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갑진만록 B

청담(靑潭) 2015. 12. 23. 10:05

 

대동야승(大東野乘)

 

 

《대동야승》은 조선초부터 인조 때까지의 야사(野史) · 일화(逸話) · 소화(笑話) · 만록(漫錄) · 수필(隨筆) 등을 모은 엮은 책이다. 《대동야승》은 총서명(叢書名)으로, 한 개인에 의한 저술이 아니라 여러 저자들에 의해 편술되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의 편찬자나 편찬연대는 미상이나, 다만 편목 중 《기축록속》은 황혁(黃赫)의 《기축록》을 추가 보충한 것으로 그 내용이 효종과 숙종 때의 사실을 다루고 있었으므로 대

체로 《대동야승》은 숙종 말에서 영종조 사이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종래에 사본 72권 72책으로 전해오던 것을 1909년~1911년 사이에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13책으로 출판하여 널리 퍼졌고, 1968년에는 이것이 다시 전 4책으로 영인, 출판되기도 하였으며, 1971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정부의 지원에 의한 고전국역총서계획의 일환으로 17책으로 된 원문 포함의 번역본을 간행한 바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책이름과 권수 · 편저자를 총괄하면 아래 [표]와 같다.

이와 같이 모두 59책으로 한 질을 이루고 있다. 체재는 대체로 조선초 성종 때 사람인 성현(成俔)의 《용제총화》로 시작하여 인조 때의 김시양의 《배계기문》으로 끝맺으니 대략 250년간에 걸쳐 배출된 유가(儒家)의 작품을 선별하여 저술시대순으로 배열한 야사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각 편을 살피면 《용재총화》 · 《해동야언》과 같이 상당한 분량의 전문(全文)이 완권 수록된 것도 있으나 《추강냉화》 · 《소문쇄록》 · 《해동악부》와 같이 발췌, 초록한 것도 있으며, 《패관잡기》와 같이 후편의 상당량을 생략해 버린 것도 있다.

수록된 내용은 대체로 야사 · 만록 · 일화 · 소화 · 수필 그밖에 폭넓은 범주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당쟁과 관계깊은 사화(士禍) · 옥사(獄事)에 대한 기록이나 임진 · 병자의 난에 관한 많은 기록물은 역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준다.

 

1) 성현(成俔) : 용재총화(慵齋叢話) 10권

2) 서거정(徐居正) : 필원잡기(筆苑雜記) 2권

3) 남효온(南孝溫) : 추강냉화(秋江冷話) 1권

4) 남효온(南孝溫) :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 1권

5) 조신(曺伸) : 소문쇄록(謏聞瑣錄) 1권

6) 임보신(任輔臣) :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1권

7) 어숙권(魚叔權) : 패관잡기(稗官雜記) 4권

8) 차천로(車天輅) :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1권

9) 심광세(沈光世) : 해동악부(海東樂府) 1권

10) 이육(李陸) : 청파극담(靑坡劇談) 1권

11) 이자(李耔) : 음애일기(陰崖日記) 1권

12) 허봉(許葑) : 해동야언(海東野言) 3권

13) 안노(安璐)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2권

14) 미상(未詳)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1권

15) 미상(未詳) : 기묘록별집(己卯錄別集) 1권

16) 이중열자(李中悅子)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1권

17) 김안로(金安老) :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1권

18) 심수경(沈守慶) : 견한잡록(遣閑雜錄) 1권

19) 이이(李珥) : 석북일기(石北日記) 2권

20) 황혁(黃赫) : 기축록(己丑錄) 2권

21) 미상(未詳) : 기축록속(己丑錄續) 1권

22) 미상(未詳) : 해동잡록(海東雜錄) 6권

23) 우성전(禹性傳) : 계갑일록(癸甲日錄) 1권

24) 미상(未詳) : 계미기사(癸未記事) 1권

25) 정철(鄭澈) : 시정비(時政非) 1권

26) 신흠(申欽) : 상촌잡록(象村雜錄) 1권

27) 조경남(趙慶男) : 난중잡록(亂中雜錄) 4권

28) 미상(未詳) : 역대요견(歷代要見) 1권

29) 신영화은(申靈華隱) : 재조번방지(再造藩邦誌) 6권

30) 미상(未詳)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1권

31) 미상(未詳) : 응천일기(凝川日記) 7권

32) 미상(未詳) : 광해초상록(光海初喪錄) 1권

33) 윤기헌(尹耆獻) : 장빈호찬(長貧胡撰) 1권

34) 박동량(朴東亮) : 기재잡기(寄齋雜記) 3권

35) 박동량(朴東亮) : 기재사초(寄齋史草) 2권

36) 미상(未詳) : 선원보(璿源寶)

37) 이정형(李廷馨) : 동각잡기(東閣雜記) 2권

38) 정홍명(鄭弘溟) : 기옹만필(畸翁漫筆) 1권

39) 유성룡(柳成龍) : 운암잡록(雲巖雜錄) 1권

40) 윤국형(尹國馨) : 문소만록(聞韶漫錄) 1권

41) 윤국형(尹國馨) : 갑진만록(甲辰漫錄) 1권

42) 이기(李墍) : 송와잡설(松窩雜說) 1권

43) 권응인(權應仁) : 송계만록(松溪漫錄) 2권

44) 윤근수(尹根壽) : 월정만필(月丁漫筆) 1권

45) 윤두수(尹斗壽) : 오음잡설(梧陰雜說) 1권

46) 이제신(李濟臣) : 청강쇄어(淸江瑣語) 1권

47) 황유첨(黃有詹) : 정무록(丁戊錄) 1권

48) 미상(未詳) : 일사기문(逸史記聞) 1권

49) 청백당(靑白堂) : 청백일기(清白日記) 1권

50) 신익성(申翊聖) : 연평일기(延平日記) 1권

51) 미상(未詳)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1권

52) 안방준(安邦俊) : 묵재일기(默齋日記) 3권

53) 윤순거(尹舜擧) : 혼정편록(混定編錄) 9권

54) 한준겸(韓俊謙) : 유천차기(柳川箚記) 1권

55) 이덕형(李德炯) : 죽창한화(竹窓閑話) 1권

56) 이덕형(李德炯) : 송도기이(松都記異) 1권

57) 김시양(金時讓) : 자해필담(紫海筆談) 1권

58) 김시양(金時讓) : 하담파적록(荷談破寂錄) 1권

59) 김시양(金時讓) : 부계기문(涪溪記聞) 1권

 

 

어느 학교의 학교 도서관이나 1971년에 민족문화추진위에서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대동야승이 꽂혀 있었지만 이를 읽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역사를 전공하고 가르치는 역사교사인 나마저도 방대한 이 책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가끔씩 가볍게 넘겨보는 정도였으니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21세기 들어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2007년부터 고전번역원에서 수많은 우리 고전들을 번역하여 홈페이지를 통해 쉽게 한글로 읽어볼 수 있게 하였음에도 대동야승을 읽기에는 나 역시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이었다.

?내 반드시 은퇴하면 대동야승을 읽으리라?핑계를 대며 미루어 오던 것이기에 은퇴 1년이 지나기 전에 실천에 옮기기를 시작한다.

우리는 역사를 주로 문헌에 의존하는데, 교과서는 정사를 위주로 편찬되고 배운다. 야사는 신뢰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 사실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도 왜곡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민총생산액, 무역수지, 대학진학률 등 각종 통계나, 눈에 보이는 모습은 세계의 선진국 대열에 당당히 서 있지만, 한편으로는 빈부격차, 자살률, 이혼율, 노인 빈곤율, 교통사고율, 사기범죄 등등에서 세계 최고의 수치를 기록하고 있어 그 뒤안길은 매우 부끄러운 모습들이 너무나 많고 국민들의 삶의 만족도는 크게 뒤처지고 있음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야사를 통해 오히려 당시의 우리나라의 진면목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고 확신해 왔다. 이제 대동야승을 차례로 읽어가면서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내용과는 매우 다르거나 의미 있는 내용들만 간추려 보고자 한다. 다행이 고전변역원에서는 복사가 가능하므로 쉽게 작업할 수가 있으니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다.

 

 

 

 

■ 갑진만록(甲辰漫錄) : 1604

 

윤국형(1543-1611)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윤국형(尹國馨:1543~1611)이 선조 중엽부터 광해군 초년 사이의 시사(時事)에 관하여 견문한 일들을 만록체(漫錄體)로 엮은 책.

필사본. 1권 1책. 1604년(선조 37) 갑진년(甲辰年)에 쓰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제목을 ‘갑진만필’이라고 하였다. 저자가 선조 초기부터 수필체로 적은 《문소만록(聞韶漫錄)》의 속편으로 서술한 것인데, 주로 임진왜란 후 명나라의 원군처리(援軍處理)에 관한 내용과, 그 후의 명나라 사신(使臣)의 동태 및 과거(科擧) ·분당(分黨) 등에 관한 사실을 단편적으로 기술하였다. 이 책은 《대동야승(大東野乘)》에 《문소만록》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 이 제독(李提督)이 평양을 평정한 뒤, 우리나라는 제독 및 아장(亞將) 장세작(張世爵)ㆍ이여백(李如栢)을 위해서 화상(畫像)을 안치(安置)하고 살아 있는 사람의 사당을 세워 춘추로 제사지냈는데, 사당은 평양 안 현복현(玄福峴)에 있고, 이름을 ‘삼대장사당(三大將祠堂)’이라 하였다.

영상 이원익(李元翼)이 임진년(1592, 선조 25) 가을과 겨울 사이에 평안 감사로 병마를 거느리고 순안현(順安縣)에 진을 쳐서 평양의 적을 방어하였다. 계사년 정월에 적이 물러간 뒤, 성중에 들어가 불탄 나머지를 수습하여 백성을 어루만지고 구제하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이 사랑하고 존경하여 화상을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의 생사(生祠)를 세웠으니, 사당은 삼대장사당 옆에 위치하였다.

 

 

○ 중국 사람들은 관왕(關王 관우(關羽))을 존경하여 국가에서 사당을 세우는 외에 집집마다 화상을 그려 놓고 생활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제사를 올리고, 특히 전쟁에 출동할 적에는 더욱 정성을 드린다.

무술년 봄과 여름 사이에 명 나라 군사가 많이 왔을 때, 남대문 밖 도제고현(都祭庫峴)에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는데, 대소의 장수들이 예를 드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심지어는 성상께 예를 드리도록 청하기까지 하였다. 기해년 전쟁이 끝나 군사가 돌아갈 적에, 성지(聖旨 중국 천자의 분부)를 받들었다 하고, 동대문 밖에 사당을 세우는데 관원 한 사람을 두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 비용을 비록 중국에서 지급한다고 하지만, 그 액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공사가 커서 모두 우리 나라에서 재력(財力)을 동원하게 되니, 그 수는 만 냥도 넘었다. 공사가 끝난 다음에는 국가에서 관리를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도제고에는 소상(塑像)을 세웠고, 동대문 밖에는 동상(銅像)을 세웠다. 관왕이 비록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장수라고는 하나, 남의 손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고, 공이 후세에 끼쳐진 사람도 아닌데, 중국에서 이처럼 존경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의 말에는,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을 가리킴) 때에 신병(神兵)을 내어 도왔다.’ 하나, 알 수 없다.

 

 

○ 중국의 방방곡곡에는 모두 점포가 있어 주식(酒食)과 거마(車馬) 등의 물품이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다. 비록 천리 먼 길을 가는 사람일지라도 은자 한 주머니만 차고 있으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그 제도가 매우 편리하였다. 우리나라 백성들은 모두 가난하여 저자나 행상 이외에는 사고파는 것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오직 농사로 생활을 꾸려갈 뿐이다. 호남과 영남의 대로에 주점이 있기는 하나 행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술과 꼴ㆍ땔나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여행 물품을 가져가는데, 멀리 가는 사람은 두세 마리의 말에 실어가고, 가까워도 한두 마리의 말이 필요할 정도여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병통으로 여겨 온 지가 오래되었다.

양 경리(楊經理 이름은 호(鎬))가 우리나라에 와서 중국을 모방하여 연로(沿路)에 모두 점포를 설치하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기 물건을 대도록 하였으니, 뜻은 매우 훌륭하였으나 습속이란 고치기 어렵고 재력도 미치지 못하여 사람들이 그대로 따르려 하지 않았다. 수령들이 죄를 면하기 위하여 중국 장수가 지나갈 때면 관에서 물건을 준비하여 길 왼편에 늘어 놓고 매매하는 듯이 하다가, 지나간 다음이면 거두니, 도리어 아이들 장난만도 못하여 중국 사람에게 비웃음만 샀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 임인년(1602, 선조 35)과 병오년(1606, 선조 39) 두 차례에 중국 사신이 나왔는데, 조정에서는 은자(銀子)가 부족함을 염려하여 은을 바치는 자에게 벼슬을 주었으니, 금관자와 옥관자의 장식이 실로 많아져서 관직의 천함이 전일보다 더욱 심하였다. 대개 처음에는 나이 60세 이상인 자로 은을 바친 차이에 따라 자급을 주었는데, 나이를 속이는 자가 많아져서 폐단이 무궁하였으니, 모르겠거니와 거둬들인 은자가 과연 얼마나 소용되었단 말이냐!

 

 

○ 을사년(1605, 선조 38) 겨울에 황제의 원손(元孫)이 탄생하자 천하에 널리 알렸다. 주지번(朱之蕃)이 정사(正使)가 되고, 양유년(梁有年)이 부사(副使)가 되어 병오년 4월에 비로소 우리나라에 이르렀다. 주지번은 술을 좋아하고 시를 즐겼으며, 또 현판 글씨도 잘 썼는데, 우리나라의 재상들과 연회할 적에 친구처럼 지내고, 심지어는 붙잡고 장난까지 하였다. 현판 글씨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막론하고 곧장 붓을 휘둘러 써주니, 그의 필적이 거의 중외 인가의 창이나 벽에 퍼지게 되었고, 비갈(碑碣)을 청하는 사람이 있어도 응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양유년은 재주와 명성이 주지번보다 훨씬 떨어졌지만, 대개 모두들 돈을 좋아하는 병폐는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천준(顧天峻)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또 부하를 단속하지 못하여 자못 방자한 폐단이 있었으나 10일 동안 머물고 돌아갔다.

 

 

○ 경술년(1610, 광해군 2) 겨울. 별시의 문과 전시에 발책독권관(發策讀券官)은 좌상 이자상(李子常 항복(恒福)의 자)이고, 참시관(參試官)은 모모였는데, 그 중에 허단보(許端甫 (筠)의 자)가 들어 있었다. 단보는 글은 잘하지만 성품이 경솔하여 시관이 되기만 하면 으레 사람들의 말이 있었다. 이번 과거에 합격한 사람 중에는 단보의 형 지사(知事) 허공언(許功彦 성(筬)의 자)의 아들 허보(許보), 사위 박홍도(朴弘道), 그리고 다른 참시관 박승종(朴承宗)의 아들 자흥(自興), 이이첨(李爾瞻)의 사돈 이창후(李昌後), 승지 조탁(曺倬)의 아우 조길(曺佶), 단보의 집과 친밀한 변헌(卞獻) 등 약간 명이 있었다. 외부에서는 단보가 허씨ㆍ박씨ㆍ변씨에게 사정을 두었다고 지목하여 은밀히 사사로이 봐 준 정상을 지적해서 의론이 분분하였고, 사위ㆍ조카ㆍ사돈의 방(榜)이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여론이 크게 일어나자, 좌상이 대죄하여 아뢰기를,

“허보의 글은 신이 뽑은 것입니다.”

하니, 상은, “그가 사정(私情)을 둔 것을 경이 어찌 알겠는가.’라고 비답하였다.

단보와 지동관(枝同官) 허용(許鎔)이 모두 하옥되어 달이 넘도록 오래 갇혔다가 마침내 형을 받고 귀양을 갔으며, 허보와 변헌은 삭과(削科)되고, 홍도(弘道)는 끝내 면제되었다.

 

 

※망해가는 명의 저질 사신들의 악랄한 수탈과, 그로 인한 우리 조정의 어려움과 피해에 대한 자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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