하거나, 신문이나 잡지를 보거나, TV를 시청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지인들 사이에 나는 고스톱을 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인간이 되었다. 지금도 은퇴한 친구들 중에는 고스톱으로 시간을 때우는 친구들이 있다는데 운동을 하거나 다른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게 보인다. 치매 예방에 좋다며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십 원짜리 고스톱을 친다고 하며 권장되기도 한다.
80년대 말 90년대 초기부터 증권(주식투자)이 유행하였다. 주식투자는 투기가 아니고 말 그대로 투자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너도 나도 참여하니 주식투자한 번 해보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여겨졌고 대한민국에는 주식투자 열풍이 오랫동안 불었다. 오늘날 생각해보니 경제 성장기에 이자율이 높아 많건 적건 저축한 돈이 있으면 크게 불어나므로 돈 무서운 줄 모르고 성인이면 너도 나도 주식투자에 매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루에 불어나는 돈이 널뛰듯 하여 어떤 날은 한 달 월급이 오르기도 하니 그 재미에 넋이 빠진 서민들, 월급쟁이들이 주식시장에서 빠져나오기는 매우 어려웠던 분위기였다. 통계적으로 개미군단들의 주식투자 성공률은 20%도 안 된다는데 애초부터 노름과 투기에 약하고 그렇다고 돈 모으는데 혈안이 된 처지도 아닌 내가 무슨 수로 주식에서 돈을 벌 수 있으리오? 애초에 투기나 노름을 멀리하던 나도 덩달아 주식투자에 끼어들어 90년대에 두 번에 걸쳐 상당히 큰 손해를 보았다. 날마다 경제신문을 뒤적이고 주식난을 살피고 객장을 찾고 했던 10여년 세월이 부끄럽고 후회스럽기 짝이 없다. 나의 어느 후배 한 분은 주식투자에 올인하더니만 당당한 평생직장을 버리고 주식투자 컨설던트가 되었으나, 주식열풍이 식은 뒤 전 재산을 잃고, 오늘날 중소기업의 공장 근로자로 근근이 살아가는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2000년대에는 펀드가 출현하여 우리를 유혹했다. 주식투자 못지않은 광풍이 불었고 나는 저축한 돈을 펀드에 투자하여 정말 큰 손실을 보았다. 주식에서 얻은 교훈으로 다시는 투자하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은 너무 약했던 나머지 펀드 열풍에 또 한번 무너져서 결국 무모한 선택을 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고, 차마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자괴감에 빠졌다. 이 때 결심했다.
?앞으로 나의 남은 인생에 주식이나 펀드는 없다. 오직 저축이다.?
미련 없이 경제신문을 끊고 일간신문의 주식투자 난에는 결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잘 실천하고 있기에 그래도 부끄럽지는 않은 오늘의 나의 가정경제를 만들 수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
10여 년 전에 동료들과 골프모임을 결성하였다. 레슨을 받고 필드에 나가보니 재미도 없고 잘 맞지도 않아 중단하고 금년부터 테니스를 시작했다. 이제 주변에 골프를 하지 않는 친구들이 별로 없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골프를 치면서 한타 당 천 원짜리라도 내기를 하는 것을 알았고, 나를 골프팀으로 끌어 들이려는 고등학교 친구들은 한 단위가 더 크다고 하니 골프치기가 더 싫어져버렸다. 도박을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라 골프를 중단한 건 아주 잘한 일이라 여긴다. 테니스는 말로만 막걸리 내기, 맥주 내기를 하자면서 흥을 돋우니 어린 시절 민화투로 먹기 내기하던 마냥 재미있다.
한국에는 경마투기가 대단히 성하다고 한다. 수 년 전 제주도에 고교친구들이 모였을 때 처음으로 제주말 경마장에 구경을 가서 양드리가 산 5천원짜리 마권으로 1등말과 2등말을 맞추어 무려 33만원을 타는 행운을 맛보았다. 우리 친구들이 3팀이나 상금을 타서 나의 의견에 따라 우리를 초대한 친구에게 100만원 모두 기꺼이 주었다. 기분이 좋았다.
한국은 부동산, 그것도 특히 서울에서는 수십 년 간 아파트 투기가 최고의 재산증식 수단이었는데 나는 부동산 투기는 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전혀 계획이 없다. 지인들에게 듣는 말로는 부동산 투기라고 모두 돈을 버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나는 주식과 펀드에서의 손해를 본 경험을 통해 일체의 투기성 투자에 미련을 끊고 오직 저축을 통한 나의 미래에 대한 확실성을 믿고 살았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나의 가정경제를 운영해 왔다. 부자는 될 수 없었지만 가난하게 살게 될 걱정일랑은 없다.
4. 마셨다 하면 취하고 취했다 하면 술주정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수시로 금주령을 발동하여 개인의 음주를 금지했다. ...알코올은 주로 곡물과 과일에서 얻는다. ...당연히 조선시대 술의 재로는 쌀과 보리 등 곡물이었다. 술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밥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금주령을 내릴 때 특별히 단속대상이 된 술이 있었으니 소주가 그러했다. 조선 건국이후 체제가 안정되자 술도 점점 고급화되어 소주의 소비가 점차 늘어났다. 조선시대에는 소주가 고급술이었다. 소주처럼 알코올 함량이 높은 증류주를 만들려면 곡식이 많이 소모된다.
●술꾼들에게 영조의 치세(1724-1776)는 정말 지옥 같은 세월이었다. 무려 반세기 동안 금주정책이 시행된 것이다. ...정조는 곡식을 줄이는 효험도 보지 못하고 백성들만 소요시키게 된다는 이유로 금주령 발동을 거부한다.
●조선시대 말 서울안의 음식점은 목로술집(서서 마시는 술집), 내외술집(행세하던 집 노과부가 생계에 쪼들려 건넌방이나 뒷방을 치우고 넌지시 파는 술집), 사발막걸리집(사발에 막걸리만 파는 술집), 모주집(술지게미에 물을 타서 뿌옇게 걸러낸 탁주를 파는 술집), 색주가뿐이었다.
※나의 飮酒史
●아주 어린 시절 막걸리 한 모금 마셔본 것 말고, 중학교 3학년 때 체육대회를 마치고 우리 반 친구들 7-8명이 역전까지 걸어와서는 포장마차 집에서 막걸리를 한잔씩 마셨던 것이 공식 첫 음주다.
●고등학교 1학년 봄 소풍 때 친구들이 몰래 가져온 소주병에 입을 대고 마시고는 소주병을 들고 기념사진까지 찍은 기억이 난다. 2학년 겨울 우연히 친구들이 자취하는 집에 갔더니 여럿이서 아주 막걸리를 주전자로 당당하게 받아다 먹고 있어 한 잔 마셔 본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마을 친구들과 주막집에서 혹은 시내 술집에서 막걸리나 소주를 종종 마셨는데 사실 그때 나의 실제 나이는 만으로 18세였으므로 미성년자였지만, 당시는 요즘처럼 음주에 대한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현재는 만 19세가 되는 해의 1월 1일부터 음주와 흡연이 합법적으로 보장된다고 한다. 친구들이 군대에 가게 되면 송별식을 여는데 젓가락을 두드려가며 돌아가면서 트로트를 불러댔다.
●전주교대를 다닐 때는 우리 성화(써클)회원들과 주로 막걸리와 소주를 마셨다. 학사주점에 가는 것은 상당한 즐거움이었다. 원광대를 다닐 때는 여름에는 과후배들과 주로 냉막걸리와 생맥주를 마셨다. 고 한상설 선생과 한대희교수와는 참 많이 마셨다. 70년대에는 막걸리 주점에도 아가씨들이 있었고,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 아가씨들의 술시중을 받아가며 술을 마셨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큰 한식집에서 상다리가 휘어지는 상을 받고 한복을 입은 아가씨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여유 있는 술을 마셨다. 친구 누나집이 그런 한식집을 운영하고 있어 종종 놀러가서 보았다.
●80년대에는 해리중과 대성고에 근무하면서 동료들과 어울렸다. 해리에서는 종종 근무가 끝나면 주막집에서 주로 가오리 등 해물안주를 시켜 소주를 마셨다. 대성고에서는 보충수업이 끝나면 삼겹살집에서 상당히 자주모여 소주를 마셨다. 20대 후반 내지 30대 초반의 청년교사들은 잘도 마시고 할 말도 많았다.
이리북중으로 옮긴 80년대 후반에는 자가용을 가진 후배의 차를 타고 시외로 나가 두부김치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고 오는 낭만적인 음주문화를 가져보기도 했다. 음주운전은 별로 단속하지 않던 시대였다. 군산월명중으로 옮긴 90년대에는 남중동 파출소를 중심으로 주로 생맥주집에서 마셨다. 김호길 선생, 채수환 교수, 김성진 교수, 오성수 사장, 김종구 사장등과 자주 어울렸다. 2000년대 이후에는 부안여상과 전주제일고에 근무하면서 교장 교감을 비롯한 거의 모든 남교사들이 가끔씩 함께 어울렸다. 무주고에서는 교장 교감과 부장단 10여명이 함께 자주 어울렸다. 어양중으로 옮긴 2012년 이후에는 건강을 생각해서 학교 친목회나 각종 모임들의 월례회 등에서 마시는 정도이며, 가끔씩 친구들과 안주 좋은 막걸리집을 찾는 정도로 음주문화를 바꾸고 있다. 물론 집에는 우리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벨기에 산 하켄버그, 체코 산 필스너 캔 맥주와 비록 값싼 와인일망정 세계 각국에 생산된 많은 와인이 상시 대기 중이어서 우리는 마음 내키면 언제라도 한잔씩 마시곤 한다.
5. 타락과 부정으로 얼룩진 양반들의 잔치
●과거는 양반사회 내부의 게임이었다. 그런데 그 게임마저도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정조 24년(1800년) 3월 21일 京科의 庭試 初試에 응시한 숫자는 11만 1,838명, 거둬들인 試券은 3만 8,614장이었다. 이튿날인 3월 22일에 열린 인일제에는 응시자가 10만 3,579명, 받아들인 시권은 3만 2,884장이었다. 이틀에 걸쳐 21만 명 이상의 거자가 서울시내에서 시험을 치른 것이다. 영조 15년의 알성시에 응시한 거자가 1만 7천 명 내지 1만 8천 명이었으니 61년 동안 과거응시자가 5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박제가의 <북학의>
현재는 그때보다 백배가 넘는 유생과 물과 불, 짐바리와 같은 물건이 들어오고, 힘센 무인들이 들어오며, 심부름하는 노비들이 들어오고, 술파는 장사치까지 들어오니 과거보는 뜰이 비좁지 않을 이치가 어디에 있으며 마당이 뒤죽박죽이 안 될 이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모든 擧子들이 詩와 賦(文體)에 목을 매었다. 하지만 시와 부는 그야말로 아무 짝에도 쓰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시와 부의 작문을 공부하면 일반적인 시와 부의 작품을 쓰는데 도움이 되자 않을까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과시와 과부는 일반 한시나 부와는 체제가 아주 다르다.
박제가는 말한다.
?...현재 과거에서는 科體의 技藝를 통하여 인재를 시험하고 있다. 그런데 문장이란 것이 위로는 조정의 館閣에 쓸 수 없고, 임금의 자문에도 응용할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아래로는 사실을 기록하거나 인간의 성정을 표현하는데도 불가능한 문체다. 어린아이 때부터 급제하게 되면 그날로 그 문장을 팽개쳐 버린다. 한평생의 정기와 알맹이를 과거문장 익히는데 전부 소진하였으나 정작 국가에서는 그 재주를 쓸 곳이 없다.?
●과거공부가 과거합격이후 행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으니 양반들은 그저 서리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지식분자들은 오로지 시험용 지식을 단련하는 데 골몰하였다.
정약용은 말한다.
?이 세상의 많은 백성들은 무식하다. 경서와 사책을 공부해 정사를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은 천 명이나 백 명 중 한 사람뿐이다. 그런데 사정은 어떠한가? 지금 천하의총명하고 슬기로운 재능이 있는 이들을 모아 일률적으로 과거라고 하는 격식에 집어넣고는 본인의 개성은 아랑곳없이 마구 짓이기고 있으니, 어찌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갈수록 취업난이 극에 달하니, 대학생들은 너도 나도 공무원 시험에 도전한다.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는 머리가 우수한 영재들이나 가능하므로 대부분은 7급이나 9급 공무원에 도전하는데 7급은 수백 대 일의 경쟁이 고, 9급도 보통 50내지 100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한다.
교사가 되는 임용고시도 통과하기는 매우 어렵다. 일단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을 졸업하거나 비사범계는 교육대학원을 마치고 교사자격증을 취득한다. 그러고 나서 임용고시에 응시하는데 중등은 보통 수십 대 일의 경쟁이다. 임용시험 통과자는 평균 5%이내의 성적우수자로 세계 최고 수준의 학력이라고 한다. 우리 세대는 베이비 붐 세대로 동년배가 약 80만 명쯤 되는데, 1960년대의 매우 어려운 시기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거나 또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이 많아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이 크게 잡아 50만 명쯤이라 한다면, 당시 고교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이 25.8%라고 하니 대학입학정원이 13만 명쯤 되고 4년제 대학은 약 10만 명쯤 되는 시기였다. 당시는 4년제 대학입학정원의 200%를 선발하는 예비고사(수능시험)에 합격해서 4년제 및 교육대학 입학자격을 획득한 뒤, 교육대학에 진학하여 졸업하면 무시험으로 전원이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고, 사범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하거나 일반대학에서 교직을 이수하여 순위고사를 거쳐 거의 모두가 쉽게 중등교사가 될 수 있었던 시대였으니 나는 정말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난 것이 틀림없다.
요즈음 일류대학을 졸업한 뒤 연봉이 엄청난 대기업에 취업한 젊은이들도 《밤이 있는 삶》을 찾아, 또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박봉인 교직이나 공무원에 도전하는 사례가 아주 많아지고 있으니 그런 모습을 보면 나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고 살았고 그리고 잘 마쳤다. 비록 우리민족사의 비극의 한 페이지인 육이오 전쟁 중에 태어났지만, 오히려 轉禍爲福격으로 산업화시대의 행운아인지도 모른다.
6. 누가 이 여인들에게 돌을 던지는가?
●어우동에 앞서 어우동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여인이 한 여인이 더 있다. 유감동(兪甘同)이다. 세종실록 9년(1427년) 8월 17일의 기록에 의하면 남편 최중기가 무안군수로 부임할 때 감동을 데리고 갔는데 감동이 병을 핑계로 도로 서울로 올라와 방종하게 굴자 최중기가 버렸다고 한다.
<방종>이라 함은 아마도 성적 방종을 의미할 것이다. 과연 실록은 감동의 사건을 처음 보고하면서 그녀와 관계했던 남자로 이승, 황치신, 전수생, 김여달, 이돈 등 여섯 명의 이름을 밝히고 그 외 이름을 숨긴 간통자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라 하고 있다. 방종이라면 꽤나 거창한 방종이었던 셈이다.
감동의 사건은 세종 9년 8월 17일 처음 실록에 오른 뒤로 9월 16일 변방의 노비로 정죄될 때까지 끌었다. 실록 자료를 정리하여 간통자를 모아보면 40명에 가까운데 이중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당연히 양반들이다. 총제 정문, 상호군 이효량, 해주판관 오안로, 전 도사 이곡 등이 제법 유명한 사람이고 장연첨절제사, 사직, 부사직, 판관, 찰방, 현감 등의 벼슬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수공업 기술자인 공장으로 水精匠, 鞍子匠, 銀匠도 있었으니 감동은 그 당시 남자들처럼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쩨쩨하고 못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형편없기로는 이효량과 정효문이 훨씬 더했다. 이효량은 최중기의 매부이면서 감동과 간통했고, 정효문은 숙부 정탁이 감동과 간통한 사실(당시 감동을 첩으로 삼았다)을 알면서도 감동과 성관계를 가졌으니 근엄하신 양반님네가 하실 짓은 아닌 것이다.
※세종실록 9년 9월 29일자에 보면 김여달이 어두운 밤에 무뢰배와 작당하여 거리와 마을을 휩쓸고 다니다가 유감동을 만나 그가 조사(朝士)의 아내인줄 알면서도 순찰을 핑계하고는 위협과 공갈을 가하여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서 밤새도록 희롱했다고 한다. 감동은 김여달과 만남을 계속했고 최중기에게서 버림받은 이후에는 스스로 창기라 하며 많은 남성들을 편력했다. 많은 관련 자료를 보건대 감동은 분명 끼가 있는 여자인 듯 보인다. 오늘날에도 스스로 몸을 파는 여성들이 있고, 그녀들은 창녀가 당당한 직업임을 주장하면서 몸을 파는 일을 생업을 삼고 있다. 비록 처음에는 김여달의 성폭행으로 인하여 빚어졌다고는 하나 이후 40여명의 남성들과 간통한 것은 자신의 성적욕구가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성이 개방된 이 시대에도 누가 감히 유감동 같은 행위를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유감동은 간통죄가 없어진 오늘날의 법의 척도로 볼 때 도덕적으로 비난받을지언정 결코 형사처벌 대상은 아니다. 또 유혹하는 유감동 같은 여성을 과감하게 거절할 남성들은 별로 찾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들 역시 무죄다. 다만 김여달의 성폭행은 큰 처벌을 받아야하나 이후 유감동과 밀회를 계속했으니 유감동이 처벌을 원치 않을 터이므로 역시 형사 처벌을 크게 받지는 않을 터이다. 집행유예로 실형을 살지는 않을 것 같은 생각이다. 유감동은 곤장을 맞고 노비(奴婢)가 되었으나 1428년(세종 11년) 석방되었다고 한다.
●감동의 사건이 일어난 지 53년 되인 성종 11년(1480년) 너무나도 유명한 어우동 사건이 일어났다. 어우동의 이름은 성종실록 11년 7월 9일조에 나온다.
의금부에서 어우동이 태강수 이동(李仝)의 아내였을 때 방산수 이난, 수산수 이기와 간통한 죄는 율이 棍杖 1백대, 徒 3년에 告身을 모조리 추탈하는 데에 해당한다고 보고하자, 성종이 장형은 속전으로 대신하게 하고 고신을 빼앗은 뒤 먼 지방으로 부처하라고 명한다.
...에컨대 방산수 이난이 어우동과 간통한 사람이라고 지목했던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청, 김휘, 정숙지의 처벌 과정을 보자. 사헌부에서는 이들을 철저히 조사하여 중벌에 처할 것을 요구했으나, 성종을 비롯한 일부 대신들은 이난이 자기 죄를 가볍게 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끌어 들였다는 이유로,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은 석방하여 신문하지 않고 김청, 정숙지등은 다만 한 차례 형신(刑訊)하고 석방하였다. 성종의 처분은 당연히 논란이 되었으나 끝내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처벌은 없었다. 사실 병조와 이조의 판서에다 좌찬성까지 지낸 어유소 같은 중신을 처벌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 방산수 이난과 수산수 이기는 종친이기도 했다. 그 외 간통한 사람들도 처벌을 받기는 하였으나 모두 가벼운 것이었고 2년 뒤에는 모두 풀려났다. 남자들에 대한 처벌이 이토록 가벼웠던 데 반해 어우동은 극형, 곧 사형에 처해졌다. 물론 어우동의 형량을 두고 갑론을박이 치열했다. ...최종 결론은 왕의 권한이었다. 성종은 법률 밖의 법률을 따르자는 심회 등의 의논을 따랐다. 성종은 음란 방종한 행위를 일삼은 어우동을 죽이지 않는다면 뒷사람을 징계할 수단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금부에 사율 곧 법률에 없는 율을 적용하라고 명하였다. 사형이 결정된 것이다.
※태강수가 은장을 불러 은그릇을 만드는데 어우동이 은장이에게 호감을 느껴 계집종 옷을 입고 은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태강수가 내쫒았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어우동은 이미 무지하게 끼가 많은 여성이다. 남편 하나만 보고는 살기 힘든 색정녀로 보인다. 쫓겨난 친정집에 머무르던 어우동은 타락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성인 성적욕구로 인한 온갖 성범죄가 일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젊고 성적으로 건강한 남녀라면, 잠깐 자신의 이성으로 성적 욕구를 억제하지 못할때 어느 누구라도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성적 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나도 물론 예외는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 할 수 있다.
세종 18년 동안에 세종 자신이 기억하는 간통사건만 해도 아주 많았다.
○변중량의 누이동생이 家奴와 간통
○유은지의 누이동생이 중과 비밀히 간통하고 가노 세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꺼려 모두 죽임
○관찰사 이귀산의 아내가 지신사 조서로와 간통
○승지 윤수의 아내 조씨가 고종오빠 홍중강과 장님 하경천과 통간하여 역시 극형에 처함
○검한성 유귀수의 딸 유감동이 기생이라 사칭하고 중외에서 자행함
○금음동(今音同)과 동자(童子)는 모두 양가의 딸로서 혹은 종형과 통간하고, 혹은 외인과 통간하여 풍속을 문란케 하였으므로 율에 따라 결죄하고 천인으로 만듬
○유장의 딸인 안영의 아내가 고종오빠 홍양생과 통간
○이춘생의 딸인 별시위 이진문의 아내(어리가)가부사정 이의산과 양인 허파회와 통간
유감동이나 어우동이나 모두 유교윤리가 정착된 조선 초 15세기에 상상하기 힘든 제약을 박차고 불륜을 스스로 찾아 가며 저지른, 여성으로서 성적 자유를 구가한 그 대담성은 시대를 초월하고 있으니 정말 대단한 여성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그녀들이 위대한 여성해방론자라거나 여성의 성적 자유를 실천한 선각자라고 칭송할 것 까지는 아니다. 2015년 2월, 금년에 간통법이 폐지되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간통법 폐지를 환영하면서 의도적으로 간통을 하려 하거나 간통을 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는 보도도 없는 것을 보면, 인간은 법과 제도와 윤리 안에서 행복한 가정을 지키며 바르고 인간답게 살려는 의지와 지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7. 서울의 게토, 도살면허 독점한 치외법권지대
●《경제육전》에 이런 구절이 있다.
먹는 것은 백성의 근본이 되고 곡식은 소의 힘으로 나오므로 본조에서는 금살도감을 설치하였고, 중국에서는 쇠고기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령이 있으니, 이는 농사를 중히 여기고 민생을 후하게 하려는 것이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말하고 있다.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궤(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에 쓰기 위해 도살하고, 성균관과 한양 5부안의 24개 푸줏간, 300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
●반촌은 고려 말 문성공 안유(향)가 자기 집안의 노비 1백여 명을 희사하여 학교를 부흥할 것을 도운데서 비롯된다. 본조가 한양에 정도하여 구학을 옮기자 노비자손이 수천 명이 되어 반수를 둘러싸고 집을 짓고 살아, 거리와 골목, 닭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염연히 하나의 동리를 이루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곳을 반촌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조선후기의 모든 禁亂에도 반촌만은 들어가 조사할 숭 없었다는 사실이다. 금란이라 조성이 5백 년 동안 금했던 소나무 벌채 금지, 임의적 도살 금지, 양조금지를 가리킨다. ...반인들은 백정은 아니었지만 소의 도살과 판매에 관계하는 이상 천대받았을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사실상 이로 인해 반촌민은 반촌 바깥사람들과 친교, 결혼 등 일체의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았다. 반촌은 사실상 게토(유대인들의 집단 거주지역,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였던 것이다.
8.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뒤흔든 무뢰배들
●홍명희의 비밀계라는 글에 있는 내용이다.
劍契는 영조 때에 이르러 다시 말썽을 피워 포도대장 장붕익이 그들을 다스렸다. 검계의 당은 모두 칼자국이 있는 것으로 자신들을 남과 구별했기에 몸에 칼자국이 있는 자를 모두 잡아 죽이자 마침내 검계가 사라졌다.
검계의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왈자라고 친했다 한다. 박지원의 <발승암기>에는 왈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김홍연이라는 자를 활자(闊者)라고 부르고 활자란 대개 시정간에 낭탕우활(浪蕩迂闊)한 자의 칭호로 이른바 협사 검객의 부류와 같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妓夫는 기생의 기둥서방으로 대개 기녀의 매니저 노릇을 하는 이들이다. 조선후기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기생이 많았는데 이들이 서울에 오면 당장 의식주 해결에 곤란을 겪게 되는 바, 기부들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기생을 장악하여 영업으로 발생하는 이익의 일부를 차지하였다. 기부는 대전별감, 포도청 포교, 의금부 나장, 승정원 사령 등 몇몇 제한된 부류만이 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는 지금도 여전히 조폭들이 있다. 예전에 골목이나 시장상인들을 괴롭히는 그런 부류에서 이제는 진화하여 대부분 사업을 한다고 한다. 유흥업소나 건설업 계통에 종사하는 것으로 보여 지며, 여전히 몸에 문신을 한 젊은이들이 목욕탕에 집단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장례식장 입구에 쭉~ 도열하여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우리 일반인들과는 거의 접촉이 없으나 존재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신문에 전라도 조폭들의 명칭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기분이 영 좋지 않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최근에 태고종 종단분규에 이리배차장파 부두목 출신이라는 자가 개입하였다는 뉴스를 보니 더 부끄럽다. 여성 연예인들 중에는 예전에 일명 매니저들이 여성의 뒤를 보아주고 출연시켜주면서 돈을 뜯어냈다는 기사들을 종종 보았다. 오늘날은 연예인들이 모두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기에 사라진 풍속도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영 사라진 것은 아닌 듯도 하다.
도시마다 성매매지역이 만연하던 시절에는 포주가 여성들을 감시하며 성매매를 시켰다. 이제 공개적인 성매매지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성매매는 오히려 더 다양화되고 확대되고 있다. 최근에만 해도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남자아이들 둘이서 여자 친구 한 명과 가출 여학생들을 꼬드겨 오피스텔에 집단 숙식하면서 포주노릇을 하며 인터넷을 통해 성매매 남성을 찾아 몸을 팔도록 하고 무자비하게 착취하다 붙잡힌 뉴스가 보도되었다.
9. 조선 후기 유행 주도한 오렌지족
●별감은 왈자의 하나로 조선후기 유흥계의 주역이었다. ...액정서에 소속된 별감은 어지간한 양반 못지않게 위세를 떨쳤다. ...별감은 왕명을 전달하지만 왕비전과 동궁전에도 소속되어 있었다. <경국대전>에 보면 대전별감 46명, 왕비전 별감 16명, 세자궁 별감 18명, 문소전 별감 6명으로 모두 86명이다.
●승전놀음은 妓生과 歌客, 琴客들을 불러 기악과 노래 춤을 벌이는 거창한 놀이판이었다. 별감들이 승전놀음을 주관하는 일이 많았다. 별감은 복색의 사치와 유행을 주도하고 시정의 유흥공간을 장악한 그런 부류였다.
※왈짜는 왈패를 말하며 한 때는 閑良이라고 하는 표현이 잘 어울릴 것 같다. 돈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므로 건달이라고 표현해도 그리 큰 무리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오렌지족은 부모 세대가 이룩한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서울 강남 일대에서 퇴폐적인 소비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1970~80년대 경제 성장의 혜택을 받고 강남 지역에 뿌리내린 부유층 2세와 부모의 부를 바탕으로 유학 경험이 있는 부류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오렌지처럼 연하고 밝고 나긋나긋한 것을 좋아한다. 사려 깊게 생각한다거나 주의·주장을 갖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씀씀이에 구애받지 않으며 철저한 개인주의, 향락적 소비문화에 익숙하다. 기성세대의 가치를 부정하면서 자유분방하게 생활한다.
10. 은요강에 소변보고 최음제 춘화 가득하니
●이춘풍전 줄거리
숙종 때 서울 곽석골에 사는 이춘풍은 풍채는 늠름하지만 주색잡기에 능해 이마에 늘 개기름이 흐른다. 가정은 돌보지 않고 놀러 다니며 가산을 탕진한다. 나중에는 아내가 품을 팔아 모은 돈까지 다 없애고 빚까지 진다. 박득만이라는 상인이 돈을 써서 벼슬을 사려고 한다는 소식을 탐지하고 최참판에게 다리를 놓겠다고 찾아갔으나 용돈도 못 얻고 술대접만 받고 돌아온다. 춘풍은 돈이 떨어지자 기생 월향에게까지 천대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 김씨는 굶어 누워 있다.
춘풍은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반성하고 아내에게 서약까지 한다. 이에 김씨는 기뻐하며 주린 배를 안고 열심히 품팔이를 하여 돈을 모은다. 춘풍은 다시 교만하여져서 호조(戶曹)에서 돈 2,000냥을 빌리고 아내가 모은 500냥까지 합해서 평양으로 장사를 하러 간다.
평양명기 추월에게 미혹되어 장사는 하지 않고 돈을 탕진하다가 이윽고 박대와 수모를 받으며 추월의 집에서 하인노릇을 한다.
남편의 소식을 들은 김씨는 마침 이웃에 사는 참판이 평양감사로 부임하게 되자 청을 드려 비장(裨將)이 되어 남복으로 평양에 간다. 추월의 집을 찾아가 추월의 간교한 행색과 남편의 거지같은 모습을 확인하고 추월을 엄히 문책 5,000냥을 남편에게 주게 하고 춘풍 역시 태장(笞杖)을 쳐서 치죄한다.
춘풍은 의기양양하여 집으로 왔으나 아내가 비장의 복장으로 나타나서 꾸짖자 다시 망신만 당한다. 춘풍은 비장이 아내인 것을 알고 개과천선하여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치가에 힘써 화목하고 부유한 가정을 이룬다.
■ 옛 서울의 주민구성
●북산(백악산) 밑을 북촌, 남산(목멱산) 밑을 남촌, 낙산 근처를 동촌, 서소문 내외를 서촌, 장교․수표교어름을 중촌, 광통교 이상을 우대, 효경교 이하를 아래대, 강변을 오강, 성밖 사면 십리 이하를 자내라 한다.
동서남북 네 촌에 양반이 살되, 북촌에는 문반, 남촌에는 무반이 살았으며 또 같은 문반이로되 서촌에는 서인이 살았으며 그중에서도 소론이 살고, 북촌은 노론, 남촌은 남인이 살았다고 할 수 있으나 사실은 소론까지 잡거하되, 주로 무반이 살았다. 동촌에는 소북, 중촌에는 중인, 우대에는 육조이하의 각사에 소속된 서리들이 살고, 아래대에는 각종의 군속들이 살고, 경복궁 서편 누하동 근처에는 소위 대전별감들이 살고, 창덕궁 동편의 원남동과 연지동 근처에는 무감들이 살았으며 동소문 성균관 근처는 관인들이 살고 왕십리 근처에는 군총(병사)들이 살고, 오강변에는 뱃사람과 상인들이 살았는데 속칭 강내사람이라 함은 강변에 사는 사람을 지칭함이었다.
●오강이란 양화진(양화대교 부근), 서강(와우산과 노고산 사이의 샛강), 마포(마포대교 언저리), 용산강(용산 앞), 한강진(한남동 일대)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