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일기(延平日記)
신익성(申翊聖 1588-1644)
본관은 전의이며 아버지는 신흠이다. 12세에 정숙옹주(선조의 서녀)와 결혼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으며, 광해군 때 폐모론을 적극 반대하였다. 1627년에 정숙옹주와 사별하였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왕을 모시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화파 대신들이 세자를 적에게 인질로 보내 화의를 맺자고 주장하자 칼로 위협까지 해가며 반대하였다. 후에 시론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김상헌·최명길 등과 함께 선양으로 잡혀갔으나, 후에 소현세자의 덕으로 무사하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글과 글씨에 능했다. 저서로 《낙전당집》이 있다.
※연평(延平)이란 단어는 주인공 이귀(李貴 1557 -1633)가 연평부원군에 봉해진데서 연유한다. 이와 비슷한 글이 묵재일기인데 묵재는 이귀의 호이다. 나는 그가 김제군수시절 부안기생 매창(1573-1610)과 연인관계였다는 사실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 익산출신 소세양(1486 -1562)은 송도기생 황진이(1506?-1567)와 한 달간 동거를 한 연인사이 였던 것도 큰 관심거리다.
■연평일기(延平日記)임술년(1622) ※모의는 1622년이지만 거사는 1623년 3월 12일 이다.
○반정에 앞서 공(이귀(李貴 1557-1633))이 함흥(咸興)에 있을 때 신경진(申景禛 1554-1619)이 북우후(北虞候)로 갈려와 서로 만나게 되었다. 한 번 보고 그 사람됨을 알았는데, 그 후에는 서로 접촉하지 못했다. 이해 봄에 공은 부인의 병환으로 인해 고양(高陽)으로부터 신문(新門)밖에 와 우거하고 있었는데, 4월에 부인의 병은 마침내 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초상을 치른 지 사흘이 되던 날 뜻밖에 신경진이 문상을 왔다. 한자리에서 조용히 담화를 나누는데, 신경진이 말하기를,
“영공(令公)께서 장차 서용될텐데 이런 시국에 벼슬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니, 공은 희롱 섞인 어조로 대답하기를,
“이때는 태평시대인데 그대는 어찌 이런 말을 하오. 내가 고발해야 되겠소.”
했다. 신경진이 말하기를,
“내가 먼저 고발한다면 어쩌겠습니까?”
하니, 공이 그의 뜻을 알고 은근히 거의(擧義)할 의사를 말하니, 신경진 또한 본래부터 그러한 뜻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공은 아들 시백(時白 1581-1660)을 불러내 같이 더불어 대책을 강구하도록 했다.
공은 또 최명길(崔鳴吉)ㆍ김자점(金自點)ㆍ심기원(沈器遠) 등 여러 인사들과 뜻을 합하여 모의하였으나 같이 의논한 사람들이 혹은 파직되어 있고, 혹은 유관(儒冠)으로 있어, 모든 일을 베풀어 나가는 데 힘을 얻을 수 없으므로 모두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 이해 봄에 공이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임명되어, 장단 부사(長湍府使) 이서(李曙)와 상의하여 겨울 동안에 거사하기로 약속했다.
○공은 이때 방어사를 겸하였는데, 신경진으로 중군(中軍)을 삼아 거사할 때 대장(大將)을 시키려고 했다. 신경진이 말하기를,
“내가 이 계책을 위하여 평안우후(平安虞候)를 그만두고 공(公)을 따라 평산으로 간다면 남들이 반드시 의심을 품을 것이니, 내가 거짓 싫어하는 눈치를 보이며 동행하지 않고 있다가 영공의 독촉을 기다린 후에 가는 것이 옳겠소.”
하고, 서로 약속한 뒤 헤어졌다. 공은 평산에 부임하여 급히 재촉하는 뜻으로 장계를 올리고, 아들 시방(時昉)을 보내 서울에서 공모한 인사들과 더불어 거사를 짜게 했다.
이때 신경진은 이미 평산을 향하여 가던 중이라, 장단(長湍)에서 시방을 만나, 장단 부사 이서(李曙)와 한자리에 모여 일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시방이 서울에 도착하니, 영의정 박승종(朴承宗 1562-1623)이 과연 그의 행동을 의심하여 상에게 상주(上奏)하기를,
“신경진은 탁월한 장수 재목입니다. 그의 온 집이 화를 겪은 후로 원한을 품어, 관서(關西)에도 부임하지 않고 또한 평산에도 부임하지 아니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국가의 일이 있음을 기다려 장차 다른 곳에 뜻을 두니, 신 등은 오랑캐의 충돌이 염려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장령(將領)이 억세고 방자한 것이 근심됩니다.”
하고, 변장(邊將)을 회피하기를 꾀한다는 구실로 계청(啓請)하여 효성령 별장(曉星嶺別將)을 삼았다. 이에 이시방은 모사가 이루어지지 못할 줄 알고 단기(單騎)로 곧장 달려 이틀 낮과 하루 밤 만에 평산에 도착하여 모든 사실을 고했다. 신경진이 이 말을 듣고 바로 그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그는 떠나면서 사랑하는 백마(白馬)를 두고 작별을 고하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효성령으로 간다 해도 거사의 기별만 들으면 즉시 달려오겠으니, 원컨대, 여러분들은 내가 갔다고 해서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끝까지 꿋꿋이 노력하십시오.”
하고, 대계(大計)를 이루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마음에 울분을 품고 떠나갔다.
○그 후에 공은 심기원(1587-1644)을 청하여 평산에 같이 있으며 서로 모의할 터전을 만들고, 최명길(1586-1647)ㆍ김자점(1588-1651) 등은 서울에 있으면서 모든 일을 주선하도록 하고, 도원수(都元帥)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을 찾아가 은밀히 거사의 뜻을 통했으며, 다시 감사 이명(李溟)과 더불어 반정에 함께 거사할 것을 약속했다.
※심기원(1587-1644) : 이 글의 주인공인 이귀(1557-1633)가 65세의 나이로 반정을 일으켜 크게 출세하였는데 심기원 역시 크게 출세하였으나 불행한 최후를 마친다. 그는 유생의 신분으로 인조반정에 참여, 1등공신에 녹훈되고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반정 직후 형조좌랑으로 등용되어 동부승지 ·병조참판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였다. 이괄(李适)의 난 때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로서 진압군을 지휘하고, 정묘호란 때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의 도검찰사(都檢察使)로서 세자를 수행하였다. 강화부유수 ·공조판서를 지내고, 병자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서울 방어를 맡았다. 패전 뒤 1642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임명되었고, 1643년 성절사(聖節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1644년(인조재위 22년)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을 때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는 반란을 꾸몄다는 고발을 받아 여러 심복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는데, 모의의 사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 소현세자를 경계하고 며느리 강씨를 압박하던 인조의 통치 행태를 두고 사대부의 불만이 많았던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병자호란 뒤 권력을 잡은 최명길(崔鳴吉)에 동조하면서 김자점(金自點) 중심의 세력과 대립하였는데, 역모로 처형됨으로써 이후 김자점이 권력을 독점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아! 권력의 허무함이여! 무상함이여!
○이때 평산에서 송경(松京)에 이르기까지의 연로변에는 사나운 호랑이가 인명을 해쳐서 파발의 길까지도 끊어지게 되었다. 공이 조정을 하직하던 날, 폐주(廢主 광해)는 호랑이를 잡는 데에 힘써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러므로 도임한 후에 신경진과 더불어 이를 상의하고 널리 덫을 놓아 연달아 큰 호랑이를 잡아 그 전체를 수레에 실려 군관들로 하여금 궐하에 끌어다가 드리게 하니, 폐주는 이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 공은 또 치계하기를,
“호랑이를 사냥하는 곳은 경기와 황해도의 접경인데, 사냥을 하다가 호랑이가 만일 타지역으로 도망치면 감히 경계를 넘어가 호랑이를 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대군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항상 중도에서 파하기 일쑤이오니 청하옵건대, 호랑이 몰이를 할 때에는 호랑이가 가는 대로 따라서 경계에 국한되지 않도록 명하여 주십시오.”
하니, 폐주는 이를 옳게 여기어, 즉시 장단ㆍ송경ㆍ평산에 명령하여 서로 힘을 모아 호랑이를 잡도록 하고, 또한 경계에 국한되지 않도록 하였다. 대개 이는 공의 생각에, 비록 호랑이를 사냥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발병(發兵)하더라도 평산에서 장단을 가려면 그 사이에는 송경이 가로막혀 서로 합세하기가 어려우므로 호랑이 몰이를 핑계하고 곧바로 장단에 이르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겨울 12월, 공이 방어사로서 자기 관하에 소속된 군병을 모두 일으켜 호랑이 사냥을 핑계로 흥의동(興義洞)에 군사를 집결하고 장단 방어사(長湍防禦使) 이서(李曙)와 합세하여 거사하려고 했는데, 유천기(柳天機)의 고발로 인해 사건은 장차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유희분ㆍ박승종 등의 주선으로 파직에 그치고 말았다. 대개 공이 탄핵을 입은 것은 비록 대사헌 남근(南瑾 1556-1635)의 손에서 나왔지만, 실은 유희분(1564-1623)ㆍ박승종(1562-1623)이 유천기의 고발을 듣고 지휘한 것이다. 그 즉시 나문(拿問)을 청하지 않은 까닭은, 만일 서궁을 부호한다는 것으로 죄목을 삼으면 화가 자전에 미치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그 후에 이이첨(1560-1623)등은 이 일을 듣고 서궁을 부호하는 것으로 죄목을 삼는가 하면 양사에서는 공과 김자점을 국문하자고 계청했다. 이때 대사간 유대건(兪大建)도 김자점의 외숙이라 해서 탄핵을 입었다. 이에 광해는 대북(大北)이 중북(中北)을 모함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 의심하고, 풍문을 가지고 옥사를 일으킬 수 없다 하여 불문에 붙였으니, 이는 대개 김자점이 중간에서 힘을 쓴 덕택이었다.
공은 파직된 후 안협(安峽)에 있는 농막에서 장차 시기를 기다려 행동하기로 했다. 보다 앞서 아들 시방과 심기원을 서울로 보내 거사를 모의하도록 했다. 이때 시방의 일행이 서울로 오는데 토산(兎山)에 도착하여 청국초계(請鞫草啓)를 가지고 오는 양가(兩家 심기원ㆍ이귀)의 종을 만났다. 시방은 토산에 머물면서 사람을 급히 시켜 공에게 이 소식을 알리게 하고 즉시 떠나 서울로 향하여 달려서 장단에 도착하니, 밤은 이미 새벽에 가까웠다. 이때 산불이 껌벅이는 것을 보고 금부도사가 횃불을 들고 뒤를 쫒아오는 줄 알았으니, 당시의 일을 어찌 다 형언할 수 있으랴? 이귀는 아들 시방으로 하여금 붓을 잡히고 3부자의 진정서(陳情書)를 만들어 각각 하나씩 가지고 날이 밝아 올 무렵에 적벽강(赤壁江) 상류를 건너려 하면서 아들 시백과 시방 등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옛날에 소순(蘇洵)이 두 아들을 거느리고 악양교(岳陽橋)를 지나며 글을 썼는데 나도 또한 너희들을 거느리고 여기에서 글을 쓰고 지나간다면 후 일의 사적이 어찌 노천(老泉 소순(蘇洵)의 호) 부자의 문장보다 낫지 않으랴?”
하며, 조금도 근심하는 표정이 없었는데, 얼마 안 가서 정계(停啓)되었다는 기별을 들었다.
○ 공은 세 아들을 거느리고 거의 두 달 가까이 궐하에서 복죄(伏罪)하여 자가들의 행동에 대해 의심이 없도록 하는 동안, 배후에서 모사하는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놓고 모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끝내는 대업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거사의 계획이 이미 탄로되었으므로 죽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여 빨리 거사할 기회를 정하고자 하는데, 마침 조옥건(趙玉乾)이 공청우후(公淸虞侯)로서 사변에 대비하기 위해 수원(水原)에 와서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이해(利害)로써 그를 유인하여 거사에 가담시킬 계획으로 우선 구굉(具宏)을 보내 그의 뜻을 떠보았다. 그러나 좀 체로 합하기 어려워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다시 가서 옥건을 꾀어보자고 하자, 심기원과 이시방은 말하기를,
“처음에 가서 달랠 적엔 들어 주지는 않았지만 다행히도 무사하게 돌아왔소. 그러나 위태로운 길이었소. 이제 다시 찾아가 이를 되풀이한다고 해서 마음을 돌릴 이치도 만무할 뿐더러, 혹시 만약 잡아놓고 고변한다면 어떻게 하겠소?”
하며, 힘써 이를 만류하였다. 이때 주상(인조)이 수백 금을 내놓고 심기원 등으로 하여금 의사(義士)를 모집하였으나 큰 힘을 얻기 어려웠고, 또 훈련도감의 군병을 얻지 못한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공은 대장 이흥립(李興立 ? - 1624)과 본디 같은 마을에 살아서 서로 교분이 있는 터이므로 직접 의견을 통해 보고 싶었으나, 이흥립이 박승종과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이를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장유(張維)와 상의하고, 장유의 아우 장신(張紳)으로 하여금 이흥립에게 이 뜻을 말하게 하여, 드디어 흥립의 승낙을 얻어 돌아왔다.장신은 바로 이흥립의 사위였다. 공은 얼마나 기뻤던지 일어나서 장유에게 절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이흥립과 더불어 장유의 집에서 모이기로 약속하려 했지만, 이때 같이 모의하는 사람들 중에 혹 겁이 나서 감히 나오지 못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드디어 흥립이 손수 쓴 편지로써 장단 부사 이서와 이천 부사(伊川府使) 이중로(李重老)에게 전하니, 이 두 사람은 이를 보고 기뻐하며 약속에 따랐다. 그리하여 3월 13일로 거사할 시기를 확정했다. 공은 김유에게 말하기를,
“이러한 때, 대장은 나처럼 늙은 자는 할 수 없소. 영공(令公 김유(1571-1648)를 말함)은 본래 대장의 물망이 있어 군중을 제압할 수 있으니, 영공으로서 대장을 삼는 것이 좋겠소.”
하고, 밤 2경을 기해 홍제원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이때 거의에 가담한 모든 사람은 약속대로 모여들었다. 이괄(李适 1587-1624)은 북병사(北兵使)로서 미처 부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의 군관 20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공도 김자점ㆍ송영망(宋英望)ㆍ한교(韓嶠) 등과 각각 모집한 군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약속대로 홍제원으로 가서 모였는데, 이날 저녁 때 이미 이 사실이 고변된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얼마 후에 장유(1587-1638)가 와서 전하기를,
“어떤 사람이 고변하여 국청을 이미 차려 놓았으며, 사방으로 체포령이 내리고 도감 중군(都監中軍) 이확(李廓)은 포수 수백 명을 거느리고 창의문(彰義門)을 나왔다오.”
하였다. 이때 약속한 군사는 반수도 이르지 않았고, 장단의 군사 역시 도착하지 않아 다만 수백 명의 오합지졸로 통령(統領)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모두 겁에 질려 장차 해산될 처지에 이르렀다. 이때 공은 이괄의 손을 잡고 귀에 대고 말하기를,
“대장 김유는 오지 않고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반드시 영공이 대장이 되어야 대중을 진압할 수 있겠소. 나는 평소에 군대의 일을 익히지 못하였으므로 창졸에 즈음하여 힘이 되어줄 수 없소.”
하고, 드디어 이괄로써 대장을 삼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 이하 그대의 절제를 어기는 자는 베시오.”
하며,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나열시켜 대장에게 절을 올리니, 이괄은 흔연히 허락하고, 자기가 거느리고 있던 군관을 불러 미리 준비했던 ‘의(義)’ 자 수백 조각을 꺼내 여러 사람에게 나눠 주어 등에 붙여 의군(義軍)임을 표시하게 했다. 이시백이 말하기를,
“군병에 통서(統緖)가 없으면 변고에 대처하기 어려우니, 속히 모든 장교를 분정하여 군병을 통솔하고 진지(陣地)를 배정해야 하오.”
하니, 괄이 이 말을 좇아 부오(部伍)를 엄격히 단속하니, 군중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밤중이 넘어서 김유 등은 다른 곳에 모여 전령으로써 이괄을 불렀다. 괄은 크게 노하여 부름에 응하지 않으려 하므로 공이 힘껏 권유하여 서로 합세하게 했다. 이에 이괄(1587-1624, 선조때 무과급제, 북병사 종2품)이 대장을 김유(1571-1648, 1596년 문과 급제)에게 양보하였으니, 이는 당초의 약속을 그대로 준행한 것이다.
○이때 김유는 고변되었다는 기별을 듣고 집에서 잡혀갈 때만 기다리고 주저하여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심기원ㆍ원두표(元斗杓)가 그의 집에 달려가 말하기를,
“약속한 시각이 이미 박두했는데, 왜 이렇게 멍청히 서서 움직일 줄 모르오?”
하니, 김유는 대답하기를,
“나명(拿命)을 기다리고 싶을 뿐이오.”
했다. 기원이 말하기를,
“나명이 만약 이른다면 장차 손을 묶고 국청에 끌려가겠소? 극도에 이른 이 판국에 나명을 어찌 근심할 것이며 의금부 도사를 어찌 두려워하겠소.”
하니, 김유가 과연 옳게 여기어, 그의 아들 경징(慶徵)을 불러 마구(馬具)를 재촉하며 융복(戎服)을 입고 나와 말을 타고 앞장서서 모화관(慕華館)에 도착하니, 심기원의 군사가 일제히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기원이 군중(軍中)에 대장 자리를 베풀어 놓고 김유를 부축하여 대장 자리에 올려 앉힌 후, 원두표ㆍ이해(李澥)ㆍ박유명(朴惟明) 등과 먼저 절하고 꿇어앉고 나머지 군병도 차례로 나열하여 서서 절을 드렸다. 그리고 군중에 호령하기를,
“지금부터는 오직 대장의 명령을 따라야 된다.”
하고, 항오를 정돈한 후에 사현(沙峴)을 넘었으니, 김유가 늦어진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다. 이어 장단 군사가 이르렀고, 심기원이 거느린 가동 무사(家僮武士) 또한 2백여 인이 되어 군세(軍勢)는 차차 커졌다. 이때 김유가 군병을 점검하고 행군하려 하니, 심기원ㆍ이시백 등이 모두 말하기를,
“만약 점검하고 사열한 후에 발병한다면 날이 장차 밝을 것이오니, 청하건대 영장(領將)을 나누어 각각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토록 하시오.”
했다. 그러자 김유는 옳다 하고, 김자점ㆍ심기원ㆍ최명길ㆍ송영망ㆍ신경유(申景裕) 등으로 선봉을 삼아 창의문으로 진격했다. 이때 선전관(宣傳官)이 문쇄(門鎖)를 점검하고 있었는데, 선봉군이 이를 쳐서 죽이고 성중에 몰려들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나아가니,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곧장 창덕궁 궐문 밖에 도착하니, 이흥립은 도감병(都監兵)을 거느리고 궐문 밖에 결진하여 군병에게 명령하기를,
“여러 군사는 모두 내가 타고 있는 말이 머리를 돌린 후에 활을 쏘라.”
하고, 끝내 말 머리를 돌리지 않았으며, 이확(李廓) 역시 이전교(籬前橋)가로 후퇴하고 서로 맞서 대항하지 않았으니, 이 두 사람은 미리 내통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 때 추국이 바야흐로 열리어 박승종ㆍ이이첨등은 모두 비국(備局)에 모여 있었으므로 혹은 먼저 국청을 습격하자고 하였으나, 궐내에 먼저 들어가 반정의 거사를 빨리 결정짓는 것이 급하여 곧바로 인정전(仁政殿)에 들어가니, 광해와 폐인(廢人) 지(祉 광해의 아들)는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군병들이 서로 눈을 부라리고 기세를 부려, 칼을 뽑아 기둥을 쳤다. 그리고 외쳐 말하기를,
“백성의 고혈을 빨아 이렇게 호화로웠는데, 우리는 이제야 반정을 하게 되었다.”
하고, 침전(寢殿)에 난입하여 횃불을 들고 죄인들을 수색할 즈음에 불이 붙어 모든 궁전이 잿더미로 화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에 주상을 인정전(仁政殿)에 맞아들였으나, 미처 대비의 명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남면(南面)의 조회는 받지 못하고 다만 전폐(殿陛) 아래 있는 높은 상에 앉아 신하들을 보았다. 이때 광해 부자의 거처는 모두 알지 못했으며, 모든 적신(賊臣)들도 미처 체포하지 못했다. 도승지 이덕형(李德泂)ㆍ보덕 윤지경(尹知敬)은 처음에 무슨 일인지 모르고 어리둥절하다가 반정의 거사임을 확신한 후에 비로소 숙배했다. 이 두 사람은 급한 지경에 임해서도 자신의 지조를 잃지 않았으니 가상한 일이다. 이어 병조 판서 권진(權縉 1572-1624)ㆍ참판 박정길(朴鼎吉 1583-1623)이 먼저 스스로 대궐에 달려와 자기의 직무를 수행하니 그 뜻은 대개 공로로써 죽음을 면하려는 것이었다. 곧 명패(命牌)를 내서 이광정(李光庭 1552-1629)ㆍ이정귀(李廷龜 1564-1635) 등을 부르니, 시각은 파루를 치게 되었다.
이때 성중에는 화염이 충천하여 인심이 두려워하였고, 도피해 있는 적들의 반격해 올 염려도 없지 않았다. 또 자전을 경동할까 염려되어 속히 문안드리기를 이시방은 계청했다. 그래서 상(인조)은 김자점을 명하여 같이 가도록 했다. 자점 등이 경운궁(慶運宮)에 달려가 수문장을 불러 문을 열게 하였더니, 유순익(柳舜翼)이 분병조 참판으로서 나와 맞이하였는데, 대개 거사하던 전날 저녁에 자전을 받들기 위하여 입직(入直)시켰던 자였다. 곧장 내전문에 나아가 승전 내관(承傳內官)을 불러내어 반정의 뜻으로 아뢰게 했다. 이에 대비(인목대비 1584-1632)는 하교하기를,
“유폐된 지 10년 동안 누구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누구인데 이런 밤중에 승지 내관도 없이 이렇게 직계(直啓)하느냐? 공주(公主 정명공주(貞明公主))는 이미 죽어 담장 밑에 묻었다. 또 여기에 온 사람은 성명을 써서 들여라.”
하였다. 이는 대개 반정이란 천만 뜻밖의 일이기 때문에 공주를 또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처럼 잡아다가 죽일까 의심하여서였다. 김자점 등이 승지 민확(閔雘)을 시켜 또 계달했으나 종시 하답(下答)하지 않았다.
곧 이 뜻으로 회계하니, 상은 공(이귀)을 시켜 가서 계달하고 즉시 모셔오라고 하였다. 공은 상이 친히 가서 대비를 모셔와야 된다는 뜻으로 아뢰었으나, 이를 저지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공의 뜻이 실행되지 못했다.
처음 거사를 모의할 때, 공은 동모하는 이들과 더불어 최명길의 집에 모여 모든 일을 협의했는데, 이때 공이 먼저 말하기를,
“이는 광명정대한 일인데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이흥립도 동모를 승낙했으니, 그날 거사할 때 의병으로 궁궐을 지키게 하고, 주상은 약간의 의병과 흥립의 군병을 거느리고 친히 서궁에 나아가 의거한 사유를 직접 고백한 다음, 자전을 창덕궁에 모셔다가 곤극(坤極)에 정위(正位)한 후에 자전의 명령으로 광해를 불러 죄를 열거하여 폐출하되, 창읍왕(昌邑王)의 고사와 같이 해야만 명분이 서고 말이 순하오.”
했다. 그러나 일변의 의론이 이를 오활하다 하여 따르지 아니했는데, 지금에 와서도 그 이론(異論)이 저지했기 때문이다.
○이에 공이 대비를 모셔오기 위해 의식에 쓰이는 여러 가지 물품을 성대히 갖추고 나아가니, 도성의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오늘날 다시 성세(聖世)를 볼 줄은 미처 몰랐다.”
라고 했다. 공이 서궁에 나가 궐문 밖에서 통곡한 후 비로소 승전 내관을 불러 사실을 아뢰고 모셔가기를 청하니, 대비는 답하기를,
“누가 이런 일을 하고서 모셔가기를 청하느냐?”
하며, 도리어 진노의 하교를 내렸다. 이때 승지 홍서봉(洪瑞鳳)이 ‘문안차로 왔습니다.’ 하고 아뢰니, 대비는 대노하여 말하기를,
“승지는 누구의 명령으로 나에게 왔느냐? 만약 그렇다면 이미 자립(自立)했는데 나를 불러서 무엇하랴?”
하였다. 공은 이에 임시 방편으로 대답하기를,
“대장(大將 인조를 말함)이라 칭한 것이지 어찌 자립할 이치가 있으리까? 그리고 승지라 말한 것은 전 승지입니다.”
하니, 대비는 노기가 풀리는 듯하였다. 공이 다시 모셔가기를 간청하자, 대비는 답하기를,
“죄인(罪人 광해를 말함)의 부자와 이이첨의 부자 그리고 모든 간당(奸黨)을 모두 효시한 뒤에야 나가겠노라.”
하였다. 공은 대답하기를,
“죄인 부자는 이미 임금이 되었던 터이니 경솔히 처단할 수 없고, 이첨 부자 그리고 모든 간당들은 군병을 시켜 체포하고 있으니, 마땅히 품지(稟旨) 후에 처단하겠습니다.”
하고, 공은 이 뜻으로 회계했다. 이때 박정길(朴鼎吉)이 병조 참판으로서 궐내에 있었는데, 상이 끌어내 참형으로 다스렸다. 이때에 대비가 연흥부인(延興夫人 대비의 친모)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승지를 명하여 보내라고 했다. 그러나 미처 책립도 되기 전에 승지를 보낼 수 없다는 뜻으로써 자주 진계(陳啓)하니, 비단 노여움을 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이 미안스러운 하교를 내리므로, 공은 부득이 그의 아들 시백을 상에게 보내어, 상이 친히 나아가 면달(面達)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뜻으로써 힘써 진계하게 했다. 그래서 상은 다시 이정귀(李廷龜)를 보냈는데, 대비가 분판(粉板)에 글을 써서 이르기를,
“좋은 궁궐에 앉아 제 멋대로 하는데, 무엇이 불가하여 반드시 나를 청하느냐?”
했다. 이러자 상은 자전이 끝까지 뜻을 돌이키지 않을 줄 알고 날이 저무는데도 즉시 서궁으로 나아갔다. 대개 상의 뜻이 본래 친히 나아가 모셔오지 않으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일변에서 이를 저지했기 때문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때 광해(1575-1641)는 몸을 피해 도망쳐 서인(庶人)의 복장으로 변장하고 여염집에 숨어 있었는데, 이를 찾아내 진선문(進善門) 밖에 감금하고 자전의 처분만 기다렸다. 상은 이에 명하여 교자를 뒤따르게 하고 서궁에 이르자, 또 폐동궁(廢東宮)을 붙들어다가 한곳에 놓고 명령을 기다리게 했다. 상이 서궁에 나아간 후에도 자전은 오히려 노여움을 풀지 않았다. 상은 땅에 엎드려 대죄하고 있는데 밤은 이미 깊었었다. 자전이 또한 전국보(傳國寶 옥새)를 들이라고 재촉했다. 공은 대답하기를,
“이때 전국보를 여주(女主 대비를 말함)께서 장차 어디에 쓰려는 것입니까? 신의 머리는 끊을 수 있지만 국보는 들일 수 없습니다.”
하니, 이에 자전은 하교하기를,
“오늘날 하는 일을 내가 미처 자세히 알지 못하니, 글로 써서 들이라.”
고 했다. 공은 김대덕(金大德)으로 하여금 붓을 잡혀 사실의 전말을 써서 아뢰고, 또한 임시방편으로 말하기를,
“도원수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이 사방의 의병을 거느리고 장차 오고 있습니다.”
하니, 자전이 친히 내정에 서서 시녀로 하여금 이귀에게 전해 말하기를,
“대장은 어찌 나를 의심하는가? 내가 친자식이 있느냐? 국보를 재촉한 것은 국체(國體)를 존중하려는 것이요, 다른 뜻은 없노라.”
했다. 공은 대답하기를,
“성교(聖敎)가 진실로 그러시다면 정전에 납시어 주상을 책립하시고 대신을 불러 국보를 전함이 가합니다. 어찌 국보를 지레 들이어 남의 의심을 사게 하십니까?”
했다. 상하가 서로 주장하여 일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상은 박홍구(朴弘耈)에게 명하여 국보를 들이라 하더니 ‘계(啓)’자도 아울러 들이라고 했다. 이때 주상은 오래도록 뜰 아래에 부복하고 있었다. 자전이 이에 대신 및 도승지를 명하여 주상을 모셔들이게 하고 비로소 책립의 예(禮)를 행하였는데, 밤이 깊고 급하기 때문에 대장들이 모두 참석하지 못했다. 이때 모든 왕자들도 들어와 광경을 보려고 했으나 김자점이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말하기를,
“지금이 어느 때인데 왕자들이 모두 들어오려고 하시오.”
하고, 손을 휘둘러 물리쳤다.
○이튿날 상이 공을 명하여 궁성 호위대장(宮城扈衛大將)으로 삼고 하교하기를,
“절제(節制)의 명령을 위반하는 자는 우선 참수하고 뒤에 보고하라.”
하니, 이서ㆍ이괄ㆍ이흥립도 모두 이에 소속되었다. 또 공에게 이조 참판과 동지의금을 제수했다. 다행히 상의 인무(仁武)에 힘입어 난을 물리치고 반정했으나, 밖에 도피해 있는 적당(賊黨)들이 모두 체포되지 않았다. 조정(趙挺)의 아들 유도(有道)는 수원 부사로서 중병(重兵)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박승종ㆍ이이첨 부자는 거처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들리는 말에, 박자흥(朴自興)이 기백(畿伯)으로서 양주(楊州)에 달아나 장차 병사를 일으키려 한다 하므로 온 도성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민심이 안정되지 못했다. 마침 이때 한찬남(韓纘男)ㆍ이위경(李偉卿)ㆍ정몽필(鄭夢弼)ㆍ백대연(白大衍) 등 4적이 먼저 체포되었다. 공이 왕명을 받들어 그들을 종루 동쪽 저자에서 참하니, 온 도성 사람들이 모여 이를 보고 우레같이 환성을 지르고 혹은 배를 갈라 난도질을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공이 통쾌하고 기뻐하는 민심을 인해서 서울 안의 의병을 모아 뜻밖의 근심을 방비하려 했으나, 이때 여러 일들이 황급하여 미처 시설하지 못했고, 6조(曹)의 모든 관원 또한 배치하지 못했다. 이러므로 먼저 종사관을 선출하여 모든 일을 관리하도록 했는데, 심기원ㆍ김자점ㆍ심명세(沈命世)ㆍ송영망 등이 하게 되었다. 또 정두원(鄭斗源 1581-1631이후))으로 별장을 삼아 군정을 널리 모집하도록 하니, 사람들이 다투어 휘하에 소속되기를 원하여 하루 동안에 거의 수천 명에 이르렀다. 사태가 안정된 후 곧 더 뽑아 정병 3천여 명을 얻어 신경진(1575-1643)으로 부장(副將)을 삼고 부오(部伍)를 편성하여 나누어 5번(番)을 만들고, 그들이 번(番)에 들어갈 때에는 관에서 요포(料布)를 주어 무예를 단련시키고, 도감병(都監兵)과 더불어 좌ㆍ우영(左右營)으로 나누어 조종조(祖宗朝)에서 행하던 오부 초군(五部抄軍)의 규제를 만들게 하여 일이 거의 이루어졌었는데, 이 또한 일변의 저지로 인해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날 저녁 왕이 거의에 앞장섰던 모든 대장들을 탑전에 모아놓고 일을 토의할 적에, 공은 아뢰기를,
“어제의 공로는 이괄이 가장 많으니, 마땅히 병조 판서를 시켜야 됩니다.”
하니, 이괄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이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다만 거사에 임해 피신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거사할 때 김유가 대장으로서 기약된 시간에 이르지 않자, 이귀가 신으로 대신하게 하였으므로 김유를 뒤에 이르렀다는 이유로 참하려 했는데 이귀가 힘써 말렸기 때문에 참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온 좌중이 모두 실색하였다. 김유는 말하기를,
“2경으로 기약했으니, 병법으로 논한다면 먼저 이른 자를 마땅히 참해야 됩니다.”
하니, 한교(韓嶠)가 말하기를,
“병법에 이러한 말이 없습니다.”
했다. 김유가 또, ‘《오자(吳子)》에 있다.'고 말하자, 공은 말하기를,
“《오자》에 졸병 한 명이 대장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돌진하였기 때문에 명령을 위반했다 하여 죽인 것이요, 먼저 왔다고 해서 참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하니, 김유는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
○그 뒤에 상이 명하여 술과 고기를 푸짐하게 갖추어 거의(擧義)한 장수와 병사들을 모화관(慕華館)에서 대접하여 위로하였다. 좌차(坐次)를 정할 때 공(1557-1633 : 67세)은 호위대장으로 북쪽에 앉고 김유(1571-1648 : 53세)는 의병대장으로 공의 상석에 앉고, 이괄(1587-1624 : 37세) 이하는 모두 동서쪽에 나누어 앉으려 하였다. 그런데 이괄이 자신이 김유의 아래에 앉는 것을 혐의쩍게 여기고는 마침내 버티고 서서 흘겨보며 말하기를,
“나는 높은 관질이다. 이 대장은 이미 절제의 명을 받았으니, 우리들이 북쪽에 앉는 것이 가하지만, 김 대장은 일찍이 절제의 명이 없었는데 무슨 공로가 있어 우리의 상석에 앉는가?”
하고, 발끈 노기를 띠었다. 공이 부드러운 말로 이를 해명하고 곧바로 술을 따라 벌주로 마시자, 이괄이 노기를 머금고 자리에 나아갔다. 김유와는 사사건건 서로 어긋났으며, 또 그의 아들은 이미 거의에 참여했는데도 수용을 받지 못하였고, 그의 아우는 문관으로서 또한 훈적에 기록되지 못하고 도리어 김경징(金慶徵)의 아래에 처하였다가 곧 또 서쪽변방으로 보내졌다. 그리하여 잔뜩 분을 쌓아 갑자년의 변란을 양성하게 만들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