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진(1556)정사(1557)록(丙辰丁巳錄)
임보신(任輔臣 ?-1558) 찬(撰)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필중(弼仲), 호는 포초(圃樵). 증 이조판서 한(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겸(由謙)이고, 아버지는 추(樞)이며, 어머니는 남효온(南孝溫)의 딸이다. 익양군 회(益陽君懷)의 사위이다. 1544년(중종 3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경(典經)·저작·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거쳐, 1551년(명종 6) 교리를 지냈다.
1547년부터 3년 동안 이조좌랑을 역임한 뒤 1551년 수안군수를 거쳐, 강원도·전라도의 암행어사로 나갔다. 1554년 장악원정·승문원판교 등을 거쳐, 1557년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익양군의 사위라는 이유로 비변사관리로 등용하려 하자 이를 거절하였고, 경연석상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소학』의 보급 및 실천을 주장하였으며,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종실에 불교진흥정책을 지원하도록 명하였을 때 이에 반대하여 문정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 중종(中宗) 신묘년에 김안로(1481-1537 金安老)가 귀양살이에서 돌아오자 먼저 이복고(李復古 이언적(李彦廸))ㆍ박언주(朴彦冑 박소) 등을 몰아내고, 정용(靜容) 임권(任權)도 배척을 받아 물러났다. 이는 곧은 말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꺼려서 그렇게 한 것이다. 정유년에 김안로가 복죄한 뒤로는 여러 어진 사람들이 차차 등용되었다. 정용이 일찍이 연석상에서 아뢰기를, “김안로가 조정에 있을 적에 소인의 무리들이 당을 지어 악한 짓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오나 전하께서도 그들과 어울려 악한 일을 하는 것을 내버려두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였더니, 중종은 대답하기를, “내가 그 책망을 면할 길이 없도다.” 하였다. 장하도다. 임금의 이 말씀이야말로 참으로 만대 제왕의 본보기이다. 남의 곧은 말을 받아들이어 자신의 죄로 돌리니, 이것은 한꺼번에 두 가지의 선(善)을 갖춘 것이라 하겠다. 임금으로서 만약 스스로 옳게 여기고 바른 말을 듣기 싫어한다면, 누가 말을 하여 화를 당하기를 즐거워하리오. 모난 것을 깎아서 둥글게 하고 바른 말을 못하고 그저 “예 예” 하기만 하게 만든다면, 그 기세를 꺾어 아첨만 하게 하여 차츰 그 세력을 이루어 위태롭고 망하는 데 이를 것이니, 어찌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는가.
○ 병신년 무렵에 어떤 사람이 갈원(葛院) 벽 위에 쓰기를,
뭇 소인들이 조정에 그득하여 태평이라 속이니 / 衆小盈朝誣太平
이 몸은 일찍 돌아가 밭갈기나 함이 합당하나 / 此身端合早歸耕
감히 임금을 생각하여 가벼이 물러나지도 못하니 / 愛君不敢輕休退
항아리 속에서 모기들 우는 소리 도무지 우습구나 / 都笑蛇虻甕裏鳴
하였다. ※항아리속의 모기들은 조정의 관리들을 의미한다.
이 글의 뜻을 보건대 반드시 조정에서 뜻을 같이하지 않던 자가 지은 것이 분명하다. 바야흐로 삼흉(三兇)이 정권을 휘두를 때에 참혹한 형벌과 준엄한 법으로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다스려, 심지어 머리 깎은 중들까지도 그 해독을 입어서, 온 나라가 두려워하여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발도 마음대로 못 놀려서, 감히 의논하지도 못했으므로 이런 사람이 있어 감히 불평을 크게 써놓았으니, 인심을 속일 수 없음이 이와 같다. 이듬해 정유년에 삼흉들은 귀양가서 죽었다. 삼흉은 김안로(金安老)ㆍ채무택(蔡無澤)ㆍ허항(許沆)을 일컫는다.
○ 추강(1454-1492 秋江 남효온)은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일찍이 청한자(淸寒子)를 스승으로 섬기고 세상 밖에서 놀아 세속에 관계하지 않았다. 18세 때에 성종에게 글을 올려 소릉(昭陵)의 복위를 청하였다. 매양 세상 일에 비분하여 가끔 무악(毋岳)에 올라가서 통곡하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과격한 논조로 바른 말을 하여 비록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일이 있어도 꺼림이 없었다. 대유(大猷 김굉필)와, 백욱(伯勗 정여창)이 경계하고 말렸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두 분이 성리학을 강론하고 지조와 행실을 《소학》으로써 다스렸으며, 실질을 숭상하는 것이 추강과는 달랐으나 교분은 서로 두터웠으니, 이야말로 이른바 지초(芝草)와 난초가 서로 향기가 같다는 것이다.
○ 우리 조정의 어진 재상으로서는 황희(黃喜 1363-1452)와 허조(許稠 1369-1439)를 으뜸으로 삼는다. 세종을 보좌하여 나라를 다스린 업적은 국사에 실려 있으므로 사람마다 모두 아는 바이다. 다만 두 분이 모두 전조에 등용된 사람이므로,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를 부족하게 여겼다.
○ 성종 때의 조지서(造紙署 종이 만드는 관청)의 별좌(別坐) 아무개가 관청의 종이 한 장을 그의 정부(情婦)에게 주었으므로 장물죄로 옥에 가두었다. 수년 후에 임금이 문득 생각하기를 종이 한 장을 훔친 죄는 가벼운데 종신 금고의 법은 너무 무겁다 하여 놓아주려고, “송(宋) 아무개가 이제는 그 계집을 버렸느냐.”고 물었더니, 좌우가 버리지 않았다고 대답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한 계집으로 말미암아 누명을 썼으니, 사람다운 마음을 가진 자라면 마땅히 뉘우쳐 빨리 고쳐야 할 것인데, 아직도 그렇지 못하다 하니 이는 허물을 고치는 데 용감하지 못한 자로다. 어찌 기용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용서하지 않았다.”
○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은 성품이 단순하고 강직하여 용납하는 일이 적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은 그의 천성에서 우러나왔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고 여러번 쫓겨났으나 끝내 고치지 않았다. 정승 심정(沈貞 1471-1531)이 양천(陽川 김포)에 소요정(逍遙亭)을 짓고 두루 당대 작가들의 글을 청하여 현판에 썼다. 공의,
산허리에는 잔치상 널려 있고 / 半山排案俎
가을 골짝에는 그릇 소리 시끄럽도다 / 秋壑閣樽盂
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심 정승이 자기를 비방한 것임을 알고 마침내 빼어버렸다.
○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의 자는 사훈(士勛)인데, 근대의 명재상이다. 중종 때에 김안로가 정권을 잡게 되자 공은 영남으로 귀양갔다. 정승 이행(李荇)의 자는 택지(擇之)인데, 그도 또한 관서(關西)로 귀양갔다. 김안로가 두 사람에게 글월을 보내어, “조정의 뜻을 보건대, 반드시 대우해 줄 것 같지 않으니 차라리 일찌감치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니, 이택지는 폭음(暴飮)하다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으나,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조정에서 늙은 나에게 죄가 있다고 하여 하루아침에 죽인다면 마땅히 국법을 받아 일벌백계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는 것인데, 안로가 어찌 나를 죽인단 말이냐.” 하며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김안로가 패하자 공을 서울로 불러 올리게 되었다. 종들이 조보(朝報 오늘날의 관보)를 가지고 급히 달려가 밤중에 귀양지에 당도했는데, 발이 부르트고 입이 말라 쓰러진 채 말을 못하므로, 공의 자제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주머니 속을 뒤져보니, 길한 소식이었다. 곧 공에게 아뢰었더니, “그러냐.” 하고는, 코를 골면서 달게 자고 이튿날 아침에서야 그 글을 보았다.
○ 찬성 이복고(李復古 1491-1553 언적)는 본래 청렴하고 가난하였다. 정미년에 귀양가 있을 때에 마침 추운 겨울을 당하였는데, 옷이 얇아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동지(同知) 장세호(張世豪)가 연경(燕京)에 갔다 돌아오는 도중에 그를 만났는데,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이 비록 조정에 죄를 지었으나 귀양살이에 그치는 것이지 그를 어찌 얼어 죽게야 하겠는가.” 하면서 여우털 갖옷을 벗어주었더니, 공은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그때 죽거나 귀양간 사람들은 모두 이복고의 죄가 왕실에 관계되었기 때문에 친척이나 친구 사이라도 감히 서로 찾아보지 못하고, 화가 자기에게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할 뿐이었는데, 장공은 무관으로서 공과 안면도 없는 터인데, 능히 옛 사람도 못하였던 어려운 일을 하였으므로, 이복고도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여 그의 아름다운 처사를 이루게 한 것이다.
○ 조효직(1482-1519 광조)이 처음에 호남으로 귀양갔다가 이윽고 사사(賜死)되었는데, 고사에 의하면 한 나라의 재상에게 죽음을 내림에 있어 어보(御寶)도 없이 다만 왕명만으로 시행하였다고 한다. 금오랑(金吾郞)이 적소에 와서 교지를 펴보이니, 조효직은 말하기를, “국가에서 대신을 이렇게 허술하게 대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폐단이 장차 간신이 득세하였을 때에 그가 미워하는 사람은 마음대로 죽이게 할 것이다.” 하고, 한 마디 임금에게 아뢰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목욕한 후 의대(衣帶)를 정제하고 조용히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39세였다. 눌재 박창세(朴昌世 박상(朴祥1474-1530)가 시를 지어 애도하기를,
지난날의 영화를 말하지 말라 / 不謂南堂舊紫衣
수레가 시름없이 고향으로 돌아오네 / 牛車草草故鄕歸
언젠가 서로 만날 저승길 / 他年地下相逢處
인간 만사 그르다고 말하지 말라 / 莫話人間萬事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