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

상촌잡록(신흠)

청담(靑潭) 2017. 11. 29. 14:12

 

 

상촌잡록

 

신흠(申欽 : 1566~1628)

 

본관 평산(平山). 자 경숙(敬叔). 호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 시호 문정(文貞).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송기수(宋麒壽)의 딸이다. 어릴 때 송인수(宋麟壽)와 이제민(李濟民)에게 학문을 배웠다. 1585년 진사 ·생원시에 합격, 이듬해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으로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1593년 이조좌랑, 이듬해 이조정랑·사복시첨정으로 승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됨과 함께 동부승지에 올랐다. 그 후 형조참의·이조참의·예조참의·병조참의·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을 합찬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이어 예조참판·병조참판·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도승지·예문관제학·병조참판·도승지를 차례로 지냈다. 1604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한성판윤이 되었다.

1613년 계축화옥이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1616년 춘천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 즉위와 함께 예문관·홍문관대제학에 중용되었고, 같은 해 우의정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란하였으며,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그는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명을 떨쳤고,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선조의 신망을 받았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정주(程朱)학자로 이름이 높아,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진다. 1651년(효종2년)에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 ·편서로는 《상촌집》, 《야언(野言)》,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낙민루기(樂民樓記)》,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 《황화집령(皇華集令)》 등이 있다.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

 

권근(權近 1352-1409)은 고려 말년의 이름난 대부(大夫)이다. 그가 죄를 입은 것은 하나는 목은(牧隱) 때문이고, 하나는 도은(陶隱) 때문이니, 진실로 당시에 그가 유방(流放)당하는 것을 편안히 여겼다면 그 문장과 명론(名論)이 어찌 두 공(公)만 못했으리요. 그러나 계룡송(鷄龍頌) 한 편으로 갑자기 개국(開國)의 총신(寵臣)이 되었으니, 슬프도다! 그가 항복한 뒤에도 벼슬이 삼사(三司)에 지나지 못했고, 나이는 육순(六旬)도 도리지 못했으니 얻은 것이 적었다. 그때 권근을 기롱하는 시(詩)가 있었으니,

대낮에 양촌이 의리를 말하고 있으니 / 白晝陽村談義理

세간에 어느 대인들 어진 이가 없으리 / 世間何代更無賢

하였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오직 그 자손들이 계승하여 조정에 벼슬하는 이가 끊어지지 않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전보다 낫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양촌(陽村) 양촌”하며 마치 덕행(德行)이 있었던 것처럼 하니, 심하도다. 그 이름을 도둑질함이.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과 함께 목은(牧隱)에게 배워 재주와 명망이 서로 비슷했으나 향방(向方)이 달라서 정도전이 항상 불평을 품었다. 태조(太祖)가 등극하자 정도전이 권력을 쥔 신하가 되어 자기의 사인(私人) 황거정(黃居正)을 도은이 귀양가 있는 고을의 원으로 보내서 도은을 매질하여 죽이게 했으니, 소인(小人)의 마음씀이 심하기도 하도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정도전은 이방석(李芳碩)의 난리에 관여해서 자기의 몸은 두 동강이 났고, 함거정도 정도전의 문객(門客)이라 해서 태종대왕(太宗大王)의 미움을 받아 특별히 훈적(勳籍)이 삭제되어 지금까지도 서용되지 못하고 있다. 그 자손들이 임금께 말해서 원통함을 하소연하였으나 선비들의 의론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서 회복되지 못했다. 정도전이 받은 화는 이숭인보다 더 심했고, 이숭인의 이름은 후세까지 빛나니 천도(天道)가 어긋남이 없다. 이로써 후세의 소인들에게 경계할 것이로다.

 

○ 태헌(台軒)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임진난에 의리를 세웠는데, 태헌의 아들 고종후(高從厚)가 원수를 갚는다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또 진양성(晉陽城)이 함락되는 날 죽어 부자(父子)가 절개를 같이했다. 진(晉) 나라 변호(卞壺)의 집과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다. 고종후도 문장에 능하여 말에 기대어 격문(檄文)을 썼는데, 빛나는 문장이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가 제주(濟州)에 말을 모집하는 글에, “옷깃을 떨치고 일어날 자가 바다 밖에도 있음을 알겠으니, 채찍을 잡고 가서는 행여 천하에 말[馬]이 없다고 하지 말라.”하여, 말뜻이 사람을 놀래키고 대(對)를 맞춘 것이 자연스러워서 당시 사람들이 서로 전해 가며 외웠다. 그러나 아깝도다. 이러한 인재가 있었어도 마침내 버려지고 말았구나. 신묘년 봄에 고명(誥命)을 짓는 데 뽑혔다가 이내 대간(臺諫)의 비평을 받았으니, 아, 사람의 진퇴(進退)와 여탈(予奪)이 이와 같고서야 어찌 도적을 부르지 않으리오.

 

○ 임진란에 동래(東萊)의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이 성을 지키다가 죽었는데, 죽을 적에 자기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를,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를 당했고, 모든 고을은 와해(瓦解)되었으니, 군신(君臣)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의(恩誼)는 가볍습니다.”하여, 말이 늠연(凜然)했으니 비록 옛날 열사(烈士)라도 이보다 지날 수가 없다.

 

○...우리 나라 역대 임금의 문필로 말하면 문종(文宗)이 으뜸이고, 성종(成宗)ㆍ선조(宣祖)의 글도 출중해서 한 무제(漢武帝)나 당 태종(唐太宗)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문종이 지은 제극성문(祭棘城文)을 보면, “정이 없는 것을 음양(陰陽)이라 하고, 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한다.”하였으니, 비록 원숙한 유학자라도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리오. 종영(宗英 종실 중 우수한 자) 중에는 시 잘 짓는 자가 또한 많은데, 풍월정(風月亭 성종대왕의 형님 이정(李婷))이 제일이고, 성광자(醒狂子 이심원(李深源))와 서호주인(西湖主人 이총(李摠))이 그 다음이다.

 

○ 명종(明宗) 정미년에 정언각(鄭彦慤 : 1498-1556)이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어 양재역(良才驛)을 지나노라니 역 벽에 익명(匿名)으로 된 글이 붙어 있으므로 정언각이 이것을 도려다가 변고를 아뢰어 드디어 큰 옥사(獄事)를 만들어 일시의 명현(名賢)들이 죽음을 당하는 자가 서로 계속되었다. 이 공으로 해서 정언각은 부제학(副提學)을 제수받았는데, 어느 날 조정에 나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한 발이 등자(鐙子)에 걸린 채 그 말이 정언각을 끌고 거리로 달아나 밟히고 부딪쳐 뼈와 살과 얼굴이 뭉개져 죽으니, 사람들은 모두 그 응보(應報)가 빠른 것을 통쾌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 자손들은 창성해서 지금 바야흐로 세력이 혁혁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계해년 반정(反正)한 뒤에 그 자손 중에 높은 벼슬에 있는 자는 혹 죽임을 당하거나 혹 관노(官奴)가 되기도 하였다.

※양재역 벽서사건을 일으킨 해가 1547년이며 그가 부제학일 때이고, 말에서 떨어져 죽을 때가 1556년 경기감사 재직중일 때인데 저자가 착각하여 기술하고 있다.

 

○ 을사사화에 먼저 기미를 알고 행동한 자는 김하서(金河西)한 사람으로 너무도 우뚝하여 따라갈 수가 없고, 일에 당해서 꺾이지 않은 이는 찬성(贊成) 권발(權潑)과 참찬(參贊) 백인걸(白仁傑)이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는 나면서부터 남과 다른 재질이 있어 신동(神童)이라고 불렸다. 처음 벼슬하여 조정에 들어가 대절(大節)이 있더니, 을사년 화가 일어날 때에는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원하여 옥과 현감(玉果縣監)에 제수되었다. 그 뒤에는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서 생을 마쳤다.

 

○ 임진년 이후에 국가가 병난을 만나 임금이 파천하게 되자 적을 치는데 급해서 조그마한 공적을 세운 자도 모두 벼슬로 상을 주었으니 이로 인해서 문무(文武)의 두 길이 흐려졌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조정의 일이 더욱 많기 때문에 은혜를 바라고 상을 바라는 자가 못할 짓이 없어 크게는 변고를 알려서 훈적(勳籍)에 오르고 작게는 시세를 타서 벼락감투를 써서 배초(緋貂)와 금서(金犀)가 길에 가득하고 옥관자를 붙이고 은대(銀帶)를 찬 자가 거의 말로 잴 정도였다. 그리고 아직 미숙한 어린애 같은 것들이 참봉(參奉)ㆍ감역(監役)ㆍ찰방(察訪)이 되었는데, 그 계급을 물으면 모두 통훈대부(通訓大夫)라 한다. 오래지 않아서 외현(外縣)으로 원이 되어 나가면 좀도둑 하나라도 잡고 도랑 하나만 치고 차원(差員) 하나만 맡아도 이를 올려 써서 상대부(上大夫)의 열에 오른다. 심지어는 과거를 뵈어 선비를 뽑는 데도 모두 사정(私情)을 써서 혹 고관(考官)과 과거 보는 사람이 버젓이 서로 통하여 혹 남의 글을 빌려다가 쓰고서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고 이미 벼슬을 얻은 뒤에는 대성(臺省)과 관각(館閣)을 자기 고유의 것 같이 알며, 계급을 초월하고 차서를 건너뛰어도 남이 감히 말하지 못하고, 누가 물으면 이는 누구의 문하(門下)에서 나와서 무슨 일을 주장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보인다는 명령이 내리면 선비를 시험(試驗)하는 제목이 이미 외간(外間)에 알려져서 방(榜)을 걸기도 전에 과거 보는 사람이 합격하고 떨어지는 것이 먼저 정해진다. 그래서 수년 이래로 과거 보려는 선비가 글공부는 폐지하고 사람 교제하는 데에 힘쓰며, 이들과 같이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자는 모두 과거를 버리고 밖으로 나가 숨어 사는 자가 역시 많았다. 무인이 벼슬에 진출하는 데는 오로지 은화(銀貨)를 써서 위로 병사(兵使)ㆍ수사(水使)로부터 아래로 보장(堡將)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해진 값이 있고, 사람을 천거하고 벼슬을 제수하는 데도 모두 이런 방법을 썼으니 사람을 뽑는 길이 극도로 무너지고 어지러워졌다. 하물며 부형의 세력을 빙자하여 음관(蔭官)으로 나가는 자이겠는가. 조금만 힘이 있으면 누구나 공(公)이 되고 경(卿)이 되고 대부(大夫)가 되지 않는 자가 없어 의기양양(意氣揚揚)하며, 그 중에 유락(流落)해서 곤경에 처한 자는 경서(經書)를 껴안고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니, 이 역시 기운(氣運)이 이렇게 만든 것인가.

 

○ 이재(吏才 관청 사무를 잘 처리하는 것)는 바로 문서를 쓰는 하급 관리의 임무로 귀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재상으로 이재가 있는 자 또한 얻기 어렵다. 나는 젊어서부터 조정에 벼슬하여 낭료(郞僚)의 몸으로 거공(巨公)들 사이에 놀았는데, 오직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ㆍ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ㆍ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등 세 정승이 이재(吏才)에 뛰어났다. 바야흐로 임진ㆍ계사년에 왜적이 들끓어 중국 군사가 성 안에 가득할 때 격문이 여기저기에서 날아들어 처리할 문서가 산같이 쌓였는데, 서애는 도착하면 내가 글씨를 빨리 쓴다 해서 반드시 나에게 붓을 잡으라 하고, 입으로 글을 불러 계속하여 몇 편이고 글을 이루는데 빠르기가 풍우(風雨)와도 같아서 붓을 쉬지 않고 글을 쓰는데 그 글에 점 하나도 더하지 않고도 빛나게 문장을 이루었다. 비록 자주(咨奏)의 글이라도 이러해서 사신(詞臣)으로 명을 받고 글을 지어 바치는 자라도 여기에 가감을 할 수가 없었으니 참으로 기재(奇才)였다. 한음과 백사는 그 다음이다.

 

○ 4, 5년 이래로 무관(武官)과 음관(蔭官)의 크고 작은 벼슬자리 임명은 밖으로는 망(望)에 올리는 것과 안으로는 낙점(落點)을 받는 것까지 모두 뇌물을 쓰게 되니 시중의 장사꾼들이 그것을 주장해서 가령 무슨 벼슬을 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시중의 장사꾼이 먼저 은(銀) 얼마쯤을 내서 그 벼슬의 고하(高下)와 좋고 나쁨을 보고 더하고 덜해서 한편으로는 전관(銓官)에게 은(銀)을 바쳐서 망(望)에 올리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궁인(宮人)에게 은을 바쳐서 낙점을 받는 길을 만든다. 뇌물이 다 들어가고 나면 그 사람은 앉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얻어서 병사(兵使)나 수사(水使)가 되고자 하는 자는 병사나 수사가 되고, 목사(牧使)나 부사(府使)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목사나 부사가 되고 그 이하로 군(郡)ㆍ현(縣)ㆍ진(鎭)ㆍ보(堡)에 이르기까지 값을 주고서 제수를 받지 못하는 자는 없다. 이리하여 장사꾼과 그 사람이 전후로 부임하면 그 사람은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 내어 밤낮으로 모아서 뇌물로 쓴 값에 배를 주어 갚으니 1백 냥을 쓴 자는 2백 냥을 얻고 2백 냥을 쓴 자는 4백냥을 얻으며, 몇천 냥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벼슬을 얻은 자가 그 값을 갚기 전에 파면당하거나 혹 죽게 되면 장사꾼은 곧장 그 집에 찾아가서 갚게 하기 때문에 심지어는 집과 전장(田莊)과 종까지 모두 팔아서 갚는 일도 있다. 이정표(李廷彪)는 무반(武班) 중에서도 가장 무뢰배(無賴輩)였다. 무신년과 계축년 사이에 임해군(臨海君)과 대군(大君)을 죽일 때에 도와서 이로 인하여 뽑혀서 병사(兵使)에까지 올라갔고, 갑인년에 강화 부사(江華府使)로 있을 때에는 또 장사꾼을 시켜 은(銀) 여러 백 냥을 바쳐 통제사(統制使)가 되었다. 그러나 진소(鎭所)에 가자마자 독한 병에 걸려 죽으니 그 장사꾼이 손해 보고 분이 나서 전주(全州)에 있는 본가(本家)로 가서 받았다 하니 이것이 그 한 가지 예이다.

 

○ 십 수년 이래로 사대부(士大夫)들 사이에도 더러 풍수(風水)를 말해서 자기 부모를 이장(移葬)하는 자까지 있으니 식자들이 탄식했다. 임자년(1612) 연간에 도읍을 옮기자는 말을 임금께 아뢴 자가 있어 이것을 조정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성지(性智)와 시문용(施文用) 등이 있어 세 대궐을 짓자는 의논을 임금께 아뢰어 토목 공사가 크게 일어나 백성들이 도탄(塗炭)에 빠져 온 나라가 시끄러웠으니, 모든 일에는 모두 먼저 그 조짐이 없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일에 하려면 처음을 잘 하여야 하는 것이다. 성지는 중으로 처음에는 풍수로 사대부의 집에 출입하면서 산을 보아 자리를 잡아 주었는데, 마침내 임금에게 잘 뵈었다. 그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는데 요즈음 세 대궐 근처에 집 하나를 짓고 중을 기르므로 떠돌이 중들도 맘대로 출입하니 흡사 하나의 절처럼 되었다.

※시문용(施文用)은 임진년에 나온 중국 군사로 도피하고 돌아가지 않은 자이다. 정인홍(鄭仁弘)이 자기 친척집 누이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고, 시문용은 풍수와 점치는 것을 이야기하여 정인홍이 일동일정(一動一靜)을 모두 물어서 길흉(吉凶)을 점치더니, 마침내 임금에게 천거해서 토목 공사를 일으키는 계제가 되었다.

 

남사고(南師古 1509-1571)는 명종(明宗) 때 사람으로 관동(關東)에 살았다. 그는 풍수(風水)와 천문(天文)ㆍ복서(卜筮)ㆍ상법(相法)을 잘 알아서 모두 전해지지 않는 비결(祕訣)을 얻었으므로 말하면 반드시 맞았다. 명종 말년에 서울에 와 살면서 판서(判書) 권극례(權克禮)와 친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서 조정에 반드시 분당(分黨)이 생길 것이며, 또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왜변이 있을 것인데, 만일 진년(辰年)에 일어난다면 그래도 구할 수 있지만, 사년(巳年)에 일어난다면 구할 수가 없을 것이다.”하고, 또 일찍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사직동(社稷洞)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마땅히 태평성대의 임금이 그 동네에서 나올 것이다.”하였다. 김윤신(金潤身)과 함께 동교(東郊) 밖을 지나다가 태릉(泰陵)근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년에 동쪽으로 태산(泰山)을 봉할 것이다.”하니, 김윤신이 괴상히 여겨 다시 물으니, 남사고가 말하기를, “내년에 저절로 알 것이다.”하였다. 이렇게 말 한 것을 일일이 다 들 수 없다. 조정이 을해년부터 의론이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거의 50년이 되는데도 그치지 않으며, 왜병의 침입은 임진년에 시작되었으며, 선조(宣祖)가 사직동 잠저(社稷洞潛邸)에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으며, 태산(泰山)이란 곧 태릉을 말한 것으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그 이듬해에 돌아가서 태릉에 장사지냈다. 우리 나라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었으니 기이한 일이다.

 

○ ...선조 때의 역사 기록은 임진왜란에 사관(史官) 조존세(趙存世)ㆍ박정현(朴鼎賢)ㆍ임취정(任就正)ㆍ김선여(金善餘) 등이 불살라 없애고 도망가서 정묘년부터 신묘년까지 25년간의 사적이 캄캄하여 알 수가 없다.

  선조(宣祖)가 승하하자 실록(實錄)을 만드는데 나와 월사(月沙) 이공(李公)이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고, 백사(白沙) 이공(李公)이 총재관(摠裁官)이 되었다. 내가 백사에게 말하기를, “25년 동안의 사적을 그날그날의 일을 다 찾아서 기록하자면 비록 10년이 걸려도 물어서 완성할 수가 없을 것이오. 그때 명공 거경(名公巨卿)의 행적이 뚜렷하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있는 것이 많으니, 만일 이것만 기록해서 마치 열전(列傳)처럼 만든다면 당시의 사적이 모두 드러날 수 있을 것이며, 곤월(袞鉞)의 의(義)도 여기로 인해서 얻을 수 있을 것이오.”하니, 백사도 내 말을 옳게 여겨 나누어서 기록하려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계축년의 화가 일어나 나는 먼저 내쫓기고 백사도 점이 찍혔으며 월사도 파직당했다. 이에 권력을 잡은 사람이 실록을 쓰는데 한결같이 자기가 좋아하고 미워하는 대로 썼으니, 이야말로 나라가 망하기 전에 역사가 먼저 망하게 되었다.

 

조남명(曹南溟 : 조식 1501-1572)의 이름은 식(植)이고, 자는 건중(楗中)이다.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천길 절벽(絶壁)에 선 듯한 기상이 있었다. 숨어 살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문장을 짓는 데에도 기위(奇偉)하고 속되지 않았으니,

청컨대 천석 종을 보라 / 請看千石鐘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 非大叩無聲

만고의 천왕봉은 / 萬古天王峯

하늘이 울려도 오히려 울지 않는다 / 天鳴猶不鳴

는 것과 같은 시는 시운(詩韻)이 호장(豪壯)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부(自負)함도 얕지 않았다. 유독 괴이한 것은 그의 학문이 일차로 정인홍(鄭仁弘)에게 전해졌는데 정인홍이 허다한 형옥(刑獄)을 만들어 내어 백년의 기강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러나 양귀산(楊龜山)도 육당(陸棠 귀산(龜山)의 제자(弟子))에게 어찌하겠는가.

 

○ 아조(我朝)에 부자가 서로 이어서 정승이 된 자가 조종조(祖宗朝) 때에는 상당히 많았으나, 중세에는 전혀 없었다. 근대에는 홍언필(洪彦弼)ㆍ홍섬(洪暹)이 있고, 지금은 정유길(鄭惟吉)ㆍ정창연(鄭昌衍)과 윤두수(尹斗壽)ㆍ윤방(尹昉)이 있는데, 정유길은 바로 옛 정승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후손이다. 문익은 당시의 명상(名相)이었고, 정유길은 곧 그의 손자이며, 정창연은 그의 증손(曾孫)이다. 정창연의 종형(從兄) 역시 정승이 되어 사대(四代)에 정승 넷이 있었으니,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대동야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석담일기 2  (0) 2017.12.10
석담일기 1(이이)  (0) 2017.12.06
사우명행록(남효온)  (0) 2017.08.27
부계기문(김시양)  (0) 2017.08.09
기재잡기(박동량)  (0) 2017.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