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연구

김제군 백산면 상정리 돌제

청담(靑潭) 2016. 12. 4. 21:02

 

 

김제군 백산면 상정리 돌제(돌모산 돌무산 乭堤)

 

 

Ⅰ. 들어가는 말

 

내 고향은 전라북도 김제군 백산면 상정리 돌제마을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우리 집?과 ?우리학교?에 대한 애착이 강했는지 시시때때로 나의 주소와 학교 이름을 노트나 연습장에 적어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제목도 주소 그대로 붙여 본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내가 태어난 우리 집터는 1880년경 고조할아버지께서 분가하시면서 터를 잡으신 곳으로 당시부터 마을의 맨 끝자락에 위치한다하여 가집(발음상 갓집)이라 불렸다. 작년까지 내가 태어나 살아온 집은 1936년에 지어져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거쳐 지금은 내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어렸을 적 내가 보기에도 우리 집은 아주 큰 초가집이었다. 당시 우리 마을의 집들은 종중재실 말고는 모두가 초가집이었지만 다른 마을의 집들에 비하면 확실히 규모가 대부분 컸다. 우리 집을 찾는 행상들이나 다른 동네에 사는 친구들은 우리 집이 덩치가 큰 것만 보고는 당연 우리 집이 부자인줄로 여길 정도였다.

 

부모님들께서 2000년 6월 김제시내로 이주하신 이후 누구도 살지는 않지만, 아버지께서 그동안 해마다 밭작물과 채소밭을 일구어 오셨고, 나는 10여 년 전부터 300여 평의 과일밭과 400여 평의 소나무 밭을 만들어 놓았다. 익산시에 거주하는 나도 매주 한 번은 반드시 시골집을 들려야만 마음이 평안할 정도로 내 고향 돌제와 내가 태어난 우리 집은 내 삶의 근원이자 보루였다. 이제 내가 태어난 우리 집(1971년 새마을 운동 때, 기와를 얹었다가 20여 년 전에는 기와 위에 파란 양철판을 덮었다)을 퇴직 첫해인 2015년 5월에 지은 지 80여년 만에 헐어내고 작은 집을 새로 지었다. 오랜 옛집이라서 아까운 마음에 리모델링을 생각해보기도 하였지만 동향으로 햇볕이 잘 들지 않는데다가 리모델링비가 만만치 않으니 아버지께서도 과감히 헐고 짓느니만 못하다는 말씀을 하셔서 정말 과감하게 헐어버리고 작은 목조주택을 지었다. 은퇴한 내가 장차 30년을 목표로 채소밭과 과일밭을 가꾸며 매일 오전 한나절씩만 지낼 생각으로 지은 집이다. 예쁜 집으로 가꾸어 가기위해 작년 한 해 동안 전북대 평생교육원에서 조경관리를 연수했다. 살림하고 사는 집이 아니므로 적은 돈을 들여 지은 작은집이지만 정성을 들여 예쁜 정원을 만들어 나가려 한다. 작은 집과 예쁜 정원과 작은 과수원과 아름다운 꽃들과 토종닭들과 예쁜 토끼들(참, 그저께 귀여운 토끼 새끼들 무려 일곱 마리가 길다란 플라스틱통속에서 소리 없이 자라다가 갑자기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해주었습니다.)과 함께 살아가는 꿈을 이루어 가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 고향 돌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어디서 본 바가 없다. 이제 내가 나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옛날을 더듬고 오늘의 모습을 담아가면서 나의 영원한 안식처인 내 고향 마을 돌제에 대해 1965년(중학교 1학년)을 기준으로 하여 작은 기록을 정리해 나가고자 한다.

 

                                                 [두악산 전망대에서 보이는 돌제]

  

Ⅱ. 돌제마을의 발생과 명칭

 

1. 마을의 탄생 배경

 

나의 15대조이신 평택현감 亨樹 公(1471-1547)께서 1534년 전라진관병마절제도위로 옥구에 정착한 후 옥구 한림동(현 군산시 옥산면)에 이주하여 살기 시작한 이후 14대조 義福 公, 13대조 春成 公을 거쳐 1689년 기사사화의 난을 피해 11대조이신 廷英 公이 이곳 돌제로 이주하여 씨족마을을 형성하였다. 지금 군산시 옥산면 한림동 마을에 1만 1천여평의 토지(논과 밭 그리고 산)가 있고 세 분의 묘와 1923년에 지은 재실이 있어 매년 시제를 모시고 있다.

 

 

2. 돌제마을 명칭의 유래

 

자연부락인 돌제는 행정명칭은 돌제이나 예전에는 주로 돌모산 또는 돌무산이라고 불려졌다. 현재 쓰고 있는 한자인 乭堤(돌제)는 우리말로는 ?돌 제방?이라는 뜻이며 아주 예전에는 석제(石堤)라고 불렸다는 말을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바 있다. 돌로 쌓은 제방이 있는 마을이었기에 석제라는 마을명칭이 생겼고, 언제부터인가 부르기 쉽게 우리 말로 돌제가 된 것이다(방죽아래라는 명칭이 있고 마을사람들이 버스를 타러 나가던 곳이다). 돌모산이라는 말은 원래 ?돌뫼산?즉, 돌이 많은 산인데 역시 부르기 쉽게 ?돌모산?으로 변한 것으로 아버지께서는 해석하신다. 우리 마을 주변은 야산지대여서 돌이 거의 없는데 돌과 관련하여 지어졌으니 이해하기는 좀 어렵다. 다만 마을 앞산인 두악산(斗岳山 59.6m)에는 오래전에 돌을 판 흔적이 있는 아주 작은 石山같은 돌벼랑의 흔적이 있을 뿐이다. 두악산이라는 명칭은 말(斗)에다가 쌀을 담아놓은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635년에 발간된 유형원의 『동국여지지』를 보면 【堤堰】조에

《돌제(乭堤) : 관아의 북쪽 10리에 있다. 둘레는 2천 5백 54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26년에 간행된 지도에는 돌제가 突堤로 표기되어 있으며 방죽은 보이지 않는다.

■1926년에 지은 재실 긍구당 주련에 石池上肯搆堂(석지상긍구당) <석지위에는 긍구당이로다.>

  라고하여 마을 뒷 편에 저수지가 있었고 그 명칭이 석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1994년에 간행된 『김제군사』1478쪽, 1914년 행정구역정리 이전의 명칭에는  突堤로 표가되어 있고, 1485쪽 1994년 발간 당시의 명칭으로는 지금 사용하고 있는 乭堤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 마을의 이름은 본래 乭堤였는데 일제 강점기 이후  突堤 사용하다가 해방이후 다시 乭堤라고 표기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1525쪽에 우리 <돌제>에 대한 설명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옥석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돌무산>, 또는 <돌뫼산>으로 부른다. 이 마을 동쪽에 수량이 풍부한 <벌샘>이라는 샘이 있는데 이 샘물을 이용하기 위해 연못을 만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 연못의 이름이 <乭堤>여서 마을이름도 <돌제>로 불리었으며, 또한 마을옆에 돌(김제 사투리로 돌무작)이 많은 산(두악산)이 있기 때문에 <돌무산>, <돌뫼산>이라 했다 한다.

벌샘은 샛밭둑에 있던 뻘시암을 일컫는다 하겠다. 신빙성이 극히 떨어지는 이야기다.

▣결론 : 우리 마을에 17세기 이전부터 乭堤라고 부르는 저수지가 있었다. 17세기 말 옥구에서 살던 廷英 公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이름도 돌제(乭堤)가 되었다. 저수지가 언제 없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20세기 초까지 그 저수지를 石池(석지)라고도 부르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일제 강점기시대에는 마을이름을  突堤 또는 突堤로 표기했으나 해방이후 다시 乭堤로 표기하였다.

한편 돌제라는 정식 명칭이외에 돌뫼산이라고도 불렀는데 부르기 쉽게 돌무산, 또는 돌모산으로 불렀다고 본다.

 

 

 

 

Ⅲ. 김제시의 역사

 

金堤군 지역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땅으로 벽비리국(壁卑離國)이었고, 백제시대에는 벽골군(碧骨郡)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16년(757년)때 벽골군을 金堤郡으로 바꾸었다. 아울러 백제시대 수동산현(首冬山縣)을 평고현(平皐縣)으로, 두내산현(豆乃山縣)을 만경현으로, 내리아현(乃利阿縣)을 이성현(利城縣)으로, 仇知只山縣은 金溝縣으로 되었다.

김제군 고려시대에 태조 23년(940년)부터 제17대 인종 중엽까지 전주의 屬縣으로 있다가 예종 원년(1106)에 감무를 두었다. 인종 21년(1143년)에는 현령관을 두고 평고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만경현은 임피현의 속현으로 있다가 1106년에 분리되었고, 금구현은 전주목의 속현이었다가 1170년에 분리되었다. 이성현(利城縣)은 1018년(현종 9)에 전주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조선에 들어와 태종 9년(1409)에 폐현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태종 3년(1403년)에는 金堤縣이 金堤郡으로 승격되었다. 1620년(광해군 12)에 만경현이 폐지되고 김제군에 병합되었다가 1636(인조14)년에 곧 복구되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만경현과 금구현이 군으로 승격되었고, 조선초인 태종9년(1409) 폐현되어 전주에 속해있던 이성현(利城縣)지역인 이동면(공덕면 대부분 지역), 이서면(청하면 중북부지역), 이북면(공덕면 북부지역)은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만경군으로 이관되었다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만경군이 폐지되어 김제군에 병합됨으로써 김제군에 속하게 되었다.

(내가 확인한 바 1872년에 간행된 지도에 의하면 지금의 청하면의 남부지역(관상리, 월현리)은 당시 마천면으로 김제군에 속하고 있다. 따라서 이성현 지역인 이동면(공덕면 대부분 지역), 이북면(공덕면 북부지역) 이서면(청하면의 중북부지역)은 옥야현(구 이리시 지역)과 함께 전주부에 속하였다가 이때 만경군에 편입하게 된 것이다. 이때 옥야현은 익산군에 편입된다. )

이를 통하여 오늘날의 김제시지역은 조선시대 이후 김제군, 만경현, 금구현, 이성현(폐현되어 전주에 속함)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김제시를 이루는 조선시대의 3개 군․현의 관할지역및 옛 이성현지역은 다음과 같다.

●김제군 지역 : 현 요촌동·신풍동·검산동·교월동․백구면․용지면․백산면․죽산면․부량면

※17세기 중엽 당시 김제군 관내 면은 다음과 같다.

1. 읍내면 : 시내 요촌동 지역

2. 입천면 : 동쪽으로 5리이다. 신풍동, 검산동 일대

3. 대정면 : 동쪽으로 10리이다. 황산면의 홍정리 용마리 청운리 지역

4. 모촌면 : 동쪽으로 20리 용지면의 부교리, 용암리. 효정리, 반교리, 와룡리, 신정리

5. 금굴면 : 동쪽으로 30리 용지면의 용수리, 장신리 지역

6. 회포면 : 동족으로 40리 현 전주시 조촌동의 옛 도덕리, 도도리, 강흥리 지역

7. 공동면 : 동쪽으로 30리 백구면의 반월리, 석담리. 영상리, 마산리 지역

8. 대촌면 : 서쪽으로 10리 교월동 북부지역

9. 반산면 : 서쪽으로 15리 죽산면의 옥성리, 종신리, 죽산리. 대창리 지역

10. 서(식)포면 : 서쪽으로 20리 죽산면의 서포리, 연포리 지역

11. 홍산면 : 남쪽으로 20리 죽산면의 홍산리. 신흥리 지역

12. 부량면 : 남쪽으로 20리 부량면의 전 지역

13. 월산면 : 남쪽으로 10리 교월동 남부지역

14. 목연면 : 북쪽으로 30리 백구면의 월봉리, 부용리, 유강리. 백구리. 삼정리 지역

15. 백석면 : 북쪽으로 10리 백산면의 상동리, 상리, 상정리, 흥사리, 하리, 하정리 지역

16. 생건면 : 북쪽으로 5리 백산면의 부거리, 생건리. 하서리 지역

17. 마천면 : 북쪽으로 30리 청하면의 월현리, 관상리, 대청리 장산리 지역

18. 연산면 : 북쪽으로 20리 백산면의 조종리, 수록리, 석교리, 만경읍의 대동리 지역

19. 개토면 : 북쪽으로 20리 용지면의 구암리 송산리, 봉의리, 예촌리 지역

●만경현 지역 : 현 만경읍․·성덕면·진봉면·광활면

●금구현 지역 : 현 금구면·봉남면·황산면·금산면

※전주부 소속의 옛 이성현 지역 : 현 공덕면, 청하면( 동지산리 지역)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만경군과 금구군이 김제군에 합쳐져, 김제군은 17개 面 152개 里가 되었다. 그리고 1931년 11월 1일 김제면이 김제읍으로 승격되었다. 그리하여 1읍 16개면이 되었으며 1935년에는 하리면과 초처면이 봉남면으로 합쳐져 1읍 15개면이 된다. 1948년에는 진봉면에서 광활면이 분할되어 1읍 16개면이 되었다가 1989년에 김제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김제군과 분리되어 김제시는 27개동, 김제군은 15개면으로 되었다.

 

1995년 김제시와 김제군을 통폐합하여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되었다. 2003년 현재 만경읍과 죽산·백산·용지·백구·부량·공덕·청하·성덕·진봉·금구·봉남·황산·금산·광활면과, 요촌·신풍·검산·교월촌동 등 1읍 14면 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산면은 본래 김제군 지역으로서 흰 돌이 많았기 때문에 백석면이라는 이름으로 금동, 삼수, 석정, 사가, 괴방, 소음, 황경, 자학, 상서, 하서, 요교, 돌제, 옥정, 석정, 상두악, 하두악, 상말, 하말, 전남, 학당, 후남, 불노, 생건, 정자, 하건, 부거, 신리등 27개 마을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연산면의 전석, 후석, 양청, 신리, 중건, 점리, 하건, 부거, 상상, 중상, 하상, 산치, 하조, 상조, 중조 등 15개 마을과 모촌면의 신성, 수하리의 일부, 입촌면의 순동 일부, 대촌면의 수곡리 일부, 마천면의 월현, 중대, 목교리 일부, 만경군 동이도면의 조종리 일부, 만경군 남일면의 부흥리, 신점리 일부를 합하여 백석면의 『백』자와 연산면의 『산』자를 따「백산면」이라는 이름으로 김제군에 편입되었다.

 

또한 백산면은 동쪽은 용지면, 서쪽은 성덕면과 만경면, 북쪽은 청하면과 공덕면, 남쪽은 김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가 1989년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되면서 하리, 흥사리, 상동리는 김제시에 편입되고 1995년 김제군과 김제시가 도농 통폐합에 따라 김제시 백산면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산면은 예로부터 효부와 열녀가 많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백산면 전 지역 여러 곳에는 그 효부와 열녀를 기리는 효부비와 열녀비가 많이 보존되어 있어 백산면은 경노 효친의 사상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지역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상정리는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에 속하는 법정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상두의 ‘상’자와 옥정의 ‘정’자를 따서 상정리(上井里)라 하였다. 조선 말기 김제군 백산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돌제·옥정·요교·석정·상두·사거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정리라 하고 백산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가 되었다.

동쪽으로 백산면 상리, 서쪽으로 백산면 하정리, 남쪽으로 상동과 이웃하고 있다. 자연마을로 금옥(金玉)·옥정(玉井)·옥석(玉石)·돌제(乭堤)·요교(蓼橋) 등이 있다. 금옥은 처음에 1530년경 전 장계부사를 지낸 김해김씨가 낙향하여 터를 잡은 뒤, 그 후손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김동골 또는 금동골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금옥(金玉)으로 고쳤고, 1971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금옥과 옥정을 합하여 양옥으로 고쳤다. 옥정은 마을 앞 우물가에 정자가 있어 유래된 이름이다. 고려시대에 여진족에게 쫓겨 이곳을 지나던 현종이 이 정자에서 쉬면서 우물의 물맛을 보고 석정(石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옥정으로 고쳤다. 옥석은 약 960년 전 마을에 박씨 선산이 있었으므로 박성산 또는 박성뫼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전혀 뜻이 다른 박석(博石)으로 바뀌었고, 광복과 더불어 옥석으로 변경되었다. 지금도 행정마을은 옥석으로 쓰고 있으나 주민들은 박석뫼[博石山]라는 이름을 더 즐겨 부른다. 돌제는 옥석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돌무산 또는 돌뫼산이라고도 한다. 마을 동쪽에 수량이 많은 벌샘이 있었는데 신평이씨들이 샘물을 이용하기 위해 돌제라는 연못을 만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연못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도 돌제라 하였는데, 마을 옆에 돌이 많은 두악산이 있어 돌무되산 또는 돌뫼산이라고도 하였다. 요교는 1750년경 정시숙이 터를 잡은 뒤, 여산송씨가 들어와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에 부정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자 요사스러울 ‘요(妖)’자와 마을 ‘촌(村)’자를 써서 요촌이라 하였다가, 이곳에서 태어난 근세 실학의 대가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이 요교(腰橋)라고 지으니 여꾸다리로 부르게 되었다. 다른 표현으로는 허리다리의 뜻을 지닌다 하겠다. 마을에 열녀 전주이씨 정려(烈女全州李氏旌閭)가 있다.

 

 

Ⅳ. 김제지역의 자연환경

 

김제시는 동부에 노령산맥 끝자락인 모악산(母岳山)을 중심으로 구성산(九城山)·국사봉(國師峰)·상두산(象頭山) 등 높이 500~700m 산지가 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솟아 있고, 황산면 황산(凰山)과 서해 연안에 봉화산(烽火山)·진봉산(進鳳山) 등 100m 안팎의 산지가 솟아 있다.

 

이들 산지를 제외하면 시 전체가 50m 미만의 야트막한 언덕과 동진강(東津江)·원평천(院坪川)·만경강(萬頃江) 주변에 형성된 광대한 충적 평야 지대로 호남평야(湖南平野)의 중심이 된다. 능제저수지·대율저수지·백산저수지·석동제·웅제 등에서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북쪽 만경강과 남쪽 동진강 사이에 펼쳐진 김제만경평야를 안은 김제는 전체 면적의 절반이 논으로 우리나라 쌀의 40분의 1을 생산한다.

 

백산면은 이리시와 김제시의 중간에 자리하여, 나지막한 구릉지대가 펼쳐진 곳이다. 조종산과 두악(斗岳)산 등이 있으나, 해발고도에서 50m 안팎의 구릉지대에 지나지 않는다. 기반암은 대보화강암(大寶花崗岩)이고, 이것이 풍화되는 과정에서 살아남는 것이 잔구(殘丘)이다. 그래서 화강암의 구릉지대는 일반적으로 흰 빛을 띠게 되고, 암석의 풍화로 이루어진 토양은 적색으로 변할 뿐이다. 결국 백산은 ‘화강암이 풍화된 흰색의 구릉성 산지가 많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백산면은 두악산(59.6m), 조종산(46.2m)등 최고 해발 60m 이하의 야산, 그리고 군소 기복 된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김제시의 전체 지형적인 위치로 보아 중앙 지대의 평지고원 지대라 할 수 있다. 1965년까지만 해도 심산 벽지의 감이 곁들었던 백산면은 1966년부터 국가 시책의 하나로 호남야산 개발사업과 더불어 1969년도에 동 공사가 준공을 보게 되어 본 면 하정리에 대규모의 조절저수지(백산저수지) 까지 구축하였다.

 김제시 검산동 양수장에서 저수지까지 약 5Km 능선 지대를 따라 취입 또는 용수용병의 도수로를 조성해서 임실군 섬진제의 역류수를 김제지선으로 인입하여 검산동에서 양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백산면 일대가 관개개선이 이룩됨으로써 임목지대가 채전단지와 목야지로 또는 비옥한 농지로 되어 천수답이 수리안전답으로 일조지간에 일신되는 등 1969년도를 전후해서 그야말로 인위적인 천지개벽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흰색은 기반암에 유래하는 까닭에, 조선조에는 백석(白石)면으로 불러왔다. 면 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 이름은 백석초등학교이다. 이후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루어졌던 1914년에, 연산(燕山)면과 합치면서 오늘의 이름을 낳게 했던 것이다. 이 이름은 백산저수지에 사용되는데, 이는 신평천 일대의 평야지대로 농업용수를 대어 주는 용수 공급원으로서, 큰 구실을 하는 것과 관계된다. 경제 활동은 편리한 관개수로에 바탕을 두고, 쌀농사에 주력하며 구릉지대를 이용한 목축업도 활발하다.

 

 

 

Ⅴ. 김제시와 백산면의 행정현황

 

1. 김제시의 행정구역(1읍 14면 4동)

 

 

[김제시 행정구역도]

 

 

 

2. 백산면의 행정구역(8리 39자연부락)

 

●하정리(5) : 학당 생건 정동 소라 복지

상정리(4) : 요교 양옥 옥석 돌제

●상 리(6) : 소음방 연동 상서 두동 황경 자학

●조종리(5) : 원조 중조 당산 대산 남조

●수록리(4) : 원상 상상 중상 산치

●부거리(5) : 원조 부신 부건 하건 부창

●석교리(7) : 전석 부석 대촌 석신 후석 신석 양청

●하서리(3) : 남산 후남 궁지

 

 

 

Ⅵ. 돌제의 사회․자연․문화환경

 

1. 新平李氏 집성촌

 

新平은 백제시대에 사평현(沙平縣)으로 불렸는데 이는 새롭게 생긴 平野(새벌 新平)이란 뜻으로 757년 통일 新羅 경덕왕 16년에 新平縣으로 개칭되어 웅주(熊州) 혜성군(懳城郡 백제때의 혜군)의 3개 영현(領縣 신평현 당진현 여읍현)중 한 현이 되었다. 오늘날 충청남도 당진군 신평면이다.

 

신평이씨(新平李氏)의 일세조(一世祖) 이덕명(李德明)은 백제때 신평호장을 지낸 이인수(李仁壽)의 후손으로, 고려에서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1534년에 신평이씨 13세손(나의 15대조) 이형수공이 전라진관병마절제도위로 부임하여 옥구 한림동에 정착하고, 14세손인 이의복공(나의 14대조), 15세손(나의 13대조) 이춘성공을 거쳐 16세손인 李鳳公(나의 12대조)까지 한림동에 사셨으나 1689년 기사환국의 난을 피해 17세손(나의 11대조)이정영공께서 이곳 석제에 정착하니 3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신평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신평이씨 문정공파시독공파인 김제계는 현재 400여 세대에 인구는 1,320여명 정도로 추정된다. 나의 생가터에는 24세(나의 4대조, 즉 고조할아버지)이신 玉淵 公(호 : 玉石 1858~1930)께서 1880년경 분가하시면서 살기 시작하여 증조 根郁 公(호 : 竹下 1884~1927), 조부 文煥 公(호 : 芝山 1903~1973) , 아버지 判基 선생(호 : 淸谷 1934-현존)을 이어 내가 태어났고 나 이석한은 (호 : 靑潭)은 양드리(호 : 佳園)와 결혼하여 우리 아들 승수는 생후 1년 6개월을 이집에서 자랐다. 나는 28세손으로 4대 장손이며 나의 아들 이 승수는 29세손으로 5대 장손이 되었다. 이승원이는 두 살 때 얼굴에 피부알레르기가 있어(실제로는 약 부작용) 어머니께서 거의 날마다 등에 업으시고 이리시내의 성모병원에 오랫동안 다니셨는데 쉽게 낫지않아 고생이 많으셨다.

 

내가 2015년 2월에 정년퇴임하고 곧 바로 아버지와 상의한 뒤 1936년에 건축한 나의 생가 옛집을 헐고 12평(데크포함 18평) 작은 조립주택을 지은 첫 번째 목적은 나의 생가터를 온전히 잘 지켜나가기 위함이다. 택호는 할아버지의 호를 따서 지산 쁠라스(Jisan Plase)라 하였는데 이는 옛집을 헐었기에 지산하우스라 하기가 민망하여 〈할아버지 이후 사시던 터〉라는 의미로 지산 플레이스라 하였고, 이를 프랑스식으로 살짝 바꾸어 부르려는 것이다. 우리말로는 지산장(芝山莊) 또는 지산원(芝山園)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이 집을 나의 別墅(농사짓는 작은 농막 같은 별장)로 언제까지나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려 한다.

 

현재 마을에는 시독공파(김제계) 대종중이 관리하는 한옥 재실이 있고 우리 사종중인 중파의 재실(실제로는 관리하는 분이 사는 집)이 있다. 장파와 계파는 본디 관리실이 없었는데 수년 전에 조상의 묘들을 한곳으로 모시면서 조립식 관리실을 지었다. 

 

                                                  [지산 쁠라스 전경]

 

 

2. 종정초등학교

 

우리 집에서 불과 200m 거리에 위치한다. 1960년대 당시에는 재학생이 800여 명이었는데 무려 21개 마을에서 우리학교에 다녔다. 먼 곳은 족히 10리길이 넘었다. 그런데 나는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학교가 있으니 그것은 나에겐 큰 자부심이자 자랑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 신평이씨 종중에서는 1938년 종정국민학교에 부지 8,000여평을 희사한 바 있고, 1942년 3월20일 종정국민학교에 사택 2동을 건립하여 희사하였다. 종정초등학교는 1939년에 종정공립심상소학교로 개교하였다. 1941년에 종정국민학교로 개칭되었고 아버지는 이듬 해 입학하셨다. 나는 1959년에 이 학교에 입학한다. 그 후 1996년에 종정초등학교로 개칭되었고 금년에 제72회가 졸업하였는데 졸업생 수는 총 4,954명이다.

 

종정국민학교 출신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서예가 강암 송성용 선생의 자손들이 유명하다. 큰아들인 송하철 전 전북부지사, 둘째 아들인 송하경 전 성대교수, 셋째인 송하춘 전 고대교수, 넷째인 송하진 현 전북지사가 있고 따님인 이당 송현숙 선생도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다. 친구인 21회 송하진 현 전북지사 이래 여러 훌륭한 후배들이 나타났다. 전 전북도의원을 역임한 유대희 변호사(23회), 임국선 예비역 육군중장(24회), 전 법무부 감찰관을 역임하고 현 금융감독원 감사인 안장근 변호사(25회) 등이다. 작은 시골 국민학교에서 함께 학교를 다니던 21회∼25회에서 여러 자랑스런 인물들이 나온 것은 종정의 큰 자랑이다.

나는 제21회 졸업생으로 현 송하진 전북지사와 6년 동안 내내 같은 반이었고, 현역으로서는 둘이서 남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유필영친구와 함께 21회의 동창회를 조직, 운영하여 왔고, 현재는 내가 4대 회장(2013-2018)으로 연임하여 봉사하고 있다. 전체 총동창회는 조직이 없다.

 

종정 출신이시고 이 학교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신바 있는 아버지의 말씀으로는 학교가 祖宗리와 上井리의 중간에 위치하므로 조종리의 宗과 상정리의 井을 떼어 붙여서 종정이라는 이름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3. 호남야산개발사업

 

1966년부터 1971년까지 김제군일대의 야산이 개발된다. 고창군까지 확대된 이 개발사업으로 우리 백산면을 비롯한 공덕면, 청하면 등 야산지대가 천지개벽이 된다. 동네와 얼마 안 되는 논밭을 제외하고는 마을 주변이 온통 야산이었고, 심지어 우리 집 바로 뒤편까지도 소나무 산이었던 것이니 불과 200m거리인 학교를 가는 것도 소나무 산길을 걸어가는 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야산들이 모두 들판이 되었다. 마을 건너편에는 백산저수지가 생겨나고 도립종축장이 들어섰다. 그리고 나머지는 대부분 밭이 되었다. 그 밭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기 시작했고 거의모든 농가의 큰 수입원이 되었다. 우리 집도 두 장 정도의 누에를 치게 되었고 고교생인 나는 봄에는 뽕나무를 베어서 지게로 나르거나 리어카로 나르고 가을누에를 칠 때는 ?뽕잎 따는 총각?이 되기도 했다. 일손이 딸려 많은 누에를 치지는 못했지만 우리 가정경제에 큰 보탬이 되었고 그래서 무난히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마을 앞산인 두악산에는 호남야산개발사업의 중심지로 온 들판을 조망하기 좋다하여 관망대가 설치되었다. 나는 젊은 시절 이 관망대에 자주 올랐고 따라서 추억거리도 많다. 2015년 11월에 김제시에서는 이곳에 야산개발 기공기념비를 세웠다. 이 야산개발 기공 기념비에는 ‘1966년 9월 21일 호남 야산개발사업 기공식에 故(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참석하시어 우리 김제의 번영을 염원하시었다.’는 내용의 글귀가 적혀있다. 이에 대해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미화가 지나치다는 논란이 일고 철거를 요구하는 시민단체도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1968년에 우리 마을에도 전기가 들어오고 전화가 놓이는 등 천지가 개벽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1969년쯤에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종축장에 오신 일이 있고, 1970년대 중반에는 당시 영애인 박근혜가 호남야산개발사업지역에 시찰을 왔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는데 확실치는 않다. 벌써 40년 전 옛 이야기가 되었는데 오늘날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어 최순실이 개입하는 국정농단이 드러나 10월 23일 이후 우리나라는 현재 국내외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으며 대통령의 퇴임 로드맵과 탄핵이 추진중에 있다. 개성공단 폐쇄 등 대북강경일변도정책과 국정교과서 개편 시도, 재벌들의 돈을 거두어 미르재단과 K스포츠 재단을 설립하고 이를 통한 온갖 비리 등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이해 못할 정책들을 추진하여 지지율 4%에 온 국민들이 촛불 시위를 통해 하야를 부르짖고 있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엊그제인 11월 29일에야 자신의 퇴진 로드맵을 국회에 넘겼다. 박정희대통령은 우리 역사발전의 새로운 도약과 기적을 일구어 낸 실로 위대한 인물이었으나 그 딸인 박근혜는 사이비 종교인인 최태민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대통령이 된 이후까지 그 딸인 최순실 자매와 함께 국정을 농단하였으니 참으로 국가의 재앙이 되었는데 나도 그녀의 참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소중한 한 표를 던져 대통령으로 만들었던데 대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어제는 박정희 대통령 생가에 불을 지른 사람이 있어 내부가 불에 타서 전시물들까지 소실되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아버지의 유업을 이룬다며 대통령이 되었건만 자신의 무능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큰 불효가 되었고 자신도 형사처벌을 결코 면치 못할 상황이다.

 

 

 

4. 도립시범목장(목장 : 전라북도종축장)

 

 

지난 1939년 익산에 종축장으로 설립됐던 축산시험장(현 영등동 지역)은 지난 1967년 김제군으로(백산면 상정리 돌제마을 일대에 20여만 평에 조성되었고, 사무실은 우리 돌제 부락 북쪽 끝자락에 소재) 이전해 종축 개량 업무를 담당해 왔으며 지난 2014년 4월에 진안군으로 다시 이전하였다. 무려 47년간 유지된 이 종축장은 김제비행장 부지로 선정되어 종축장 인근 농지까지 국가가 매입하였으나 비행장 건설이 취소되는 바람에 종축장은 이전되고 그 땅에는 종묘단지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시골마을에 도청 축산과 산하기관인 종축장이 들어선 것은 우리 마을로서는 큰 경사였다. 교육기관인 종정초등학교가 있는데다 농업기관인 도립 종축장이 들어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경제적으로 많은 혜택을 주었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마을 사람들이 종축장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거나 또는 품삯을 받고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는 부르기 쉽게 <목장>이라고 불렀다.

 

 

 

5. 새마을 운동

 

1971년부터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었다. 내가 재수를 하던 해인데 나는 학원의 종합반에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하여 1학기 동안은 집에서 책을 보며 소일하였다. 이때 전국의 군지역마다 한 마을씩을 시범마을로 선정하여 새마을 사업이 추진되었고 마을길들을 넓히고 흙담장은 블록으로 교체되었다. 초가지붕은 기와집이나 슬레이트로 바꾸고 마을에는 신기하게도 공동목욕탕이 만들어졌다. 전병우 군수는 수시로 방문하시고 상주하다시피 하는 군직원이 있다시피 하였다. 그 결과 우리 돌제마을은 이 해에 전국 최우수시범마을로 선정되었다. 우리 마을의 새마을 사업을 이끈 분은 이석현 형님으로 후일 김제군의회 부의장을 역임하셨다. 나는 이 당시에 내 방에 마을문고를 두고 맡아서 운영하였는데 농촌관련 잡지사에서 취재하기도 했고, 아버지께서 설계한 우리 집 돼지축사는 우수하다하여 농민잡지에 칼라로 소개되기도 했다. 또 아버지께서 만든 꽃밭이 아름답다하여 김제군지에 칼라로 게재되었다. 사실 그 꽃밭엔 기껏해야 채송화, 봉숭아, 분꽃, 나팔꽃, 옥잠화, 키다리꽃 등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인데도 대나무를 이용하여 나팔꽃을 펼쳐는 등 아름답게 꾸며져서 매우 예뻤기 때문이다. 새마을 사업이 전국적으로 본격 시작되는 1972년에는 전국의 새마을 지도자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연일 우리 마을을 방문하였고 TV에 여러 차례 소개되었으며 우리 마을의 전경사진이 초등학교 4학년 사회 교과서 앞면 표지에 실렸다.

 

 

6. 복지농촌시범마을

 

5공화국의 새마을운동 시책은 우리 마을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가 새마을 운동에 깊숙이 개입한 1983년 우리 마을은 정부로부터 파격적인 제의를 받았다. ‘덴마크식 복지농촌 시범마을’로 지정해 집중 육성하겠다는 것이었다. 5년 동안 8억원을 순차적으로 투자할 테니 젖소·고기소·돼지 등 축산업을 하되 정부 정책 사업이므로 철저히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주민 총회에서 정부 빚을 얻어 축산하는 일이 불안하다는 여론이 일자 군에서 간부들이 찾아와 설득 작업을 벌였다. 8억원은 축산만이 아니라 마을 진입로 확장, 복지회관과 진료소 건립, 경지 정리에도 쓰이므로 도시 못지않게 잘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그 말을 믿고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사업 시행 첫해인 1983년 서른두 농가가 축산 농가로 선정돼 8천9백만 원을 융자 받았다. 연리 3%에 2년 거치 3년 상환 조건이었다. 사업 시작과 때맞춰 그해 5월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김제군청을 찾아와 마을에 3천만원을 주었다. 그 뒤에는 새마을 운동중앙회장인 전경환씨가 마을에 찾아와 주민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올라갔다.

중앙 정부의 각별한 관심이 계속되자 마을에는 아예 김제군청 축산계장이 들어와 살다시피 했다. 정부 정책 사업이었으므로 군청의 지도와 개입은 절대적이었다. 주민들은 실속을 위해 간이 축사를 짓고 소 한 마리라도 더 사들이겠다고 건의했지만 군 축산계장이 전국에서 최고 모범이 되어야 하므로 축사부터 멋있게 지으라고 요구했다. 간이 축사를 지을 경우 지원금을 회수하겠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축사 스물다섯 동을 건립하는 데 5천만 원을 썼다.

축사가 완공되자 다른 지역 농민들이 관광차를 타고와 견학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후 젖소 50두, 고기소 50두를 사들였다. 송아지도 한 마리에 백만 원씩 사들였다. 그러나 사업을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난 뒤부터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소값은 84,85년으로 이어지면서 대규모 파동이 되어 축산농가들을 강타했다. 백만 원 주고 산 송아지를 2년 동안 키운 뒤 판 값은 45만원. 이자는커녕 원금마저 감당할 수 없게 된 축산농가들은 늘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해 소를 헐값에라도 팔겠다고 했다. 그러자 당국에서는 ‘소를 팔면 지원금을 일시에 회수하겠다’고 맞섰다.

5년에 걸쳐 8억 원을 투자해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복지 농촌을 만들어 보겠다던 당국은 소파동이 일자 정책 사업에서 서서히 손을 뗐다. 83년 8천9백만 원, 84년 3천만 원, 85년 1천2백만 원 등 총 1억3천여만 원을 소값으로 융자해준 뒤 지원을 완전히 끊었다. 그 뒤 우리 마을은 집단으로 빚더미 위에 올라 몰락하기 시작했다. 야반도주한 뒤 소식을 끊어버리는 사람들도 발생하였다.

농정 실패가 안겨준 전형적인 농가 부채라 할 수 있는 마을 축산농가들의 빚은 89년 정부가 일제히 실시한 ‘농어가 부채 탕감 특별조치’대상에서도 제외됐다. 이 조처는 농·수·축협이나 금용기관이 융자한 자금만을 대상으로 했는데, 우리 마을 부채는 주로 김제군 소득금고와 전두환 대통령의 지원금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김제군청은 89년께부터 19.50%에 이르는 고율의 연체 이자까지 적용해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군청은 3월20일자로 마을 농가들에게 농토를 압류해 공개 매각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야반도주한 뒤 소식을 끊은 축산농가들의 융자 원금 및 이자에 대해서는 보증을 섰던 이웃 주민들의 농토를 압류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축산을 했던 집들은 대부분 실패하였으나 자본이 튼튼한 집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계속 소를 키워 상당한 수익을 올린 집도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 소를 몇 마리 키우고 있는 집이 딱 한 집이 있는데 조만간 중단한다고 한다. 우리 집도 이 때 280평의 밭에 돈사를 지어 돼지를 키우다가 이익을 보지 못하고 15년쯤 지난뒤에야 축사를 헐어버렸다. 나는  몇 년뒤 2004년 이 밭에 매실나무를 심어 과일밭으로 만든 것이다.

 

 

7. 민간육종종묘단지 사업

 

종축장이 비행장 부지로 선정되어 추진하다가 취소됨에 따라 이 땅을 다른 용도로 전환하기로 결정되어 드디어 논란 끝에 종묘단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김제시는 2013년 7월 4일 '민간육종연구단지 입주기업'에 NH종묘, 코레곤 등 20개 기업을 선정했다. 민간육종연구단지에는 다국적 종자 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종묘 관련 기업 20여 기업이 입주할 예정이다. 전라북도는 민간육종연구단지가 완료되는 내년부터 '금보다 비싼 종자'를 의미하는 '골든 시드' 프로젝트를 추진할 계획이다.

선정된 업체를 살펴보면, 수출시장확대형은 NH종묘와 아시아종묘 등 2개사, 수출시장 개척형은 현대종묘와 코레곤 등 9개사, 역량강화형은 에코씨드와 양파나라 등 9개사가 최종 선정됐다.

김제시 백산면 일원 54.2ha부지에 조성되는 '민간육종연구단지'는 기반공사 착공을 시작으로 2015년까지 기본 인프라시설을 마무리하고, 2016년부터 20개 종자기업을 입주시켜 세계 수준의 육종연구와 종자수출을 선도하는 글로벌 종자기업으로 육성해 동북아 종자수출의 메카로 육성할 계획이라는데 실제로는 금년에 6개 기업이 마을 주변에 들어섰다. 농협종묘·아시아종묘·현대종묘·코레곤·애프엔피·제일종묘농산 등 국내 대표 종자 관련 기업이 들어섰다. 9월부터 기업들의 입주주가 진행되고 있는데 돌제 로타리 입구에 종자산업진흥센터 건물이 들어서서 11월 22(2016)일 준공식을 가졌다. 우리 마을로 들어서는 초입엔 아시아 종묘가 건물을 짓고 입주하였다. 우리 마을의 서쪽과 북쪽으로 회사들이 마을을 에워싸듯이 들어섰다. 앞으로 종묘회사들이 크게 발전하고 융성하여 우리 마을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1917년부터 매년 국제종자박람회가 개최되고 있다. 

 

[종자산업진흥센터 전경]

 

[마을주변 미래 조감도]

 

 

 

Ⅶ. 1960년대 돌제 모습

 

1. 마을의 가구 구성

 

돌제 마을(안동네 중심)에 사는 57호의 집들은 거의 모두가 신평이씨 친족들이었다. 친구인 유삼렬이네 집, 나영균 형의 집, 박영수 집, 김기환네 집, 최쌍니네 집, 조익준네 집, 최판권형의 집 등 예닐 곱 집을 제외하면 모두 일가천척들이 모여 살던 씨족부락인 것이다. 호남야산개발 이후 외곽지역에 조장로님댁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게 되어 전체로는 60여 호가 넘는 큰 동네가 되었다. 집집마다 식구수가 대략 6명~10명(우리 집은 8명)이므로 마을 총 인구수는 대략 350여명~450여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집마다 초등학생들이 한두 명씩은 모두 있었으므로 재건운동 할 때는 아침에 모정에 모여 열을 지어 구령을 붙여가 학교에 갔는데 이때 모이는 안동네 초등학생들이 50~60여명 넘었었다. 지금은 초등학생이 단 한 명도 없다.

 

 

 

2. 마을 지명

 

●용호초리(16가구)

우리 집에서 뒤편으로 작은 언덕(잔둥)을 넘어 가면 나오는 마을의 위쪽에 위치한 곳이다. 학교 앞에는 효수네 집, 쌍니네 집, 영균 아저씨네 집, 경희네 집, 기룡 아저씨네 집과 교사 사택, 교장사택, 옛 판용이네 집, 아랫점방, 영희네 집. 기홍 아저씨네 집이 있었다. 학교 뒤편에는 사택 2채, 윗점방, 상덕이네 집이 있었고 시내 건너 조금 떨어진 곳에 기조네 집이 있었다.

  ●안덤(26가구)

마을의 중심부이다. 아래로부터 기춘 아저씨네 집, 현기 아저씨네 집, 석현 형님네 집, 현수네 집, 영기네 집, 순금이네 집, 영수네 집, 전환아저씨 집, 석종 형님 집, 영생 아저씨 집, 기복 아저씨 집, 판용이네 집, 재철 형네 집, 옛 기도네 집, 기현이네 집, 기정 아저씨 집, 우리 앞집, 우리 집, 작은 집, 병환 아저씨 집, 갑복 아저씨 집, 동기네 집, 기환이네 집, 기환이네 집 옆엔 90평생을 혼자사시며 작은 몸집에 눈이 침침하시고 보행도 아주 느렸지만 이웃동네를 다니시면서 마른 생선 행상을 하셨던 황산할머니 집이 있었다. 황산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자주 식사를 하시곤 했는데 나를 매우 예뻐하시며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주시기도 했다. 인근 마을에 따님이 살고 있어 가끔씩 와서 돌봐주기도 했지만 끝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살다 가신 억척스런 분이셨다. 시내건너 가장골에는 조익준 친구의 집이 있었다.

●잿덤(9가구)

기중아저씨 집, 광석이네 집, 기남아저씨 집, 재환할아버지 집. 갑기네 집이 있고 재를 오르면서 석재네 집, 기권 아저씨네 집, 석구형네 집, 중대장님 집이 있었다.

●서당골(3가구)

재실(서당)에서 황경동으로 가는 길이 있어 독골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우리는 별로 들어본 일은 없다. 이곳에 종중재실이 있는데 재실에는 동립 아저씨네가 살았고, 쌍기 아저씨 집, 최판권 형네 집이 있었다. 어느 김제 장날, 어머니를 따라 장에 가서 집에 오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다가 동립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재실을 관리하며 사는 관계로 마을사람들로부터 하대(낮추임)을 받았으나 그리 괘념치 않는 태도로 살았다. 그날 아저씨가 내게 풀빵을 사주신 기억이 평생 잊혀 지지 않는다. 아버지와 동넨배로 군대에 같은 날 입대하신 인연으로 나를 예뻐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이웃마을인 황경동에 사신다고 하며 우리 집 몇 평 안 되는 논은 아저씨의 아들이 짓고 있다. 어렸을 때 나를 사랑해주신 어른들의 따뜻한 말과 표정은 잊혀 질수가 없다. 어른들은 항상 온화한 얼굴과 다정한 말로 따뜻하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방죽아래 또는 신작로(3가구)

23번 국도에서 동네로 들어오는 첫머리를 말한다. 신작로 초입에 기도네 집, 삼열이네 집이 있고 시내건너 외지에서 이사 온 강씨네 집이 있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신작로 아래는 방죽아래이고 마을 쪽은 소란너머라고 했다는데 우리는 당시에 소란너머라는 말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그냥 방죽아래라고 통칭했다. 지금은 상정교차로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버스를 탔다. 우리 집에서 7분 거리이다. 이곳에는 우리 논이 1,050평이 있어 내가 고교를 졸업한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혼자서 김도 메고 농약도 주며 일을 거들었으나 경제 형편상 부근의 다른 집의 작은 논과 바꾸었다.

●징걸씨

신작로에서 200여미터를 들어와 본 마을 입구 초입부근을 말한다.

●상정 잿빼기

지금은 백산교차로가 된 곳으로 요교마을, 자학마을, 돌제마을에서 버스를 타러 나오는 곳이며 상정리와 상리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다. 이곳에는 방앗간이 있고 이발소와 구멍가게와 주점이 있다. 농협창고가 있고 담배와 누에고치를 수매하는 곳이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애써 생산한 누에고치를 리어카에 싣고 줄을 지어 등급판정을 기다렸고 좋은 판정을 받으면 기분이 좋았다. 할아버지께서는 기대가 컸던 손자가 당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부끄러운 모습만 보시고 떠나셨다. 그래 시골집에 지은 작은 別墅는 할아버지의 號를 따서 芝山 쁠라스라고 지었는데 할아버지께서 아시고 작은 미소라도 지으시는지 모르겠다.

이곳은 우리 집에서 10분 정도 걸리는데 산이 많아서 저녁이면 무서우므로 주로 낮에만 이용하였다. 그러나 70년대에는 익산의 시내버스 종착지여서 시내버스를 타게 되면, 밤에도 어절 수 없이 이곳에서 걸어 와야만 하던 때도 있다. 밤에 산길을 혼자 오는 것이 재미없으면 목장길로 돌아왔다. 목장길은 차도이므로 차와 사람이 왕래하는데다 조금 더 걸어 13분 정도면 집에 올수 있었다. 목장 삼거리는 지금 돌제교차로가 되었다.

●가장골

마을 앞의 논과 산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작은 골짜기이다. 이곳에는 우리 논이 1,500여 평이 떡 버티고 있어 매우 자랑스러웠으나 60년대 후반에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남에게 넘겼다. 또 우리 야산이 있어 개간하여 밭을 만들었는데 무려 1,500평으로 산도벼나 고추, 고구마를 재배하였다. 산도벼를 재배하면 선희와 간식거리인 단수수를 챙겨서 아침 일찍부터 새를 보러 나가고, 고추를 갈면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따 놓은 고추를 두 분이 직접 머리에 이고 나르시기도 하지만 나도 지게에 지고 많이 날랐다. 우리 입에서 걸어서는 불과 5-6분 거리이지만 무거운 짐을 지게에 지고 좁은 밭 두덕과 논 두덕길을 걷는 일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어느 해인는 고구마를 재배하여 내가 수 십 가마니의 고구마를 지게에 지고 트럭이 대기하고 있는 곳까지 날랐던 기억도 난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손수 농사지으시느라 고생 정말 많이 하셨다.

●샛밭둑골

마을 동편 언덕에 있는 모정에서 더 내려가면 논이 있고 밭과 산을 지나 자학동 마을로 넘어 가게 된다. 이곳에는 본래 우리 논 350평과 밭 800평 여 평이 있었는데 중학교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리어카를 끌고 밭의 흙을 퍼 나르며 고르게 하여 논 한마지기를 더 만들었다. 당시 아버지께서 군산에서 사업을 하시므로 일군(머슴)한 사람이 있어 나와 한방에서 잤다. 20여 년 전 경지정리를 한 후 근처에 배정받은 논이 현재 짓고 있는 한 필지 논이다. 초등학교 시절, 선희와 내가 여름비를 흠뻑 맞으며 고구마를 캐러 다녀온 기억이 난다.

●맷골

지금은 큰 밭이 되어있지만 당시에는 새밭둑골에서 우리 밭위로 올라서면 억새밭이 나오고 이어 산을 지나면서 잿빼기로 가는 길이 있었고, 현수네 밭을 지나 자학동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었다. 자학동 가는 길은 소나무가 빽빽한 삼열이네 종산을 지나면 23번 국도 행길이 나오고 행길을 지나 논과 산을 지나야 자학동이 나온다. 지금도 그렇지만 행길은 좌우로 언덕이 있는 산이므로 골짜기라 할 수 있으니 이곳이 맷골이다. 송지사가 사는 요교마을 학생들이나 자학동 학생들은 이 길을 통하여 학교에 다녔다. 맷골에는 우리 신평이씨 종산이 있고 그곳에는 많은 조상묘들이 있다.

●귀등골

지금은 모두 밭이 되었지만 교장사택을 지나 윗점방으로 가는 길 오른편으로는 모두 소나무 산이었다. 좁은 산길을 따라가다 잿배기에서 학교로 오는 길을 만나고 이를 건너서 조금 가면 우리 밭 200여 평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자주 이 밭을 찾아 가는 일이 즐거웠고, 선희와 나는 간식거리를 위해 가끔 고구마와 감자를 캐오기도 하고 수박을 따오기도 했다.

●원안

학교에서 소종중 산을 지키는 재실인 기조네집을 가는 길에 무너진 둑이 있고 그 오른편을 원안이라 불렀다. 원안은 본디 방죽이었다고 하며  아버지는 자주 고기를 잡았다고 증언하셨다. 1939년에 흉년이 들어 둑을 크게 쌓는등 개보수를 하였는데 언젠가 방죽의 둑이 무너지기 시작하여 논으로 변하였다. 나는 방죽이 기억에 없는데 기조친구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1960년대초에는 방죽에 변한 논이 기조네 소유였다가 최상선씨 소유로 넘어갔다고 말한다. 우리는 무너진 둑을 건너 뛸 수는 없기에 둑아래로 내려와 무너진 둑의 가운데를 통해 흘러오는 맑은 시내를 건넜다. 불로동 친구들은 이 시내를  건너 학교에 다녔다. 이 시내는 원도랑이라 하며 마을 입구 신작로까지 이어졌고 큰 비가 내릴라 치면 시뻘건 흙탕물이 무섭게 흐르는 원도랑둑이 무너질까 두려웠다. 

원안이라 부르는 방죽골짜기를 새방죽골이라 불렀는데 이는 본디 조선후기에 마을입구에 돌제(堤)라는 큰 방죽이  있다가 없어진후 마을앞 가장 윗쪽에 새로운 작은 방죽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래서 새방죽이라 불렀고 골짜기는 새방죽골이 되었다고 보인다. 새방죽골은 한자어로 신방(新坊)이라 표기하였고 이곳에 모신 7대조 할아버지는 신방공(新坊公)이라 불리며 우리 소종중(신평이씨 문정공파 김제계 신방공파)의 시조가 되시었다.

●외애미

원안으로부터 북으로 논을 따라 가면 이곳은 외애미라 하였다. 논 주변은 야산이고 외져서 우리가 찾는 일이 거의 없는데 1963-64년경 국가재건운동 당시 학교에서 퇴비증산운동을 벌여 학급당 퇴비 모집 할당량을 주었는데 이 때 우리 반 친구들과 이곳까지 낫을 들고 풀을 베러 갔고 개구리를 잡아 구어 먹기도 했다.

●아가골

지금 백산저수지의 관망대 서쪽지역이 아가골이다. 아가위나무(산사나무)가 많은 골짜기여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우리 사종중 산이 있어 그중 약 200여 평의 우리 가족묘역이 조성되어 있는데 나의 고조부, 증조부 이하 열두 개의 봉분이 있고 내가 장손으로서 아버지와 관리하고 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장손으로서 책임지고 묘역관리를 책임지겠으나, 세상은 너무 급히 변하고 사람들의 가치관도 급변하는 세상이라 나 이후의 묘역관리는 후손들이 알아서 할 밖에 도리가 없다.

 

 

3. 마을의 샘과 원또랑

 

●윗시암 : 용호초리에 있던 시암이다. 한 여름 무덥고 깜깜한 밤이면 병환이 아저씨와 산책을 하러 나가 바가지로 물을 떠서 등목을 하곤 했다. 물이 얕아서 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너무 차가운 물이라서 등목이외는 하지를 못했다.

●새시암 : 우리 집 대문 앞에 있던 시암이다. 6.25전쟁 이후 판 우물로 두레박으로 줄을 다섯 번 정도 끌어 올리면 되는 그리 깊지 않은 시암이다. 10가구에서 이용했고 일 년에 한번은 이웃이 모두 모여 물을 뿜어내고 청소를 하는데 누가 넣었는지 꼭 붕어 두어 마리가 보이곤 했다. 1970년대에 집집마다 지하수를 파면서 이 우물을 없앴다.

●안시암과 미나리강 : 동네 한복판에 위치한 시암으로 물이 얕아서 어른들은 두레박 필요 없이 바가지로 뜨는 시암이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다. 이곳이야말로 마을의 한 복판이어서 동네사람들을 수시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아랫쪽으로는 수량이 풍부한 안시암 물을 받아 항시 물이 가득한 미나리 강(미날강)이 있어 무려 일곱집이서 소유했다. 작은집 앞에서 승기 아저씨네 집으로 이어지는 미나리 강 사이로 리어카 정도나 갈 수 있는 좁은 길이 나 있고 아래쪽에 우리 작은집 미나리강이 있어 우리는 봄철이면 미나리를 자주 얻어먹을 수 있었다. 미나리 농사가 끝나면 왕골을 심었다. 왕골은 쪼갠 줄기를 건조하여 자리·방석·모자 등을 만들고, 속은 건조하여 신·바구니·노끈 등을 만든다고 한다. 당시 미나리강을 소유한 집은 기권아저씨네, 승기아저씨네, 석종형님네, 현수네, 영기네, 영생아저씨네, 재철형네집이었다고 한다.  

●잿시암 : 잿덤에 있는 시암으로 두레박을 이용했다. 10여 번은 끌어 올려야 하는 조금 무서운 시암이다.

●뻘시암 : 새밭둑 우리 밭 못미처 뻘시암이 있었다. 이 시암은 마시는 우물 샘이 아니다. 작은 연못이다. 윗 논은 춘기아저씨네 논으로 수렁논이라서 연중 물이 마르지 않았는데 이 논의 물이 연못으로 흘러 물이 고이는 것이다. 이곳에는 빨래를 두드릴 수 있는 큰 돌이 박혀 있었고 실제 가끔씩 아주머니들이 많은 빨래를 머리에 이고 와서 빨래를 빠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우리는 밭에서 일을 하고 집에 올 때면 언제나 이 시암에서 발을 씻고 왔다.

●교장사택 시암 : 일제 때부터 사용해 왔다는 도르레를 이용하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요란하고 시끄러운지 용호초리와 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청이 떨어질 정도였다. 또 얼마나 깊던지 두 손으로 도르레 밧줄을 수십 번 끌어 올려야만 겨우 두레박이 올라왔다. 학교에서 쓰는 물은 모두 이 시암물을 퍼다가 쓰므로 청소시간이면 물당번들이 수대를 들고 교장사택으로 선착순으로 달려가서 힘들게 도르레를 잡아당겨 물을 퍼서 교실로 날라야만 했다.

원또랑 : 시내란 골짜기나 평지에서 흐르는 자그마한 내를 말하며 개울, 개천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는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는 < 원또랑>이라고  불렀다. 큰 시내가 아니어서인지 또랑(물이 흐르는 작은 시내를 뜻하며 똘이라고도 한다.)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원또랑은 결코 부르는 이름처럼 작은 또랑은 아니다. 원또랑은 외애미에서 흘러나와 마을 앞을 흐른다. 학교에서 불로동으로 가는 길을 따라 기조네 집 가까이에서 이 시내는 시작되는데 방죽아래까지 1km는 족히 넘는다. 앞쪽은 둑이 잘 쌓여져 있고 뒷편은 밭이나 산인데 어린 우리의 눈으로는 마치 큰 낭떨어지나 큰 절벽으로 보일 정도로 높았다. 평상시에는 시내물이 졸졸 흐르다가도 큰 비가 오는 날이면 마치 넘쳐 흐를 듯이 무섭게 흘러내려서 우리는 으레 물구경을 가기도 했다. 큰물이 넘칠 때면 가끔 둑이 무너지기도 했고 홍수가 져서 큰 물이 흐를때면 둑 안에서는 그 안에서  자라던 꿩 새끼들이 둥둥 떠내려가기도 하는데 우리는 구해줄 생각보다는 잡아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동물보호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원또랑 주변이 산이나 목장이 아니고 종묘회사들의 대형비닐하우스들이 설치되어 있어 큰 비가 내리면 물난리 사태가 예상되므로 최근에 시내를 확충하고 시멘트로 둑을 쌓아 좀 더 큰 규모가 되었으므로 또랑이라는 말이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

미나리깡(꽝) : 미나리를 재배하는 논은 미나리깡(꽝)이라고 부른 것이다. 나는 지끔껏 미나리강이나 미나리깡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사전에는 전라도 방언으로 미나리꽝이라고 나와있다. 엄청 물이 풍부하여 끊임없이 샘솟는 안시암에서 쓰고 버리는 물을 이용하여 미나리 강에서 미나리를 재배하였다. 세 개의 미나리강 중 하나가 작은 집 소유여서 우리는 자주 미나리를 얻어 먹을 수 있어 우리 집의 주 식재료가 되었다. 미나리를 재배한 후로는 왕골을 심었다.  왕골은 말려 돗자리를 짰던 것으로 생각된다.  

 

 

4. 모정과 재실

 

●茅亭 :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지은 모정은 아마도 지붕에 띠를 얹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인듯하다. 물론 우리 시절에는 볏집으로 지붕을 했다. 우리는 모종이라고 불렀다. 부자동네는 기와를 얹은 정자를 짓지만, 우리 마을은 초가였기 때문에 정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모정은 20여 평인데 높은 마루가 5평 정도이고 낮은 마루가 15평 정도 되었다. 선풍기도 없던 시절이라 6월이 되어 더워지기 시작하면 낮에는 남자들은 모두 모정으로 나와 낮잠을 자고 논이나 밭으로 나갔다. 우리 어린이들은 감히 모정마루로 올라가지 못하고 항상 모정 아래 흙바닥에서 고누를 두거나 잠자리를 잡거나 하면서 들락거리며 놀았다. 어른들이 없으면 먼저 올라가 누워있는 친구들의 등판을 마루판 사이 틈으로 솔가루를 이용하여 찌르기도 하고 모두 올라가 잘 그려진 고누판에서 고누를 두기도 하고 눕기도 하였다.

●재실 : 한때 서당으로 이용되어서인지 우리는 서당이라고 부르는 신평이씨 시독공파(김제계)의 재실이다. 기록에 의하면 1926년 6월 8일 시독공 재각 긍구당을 건립하였으며 현판은 석정이 썼다. 이 건물이 세워지기 16년 전에 석정은 이미 돌아가셨으니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이전에 있던 초가 재실은 보창당이라고 했었다니 말이다. 앞으로 확인이 필요하다.). 석정 이정직(1841~1910)선생은 이웃마을인 요교에 살던 우리 신평이씨 종친 학자로 자는 형오(馨五), 호는 석정(石亭)이다. 실학(實學)에 조예가 깊었고, 시문(詩文)에 능했으며, 글씨ㆍ그림에도 뛰어났다. 나의 친구인 이창석군의 고조할아버지로 장손인 창석이네 집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 21호로 지정되었고 석정은 칸트와 베이컨을 최초로 소개한 근대 실학자로 평가받으면서 그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시제를 지내는 날이면 우리 어린이들도 가슴이 설렜다. 시제를 모시는 산소에서 직접 떡을 주기도 하였지만, 특히 대종중 시제 때는 오후 서너 시쯤 되면 집집마다 어린이 한사람씩 바구니를 들고 모두들 재실로 향했다. 나란히 줄을 세운 뒤 집집마다 고르게 바구니에 과일과 떡과 생선부침을 나누어 주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항상 대종중 유사로 직책을 가지셨으므로 일을 보시는 분들이 내게는 덤으로 조금 더 얹어주기도 했다. 집에 와서 동생들과 나누어 먹던 재미는 다시 맛 볼 수 없는 추억이다. 나는 먹는 데에는 양보심이 적어 동생들보다 기어이 더 먹고자 했으니 부끄러운 오빠다.

 

                                                 [긍구당 현판]

 

5. 마을의 산업

 

○논농사

우리 마을은 주변이 온통 야산인 곳이었다. 신작로에서 들어오는 길 이외에는 모두 산길이었다. 논은 동네입구와 앞, 그리고 뒤편에 기다랗게 이어져 있었고 앞산 건너 가장골에 약간의 논이 있었다. 이런 우리 돌제마을은 들녘도 아니고 산중도 아닌 어정쩡한 마을, 즉, 논과 밭은 적고 야산이 많은 마을이어서 좋은 점은 많았다. 깊은 산중처럼 교통이 불편하거나 생산되는 것이 적어 산속을 헤매며 먹을거리를 찾을 필요도 없고, 황량한 만경들녘마냥 삭막하지 않았다. 논과 밭고 산이 적당히 어우러져 있는 곳이어서 자연은 나름대로 아름답고 밥걱정 덜하고 버섯이나 땔감나무는 충분하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논은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부잣집이 40여마지기(6,000평) 우리 집 같은 중농은 15내지 20여마지기(2,000평~3,000평)을 지었고 어려운 집들은 10마지기(1,500평)가 채 안되었다. 고등학교 때 백구에 사는 영찬이네 논이 100마지기에 머슴이 다섯이고, 진봉에 사는 구남이네 논이 280마지기에 머슴이 10명이라는 말을 듣고 기절초풍할 뻔 했는데 김제 만경 들녘의 부잣집들이 대개 100여마지기 이상 짓는 것을 미처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 논들은 대부분 천수답이어서 비가 오지 않으면 모내기를 하기가 어려웠고 곳곳에 둠벙(작은 연못)을 파 놓아 가뭄에 대비하였다. 둠벙을 품으면 붕어, 송사리, 미꾸라지를 한 수대 가득히 잡을 수 있어 아이들도 곧잘 공동으로 품어내고 고기를 잡았다. 논주변의 작은 수로에도 물고기가 많아 가끔씩 잡았는데 우렁, 송사리, 메기, 장어, 음지 등을 잡았다. 가을이면 메뚜기를 잡아 부엌에서 불에 구워 먹기도 했다. 아버지와 함께 우렁이를 줍고 사래로 고기 잡던 일, 메뚜기 잡아와서 구어 먹던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밭농사

밭 역시 그리 많지는 않았고 우리 집은 많을 때 2,300여 평이어서 논 면적과 거의 같았다. 밭에는 조선시대 이래 내내 전통작물들을 심었다. 보리, 밀, 콩, 팥, 고구마, 감자, 참깨, 들깨, 수수, 조 등이다. 기장은 재배하지 않았다. 가끔 목화를 심는 집도 있었고 언젠가는 작은 집에서 땅콩을 재배해서 신기했다. 우리 집 경작지가 겨우 5,000여 평인데 가끔씩 머슴을 두었다. 할아버지께서 한의원을 하시므로 농삿군이 아니시고, 아버지는 제대 후 3~4년간은 농사를 지셨으나 곧 군산에서 사업을 시작하셨으므로 어쩔 수 없이 가끔씩 머슴을 둔 것인데 마을에서 머슴을 두는 집이 예닐 곱 집이 있었다. 우리 집처럼 결코 부자가 못되는 집에서 일손이 없다하여 머슴을 두는 것은 절대로 가당치 않은 일이었지만, 오늘 날 부자가 아닌 사람들도 필요에 따라 파출부를 쓰기도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모두 서로 돕고 나누어 쓰는 경제의 한 형태가 아니었나하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도 해본다.

○잠업(누에치기)

호남야산개발사업에 따라 동네 주변의 거의 모든 야산이 개발되어 밭이 되면서 집집마다 뽕나무를 심게 된다. 이제는 보통 농민들도 대부분 특용작물을 하게 된 것이다. 김제에 호남잠사라는 회사가 설립되어 누에고치를 수매하여 실을 생산하였다. 누에를 키워 얻는 수입이 논농사의 4배가 된다고 하였지만 일손이 없으면 힘들었다. 집집마다 누에 한 장 이상은 키우는데 우리 집은 일손이 적어 겨우 두 장 정도만 길렀다. 목장 뒤편의 어느 집은 수백 장을 길러 누에를 키우는 시기에는 수십 명의 일군들이 모여들었다. 마치 무슨 생산공장 같았다. 일 년에 두 번 치는데 봄에는 뽕나무를 베어 지게로 지어오거나 리어카로 날라 오고, 가을에는 뽕칼로 뽕을 따서 자루에 담아 날랐다. 그래서 종종 나는 뽕따는 총각이 되기도 했다.

○담배농사

누에치는 일 못지않게 수익성이 높은 또 다른 특용작물인 담배농사도 일손이 많이 들었으나 집집마다 담배농사를 지었다. 더운 여름 날 담배잎을 따서 건조장 안에서 정성스레 잘 말려야만 좋은 등급을 받을 수 있다. 가족들이 담배잎을 예쁘게 묶는 일부터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농촌사람들도 비로소 부지런하면 누에치기와 담배농사로 수매하여 큰돈을 현금으로 받아 자식들 교육에 투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60년대 중․후반이면 남자아이들만 거의 중학교에 들어가는 형편이었으나, 70년대가 시작되면서 여학생들까지 모두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거이 모든 면단위에도 중학교가 생겨났다. 놀랍게도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시골에 눌러있던 젊은이들은 도시 상공업의 발달로 일자리를 찾아 모두 도시로 이동하였다. 향도이촌현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가축 기르기

당시는 돼지고기나 쇠고기는 연중 정육점에서 살 수 있었지만, 생선은 쉽게 상하기 때문에 한 겨울 아니면 소금절인 것 외에는 사올 수조차 없었다. 가난한 시절이라 쇠고기는 설과 추석 명절 때 겨우 맛을 보았고, 돼지고기도 명절과 제사 때, 그리고 모내기나 벼 베기 하는 날에나 제대로 먹어 볼 수 있었다. 생일날엔 닭 한 마리를 잡아 미역국을 끓여 온 식구가 나누어 먹었다. 우리 양드리네 집은 도시 변두리였는데 닭 한 마리라도 여러 집에서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집은 가축을 많이 길렀다. 60년대에는 어미돼지 두 마리를 종돈으로 길러 새끼를 낳게 하여 판매하였다. 나는 돼지를 키우지 않는 몇몇 집에 아침이면 구정물을 걷으러 다녀오곤 했다. 돼지는 주로 햄프셔와 요크셔를 길렀고 일 년이면 두 번씩 새끼를 낳는다. 새끼는 보통 10마리 내지 12마리를 태어났고 50여일을 마당에서 자라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긴 했으나 그놈들 때문에 심심하지는 않았다. 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잘 단속하지만 어쩌다 몰래 열린 문으로 집단으로 우르르 몰려 나갈라 치면 남의 농작물 피해를 입히자 않으려 속히 몰아오느라 꽤나 힘이 들었다. 어미돼지를 길러 새끼를 낳아 파는 일은 상당한 수입이 되었는데 다른 집에서는 대부분 한 마리씩 길러서 팔았고 우리처럼 새끼치기를 하지는 않았다. 83년도에  우리마을이 축산시범마을로 지정됨에 따라 대출을 받아 집 뒤에 있는 뽕나무 밭을 없애고 상당히 큰 축사를 현대식으로 지어 본격적으로 양돈업을 시작하셨는데 어미돼지 두 마리로 새끼를 치고 그 새끼들을 서너 달씩 길러서 팔았다. 수익성이 낮아짐에 따라 양돈을 중단하게 되어 방치된 축사를 허물고 2002년에 내가 매실나무를 심어 과일밭으로 전환하였다.

집집마다 토종개(똥개) 한 마리를 언제나 키운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다. 언젠가 가족들이 방죽아래 논에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따라갔던 개가 날이 어둡도록 도시 돌아오지를 않아 내가 새밭둑 논에 갔더니 개 혼자서 짚더미 위에 엎드려 가족들을 기다리다가 나를 보더니 너무 반가워한다. 제 딴에는 방죽아래서 일을 마친 가족들이 어느 때처럼 새밭둑 논으로 갈 줄 알고 먼저 가서는 우리 가족들이 오기만을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기르는 개도 잡아먹던 시절이라서 차마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마음 아픈 기억들도 있다. 80년대에 매주 할아버지댁에 찾아가는 우리 아이들이 무척 예뻐했던 미리는 매우 영리했다. 당시에는 내가 세퍼드를 사다 드려서 기른 일도 있다. 도 길렀다. 봄에는 병아리를 10여 마리 부화시켜 점점 자라면 잡아먹기도 하고 계란을 받아먹기도 했다. 당시에 계란은 결코 가족들이 마음대로 먹을 수 없을 만큼 비쌌다. 계란은 모았다가 새끼로 꾸러미를 엮어 10개씩 넣어서 장날이면 내다 팔았다. 요즘 달걀 한 개에 100원인데 당시는 계란 한 개로 점방에서 과자 한 봉지를 충분히 살 수 있었기에 요즘 가격으로는 1,000원 정도로 생각된다. 군것질을 하고 싶었던 선희가 5~6학년 때쯤 친구들과 각기 자기 집에서 종종 계란 한 개씩을 몰래 가져다 아랫점방에서 군것질(당시 표현으로는 까먹다)을 했던 모양인데 어른들에게 들켜 엄마에게 혼이 난 일도 있었다.

는 단 한 번 키운 일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쯤인데 할아버지께서 사오신 암소를 내가 종종 앞 시내 둑으로 나가 풀을 먹인 기억이 있다. 아마도 소를 사서 키운 다음 좀 비싼 값을 받고 파셨던 것으로 여긴다. 1960년대 중반 경운기가 보급되기 전까지는 암소들이 논밭을 갈고 구루마(마차)로 짐을 실어 날랐는데 우리 마을에도 서너 집에서 소를 키우고 구루마를 운행하였다. 우리 마을에는 말은 한 마리도 없었다.

오리는 오랫동안 여러 마리를 키워 알도 내고 잡아먹기도 했다. 어느 때는 닭보다 오리수가 더 많았다. 칠면조도 키웠다. 암수 한두 마리를 길러 오리처럼 알도 내고 겨울에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버지께서 잡아 가족들이 축제를 했다. 염소도 길렀다. 주로 한 마리를 길러서 약용으로 썼는데 풀이 있는 밭에 매어 놓았다가 저녁때가 되면 데리러 가는데 어찌나 주인을 반가워하는지 모른다. 줄을 매어놓은 꼬챙이를 뽑자마자 온힘을 다하여 집으로 내달리면 내손은 줄을 놓친다. 집에 가면 그 놈은 벌써 와있다. 어느 때인가는 고양이를 기르기도 하였는데 이놈은 도무지 사람에게는 정을 붙여주지 않아서인지 지금도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다. 토끼는 1970년대에 내가 많이 길렀다. 새끼를 낳으면 팔거나 남에게 주지 않고 그냥 길렀기 때문에 수십 마리가 되는 때도 있었다. 친구들이 오면 잡아주고 우리 가족이 먹기도 했는데 잡는 일은 내가 아주 잘했다. 우리 집에 다녀간 친구들은 토끼 한 마리씩은 먹고 갔다고 모두들 기억하는데 이젠 내손으로 동물을 잡는 일은 안하기로 하고 있다. 최근에 과일밭 축사에서 기르고 있는 두 마리의 암수 토끼가 새끼를 7마리나 낳았다. 이후에 계속하여 새끼를 낳을 터인데 그 많아지는 토끼들을 어떻게 처분할 것이지 매우 걱정이다. 친구들에게도 주고 적절히 처리해야 할 듯싶다. 내년 봄에는 지금처럼 닭 5~6마리, 토끼 서 너 마리에다 오리 3~4마리를 추가로 기를 생각이다.

○수공업

1971년 새마을 운동으로 기와지붕을 올리기 전까지는 우리 마을 집들은 재실 하나를 빼고는 모두 초가집이었다. 3~4년에 한 번씩 초기지붕을 다시 엮어 올렸다. 담장역시 마찬가지였고 초가담장에는 호박을 키워 호박이 주렁주렁 열렸었다. 대문은 싸리로 엮거나 대나무로 짜서 만들었다. 병아리를 키우는 망태나 닭들이 잠을 자러 들어가는 닭집은 대나무를 엮어 만들었다. 우리 집은 대밭이 있어 필요한 물건들을 만드는데 요긴하게 사용했다. 겨울철이면 볏짚으로 다음해에 쓸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짰다. 산에서 댕댕이 넝쿨을 끊어다가 바구니를 짜기도 하고 박을 말려 바가지를 만들어 곡식을 담거나 물바가지로 쓴다. 플라스틱이 나오기 전까지 집에서 쓰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손으로 직접 짜거나 만들어 썼지만 1970년대부터는 거의 모든 물건들이 공장에서 제작되어 판매되므로 시장에서 구입하게 되었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 되어 갔던 것이다.

 

 

 

6. 마을의 풍속및 추억거리

 

○전통혼례식

국민학교 입학 전 쯤, 옆집인 갑복이 아저씨네 집에서 전통혼례를 치르는 것을 내내 구경한 일이 있다. 아마도 1960년대 초까지는 마을에서 전통혼례식을 거행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장례식

당시에는 장례식장이 없는 때이므로 초상을 당하면 집에서 3일상을 치른다. 마을사람들이 총동원되어 장례식을 준비한다. 가장 먼저 종정국민학교에서 부고를 인쇄하여 청년들이 동네별로 나누어 가지고 백산면 지역의 동네를 두루 돌며 부고를 돌린다. 먼곳은 전보를 치거나 읍내에 나가서 전화를 하여 알린다. 남자들은 천막을 치거나 장을 보거나 음식대접할 상을 준비하는 등의 일을 맡고 여자들은 엄청난 양의 음식을 장만하기 바쁘다. 1973년 12월 말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초상에는 전주에서 친구들이 모두 다녀갔다. 핸드폰은 커녕 면소재지 이외지역에는 전화조차  없었지만 당일 하루동안에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연락들이 긴급하게 취해졌다.

나도 1970년대의 20대때에는 마을장례에서 상여를 종종 맸다. 서로 품앗이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마을 인구가 400여명이나 되는 데다가 1년뒤에는  탈상까지 치렀기 때문에 초상과 탈상을 치르는 큰일이 많았고 이 때는 전문도박꾼들까지 모여들어 밤을 새워가며 노름을 할 수 있는 거의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도박장소가 되어졌다. 마치 삼한시대에 소도(蘇塗)에서 범죄자가 숨어들어도 잡아가지 않았던 것처럼 초상집에서 도박을 하는 것은 결코 범죄로 여기지 않았다. 이를 이용하여 전문도박꾼들은 상여집을 통해 김제군내에 발생하는 초상집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도박을 했다. 이는 상을 당한 가족을 위해 친지들이 밤을 새워가면서 위로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행할 수 밖에 없는 놀이로  간주하는 관행이었고 법으로도 제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경찰이나 판검사도 죄의식없이 하던 일이지만 오늘날에는 사라졌으나 그래도 약간은 남아있어 가볍게 고스톱을 치는 모습은 종종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100%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고 있고, 탈상은 모두 사라졌다. 또 국민의  80%가 화장을 원하고 있는데다 화장을 한뒤 절이나 추모공원에 모시기 때문에 전통적 장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비록 화장하지 않은 상태로 시신을 산소에다 묻고 봉분을 만든다해도, 시신을 장례식장의 자동차로 장지 가까이 이동한뒤 친지들이 잠간 관을 들어 장지까지만 이동하기 때문이다.

○제청(지청)

당시에는 대부분 1년상을 치렀는데 1년동안 마루끝에 제청(사투리로 지청)을 만든다. 보름날과 그믐날 아침이면 아들과 며느리가 밥과 국을 떠 올려 놓고 곡을 한다. 남자들은 낮은 소리로 <아이고∼ 아이고∼>하지만, 여자들은 소리 높여 우는 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졌다. 우리 어린이들은 여자들이 소리높여 울다가도 금방 뚝 그치는 광경이 도저히이해가 되지 않아 의문스럽기그지 없었다. 며느리들이 시아버지나 시어머니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관례행사로 치르는 것임을 알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레풍장굿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사람들이 농악굿을 했다. 농악이란 농민들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풍농을 기원하고 액운을 막기 위해 행하는 제반 문화 현상으로 풍물굿, 풍장굿, 두레굿, 매구라고 부르기도 하고, 단순히 ‘굿’이라고 하기도 한다. 주체나 목적에 따라 마을굿, 당산굿, 걸립굿, 판굿, 마당밟기(뜰밟기)라고도 하며, 시기에 따라 대보름굿, 백중굿, 호미씻굿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어린시절에는 대보름날에 행해진 대보름굿만 기억에 남는다. 우리 마을 농악단은 최상선 아저씨가 상쇠인데 특히 장구를 기가 막히게 잘 치셨다. 얼마나 힘차고 신명나게 치는지 나는 그 분보다 더 장구를 잘 치는 사람은 실제건 TV화면에서이건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본 적이 거의 없다. 김덕수 장구와 다름 아닌 솜씨라고 보면 된다. 아마도 아저씨는 씨름꾼이라서 힘이 장사였기에 저처럼 힘찬 장구를 치셨지 않았나 싶다. 1990년대 마한향토문화연구회 활동을 할 때 아저씨의 장구 치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다. 징은 기환이 아버지인 창현 아저씨가 도맡아 치셨다. 마을주변 논에서 치고 또 온 동네 집집마다 마당과 부엌에서 그리고 집을 한 바퀴 돌면서 치니 몇 시간씩 걸렸지만 우리는 피곤한 줄 모르고 졸래졸래 따라다녔다.

○술집(막걸리 집)

영수네 집에서 막걸리를 팔았다. 우리는 술집이라고 불렀으나 오늘날의 주점은 아니고 그저 술을 판매하는 곳이라고 하는 게 더 맞다. 말수가 적은 영수 아버지는 매일 백산주조장에서 자전거에 술통을 매달고 오셨다. 부엌의 큰 술항아리에는 언제나 술이 가득하였고 마을사람들은 대두병이나 주전자로 술을 사갔다. 인정 많은 영수어머니는 당신이 바쁠 때면 알아서 떠가라고 하는 때도 있었고 남자 어른들은 부엌에서 마시고 가는 일도 있었는데 반찬은 김치밖에 없었다. 겨울이면 윗방에서 도리짓고땡 노름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을 농사가 끝나면 겨울 내내 별다른 할 일이 없는지라, 남자들이 화투놀이를 하게 되고 이것이 노름으로 커져서 패가망신하는 집도 생겨나게 되었다. 또 영수네 집에서는 두부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덕분에 내 도시락엔 언제나 두부조림이 있을 수 있었다. 우리 중·고등학교는 조금은 잘사는 집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학교지만 그래도 반찬으로 김치나 깍두기만 달랑 싸오는 아이들도 많았다. 엄마는 아들의 도시락에 계란 후라이, 콩볶음, 두부조림, 멸치조림도 해주어서 부끄럽지 않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그 고마움을 지금도 갚지 못하니 죄송하다. 70년대 중반에는 영생이 아저씨 집에 세 들어온 청하면에서 왔다는 어떤 사람이 막걸리와 소주를 팔며 안주로는 삶은 계란을 팔았는데 20대 젊은 사람들이 저녁마다 모여 화투를 치며 놀았다. 나도 덩달아 놀러가곤 했는데 그 계란은 부화에 실패한 계란으로 자라다 죽은 병아리가 들어 있었으니 지금 먹으라면 절대 먹지 못하리라. 안주값이 싼 이유 말고는 누추하기 짝이 없는 그 방에 젊은이들이 모여들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점방

내가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대여섯 살 때쯤에 훗날 판용이네가 살던 집 마루에서 고사할머니가 학생들의 군것질거리를 파는 아주 작은 점방을 보셨던 기억이 있다. 1960년대의 종정국민학교는 학생수가 800여명이 넘었는데 학생들의 학용품과 군것질, 마을 어른들이 마시는 소주 등을 판매하는 상점이 두 개가 있었다. 운동장 앞 학교의 정문에는 고창고모네가 점방을 차렸고, 후문에는 식동할머니네가 점방을 차리게 되니 두 점방이 라이벌이 되었다. 대체로 윗점방이 인기가 좋았는데 이유는 할머니 내외분의 친절이었다. 대학입시에 실패를 거듭한 70년대 초 이태동안 겨울저녁이면 으레 윗점방에 출근하다시피 했던 기억이 있다. TV가 없던 시절이라 기나긴 겨울밤을 저녁에 책만 볼 수는 없고, 라디오는 한 대인데 내차지만 할 수는 없으므로 저녁밥을 먹으면 거의 매일 윗점방에 가서 여럿이 모여 얘기하거나 민화투를 치며 놀다 10시쯤이면 돌아오곤 했다. 내가 도시에서 태어나지 못한데다 경제가 어려운 탓에 입시공부를 열심히 하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낸 이 시절은 지나고 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이 되기도 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는지라 담배를 피웠는데 엄마는 싼 담배를 피우면 몸에 더 좋지 않을 거라며 차라리 고급담배를 피우라 하는 자식사랑을 보여주셨다. 대학에 실패하고 종합학원에도 보내주시지도 못하는 형편이었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깊은 마음이 그와 같았다.

목장이 생겨나자 목장사무실 앞 삼거리에 점방이 생겼다. 자학동에 사시던 고모할머니네(할아버지 고모의 따님으로 두 분은 외사촌간이다.)가 차린 점방이다.

○밤마실과 라디오 청취

4학년과 5학년 시절 겨울밤이면 아버지와 함께 척산할아버지 댁에 저녁바다 밤마실을 갔다. 우리 집에는 광석라디오만 있다가 그나마 없어져서 큰 라디오가 있는 그 댁에서 연속극이나 재치문답 같은 프로를 재미있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후 5시면 한 시간 동안 어린이 시간인데 방송은 무지하게 듣고 싶은데 우리 집에는 라디오가 없으므로 작은집 마당에서 형이랑 함께 놀다가도 나 혼자 방에 살짝 들어가 음질 좋은 일제 내쇼날 트랜지스터로 어린이 시간을 청취했다. 당숙모는 이를 제지하시지는 않았지만 나 혼자 방송을 듣는 것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다. 첫째는 라디오 뒤에 고무줄로 동여맨 밧데리(일명 라디오 약)가 닳기 때문이고 둘째는 석영형이나 동생인 석상이는 어린이 시간에 관심이 없는데 조카인 나 혼자 듣는 모습이 과히 마음 내키지는 않았겠지요. 하지만 그냥 듣도록 해주신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다. 흑백 TV는 1970년대 중반이 다되어서야 농촌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다양한 끼니식

쌀밥이 제일 맛있지만 겨울에만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봄이 되면 보리밥을 먹기 시작하는데 가난한 집에서는 순 꽁보리밥만 먹었다. 우리 집은 그래도 쌀을 어느 정도는 섞어 밥을 짓는데 어머니와 할머니는 밥을 푸실 때 할아버지와 내게는 조금 쌀밥을 더 퍼주셨던 같기도 하다.

여름철이 되면 밀농사를 지어 빻은 밀가루로 10여개가 넘는 국수를 빼온다. 그 국수뭉치는 마루위의 시렁에 올려놓고 종종 국수를 끓여 먹는데 지금이나 그 때나 국수는 여전히 맛이 있다. 물에 말기도 전에 채반에 올려놓은 삶은 국수를 마구 집어먹었지만 엄마는 혼을 내는 일은 없었다. 요즈음 고등학교 친구들이 한 달이면 두어 번 씩 국수모임을 갖는데 마냥 즐겁다. 부송국수가 4,500원인데 최근에 2,000원 짜리가 여러 군데 생겨서 한 번 먹어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2,000원짜리 국수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지 금새 문을 닫아 버리기 때문이다. 엄마는 수제비도 종종 해주시고 또 칼국수를 해주시는데 팥 칼국수가 훨씬 더 맛이 좋다.

호박이 익으면 호박죽을 쑤어 먹기도 한다. 호박에 팥과 새알을 넣고 끊이면 어찌나 맛이 있던지 나는 부엌에 주저앉아 솥단지까지 수저로 싹싹 긁어 먹었다. 고구마밥도 가끔 해 먹었다. 내가 가장 먹기 싫은 밥이 고구마 밥이다. 찐고구마 군고구마는 맛있지만 달디 단 고구마밥은 무척 싫었다. 시래기밥은 맛있다. 파를 듬뿍 넣은 간장으로 비벼먹는 시래기밥은 하루에 한 끼씩 먹어도 결코 질리지 않았다. 무시밥은 무밥이다. 냄새가 약간 싫지만 파간장에 비비면 먹을 만은 했다. 콩나물밥 역시 익은 콩나물 냄새가 조금 역겹지만 간장에 비비면 먹을 만 했다. 쑤시밥은 수수밥이다. 거칠어서 먹기 불편하고 맛은 없었다.

콩밥은 언제나 내가 환영하는 밥이다. 밥을 먹으면서 모두 다 먹어버리기가 아쉬워 일부는 밥을 먹기 전에 미리 상에 가려놓았다가 밥을 먹고 난후에 맛있게 따로 먹고는 했다. 물론 지금도 역시 콩밥은 맛있다.

○새때간식

군것질 할 돈이 없는 가난한 시절이지만 새때가 되면 왠지 무엇인가 먹고 싶어진다. 가장 많이 먹는 간식은 고구마이다. 겨울저녁이면 물고구마를 매일 한 바구니씩 찐다. 어두워지는 5시~6시쯤 저녁을 먹으므로 10시가 지날 때쯤이면 배가 고파진다. 우리식구들은 빙 둘러앉아 한바구니 고구마를 다 먹어 치웠다. 항상 윗방에는 수수대로 고구마 저장실을 설치하고 10여가마의 고구마를 쌓아놓고 한 겨울을 지냈다.

감자는 하지감자라고 불렀는데 당원을 넣고 달게 쪄서 먹었다. 수수도 쪄서 먹었다. 옥수수를 쪄서 먹었다. 단수수는 수시로 끊어서 껍질을 벗겨 씹어 먹었다. 가

끔은 날카로운 껍질에 입술을 베이기도 한다. 을 볶아 먹기도 한다. 그리고 엄마를 졸라 해주시는 간식으로는 부침개, 단술, 찐빵이 있다. 여린 호박부침개는 지금도 맛이 그만이다. 단술은 술맛이 나는 특이한 음식인데 요즈음 콩나물 해장국집에서 단술맛이 나는 막걸리를 한잔씩 판다. 찐빵은 막걸리를 넣고 수 십 개씩 찌는데 찌자마자 금새 동이 나버린다. 나 혼자만 해도 열 개도 더 먹으니 단숨에 없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많이 남을 때면 대바구니에 담아 시렁에 올려놓았는데 절대로 오래 갈 수는 없었다. 내가 시도 때도 없이 수시로 꺼내 먹기 때문이다.

○석유장사

1967년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등잔불을 켰다. 방안에는 등잔불 하나를 켜므로 아주 어둡다. 조금만 불을 크게 하면 끄을음이 많아 냄새도 나고 아침이면 콧속이 까맸다. 그 등잔불 아래서 책을 보는 일을 매우 힘들었는데 우선 졸음이 금방 찾아오는 것이 가장 힘들었고 한번 졸리면 더는 책을 볼 수가 없다. 螢雪之功의 고사가 있다지만 燈盞之下의 공부는 나를 매우 힘들게 하고 또 슬프게 했다.

석유를 파는 아저씨가 주 1회 정도씩 마을을 찾아왔다. 석유가 떨어질 만 할 때 고삿길 저 멀리서

『석유~ 사우~』

하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대문 밖으로 나가 아저씨를 기다려 모시고 왔다. 가난한 시절이라 꼭 대두병으로 한 병씩만 샀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주 비효율적이었지만 당시의 관행으로 다들 그랬다. 당시에는 월급을 받는 사람이 없는 농촌이라 우선 농민들은 현금이 없고 다들 가난하던 시절이라서 두 세병 씩 미리 사놓을 돈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때문이었다. 그래도 할아버지와 등잔불아래서 함께 책을 읽던 기억, 6학년 때 학교에서 밤 10시까지 촛불을 켜고 공부하던 기억, 호롱불을 들고 야간자율을 하는 동생 선희를 데리러 다니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다.

○엿장사

엿장수는 자주 왔다. 엿장수의 큰 가위소리가 멀리서 나기 시작하면 무척이나 반갑다. 현금으로 사먹기 보다는 주로 헌 고무신, 사이다 병으로 바꾸어 먹었다. 한번은 보스(아마도 용균이 아저씨?)의 지시에 따라 여럿이서 엿을 쥐어들고 모두 도망가는 짓을 한 일이 있는데 그 엿장수는 얼마나 큰 낭패였을까? 그러나 나쁜 짓을 하고도 재미있는 놀이를 한 것으로 여기고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아주 잘못된 일이었다.

○아이스케키 장사

초등학교 시절 여름이 되면 가장 반가운 장수가 바로 아이스케키(얼음과자) 장수였다. ?아이스 케키~ 얼음과자~?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흥분되고 밖으로 나간다. 아이스케키통을 메고 다니는 어린 장수에게는 현금을 주고 사먹지만,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장수에게는 엿장수에서처럼 헌 고무신발이나 사이다병을 주고 바꾸어 먹었다.

○고기잡이

둠벙을 품어 수대에 가득 송사리와 붕어, 그리고 미꾸리지등을 잡았다. 또 큰 논 주변의 작은 수로에서 한 사람이 사래로 막고 있다가 다른 한 사람이 고기를 몰아가면 사래를 들어서 송사리나 작은 붕어를 잡았다. 초등학교 4학년쯤에 자학동방죽이 가뭄에 말랐다하여 고기를 잡으러 가는 당숙을 여러 아이들과 함께 덩달아 따라 갔다. 물은 아주 얕아서 바지를 걷고 서있을 정도였는데 당숙 뒤를 따라다니고 있다가 갑자기 물웅덩이에 빠져 목까지 물이 찼다. 더러운 물을 두어 모금 마시며 내가 허우적거리는데 눈앞에 서있는 누구도 크게 놀라지도 않으며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으나 6학년인 용균이 아저씨가 손을 내밀어 나를 끌어 올렸다. ?재수가 없으면 사람이 접시물에 코 박고 죽는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70년대 초에는 전환이 아저씨가 직접 제작한 작은 조각배를 지게에 지고 백산저수지에 나가 전날 쳐놓은 붕어들을 거두어 오는 일에 여러 번 따라 가서 거들면 재미도 있고 고기를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새잡기

우리 집에는 대밭이 있어 일 년 내내 참새소리로 시끄럽다. 아버지와 겨울이면 나락탑 옆에 널빤지를 놓고 새끼줄을 매어 방안까지 연결해놓고는 새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줄을 잡아당겨 몇 마리씩 잡는다. 아버지께서 부엌에서 직접 구어 주시곤 했다. 70년대 초에는 겨울철 밤에 재철이형과 학교 뒷산에서 공기총으로 비둘기를 잡아 술안주를 하기도 하고, 형이 미리 놓은 싸이나(독극물)에 죽은 꿩을 주워서 막걸리 안주를 했다.

○자치기

주로 작은집에서 했다. 잘 치면 기정이 아저씨네 마당까지 날아갔다.

○구슬치기

유리구슬을 모아 서로 따먹기를 한다. 간혹 자전거포에서 흘러나오는 쇠구슬을 한 개라도 얻으면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광석이와 함께 기조네 집 앞의 외애미 논에서 진흙을 파다가 진흙구슬을 만들면 단단하고 예쁘기도 했다.

○쥐불놀이

깡통에 짚을 넣고 불을 붙이면 연기가 난다. 깡통을 들로 마을 앞 논에서 빙빙 돌리며 놀았다.

○얼음지치기

마을 앞 논에 물이 잡혀 있어 얼음지치기를 할만 했다.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스케이트였다. 그 추운 겨울에 겨우 내복에 광목옷이라 춥기가 말도 못하는데 물에 빠질라치면 정말이지 무지 추웠다.

○연날리기

내손으로 제대로 된 연을 만들어 본 기억이 없다. 별수 없이 보스인 용군이 아저씨가 만들어 주었다. 요즈음 우리 서예실에는 書刻을 하시는 분들이 여러 분이 계시고 김호길 선생은 목공예를 배우더니만 곧 서각도 하겠다고 벼르는데 나는 지금도 무엇을 만드는 일엔 여전히 조금도 자신이 없다.

○퇴비증산

학교에서는 퇴비를 집에서 가져오라 하기고 또 학급마다 모두 낫을 가져오라고 해서 학교 주변에서 풀을 베어 퇴비탑을 쌓았다. 1962년 내가 4학년 때 우리의 보스 용균아저씨는 퇴비를 쌓아 팔아서 축구공을 사자는 놀라운 제안을 한다. 일당들과 함께 신작로를 넘어 자학동 넘어가는 우리 대종중 선산에서 풀을 베다가 왼손 검지를 크게 베어버렸다. 김제 병원에 다녀오는 등 법석을 치르고 우리의 사업은 즉각 중단 되었다. 지금도 왼손 검지에는 이때의 상처가 있고, 오른 손 엄지에는 중학교 1학년 때 남성초등학교 진입로 풀 작업을 하다가 우리 반 별명이 뚱땅이란 친구가 조심하지 않고 내려친 괭이에 엄지를 치어 힘줄이 끊어져서 남은 상처가 있다.

○제사떡 얻어먹기

이것은 70년대 초 현수네 집에서 자주 한 놀이다. 친구들이 군대 가기 전이라 우리 동기동창 일당들(나, 현수, 삼렬, 강영, 준기)는 저녁이면 자주 어울렸고 상정잿빼기 강영이네 집에서 다섯이서 함께 자고 아침에 오기도 하고, 현수네 집에서 삼렬이와 함께 셋이서 가끔씩 자기도 했다. 마을 어느 집에 제사가 있을 때면 우리 셋은 제사가 끝나는 시간을 기다려 바구니를 들고 찾아가 잿밥음식을 동냥(?)해 왔다. 다들 기꺼이 떡과 음식을 주셨고 우리는 즐거웠다.

○사리놀이

수박사리는 마을 앞의 밭에서 친구들과 단 한 번 해 본 일이 있는데 농사지은 분을 생각하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그건 분명 범죄행위였다. 수박밭을 다 망쳐놓기 때문이다. 남녀가 함께 모여 놀다가 고구마 사리를 해본 일이 있는데 그것은 애교어린 장난이라 해도 무방했다. 필요한 만큼만 조금 캐왔기 때문이다. 가장 큰 범죄는 닭사리였다. 언젠가 이웃동네에서 소란을 피우며 닭을 잡아오는 사리에 따라간 일이 있었는데 참으로 무서운 강도 행위였다. 내 생애 유일한 강도행위의 공범이 된 것이다. 나는 용기도 닭을 잡는 기술도 없어 일행을 그저 따라가는 것이었으나 1969년 겨울철에는 작은 집에서 모여 놀면서 여러차레 했던 닭사리가 고발이 되어 나도 지서에 출두하고 모두들(예닐곱 명) 형사처벌을 면하는 대신 지금으로 치면 몇 십만 원씩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우리는 겨우 한사람이 닭 한 마리 정도 잡아먹고 열 마리 값의 큰돈을 물어야 했지만, 그것도 주인이 우리 마을 사람들 모두를 잘 아시는 교회 집사님이셨기에 다행이 그 정도로 끝난 것이었다.

 

 

Ⅷ. 2016년 현재의 돌제 모습과 미래

 

1. 마을의 가구 구성

 

서류상 2015년 말 현재 무려 78세대에 인구는 총 169명(남 87명, 여82명)으로 백산면의 39개 자연부락 가운데 세대수로나 인구수로나 학당부락 다음으로 두 번째 큰 마을을 유지하고 있다. 이장이신 이기홍 아저씨도 169명을 모두 잘 파악할 수가 없다고 한다. 외곽지역에 주소를 둔 세대가 많은데다 주소만 두는 사람들이 있어 누가 누구인지 정확한 파악이 안 된다고 한다. 하기는 우리 부부도 현재 내 고향 돌제마을에 주소를 두고 있으나 여전히 살기는 익산에서 살고 있다. 그래도 나는 하루 한번은 거의 반드시 찾는 사람이니, 실제 사는 거나 진배없기는 하다.

실제로는 안동네 마을에 현재 상주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안동네에는 약 30여 집에 사람이 살고 있고 가구당 평균 2인 정도이니 60여명 밖에 되지 않는다.

 

                                                          [항공사진으로 본 돌제]

 

 

 

2. 미래 전망

 

종정초등학교는 도시주변 농어촌 학교를 살리기 위한 어울림학교로 지정되어 김제 시내에서 매년 여러 명의 학생들이 입학하게 됨으로서 유치원을 포함하면 무려 90명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다.

2016년 11월에 준공식을 한 민간육종종묘단지는 장차 20여개의 종묘회사가 입주하게 되며 우리나라 종묘산업의 메카가 되어 종자수출국의 중심산업단지로 발전할 수 있을 전망이다. 20여 년 전에 마을 중심에 보건진료소가 설치되었고 재작년에는 동네 입구에 건물을 잘 지어 이주하였는데 상정리의 여러 부락에서 환자들이 찾아온다.

 

우리 돌제마을 주위에 교차로가 세 개나 생겼다. 상정잿배기는 백산교차로가 되었고, 신작로 마을입구는 상정교차로가 되었으며, 종정초등학교로 들어오는 종자산업진흥센터 앞은 돌제교차로가 되었다. 우리 돌제는 원래 국도 23번에 위치하여 교통이 좋은 곳이었지만, 최근에는 마을 가까이에 김제지평선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이어 마을에 민간육종종묘단지를 조성하면서 상전벽해가 되어가는 모습이다. 현재 백산교차로를 기준으로 자가용으로는 익산은 10분, 김제는 5~6분, 전주와 군산은 25분 거리인데 머지않아 마을 앞쪽으로 새만금에서 전주로 직접 통하는 4차선 도로가 또 하나 생겨 완성되면 도청까지 불과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게 된다.

 

현재 두악산 부근에는 두개의 교차로가 조성되고 있다. 하나는 흥사-연정간 도로라고 명명된 도로가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에서 출발하여 이곳에서 전주로 통하는 기존 도로와 연결하는 교차로이다. 2021년 12월에 완공될 예정이다. 또 하나는 새만금 신시도에서 시작되는 새만금 고속도로가 마을 앞 교차로를 지나 전주 남부지역를 거쳐 순천-완주고속도로 와 연결하고 나아가 현익산-장수 고속도로(연결되면 새만금고속도로)까지 연결하게 되는 교차로이다. 두악산에는 고속도로 휴게소가 건설중인데 우리 선산 앞 저수지 건너편이다. 2020년 11월 신시도에서 심포항까지 20.4km가 완공되어 드리아브 코스가 되었고  또한 전주 익산 김제등지에서 새만금까지 접근이 아주 쉬워졌다. 

 

마을 안동네 30여 호에 살고 있는 60여 명 중 80대가 15명 정도, 70대가 10여명 정도이니 이 분들이 세상을 뜨시게 되면 외부에서 인구가 유입되지 않는 한 마을 주민수는 급격히 줄어들 전망이다.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의 집들이 벌써 대여섯 집이나 되는데 교통은 좋으나 땅값은 터무니없이 싼 관계로 외지인들이 들어와 살려는 관심도가 상당히 높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내 고향 돌제는 도시와 접근성이 좋아 자가용만 있으면 노후에 살아도 무방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 생각까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나는 매일 내 별서인 지산 쁠라스를 찾아 두 마리의 개를 기르고 연못과 잔디를 관리하며 비단잉어를 기른다. 지난주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낮은 소나무 세 그루를 옮겨 심었다. 아버지와 함께 채소밭을 일구어 갖가지 채소를 거둔다. 엊그제 김장을 마치고 서울 아이들 집에 가져다주고 방금 도착했다. 과일밭을 가꾸어 꽃을 보고 농약을 치지 않아 비록 초라하지만 과일을 조금 수확하는 재미도 크다. 과일밭엔 축사를 지어 닭과 토끼를 키우는데 계란을 두어 개씩 내오는 일이 즐겁고 토끼식구들이 일곱 마리나 늘어나 큰 부자가 된 느낌이다. 언제까지나 나의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영원한 고향마을 돌제에 대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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