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계미기사(작자 미상)

청담(靑潭) 2015. 12. 27. 12:27

 

 

■계미기사(癸未記事) : 1583

작자 미상

 

 

조선 중기 동서당론(東西黨論)에 관계된 기사를 뽑아 엮은 책이다. 1책 필사본으로 1583년(선조 16) 1월부터 12월까지 1년간의 시정(時政)을 기록한 것으로,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동서당론에 관계된 기사를 뽑아 편찬하였다. 1583년 2월 이탕개(尼蕩介)가 침입하여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이이는 5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출동시키는 한편, 부방(赴防)하는 군사 중 전마(戰馬)를 바치는 자는 군역을 면제한다는 병조사목(兵曹事目)을 만들어, 왕에게 아뢰지 않고 시행하여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았다.

또, 이이는 왕으로부터 인대(引對)의 명을 받고 입궐하였다가 칭병(稱病)하고 퇴궐하였다 하여 삼사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이에 이이는 사직소를 올리고 귀향하니 서인들은 신구(伸救)하는 소를 올려 동서당쟁은 격화되었다.

동인은 다시 이이를 신구하는 소가 공론(公論)이 아니라고 공격하였다. 그 뒤 왕은 이이를 매국소인이라고 탄핵한 허봉(許篈)을 갑산으로, 송응개(宋應漑)를 회령으로, 박근원(朴謹元)을 강계로 유배하고, 이이의 탄핵에 참여한 대간들은 외임(外任)으로 좌천시켰다.

그리고 이이를 이조판서, 정철(鄭澈)을 대사헌, 성혼(成渾)을 이조참판에 임명하여 서인이 요직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동서당론의 심화과정을 서술하여 서인집권의 정당성을 설명하려 하였던 책이다.

 

●1583년 1월 22일

이발(李潑)을 대사간에 임명하다.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신병으로 관청에 나아가 사직하니, 답하기를, “국가의 병력(兵力)이 진실로 전조(前朝)에 미치지 못하면서 태평하게 백년 동안을 지냈으니 병정(兵政)의 폐단이 오래므로 내 일찍이 깊이 근심하였으나 적당한 인재를 얻지 못하였더니 경(卿)이 고쳐서 새롭게 하고 기율(紀律)을 개혁하고자 하여 전후에 정성껏 하고 이제 능히 기이한 계책을 내어 지금까지 내려오던 폐단을 모두 개혁하고 양병(養兵)의 규범을 만들게 되었으니, 국가에 다행한 일이다. 경이 노력하여 조리(調理)해서 공무를 집행하면 또한 일을 잘 다스릴 것이니 사직하지 말라.”하다. 함경 감사 정철(鄭澈)이 배사(拜辭)하고 소(疏)를 올리니, 답하기를, “기특하도다. 경의 말이여! 이제 경이 멀리 조정을 떠나기 때문에 이러한 충성되고 간절한 말을 하는 터인즉 내 마땅히 유의할 것이니 가서 직무에 힘쓰라.”하다.

 

●4월 14일

송응개(宋應漑)가 대사간, 이식(李式)이 대사헌, 이기(李墍)가 부제학이 되다. 이이가 진폐소(陳弊疏)를 올리니, 임금이 답하기를, “내 우연히 경(卿)이 연전에 올린 소를 보고 있던 터에 지금 경의 소가 마침 왔는데 전후의 상소가 매우 간절하다. 경의 어리석은 임금을 잊지 않는 외로운 충성을 깊이 아름답게 여기노라. 국가의 일은 어진 대신들이 마땅히 맡아서 할 것이고, 높은 학행으로 대간(大諫)이 된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 후회해도 소용 없다. 한 번 잘못한 것도 이미 심한데 어찌 차마 두 번씩 잘못한단 말인가. 공안(貢案)의 일은 조정에서 의논해도 그 의논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감히 경솔히 고칠 수 없거니와 가령 고친다 하더라도 이처럼 일이 많은 때에는 한꺼번에 의논하기가 어려울 듯하노라. 군적(軍籍)에 관한 일은 본조(本曹)에서 이미 명령을 받았으니, 오직 경이 시행하기에 달렸도다. 주현(州縣)을 감축시키는 일은 과연 덕이 부족하고 경박한 나의 뜻에서 나왔으니 다른 폐단을 끼칠까 두려워 다른 것도 감히 이로부터 변경하지 못한 것인데, 경이 권하고 청하기를 말지 않으니 마땅히 시험하게 하리라. 감사(監司)를 오래 재임시키는 일은 새로 창설(創設)하기가 어려워서 지체하고 의심하여 오늘에 이르렀더니, 이제 또한 경의 계획을 좇아서 먼저 양남(兩南)에서 시험하도록 하겠다. 서얼과 천인(賤人)을 허통(許通)하는 일은 사변(事變) 때에 경이 올린 계획에 의하여 바로 시행하라고 명했더니 언관(言官)이 논하니, 다시 비변사에 물어서 상의해서 거행케 할 것이다.”하다.

 

●6월 11일

임금이 변방의 일을 의논하고자 병조 당상(兵曹堂上)을 불렀는데, 판서 이이(李珥)는 내병조(內兵曹)에 이르러서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다. 임금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보게 하고 물러가 조리하게 했더니, 양사(兩司)에서 논하기를, “이이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들어오다가 다만 가까운 내병조까지만 오고 마침내 정원(政院)에 나와서 임금의 말씀을 듣지 않았사오니, 임금을 업신여긴 죄가 크옵니다. 파직을 명하시옵소서.”하고, 여러 날 논핵했으나 따르지 않다.

 

●7월 15일

대간(大諫) 송응개(宋應漑)가 아뢰기를, “삼가 성혼(成渾)의 상소를 보고, 또 영상(領相) 박순(朴淳)이 성혼의 머리를 숨기고 하는 말로 인하여 허봉(許篈)과 신의 몸을 지적하였사온 바 언책(言責)의 관리로서 묵은 원망을 품고 때를 타서 어진 사람을 제거하려 하면 그 죄 마땅히 만번 죽어야 할 것입니다. 적이 생각하옵건대, 신의 집은 6대(代) 전부터 과거에 올라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사온데, 성명(聖明)이 편벽되게 한쪽 말만 들으시어 간사함이 생겨 장차 화의 계제를 이루는 것을 눈으로 보았사오니, 차라리 말 한 마디를 하고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구차하게 면해서 전하를 저버리겠습니까. 이이(李珥)는 본래 한 중으로 그 가까운 친척마저 끊고 인륜에 죄를 지었사오니, 만일 그 죄를 논한다면 선유(先儒)가 진실로 정한 의논이 있을 것이옵니다. 몸을 변해서 속인(俗人)으로 돌아온 뒤로 부지런히 권문(權門)에 드나드니 일세의 맑은 무리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상사(上舍)로 뽑혀 전하께 뵈었을 때에는 관중(館中)의 많은 선비들은 그와 함께 반열이 되기를 부끄러워해서 서로 통해서 뵙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더니, 심통원(沈通源)이 그 아들 심화(沈鏵)를 보내서 앞뒤로 분주히 주선해 가지고 일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가 출세한 뒤에는 심의겸(沈義謙)의 천거로 청현(淸顯)의 벼슬에 올라 그 심복(心腹)들과 결탁해서 죽음으로써 일을 같이 하였으니, 그 평생의 뜻을 가히 알 것입니다. 중간에 자칭 학문에 지향했다고 일컬어 문장(文章)으로 빛을 내어 스스로 당시의 소위 선비들에게 붙어 박순(朴淳) 같은 무리와 같이 사생(死生)의 교분을 맺어 비밀히 폐부(肺腑)를 드러내고 당시 시국 의논을 주장했습니다. 이때를 당해서 심의겸이 외척(外戚)의 권리를 빌리고 왕량(王梁)의 세력을 빌려 입으로는 왕법을 말하고, 손으로는 국가의 운명을 쥐고서 이준경(李浚慶)ㆍ정대년(鄭大年)은 선조(先祖) 때의 옛 신하이며, 김난상(金鸞祥)은 을사사화의 곧은 유풍(遺風)이 남은 신하인데도 심의겸에게 붙지 않았다 하여 모두 배척을 받았사오며, 자기에게 친밀히 하는 사람은 일개 낭관(郞官)이라도 외직으로 나가게 되면 조정을 움직여서 머물기를 청하게 하고, 당비(黨比)로 사사로이 원조해서 하지 못하는 일이 없이 하여 조정의 명령이 조정에서 나오지 않고 심의겸과 박순에게서 나오고 있었으니, 그때에는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오래지 않으신지라 비록 유식한 자가 통분하게 여기더라도 누가 감히 그들의 세력을 무서워하지 않고 전하께 말씀드리겠습니까. 이이가 비록 산야(山野)에 있는 선비로 자처하나 실상은 모주(謀主)가 되어 안팎으로 서로 주선하고 있사오니, 이는 심의겸이 이이와 성혼에게 잊을 수 없는 은혜가 있고, 이이는 심의겸에게 성세(聲勢)로 서로 원조하는 힘이 있는 터이오니, 이는 나라 사람들이 다 함께 분명히 아는 바이옵니다. 그러하온데 이이는 감히 우활한 야인의 태도로 산림 사이에 출몰해서 마치 조정에 나가기 어려운 것처럼 하기 때문에 헌된 명성이 몹시 높아 사람들이 많이 믿고 혹하는 것입니다. 이이는 나와 벼슬하고 물러가는 데에 걸핏하면 옛날 어진 이를 이끌어 비유해서 스스로 당세(當世)에 우뚝이 서서 시비(是非) 밖에 초연(超然)한 듯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의겸이 맑은 의논을 하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을 적에 이이는 비록 분한 마음을 품었으면서도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는 듯이 하여 우선 전야(田野)로 물러가 시세(時勢)를 좌시하고 있다가 어깨를 들먹이면서 큰 소리로 떠들어 양쪽을 화합시키고 함께 협력하도록 하는 체하여 온 세상을 현혹시켰으며, 또 일부러 소(疏)를 올려 심의겸의 단점과 김효원(金孝元)의 장점을 말해서 지극히 공평하다는 이름을 구했사오니, 이는 이이가 아래로는 당시 세상을 속여서 아무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위로는 전하를 속여서 또한 깨닫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아, 제 마음은 속일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의 마음은 속이기 어려운 것이오며, 전하는 속일 수 있어도 귀신은 속이기 어려운 것이오니, 이이의 가슴속을 나라 사람들은 이미 속까지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전번에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심의겸을 탄핵할 적에 이이는 장관(長官)으로서 사사로이 정인홍을 보고 극력 변명했으나 정인홍이 듣지 않자 할 수 없이 뜻을 굽히고 좇아서 마치 처음에는 심의겸의 죄상을 알지 못한 것처럼 하였고, 그 뒤에 정인홍이 또 정철(鄭澈)이 심의겸에게 붙었다 하면서 같이 의논하자, 이번에는 이이가 또 말하기를, “정철과 심의겸은 정분은 비록 두터우나 기미(氣味)와 심사는 현저히 다르다.”하였사오니, 이는 정철을 말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자기 자신을 밝혔던 것입니다. 공론이 일어난 뒤에 이이는 비록 감히 드러내 놓고 다시 심의겸의 입장을 두둔하지는 못했으나 그가 계획한 것은 모두 심의겸을 위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비록 전하께서 진정시키는 데 힘쓰시는 힘을 입어 동ㆍ서의 말이 겨우 조정되었다 고는 하지만, 이이가 감히 드러내놓고 배척해서 심지어는 상소까지도 이것을 나타내서 겉으로는 조정하는 말과 같이 하였사오나 실상은 한쪽을 기울어뜨릴 계획이었사오니, 그 계교가 또한 음흉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양쪽이 모두 그르다고 큰 소리로 떠들고 한쪽으로는 심의겸을 변명해서 심지어는 말하기를, ‘심의겸은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니 별다른 죄악이 없다.’하고, 나중에는 말하기를, ‘정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하여, 이이가 전후에 심의겸을 의논하는 데 세 번 그 말을 변경했사오니 그 마음을 가히 알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니옵고 그가 고향에 있을 적에도 일찍이 염치를 스스로 지키지 못하였고, 여러 고을에서 뇌물을 보내어 그 문에 폭주하였사오니, 이익을 꾀하고 재물을 다투는 데는 있는 힘을 다해서 바다의 이익과 관선(官船)의 세금을 차지하지 않은 것이 없었사오며, 심지어는 옛 도읍의 공서(公署)를 대명(代名)으로 받아 내고, 첨지(僉知) 봉소(奉訴)가 대대로 경작하던 땅까지도 아무런 이유 없이 억지로 빼앗았사오며, 심지어는 그 형이 봉소의 종을 때려죽였는데 관청에서는 죄를 묻지 못했사오며, 대간(大諫)이 되어 조정에 들어갈 적에 버젓이 곡식 1백 석을 지나는 고을에서 받아 본집으로 보내는 등 모든 이익이 있는 곳에는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아무것도 거리낌이 없었사오니, 이는 만 사람이 다 함께 말하는 바이옵고 원근에서 서로 전해오며 웃고 침 뱉고 욕하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옵니다. 그 법을 무시하고 제 맘대로 방자히 하여 행동이 보잘것없는 짓이 끝내 이와 같거늘, 박순(朴淳)은 입만 열면 그를 칭찬하여 전하를 속이고 있사오니 그 뜻을 측량할 수 없나이다. 이이의 본심이 오직 이와 같기 때문에 자기 몸이 전하의 총애를 입어 벼슬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는데도, 국가를 위하여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타인의 재능을 시기하여 그보다 나으려고 다툼질이나 하고 제 맘대로 하여 임금을 속이고 사사로운 일만 행해서 하지 못하는 일이 없이 크고 작은 일들을 반드시 자기의 사사로운 꾀대로만 하고, 일을 행할 적에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여서 국가의 중심을 맡은 지 반년에 그 원망이 창생(蒼生)들에게까지 미쳤고, 전부(銓部)를 주관한 지 1년 만에 선비의 길을 흐리게 하고 어지럽혔사오니, 그야말로 이른바 나라를 파는 간사한 무리로 혹자는 그를 왕안석(王安石)에게 비유하오니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아, 삼공(三公)이란 것은 전하께서 의지해서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온데, 영상(領相) 박순(朴淳)이 끝까지 이이(李珥)를 보호한 것은 진실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지척(咫尺)에 전하를 모시고서 반복하여 그를 찬양해서 거듭 전하의 귀를 속였사오며, 심지어는 비변사에서 함께 일을 한 뒤에야 비로소 서로 안 것처럼 말하여 그 말이 마치 지극히 공변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했사오니, 이런 일을 차마 한다면 무슨 일인들 차마 못하겠습니까. 신이 저번에 이 말을 듣고서 해괴하고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박순까지 함께 논핵하고자 하여 이 말을 동료들에게도 했고, 또 간혹 남을 향해서도 말하였으나, 성명(聖明)께서 살피지 않는 것이 없이 끝까지 진정하려 하심을 믿고 있으므로 일이 소란스러워질까 두려워 참고 있었사오니, 신의 나약함은 죽어도 죄가 남나이다. 이제 탑전에서 신의 성명을 들어 피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오니, 신이 이이와는 애당초 은혜나 원수진 일이 없사옵고 또한 이이가 신의 과실을 말했단 말을 듣지 못했사온데 현저하게 지적을 받으오니, 생각하건대, 혹 신이 박순을 논하고자 한다는 말이 이이의 귀에 들어가서인지 실상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신은 본래 배우지 못하여 어리석고 못났사온데, 다행히 과거에 올라 여러 번 전하를 모시게 되었사옵니다. 죽은 아비 송기수(宋麒壽)가 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항상 시론(時論)에 부회(附會)하지 말도록 경계하였사옵기로 비록 어려서부터 함께 놀고 공부하던 자라도 신은 서로 고요함[靜]을 지키기를 권면하였사오며, 심지어 친구들 사이에 혹 심의겸과 이이를 따르는 자가 있으면 신은 외척(外戚)과 사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혹 책망한 일이 있는데, 이이는 이 때문에 신을 미워하여 항상 신의 과실을 말한 것인지 신은 듣지 못한 일입니다. 성혼(成渾)에 이르러서는 박순 등이 천거하여 실상 심의겸과는 대대로 친분이 두텁사오며 또 박순과도 사이가 몹시 친밀하고, 이이에 이르러서는 정이 골육(骨肉)간보다도 지나칩니다. 성혼은 오직 이들 세 사람이 있는 것만 알고 공론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이가 의논하는 바는 성혼 역시 흑백(黑白)도 분별하지 않고 모두 옳다고만 하여 그가 평소에 논의하는 것이 마치 한 입에서 나온 것과 같습니다. 저번 상소 안에 경상(卿相)을 두루 헐뜯어서 모두 세속 사람으로 만들고 한 사람에게만 의지하려 했사온데, 그 뜻은 대개 박순과 이이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끼리 서로 칭찬하고 서로 응원해서 만일 심의겸의 죄를 의논하게 되면 이이가 나와서 구원하고, 만일 이이의 과실을 배척하게 되면 박순과 성혼이 또 그를 위해서 구원하여 서로 이끌어 전하의 총명을 속이고 가려서 감히 삼사(三司)의 의논하는 바를 공평하지 않다 하오니, 모르겠지만 성혼의 마음은 과연 공평한 데서 나온 것입니까. 저번에 본원(本院)의 관리가 전하의 교서에, ‘이이의 죄가 이와 같은데 파직만을 청하는 것은 을사년의 간인(奸人)들의 소행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하였으므로 미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능히 법에 의하여 죄를 청하지 못했으므로 피혐의 말을 한 것뿐이지, 처음에야 어찌 참으로 죄를 더할 뜻이 있었겠습니까. 이는 성혼이 대간(臺諫)이 지나치게 의논한 죄를 다스리고자 하였사오나 스스로 엄한 법률을 쓰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아, 신 같은 고깃덩이는 역시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묵은 원망을 품고 배척해서 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사오니 죄는 진실로 만번 죽어 마땅하옵니다만, 삼사(三司)에 이르러서는 전하께서 고문(顧問)하시는 데 갖추고 이목(耳目)을 부치시는 자리이기 때문에 조종(祖宗) 수백 년 이래에 일시의 인재를 아끼고 예로 대접하고 높이 권장해서 국가의 명맥을 삼았는데, 성혼은 어떤 사람이기에 스스로 산야(山野)의 선비란 이름을 가지고 감히 당비(黨比)의 모책을 행하여 마침내 삼사(三司)를 상영(商英)과 윤색(尹穡)에게 비유하였사오니, 이는 전하의 온 조정의 신하들을 모두 소인(小人)으로 만든 것입니다. 좌의정 김귀영(金貴榮)은 이를 변별해서 아뢰고자 하지 않은 것이 아니오나, 감히 이이(李珥)를 군자라 하지 않은 것은 그 뜻이 있는 것이온데, 도리어 대신들에게 엄준한 교서를 내리시오니, 신처럼 말단의 지위에서 소원하게 있는 자가 말을 하면 화가 이를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나, 일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는 것은 그 종사(宗社)에 관계된 데야 어찌하겠습니까. 저번에 경안 령(慶安令) 이요(李瑤)가 면대한 일은 밖으로 흘러다니는 말에 모두 이이 등이 시켜서 한 일이라 하오니 대개 이들은 서로 결탁한 지 이미 오래여서 뿌리가 이미 깊사온즉, 당(黨)을 위해서 죽을 마음만 알고 다시 전하가 계신 줄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임금을 속이고 사사로운 일을 행해서 이런 극한에 이르러서도 더욱 거리낌없는 것이오니 상제(上帝)가 밝게 임하심에 신은 실로 마음아프나이다. 신이 남의 지척(指斥)을 받아 관직을 욕되게 하였사오니 잠시라도 자리에 있을 수 없사옵니다. 청컨대, 파직시켜 주시옵소서.”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의 말이 가령 모두 옳다 하더라도 지금 말한 것은 충성스럽지 못하니 본직(本職)을 갈게 하라.”하다.

 

●18일

사간 성낙(成洛)과 정언 황정식(黃廷式)이 아뢰기를, “이이(李珥)가 군사를 주장하는 관원으로 함부로 행한 일이 많기로 그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보통으로 탄핵했더니, 이이는 먼저 스스로 의심해서 심지어 간관(諫官)과 다투어 변론해서 말을 많이 허비해서 공론을 더욱 격하게 만들었나이다. 더구나 이이의 사람됨이 오활하고 주견(主見)이 편벽되고 고집스러워 시끄럽게 싸우는 데 치우치고 고요한 도량이 없어서 모든 시행한 일이 걸핏하면 물정(物情)에 어긋났는데, 자기 스스로는 천하의 일을 담소(談笑)하는 사이에 정해질 것으로 알고, 제 역량이 이 세상을 담당하지 못할 줄은 알지 못하였나이다. 그리하여 나라 일을 맡아본지 오래지 않아서, 중외(中外) 사람들이 시끄럽게 자기들의 삶을 즐기는 마음을 잃었사오니, 오늘날 논하는 바는 모두 이이 자신이 스스로 취하지 않은 것이 없나이다. 성혼(成渾)이 그와 가장 친했기 때문에 좋아하기만 하고 그 허물은 알지 못하여 심지어 전하께 글을 올려 구원하려 한 것이 많사와 조정으로 하여금 안정되지 못하게 하고, 사림(士林)으로 하여금 스스로 위태롭게 만들었으면서 당연히 여겨 일어난 공론을 가지고 원망을 품고 남을 해치려는 함정을 만든 것으로 돌렸습니다. 박순이 면대해서 아뢴 말은 비록 스스로 화평하게 한다고 말했사오나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언관(言官)을 억제하고자 했사오며, 심지어 그 이름을 들어서 배척하기까지 했사오니 이 역시 대신으로서 국가를 다스리는 처사가 아니옵니다. 또 송응개(宋應漑)가 근원을 캐보려는 의논을 하고자 하자 유영경(柳永慶) 등이 중지시켰사오니, 이는 역시 일에 임하여 신중하게 해서 허물 있는 곳에서 다시 허물이 없기를 구한 것이오니, 대간(臺諫)으로서는 별로 과실이 없습니다.

 

●19일

양사(兩司)에서 다음과 같이 합계(合啓)하기를, “영상 박순은 본래 조그만 그릇으로 문묵(文墨)의 조그만 재주를 가져 마음을 간사하게 쓰고, 행동을 교활하게 해서 자기의 득실에만 급하고 염치는 돌보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심의겸의 심복이 되어 모든 조정의 하는 일과 인물의 진퇴를 한결같이 심의겸의 지시를 좇아 국가의 권리를 맘대로 농락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역시 심의겸의 문객(門客)이거나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박순은 이 사람들과 함께 사생(死生)을 맹서하고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박순과 이이는 성혼을 산림(山林)의 높은 선비라고 칭찬하고, 성혼은 박순과 이이가 일대(一代)의 어진 신하라고 칭찬해서 안으로는 외척을 의지하고, 겉으로는 헛된 명예를 빌려서 서로서로 추대해서 성세(聲勢)가 장황하오니, 일시(一時)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기면서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8월 28일

정이품(正二品) 이상을 부르라고 명하여 선정전(宣政殿)에서 만나 보시고, 하교하기를, “요사이 조정이 깨끗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 두 사람 때문이니 이들을 멀리 귀양보내고자 하는데 어떠하냐?”하니, 좌우가 모두 아뢰기를, “당초에 동서(東西)로 분당(分黨)된 것은 비록 이 두 사람에게서 시작되었사오나, 지금은 모두 외지(外地)로 나가 있어서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고 있사오니 죄줄 필요가 없나이다.”하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ㆍ허봉(許篈) 세 사람은 나도 간사함을 아나니 멀리 귀양보내는 것이 어떠하냐?”하니, 좌우가 아뢰기를, “이런 사람들은 비록 지나친 말이 있다 하더라도 성명(聖明)의 세상에 말 때문에 죄를 줄 수는 없나이다.”하고, 힘써 변명하여 구원했으나, 정철(鄭澈)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 사람들은 그 죄를 분명히 보여서 시비(是非)를 정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하다. 이에 송응개를 회령(會寧)으로, 박근원을 강계(江界)로, 허봉을 종성(鐘城)으로 귀양보내다.

 

●9월 2일

대사간 김우옹 등이 아뢰기를, “어제 세 사람을 귀양보낸 것은 일을 책망하는 것이 너무 중했나이다. 이 사람들은 진실로 죄가 있사오나 조급하고 망령됨이 지나칠 뿐이온데, 형벌을 너무 중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국가의 장구한 계책이 되지 못합니다. 당초에 이이(李珥)가 국가의 중임을 맡았을 때 재주는 소활하고 뜻이 편벽되어 말하고 일처리하는 것이 인심에 거슬리므로 언관(言官)들이 일에 따라 논박하고 바로잡은 것은 진실로 마땅한 일이옵니다. 송응개와 허봉 등은 한갓 이이의 옳지 못한 점만 보고서 탄핵하는 말이 크게 알맞지 못했사오며, 또 송응개는 이미 지척(指斥)을 받았는데도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고 박순과 이이 ㆍ성혼을 배척하여 온당치 못한 말을 많이 했사오며, 유생들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논의가 편벽되었사옵니다. 승지(承旨)가 임금께 아뢰는 것은 당연한 직책이지만 박근원 등이 사리(事理)를 분석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말을 많이 아뢰었사오니 모두 죄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그 본정(本情)을 살펴본다면, 위로 전하를 믿고 제 맘에 있는 것을 모두 아뢰어 그 지나침을 깨닫지 못하였사오니 어찌 깊이 죄줄 게 있사옵니까. 만일 붕당을 만들어 성명(聖明)을 가린 것으로 죄를 삼는다면 온 나라가 모두 그의 원통함을 아옵거늘, 어찌 모든 대부(大夫)와 국인(國人)들의 동정(同情)을 살피지 못하고 기회를 잃은 것을 불만스럽게 여겨서 때를 타 음해하였다는 한 마디 말로 죄를 결정하겠나이까. 청컨대, 세 사람을 귀양보내는 명령을 거두시옵소서. 김응남(金應南)은 오랫동안 경연에서 좋은 말을 여쭌 공이 많고, 승지(承旨)가 된 뒤에도 부지런하고 힘을 다하여 전하께서 일찍이 의지 하시고 총애하신 터이온데, 죄명(罪名)이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서서히 젖어드는 참소를 믿으시고 도깨비가 사는 시골로 보내시나이까. 요사이 배척하고 내쫓는 것이 분분하여 명류(名流)가 거의 없어지고 참소하는 이들이 틈을 엿보아서 대성(臺省)이 비어 가고 있어 백료(百僚)들이 한심스럽게 여기고, 충성된 사람들의 행동이 꺾이고 있사오니 크게 사직(社稷)의 복이 아니옵니다. 청컨대, 김응남을 제주(濟州)로 보내라는 명령을 거두시옵소서.”하니, 답하기를, “국가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세 간사한 자는 결단코 용서할 수가 없다. 김응남은 나도 과연 그의 부지런함을 사랑해서 실지로 믿어 의심치 않았기로 경안 령(慶安令)이 면대해서 배척할 때에도 의심치 않았었다. 그 후 조회에 임해서 우연히 하교하기를, ‘김응남이 능히 자기의 직책을 살필 줄 안다.’하니, 송응개(宋應漑)가 문득 몹시 칭찬하였는데, 지금 와서 보니 송응개는 간사한 자들의 괴수인데 김응남이 이 역적에게 칭찬을 받았으니 그와 함께 붕당을 맺었음을 분명히 알 것이다. 근래에 경안 령이 면대하기를 청한 것이 이이(李珥)가 시킨 것이라 하지만 이런 말들은 필시 김응남의 무리들이 자기의 이름을 직접 지적한 것이 분하기 때문에 간사한 말을 만들어 모함한 것이로다. 죄상이 이미 나타났으매 내 실로 몹시 미워하노니 제주로 보내도록 한 것은 오히려 그에게는 다행한 일이다. 만일 지난 일을 고쳐서 새로운 사람이 된다면 훗날 반드시 사랑을 받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하다.

 

●27일

이조 판서 이이가 서울에 들어와 숙배(肅拜)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위로한 다음 하교하기를, “내가 한(漢) 나라 원제(元帝)처럼 소인(小人)들을 배척해 멀리하지 못하니 국가가 거의 망하리로다.”하니, 이이가 대답하기를, “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宋應漑)는 진실로 간사한 사람이오나 허봉(許篈)은 나이 젊고 경망하지만 그 재주가 아깝고 간사한 사람은 아니온데도 이 세 사람이 지나친 벌을 받게 되니 같은 죄를 진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합니다. 모름지기 너그러운 처분을 내리시옵소서.”하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 일은 내 이미 정했으니 경(卿)은 다시 말하지 말라.”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비유하옵건대, 10인이 도둑질을 했는데 그 중에 3명만 중한 죄를 받고 나머지 7명은 편안히 사모(紗帽) 차림으로 일을 보는 것과 같으니 이는 왕정(王政)에 매우 편벽된 일이옵니다. 또 이 사람들은 비록 석방해서 고향으로 돌려보내더라도 어찌 다시 조정을 어지럽히겠습니까. 또 같은 죄를 진 사람으로 혼자만이 벌을 받는데 다른 자는 한 사람도 그 벌을 함께 받으려 하지 않사오니 그들이 의기가 없는 것을 알 것입니다.”하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그들의 뿌리가 이렇게까지 박혀 있는 줄은 몰랐도다. 그때에 한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으니 가령 송(宋) 나라 정강(靖康)ㆍ덕우(德祐) 연간의 환난이 있었을 때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었다면 이는 가히 탄식할 일이로다.”하니, 이이가 또 아뢰기를, “그렇다 해도 권간(權奸)이 국가의 일을 맡은 때와 같지는 않습니다. 만약 지금 동서의 뿌리가 박혔다고 한다면 옳지 못합니다. 지금은 한때의 선비라고 하는 자들이 그 의논이 같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이는 식견이 없어서 그러한 것이옵니다. 저들은 스스로 선비라 하는 까닭에 비록 성혼(成渾)이라도 용서하지 않은 것이니 선비들의 하는 일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이들을 간사하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오니 간사한 사람은 반드시 임금의 뜻을 탐지해서 교묘하게 맞추는 것이온데, 저들은 임금의 뜻을 돌리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고집하고 있으니 간사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지금 서(西)를 옳다고 하는 자도 반드시 모두 군자가 아니고, 동(東)이 옳다고 하는 자도 반드시 모두 소인이 아니므로 지금은 이들을 분별해서 쓰기가 어렵습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신하가 되어 훌륭한 임금을 만나 도(道)를 행하게 되오면 반드시 가족 같고 부자(父子)간처럼 되어서 참소가 이간질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된 뒤에야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이온데, 근래에는 나이 젊은 무리들이 조정의 권력을 잡은 지 30여 년이 되었사오니, 물건이 극도에 달하면 돌아오는 이치이온즉 이제는 모두 위에서 살피실 때이옵니다. 다만 벼슬이 높은 자가 만일 시론(時論)을 주장한다면 권간(權奸)이라는 혐의를 받기 쉽고, 또 비부(鄙夫)들은 도리어 나이 어린 무리들에게 붙어서 벼슬이나 할 계획을 하게 될 것이오니, 이로써 정치가 타락하게 되는 것이옵니다. 반드시 인망(人望)이 두텁고 물정을 진압할 사람을 얻은 뒤에야 조정(朝廷)을 맡길 것이오나 그러한 사람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신(臣) 같은 사람은 인심을 누르지 못하오니 저들이 어찌 마음으로 복종하겠습니까. 성혼(成渾)이 만일 올라온다면 가부(可否)를 서로 의논할 것이오나 이 사람인들 어찌 일을 해 나가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경(卿)이 있으니 내 마땅히 위임하겠노라.”하다. 이이가 아뢰기를, “지금은 인재(人才)가 없사와 문사(文士) 중에 쓸 만한 사람을 더욱 얻기 어렵사온데, 정여립(鄭汝立)이 아는 것이 많고 재주가 있사오니 이야말로 실로 쓸 만하오나, 남을 업신여기는 병통이 있나이다. 이번에 천거를 했는데도 낙점이 되지 않은 것은 참소하는 말이 있어서가 아니옵니까.”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무런 훼방도 칭찬도 없었다. 그러나 이 어찌 쓸 사람이겠는가. 대개 사람을 쓰는 데는 한갓 그 이름만 취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시험해 써 본 뒤에야 알 것이로다.”하다. 이이가 또 아뢰기를, “정구(鄭逑)가 쓸 만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불러도 오지 않으니 어찌하리오. 천천히 또다시 불러 보리라.”하다. 이이가 아뢰기를, “모든 특소(特召)라 하는 것은 모두 전하의 뜻이오니 감히 일을 담당하지 못하겠으므로 오지 않는 것이오니 성혼(成渾)이 오지 않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성혼이 전에는 전혀 벼슬할 마음이 없어서 고집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 전 같은 고집은 없어졌사오나 병이 있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한가한 벼슬을 주어 참찬관(參贊官)을 겸하게 하거나 혹은 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에 참석해서 전하를 돕게 하오면 유익함이 있을 것이오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계급인들 무엇이 아까울 게 있사오리까.”하다. 임금이 이르기를, “김우옹(金宇顒)은 어떤 사람인가?”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착한 사람이라 할 만은 하오나 시비(是非)에는 밝지 못한 자입니다.”하다. 이이가 또 아뢰기를, “한연(韓戭)은 미치고 망령된 사람으로 그가 한 일이 진실로 죄가 있사오나 죽이기까지 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임금을 업신여기고 무도(無道)하다는 것으로 죄명을 만들어 자백시키려 하기 때문에 그가 항복하지 않은 것이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나를 임금으로 여긴다면 감히 이런 일을 하겠는가. 이는 임금을 무시하는 것으로 전례를 빙자하면서 실지로는 제 마음대로 행한 것이니 이는 간사한 사람이고 광망(狂妄)한 사람은 아니다. 박근원(朴謹元)은 군신 사이를 막고 가렸으니 조고(趙高)와 같고 한연은 이사(李斯)와 같다. 정원(政院)에서 비준을 받아야 한다 하고 곧장 소장(疏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역시 옛 법이나, 박근원이 비로소 이 법을 시작한 것이니 만일 옛 법을 깨트리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박근원의 소행이 있을 것이로다.”하다. 이이가 또 아뢰기를, “화평히 할 의논을 주장하는 자들은 혹 ‘전일 삼사(三司)의 사람들은 모두 쓸 만하다.’하오나, 신의 생각으로는 조정에서 일조(一朝)에 만일 이 사람들을 모두 쓴다면 의논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서 마침내 통일되지 못할 것이오니 모두 다시 쓰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다.

 

 

송응개(1536-88)는 1583년 대사간이 된 뒤, 동·서 분당(分黨) 이후에는 동인의 중진으로서 활약하였다. 이 때 헌납 유영경(柳永慶), 정언 정숙남(鄭淑男),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허봉(許篈)과 함께 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장흥부사로 좌천되고, 다시 회령에 유배되었다. 강계·갑산에 귀양간 박근원·허봉과 아울러 세칭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하였다. 이 때 조헌(趙憲)을 비롯, 전라도·해주 등지의 유생들로부터 맹렬한 배척을 받았다. 위 글을 통하여 송응개 같은 간신이 온갖 감언이설로 얼마나 임금의 눈을 가리고 속이고 있는지, 이이를 모함하는 정도가 얼마나 극심하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송응개를 비롯한 동인무리들은 양사의 대간직을 차지하고 이이, 성혼, 박순 등을 끊임없이 모함하고 비난하고 있다. 저런 간신 모리배는 능지처참을 당하면 딱 좋은 인물일진대 어찌 53세까지나 살았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2000년 이회창 대권후보의 아들 병역비리(무죄로 판결)를 조작한 무리들(사기범 김대업, 천모, 설모, 이모 등 청치인들)이 버젓이 살아 큰소리 치는 세상이다. 총리까지 지낸 어느 야당 지도자는 총리 재직시 10억 여원을 수뢰한 죄로 대법원 판결까지 받고도 <국민>이며 <정의>를 운운하였다. 과연 세상에 정의란 존재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존경할 만한 정치인은 아예 없다고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들이지만 야당사람들 중에는 정말 용서가 안되는 사람들이 많다.

이이가 정여립(1546-1589)을 추천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는 정여립을 잘 못 보고 있고 오히려 선조가 그의 인간됨을 잘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해인 1584년(선조 17년) 정여립은 수찬이 된 뒤 이이ㆍ성혼ㆍ박순(朴淳) 등 서인의 주요 인물을 비판하고 동인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런 급변의 원인은 확실치 않다.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그의 직정적(直情的)인 성격을 문제 삼아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이런 그의 기질이 동인의 영수인 이발(李潑, 1544∼1589)과 좀 더 잘 맞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아무튼 그는 갑자기 당파를 바꿨고, 선조는 그것을 비판했다. 그러자 정여립은 즉시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런 행보는 그가 직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판단을 뒷받침해 준다.

오늘날, 말로는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척하지만 기실은 오직 자신의 영달만을 좇아 망언을 일삼는 정치인들이 대한민국에 가득한 세상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불신과 비난을 한 것 뒤집어쓰고 있는 저들은 오늘도 내년 총선에서의 의석자리를 둘러싼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다. 새누리당은 대통령과 친박파들이 민주주의를 훼손시키면서까지 권력투쟁을 촉발시켜가고 있고, 새정치연합은 문제인을 비롯한 친노파들이 오로지 당권을 유지하기 위해 당이 사분오열되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무조건 나만은 국회의원 뱃지를 차야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성과주의 독선적 통치스타일은 비록 성격과 방향은 다르지만 노빠들의 포퓰리즘을 등에 없고 제멋대로였던 노무현 대통령이나 그저 비슷한 수준으로 보인다.  결코 큰 인물들이 못된다. 교수들이 2015년을 되돌아보는 사자성어로 혼용무도(昏庸無道)를 선정하였다. 혼군은 사리분별이 어두운 군주요, 용군은 무능한 군주라 한다.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 때문에 천하가 일을 잃어 나라가 어지러워졌다는 의미이다. 임란이 일어나기 10여년 전의 글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30대의 선조는 젊은 賢君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당하면서부터 취하는 태도는 아주 어리석은 군주였다. 한 나라의 지도자의 자질과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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