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구비설화2
웅포면(곰개나루 이야기)
이갑세(지역유지 ․ 전 시의원 86세)
문 : 웅포(곰개나루)라는 곳이 포구로써 언제까지 번창했나요?
답 : 대체적으로 박정희 정권까지라고 볼 수 있으니 1970년대 초까지는 포구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겠어요.(1972년에 포구 폐쇄) 육로로 운송이 잘 되기 전까지는 주로 강을 통한 배가 운송수단이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옛날에는 군산이 중심이 아니고 이곳 조창이 있던 고창포가 중심이 된 것이지요. 그때는 고창포가 성시를 이룬 것이지요. 예전에 이곳 웅포에는 5개의 포구가 있었다고 해요. 곰개포, 해창포 고창포 등이지요.
이곳 금강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당의 소정방이가 백제로 진격할 때에 이곳 어래산에서 12일 동안 머무르며 준비해서 도강을 하여 진격했다고 해요.
역사적으로 기록이 별로 없고 제가 이곳에 정착해서 사람들이 ?객지 놈 객지 놈?이라 하니 오기가 생겨 도전하다보니 조금 알게 되었지요.
최무선 장군 기념행사를 군산에서 하고 있는데 제가 알기로는 전적지가 바로 여기에요. 어떤 기록을 보면 군산에서 서천에다가 전적지를 옮겨놓고 이곳 웅포 포구에다가 화포를 걸어 놓았다고 해요. 당시 화포의 유효사거리는 대략 800m라고 하는데요. 포구 중에서는 해창이 가장 수심이 깊었다고 해요. 지자체가 시작되고 조한용 시장 때 그때 해저탐사까지 했지만 지자체장이 바뀌면 사업이 이어지지를 않아요. 내가 재선하지 못하고 다음 시장이 채규정 시장인데 그 사람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 사업계획에서 탈락해버렸어요. 제가 아쉬움이 크지요.
문 : 그 해창은 지금 어디 쯤 인가요?
답 : 웅포에서 나포로 넘어가는 곳이지요. 해창은 이곳 일대에서 나는 곡물과 제주도 등에서 오는 해산물 등을 교환하던 곳이지요. 일제 강점기 때 만 해도 육로 교통이 불편하여 사람운송도 배를 이용하였어요. 군산에서 강경까지 해운환이라는 정기선이 왕래하였는데 어느 날 사고가 나서 인재들이 많이 죽었어요.
문 : 선생님 그럼 먼 얘기가 아니고 불과 수 십 년 전에 정기 연락선이 다녔다는 것인가요? 몇 년도까지 다닌 건가요?
답 : 그러면요. 불과 얼마 전까지 다녔지요.(군산-강경-공주 간 여객선이 1930년까지 운행되었고, 군산-강경간 37km 수로는 1960년대까지 운행되었다.) 60년대가 되면 경제가 좋아지고 화폐순환이 잘 되기 시작했는데 주로 노름꾼들이 경제 순환의 중심이 되었어요. 이 동네에서도 노름을 잘하는 사람 집에 가야 돈이 있었어요. 노름 잘하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지능도 높았어요. 그들은 돈도 모아서 주색잡기에 잘 빠지는데 내 고향인 개정에도 여자들이 있는 막걸리 집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 부류인 건달들이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쌀 몇 가마니라고 보관증을 써주면 그것이 바로 현금과 같이 쓰였어요. 그렇게 경제 순환이 되다가 마을단위농협이라는 것이 태동이 되었지요. 처음에는 마을단위조합이 생겼다가 유지들의 출자금을 받아 면단위 농협이 생겨났지요. 이 마을 갓점 이야기를 하자면 일정 때 천석꾼이 한 사람 있었어요.
그 사람이 아주 계수에 밝았대요. 1원을 빌려주면 이자까지 반드시 1원 1전을 받고 증서 써놓고 하루만 넘겨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는 거여요. 그러다보니 그 사람은 지주역할을 하고 나머지 마을 사람들이 다 그 사람의 노예가 된 거지요. 신학문 받은 사람이 없다보니 발령받은 면 직원 하나 없는 동네가 이 동네여요. 그러다보니 사회주의에 눈뜬 사람이 하나 있었는디 그 사람에 의해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었어요. 무엇인지도 모르고 도장을 다 찍었는디 나중에 보니 공산당으로 입회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6.25때 이 마을이 소위 웅포면 모스크바로 몇 달은 세력을 누렸겠지요.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면 고분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것인데요. 그렇게 해서 어렵게 살았는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용안출신인 최재승이라는 분이 국회위원이 되었는디 나와 인연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운이 좋아서인지 문광위원장을 하게 돼요. 제가 역사에 귀동냥을 하다 보니까 문화재에 관심을 가졌어요. 당시 어떤 고등학생이 발견(1982)한 것을 발굴해달라고 제가 문체부에 건의를 하였지요. 처음에는 박물관으로 하고자 했는디 나중에는 전시관(2004)으로 되었어요. 그래서 입점리 이 마을이 새로운 모습으로 태동이 되었지요. 대강 이해가 되셨는지요?
문 : 현재 진포싸움은 거의 군산사람들의 역사가 되어 있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 : 우리나라의 정치논리가 역사도 배제하곤 해요. 이곳 어래산성에는 군산시 서수면, 익산시 함라면과 웅포면의 기점이 있어요. 얼마 전에 슬로시티마을 선정을 신청하게 되어 웅포와 나포가 신청하였어요. 군산시는 어래산을 근거로 자료를 만들고 그 아래 있는 원불교 다도협회에서 후원을 하였어요. 웅포는 인재가 있어야지. 군산시에서는 이 시기에 최무선 장군 역사도 우리동네요 하면서 차지해버렸어요. 이한수 시장 때 금강개발을 위해 부여군과 군산시, 익산시, 서천군이 모여 200억 정도의 기금을 조성했다는 거여요. 그런데 자기 임기가 끝나니 난 모른다 이거예요. 그래서 제가 정헌율 현 시장이 후보일적에 첫 번째는 당신이 시장이 되면 그 기금의 전문과 계획에 대해 공개를 해달라고 요청하였지요. 두 번째는 1995년 익산군과 이리시가 합병할 적에 제가 반대운동을 했는데, 만일 합병하면 시청을 함열에 두는 것을 전제로 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가버렸어. 정치논리가 그런 것인 줄은 알지만 그러다보니 익산군은 오늘날 낙후되어 버렸지.
이제 금강을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웅포포구에 대해서 제가 아는데 까지 말씀 드릴려고 해요. 웅포에 8경이 있는데 그중 3경이 웅포 포구를 중심으로 한 명소예요. 그 8경이 어업을 하는 금강을 그린 것인데 폐항이 되어버리니 그 근거가 없어져버린 거여요. 이제 웅포라는 소재지에는 내놓을 것이 없지요. 다만 풍어를 빌었던 용왕사라는 곳이 있었어요. 그 용왕사가 사라호 태풍때 날라가 버렸어요. 사람들이 땔감으로 가져가 버리고 방치되었는데 제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게 있어 ?이거는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당시에 콘크리트 건물로 덕양정이라는 육각정이 있었는데 헌법개정 때(1980) 면단위 현상금을 걸었다고 해요. 투표율이 가장 높은 곳에 3천만을 주기로 했다는 거여요. 사실은 가장 못난 동네가 받게 되는 거지요. 그 때 웅포면이 현상금을 받았다는데 아침 6시에 시작된 투표가 9시 30분에 94.2%를 넘었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거든요. 아무커나 현상금을 받아가지고 거기다가 콘크리트로 건물을 지었어요. 용왕사 현판은 간곳이 없고 덕양정이라는 현판이 붙게 돼요.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오류를 범하게 되지요. 그 후 지방자치가 실시되면서 콘크리트를 헐고 다시 목조로 육각정을 짓게 되지요.(2005) 나는 덕양정을 부수고 목재로 지을 적에 용왕사를 복원한다는 목적이 있었어요. 그러나 나의 임기도 끝이 났기 때문에 목표대로 하지 못했어요. 덕양정은 원래 활터에요. 작년에 원래 활터에 5천만 원을 지원받아 덕양정을 짓고 덕양정 현판을 걸고, 용왕사 자리의 목조 육각정에는 용왕사라는 현판을 걸게 되었지요. 콘크리트 건물을 짓고 덕양정이라고 한 것은 유신잔재 잔머리다 하여 제가 그것을 부수고 머리에 띠 둘러가며 원래의 용왕사를 복원하려할 적에 ?객지놈인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며 우리 집에 소대변을 던지고 했어요. 작년에 문화관광과 신과장님의 도움이 컸지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지요.
문 : 웅포가 큰 포구였는데 당시 객주도 많이 있었습니까?
답 : 객주들이 많이 있었는데 50년대 말에 제가 여기 와서도 객주가 있었어요. 대를 못 잇게 되었지요. 자식들은 모두 외지로 나가고 나름대로 잘 살겠지요 그러나 이곳을 찾아보지는 않아요. 그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강변을 근거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문 : 만경강은 1924년부터 1938년까지 현재의 제방이 쌓아졌는데 이 금강은 제방이 언제 완성되었는가요? 거의 같은 시기였던 것 아닌가요?
답 : 1960년 윤보선대통령 때 만 해도 지금의 제방 모습이 아니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의 제방이 없었고 지방도로가 제방역할을 하고 있어서 비가 많이 오면 비가 들어와 싹 쓸고 갔어요. 하도 살기가 힘드니까 공무천이라는 분이 실사를 해가지고 설계를 하고 익산의 대륙건설 조갑도라는 분이 제방을 쌓았어요. 그래서 오늘날 웅포의 농토가 생긴 거지요.
문 :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50년대 말 이곳에 처음 이주해 오셨을 당시에는 이곳 웅포와 강 너머 서천 쪽의 큰 제방이 쌓아져 있지 않았다는 건가요?
답 : 그러믄요. 제가 서울에서 거지처럼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분이 이곳의 고수부지를 잘 점령, 이용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린 마음에 서울에 있는 상가도 팔고해서 고수부지를 사서 농사를 지으면 부자가 될 것 같았는데 거기서 망한 거여요. 다 떠내려가 버렸거든요. 제방이 없었을 때는 농토가 거의 없었어요. 우리 면에 25개 마을이 있는데요. 강쪽으로 있는 마을 두 개 마을을 제외하고 산 밑에 있는 마을들은 초근목피로 살았어요. 대청댐에서 물을 방류하면 이곳은 직사해버려요. 참외 주서 먹으러 다니고 그랬어요. 시악시들이 몸단장을 못하고 살았어요. 그렇게 살았어요. 지금 70대와 80대된 사람들은 당시 마을에서 남의 집 살고 생계가 힘들었어요. 추억얘기 하다보먼 밀물과 썰물이 교차되고 사리 때가 되면 물 반절 고기 반절이 되어 좀 능력 있는 사람들은 그물로 잡아서 먹고 그러면서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힘 있는 놈이 임자라고 고수부지에 흙으로 막고 농사짓다가 떠내려가기도 하고 그러면서 살았어요.
역사적으로 제가 조사해보니까 웅포에서는 노초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어요. 갈대지요. 강변에 무수히 많으니까 해방이후에 거의 90%가 그것을 엮어 먹고 살았어요. 일정때에는 일본놈들이 그것을 수납을 해갔어요. 만주를 점령한 이후로 이것으로 비행기를 만들어 비행장 주변에 위장하여 죽 늘어놓으면 미국은 그것을 폭격하고 그랬던가 봐요. 그래서 이곳에서는 밤낮으로 그것을 짜가지고 일본으로 가져갔어요. 그래서 이곳에서는 방석이랄지 무엇을 널고 하는 멍석 같은 것을 갈대로 짜는 주산지였더라고요.
농사는 못허고 어업이나 노초로 근근이 살다가 제방이 쌓아지고 난 후에는 이곳의 쌀이 익산에서는 질이 제일가요. 강의 퇴적물이 쌓인 땅이라 기름지니까 미질이 좋아요. 익산에서 음식 좀 한다는 식당에서는 이곳 쌀을 가져갔어요.
문 : 포구에 생선이 들어오면 그것들은 이곳에서 어디까지 조달이 되었던가요?
답 : 들어보면 대전권까지라고 하는데요. 객주들이 돈이 잘 도니까 이곳에서 매입하여 다른 배로 강경쪽으로 보내거나 달구지를 이용하여 다른 곳에 팔거나 또 염장하여 판매하니까 이곳에 염장문화가 아주 잘 발달했어요. 이후에는 트럭을 이용하여 실어 나르게 되었지요.
이곳에 칠목재가 있는데 역사적으로 기억할 만한 부분이 있어요. 지금의 길이 날 때에 10m이상 길을 낮추었어요. 내가 알기로는 소화 14년도(1939)에 길을 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생선을 가지고 저 높은 길을 가지고 가기가 힘들어요. 당시 부자들이 가진 것이 달구지여요. 그 다음이 자전차요. 자전차 짐차라는 것을 아시는가 모르겄네. 쌀 두가마도 실어요. 자전차에 싣고 저그만 넘어가면 되는디 힘이 드니까 어떤 지혜 있는 사람이 짐을 날라다주고 돈을 벌었다고 해요. 그러다보니 이 근방 총각들이 학교를 안 갔다고 해요.
그 옆에는 그 아이들 돈을 뺏기 위해서 구멍가게가 생겼다고 해요. 이곳이 그런 고을이고 역사적으로 저 고목나무가 증명을 하고 있어요.
문 : 제가 듣기로는 예전에는 웅포 넘어가는 칠목재가 무서운 곳이었다고 하는데요.
답 : 지금도 그래요. 귀신 많이 나온다고 하고요. 그곳에 공동묘지가 있거든요. 어업하는 사람들이 봉창에 돈 가지고 넘다가 불량한 사람들에게 뺏기고요. 지금 이런 말하면 큰일 날 소리지만 여기서 생활권이 황등이거든요. 황등 가는 길목 주변에 사는 사람들 90%가 그때말로 건달이에요. 그래서 거기 지나갈려면 깡패 때문에 못가니까 누구랑 같이 가야 했어요.
문 : 그럼 웅포에서 황등장을 갈려면 입점에서 칠목재 거쳐서 소롱골로 가서 와룡정으로 해서 금암리 거쳐서 갔군요.
답 : 그 놈의 소롱골 동네가 가장 나빴어요. ?야이 도둑놈들아 그때 느그덜이 우리 동네 닭 다잡아 먹었지??하고 지금 그 동네 사람들에게 그런 소리를 하면 ?나는 안 했어?그래요. 그런 에피소드가 있어요. 허허
문 : 원래 웅포에서 나가는 길은 함라산을 넘어서 함라로 가는 길이 있었지요?
답 : 산너머에서 웅포로 오는 구녁이 세 군데여요. 칠목재길이 하나고, 함라산을 넘어 바로 함라로 가는 산길이 하나고, 숭림사 앞을 지나 성당으로 가는 길이 하나여요. 그 세군데 만 막으면 웅포로 들어오지 못하지요.
신문화가 들어오고 신학문을 하기 위해서 산길을 넘어 함라중학교로 학교에 다녔지요. 지금 오륙십대들이 그랬어요. 90대되신 분들이 학교를 다닐 적에 웅포초등학교는 4년제였고 함라는 6년제였어요. 웅포에서 4년제를 마치면 함라로 전학가서 다녔어요. 함라초등학교를 다닌 유명한 분들이 네 분이 있는데 그 중 두 분은 팔봉에서 유학을 왔다고 해요. 조남조 전 의원은 자기 고향이 함라요. 그러다보니까 웅포 같은 데는 위정자가 하나도 없당게.
문 : 우리가 생각할 때는 웅포가 포구도 있고 해서 함라보다 더 잘살았을 것 같은데요?
답 : 몇 사람이지요. 객주들 외에는 거의 노예에요. 지게지고 그 사람들 일을 했지요. 그러고 배가 떠날 때는 내내 배에서 밥을 해먹는데 그래서 식량을 싣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이 땔감이어요. 이 근방에서 배에서 일을 못하는 사람들은 산에서 벌목을 했어요. 나무를 작게 장작으로 만들어서 사리대가 되어 배가 들어오면 그것을 지고 가서 물물교환을 했다고 그래요. 할머니나 아녀자들은 솔방울을 따서 팔았는디 그것은 배에서 밑불을 살리는데 아주 긴요했거든요. 그렇게 근근이 살았는데 양반이랍시고 강에는 안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객주를 제외한 거그 사람들은 배오기만 기달리고 있었어요.
객주가 있으면 선주가 있는데 이곳 사람들이 누구 편을 들겠어요? 짐을 셀 때에 ?하나요, 둘이요, 셋이요, 다섯이요, 일곱이요?해서 객주의 부를 늘려주었다고 해요.
문 : 웅포에 인구가 가장 많았을 때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답 : 4,700까지 되었다고 해요. 확실히는 잘 모르지만 내가 그렇게 들었어요.(기록에 의하면 1963년도에 8,283명임) 학교도 초등학교가 16학급이었고요. 오후 오전반이 있었고요. 웅포초등학교가 98년인가 되었는디(1908년 사립 보명학교로 개교) 간이학교라고 인가 없는 학교로 출발하였는디 그 근원을 살펴보면 기독교 문화가 들어와 신학문을 가르칠 적에 군산에 영명학교(1903년 설립)가 생겨서 이곳에서 5명 정도가 걸어서 군산까지 다녔다고 해요. 그분들이 영명학교에 다니고 나서 교회가 생기고 향교에서 공부 좀 하다가 학교가 세워졌어요.
덕양정이라고 하는 활궁터가 있는데 최무선 장군이 그곳에서 작전을 할 적에 거기에서 훈련을 했다고 그래요. 그곳에서도 앞선 사람들이 간이학교라는 것을 열었는디 그것이 웅포초등학교의 모체가 되었다고 해요. 웅포초등학교 교장도 아는가 모르겄어요. 이런 얘기들은 대부분 거짓말인디 이런 거짓말이라도 하는 사람이 없당게. 이런 얘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문 : 1960년대만 하더라도 당시의 노인들은 자신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므로 지역의 근대사를 잘 알고 있었지요. 지역의 근대사가 일찍부터 잘 조사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답 : 그 분들은 수기능력이 없어 기록이 없지요. 제가 예전에 어떤 할머니를 찾어 뵈었는데 김씨인가 하는 분인데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디 녹두장군의 이름도 모르는 분인디
?그전에 말이요. 난리가 났는데 그 사람들이 쳐들어 왔는디 여자들은 숨으라고 혀서요. 나는 숨을 디가 없어서 적구덕이 거기서 치를 덮어서 우리 어메가 숨으라고 혀서 거기서 가만히 있다가 내가 살어 났는디 그 사람들이 모두 때려 쳐부수고 혔는디 그 대장이 이 곰개를 와가지고 강이라서 오도가도 못허는디 그 대장이 배를 억지로 불러서 한산으로 떠났시오. 그런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어떤 장수라고 했시요?라고 하는 거여요.
아마도 전봉준 장군이 여기서 도강해서 산을 거쳐서 공주로 가서 잘못된, 그 얘기를 하는 것 같어요. 그 할머니가 다 죽게 생겼는디 경로당 같은데서 그런 얘기를 하면 저 늙은이가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헌다고 들 했어요.
문 : 여기 웅포하고 충청도하고 교류는 어느 정도 였을까요?
답 : 북촌사람들은 황등장이나 함열장을 가야 하는디 멀고, 강폭이 좁아서 나룻배를 이용해서 강을 건너가서 물물교환도 하고 그랬다고 해요. 그쪽 갓개장(현 부여군 양화면 소재지인 입포리)이라는 곳을 이쪽 사람들이 이용을 했어요. 내가 그곳을 가 봤는디 대여섯 사람이 그곳으로 출가를 혔어. 한산에서 시집온 사람도 있고요. 이쪽은 강이 넓으니까 별로 없어. 나는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혀. 북촌은 대붕암리와 쪼끔 내려오면 있는 맹산리 지역을 말하지요. 갓개는 양화면 소재지로 알고 있어요. 지금 웅포다리를 건너가면 그곳은 강변이라 하고 조금 올라가면 양화면 소재지이지요. 지금도 다리가 생겨서 ?갓개 가세?하고 넘어가서 막걸리 한잔 하고 오지요.
성당포구는 이 웅포에게는 비교가 안 되는 포구인디 언젠가 제가 사회생활을 할 적에 면장하고 성당에 가니 노파들 몇이서 강변 고목나무 아래에서 놀다가 얘기들을 해요. 인사를 허구선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어느 노파가 이런 말을 해요. 여그가 얼마나 훌륭하고 좋은데인지 아느냐고 얘기를 해요.
그래서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냐고 물으니 백제가 성세를 이룰 적에 이곳의 곡식을 진상을 해서 갔다 이거여요. 그 때 나락을 천변에서 말리는데 얼매나 정성이 지극했는지 참새가 와서 쪼아 먹으면 바로 죽었다 이거여.
여기가 그런 디라고 앞뒤도 안 맞는 자랑을 허는 거여. 한 20여 년 전 되네요. 그때 무당제를 거기서 했시오. 그러고 그 고장 출신 모국장급 인사가 그 고향마을에 4층 건물 올리고 체험마을을 만들고 혀서 웅포보다 더 발전하게 된 일이 있어요. 근디 웅포는 인재가 없어요. 제가 여기에 온 것은 50년 전이니까 1967년도쯤 되네요. 저는 그때까지는 주소도 없이 떠돌아다녔어요.
문 : 1960년대까지 강경까지 여객선이 다녔다는데 정기여객선이었다고 했지요?
답 : 저도 군산에서 그 배타고 여기 오고 그랬어요. 배를 타면 여기 저기 누어도 있고 좀 무질서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해운환이 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몇 죽었어요. 해운환 사고는 과적해서 났다고 해요. 부모들이 옷도 따듯하게 입혀서 보냈는디 그 두터운 옷 입고 애들이 빠져나올 수 있었겠어요? 50년대 때의 큰 사고였는데 일제 때 쓰던 폐선 된 배였겠지요. 제가 공연시리 중언부언 여러 쓸데없는 말씀 많이 드렸네요.
문 : 많은 말씀 대단히 고맙습니다.
'향토사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익산 대물림맛집 13 (0) | 2018.08.21 |
---|---|
함라면(함라산 호랑이와 삼부자 이야기) (0) | 2018.06.03 |
성당면(성포농악 이야기) (0) | 2018.06.03 |
익산시 영역 변천사 개요 (0) | 2018.05.10 |
풍패지관과 망모당의 현판에 대한 소고찰 (0) | 2017.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