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부계기문(김시양)

청담(靑潭) 2017. 8. 9. 23:44

 

 

부계기문(涪溪記聞)

 

김시양 金時讓 (1581∼1643)

 

1605년(선조 3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1607년 주서(注書)가 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예조좌랑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했으며, 1610년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는데,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정랑·병조정랑·수찬(修撰)·교리(校理)를 역임,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25년(인조 3) 응교(應敎)가 되어 문학을 겸했고, 이듬해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산릉역(山陵役)에 공로가 많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의정부의 의논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한성판윤을 거쳐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가 9월에 다시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6년 청백리에 뽑혀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년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할 때 대제학 이식(李植)과 총재관(總裁官) 홍서봉(洪瑞鳳)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實錄改修)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다.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하담집(荷潭集)』·『부계기문(涪溪記聞)』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부계(涪溪)는 즉 종성(鐘城)의 다른 이름으로, 공이 광해 임자년(1612)에 귀양살이하였음.

 

이청련(李靑蓮 : 이후백 1520-1578)은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그의 집에서 사사로이 찾아오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고, 비록 그 명망이 백집사(百執事 : 온갖 벼슬아치)가 되기에 알맞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혹 사사로이 부탁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끊어버리니, 인재를 아끼는 이들은 그런 처사를 대부분 병통으로 여겼다.

대부분 병통으로 여긴 것은 진실로 옳지만, 오직 돈이면 좋다고 하여 문 앞이 시장을 이루게 하는 자들과 비교한다면 그 차이는 현격한 것이다.

 

●소재(蘇齋) 노수신(蘆守愼 : 1515-1590)이 진도(珍島)에 귀양살이할 때에 수령이 당시 재상들의 눈치를 살펴서 여러 모로 곤욕을 보여,

“죄인이 어찌 쌀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면서, 산군(山郡)에서 기장쌀을 사다가 공급하였다. 어느 달 밝은 밤에 소재가 아이종을 시켜서 피리를 불게 하였더니, 수령이 말하기를,

“죄인이 어찌 즐길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고는, 그 종을 옥에 가두었다. 선조 때에 소재가 크게 등용되니, 그 사람은 드디어 때를 만나지 못하고 한평생을 마쳤다.

나는 귀양살이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 시사(時事)는 날로 더욱 심해져서 수령이 된 자는 모두 나를 모욕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고 있다. 식량의 공급이 항상 끊어지니 기장쌀인들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또한 세태가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저작(著作) 김성립(金誠立 : 1562-1592)의 아내는 허균(許筠 : 1569-1618)의 누나(허난설헌 : 1563-1589)인데, 문장을 잘 지었다. 일찍 죽으니 허균이 그의 유고(遺稿)를 수집하여 제목을 《난설헌집(蘭雪軒集)》이라고 하고, 중국 사람에게 발문(跋文)을 받기까지 하여 그 전함을 빛나게 하였다.

어떤 사람은 ‘거기에는 남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 많다.’고 하였으나 나는 본래부터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내가 종성으로 귀양오게 되어 《명시고취(明詩鼓吹)》를 구해 보니, 허씨의 시집 속에 있는,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 눈에 떨치니 봄 구름 따사롭고 / 瑤琴振雪春雲暖

패옥이 바람에 울리는데 밤 달이 차가워라 / 環珮鳴風夜月寒

라고 한 율시(律詩) 여덟 구절이 《고취(鼓吹)》에 실려 있는데, 바로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연간의 시인 오세충(吳世忠)의 작품이다.

나는 이에 비로소 어떤 사람이 한 말을 믿게 되었다. 아, 중국 사람의 작품을 절취하여 중국 사람의 눈을 속이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남의 물건을 훔쳐다가 도로 그 사람에게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참찬 백인걸(白仁傑 : 1497-1579)은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으로서 창평 현령(昌平縣令)이 되었다.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 날마다 잔치를 베풀어서 드디어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나무람을 듣게 되자, 감사 최보한(崔輔漢)이 파면시켰다. 그런데 최보한이 일찍이 백인걸에게 탄핵을 당했으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그 보복이라고 말하였다.

인종(仁宗)총에 최보한은 국상(國喪) 때에 기생을 끼고 놀았다고 하여 죄를 받고 파면되었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대사령(大赦令)을 내리니, 최보한이 다시 채용되었다. 대간이 그를 탄핵하려고 하니, 백인걸이 그때 헌납으로 있었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고 하며 말하기를,

“최보한이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것은 소문에서 나온 말이니,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군자는 너무 심한 처사를 하지 않는 것이니, 어찌 다시 사람을 태평 시대에 금고(禁錮)시킬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여, 최보한이 드디어 탄핵을 면하였다.

최보한은 백인걸이 묵은 원한을 마음껏 갚을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백인걸이 태연하게 마음에 두지 않으니, 최보한은 매우 고맙게 여겼다.

 

●우리나라의 국사(國史)는 대부분이 다 그때에 득세(得勢)한 자가 편찬한 것이어서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 많다. 그러니 그 말이 반드시 다 공정하지는 않으며, 야사(野史)는 금령(禁令)이 있고, 풍속 또한 입언(立言:썩지 않을 중요한 언론이나 학술을 수립하는 것)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선현의 사업이 두드러지게 사람들의 이목에 드러나는 것이 있어도 겨우 수십 년을 지나서 사람들의 이목이 미치지 못하게 되면 찾아볼 길이 없어진다.

 

●북경을 가는 사신이 강을 건널 때면 으레 어사(御史)가 금지 물품을 가진 것이 없는가를 수색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명종 때에 사문 김덕곤(金德鵾)은 강직한 사람이었다. 평사(評事)로서 어사 일을 겸임하였는데, 홀로 어사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역관이 궁내의 물건이라고 칭탁하고 금지 물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조금도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빛이 없었다. 김덕곤이 강개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수색은 무엇 때문에 한단 말인가?”

하고, 모두 모아서 불태워 버렸다. 역관이 와서 호소하니, 궁중에서 모두 분하게 여겨 이를 갈았다. 사문 홍인경(洪仁慶)이 듣고 탄복하여 그를 천관랑(天官郞 이조의 낭관(郞官))으로 추천하니, 상이 몹시 성내어 이르기를,

“이처럼 미친 자를 누가 추천하는가?”

라고 하고, 홍인경을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김덕곤 또한 일찍 죽어서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였다.

 

●영평군(鈴平君) 윤사분(尹士昐 :1401-1471)은 정희대비(貞熹大妃 세조비(世祖妃))의 아우이다. 성종 때에 북경에 표문(表文)을 받들고 사신으로 가는데, 참판 권경우(權景祐)가 서장관이 되었다. 사분이 대비의 세력을 믿고 재물을 탐한다는 비방을 들었다. 돌아와 의주에 도착하였을 때에 권공(權公)이 그 재물을 다 가져다가 상께 아뢰었다. 성종이 즉시 사분을 형리(刑吏)에게 내리고, 경우를 발탁하여 종관(從官)을 삼으니, 동조(東朝 정희대비)에서도 감히 그의 목숨을 구해주기를 요구하지 못하였다. 사분은 근심하다가 죽었다.

경우는 이때부터 날로 총애를 입었다. 윤씨(尹氏 연산(燕山)의 생모)가 폐위되어 사제(私第)에 거처하니, 경우가 상소하기를,

“아들이 세자로 있는데 어머니가 여염집에 섞여 살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더니, 성종이 크게 성내어 그가 후일의 은혜를 바란다고 하여 국문하기를 명하였다. 경우가 사리를 들어서 항변(抗辯)하여 조금도 굴복하거나 동요함이 없으니, 상은 위엄을 거두었다.

 

●선조 때에 권공 덕여(權公德輿)가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사문 이승양(李承楊)이 서장관이 되었다. 늙어서 위풍이 없었으므로 역관들이 그를 업신여기고 금지 물품을 많이 사서 요동(遼東)에 도착하니, 마중 나온 의주 사람들이 수송을 곤란히 여겨 많이 서장관의 실수라고 드러내놓고 말하여 그로 하여금 듣게 하였다. 이승양은 성내어 압록강 가에 닿았을 때에 일행의 물건을 모두 가져다가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권공(權公)이 말하기를,

“이미 싣고 왔으니 너무 심하게 하지 마시오.”

라고 하였으나, 이승양이 듣지 않으니, 사람들은 다 그의 처사가 지나치다고 하였다. 그때 이오리(李梧里 이원익(李元翼)의 호)가 질정관(質正官)으로 동행하였으므로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지금은 서장관이 서적을 칭탁하고 스스로 상인 노릇을 하여 비록 비방하는 물의는 듣지만, 어찌 감히 이와 같은 처사야 하겠는가. 이는 이른바 허물을 보면 어짊을 안다는 것이다.

 

김안로(金安老 : 1481-1537)가 정권을 잡았을 때에 한강 가에 별장을 지었는데, 당시에 그의 사치함을 대단히 말하였다. 안로의 조를 논하는 자는 반드시 이 정자를 즐겨 말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정승상(鄭丞相 : 정유길)은 그 곁에 정자를 지으니 제작의 사치함과 정원의 아름다움이 김안로의 정자보다 백배나 더하였는데도, 사람들은 나무라지 않으니, 아마 하류에는 모든 나쁜 것이 다 돌아가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치하고 검소한 것이 세도(世道)의 더럽고 융성함에 따르는 것이어서 사람이 어길 수 없기 때문인가. 반드시 분변하는 자가 있으리라. 정씨는 즉 유길(惟吉)이다.

 

●지금은 재물이 없는 자는 비록 재주가 자기(子奇 : 춘추시대 제나라의 현인)같은 사람이라도 벼슬할 수 없다. 그러나 상하가 태연하여 그것이 잘못임을 알지 못하니,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성안공(成安公) 상진(尙震)은 검열(檢閱)에서 파직되어 돌아가는 길에 금천(衿川)의 언덕 위에서 말에게 먹이를 먹였다. 어떤 노인이 두 마리 소를 먹이고 있으므로 공이 물었다.

“두 마리 중에 어떤 소가 더 좋은가?”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세 번 물어도 끝내 대답이 없으므로, 공은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말에 올랐을 때에 노인이 수십 보를 뒤따라와서 비밀히 공에게 대답하기를,

“아까 묻는 것을 즉시 대답해 올리지 못한 것은 두 소가 노역(勞役)에 종사한 지가 여러 해가 되어 차마 하나를 지적하여 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은 작은 소가 더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은 말에서 내려 감사하면서 말하였다.

“노인께서는 숨은 군자(君子)이십니다. 나에게 처세법(處世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드디어 가슴에 새겨 잊지 않았다. 처음 벼슬에 나간 때부터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남에게 거스른 일이 없었다고 한다.

 

●기축년(1589)의 화에 대사간 이발(李潑 : 1544-1589)이 고문으로 죽으니, 친구 중에 감히 조문하는 자가 없었다. 부윤 허상(許鏛)만이 그 상(喪)을 주관하여 처리하면서 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일 또한 말세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남이(南怡 : 1441-1468)라는 이는 의산위(宜山尉) 남휘(南輝)의 아들로 태종의 외손이었다. 근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세조 때에 공이 있어서 차례를 뛰어넘어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예종(睿宗)은 그를 매우 꺼렸다. 어떤 사람이 그가 공주(公主)와 증(烝 : 손윗사람과 간통함)하였다고 고하여 하옥시키고, 이어 모반으로 다스려 죽였다. 바야흐로 남이가 국문을 받게 될 때에 강순(康純)이 영상으로 참여하였다. 남이가 강순이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말하니, 강순은 말하기를,

“신은 본래 편호(編戶 : 보통백성)로서 성상을 만나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사온데, 또 무엇을 얻고자 하여 남이의 음모에 가담하였겠습니까?”

라고 하니, 예종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남이가 다시 말하기를,

“전하께서 그의 간사한 말을 믿고 사면하신다면 어떻게 죄인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하자, 예종은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강순은 나이가 이미 80으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복하여 남이와 같이 참형을 받게 되었다. 그는 부르짖기를,

“남이야! 네가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나를 무함하느냐?”

하니, 남이가

“원통한 것은 나도 너와 같다. 네가 영상으로 나의 원통함을 알고도 한 마디 원해 주는 말이 없으니, 너도 원통하게 죽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말하매, 강순은 묵묵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김안로(金安老)는 정권을 마음대로 행하니 온 조정이 근심하였다. 참판 윤안인(尹安仁)은 곧 문정왕비(文定王妃)의 종부(從父)로, 비밀히 안로를 제거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비밀히 왕비에게 아뢰기를,

“안로가 왕비께 불리한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니, 왕비가 매우 두려워하여 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니, 상이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대답하기를,

“오래도록 좌우에서 모시다가 지금 폐위당할 것이므로 슬퍼합니다.”

하였다. 상이 매우 놀라서 그 까닭을 물으니, 안로의 음모를 아뢰었다.

상이 매우 성내어 즉시 안로를 베어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의 권세가 중한 것을 두려워하여 밀지(密旨)를 안인에게 주어서 일을 도모하게 하였다.

안인이 새벽에 대사헌 양연(梁淵)의 집에 가니, 빈객이 좌석에 가득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아침에 또 가고 저녁에 또 가니, 양연이 비로소 의아하게 생각하고 빈객들이 흩어지기를 기다려서 침실(寢室)로 인도해 들였다. 안인이 밀지를 보이니, 양연이 즉시 동료들을 거느리고 논핵하였다. 상이 선전관에게 명하여 군사를 풀어서 그의 집을 포위하고 체포하여 배소(配所)로 압송(押送)하게 하였다. 갈원(葛院)에 이르렀을 때에 사사(賜死)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안로를 총애하여 그의 집에 사소한 예식(禮式)만 있어도 반드시 선온(宣醞 : 임금이 신하에게 술을 하사함)하였는데, 이날은 안로의 아들 김지(金禔)를 장가보내려고 하여 빈객이 집에 가득하였다. 날이 저물었는데도 내온(內醞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이 내려오지 않으매, 안로가 마음으로 괴이하게 여기던 차에 갑자기 금부도사가 닥치니, 빈객들은 창황히 담을 넘어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안로가 포박되면서 김지에게 가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오늘을 당하여 남이 누가 우리와 혼인하겠느냐?”

라고 하였다.

안로가 젊었을 때에 중국의 점장이에게 운명을 점치게 하니, 점장이가 써서 주기를,

“더할 수 없는 부귀를 누리겠으나 갈(葛)에서 죽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 뜻을 알 수 없었는데, 갈원에 이르러 마침내 징험하게 되었다.

 

●박원종(朴元宗)ㆍ성희안(成希顔)ㆍ유순정(柳順汀) 등이 정난(靖難) 뒤에 서로 이어 정사를 보좌하니, 세상에서는 3대신(大臣)이라고 일컫는다.

중종은 그들을 상례(常例)와 달리 예우하였다. 그들이 조정에서 물러갈 적에는 일어났다가 문을 나간 뒤에야 자리에 돌아오곤 하였다. 그러나 3대신은 그 일을 알지 못하였다. 희안이 늙고 병들어서 하루는 궁중에서 물러나오는데, 의젓하게 걸어서 매우 태연스러운 모습으로 중문(中門)에 이르니, 문검(門檢)이 말하기를,

“상공(相公)께서는 상이 서 계신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어찌 그리도 걷는 것이 더디십니까?”

라고 하였다. 희안은 얼굴에 땀을 가득히 흘리면서 말하기를,

“늙은 사람이 죽을 바를 알지 못하겠소.”

라고 하였다.

 

●연산(燕山)이 들에서 사냥하는데, 그때 중종은 진산대군(晋山大君)으로서 호종(扈從)하였다. 사냥이 끝나자 연산은 준마(駿馬)를 타고 중종에게 말하기를,

“나는 흥인문(興仁門)으로 들어가고 너는 숭례문(崇禮門)으로 들어가는데, 뒤에 온 자는 마땅히 군법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중종이 매우 두려워하니, 영산군(寧山君)이 비밀히 중종에게 아뢰기를,

“근심할 것 없습니다. 나의 말이 승마(乘馬)보다 매우 날랩니다. 그러나 내가 아니면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고, 즉시 미복(微服) 차림으로 말고삐를 잡고 좇으니 그 달리는 것이 나는 듯하였다. 궐문(闕門)에 이르고 난 조금 뒤에 연산이 뒤따라 도착하였으므로 중종은 마침내 화를 면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영산군과 말은 다 중종을 위해서 때를 맞추어 나왔다’고 하였다. 영산군은 바로 중종의 서형(庶兄)이다. 세상의 칭찬을 받았는데 이옹(李顒)의 옥사에 연루되어 정국공신(靖國功臣)들의 해를 입었다.

 

●상락군(上洛君) 김공 시민(金公時敏 : 1554-1592)은 나의 종형이다. 젊을 때에 호방(豪放)하여 학문을 하지 않았다. 얼굴과 몸이 크고 건장하였으며 과장하고 허탄(虛誕)한 말을 잘 하여 비록 한 집안 사람이라도 능히 알아보지 못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뽑혀 들어가니, 정승 이헌국(李憲國)이 제조로 있으면서 유독 그를 그릇으로 여겼다. 여러 번 외직(外職)에 보임되었으나 번번이 군기시에 머물러두기를 청하곤 하였다.

신묘년에 진주 통판(晋州通判)이 되었는데, 진주는 영남의 큰 고을로서 본래부터 호족(豪族)이 많아서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이름이 났다. 공은 늦추거나 조임을 알맞게 하고 덕을 베풀고 위엄을 행하니, 아전은 단속되고 백성은 사모하여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넘쳤다.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났을 때 목사가 마침 죽으니, 공은 목사의 일을 대행하였다. 무기를 수리하고 성지(城池)를 수선하여 죽음을 바칠 계책을 하였다. 그때 군(郡)들은 마구 무너지고 대가(大駕)는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며, 적병이 횡행하는데도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되, 진주성만은 우뚝히 뛰어나 호남ㆍ영남의 성곽이 되었다. 조정에서 듣고 공을 발탁하여 목사로 삼았다. 공은 군사들과 고락을 같이하면서 함께 죽고 살기를 맹세하였다. 드디어 금산(金山)의 적을 깨뜨리고, 진해(鎭海)의 적장(賊將) 평소태(平少泰) 등을 사로잡아 행재(行在)에 송치하였다. 선조가 가상히 여겨 차례를 뛰어넘어 절도사를 제수하였다.

이해 겨울에 적이 군대를 모조리 이끌고 와서 포위하고는 높은 사다리를 놓거나 땅굴을 파는등, 온갖 공격의 방법을 다 썼다. 그러나 공이 이에 대응하기를 귀신같이 하니, 적이 문득 꺾이어 퇴각하였다. 안에는 정예병도 없고 밖에는 구원병도 없었건만, 공은 오직 충의(忠義)로써 군사를 격려하니 모두 죽기를 즐겨하면서 성가퀴로 올라갔다.

14일 밤낮을 지나는 동안 적을 무수히 살상하니, 적이 크게 패전하여 달아났다. 공이 유탄에 맞아 상처가 덧나서 미처 논상(論賞)도 하기 전에 죽으니 성안 남녀들의 울음 소리가 소울음 소리 같았다. 호남ㆍ영남의 인사들이 다 서로 조상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는 어떻게 할꼬?”

하였다. 괴산(槐山)의 선영(先塋)에 장사하는데 길이 호남을 경유하게 되었다. 선비들과 백성들이 다투어 상여를 붙들고 울며 말하였다.

“우리 공(公)이여! 우리 공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죽은 지 오래였을 것이오.”

진주가 재차 포위되었을 때에는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호남 절도사 최경회(崔慶會), 호서 절도사 황진(黃璡) 등의 군사 6만 명이 수비하니, 성세(聲勢)가 전에 비하여 10배나 되어 사람들이 모두들 지킬 수 있다고 하였으나 늙은 기녀(妓女) 한 사람만이 근심하니, 천일이 불러 물었다. 대답하기를,

“전일에는 군사의 수가 비록 적었으나 장수와 군졸이 서로 사랑하였으며, 호령이 한 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겼습니다. 지금은 군사에 통솔함이 없을 뿐더러 장수는 군사를 알지 못하고 군사들은 장수와 익숙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근심합니다.”

라고 하였다. 천일은 그것을 요망한 말이라고 하여 베어 죽였다. 며칠 뒤에 성이 함락되니 적이 전일의 패전을 분하게 여겨 드디어 그 성을 헐어 버리고 갔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동지(同知) 황윤길(黃允吉) 등을 따라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비굴함이 없는 꿋꿋한 태도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겁내는 일이 없다. 회답의 글을 받는 일이나 여러 가지 논의에 모두 힘껏 다투어 바로잡으니, 동행한 사람은 목을 움츠리고 적인(敵人)은 경탄하였다. 그 또한 목숨을 바쳐 힘쓴 군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는 말로 일컫는 것에 이르러서는 나는 부끄러워해야 할 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저 전대(專對 : 사신이 외국에 가서 의외의 질문에도 자유자재로 대처함. )라는 것은 어찌 요행(僥倖)이나 절목(節目)의 일을 가리킨 것이겠는가.

학봉이 돌아오니, 상이 적인의 실정을 물었다. 윤길 등은 다 적이 침입할 조짐이 있다고 말하니, 학봉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여 여러 천 마디 말로 깊이 윤길 등을 공격하고, 스스로 적의 실정을 자세히 살폈다고 말하였다. 다음해에 적이 전 국력을 기울여 가지고 침략하여 종묘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민생(民生)이 주륙 되는 데에 이르렀으니, 병화(兵禍)의 참혹함이 옛날부터 임진년과 같은 적은 없었다. 그가 요령을 얻지 못함이 이와 같다. 이것을 전대(專對)라고 함이 옳겠는가. 만약 한 고조(漢高祖) 때를 만났다면 전사십배(前使十輩 :한 나라 고조 7년에 흉노(匈奴)를 치고자 하여 사자(使者) 10인을 흉노에 보내었다. 흉노가 건장한 무사와 살찐 우마(牛馬)는 다 숨기고 노약(老弱)하고 수척한 마소만을 보였다. 10인의 사자가 돌아와서 다, “흉노는 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조가 다시 유경(劉敬)을 흉노에 사자로 보냈다. 돌아와 복명하기를, “흉노가 좋은 것을 보이지 않고 나쁜 것만을 내보이니 반드시 복병(伏兵)이 있을 것입니다. 흉노를 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러나 고조가 듣지 않고 군대를 거느리고 정벌의 길에 올랐다. 평성(平城)에 이르러 과연 적의 기병(奇兵)에게 포위되어 겨우 살아 돌아왔다. 고조는 드디어 먼저 사자로 보냈던 10인을 모두 베어 죽였다. )의 죽임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귀양살이하는 사람은 다 두려워서 벌벌 떨며 날을 보내고 있다. 옷이 겨우 갖추어지고 먹는 것이 겨우 배부르게 되더라도 수령된 자들이 다 헐뜯고 질책하여 손발도 움직일 수 없게 한다.

 

●첨중추(僉中樞) 김효원(金孝元 :1542-1590)은 젊어서 명성이 있었다. 윤원형(尹元衡)의 사위 안모(安某)와 교류하였다. 일찍이 안모를 윤원형의 집으로 찾아가니, 마침 청양(靑陽 청양부원군) 심의겸(沈義謙 : 1535-1587)도 있었다. 심의겸은 마음으로 그를 더럽게 여겼다.

김효원이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명론(名論)이 매우 중하였다. 이조 낭관을 뽑는 논의를 하는데, 여러 사람들은 다 김효원을 촉망(囑望)하였다. 심의겸은 참의로서 김효원의 전과(前過)를 끌어다가 저지하였다.

그 뒤에 김효원이 마침내 이조로 들어갔다. 청양의 아우 충겸(忠謙)을 뽐음이 마땅하다고 추천하는 사람이 있었다. 김효원은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조가 어찌 외척(外戚)의 집안 물건이기에 심씨의 가문에 반드시 있어야 한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이는 청양은 인순왕비(仁順王妃)의 오빠이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조정이 드디어 당(黨)으로 나뉘어져 심의겸을 편드는 자를 서인(西人), 김효원을 편드는 자를 동인(東人)이라고 하였다. 서로 배척하고 끌어들여 조정이 조용하지 않으니, 유식한 사람은 다 근심하였다.

율곡 이이는 양쪽을 다 내쫓아버리자는 논을 힘써 주장하였다. 심의겸은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고, 김효원은 부령 부사(富寧府使)가 되니, 율곡이 소를 올려,

“서로 거리가 같지 않으니, 사람들이 마음을 심복시키기 어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김효원을 삼척(三陟)으로 옮기고, 심의겸을 완산윤(完山尹 전주 부윤)으로 내보냈다

율곡이 처음에는 양쪽 사이를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는 그 자신이 서인의 영수(領袖)가 됨을 면치 못하였다.

 

율곡(1536-1584)은 10여 세에 문장이 이미 성숙하여 높은 명망이 있었다. 아버지가 첩에게 빠져서 아버지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중이 되어 정처없이 떠도니, 법명을 의암(義菴)이라고 하였다. 중들이 그를 존경하여 생불(生佛)이라고 하면서 죽도자(竹兜子 대나무로 만든 가마)로 어깨에 메고 다녔다.

나이 20세가 되어서 머리를 기르고 과거에 응시하여 갑자년의 진사시(進士試)와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좋은 벼슬을 역임하고 선조의 지우(知遇)를 받아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당시 유림의 영수가 되었으니,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깎아내려 돌아보지 않았다.

처음에 생원으로서 성균관에 나아가 공자를 뵈려고 하니 통례(通禮) 민복(閔福)이 장의(掌議)로서 그를 중이라고 흠을 잡고 허락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지니 같이 급제한 사람들은 다 얼굴빛이 변하였으나, 공은 신색(神色)이 태연하여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유서애(1542-1607)는 소시적부터 문장과 학행(學行)이 당시의 추앙을 받았다. 비록 오랫 동안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었으나 청빈(淸貧)하기가 한미(寒微)한 선비와 같았다. 정치하는 것이 공평하고 밝으니,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움으로 벼슬을 구하지 못하였다.

임진년의 큰 난리 뒤에 공은 영상으로서 국정을 담당하여 쉴사이 없이 부지런히 경영하면서 마음을 태우고 정성을 다하였다. 모든 국가에 이익이 될 만한 일이면 남의 말은 돌아보지 않았다. 도감(都監)을 창립(創立)하고, 군적(軍籍)을 통융(通融)하게 하였으며, 공안(貢案)을 개정하여 지금까지도 혜택을 입게 하였다. 악한 것을 제거하고 착한 것을 권장하여 차츰 형적을 두게 되더니, 마침내 이것으로 간인(奸人)의 참소를 입고 조정을 떠나 안동(安東)의 옛집으로 돌아가서 10년 동안 벼슬하지 않고 지내다가 죽으니, 조야가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성품이 겸손하고 언어가 온화하고 공손하여 남의 앞에서 얼굴빛이 변하면서 놀라는 일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골경(骨鯁 : 강직하여 임금의 과실을 힘껏 간하는 충신)한 풍도가 적었으므로 구비된 군자가 되기를 기대하는 자는 한이 없지 않았다.

 

●적신(賊臣) 정여립(鄭汝立 : 1546-1589)은 전주(全州) 사람이다. 두루 보고 잘 기억하여 경전을 관통하였다. 논의는 높고 격렬하여 탁려풍발(踔厲風發 : 기세(氣勢)가 강성하여 당해낼 수 없는 것의 형용)하였다. 율곡이 당시에 추앙받는 것을 보고 몸을 바쳐 섬겨 제자의 예를 행하였다. ‘공자는 이미 익은 감이고, 율곡은 아직 익지 않은 감’ 이라는 주장을 하기까지 하였다.

율곡은 그의 재주를 기특하게 여겨 널리 칭찬하여 드디어 높은 벼슬에 오르고 명성이 매우 높았다.

율곡이 죽은 뒤에 여립은 당시의 논의가 점점 변하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그를 배반하고 이발(李潑) 형제에게 아첨해 붙었다. 하루는 상이 묻기를,

“이이는 어떠한 사람인가?”

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립은 여지없이 극구 그의 단점을 말하니, 상은 매우 미워하여 이르기를,

“여립은 지금의 형서(邢恕 : 송(宋) 나라 사람으로 정호(程顥)를 스승으로 섬기더니 배반하고, 사마광(司馬光)의 문객(門客)이 되더니 사마광을 무함하고, 장돈(章惇)에게 붙더니 곧 장돈을 배신하였다)이다.”

라고 하였다. 여립은 성난 눈으로 물러가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돌아갔다.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고향에서 무단(武斷 : 시골에서 지위와 세력 있는 사람이 남을 억지로 내리 누르는 짓을 하는 것)하면서 몰래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자살하였다.

 

●송강 정철(1536-1593)은 젊어서 청렴하고 정직한 것으로 이름이 났다. 율곡이 매우 그를 소중히 여겼으며, 총마어사(驄馬御史 : 후한(後漢) 때 환전(桓典)이 시어사(侍御使)가 되어서 항상 총마(驄馬)를 타고 다녔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환전은 엄정(嚴正)하였기 때문에 간인(奸人)은 항상 총마어사를 피하라고 하면서 두려워하였다고 한다)라는 이름이 있었다.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있은 뒤에, 이발에게 배척되어 오랫동안 한산한 직책에 있었다.

기축년 옥사가 일어나니, 정철은 우의정으로서 옥사를 다스렸는데, 매우 단련(鍛鍊)한다는 나무람이 있었다. 논의가 자기 비위에 불쾌한 자는 서로 잇따라 죄를 입으니, 사람들이 다 그를 탓하였다.

뒤에 함부로 추국(推鞫)한 죄로 강계에 귀양갔다가 임진년에 석방되어 돌아와서 죽으니, 대간이 그의 죄를 추론(追論)하여 관직을 삭탈하였다.

 

●기축년 옥사를 다스릴 적에 정송강은 영수가 되고, 백유함(白惟咸)ㆍ이춘영(李春英) 등은 그의 보좌가 되어 당론이 다른 자들을 쳐서 거의 다 없애버렸다. 김빙(金憑)이란 자는 전주 사람인데, 여립과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틈이 생긴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본래부터 풍현증(風胘症)이 있어서 날씨가 춥고 바람을 맞으면 문득 눈물이 흘렀다. 정여립을 육시할 때에 김빙도 백관(百官)의 반열 속에 있었는데, 마침 날씨가 차가와서 눈물이 흘렀다. 그는 일찍이 백유함과 틈이 있었다. 유함은 김빙이 슬피 운다고 하며 얽어서 죽였다. 이때부터 조야(朝野)가 두려워하여 바로 보지 못하였다.

 

●안시성주(安市城主 : 양만춘)는 조그마한 외로운 성으로 천자의 군대를 막아냈으니, 세상에 드문 책략가일 뿐만 아니라, 성에 올라가 절하고 하직하는데 말이 조용하여 예의의 바름을 얻었으니, 진실로 도(道)를 아는 군자이다. 아깝게도 역사에서 그의 이름을 잃었는데, 명나라 때에 이르러 《당서연의(唐書衍義)》에 그의 이름을 드러내어 양만춘(梁萬春)이라고 하였다. 어떤 책에서 찾아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안시성의 공적이 책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진실로 그의 이름이 잃어지지 않고 전하였더라면 《통감강목(通鑑綱目)》과 《동국사기(東國史記)》에 응당 모두 유실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수백 년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연의(衍義)》에 나오겠는가. 거의 믿을 수 없다.

 

이시애(李施愛 : ? -1467)가 반역할 때에 치밀하게 자기편을 배치하고 기일을 정하여 거사하니, 함흥 이북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장수와 관리들을 다 죽이고 호응하였다. 그가 가령 새로 일어난 날카로운 사기를 인하여 길게 몰아 재를 넘어왔다면 누가 방어할 수 있었겠는가.

시애가 이성(利城)에 이르러 현감의 아내를 차지하고는 미혹되어 환락에 빠져 남쪽으로 전진할 마음이 없게 되자,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해이해져서 드디어 멸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려 25일 만에 블로그에 간단한 글을 싣습니다. 일직이 이런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서예 초보자인 제가 서예대회에 출품할 작품을 쓰느라 미처 블로그에 마음을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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