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재잡기(寄齋雜記)
▣박동량(1569~1635)
본관 반남(潘南). 자 자룡(子龍). 호 오창(梧窓) ·기재(寄齋) ·봉주(鳳洲). 시호 충익(忠翼). 1589년(선조 22) 사마시를 거쳐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어 검열(檢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義州)에 호종, 그 공으로 승지(承旨)에 승진하였다. 1596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를 다녀온 후 도승지 등을 지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어 금계군(錦溪君)에 봉하여지고 형조판서를 역임한 뒤 1608년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가 되었다. 이듬해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추관(推官)이 되어 죄인을 다스리다가 혐의가 없음을 간파하고 석방될 것이라는 말을 발설했다가 탄핵을 받았으나 용서받았다. 이어 폐지된 호패법(號牌法)을 양법(良法)이라고 했다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 당했다가 곧 복관되었다.
이듬해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앞서 선조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유릉(裕陵:懿仁王后의 능)에 저주한 사실을 묵인한 일과 김제남(金悌男)과 역모를 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자 역모사건은 부인하고 대북파가 조작한 유릉 저주사건을 시인, 폐모(廢母)의 구실을 줌으로써 감형되어 지방으로 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유릉 저주사건을 그릇 시인한 죄로 부안(扶安)에 유배되고 1627년 충원(忠原)에 양이(量移)되었다가 1632년 풀려났다. 1635년 아들 미(瀰) 의 상소로 복관,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기재사초(寄齋史草)》 《기재잡기(寄齋雜記)》 《방일유고(放逸遺稿)》가 있고, 그림에는 《농가풍경도(農家風景圖)》가 있다.
▣기재잡기 1(寄齋雜記一)
: 역대 조정의 옛이야기 1[歷朝舊聞一]
■태종
○ 세상에 전해오기를,
“헌묘(獻廟 태종의 묘호)가 상왕궁에 있고 심온(沈溫 1375-1418) )이 국구(國舅)로서 수상이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시기에, 옥사가 크게 일어났다. 심온이 돌아올 때 압록강에 이르자마자 붙잡혀 수원(水原)으로 귀양갔다가 이내 죽음을 받았다. 심온이 죽을 때에 가족들에게 이르기를, ‘대대로 박씨와는 혼인하지 말라’ 하였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우리 선조 평도공(平度公 박은(朴訔))이 좌상으로서 그가 죽을 무렵에 힘이 있었기 때문에, 깊이 원망하여 이런 유언이 있었던 것으로 여겼었다.
○도은(陶隱)선생(이숭인 : 1347-1392)은 문장과 절의가 있는 분으로 목은(牧隱)ㆍ포은(圃隱) 여러분과 함께 위태롭고 어지러운 조정에 서서 한 마음으로 나라에 헌신하여 험난한 일을 주선하기를 거의 수십 년을 하다가, 나라가 이미 바뀐 뒤에는, 포은의 당이라 하여 영남으로 유배되었는데, 황거정(黃居正)이 사자로 영남에 가서 하루 동안에 공을 곤장 수백 대를 때리고 묶어서 말에 싣고 수백 리를 달리므로 드디어 공이 문드러져 죽었으니, 이것은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다.
태종 때에 황거정이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훈되어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다. 그때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상왕께 아뢰니, 태종이 크게 노하여,
“이숭인의 문장과 덕망은 내가 사랑하고 사모하는 바로 그가 일찍 죽은 것을 한탄하였더니, 그를 죽인 것이 과연 이 놈의 소행이었구나.”
하고, 드디어 훈호와 벼슬을 삭탈하고 멀리 귀양보내어 거기에서 죽게 하였다.
목은(牧隱)(이색 : 1328-1396)도 임신년(1392)에서 을해년(1395)까지 한산(韓山)ㆍ여주(驪州)ㆍ오대산(五臺山) 등지에 왕래하며 지냈는데, 태조가 옛 친구의 예로써 대접하여,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가도록 맡겨 두었다. 병자년 5월에는 태조에게 청하여 여강(驪江)에 피서하러 가다가 배에 올라 갑자기 죽었다. 태조가 뒤에 그가 죽은 까닭을 의심하여 당시의 안찰사(按察使)를 죽였고, 오랠수록 더욱 한탄스럽게 여겼다.
두 임금(태조ㆍ태종)의 충성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방식이 동일한 법도에서 나온 것이니, 참으로 훌륭하다 하겠다고 해평(海平)이 말하였다.
■세종
우리나라의 예악 문물이 세종 때부터 융성하기 시작하였고 또한 크게 갖추어졌으며, 여러 임금들이 잇달아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아름다운 것이다.
내가 일찍이 세종 때의 주서(注書)의 《일기초(日記草)》를 보니, 상감께서 친히 양성ㆍ진위ㆍ용인ㆍ여주ㆍ이천ㆍ광주 사이를 사냥 다녔는데, 때로는 한달이 지나서야 돌아오셨다가 이튿날 또 떠나곤 하였다. 길가의 시골 백성들이 더러는 푸른 참외를 드리기도 하고 더러는 보리밥을 드리기도 하였는데, 그러면 반드시 술과 음식으로 답례하였다.
■세조
○ 인성(仁城 : 홍윤성 1425-1475)은 성질이 몹시 모질고 사나웠다. 공을 믿고 사람을 멋대로 죽이고, 문 밖 냇물에서 말을 씻으면 즉각 사람과 말을 모두 죽였으며,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은 귀천을 묻지 않고 모조리 죽였다.
언젠가는 또 남의 논을 빼앗아 미나리 논을 만드니, 늙은 할미가 울면서
“늙은 몸이 가난한데다 홀로 되어 일생 동안 믿고 생활을 부지해 가는 것이 이것인데, 그대로 순종하면 굶어 죽을 것이요, 항거하면 죽음을 당할 것이나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지이니, 차라리 그 집에 가서 하소연하여 만일을 바랄 수밖에 없다.”
하고, 드디어 문서를 가지고 갔었는데, 공이 한 마디 말도 건네보지 않고 바로 그 할미를 돌 위에 거꾸러뜨리고 모난 돌로 쳐부수어 그 시체를 길 옆에 버려두었으나, 누구도 감히 어쩌지 못하였다. 이러므로 그의 종들이 멋대로 행패를 부렸으나 관에서도 금하지 못하였다.
■성종
○ 성묘(成廟)가 경연의 강론이 끝나면 반드시 편전에 나가 계시므로 여섯 승지들이 각기 소속 관아의 공무를 휴대하고 그 해당 관원들을 인솔하여 상감의 앞에 나아가 바쳤다. 그리하면 상감께서 반드시 해당 관원 및 승지와 더불어 사리를 연구하고 따지기를 되풀이하여, 만일 그것이 옳지 않으면 물러가서 다시 의론하게 하고, 옳게 되었으면 반드시,
“이것이 당상관의 의견인가 해당 관원의 의사인가?”
하고 물었으며, 만일 해당 관원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라면 극진히 칭찬하고는 그 이름을 기록하여 훗날 승진하는 전형 자료를 만들었다.
심지어 수령ㆍ첨사ㆍ만호들이 부임하려 하직할 때에도 반드시 일일이 불러 보아 그 사람의 출신한 근거를 묻고 다음으로 씨족 관계와 교우 관계를 물었으며, 그 다음에 공사 처리와 부하 통솔, 백성 다스리기와 적 방어하는 방법을 물어 보아 잘한 사람은 극진하게 칭찬하고 또한 따라서 등급을 뛰어 승진시켰으며, 잘못한 사람은 바로 파면하되 아울러 천거한 사람까지 죄주어,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도 이렇게 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비록 시종하여 직접 받드는 사람까지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그러므로, 지방관으로 부임할 사람들이 그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짐작하면 어쩔 수 없이 병을 핑게하고 감히 부임 인사를 가지 못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 사실을《승정원일기》에서 보았다.
■예종
남이(南怡 1441-1468)의 옥사에 중추원 영사 강순(康純 1390-1468)이 관련되어 심문을 받았다. 남이가 형벌을 받아 종아리뼈가 부러지자, 마침내 자백하기를,
“강순이 나를 시켰다.”
고 하자, 강순이 말하기를,
“나이가 70이 넘고 지위가 신하로서는 최고에 이르렀는데, 무슨 이익이 있다고 남이를 시켰겠습니까?”
하였다. 남이가 탄식하며,
“내가 자백하지 않은 것은 훗날에 공을 세울 것을 바랐던 것인데, 이제 종아리뼈가 다 부러져 이미 덩치만 남은 쓸모없는 병신이 되었으니, 산들 무엇을 할 것인가? 나 같은 나이 젊은 사람도 죽음을 아끼지 않는데, 머리가 허연 늙은이는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그러므로, 내가 증명하는 것이다.”
하였다. 예종이 묻기를,
“병조 판서 허종(許琮 1434-1494)도 역적 모의를 아느냐.”
하였다. 이때에 허종이 입시하였다가 황공해서 땅에 엎드렸다. 남이가 말하기를,
“허종은 충신으로 이 일을 모르니, 원컨대 의심하지 마시고 쓰소서.”
하였다. 남이와 강순이 함께 형을 받으러 가면서 강순이 남이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젊은 애와 서로 좋아했으니, 이런 화를 당하는 것이 당연하지.”
하였다. 도대체 역적이란 것이 어떤 죄명인데, 이렇게 희롱을 한 것일까.
▣기재잡기 2(寄齋雜記二)
: 역대 조정의 옛 이야기 2[歷朝舊聞二]
■중종
○세 대장이 광화문 밖에 진을 치고 사복사(司僕寺)에 저장된 마초를 불피었는데 불빛이 대낮같아 궐안이 진동되므로 입직했던 높고 낮은 벼슬아치들이 모두 뿔뿔이 달아나 숨는데 어떤 사람은 수채구멍으로 빠져 나가기도 하고 혹은 대궐 담을 넘어서 도망치기도 하여 연산군이 당황하여 여러 관원을 불러 들였으나 한 사람도 응하는 자가 없었고, 심지어는 활과 살을 절취하여 가지고 달아나는 자도 있었다.
승지 윤장(尹璋)과 이우(李堣)와 조계형(曺繼衡)이 대궐 담 위에서 군중(軍中)에게 외치기를,
“오늘 추대한 분이 누구냐?”
고 하니, 곧 응하기를,
“진성대군(晉城大君)이신데, 벌써 왕대비의 허락을 받았소.”
하자, 세 사람이 그제서야 밧줄을 타고 내려와 달려오므로 사람들이 체통을 유지하였다고 하였다.
그윽이 생각건대, 연산이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하고 미친듯이 난폭한 짓을 한 지가 10년이 넘어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된 것을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할 것없이 모두 알고 있었는데, 후설(喉舌)과 같이 가깝고 밀접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일찍이 한 가지 일도 바로 잡는 말이 없다가, 변을 알게 되자 마자 처신할 의리를 생각지 않고 천명이 돌아간 것을 엿보아 비로소 궐문에서 나올 생각을 하였으니, 비록 활과 살을 훔치고 수채구멍으로 나온 사람과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마는 역시 한 때 화를 모면하려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니, 어찌 체통을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때 세 사람이 모두 논핵당하여 파면되었다.
○ 의정부의 종 정막개(鄭莫介)는 간사하고 교묘한 말재주로 박승문(朴承文)ㆍ신윤무(辛尹武)를 고해 바치고 당상관까지 되었었다. 충정공(忠貞公) 권벌(權橃)이 지평으로 있으면서 단독으로 그를 죽여야 할 죄상을 임금께 아뢰었는데, 비록 임금의 윤허를 받지는 못하였으나 이로부터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막개를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여 사람 축에 들지 못하였다. 그의 집이 사복시 냇가에 있었는데, 붉은 띠를 띤 조복(朝服)차림으로 일하고 아침 저녁에 시장 거리에 나서면 동네 아이들이 곳곳에서 떼를 지어 기왓조각을 던져 쫓으면서 큰 소리로,
“고변한 정막개야, 붉은 띠가 가소롭구나.”
하니, 막개가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쫓기어 돌아 갔었다. 아이들이 항시 그러하였고, 사람들도 또한 침뱉아 욕하였는데, 마침내 굶어 죽었다.
○ 정유년(1537)에 수찬 공용경(龔用卿)이 중국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오는데, 찬성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이 대제학으로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압록강 가에 가서 그를 맞이하게 되었다. 공수찬이 연도(沿道)에서 지은 작품이 잇달아 들어오는데, 그 문장 내용이 매우 풍부하고 화려하므로, 소 퇴휴(退休 세양의 호)가 명성에 흠이 날까 걱정되어, 드디어 사퇴하였다.
이조 판서 심언광(沈彦光)이 관반사(館伴使)가 되었는데, 자신이 가고 싶어 안로에게 가서 청하니 안로가 말하기를,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될 수 없소. 정운경(鄭雲卿 사룡(士龍))이 지금 기성(箕城 평양)에 있으니, 그를 보내는 것이 좋겠소.”
하고, 드디어 대신시켰다.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에 송별시를 심언광만이 두 수를 지어 주었으니, 대개 자신이 시에 능한 것을 과시한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떠벌여 과장하는 것을 비웃었다.
○ 육조의 일을 해당 판서가 모두 결정하고, 그 조(曹) 안의 잡된 일은 참의가 맡아서 하는데 참판은 주관하는 일이 없었으며, 낭청은 모든 사무를 조사 좌랑 한 사람에게 책임지우고, 정랑은 행동을 제마음대로 하였다. 예조가 육조 중에서 조용하고 한가로워 일이 없으면서도 좋은 일은 가장 많았다. 출근한 날에는 음악을 검열한다 핑계하고 남루(南樓) 위에 나앉아 아리따운 기생과 좋은 음악을 마음껏 골라 종일토록 술을 마시면서 노래와 춤으로 즐기며, 때로는 조사 좌랑을 불러 벌주를 수없이 주는 짓이나 하되, 판서가 듣고서도 예사로 여겨 책망하지 않았다.
임당(정유길 1515-1588)이 좌랑으로 있을 적에 정랑이 귀찮게 굴어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었는데, 판서가 불러 계초(啓草)를 쓰라고 하였으나 정랑이 보내주지 않아 한참 만에 들어가니, 판서가 웃으면서,
“좌랑이 필시 정랑의 괴롭힘을 받는가 보군.”
하므로, 공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말하기를,
“정랑이 비단 자기가 맡은 사무를 안 볼 뿐만 아니라 좌랑도 그 맡은 사무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소인의 생각으로는 참판과 정랑을 고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참판이 마침 졸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면서,
“좌랑, 좌랑, 절대 그런 말을 하지 마오. 용렬한 이 늙은이가 태평한 시절을 만나 육조의 아경(亞卿)자리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는 것도, 어찌 태평성대의 좋은 일이 아니겠소.”
하자, 판서와 참의도 모두 껄걸 웃으므로, 공이 자기가 망발했음을 알고 송구하여 재삼 사과하였다.
악군(岳君 장인)이 예조 좌랑으로서 공사를 가지고 찾아갔더니, 임당 공이 좌상으로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한 번 망발을 한 일이 있었다.”
하여, 드디어 그 이야기를 꺼내어 웃고 또 말하기를,
“나는 나이가 젊어서 경솔한 말을 했소마는 그대는 그럴 염려가 없겠지.”
하였다. 대개 악군의 나이 이미 50을 넘어 나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재잡기 3(寄齋雜記三) :
역대 조정의 옛 이야기 3[歷朝舊聞三]
■중종
○ 홍정(洪正) 사부(士俯 홍정의 자)는 대사헌 흥(興)의 아들이며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의 외조부이시다. 재주와 행실로 기묘년의 선류(善類)들에게 중요시되어 일찍이 안동 부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제도에 당하관은 반드시 양사(兩司)의 서경(暑經)을 거친 다음에야 부임하게 되는데, 장령 박세희(朴世熹)가,
“아무개와 같은 사람됨으로도 또한 서경하여야 할 것인가.”
하고, 곧 양사에 말하여 격식을 깨뜨리고 서경을 거치지 않고 보냈다. 기묘 제현들의 일 처리한 예기(銳氣)를 이 한 가지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홍정 공은 우의정 성세창(成世昌 1481-1548)과 서로 통하는 친구였다. 그가 일찍이 정월 어느 날 눈내린 밤에 찾아가 동원(東園) 별실 한가한 창문 아래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뜰가에서 거문고 소리가 들렸다. 창 구멍으로 가만히 내다 보았더니, 한 늙은이가 매화나무 밑에 눈을 쓸고 앉아, 하얀 백발을 날리면서 거문고를 탔다. 그 손가락 끝에서 울려 나온 맑은 소리는 지극히 기이하였다. 성세창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였는데, 어느새 손님이 당에 있는 줄을 알았는지 바로 분주하게 거두어 가지고 들어갔던 것이다.
뒤에 홍정 공이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달빛은 대낮 같고 매화는 활짝 핀 바로 그때에, 백발이 흩날리고 맑은 가락이 그 사이에서 발산되었는데, 아득히 진짜 신선이 내려온 것 같아 상쾌한 기분이 온몸에 가득 차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니, 용재(慵齋 성현(1439-1504 成俔))야말로 신선의 풍채와 도사의 기골이라 할 수 있다.”
고 하였다.
○ 병조 좌랑 윤춘년(尹春年)이 상소하기를,
“돈녕도정 윤원로( ? -1547 尹元老)가 외람됨이 지나치고 기습(氣習)이 많아 조정의 권세를 농간질하기 좋아하니, 청컨대 속히 제거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과 2품 이상의 관원을 빈청에 모여 의논하게 하였다. 충정공(忠正公)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이 공조 참판으로 2품의 말석에 있었는데, 어떤 이는,
“법대로 처형하는 것이 옳다.”
하고, 어떤 이는
“처형을 늦추어서는 안 되니, 모두 모인 자리에서 박살내야 한다.”
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미리 형틀을 차려 놓아야 한다.”
하였다. 충정공이 말하기를,
“국모가 위에 계시는데, 어찌 까닭 없이 그 동생을 죽입니까? 하물며 드러난 죄가 있지도 않은데 사대부를 박살내어도 됩니까? 절대로 안 되오.”
하였다. 대개 나라의 공론이 밖에서는 이미 결정되었으나 공의 말이 이러하므로 여러 사람들의 의론이 저지되고 다만 사사(賜死)하기로 결론하고 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재상들이 모두 그 허물을 공에게 돌리면서 말하기를,
“종묘사직의 죄인을 처형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여, 서로들 얼굴을 쳐다보면서 공을 위하여 매우 위험스럽게 여기므로, 공이 한 재상을 바라보며, 그를 불러 함께 가자고 외쳤으나 못들은 척하고 끝내 피해 나가 버렸다. 공이 말하기를,
“나는 평생 두려워한 일이 없었는데 그날의 분위기는 무시무시하여 자못 두려웠었다.”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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