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만록(聞韶漫錄)
윤국형 尹國馨 : 1543-1611
조선의 문신. 초명은 선각(先覺), 자는 수부(粹夫), 호는 달천(達川). 본관은 파평(坡平). 현령 희렴(希廉)의 아들. 1568년(선조 1) 대과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으로부터 예조 좌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 이르러 10여 년 동안 명망이 날로 높아져 삼사(三司) 양전(兩銓)에 역임하지 않은 데가 없었으나 자기 직책에 지성을 다할 뿐 구태여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1583년 사론(士論)이 두 갈래로 갈라져 시비가 벌어졌으나 동전(東銓)에 있으면서 공정한 입장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바 되어 드디어 병을 청탁하고 사퇴한 후 교리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청주 목사로 부임하였다가 몇 달 안에 사임하였고 그 해 겨울 장악원정(掌樂院正)을 거쳐 1585년 옥당(玉堂)에 돌아갔다. 선조가 날마다 유신(儒臣)들과 경사(經史)를 강론하여 정치도를 논의 할 때 강석(講席)에서 진언한 바 많았다. 1589년 좌수지로 상주 목사에 전임되어 선치(善治)하였고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1592년 임진왜란 때 순찰사를 겸임하여 장병을 지휘, 방어에 힘쓰다가 서울이 이미 함락당하고 병으로 임무를 감당치 못하게 되자 이를 문책하는 자가 있어 관직을 삭탈 당했다. 1594년 판결사(判決事)ㆍ병조 참판ㆍ대사헌 등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임하고, 영상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그를 아껴 모든 일을 협의하자 이를 싫어하는 자가 모함하려 하므로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나갔다. 돌아와 한성 우윤 겸 형조 참판이 되었다가 유성룡이 몰려날 때 함께 모함당하여 파직되었다. 6년 후 다시 판결사로 기용되어 1606년 한성 좌윤을 지내고 1608년 선조가 죽자 광해군 때 공조 판서에 이르러 사망, 위인이 무겁고 도량이 넓었으며 희노(喜怒)를 나타내지 않고 충의와 신의로 일관했다.
○ 아버님께서는 비록 술을 좋아하셨어도 술 때문에 곤욕을 치르신 일은 없으셨으며 취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기를 목표로 삼으셨다. 그런데 내 아이 경립(敬立)은 취하기만 하면 반드시 큰소리로 떠들며, 의립(義立)은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지난 여름에 우연히 술을 먹고 주정하는 것을 보았으니 이것은 가장 나쁜 짓이다. 경립은 주량도 크고 술도 즐기니 끊을 수는 없겠지만 절제하는 것이 진실로 좋겠다. 옛날에 정일두(鄭一蠹 이름은 여창(1450-1504 汝昌)) 선생이 술에 취해서 들판에 쓰러져 하룻밤을 자고 집에 돌아갔다. 그 어머니가 몹시 책망함으로 인하여 임금이 내리는 술이나 음복(飮福)하는 경우 외에는 다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한다. 의립도 이것을 본받으면 더욱 좋겠다. 그러나 병이 있을 때에 기운이 돌 정도로만 마시는 것도 묘방이다.
○나는 아홉 살 때부터 교관(敎官) 유임(兪任)에게 6~7년 동안 글을 배워서 비로소 개몽(開蒙)하여 마침내 과거를 보았으니, 이는 모두 가르쳐 인도해 준 은혜이다. 그 뒤에는 혹 판사 황박(黃博)과 감사 이담(李湛)에게 배우기도 했으나 모두 유선생 문하에서와 같이 전념하고 오래 배우지는 못했다. 유선생은 91세에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도 총명이 여전하여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초상을 치를 때에는 울면서 일을 하는 제자들이 위로는 육경(六卿)으로부터 아래로는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무려 수백 명이나 되었으니, 이때는 병술년(1586, 선조 19) 겨울이었다. 초상을 치르는 일에는 정성을 다하였고,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 판서 권징(權徵), 판서 윤탁연(尹卓然)과 내가 성심껏 염출하여 본가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는 모든 기구도 갖추었다.
유선생은 나이 70세가 넘어서도 기운이 매우 강녕하였다. 여러 제자들이 봄ㆍ가을로 잔치를 벌여 헌수(獻壽)했다. 묵사동(墨寺洞) 성 정승(成政丞)의 옛 집의 행랑이 넓으므로 언제나 여기에서 연회를 열었다. 선생은 명례동(明禮洞)에 살다가 만년에 묵사동으로 옮기셨는데, 잔치 때에는 언제나 매우 즐겁게 노셨다. 높은 벼슬에 있는 제자들이 많아 금관자나 옥관자가 번쩍번쩍했고, 대각(臺閣)으로 있는 벼슬아치들이 좌우에 늘어 앉았으며 유생(儒生)과 아이들까지도 모두 참여했다. 잔치가 파하면 선생은 말을 타고 가고 여러 제자들은 모두 걸어서 뒤를 따르는데, 등불이 휘황하고 음악 소리는 하늘을 울리며 거리를 메우고 지나가니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이 집에 돌아가신 뒤에라야 비로소 흩어졌다.
말년에 선생은, ‘성 정승의 집에서 잔치를 열면 여러 사람이 걸어서 따라오는 것이 몹시 불안하다.’ 하여, 본댁에서 잔치를 열도록 했다. 기사년(1569, 선조 2)으로부터 병술년에 이르기까지 18년 동안 국상(國喪)이 있는 해를 제외하고는 해마다 이것을 상례로 삼았다. 묵사동에는 선배와 높은 벼슬아치들이 많았는데, 모두 흠모하여 감탄하기를,
“유 교관(兪敎官)의 복은 우리들의 미칠 바가 아니다.”
했다.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 전후에 통틀어 거의 천여 명에 달했으니, 당시 동몽 교관(童蒙敎官)으로서 제자를 가르친 것이 이처럼 많은 이는 없었다. 先生丙辰生壬午生員賢而尙古無書不讀處己簡潔一毫不妄取家極淸貧不以爲介無子有女數人享年九十一丙戌十月二十日卒葬廣州
(선생은 병진년(1496)에 태어나서 임오년(1522)에 생원이 되었다. 어질고 옛 사람을 존경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몸가짐이 간결하여 터럭만큼도 망령된 일을 하지 않았으며, 집이 몹시 청빈(淸貧)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딸 몇 명만 있고 아들은 없었다. 나이 91세로 병술년(1586년 10월 20일에 세상을 떠나니 광주(廣州)에 장사지냈다.)
※고전번역원의 번역자가 연대에 착오를 일으켰다. 유임은 윤국형이 스승으로 모시고 장례를 치르기도 했는데 생몰연대를 (1556-1646)으로 기록하였으므로 내가 바로 잡는다.
○이조와 병조의 낭관이 이 사람을 추천하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인데, 사람 가려 쓰기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계미년(1583, 선조 16) 가을에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이조에서 천거하는 것을 없애자.’고 아뢰었으니, 이는 전랑(銓郞)이 인사권을 마음대로 하기 때문이었다. 병조에 대해서는 박사암의 장계에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있었다. 그때 나는 이조 정랑으로 있었는데, 이해 초여름에 좌랑 김자앙(金子昻)과 함께 홍태고(洪太古)를 천거했으나 이후로는 천거가 시행되지 못했다. 만일 인사권을 마음대로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만을 죄 주면 되는 것인데 그 천거하는 권한마저 없애 버리니, 마치 정(鄭) 나라 사람이 향교(鄕校)를 헐려고 한 일과 비슷하다.
○ 정해ㆍ무자년 사이에 일본에서 통신사를 보내줄 것을 극구 청했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다가 마침내 부득이하여 사신을 보냈다.
경인년(1590, 선조 23) 봄에 정사 황윤길(1536- ? 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1538- 1593 金誠一), 서장관 허성(許筬)이 명을 받고 갔다. 오랫동안 동래(東萊)에 머무르다가 5월에 비로소 바다를 건너가서 신묘년 봄에 돌아왔다.
윤길은 일본왕 수길(秀吉)이 걸출하고 군사들도 날래니 뒷일이 걱정스럽다고 말하고, 성일은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임금 앞에서 서로 다투었다.
임진년에 적변이 크게 일어났으니, 윤길의 말이 맞은 것이다.
윤길은 난리 전에 죽었고, 성일은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있었는데, 난이 일어난 뒤에 잡혀서 의금부에 갇혀 있다가 적을 막아낸 공이 있다 해서 석방되었다. 직산(稷山)에 이르러서 초유사(招諭使)의 명을 받아 도로 경상 우도로 들어가서 힘써 의병을 모집했으니, 우도에서 의병이 많이 일어난 것은 모두 그의 힘이었다. 가선대부로 승급되어 경상우도 감사(慶尙右道監司)가 되었다가 계사년 여름에 병으로 진양(晉陽)에서 죽으니, 사민(士民)들이 지금까지도 애석히 여긴다.
○ 우리 나라 국사(國史)는 안으로는 춘추관(春秋館), 밖으로는 전주(全州)ㆍ성주(星州)ㆍ충주(忠州)의 네 곳에 나누어 간직해 두었다. 임진년 왜란에 전주에서는 병화가 미치기 전에 산속으로 옮겨 두었고, 그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다. 승여(乘輿 임금의 수레, 즉 임금)가 서울에서 평양으로 파천하는 동안 기록한 사초(史草)는 사관들이 안주(安州)에 이르러 이것 역시 불태우고 도망갔고, 그 뒤의 사초(史草)는 외부인들은 얻어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혹자는 사초가 너무 간략하고 미비한 것을 병통으로 여기기도 했다. 야사(野史)는 전혀 없었고, 오직 덕훈(德薰 이정형(李廷馨))이 병자년(선조 9, 1576)부터 임진년까지 쓴 《가장일기(家藏日記)》가 상당히 자세했다. 이것을 춘추관에 보내서 빠진 부분을 보충하게 했으니, 그 마음씀이 부지런하다고 하겠다. 전주에 간직해 두었던 국사(國史)는 지금 해주(海州)로 옮겨갔다고 한다.
○ 우리 나라 풍속에 남녀가 어릴 때에 귀를 뚫어 귀걸이를 다는 것이 있어서 오랑캐 풍속과 유사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해온 지가 오래여서 고치려 하는 자가 없었다. 금상(今上 선조(宣祖)를 지칭) 초년에 오랑캐 풍속을 고쳐야 한다는 명이 있었다. 그래서 귀한 이든 천한 이든 아이를 낳으면 모두 귀를 뚫지 않았는데, 계집아이만은 혹 모양을 내려고 그대로 귀걸이를 하는 일도 있다.
○8월 열흘께 전라도 순찰사가 금산(錦山)의 적을 쳐서 이기지 못하자, 영규를 선봉으로 삼고자 하기에 나는 이를 승낙하였다. 영규( ? - 1592)는 그 군사를 거느리고 유성(儒城)에 나가서 진을 쳤다. 조 제독(趙提督 조헌(趙憲))은 일찍이 이달 1일 다시 싸울 적에, 영규의 진으로 가서 군사 수백 명을 내어 싸움을 도왔다. 이때 영규가 쓸 만한 사람임을 알고 유성으로 따라가서 영규와 진영을 합하고, 영규를 독려하여 함께 금산으로 들어갔다. 영규는 말하기를,
“전라도 순찰사가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진격하려 하면서 나에게 선봉이 되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시기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경솔히 나갈 수는 없습니다.”
하고, 조헌에게 순찰사와 날짜를 약속하도록 권했다. 그런데 회보가 오기도 전에 조헌은 적을 속히 쳐야 한다고 강경히 고집하면서 그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금산으로 들어가니, 영규도 마지못해 따랐다. 그의 부하들이 말하기를,
“반드시 패할 것이 분명하니 가지 마소서.”
했으나, 영규는 말하기를,
“가부를 의논할 적에는 그래도 그의 말을 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저 사람이 이미 먼저 갔으니, 내가 만일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누가 구원하겠느냐?”
하고는 따라갔다. 이때는 8월 17일이었다. 영규가 조헌과 금산 5리 안에서 진을 연결해 치고 있노라니, 적이 크게 몰려와 조헌의 진이 먼저 함락되고, 영규의 진도 다음으로 함락되었다. 이 싸움에서 죽은 우리 군사가 10명 중에 8~9명이나 되었고, 적도 죽은 자가 많았다. 조헌이 만일 영규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이같은 실패가 있었으랴. 원통하고 원통한 일이다.
군사가 패한 이튿날 조헌의 군관이 권 순찰사의 날짜 약속한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였다. 그러나 때가 이미 지났으니 말한들 무엇하리오. 청주의 적을 몰아냈다는 보고가 의주(義州)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영규에게 당상관을 제수하고 옷감까지 보냈으나, 영규는 이미 죽어서 받지 못했다.
이 뒤로 승병(僧兵)들이 곳곳에서 계속 일어났으니, 실로 영규가 불러 일으킨 것이었다.
영규는 청주에서 적을 칠 적에 수령들이 혹 물러서면 짚고 있던 큰 몽둥이로 등을 치면서 말하기를,
“평일에는 육식(肉食)을 하며 잘 지내더니, 이제 와서는 도망갈 생각밖에 없느냐?”
하니, 수령들이 감히 누구도 뒤처지는 자가 없었다. 관하에 혹시 영을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군법으로 다스리니, 사람들이 감히 그의 영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말은 연기 현감(燕岐縣監) 임태(任兌)가 공주 목사 허공(許公 이름은 욱(頊))을 보고서 한 말이다. 영규는 글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의 성명 정도만 조금 분별했다.
○ 임진년 난리 후로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비록 대가세족(大家世族)이라도 모두 생업을 잃고 거지가 되어 돌아다녔으며, 여자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적들에게 몸이 더럽혀진 자가 몹시 많았다. 이 중에서 두드러지게 절개를 지킨 자는 조정에서 알아보고 정문을 세워 주었다. 시체는 들에 가득하고 매장된 것은 거의 없었다. 아비가 자식을 팔고 남편이 아내를 팔았으며, 계사년 봄에는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고 시체를 쪼개어 앞을 다투어 먹었으며, 골육지간끼리도 서로 죽이는 자도 있었으니, 우리 동방의 변란의 화가 참혹함이 오늘과 같은 때는 없었다.
임진년에는 모를 심고 김을 맨 뒤에 적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심한 흉년은 아니었고, 계사년에는 모를 심은 곳은 풍년이 들었지만, 중외의 들판에는 쑥대만 우북하고, 모 심은 곳이 3분의 1도 안 되어 흉년이나 다름이 없었다. 갑오년에는 모 심은 것이 계사년에 비해서 조금은 많았으나, 굶주리고 병들어 죽은 자가 반이 넘었기 때문에 김을 맬 사람이 없어서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었지, 하늘이 풍년이 들지 않게 한 것은 아니었다.
올해(을미년 1595)에는 중외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는 고초를 겪어서 지난 일을 경계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농사에 힘써서 황폐한 밭을 많이 개간한데다가 마침 큰 풍년을 만났으며 서리도 늦게 내렸다. 그래서 비록 척박한 밭이라 할지라도 곡식이 익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에 백성들이 곡식을 마치 진흙이나 모래처럼 보아 포목 한 필 값이 곡식 몇 섬씩 가게 되고, 쌀로도 열 말이 넘게 되었다. 그런데 무명만은 극히 귀해서 겨울옷을 해 입을 길이 없었다. 촌에서는 한껏 술을 빚어 마시고 노래 소리가 서로 들렸으니, 이는 거의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나서 이런 풍년을 만났기 때문에 실로 자축하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었다.
○ 계사년 10월에 환도하여 양천 도정(陽川都正)과 계림군(桂林君)의 집을 대궐로 쓰고,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쓰고,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종묘(宗廟)로 썼으니, 모르겠지만 왕기(王氣)가 이 지대에도 서려 있던 것이었을까.
소공주궁(小公主宮)은 의안군(義安君)의 신궁(新宮)이 되었는데, 적추(賊酋)가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다가 나갔고, 지금은 중국 사신과 장수들을 접대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니 진롱(秦隴)의 요새(要塞)와 힘들여 건설한 역사(役事)가 왕자가 누리는 곳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 될 줄 누가 생각했으랴. 천하의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 사관(四館 승문원ㆍ예문관ㆍ성균관ㆍ춘추관)에서는 서로 지극히 공경하여 지위마다 더욱 엄격하고, 아랫사람을 검속하는 데도 엄격해서 만일 미비한 점이 있으면 조금도 가차없이 책망하여 그 종을 매질하게 하였으며, 또 처벌과 예우가 병행하기 때문에 상하 사이에 체모를 존중했다. 사관(史官)은 역사를 편수하는 데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괴원(槐阮 승문원의 별칭)에서는 반드시 아랫사람부터 일찍 출사하고 공사(公事)는 감히 잠시도 지체하지 못했다.
○ 소재(노수신 1515-1590)는 마침내 정승 자리에 올라 임금에게 중한 대우를 받은 지 20여 년 동안 비록 일을 하거나 건의한 일은 없었어도 선비들의 마음이 모두 그에게로 향하여 여론을 진압하는 장점이 있었으며, 항상 간결하고 침묵하는 것으로 자처했다. 나도 여러 번 임금 앞에 그와 함께 입시했지만, 글 뜻을 논의하는 데는 그가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기축년 역옥(逆獄)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그는 부축을 받고 대궐에 나아가 일이 번지게 하지 말라고 아뢰더니 얼마 안 되어 일찍이 역적을 천거했다 하여 탄핵을 받았다. 경인년(1591, 선조 23) 봄에 세상을 떠났다. 사대부 중에서 유 정승(柳政丞 유성룡을 지칭)과 상산군(商山君) 박충간(朴忠侃)만이 그 초상을 힘껏 돌봤을 뿐, 조정에서는 부의나 예장(禮葬) 같은 일이 없었다. 나는 그때 상주(尙州)에 있으면서 힘껏 초상 일을 돌봤다.
소재는 젊었을 때부터 절행과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런데 을사년의 죄명은 “일에 서툴고 고집이 세다[疎戇].’는 것으로 지목하였으니, 이것은 간사한 자들이 죄를 꾸며내는 데 명목을 붙이기 어려워서 억지로 이 두 글자를 덮어 씌운 것이다. 원통한 일이다. 시문(詩文)이 고고(高古)해서 사람들이 한 구절만 얻어도 반드시 이를 외우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숙흥야매잠주(夙興夜寐箴註)》가 있다. 무진년(선조 1, 1568) 겨울에 《학문혜경(學問蹊逕)》을 올렸는데, 퇴계와는 길이 조금 달랐으니, 이는 소재는 나정암(羅整菴 명대의 학자 나흠순(羅欽順)의 호)을 위주로 했기 때문이다.
○ 김 영흥 효원(1542-1590 金永興孝元 영흥(永興)은 지명으로 영흥 부사를 지냄)의 자는 인백(仁伯)으로 가정(嘉靖) 임인년(1542, 중종 37)에 태어났다. 나는 을미년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끝까지 의리를 변치 않았다.
사람됨이 총명하기가 남보다 뛰어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일찍부터 재주 있다는 명망이 퍼졌다. 을축년(1565, 명종 20)에 알성과(謁聖科)에 장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역임했는데, 갑술ㆍ을해년 사이에 동(東)ㆍ서(西)의 설이 일어나자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나갔다. 이 뒤로는 침체되어 빛을 보지 못하고, 혹은 내직으로 들어왔다 혹은 외직으로 나갔다 했으나, 끝내 개의하지 않았다.
신묘년에 당상관에 올라 영흥 부사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사람됨이 후덕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또 악을 미워하기를 너무 심하게 하더니, 말년에는 너그럽고 부드러워 남을 용납했으며, 또 세상을 다스리는 재주가 뛰어나므로 사람들이 크게 쓰일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일찍 죽었으니, 천명이다.
나는 그의 언론이 강직하고 말투가 단정하던 모습이 생각날 때마다 문득 슬픈 마음이 들어 목이 멘다. 친구간에 서로 도와 유익하게 하는 것이 경선(景善 우성전(1542-1593 禹性傳)의 자)과 함께 좋은 벗이 되었는데 모두 잃었으니, 내 말로가 캄캄하다.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인가.
○ 좨주(祭酒) 우성전 경선(1542-1593 禹性傳景善 경선(景善)은 자)은 임인년(1542, 중종 37)에 태어났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함께 놀던 좋은 벗이다.
경선은 일찍부터 스스로 분발하여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드디어 이름이 알려진 선비가 되었다.
신유년(1561, 명종 16)에 나와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무진년에도 나와 함께 별시(別試)에 합격했다.
그는 사람됨이 강직해서 좀처럼 사람을 허여하지 않으며, 자신을 굽혀 세상과 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속배들의 미움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30년 동안이나 침체되었으되, 개의하지 않았다.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란 오직 서애ㆍ파곡(坡谷 이성중(李誠中))ㆍ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ㆍ시우당(時雨堂 홍혼(洪渾))ㆍ자앙(子昻 김수(金睟)의 자)과 나 몇 사람뿐이었다. 계미년에 응교가 되어 차자를 올렸는데, 언론이 매우 정당해서 비록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탄복했다. 그러나 선비와 벗들 사이에서는 종시 그를 이해해 주는 자가 없었으니, 이것은 천명이라, 어찌하겠는가.
동과 서라는 두 글자가 이미 나라를 병들게 하는 큰 좀이 되었는데, 일 만들기 좋아하는 자들은 또 남(南)ㆍ북(北)의 설을 만들어내어 그 여파가 점점 번져가더니, 기축년의 옥사까지 일어나서 백중겸(白仲謙 백유양(白惟讓)의 자)이 죽을 때에 경선을 남인의 우두머리라고 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미혹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말인가. 중겸의 죽음은 극히 원통한 일이지만, 이 말은 매우 애석하다. 남과 북이란 두 글자를 어찌 차마 입에서 냈단 말인가. 지금까지도 중겸의 남은 의론으로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들이 있으니, 더욱 괴이한 일이다.
난리가 난 뒤에 그는 90세 노모(老母)를 모시고 해변으로 돌아다니다가 의병을 일으키니, 조정에서 이 소식을 듣고 특별히 당상관으로 승격시켜 대사성(大司成)을 삼고 인신(印信)을 주었다. 그는 자기가 거느린 군사를 장의병(仗義兵)이라 하고, 강화(江華)로 들어가서 김천일(金千鎰)과 서로 호응해서 바다를 함께 지켰다.
계사년에 적이 물러갈 때 의령(宜寧)까지 추격했다가 병이 심하여 들것에 실려 돌아오던 중 부평(富平)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52세였다.
○ 허봉 미숙( 1551-1588 許篈美叔 미숙(美叔)은 그의 자, 허균의 형)은 초당 선생의 둘째 아들로 총명하고 민첩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열 살 전에 빛나는 재주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소문이 자자하였다.
18세에 무진년(1568, 선조 1) 증광생원시(增廣生員試)에 장원으로 뽑히고, 22세에는 임신년 정시(庭試)에 급제해서 예문관을 거쳐 오랫동안 경연(經筵)에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그와 옥당의 동료로 있으면서 살펴보건대, 용모와 행동이 청일(淸逸)하고 의론이 초월하여 그 예리한 비판을 숨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를 아는 자는 그의 비상한 격조를 사랑했고, 알지 못하는 자는 그가 지나치게 재주를 드러내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으며, 심한 자는 그의 흠을 꼬집어 배척하기도 하였다.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한 번 보기만 하면 문득 외어서 고금의 일을 꿰뚫어 조금도 빠뜨리지 않았다. 또 시와 문장을 바로바로 지었으며, 비록 술을 마시고 크게 취했어도 문득 등불을 켜놓고 글을 읽은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모든 소차(疏箚)를 올리는 일은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계미년 가을에 한 대신을 여지없이 배척하는 상소가 들어오자 그 대신은, “이는 필시 전한(典翰)이 지은 것일 게다.”하고, 사람을 시켜 알아 보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 되어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나갔다가, 또 얼마 안 되어 갑산(甲山)으로 귀양가는데, 상주를 지나서 가게 되었다. 전에 무진년 과거에 장원한 하도원(河道源 이름은 낙(洛))은 미숙과 함께 과거에 급제한 사람으로, 미숙을 길에서 만나 보려고 하니, 미숙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도(道)가 같지 않은 자와는 함께 일을 꾀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만나 보지도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을유년 가을에 귀양이 풀렸다. 정해년간에는 금강산(金剛山)에 가려고 금화(金化)의 직목역(直木驛)을 지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재사(才士)로만 인정하였는데, 그가 함경도 순무사가 되어서는 모든 하는 일이 시의(時宜)에 맞고 또 원대한 계획이 있으니, 비로소 그에게 세상을 다스릴 만한 재주도 있음을 알았다.
○ 근세에 와서 규수(閨秀)로는 허씨(許氏 김성립(金誠立)의 아내로, 허엽(許曄)의 딸, 허난설헌 1563-1589)가 제일 뛰어났고, 충의(忠儀) 이봉(李逢)의 서녀도 시를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내 친구 조백옥(1544-1595 趙伯玉 원(瑗))이 데리고 살았다.
기축년(1589)에 내가 새로 상주(尙州)에 부임했을 때 백옥은 성주 목사에서 갈려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라, 관사에서 자고 가게 되었다. 이때 나는 백옥과 함께 그의 첩이 묵고 있는 곳에 술자리를 베풀었더니 백옥은 그 첩에게 시 한 구를 지어서 나에게 주라고 권하자, 이는 즉석에서 입으로 부르며 백옥에게 대신 쓰게 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낙양의 재주 있는 사람 진작 부르질 않고 / 洛陽才子何遲召
상담부 지어 굴원을 조상하라 하나 / 作賦湘潭弔屈原
손으로 역린을 잡은 것은 위태로운 일인데 / 手扮逆鱗危此道
회양에 편히 누운 건 역시 임의 은혜라네 / 淮陽高臥亦君恩
그는 시를 읊고 생각하는 동안에 손으로 백첩선(白疊扇)을 부치면서 때로는 입술을 가리기도 하는데, 그 목소리는 맑고 처절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그 첩의 호는 옥봉( ? -1590년 이후 玉峯)이라고 한다.
○ 생원ㆍ진사에 장원한 자에 대해서는 같이 급제한 사람들이 매우 지극히 공경하여 보기만 하면 반드시 나아가서 절하고 감히 나란히 걷지도 못하며 나란히 앉지도 못한다.
방(榜)을 내던 이튿날 모두 명함을 드리고, 방방(放榜)한 이튿날에는 생원에 장원한 사람의 집에 또 그 이튿날엔 진사에 장원한 집에 함께 나아가 모시고 가서 사은(謝恩) 알성(謁聖)의 예를 행하였다. 문과와 무과도 모두 그러하였다.
수십 년 동안 성균관에서 신ㆍ구방(新舊榜)을 파한 뒤에는 나이대로 앉아 비록 장원이라도 나이가 적으면 방하(榜下)에 앉게 되자 공경하는 예가 점점 소해져서 혼동되어 등급이 없기에 이르러 2백 년 동안 돈독하고 순후한 풍속이 모두 없어져 버렸으니, 아까운 일이다. 아비의 동년(同年)도 장원처럼 공경했는데, 이런 일로 해서 역시 폐해졌다가, 난리 뒤에 와서는 아주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