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1. 갑진만록
■대동야승
72권 72책. 편자 ·간년 미상. 규장각도서. 수록된 저서가 57종 13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조선 개국 초부터 인조 때까지 약 250년 동안에 나온 역사관계의 만록(漫錄) ·야사(野史) ·일기 ·전기 ·수필
·설화(說話) 등의 저술과, 역대 왕조의 일사(逸事) 및 명인들의 일화(逸話) ·소담(笑談) 등이 광범하게 수집
되어 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이이(李珥)의 《석담일
기(石潭日記)》, 김시양(金時讓)의 《부계기문(涪溪記聞)》, 작자 미상의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남
효온(南孝溫)의《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등이 채록되어 있다. 당파를 초월하
여 다양하게 채집됨으로써 여러 사화(士禍)와 당파의 분열 및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史料)이다. 또, 당시의 풍속과 세정을 널리 살필 수 있다.
■갑진만록
1권 1책. 1604년(선조 37) 갑진년(甲辰年)에 쓰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제목을 ‘갑진만록(甲辰漫錄)’이라고 하
였다. 저자가 선조 초기부터 수필체로 적은 《문소만록(聞韶漫錄)》의 속편으로 서술한 것인데, 주로 임진왜란 후 명나라의 원군처리(援軍處理)에 관한 내용과, 그 후의 명나라 사신(使臣)의 동태 및 과거(科擧) ·분
당(分黨) 등에 관한 사실을 단편적으로 기술하였다. 이 책은 《대동야승》에 《문소만록》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저자 윤국형(尹國馨, 1543년 ∼ 1611년) 윤선각이라고도 하는데 처음 들어보는 고급관리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왜군과 싸웠으나
병으로 실패하여 벼슬을 잃었다. 1594년에 다시 등용되어 병조참판·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병으로 물러났
다. 그 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공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마음이 어질고 넓었으며 언제나 충
성과 믿음으로 왕을 모시었다고 한다.
■수록내용중 발췌글 및 비평
○ 무술년(1598, 선조 31) 관왕이 비록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장수라고는 하나, 남의 손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고, 공이 후세에 끼쳐진 사람도 아닌데, 중국에서 이처럼 존경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의 말에는,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을 가리킴) 때에 신병(神兵)을 내어 도
왔다.’ 하나, 알 수 없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마치 공자처럼 민간에서 추앙되고 신앙의 대상이 된 사람이 관우이다. 윤국형은 그 까닭을 괴이하게 여기고 있다. 이는 오늘날 특정종교에 자신의 모든것(정신, 시간, 재물등)을 바치면서 뜨거운 믿음을 가졌으니 자신은 반드시 죽어서 천국(천당, 극락, 여하튼 가장 바라는 사후세계)에 간다고 믿으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일과 모든 것까지도 다 그 분의 뜻이라고 당당하게 역설하는 사람들을 말은 못해도 별스럽다고 여기는 것과 별반 다름 아니다.
○ 중국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 중에 태감(太監 환관)은 으레 많은 뇌물을 요구하고, 문관은 혹
청렴하고 간결하여 법도로 처신하고, 혹은 시주(詩酒)와 풍류(風流)로 그 이름을 남기기도 하며, 그렇
지 않다면 그저 평범할 따름인데, 아무리 청렴치 못하다는 비난을 듣는 사람이라도 태감의 무리들보다
는 나았다.
만경리(萬經理 이름은 세덕(世德))가 양호를 대신하여 나와서는 태만하여 법도가 없고, 구차스럽게
이익만 추구하여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었다. 귀국할 때 짐바리가 길을 메웠다.
자고로 중국이 우리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때 환관을 파견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는 황제가 우리나라를 업수이 여기기 때문이다. 학문을 바로 하여 과거에 급제한 지식인을 보내 외교를 해야 하는데, 황제 자신이 총애하는 환관들을 보내 마치 대접이나 실컷 받고 오라는 양 파견하니 온갖 불상사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두어 달 전에 중국 모 지역의 총영사와 영사들의 치정사건이 일어나서 외교 망신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총영사는 지난 대선에 선거운동 웅변가로 차출된 인사로 경력이 학원강사여서 외교관으로는 전혀 부적격한 사람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잘못쓰는 건 변함이 없다.
○ 중국의 방방곡곡에는 모두 점포가 있어 주식(酒食)과 거마(車馬) 등의 물품이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다. 비록 천리 먼 길을 가는 사람일지라도 은자 한 주머니만 차고 있으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그 제도가 매우 편리하였다. 우리나라 백성들은 모두 가난하여 저자나 행상 이외에는 사고파는 것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오직 농사로 생활을 꾸려갈 뿐이다. 호남과 영남의 대로에 주점이 있기는 하나 행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술과 꼴ㆍ땔나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여행 물품을 가져가는데, 멀리 가는 사람은 두세 마리의 말에 실어가고, 가까워도 한두 마리의 말이 필요할 정도여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병통으로 여겨 온 지가 오래되었다.
양 경리(楊經理 이름은 호(鎬))가 우리나라에 와서 중국을 모방하여 연로(沿路)에 모두 점포를 설치하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기 물건을 대도록 하였으니, 뜻은 매우 훌륭하였으나 습속이란 고치기 어렵고 재력도 미치지 못하여 사람들이 그대로 따르려 하지 않았다. 수령들이 죄를 면하기 위하여 중국 장수가 지나갈 때면 관에서 물건을 준비하여 길 왼편에 늘어놓고 매매하는 듯이 하다가, 지나간 다음이면 거두니, 도리어 아이들 장난만도 못하여 중국 사람에게 비웃음만 샀으니 한탄스런 일이다.
조선이 성리학에만 치중하여 사농공상을 지나치게 구분하고 공상을 천시하니 상공업이 일어나지 못하였다. 고루한 성리학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성리학과 그 고집을 꺾을 제왕도 학자도 애초에 나올 수도 실천에 옮길 수도 없었다. 중기들어 이수광을 선두로 일단의 선각자인 실학자들이 상공업중시를 주장하고 나섰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아! 그러나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나 소위 역사학자들은 지나친 민족주의와 민족사관에 포로가 되어 이에 대한 비판은 형식에 그치고 있다. 무조건 우리나라 역사라면 찬사만 늘어 놓으며 그것이 애국이라고 여긴다.
양경리라는 중국관리가 우리나라에 와서 정책적으로 조정의 허락을 받아 상업발달을 꾀하였다는 사실을 처음 대하거니와 수령들이 극히 수동적으로 형식적으로 하는 시늉만 하니 그 정책이 성공할 리가 없다. 아아! 부끄럽다. 백성 먹고사는 것과 관련없는 소위 형이상학적 성리철학에 찌든 조선의 관리들이여!
농업국가에서 아직도 멈칫거리던 우리나라를 상공업으로 일으켜 성공시켜서 오늘날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초석을 다지고 선진국이 되게 하여 이 나라를 세계가 주목하게 하고, 이제 한류로 세계를 점령하고자 웅비하는 대한민국의기 반을 만들어낸 박정희대통령, 남덕우 신현확 같은 뛰어난 경제 학자들, 정주영, 이병철같은 걸출한 기업 영웅들, 그리고 땀 흘려 일한 수 많은 공장 근로자들, 해외로 발품 팔며 모진 고생한 수출 전사들, 모두 모두 감사드리고 고맙습니다. 당신들 덕택에 우리는 늘 희망찬 미래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열린마음으로 이 나라 백성들 모두 모두 행복한 그날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이수만 SM 회장, 박진영, 양현석씨 당신들 역시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를 개척하는 영웅들입니다.
○ 임인년(1602, 선조 35)과 병오년(1606, 선조 39) 두 차례에 중국 사신이 나왔는데, 조정에서는 은자(銀子)가 부족함을 염려하여 은을 바치는 자에게 벼슬을 주었으니, 금관자와 옥관자의 장식이 실로 많아져서 관직의 천함이 전일보다 더욱 심하였다. 대개 처음에는 나이 60세 이상인 자로 은을 바친 차이에 따라 자급을 주었는데, 나이를 속이는 자가 많아져서 폐단이 무궁하였으니, 모르겠거니와 거둬들인 은자가 과연 얼마나 소용되었단 말이냐!
명말 세제인 일조편법하에서는 하세·추세의 합산 은액(銀額)이 일률적으로 토지에 부과되었고 이후 청나라에서 지정은제가 실시된다. 즉 은이 화폐구실을 하므로 중국 사신은 은을 착취하고 가난한 이 나라는 백성들에게 벼슬을 팔아 은을 모은다는 것이다. 관직을 가진 자가 늘어나고 관직은 천해지고 나이를 속여서까지 벼슬받는 자가 많아지는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공명첩이라는 것이 있어 받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지 않은 백지임명장을 말하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군공을 세웠거나 납속(納粟)한 경우 대가로 준 데에서 기원한다. 이후 국가 재정의 고갈을 해결하거나 구휼사업을 위하여, 또는 사찰을 중수하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발행하였음은 알되 명나라 사신의 착취를 감당하기 위해 벼슬을 판 사실은 오늘에사 처음 알았다.
○을사년(1605, 선조 38) 겨울에 황제의 원손(元孫)이 탄생하자 천하에 널리 알렸다. 주지번(朱之蕃)이 정사(正使)가 되고, 양유년(梁有年)이 부사(副使)가 되어 병오년 4월에 비로소 우리 나라에 이르렀다. 주지번은 술을 좋아하고 시를 즐겼으며, 또 현판 글씨도 잘 썼는데, 우리 나라의 재상들과 연회할 적에 친구처럼 지내고, 심지어는 붙잡고 장난까지 하였다. 현판 글씨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막론하고 곧장 붓을 휘둘러 써주니, 그의 필적이 거의 중외 인가의 창이나 벽에 퍼지게 되었고, 비갈(碑碣)을 청하는 사람이 있어도 응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전라북도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90호인 망모당(望慕堂)의 현판은 주지번이 직접 찾아와 쓴 것이라고 한다. 망모당은 익산시 왕궁면이 있는데 선조(재위 1567∼1608) 때의 문인 표옹 송영구(1556-1620)가 은거하던 곳의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선조 40년 (1607)에 부친 상을 당한 뒤에 집 뒤쪽 언덕에 이 집을 짓고, 동쪽 우산에 모셔져 있는 조상들을 추모하였다고 한다. 주지번이 입국한 해가 병오년으로 1606년이니 시기는 약간 오차가 있는 듯 하다. 표옹이 1598년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에 갔을때 과거를 준비하며 고생하던 주지번을 만나 격려한 것이 인연이 되었고 그후 주지번이 과거에 합격하여 우리나라에 정사로 와서 만나게 되고 표옹을 위해 현판을 써 주었다 한다. 주지번의 글씨는 성균관 명륜당의 현판, 경포대 누각의 <제일강산>등 지금까지 많이 남아 있다.
○ 무술년(1598, 선조 31)에 중국의 대군이 나온 뒤로는 중국 상인들이 물건을 많이 가져와서 전후로 계속 이어졌고, 종로(鍾路) 거리에 가게를 열고 물건을 늘어놓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에 중국 물건이 도리어 천하게 되었고, 모양을 조금이라도 꾸미는 사람은 직물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겉옷 이외에는 혹 순전히 비단과 양갖옷을 입는 사람도 있고, 또한 귀천 노소를 통틀어 입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법관이라도 이것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상의 하교가 때로 혹 간곡하였지만, 한 사람도 두려워해서 입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진하게 물들인 초록 주의(紬衣)는 당상관의 연복(燕服)인데, 유생들이 공공연히 착용하니, 심하다. 사치의 유행이여!
임란중에 이여송이 이끄는 5만 명의 명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였으나 중국상인들이 무수히 입국하고 중국상품을 가져와 판매한 사실은 처음 듣는 일이다. 전쟁시기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치를 하였다니 놀랍고 저자는 이를 걱정하고 있다. 이제 부자나라가 되고 잘 살게 되어 소비가 미덕이 되어버린 우리 대한민국은 절약이니 알뜰살림이니 심지어 저축이니 하는 말 자체가 실종되다시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미래를 생각하며 아끼고 절약하여야 한다. 내 스스로 다짐하건대 장차 경제적 여유가 주어진다해도 명품(지갑에 30만원 가격표가 붙어 있어 놀랐다. 국산 최고급 에쿠스는 1억원도 훌쩍 넘는다)이니 호화주택이니 값비싼 자가용이니 하는 것과는 가까이 하지 않고자 한다. 항상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할 줄 알고, 내 수준에 잘 어울리는 합리적 경제생활을 해 나가는 모범된 생활인이 될 것을 스스로에게 다시 약속하여 본다.
○ 중국 사람은 우리 나라 사람이 모자(帽子 속칭 감두(敢頭)라는 것)를 쓰지 않고 갓을 쓴다고 비웃었는데, 난리 후에 조정에서 누차 영을 내려 갓을 벗고 모자를 쓰도록 하였다. 지방의 시장이 서는 날이면 관리들과 역졸들이 관청의 금령을 빙자하고 함부로 빼앗았지만, 명령에 따르지 않아 시종 6~7년 동안 끝내 금하지를 못하였으니, 심하도다. 이같이 습속을 고치기 어려움이여!
더구나 이 금지는 천민에게만 하고 양반에게는 하지 않으니, 따르지 않음도 당연한 일이다. 간혹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 있기도 하였으나 서울 사람은 망건(網巾)을 쓰고 모자를 그 위에 쓰고 또 검은색의 옷을 입으니 그래도 괜찮지만 시골 사람들은 망건을 쓰지 않고 검은색의 베로 조잡하게 모자 모양을 만들어 쓰고, 또 다닥다닥 기운 누더기 옷을 입는 바람에 남루한 모양이 도리어 패랭이를 쓴 것만도 못하니, 다른 사람과 상대할 적에 부끄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더러는 상투 머리로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혹은 탈옥하였느니 혹은 도적이니 하여 비웃으니, 이러한데 어찌 명령에 좇을 리가 있겠는가.
임란후 국가에서 거추장스러운 갓을 쓰지 말고 감두(속칭 감투)만 쓰도록 한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모
자라고 하는 것이 감투임을 알겠다. 감투는 앞은 낮고 뒤는 높은 탕건과는 달리 앞뒤가 같은 높이라고 한다.
천민들이 머리를 단단하게 정리하여 묶는 구실을 하는 망건도 없이 모자를 쓰니 머리가 흐트러지며 보기
흉했던 모양이다. 아아! 서민들 만이라도 귀찮은 상투없애고 빡빡 깎아 버렸더라면 좋았으련만... 하긴 우린
왜 검은 양복에 흰 와이셔츠 받쳐입고 갑갑한 넥타이 매고 불편을 감수하며 사는 것인가? 패랭이는 대나무
로 만든 값싼 모자라 한다.
○ 판서 홍사신(洪士信 여순(汝諄)1547-1609)은 난리 전에 동대문 안에 새 집을 짓고 화초를 많이 심고 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는데 대단히 깨끗하였다. 난리 후에 옛 터에 다시 집을 짓되 규모를 전보다 조금 더 늘리고 화초나 나무ㆍ돌 같은 완상물을 평시보다 더욱 욕심내어 많게 하였다. 의자 사이에도 티끌 하나 없고, 음식물과 의복 또한 매우 사치스럽게 하였는데, 겨우 4~5년을 누리다가 탄핵을 받아 진도(珍島)로 귀양가서 1년 만에 죽었다. 게다가 아들이 없고 외손 하나만이 있었으나 또한 나이가 어리고 귀양 중에 재력이 없어 초상을 치르는데 극히 초라하였다. 상여 위에는 장식이 없고, 다만 베보자기로 널 위를 덮으니, 길가는 사람이 모두 생전의 기쁜 일이 모두 허사라고 탄식하였다. 장사를 지내는 데에도 속관과 덧널의 크기가 서로 맞지 않고, 겨우 대충 매장하였으니, 차마 들을 수도 없도다.
일생을 늘 남의 입에 오르내려 세상에서 좋지 않게 여기더니 죽어서도 슬퍼하거나 애석해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집을 다시 지을 때 제조(提調) 노릇 하던 각사(各司)의 아랫사람들에게 원성을 들었으니, 사람이 일생을 사는 데는 모름지기 화평과 용서를 위주로 하여 살았을 때나 죽을 때에 남의 구설을 듣지 않도록 할 일이다.
홍여순은 악독한 인간이라고 한다. 당쟁만 일삼아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두번이나 탄핵을 받고 유배되어 죽었다. 무슨 상사출신인가하는 별스럽게 생긴 인사를 앞세워 10여년 전 병풍사건을 일으킨 전직 장관과 국회의원이 생각난다. 요즘도 이상한 언론에는 전직 국가지도자들을 지독하게 험한 말로 무자비하게 비난하는 이상한 인간들이 많이 있다. 그 인간들 홍여순 같은 모습으로 되는 건 아닌가?
○ 임해군은 의롭지 못한 짓을 많이 하여 백성의 땅을 빼앗는 등 죄악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감히 역모를 꾀하여 재인이나 잡배 등 날랜 자들로 손발이 된 자들의 수효가 헤아릴 수 없고, 무장(武將)으로 서로 결탁한 자들 또한 많았다.
본래 성질이 포악한 데다가 포로가 되었던 정신적인 압박으로 인하여 그 포악함은 더욱 심해져서 분을 발
산시키기 위하여 길거리를 헤매었고 민가에 들어가 재물을 약탈하고 상민을 구타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서자이지만 큰아들임에도 유능한 광해군에게 왕위가 돌아가면서 불행한 삶을 산 듯 하다.
○ 전에는 중국 조정에 관계되는 일이면 문신 중국 사신 두 명이, 본국의 일이면 태감(太監 환관) 중국 사신 두 명이 나왔는데, 연릉군(이호민)이 중국에서 예부에 글을 올려 본국의 피폐된 상황을 낱낱이 알렸다. 그리하여 성지를 받들어 제시 천사(祭諡天使) 한 명과 책봉 천사(冊封天使) 한 명을 보내 왔으니,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용은 재물을 탐하기 한이 없고, 긁어 모으는 것도 형용할 수가 없어 보물을 전하께 헌납함도 많기는 하였으나 모두 그 대가를 받았다. 처음 국경에 발을 들여 놓으며 기필코 10만 냥의 은을 모으리라 하더니, 마침내 왕래하는 길과 서울에서 얻은 은자가 거의 5~6만 냥에 이르렀는데, 도중의 음식 제공도 모두 은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고 비록 차나 식사 대접이 없어도 가하다고 하였다.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찾아온 환관 사신들의 행태를 보니 가관이다. 전쟁을 치르고난 가난한 조선에서 아주 돈을 긁어 모으러 작정을 하고 온 놈들이다. 오늘 신문에는 공공기관 임원들이 법인카드를 제멋대로 사용하여 적발되었다는데 술집등에서 함부로 쓴 돈이 상식을 초월한다. 카드사용이 허용되지 않는 골프장 노래방 유흥주점등에서 마음대로 쓴 모양이며 공공기관(공사) 기강이 지극히 문란한데 국민들이 참기 힘들 지경이다.
○ 내가 젊을 때에 무오년 순회세자(順懷世子) 책봉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 태감(太監) 중국 사신 두 명이 나와 오직 팔고 사는 일만 했을 뿐, 지나친 정도까지에는 이르지 않았고, 또한 오래 머무르지도 않았다. 그 후에 태감 중국 사신이 나온 숫자가 얼마인지 알 수는 없을 정도였으나 토색질을 심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년에 금상(今上 현재의 임금, 즉 광해군)의 책봉 때에 태감 중국 사신 유용(劉用)이 처음으로 은을 몹시 요구하여 5만 냥이나 뜯어 갔다.
금년 세자 책봉 때엔 태감 염등(冉登)이 은을 요구함이 유용보다 배나 더하여 5~6만여 냥을 뜯어갔다. 앞으로 나오는 사람은 반드시 이를 본받아 더 뜯어 가려 할 것이니, 국가가 장차 어떻게 지탱해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은은 토산물이 아니다. 중국에 바치기는 고려 말기부터인데, 몇 만 냥에 이르므로 정포은(鄭圃隱)이 힘을 다해 주선하여 중지시켰고, 우리 나라에서도 토산물을 바치는 데 그쳤다. 임진란 이후 중국 장수들이 계속 나오자 은의 사용이 점차로 광범위해져서 중강(中江)에 시장을 개설하니, 우리 백성들로 제 이익만을 꾀하는 자도 많았다. 시장에서 매매하는 데에도 그대로 사용되자, 중국 사신의 요구가 있으면 벼슬을 팔아 모아 들이기도 하고, 혹 모집하고 혹은 사들여서 계속 긁어 모으므로, 드디어 무궁한 폐단이 되었으니, 아주 작은 걱정이 아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근래 부산(釜山)에서는 왜인의 접대를 허락하여 은의 판로를 금하지 않는데, 중국 사신의 요구하는 은도 여기에 의지하여 구해서 바친다.”고 한다.
고려말 명나라에 은을 바치기 시작한 것으로 정몽주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중강개시는 의주 중강(압록강의 난자도)에서 열렸던 중국과의 국제 무역이 이루어진 시장이다. 선조 26년(1593) 영의정 유성룡이 임진왜란으로 생긴 조선의 기근 구제와 군마 조달을 위하여 요동에 건의하여 시작하였다.
임란후 1607년에 동래부의 두모포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고 이어 기유약조를 맺어(1609)제한된 범위내에서 교섭을 허용한다. 아마 이 왜관을 통해 일본의 은을 구입하여 중국의 요구에 충당하는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 경술년(1610, 광해군 2) 겨울. 별시의 문과 전시에 발책독권관(發策讀券官)은 좌상 이자상(李子常 항복(恒福)의 자)이고, 참시관(參試官)은 모모였는데, 그 중에 허단보(許端甫 균(筠)의 자)가 들어 있었다. 단보는 글은 잘하지만 성품이 경솔하여 시관이 되기만 하면 으레 사람들의 말이 있었다. 이번 과거에 합격한 사람 중에는 단보의 형 지사(知事) 허공언(許功彦 성(筬)의 자)의 아들 허보(許보), 사위 박홍도(朴弘道), 그리고 다른 참시관 박승종(朴承宗)의 아들 자흥(自興), 이이첨(李爾瞻)의 사돈 이창후(李昌後), 승지 조탁(曺倬)의 아우 조길(曺佶), 단보의 집과 친밀한 변헌(卞獻) 등 약간 명이 있었다. 외부에서는 단보가 허씨ㆍ박씨ㆍ변씨에게 사정을 두었다고 지목하여 은밀히 사사로이 봐 준 정상을 지적해서 의론이 분분하였고, 사위ㆍ조카ㆍ사돈의 방(榜)이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여론이 크게 일어나자, 좌상이 대죄하여 아뢰기를,
“허보의 글은 신이 뽑은 것입니다.”하니, 상은, “그가 사정(私情)을 둔 것을 경이 어찌 알겠는가.’라고 비답하였다.
단보와 지동관(枝同官) 허용(許鎔)이 모두 하옥되어 달이 넘도록 오래 갇혔다가 마침내 형을 받고 귀양을 갔으며, 허보와 변헌은 삭과(削科)되고, 홍도(弘道)는 끝내 면제되었다.
허균(1569-1618)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재능이 뛰어난 수재였다고 한다. 그러
나 그 가정은 아버지 허업부터 두 형인 허성, 허봉, 그리고 매형인 우성전등이 당파의 리더로 권력투쟁을 하
였으므로 허균이 비록 자유분방하며 다양한 학문과 종교에 관심이 큰 개방적 사고의 소유자라고 보여지기
는 하나 파벌의식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한 듯 하다. 무리를 지어 벼슬을 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
거나 저자인 윤국형이 훌륭한 인품의소유자로서 허균을 판단한 것을 믿어 본다면 허균은 멋있는 시대의 풍
운아이기는 하되 그의 인품이 높은 철학적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한 인간으로 나는 보고 있다. 평소에 내가
판단하던 허균에 대한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글이다.
○ 동서(東西) 운운하는 말은 을해년(1575, 선조 8) 무렵부터 일어나 서로 나왔다 사라졌다 하다가 드디어 온 세상이 다 동서간에 지목하는 중에 들어 문호를 나누어 세워 마치 대대로 원수인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조정의 사대부들 사이에 서로 협동하고 공경하는 미덕이 아주 없어져 국세는 쇠약해지고 인심과 풍속은 극도로 야박해져 마침내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는 참변을 보게 되었으니, 당고(黨錮)와 청담(淸談)이 어찌 유독 한 나라와 진(晉) 나라에만 화를 끼치겠는가.
의주 한 구석에 몰려 있을 때에는 서인(西人)이 국정을 담당함 조정이 그래도 옛 투를 벗어났으나 환도한 후에는 남인과 북인의 일맥이 잇달아 일어났고, 무술ㆍ기해년(1598~1599, 선조 31~32)에 와서는 그 화가 극도에 달했다.
이른바 남북(南北)이라는 말은 애초에 별다른 사람이 아니라, 실은 동인에서 갈려 둘이 되었는데, 햇수가 쌓여 마침내는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사림의 수치라 하겠다. 남인이 이미 물러났는데, 북인도 스스로 보전되지 못하고 이어서 대북(大北)ㆍ소북(小北)ㆍ골북(骨北)ㆍ육북(肉北)이란 이름이 생기고, 끝내는 어그러져서 엎어짐을 면치 못하자, 그들이 잡고 농락하던 권세가 자연히 서인에게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신축년 겨울 말기 가소로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북인 중에 약간 명예를 좋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남인에게 공이 있음을 변명하려다 도리어 그것이 심해져서 그 부류에게 매수당하여 그 주론자를 제거하려는 것이 격변하여 결국 서로 공격하게 된 것이다.”고 한다. 얼마 안 가서 자칭 남인도 북인도 아니라는 자들이 나오자 국정을 담당하던 서인이 다시 물러나게 되었다.
북인으로서 지금 있는 사람들이 비록 국정을 담당한 자들과 약간의 이합(離合)은 있지만, 그 기미(氣味)와 하는 일을 따져보면 그다지 다를 것이 없으니, 그 종국이 어찌 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남인으로서 조정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혹 현달하기도 하고 혹 은둔하기도 하였으나, 그럭저럭 구차하게 지내면서 주견 없이 무리지어 나왔다가 무리지어 물러가기는 거의가 일반이니, 필경 국가에 무익하기는 매한가지이다. 나처럼 늙고 병든 사람은 빨리 죽어 이런 꼴을 다시는 보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것도 쉽게 되지 않으니, 애통하고 애통할 따름이다.
우리나라 정통야당은 민주당이라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계라고 할 수 있는데 모다가 전라도 사람들이다.
대표적 인물들이 정동영, 정세균, 박지원, 이강래같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노무현 추종자들도 일
부 함께 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일부는 유시민이란 사람이 만든 국민참여당에 속해 있다. 민주노동당이라는
사회주의 좌파정당이 있고 지도노선의 차이로 갈라진 진보신당이 있다. 이념과 지도노선이 다르다고 갈라
진 정당들이 선거때만 되면 통합하거나 단일후보를 내서 여당을 무조건 이기고 보자고 떠들어 댄다.
이 책에서 저자가 애통해 할 만큼 일본의 현 정치모습이나 우리나라의 야당들의 행태는 모두 비통해야할
일이다. 일본정치야 남의 나라 일이니 크게 관여할 바 아니로되, 우리나라 야당들이 선거때만 되면 늑대나
승냥이 처럼 정부와 여당을 짖어대는 것을 보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찌하여 이명박 대통령은 뛰어
난 국가경영 능력과 미래지향적 비젼과 올바른 식견을 가진 휼륭한 대통령으로 상당한 업적을 이루어내고
있음에도 국민이나 야당과의 소통을 소홀히 하여 인기는 날로 하락하고 공직기강은 문란하며 정책문제로
지역갈등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는 것인고? 이명박 대통령의 한계이자 한국판 정치 매커니즘의 한계가
아닐까?
○ 나는 어려서부터 본시 사우(師友)의 도움이 없고, 다만 과거보는 문장의 찌꺼기로 출신의 소지를 삼았으니, 공명(功名)을 쌓으려는 한 선비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상의 공명에 뜻을 가진 사람을 보면 역시 되는 대로 지나버리는 것이 아니고, 근신하고 스스로 단속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잘 보전하는데, 나는 성품이 찬찬하지 못하고 어리석은데다가 자신을 위해 꾀하는 지혜가 가장 부족하여 가려 사귀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혹 선택한 상대가 바라는 사람이 아니며, 화기가 목전에 닥쳐도 어리석어 피할 줄을 몰라 흰 머리가 된 노년에 이르러 몸이 천 길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른바 공명을 바라는 선비 중에 나처럼 졸렬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나는 공명을 얻을 수 있는 자리에서 본래 순조로운 일이 적고 잘못되는 일이 많아 등과(登科)하던 다음해부터 이습(肄習)하는 데 가장 낮은 성적을 받은 것이 3년, 전랑(銓郞)이 되었다가 물러나고,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었다가 실패한 것이 전후 2년, 임진왜란 때는 백의종군하여 비록 죄는 즉시 풀렸으나 죄명이 중대하여 실로 매우 송구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삭탈관작(削奪官爵)된 것이 3년,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되었다가 병으로 파직되기를 반 년, 이번에는 파직되어 서용되지 못한 지가 6년이니, 이는 죄명이 가장 중하여 기간이 특히 오래인 것이고, 종전의 죄는 특히 가벼웠기 때문이다. 그런즉 벼슬한 37년 동안에 죄를 입은 것이 15년이고, 상중에 있은 3년까지 합치면 18년이 된다. 그러나 아무 사고 없이 조정에 있은 것도 19년이나 되는데, 국가에 털끝만치도 보탬이 없었으니,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저자인 윤국형의 인간됨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글이다. 벼슬이나 권력에 큰 욕심이 없고 당파에 휩쓸지 않
으며 청렴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선비로 보여지며, 그런 고고한 인품으로 왜란과 당파싸움의 소용돌이 속에
서 대사헌과 공조판서까지 지낸 인격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 본받을 만한 존경스런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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