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갑일록(癸甲日錄) : 1583-84
우성전(1542-1593)
계갑일록(癸甲日錄)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던 우성전(禹性傳)이 1583년(선조 16) 6월부터 1584년(선조 17) 8월까지 간관으로 있으면서 보고 겪은 일들을 적은 일기이다. 당시 우성전은 동인으로서 서인(西人) 세력인 성혼(成渾: 1535~1598)과 정철(鄭澈: 1536~1593) 등이 활동하며 당쟁이 진행되던 때였다. 일기에는 왕과 동인 및 서인의 움직임과 세력 양상이 꽤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정치 상황과 당쟁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 서애 류성룡(1542-1607)과 동년배 친구로 같은 동인에 속하였으며 절친했다고 한다.
●1583년 6월 12일
병조 판서 이이(1536-1584)가 또 상소하여 사면하려 하니, 답하기를, “자고로 현신이 자기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에 사람들이 비방하고 헐뜯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다. 아득히 지나간 천년(千年) 사이에 군신이 서로 만나 공업을 세우는 일은 거의 없고 어쩌다가 있는 것이다. 경은 저번에 내가 친히 한 말을 듣지 않았는가. 간절한 한 마디의 말은 귀신까지도 아는 것인데, 경은 어찌 차마 지금에 와서 물러가려 하는가. 또 경을 인견(引見)하여 모든 일을 의론코자 한 지도 오래다. 하물며 날마다 경이 대궐에 나오므로 불러 면대해서 직접 타이르려고 하지 않음이 아니었으나, 요즈음 나의 기분이 불쾌하고 또 경솔한 무리들이 어찌 대신은 접하지 않고 병조 판서만 접견하느냐고 말할 것이므로 그렇게 못하고 있는 것이니, 경은 아울러 나의 뜻을 알라.” 하다.
●17일
병조 판서 이이가 숙배(肅拜)하고 사면하면서 대략 아뢰기를, “자고로 유자(儒者)는 진퇴를 구차하게 하지 않아 예(禮)로써 나가고 의(義)로써 물러가는 것이니, 죄를 짓거나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작록에 연연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다. 지금 신은 지극히 어리석고 고루하여 진실로 감히 유자(儒者)를 바라지는 못하옵니다. 비록 그러하나 평소 선비가 되기를 기약하기로 자처하였으니 선비로서 부끄러움이 없다면 어찌 족히 선비가 되겠나이까. 이제 대간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교만방자하여 임금을 무시한다는 것으로 신의 죄목을 삼으니 이것이 하나의 죄입니다. 대신들이 신을 위하여 번명하여 나오기를 재촉하면서도 탄장(彈章 죄상을 탄핵한 상소)을 지나치다고 감히 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서 분명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는 홀로 신이 죄가 없다 하시어 변핵(辨覈)을 더하지 않으시고 공론을 뭇 사람이 떠드는 것이며 훼방하는 것이라 하시오니, 진실로 신이 감히 받들지 못하는데 대간이 이것을 듣고 어찌 마음이 편안하오리까.” 하고, 또 아뢰기를, “평범한 남녀라도 죄가 있고 없는 것을 마땅히 분석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한 뒤에야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죄줄 것은 죄를 주면 유감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신은 비록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사오나 숭반(崇班)에 대죄하는 것은 염치에 관계되는 바이오니, 신의 죄상의 허실을 어찌 그저 두고 묻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하고, 또 아뢰기를, “삼가 바라건대, 의리를 명찰하시고 대중의 심정을 안정시키기에 힘쓰시어 신의 죄를 들어 좌우 신하에게 물으시고 대부들에게 물어 보시어 죄의 경중을 헤아려 만일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이라 하면 신이 비록 미안하오나 감히 억지로라도 따라 행하지 않겠나이까. 만일 실제 범죄가 있다 하오면 비록 내쫓고 귀양보내고 죽이신다 하더라도 신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자처하는 도에 있어서는 비록 마땅히 이같이 하여야 할 것이나, 만일 좌우 신하에게 물어 보게 되면 이것은 조금이라도 경을 의심하는 의사임을 면치 못할 것이니 내가 어찌 이런 일을 감히 하겠는가. 지난날 대간의 말은 본시 근사하지도 않은것이니 족히 변별할 것도 못된다.” 하다. 성상소(城上所)지평(持平) 이경률(李景㟳)이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오늘 병조 판서 이이의 계사를 보니, 전번에 본부(本府 사헌부)에서 논의한 중에 8자(字)를 추려 그 죄목을 삼아서 대신들이 자기에 대한 탄장(彈章)을 과중한 것이라 하지 않았다고 허물하고 심지어는 대신과 여러 대부에게 물어서 경중을 헤아려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송 나라 때에 여회(呂誨)는 과중하다는 실수로 은밀히 의논하는 자가 많았사오며, 당개(唐介)는 곧은 체하였다는 죄를 신이 실로 당하겠나이다.” 하다. 그 비답에, “사직하지 말고 물러가 기다리라.” 하다. 집의(執義) 홍여순(洪汝淳), 지평(持平) 조인후(趙仁後)가 사직을 원하며 아뢰기를, “본부에서 병조 당상을 논핵할 때에 천롱권병교건만상(擅弄權柄驕蹇慢上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교만하여 임금을 업신여긴다)이라는 말은 비록 성상소(城上所)의 계사(啓辭)였으나 신등의 뜻으로 말한다면 대간(臺諫)이란 강개하게 말하는 것을 귀중히 여겨서 차라리 과격한 실수가 있을지라도 무기력한 습성은 기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병정(兵政)의 중요한 일을 먼저 행하고 뒤에 아뢸 것인데, 이미 내조(內曹)에 들어와서도 끝내 명을 받지 않았으니, 현저하게 교만한 형적이 있는 것입니다. 신 등이 처음 계사를 논의할 때에도 이 같은 말이 있었사오니 그 과실은 지평 이경률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오니, 청컨대, 갈게 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물러가 기다리라.” 하다. 장령(掌令) 성영(成泳)이 이경률ㆍ홍여순ㆍ조인후의 출사(出仕)를 청하니, 왕이 윤허하다.
●20일
삼공(三公)에게 소명을 내려 인견하고, 그 비망기에, “요즈음 병조 판서 이이(李珥)에 대한 언론의 일로 인하여 대간이 서로 격해져서 쟁변(爭辨)하기를 반복하여 엎치락뒤치락하고, 옥당에서 올린 차자(箚子)에서는 이이를 나라를 그르친 소인배에 비유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우연히 말하는 사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이는 전부터 신진(新進)의 선비를 억눌러 그들이 시국에 따라가고 당파에 아부하는 것을 미워하여 대략 의논을 진술했으므로 시론(時論)을 하는 자들의 마음을 거스르게 된 지가 오래되었다. 그래서 그의 실수를 이용하여 때를 찾고 틈을 기다렸다가 반드시 탄핵하여 제거하고야 말려 한다. 공경대부(公卿大夫)로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도 오지 않는 자가 많건마는 임금에게 거만하다고 논박한 일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대간에서 이이에게만 즉각적으로 파직하려고 하는가. 또 그가 말[馬]을 바치게 하고도 품계하지 못한 것은 허다한 사무로 인하여 진작 품계하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이 어찌 천권(擅權)이라고 하겠는가. 천권만상(擅權慢上)은 인신(人臣)의 극한 죄인데, 이름 지으려면 밝히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인군(人君)이 천한 백성에게도 정상 이외의 죄명을 씌워 함부로 그 몸에 형벌을 가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재상에게랴. 이미 천권만상이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 죄상을 분명히 밝히고 또 유사로 하여금 왕법의 참조를 청하여 만세에 인신이 된 자들을 경계하지 않고, 그저 파직만을 청하기를 을사년의 간신배가 반역으로 지목해서 파직시켜 쫓는 것과 같이 하는가. 이것이 이이가 마음에 불복한 것으로 수치를 품고 움츠리면서 여러 차례 사퇴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말하는 사이에 과연 변명하는 데 이르렀으니, 어찌 언관에게 분심을 가지고 꺼려하고 이기려 하였겠는가. 대간이 귀중한 것은 몸소 공론을 맡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으로 한번 탄장을 내면 인심이 모두 심복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겉으로 공론에 의탁하고서 은밀히 자기 사리를 돌보고 사람을 배척하거나 모함하는 짓을 한다면 어찌 대간의 도리가 있다 하겠는가. 경등이 이이를 나라를 그르친 죄인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분명하게 밝혀서 물리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공격하는 자가 바로 소인(小人)이다. 어찌 임금이 되어 소인을 써서 나라를 다스릴 이치가 있겠는가. 맑고 사특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 오늘에 있지 않은가. 경등은 마땅히 우물우물하여 변별하지 못하게 말라. 대개 신하들이 붕당을 만들면 국사는 날로 그르치게 되는 것인데, 대신들이 능히 변별하지 못하면 장차 이 나라 일은 어느 지경에 두려는가.” 하다. 또 이조 당관들의 천망(薦望)하는 규정을 혁파하게 하니, 이는 경안령(慶安令)이요(李瑤)의 말에 따른 것이다. 승정원에서 그 혁파할 수 없는 뜻을 진술하여 올리니, 그 비답에, “계사하지 못할 일을 어찌 계사하느냐. 계사해서는 안 된다.” 하다. 사헌부의 전원이 사임하매 윤허하지 않으니, 물러가 기다리다. 소사(疏辭)에 대강 아뢰기를, “신등은 모두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언관을 맡고 있으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니 무슨 일이든 진계(陳啓)하지 않음이 없어서 시세(時勢)를 헤아리지 않고 국정을 맡은 신하를 논책하고자 하였사온데, 지금 비망기를 보니, 신등의 죄가 이에 이르러서 큰 것이오니, 중전(重典)을 베푸시어 망언(妄言)한 죄를 다스려 주옵소서.” 하다. 사간원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으므로 물러가 기다리다. 소사에, “삼가 삼공에게 하교하신 비망기를 보니, 지극히 황공하고 놀라 떨리는 마음 가눌 길 없습니다. 신등이 비록 지극히 보잘것없사오나, 어찌 감히 틈을 타 흠이 있기를 기다려 허물 없는 사람을 물리치려 하오리까. 이이(李珥)는 본디 성격이 경솔하여 교란시키기를 일삼아 집요하게 자기 맘대로 하여 나라를 그르치려고 하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므로, 신등도 전부터 의심하였습니다. 근일에 와서는 점차 기탄없이 명령을 봉행함에 있어 현저하게 거만하고 마음대로 하는 형적이 있사오며, 언관을 헐뜯어 배척하고 더욱 잘못을 그대로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신등은 직책이 언론에 있기로 그르침이 적을 때에 막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여 부득이 논핵한 것이온데, 법에 따라 죄를 청하지 못하여 전하의 하교가 이런 극한에까지 이르렀으니, 신등의 죄는 만번 죽어도 마땅하옵니다. 속히 중전(重典)에 처하게 하시어 망언의 죄를 다스려 주옵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병조 판서 이이에 관한 사건은 경등이 비록 유임을 청하더라도 이이가 출사할 리가 없다. 병무(兵務)가 매우 급하므로 임시로 그 직책을 바꾸어 이이의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하나, 북방에 변란이 일어나 장차 국가가 망하게 될 이때에 조정이 서로 어지럽고 또 신과 간신의 분별이 없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가슴아픔을 가눌 길 없다. 이것은 내가 추후에 처리하겠으니, 본부 낭청을 시켜 마땅히 삼공과 의논하여 계주(啓奏)하도록 하라.” 하고, 옥당의 어제 올린 차자에 답하기를, “그대들이 차자로 진술한 뜻을 알았다.” 하다. 옥당의 차자에 대략 아뢰기를, “신등이 삼가 보건대, 병조 판서 이이는 문묵(文墨)으로 출세하여 성명(聖明)의 때를 만나 숭반(崇班)에 뛰어올랐사온데, 일찍이 충의를 다하여 특별한 은혜를 갚으려 생각지 않고 집요하게 제 마음대로만 하여 모든 일을 계획하는 것이 모두 인정에 위배되고 공론에 죄를 지었으니, 공론이 일어나는 것을 어찌 막겠습니까. 우선 근일의 일로 말하오면 큰 일이든 적은 일이든 아뢰는 것이 신하의 직분이온데 대궐뜰 지척에서 말을 바치라는 명을 먼저 행하고 후에 아뢴 것은 국가의 권한을 마음대로 한 것에 가까운 것이오며, 평소처럼 출입하여 고질병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군명(君命)에 거만하게 하고 병조에 와서도 승정원에 나오지 않았으니, 이것은 군부에게 거만하게 한 것에 관련됩니다. 이와 같으니 대간에서 그의 파직을 청한 것은 진실로 마땅한 것입니다. 이이 같은 자는 마땅히 인책하여 허물을 살피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거늘, 감히 거취로 논쟁하고 또 필설(筆舌)을 황홀하게 놀려 공의와 힘껏 다투면서 한편으로는 ‘시론을 거슬렸다.’ 하고, 한편으로는 ‘좌우 신하에게 물어보라.’는 등 애걸하고 구차한 언사로 임금을 움직여 모든 죄를 대간에게 돌린 뒤에 말려는 것입니다. 이는 온 세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여겨 대간을 자기 손바닥이나 다리 사이에서 농락하려고 하는 것이니, 그 공론을 멸시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공론이 있는 곳에는 비록 만승(萬乘)의 높으신 천자라도 몸을 굽히고 따라가는데, 일찍이 재상의 열에 있는 자가 공론을 멸시하고 기탄없이 하는 것이 여기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이대로 자라서 말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장차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분주히 그 명령에 따르고 그의 말을 누구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범저(范雎)가 이른바 아랫사람을 제어하고 윗사람을 가려서 그 사욕을 이룬다는 것과 거의 같습니다. 어찌 통탄하지 않겠나이까. 대간은 임금의 이목이 되어 한때의 공론을 주관하는 것으로, 공론이 통하고 막히는 것은 국가의 치란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전하는 여러 서적을 열람하여 전대의 잘잘못을 널리 살피셨사오니, 어찌 일찍이 자신이 재상이 되어서 대간을 꺾어 욕되게 하고서 그 국가가 안전한 이치가 있었나이까. 지금 말하는 자가 이이를 왕안석에 비유하나 왕안석의 문장과 절행(節行)을 어찌 이이와 비교하겠나이까. 그러나 왕안석의 교건만상(驕蹇慢上)을 이이가 가졌고, 왕안석의 총애를 굳히고 임금에게 요구하는 것을 이이가 가졌으며, 왕안석의 언론을 배척하는 것을 이이가 가졌는데, 전하와 같은 성총으로 어찌 통찰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한 사람만을 소중히 돌보시며 대간을 꺾으시나이까. 신등은 후일의 화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신등이 처음부터 어찌 이이의 방자함이 이처럼 심할 줄이야 생각하였사오리까. 오직 그의 한 생각이 편벽되게 치우쳐서 해독이 자심하리라 여겼는데, 사람의 입을 봉하게 하고 온 나라를 몰고서 가지 않는 곳이 없으니, 이이의 죄는 여기에서 가장 큰 것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치우치게 들으면 간사한 일이 생기고, 한 사람에게만 맡기면 난이 생긴다.’ 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는 공평하게 들으시고 똑같이 보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서 한 사람에게만 맡기고 치우치게 듣는 일을 경계하소서. 다만 이이만을 믿을 수 있고 대간들은 헤아릴 것도 없다고 하지 마시어 한편으로는 사기(士氣)도 북돋아 주시고 또 한편으로는 이이도 한결같이 보호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나이다.” 하다. 이날 옥당에 모여서 장차 일을 의논하려 하다가 도로 헤어졌다 하다. 삼공이 비로소 합문 밖에 나아가자 왕이 비망기를 내려 물으니 삼공이 면대를 청하였다 하다. 영상 박순(朴淳)은 이이의 충간(忠懇)을 극구 진술하고, 또, “전조 낭관(銓曹郞官)이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 그들의 동류를 많이 등용하고 가부를 상관하지 않으니, 이후로는 인재를 선정할 때는 낭관과 삼사에서 참여하여 등용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낭관의 천법(薦法)은 중국에도 없는 일이니, 파하고자 한다.” 하였다. 박순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진실로 그러합니다.” 하였으나, 좌상 김귀영(金貴榮)과 우상(右相) 정지연(鄭芝衍)은, ‘그것을 파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다. 왕이 이이가 소인인지의 여부를 물으니, 영상 박순이 얼굴빛을 가다듬고,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좌상과 우상이 아뢰기를, “비록 소인은 아니지만 그르치는 일이 많습니다.” 하다. 영상이 또 아뢰기를, “만일 이이를 신임하지 않으신다면 성혼(成渾)도 등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다. 또 전랑(銓郞)에게 죄를 주기를 매우 중하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전랑은 죄를 주는 것이 좋다.”고 거듭 하교하다. 이때 영상은 묵묵히 있고, 좌상과 우상은 극히 죄줄 수 없음을 극구 말하고, 또 아뢰기를, “비록 이이를 등용하더라도 한 사람에게만 맡기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다. 이날 계사(啓辭)에 좌상은 상당히 곧게 말하였으나, 우상은 양편을 두둔하는 뜻으로 말하였다고 하다.
●21일
심직(沈直)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근일의 논의는 오로지 아무개(우성전)에게 나와 대간이 밤낮 모여 의논한다.’ 하면서, 문을 닫고 손님을 만나지 말라.”고 권하다. 삼공의 논의에서 박순이 아뢰기를, “이이는 끝내 출사하지 않을 것이고, 병무는 급하니 우선 병조 판서를 가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하고, 김귀영은 아뢰기를, “병무가 한창 급하니 진퇴를 따지기 어려우나 일이 많이 밀려 있으니 가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하고, 정지연은 아뢰기를, “이이의 일은 어제 탑전에서 대강 아뢰었거니와, 이이가 끝내 출사하지 않는다면 일이 많은 때인지라 부득불 갈아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마음을 공평히 하시고 처리하시면 조정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이 걱정하는 바는 조정만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이의 영명(令名)도 보전해 주려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병조 판서는 가는 것이 좋다. 이이는 이미 나라를 그르친다는 소인배로 떨어졌는데, 어찌 영명이라는 것이 있겠는가. 우상의 말은 어쩌면 그리도 우활한가.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나는 매우 측량하지 못하겠노라. 내가 비록 어두운 임금이긴 하나 소인과 같이 일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 이이는 향리로 잘 돌아가서 한가로이 백운(白雲)과 같이 고상하게 지내라. 그러면 누가 그를 구속하겠는가.” 하다. 옥당에서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이이는 이미 소인이 되었으니, 소인을 논한 자야 어찌 소인이라고 하겠는가. 다만 옥당에서 권덕여(權德輿)부제학 와 홍진(洪進) 응교 같은 사람은 일찍이 이이의 충직을 내 앞에서 칭찬한 일이 있다. 소인을 칭찬한 자는 그 몸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홍진처럼 국량이 작은 사람은 진실로 책망할 것도 없거니와 권덕여로 말하면 연로한 사람으로 새로 등용된 선비에게 아부하여 지금은 이이를 소인이라 지목하니, 이는 전후가 번복된 일이 아닌가. 그리고 서얼의 허통 문제에 있어서도 김첨(金瞻)교리 이 먼저 경연에서 계(啓)하였는데, 그것이 만일 이루어진 법을 변란(變亂)시키는 것이라면 김첨이 먼저 꾀하고 이이는 따랐는데, 어찌 김첨으로 하여금 이이를 논박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다. 장령 윤승길(尹承吉)새로 제수되었다. 이 이이가 마음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실수와 방자해지는 조짐을 극언하고, 또 이어 삼사를 박대하는 것을 말하고 사직하고 물러나 기다렸다. 정부에 전교하기를, “홍문록(弘文錄)을 어찌 속히 선출(選出)하지 않는가.” 하니, 정부의 답에, “대제학이 유고하여 하지 못하고 있나이다.” 하다. 승정원에서 임금이 언관을 박대한다는 뜻으로 극언하였으나, 이이를 언급한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또 아뢰기를, “권덕여 등은 비사(批辭)가 엄준하므로 물러가서 죄를 기다리고 있는 관계로 옥당의 하번(下番)이 궐원이며, 양사에서도 물러가 기다린 지 여러 날이 지났으되, 처치(處置)를 얻지 못하고 있어서 지극히 온당치 못하니 권덕여 등을 패초(牌招 왕명으로 승지가 신하를 부르던 일)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홍문관원을 어찌 패초한 때가 있는가.” 하다. 정원에서 재차 계하니, 그 비답에, “권덕여 등 3명은 내가 하문(下問)할 일이 있으니, 혹 나와서 대답하든지 혹 스스로 처리하든지 하라. 그리고 그 나머지는 불러서 출사하게 하라.” 하다. 옥당에서 부름을 받고 와서 사직하니, 답하기를, “이미 출사를 명하였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다. 옥당이 양사가 출사하도록 청하니, 윤허 옥당(玉堂)은 3경(三更) 1점(點)에 나오다. 하다. 전조(銓曹)에서, “병조 판서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임명하게 하옵소서.” 하니, 서서히 하라고 명하다. 생원 허절(許㦢)은 문관 허사흠(許思欽)의 아들로 어릴 적부터 경망하고 방자하며 고담대언(高談大言)을 좋아하면서 명사의 집에 출입하였는데, 우리 동배인 사순(김성일)도 그와 허교하니 동배들간에 비웃다. 자제(子弟)로서 그 아버지를 따라 성주(星州)에 가서 주색에 빠지고 작폐하여 많은 사단이 일어나니 허사흠(許思欽)이 이 때문에 근심하고 분해하다가 병이 생기다. 정도가(鄭道可)와 김보부(金甫夫)와도 친밀하였으며, 또 일찍이 숙헌(俶獻 이이)과 호원(浩原 성혼)의 집에도 출입하였는데, 서로 칭찬함이 너무 지나쳤다. 지난번에는 소를 지어 면대하기를 청하였는데, 경안 령(慶安令)이 했던 것처럼 정원에 올리니, 정원에서는 이미 그 뜻을 알고서도, “무슨 일을 논의하려 하는가.” 물으니, 허절이 거짓으로 말하기를, “동인은 보호하고 서인은 억압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니, 동부승지 김응남(金應南)은 실로 동인(東人)인데, 말하기를, “만일 이 일을 논한다면 나는 혐의할 것이 없다.” 하고, 곧 물리치다. 이렇게 여러 번 올렸으나 여러 번 물리치다. 허사흠이 듣고 그만두도록 하며 엄하게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는 너로 인하여 병이 들었는데, 지금은 또 너로 인하여 죽게 되었다.”고 경계하니, 허절이 답하기를, “아버지께서 당초 저에게 글을 가르친 것은 어디에 쓰라고 한 것입니까. 또 저로 하여금 상소도 못 하게 하는 것은 끝내 무엇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까.” 하니, 이는 벼슬을 얻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날마다 호원의 처소에 가서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와 그 부친의 병을 돌보지 않으니, 허사흠이 말하기를, “너는 나를 위하여 약이나 지어 조리하게 하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듣지 않고 몰래 사람을 시켜 이웃집에서 말을 빌려 날마다 호원의 집에 가니, 그 부친이 괴롭게 여겨 이웃집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 아들 허절에게 말을 빌려 주지 말라.” 하다. 어떤 사람이 허절에게 묻기를, “너의 부친에게 여쭈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자고로 충신이나 의사가 어찌 모든 일을 여쭐 수 있는가.” 하다. 그 형편없음이 이 같은데, 숙헌과 호원은 그를 가사(佳士)라 하고, 대접이 매우 두터우나 사론(士論)은 수치스럽게 여기다.
●7월 9일
어제 석강(夕講)에서 정희적(鄭熙績)이 아뢰기를, “이이가 젊어서 중이 되었던 일로 시의(時議)가 정거(停擧 과거를 못 보게 하는 것)를 논의하니, 심의겸(沈義謙)이 그를 해제하게 하고 그 후 발신한 것은 모두 심의겸의 힘이었으니 신과 같은 광패한 사람을 등용하시면 반드시 듣지 못할 말을 들으실 것입니다.” 하고, 또 홍적(洪迪)이 아뢰기를, “상앙(商鞅)은 경감(景監)으로 인하여 출세하고, 이이는 심의겸으로 인하여 출세하였으니, 그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니, 상왕이 이르기를, “이이는 나라를 그르칠 소인에 불과하고, 나는 경망한 임금에 불과한데 너희들이 이 일을 가지고 다투면 능히 이탕개를 잡을 수 있느냐.” 하다
●11일
“적의 괴수를 잡아 죽인 것은 아주 다행이다. 그러나 그 처사가 의(義)에 합당치 않다. 꾀어다가 같이 말하고 술을 주어 마시게 하고 위협해서 사로잡아 참살했다 하니, 비록 병모(兵謀)는 속임수를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우 좋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앞으로도 가히 죽일 자가 한 사람만이 아님에랴. 금후로는 전번의 계획을 밟지 말라고 하유하라.” 하다. 겸 병조판서 박순(朴淳)이 숙배한 뒤에 전례에 따라 사임하니, 답하기를, “전 병조 판서가 일에 임하여 경솔히 일을 하다가 논박을 받았다. 만일 대신으로 겸임하여 관할하도록 해서 확실하게 의논하게 한다면 일이 아주 온전하게 되고 반드시 실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매양 있는 일이 아니니, 경은 혐의쩍게 여기지 말고 국사에 힘쓰라.” 하다. 재차 사임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고, 또 3차로 사임하며 아뢰기를, “이이와 같은 통달한 재주와 민첩한 학식으로도 어려운 일에 임하여 충성을 다했지만 잘못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소신같이 본래 식견이 없고 게다가 나이 많고 정신이 쇠모하였으니 어찌하오리까.” 하니, 답하기를, “국사가 이에 이르니 겸직을 명하지 않을 수 없고, 경도 어려운 일을 당하여 수고를 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마땅히 병조와 협심하여 힘을 다해서 나의 근심을 덜어 주기 바란다.” 하다.
●8월 5일
...비답에, “어느 승지가 이를 기초(起草)하였는가.” 하니, 아뢰기를, “동료들이 같이 논의하여 기초하였습니다.” 하다. 전교하기를, “모든 승지가 일시에 같이 붓을 잡고 기재했는가.” 하니, 아뢰기를, “서로 상의하여 글을 쓴 것으로, 비록 글씨를 쓴 자가 있기는 하나, 자기의 의견으로 쓴 것이 아닌데, 글을 쓴 자를 물으시니 말할 수 없이 황공스럽고 지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 계사를 보니, 그대들이 사람의 언론을 막아 나의 총명을 가리려는 것인가. 이렇게 하여 끝내 어떤 일을 하려는 것인가. 내가 비록 어리석으나 어찌 그대들이 지적하고 가르칠 바인가. 내가 그대들을 잘 다스리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가. 대개 공론이 사람에게 있는 것은 물이 땅 속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반드시 대간의 말만이 옳고 초야의 말이라서 그른 것은 아니니, 그 사람이 공정하면 그 말도 공정한 것이다. 옛날부터 대간이나 시종(侍從)이란 명칭이 없는 때가 있었을까마는, 옳은 공론이 조정에 있을 때는 드물었다. 공론이 조정에 있으면 정치가 잘 되고, 그렇지 않으면 정치가 어지러운 법이므로, 이것이 백세를 두고 훌륭한 정치가 없었던 까닭이다. 지금 대간의 말에 대해 인심이 불복하고 의사(義士)가 사방에서 분연히 일어나는 것인데, 그대들이 비록 힘을 다하여 미봉책(彌縫策)을 쓰려 하나 되지 못할 것이다.” 하다.
●8일
김우굉ㆍ조인후ㆍ정사위ㆍ이덕열ㆍ이정형과 같이 차자(내가 짓다) 를 올렸는데, 윤허하지 않다. 미시(未時)에 나가 숙직하다. 이날 양사에서, “이번 정원에 대한 처치는 부당합니다.”고 차자를 올리니, 답하기를, “옛날 송(宋) 나라 때에 6적(六賊)이 조정을 장·악하자 이강(李綱)이 조정에서 나가니 태학생 진동(陳東) 등이 상소하여 불가함을 극구 간하였다. 1천년 뒤에 그 풍절(風節)을 듣고 나도 모르게 소매를 걷고 분기하는데, 이제 관학 유생이 조의(朝議)의 마땅치 못한 것과 국사가 날로 그릇됨을 보고 의(義)를 주창하여 서로 이끌고 궐문을 두드리고 상소로 항거하니 그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이 늠름하여 가히 범할 자가 없는지라, 진실로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세차게 흐르는 강물의 지주석과 같다 할 수 있다. 태학은 선을 숭상하는 곳으로 공론이 나오는 바이다. 조정의 시비는 한때에 어지러울 수 있으나 태학의 공론은 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즉위한 이래로 제생(諸生)들의 상소가 한 번만이 아니니 그 중에는 곧은 체하여 귀에 거슬리는 것이 어찌 없겠는가마는, 내가 한 번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고 반드시 온순하고 부드러운 언사로 위로하며 보낸 것은 진실로 국가의 원기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조신(朝臣)은 죄줄 수 있지만 제생의 기절(氣節)은 꺾을 수 없는 것이다. 설사 광사(狂士)의 하는 짓같이 혹 중도에서 지나치더라도 오히려 대접하기를 이같이 못하는데, 하물며 그 정직한 기풍이 푸른 소나무의 높은 절조보다도 뛰어남에랴. 내가 천승(千乘) 나라의 임금으로서도 몸을 굽혀서 겸손하게 대했는데, 낮은 몇 명의 신하가 임금 가까이에 있으면서 방자하게 끼리끼리 짜고서 사람의 말을 두절시키고 임금의 총명을 엄폐하고는 감히 제생을 패란(悖亂)으로 지목하니, 이는 황잠선(黃潛善)의 행위를 따라가려 함이다. 참으로 소인으로 기탄이 없는 자이다. 내가 곧장 귀양보내거나 죽이는 형전(刑典)을 쓰지 않아서 도깨비 같은 무리들이 어두운 방에 날뛰게 하였으니, 이미 형정(刑政)을 그르침이 심하므로 마침내 한(漢) 나라의 원제(元帝)처럼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인데, 너희 양사에서는 도리어 그들을 구하려고 하는가.
●15일
신급의 상소를 보니, 그 대략에, “이이는 본래 동ㆍ서의 당에 참여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야흐로 심의겸이 뜻을 얻었을 때에 병을 핑계 대고 모든 관직을 사면하고 시골로 물러났으니 그의 마음을 캐어 보면 이 어찌 척리(戚里)와 결탁한 자이겠습니까. 그리고 동인들이 국권을 잡은 후에는 더욱 서인을 억제하는 것이 심하여 자기에게 따르는 자는 올려 주고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하였으므로 새로 벼슬한 경박한 자들이 갈림길에서 권세의 경중을 살펴서 향배를 정하고 때를 타서 사리를 탐하고 공격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 어진 이를 방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함이 이르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이와 백인걸(白人傑)이 같은 때에 상소로 그 폐단을 극구 진술한 일이 있었으니, 이이의 본심은 공평하게 협력하는 뜻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인은 함사사영(含沙伺影)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한 번 병조의 판서가 되어 마침 다사다난한 때를 당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알고서는 하지 않는 것이 없었사오니, 그 많은 일을 계획하다가 비록 한두 가지의 엉성하고 오활한 과실이 있었사오나 이것이 어찌 오국전천(誤國專擅)의 죄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처사(處士) 성혼이 이와 같은 망국의 징조를 보고 박양(剝陽)의 통탄을 견디지 못하여 진정을 다하여 상소하고 호연(浩然)히 돌아갔으니, 그 말이 곧고 옳을 뿐 아니라 지공무사(至公無私)함에도 불구하고 언관들은 도리어 거짓으로 날조하는 데 조금도 기탄이 없어 혹은 귀역(鬼蜮)으로 지목하고 혹은 음험하다고 하며 엮어서 죄를 만들어 사지에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어찌 이 같은 악인들이 전하의 조정에 발을 붙이고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이이와 성혼은 사림(士林)의 영수요, 사문(斯文)의 근저(根柢)로서 오도(吾道 유교)가 이들의 힘으로 떨어지지 않고 학자가 의탁하여 귀중히 여기는데, 하루 아침에 무고를 입은 것이 이렇게 극도에 이르니, 사람들이 심복하지 않고 여론이 더욱 격분하여 태학의 유생들이 소매를 걷고 일어나서 강개한 상소를 올려 진정한 자가 수백 명이오니, 이는 실로 온 나라의 공론이고, 사기(士氣)가 크게 진작된 것입니다. 성상께서 가상히 여기어 받아들이시고 많은 칭찬을 보이시니, 전하 가까이에 있는 요사한 무리가 전하가 유자(儒者)의 말을 잘 받아들이실까 하여 은밀히 그들 자제를 사주하고 친구 중에 선비의 갓을 쓴 자들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이에 시세를 따르고 세력에 아부하는 무리가 분주하게 어두운 밤에 사리(私利)로 꼬여서 많은 도당을 모아 별도로 적치(赤幟)의 논의를 세워 일망타진의 계책을 성공시키려 하였으니, 그 음험하고 속임수를 쓴 형상이 또한 너무나도 교묘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안으로는 박근원(朴謹元)이 시종(侍從)의 지위에 있으면서 소장(疏章)을 들이지 않아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밖으로는 김응남(金應南)ㆍ우성전(禹性傳)ㆍ홍혼(洪渾)ㆍ김첨(金瞻)ㆍ김수(金晬)의 무리가 권세를 부리며 사사로 당파와 응원 부대를 만들어 뱀이나 지렁이처럼 얽혀 있고, 매나 개처럼 부리는 자가 몇 명인지 모르겠사오며, 군부(君父)를 협박하고 견제하기를 어린애 다루듯이 하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할 형세가 이미 이루어졌는데, 전하께서는 위에 고립되어 있으니 지금의 국사를 가히 알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는 급박하게 여기지도 마시고 의심하지도 마시고 성스러운 마음으로 결단하시어 후일에 서제(噬臍)의 후회를 마시기를 바라나이다. 전하가 만일 성혼과 이이가 죄가 있다 하시고 신의 말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여기시거든 신의 머리를 베시어 기망(欺罔)한 죄를 바르게 하소서. 신은 차라리 이이와 성혼과 같은 날 죽으려 하나이다. 신이 삼가 생각하오니,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은 신의 친동생인데, 다행히 성상께서 헤아려 주시어 성(城)을 지키고 있사온데, 신자의 직분이옵거늘 무슨 공로가 있다 하시어 면복(冕服)을 신의 아우에게 하사하시고, 또 쌀ㆍ콩ㆍ진기한 반찬 등을 자주 신의 어미에게 내리심에 일가족이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모두 은혜 갚기를 맹세하였습니다. 신립은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죽을 것이며, 신도 가벼이 제 몸 바치리라는 것을 장담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같은 시사(時事)를 보고 차마 침묵하고 있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이 상소를 올리면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압니다. 아우는 밖에서 죽고 신은 안에서 죽는다면 진실로 노모도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어찌 감히 살기를 탐내어 구차하게 살아서 망극하신 성상의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하다. 정원에서 신급의 상소가 그릇됨을 지적하니, 그 비답에, “알았다.” 하다.
●17일
...옳고 그른 것은 양지(良知)의 밝음에 근원하여 안정된 인심에서 발하는 것이다. 조정의 말이라고 해서 중히 하지 못하며 초야의 말이라 하여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니, 진실로 말이 그르다면 천만 명이 말하더라도 부족하고, 말이 진실로, 옳다면 한 사람이 말하더라도 충분한 것이니, 대간의 혓바닥이라고 해서 억지로 결정할 수도 없고, 뭇사람의 세력이라고 해서 강제로 맞출 수도 없다. 그러므로 편당의 논리를 부추겨서 한때에 시비를 어지럽게 할 수는 있으나, 군자의 견해를 밝게 하면 공론은 반드시 백대(百代) 뒤에 판단될 것이다. 아, 예부터 대간과 시종하는 신하가 임금에게 진언할 때에 누가 스스로 그 말이 공론이라 하여 그 임금을 전환(轉環)의 아름다움으로 유혹하지 않았던가. 오직 그때 임금들의 지혜가 족히 그 간사함을 분별하지 못하고 명철함이 그 거짓을 밝히지 못하여 그럴 듯한 방법에 속임을 당하고 여럿이 지껄이는 데에 농락당하여 뒤집힌 길[覆轍]을 또 가게 되어 계속되는 것이 모두가 그런 것이다. 명철한 임금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나 같은 용렬하고 어두운 자에 있어서랴. ... 이제 너희들이 전부터 미워하는 뜻을 품고 형체도 없는 말을 날조해서 방자하게 욕하고 모함하여 이르지 않는 것이 없으니, 천하 후세에서 너희들을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비록 10년을 논란하여도 어찌 그 말에 따라갈 리가 있으랴. 그러므로 속히 논박을 그만두는 것만 못하다.” 하다.
●22일
날씨가 음침하여 어둡고 오후에 비가 오기 시작하여 어두워지면서 점차 굵어졌다. 들으니, 호남에서 초시에 합격한 유생(儒生) 15, 6명이 상소를 하여 간사한 사람을 들었는데 인백(仁伯 김효원)이 우두머리이고, 나도 그 속에 끼었다고 한다. 웃을 일이다. 비로소 변사정(邊士貞)의 상소문을 보니, 그 내용이 지극히 참혹하다.
○ 하항(河沆)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이르기를, “이 상소를 보니, 공사(公事) 중의 뚜렷한 일에서 진실을 잃은 것이 많구나. 이이가 능히 음(蔭) 자도 분별하고 해석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죄목으로 삼기에 이르렀는데, 국가의 급무가 과연 음 자를 주석하는 데 있는가. 그 음 자를 주석하는 것으로 안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는 정책이 되는가. 썩은 선비들의 말은 우습구나. 우선 제쳐두자꾸나.” 하다. 혼원(渾元)이 돌아갈 때에 비가 오다. 일과를 그만두다.
●28일
비로소 호남 유생의 상소문을 보니, 그 내용이 지극히 혹독하다. 동ㆍ서인의 말에 있어서는 인백(김효원)의 이름만 거론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그리고 숙헌(이이)에 대해서는 현성(賢聖)의 학문에 뜻을 두었고 마음은 경국제세(經國濟世)에 있고, 몸은 세도(世道 세상을 올바르게 지도하는 것)의 책임을 자임하여 유속(流俗)에 동요되지 않았다 하고, 또 호원(성혼)은 아름답게도 초야에 물러가 있으며, 행실이 매우 독실하고 의리(義理)의 오묘함을 우뚝이 보았고, 또한 출처(出處)의 정도(正道)를 아니, 이 두 사람은 일세의 유종(儒宗)으로 일국의 중망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이 우러러보기를 태산(泰山)과 북두성(北斗星)보다도 더한다 하고, 박순은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공정하고 곧다고 하다. 또 이르기를, “그 중에 논의를 주장하는 자는 성부(城府)가 매우 깊어 지극히 보기 어려우나 악행을 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그들 수족이 모두 드러났기로 거리에 사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꾸짖지 않음이 없어서 혹은 6간(奸)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10간이라 하기도 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권간(權奸)이라고 하는 것은 작위의 고하에 있지 않고, 논의를 주장하는 자에 있는 것이어서 인물을 진퇴(進退)시키는 데 공정한 의리를 따르지 않고 저희들 마음대로 자행할 뿐이어서 물리치거나 올려 주는 형정(刑政)이 군부(君父)에게 있지도 않고 또 대신에게도 있지 않고, 낭료(郞僚)에게 있으니, 낭료를 권간의 무리라 하여도 어찌 능히 그 실정에서 도망할 수 있습니까.” 하다. 하항의 상소는 엉성하고 기백이 없으며 오활하였으니, 우스운 일이다.
●9월 3일
김홍민(金弘敏)의 상소에 비답하기를, “이 상소를 보니, 다만 삼사의 계사를 그대로 등사한 것이다. 김홍민도 간사한 낭료(郞僚)들과 동류이니 그 말이 이러한 것을 괴이쩍게 여길 것이 없다. 이이가 당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그 같은 말로 나의 마음을 요동시키겠느냐. 아, 진실로 군자라면 그 당이 있음을 걱정하지 않고 오직 그 당이 적음을 걱정할 것이다. 나도 주희(朱熹)의 말을 본따서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어가고자 한다. 이후로는 너희들이 나더러 이이와 성혼의 당이라고 해도 좋다. 너희들은 그래도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 오직 이이와 성혼을 배척하는 자는 반드시 죄를 주어 용서하지 않겠다. 내가 아무리 어둡고 용렬하나 썩은 선비 한 명쯤이야 용납하지 못하겠느냐. 우선 그대로 두고 책망하지 않겠다. 사임한 본직은 체차하라.” 하다. 김응남을 인견하고 호피(虎皮) 등의 물품을 하사하다. 간원의 전일 계사에 비답하기를, “간원에서는 어찌 이 3명을 무죄하다고야 하겠느냐. 단지 화가 만연될까 지나치게 염려해서일 것이다. 이는 마지못하여 한 일이니 이 어찌 나의 뜻을 아는 자이겠는가. 이제까지 나의 말이나 행동은 모두 차례가 있었다. 당초에 삼사의 계사를 보고 내가 그 모함하는 것을 명백히 알았으나, 대번에 위엄과 노기를 보이지 않고 온화하고 완곡한 말로 지성스럽게 타일러서 첫째는 환연히 얼음 풀리듯이 하여라 하고, 둘째는 협심하여 힘을 다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득이한 거조가 있으리라.” 하여 자주 타일렀으되 미로(迷路)만을 고집하기로 혹은 위협하는 말로 움직여 보기도 하고, 혹은 온순한 말로 타이르기도 하였건만 도리어 내 말을 그르다고 하고 그들의 말하는 것이 나올수록 더욱 격렬해져서 시비도 따지지 않고 반성도 없이 붓과 혀를 휘둘러 힘껏 싸워 이기려고 하니, 그것으로 일국의 사람을 미혹시킬 수 있겠느냐. 나의 본뜻은 은근하면서도 각박하지 않다 하겠다. 오늘의 거조를 내가 어찌 바란 일이겠는가. 저들이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다. 오직 세 사람 외에는 다시 없을 것이니 모든 직위에 있는 신하들은 그 마음을 안정하고 조금도 의심할 것 없이 단지 직무에 성실하고 간원에 다시는 번거로운 말을 해서 당사자가 죄를 받게 하지 말 것이다. 김응남으로 말하면 내가 오늘 친히 인견하고 좋은 말로 타일렀으니, 김응남도 반드시 나의 뜻을 이해하였으리라. 우선 임지로 가는 것이 무방하다. 내가 어찌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편벽되게 할 리 있겠느냐. 그리고 영상 박순과 이이의 실수는 이미 밝게 깨우쳐 주었다.” 하다.
●5일
... 이이가 사직 상소를 올리니, 답하기를, “아, 하늘이 우리 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리고자 하지 않는 것이냐. 이 어찌 경과 같은 인물이 때를 만나지 못했단 말인가. 내 생각에는 하늘이 경으로 하여금 경의 마음을 가다듬게 하고 성품을 강인하게 하여 하지 못하는 일을 더 힘쓰게 하여 후일에 보필의 소임을 맡기려는 것인가 보다. 하늘이 경을 곡진하게 성취시켜서 옥 같은 사람을 만들려 함이니, 금일의 일은 하늘이 경에게만 유독 후대하는 것이니 경에게 무슨 손해가 있으리오. 사람들의 떠드는 말은 이제 한 웃음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이니 경은 무엇을 개의(介意)할 것이 있어서 급하게 사직한다는 말을 내는가. 아, 세상은 이미 야박해지고 때는 이미 흐려져서 정성(鄭聲)이 아악(雅樂)을 어지럽히고 질투하고 모함하는 것이 천성처럼 되어 사람을 죽였다는 헐뜯는 말이 증삼(曾參) 같은 사람에게도 미쳤으니, 그 어머니가 북을 던지지 않은 것만은 다행한 일이다. 경은 속히 와서 나를 만나야 한다. 겸하여 회포도 진술하고 대중들의 마음을 위안하는 것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으니 사직하지 말고 역말을 타고 올라 오라.” 하다.
●17일
정철(鄭澈)이 네 번째로 사직서를 올리니 말미를 더 주다. 성혼(成渾)의 사직하겠다는 상소문이 들어갔다. 임금께서 옥당의 차자에 답하기를, “지극한 말이로다. 나에게 이와 같은 신하가 있으니 나라 일은 다시 근심할 것이 없을 것이다. 차자에서 말한 뜻을 다시 유념하겠노라.” 하다. 옥당의 차자에 대략 아뢰기를, “사림(士林)은 본래 같은 사림인데 처음에는 사소한 일로 인하여 점점 어긋나게 되어 동(東)이다 서(西)다란 두 이름을 내걸게 되었습니다. 식자(識者)들은 이로 인하여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근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이조 판서 이이(李珥)가 동ㆍ서 양인의 화평의 의론을 강력히 주장하여 위로 임금님에게 알려서 이것을 사림에게 유시(諭示)하게 된 것은 사실은 나라를 위한 것이지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서인을 도와 주고 동인을 억누른다고 의심을 받게 되어 그 결과 의논이 분분하게 되어 바야흐로 동ㆍ서 양인이 대립하여 싸우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이의 화평론이 당시에 행해졌다면 어찌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이를 배척한 사람들도 처음에야 어찌 감히 이이를 공격할 마음을 먹었겠습니까. 이이에 대한 의심이 오래오래 쌓인 나머지 한두 사람이 주장하니까 나머지 사람들은 이것을 대항하지 못하고 마침내 이렇게 된 것입니다. 송응개(宋應漑) 등 세 사람은 정말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귀양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 과중한 것입니다. 귀양가는 길은 근 20년 동안 귀양간 사람이 없어서 가시가 나 있는데 한 번 이 길을 다시 열게 되면 맑고 밝은 조정에 큰 흠이 될 것입니다. 신(臣)등은 조정의 의향도 이로 인하여 그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태까지 조정에서의 병폐는 모두 의심[疑]이라는 한 글자에 있는 것입니다. 대체 사람이란 남과 나와의 사이에서 지극히 공명하지 못한 것을 의심하게 되면 서로 어긋나게 되고, 서로 어긋나게 되면 그 다음은 서로 막히게 되어 말을 다하지 못하게 되고 정을 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단지 상대방의 잘못만 보고 옳은 점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점점 알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공통된 병폐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특히 심한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폐단을 제거하지 못하게 될 것 같으면 결국 무엇으로 저쪽과 이쪽을 합하여 사림(士林)을 통일하게 되겠습니까. 요즈음 사간원에서 올린 차자를 보니, 비록 쌍방을 진정시키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뜻이 편벽되고 말이 어긋나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대체로 항간의 근거 없는 말들은 사대부(士大夫)로서는 귀로 듣기는 하지만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12월 8일
처음으로 박추(朴樞)의 상소문을 보니, 동인(東人)ㆍ서인(西人)을 들어 말하기를, “소위 동인이라는 것은 남을 해치는 것이 본의이며, 서인이라는 것은 이전부터 지금까지 단지 남의 논박을 받아 왔을 따름이고, 그때 해 놓았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이(李珥)는 충성스럽고 신실(信實)한 신하입니다. 그 나라를 근심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이이와 같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전에 어떤 사람이 죽은 우의정 강사상(姜士尙)의 집 문에 글을 쓰기를, ‘두 아들을 거느리고 동인(東人)에 들어가서 우의정이 되었다.’ 하니, 인심의 분노함은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김성일(金誠一)은 먼 지방의 한미한 선비로 전조(銓曹)의 권한에 참여하여 동서인(東西人)의 물의를 더욱 치열하게 만든 것이 허봉(許篈)보다 갑절 더 심하였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본도(本道)의 순무사(巡撫使)로 있을 때에는 먼저 본도의 각 읍에다 글을 돌려 군사로서 나이가 많고 병들었으면서 아직 제대를 못한 사람들을 관문(官門)에 불러모아 놓고 순무사가 오기를 기다리게 하니 그들은 마치 요 임금이나 맞는 것처럼 태양을 바라보고 구름을 바라보듯 관문에 몰려들어 모두 그 제대를 한다는 즐거움에 겨워 쓸데없는 비용과 헛수고를 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심히 백성들을 속인 것입니다.
...또 우성전(禹性傳)이란 사람은 먼저 배척하는 의논을 내어서 그들에게 붙으니 그 집 문에는 수레와 말이 끊어지지 않고 차 있습니다.
●1584년 1월 19일
들으니, 성균관 학생 홍유경(洪有慶) 등이 숙헌(이이)에게 제전을 올렸는데, 숙헌이 돌아가자 성균관 유생들이 사학(四學)에 통문을 내어 쌀을 거둬 (동학(東學)은 참여하지 않다) 제물을 준비하고서 백단령(白團領 깃을 둥글게 마른 흰색의 공복(公服))을 입고 제물을 갖추어 성균관을 나와서 길 좌우로 갈라져 행인들을 벽제(辟除)하며 행진하는 것이 마치 유생들이 상소할 때와 같았다고 한다. 숙헌의 부고가 발표하던 날에 성균관에 거재(居齋)하는 유생들이 혹은 소식(素食)을 하고 혹은 육식(肉食)을 했는데, 소식하지 않는 자는 제명을 시켰다.
●3월 2일
최언명(崔彦明)이 도승지가 되고, 황경문(黃景文)이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특명으로 이우직을 형조 판서에 임명하다. 들으니, 양사(兩司)에서 죄를 가중하는 법을 행하고자 하는데 그 대상이 이발(李潑) 형제와 김응남(金應南)ㆍ김사순(金士純)ㆍ홍여순(洪汝諄)ㆍ홍혼원(洪渾元) 및 나라고 한다. 이발과 사순이 드러나게 윤근수(尹根壽)와 서로 미워하므로 법을 행함에 그 사감이 개입된 형적이 나타남을 곤란하게 여겨 윤근수를 체직시키고 난 뒤에 거사하려 한다고 한다. 전교를 내리기를, “군현(郡縣) 합병의 편의 여부를 감사에게 물었는데 어찌 속히 회계하지 않는가.” 하다.
●18일
김포(金浦) 유생 홍필신(洪弼臣) 등이 상소하여 이이를 위해 추증하고 대(代)를 잇게 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할 수 없는 일.”이라 하다. 이이에게는 서자 둘이 있고 적자는 없다. 그 한 아들은 평소 친한 이가 성혼(成渾)ㆍ정철ㆍ신응시(申應時)ㆍ윤근수(尹根壽) 제군들이라 그들이 모두 회문(回文)을 내어 미포(米布)를 거둬 납속(納粟)하여 속신(贖身)을 허락받았으나, 그 다른 한 아들은 속포(粟布)가 없어 속신받지 못해 서울에서 오래도록 이런 논의가 있었는데 지금에서야 비로소 발론(發論)되다.
●5월 10일
정철이 숙배(肅拜)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대관(臺官)의 직에 있으면서부터 사람들이 말하기를, ‘대관의 기강의 엄숙하지 못함이 전일보다 더 심하다.’고들 합니다. 이충원(李忠元)의 경박스럽다는 기롱을 하기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신을 지적해서 발언한 것은 아니오나, 일을 논하는 데 성실하지 못하다는 꾸지람은 신이 실로 지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간(臺諫)의 말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옳은 것은 아니며, 다른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그른 것도 아니니, 오직 그 사람됨이 어떠하냐와 그 말의 옳고 그름만 볼 뿐이다. 경은 충직하고 청렴한 사람이라 진실로 남의 없는 허물을 함부로 탄핵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경은 사직하지 말고 다시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이충원 역시 우연히 생각을 진술한 데에 불과할 뿐이다. 대저 모든 일에 나는 조신(朝臣)들이 임금 앞에서 논쟁하고 항변해서 말과 얼굴빛에 나타나더라도 옳지 않음이 없지만, 물러나서는 협력해서 화열하게 각기 맡은 직무를 수행하기를 원하니, 조정에서는 내 말을 잊지 말고, 그 복을 함께 누리기를 바라노라.” 하다. 정철이 재차 아뢰기를, “임금 섬기는 도리를 대강은 알면서 어찌 감히 남의 허물 주워 모으는 일로 마음을 삼겠습니까. 이충원의 말에는 척연(惕然)히 마음이 움직여 여러 번 옳은 말이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나의 행위가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하지 못함을 두려워한 데 불과하며, 물러나서 스스로 반성하여도 대간이란 자리를 감히 스스로 가벼이 하지 못하는 의리였을 뿐이고, 그가 나와 의논을 달리함을 미워하여 그를 배척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한 마디 말이라도 합하지 않으면 곧 의심하게 되고 의심이 오래되면 곧 이편 저편으로 나뉘어 마음이 아주 멀어져 같은 조정에서 적이 되어 국사는 도외시하고, 오직 의논만 비교하여 같은 자는 좋아하고 다른 자는 미워하며, 각기 편벽된 의견만 지켜 돌려가며 서로 배척하는 것이 요즘 조정간의 위태로운 증상입니다. 신이 항상 이를 탄식하고 통한히 여겨 동서의 이쪽 저쪽을 다 깨뜨려 하나로 만들어서 오직 어진 이는 채용하고 어질지 못한 이는 내버려 둘 뿐, 반드시 의논의 차이로 등용하거나 물리치지 않은 뒤에야 거의 일을 그르침이 없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미약한 신의 이 신념은 너무나도 명확하여 매양 사람들을 향해 말하기를, ‘남과 나 사이를 공평하게 하고, 또 나의 사사로운 의견을 버리려면 어찌 〈서명(西銘)〉을 읽어 옛사람들의 미묘(微妙)한 뜻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 하였더니, 듣는 이 중에는 믿는 이도 있고 믿지 않는 이도 있었습니다만, 드디어 천장(天章 임금의 교지(敎旨))을 내리시어 훈계하여 타이르심이 간절하였습니다.
●17일
사헌부에서 또 옥비(玉非)의 사건을 논하니, 윤허하지 않다. 옥비는 경원(慶源) 관비(官婢)인데, 성화(成化) 연간에 한 진주(晉州) 사람이 북도의 변장(邊將)으로 있으면서 경원 기생을 첩으로 들였으니, 그가 곧 옥비이다. 같은 고을의 군사 강필경(姜弼慶)이 경원에 충군(充軍)이 되어 지난 가을에 순찰사의 장계에 고하여 윤승길(尹承吉)을 경차관(敬差官)으로 삼아 옥비의 자손을 조사해 내니 그 수효가 매우 많았다. 사목(事目) 내용에 의하면, 자손으로 남자일 경우에는 그 아내까지, 여자는 그 남편까지 모두 연루하고, 그 붙어사는 자는 그 주인까지 모두 강제로 데려오라고 되어 있었다. 윤승길이 장계를 보내어 아뢰기를, “아내가 남편을 따르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지만 남편이 아내를 따름은 이치에 매우 어긋나는데, 하물며 그가 정처(正妻)도 아닌 우연히 만나 첩으로 데리고 사는 자에게 같은 경우로 논단(論斷)하는 것은 더욱 부당한 일입니다. 더구나 옥비가 남쪽으로 온 지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그 열읍(列邑)에 흩어져 사는 자손들을 사람들이 그의 근본도 알지 못하는데, 지금 붙어살게 했다는 이유로 논함은 더욱 억울한 일이 됩니다.” 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윤승길이 반쯤 조사해 내다가 어버이 병환으로 중도에서 돌아가고, 성영(成泳)이 후임으로 진천(鎭川)까지 와서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김위(金偉)가 그 임무를 대신하게 되어 전후 조사해 낸 것이 5백여 명인데, 자손을 제외하고 아내가 되어 남편을 따라오기도 하고, 더러는 남편이 되어 아내를 따라오기도 하였으며, 그 아내와 남편은 양민(良民)ㆍ천민(賤民)을 가리지 않고 한 집안 식구로 논단하여 집안 식구들이 남아 나는 사람이 없었으며, 천인들은 붙어살게 했다는 이유를 붙여 그 주인까지 아울러 강제로 데려왔으므로 더러는 한 여자에 두 지아비가 아울러 관여되기도 하고, 또 첩으로 인하여 그 정처(正妻)까지 데려오기도 하여 사족(士族)들도 그 속에 많이 끼어 있게 되었다. 데려올 때 도보나 혹은 말도 타고, 혹은 수레로 혹은 업혀서 오는데, 울부짖는 소리가 도로에 어지러우니 듣는 이가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길에서 쓰러져 죽는 자도 많았다. 식사 때마다 반드시 하늘에 기도하기를, “김위(金偉)의 원수를 갚아 주소서.” 하였다. 15일에 사간원에서 장계로 사건을 밝혀 석방해 주고 아울러 김위도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이보다 앞서 우상 정임당(鄭林塘)이 장계를 올리려고 영상에게 말하니, 영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정임당이 연석(筵席)에 들어가 혼자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상은 임금의 의사를 알고 거슬리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고, 정철도 박순과 같았으므로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청의(淸議)가 일어나 정철을 비난하였다. 어제 승지 정사위(鄭士偉)가 또한 이 사건을 계주(啓奏)하였으니, 임금께서 나이 많은 이와 홀어미는 참작하라는 말이 계셨으므로 임금의 의향도 조금 변한 것을 알고 이런 주계를 한 것이다. 그러나 김위에 대해서는 일체 논급(論及)하지 않았으니, 요즘 정철ㆍ박순 등 사류(士類)들의 처사가 이러하다.
※이이가 1583년에 병조판서가 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바치며 십만양병설 등의 개혁안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는 모습이 아주 절절하게 기록되어있다. 임진왜란시 보여준 선조의 무능한 지도력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아주 무능한 대표적 군주로 낙인찍힌 선조이지만, 당시는 32세의 젊은 군주로써 유능하고 충정한 이이를 신뢰하며 당쟁으로 인하여 이이를 제거하려는 동인 신진사류들의 얄팍한 저의를 아주 잘 간파하여 조정하고 있는 선조의 지혜를 살펴 볼 수 있는 내용이 많다. 또 이이를 제거하려는 삼사의 젊은 대간들의 집요함과 소인배적 기질과 비열함까지도 잘 드러나 있으며 당파싸움속에서 군주의 현명함이 얼마나 요구되며 얼마나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어려운지를 여실히 증명하여 주는 글이다. 저자인 우성전은 동인으로서 당시 승지와 사성의 자리에 있으면서 서인인 이이와 성혼을 아주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후일 남인의 거두로써 임진란 때 큰 공을 세웠지만 자신의 글을 통하여 오히려 현명치 못하고 편벽된 자신의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1575년 동서 분당이후 동인과 서인들이 벌이는 권력투쟁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진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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