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연구

풍패지관과 망모당의 현판에 대한 소고찰

청담(靑潭) 2017. 5. 6. 08:21

 

 

풍패지관(豊沛之館)과 망모당(望慕堂) 懸板에 대한

 

小考察

 

 

1. 들어가는 말

 

지난 4월 20일 JTV방송에서 방영한『전북의 발견 전주객사 풍패지관』에서 전주객사에 걸려있는「豊沛之館」글씨는 명나라의 사신으로 왔던 주지번이 쓴 것인데?주지번(1546-1624)이 서울에서 써준 것이라는 설도 있고, 전주에 내려와 직접 써주었다는 설이 있다.?라고 말하는 해설을 듣었다. 이미 2013년에 익산문화원에서 편찬한『익산인물지 제1권』송영구(1556-1620) 선생 편에서 「望慕堂」현판에 대해 필자가 그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규명한 바 있으나 이 글이 전문적인 논문도 아니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지는 책이 아니어서인지 아직까지도 여전히 주지번이 전주에 내려와 「望慕堂」과 「豊沛之館」의 현판글씨를 쓴 것으로 잘못 알려지고 있기도 하다고 판단되어 이에 대한 고증을 통해 잘못된 설을 바로잡고자 한다.

 

豊沛라는 뜻은 한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현(豐縣) 패읍(沛邑)을 본 따서 왕의 고향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의 본향을 말하는 것이다. 방송에 출연한 김진돈 전주문화원 사무국장은

?서울에서 썼다는 설도 있고 전주에 내려와 썼다는 설도 있다.?면서

?어디에서 썼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주지번이 쓴 것은 맞다.?고 설명한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은

?전주부읍지(1760년경 필사본)에 주지번이 썼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또 김진돈 사무국장은 풍패지관의 글씨는 익산출신 표옹 송영구와 관계가 깊다면서 주지번과 송영구와의 연경에서의 인연을 말하고 있다.

한학자이자 서예가인 전북대 김병기 교수는 주지번의 글씨일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말을 하고 있다.

 

현재 전주감영을 복원하기 위한 공사가 이미 시작되고 있으며 2018년 10월까지 추진된다고 하는데 객사인 豊沛之館의 현판글씨에 대한 정확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고 여전히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근거하여 설명되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익산시 왕궁면에 있는 표옹 송영구 선생이 선친을 여의고 추모하기 위해 지은 望慕堂 현판과 전주객사에 걸려 있는 豊沛之館의 글씨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쓴 것이 분명하다.

둘째, 그러나 그가 전주에 내려와서 썼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서울에 10일간 머물다 귀국하였다.

셋째, 표옹 송영구선생과 주지번과의 연경(북경) 일화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되며 구전 그대로 믿기가 매우 어렵다.

 

익산출신의 표옹 송영구 선생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주지번과 송영구와의 관련을 살펴보고, 이를 조사하던 중에 발견한 허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18권 병오기행(丙午紀行)에 실려 있는 내용을 통하여 주지번이 결코 전주에 내려온 일이 없다는 확실한 고증을 제시할 수 있으며, 윤국형의 갑진만록을 통하여 당시 겨우 10일간 서울에 머물던 주지번이 수많은 글씨를 써주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으므로 望慕堂과 豊沛之館의 현판글씨는 주지번의 글씨임에 거의 틀림없다고 단정적으로 말 할 수 있다.

 

 

2. 표옹 송영구(宋英耈 : 1556 ~ 1620 )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인수(仁搜), 호는 표옹(瓢翁) 또는 일호(一瓢), 백련거사(白蓮居士)이다. 본관은 진천(鎭川)으로 익산군 왕궁면 광암리 장암(王宮面 光岩里 長岩, 당시 전주부全州府 우북면紆北面) 출신이다. 증좌승지(贈左承旨) 억수(億壽)의 손자이며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영(翎)의 아들로,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4년(선조 17) 29세로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병과(丙科) 1위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승정원 주서(承政院 注書)에 임명되었다. 무반의 계통인 사과(司果)의 직을 받고, 연이어 부친, 모친, 조모의 상을 치르는 5년 동안은 관직을 떠나 있었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발탁되었고, 이어서 1593년(선조26) 예조좌랑이 되어 군사 1,000여명을 모집하여 임금이 피하여 있던 행재소로 향하던 도중 시강원 사서(侍講院 司書)의 벼슬을 받았다.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어 서장관(書壯官)이 되어 북경에 다녀온 후 고향에 돌아와 살았다. 또한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충청도 순찰사(忠淸道巡察使) 김신원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1599년(선조 32)에 충청도사(忠淸都事)로 임명되어 피폐한 도정(道政)을 바로 잡았고 지평이 되고 문학을 겸하였으며, 이조정랑 ‧ 사인 ‧ 사간을 지내고 청풍군수 ‧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을 역임하였다. 1607년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곧 권신 정인홍(鄭仁弘)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사간(司諫)에 등용되었고, 필선(弼善)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냈으며, 1613년(광해 5)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이 일본과 수호한 사실이 없음을 밝힌 공으로 지중추부사가 되고, 1616년(광해 8) 병조참판이 되었으나 1618년(광해 10) 폐모론에 반대하며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고 또 낙서 등으로 비방한 것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절대로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차례 파직, 좌천, 휴직되었으나 그것이 관직자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풍채가 단아하고 언행이 바르며 성격이 강직하였으나 남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해주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문집으로 『표옹유고(瓢翁遺稿)』인쇄본 3권 1책이 있다. 시(詩)․잡저(雜著)․부록(附錄) 등이 실려 있다. 인조반정 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전주 서산사(西山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3. 송영구(1556-1620)와 주지번(朱之蕃 1546-1624 또는 1548-1626)의 인연에  대한 전설

 

 

 주지번은 명나라 산동(山東) 사평(茌平) 사람으로 저적(著籍)은 금릉(金陵)이고, 자는 원개(元介)며, 호는 난우(蘭嵎)다. 만력(萬曆) 23년(1595) 장원급제했다.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다. 서화(書畵)에 뛰어났다. 1606년 조선(朝鮮)에 사신을 왔을 때 일체의 뇌물이나 증여를 거절했다. 조선 사람들이 와 글을 구하면서 초피(貂皮)나 인삼을 들고 왔다. 법서(法書)나 명화, 고기(古器) 등을 매매하는 것을 배척했고, 소장품이 남도(南都)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저서에 『봉사고(奉使稿)』가 있다.

 

송영구는 1593년 5월 성절사((聖節使;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파견된 사신) 홍이상(1549~1615)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의 서울인 연경(북경)에 갔었다. 북경에 도착한 사신 일행은 숙소인 영빈관에 여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때 조선 사신들이 머물던 숙소의 부엌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청년이 하나 있었다. 청년은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중얼 거리고 있었다. 표옹이 가만히 들어보니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이었다. 표옹은 숙소의 심부름꾼이 남화경을 외우는 것이 하도 신통해서 청년을 불러 물어보았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천한 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경을 모두 암송할 수 있느냐?”

“저는 남월(南越)지방 출신입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몇 년 전에 북경에 올라왔는데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가져온 노잣돈이 다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과거시험 답안지를 어떻게 작성했었는지 종이에 써 보아라.”

표옹은 청년이 문장에 대한 이치는 깨쳤으나 전체적인 격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 작성요령을 알려줬다. 또한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여러 권을 필사해주고 상당한 액수의 돈을 청년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후 청년은 과거에 합격하였다. 청년의 이름은 주지번(朱之蕃)이었다.

※참고1 : 방송자막에는 주지번의 생몰연대가 (1548-1624)으로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송영구보다 오히려 8살 연상이며 이미 46세이니 결코 청년이 아니다. 그가 1595년에 과거에 장원급제했을 때의 나이는 이미 48세가 되는 셈이니 위 전설은 신빙성이 없다. 

이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606년, 명나라는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주지번을 정사로 사신을 조선에 파견했다. 그는 송영구를 늘 스승으로 섬기고 잊지 못하여 조선 내왕 사신을 자원했다고 한다.

 

그가 송영구에게 망모당액자(望慕堂額字)를 써 주고 갔는데 지금도 그 액자가 남아 있다. 망모당은 조선 선조대인 1605년 표옹 송영구 선생이 선친을 여의고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집으로 전북 유형문화재 제 90호로 등록되어 있으며, 전북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356번지에 있다. 현재 장암마을에는 표옹이 짓고 주지번이 현판을 쓴 망모당이 세월을 견디면서 아직도 남아있다.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전주객사의 웅장한 현판 풍패지관(豊沛之館)도 주지번이 쓴 것이다. ‘풍패’는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이 태어난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전주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써 준 것이다.

: 망모당은 현재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장중마을에 있는데 1906년 이전에는 전주부에 속한 옛 우주현 지역의 우북면이었다. 당시 우북면 지역은 오늘날 왕궁면 동봉리, 동룡리, 광암리, 흥암리, 구덕리 지역으로 1906년 비입지 정리로 익산군으로 넘어오고 1914년에 제석면과 합쳐져 왕궁면이 되었다.

 

 

4.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18권 병오기행(丙午紀行)

 

■1606년 4월 10일

먼저 서울에 와서 복명하였다. 주상께서 교외까지 나와 일행을 마중하였다. 이사(二使)는 서울에 10일 간 머물렀다.

※참고 2 : 二使는 정사와 부사를 말함.

 

■ 1606년 5월 23일

나는 먼저 중화(中和)를 돌아가고 우리 세 사람은 숙야와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송인수(宋仁叟 송영구(宋英耈)의 자)와 함께 뱃놀이를 매우 즐겁게 하였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허균의 시문집이며 이 책에 실려 있는 병오기행(丙午紀行)의 이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익산의 향토사에 관련한 각종문헌에는 주지번이 익산의 송영구집에 찾아와 직접 망모당 편액글씨를 써주고 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접반사의 종사관으로 주지번 일행의 입국에서부터 출국 때까지 수행한 허균의 기록인 병오기행을 통하여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 3 : 병오기행(丙午紀行)은 명의 한림수찬(翰林修撰) 주지번(朱之蕃)이 정사로 우리나라에 올 때 1606년 정월 허균이 접반사 유근의 종사관이 되어 1월 22일부터 6월 2일까지 그 임무 수행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병오기행(丙午紀行)의 기록을 보면 주지번이 사신으로 와서 4월 10일에 서울에 도착하고 20일에 서울을 떠나가니 불과 서울에 10일간 머무르고 돌아가는데 5월 2일에는 압록강을 건넌다. 그 후인 5월 23일에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耈)는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근무하면서 접반사 종사관인 허균과 만나 뱃놀이를 즐겼다는 내용이다. 당시 주지번이 부친을 여의고 익산에 은거해 있던 송영구를 찾아와서 망모당(望慕堂) 현판을 써 주었다고 하는 기록은 사실이 아닌 것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표옹 송영구는 이 때(1606년 5월) 익산의 왕궁에 거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대동도찰방으로 근무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흠(1566-1628)의 『상촌집』을 통하여 조사된 바로는 1604년경, 송인수는 청풍 군수(淸風郡守)로 있다가 해직되어 돌아온 뒤에 이때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참고 4 : 대동도는 조선시대 평안도 평양의 대동역(大同驛)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를 말하며 찰방은 종6품이다.

 

이중환(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그림과 글씨로 이름이 높았던 명나라의 주지번(朱之蕃)이 어느 해 조선에 사신으로 오는 길에 평양을 지나면서 연광정에 올랐는데, 그 풍광에 놀라 무릎을 치며 ‘천하제일강산’ 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는 제 손으로 현판을 써서 걸어놓았다. 그 뒤 병자호란 때 조선에 쳐들어와 인조(仁祖)에게 항복을 받고 돌아가던 청태종(靑太宗)이 여기에 들렀다가 중국에도 명승이 많은데 어찌 여기가 천하제일일 수 있느냐고 그 현판을 부숴버리게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풍광도 아름답거니와 글씨 또한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지라 청태종은 ‘천하’ 두 글자만 톱질해 없애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 '제일강산‘이라고 붙어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누가 다시 ’천하‘ 두 글자를 새겨 넣어 지금은 이렇게 ’천하제일강산‘ 이 걸려 있다.)

 

허균(1569-1618)의 『병오기행』을 읽어보면 중국 사신으로서 시(使行詩· 사행시)를 가장 많이 쓴 사람은 주지번(朱之蕃)이다. 주지번은 1606년(조선 선조 39년) 조선에 와서 방문 중 모두 259수의 시를 남겼다. 명 사신이 시를 지으면 조선의 접반사도 시를 지어야 했다. 우리 측의 원접사인 의정부 좌찬성 유근은 300수 가까운 창화시(唱和詩)를 이때 지었다. 명의 사신 주지번은 유근의 종사관(從士官)이던 허균에게 조선에서 간행된 옛 시 책(古詩本· 고시본)을 구해달라고 해 받기도 했다. 주지번은 액자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붓을 휘둘렀다. 그는 신라 이래 지금까지 한국의 시가(詩歌) 중에서 좋은 것으로 책을 한 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사행기록인 '봉사조선고(奉使朝鮮稿)'를 남겼다.

 

임진왜란 당시 판서인 윤국형(1543-1611)이 기록한 『갑진만록(甲辰漫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을사년(1605, 선조 38) 겨울에 황제의 원손(元孫)이 탄생하자 천하에 널리 알렸다. 주지번(朱之蕃)이 정사(正使)가 되고, 양유년(梁有年)이 부사(副使)가 되어 병오년 4월에 비로소 우리나라에 이르렀다. 주지번은 술을 좋아하고 시를 즐겼으며, 또 현판 글씨도 잘 썼는데, 우리나라의 재상들과 연회할 적에 친구처럼 지내고, 심지어는 붙잡고 장난까지 하였다. 현판 글씨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막론하고 곧장 붓을 휘둘러 써주니, 그의 필적이 거의 중외 인가의 창이나 벽에 퍼지게 되었고, 비갈(碑碣)을 청하는 사람이 있어도 응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5. 정리하는 말

 

윤국형의 『갑진만록』의 기록을 통하여 명나라 문단에서 문명을 떨치던 주지번이 수많은 글씨를 써주고 갔음을 알 수 있다. 익산의 望慕堂과 당시 용안현의 태허정 편액(太虛亭 扁額 : 용안읍지에 기록), 전주의 豊沛之館이외에도 평양 연광정의 天下第一江山, 성균관의 明倫堂 현판, 남원의 永思亭 현판 등이 알려져 있다. 

망모당(望慕堂) 현판은 분명 송영구가 사행중인 주지번을 만나 받았을 것이며, 전주 객사의 풍패지관(豊沛之館)의 글씨도 누군가가 서울에서 받은 글씨임이 틀림없다. 158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1593년에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간 송영구와, 2년 후인 1595년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주지번 두 사람이 연경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것은 어느 정도 인정될 수 있지만, 師弟의 깊은 인연을 맺은 정도는 아니라고 보여 진다. 만일 주지번이 송영구를 스승으로 여기며 은혜를 잊지 않고 크게 사모하고 있었다면, 그리고 송영구를 사모하여 조선사신을 자청하여 온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송영구를 안부를 묻거나 만나고 싶어 찾은 기록, 또는 두 사람의 깊은 인연에 대한 기록이 어찌 조선왕조실록이나 허균의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인가? 송영구가 원접사의 종사관이던 허균과 친분이 있는 사이인지라 연경에서 만난 적이 있는 주지번을 찾아 망모당 글씨를 받았기에 조금은 과장되어 전설로 내려오게 되지 않았을까 여겨지고, 익산지역의 각종 鄕土史志에 그대로 기록되어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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