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연구

성당면(성포농악 이야기)

청담(靑潭) 2018. 6. 3. 19:38

전북의 구비설화1


성당면(성포농악 이야기) 

                                                                                                    

                                                                           이인수(92세 금강성포좌도농악 지도자)

                                                                           임승용(61세 금강성포좌도농악보존회 대표)


문 : 먼저 성포 별신제에 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이인수 옹 : 우리 성당포에서는 옛날부터 별신제를 지냈는디 당산제와 별신제는 달러요. 당산제는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에게 마을의 풍요와 평안 등을 기원하는 지역공동체적 제사여. 많은 동네마다 지내던 제사요. 별신제는 별신굿이라고도 허는디 마을 공동으로 마을의 수호신을 제사하는 점에서 당산제와 비슷허나 당산제는 마을사람 중에서 뽑은 제관이 제사를 주관하고 별신제는 무당이 주재하는 것이 달러요. 그런디 당산제를 별신제로 알고 지내고 있어 우서 죽것어.

■참고 1 : 조창인 성당창(1662~1895)이 있던 성당포에서 오랫동안 음력 정월 초에 실시된 성포별신제는 천신(天神), 수신(水神)이자 미륵의 호위신으로 일컬어지는 용신과 풍신, 방위를 관장하는 오방위신에게 조운선의 안전을 빌고 풍랑에 숨져간 망혼을 위로하여 좋은 곳으로 보내며, 조창과 지방관아의 번영과 마을의 풍어와 초복제액을 빌고, 주민들의 발복과 무사를 기원하기 위한 민관 합동의 축제적 제의 행사였다.

그러나 성당창이 폐쇄되면서 별신제를 지내던 순풍당도 사라진 후 성포마을에서는 오래도록 지내오던 별신제를 중단했다. 성당창의 폐쇄와 거듭된 흉년으로 성포마을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별신제 대신 원래부터 지내오던 당산제라도 지내자고 의견을 모았다. 당산제를 지내기 시작하자 마을은 다시 흥성대기 시작했다. 비록 일제치하이기는 했지만, 위도와 법성포 일대 칠산바다에 형성된 조기파시는 성포마을을 다시 커다란 포구로 탈바꿈시켰다. 고깃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경상도에서도 생선을 사러오는 사람이 북새통을 이루어 사람이 걸려서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남획에 따른 조기의 고갈과, 한국전쟁과 근대화의 물결 속에 성포마을의 당산제는 다시금 맥이 끊기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익산문화원이 전통문화 발굴 재현사업의 일환으로 1997년 성포별신제를 재현시켰다.

〈익산시 공식블로그에서 발췌〉

1997년부터 익산문화원에서 별신제를 지내오고 있어 고마운디, 지금 지내고 있는 것은 당산제허고 같어요. 익산문화원에서 서둘러서 별신제를 제대로 지내야 헌다고. 이 근처에 산들이 대명산 저 짝은 용왕산 그러고 조상산이 있어요. 대명산 말랭이에다 내가 어려서 한 여남살 먹어서 올라갔더니 기와집이 다 거꾸라지고 있더라고. 시방도 기왓장이 있을거여. 문화원에서 이것을 서드러서 별신제를 지내야 헌다고. 별신제라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한가지뿐이어. 충청 은산, 충청도가서 여그도 별신제가 있어 이런 세상에 익산군 그 자랑스러운 일인디 문화원에서 서들어서 해야 하는디. 원장님 돈만 받어 먹고서나 별신제 지낸다고 당산제나 지내고 농기 들고 와서나 뭐 구레(?)났간디(?) 농기 들고 와서 쳐? 그때 배려 놨다고 인호씨가. 그러고는 죽었지. 그때 배려놨지. 그때 서둘러서 해야 혔거든. 내가 그것을 얘기 했더니. 한 40년 전이고만. 원광대학교에서 교수님이 오셨어. 나를 싹 다 조사 했네. 비 하나가 있드래야. 사거리를 비석거리라고 혀. 나 어려서는 성당 사거리 좌우에 비가 쫘악 있었어. 그게 비석거리여. 그렁게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세곡을 받었으니 얼매나 좋았것어 최고지. 그때에는 군청도 여그 서낭지에 있었드래여 군청도. 자랑스런 일을 면장님이 해야 할 것 아녀? 도지사 군수 면장 장짜리 들이 서둘러서 해야 한다고. 시방 어느 지방이고 하잖은 것도 있으면 자랑거리로 맨들잖여 크게. 아 역사가 있는디 그걸 못허네?

문 : 언제부터 별신제를 보셨어요. 별신제 했을 거 아니에요?

이인수 옹 : 나는 보지는 않고 부락에서 당산나무아래서 당산제를 지내더라고. 별신제는 나는 못 보았지.

문 : 당산제는 보셨고, 그러면 언제부터 별신제가 끊어졌을 까요?

이인수 옹 : 언제 끊어진지도 모르지. 옛날에 끊어졌응게. 조선시대에 전라북도 세곡을 여그서 받었대여. 그러니 얼마나 좋았것어. 긍게 그때 별신제 지냈는개벼.

긍게 별신제라는 것은 3신 9패를 모시는 것이 별신제야. 그거 알어 하도 노인들한티 들어서. 부곡씨 신농씨 허우씨 삼승 구패를 모셨다 신농씨는 농사잘 지으라는 신이고 부곡신은 우리 전라북도 도민들 부자 되라는 신이고 허우씨는 우리 전라북도 도민들 몸 건강해 달라는 신이어. 삼승 그건 어려서 누차 어려서 들었어. 부락으서 농악치고 허먼서. 이런 역사에서 허든 일은 도지사 군수 면장이 서들어서 혀얀다고.

문 : 별신제라는 이름으로 매년 한 번씩 하잖아요? 그런데 그 별신제가 원래 지내던 별신제가 아닌 변형된 별신제를 지내고 있잖아요?

이인수 옹 : 시방 지내는 별신제는 아무 소용없어. 말만 별신제지 제대로 못혔지. 마을 노인양반들 말 듣고서나 내가 머시냐 당산제를 지낼 때는 농악도 치고 그렸어. 어렸을 적부터. 별신제 잘못 허고서나 사람 및 죽었당게.

산신이랑게 있는 거여. 신이 있는 산인디. 내가 그 얘기 했드니 원광대학교 교수님이 와서 이 얘기를 헝게. 차 올라가서 동네서 찻길을 더 말랭이까지 맹글라고 헝게. 일을 했등게벼 저 말랭이까장. 나는 인자 머시냐 그 사람 이름 치안씨 무칠(?)게요. 부락일 머더러 다혀요. 그 양반 보고 그 때 농악치러 갔던가? 이리 농악 이리우도농악 치러 갔다 왔더니 아 일이 끝나고 사람이 느이 죽었네. 가만이 생각헝게 유독 생각이 나데. 길을 그 양반이 잘 알거든 머시고 치안씨가. 치안씨한티 쫓아갔지.

?나 봐요. 선생님 말여 산신제나 지내고 일을 시작을 허지.?물팍을 팍 치더니

?내가 깜박 잊고서 일을 혔네?

그런디 일 헌 사람 부락 구장 내 조카여 사람 똑똑허지. 부락구장 일보는 사람 죽고. 두 사람은 바로 별신제 지낸 턱 밑에다 묘를 썻어. 묘를 썻싱게 올라 왔싱게 붙잡고 일을 혔네? 그러도만 죽어버렸어.

문 : 별신제를 지냈던 터에 옛날에는 무슨 집이 있었나요.

이인수 옹 : 기와집 한 채가 있었는디 기왓장이 있을 거여. 그런 것을 우리 전라북도 도지사 군수 면장이 서둘러서 일을 혀얀다고. 별신제를 지내도록 혀야는디 당산제를 지내면서 별신제로 허지 말고 별신제를 제대로 지내자는 거여. 원광대학교 교수님이 여간 좋아허드랑게. 우리 전라북도에 이런 별신제가 있다고 말여. 첫째는 지방에 좋고 두 번째는 전라북도에 좋다는 거여. 그거 자랑허고 인호씨허고 얘기 혔등가보드만 인호씨가 돈만 받어 가지고 그냥 누가 헌다고 배려놨당게 그냥.

문 : 별신제 원형을 찾을려면 먼저 그 장소부터 복원을 해야 겠네요.

임 대표 : 그러니까 복원을 먼저 허고 옛날에 별신제 지낼 때에 어른들 말씀이 마을 무당들, 마을에 신들린 무당이 많이 있었잖아요? 그 무당들이 지냈단 말도 들었는데요.

이인수 옹 : 삼신 구패를 지냈다고 허드랑게 부곡씨 신농씨 허우씨 삼승 구패를 지냈다고 혀. 어렸을 적 찌깐헐 때 들었어.

문 : 그럼 별신제를 누가 지냈어요?

이인수 옹 : 동네에서 지냈지 동네서. 잘사는 집 없어 돈을 쪼매씩 걷어 각고 지냈지. 나 어렸을 적에 보면은, 찌간혀서 보면은 정월 보름날 건립허러 댕겨. 쌀 다섯 가마니 내라는 얘기 허드라고. 풍물치면서 건립을 혀 명년의 지낼 것을. 쌀을 걷어놓아.

문 : 허수아비를 짚이 몇 동이나 들어가게 크게 만들었다면서요?

답 : 허수아비를 짚으로 크게 만들어 가지고서나 긴 면목, 나무으다 올려놓고서나 가마 띠미드끼 용왕을 띠미고 올라갔디야. 용왕을 거기 놓고서나 사물놀이를 하고서나 들고 내려와서 물가시 강가싱게 불질르고서나 다 타도록 내버려 두었디야. 그렸다고드만.

문 : 허수아비를 하나만 만들었다는데 짚이 몇 동이나 들었어요?

이인수 옹 : 응 하나, 크게 가마맹기로 띠미고 올라가서 사물놀이 허고서나 또 띠미거 내려와서 물가시에서 다 타도록 놓았었다고 허드랑게.

문 : 지금 별신제라고 행사를 해요. 별신제가 아닌 당산제 형식으로 지내고 있는 거지요.

이인수 옹 : 당산제하고 별신제하고 틀리당게. 당산제라는 것은 부락마다 다 있어. 산마다 다 있어. 별신제라는 것은 삼신 모시고서나 지냈다고 허드라고.

임 대표 : 저도 선생님의 취지대로, 제일 안타까운 것은 문화원에서 제대로 복원해서 지내고요. 없는 것을 만들어서 하지 말고 있는 것을 제대로 밝혀서 활동을 시켜야지요. 그리고 일반적인 농악단들은 어디고 임실도 마찬가지고 마을구석이 허전헌 것 같어서 힘이 있으니까 됐지요. 여기는 뜻이 있잖아요.

세곡은 배가 약하니까 그 현장이 고초를 많이 당하니까 별신제를 지낸거요. 뜻이 있고 350년의 역사가 있는데 이런 것을 잘 살려야 되잖아요?

문 : 당산제는 마을안녕을 기원하는 것이지만 특별히 별신제는 성당포구 조창의 세곡선과 관계되는 것이니 국가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임 대표 : 저는 별신제까지 꿈을 갖고 있어요. 왜 그냐? 한 해는 당집도 짓고 제가 만약에 헌다고 보며는 조창도 창고도 하나 짓는 거예요. 지게도 사고 가마니 사서 배에다 실어서 배의 안전한 운항을 기원하는 것까지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국가적인 문화재가 되는 거지요.

문 : 별신제는 배가 출항하는 것까지 지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임 대표 : 그래요. 배에 올려서 돌아올 때까지 배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까지 해야 전라북도의 세곡을 잘 바치고 오라고. 제가 꿈이 그거예요. 그것을 목표로 가고 있습니다.

이인수 옹 : 전라북도의 세곡을 모아 바치던 곳이 이 성당포구여요. 문화원에서 서드러서 별신제를 지내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문 : 문화원 혼자서는 안 되고, 문화원이 주축이 되어서 시와 도의 협조를 받아 추진해나가야 하겠지요.

임대표 : 문화원에서 주축이 되어서 서둘어야요. 국가의 중요한 문화유산이잖아요. 저는 포구가 안타까워서요. 생색내기로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를 미워해요. 그래서 제게 권한을 주십시오. 제가 먼 사업을 하든지 간에 백 몇 십 만원 들여서 해보겠습니다고 했었지요. 그런데 혼자서는 안 되어요. 문화원에서 해야지요.

문 : 일반사람들은 여기서 별신제를 지내고 있으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있지요. 우리 익산문화원에서 발간한 을해조행록을 보면 1875년 3월에 함열현감 조희백이 성당창 조세 운영관이 되어 8개 고을에서 걷은 1만 6천여석의 세미를 12척의 조운선에 싣고 웅포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별신제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행사재현에 많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임 대표 : 제일 연로하신 선생님들이나 어른들에게 들은 것들이 도움이 되겠지요.

이인수 옹 : 원광대 교수님이 이곳에 별신제가 있었다는 것을 참말로 좋아 허드랑게. 세상에 별신제가 전라북도에 이렇게 있다고 여간 좋아 허드라고.

임 대표 : 제 생각도 그래요. 문화원에서는 실질적인 사업을 하는 것보다도 새로운 행사의 계획을 세워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봐요. 이번에 적극 추진해 봐야지요.

문 : 문화원에서 하는 것은 시에서 주는 예산 범위 안에서 하다 보니까 같은 행사를 반복해온 것이지요. 예산을 확보해서 별신제를 복원하려는 계획을 말하면 시에서는 지금 하고 있는 행사가 바로 그것인 줄 알고 있어요.

임 대표 : 문화재단에서도 기왕에 없던 행사 같은 것을 몇 십억씩 들여서 하지 말고 그 예산 일부분만이라도 주어서 다시 살려내야 하는데 왜 없던 것을 만들어 내서 몇 십 억씩을 쓰나요?

이인수 옹 : 여그 성당포구에서 쌀을 서울까지 싣고 가면은 배가 12척이 있드래야. 쌀을 싣고 가다가 태풍을 만나가지고서나 파산됐드래야. 창고지기가 꿈을 꿍게 별신제 지내는 꿈을 꾸었다는거여. 그리서 서둘러서 지냈다고 허드라고. 배 쉰 두척이 다 파산되었데야 태풍만나서.

문 : 지금은 제방을 쌓았는데 예전에는 포구의 어디까지 배가 들어왔습니까?

이인수 옹 : 동네 앞까지요. 체험관 지금 느티나무 있는디 지금 집을 지은 자리까지 다 강이여. 배가 거까지 다 둘왔어. 나 젊어서도 배가 거까지 들어왔어. 우리 아버님이 객주를 보았거든. 서해바다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조다 성당으로 들어왔어 성당포구로. 긍게 조고장사 새우장사 허는 사람들은 죄다 성당포구로 들어왔당게 돈 짊어지고. 참 좋았거든 나 어렸을 때까지.

문 : 성당포구는 언제부터 배가 들어오는 것이 끊어졌습니까?

이인수 옹 : 얼마 안되아 나 20대까지도 배가 들어왔거든. 30대 이후로는 안 들어왔어. 내가 92세(1926년생)니까 그때 이후로는 포구로는 배가 들어오지 않았지. 서해바다에서 고기 잡는 배들은 전부다 성당포구로 들어왔어. 군산이니 강경이니 다른 디 안 닿고 전부 성당포구로 들어왔어. 왜 그런고니 아버님이 머리가 좋았던개벼. 조기를 싣고 들어오는 배에는 배 하나에 쌀 시가마씩 실어주었어 돈 받고. 쌀이 귀혔거든. 군산으로 어디로 가야 괴기 팔아서 쌀을 사야 식구들 먹여 살릴거 아녀? 그 돈 갖고 가서 식구들 멕여 살릴 수 있겄어? 우리 아버님은 그 머리를 써 가지고서나 그냥 서해바다에서 잡는 괴기는 죄다 성당포구로 들어왔네. 팔월 보름날이면 나 열 두살 먹어서 저 대명산 용왕산 조상산, 성당에는 산이 셋이여. 삼신산은 농악치고 꽃밭이어. 충청도서 농악치러 들어오지 각 지역에서 들어오지 충청남도 농악패허고 우리 익산군 농악패허고 서로 쌈이 붙었네 하! 겁나도만 왜정시대고만.

문 : 싸움이 붙은 이유가 뭔데요?

이인수 옹 : 긍게 농악치면 쌈이 난당게. 왜놈들이니까 큰일 나것거든? 왜놈들은 농악 못허게 헝게 긍게 끊어져버렸어. 치는 것이 끊어져버렸어 나 열 두살 먹어서 충청남도 허고 전라북도허고 쌈이 나서. 밤이나 낮이나 농악을 혔어.

임 대표 : 그러니까 여기가 익산에서나 전국에서 잘 모르는 분들은 왜 여기서 좌도농악을 허냐? 익산의 북부지역은 산간지역을 지나다보면 좌도를 거의 쳤고, 우도는 불교에서 나오는 거라 익산에서 평야지대로 가서 전라선과 호남선으로 갈라졌다는 역사가 있어요. 그래서 악기를 세 가지 밖에 안 갖고 쳤드랑게요 어려서부터 봤을 때도.

■참고 2 : 익산 성당포 좌도농악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공납되는 전북 지역의 세곡을 성당포구의 조곡창고에 저장하고 운반할 때 선원과 선박의 안전운항을 기원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호남평야의 풍년과 서민들의 애환을 담아 수 백 년 동안 명맥을 이어왔다. 성당포구는 조선시대 300년 동안 국가의 세곡을 쌓아놓고 한양과 마포 포구로 쌀을 옮겨가는 포구였다. 무려 51척의 배가 한양을 오고 갔다. 이때 귀중한 쌀이 잘 도착하도록 기원하는 풍물 굿이 성당포구가 바라보이는 용왕산과 대명산에서 지속적으로 행해져 왔다. ...그러나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당산굿은 익산문화원 주최의 ‘성포별신제’라는 이름으로 열리고 있다. 전라 우도농악은 불교와 무속에서 유래한 반면 좌도농악은 네마치걸궁길굿, 두레굿, 진굿 등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현장음악의 성격이 짙다. “좌도농악은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익산 성당포구는 강경과 전라도에서 풍물패들이 모여들면서 농악이 융성했던 곳인데 충청도와 전라도의 변이형태의 특이성 있는 장단으로 계승되어 온 것이 바로 성당좌도농악이다. 조선시대 만들어졌던 장단으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만큼 정통성을 간직한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고 임대표는 말하고 있다. <2017.6.1자 데일리뉴스에서 발췌>

이인수 옹 : 몇 십 년 전의 충청남도 은산에서 농악대회를 헐적은디 심사를 허는 양반이 이런 얘기를 허드라고 ?농악은 대한민국에서 큰 집은 익산이다.?라고. 아! 내가 그리서 농악은 익산이 큰집이구나 하고 그때 내가 알었당게.

문 : 성당포구에서 고깃배들이 들어오면 아버님께서 객주셨다는데 고기들은 어느 쪽으로 판매했습니까?

이인수 옹 : 고깃배가 들어오면 서로 사갈라고 허니까 아버님이 번호를 매겨. 8번까지 있어. 일번 이번 삼번 팔번 까장 있어. 첫 번째는 일번이 차지해야 한다. 조기를 많이 실었거나 적게 실었거나 그렇게 연구를 혔드라고 아버님이. 그렁게 쌈 않고 그냥 별수 없이 적게 실었어도 이번이 가져갔지. 재수있는 사람들이 있고. 조기가 그냥 대한민국에서 장삿꾼들이 다 성당으로 왔으니 어떻게 돼요?

문 : 선생님이 어렸을 때는 저 둑이 없었다고 하셨지요? 그럼 물이 어디까지 들어왔어요?

이인수 옹 : 아먼 뚝 없었어. 죄다 들판이지. 강물이 육지까장 들어와서 대사리일 때는 물이 찌거든? 조금은 물이 적게 들어오고. 비가 많이 와서 대사리때는 들판이 바다같이 흐여. 바다 같었어. 그리각고서나 왜놈들이 큰 둑을 쌓고서 홍수를 방지혔지.

문 : 그럼 이 지역의 둑은 언제 쌓았나요?

이인수 옹 : 내가 열 여섯 살, 열 일곱 살 먹었을 적의 쌓았고만.

문 : 선생님이 1926년생이시니까 일제 말기에 쌓았군요?

이인수 옹 : 응 그렇게 되어. 어찌 아는고니 다리를 놓니라고 막 쇠망치가 있잖어 날 박는. 층층이 다 박네. 땅이 물릉게. 다리를 놀라고.

문 : 여기 성포에는 선생님댁 말고 객주가 몇 분이나 있었나요?

이인수 옹 : 몇 사람 있었어요 객주가 한 서너 사람 있었어요. 근디 그냥 우리집으로만 배가 다 들어오드라고. 아버님만 찾어 와서. 아무개집 어디냐고막 들어오면서부터. 강경이고 군산이고 배가 한나 못갔어. 살 팔어서 갖고가야 식구들 먹여 살리는디 쌀은 귀헌 때고. 우리 아버님은 용안면 쌀 부자사람들이 방아 찧은 쌀 밤이면 일꾼들 시켜서 쌀을 짊어지고 왔어. 낮에는 일본놈들한티 들키면 뺏기닝게. 밤에 실고 와서 한 배에다 꼭 시가마니씩 실어 보냈씅게. 금강으로 출항하는 배는 전부 우리 생가쪽으로 다 와. 참 좋았었고만. 오죽해야 성당포구 개들도 지전물고 댕긴다고 혔당게. 아버님이 머리가 좋았등게벼.

임 대표 : 여기 성당포농악이 우도가 섞였네, 멋혓네 말이 많은데, 여기에는 우도하고 충청도 좌도가 같이 모여드니까 그렁게 선생님 말씀대로 항시 꽃밭이었다고 안혀요?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변이형태 아주 특이한 특색 있는 장단이라고 봐요. 어떻게 생각허면 진안 장수 무주 등지 순창에서 머가 있었겠어요? 그런디 전쟁이 산중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거기서 발달되지 못헌 것은 이해가 가는데, 그 분들이 산중 산중으로 이곳에 와서 며칠씩 풍물 쳤던 것도 겪고 갔을 거라고 저는 생각허거든요. 어떤 분들은 산악 지대에서 밀려 들어왔다고 그렇게 얘기를 혀요. 거기가 전쟁이 일어나니까.

이인수 옹 : 나는 농악 치는 것을 그치던 안혔어. 내가 그렇게 살았다고. 농악을 좋아하는 통에 학교 가다가도 책 젖혀 놓고 농악소리만 나면 농악을 쳤어. 열 서너살 먹어 학교가다 책보 감춰놓고 그치덜 안혀. 뜰에가 밤이나 낮이나 농악만 치네? 우리 아버지가 폭폭헝게 집안 우리 집안이 벌족허거든 회의를 혔어. 다들 왔드라고. 얘기를 혀. 저거 얼굴 괜찮고 가르치면 괜찮겄는디 아 학교 가라고먼 책보 감춰놓고 농악만 치니 그거 죽이지도 살리지도못허고 어떻게 허라는거여? 긍게 오시라고. 야는 농악치는 아라고 우리어머니가 태몽 꿈을 꾸는디 어떤 하얀 노인이 장구하나를 주더래야. 태몽 꿈을 꾸었다고 헝게 아버님이 니 팔자다. 그렁게 너 허고 싶은대로 허라고 허대?

그때는 날마다 치는게 좋아서 학교는 말아버렸네? 그래 다래 농악치래여. 우리 집은 부자여. 부잔디 먹을 것은 주고 밤이나 낮이나 농악은 치라는 거여. 그렁게 밥주고 먹을 것 주고 그냥 그릿어. 여하튼 살었어. 육이오 전장 몰르지? 김일성이가 밀고 들어왔는디 젊은 사람들 다 죽었어 이남 사람들. 중국사람들은 수수 만 명 죽었고. 우리 남한은 훈련을 시켜야는디 훈련을 시킬 시간이 없어. 학교를 댕기면 학도병을 뽑아. 전주로 가닝께 일자로 죽 섰는디 별자리가 앉었대. 나를 쳐다보고서나 내가 갈라고 헝게 별자리 하나가 내 어깨죽지를 곽 잡어. 가지 말고 쉬라고 허대. 나는 졸업도 안 맡었어. 학교 댕기다말고 졸업장도 없어. 너 집에 가그라. 사흘만에 그 사람들이 싹 죽어 버렸네. 마을에서 간 사람들 싹 다 죽어버렸어.

우리 부락으서 스이 갔는디 둘은 나가고 나는 왔어 그런디 둘은 죽어버렸어. 팔자가 타고 났어 그리서 지금까지 산당게. 시방도 어디 가서 구십 두 살먹었다고 허면 그짓말이라고 혀.

문 : 선생님은 행방당시에 벌써 스무 살이셨으니까 이 지역의 역사를 생생하게 다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임 대표 : 지금 연세에도 저 청양가서 가르치시고 그 면장 이름 아주 거기 있는 사람들 이름까지 다 기억하고 있어요. 우리는 엊그제 있어버리는디요. 무주 적상가서도 많이 가르치셨고요.

이인수 옹 : 장구를 치먼은 다른 사람은 못 따러올 정도로 젓가락을 쳐버리네. 나는 손이 절로 나와 젓가락이. 절로 쳐져 안 배웠어도. 오죽해야 내가 스물 두 살 먹던 해던가 거기 어디지 임실 신기남 선생 장구가락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다고 허대. 찾어가 뵈야 것다 허고 찾어 갔네. 그래서 갔는디 개고기를 잘 잡순다고 혀. 그래서 개고기를 서 너근 사가지고 갔는디 여간 반가허대. 선생님 장구한가락 배우러 왔시오 혔더니 아 그러냐고 배워야 헌다고 그러대. 하루저녁 자는디 저녁 먹고서나 개고기 사갔고 갔응게 좋아허더라고 한가락 일러주시오 혔더니 설장구를 치는디 그 양반은 접가락을 쳐. 그런디 나는 접접가락을 들어강게 그렁게 너는 어떻게 치는 가락이냐 저는 돌아가네요 혔더니 나는 니한티 배워야겄다 허드라고. 그럼서 장구채를 놓더라고. 임실 양순용이 불러야것다 해서 그런디 양순용이는 아무것도 아녀 농악도 아녀 질굿도 모르고 그렁게 좌도굿은 어려워요. 무슨 굿이 훈남 훈장이 따로 있는 것이고 질굿이 따로 있는 것이고 세마치가 있는 것인디 임실굿은 한마치 밖이 못치네? 그런것이 문화재 받었어. 그렁게 그때까지 가만히 생각헝게 임실 신기남 선생이 장구 잘쳤다고 헝게 이쁘게 봤던 개벼. 웃어 죽겄어.

서울서 전화가 왔덩개벼 문화재 기록을 혀야겄다고 임실농악 익산 우도농악 우도 좌도. 전주 학생체육관이 있어. 거그서 날을, 자리를 잡았더라고. 형순이가 머리가 좋은 사람이어. 나보다 한 살 들먹었어. 형님 장구치지 말고 명수인게 어디 잘치나 잘못치나 지도나 허라고 대 따라 앉어서. 어디 잘못된 거 있으먼 말이나 허라고. 그러라고 허고 우두커니 섰어. 쳤어 치는디 치고는 끝났어. 인자 임실이 치고 둘오는디 들어오는디도 자진마치 늦은 자진마치 갱개갱 개갱개갱 개갱개갱 갱개갱 자진마치 치고 들어오네? 아 둘올 때는 네 마치 치고 짓고 들어오야는디 그 자진마치를 한마치 치고서는 빨리 치고서는 25분씩 쳤어. 25분간을 치고서는 그쳐. 땀을 뻘뻘 흘리고서는 내 옆으로 또 오데? 나봐 욕봤네 욕봤는디 아 한마치 굿만 치고 들어오나? 한 마치 굿만 치고 끝내야? 그렸드니 치채굿도 다 있는 것인디 치채굿도 못치고 치채굿을 먼저 치야거든 치채굿을. 아니 시간이 없어서 그랬어요 그러대? 에이 사람아 그 시간이먼 12채 다 빼서나. 당장에 뭐라고 혔드니 그때는 얼굴 뺄간 혀가지고 저리 가대? 저리 가. 밑도 안 닦고 가버리드라고. 고민은 혔등개벼 우스워서.

임 대표 : 인제 아드님이 잘 만들어내서 좋아졌지요.

이인수 옹 : 아들도 그려. 치는 거 보면 맨 위에 칠 것도 못쳐. 자진마치 한 마치 한마치밖에 못쳐. 시방도 한 마치 배끼 못쳐. 그런 것이 어떻게 문화재 받아 가지고서나 우리 전라북도 우세스런 일이지 참말로.

임 대표 : 그래서 오방기나 그런 행위를 봐도 웃다리는 오방기는 들고 있거든 색으로 그냥. 빨간색 하얀색 검은 색...행위는 아무것도 안혀 그냥 서있기만 허고.

이인수 옹 : 형순이, 우리 익산은 문화재 받어야 한다고. 생각혀봐 익산시에서 문화재 받어야 헌다고.

임 대표 : 저도 작년에 도무형문화재 신청혔는디. 선생님이 연로허시다고 했드니 올해 재심사 있어서 기다리고 있어요.

이인수 옹 : 형순이가 틀었다고. 서울따 문화재 허것다고 보냈는디 형순이가 틀어버렸어. 그런 무식헌 놈이 어디가 있어? 익산이 춤의 고장잉게 좌도도 문화재 받어야 헐 것 아녀? 문화재 받어 놓으면 즈 굿은 뒤떨어져버리거든. 문화재 관리국 한 달에 한 번씩 서울 가야 혀. 그때 돈 백 만원씩 나왔어.

임 대표 : 근디 문화재청에서 준 이수증도 있잖아요? 우리 선생님도 같이 활동했으니까. 그런데도 이인수라는 이름자가 없어요. 우도농악 책에고 멋이고. 그러면서도 김형순씨허면은 정정거리잖아요? 선생님 훌투려 잡고 치는 것 봐요. 그런디 김형순씨 그 쪽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요. 치는거 보면 아는디요. 도발표회에서도 보고요.

이인수 옹 : 형순이가 말이요. 우리나라에서 잘 쳐요. 농악 잘 치거든? 아 충청남도 갈 때 제자가 더 많여. 수 천명여. 농악이란 악기는 싹다 형순이 주어서 보냈당게. 나 인자 맘 편하게 살다 죽어양게. 신경 그만 쓰고.

문 : 선생님은 12살 때부터 농악을 하셨어요?

임 대표 : 실제로는 일곱 살 잡수셔서 부터 백부님 따라 댕겼다고 했지요?

이 인수 옹 : 찌깐혀서부터 질장구 따러 댕기고 혔어. 장구라고 허면 환장 허고 따러 댕겼어.

문 : 임실의 좌도농악에서는 자기들이 좌도농악의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에, 익산의 우도농악에서는 우도농악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선생님에 대해 배타성을 보이고 있는 듯 하군요?

임 대표 : 옛날 분들은 전국 어디를 다 돌아 댕기고 했어요. 우도도 치고 좌도도 치고 웃다리도 치고. 그런데 여기만의 특색 있는 특이한 변이형태의 모습이 나타난 당게요. 역사적으로도 학술적으로도 말이지요.

문 : 농악전문가 또는 국악전문가들에 의해 선생님의 가락장단에 대한 학술적 정리가 안되었나요?

임 대표 : 제가 정리노력을 좀 했어요. 김익도 교수님이 논문을 쓰시기도 했지요.

문 : 이런 상황에서라면 좌도니 우도니 할 것이 아니라 아예 성당포농악으로 명칭을 정하고 정립하면 바람직하지 않나요?

임 대표 : 성당포농악으로 정립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도립국악원 조세원 박사님이 30주년 기념으로 책을 발간했어요. 선생님에 대한 책을. 전북대 김익도 교수님이 농악연구소를 차렸잖아요? 그 분이 또 책을 발간했고 거기 돈 많이 들어갔네요.

문 : 판소리에는 처음에 서편제 동편제 중부제가 있다가 그것들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런 명칭이 없어지고 예를 들어 임승용제 이석한제 임방울제 등 그 스승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쓰고 있어요. 같은 서편제라 하더라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지요. 판소리를 크게 두세 가지로만 대별할 수 없다는 것이겠고요. 이곳에서는 좌도와 우도농악이 들어와서 섞여서 치게 되었으나, 주로 선생님이 치시던 것은 크게 보면 좌도농악에 속한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임실의 좌도농악보다도 더 깊고 더 넓은 농악을 치고 게시는 것 같군요.

임 대표 : 그런데 왜 좌도라는 말을 넣었느냐고 물으니 어려서부터 윗분들이 풍물하시는 분들이 옛날부터 좌도라고 해서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제 좌도 자를 빼고 성당포농악으로 정립하고 싶어집니다.

문 : 어찌됐던 선생님의 농악은 익산의 김형순씨 이리우도농악보다는 임실의 좌도농악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군요?

미 대표 : 그런데 우도농악 김형순씨는 여기분이 아니잖아요? 부안의 농악장단을 가지고와서 이리농악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하는데 익산에 역사적 근거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는 3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잖아요? 아주 중요한 문화유산이지요. 이리농악은 흩어진 우도농악이라고 봐야 돼요. 김형순씨가 고향에서 자라고 배워서 이리에 정착하면서 이룬 것이어요. 그것은 큰 역사가 없다니까요. 중요한 문호유산이 묻혀지고 있는 것이지요.

문 : 익산의 농악이라고 하면 성당포농악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리농악과 성당포농악을 함께 발전시켜나가면 좋겠네요?

임 대표 : 예, 성당포농악을 살려야지요. 그래서 이리농악은 문화재지정을 받았으니까 우리 익산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우도와 좌도농악이 같이 존재하는 곳이다 이렇게 인정하고 정립해야한다고요.

문 : 이리농악은 우도농악이고, 성당포농악은 좌도농악을 표명하니 독립된 이리농악 독립된 성당포농악으로 볼 수 있겠어요.

임 대표 : 그래서 여기는 중요한 웃다리와 이런 저기가 같이 조끔만 돼있지만 같은 장단이라도 똑같은 장단이라고 볼 수 없거든요. 행위도 많이 달러요. 평택의 무등굿은 그냥 마침굿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는 호두채와 세마치와 굿거리 장단까지 아주 무등굿이 진짜 중요하게 춤추는 게 있지요.

이인수 옹 : 아 무등굿은 농악 아니랑게. 듣기 싫은 말로 중들이 동냥을 댕김서 친 음악여 그게. 대한민국에서 치는 자두굿이 진짜치는 거여. 그 소리를 누가 형순이에게 혔네? 그러니 나를 얼매나 그거 허겄어? 하하하! 사실을 얘기 혀야지 어떡허것어? 지금 김제 정읍 이 안쪽 서 너군데 밖에 없어. 중들이 동냥을 친 음악잉게. 인제 익산시에서도 그걸 알어야 헌다고 전라북도에서도. 익산시 문화원장이 첫째 욕보아야 허것고. 문화재 깜이 충분히 돼요.

임 대표 : 그래 혼자 정리를 할 수도 없고 얼굴 맞대고 서로 궁리 할 사람도 마땅히 없고 그러다보니 안 들어갈 돈도 들여가면서 책을 발간하고 했어요.

이인수 옹 : 별신제 지내게끔 문화원서 서둘어서 혀얀다고. 우리 전라북도 자랑스러운 일 아녀? 대한민국에서 별신제는 충청도 한가지뿐이라고 원광대 교수가 막 좋아허드랑게.

임 대표 : 문화원 부원장님도 내용을 아시고 그래도 바꿔지든 후딱 안 헐거여요. 점차적으로라도 별신제 지내는 것만이라도 해서 우선 당장 농악을 허게크럼 해주고 앞으로 정립을 혀서 익산분들에게 알려야하고 그래서 익산에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디 제가 가진게 없잖아요? 요새 방과후 수업만 해요. 본업을 놓고...사분의 일도 안 되는데 그나마 그놈도 깔고 댕기는게 많찮아요? 관계를 가져야니까. 긍게 벌이가 없고 집사람이 버는 걸로 먹고 사는데 진짜 이것 공짜로 가르치러 다닙니다. 성당면도 몇 분들밖에 안하기 때문에 내가 무료 강습을 해야겄습니다. 교장을 찾아가서 자리를 제공해달라고 해서 주민자치위원장에게 회의를 해가지고서나 지금 무료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웃기는게. 익산에도 아쉬움이 있어요. 장소만 있으면 좀 우리 장단을 좀 알리고 보급을 했으면 좋겠는데요.

문 : 지금 웅포 용왕제는 중단되었어요. 그러나 여기서는 당산별신제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하고 있지요. 농악은 문화원에서 와서 치고 있는데요.

임 대표 : 여기도 농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문화원에서 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답답하다는 거예요. 거기서 주는 돈을 안 받고도 저는 하겠다는 거여요. 내가 이 지역의 내거나 마찬가지인 장단으로요. 거기서는 농악 안 칠거 같어도 상관 없어요. 왜 그냐면 우리가 동영상도 있어요. 옛날에 혔던 것. 4회땐가 서영식씨 살아계실 때, 그런데 그 분이 돌아가시고 난 뒤로 문화원장이 김복현씨로 바뀐 뒤로부터 인자 점차적으로... 그리각고 여기 금성초등학교 애들허고 같이 선생님이랑 같이 허기도 혔었고 풍물치고 혔던 저기도 있는데 느닷없이 바뀌어버린 거에요. 바뀌어 가지고 문화원에서 했는데 그건 진짜 안타까워요. 신문상에도 성당포 농악으로 별신제를 지낸다고 올라가 있고 별신제 돌아다니는 책에도 자료가 있는데. 제가 오직 폭폭허면은 문화원 오지 말아라고 혀라. 내가 무슨 서류라도 받어 놀 테니까. 문화원에서 자금 받아서 여기다 음식장만 허라고 돈만 줄 뿐이잖아요? 마을에서 제 지내는 곳에다가요. 거기서 저 무당들도 우리가 불러와도 돼요 제 지내는 것이야. 그래도 문화원에서 하지만 걸맞게 허라는 거예요. 손가락질 당하고 추접스럽지 말고. 그런디 나는 힘이 없응게 말도 못허고 있지요. 문화원 풍물패에다 들어가는 돈 같은 한 30만원 40만원 들어갈 거여요. 그런 것은 내가 여기서 무료로 여기서 할 테니까. 문화원 풍물패가 여기 오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실질적으로 여기도 선생님이 살아계시고 농악단들이 거창하게 하고 있으니까. 우리 농악단들이 있어요. 그리고 매주 토요일 날 총 연습식으로 허고 있고요. 지금도 문화원에서 돈만 주고 지역 위원들이 있어 지내는 것도 마을분들이 하거든요. 문화원은 사람동원하고 무당, 굿허는 분 데려오고 그것밖에 역사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농악은 부원장님이 만들어 주시겄지요. 이번 기회로 해서 작년에도 토로를 혔었는데. 저도 원래는 여기 사람도 아니지만은 저는 낭산사람이에요. 함열로 이사 와서 여기를 수년간 밤낮없이 찾아다니고 있어요. 그래서 옛날에 박순자선생님이라고 허죠? 문화 조사자료를 찾으러 여기를 발이 달토록 쫓아다녔어요. 산으로 댕겼다고. 실질적으로 조사하러 다녔어요. 그래서 저 박순자 선생님을 수소문하고 있어요. 금성초등학교 여선생인 박순자 선생님이 조사를 많이 했어요. 찾아 주시고 저희 말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